종산1교를 건너자마자 왼쪽 산기슭을 향해 들어가는 좁고 낡은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난간 없는 다리가 있습니다. 그것도, 둔각으로 한 번 꺾인, 아주 로맨틱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이 다리 아래로도 물론 세찬 물길이 달려 내려가고 있지요.
꺾인 다리 아래로 물길이 나뉘어 흐르도록 했군요. 그런데 다리를 지나면 아무 일 없이 그냥 합해집니다. 왜 그랬을까, 잠깐 생각해 보지만 확실한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강한 물길이 공격사면을 만나 지나치게 산비탈을 깎지 않도록 세력을 나누어 놓은 것일 거라고 혼자 추측만 할 뿐.
이 다리를 건너 역시 호젓한 산비탈길을 따라 잠깐 들어가면 거기에 「所電發岩雲(운암발전소)」라 붙은 낡은 건물이 서 있습니다.
발전소로서는 폐업한, 그러나 다른 용도로 쓰려고 손을 대다가 그만 둔 듯한 이 낡은 건물은, 돌간판에 새겨진 대로, 소수력발전소였습니다.
캄캄한 건물 안 복도를 지나 왼쪽 통로로 빠져 나가니 손을 대지 않아 숲이 무성한, 경사가 꽤 급한 절벽이 나타나고, 옛 시절 발전에 쓸 물이 떨어지던 도수관 끝 토막 두 개가 악마의 콧구멍처럼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절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으스스하면서도 모험영화의 한 장면 같은 신비로움까지 자아내는 현장입니다.
1931년에 준공되어 54년 동안 전기를 만들어내다가 1985년에 폐업한 발전소라는군요.
이곳에 물을 끌어들이는 도수관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아까 보았던 ‘팽나무정 발전소’ 위, 해발 230미터쯤의 산정에서 이곳(해발 130미터쯤)까지 1.7킬로미터 정도 길이의 도수관이 산을 뚫고 건너왔답니다.
이곳 발전소 뒤의 절벽은 물을 떨어뜨려 터빈을 돌리기에 안성맞춤인 낙차를 가진 지형이었던 것이죠.
발전용수 도수관은 이미 쓰이지 않게 되었을지만, 「도수관 속을 따라 걷기」 같은 이벤트를 어드벤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보면 재미있겠습니다.
발전소 건물은 어떤 종교단체의 수양관으로 쓰이려고 매각되었다는데, 개조의 손을 대다가 그만 둔 상태에서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건물은 매우 튼튼해 보입니다. 버려두고 있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또 그 건물 앞 큰길가에는 물가에 딱 붙여서 어떤 축산업체가 들어서 있어서 그다지 보기 좋지 않군요.
발전소 터를 벗어나 다시 낡은 다리를 건너 큰길로 빠져 나옵니다.
이 언저리는 종산삼거리라 하여 종산마을이 있는 넓은 터전입니다.
매우 큰 초등학교도 폐교된 상태로 남아 있고, 집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발전소가 현역으로 가동 중이던 시기에는 잘 나가던 마을이었을 것이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기술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을 듯.
초등학교 옆에 눈길을 끄는 꽤 큰 집이 ‘숨어’ 있어 가까이 가보니, 일본식 가옥의 흔적이 보이네요. 추측컨대, 발전소 소장 쯤 되는 왜인의 관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발전소 건물을 수양관으로 쓰려던 종교단체가 이 건물을 쓰고 있다고 하네요.
폐쇄된 초등학교는 넓디넓은 운동장에 어떤 도예가가 옹기작품을 한 마당 디스플레이해 놓고 있는 외에는 이렇다 하게 쓰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용도미상의 건물은 무엇일까요?
발전소가 국가중요시설로 살아있던 무렵, 이를 지키는 초병의 초소였을까요?
이 마을은 발전소가 아니었더라도 아침에 들렀던 내목·외목마을(목욕리)로 통하는 삼거리 목에 위치한 곳이라 번영했을 것 같습니다.
강가에 나무도 많이 심어놓고 쉼터도 있고 강 수면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약간의 손을 대놓기도 했습니다. 시멘트 옹벽으로만 이루어진 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처음으로 만나는 동진강의 ‘인간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리 옆에 쓰레기 버리지 말라고 써 붙인 돌이 하필이면 옛 사람의 공적비(추정)로군요. 이미 다 닳아서 전혀 읽을 수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요.
여유있는 마을이어서 그런지 물가에 나와 노는 사람도 꽤 있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막걸리 한 잔 하시겠느냐" 고 말을 걸기도 합니다.
제1취수구라 할 운암취수구는 임실군 운암면 운정리에 있습니다. 1928년에 가동을 시작한 이래 아직 현역으로 있는 이 취수구를 통해, 일단 최상류의 수량은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 취수구에서 1킬로미터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남해와 서해로 각각 흐르는 두 강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이쯤 되면 동진강의 발원지는 섬진강댐·옥정호”라고 공식으로 불러도 좋지 않을까, 라고 주장하면 또 새로운 논란거리를 만드는 셈이 되겠네요.
운암취수구가 제1취수구라면 제2취수구는 어디일까요?
이 시리즈가 끝나기 전에 답을 알아맞히면 당신은 매우 상식이 풍부하고 관심 깊은 여행자입니다.
첫댓글 걷기에만 몰두해 놓쳤던 많은 부분들을 감사님의 글 통해 다시금 되새겨 볼수있어
감사합니다
가끔 사진촬영 금지구역에서도 촬영하시는 감사님의 열정에 우리의가슴은 두근두근~..^^
앗.
금지구역에서 찍은 것을 들켰군요. 우리끼리의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