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믿음은 안 됩니다"(마23:27-28) ★삼위일체q.3편 ★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요 14:8-21) ★성령체험과 분별 ★주님이 나타나시는 때 (막 16:9) ★예배의 성공자 (창 4:3-5) ★긍휼을 구합시다.(호14:1-3) ★성령과 악령의 구분 요즘 '짝퉁'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사전에는 없는 단어지만, 값비싼 명품을 모방한 가짜, 모조품, 유사품, 등을 말합니다. 한때 우리 나라는 '짝퉁 선진 한국'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였고 서울 이태원은 '짝퉁' 이 많이 나도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요즘은 1위 자리를 중국이 따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물건 뿐만아니라 신앙생활에도, 믿음에도 짝퉁이 있다는 것입니다.가짜가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여러분! '짝퉁' 믿음은 구원(救援)받지 못합니다.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겉과 속이 다른 그리스도인의 짝퉁 믿음을 보면서 새롭게 거듭나는 성도로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먼저 '짝퉁' 믿음은 어떤 모습인지 봅시다. 1) 짝퉁 믿음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짝퉁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어쩌면 진품보다 색깔도 더 화려하고 세련미도 탁월합니다. 그러나 속이 문제입니다. 사단이 천사로 가장해도 사단은 사단일 뿐입니다.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기도하고,십일조, 안식일을 준수하고,금식기도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보면 잘 믿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해 주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2) 짝퉁 믿음은 하나님 중심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 중심 이어야합니다. 내 중심, 사람중심, 세상풍조에 이끌리면 '짝퉁'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짝퉁신앙에 물들어 버리면 우리의 영적인 눈을 가리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뿐만아니라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약 효과가 떨어지면 약을 구하기 위해 찾아 헤매듯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옷만 걸쳐 입고 세상을 좇아가는 불신자와 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히브리서 11장1절~2절“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무슨 말입니까?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간구하고 바랬더니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누가?선지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선지들이란 믿음의 선배들입니다믿음의 선배들만 얻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그 믿음의 선지들 반열에 서는 믿음을 소유한 성도들이 되어야 할줄 믿습니다.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있어 가장 우선순위를 제일 하나님중심 이어야 합니다.그럴 때 가정도, 이웃도, 직장도, 사업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며, 약한 것을 강함으로 만들어 주시며, 병든 곳을 치유하사 강건케 하시며,없는 자를 있게 하시사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이런 말씀이 선포될 때 믿음 있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에 가면 말씀 말씀마다 큰 소리로 아멘 ! 아멘! 외치며 내 것으로 받아드리는데 우리교회에는 믿음이 있는 성도들이 없나 봅니다.맹숭맹숭 않아 있는 것 보니............아~성령이 뜨겁게 임하다보니 가슴이 너무 뜨거워 입이 터지지 않아서 대신 눈으로 껌뻑껌뻑 하고 계신 것이었군요~죄송합니다.난 그것도 모르고 우리 교회 성도님은 믿음이 없나 깜짝 놀랬지 뭡니까?그러나 여러분 그 뜨거운 성령의 충만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있으면 가슴이 시커먼케 타서 고통스러우니까 내 보내십시오 그럴 때 감동이 더 오고 은혜가 더 충만해지고 더 큰 능력이 임합니다. 한번해보겠습니다. 참~ 성령이 폭팔하도록 입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고 합시다.<주여 우리의 입술이 열려 선포되는 말씀이 내게 선포되는 주님의 음성이 되게 하시고 그 말씀을 아멘으로 화답할 때 성령의 감동과 은혜와 능력이 임하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아멘! >하겠습니다.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며, 약한 것을 강함으로 만들어 주시며, 병든 곳을 치유하사 강건케 하시며,없는 자를 있게 하시사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3) 짝퉁 믿음은 거듭나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3절에서 주님은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가 주님의 말씀에 놀라 어떻게 사람이 늙어 죽어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묻습니다.그 말에 주님은 요한복음 3장5절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물”이란 “물세례”을 말하는데 회개의 표시로서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그리고 “거듭남”이란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거듭남이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죄와 허물로 죽은 영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장사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의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유업으로 상속받고 부활의 몸을 입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거듭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임으로 불매 어디서 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적으로는 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므로 천국의 실재를 믿을 수 있고 천국을 보지 못하였어도 성경에 기록된 천국이 사실임을 믿고 천국을 상상하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하였습니다.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보지 못하는 천국을 보는 자들이며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 받았으므로 이미 우리 심령에 천국을 이룬 사람들입니다.그러므로,거듭나지 않고는 천국도 영생도 없습니다. 거듭난 신자가 하나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게 됩니다.2. 두 번째로 “짝퉁 믿음”은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시간이 경과하면 드러납니다. 짝퉁은 얼마 못가서 기능상의 문제도 드러나고 색상도 변합니다.짝퉁 신자는 인내가 없습니다. 바른 신앙의 사람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습니다.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세월이 가도 어떤 환경에 처해도 변함이 없습니다.가짜는 결국 버려집니다. 재활용으로도 사용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짝퉁 신앙도 버려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를 가려내실 것입니다. 알곡 같은 신자는 천국에, 양은 주님의 우편 영광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가라지는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이 기다릴 뿐입니다. 참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지금 이 시간은 바른 믿음 가질 기회입니다. 짝뚱 신자에서 참 믿음의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시간입니다.순간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외식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책망, 심판,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 은혜의 날, 구원의 날입니다.'짝퉁 물건'은 버려집니다. 그러나 '짝퉁 믿음'은 고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그 동안 내가 짝퉁 신자였다면 회개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그리고 다른 분들은 짝퉁 신앙이 되지 않도록 나를 재 정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 기독교 신앙은 삼위의 하나님과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다. ( 마 28:19-20 )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성경에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말은 없다. 그 뜻은 세 자리가 한 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성경의 기록을 보고 삼위일체라 한 것이다. 위의 성구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한 육체에 성령이 임했고(마 3:16) 하나님이 예수 안에 계심으로(요 14:10)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한 몸에 있으므로 일체라고 한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 예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다. 이러므로 삼위일체라고 한 것이다. 예수께서 육체를 벗고 개체로 계실 때는 각각 삼위로 계셨다.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고(요 3:34),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증거했다(행 7:55-56). 이와 같이 성령은 스데반에게 충만했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개체로 있음을 본 것이다.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요 10:35).예수께서 이 땅에서 역사하실 때는 하나님과 성령이 예수 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성경에 이름과 같이 우리가 성령을 받고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요 7:38-39) 삼위가 한 몸을 이루게 된다(약속한 성구 ; 롬 8:9, 갈 4:1-7, 요 14:20, 계 3:20). 이 일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 말세가 되므로 기독교 세계 안에는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가 많이 일어난다고 하셨다(마 24:11, 24).하나님의 계명 첫 번째가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었고(출 20:1-3), 두 번째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거나 절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출 20:4-6). 솔로몬은 다른 신에게 절하고 섬김으로 그 나라가 망했다(왕상 11장). 카톨릭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개신교가 있고, 그 중 일본 천황 신에게 절한 교단에서 구원 없다고 갈라져 나온 교파가 있다. 지금은 참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할 때이며(요 4:23-24 참고), 성부, 성자,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순종해야 할 때이다. 기록된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나는 그 때 신령한 몸(신령체)으로 하나님과 함께 오시게 된다(고전 15:51-54, 살전 4:13-16). 이 때 물과 성령으로 변화되어 새 피조물로 거듭난 우리는 사망과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요 3:3-7, 고후 5:17, 계 21:4). 죽을 것이 죽지 않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때는 사망이 생명에게 삼킴이 된 것이다. 이 말씀을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주장대로 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 (요 14:8-21)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 성부와 성자와 성령 (요 14:8-21)서 론 : 금주는 교회절기로 삼위일체주일로 삼위일체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 나누겠습니다. 본장의 전개 형식이 대화를 통한 것이거니와 여기서는 예수와 빌립과의 대화를 보여준다. 빌립은 브니엘에서 야곱에게(창 32:24, 30), 삼손의 부모에게(삿 13:3-22) 혹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출 34:4-8)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야 말로 전지 전능(마 28:18; 요 1:48) 무소 부재하신(마 18:20)자, 곧 성자 하나님이시라는(롬 9:14; 빌 2:6) 사실에 대해서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한편 16, 7절에는 보혜사 성령의 강림(행 2:1-13)이 약속되어 있다. 1. 빌립의 하나님 증명 요구(8-10절)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이 가로되 : 본절에서 빌립은 앞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예수의 신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신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예수에게 여쭙는다.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 본절에서 '우리에게'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는 당시 모든 제자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의 전제란 예수의 선포된 말씀을 이해고 믿기 앞서 구약의 신적 현현(Theophany)을 기대한 듯 싶다.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빌립의 질문가운데 '족하겠나이다'는 표현은 기대와 열망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빌립이 주께서 앞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집', '처소', '예비', '영접' 등의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기만 하면 족하다는 어리석음과 빗나간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빌립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함으로써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를 바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자세로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예수께 요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빌립의 요구는 신성을 지닌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우리에게')를 반영한 것이다. 한편 빌립은 현실주의 신자의 모형이니 육신으로 아버지를 보고 믿겠다는 일반인의 요구이다(영암 김응조).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 주께서는 미련한 질문을 던진 빌립을 안타깝게 여기시면서 다시 자세히 가르쳐 주신다. 본절에서 '너희'라는 말이 쓰인 것으로 보아 전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나 구체적으로 '빌립'이란 이름과 '네'(헬, 쉬)란 대명사를 특별히 사용하신 것은 특히 빌립에게 주목하시는 끝까지 자상함을 잃지 않으시는 예수의 배려도 볼 수 있다. 한편 주께서는 빌립에게 '알지 못하느냐'고 도리어 물으심으로써 빌립의 영적인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우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하나님과 예수의 동질적인 존재성에 대해서 지금가지 예수께서는 누차 강조하였다 제자들은 벌써 3년 동안이나 예수와 함께 있으며 하나님과 동등되신 예수 그리스도(빌 2:6)을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전히 영적으로 부족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빌립과 제자들에게 7절에서 하신 말씀과 거의 동일한 말씀을 반복하심으로 그들에게 예비된 영적 진리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신다.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 여기 이른바 '안에 있고'란 말은 성부와 성자의 본질상 연합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그 두분의 도덕적 연합의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삼위 일체의 교리로서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의 사역에 있어서 통일성을 기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전하신 목적을 이루어 나간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사명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며 이루시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명과 사역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반영한 것이 된다. 그렇다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만 수행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는 아니시며 도리어 자신의 신적 지위을 낮추어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스스로 맡으신 분으로서 능동적으로 사역을 행하시는 분이시다.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본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상호 보완적 존재가 아니라 완전한 동질성을 가지고 계심이 설명되어 진다. 즉 성부와 성자는 존재론적 측면과 사역적 측면에서의 동질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근거가 된다. 2. 하나님과 예수의 동역하심의 증거(11-15절) 1) 행하시는 사역을 보아서(11-12절) -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 10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존재론적 측면과 사역적 측면에서의 성부와 성자간의 동질성을 믿으라고 거듭 요구하신다.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성부와 성자의 일치 동일성을 믿지 못하거든 '그 일'로 인하여 믿으라 하신다. '그 일'이란 예수께서 일으키신 이적과 기사들을 가리킨다. 한편 '나를 믿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테 모이'는 단순히 그 자신이 가치를 충분히 보증하는 '자신의 말씀' 증거에 강조를 두며 믿음을 요청하는 것이다. 12절에서도 예수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언급하시는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도 이미 성부와의 동질성에 근거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다.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깜짝 놀라게 된다. 성부와 성자의 동질성을 그들이 이해했다면 성자가 하는 일을 자신들도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자신들의 연합한다는 의미이므로 제자들이 놀랄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는 말씀에서이다.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 '이보다 큰 것'이란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절의 표현대로 주의 일보다 크다고 한 것은 복음의 전파가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시던 시대보다 양적으로 확대될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의 구원받았으나 오순절 이후에는 사도들을 통하여 넓은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즉 주께서 크다고 표현하신 것은 질적인 면에서 향상된 위대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양적인 팽창을 지적하신 것이다.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 아버지께로 감 즉 예수의 승천이 더 큰 일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은 거의 틀림없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있었던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암시한다. 도한 이보다 큰 것은 반드시 질적인 의미에서 더 큰 영적 이적을 의미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Robertson). 즉 성령의 강림과 필수적으로 연결되는 복음전파 사역에 있어서(행 1:8) 제자들이 예수의 선교보다 더 확대되고 큰 능력으로 이렇게 될 것을 가리킨다. 2) 기도 응답을 보아서(13-14절) -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 기도의 응답에 대한 근거는 주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시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이다. 또한 구하는 것이 응답 받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구하는 기도가 시행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 이름을 부르는 단순한 행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 구할 수 있는 근거, 즉 보혈의 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는 것을 의미한다.내가 시행하리니 : 아버지께서 기도 응답하심이 아들로 말미암아서 실행됨을 가리킨다(Barrett). 예수의 이름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믿고 구하라. 이것이 신자에게 부여된 특권이다(영암 김응조).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인들은 사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를 먼저 해야 한다.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 본절은 윗절의 약속을 거듭 고조하는 말씀이다. 13절과 본절의 차이는 '내게'(헬, 메)가 추가된 것뿐이다. 한편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씀을 13절과 비교할 때 본절은 예수 자신이 더욱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서 예수께서는 명백히 기도 응답의 시행자이심을 강조적으로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3절과 14절을 종합하면 기도의 대상은 '내게'이며, 기도의 중보자는 '내 이름을', 기도 응답의 시행자는 '내가 시행하리라'이다. 3) 계명 지킴을 보아서(15절) -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본절은 주의 제자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본절에서 주를 사랑하는 자는 그분이 가르치신 계명을 지킨다고 말씀하셨다. 사랑이란 어떤 구체적인 정형이 있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하는 상대방을 아끼고 상대가 원하는 행동을 하는 관계성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며(3:16)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을 위해 죽으심으로써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따라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서 당연히 주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이는 의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2. 성령의 역사의 증거(16-21절) 1) 함께하시는 보혜사의 영(16절) -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 본절의 '구하겠다'는 말의 헬라어 '에로테오'는 '상대방을 향하여 동등 처지를 취하고 구하는 태도'와 과히 틀림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 본절의 '또 다른'(헬, 카이 알론)이란 표현은 보혜사가 둘 이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중보자 되시는 예수 대신에 중보자 되실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로서 '곁에'라는 뜻을 가진 '파라'와 '부른다'라는 의미의 '클레토스'가 합쳐진 단어인데 '도움을 받기 위해 곁으로 부름 받은 자'라는 뜻이 있다. 이 낱말은 영어 성경에서 '상담 자', '위안 자', '돕는 자'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셔서 영원토록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라 말씀하셨다. 성령께서는 항상 믿는 자들의 인격과 삶 속에 거하시면서 각자의 필요와 고충을 이해하시며 적절한 은혜로 채워 주신다.2)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영(17절) -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저는 진리의 영이라 : 본절의 '토 프튜마 테스 알레데이아스'의 경우 헬라어에서는 소유격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도 그 해석이 문제가 된다. 즉 이를 주격의 의미로 보면 '진리의 영'이 '진리가 되신 영'으로 해석되어 '성령이 진리'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소유격은 요한에게 있어 거의 그렇듯이 복적격적인 의미를 지님이 거의 확실하다(Brown). 즉 성령은 진리를 전달하는 영이요 혹은 진리를 증거하고 밝히시는 영이다(Morris, Bernard, Barrett).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 '빛'이란 예수를 깨닫지 못하던 어두움인 세상이 예수가 보내신 성령을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는 근본적으로 세상이 영적 통찰력이 없고, 영적 지식도 없으며, 영적 분별력도 없고, 성령을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예수에 무지한 이들이 아닌 예수를 아는 제자들은 그와 동격이신 성령도 당연히 안다. 본절과 16절에서 '너희와 함께' 있게 한다는 의미의 표현이 세 번 사용되었는데 각각의 문장에서 전치사의 위치를 달리하는데 이것은 동일한 단어의 사용은 피한 요한 특유의 강조적 용법인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3) 함께하시는 영(18절) -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 '고아와 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르파투스'는 요 13;33에서 제자들이 '소자들아'(헬, 테크니아)라고 불리운 것을 상기시킨다. 유대에게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이 여겨졌으므로 제자들은 스승이 죽었을 때 고아라고 불리웠다. 아무튼 유대 사회에서 과부와 함께 더불어 가장 불쌍한 부류의 사람들로 보호자를 상실한 고아가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신다고 확실한 보장을 하셨다.너희에게로 오리라 : '오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코마이'는 역시 3절과 같이 분명한 미래를 의미하는 현재형으로 성령의 오심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모두 표현하는 이중 암시적 용법으로 쓰였다. 이처럼 성령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부모를 다시 찾는 것과 같이 큰 힘이 된다.4) 다가오시는 영(19-20절) -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 '조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키 미크론'이란 표현은 일차적으로 임박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가까움을 의미하지만 20절의 표현과 관련시켜 이해할 때 그리스도 승천 이후로부터 재림 이전가지, 즉 종말론적 중간시기로 볼 수도 있다(Brown). 이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영안을 통하여 구속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그리스도를 볼 것이나 불신자들은 영적 어두움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망각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영적 안목이 없어서 예수나 성령을 보지 못하는 세상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예수를 본다. 이 표현 역시 1차적으로는 제자들이 직접 경험한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신약시대에 계속될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속사역을 가리키나 궁극적으로는 주의 재림시 영광가운데서 예수를 보게 될 것을 가리킨다.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 날에는 : '그날'(헬, 에케이네 테 헤메라)이란 종말론적 완성의 날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메시야 임재를 나타내는 주의 날과 연관될 뿐만 아니라 본서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표현과 거의 의미차이 없이 쓰였을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본절에서는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된 새로운 교회 시대를,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될 종말의 날을 가리킨다. 이 날이 이르면 성부와 성자간의 본질적 일체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믿음을 통한 영적 인격적 연합에 대한 신비를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한편 성부와 성자간의 연합과 성자와 성도들 간의 연합에 대해서는 전장의 목자와 양의 비유,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묘사하는 밀접성을 참조하라.5) 계명을 지킴으로 함께하시는 삼위일체의 영(21절) -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본절에서 주께서 가르치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주를 사랑하는 자이며 주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나의 계명'이란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새계명'을 가리키는데(13:34), 신자들이 서로 사랑할 계명이다.결 론 :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이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시고, 성령님 안에서 영원토록 보존하신다. 바로 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사는 자, 그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주님은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고, 사랑할 것을 명하신다. 성령님은 이처럼 내 곁으로 오신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작정하시고, 약속하시고, 성취하신다. 다시금 성령님을 바라본다.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의 말씀을 모두 생각나게 하실 성령님을 찬양한다. -----------------------------------[2] 삼위일체의 하나님 (시 8:1-9, 고후 13:13)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는 신조에 대해 요약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한 고백을 차례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에 대한 고백을 하면 될 것을 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라는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만,우리는 왜 꼭 이런 식으로 축복기도를 하는 걸까요? 삼위일체의 교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자면 아주 어려운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이 교회력으로 삼위일체주일인데, 그 의미를 오늘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기독교의 독특한 신앙고백입니다. 유대교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에서 기독교와 달리합니다. 유대교는 예수를 하나님에 대해 알려준 예언자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호멧교나 힌두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실제로는 이들과 별 차이없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하나님이고, 예수는 우리에게 신앙의 길을 일러준 위대한 성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유대교도나 마호멧교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요즘에, 종교간의 대화를 강조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고수하는 ‘그리스도 중심 모델’을 가지고는 대화가 안 되니까, 대화가 되는 방식으로 하자. 즉 차이점 가지고 얘기하지 말고, 공통점을 가지고 하자, 그게 뭐냐?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나, 유대교도들이 믿는 하나님, 그리고 마호멧교도들이 믿는 알라나 결국은 한 분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 중심 모델, 즉 신중심모델로 대화하자,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대화를 위해서는 공통점도 중요하지만 차이도 중요합니다. 대화를 위해서 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 대화의 내용이 풍성해지고 뭔가 기여할 바가 있는 것이지, 나의 정체성을 일방적으로 포기하는 것은 대화의 의미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즘, 가장 local한 것이 가장 global한 것이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지구화가 좋다고 해서 우리의 말과 문화를 버리는 것이 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문화를 다 내버리고 나면, 그러면 우리 모두가 다 서구사람이 되자는 건데, 과연 그게 바람직한 것입니까? 결코 아니지요. 서구적인 것이 다 옳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서구문화는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고, 그런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듯이, 아시아문화는 아시아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으로 그 고유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17장에서 말했듯이 모든 민족의 경계와 문화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 나름대로의 존재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기독교는 기독교의 특별한 존재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로 충분하다면 하나님이 왜 예수를 보내셨겠습니까? 기독교의 독특성은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특별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가장 명확하고 완전하게 나타났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빼버리면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빠져버리게 되므로 결코 이것을 양보할 수 없다는 고백 위에 기독교는 서있습니다. 흔히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 그러면 갖게 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심판자, 전쟁의 신, 질투의 신, 역사의 주관자...대체로 이러한 하나님이지요. 물론 다른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이러한 하나님은 대체로 인간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내려다보면서 명령하고 주관하고 구원하고 심판하며, 자기 외의 다른 어떤 신도 용납하지 않는 제왕적 이미지의 신,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신 앞에서 인간은 한갓 미천한 존재일 뿐이며, 그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러한 신관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저 높은 곳에서 인간의 잘못을 책망하고 호령하고 군림하고 지배하고 심판하는 제왕적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고통당하고 짐을 나누어지며, 스스로 피흘리며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종이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길을 걸어갔다면,예수님은 빌립보서 2장에 있는 말씀대로, 교만으로 인하여 죽음에 떨어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되시고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는 섬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삶 속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가장 완전하게 나타났다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의 이단 가운데 종속론(subordinationism)이라는 게 있는데, 이 입장에 따르면 하나님이 전체 집합이라면 예수는 부분집합입니다. 성자 예수는 성부 하나님께 종속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입장을 거부합니다. 예수는 부분집합이 아니라, 만약에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빠지면 하나님이 다른 신이 되어버리는 생명이요 알짬, 온집합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우리가 성경에서 구원얻는 줄로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성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요 5:39) 이것을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중에서 누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시나요? 당연히 예수님이시지요.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우리와 대화하시고, 존중하시고, 사랑하시며, 또한 우리의 사랑을 구하시고 우리에게 의지하기도 하시며 참여와 협력을 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론은 이분이 바로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 증거하는 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당신을 비우시고 사랑하시고 내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한 분이 다른 한분을 포섭하고, 어느 한 분이 다른 한 분에게 종속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본질이 같은 한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요컨대, 삼위일체론은 제왕적 신관을 따르지 않고, 철저하게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쌍방적인 신관을 견지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을 믿는 기독교와 전체주의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론을 믿는 기독교와 일방적 지배, 군림, 전쟁과 폭력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유일하신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서는, 그래서, 결국에는 전체주의가 극복되고 민주주의가 싹틀 수밖에 없으며, 일방주의가 사라지고 대화와 협력,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문화가 꽃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것은 우리 삶을 은혜롭게 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절대적으로 높고 거룩한 분이 군림하지 않고 나를 존귀하게 여겨주고 조건없이 나를 사랑해줄 때, 그 사랑 앞에서 갖게 되는 변화의 경험을 은혜롭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은 군림의 신이 아니라 은혜의 신이십니다. 당신의 힘을 동원해 억지로 굴복하게 만드는 신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를 통해 스스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가지고 그 앞에 옷깃을 여미고 마음과 뜻을 다해 헌신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사랑의 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철들게 하고, 이 사랑이 우리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합니다. 사랑을 하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는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경험한 은혜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주변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 새로운 감성을 가지고 느끼고 반응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은혜를 깨닫고 난 뒤, 세상 만물을 보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느껴지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눈에는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요 저기에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따스한 햇살 한 줌, 풀 한 포기, 바람 한 줄기, 그 어디에도, 높은 곳에 군림하지 않고 스스로 낮아져서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마음이 묻어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이 곧 구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우주만물에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다 깃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주만물을 은혜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과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 또한 삼위일체론입니다. 여러분, 미켈란젤로(1475-1564)라는 미술가 아시지요? 이분은 자기의 작품에 결코 서명을 남기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다음의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시스틴 성당의 천정벽화를 그려줄 것을 요청받은 미켈란젤로는 자기의 열과 성의를 다하여 작품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몇 달을 벽화그리기에 몰두했던 그는 마침내 불후의 명작 ‘천지창조’를 완성했습니다. 흡족한 마음으로 서명을 한 뒤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눈부신 햇살과 푸른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대자연의 아름다움! 그때 문득 그에게 한 가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그 어디에 서명 같은 것을 남기지 않으셨는데 기껏 작은 벽화를 그려놓고는 나를 자랑하려 했다니...” 그는 즉시 되돌아가 천정 벽화에서 자신의 서명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어떠한 작품에도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이기에 자연을 보면서도 이와 같이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 줄 믿습니다. 삼위일체론을 말할 때 또 한 분 빼어놓을 수 없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만물을 창조하실 때 성령이 참여하셨으며, 사사들이나 선지자들을 불러 쓰실 때도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돕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없으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깊은 생각을 알 수도 없고 관계 맺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인격이시기도 합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하신 일과 그분들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고 깨닫게 하며 소통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 우주만물을 지으신 뜻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의 의미가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깨달아집니다.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성경의 모든 기록도,역사 속의 모든 사건도, 죽어있는 화석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소통케 하시는 역사가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말씀을 읽고 역사를 대할 때 깨닫고 감동하며,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성령은 소통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론은 이 성령을 또한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본질을 같이하는 하나님의 다른 위격이라고 말합니다. 성자 예수를 성부 하나님에게 종속시키지 않는 것이 삼위일체론이듯이, 성령을 또한 종속시키지 않는 것이 삼위일체론입니다. 삼위일체론은 그만큼 소통을 중시하고, 대화와 사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나눔, 참여와 대화 없이는 하나님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본질적으로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것이요 대화하는 것이요 나누는 것이요 그러한 과정에 마음을 모아서 참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히 10:25), 마음을 함께 하여 기도하고 떡을 떼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행 2:43-47). 요즘의 추세는 성령을 강조하는 것이 흐름입니다. 그 동안 성령을 우리가 달라고 하면 받을 수 있는 무슨 물질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성령은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가령, 성령을 무엇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찬양이든지, 기도든지, 성도의 교제든지 그 어느 것도 더 가치있는 그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하나님이신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입니다. 말과 행실이 일치하고, 깨달음이 사랑의 나눔이나 실천과 분리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래서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골 3:23).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몸이 성령의 전이므로(고전 3:16, 고후 6:16)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롬 12:1) 요컨대, 삼위일체론은 그것을 사변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을 우리의 현실과 관련시켜 생각하면 자칫 편향적으로 흐르기 쉬운 우리의 삶을 균형있게 바로잡아주는 아주 중요한 교리입니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설명하고, 그것을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생동하는 역사가 되도록 하기 위한 교리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오류와 복잡한 시대상황 속에서 신앙의 본질을 지켜내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한 치열한 영적 싸움의 결과물입니다. 모쪼록, 아버지, 아들, 성령이 서로가 연결되고 하나가 되고 서로 통하면서 존재하였듯이, 우리의 삶 역시 이 하나님의 신비하신 교통 가운데서 서로가 연결되고 하나가 되어서 점점 퇴색되어져가는 이 시대의 정의, 평화, 생명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부활시키는 창조적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삼위일체 교회의 신비와 전례의 정점이 되는 축일입니다. 주님, 삼위일체의 신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교회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진실한 사랑을 나누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에 더욱 충실하게 하소서.우리 모두하느님의 초월성과 그 깊은 신비를 묵상합시다. 삼위일체ㅡ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세분 하나님이 아닌, 삼위 일체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버지이신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들이신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님,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오늘은 성 삼위이신 성령과 함께 묵상합시다. 예수께서는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업을 완성하고 승천하시면서 당신 제자들에게 협조자이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이 `빠라끌리또'(협조자)는ㅡ 그리스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로 누구를 보라, 하거나 법률 소송에서 누구를 두둔해 발언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10일, 부활하신 날부터 5일이 지난 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한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날은 오순절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농경 축제로 첫 곡식을 봉헌하는 감사절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율법을 선사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이 모여 있던 온 집안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머리 위에 내렸습니다.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사도 2,2-4)성령은 바람처럼 아무도 모른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성령은 불처럼 더러운 것을 태워 사람들을 내 것으로 정화하고 열정을 불어 넣어주고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혀 같은 것들이 불길처럼 이란, 불 혀(火舌)라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이 하시는 온 일을 전하는 선포와 신적 훈계의 선포를 가리킵니다.성령은 사람을 내적으로 변화시키고 자유롭게 하며 그들을 새 공동체로 형성시켜주는 일치의 힘이십니다. 불 혀 형상은 물론 성령의 본래 모습이 아니고 다만 상징일 뿐입니다. 불은 물건을 비추고 뜨겁게 하며 혀는 말할 때 씁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열정적으로 전할 사도들의 사명을 나타냅니다.제자들은 성령을 받고서야 비로소 예수께서 명령하신 대로 예루살렘을 비롯해 땅 끝까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성령 강림은 바벨탑 사건(창세 11,1-9)을 뒤집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각기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로 말했지만 한데 모인 사람들은 각기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성령은 분열돼 있는 사람들을 일치시키는 힘이십니다. 사도들은 본래무식하고 우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같은 그들은 성령과 그 은혜를 받은 다음에야 모든 것을 확연히 깨닫고 자기들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들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이 가득 차서 군중 앞에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첫 설교를 했습니다.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며, 우리는 다 그 증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려 당신의 오른 편에 앉히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성령을 지금 여러분이 보고 듣는 대로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사도 2,32-33)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감명을 받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사도 2,38) 이 말을 듣고 삼천 명이나 세례를 받고 입교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교회도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살아 있는 교회로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강림 날은 교회의 생일입니다.신약성서의 네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라고 한다면 사도행전은 성령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성령의 역사(役事)가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구원의 진리를 깊이 깨닫고 대담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는데 민중 앞에서, 법정과 의회에서, 그리고 관헌과 왕 앞에서 성령이 주신 지혜와 언변으로 진리를 강력히 전해 당대의 학자들을 침묵시켰습니다.또한 사도들은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는 여러 가지 기적을 성령의 힘으로 행했고 가야 할 곳을 식별했으며 악인들의 생각을 꿰뚫어보았습니다. 사도들은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항상 성령의 인도로 복음을 선포하는데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순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저희를 보살펴주시는 주님, 삼위일체이신 주님을 찬미하며 드리는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령체험과 분별 질문 기도 중에 어떤 명령이나 무엇을 하지 말라 등의 금지 사항이 나오기에 잘 아는 목사님께 성령의 음성인줄 알고 상담을 했더니 귀에 들리는 말도 위험하고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 역시 감정에 치우친 말일 수도 있으니 위험한 일이라고 합니다. 정말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 의심이 됩니다.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성도들은 자기나름대로의 신령한 영적 체험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신령한 영적체험이라고 해서 모두 성령의 역사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는 내주하는 성령의 역사나,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의 역사가 있는가 하면 마귀들도 끊임없이 악령의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를 분별해야만 하는데 가장 확실한 길은 하나님께로부터 영분별의 은사를 받는 것이지만, 모두가 이 은사를 받는 것도 아니므로 성도들은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영분별의 기준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 열매를 보아 분별 할 수 있습니다. 마7:15-20에 보면 아무리 놀라운 영적체험을 하였다 해도 그 열매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열매에 어긋난다면 그 체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 성령의 역사를 빙자하여 사소한 일을 간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집을 팔라, 팔지마라. 이 버스를 타라. 저 차를 타지말라. 오늘 상점매상은 얼마가 될 것이다."등 이러한 경우 거의 틀림없이 악령의 역사입니다. 사8:19을 보면 이것을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자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성령받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숨겨진 비밀을 들어내거나, 교회나 성도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소한 일을 예언하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신접한 자로 보아 틀림없습니다. (나) 영적인 체험을 했어도, 마음에 평안이 없고 불안과 고통의 중압감으로 고통스럽다면 이는 악령에 억압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 영적체험을 한 후에 더러운 생각이나 교만이 마음을 사로잡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으로 성령받은 사람에게도 때로는 유혹이 엄습할 때도 있으나, 악령에 사로잡힌 자는 자신의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추한 생각과 참소나 교만이 심령을 사로잡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더러운 영이기 때문입니다.(마10:1, 막1:28) 둘째로, 그 사람의 언어생활을 통하여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받은 사람의 모든 말은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며, 그분에 관한 것을 알려주시는 데 사용됩니다.(행10:45,46) 그런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를 높이며 성도들을 향하여 협박과 공갈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스스로 나에게 안수를 받으라고 강권하며 교회를 비판하고 직접간접으로 금품을 강요하거나 말이나 행동이 방자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통해 놀라운 기사이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악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셋째로, 그 사람의 기독관을 통해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받은 이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된 주장을 하거나 자칭 예수나 감람나무라 하여 하나님을 높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것 또한 악령의 역사입니다. (요일4:3) 그러므로 성도는 모름지기 영적체험도 중요하지만 영분별을 잘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일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 주님이 나타나시는 때 (막 16:9) 이 시간에 “주님이 나타나시는 때”라는 제목입니다. 안개의 나라 영국에 날씨가 맑을 때면 온 나라는 순식간에 국민적 축제의 날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손을 잠시 놓고 공원으로 산으로 몰려간다고 합니다. 매일 뜨는 해도 모습을 나타내면 이렇게 반가운데 그 해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다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을 영광의 비밀 만국의 보배라고 말씀합니다.그러므로 성도의 최고의 행복은 주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입니다. 이때처럼 복되고 기쁨이 넘치는 때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지만 우리 앞에 나타나시고 우리 곁에 나타나시고 우리 속에 나타나십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입니다. 에녹은 이렇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300년이나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가장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나 깨나 주님의 온전한 임재를 날마다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그럼 언제 주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까요? 1. 위기의 때에 자기를 나타내십니다. 요20:19에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목숨이 두려워서 떨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시고 평강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처럼 위기가 닥치면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평강과 위로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는 아이에게 주님은 하루에도 수없이 나타나셔서 위로하시고 천국의 비밀을 보여주셨다는 간증을 읽어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혼자 두지 아니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고아처럼 혼자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을 때도 예수님은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확신 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영국의 여객선 스텔라호가 암초에 부딪쳐 난파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친 파도는 승객들이 탄 구명보트를 모두 삼켜버렸습니다. 그런데 12명의 여성이 탄 구명보트는 노가 없이도 계속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보트에는 유명한 가수인 마가렛 윌리암스가 타고 있었는데 그는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믿음의 징표로 함께 찬송을 부릅시다." 라고 외쳤습니다. 12명의 여성은 찬송을 부르며 사나운 폭풍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격랑 속에서도 보트는 침몰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순양함이 생존자들을 찾아 나섰는데 안개 때문에 한치 앞도 볼 수 없었지만 찬송소리를 듣고 무사히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도우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을 때 나타나십니다. 빌3:10-11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랬습니다. 내가 죽어지면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의지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나를 포기하고 주님을 택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내 뜻보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죄를 회개하여 죄와 상관이 없게 되고,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높이며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아버지의 뜻에 절대 복종한 것 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자기가 주이니 안 되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어야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진짜 죽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진짜 죽어야 할 것이 죽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사는 것도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어떤 부인이 사는 것이 어려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너무 괴롭습니다. 저 살기 싫으니 저를 천국으로 어서 불러 주세요.” 간절한 기도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래 내가 네 소원에 응답해 주마. 그런데 하늘나라로 너를 부르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구나!" "뭡니까?" "네가 하늘나라에 오면 장례식을 해야 할 텐데 집안이 너무나 어지럽혀 있구나. 사람들이 장례식에 왔을 때 이 사람이 그래도 살림을 잘하고 갔다는 그런 이야기를 듣도록 집안 청소 좀 할래?" "하겠습니다." 그래서 부인은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돈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또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정원 좀 내다보아라. 정원의 풀을 깍은 지 오래된 것 같구나. 사람들이 정원도 손질하지 않고 갔다고 흉보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래서 부인은 며칠 동안 열심히 땀을 흘려가며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꽃도 심고 나무도 심고 열심히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또 말씀하셨습니다. “됐다, 그런데 지금 네가 죽으면 네 자식들이 마음에 걸리지 않니?” “그렇습니다. 그동안 너무 소홀했습니다.” “그러면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 그걸 느낄 수 있도록 좀 자식들에게 며칠간 네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을 다 해 봐라.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해 봐라.” 그래서 부인은 며칠 동안 자식들과 대화를 나누고 사랑한다 말해주고 안아 주고 손도 잡아 주고 맛있는 식사도 준비해서 먹이며 사랑한다는 표현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네 남편이 걸리는구나. 네 속 썩인 거 내가 잘 안다. 그 사람으로 인해 네 마음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니? 밉지? 그러나 내 마지막 부탁인데 남편이 장례식 하면서 그래도 참 좋은 여자였는데 이런 추억을 가질 수 있도록 사흘만, 꼭 사흘만, 남편이 뭐라 해도 절대로 대꾸하지 말고 남편에게 할 수 있는 한 마지막 친절을 베풀어라.” 그 말씀에 부인은 천국 가기 정말 어렵구나 생각했지만 이를 악물고 사흘 동안 예수님 말씀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하늘나라에 갈 시간이 다 되었구나. 마지막으로 네 집을 한 번 더 돌아보려무나.” 그래서 부인은 집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잘 정돈된 꽃이 핀 정원이 보기 좋았고, 집안도 깨끗이 정돈되어 상쾌했습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실로 오래간만에 자녀들의 얼굴에서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 한구석에서 무척 괴롭고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편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부인의 머릿속에는 너무 좋아진 집안 환경을 바라보고 갑자기 주님을 따라가기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 저 좀 이따 가면 안 되나요? 가족들과 같이 더 살다가 주님이 오라 하실 때까지 가겠어요.”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육체로 죽는다고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죽어야 할 내가 죽어져야 합니다. 여인처럼 주님의 말씀 따라 철저히 죽어질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가정은 복의 동산으로 변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우리 모두 이렇게 순종하고 저렇게 순종할 수 있을 만큼 죽어져야 합니다. 이 모습이 죽어진 모습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주인 된다면 어찌 주님이 나타나시겠습니까? 우리 옛사람은 야생마와 같아 속박이 싫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지만 고난 속에서 고분고분 순종함을 배웁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려는 우리의 야성이 고난 속에서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악한 인간은 야성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 속에서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고통스러우며 반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복임을 깊이 체험하게 되고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히5:8).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바울의 그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행26:14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하셨습니다. 바울의 날마다 죽는 그 믿음도 고난 속에서 배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도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교만하지 않는 비결을 가졌습니다(고후12:7). 청년 김익두도 날마다 말씀 보며 회개하며 자기를 죽였기에 예수님이 나타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후2:11-12) 3.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누구에게 나타나셨습니까?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막16:9에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그랬습니다.자기를 사랑하면 절대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나를 잊고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늘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늘 주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요14:21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도 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이 기도를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실 것이며 달라진 모습으로 다음 주에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고 내가 나타나면 주님의 모습은 숨겨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사는 것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만사는 주님의 나타나심에서 해결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말씀 앞에서 날마다 죽어지고 순종하고 충성하고 사랑하며 더욱 변화 되십시다. 그래서 항구적인 하나님의 임재의 은총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가장 평안하고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죄사함을 받고 죄의 가리움을 입은 자는 복있는 자로다!"
이 말은 실로 축복의 말입니다. 죄사함이 없다면 축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확실한 믿음을 갖는 것은 참 행복의 유일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죄사함 없이 행복하다는 것은 마치 어느 때 영원한 구덩이에 빠질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제거되었다는 하나님의 확증을 소유하기 전에는 확고한 행복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죄사함에 대한 불확실은 항상 죄의 무거운 짐을 느끼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틀림없이 근본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주님께서 다 지고 가셨나 아니면 아직도 마음(양심)에 남아 있느냐를 구별하지 못하는 모호한 의혹 상태에 있다면 이것은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이 죄사함에 관해서 설명하기 전에 먼저 독자들에게 아주 정확하고 확실한 개인적 질문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실하고도 안정된 확증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내가 이 질문을 초두부터 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식적으로는 알고 설교도 하면서 자기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는 것은 주제넘은 것으로 고집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이 용서받았다는 귀중한 사실에 대해서 항상 의심하는 것이 오히려 겸손의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는다는 추상적인 것이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겸손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은 다음의 성경 구절 앞에서 문외한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6-4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골 1:14) 여기서 우리는 "용서"와 "죄사함"과 "죄"라는 말이 주의 이름으로 설교된 것을 봅니다.(이 단어들은 위의 3개의 성경 구절에 똑같이 들어 있다.) 그리고 위의 말씀을 듣고 믿은 자들은 다 죄사함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모든 족속"의 범주에 속한 에베소, 골로새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요, 그 내용은 예수의 이름으로 얻는 죄사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복음을 믿고 "죄사함"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제넘은 것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던가? 아니면 "죄사함"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이 경건하고 겸손한 것이었던가?사실 그들은 사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즉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외인이요 손"이었습니다. "악을 도모하는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다이아나 신"에게 의심 없이 무릎을 꿇고 절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우상과 악한 행습에서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죄사함"의 말씀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말씀들은 진실이었습니까? 아니면 거짓이었습니까? 이 말씀들은 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까? 그것은 모두 신화 속의 꿈같은 그림자였습니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까? 그 말씀에는 죄사함에 대한 확실성도, 정확성도, 확고 부동한 것도 없단 말입니까? 이 질문이야말로 아무도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로부터 해명을 요구하는 질문들인 것입니다. 만일 참으로 죄사함에 대해서 깨우친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사도 시대에는 어떻게 그 사실을 깨우칠 수 있었습니까? 만일 1세기에 깨우칠 수 있었다면 지금 19세기에는 왜 그 사실을 깨우칠 수 없단 말입니까?(C. H. 매킨토쉬는 1820-1896년대의 사람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 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4-8)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어느 때나 죄사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고히 알려져 왔습니다. 위에 인용한 성경 구절의 하나만으로도 죄사함 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거짓 가르침을 누르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신기하고도 귀한 축복을 깨달은 사람들을 성경에서 발견한다면 나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 우리가 성경을 열고 각종 악습에서 죄책감을 느낀 사람들이 죄사함을 받은 것을 발견한다면 아무리 사악한 악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확실성으로 자신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 다윗, 히스기야, 중풍 병자 등 그 외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사함을 믿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주제넘고, 추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그들의 마음 속에서 죄사함에 대해서 의심했다면 그것을 겸손하고 경건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어떤 이들은 그들을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에 관계되는 한 그들이 특별한 경우였던, 아니였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성경 속의 그들도 자신의 죄사함에 대해서 확실할 수 없다는 주장에는 틀림없이 반박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감정과, 연약성과, 과오와, 죄지을 가능성에 쉽게 영향을 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글 쓰는 입장에 있든, 독자의 입장에 있든 온전한 죄사함의 복음을 듣고 기뻐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귀중한 문제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고수하는 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할 만한 성경적 근거도 없이 고집합니다. 성경에 있는 이 모든 예들이 우리에게 선례로 제시 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경우라고만 한다면 이것은 진실일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가. 아브라함의 경우를 주목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3-25)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고 했습니다.(창 15:6) 성령님도 역시 우리가 믿으면 의롭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 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 10:43)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인데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죄사함에 대해서 거리낌 없이 전했을 때 그 내용의 진의가 무엇이었느냐입니다. 그들은 죄사함에 대해서 확신 할 수 없다는 사상을 열심히 전달하려고 애썼을까요? 안디옥 회당에서 바울이 청중들에게 "우리는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복음)을 전합니다" 라고 했을 때 아무도 자신의 죄사함에 대해서 확신 할 수 없다는 사상을 전한 것입니까? 만일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과 염려가 남게 된다면 어떻게 그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만일 아무도 죄사함에 대한 확신을 즐길 수 없다는 것이 진리라면 사도들의 전체 설교는 뒤집혀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의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알 것은 아무도 자신의 생애 동안에는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는지, 못받았는지를 알 사람은 없는 이것이라" 사도들의 전체 설교와 가르침에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까? 사도들은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난 구세주를 믿는 믿음의 적절한 결과로 얻는 죄사함을 가장 확실하고 충실한 방법으로 어디서나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교사들이 너무나 강하게 주장하는 가르침은 사도들의 그것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즉 우리 모든 죄의 온전한 용서를 믿는다는 것은 위험한 추측이라는 견해라든지, 영원한 의혹 속에서 사는 것이 절대자 앞에서 겸손한 태도라는 주장이 곧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하고 평안한 안식을 믿고 즐길 수 없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수 없습니까? 또는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희생에 맡길 수 없는 것입니까? 소망 없는 혼돈 속에 영혼을 버려두는 것이 복음의 유일한 효과일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나는 믿지 못합니다. 성령님은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증거하시지만 나는 그 증거를 믿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과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멸시하는 것과 성령님의 기록을 믿지 못하는 것이 경건과 겸손이라면 이것은 너무도 슬픈 일입니다. 이런 것이 복음이라면 믿음으로 화평과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그때부터 안녕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면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게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77-79) 라는 말씀은 그때부터 헛된 것입니다. 만일 이 "구원의 소식"을 아무도 알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복음이 주어졌다는 말입니까?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문제는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속여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즉시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여 왔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과 죄를 제거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확고히 믿을 수 없다고 핑계될 수 있을까요?(성경을 사람의 글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종종 그렇게 생각한다-역자 주) 인간은 스스로 속여왔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를 신뢰하기가 두렵다. 인간은 타인을 속여왔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도 속일 것이 두렵다. 이것은 흔히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때때로 율법과 육적 경건주의가 사람들에게 입힌 외식적 옷을 벗겨서 그들의 상태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리를 알고, 교단이 인정하는 건전하고 계몽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옹호자로 자처하며 나설 때 그들의 주장을 흠없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해 보는 것도 우리의 임무입니다. 만일 그들이 주장하기를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고 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고, 인간이 생활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최상의 것은 혹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나라에 갈지도 모른다는 연약한 소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단호히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그들의 가르침을 배척해야만 합니다. 거짓 신학은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확신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어느 쪽을 믿어야 할까요? 전자는 어두운 의혹과 두려움을 주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확증을 심어 줍니다. 전자는 우리를 우리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게 하지만, 후자는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지하게 합니다. 어느 쪽에 가담할 것입니까?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볼 때 그 안에는 아무도 영원한 구원을 확신 할 수 없다는 사상들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나는 단호히 성경에는 그런 사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성경 어느 부분에서나 분명한 방법으로 모든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용서와 영접에 대한 가장 밝은 확신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묻겠습니다. 성경에 있는 가장 완전한 확증을 즐기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과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사역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확신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성령님에 의해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의 현재 다루고 있는 문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독자들이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께서 해주시는 한 안전하다는 사실을 소유할 수 있다는 충분한 확증을 갖고, 이 연구를 마치기 바랍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죄사함에 대한 확증을 즐길 수 있다면, 왜 나의 독자들이라고 해서 그와 똑같은 확증을 즐길 수 없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입니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내가 죄사함에 관한 복음을 단순히 믿기만 하면 그때 나는 용서받은 것이요, 의롭게 된 것이요, 주님께 영접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나의 모든 죄를 그가 갖고 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모든 죄를 그분께 담당시켰습니다. 그분은 그 모든 죄를 지고,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 점의 죄도 없이 하늘로 오르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나의 모든 죄 때문에 형벌을 받으신 그분이 지금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계신다면 나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를 공격하던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죄를 짊어진 그분 그리스도에게 떨어졌습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그분이 받았기에 나는 부활과 영광을 받으신 구세주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영원한 용서를 받고 영접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나의 독자들이여, 이것을 믿습니까?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습니까? 타락된 죄인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와 진실된 마음으로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였습니까?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성경대로 죽으셨다가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당신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의롭게 된 것입니다. 영접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여진 것입니다. 사실 당신은 불쌍하고 연약한 피조물이요, 매 순간마다 거역하는 악의 성품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명이요, 당신의 지혜요, 당신의 의요, 당신의 거룩이요, 당신의 구속이요, 당신의 모든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서 하늘에 항상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죽었고, 계속 깨끗이 보존하기 위해서 살으셨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죽음이 하실 수 있는 한 깨끗해 졌고, 그분의 생명이 당신을 보존하는 한 깨끗하게 보존되어집니다. 그분은 스스로 당신을 위해서 책임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변화시킨 상태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을 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분과 하나가 된 것을 보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두운 율법과 외식주의와 거짓 신학의 복도를 걷지 말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것들은 여러 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죄를 짊어지고 잘못 인도된 불쌍한 심령들의 한숨과 통분과 함께 뒤범벅이 되어 들려 온 소리들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충만한 기쁨으로, 부활하시고 영광 받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선 것을 안다면, 지상에서의 당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고, 하늘에 예비 된 영화로운 집에서 영원히 살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죄사함이란?(2) 하나님의 권위로 당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를 원하면서 성령의 가르침에 따라 말씀 안에서 죄사함의 과제를 계속 풀어 나가도록 합시다. 다음 3가지 항목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 둘째, 하나님의 죄사함의 양(크기) 셋째, 하나님의 죄사함의 방법(형태) 위의 열거한 세 개의 항목은 우리가 이 과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분명하고도, 충분하고, 명확한 도움을 줍니다. 우리가 먼저 죄사함의 기초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면, 더욱 죄사함의 양(크기)에 감사하게 될 것이요, 또한 죄사함의 방법을 더 알기를 원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를 상고하는 동안 계속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 죄 때문에 염려 속에 있는 독자들이 이 귀한 진리를 이해하여야만 한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취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죄사함의 기초가 확실히 깨달아지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난 심령(양심)이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관해서 인간은 모호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즉 죄인을 영접하려는 하나님의 준비, 죄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준비, 심판의 자리에 보내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뜻, 그리고 속히 죄인을 은혜의 장소로 보내려는 하나님의 안타까움 등,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인간은 모호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유죄로 판명난 자가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운 분이시면서도 구세주로 계시고, 또 죄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얼마나 깨끗한 분이시면서 하나님의 속성이 얼마나 이 모든 것을 조화시켜 왔는가를 알기 전에는 진실로 깨우침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화평에 대해서 문외한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유죄를 선포하실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우리 양심에 부어지면 죄는 절대로 하나님의 존전에 그냥 나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죄는 어느 곳에서 발견되든지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에서만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다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방법이 이해되고 믿어지기 전에는 심한 염려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심판도 실제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알아져야 하고 정식으로 상고되어야 합니다. 공의는 만족되어야 합니다. 양심은 깨끗함을 입어야 합니다. 사탄은 잠잠케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귀한 구속 사역은 공의의 하나님과 칭의(稱義)를 받은 죄인의 달콤한 밀월을 즐길 수 있는 기초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구속 사역 속에서 저주받은 죄를 보게 되고, 공의가 만족해하는 것을 보게 되고, 율법의 중요성을 보게 되고, 죄인이 구원받는 것을 보게 되고, 원수 마귀가 당황해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창조 시에는 이런 것을 결코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피조물들이 표면에 나타난 능력과 지혜와 선양(goodness)을 즐겼으나, 첫 창조는 공의를 통과한 은혜 같은 것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공의와 화평" 또는 "자비와 진리"의 아름다운 조화 같은 것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갈보리에서 보여지도록 예비해 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점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공의롭고 의로운 분이신가요? 하나님은 영광스런 해답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해답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다루었습니다.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이 새롭고 영원한 부활의 기초 위에서 죄인을 다루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점 일획의 죄라도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제거하실 수는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 위에 의로운 진노를 퍼부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믿는 죄인(구원받은 성도)위에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모든 기록은 장엄하도다. 죄는 심판 받았고, 죄인은 구원을 얻었도다" 귀한 말씀입니다. 두려워하는 모든 죄인들은 믿음의 눈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음에 안정된 평화를 주는 진리의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도 만족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나도(믿는 사람) 만족합니다. 여기서 나의 죄스럽고 고통스런 양심은 달콤한 쉼을 발견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앞에 검은 산 그림자같이 증대해 가는 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영원한 진노로 나를 위협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보혈은 하나님의 시야에서 그 모든 죄들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 모든 죄는 사라진 것입니다.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납덩이처럼 하나님의 망각의 수렁 밑바닥에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나는 이제 자유자 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 때문에 못 박히셨고, 이제는 일점의 죄도 없이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그분의 자유를 나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인 것입니다. 얼마나 굳건한 기초입니까? 누가, 무엇이 그것을 간섭할 수 있을까요? 공의는 그 기초를 확보했습니다. 고통의 양심은 그 안에서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공의자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 계시의 빛과 능력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단순하고 확실하고 만족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공의자로 계시하신다면 나는 그 계시된 말씀 속에서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적 영광이 죄인에게 비췰 때, 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를 심판하신 분이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죄인을 의롭다 하셨음을 보게 되고, 깨닫고, 믿고,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두려움에 가득찬 독자들이여! 간청하노니 죄사함의 참 기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고통 속에 있는 불쌍한 양심이 영원불변의 죄사함의 기초 위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죄사함의 양(크기)과 죄사함의 방법을 아무리 숙고할지라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물어보겠습니다. 이 순간 완성된 구속 사역의 기초 위에서 안식할 수 있는 은혜로부터 당신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도데체 무엇입니까? 말해 보십시오. 당신은 절대로 굽히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십자가보다 더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다른 것을 필요로 합니까? 하나님께서 의칭(義稱) 받은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완전한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한 그 기초가 바로 십자가가 아니었습니까? 이에 대해서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만족합니까?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충분하신 분이 아닙니까? 당신은 아직도 자신 안에 있는 어떤 다른 것, 즉 당신 자신의 방법이라든가, 당신 자신의 사역이라든가, 당신 자신의 생각이라든가, 당신 자신의 감정 같은 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헛된 것인 줄 알고 중지하십시오. 당신은 결코 다른 것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무언가 찾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장애물이 될 것이요, 손해거리요, 방해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도 충분한 자요, 동시에 당신에게도 충분할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당신은 진실로 행복할 것입니다.(그렇게 되기 전에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아마도 이 순간 유일한 죄사함의 기초인 온전하고 충만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당신에게 안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 실질적인 깨달음과 흥미를 갖고 두 번째 항목인 죄사함의 양(크기)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2. 죄사함의 양(크기)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서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충분한 구속 사역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죄에 적용되는 실제적인 자유를 붙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노래하면서도 그 가사의 능력 있는 내용에 심취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를 누가 그 큰 은혜로 용서하실까!" 그들은 주께서 단지 죄의 일부분만 짊어진 것으로 느끼는 것 같습니다. 즉 그들이 회심 시의 죄까지만 주께서 짊어지신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매일 짓는 죄에 대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마치 매일 짓는 죄는 과거의 죄를 용서하신 것과는 다른 기초에서 다시 용서되어지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따금 심히 낙담하고 매우 시달리는 생활을 합니다. 그들이 모든 죄에 해한 온전한 죄사함의 예비를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알기 전에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와 그 죄를 자백(시인)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성도가 그렇게 자기 죄를 자백함에 대해 무어라고 말했던가?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자! 왜 사도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라고 말하고 있으면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사"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모든 죄의 문제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제거되고 평온하게 되었다는 기초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의로운 대언자로서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죄사함에 관한 한 다른 어떤 기초 위에서 미쁘시고 의로우실 수 없습니다. 믿는 자들의 죄는 십자가에서 전부 속죄된 것입니다. 만일 하나의 죄라도 남았다면 그들은 영원히 버리운 자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하찮은 죄라도 하나님의 성역에는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첨가해서 말한다면 만일 믿는 자들의 모든 죄가 예수의 죽음으로 속죄되지 않았다면 그때는 자백(시인)으로도 안되고, 기도로도 안되고, 금식으로도 안되고, 그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용서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미쁘시고 의로운" 성품에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기초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직 "미쁘시고 의로운" 성품으로만 이 기초를 꼭 실천하셔야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기초가 곧 하나님께는 찬양이 되고, 우리들에게는 최고의 안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독자들이 다음과 같이 부르짖을 것을 상상해 봅니다. "무어라고요? 당신은 우리의 미래의 죄까지도 다 속죄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고 저주받은 시기로부터 미래의 죄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믿는 자들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을 때로부터 18세기 동안 미래였습니다.(C. H .맥킨토쉬는 19세기 사람임) 만일 이 미래의 죄에 대한 생각이 우리가 범할 수 있는 미래의 죄와 관련지어 볼 때 어려움에 부딪힌다면, 그리고 현재 그 문제가 아직도 미해결로 남아 있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범해 온 과거의 죄에 관해서도 매우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미래의 죄에 대한 모든 복잡함이 하나님의 견지에서 보기보다는 습관적으로 우리 인간 자신의 견지에서 십자가를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미래의 죄에 대한 언급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오직 인간적인 것이요, 세상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영원한 현재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의 죄들)가 십자가의 영원한 공의의 눈길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죄가 죄를 짊어진 자 곧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놓여졌던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으로 죄사함의 영원한 기초를 세웠고, 그러므로 믿는 자마다 각자의 생애의 어느 한 순간, 또는 자신의 역사의 어느 한 경점에서, 또는 자신의 경력의 어느 한 지점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의 믿음의 귀로 듣게 되고 그 순간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확실함과 확신을 갖고 거리낌 없이, 불안함도 없이, 주저함도 없이 "주께서 나의 모든 죄를 주의 등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오직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 10:17)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응답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강도를 예로 들어 봅시다. 유죄 선고를 받은 죄인으로서 그는 자기 옆에 매어달린 복된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곳에서 그 강도는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죄인에서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 갈 하나님이 주시는 자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적격자가 되기 위해서 그 자신 속에 그 자신과 함께 할 어떤 다른 것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낙원에 들어 갈 자격을 받은 후 낙원에 가는 대신 허락 받고 십자가에서 내려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즉 못은 뽑혀지고 자유롭게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아마도 그는 그의 자연성 속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각 속에서나, 말과 행동에서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하나님이 주신 자격과 적합함을 상실할 수 있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자격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지상에 남아서 50년을 더 살았다 할지라도, 그는 어느 날 첫 번째 얻은 동등한 자격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만일 용서받은 죄인이 죄를 범한다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죄에 대한 진정한 자백(시인)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기 이전에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죄사함과는 전혀 다른 각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방해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의 자격은 절대로 상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와 허물은 비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귀중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속죄된 것입니다. 그분의 희생에 의해 믿는 자는 죄와 저주의 장소에서 의로움과 온전한 은혜의 장소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 하나의 의로운 행위도 없었던 상태에서, 단 하나의 죄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는 상태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는 은혜 안에 서 있고, 은혜 아래서 살고, 바로 그 은혜를 호흡하며, 하나님의 시야 외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누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으랴?) 거기에는 반드시 자백(시인)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어쨌단 말입니까? 그래도 죄사함과 죄의 씻음은 역시 십자가에서 해답을 주신 하나님의 "미쁘고 의로운" 성품에서 세워진 기초 위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십자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쁘심과 의로우심, 그리스도의 대언자로서의 사역, 우리의 모든 자백, 우리에 대한 모든 용서, 우리의 모든 성결, 모든 교제의 회복,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귀중한 보혈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죄사함의 양(크기)이라는 항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또 다른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먼저 믿는 자가 하나님과의 하나 됨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양자로 들어가는 것이요, 성령님이 함께 거하심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죄를 온전히 용서하셨음을 의미하고 있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현재 한정된 주제 안에서 죄사함의 기초와 죄사함의 크기(양)를 생각해 보면서 죄사함의 방법(형태)이라는 몇 마디 말로 결론을 맺을가 합니다. 3. 죄사함의 방법(형태) 우리는 얼마나 많은 행위를 의뢰하고 있는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내면적, 실질보다는 외형적 형태에서 좀 더 능력을 취하려 합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그래요, 나는 그가 나에게 은혜를 베풀었음을 압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은혜에 따른 모든 좋은 것도 갖고 가 버리기 위함이었지요"(이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때때로 있는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자신의 방법대로 행하십니다. 그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그분은 그 큰 일들을 실천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있음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분의 실제적 행위가 위대할 뿐 아니라 그분의 실천하시는 방법(형태) 또한 매력적인 것입니다. 한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 복음 7장에서 바리새인 시므온에게 하시는 주님의 감동적인 말을 살펴봅시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원문에는 이 말이 있음-역자 주) 탕감하여 주었으니…"(눅 7:42) 위 말씀에서 단순히 빚에 관해서만 생각해 볼 때, 어떤 방법이었든 결과는 동일하게 둘에게 적용되었습니다.(둘 다 탕감되었다는 뜻) 그러나 둘 중에 누가 "기쁘게"라는 말의 영적 능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포기했을까요? 둘 중 누가 그분의 적나라한 실제 방법을 보고 싶어했을까요? 빚 준자는 그 빚의 양에 대해서 투덜대며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이 투덜댐은 판단하려는 마음이므로 모든 은혜의 고마움을 삭감시킬 수 있습니다.(세상 사람들의 은혜는 때때로 그렇다) 다시 말하면 "기쁘게 하는" 은혜의 방법이 실제에 있어서 은혜의 가치를 보기보다는 더 높이는 것입니다. 잠시 늘 영적 풍성함을 주는 우리에게 친숙한 누가 복음 15장을 살펴봅시다. 여기에는 3가지 비유가 있는데, 매 비유마다 능력 있고, 아름다운 방법을 보여 줍니다. 목자가 자기의 양을 찾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찾느라고 애썼던 모든 괴로움을 불평하였습니까? 아니면 자기 앞에서 양 자신이 스스로 집으로 가도록 다루었습니까? 둘 다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그 양을 자신의 어깨에 메었습니다. 어떻게? 그 무거움과 괴로움을 불평하면서 말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즐거움"으로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방법을 깨닫습니다. 목자는 양을 다시 찾은 기쁨을 보여주었습니다. 양은 안전하게 그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비록 과거에 벼랑에 있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자, 누가 그의 "기쁘게"라는 말을 포기할까요? 누가 그분의 매혹적인 모습의 적나라한 행위의 본질을 깨닫기를 원할까요? 또 한 여인과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촛불을 켜고, 집을 쓸고, 찾았습니다. 어떻게? 활기 없이, 싫증난 모습으로, 무관심하게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심전력으로 일하는 사람처럼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이것은 진짜 잃어버린 은전을 찾고자 하는 여인의 분명한 모습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불쌍하게 타락한 아들의 돌아옴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주목해 봅시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아버지는 잘못을 저지른 아들은 집밖의 어느 누추한 곳으로 쳐 박으려고, 한 종을 보내지 않았고, 또는 부엌 같은 데로 들어가게 하지도 않았고, 아들이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 자신이 친히 뛰어 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아버지로서의 위엄도 제쳐놓고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단순히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이 전심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나타내야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실제적 사랑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모습으로도 그 사랑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다른 성경 구절에서도 하나님의 죄사함의 방법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성경 말씀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인간 마음에 베푸시는 능력있는 모습을 은혜로 깨우쳐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침에 즈음하여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하노니,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가 무엇이며, 죄사함의 크기(양)가 얼마나 큰 것이며, 죄사함의 방법(형태)이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알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그 기초가 하나님 보좌만큼이나 안전하며, 그 크기가 무한하며, 그 방법(형태)이 모든 심령들이 바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죄사함의 문제가 풀려서 만족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아직도 죄사함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고 있습니까? 그가 이런 방법으로 당신들 앞에 실제적으로 죄를 용서해 놓고 죄사함의 기초와, 죄사함의 크기(양)와, 죄사함의 방법(형태)을 보여 줄 때 당신은 주저할 것입니까? 그분은 당신에게 마음 문을 열고 그의 생각이 얼마나 철저한가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분은 두 팔을 벌리고 당신을 영접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십자가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분의 손은 죄사함의 기초를 만들었고, 다 이루었음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그곳에 나아와 안식을 누리기를 간청합니다. 더 나아가 항상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당신을 위하여 예비하셨습니다. 지금 축복의 성령님께서 당신에게 임하시어 이 모든 일들을 확실하게, 충만하게 알게 하시고, 죄사함을 믿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모든 죄를 "기쁘게" 그리고 "영원히" 용서하셨습니다. .....................................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1) 1. 회심이란 무엇인가? 데살로니가 전서에는 참으로 "진짜 회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현저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 우리는 독자들과 함께 이 모습을 연구하기로 하자. 우리가 지금 큰 실수를 하고 있지 않다면, 즉시 흥미 있고 유익 된 연구를 하게 될 것이다. 이 연구는 이 글의 제목인 "회심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확실한 해답을 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을 얻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요즈음 여러 사람이 하나님의 훌륭한 능력으로 회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하나님께 진실로 회심한 모든 심령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다. 우리는 신성한 회심의 절대적이고 필요 불가결한 우주적 필요성을 믿는다고 말로만 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졌고, 또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야만인이든, 수크다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개신교인이든, 로마카톨릭교인이든, 다시 말해서 국적이 무엇이든 간에 또는 교회에서의 직분이 무엇이든 또는 그의 신학적 신조가 무엇이든 간에 꼭 회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직통으로 지옥과 연결된 넓고도 영원한 길목에 있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모태로부터 기독 신자가 된 사람은 없다. 또한 누구든지 교육으로 기독 신자가 될 수도 없다. 누가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교육으로 또는 물세례로 또는 어떤 종교적 의식으로 기독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치명적 실수이며 엄청난 기만이며 영혼에 대한 사단의 기만술인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신성한 회심에 의해서 기독 신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께로 향한 진실 된 회심이 절박하고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강조하는 바이다. 이것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이것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본다면 엄청난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자기 앞에 끝없는 영원한 내세가 펼쳐져 있는데도 불멸의 존재인 영혼이 자신의 회심의 엄숙한 문제를 거역한다는 것은 죄책감을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우매함인 것이다. 이 최대로 중요한 문제와 비교해서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별로 견줄만큼 의미 있는 것은 없다. 우리 주위에서 분요하게 사람들의 생각과 에너지를 몰두시키고 빼앗아 가는 여러 가지 일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향하는 심령의 중요하고도 엄청난 회심의 문제와 비교해 볼 때 한낱 저울 위에 묻은 작은 먼지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상거래의 투자라든가, 모든 돈버는 계획이라든가, 이익 되는 투자의 흥미진진한 문제라든가, 모든 쾌락 추구 곧 극장, 음악회, 무도회, 당구, 카드놀이, 주사위 놀이, 경마, 사냥, 음주 등 이름 댈 수도 없는 수많은 여러 가지 일들 즉 이런 것들은 마음에 만족이 없는 가련한 사람들이 추구하고 붙잡으려고 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은 마치 아침 안개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물거품과 같은 것이며, 굴뚝의 연기이며, 가을 낙엽과 같이 모두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며, 후에는 고통스런 공허만 남긴다. 이런 사람들은 회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족이 없고, 그 심령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무시무시한 질문이다. 상거래의 흥분과 정치적 싸움(권력투쟁)과 야망과 돈벌이와 쾌락 추구 끝에는 무엇이 남는가? 왜 인간은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 누구든지 이 죽음의 문제를 뛰어 넘을 수는 없다. 이 죽음과의 싸움을 피할 길은 없다. 우주의 모든 재물로도 무자비한 원수 사단의 손에서 한 순간의 휴식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의학적 기술로도, 모든 애정 어린 친척이나 친구들의 염려와 그들의 모든 눈물과 한숨과 간구로도 그 무서운 순간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며, 공포의 왕 사단으로 하여금 그의 무서운 칼을 거두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음은 어떤 인간의 예술로도 처리 될 수는 없다. 그 죽음의 순간은 인간의 생활의 모든 아름답고 매혹적인 것들과 마음의 이음줄이 끊겨지면서 틀림없이 찾아온다. 즐겁게 지냈던 사랑하는 친구들과 매혹적인 일들과 모든 탐욕의 대상물들은 포기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세상이 천 개가 있다 할지라도 이 충격을 피할 수는 없다. 죽음은 대면하여 똑바로 보아야만 한다. 이것은 무서운 신비이며, 엄청난 사실이며, 확실한 실제인 것이다. 이 죽음은 하늘 아래 모든 회심하지 못한 남녀와 아이들 앞에 우뚝 버티고 서 있다. 죽음이란 년, 월, 일, 시, 즉 시간의 문제인데 그 시간 속에 있는 헛되고 공허한 그림자 같은 것들을 굉장한 실재를 갖고 있는 영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분계선을 통과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성경에서 해답을 얻자. 성경 외에는 해답이 없다. 인간은 자신의 헛된 사상으로 선뜻 대답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상을 주입시키려 한다. "먹고, 마시고, 그리고 내일 죽자!" 이 얼마나 허황된 자만심인가! 그것은 헛된 속임수다. 이것은 이 세상 신에 의해서 가려진 인간의 바보 같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불멸의 영혼이 소멸될 수 있단 말인가? 에덴 동산에서부터 인간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 영혼을 소유한 자가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절대로 소멸되는 영혼이 아니다. 영혼은 틀림없이 영원히 존재한다. 회심을 한 사람이든, 또는 회심을 하지 않은 사람이든 영혼은 영원성을 지내고 있다. 오, 모든 사려 깊은 심령에 이 얼마나 무거운 생각인가! 어느 누구도 이 광대한 사상을 습득하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초월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자.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의 단 한 구절이 만개의 인간 마음의 주장과 이론을 쓸어버리기에 충분하다. 죽음은 소멸인가? 아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말에 주목하시라. 이 말은 오직 자신의 죄 속에서 죽는 사람과 불신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기독도에게는 성경 여러 군데에서 언급한 대로 심판은 영원히 지나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죽으면 그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죽음 이 후에는 심판이 있다. 그러면 심판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성경은 엄숙하고도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이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1-15) 이 모든 것들은 말씀이 표현하는 한 확실한 것이다. 거기에는 한 점의 이의나 거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에게는 전혀 심판이 없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어쨌다고? 죽으면 끝이라고? 아니다. 오히려 불못 속에서 영원히, 영원히 있게 된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그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든 간에 자기 앞에 죽음과 심판과 불못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매순간의 맥박 소리는 점점 더 두려운 곳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독자께서 머지 않아 영원 속에 빠져든다는 사실은 내일 아침 태양이 다시 뜬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것이다.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없고, 회심하지 않았다면, 또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심판의 모습은 불못으로 나타날 것이요, 그것은 끝없이 영원한 것이다. 독자들께서는 이런 무서운 주제로 우리가 오래 상고하는 것에 대해 아마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그 따위 말이 사람들을 회심케 할 수 있겠는가?" 설사 이런 말이 사람들을 회심시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회심의 필요성은 알게 할 것이다. 그들에게 다가 올 절박한 위험은 알게 할 것이다. 다가 올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도록 권면은 할 것이다. 왜 축복 받은 사도는 벨릭스와 함께 "다가 올 심판"에 대해서 언쟁을 하였던가?(행 24장) 그것은 틀림없이 벨릭스로 하여금 그의 악한 길과 생활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설득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왜 청중들에게 영원한 곳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강조를 했던가? 왜 주님은 자주자주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을 말했던가?(막 9:48) 그것은 틀림없이 그들에게 위험을 알게 할 목적으로 하셨을 것이고 그러하므로 그들이 그 위험으로부터 도망하여 그들 앞에 제시된 소망을 붙잡고 피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보다 더 현명한가? 우리가 그분보다 더 온화한가? 우리가 사람을 회심시키기 위해서 보다 나은 방법을 찾아낸 적이 있던가? 주님께서 당시 사람들에게 강조했던 주제와 같은 것을 독자들에게 강조한다고 해서 염려할 것이 있겠는가! 누구든지 회심하지 않으면 크고 흰 보좌 앞에 불가피하게 서게 되며, 불못에 던지운다는 확실한 말씀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교묘히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위축되야 하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금하는 바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회심하지 못한 독자들에게 엄숙히 말하는데, 이 중요한 영혼의 문제에 집중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그 무엇도 이것에 대해서 독자로 하여금 거역하게 해서는 안된다. 세상의 어떤 걱정거리나 즐거움이나, 어떤 직업도 이 중요한 문제의 심각성에서 독자로 하여금 돌이켜 못 보게 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세상 모든 것을 얻고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그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아니면 "사람이 자기 목숨과 바꿀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 16:26) 오, 만일 당신께서 구원받지 못하고 회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대에게 지금 간청하노니,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고 구원받고 하나님께로 회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바란다. 이것이 바로 그의 왕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도 최소한 이 문제를 알게 되기를 믿고 싶다. 그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그의 말씀은 절대로 없어질 수 없다.(마 24:35) 땅과 지옥의 모든 권세와 인간과 악마라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헛되게 할 수는 없다. 당신 앞에 두 길 중 하나가 놓여 있다. 지금 회심하든지 아니면 이후로 영원히 멸망하든지 둘 중 하나다. 이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고, 이런 견해에서라면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회심하지 못한 자에게 말로나 글로나 지금 이 순간 다가오는 진노에서 벗어나 축복의 구세주에게로 도피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열의를 다해서 열렬히 강조하는 것이 지나친 일이겠는가?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다. 그분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두 팔 벌리고 환영하고 계시다. 그리고 사랑스럽게 은혜의 말씀으로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자는 결코 내어쫓지 않으리라"(요 6:37b)라고 말씀하신다. 2.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성경은 성경의 권위에 머리를 숙이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의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이 말씀은 그 말씀 자체의 영적 권위와 엄숙함과 함께 타락한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이 지구상의 수십 억 인구 중 단 하나의 예외도 있을 수 없다. 회심(돌이킴)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그렇게 될 수도 없다. 회심하지 못한 모든 영혼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구며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조금도 문제되지 않는다. 만일 내가 회심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사단의 수하에서 내 죄로 인하여 흑암의 권세 하에 있으며 지옥 길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일 수 도 있다. 흠 없는 명사일 수도 있다. 높은 위치의 종교 지도자일 수도 있다. 또는 포도원의 일꾼일 수도 있다. 주일 학교 교사일 수도 있다. 복음을 시인했다고 하는 교회의 공직자일 수도 있다. 자격 있는 선교사일 수도 있다. 집사, 장로, 목사 또는 카톨릭 주교일 수도 있다. 또는 가장 자비심 많은 사람일 수도 있고, 종교단체나 자선단체에 아낌없이 바치는 기부금 수여자일 수도 있다.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나의 인격과 도덕적 영향력 때문에 우러러 보임을 받는 자일 수도 있고, 선망의 대상일 수도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거나,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사람들이 바라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모든 것을 소유한 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심하지 못했다면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자요, 사단의 왕국에 속한 자요, 죄책감의 소유자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으로 직통하는 넓은 길목에 서 있는 자다. 이것은 바로 마태 복음 18:3의 우리 주님의 말씀의 정확하고 분명한 의미이며 능력인 것이다. 이 말씀 앞에서는 피할 길이 없다. 그 말씀은 태양 빛과도 같이 분명한 말씀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 말씀은 우리 세상에 엄청날 정도로 위엄 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위엄으로 이 지상에 있는 모든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돌이키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거리를 배회하고, 짐승보다 못할 정도로 타락한 술주정뱅이에게나, 또는 회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전 직임을 맡은 자에게나, 또는 몇 날, 몇 주, 몇 달, 몇 년이라 할지라도 계속 금주하는 것을 자랑하며 항상 방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우월감을 갖는 절대 금주자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요, 똑같이 자신의 죄 속에 갇혀 있고, 똑같이 영원한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술주정뱅이에서 돌이켜 방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축복할 만 하다. 그러나 술 취함에서 돌이켜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도덕성을 자랑하며, 그러한 자만심으로 자신을 헛된 데로 자신을 속여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술주정뱅이와 절제 자 사이에 외형적 차이점은 있다. 즉 금주 자는 자신의 절제하는 마음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자신의 도덕성을 자랑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옳다고 하는 헛된 사상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술주정뱅이는 틀림없이 잘못된 모습이다. 모든 사람은 술주정뱅이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회심하지 못한 상태의 절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도 마찬가지 사실이다. 둘 다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다. 전자나 후자나 다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것이 절대 필수적인 것이다. 사회 각층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또는 여러 생활 수준의 사람들로부터, 도는 모든 피부색의 사람들로부터, 모든 사회 계급으로부터, 그리고 해 아래서의 모든 환경의 사람들로부터 동일한 질문을 받게 된다. 이런 크나큰 질문에 대한 해답에는 그들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 있다. 그들의 외모가 어떻든,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너희가 돌이키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나는 돌이켰는가(회심했는가?)" 라는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엄청난 질문이다. 인간의 언어로 이 질문의 중요성과 위엄을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것이다. 한 인간이 매일 또는 매년 이 귀한 질문에 대한 확실하고도 확정적인 해답 없이 계속 이 생각에만 몰두한다는 것은 최고의 어리석은 자로 지목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더욱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만일 인간의 자신의 세상 문제를 불확실하고도, 가장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 내버려둔다면, 그는 가장 악하고 못된 자기 무관심과 자기 부정이라는 송사에 자신을 드러내는 꼴이 된다. 그러나 영혼 구원과 비교해서 현세에서 무엇이 가장 긴박하고도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을까? 불멸의 영혼의 유익과 비교해 볼 때(불멸의 영혼은 가장 중요한 영원의 실재이다.) 모든 세상 염려는 단지 여름 타작 마당의 겨와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이 진실로 하나님께로 회심했다는 분명하고도 평안한 확신 없이 단 한 시간이라도 쉴 수 있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되는 소리다. 회심한 심령은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분계선을 통과한 사람이다. 그 분계선은 흑암의 자녀와 빛의 자녀를 구별하는 분계선이며, 이 악한 현세와 하나님의 교회를 구별하는 분계선이다. 회심한 심령에게는 사망과 심판은 뒤에 있고 오직 영광만이 앞에 있다. 그는 이미 그 자신이 천국에 있는 것처럼 천국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 이미 천국에 속한 자가 된 것이다. 그는 흠 없는 자녀의 명칭을 소유한 자며, 어두움이 없는 내세를 소유한 자다. 그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알며,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와 친구로 알며, 성령을 자신의 축복의 위안자, 또는 인도자와 선생으로 안다. 또한 천국은 자신의 밝고도 행복한 가정으로 안다. 오! 회심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믿는 자들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9-10) 자! 이제 이 회심이 무엇인지, 참으로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하심을 받을 것인가? 거기에 한 점의 실수라도 있다면 치명적 재난으로 판명될 것이다.많은 사람이 회심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참으로 우리는 이 제목 하의 매우 중요한 어떤 사실에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즉 그 사실이라는 것은 우리의 원수이며,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원수인 사단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회심에 대해서 잘못된 길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만일 사단이 계속적으로 사람들은 이 회심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케 하는 데로 이끌지 못한다면, 한 술 더 떠서 사단은 그 회심의 본질에 대해서 사람들은 눈을 가리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여러 방법으로 이 세상 오락이 몹시 헛되고,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여 자신의 생활 변화의 긴급한 필요성을 알게 될라치면, 그 최고의 속임 자는 그런 사람을 오히려 종교적인 사람이 되게 하여 예배 형식과 의식과 행사에 바쁘게 하여 무도회나, 파티나, 극장이나, 콘서트나, 음주나, 놀음이나, 사냥이나, 경마를 다시 말해서 모든 쾌락이나 오락을 버리게 하면서 오히려 종교적 생활에 빠지게 하며 또 모든 종교 행사에 부지런히 참석케 하여 성경도 읽게 하고, 기도도 하게 하고, 구제도 하게 하며, 큰 종교 행사나, 그 지방의 자선 단체를 지원하는데 헌신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은 회심이 아니다. 사람은 위의 모든 것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독실한 종교인이 자기의 전 생활을 철야라든가, 금식, 기도, 금욕, 구제 행위 등을 실천하면서도 전혀 회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시들어 가는 나뭇잎이나, 꽃 등, 무가치한 대상물을 추구하면서 전 생활을 보내는 사냥꾼이나, 사려 깊지 못한 세상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생활인 것이다. 상기 두 인물(철저한 종교인과 세상 취미 생활자)들은 틀림없이 서로 외형적으로 크게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회심하지 못했다. 둘 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밖의 사람들이다. 둘 다 자신들의 죄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사실 하나는 "악한 행위(골 1:21)"에 몰입한 자요, 다른 하나는 "죽은 행실(히 6:1)"에 빠진 자다.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다. 그 둘은 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요, 소망 없고, 끝없는 고통의 길에 있는 자들이다. 만일 구원의 회심을 못했다면 다른 한 쪽과 마찬가지로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 속에서 자신들의 들어 갈 자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회심은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유대교나, 이방 종교나, 마호멧교나, 또는 카톨릭교에서 개신교로 전환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회심하지 않을 수 있다. 틀림없이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지적 기준에서 볼 때 개신교인이 되는 것은 마호멧 교인이 되는 것보다 나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서 볼 때 그들은 모두 공통 플랫트홈에 있는 것이고, 둘 다 회심하지 못한 것이다. 진실로 이쪽이나 저쪽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회심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회심은 어떤 종교 제도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 종교제도가 항상 순수하고, 항상 건전하고, 항상 권위가 있는 제도라 할지라도 말이다. 사람이 기독교 내의 가장 존경스러운 종교 단체의 한 일원이 될 수는 있다. 그러면서도 회심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영원한 멸망의 길에 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신학적 신조에서도 그렇다. 사람이 어떤 위대한 기준인 종교적 신념에 가입할 수도 있다. 39개도(영국 국교의 신조)나, 웨스트 민스터 고백이나, 요한 웨슬레의 설교문에나, 폭스나, 바클레인이나, 또는 어떤 다른 신조에 가입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회심하지 못하고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상태에서 한 가닥의 소망의 빛조차 없는 비참하고도 영원한 우울한 장소인 지옥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가닥의 하나님의 생명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합법적으로 종교 문답을 할 수 있다 해도, 그 종교적 제도나 신학적 신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제도나 신조가 심령을 살릴 수 없고, 구원할 수 없고, 영생을 줄 수는 없다. 사람이 매일 매일 계속해서 맷돌을 돌리는 말과 같이, 한 해 한 해 종교라는 기계 장치 위에서 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황량하고 단조로운 죽은 행실로 제자리걸음만 하는 격이다. 그런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에서 끝장 날 것인가? 죽음! 맞다. 바로 끝은 죽음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아! 바로 이것이 문제다. 하나님께 이 질문의 중요성과 심각성이 보다 진지하게 알려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 그 자체는 더욱 만월의 빛 가운데서 아마도 종교적 신념의 제도로서 옹호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지식적으로 영광스런 은혜의 교리와 함께 충만하고도 값없이 받는 복음으로, 행한 것 없이도 받은 구원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칭의에 거의 입문하여 기뻐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영광스런 신약적 기독교 교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다. 사람이 이 교리를 믿고 기쁨을 지식적으로 시인할 수도 있다. 그는 능력있는 작가로 기독교 교리를 옹호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또는 복음을 웅변적으로 열의를 다해 설교할 수도 있다. 이 모두가 사실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이 전혀 회심하지 못하고,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귀한 복음의 진리에 익숙해진 나머지 오히려 마음이 굳어져서 스스로 속임을 당하고, 파멸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복음의 진리는 그 사람의 이해력을 초월하지 못하고, 그의 양심에 도달되지도 못하고, 그의 마음을 감동하지 못하고, 전혀 그의 영혼을 회심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가장 극단적인 예만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 믿고 기뻐한다고 하면서, 또한 실제로 하나님의 복음을 설교하면서, 또는 기독교 교리의 가장 특이한 모든 진리를 가르치면서도 아직도 회심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영원의 길로 향하고 있다면, 이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불행은 없으리라. 이 불행은 그가 한 때 믿고 죽어 가는 모든 사람의 귀에 가장 영광스런 복음의 소식을 실제로 설교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때문에 그 불행은 더욱 최고조에 달하는 것이다. 오! 독자여 당신이 누구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당신에게 간청하는 바이다. 위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 당신의 모든 주의력을 집중하길 바란다. 당신의 오류 없는 진짜 회심이 하나님 앞에서 확인될 때까지는 한시라도 안일한 마음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3.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지금까지 어떤 경우에라도 회심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또 어느 정도 무엇이 참 회심이 아니라는 것도 지적했기 때문에 이제는 진짜 회심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겠다. 그래서 성경 말씀의 확실한 가르침에 접근해야만 한다. 우리는 보다 못하지 않고, 보다 틀리지 않은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이 회심했다고 하는데 전혀 회심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난 것에 대해 몹시 염려되는 바다. 소위 회심했다고 하는 많은 간증이 나오고 또 그런 소문을 듣고 있는데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볼 때 적합 되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다고 고백하고 또 그렇게 믿어 주고 있는데, 그들이 단순히 무감각한 청중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 마음에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영적 움직임은 없고, 양심에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실제적 활동도 없고, 세상과 함께 철저한 부서짐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의 영향력을 받아 감정의 작용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 들고, 또는 어느 복음 전도자의 감정이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든다. 그러면서도 자아(self)는 판단 받지 않고, 오히려 세상과 자연에 대한 집착은 계속 있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열의는 없고, 또한 신약 성경에 기록된 회심의 특성을 지닌 그런 진짜 회심자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심하는 그런 회심자를 찾고 있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천박한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시도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은혜로운 복음 전도 사업에 몰두하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성경의 밝은 빛으로 그 문제를 상고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언급하는 바이다. 그리고 많은 복음 사역자들이 얼마나 성경 원리에서 이탈하고 있는가를 알리기 위함이다. 아마도 우리의 복음 사역에 많은 인간적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도록 맡기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사역의 능력과 효율성 자체를 신뢰하는 믿음이 부족하다. 아마도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려는데 신경을 쓰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 선풍을 일으키는데 많은 할애를 하는 것 같다. 아마도 좋은 결과를 보려는 욕심에서 많은 회심자들의 일시적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도자들은 그들을 회심으로 인정해 주고, 공중 앞에서 공포까지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열의가 위축되겠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들의 열심을 더 강렬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남모르게 더 열심을 간구할 것이며, 공중 앞에서는 청중들에게 더 열렬히 호소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의 중요성을 보다 깊이 깨닫게 되고, 우리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역사하심이 와야 함을 전적으로 확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소중히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우리를 바른 자세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바른 자세란 지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역사하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자아를 비운 마음으로 의뢰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골방에서나 공중 앞에서나 회심의 영광스런 사역에 관한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보다 똑바른 마음으로 직면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황금 같은 알곡과 잘 익은 열매가 열릴 것이다. 그럴 때 진짜 회심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회심은 그 회심 자체가 증거 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회심자와 함께 회심의 신용장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럴 때 진실로 우리의 마음은 귀한 영혼들이 구원받음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이 회심한 경우를 일일이 세고, 우리들의 사역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자만심과 자기 만족 속에서 거들먹거리는 어리석은 우리들의 마음과 비교해 볼 때 참으로 귀한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예배하는 마음 자세가 우리 자신의 이름을 위대한 설교자로 또는 대단한 복음 전도자로 땅 끝까지 드러내는 것보다 얼마나 훌륭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자세인가! 진실로 영의 인격으로 판단해 볼 때 우리의 사역은 비교조차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 맡길 때 복음 사역의 위엄과 실제적 효과와 중요성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 사역자들의 마음에서는 행복과 영적 평안함과 실제적 효과는 점점 증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하게 되고 계속될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이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서는 어떻게 묘사되었는가를 알아보자.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1-3) 이것은 참 기독교의 위대한 근본원리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사도 바울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생활 속에 드러난 확실하고도 의심할 바 없는 증거로 알게 된 것이다. 즉 한 성도가 택함을 입었을 때, 알 수 있는 바로 그 동일한 방법으로 알았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축복 받은 사도는 그의 일상생활 자체가 그 자신이 설교하는 복음의 해설자였던 것이다. 그는 복음으로 살았다. 바울은 성도들로부터 무엇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의 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설교했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밤낮 없이 일하고 수고했다. 그는 사랑스럽고 유순한 유모와 같이 그들 가운데 함께 있었다.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직분에 대해서나, 자신의 권위에 대해서나, 자신의 은사에 대해서나,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나, 다른 지역에서의 기적 행함에 대해서 전혀 과장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사랑하고 낮아진 자세에서 난체하지 않고, 열심을 다하는 헌신하는 사역자였다. 그러한 그의 생활 자체가 회심의 일을 했고, 그의 전 생활이, 그의 영이, 그의 생활 모습이, 그의 태도가, 그의 생활 습관이 그의 설교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모든 사역자들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천박한 사역이 사역자의 천박성에 결과임을 바울의 생활 태도로 믿게 된다. 능력은 어디에 있을까? 성령의 드러남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충만한 확신"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들의 설교에는 혹 이런 생활의 부족함은 없지 않은가? 유창한 언어구사가 많을 수 있다. 소위 재치라는 것도 많이 발휘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귀를 즐기고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많은 것들이 일시적으로 유익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단순한 호기심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오! 거룩한 기름부음은 어디 있으며, 살아 있는 열의와 깊은 진지함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럴 때 일상 생활과 습관이 산 해설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주께서 그의 사역자들의 마음에 작용하여 그의 사역을 되살아나게 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때 우리는 사역의 열매를 보다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회심의 일이 사역자에게 달렸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괴기한 생각은 멀리멀리 안녕이다! 그런 일은 전적으로, 절대적으로 성령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이 모든 의문점을 해소한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는 말씀은 사역의 모든 부분과 매 경우마다 항상 바르게 붙들어야 할 말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성령님은 보통 어떤 도구를 사용하실까? 우리 사역자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주님의 마음에 드는"것은 어떤 그릇일까? 그것은 비고, 깨끗한 그릇이다. 우리는 과연 그런가? 우리는 자신을 비웠는가? 우리의 손은 깨끗한가? 우리의 교제, 우리의 방법, 우리의 환경은 깨끗한가?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주께서 그의 거룩한 봉사에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이 중요한 문제에서 은혜 받기를 바란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온통 감동하사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을 정도로 보다 합당한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을 계속 진행하자. 그 전체의 내용은 능력으로 가득차 있다. 한편에는 사역자의 특성이요, 다른 한편에는 사역 자체의 특성인데, 그 특성들은 우리에게 매우 세심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저희가 우리에게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 1:6-9) 이것이야말로 참 사역이다. 그 사역은 그 자체에 신임장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헛된 것이나 불만족이 전혀 없다. 그 일에 대해서 어떤 비평도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주님의 인침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분명함을 줄 수 있는 확고함이 있다. 회심의 역사는 행해졌고, 그 회심의 결과는 기쁨 충만함으로 뒤따랐다. 그 증거는 더 멀리 더 넓게 펴져 갔다. 그래서 사역자는 자신의 사역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회심자의 수를 세어 드러낼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직접하신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었는데 거기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고, 그 사역에 또 다른 말을 더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사도는 충만한 확신으로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설교한 것 뿐이다. 거기에는 헛됨도 없고, 그의 증거에 대해서 의심 할 수조차 없다. 그는 그 자신의 설교 내용을 믿고, 그 내용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설교했을 뿐이다. 그것은 어떤 단순히 알고 있는 지적 진리의 유창한 언어구사가 아니었다. 어떤 틀에 박힌 열매 없는 교리 강연이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고 말고다. 그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의 퍼부음이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말씀의 의미를 깊숙이 느끼는 그러한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설교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가슴에 와 닿은 모든 것을 수령한 것이었다. 데살로니가에서의 그의 사역이 그러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고,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적 참 열매였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 흥분도 아니고, 선동도 아니고, 들뜸도 아니고, 리바이벌 붐을 일으키려는 시도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울 정도로 고요했다. 사도 행전 17장에서 사도는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행 17:1-2) 귀하고 능력 있는 강론이었다. 하나님께 구하노니 우리 가운데서도 그보다 더한 역사가 있기를 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 17:3) 이 얼마나 단순한가! 성경으로 예수를 설교했다. 그렇다 여기에 위대한 바울의 설교의 비밀이 있다. 그는 살아 계신 인격자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능력으로, 살아 있는 말씀의 권위로 설교했다. 이 설교가 산 믿음으로 받아들여졌고, 회심자들의 생활 속에서 산열매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고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그것은 단순한 틀에 박힌 설교가 아니고, 종교 대담도 아니다. 오직 자신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설교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한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4. 탐심은 우상숭배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의 마지막 두 절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 구절들은 회심의 참 특성에 대해서 특이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 구절들은 아주 분명하게 데살로니가 교회 회심자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적 깊이와 확실성과 충만함과 실제성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는 실수라고는 없다. 거기에는 그 자체의 신임장을 갖고 있다. 그것은 결코 불확실한 사역이 아니었다. 그것을 믿기 위해 어떤 세심한 테스트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분명하고도 실수 없는 하나님의 사역이었으며, 모든 회심자들에게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었다. "저희가 우리에게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그래서 이제 간략하지만 납득이 갈 만한 회심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깨달을 수 있게 됐다. 회심은 어떤 기점에서 어떤 다른 기점으로의 전환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우상으로부터 돌이켰다. 거기에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 즉 그들의 과거 생활과 관습에서 단번에 그러면서도 영원한 돌이킴이 있었다. 즉 그것은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에너지를 지배하고 휘어잡고 있었던 세상 것들에 대한 전적인 포기였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안에서 그들 자신의 전체 과거 생활을 판단했을 뿐만 아니라 솔직하게 그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떤 어정쩡한 행위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애매하다거나 모호함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생애 속에서 특별한 기점이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도덕적인 면에서나 실 생활면에서도 엄청난 변화의 기점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들의 어떤 의견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떤 새로운 이론의 수용도 아니었다. 또는 그들의 지적 견해에서의 어떤 변화도 아니었다. 전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전체 과거의 경력이 하나의 엄청난 어두움의 괴물과 같은 거짓 생애였음이 엄숙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의 실제적인 확신이 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은 그들의 심령에 강하게 들어갔고 그 진리의 빛의 능력 속에서 그들은 자신과 그들의 과거 전부를 심판 내렸던 것이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이 세상 것의 철저한 부서짐이 있었다. 조금도 세상 것은 남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신비한 변화를 가져왔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능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의 심령에 간절히 호소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바울 사도의 데살로니가 방문에 대해서 영감으로 설명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 17:2).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살아 있고 영원한 말씀에 직접 연결시키려 애썼던 것이다. 거기에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감정이나, 생각에 작용하는 어떤 인위적 시도도 없었다. 그런 것은 축복 받은 사역자 바울에게는 무가치한 것이었다. 바울은 그런 시도는 믿지 않았다. 그의 신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뿐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자세로 확인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쉬지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이점이 바로 생동감 있고 지고한 중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능하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데살로니가에서 이런 위대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축복 받은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감사가 채워졌다. 바울이 기뻐한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자기와 연결된 점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었다는 점이었다. 하나님과의 연결은 소멸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말은 인간이 소멸될 때 함께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참 사역자로서 이 점을 깨우쳤고, 또한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신성한 열심히 생겼고, 그의 모든 사역에서 그가 전한 복음을 들은 모든 심령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에게 의뢰하지 않기를 바랬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요, 사역자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하는 말씀을 들어보자."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여기서 우리는 참 복음 사역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증거"와 "성령의 나타남"이다. 즉 말씀과 성령이라는 말이다. 이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모든 인간의 영향력이라든가 인간의 능력,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에너지에 의한 결과는 철두철미하게 무가치한 것이다. 그렇다.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사역자들은 자기네들이 나열하고 지껄여 온 자기네들의 두드러진 사역의 결과로 마음이 부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거짓된 영향력을 받은 불쌍한 심령들은 속은 것이 되고, 전적으로 거짓된 곳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고 거짓 신앙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전체 사역은 최고의 재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전지 전능의 영적 능력과 성령의 활력 하에서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거하게 될 때는 그렇지 않다. 그 때는 데살로니가에서 보여진 경우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엄숙한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모든 의문점을 뛰어넘어 누가 참 사역자인지 분명하게 판가름나는 것이다. 복음 사역이 신임을 얻게 되는 것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의 사역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사역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영원히 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을 돌리자!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에서의 그의 사역의 결과를 셈하거나 떠버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 자신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드러냈다. 그것이 진짜 사역이었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인침이 확고히 그 사역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바울은 매우 만족했다. 이점이 바로 스스로 마음을 비운 모들 사역자들에게는 만족을 주는 것이다. 바울은 말씀을 전달했고, 그 말씀 자체가 심령을 살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마음에 간절히 호소했던 것이다. 그 말씀은 좋은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풍부한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이제 그 결과를 살펴보자. "우상을 버리고"(살전 1:8). 여기서 우리는 회심하지 못한 모든 세상 사람들의 생활을 한 마디로 알 수 있다. 그것은 모두 "우상"이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포장되어 우리 마음에 던져진다. 우상 숭배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가축이나 돌에만 머리 숙이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사로잡은 모든 세상 것이 우상이다. 어떤 대상에 마음을 복종시키는 것이 우상 숭배다. 또 그것에다 마음을 빼앗기는 자는 우상 숭배자다. 이런 말이 자존심 강한 어떤 사람에게는 불쾌하게 들릴는지 몰라도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이 점에서 이 말은 엄연한 진리인 것이다. "탐심"이라고 불리 우는 일반적인 큰 죄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영감 받은 바울 사도는 "탐심"을 무엇이라고 했던가? 그는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했다.(골 3:5)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돈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금이라는 우상 앞에 머리를 조아리던가? 탐욕은 무엇인가? 좀더 얻고자 하는 욕망이거나,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애착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신약에서 그 두 가지 형태를 다 보게 된다. 그리스 원어에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내포하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얻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던지, 아니면 쌓아 두려는 욕망을 가졌든지 이 둘은 다 우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표면적으로는 같은 모습이 아니라 전자는 더 얻고자 하는 욕망은 쓰기 위해서 예비하는 것과 연관시킬 수 있다. 후자 곧 쌓아 두려는 욕망은 반대로 일반적으로 저장하려는 강렬한 정신과 연결되어진다. 예를 들어 큰 사업 능력을 갖춘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장사에는 천부적 재능이 있다. 그의 손안에서는 모든 것이 불어나는 것 같다. 그에게는 사업에 대한 진짜 열정도 있고, 돈을 버는데 그칠 줄 모르는 갈급 함도 있다. 그의 목적은 오직 더 버는 것이고, 숫자를 더 늘리는 것이고, 사업체를 더 강화시키는 것이요, 그리고 그 자신의 사업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다. 그는 사업의 분위기 속에서 살고 번창하고 흥청거리며 살아간다. 그는 처음에 몇 푼 안되는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며, 드디어 자랑 할 수 있는 사업 왕자 자리까지 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구두쇠는 아니다. 그는 얻기 위해서는 돈을 쓸 자세도 갖추고 있다. 그는 엄청날 정도로 노임도 나누어준다. 화려한 대접으로 유흥도 베푼다. 아낌없이 대중들에게 여러 배로 되돌리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 각층으로부터 우러러 보이게 되고, 존경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더 얻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탐심의 사람 즉 우상 숭배자이다. 실제로 그는 금을 만지며, 돈주머니를 주무르면서 밤을 지새며 즐기는 어리석은 구두쇠를 경멸하는 사람이다. 원래 구두쇠들은 환상적인 먼지(돈을 말함)를 보며, 그것으로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하며 즐긴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가족을 위한 생활 일용품에는 인색하다. 그는 저축된 귀한 돈 뭉치의 일부를 쓰기보다는 넝마 조각을 걸치고 남 보기에 불쌍하리만큼 보이면서 거리를 누비는 사람이다. 그도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벌어서 어떻게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돈 그 자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그는 쌓는 재미로 산다.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쌓아 두기 위해서 산다. 그의 지배적 욕망은 수많은 넝마 조각과 함께 죽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괴상망칙한 욕망이다. 이 둘은 현저하게 다르다. 그러나 그 둘은 다 한 지점에서 만난다. 그 둘은 동일한 플랜트 홈에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둘 다 탐심의 사람이요, 둘 다 우상 숭배자들이다. 이 말이 거칠고 심각하게 들릴는지 모르나, 이 말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권위에 복종해야만 한다. 성령이 우상 숭배라고 선포하는 바로 그 탐심의 죄를 사람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엾은 저질의 구두쇠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업 왕자와 비교된다는 것은 쇼킹한 일이다. 타인들 속에서 위와 같은 경우를 보는 것과 우리 자신 속에서 그것을 판단 내리며 볼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사실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 내리며 볼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만이 심령을 비추고 영적 존재인 우리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다. 그리고 탐심의 죄를 끄집어 낼 수 있다. 얻기를 추구한다는 것 즉 더 얻으려는 욕망, 즉 사업 정신, 다시 말하면 돈을 버는 능력 즉 계속 얻으려는 욕망은 인간 세계에서는 매우 존경받은 일이다. 비교적 몇 안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견지에서 그런 모습을 가증한 것으로 본다. 자연성은 인간의 생각이다. 자연성은 세상에서 찾아지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찬양하고 숭배한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마음은 나름대로 우상을 갖고 있다. 한 사람은 금을 숭배하고 다는 사람은 쾌락을 숭배하고 또 다른 사람은 권력을 숭배한다. 회심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우상 숭배자다. 회심한 자라 할지라도 우상의 영향력을 뛰어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요일 5:21)고 경계의 말씀을 했던 것이다. 독자들이여, 우리가 이 문제를 더 진행하기 전에 여러분께 확실하고도 예리한 질문을 해도 되겠는가? 당신은 참으로 회심했는가? 당신은 그렇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당신은 구원받은 기독교의 기초석을 갖추고 있는가? 그렇다면 참으로 우상에서 돌이켰는가? 당신은 진실로 세상과의 관계가 끊어졌는가? 그리고 구원받기 이전의 자아와의 관계가 끊어졌는가? 당신은 마음속에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고 있으며, 또한 당신의 이전의 전 생애 즉 그것이 환락의 생활이었던지 또는 무분별하고 어리석고 돈벌기에만 급급한 생활이었던지 또는 가증하고 사악하고 비참한 생활이었던지 또는 그리스도가 없고, 믿음 없는 무가치한 단순히 의례적인 종교 생활이었던지 간에 그런 생활을 지금 심판하고 있는가? 대답해 보시라. 당신의 생활이 어떤 것인가? 철저하게 솔직해 보시라. 지금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신의 진지한 열의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우리 모임 안에 슬프게도 이런 면에서 철저한 결단이 없음을 깨닫고 괴로워하고 통탄하는 바이다. 우리는 분명하고도 강렬하게 "우상으로부터 돌이키지" 못하고 있다. 구습은 성격이나, 외향이나, 정신이나, 태도가 회심을 바라고 있지 않다. 우리는 슬프게도 우리의 옛 자아를 너무나 좋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세상적인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터놓고 좋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엄청난 일들이다. 우리는 이 점이 복음과 영혼 구원의 진행 과정에서 슬프게도 방해 거리가 되고 있음을 염려하는 바이다. 증거의 말씀은 우리가 전하는 사람들의 귀에 무능력하게 들려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조차 진실하게 믿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의 회심자들에게 말하듯이 직접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살전 1:8) 우리에게는 깊고도 능력 있는 확실한 회심이 부족하다. 소위 역사 하심이 있다는 모임에서도 무기력함과 연약함과 모호함이 부끄럽게도 실망스러울 정도로 만연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5) 5. 성도의 기업 자 이제 우리는 회심의 주제에 대한 긍정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상 버림" 즉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휘어잡았던 모든 사물로부터의 돌이킴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그것들은 헛된 것이며 어리석은 것이며, 우리의 어둡고 캄캄했던 모든 지난날들의 정욕과 쾌락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도 행전 26:18에 있는 말씀과 같이 "이 악한 세대"로부터의 돌이킴이다. 그러나 회심은 그 이상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회심은 단순히 죄된 세상과 사단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라면 너무나 협소한 것이 되리라. 회심은 우리들의 모든 비참한 과거 생활과 영적 타락으로부터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건짐을 받은 것이라는 면에서 보면 확실한 은혜임에는 틀림없다. 회심은 이 세상 신과 이 세상 임금의 비참한 속박으로부터의 건짐이요, 악한 자의 손아귀 안에 있는 헛되고 공허한 세상으로부터의 건짐이요, 한 때 우리를 휘어잡았던 사악한 세상 애착 즉 죄에 대한 사모와 죄된 행실로부터의 건짐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 문제점을 다루고 있는 모든 면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그러나 다시 반복해서 말하는데, 회심에는 그 이상의 것이 더 있다. 우리는 마음에서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한 댓가로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의문을 떠올리곤 한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모든 것을 부정만 하는 제도인가? 우리가 만일 이 세상과 나 자신과의 이음줄을 끊는다면, 또는 우리의 과거 쾌락과 오락을 포기한다면,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등진다면, 그 대가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데살로니가 전서 1:9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러한 모든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준다. 충분하고도 확실하고, 분명하고도 납득이 갈 만한 해답을 준다. 그 해답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는 말씀이다. 참으로 귀한 해답이다. 그렇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의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귀한 해답이다. 나의 과거라는 우상 대신 얻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 세상의 헛되고 죄된 즐거움 대신 무엇을 얻었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세상의 부와 영예와 세상의 우월감 대신 무엇을 얻을 것인가? 하나님이다. 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럽고도 완전한 대치인가? 탕자가 먼 나라에서의 넝마 조각 대신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바로 그것은 아버지 집에 있는 최고의 옷이었다. 돼지의 쥐엄 열매 대신 무엇을 얻었던가? 그것은 아버지께서 친히 예비하신 살찐 송아지였다. 먼 나라에서의 비참한 고역 대신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환영이었고, 아버지 자신의 품이었고, 바로 아버지의 식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복된 대치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항상 참 회심 속에 있는 두 면(곧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의 감동적이고도 인상적인 예를 탕자의 비유에서 쉽게 얻지 않는가? 이 비길데 없는 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멋진 회심인가! 얼마나 멋진 우상으로부터의 돌이킴이며, 하나님께로의 돌아감인가!" 감히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느 인간의 언어가 감히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품안에서 아버지의 온화한 사랑의 빛에 쏘임을 받는 그의 감정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헌옷, 쥐엄 열매, 돼지, 종살이, 냉냉하게 굳어진 자아, 궁핍, 기근, 비참, 도덕적 타락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영원히 없어졌다. 그 대신 이루 말할 수 없는 밝고도 행복한 가정의 기쁨과 게다가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주위에서는 축제의 즐거움이 되살아났고, 또한 그의 돌아옴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신 채워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예인가? 귀하고도 거룩한 사실에 대한 예이다. 하늘의 기준에서 볼 때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참 회심에 대한 예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헛되고 어리석은 세상 것의 포기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곧 그것은 하나님 앞으로의 인도됨이다. 고향으로 돌아옴이다. 아버지 품으로의 되돌아옴이다. 가정으로의 돌아옴이다. 어떤 틀에 박힌 메마른 공식 문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전능한 역사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지체, 하늘나라의 상속자에 대한 이야기다. 바로 이것이 참 회심이다. 독자들께서 충분히 납득하기 바란다. 이 위대한 사실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안일하게 있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흑암에서 빛으로의 돌이킴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세력과 우상 숭배로부터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 현재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강렬한 말 같아도, 복스럽게도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들어보자.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무엇이라고? 우리가 죽은 후에 하늘나라라고? 아니다. 지금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이다. 로마서 5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롬 5:10-11) 이것은 아주 중요한 원리이다. "돌이킴"이라든가, "하나님께로 돌아선다" 라는 말속에 함유되어 있는 모든 의미를 설명한다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힘든 일이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주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그분 자신의 온전하신 영접으로 하나님의 존전으로 인도하신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신임장으로, 그분의 미덕으로, 그분의 피의 대가로, 그분 자신의 가장 고귀한 이름의 향기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과 우리를 연결하시고 그가 갖고 계신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시고, 그분의 자격까지도 나누어주신다. 다만 하나님으로써의 그분 자신의 위치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것만은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온전하게 그분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니라"(요 14:19)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 15:11)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또 요한 복음 17장에서 신비스런 주님의 기도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본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6-10)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 17:14)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26) 자, 이제, 이보다 더 고상하고 더 축복스러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으리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그처럼 일치되고,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과 같은 사랑을 나누듯이 그분과 전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 그분의 평화, 그분의 기쁨, 그리고 그분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이 모든 사실이 한 피조물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이며, 특성인 것이다. 지옥 구덩이의 영원한 공포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것, 죄 사함 받는다는 것, 씻음을 받는다는 것,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 아담이 잃은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 등,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동일한 기초로, 동일한 특성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자비이며, 축복이며, 사랑의 배려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사랑과 호의 속에서 하나님께로 인도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아들의 위치와 동일하게 일치된다는 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의 전지 전능만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걸작품인 것이다. 자,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말하는 회심 속에 다 내포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엄청난 큰 은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그런 것이다. 비록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때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사악한 일로 마음에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라도, 여러 가지 정욕과 쾌락에 빠졌을 때에라도, 우상을 섬기고, 영적으로 눈이 멀었고, 죄와 사단의 타락한 종이 되었을 때에라도, 진노의 자녀로 곧바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때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중 최대의 선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축복과 사랑과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마음에 우리가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마음 자세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보다 뒤쳐지는 자리를 선물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일이 못된다. 영감 받은 사도 바울이 이 엄청난 은혜로 감탄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3-7) 여기 얼마나 깊은 사랑과 충만한 은혜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역사 속에서 영원히 하나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의 지혜에 알맞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배려로 자신의 은혜의 부요함을 보이신다. 우리의 죄사함, 우리의 칭의, 우리의 온전한 구원, 우리를 영접함, 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베푸신 것인데 이 모두는 이 광대한 온 우주 안에서 영원히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위치말고, 다른 위치에 우리를 둔다면 이것은 영광스런 하나님 자신의 요구에 미치는 것이 못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마음 속 사랑에 대한 만족한 해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두가 너무나 신비하다. 너무 훌륭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인간에게 대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즐거움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고귀해서 확고히 받아들이기 힘들 수는 있을는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 자신의 마음속 사랑에 따라 우리에게 역사 하시고 그리스도의 대가를 기초로 해서 활동하신다. 탕자는 품꾼 중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그럴 수 없었다. 집에서 종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아들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든지, 둘 중 하나다. 만일 행한 공적에 따라 대우한다면 우리는 아들의 위치는커녕 종의 위치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전혀 우리의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의 이름에 따른 것이다. 바로 이것이 회심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로 인도되었다. 이보다 못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단순히 우상에서 돌이켜, 그것들이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는 실제로 바로 하나님 존전에 인도된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기쁨을 만끽하고, 그와 동행하며,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생수를 찾으며, 소멸되지 않은 근원으로 인도되며,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그분 안에서 찾으며,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은 만족하게 되고, 또한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가 우상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절대로 안된다. 과거의 우리의 대상물을 갈망하고 따라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분깃을 깨닫는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에서, 아버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아버지의 상에 같이 앉아 있으면서 돼지나 쥐엄 열매를 찾았던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고, 믿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탕자가 복된 사랑의 가정이라는 밝고도 거룩한 곳에 자신이 살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먼 나라를 한숨 지며 바란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말하고 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돌이켰다고 고백하고, 잠시동안은 그것을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금방 그들은 열의가 식어지고 지치고 만족을 잃는다. 그들 내면의 역사는 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진짜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된 것이 아니다. 우상은 잠시 포기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관련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그들 마음에 만족을 찾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참 교제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의 만족감과 심령의 안식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간이 흐름을 따라, 그 가련한 심령들은 세상을 한번 더 바라게 되고, 그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평상시보다 더 많은 탐욕으로 어리석게도 헛된 것에 몰입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슬픈 모습이다. 매우 실망스런 모습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오히려 보다 큰 비난을 퍼붓는다. 그리고는 사단의 옹호자가 되어 회의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회심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떠나 버린다. 참으로 회심한 심령은 단순히 이 악한 세상에서 헛된 꿈과 기만을 버리고 떠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서나 영원한 곳에서나 원하는 모든 진실 된 것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거룩하게 세상과 분리된 사람이다. 영원히 세상과 끊어진 사람이다. 그의 눈은 철저하게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 자신이 이미 세상을 심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준으로 이미 세상을 측정한 사람이다.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저울로 세상을 달아보았고 세상에 대하여 영원히 등을 돌린 것이다. 대신, 저주받은 나무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진지하고, 당당한 목적을 찾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은 바로 그를 구원키 위함이요, 영원한 불못에서 구원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승리케 위함인 것이다.
-------------------------------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6) 6. 내 영혼아 하나님만 바라라. 데살로니가 전서 1:9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깊고도 충만한 신비의 능력에 감동을 받게 된다. 그것은 마치 광맥을 집어넣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잠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는 풍요롭고도 암시적인 구절을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진정 그 말씀 속에 있는 능력과 충만함을 이해하고 있는가? 한 심령이 하나님께로 인도된다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연약하고, 필요할 때마다 그분을 우리의 방패와 능력으로 안다는 것, 우리의 인도자와 조언자로 안다는 것, 우리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로 전적으로 다가가서 전적으로 그분만 의뢰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당신은 심령 속에서 이 모든 깊고도 오묘한 축복을 알고 있는가?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자녀이고, 진정으로 회심한 심령이라면 그 회심을 안다는 것은 당신의 즐거운 특권이요, 따라서 그 회심 없이는 한시라도 기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면 이 세상이나 영원 속에서 우리의 필요를 그분 안에서 찾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심령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세상에는 없다. 우리가 만일 온 우주의 부요를 다 소유하고 그 부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취한다 할지라도 해 아래서는 다 채워지지 않고 오직 고통과 공허만이 남게 될 것이다. "나 전도자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내가 마음 가운데서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 깨달았도다."(전 1:12-17)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 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 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1:18-2:11)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에 의해 기록된 모든 것은 그런 시들어 가는 말뿐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모든 술잔과 세상 즐거움은 쓰레기 같이 소모되도록 허락된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 되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 도다."(전 1:8) 가련한 인간의 마음은 세상 것으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영원성을 지닌 인간의 심령의 목마름을 세상 것으로 채워 주지 못한다. 물질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물질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모든 인간의 심령에서 증명된다. 조만간 모든 사람이 철저히 드러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귀머거리 귀를 지금 그런 진리의 말씀으로 돌이킬 수 있다. 반대로 성령님의 음성을 거절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이 가련한 세상이 실질적인 위안과 행복을 줄 수 있다는 망상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세상의 부요와 명예와 공덕과 쾌락과 물질적 위로에 열심히 몰두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너무 늦게 깨닫는 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누가 복음에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눅 16:19 이하 참고) 그 부자와 같이 지옥에서 눈이 열린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는가? 하나님의 존전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하는 한 심령의 공포를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밖에 어두움에 버리워져 이를 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깨달아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지옥에서 고통의 불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한 가닥의 소망의 빛조차 없이 영원하고도 깊은 해결할 수 없는 어두운 구렁텅이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것인가? 오, 그런 사람은 아마도 조만간에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닥쳐올 심판에서 도망했을 것을, 복음으로 눈앞에 온 은혜의 소망을 붙잡았을 것을, 일찌감치 하나님께로 돌이켰을 것을" 그러나 슬프게도 이 세상 신은 그들의 마음을 가렸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사단은 그들을 세상 것에만 몰두하게 했다. 사업이라든가, 돈벌이, 쾌락, 세상 걱정, 정욕 등 세상 모든 일에만 몰두하게 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복음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게 했다. 이 복음과 비교해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은 저울 위에 티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잠시 본 주제에서 벗어난 것 같다.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특별히 성도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 안에서 모든 자원을 찾아야 함을 강조하는 바이다. 우리는 잠시 주제에서 벗어났는데 실은 회심하지 못하고 무관심한 사람이 혹 이 글을 우연히 읽게 될 때 그의 귀에 경고의 말을 주기 위함이다. 우리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간청하는 바이다. 그리고 회심한 성도들에게는 은혜로 돌이켜 주신 그분 하나님과 더 깊은 친교를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회심'이라는 제목 하에서 이 글을 쓰면서 우리 앞에 두 가지 일이 놓여 있음을 안다. 곧 회심하지 못한 심령들은 하나님께 회심하라는 것과 이미 회심한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라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 안에서 찾은 심령의 평안한 생활을 매일 살아가면서 그 실제적인 회심의 중요성에 대해서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그러한 확신 있는 생활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는 매우 기이한 모습으로 비치게 된다. 사실 그러한 확신 있는 생활은 이 세상에 담대히 말할 수 있게 될 때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비법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얻은 것을 지속적으로 감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에게 기대려는 강렬한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할 것이며, 우리가 다소 탄식하며 얻은 세상 것에 우리를 매달리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세상 것들은 우리에게 실망만 주었고, 하나님을 경멸하게 했던 것들이다. 우리는 동정과 도움과 상담을 위해 하나님께 직접 매달리기보다는 사람을 찾는 경향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것은 정말 심각한 실수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요, 담을 수 없는 물통마저 우리 스스로 부셔 버리는 격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결과는 불모와 황폐뿐이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우리에게 실망만 안겨 준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왜냐하면 사람의 팔에 기댄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터득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살펴보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렘 17:5-6)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다음의 말씀을 보자.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니라"(렘 17:7-8) 살아 계신 하나님의 팔에 의지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찾고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어떤 환경에서나 우리의 자원을 그분 안에서 찾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믿는 마음에는 결코 실망을 주시지 않는다.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이후에라도 실망을 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응답을 우리로 하여금 계속 기다리도록 하신다. 그러나 그 기다림 속에서 시간이 흘러 때가 되어 응답이 임하게 되면, 우리 마음은 찬양으로 가득 차게 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19)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위급할 때마다 그분은 우리에게 충족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인 사실이어야 하고 단순히 말로만의 고백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연약한 인간에게 기대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이것은 슬픈 기만술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런 기만술에 빠지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람을 찾고 있으며, 또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의 부족한 것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고, 또한 하나님을 불 명예롭게 한다. 그 결과는 실망과 혼돈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좀더 솔직하게 살펴보자.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는 귀한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정말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 구절 속에는 참 행복과 참 거룩의 본질이 있다. 심령이 참으로 하나님께로 실질적으로 돌아올 때는 참 진리와 참 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과 안식과 온전한 만족을 알게 된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 품속에 있는 것들이다. 거기에는 피조물을 의지하려는 어떤 기회도 있을 수 없다. 나는 혹 혼돈 속에 있지는 않은지? 나는 나의 길 인도를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다. 그분은 자신의 눈길로 나를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얼마나 완전한 인도함인가! 어느 인간이 나를 위해 이보다 더 훌륭한 인도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을 한번에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거동을 알고 계신다.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모든 문제의 근원과 결과를 알고 계신다. 그분은 실수 없는 인도자시다. 그분의 지혜에는 오류가 없고 게다가 그분은 나를 완벽하게 사랑하신다. 어디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인도자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나는 부족하단 말인가? 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소유주시다. 우주의 모든 보물이 그의 섭리 속에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에게 유익된 것이라면 주실 것이다. 만일 그 반대라면 안일함보다는 오히려 고통이 나에게 유익될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왜 피조물을 찾아야 하는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우리의 부족함을 인간에게 가서 찾아야 하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실제로 믿음의 기초를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을 단순히 의뢰하는 생활을 포기하는 것이리라. 그것은 실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불명예롭게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은 나를 실망시키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그것은 나의 몸과 혼과 영을 택하시어, 세상에서나 영원한 세계에서도 나를 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배신하는 꼴이 된다. 그분은 스스로 나의 부족을 예비하시겠다고 맹세하셨다. 비록 그 예비물이 아무리 많고, 아무리 크고,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말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그분의 말씀은 이렇다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물론 하나님은 피조물을 사용하시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다. 축복 받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고후 7:6) 바울은 위로를 위해 하나님을 찾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디도를 보내어 바울을 위로하셨다. 만일 바울이 디도를 바랬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다른 모든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유일한 언급은 하나님을 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라는 말씀뿐이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위급한 때에라도 그분은 우리의 확실한 자원이 되신다. 우리는 동정을 위해서도, 기타 모든 것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 하리로다"(시 62:5-6) 이렇게 하나님만 찾는 가장 축복된 습관이 그분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사람을 무가치한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서 그분의 분명한 도구로 사용되어 나에게 전달자로 오는 사람을 어떻게 무가치하게 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통로로 사용되는 그 사람을 내가 의뢰할 자원으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통로로만 가치 있게 보는 것이다. 이것으로 모든 것은 분명해 진다. 회심의 참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로 인도된다면 그것은 그분 안에서 우리의 완전한 가리개(covering)를 찾기 위함이요, 우리 마음의 완전한 대상을 찾기 위함이요, 시종 우리의 위급한 때를 맞아 완전한 자원을 찾기 위함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두자. 참으로 회심한 심령은 모든 피조물을 의뢰함으로부터, 또는 인본적 소망으로부터, 그리고 세상 성취로부터 돌아서서, 살아 계시고, 참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와 자신의 모든 부족함을 찾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하리라. 7.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는 지금 "회심"이라는 제목의 실제적인 면을 깊이 상고함에 이르렀다. 데살로니가전서 1:9에는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라는 말씀도 있다. 이 말씀은 진실로 회심한 모든 진실한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깊은 흥미를 준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전 생애는 회심의 순간부터 생이 끝날 때까지 진실된 영과 진실된 열심과 진실된 지적 봉사로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귀한 우리의 특권이며, 때문에 신성한 의무가 있다고 말로만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의 문제도 아니며, 어떤 생활 수준의 문제도 아니며, 또는 어떻게 우리가 부름을 받았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회심되었을 때 꼭 한가지 실천할 일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의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을 추구하거나, 하나님의 직접 가르침인 말씀에 위배되는 일을 찾는다면 그 즉시 우리는 그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말이다. 충실한 종의 그 첫 단계는 어떠한 위선에서도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바로 이 기준에서 시험을 거쳐야 한다. 기독도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아야만 한다. 즉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금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포기되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생애에서 우리 자신의 부름을 하나님의 명예와 연결할 수 없다면 비록 우리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할지라도, 또는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는 자로 발견되기를 바란다 할지라도 단연코 그 부름은 포기되어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길을 열어 주시기를 바래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자. 하나님은 믿음의 심령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우리의 할 일은 심령에 목표를 갖고 하나님께 몰두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앞에 평탄한 길을 열어 주신다. 처음에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 길은 좁고 험난하고 외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을 위해 기다리는 것뿐이다. 단 한시라도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반대되는 어떤 것과도 연관되어서는 안된다. 온순한 양심과 성실한 눈과 헌신적 마음은 많은 문제를 안정시킬 것이요, 많은 어려움을 해결하고, 많은 장벽을 무너뜨릴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본성이 움직이도록 허락만 된다면 많은 당혹함 속에서도 잘 인도해 주실 것이다. "눈은 마음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우리 심령의 목표가 진실하게 그리스도께 있고, 진실하게 그분의 이름과 주장에 있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긴다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귀한 계시의 보고를 활짝 열어 생명의 빛을 흠뻑 부으면서 납득시키실 것이다. 그러함으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태양 광선처럼 명쾌한 길을 보게 되고, 확고한 걸음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순간이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회심되었다는 귀한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생명의 열매는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우리가 회심하지 못했을 시절에는 우상을 섬겼고, 여러 가지 정욕과 오락에만 심취했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로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속죄된 온전한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이켰고,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안식과 만족을 찾은 것이다. 이 세상의 시간 속에서나 또는 영원한 곳에서도 피조물을 바랄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얻을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새 생명의 소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모든 보물을 저장해 두셨다. 믿음으로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가 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며, 사랑 안에 뿌리박고, 사랑 안에 기초를 두어 성도들과 함께 그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알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지혜를 전해 주시며, 그분으로 인해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우리 안에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충만하고, 만족하고, 강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김에 온 영과 혼과 육을 바칠 수 있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견고하며, 요동치 않고 항상 주님의 일에 만족하게 쓰임 받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다른 할 일이 없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로 실천될 수 없는 어떤 일이라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말이 놀랍게도 모든 문제를 단순하게 한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즐거운 권리이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부름과 정반대 되는 세속적 부름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때때로 듣곤 한다. 그것이 참 공덕인지 아닌지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된다. 바울은 천막을 만들면서도 한편 교회를 세웠다. 그는 양편(천막 만드는 일과 교회를 세우는 일) 모두로 주 예수님을 섬겼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일은 거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말이 마음에 진실로 간직된다면, 이 말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일상생활의 가장 단순한 일에도 주님 자신과 연관을 맺게 한다. 그럴 때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의 일에 가담하시어 거룩한 위엄을 부여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관심을 가져 주신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에서 방해 거리를 찾기보다는 오히려 그 일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한 실제상의 지혜와 은혜를 찾아 주님을 시중드는 일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의 거룩한 이름은 우리의 가장 작은 실생활에서도 영광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한 문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해진 행동반경의 범주를 넘어 어떤 신비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부를 예로 들어보자. 어떻게 그녀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그녀는 심방도 못하고 대화도 나눌 수 없다. 그녀의 행동 범위는 집주인의 그늘에 있어야 하고, 만일 그렇지 못하면 집주인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만일 그녀가 이 집, 저 집을 심방만 한다면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며, 실제로 하나님의 정해진 일을 거부하는 격이 된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들어보자. "종들로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떼어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딛 2:9-10) 우리는 여기서 종이 복종과 겸손과 정직함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자신의 믿음 정도에 따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복음 전도인이 거룩하고 고귀한 자신의 사명에 따라 세계를 두루 다니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또 다른 성경 구절을 보자.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말고, 그리스도의 종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 6:5-8) 이 얼마나 사랑스런 모습인가! 이 얼마나 멋진 종의 모습인가! "두려워하고 떨며"라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오늘날 어디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어디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거룩한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성한 눈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디에 자원하는 섬김의 마음이 있겠는가? 슬프게도 오늘날 고집과 교만한 마음과 자고와 자기 기쁨과 자기 유익만을 위하는 자만을 보게 된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주님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며,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일인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부름 받은 자 같이 우리를 다듬어 갈 모든 감각에 절실히 눈뜰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위의 말씀은 모든 진실한 기독도들에게는 가장 흔한 가정 일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며 영광을 돌려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은혜의 신호등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대부분의 기독도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 마음에 있는 실제적인 진리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정부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영광을 낮추시어 우리의 매일의 가정 생활에서의 맡겨진 조그마한 일과도 연결하신다는 사실을 은혜로 알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것은 마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우리의 모든 작은 일에도 하나님은 위엄과 유익과 원기를 주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7) 여기에 모든 문제의 귀중한 비밀이 담겨 있다. 급료를 위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주님을 섬기기 위한 일이다. 이는 하늘의 보상을 유업으로 받기 위하여 주님을 바라보는 자세이다. 오, 이 모든 것이 보다 충실하게 깨달아지고, 우리 가운데서 보다 드러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만 됐더라면 전 기독도 생활에 영적 고상함이 있었으리라! 그렇게만 됐더라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좋은 해답을 주었으리라! 모든 사람에게는 비웃음과 흠잡기가 얼마나 맥없는 비난인가! 기독교인들의 영적 고상함이 수만 명의 지식인들의 논리보다 훨씬 낫다. 열심 있고, 헌신적이며, 거룩하고, 즐거운 자기 희생의 기독교인들의 생활보다 더 강렬한 표현은 없으리라. 그리고 이런 생활은 4면이 벽으로 둘러 쌓여 있는 좁은 부엌에서 생활하는 진실한 기독도 가정부에 의해서도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진실한 기독자의 실생활은 회의주의자나 불신자들에게 가장 올바른 가능성 있는 해답을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막고 기독교인들을 법 아래로 집어넣으려는 자칭 법통들에게는 가장 만족스런 해답을 준다. 하나님의 사역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도전적일 때, 우리는 단순하게 이렇게 말하게 된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말로 설교해야 하겠는가?"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악한 일"과 "죽은 행실" 외에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골 1:21, 히 6:1) "육신에 있는 자들(회심하지 못한 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그들이 어떤 그럴듯한 방법으로 참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설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방법은 오직 사람들의 눈에 티끌만 더할 뿐이요, 사람들의 마음 눈을 감기게 할 뿐이요, 사람들의 심령을 속일 뿐이요, 손에 거짓 가르침을 들고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뿐이다. 하나님께 향한 참 회심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이다. 무엇이 회심자로 하여금 그렇게 될 수 있게 할까? 그는 생명을 얻기 위해 또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새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은 하나님의 값없는 영원한 선물인 것이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을 행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는 부름을 받았단 말인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언제? 어디서? 그 해답은 어떤 방법으로도 가능하며, 항상 실천할 수 있는 것이며, 어느 곳에서도 되는 일이다. 회심한 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만일 그가 다른 어떤 것을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진짜가 아닐 것이요, 은혜의 주님에 대해서는 불신자일 것이다. 주님은 섬기는 일을 위해 부르시기 이전에 먼저 그에게 새 생명을 주었고, 은혜를 주었고, 능력을 주셨다. 그러므로 섬기는 일만이 허락되는 것이다. 그렇다 기독교인는 섬기기 위해서 부름을 받는다. 이 사실을 잊지 말자. 기독교인에게는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거룩하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도록 드릴 권리가 주어졌다. 이것이 합당한 예배다.(롬 12:1) 이런 모습이야말로 모든 의문점을 해소시킨다. 그런 모습이 모든 어려움을 제거한다. 그런 모습이 모든 대적을 잠잠케 한다. 그런 모습이 모든 것을 제자리에 안정시킨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어느 곳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다. 신약 성경에 보여진 기독 신앙은 믿는 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열매인 것이다. 그것은 기독도의 매일의 생활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가 재생되는 것이다. 기독도가 만지는 모든 것, 그가 행하는 모든 행위, 그가 말하는 모든 말, 그가 살아가는 전 생활이 주일 아침부터 다음 토요일 저녁까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라는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어야 하며,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의 영에 감동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바램은 성도들의 생활이 보다 훌륭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주님의 사랑하는 성도들이 어디서든지 성령님의 감동 속에서 보다 열성적이고, 철저하고, 온 마음이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자세가 되어 주님에 대한 귀한 섬김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8. 당신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데살로니가 전서 1장 마지막 절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그 구절은 매우 확실하고 강력한 어조로 데살로니가에서의 뚜렷하고도 충만한 사도 바울의 깊은 이해력있는 증거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곳 데살로니가의 새 회심자들 속에 있었던 밝고도 실제적인 믿음 생활을 드러내고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살아 계시고 참 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이것은 은혜로 행한 것이었다. 또한 특별한 능력과 원기와 열의로 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믿건데 그보다 더한 것이 또 있었는데 곧 만일 이것이 없었더라면 사랑하는 성도들의 회심과 신앙 속에서 엄청난 결함이 있을 뻔했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돌이켜 회심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바로 이 사실에 깊은 관심을 두기 바란다. 밝고도 복된 주님의 재림의 소망은 바울 사도의 설교 속에 있는 복음의 진지한 부분이며, 또한 그의 복음 사역으로 말미암아 회심한 사람들의 내적 신앙의 성실한 부분이기도 하다. 축복의 종 바울은 온전한 복음을 전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위대한 일을 성취했음을 전파함과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그 계획의 영원한 기초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주께서 하늘에 올라 하나님 우편에서 승리의 자리에 앉아 성도들을 드높이고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사실도 설파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오신다고 전했다. 첫째는 자기 백성을 자신에게 이끌어 하나님 아버지의 집 깊숙한 곳에 거하게 하기 위함이요,(그 장소는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그 후 그들과 함께 지상에 오시어 원수들을 심판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왕국으로부터 불법을 행하는 대적자 모두를 끌어내고 자신의 영광스런 통치를 땅 끝까지 이루기 위함이다. 이 모든 내용이 사도 바울이 전한 귀한 복음 속에 있다. 데살로니가의 회심자들은 바로 그 복음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사도행전 17장에서 간접적이지만 매우 흥미 있는 이 복음의 내용을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영감 받은 기자는 불신의 유대인들이 바울의 설교에 대해서 어떻게 반대하고, 평가한 내용을 기록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행 17:5-7) 이것이 주의 종들의 설교를 들은 불신자들의 불쌍하고 무식하고 편견적인 생각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생각 속에서 위대하고 엄숙한 진리의 요소를 볼 수 있는데 즉 환경에 따른 세상 제도의 완전한 멸망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의 설립이다.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겔 21:27) 그러나 주님의 재림과 왕국이 사도 바울의 설교 속에서 당시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교훈이 현재에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는 점이다.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이러한 축복된 소망으로 돌이켰을 뿐만 아니라 그 소망 안에서 섰고, 안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매일의 삶을 그러한 밝은 소망 안에서 사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한 신조의 부분으로만 받아들이기 위한 건조하고 메마른 어떤 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실상이요, 심령 속에 있는 강력한 영적 능력이었다. 즉 이 세상에서 완전히 마음을 분리시킨 어떤 귀하고 흠 없는 거룩하고도 지고한 소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순간 순간 밖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 다시 강조하는데,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이었다. 데살로니가 전, 후서에는 다른 서신에서 합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계시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전, 후서가 바울 서신 중에서 가장 초기의 글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주목하게 된다. 그 서신서들은 신앙 면에서 어린 모임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독자들께서 이 두 서신을 단번에 읽어보면 8개의 각 장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기록되어 매 장마다의 주제와 연관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제 1장에서는 주의 재림이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항상 보존되어 마음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주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에서의 긴 여정의 끝에 가서는 찬란하게 빛나는 빛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 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기다린다고 말하니"(살전 1:9-10) 무얼 기다린다는 말인가? 자신들의 죽음을? 아니다. 그러한 내용이 아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은 없어졌다. 죽음은 신자들의 소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무얼 기다리라고 가르침을 받았던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살전 1:10a) 그렇다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 주목하시라.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b) 이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구주시며, 위대한 구속자의 인격이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비참함을 담당하신 분이며, 우리를 위해 영원하신 심판자의 손길로부터 진노의 잔을 받아 영원히 비워 버리신 분이시다. 그분은 모든 구름을 제거하셨고, 그리함으로 우리는 그 구름 너머에 있는 천국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고 영원 속을 끝없이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찬란한 영광과 축복만을 바라보게 되었고, 이는 마치 끝없는 행복을 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 은혜로우신 구원자의 재림을 아침,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밤까지 바라보며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인 구주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실상인가!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 그 날의 일을 시작하면서, 비록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때로는 마루를 닦는 일일 수도 있고, 복음을 설파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밝고도 복된 소망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 얼마나 구별되고 고상한 것인가! 저녁 어두움이 우리를 엄습하기 전에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주님의 재림을 맞이한다는 것은 너무나 거룩하고 구별된 일이다. 이것이 광신자의 꿈이고, 열광자의 환상이겠는가? 아니다. 이것은 소멸될 수 없는 진리이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가장 귀한 기독 신앙의 바로 그 기초 위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의 인성을 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밟으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분께서 이 땅에서 가련하고 타락된 인간들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며 일하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분이 죄가 들끓는 이 황폐한 세상의 감각으로 한숨짓고, 눈물을 흘리시며 신음하였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분이 십자가를 지고,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을 옹호하셨고,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셨고, 마귀의 역사를 멸하시고, 지옥의 모든 권세를 공개적으로 보이셨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려 원죄를 소멸하시고, 역사의 시작부터 은혜로 하나님의 이름을 믿게 되는 모든 사람들의 자범죄를 짊어지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사흘 밤, 사흘 낮을 땅 속에 누이셨고, 주의 첫날에 무덤에서 일어나 죽음을 이기시어 새로운 피조물의 머리가 되시고, 최소한 오 백 여명의 증인들에게 보이신 후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부활 후 50일 만에 성령을 보내어 사도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여 땅 끝까지 그분의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오순절로부터 지금까지 그분이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대언자가 되시어, 곧 거룩한 대제사장이 되시어 우리의 죄와 허물과 부족함을 위해 중보자로서 우리의 모든 연약성과 슬픔을 동정하시며, 지속적으로 우리의 기도와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려 아름다운 향기를 흠향케 하시는 것이 사실인가? 이 모든 것이 사실이며, 진실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 모두가 틀림없는 사실이며, 이것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놀랍게도 확실함과 충만함과 함께 심도있게 능력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모두가 바로 성경의 확고한 기초가 된다. 이 기초는 어떠한 세상의 권세라도, 또는 지옥의 권세라도, 또는 인간과 마귀의 어떤 권세라도 방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자, 이제 주님의 재림의 복된 소망도 정확하게 위와 같은 권위에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로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신 것이 사실인 것처럼, 자라서 어른의 신분이 되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무덤에 누이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하늘의 위엄의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주께서 주의 백성을 자신에게 영접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주님은 오늘밤에 오실 수도 있다. 그가 언제 오실런지 아무도 모른다. 그건 어느 때고 오실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그분께서 지체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1800년의 오랜 기간 동안(필자는 1820년에 태어났다) 주님은 식을 줄 모르는 사랑과 자비와 동정심으로 기다려 오셨다. 그 모든 기간 동안 온전한 구원이 드러나기를 예비하셨고, 동시에 심판도 예비하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오랜 고통과 인내로 기다려 오셨고, 지금도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언젠가는 도적같이 주님은 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오심을 소망하고 항상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러한 마음 자세로 살 것을 가르쳤다. 사도 바울도 실은 그렇게 살았다. 복된 재림의 소망은 그의 매일의 생활 습관과 감정에 긴밀히 밀착돼 있었다. 그것은 그의 노고의 매일의 생활 습관과 감정에 긴밀히 밀착돼 있었다. 그것은 그의 노고의 열매였던가?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바울은 그들 모두를 그때 그곳에서(주님의 재림 때) 만나기를 바랬다. 어느 원수도 그 모임을 방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 2:18) 매우 기이한 일이고, 괴기한 일이다! 그때도 그랬었다. 사단은 다니엘의 시대에도 자기의 임무대로 하나님의 천사를 방해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간절히 보기 원하는 일에도 방해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가 즐겁게 모이는 그 모임은 방해할 수 없다.(하늘의 모임을 말함-역자 주) 그 모임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순간일까! 얼마나 귀한 결합일까! 얼마나 달콤한 만남일까! 얼마나 멋진 오랜 친구들의 인사가 될 것인가!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욱 멋진 것은 주님 자신이다. 주님의 미소야말로 최고의 멋짐인 것이다. 바로 주님의 환영이다. 주님의 감동어린 "참 잘 했노라"라는 말일게다. 이 얼마나 귀하고 심령을 감싸주는 소망인가! 복된 사도의 생각과 가르침 속에 있는 그 엄청난 장소에 대해서 우리는 놀랄 필요가 있겠는가? 사도는 지난 모든 경우를 회상하며 모든 주제와 연관시킨다. 그것은 구별된 생활과 실제로 경건으로 이어지는 문제인가?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이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2-13) 독자들이여, 특별히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마지막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자.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이 얼마나 감탄할만한 지혜가 비치고 있는가! 사도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친구들(성도들)로 인해서 실족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오류에 대해서 직접 관여하려 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미 자는 자들이 주님 재림 때 만남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의 오류는 다음의 짤막한 문장으로 완전히 해소되고 있다. 즉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이다. 한 사람도 그 기쁨의 만남과 잔치에서 누락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복된 확신이다! 이것은 현재 살면서 보이는 것 이외에는 아무도 주님의 재림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승리적 해답인 것이다.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비록 그들이 무식하고, 실수 많고, 방황하고, 넘어지고, 연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복된 주님인 우리 심령의 영원한 사랑 공급자는 그 복된 순간에서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내어쫓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한량없는 은혜로 인해서 우리는 신앙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살게 될 것인가? 아니다. 그 은혜는 항상 내재하는 지각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의 모든 것을 판단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에 거슬리는 우리 자신의 모든 방법을 분별할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이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 주님의 재림의 소망 역시 마음 속에 밝고도 생생하게 간직되어 진다면 틀림없이 우리의 성품과 우리의 생활을 깨끗하고, 거룩하고, 고상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렇게 해주지 못한다. "자기 안에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주께서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케 하느니라"(요일 3:3) 사람이 어느 때고 주님 맞이할 소망으로 살아가면서 그의 마음이 세상일에 집착하고, 돈버는 일이라든가, 자기 멋대로의 행동이라든가, 오락 등 헛되고 어리석은 일에 마음이 붙잡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자. 우리가 하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매일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면 시간 속에서의 피부적 감각 생활에는 좀 느슨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의 재림을 지식으로 단순히 교리로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에나, 성격에나, 실생활 속에 아무런 효과도 미치지 못하면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예언의 진리를 단순히 지식으로만 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귀한 보혈로 우리 죄를 씻어 주신 주님을 맞이할 밝고도 복된 소망으로 가득찬 모든 영적 실재와 실질적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다. 우리 속에 이러한 일들이 허다하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참되고 적절한 소망의 능력을 이처럼 잃고 살아가고 있음은 심히 두려운 일이다. 주님 재림의 진리는 우리가 쉽게 거론할 수 있는 단순한 교리로만 받아들이기에 매우 익숙하다. 때문에 우리는 재림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서 토론도 하며, 사람들과 논쟁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확실하게 잡았다고 고백하는 신앙에다 거짓된 우리 자신의 세상적 태도와 마음과 세상적 기질을 더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 주제 하에서 슬프고도 비참한 우리의 단면을 더 추구하지 않으련다. 주께서 우리를 살피사 은혜로 치유하시어 우리의 심령을 높여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망을 적절하게 재생시켜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은 찬란한 새벽 별을 맞이할 소망이리라.(벧후 1:19참조)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명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이 "아멘 주여 어서옵소서" 라는 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이 글을 끝맺어야겠다. 우리는 독자들과 함께 두 서신서(데살로니가 전, 후서)를 통해 데살로니가인들이 돌이켜 주님의 재림의 소망을 갖게 됨이 곧 사도 바울의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면으로 또한 기독자의 생활 양상으로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건대 참 회심으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한다면 복된 주의 재림의 소망은 절대로 중단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드러냈다. 참 회심자는 우상에서 돌이켜 즉 세상과의 연관을 끊고, 또한 옛 자아와 관계를 끊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이 생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나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발견하여, 그만을 섬기며 결국에는 하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자다. "참 회심이란 무엇인가?"(Conversion, What is it?) 라는 질문에 대한 참되고 적절한 해답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당신은 참으로 돌이켜 회심했는가?(즉 당신은 참으로 구원받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일 당신이 회심했다면 당신의 생명은 지금 그 회심(구원)을 선포하며 살고 있는가? ........................................ 어떤 때는 구원받은 것 같고…… 어떤 철학자는 자기의 고민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태어난 이상 누구나 꼭 한 번은 죽어야 하는데, 지금 나는 살아 있는 그것이다". 그렇습니다. 흐르는 물에서는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이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며,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어떤 사람에게는 갑자기,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서서히 다가오지만 그 어떤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죽음 저편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을 뿐 그 중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을 뿐, 그 중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중간에서 머뭇거리는 것이나(왕상 18:21),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것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고 계십니다(계 3:16).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든지, 멸망을 받아 지옥에 가든지 둘 중의 하나에 속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입니까? 다행히 구원을 받아 아름다운 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히 기쁨을 누린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만, 만약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드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지옥에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처럼 두렵고 기가 막힌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 일이 이렇게 중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구원받은 것 같고, 또 어떤 때는 구원받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때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며칠 전,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집사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 저는 오래 전부터 예수님을 믿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예, 예수님은 저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을 진실로 믿으십니까?" "예, 저는 진실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으시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이제는 죄인이 아니죠?" 그 집사님은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저는 하나님 앞에 늘 부족한 죄인입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대신하셨다면 왜 또 죄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믿을 때까지의 죄는 용서해 주셨지만 그 후에 짓는 죄는 항상 회개함으로서 받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죄인으로 계십니까?" "예, 저는 그래서 날마다 새벽이나 집회시간에 나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심히 겸손한 모습으로 허리를 굽히며 말했습니다. "집사님은 모든 죄를 다 회개하셨습니까?" "………"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심령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못한 죄는 하나도 없습니까?" "……(작은 목소리로) 회개하지 못한 죄가 조금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주님이 오신다면 주님 맞으실 확신은 있으십니까?" "지금 죽는다면 하늘나라에 가실 확신은 있으십니까?" 저는 다시 한번 확실하게 물었습니다.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아니면 못 받으셨습니까?" "(자신이 없는 목소리로) 어떤 때는 구원받은 것 같고, 어떤 때는 구원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집사님은 구원받지 못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저편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을 뿐 중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죄가 한 호리라도 있다면 지옥에서 결코 나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6)".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 이러한 어정정한 믿음을 갖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함정은 회개하면 죄가 용서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가장 악랄한 사단의 도구입니다. 회개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죄를 용서받는 도구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강도짓을 하다 붙잡힌 한 죄인이 재판관 앞에서 통곡을 하며 자기 죄를 회개하고 뉘우쳤습니다. 그러면 재판관이 그 죄인의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것을 보고 그를 용서해 줍니까? 그 죄인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 죄 때문에 형벌 받아야 하는 것은 또 다른 별개의 문제입니다. 재판관은 법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하여 판결할 것입니다. 그 죄인은 자기의 눈물과 회개에 상관없이 법에 따라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후 그 사람이 형량을 다 마치고 나오면 재판관이 또 그를 잡아다 재판을 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죄 값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재판관 앞에서도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 용서는 회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롬 6:23).죄의 삯에 대하여 다른 것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죽음과 영원한 형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상충되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공의도 이루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구원도 주시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요일 4:9,10).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심으로 바로 우리가 죽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른 것이 되었으며 죄 값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는 죄로 인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나쳐 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때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난 죄는 용서되었으나 이후부터 범하는 죄는 자기 자신이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가 용서되는데 그 주님의 십자가는 지금부터 1,900여 년 전의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를 기점으로 볼 때 우리의 죄 중에 주님의 십자가로부터 미래의 죄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현시점에서 볼 때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있지, 1900여 년 전의 그 갈보리 십자가에서 보면 모두가 미래의 죄입니다. 그런데 어떤 건 용서받고 어떤 건 용서받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죄도 주님의 십자가에서 보면 미래의 죄입니다. 그러나 그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롬 3:24)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생애의 모든 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골 2:13). 이제 모든 것은 확실해졌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못 받은 것 같기도 한 것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기의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이며, 구원받은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 저의 모든 죄를 책임져 주시고 해결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님께서 저의 영원한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주님을 마음에 영접해 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제 "나도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 가운데 기쁨으로 주님을 기다리시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의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OK냐? OP냐? 어느 날 공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좌석 체크를 하고 수속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쪽 편에서 소동이 있어 가서 보니 어떤 젊은 부인이 통사정을 하며 비행기를 타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지금 저쪽 공항에 자기를 맞기 위하여 남편과 아들이 나와 있으며, 지금 가지 못하면 모든 일을 그르친다며 간곡히 부탁했지만 공항 직원은 도저히 이 표로는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표는 OP표였습니다. 그 부인은 표를 살 때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비행기표에는 OK표와 OP표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표는 생김새도 똑같고 금액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글자의 차이는 참으로 큰 것입니다 OK표는 자석이 확실히 예비되어 있는 것으로 항공사 측이 그의 탑승을 보증하는 표입니다. 그러나 OP표는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 없을지 그때 가 봐야 아는 표입니다 OP표는 OK표를 가진 사람이 무슨 일이 갑자기 생겨 가지 않을 때를 예상하여 파는 대기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OP표를 가지고는 자기가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 늘 불안하고 초조해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나라에 가려 하지만 이 OP표를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늘나라에 가게 될지 못 가게 될지는 그때 가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을지 지옥일지 그때 가 봐야 안다는 것처럼 불안하고 두렵고 초조한 것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비행기야 못타면 다음 비행기를 탈 수도 있고 또 비행기를 못타면 배를 탈 수도 있지만 이 하나님의 심판은 단 한번에 결정되는 것이니 세상에 이처럼 크고 무서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갈지 못 갈지 그때 가봐야 안아는 사람은 바로 OP표를 가진 사람과 같으며 그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 행위가 심판 때 인정받아서 구원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마태복음 7장 22,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기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또 누가복음 13장 25-2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이 사람들은 다 자기의 행위를 의지한 사람들로서 영원히 쫓겨남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에 대한 보증이 주님께 있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OK표를 가진 사람은 어떻습니까? 예를 들면 십자가에 달렸던 한 강도는 주님께 자기를 부탁하고 의지했을 때 비록 그 강도의 생애가 추악하고 저주스러웠을지라도 주님은 그 강도의 구원을 주님께서 친히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 강도는 주님 앞에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을지라도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것이 바로 OK표입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느 표를 갖고 계십니까? OK입니까! OP입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죄의 삯은 사망 어떤 사람이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 백화점은 가격 정찰제를 하기 때문에 할인을 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마음에 드는 옷을 보고 가격을 물었습니다. "예. 그 옷은 10만원입니다". "너무 비싸군요. 7만원만 합시다". "안됩니다. 10만원 주셔야 합니다". "뭘 그러십니까? 그럼 8만원 드리겠습니다"하며 그 사람은 값을 치르려 했습니다. 점원은 "그렇게는 절대로 안됩니다. 이곳에서는 할인을 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10만원 주셔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꼭 10만원을 다 내야 합니까?" 그 사람은 할 수 없이 제값을 다 주고 그 옷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할인을 하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죄에 대해 치러야 할 값은 사망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으므로(롬 3:23) 누구나 죄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죄 값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 죄 값에 대하여 "사망"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기의 죄 값을 그 값보다 덜 치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회개하면 죄가 용서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이 회개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아서 무더기로 지옥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회개하면 죄가 용서된다는 말씀이 한 구절이라도 있습니까? 물론 회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을 했다고 해서 죄가 용서되겠습니까? 앞에서도 잠깐 예를 들었지만 어떤 강도짓을 한 사람이 잡혀서 재판을 받게 될 때에 그가 재판장 앞에서 잘못했다고 회개하면 그 죄가 그냥 용서가 되겠습니까? 그가 잘못을 시인하고 돌이키겠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회개했다고 그 죄가 용서되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회개하는 것과 그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은 다릅니다. 그가 죄에서 해방되는 길은 죄의 값을 치르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하여 해방을 받으려면 자기의 죄 값을 치르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죄 값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까? 새벽기도입니까? 선행입니까? 십일조입니까? 교회에 등록하는 것입니까? 찬송하는 것입니까? 성경공부 하는 것입니까? 율법을 잘 지키는 것입니까? 주기도문을 열심히 외우는 것입니까? 십계명을 잘 외우고 치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할 때 죄의 값이 치러집니까? 하나님 앞에서 할인하려 하지 마십시오. 죄에 대한 판결은 죄인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재판장이 내리는 것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언도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 죄의 삯은 오직 사망일뿐입니다. 사망 이외에 죄의 값을 지불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결코 할인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자신의 노력을 멈추십시오. 죄의 삯은 행위가 아닙니다. 이제 겸손한 마음으로 앉아 손을 모으고 눈을 들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거기에 누가 달렸습니까? 그분은 누구십니까? 그분은 왜 그렇게 매달리셨으며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까? 그분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렇게 죽어야 했습니까? 성경은 주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주 예수님)가 온 것은 섬김을 닫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대속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죽어주는 희생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주 예수님은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죽은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여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사랑하는 여러분!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똑같습니다. 여기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네 사람이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식대를 모두 지불하였을 때 다른 세 사람도 역시 식대를 지불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세 사람은 식대를 지불한 적이 없지만 그들은 낸 것과 똑같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당신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당신은 이미 죽은 것으로 하나님이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에게서 죄의 값을 다 받으셨습니다. 당신의 죄의 값은 지불되었고 다 치러졌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큰 소리로 선포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의 뜻은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아무 죄도 묻지 않으십니다. 주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는데 무슨 죄가 또 남아 있겠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며 그 삯은 이미 지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치를 죄 값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 모든 행위를 멈추고 당신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신 주 예수님을 가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감사드리십시오. "주님! 참 감사드립니다. 저의 죄의 삯을 대신 치러주신 주 예수님, 참 감사드립니다"라고, 지금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 되었느니라"(롬 3:23,24). 그의 눈은 불꽃같고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막 4:22). 이 세상에는 숨겨진 것도 많고 감추어진 것도 많습니다. 온갖 비리와 부정이 드러나지 않고 역사 속에 묻혀진 것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치계나 경제계, 또는 교육계와 사회 각 분야의 비리는 그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 시간 그런 외적인 모든 분야를 떠나서 조용히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지난 과거의 행적과 모든 생각들을 돌아다본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비밀은 드러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눅 8:17)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살펴보시는 주님의 눈은 불꽃같습니다(계 1:14, 2:18, 19:12). 이 불꽃은 어둠을 밝히며, 숨겨진 것을 드러내며, 감추어진 것을 남김없이 나타내는 하나님의 불꽃입니다. 그 때 감추어졌던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납니다.사람은 외모를 보고, 그가 입는 옷을 보고, 그의 직장을 보고, 그의 문벌과 학벌을 보고 그를 판단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은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실 뿐입니다. 주님의 불꽃같은 눈이 우리의 마음 깊숙이 감추어진 부분을 샅샅이 살펴보실 때 우리는 얼마나 무섭고 두렵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의 행적 중에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숨겨진 행위들, 자기도 그러한 일을 하면서 그러한 일을 행하는 이들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했던 모든 위선들…. 다른 사람들이 알면 깜짝 놀랄 그 부끄러운 사실들이 모두 밝혀질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 구상하며 즐겼던 모든 죄악들이 그날 큰소리를 지르며 다 튀어나올 것입니다. 저는 일전에 어느 분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의 문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에게 "당신은 당신의 모든 과거를 잘 알고 계시는 어머니 앞에서도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한참동안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흔들며 어머니 앞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어머니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 작은 죄가 따로 없으며 오직 죄가 있느냐, 없느냐가 있을 따름입니다. 죄의 기준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롬 3:23)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며 영원한 지옥 형벌입니다(롬 6:23). 하나님 앞에서 속이거나 숨기려 하지 마십시오. 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직 죄인인 것을 솔직히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시며 자기를 낮추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여기 실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에게 임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두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두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이 말씀은 죄인만이 받을 수 있는 복된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께 나아오셔서 당신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완전한 형벌을 받으신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시므로(요 1:12) 심판에 이르지 않게(요 5:24)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데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 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면 주 예수님께서는 한 생명의 가치를 온 천하보다 귀하다 하셨습니다(마 16:26). 그 생명은 이 세상에서 그에게는 오직 하나뿐이며 전부입니다. 그는 생명을 잃어버리는 순간 온 천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한 생명의 가치를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귀한 생명을 갖고 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고 있습니다. 한가지 예로 지구의 넓이는 대략 5억 9백만㎢로 평수로 계산하면 154조 2천 6백억 평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의 가치를 지구의 넓이보다 더 크다 하셨습니다. 사람의 평균 수명을 70년으로 할 때 하루의 가치는 약 60억 평에 해당합니다. 오늘 하루를 지나면 우리의 생명은 그만큼 줄어든 것이며 하루에 해당하는 엄청난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숱한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은 겨우 내 집 마련하는 것이며 일생을 다 바쳐 50평짜리 아파트 한 채 구하는 정도의 것임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얻지 못한 채 허망하게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허다하며 혹 얻었다 할지라도 죽을 때 가져갈 수 없는 것뿐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갖고 세상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을 얻기 위해 일생을 다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여러 제자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주님보다 은 삼십을 택한 가룟 유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재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 2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말씀인가요? 주님보다 은을 택한 사람. 영원한 생명보다 돈을 택한 사람 가룟 유다! 그는 지금 어디 있을까요? 어찌 가룟 유다 뿐이겠습니까? 오늘날도 주님을 믿지 아니하고 세상을 택한 사람들은 다 똑같습니다. 주님보다 이 세상에 명예, 지위, 돈, 쾌락, 술, 인기 등등. 성경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세계적으로 하루에 죽는 사람이 약 23만명이며 매일 매일 그렇게 죽어갑니다. 열흘에 230만, 백일에 2,300만, 일년에 8,000만여명씩 죽어갑니다. 죽음은 물밀 듯이 그렇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존귀한 생명을 갖고 천한 것을 추구하다가 속절없이 죽어갈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그러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을 사용해서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생명보다 귀한 것이어야 하며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어야 하기에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요 18:36). 그것은 하늘에 속한 것이며(빌3:20), 하나님의 선물이며(엡 2:8), 구원이며(롬 10:13), 영생입니다(요일 5:13). 이 영원한 생명은 주님께 있으며 주님을 모셔들인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요 6:47)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진정한 기쁨은 어디에 있을까요? 돈이나 명예 재물을 얻는 데 있을까요? 그런 것을 추구하다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의 고난을 받는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러한 것이 부족하고 없을지라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 영원한 생명을 찾고 소유했다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참 잘했다"할 것입니다. 주님은 장차 당신께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리라" 하시지는 않으시겠습니까? 다듬지 않은 돌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제단을 쌓는 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단을 쌓을 때는 반드시 다듬지 않은 돌로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출 20:2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신 27:5,6). 다듬지 않은 돌! 하나님께서는 제단에 사용하는 돌은 정으로 쪼거나 철로 다듬으면 부정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벽돌 굽는 일을 하거나 돌을 다듬는 일을 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어떤 종교 제단을 만들거나 큰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은 다듬지 않은 돌이 쓰여졌고 애굽의 우상 전각은 잘 다듬어진 돌이나 벽돌이 쓰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하나의 예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우리를 다듬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만큼 다듬어 질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가증하게 보시고 부정하다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대다수의 종교는 끊임없는 자기 연마를 요구하고 있으며 도를 쌓거나 공을 드리는 등의 노력으로 잘 다듬어져서 일정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가르침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주님은 수고와 무거운 짐을 다 정리하고 오라 하시지 않고 그냥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종교와 신앙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잘 다듬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실 것을 믿고 나아간다면 그것은 신앙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나아오는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오래 전에 들은 한 예화가 생각납니다. 영국의 어떤 유명한 화가가 인생의 진솔한 모습을 그리고자 모델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어떤 지하도를 지나다가 한 구걸하는 남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를 보자 남루한 모습이지만, 그의 꾸밈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나온 진실을 발견하고는 그를 그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화가는 걸인에게 가까이 가서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모델로 삼고 싶으니 내일 우리 집으로 와 주시오"하고는 명함과 함께 얼마간의 돈을 주었습니다. 그 걸인은 그러한 제의를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더구나 자기를 모델로 삼겠다고 한 그 화가는 당대에 제일가는 화가였습니다. 그래서 그 걸인은 생각하기를 '내가 비록 거지라 빌어먹기는 해도 인물이 괜찮은가 보다'하고는 '이왕 그릴려면 더 나은 모습을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화가가 준 돈을 갖고 맨 먼저 간 곳이 목욕탕이었습니다. 목욕탕에서 말끔히 씻고 나온 그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손질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 가서 새옷을 사 입고는 마지막 남은 돈으로 구두를 사 신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말쑥한 신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정식 모델이 되면 많은 돈을 받으리라 생각하여 있는 돈을 다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곧 그는 명함에 적혀 있는데도 그 화가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거지는 자기의 달라진 모습에 화가가 크게 기뻐하리라 생각했고 자기가 매우 자랑스러웠습니다. 이윽고 화가가 나와서 그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문간에 서 있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그 거지는 화가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고는 자기가 그 지하도에서 구걸하던 걸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그 화가는 말할 수 없이 실망하고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리고 말하기를 "당신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하고는 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가식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원하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께 간다면 주님은 자신의 손으로 우리를 주님의 뜻에 맞게 다듬어 주실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가려진 십자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커다란 전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은 드러내려 하는 것이요, 다른 한편은 가리우려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없이 치열한 전쟁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것으로 우리의 생명에 관한 것이며 또한 죄에 관한 것입니다. 태어난 이상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한계에 있어서 죄와 그 결과에 대한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죄와 그 무서운 결과로부터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또 어떻게 구원하시려는지를 밝히 드러내려 하시고, 사람을 멸망시키고 파멸에 이르게 하려는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이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가리우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쉽게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하여 구원의 길을 단 한가지 방법으로 만드셨는데 이것을 온 천하에 다 증거하십니다. 사단 또한 사람이 구원받는 길이 단 한가지 방법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오직 그것을 가리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그 하나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입니다. 그분은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가? 그분에게 무슨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만한 죄가 있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분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벧전 2:24).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았다"(고후 5:21).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15:3). 등등 이렇게 성경은 주님의 죽으심의 이유가 우리 죄 때문이며 우리의 죄 문제를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속죄 제물이었다고 분명히 밝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러한 말씀을 교묘하게 덮어씌운 사단의 술수에 속아넘어간 숱한 교인들을 만나보게 됩니다. 사실 오늘날의 교인들 중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라는 것을 모르는 교인은 없습니다. 제가 만나본 많은 교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죽으신 이유에 대하여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시 "그렇다면 하늘나라에 가실 수 있으시겠네요?"라고 물으면 어찌 그리 약속이나 한 듯이 "아직 부족해서요", "회개를 더 해야죠"라든가 "아직도 죄가 많이 있어서"라며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되물으면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주일 성수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죠"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제자의 십자가에 가리워진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단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성실한 교인으로 만들어 교회 일에 충실하고 종교생활에 열심하게 함으로 스스로 속게 만들로 있습니다. 사단은 오직 구원의 십자가만을 가리우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기독교적인 것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교회 일에 열심하게 하여 직분을 받게 하고 봉사와 헌신 또는 기도와 찬송, 방언 등으로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 같은 뚜렷한 이단은 결코 두려워할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정통이라 하는 교회들이 기독교적(종교적)인 것에 뒤덮혀 율법적 사고와 행위적인 일들을 가르치며 요구하는 것이 참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 또는 율법에 얽매여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사단의 계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열심과 노력에 의지하는 십자가를 우리 주님의 갈보리 십자가에 대신하여 섬기는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 귀하신 주님이 생명바쳐 이루신 십자가의 공로를 그러한 것으로 대신하지 마시고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공로로 완전한 죄사함을 얻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 당신을 대신하여 죄의 삯을 완전히 지불하신 우리 주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요1:12) 진실된 갈보리의 십자가를 행위의 십자가로 가리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두 개의 산 얼마 전 한라산에 등반한 적이 있었습니다. 몇몇 성도들과 더불어 아침 일찍 시작한 한라산 등반은 정상에서 잠시만 있다 내려와도 저녁 늦게서야 끝나는 힘든 산행이었습니다. 한라 서쪽의 영실 계곡을 타고 가파른 언덕을 숨을 몰아쉬며 기어가듯이 오르면 넓은 평원이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 한참 걸으면 윗새오름 대피소를 만나는데 여기는 기후의 변화가 심한 곳으로 안개를 만나면 길을 잃어버리기가 쉬운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윗새오름 대피소를 지나 정상을 향해 계속 가면 갑자기 눈앞에 우뚝 서 있는 기암절벽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서도 수직으로 300여 미터 높이로 서 있는 이 거대한 봉우리야말로 한라정상이며 백록담으로 한라산을 등반하는 이의 마지막 남은 힘까지도 소진시키는 최후의 난코스입니다. 숨이 턱에 찬 채 다섯 계단 오르고 쉬며 또 일곱 계단 오르며 쉬다가 저는 성경에 나오는 한 높은 산이 생각났습니다. 그 산은 한라산보다 500여 미터나 더 높은 시내산이었습니다. 이 시내산은 해발 2400여 미터의 험준한 산으로 온통 바위로 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산에 강림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내려 주셨습니다.출애굽기 19장과 20장을 보면 열 개의 거룩하고 엄위한 하나님의 계명이 떨어지던 그날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무섭고도 두렵기가 한이 없었습니다. 말씀을 보면 그 산의 사면에 경계를 정하고 그곳을 침범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임을 당했으며(출 19:12), 짐승이나 사람이나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있었고 큰 나팔 소리에 진중 백성이 다 몸을 떨었습니다. 출 20:18절에 "백성이 떨며 멀리 섰다" 했고 19절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매 우리가 죽을 것 같으니 모세가 대신 말해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돌판에 기록한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았으며 그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오는 날 결국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출32:28). 시내산은 사막 가운데 있는 곳으로 높고 험준하며 무섭고 두려운 곳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법이 있고 심판이 있는 곳입니다. 모세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그 즉시 죽임을 당하는 곳입니다(출 33:20-23). 저는 한라산을 오르며 주님이 방문하셨던 또 하나의 나지막한 산을 생각했습니다. 그곳은 갈보리 산이며, 산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언덕입니다. 그곳은 사람이 많이 사는 예루살렘 성에서 가까운 곳이며(요 19:20) 10여 미터의 낮은 언덕이었습니다. 오래 전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엄위하신 그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갈보리 언덕에 와 주셨습니다.시내산에 오셨던 분과 갈보리 언덕에 오셨던 분은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갈보리 언덕에는 사방으로 쳐진 경계선도 없었고 우레나 번개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에서 주님은 범죄한 우리를 죽이는 대신에 스스로 죽어주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를 죽이는 대신 자신이 죽으시고 말았습니다.주님은 그곳에서 강도의 죄를 대신하심으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 올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불의와 허물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그곳은 높은 산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올라올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다 내게로 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도 올 수 있는 곳이며, 어린아이들도 올 수 있는 곳입니다. 부자도 올 수 있는 곳이며 가난한 자도 올 수 있습니다.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도 올 수 있습니다. 건강한 자 뿐 아니라 연약한 자도 부르십니다. 죄가 조금밖에 없는 사람뿐 아니라 아주 많이 있는 사람도 올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세상 죄를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주님은 우리의 죄, 다시 말해서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온전히 담당하셨고(벧전 2:24)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으며 (히 9:12)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히 10:17)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주님을 만나시기 위하여 어디에 서 계십니까? 무거운 십계명을 등에 지고 높은 시내산 밑에서 떨고 계십니까? 아니면 갈보리 언덕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아래 와 계십니까? 시내산에서는 가장 의로웠던 모세라도 정죄를 받았는데 갈보리에서는 가장 죄인이었던 강도라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만나시기 위해서 한라산보다 더 높은 시내산을 오르려 하십니까? 지금,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갈보리로 오십시오. 주님은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 하나님의 은혜 당신의 삶에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6살 먹은 아들이 하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아들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 번 가정해 봅시다. 그 살인자에 대한 당신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만인 당신의 힘으로 그 살인자를 죽인다면 그것은 복수가 됩니다. 만일 당신이 잠잠히 앉아 사회의 공권에 맡겨 법정으로 하여금 그를 처형하게 한다면 이는 공의가 됩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살인지를 용서하고 당신의 집에 초청해서 함께 살며 또한 그를 당신의 아들로 입양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됩니다. 물론 당신은 이와 같은 예는 하나의 가상일 뿐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다른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당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의해 지옥에 갈 판결을 받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그 판결대로 집행하신다 해도 당신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당신이 행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불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 값으로 대신 죽게 하기 위해서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셨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 아들이 당신 죄를 대신해 죽으신 것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면 당신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주께서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고 하늘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기 위하여 그 자신을 속죄물로 드리셨다면 당신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겠습니까?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오직 한가지 표현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께서 하고 계신 일입니다. 이 예는 진리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며 가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에게 한없는 호의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기 위해 다섯 가지 간단한 성명(聲明)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는 지옥에 가야할 죄인들에게는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호의이다. (2)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구원을 베푸신다. (3) 주 예수님께서 갈보리 동산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한 속죄제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 (4) 하나님의 은혜는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사람이 그 스스로 얻거나 만들 수 없다. (5) 하나님의 은혜는 제한이 없다. (1)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호의 하나님의 은혜는 지옥에 가야할 죄인들에게는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만한 행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그 어떤 것을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은혜는 베푸시기로 하셨다면 그 이유는 사람들 편에 잇는 것이 아니라 전능자 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이를 조심스럽게 주목해 보십시오. 선한 사람들, 올바른 사람들, 도덕적인 사람들이 아닌 바로 죄인들에게 말입니다. 은혜는 본래 그 성격상 하나님께로부터 불의한 자들에게 흘러내립니다. 은혜는 언제나 불의한 자와 저주받은 죄인들에게만 그 효력을 발할 수 있습니다. "선을 드러내는 것은 공의이지 은혜가 아니기 때문에 은혜는 의인을 찾지 않습니다. 은혜는 구원하고 거룩케 하며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저주받은 죄인, 죄를 지은 자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무능한 자들을 찾습니다"(C. I. 스코필드). 죄인들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만한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그 공의로운 법에 의하면 죄인들은 그 죄로 인해 죽어야 하며 영원히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란 이와 같은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값없이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구원을 베푸십니다. 구원이란, 이 세상에러 죄의 형별과 죄의 권능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 그리고 오는 세상에서 죄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값없이 주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에는 전혀 대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은 이것을 하나님께로부터 그냥 받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구세주를 자신의 죄에 대한 대속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영과 혼과 몸에 대한 영원한 안녕을 주께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베풀어지는 은혜 - 주 예수께서 갈보리 동산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한 속죄제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못본체하고 눈감아 준다거나 그냥 용서해 준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죄를 범한 죄인을 벌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법은 마땅히 집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그 스스로 자신의 죄 값을 지불해야 한다면 그는 영원히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 법을 지키시면서 그 사랑하시는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죄없는 독생자를 죄인들 대신 죽게 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사람들이 지불해야 할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의 죄 값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죽어야할 그 자리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모든 것이 충분히 충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주와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제공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은혜를 "그리스도를 희생한 댓가인 하나님의 풍요"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 그리고 부활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구원받기를 원하는 불경건한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게 했습니다. (4) 돈으로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전체든 부분적이든 돈주고 사거나 노력해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은혜를 율법, 행위 그리고 빚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행한대로 받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순종하는 자에게 이 땅에서의 지속적인 삶을 그리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행위의 원칙은 사람이 행한대로 그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행한 대로 정확히 그 보상을 받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빚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섬김(일)을 받았으면 그에게 수고에 대한 댓가를 지불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아닙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있다면 그는 구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구원합니다. 구원은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보상이 아닙니다. 구원은 일을 아니할지라도 불의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로마서 4:4-5). 구원은 사람들이 청결한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불해야 할 빚이 아닙니다. 구원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친절입니다. 일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예를 들어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당신을 초청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진수성찬 앞에 앉아 값진 음식들을 먹을 것이며 그곳의 모는 것들은 당신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매우 즐거운 저녁이 되겠죠! 이제 저녁이 끝난 후 대통령이 문 앞까지 나와 당신에게 작별인사를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떠나면서 당신은 500원 짜리 동전 하나를 대통령의 손에 쥐어주면서 "친절히 대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은 참 즐거웠습니다. 저를 위해서 많은 돈이 들었을 것 같은데 적은 일부나라 제가 먹은 것을 담당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시겠습니까? 그것이 대통령의 친절에 대한 합당한 자세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버릇없고 무례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이와 같습니다. 노력해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제시하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바울이나 막달라 마리아나 그대에게나 모두 무료이니 값없이 오라". 은혜라는 말에 무엇이 붙거나 조건이 주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며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로마서 11:6). (5) 누구에게나 베풀어지는 은혜 이제 마지막 요점인 "하나님의 은혜는 제한이 없다"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나의 죄악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지불하기를 원했던 값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밖에는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매춘부들, 간음자들, 음행한 자들, 거짓말쟁이들, 속이는 자들, 살인자들, 불신자들, 무신론자들 그리고 종교적인 외식가들... 모두 죄악 가운데 깊이 물든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수세기를 걸쳐 하나님은 모욕과 거부를 참아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자들은 돌에 맞고 핍박을 받아왔으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에 대한 복된 소식을 전하고 계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믿는 죄인들에게 주신 높은 신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상속자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죄와 죽음과 지옥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그리스도와 같이 영원히 살게 될 하늘나라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시인들과 예술가들, 주권자들, 평민들, 순교자들 그리고 죽어 가는 강도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오고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너무 인간적이다"(마틴 루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인간들과 같은 분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가를 별로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셨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더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를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서 우리는 먼저 그분은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신명기 33:27). 하나님만이 홀로 위대하시며 이 세상에서 그와 같은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애굽기 15:11). 하나님은 아주 위대하시기 때문에 이 땅에서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아주 작게 보입니다.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이사야 40:22, 23). 세상의 민족들이라도 하나님에게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이사야 40:15, 17). 하나님은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려야 마당하신 분입니다(디모데전서 6:15-16). "이러한 분은 우리가 존경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그는 그 위엄에 있어 유일하시며 존귀에 있어서도 유일하십니다. 그리고 완전함에 있어서도 뛰어나십니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시면서 만물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지만 아무 것도 사람들에게서 취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시는 분입니다(사도행전 17:25). 그는 어떤 사람이나 물건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스스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완전한 기쁨이나 만족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들에게 어떠한 의무도 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빚진 것이 없으며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의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그의 은혜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로마서 11:35, 36). 하나님의 지식은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 미래 어느 것이든 그가 모르시는 것은 없습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태복음 10:30).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누가복음 12:6). 아무도 하나님을 가르친 자가 없고 조언한 자도 없습니다"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이사야 40:13, 14).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로마서 11:33, 34).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지식을 생각했을 때 그는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시편 147:5)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는 감추일 것이 없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브리서 4:13).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창세기 16:13). 하나님은 스스로 잊어버리기로 한 것 외에는 잊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죄 외에는 잊지 않으십니다(히브리서 8:12). 하나님은 만유 위에 뛰어 나십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역대상 29:11-12). "가로되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역대하 20:6). 모든 피조물의 주로서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시편 135:6). 이 말은 그는 그의 기뻐하시는 대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편 115:3). 하나님의 동기나 행함에 대해서는 아무도 물을 권한이 없습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다니엘 4:35).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바르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누구도 이에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는 가장 고상한 피조물보다 월등히 높으시며 하늘과 땅의 주가 되십니다. 아무에게도 복종치 않으시고 아무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며 완전히 독립적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시며 오직 그의 기쁨 그리고 언제나 그의 기쁘심을 따라 행하십니다. 아무도 그를 가로막을 수 없고 그를 훼방할 수 없습니다"(인용 글).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사무엘상 15:29).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어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수기 23:19).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라기 3:6).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야고보서 1:17).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하십니다. 그는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는 죄를 변호하거나 벌하지 않고 눈감아 주실 수 없으십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한일서 1:5).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이사야 6: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하박국 1:13).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죄를 다루시는 모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은 죄를 지어서 자기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 지은 사람들에게 그의 모든 진노를 쏟아 부으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드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셨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벌하지 않으실까요?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인들을 대신해서 그의 아들을 죽으실 때 세 시간 동안 그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그의 거룩을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또한 그의 전능하심을 나타냅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시편 62:11). 그의 권능은 창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머리 위에 있는 저 하늘과 별들은 측량할 사람이 없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편 8:3, 4). 하나님의 능력은 그의 우주를 붙잡고 계심에 또한 나타나 있는데 모든 것-식물, 짐승, 사람, 채소-들을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능력이 가장 크게 나타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것이었습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에베소서 1:19-20).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고린도전서 1:9). 그는 그의 약속하신 것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후회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예레미야애가 3:22). 하나님은 선하십니다(나훔 1:7). 그의 선하심은 모든 이들에게 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그들 죄 가운데 죽는 것을 허용하시지만 이는 조금도 그의 선하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태복음 20:15). 하나님은 인내하시며 오래 참으십니다(로마서 2:4). 그는 이교도들과 불신자들의 공격을 참으시며 악을 선으로 갚으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십니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편 57:10).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편 103:11).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십니다(에베소서 3:18). 하나님의 사랑은 그 넓이와 높이, 길이 그리고 깊이에 있어서 제한이 없습니다. 그는 사랑이셔서 엄청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봅니다(요한일서 4:7-11). 하나님의 사랑은 공명정대하며 우주적입니다. 결코 이기적이 아닙니다. 그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로마서 8:35-39). 나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의 피조물들이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욥기 11:7). 하나님은 우리 마음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신 분이십니다. "그의 위대하심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는 모든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크시며 어떠한 말로도 그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이해와 생각의 한계를 초월한 분이심을 생각할 뿐입니다"(노바티안). 경이로운 것은 이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관심을 두시고 그들 대신 고난 당하고 피흘려 죽게 하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성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하나님의 위대하심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너무 인간적이듯 사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너무 신성시하는 면이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 아주 어두운 그림을 보여 주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대해 정직하다면 인간이 그렇게 어둡다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사람은 경건치 못한 죄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사람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으며 날 때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했습니다"(시편 58:3). 사람은 죄 짓는 짓을 가르칠 필요가 없으며 어릴 때부터 자연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의는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가르쳐야 합니다(잠언 22:15).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며(시편 51:5) 하는 일을 통해서도 죄인입니다(로마서 3:23). 그 자신이 죄인이며 하는 것도 죄악된 것들입니다. 사람은 그가 하는 것보다 그 속에 있는 것이 더 죄악된 것입니다(마가복음 7:15-23). 그 안에는 부패와 부정 그리고 죄악의 오물 구덩이가 있습니다(예레미야 17:9). 사람의 중심의 생각은 지금 당장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은밀한 생각들이 기록된 책을 만들 수도 없으며 또한 그와 같은 책을 만드는 것을 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지난 주에 했던 추악한 생각들을 다니면서 선전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수세기를 통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추악한 생각-그들 마음의 부패성을 드러내는 생각-들을 공공건물의 벽에 써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사랑들이 생각해주기를 원하는 자신과 본래의 자신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가면을 씁니다. 인간에게는 본래의 모습인 '자아'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자아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외식자들입니다. 어떤 이는 사람에 대해 말하기를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홀로 있을 때의 그가 진정한 그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한복음 3:19)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실수나 죄를 볼 때에는 굉장히 불쾌해 하며 혐오감을 가지고 봅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러한 죄를 지을 때는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로마서 2:3). 이 죄는 모든 사람 즉 육신을 가진 부모 밑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은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로마서 3:10-12) . 죄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목구멍이나 혀, 입술, 입, 발, 눈 등 지체의 모든 부분에도 그 영향을 미 쳤습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3:13-18).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 이웃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죄를 짓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 우상을 만들어 그것에 절하므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은 사람의 형상이나 새, 네 발 가진 짐승, 그리고 기어다니는 벌레들의 형상입니다(로마서 1:23). 사람은 그의 생명과 양식, 의복, 그리고 안식처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합니다. 그는 그의 부모나 대통령 또는 주권자들은 욕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주님이나 하나님의 이름은 헛되이 불러 모욕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20:7).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갖는 대신 적개심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잊을 수 있을 때 기뻐하고 하나님을 생각할 때면 슬퍼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그 이웃에게도 죄를 짓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만 죄를 범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죄를 짓도록 부추깁니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로마서 1:32).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잠언 4:16). 사람은 이기적입니다. 그 자신이 우선이어야 하며 자기 길을 가기를 좋아합니다(이사야 53:6). 그는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간음이나 음란, 그리고 여러 형태의 부도덕한 성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오염시킵니다(로마서 1:26-27). 사람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거짓을 말합니다. 사람은 참으로 신뢰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이사야 2:22).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예레미야 17:5). "...사람은 다 거짓되되..."(로마서 3:4).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이 닥치고 그것이 자신에게는 그 영향을 미치지 아니할 때 기뻐합니다. 그리고 분을 발하며 그 이웃에 대하여 악의를 품습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자에 대하여 시기하고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훔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더 의로운 자들을 보면 어떠합니까? 그도 더 의롭게 살려고 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삶이 자기의 양심에 괴로움이 되므로 그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요한복음 3:19-20). 사람은 하나님과 그 이웃에 대하여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하여서도 죄를 짓습니다. 그는 술취함이나 부도덕 그리고 방탕을 통하여 그 자신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재능을 낭비하며 그의 소유를 허비합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상담을 거부하며 그의 친한 친구를 거절합니다. 그가 이것을 아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 자신에게 있어 가장 큰 원수입니다. 성경에 인간의 죄악된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예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비참하게 타락되고 더럽혀진 인간을 묘사하기 위하여 문둥병 환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8:2). 사람은 중풍병 환자(요한복음 5:5), 귀머거리(마가복음 7:32), 벙어리(마가복음 9:17), 소경(요한복음 9:1), 그리고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은 자(에베소서 2:1)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타락하고 더럽혀졌으며 무력하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람들의 죄에 대한 절정은 지금부터 약 1,900여년 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 예수 그리스도 -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그는 모든 면에 있어 온전한 분이셨지만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훔치거나 죽이기 위해 또는 멸망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면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요한복음 10:10). 그러나 그의 피조물인 사람들은 "이는 상속자니 죽이자"(누가복음 20:14)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보리 동산의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 - 간음자들, 술취한 자들, 거짓말쟁이들, 도둑들 그리고 살인자들 - 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신은 알콜 중독자들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그는 이렇게 했습니다! 사람은 정말 지옥에 갈 짓 밖에 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자비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조금도 없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은 불의하며 심판받을 일 외에는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죄인들을 위한 대속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에는 "오! 내가 누구이기에 주께서 나 같은 자를 위해 돌아가셨단 말인가"라는 외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용서받지못하는 罪 서론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라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우리 주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의 용서를 제시하는 복음 속에 포함된 단 하나의 두려운 예외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으되 단 하나는 예외입니다!복음은, 인간의 죄가 더한(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 5:20)고 선언합니다. 복음은, 자진하여 갈보리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시키신 주 예수님의 중재사역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신성모독)죄 "가 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또 구속(救贖)은 죄인들의 경험으로부터 저 가공할 죄들이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라는 위의 말씀과 같이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코 사함받을 수 없는 그 단 한가지 예외적이고 두려운 죄는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심사숙고해 보고자 하는데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죄를 깊이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결코 지은 적이 없으면서도 자기는 그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비통한 낙심 가운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그것을 피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도 그 죄에 관하여 애매모호한 개념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관하여 단 한번 말씀하셨지만 그분의 말씀과 및 그 관련 사건은 마태복음 12장 22∼37절, 마가복음 3장 22∼30절, 누가복음 11장 14∼23절 세 곳에 약간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마태복음 12장 22∼3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이 말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의문이 떠오르며, 동시에 그에 대한 해답이 본문에 암시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1)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무엇인가? (2) 이 죄는 왜 용서받지 못하는가? (3) 이 죄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무엇인가? 도대체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무엇이길래 그렇게 많은 의견들이 피력되고 있으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혼동 가운데 빠져 걱정하고 있을까요?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사실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거나 또는 범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를 받은 사람들이 다름 아닌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종파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바리새인들"이었으며, 성경 문헌에 전문가였던 "서기관들"이었습니다(막 3:22)!이 놀랄만한 사실은 어떠한 것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해당되지 않는지를 즉시 가르쳐 줍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주색잡기나 살인 등 어떤 한가지 특정 죄악, 불순(不純), 또는 범죄도 아니며, 오랜 "허랑방탕"과 폭력의 생활도 아닙니다.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 혹은 모든 사람들은 십계명에 관하여 말할 때 부자 청년 관원이 우리 주 예수님께 했던 말과 똑같이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 10:20).도덕에 관한한 그들 각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백합화처럼 흠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지었거나 거의 짓고 있다고 경고하신 대상들은 바로 그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그 다음으로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사항은 그 용서받지 목하는 죄가 분명히 어떤 형태의 성령에 대한 범죄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아마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삼위일체 중의 한 분으로서 육신을 입고 오신 제2위(位)가 되신다는 것을 알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성령도 삼위일체 중의 한 위(位)가 되신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영향력으로서 인간들에게 역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신약성경이 점차로 전개되어 감에 따라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 자신은 성령의 개체성(個體性)을 알고 계셨으며, 현재의 우리가 충분한 계시에 비추어 그분의 말씀을 생각해 볼 때에 그분이 성령의 개체성을 분명히 암시하셨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성령의 개체성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 주님의 엄숙한 말씀이 약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한 위(位)되심을 모르고서도 성령에 대하여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지을 수도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허나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다름아닌 성령을 "훼방하는"(모독하는) 죄라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말씀의 초점이었습니다.31절을 다시 주목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그렇다면 훼방(모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비방하거나 중상하거나 모욕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옛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모욕했습니까? 그 종교적 위선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마 12:24).따라서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 훼방죄란 은혜롭고 거룩한 성령의 활동을 마귀에게서 난 것으로 모독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役事)를 사단의 역사(役事)라고 말하는 것이 성령 훼방죄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문맥을 감안하여 볼 때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그 성령 훼방죄가 왜 무서운 성격을 띠고 있었는지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성령 훼방죄를 용서받을 수 없도록 만드는 요소는 바로 이성적으로 알면서도 고의적이고 결정적이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의 사악한 성령 훼방죄가 단순히 무지 탓이었다면 그것은 즉시 용서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의 사도 바울이 성령 훼방죄를 지은 것은 무지 탓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와 그 제자들에 대한 그의 악감은 대단히 심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용서를 받았던 것은 그가 알지 못하고 행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하지만 우리 주님에게 그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관하여 경고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무지탓으로 성령을 훼방한 것이 아니었으며, 문맥은 이것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행하시던 그 자애로운 기적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은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들에게조차 즉시 감지되었으며, 그러기에 그들은 자동적으로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외쳤던 것입니다(마 12:23). 그들은 주님에 의해 행해지는 기적들이,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대로 여호와의 성령이 장차 오실 메시야를 통해 행하시리라고 하신 것과 같은 것임을 금새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보통의 지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논리적으로도 명백하게 실증되는 문제였습니다.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마 12:26).이 말씀은 연역적인 논증이었습니다. "또 내가 바살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혹은 제자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마 12:27).이 말씀은 대인논증(논자(論者)의 주의, 성격, 지위, 직업 등을 이용하여 그 이론을 논난하며 또한 변호하는 법-역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주님의 결론을 논리적으로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 :28).그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役事)를 마귀 탓으로 돌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훼방(모독)이었습니까?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살면서 가르치셨고, 기적을 행하셨고,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고, 승천하셨고, 성령을 부어 주셨기에,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복되신 성부 및 성령과 영원토록 동등하시다는 사실이 실증되고 선포되었기에 그분의 사역을 마귀 탓으로 돌리는 것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옛날의 바리새인들이 성령을 훼방(모독)한 것과 똑같이 현재도 하나님을 명백히 훼방(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역사(役事)이든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이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역사(役事)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마귀에게서 난 것으로 돌리는 것이 바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이 죄는 왜 용서받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왜 이 성령 훼방죄가 용서받지 못할까요?그 첫번째 이유는 이 죄가, 나중에 회개하고 돌이킨 어떤 죄가 아니라 요지부동한 마음 자세에 기인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심지어 이 죄는 탕자가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며" 오랫동안 탐닉했던 그런 종류의 죄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죄는 이성적으로 완고하게 성령을 거역하는 죄라기보다 저질적인 욕망에 굴복하는 죄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극도의 패역한 일을 저지르고, 자기 생애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 주지만 나중에는 이것을 통회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1절을 펴서 읽어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감사하옵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가장 타락한 탕아들에게도 베풀어질 수 있으며, 또 실제로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종류의 범죄는 마태복음 12장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저지르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이 저질렀던 범죄는 육신의 연약이나 영적인 무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참 빛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려는 확고한 마음 자세요,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겠다고 결심하고, 알면서도 고의로 영혼의 문을 닫아버렸으므로 용서의 사랑의 광채가 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용서를 미리 배제했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 다른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왜 그런 종류의 죄가 용서를 미리 배제할까요? 탕자가 나중에 자신의 "허랑방탕한" 생활을 회개했으며, 다른 수많은 사람들도 나중에 자기 죄를 실제로 회개했듯이 그 사람들도 자신의 마음 자세를 나중에 회개할 수 없었을까요?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만일 그 바리새인들이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 지점에까지 실제로 도달했다면 그들의 죄는 용서를 미리 배제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가 회개를 미리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이 기점에서 분명하면서도 신중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사람들이 결코 용서받지 못할 만큼 죄를 지었다든지 혹은 안지었다든지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요점을 더욱 분명하고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들이 그런 죄를 지었다고 잠시 가정합시다. 이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 하나님의 참 빛을 고의적으로 완고하게 거절했기 때문에 이제는 결국 회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말살되어 버릴 정도로 완고한 상태에 돌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실은 회개를 배제하는 까닭에 용서도 배제하는 죄의 상태가 곧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누구든 이러한 지점에까지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완고한 거절의 과정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으며, 이것이 결국 그 사람의 주인이 되면 회개의 가능성을 말살시켜 버리고 맙니다. 인간은 회개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제가 잘 아는 어떤 목회자로부터 저는 무서운 임종 장면을 지켜보았던 경험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죽어가던 그 사람은 죽음을 물리치려고 몸부림치면서 불쌍한 손을 무익하게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는 죽음과 그 너머의 두려움으로 인해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발광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지만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 전에 발작적으로 다음과 같이 신음하며 울부짖었다 합니다. "나는 죽기 전에 회개한다고 말했는데 회개가 되지 않아!회개가 되지 않아! 나는 도무지 회개할 수 없어!" 그렇습니다. 사람은 회개의 가능성이 말살되어 버린 그 시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회개가 없으면 더이상 용서도 없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용서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행위의 죄도 아니며, 심지어는 오랫동안 계속되는 죄악도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묘사한대로, 하나님과 그 진리에 대하여 악한 마음으로 거부해 온 과정을 통해 형성된 마음의 상태입니다.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해 우리 주님이 대속 제사를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악하고 더러운 죄라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계속된 죄악들도 통회하기만 한다면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가능성이 말살된 상태의 영혼은 용서받을 수 없으며, 이것은 마치 의사가 암을 용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하나님의 성령과 그 역사(役事)를 의식적으로 오랫동안 거부해 온 과정을 통해 형성된 요지부동의 마음 상태입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죄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마음속에 실제적으로 깨닫게 해주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모든 경건한 덕목들을 생성시키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무서운 사실은 사람이 이와 같은 것들을 알면서도 미워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 과정이 시작되고 이것은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종말을 맞이하여 결코 용서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때 그 사람 속을 비추었던 빛은 어두움으로 변할 수 있으며,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이 지점에 실제로 도달한 사람은 결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는 빛을 미워하는 일을 영원토록 계속할 것입니다. 그들은 귀신처럼 "믿고 떨기는" 하지만(약 2: 19)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의 정점에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과거의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 전체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씀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이런 지점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은혜가 더 이상 베풀어진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밀랍을 녹이는 태양은 동시에 진흙을 응고시킵니다. "버려두라" - 이것은 실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용서가 있을 수 없는 것은 회개의 가능성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죄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세번째 질문을 다루기 전에 먼저 확실히 알아야 할 사실은, 사람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실제로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엄숙한 말씀은 허구에 대한 경고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 죄를 범할 수 있으며, 또 범해 왔습니다. 사단도 그 죄를 범했습니다 그의 최초의 범죄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범죄의 역사 가운데서 알지 못하고 죄를 지었거나 흑은 유혹을 받아서 죄를 지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지성을 가지고, 자기가 하나님의 빛과 사람을 대적하는 죄를 짓고 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늘 스스로 죄를 지어 왔습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죄를 지어 왔으며, 도저히 회개할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전혀 용서받을 수 없고 오로지 불못행일 뿐입니다. 타락한 천사들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던 것 같습니다.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유전(遺傳) 따윈 전혀 생각해 볼 수 없습니다. 타락한 천사들은 순전히 자발적으로 죄를 범했으며,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이성적(理性的) 반역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회개의 가능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그들 속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용서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지옥뿐입니다. 바로와 헤롯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 당시의 종교적인 위선자들도 역시 이 죄에 매우 근접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면서도 고의적인 위선으로,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을 마귀의 소행이라고 말할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주님께서 그들 중 일부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근대의 아돌프 히틀러 같은 사람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었는지 우리는 궁금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도 역시 다음처럼 동일한 특징과 과정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양심의 계획적인 억누름, 계속적인 기만과 사기, 완전히 비정상적으로 되어 버린 도덕성, 그래서 검은 것을 희다하고, 악을 선이라 하며, 마귀를 하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시편 2편이 만일 세상 끝날과 관계있는 말씀이라면 그것은 마치 세상의 권력자들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아마겟돈으로 가는 전조와도 같이 짓게 될 것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여간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다른 각도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으며, 이것은 참으로 우리를 위로해 줍니다. 즉, 자기가 혹시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짓지나 않았나 염려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실상 그러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고민하는 그 자체가 바로 그들이 그러한 죄를 짓지 않았음을 입증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간에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사람도 과거의 죄가 어떠하든지 간에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자기 죄를 자각하고, 다가오는 심판을 두려워하며, 구원의 길을 알기 원하고, 더 나은 생활을 하기 소원하는 죄인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감정과 소원과 참회가 다 성령의 역사이며, 따라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정로를 벗어난 그리스도인들과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낙담시키기 위해, 자기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얼마나 잘 이용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로우신 성령님께서는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여러분 모두는 이 말씀 속에 포함됩니다!고(故 G. 캠벨 몰간(Campbell Morgan)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시험기간(수습기간) 중에는 범해질 수 없습니다. 그 죄는 한 시간 안에 범해지거나 한 행동으로 범해지지 않습니다. 그 죄는 시험기간(수습기간)이 끝날 때까지 분명하고 확고부동하게 취해진 자세의 결과입니다. 그 기간은 사람이 이생과 내생의 경계선을 넘어가야 끝납니다. 우리는 은혜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에는 성령님이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저는, 하나님을 끝끝내 버리는 사람만 하나님도 결국 버리신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용서받지 못하는 죄로 진행되는 그 과정이 시작조차 되지 않도록 우리는 한 순간도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죄는 십중팔구 다음과 같은 세방식으로 시작됩니다. 연기(延期), 가정(假定), 가식(假飾).성령의 내적인 활동에 의해 영혼들은 자신의 영원한 구원에 관하여 각성하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를 구원하는 복음의 진리와 주 예수님의 능력을 깨닫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연기합니다. 이렇게 하여 긴박감은 점차 가라앉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될수록 연기하는(미루는) 일은 점점 쉬워집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반응을 나타내는 영혼의 힘이 손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점점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영혼은 만성적인 무능(無能)으로 회개할 수 없게 되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고 마는 것입니다. 다른 경우로는 영혼이 하나님에 관하여 그릇된 가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구원받기를 원하긴 하지만 그 시간은 스스로 선택합니다. 그들은 죄의 자각과 돌이킴, 회개와 중생(重生)이 인간의 의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어리석게도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다른 경우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이르는 과정이 가식에 의해 야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즉, 하나님과 자기 양심에게 솔직하지 못함으로써, 변화되지 않은 마음이 여전히 죄를 품고 있는데도 구원을 받은 것처럼 꾸밈으로써 발생합니다. 그들의 말의 실상은 이렇습니다. "물론 저는 복음을 믿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저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쉽사리 포기할 수 있어요." 사람이 이런 치명적인 자기 기만에 습관적으로 빠지면 급기야 그 마음은 처음에 잘못임을 알았을지라도 그것이 진짜 사실이라고 믿게 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검은 것이 희게 되고, 횐 것이 검게 되며, 그 마음 자체가 거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제가 추측하기로는, 처음부터 거절하거나 배척하거나 반항하는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 악한 과정은 단지 연기하거나 가정하거나 가식하거나 하는 식으로 매우 완곡하게 시작되며, 그 이유는 거의 예외 없이 그 마음이 애지중지하는 것들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에 기인합니다. 오, 우리는 참다운 헌신을 사랑하는 구주께 드려, 하나님의 영원한 실재들을 어리석게 장난하는 일을 결코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성경에는 끝내 용서받지 못하는 죄로 변하고마는 이 과정을 잘 보여주는 예들이 세가지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사울, 헤롯, 이 세 왕이었습니다. 1. 애굽 왕 바로 먼저 바로를 생각해 봅시다(출 1 :14장). 첫 눈에 알아보게 되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괴롭히려고 잔인한 계교를 꾸밀 만큼 악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연속적인 "재앙"이 퍼부어짐으로써 참되신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로 증명되었으며, 그러기에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는 전혀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이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거역차기로 결심하고 말았습니다. 단지 인간이 알면서도 감히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지만 고(故) F. B. 마이어(Meyer)의 글에서 인용한 다음의 문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고압적이고 안하무인격인 자세로 묻는 바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애굽의 절대군주들이 지녔던 무제한적 권력을 고려해야 합니다. 각 바로는 태양의 아들이었습니다. 바로는 가장 위대한 신(神)들에게 총애를 받는 것으로 묘사되며, 또 그 신들과 함께 신전 깊숙한 곳에 앉아 똑같은 숭배를 받는 것으로 묘사되는 존재였습니다. '바로의 생명을 걸고'라는 표현은 최고의 맹세였습니다. 애굽 온 땅에서 바로의 허락없이는 아무도 수족을 놀리지 못했습니다. 거대한 애굽은 바로 그를 위해 존재했으며, 다른 모든 인민들은 그를 위해 살았고, 고난당했고, 죽었습니다. 미지의 원천에서 흘러 토양을 비옥하게 했던 저 도도한 나일 강도 그를 위해 흘렀습니다. 그 엄청난 숫자의 사제들과 마법사들, 아전들도 그를 섬기며 수종들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보좌에 앉아 백성들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은채 불쌍한 인민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백성들의 눈물과 신음, 그들의 속박의 울부짖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하지만 바로의 위엄을 더욱 높이기 위해 합당한 희생이 강요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현재의 절대 군주는 최근에 자기 장군들을 통해 큰 승리를 획득했으며, 이 성공은 그의 오만을 크게 부풀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오만한 조소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순종하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 하니라'(출 5:2).이 대답의 핵심은 '듣고'(순종하고)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이 자기에게 청원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보다 더 큰 권세를 지니신 분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을 보았으며, 이것은 그의 속살을 찔렀던 것입니다. '나도 역시 신(神)인데 그런 나에게 이런 명령을 감히 내리면서 나보다 더 강하다는 이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금까지 존재조차 알지 못하던 저 하나님이란 누구인가!한 꾸러미의 노예들의 하나님이 아닌가! 그런데도 어찌 저들이 감히 내 앞에서, 그리고 사제들과 아전들과 고관들 앞에서 하찮은 신(神)에 관해 입을 연단 말인가!'이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으로서 교만하고 허세부리며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영혼 속에서 그 치명적인 과정(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이르는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로의 마음이 18번이나 "강팍하여져서" 거절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약 절반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었고, 그 나머지는 바로 자신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회개치 않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상대적 반작용이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께 도전하며 자신을 강팍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저희 마음의 정욕대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롬1:24,26,28). 예루살렘을 향하여 한탄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 속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너희는 ... 못하리라"(마 23:37∼39).2.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바로의 경우보다 덜 심각하긴 하지만 애처롭기로는 훨씬 더 한 것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경우였습니다. 그의 이력은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초기의 약속 단계, 나중의 쇠퇴 단계, 최후의 실패 단계. 그의 출발은 우월한 신체, 높이 칭찬받을 만한 성격, 성령에 의해 갖추어진 특별한 영성, 자기 주위에 있던 경건한 사람들, 훌륭한 조언자인 사무엘 선지자와 더불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완고함과 하나님께 대한 거역은 그의 생애를 점점 더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급기야 제사장의 특권을 범하는 교만한 행동을 저질렀고(삼상 13장), 그런 다음에는 경솔하게도 하나님께 불순종했으며(14장),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또 불순종함과 동시에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15장). 그런 다음에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켜 소멸하였으며, 소인처럼 다윗을 시기하다가 결국 악마같이 그를 세 번이나 살해하려 하였고,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수개월 동안 그를 추적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령을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하나님의 성령도 그를 저버리셨고, 마침내 그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도다"(삼상 28:15).그리고 그처럼 훌륭한 약속과 더불어 출발했던 사울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물을 정도로 타락하였고, 결국 자살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습니다!그렇다고 사울이 우리 주님의 말씀하신바 그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생애는 그 죄에 이르는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 로마의 영주였던 헤롯 왕 마지막으로 로마의 영주였던 헤롯 왕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에 그의 경우는 두드러진 사례입니다 마가복음 6장 20절에 기록된 대로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활 속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그러나 헤롯은 자기 형제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탐하여 불법적으로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헤롯은 요한을 통해 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지 혜로디아를 통해 오는 죄의 음성을 듣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요한을 옥에 가두고,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써(17∼19절) 성가신 하나님의 음성을 자신에게서 제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음 과정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일한 사건이 언급된 누가복음 3장 19,20절에서 누가는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과 "이 위에 한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는 헤로디아를 기쁘게 하려고 요한의 목을 베는 일까지 자행했습니다(막 6:27).하지만 이 때에도 양심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죄의식을 가지고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그 후에 헤롯은 예수님도 죽이려 했으며(눅 13:31),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날 아침 빌라도가 보낸 사람들에 의해 헤롯 앞으로 끌려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누가복음 23장 9절에는 헤롯이 "여러 말로 물었으나" 예수님은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생활 가운데서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묵살되어 온 하나님의 음성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분노와 좌절에 빠진 헤롯은 이제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사랑은 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요, 이것이 바로 그리로 가는 과정입니다. 거절된 사면장 미국 서부에 한 성실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카드놀이를 하다가 몹시 다투던 끝에 그만 이성을 잃고 권총으로 상대를 쏴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교수형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소한 시비가 죽음을 부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청년을 사랑하던 친척들과 이웃들은 진정서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이 다른 마을, 다른 도시에서도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 진정서에 서명했습니다. 결국 그 진정서가 주지사에게까지 전달이 되었습니다. 바구니 가득 쌓인 진정서를 읽은 주지사는 그 청년을 사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주지사는 사면장을 써서 주머니에 넣고, 성경을 들고 형무소로 찾아갔습니다. 주지사가 형무소 감방으로 가까이 갔을 때 청년은 벌떡 일어나 철장문으로 다가오며 소리쳤습니다."여기 오지 마시오! 보기도 싫소. 당신같은 사람은 벌써 일곱 번이나 만났오. 나도 집에서 종교생활을 했단 말이요.""그러나 잠깐만 젊은이, 내가 젊은이를 위해 가지고 온 것이 있으니 ... ""듣기 싫어요! 만일 당장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간수를 부르겠소." 청년은 화를 내면서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젊은이 ..." 주지사는 간청하듯 말했습니다. "내가 젊은이를 위하여 가장 좋은 소식을 가져왔소. 말좀 하게 해주시오.""듣기 싫어요. 당장 나가지 않으면 간수를 부르겠소"여러번의 간청에도 청년은 주지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지사는 슬픈 마음으로 돌아서서 나왔습니다. 잠시 후, 간수가 오더니 "저, 지금 주지사님이 방문하고 갔는데... 그분은 자네의 사면장을 주머니에 넣고 왔으나 자네가 들으려 하지 않더군.""뭐라구요, 주지사님이? 오... 이런, 제게 펜과 종이를 좀 가져다 주십시오." 청년은 주저앉아 울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경외하는 주지사님,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주지사님께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주지사는 그 편지를 읽은 후 그 편지 뒤에다 『이 사건에 더이상 흥미가 없소』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청년의 사형 집행일이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할 말은 없는가?""예, 있습니다. 미국의 모든 청년들에게 이 말을 전해 주십시오. 내가 죽는 것은 살인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살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주지사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사면장을 거절한 결과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거절한다면 이보다 몇천배 더 슬픈 일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사실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다면 거절한 그 죄는 결코 사함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힘으로 처리할 수 없는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벧전 2:24). 그 많던 모든 죄가 예수님의 피로 씻어졌습니다(엡 1:7). 영원히 씻어진 것입니다(히 10:12)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 10:17).이제 당신의 모든 죄는 사면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멸망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어리석은 청년과 같이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예수님 믿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거절한다면 멸망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거절하여 멸망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사면장을 거절하여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된다면 그 청년의 말과 같이, "내가 멸망하는 것은 내 죄 때문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요 3:18).예수님 앞에 나오십시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 예배의 성공자 (창 4:3-5) 이 시간에 “예배의 성공자”라는 제목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자가 되길 원합니다. 가정에 성공하고, 신앙에 성공하고, 교육에 성공하고, 사업에 성공하고, 추구하는 어떤 일에 성공하고, 목회도 성공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성공은 인생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간 부자와 같이 인생에 성공하지 못하면 가장 불행합니다. 우리의 수없이 많은 노력은 성공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도 실패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성공하기를 원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성공하게 해주셔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다 성공할까요? 오늘 저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진정 성공하려면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배의 성공자만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도 성공자가 되게 해주십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서 참으로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예배의 성공자만 되면 다 성공한다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워털루 전쟁에서 참패하여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한참 눈을 감고 회상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전투가 치열하던 어떤 주일이었죠. 그때 나는 졸병이었지만 아침에 철모를 벗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린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가 내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예배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지금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처럼 유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의미 깊은 이야기입니다. 이 실화는 나폴레옹에게만 적용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가인은 예배의 실패자였지만 아벨은 예배의 성공자였습니다. 그 결과 가인의 인생은 실패로 끝났지만 아벨의 인생은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있고 그의 후손을 통해서 영원히 빛나고 있습니다. 예배에 실패한 가인은 죄도 다스리지 못합니다. 살인죄를 짓고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가인의 자손은 문명을 발달시키지만 어둠 속에 방황합니다. 그러나 예배의 성공자인 아벨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형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의인 아벨의 피라고 한 것을 보아 자기를 미워하고 죽인 원수까지도 용서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지금 밝고 밝은 천국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예배하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과 온갖 아름다운 복이 임합니다.그럼 예배의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1. 항상 예배함입니다. 필리핀 마닐라에 갔더니 가톨릭교회인데 하루 24시간 미사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우리 개신교도 각 도시마다 교회와 교파를 초월하여 24시간 예배하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일이 오면 각 교회에서 예배하고 언제든지 예배드리고 싶을 때는 찾아와서 예배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라와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구약의 성도들은 안식일과 특별한 절기 외에도 매일 하나님께 제사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매일 두 번 상번제를 드렸습니다. 상번제란 항상 드리는 번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매일 마음속에서 예배하는 생활이어야 하지만 예배드리는 수효도 중요합니다. 한 주간에 한 번으로는 부족합니다. 20세기 저명한 신학자 칼바르트는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우리 예배의 분량이 구약 성도들의 분량만큼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주의 모든 정규예배 뿐 아니라 매일 조석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크고 작은 특별집회에 참여하여 예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늘 기도와 찬송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찬양 테이프나 콧노래로라도 늘 찬송하십시오. 우리의 예배에는 소리가 있다는 점에서 참 감사합니다. 찬송소리 기도소리 설교소리 음악소리 소리가 있습니다. 묵상하면 영혼에는 잔잔한 도움이 있지만 소리 내어 예배하고 기도하면 영혼도 살고 능력도 임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9장을 보면 적그리스도가 나와서 성도를 박해할 것이 예언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박해하느냐? 그 핵심이 성소를 훼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하게 합니다. 마귀는 예배만 못 드리게 하면 자기들이 성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퍼젼은 "많은 원수가 있어서 제단의 불을 끄려고 한다. 그러므로 아침마다 성경의 나무를 더하고 기도의 바람을 보태어 제단의 불이 영원이 꺼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배에 등한히 하는 것은 마귀시험입니다. 모든 시험을 이기고 항상 예배하여 예배의 성공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준비 된 예배를 드림입니다. 아벨의 제사도 준비한 예배였습니다. 일 년간 양을 치면서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위해 흠도 없고 점도 없고 티도 없는 건강한 양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보다 먼저 피 없이 드렸으므로 농사만 지은 것이지 진리의 믿음 준비가 제대로 되지 못한 준비 되지 못한 제사였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곡식이므로 반드시 동생 아벨의 피의 제사에 곁들여 드려야 합니다. 아무리 성급해도 준비 없이 먼저 드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인도 그 제물도 열납 되지 못했습니다.이처럼 구약의 제사도 얼마나 준비하는 제사였는지 모릅니다. 성전론을 하면서 말씀드렸지만 제사장들은 한 번의 제사를 위해서 오랫동안 자기를 거룩하게 하며 준비합니다. 대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한 주간 앞서 들어가 폐쇄된 공간에서 자기를 준비합니다. 일상 모든 것이 예배인데 무슨 준비냐고 할지 모르지만 특히 정한 예배를 위해서는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를 위해서 한 주간 동안 온 성도들이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시간에도 일찍 나와서 기도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부흥하는 교회마다 기도부대가 있습니다. 교인들이 예배 시작 1-2시간 전에 교회 기도실에 와서 예배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도록 기도합니다. 그런 교회는 부흥은 물론 온 세상에 영향을 끼칩니다. 이처럼 외형적인 목표가 아니라 가장 은혜로운 교회를 목표로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쓰시는 교회가 될 것이고 마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강력한 요새가 될 것입니다.그리고 모세가 선 자리가 거룩한 자리였던 것처럼 예배하는 공간마저도 거룩하게 됩니다. 요즘 숯도 굽고 찜질도 하는 찜질방이 있습니다. 들어가 보면 숯을 굽는 가마에는 나무도 불도 꺼내어 찾아볼 수 없지만 들어가 있으면 땀이 나고 뜨끈뜨끈합니다. 이처럼 늘 예배하면 그 공간도 거룩해집니다. 신령한 예배를 자주 드리면 예배하는 공간까지도 은혜로운 장소가 되어 악령은 떠나고 훈훈하니 성령의 역사가 강합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이 아닌 때도 그 자리만 오면 은혜의 훈훈함을 느낍니다. 기도 많이 한 장소에 가면 기도가 잘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가정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라는 공간에 온갖 나쁜 에너지는 떠나가고 평안함이 오게 됩니다. 3. 하나님이 임하시는 예배입니다. 이사야 6장에 하나님을 모시는 스랍천사가 나옵니다. 이 스랍천사와 같이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임하십니다. 어떻게 예배했습니까? 사6:2-3을 보면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면서 예배했습니다.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린다는 뜻이요, 또 날개로 발을 가린다는 것은 겸손과 거룩으로 나를 낮춘다는 의미요, 두 날개로 날며 영광을 돌린 것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크게 영광을 돌렸는지 문지방의 터가 요동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듯이 이런 자세로 하나님께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임하심이 없는 예배라면 실패입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공연입니다. 그곳에는 공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는 하나님이 성령의 불로서 임하십니다. 그 때 우리 영혼이 그 손의 어루만지심을 느끼고 희열을 느끼고 살아나고 그 품안을 체험합니다. 아벨의 제단과 가인의 제단의 차이점은 가인의 제단에는 하나님의 임하심이 없고 아벨의 제단에만 임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하는데 신령이란 영으로 드린다는 뜻으로 율법의 형식이나 의식적 예배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간절함도 없이 늘 하던 대로 모여 흩어지는 식의 성의 없는 예배라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한 부부가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면서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박 집사 자동차가 3,000cc로 바뀐 것 보았어요?" 라고 묻자, 남편은 "못 보았는데"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다시 아내가 "어느 성도님 부인이 밍크코트 입은 것 보았어요?" 다시 남편이 "아니 몰랐어" 그러자 다시 아내가 "그러면 오늘 설교할 때 목사님 넥타이가 조금 삐뚤어 진 것 보았어요?" 라고 질문하자, 남편은 "설교 듣느라고 정신이 없었어" 하나도 못 봤다고 하니까 아내가 열 받아 남편에게 "그러면 오늘 성가대 찬양하던 이 집사 입술 립스틱으로 진하게 칠한 것 보았어요?" 라고 물어보자, 남편은 역시 "그것도 못 보았는데."라고 대답합니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아내는 "아니, 당신은 예배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을 하나도 못 보았어요? 예배 시간에 잠만 잤어요?" 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눈을 가리워서 눈물만 났지."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배입니다. 남편은 예배를 잘 드렸지만 아내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구경꾼만 된 것입니다.그리고 진정으로 드린다는 것은 이단의 비 진리가 아닌 진리의 예수님이 증거 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단의 교주가 예수님 자리에서 영광을 받는 그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도 우리가 예배하는 주일날 같은 시간에 찬불가를 부르며 예불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그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령과 진리 안에서 열심히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그곳에 찾아오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의 성공자가 모든 것의 성공자입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은 예배 하나에 달렸습니다. 한국교회의 희망도 예배에 달렸습니다.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십시다. 예배하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우리 모두 항상 예배하고, 예배를 준비하고, 하나님이 임하시는 예배를 드려 하나님께서 크게 영광 받으시고 우리 영혼이 살고 모두가 사는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긍휼을 구합시다.(호14:1-3) 2000년 6월 25일 주일낮예배 그날도 주일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이 민족의 비극적인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진 후에 정부의 고민 중에 하나가 6.25행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것입니다. 북한을 괜히 자극해서 모처럼 조성된 화해의 분위기를 망칠 수 없다는 분석입니다. 정치적으로, 또 정책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중요한 과제를 앞두고 우리 신앙 인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점거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호세아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오늘 주신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돌아오라는 말은 떠났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호세아 선지는 외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증거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실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는 외칩니다. "네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호세아가 예언하고 있던 북왕국 이스라엘은 역사상 두 번째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여로보암 2세가 40년간을 통치했었는데 거의 다윗과 솔로몬에 시대에 버금가는 영토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고 밝혀지고 있습니다.창고에는 먹을 것으로 가득하고 항아리에는 포도주가 넘칩니다. 들에는 양과 소가 풀을 뜯고 있고 곡식이 영글어 넘실댑니다. 이삭의 무게가 무겁습니다. 거리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낙네들의 모습이 보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상에는 살진 송아지와 양이 올려집니다.실로 풍요로운 삶입니다. 앗수르도 무섭지 않으며 수리아도 겁나지 않습니다. 적당한 외교력과 군사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든든한 나라가 어찌 기울어지겠습니까?그런데 여러분! 여로보암 2세의 통치기간을 주전 793년에서 753년으로 잡습니다. 그가 41년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완전히 함락된 연대가 주전 722년입니다. 여로보암이 그 위를 스가랴에게 넘긴 후 약 31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비참하게 아주 비참하게 멸망당합니다. 여로보암 1세에 의해 시작된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 210년을 마감합니다. 그 번영이 한 세대 30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번영의 시기에 축복 가운데 태어난 갓난이가 만 30살이 되던 해에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슬픈 역사입니다. 축복 가운데 태어난 아이가 30이 되어 망국의 한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알아야 합니다. 6.25는 이 민족에게 내려진 심판의 막대기였습니다. 일제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제의 탄압과 우상숭배 강요 앞에 의연하게 저항했습니다. 피를 흘리며 견디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일제의 강압에 견디지 못하고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해석하면서 우상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하나님 품에 안기신 한경직 목사님께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탬플턴 상을 수상하시면서 이 사람은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부끄러운 사람이어서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노라고 수상 소감을 밝혀서 모두를 머리 숙이게 한 적이 있습니다.한국기독교가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셔서 1945년 이 민족에게 해방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수여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민족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신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싸우고 이념과 정파의 이익과 정권의 창출 때문에 해방이라는 놀라운 선물은 포장지가 벗겨지자마자 싸움으로 짓밟혀지고 있었습니다.일반 역사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신학교가 나뉘고 분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우상숭배와 혼란과 분쟁이 가득했습니다. 6.25는 이 민족에게 내려진 심판의 회초리였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전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호세아 선지는 오늘도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예언자 호세아는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방법의 하나를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말씀합니다.여기서 말씀이란 이스라엘과 하나님께서 맺으셨던 언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자손 만대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약속을 파기하고 있습니다.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사는 방법은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의지가 무엇이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외운다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다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말씀을 제대로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음을 알아 하나님의 마음으로 내가 선 삶의 장에서 그 마음을 펼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입니다.1945년 우리 나라가 해방을 맞이하고 미국의 군정시대를 살게 되었는데 1945년 10월에 미군정 한국인고문관으로 11명이 임명되었는데 그 중 6명이 그리스도인이었고 그리스도인 중 3명은 목사였습니다. 뿐 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은 평가하기를 기독교정권이었다고 할만큼 기독교인들이 많았고 교회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국회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아 개회할 때마다 기도하고 시작했습니다.그 시대에 우리 민족에게는 세 가지 과제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민족국가 건설, 둘째는 일제잔재 척결을 통한 건전한 민족정신 함양, 셋째는 민족 생존 경제 기반 건설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이승만 정권은 이것을 온전히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취약한 분단국가만 남겨 놓았다고 혹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직장에서의 일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교육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돈을 벌 때 하나님의 마음으로 벌어야 합니다. 정치를 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자랄 때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이 목사님은 어려서 잘 믿으시는 어머님의 신앙지도 아래 자라났습니다. 일주일 내내 논과 밭에서 일하시다가 주일만 되면 옷을 깨끗하게 한복으로 갈아입으시고 교회에 가셔서 예배드리시고 봉사하십니다.새벽부터 일어나셔서 교회에 가십니다. 그리고는 교회에 가시기만 하시면 눈물을 흘리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주일 동안 썩어진 세상일만 위해서 하루종일 죽을지 살지 모르고 일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오늘이라도 겨우 주 앞에 나와서 주의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씀이 "너 같이 믿음 좋은 놈이 주의 일 하다가 죽어야지 어떻게 세상일 하면서 살겠느냐? 너는 커서 꼭 목사가 되거라" 가르치셨습니다.그래서 그때마다 '목사가 되어야 만 주의 일을 하는 것이구나.' 생각했고 '월요일부터는 토요일까지는 세상일만 하고 주일은 주의 일을 하는구나' 그렇게 여겼습니다.이 분이 커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니 뭔가 잘못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만약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만이 주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이 일생 주어지는 시간의 몇 %나 주의 일을 하는 것일까? 우리 몸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없는 불행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영원한 죄인이 될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한국교회가 달라질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직장이, 내 삶의 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가는 말씀의 실천 도장이 되어야 합니다. 지지난 수요일에 시편50편을 읽으면서 드렸던 말씀을 다시 강조하려고 합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을 좀 바꾸셔야 합니다. 주일예배는 일주일간 잘 못 살다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무장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달픈 인생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주일 예배를 통하여 새 힘을 얻고 기운을 얻어 인생 길을 좀더 활기차게 걸어가기 바라는 바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소극적이고 말씀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오히려 주일예배 잘 드리기 위해서 일주일을 건강하게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서서 예배 드리기 위하여 우리 삶의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소망하십니다. 내가 하루종일 가서 일하는 일터, 내가 서 있는 삶의 장이 제사를 드리는 번제단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번제단에서 드리는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드려야 할 제사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여러분! 예배 준비하시고 오셨습니까? 옷을 챙겨 입고, 헌금을 준비하고 시간에 맞추어서 예배 드리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일주일의 삶이 곧 예배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 준비 잘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잘해야 합니다. 정말 잘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못산다'는 말을 합니다. '누구 누구 못산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뜻입니까? 돈 얘기입니다. 가난하다는 의미입니다. 가난이 잘 못 사는 것입니까? 게을러서 그렇다면 문제가 있고 불의해서 그렇다면 그렇고 성실하지 못해서 그렇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의식들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가난해도 잘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돈을 버는 방법이 중요합니다. 승진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방법입니다. 출세 자체보다 그 과정이 중요합니다.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돈 벌고 승진하고 출세하고 공부하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살 길에 대하여 계속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세요.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세아는 이스라엘의 번영의 이유를 되짚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번영할 수 있는 이유는 앗수르와의 외교정책 때문이요, 그리고 이집트에서 수입한 마구간에 매여진 훈련된 말들 때문이고, 풍산의 신이 자신들을 도운 까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매력 있고 의지할 만한 것들입니다.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참 양식과 참 안전의 발판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무엇이 있습니까? 오늘 주신 본문 다음에 구절들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5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호 14: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호 14:6)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호 14:7)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호 14: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여러분 우리는 민족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저는 요즈음 남북정삼회담을 놓고 많은 생각을 합니다. 매스컴을 통하여 최초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신의 모습을 우리 국민 앞에 드러냈습니다. 평가가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김정일 쇼크니 김정일 신드롬이니 별 말들이 시중에 가득합니다. 마치 김정일이 이 나라 통일을 가져다 줄 것 같은 분위기가 있는 듯 합니다. 얼마 전 까지 정신병자 취급하고 왜곡된 인간이요, 전쟁놀이를 즐기는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평화주의자처럼, 실력 있는 지도자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게 사람의 마음이요, 이 마음이라는 것이 간사합니다.여러분! 사람 보아서는 안됩니다. 통일은 하나님만이 우리 민족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이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를 긍휼이 여기시도록 어느 때 보다도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통일이 사람의 손에 맡겨지고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지면 이 민족은 통일을 이루고도 엄청난 시련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새벽마다 심야기도회마다 기도하십시오. 통일이라는 과제는 몇 명이 지고 가는 것이 아니고 지고 갈 수 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요, 우리 모두의 삶에 엄청난 변화들과 영향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마음으로 삽시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시다. 하나님 앞에 이 민족 앞에 부끄럼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짝퉁 믿음은 안 됩니다"(마23:27-28) ★삼위일체q.3편 ★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요 14:8-21) ★성령체험과 분별 ★주님이 나타나시는 때 (막 16:9) ★예배의 성공자 (창 4:3-5) ★긍휼을 구합시다.(호14:1-3) ★성령과 악령의 구분 요즘 '짝퉁'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사전에는 없는 단어지만, 값비싼 명품을 모방한 가짜, 모조품, 유사품, 등을 말합니다. 한때 우리 나라는 '짝퉁 선진 한국'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였고 서울 이태원은 '짝퉁' 이 많이 나도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요즘은 1위 자리를 중국이 따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물건 뿐만아니라 신앙생활에도, 믿음에도 짝퉁이 있다는 것입니다.가짜가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여러분! '짝퉁' 믿음은 구원(救援)받지 못합니다.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겉과 속이 다른 그리스도인의 짝퉁 믿음을 보면서 새롭게 거듭나는 성도로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먼저 '짝퉁' 믿음은 어떤 모습인지 봅시다. 1) 짝퉁 믿음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짝퉁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어쩌면 진품보다 색깔도 더 화려하고 세련미도 탁월합니다. 그러나 속이 문제입니다. 사단이 천사로 가장해도 사단은 사단일 뿐입니다.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기도하고,십일조, 안식일을 준수하고,금식기도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보면 잘 믿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해 주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2) 짝퉁 믿음은 하나님 중심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 중심 이어야합니다. 내 중심, 사람중심, 세상풍조에 이끌리면 '짝퉁'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짝퉁신앙에 물들어 버리면 우리의 영적인 눈을 가리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뿐만아니라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약 효과가 떨어지면 약을 구하기 위해 찾아 헤매듯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옷만 걸쳐 입고 세상을 좇아가는 불신자와 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히브리서 11장1절~2절“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무슨 말입니까?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간구하고 바랬더니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누가?선지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선지들이란 믿음의 선배들입니다믿음의 선배들만 얻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그 믿음의 선지들 반열에 서는 믿음을 소유한 성도들이 되어야 할줄 믿습니다.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있어 가장 우선순위를 제일 하나님중심 이어야 합니다.그럴 때 가정도, 이웃도, 직장도, 사업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며, 약한 것을 강함으로 만들어 주시며, 병든 곳을 치유하사 강건케 하시며,없는 자를 있게 하시사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이런 말씀이 선포될 때 믿음 있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에 가면 말씀 말씀마다 큰 소리로 아멘 ! 아멘! 외치며 내 것으로 받아드리는데 우리교회에는 믿음이 있는 성도들이 없나 봅니다.맹숭맹숭 않아 있는 것 보니............아~성령이 뜨겁게 임하다보니 가슴이 너무 뜨거워 입이 터지지 않아서 대신 눈으로 껌뻑껌뻑 하고 계신 것이었군요~죄송합니다.난 그것도 모르고 우리 교회 성도님은 믿음이 없나 깜짝 놀랬지 뭡니까?그러나 여러분 그 뜨거운 성령의 충만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있으면 가슴이 시커먼케 타서 고통스러우니까 내 보내십시오 그럴 때 감동이 더 오고 은혜가 더 충만해지고 더 큰 능력이 임합니다. 한번해보겠습니다. 참~ 성령이 폭팔하도록 입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고 합시다.<주여 우리의 입술이 열려 선포되는 말씀이 내게 선포되는 주님의 음성이 되게 하시고 그 말씀을 아멘으로 화답할 때 성령의 감동과 은혜와 능력이 임하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아멘! >하겠습니다.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며, 약한 것을 강함으로 만들어 주시며, 병든 곳을 치유하사 강건케 하시며,없는 자를 있게 하시사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3) 짝퉁 믿음은 거듭나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3절에서 주님은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가 주님의 말씀에 놀라 어떻게 사람이 늙어 죽어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묻습니다.그 말에 주님은 요한복음 3장5절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물”이란 “물세례”을 말하는데 회개의 표시로서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그리고 “거듭남”이란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거듭남이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죄와 허물로 죽은 영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장사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의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유업으로 상속받고 부활의 몸을 입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거듭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임으로 불매 어디서 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적으로는 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므로 천국의 실재를 믿을 수 있고 천국을 보지 못하였어도 성경에 기록된 천국이 사실임을 믿고 천국을 상상하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하였습니다.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보지 못하는 천국을 보는 자들이며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 받았으므로 이미 우리 심령에 천국을 이룬 사람들입니다.그러므로,거듭나지 않고는 천국도 영생도 없습니다. 거듭난 신자가 하나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게 됩니다.2. 두 번째로 “짝퉁 믿음”은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시간이 경과하면 드러납니다. 짝퉁은 얼마 못가서 기능상의 문제도 드러나고 색상도 변합니다.짝퉁 신자는 인내가 없습니다. 바른 신앙의 사람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습니다.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세월이 가도 어떤 환경에 처해도 변함이 없습니다.가짜는 결국 버려집니다. 재활용으로도 사용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짝퉁 신앙도 버려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를 가려내실 것입니다. 알곡 같은 신자는 천국에, 양은 주님의 우편 영광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가라지는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이 기다릴 뿐입니다. 참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지금 이 시간은 바른 믿음 가질 기회입니다. 짝뚱 신자에서 참 믿음의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시간입니다.순간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외식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책망, 심판,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 은혜의 날, 구원의 날입니다.'짝퉁 물건'은 버려집니다. 그러나 '짝퉁 믿음'은 고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그 동안 내가 짝퉁 신자였다면 회개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그리고 다른 분들은 짝퉁 신앙이 되지 않도록 나를 재 정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 기독교 신앙은 삼위의 하나님과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다. ( 마 28:19-20 )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성경에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말은 없다. 그 뜻은 세 자리가 한 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성경의 기록을 보고 삼위일체라 한 것이다. 위의 성구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한 육체에 성령이 임했고(마 3:16) 하나님이 예수 안에 계심으로(요 14:10)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한 몸에 있으므로 일체라고 한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 예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다. 이러므로 삼위일체라고 한 것이다. 예수께서 육체를 벗고 개체로 계실 때는 각각 삼위로 계셨다.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고(요 3:34),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증거했다(행 7:55-56). 이와 같이 성령은 스데반에게 충만했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개체로 있음을 본 것이다.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요 10:35).예수께서 이 땅에서 역사하실 때는 하나님과 성령이 예수 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성경에 이름과 같이 우리가 성령을 받고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요 7:38-39) 삼위가 한 몸을 이루게 된다(약속한 성구 ; 롬 8:9, 갈 4:1-7, 요 14:20, 계 3:20). 이 일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 말세가 되므로 기독교 세계 안에는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가 많이 일어난다고 하셨다(마 24:11, 24).하나님의 계명 첫 번째가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었고(출 20:1-3), 두 번째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거나 절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출 20:4-6). 솔로몬은 다른 신에게 절하고 섬김으로 그 나라가 망했다(왕상 11장). 카톨릭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개신교가 있고, 그 중 일본 천황 신에게 절한 교단에서 구원 없다고 갈라져 나온 교파가 있다. 지금은 참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할 때이며(요 4:23-24 참고), 성부, 성자,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순종해야 할 때이다. 기록된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나는 그 때 신령한 몸(신령체)으로 하나님과 함께 오시게 된다(고전 15:51-54, 살전 4:13-16). 이 때 물과 성령으로 변화되어 새 피조물로 거듭난 우리는 사망과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요 3:3-7, 고후 5:17, 계 21:4). 죽을 것이 죽지 않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때는 사망이 생명에게 삼킴이 된 것이다. 이 말씀을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주장대로 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 (요 14:8-21)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 성부와 성자와 성령 (요 14:8-21)서 론 : 금주는 교회절기로 삼위일체주일로 삼위일체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 나누겠습니다. 본장의 전개 형식이 대화를 통한 것이거니와 여기서는 예수와 빌립과의 대화를 보여준다. 빌립은 브니엘에서 야곱에게(창 32:24, 30), 삼손의 부모에게(삿 13:3-22) 혹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출 34:4-8)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야 말로 전지 전능(마 28:18; 요 1:48) 무소 부재하신(마 18:20)자, 곧 성자 하나님이시라는(롬 9:14; 빌 2:6) 사실에 대해서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한편 16, 7절에는 보혜사 성령의 강림(행 2:1-13)이 약속되어 있다. 1. 빌립의 하나님 증명 요구(8-10절)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이 가로되 : 본절에서 빌립은 앞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예수의 신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신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예수에게 여쭙는다.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 본절에서 '우리에게'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는 당시 모든 제자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의 전제란 예수의 선포된 말씀을 이해고 믿기 앞서 구약의 신적 현현(Theophany)을 기대한 듯 싶다.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빌립의 질문가운데 '족하겠나이다'는 표현은 기대와 열망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빌립이 주께서 앞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집', '처소', '예비', '영접' 등의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기만 하면 족하다는 어리석음과 빗나간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빌립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함으로써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를 바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자세로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예수께 요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빌립의 요구는 신성을 지닌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우리에게')를 반영한 것이다. 한편 빌립은 현실주의 신자의 모형이니 육신으로 아버지를 보고 믿겠다는 일반인의 요구이다(영암 김응조).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 주께서는 미련한 질문을 던진 빌립을 안타깝게 여기시면서 다시 자세히 가르쳐 주신다. 본절에서 '너희'라는 말이 쓰인 것으로 보아 전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나 구체적으로 '빌립'이란 이름과 '네'(헬, 쉬)란 대명사를 특별히 사용하신 것은 특히 빌립에게 주목하시는 끝까지 자상함을 잃지 않으시는 예수의 배려도 볼 수 있다. 한편 주께서는 빌립에게 '알지 못하느냐'고 도리어 물으심으로써 빌립의 영적인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우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하나님과 예수의 동질적인 존재성에 대해서 지금가지 예수께서는 누차 강조하였다 제자들은 벌써 3년 동안이나 예수와 함께 있으며 하나님과 동등되신 예수 그리스도(빌 2:6)을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전히 영적으로 부족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빌립과 제자들에게 7절에서 하신 말씀과 거의 동일한 말씀을 반복하심으로 그들에게 예비된 영적 진리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신다.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 여기 이른바 '안에 있고'란 말은 성부와 성자의 본질상 연합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그 두분의 도덕적 연합의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삼위 일체의 교리로서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의 사역에 있어서 통일성을 기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전하신 목적을 이루어 나간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사명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며 이루시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명과 사역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반영한 것이 된다. 그렇다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만 수행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는 아니시며 도리어 자신의 신적 지위을 낮추어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스스로 맡으신 분으로서 능동적으로 사역을 행하시는 분이시다.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본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상호 보완적 존재가 아니라 완전한 동질성을 가지고 계심이 설명되어 진다. 즉 성부와 성자는 존재론적 측면과 사역적 측면에서의 동질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근거가 된다. 2. 하나님과 예수의 동역하심의 증거(11-15절) 1) 행하시는 사역을 보아서(11-12절) -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 10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존재론적 측면과 사역적 측면에서의 성부와 성자간의 동질성을 믿으라고 거듭 요구하신다.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성부와 성자의 일치 동일성을 믿지 못하거든 '그 일'로 인하여 믿으라 하신다. '그 일'이란 예수께서 일으키신 이적과 기사들을 가리킨다. 한편 '나를 믿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테 모이'는 단순히 그 자신이 가치를 충분히 보증하는 '자신의 말씀' 증거에 강조를 두며 믿음을 요청하는 것이다. 12절에서도 예수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언급하시는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도 이미 성부와의 동질성에 근거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다.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깜짝 놀라게 된다. 성부와 성자의 동질성을 그들이 이해했다면 성자가 하는 일을 자신들도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자신들의 연합한다는 의미이므로 제자들이 놀랄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는 말씀에서이다.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 '이보다 큰 것'이란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절의 표현대로 주의 일보다 크다고 한 것은 복음의 전파가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시던 시대보다 양적으로 확대될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의 구원받았으나 오순절 이후에는 사도들을 통하여 넓은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즉 주께서 크다고 표현하신 것은 질적인 면에서 향상된 위대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양적인 팽창을 지적하신 것이다.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 아버지께로 감 즉 예수의 승천이 더 큰 일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은 거의 틀림없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있었던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암시한다. 도한 이보다 큰 것은 반드시 질적인 의미에서 더 큰 영적 이적을 의미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Robertson). 즉 성령의 강림과 필수적으로 연결되는 복음전파 사역에 있어서(행 1:8) 제자들이 예수의 선교보다 더 확대되고 큰 능력으로 이렇게 될 것을 가리킨다. 2) 기도 응답을 보아서(13-14절) -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 기도의 응답에 대한 근거는 주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시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이다. 또한 구하는 것이 응답 받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구하는 기도가 시행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 이름을 부르는 단순한 행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 구할 수 있는 근거, 즉 보혈의 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는 것을 의미한다.내가 시행하리니 : 아버지께서 기도 응답하심이 아들로 말미암아서 실행됨을 가리킨다(Barrett). 예수의 이름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믿고 구하라. 이것이 신자에게 부여된 특권이다(영암 김응조).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인들은 사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를 먼저 해야 한다.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 본절은 윗절의 약속을 거듭 고조하는 말씀이다. 13절과 본절의 차이는 '내게'(헬, 메)가 추가된 것뿐이다. 한편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씀을 13절과 비교할 때 본절은 예수 자신이 더욱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서 예수께서는 명백히 기도 응답의 시행자이심을 강조적으로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3절과 14절을 종합하면 기도의 대상은 '내게'이며, 기도의 중보자는 '내 이름을', 기도 응답의 시행자는 '내가 시행하리라'이다. 3) 계명 지킴을 보아서(15절) -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본절은 주의 제자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본절에서 주를 사랑하는 자는 그분이 가르치신 계명을 지킨다고 말씀하셨다. 사랑이란 어떤 구체적인 정형이 있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하는 상대방을 아끼고 상대가 원하는 행동을 하는 관계성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며(3:16)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을 위해 죽으심으로써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따라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서 당연히 주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이는 의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2. 성령의 역사의 증거(16-21절) 1) 함께하시는 보혜사의 영(16절) -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 본절의 '구하겠다'는 말의 헬라어 '에로테오'는 '상대방을 향하여 동등 처지를 취하고 구하는 태도'와 과히 틀림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 본절의 '또 다른'(헬, 카이 알론)이란 표현은 보혜사가 둘 이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중보자 되시는 예수 대신에 중보자 되실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로서 '곁에'라는 뜻을 가진 '파라'와 '부른다'라는 의미의 '클레토스'가 합쳐진 단어인데 '도움을 받기 위해 곁으로 부름 받은 자'라는 뜻이 있다. 이 낱말은 영어 성경에서 '상담 자', '위안 자', '돕는 자'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셔서 영원토록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라 말씀하셨다. 성령께서는 항상 믿는 자들의 인격과 삶 속에 거하시면서 각자의 필요와 고충을 이해하시며 적절한 은혜로 채워 주신다.2)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영(17절) -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저는 진리의 영이라 : 본절의 '토 프튜마 테스 알레데이아스'의 경우 헬라어에서는 소유격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도 그 해석이 문제가 된다. 즉 이를 주격의 의미로 보면 '진리의 영'이 '진리가 되신 영'으로 해석되어 '성령이 진리'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소유격은 요한에게 있어 거의 그렇듯이 복적격적인 의미를 지님이 거의 확실하다(Brown). 즉 성령은 진리를 전달하는 영이요 혹은 진리를 증거하고 밝히시는 영이다(Morris, Bernard, Barrett).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 '빛'이란 예수를 깨닫지 못하던 어두움인 세상이 예수가 보내신 성령을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는 근본적으로 세상이 영적 통찰력이 없고, 영적 지식도 없으며, 영적 분별력도 없고, 성령을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예수에 무지한 이들이 아닌 예수를 아는 제자들은 그와 동격이신 성령도 당연히 안다. 본절과 16절에서 '너희와 함께' 있게 한다는 의미의 표현이 세 번 사용되었는데 각각의 문장에서 전치사의 위치를 달리하는데 이것은 동일한 단어의 사용은 피한 요한 특유의 강조적 용법인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3) 함께하시는 영(18절) -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 '고아와 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르파투스'는 요 13;33에서 제자들이 '소자들아'(헬, 테크니아)라고 불리운 것을 상기시킨다. 유대에게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이 여겨졌으므로 제자들은 스승이 죽었을 때 고아라고 불리웠다. 아무튼 유대 사회에서 과부와 함께 더불어 가장 불쌍한 부류의 사람들로 보호자를 상실한 고아가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신다고 확실한 보장을 하셨다.너희에게로 오리라 : '오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코마이'는 역시 3절과 같이 분명한 미래를 의미하는 현재형으로 성령의 오심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모두 표현하는 이중 암시적 용법으로 쓰였다. 이처럼 성령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부모를 다시 찾는 것과 같이 큰 힘이 된다.4) 다가오시는 영(19-20절) -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 '조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키 미크론'이란 표현은 일차적으로 임박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가까움을 의미하지만 20절의 표현과 관련시켜 이해할 때 그리스도 승천 이후로부터 재림 이전가지, 즉 종말론적 중간시기로 볼 수도 있다(Brown). 이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영안을 통하여 구속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그리스도를 볼 것이나 불신자들은 영적 어두움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망각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영적 안목이 없어서 예수나 성령을 보지 못하는 세상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예수를 본다. 이 표현 역시 1차적으로는 제자들이 직접 경험한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신약시대에 계속될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속사역을 가리키나 궁극적으로는 주의 재림시 영광가운데서 예수를 보게 될 것을 가리킨다.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 날에는 : '그날'(헬, 에케이네 테 헤메라)이란 종말론적 완성의 날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메시야 임재를 나타내는 주의 날과 연관될 뿐만 아니라 본서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표현과 거의 의미차이 없이 쓰였을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본절에서는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된 새로운 교회 시대를,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될 종말의 날을 가리킨다. 이 날이 이르면 성부와 성자간의 본질적 일체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믿음을 통한 영적 인격적 연합에 대한 신비를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한편 성부와 성자간의 연합과 성자와 성도들 간의 연합에 대해서는 전장의 목자와 양의 비유,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묘사하는 밀접성을 참조하라.5) 계명을 지킴으로 함께하시는 삼위일체의 영(21절) -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본절에서 주께서 가르치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주를 사랑하는 자이며 주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나의 계명'이란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새계명'을 가리키는데(13:34), 신자들이 서로 사랑할 계명이다.결 론 :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이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시고, 성령님 안에서 영원토록 보존하신다. 바로 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사는 자, 그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주님은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고, 사랑할 것을 명하신다. 성령님은 이처럼 내 곁으로 오신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작정하시고, 약속하시고, 성취하신다. 다시금 성령님을 바라본다.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의 말씀을 모두 생각나게 하실 성령님을 찬양한다. -----------------------------------[2] 삼위일체의 하나님 (시 8:1-9, 고후 13:13)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는 신조에 대해 요약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한 고백을 차례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에 대한 고백을 하면 될 것을 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라는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만,우리는 왜 꼭 이런 식으로 축복기도를 하는 걸까요? 삼위일체의 교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자면 아주 어려운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이 교회력으로 삼위일체주일인데, 그 의미를 오늘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기독교의 독특한 신앙고백입니다. 유대교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에서 기독교와 달리합니다. 유대교는 예수를 하나님에 대해 알려준 예언자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호멧교나 힌두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실제로는 이들과 별 차이없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하나님이고, 예수는 우리에게 신앙의 길을 일러준 위대한 성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유대교도나 마호멧교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요즘에, 종교간의 대화를 강조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고수하는 ‘그리스도 중심 모델’을 가지고는 대화가 안 되니까, 대화가 되는 방식으로 하자. 즉 차이점 가지고 얘기하지 말고, 공통점을 가지고 하자, 그게 뭐냐?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나, 유대교도들이 믿는 하나님, 그리고 마호멧교도들이 믿는 알라나 결국은 한 분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 중심 모델, 즉 신중심모델로 대화하자,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대화를 위해서는 공통점도 중요하지만 차이도 중요합니다. 대화를 위해서 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 대화의 내용이 풍성해지고 뭔가 기여할 바가 있는 것이지, 나의 정체성을 일방적으로 포기하는 것은 대화의 의미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즘, 가장 local한 것이 가장 global한 것이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지구화가 좋다고 해서 우리의 말과 문화를 버리는 것이 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문화를 다 내버리고 나면, 그러면 우리 모두가 다 서구사람이 되자는 건데, 과연 그게 바람직한 것입니까? 결코 아니지요. 서구적인 것이 다 옳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서구문화는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고, 그런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듯이, 아시아문화는 아시아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으로 그 고유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17장에서 말했듯이 모든 민족의 경계와 문화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 나름대로의 존재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기독교는 기독교의 특별한 존재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로 충분하다면 하나님이 왜 예수를 보내셨겠습니까? 기독교의 독특성은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특별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가장 명확하고 완전하게 나타났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빼버리면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빠져버리게 되므로 결코 이것을 양보할 수 없다는 고백 위에 기독교는 서있습니다. 흔히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 그러면 갖게 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심판자, 전쟁의 신, 질투의 신, 역사의 주관자...대체로 이러한 하나님이지요. 물론 다른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이러한 하나님은 대체로 인간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내려다보면서 명령하고 주관하고 구원하고 심판하며, 자기 외의 다른 어떤 신도 용납하지 않는 제왕적 이미지의 신,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신 앞에서 인간은 한갓 미천한 존재일 뿐이며, 그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러한 신관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저 높은 곳에서 인간의 잘못을 책망하고 호령하고 군림하고 지배하고 심판하는 제왕적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고통당하고 짐을 나누어지며, 스스로 피흘리며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종이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길을 걸어갔다면,예수님은 빌립보서 2장에 있는 말씀대로, 교만으로 인하여 죽음에 떨어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되시고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는 섬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삶 속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가장 완전하게 나타났다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의 이단 가운데 종속론(subordinationism)이라는 게 있는데, 이 입장에 따르면 하나님이 전체 집합이라면 예수는 부분집합입니다. 성자 예수는 성부 하나님께 종속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입장을 거부합니다. 예수는 부분집합이 아니라, 만약에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빠지면 하나님이 다른 신이 되어버리는 생명이요 알짬, 온집합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우리가 성경에서 구원얻는 줄로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성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요 5:39) 이것을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중에서 누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시나요? 당연히 예수님이시지요.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우리와 대화하시고, 존중하시고, 사랑하시며, 또한 우리의 사랑을 구하시고 우리에게 의지하기도 하시며 참여와 협력을 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론은 이분이 바로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 증거하는 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당신을 비우시고 사랑하시고 내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한 분이 다른 한분을 포섭하고, 어느 한 분이 다른 한 분에게 종속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본질이 같은 한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요컨대, 삼위일체론은 제왕적 신관을 따르지 않고, 철저하게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쌍방적인 신관을 견지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을 믿는 기독교와 전체주의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론을 믿는 기독교와 일방적 지배, 군림, 전쟁과 폭력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유일하신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서는, 그래서, 결국에는 전체주의가 극복되고 민주주의가 싹틀 수밖에 없으며, 일방주의가 사라지고 대화와 협력,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문화가 꽃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것은 우리 삶을 은혜롭게 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절대적으로 높고 거룩한 분이 군림하지 않고 나를 존귀하게 여겨주고 조건없이 나를 사랑해줄 때, 그 사랑 앞에서 갖게 되는 변화의 경험을 은혜롭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은 군림의 신이 아니라 은혜의 신이십니다. 당신의 힘을 동원해 억지로 굴복하게 만드는 신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를 통해 스스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가지고 그 앞에 옷깃을 여미고 마음과 뜻을 다해 헌신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사랑의 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철들게 하고, 이 사랑이 우리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합니다. 사랑을 하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는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경험한 은혜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주변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 새로운 감성을 가지고 느끼고 반응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은혜를 깨닫고 난 뒤, 세상 만물을 보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느껴지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눈에는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요 저기에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따스한 햇살 한 줌, 풀 한 포기, 바람 한 줄기, 그 어디에도, 높은 곳에 군림하지 않고 스스로 낮아져서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마음이 묻어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이 곧 구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우주만물에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다 깃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주만물을 은혜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과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 또한 삼위일체론입니다. 여러분, 미켈란젤로(1475-1564)라는 미술가 아시지요? 이분은 자기의 작품에 결코 서명을 남기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다음의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시스틴 성당의 천정벽화를 그려줄 것을 요청받은 미켈란젤로는 자기의 열과 성의를 다하여 작품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몇 달을 벽화그리기에 몰두했던 그는 마침내 불후의 명작 ‘천지창조’를 완성했습니다. 흡족한 마음으로 서명을 한 뒤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눈부신 햇살과 푸른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대자연의 아름다움! 그때 문득 그에게 한 가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그 어디에 서명 같은 것을 남기지 않으셨는데 기껏 작은 벽화를 그려놓고는 나를 자랑하려 했다니...” 그는 즉시 되돌아가 천정 벽화에서 자신의 서명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어떠한 작품에도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이기에 자연을 보면서도 이와 같이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 줄 믿습니다. 삼위일체론을 말할 때 또 한 분 빼어놓을 수 없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만물을 창조하실 때 성령이 참여하셨으며, 사사들이나 선지자들을 불러 쓰실 때도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돕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없으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깊은 생각을 알 수도 없고 관계 맺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인격이시기도 합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하신 일과 그분들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고 깨닫게 하며 소통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 우주만물을 지으신 뜻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의 의미가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깨달아집니다.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성경의 모든 기록도,역사 속의 모든 사건도, 죽어있는 화석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소통케 하시는 역사가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말씀을 읽고 역사를 대할 때 깨닫고 감동하며,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성령은 소통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론은 이 성령을 또한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본질을 같이하는 하나님의 다른 위격이라고 말합니다. 성자 예수를 성부 하나님에게 종속시키지 않는 것이 삼위일체론이듯이, 성령을 또한 종속시키지 않는 것이 삼위일체론입니다. 삼위일체론은 그만큼 소통을 중시하고, 대화와 사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나눔, 참여와 대화 없이는 하나님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본질적으로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것이요 대화하는 것이요 나누는 것이요 그러한 과정에 마음을 모아서 참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히 10:25), 마음을 함께 하여 기도하고 떡을 떼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행 2:43-47). 요즘의 추세는 성령을 강조하는 것이 흐름입니다. 그 동안 성령을 우리가 달라고 하면 받을 수 있는 무슨 물질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성령은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가령, 성령을 무엇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찬양이든지, 기도든지, 성도의 교제든지 그 어느 것도 더 가치있는 그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하나님이신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입니다. 말과 행실이 일치하고, 깨달음이 사랑의 나눔이나 실천과 분리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래서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골 3:23).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몸이 성령의 전이므로(고전 3:16, 고후 6:16)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롬 12:1) 요컨대, 삼위일체론은 그것을 사변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을 우리의 현실과 관련시켜 생각하면 자칫 편향적으로 흐르기 쉬운 우리의 삶을 균형있게 바로잡아주는 아주 중요한 교리입니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설명하고, 그것을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생동하는 역사가 되도록 하기 위한 교리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오류와 복잡한 시대상황 속에서 신앙의 본질을 지켜내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한 치열한 영적 싸움의 결과물입니다. 모쪼록, 아버지, 아들, 성령이 서로가 연결되고 하나가 되고 서로 통하면서 존재하였듯이, 우리의 삶 역시 이 하나님의 신비하신 교통 가운데서 서로가 연결되고 하나가 되어서 점점 퇴색되어져가는 이 시대의 정의, 평화, 생명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부활시키는 창조적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삼위일체 교회의 신비와 전례의 정점이 되는 축일입니다. 주님, 삼위일체의 신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교회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진실한 사랑을 나누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에 더욱 충실하게 하소서.우리 모두하느님의 초월성과 그 깊은 신비를 묵상합시다. 삼위일체ㅡ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세분 하나님이 아닌, 삼위 일체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버지이신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들이신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님,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오늘은 성 삼위이신 성령과 함께 묵상합시다. 예수께서는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업을 완성하고 승천하시면서 당신 제자들에게 협조자이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이 `빠라끌리또'(협조자)는ㅡ 그리스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로 누구를 보라, 하거나 법률 소송에서 누구를 두둔해 발언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10일, 부활하신 날부터 5일이 지난 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한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날은 오순절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농경 축제로 첫 곡식을 봉헌하는 감사절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율법을 선사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이 모여 있던 온 집안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머리 위에 내렸습니다.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사도 2,2-4)성령은 바람처럼 아무도 모른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성령은 불처럼 더러운 것을 태워 사람들을 내 것으로 정화하고 열정을 불어 넣어주고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혀 같은 것들이 불길처럼 이란, 불 혀(火舌)라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이 하시는 온 일을 전하는 선포와 신적 훈계의 선포를 가리킵니다.성령은 사람을 내적으로 변화시키고 자유롭게 하며 그들을 새 공동체로 형성시켜주는 일치의 힘이십니다. 불 혀 형상은 물론 성령의 본래 모습이 아니고 다만 상징일 뿐입니다. 불은 물건을 비추고 뜨겁게 하며 혀는 말할 때 씁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열정적으로 전할 사도들의 사명을 나타냅니다.제자들은 성령을 받고서야 비로소 예수께서 명령하신 대로 예루살렘을 비롯해 땅 끝까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성령 강림은 바벨탑 사건(창세 11,1-9)을 뒤집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각기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로 말했지만 한데 모인 사람들은 각기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성령은 분열돼 있는 사람들을 일치시키는 힘이십니다. 사도들은 본래무식하고 우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같은 그들은 성령과 그 은혜를 받은 다음에야 모든 것을 확연히 깨닫고 자기들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들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이 가득 차서 군중 앞에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첫 설교를 했습니다.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며, 우리는 다 그 증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려 당신의 오른 편에 앉히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성령을 지금 여러분이 보고 듣는 대로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사도 2,32-33)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감명을 받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사도 2,38) 이 말을 듣고 삼천 명이나 세례를 받고 입교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교회도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살아 있는 교회로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강림 날은 교회의 생일입니다.신약성서의 네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라고 한다면 사도행전은 성령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성령의 역사(役事)가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구원의 진리를 깊이 깨닫고 대담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는데 민중 앞에서, 법정과 의회에서, 그리고 관헌과 왕 앞에서 성령이 주신 지혜와 언변으로 진리를 강력히 전해 당대의 학자들을 침묵시켰습니다.또한 사도들은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는 여러 가지 기적을 성령의 힘으로 행했고 가야 할 곳을 식별했으며 악인들의 생각을 꿰뚫어보았습니다. 사도들은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항상 성령의 인도로 복음을 선포하는데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순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저희를 보살펴주시는 주님, 삼위일체이신 주님을 찬미하며 드리는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령체험과 분별 질문 기도 중에 어떤 명령이나 무엇을 하지 말라 등의 금지 사항이 나오기에 잘 아는 목사님께 성령의 음성인줄 알고 상담을 했더니 귀에 들리는 말도 위험하고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 역시 감정에 치우친 말일 수도 있으니 위험한 일이라고 합니다. 정말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 의심이 됩니다.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성도들은 자기나름대로의 신령한 영적 체험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신령한 영적체험이라고 해서 모두 성령의 역사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는 내주하는 성령의 역사나,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의 역사가 있는가 하면 마귀들도 끊임없이 악령의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를 분별해야만 하는데 가장 확실한 길은 하나님께로부터 영분별의 은사를 받는 것이지만, 모두가 이 은사를 받는 것도 아니므로 성도들은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영분별의 기준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 열매를 보아 분별 할 수 있습니다. 마7:15-20에 보면 아무리 놀라운 영적체험을 하였다 해도 그 열매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열매에 어긋난다면 그 체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 성령의 역사를 빙자하여 사소한 일을 간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집을 팔라, 팔지마라. 이 버스를 타라. 저 차를 타지말라. 오늘 상점매상은 얼마가 될 것이다."등 이러한 경우 거의 틀림없이 악령의 역사입니다. 사8:19을 보면 이것을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자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성령받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숨겨진 비밀을 들어내거나, 교회나 성도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소한 일을 예언하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신접한 자로 보아 틀림없습니다. (나) 영적인 체험을 했어도, 마음에 평안이 없고 불안과 고통의 중압감으로 고통스럽다면 이는 악령에 억압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 영적체험을 한 후에 더러운 생각이나 교만이 마음을 사로잡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으로 성령받은 사람에게도 때로는 유혹이 엄습할 때도 있으나, 악령에 사로잡힌 자는 자신의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추한 생각과 참소나 교만이 심령을 사로잡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더러운 영이기 때문입니다.(마10:1, 막1:28) 둘째로, 그 사람의 언어생활을 통하여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받은 사람의 모든 말은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며, 그분에 관한 것을 알려주시는 데 사용됩니다.(행10:45,46) 그런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를 높이며 성도들을 향하여 협박과 공갈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스스로 나에게 안수를 받으라고 강권하며 교회를 비판하고 직접간접으로 금품을 강요하거나 말이나 행동이 방자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통해 놀라운 기사이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악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셋째로, 그 사람의 기독관을 통해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받은 이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된 주장을 하거나 자칭 예수나 감람나무라 하여 하나님을 높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것 또한 악령의 역사입니다. (요일4:3) 그러므로 성도는 모름지기 영적체험도 중요하지만 영분별을 잘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일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 주님이 나타나시는 때 (막 16:9) 이 시간에 “주님이 나타나시는 때”라는 제목입니다. 안개의 나라 영국에 날씨가 맑을 때면 온 나라는 순식간에 국민적 축제의 날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손을 잠시 놓고 공원으로 산으로 몰려간다고 합니다. 매일 뜨는 해도 모습을 나타내면 이렇게 반가운데 그 해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다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을 영광의 비밀 만국의 보배라고 말씀합니다.그러므로 성도의 최고의 행복은 주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입니다. 이때처럼 복되고 기쁨이 넘치는 때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지만 우리 앞에 나타나시고 우리 곁에 나타나시고 우리 속에 나타나십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입니다. 에녹은 이렇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300년이나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가장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나 깨나 주님의 온전한 임재를 날마다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그럼 언제 주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까요? 1. 위기의 때에 자기를 나타내십니다. 요20:19에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목숨이 두려워서 떨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시고 평강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처럼 위기가 닥치면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평강과 위로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는 아이에게 주님은 하루에도 수없이 나타나셔서 위로하시고 천국의 비밀을 보여주셨다는 간증을 읽어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혼자 두지 아니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고아처럼 혼자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을 때도 예수님은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확신 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영국의 여객선 스텔라호가 암초에 부딪쳐 난파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친 파도는 승객들이 탄 구명보트를 모두 삼켜버렸습니다. 그런데 12명의 여성이 탄 구명보트는 노가 없이도 계속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보트에는 유명한 가수인 마가렛 윌리암스가 타고 있었는데 그는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믿음의 징표로 함께 찬송을 부릅시다." 라고 외쳤습니다. 12명의 여성은 찬송을 부르며 사나운 폭풍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격랑 속에서도 보트는 침몰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순양함이 생존자들을 찾아 나섰는데 안개 때문에 한치 앞도 볼 수 없었지만 찬송소리를 듣고 무사히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도우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을 때 나타나십니다. 빌3:10-11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랬습니다. 내가 죽어지면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의지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나를 포기하고 주님을 택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내 뜻보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죄를 회개하여 죄와 상관이 없게 되고,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높이며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아버지의 뜻에 절대 복종한 것 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자기가 주이니 안 되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어야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진짜 죽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진짜 죽어야 할 것이 죽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사는 것도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어떤 부인이 사는 것이 어려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너무 괴롭습니다. 저 살기 싫으니 저를 천국으로 어서 불러 주세요.” 간절한 기도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래 내가 네 소원에 응답해 주마. 그런데 하늘나라로 너를 부르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구나!" "뭡니까?" "네가 하늘나라에 오면 장례식을 해야 할 텐데 집안이 너무나 어지럽혀 있구나. 사람들이 장례식에 왔을 때 이 사람이 그래도 살림을 잘하고 갔다는 그런 이야기를 듣도록 집안 청소 좀 할래?" "하겠습니다." 그래서 부인은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돈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또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정원 좀 내다보아라. 정원의 풀을 깍은 지 오래된 것 같구나. 사람들이 정원도 손질하지 않고 갔다고 흉보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래서 부인은 며칠 동안 열심히 땀을 흘려가며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꽃도 심고 나무도 심고 열심히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또 말씀하셨습니다. “됐다, 그런데 지금 네가 죽으면 네 자식들이 마음에 걸리지 않니?” “그렇습니다. 그동안 너무 소홀했습니다.” “그러면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 그걸 느낄 수 있도록 좀 자식들에게 며칠간 네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을 다 해 봐라.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해 봐라.” 그래서 부인은 며칠 동안 자식들과 대화를 나누고 사랑한다 말해주고 안아 주고 손도 잡아 주고 맛있는 식사도 준비해서 먹이며 사랑한다는 표현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네 남편이 걸리는구나. 네 속 썩인 거 내가 잘 안다. 그 사람으로 인해 네 마음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니? 밉지? 그러나 내 마지막 부탁인데 남편이 장례식 하면서 그래도 참 좋은 여자였는데 이런 추억을 가질 수 있도록 사흘만, 꼭 사흘만, 남편이 뭐라 해도 절대로 대꾸하지 말고 남편에게 할 수 있는 한 마지막 친절을 베풀어라.” 그 말씀에 부인은 천국 가기 정말 어렵구나 생각했지만 이를 악물고 사흘 동안 예수님 말씀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하늘나라에 갈 시간이 다 되었구나. 마지막으로 네 집을 한 번 더 돌아보려무나.” 그래서 부인은 집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잘 정돈된 꽃이 핀 정원이 보기 좋았고, 집안도 깨끗이 정돈되어 상쾌했습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실로 오래간만에 자녀들의 얼굴에서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 한구석에서 무척 괴롭고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편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부인의 머릿속에는 너무 좋아진 집안 환경을 바라보고 갑자기 주님을 따라가기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 저 좀 이따 가면 안 되나요? 가족들과 같이 더 살다가 주님이 오라 하실 때까지 가겠어요.”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육체로 죽는다고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죽어야 할 내가 죽어져야 합니다. 여인처럼 주님의 말씀 따라 철저히 죽어질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가정은 복의 동산으로 변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우리 모두 이렇게 순종하고 저렇게 순종할 수 있을 만큼 죽어져야 합니다. 이 모습이 죽어진 모습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주인 된다면 어찌 주님이 나타나시겠습니까? 우리 옛사람은 야생마와 같아 속박이 싫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지만 고난 속에서 고분고분 순종함을 배웁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려는 우리의 야성이 고난 속에서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악한 인간은 야성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 속에서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고통스러우며 반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복임을 깊이 체험하게 되고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히5:8).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바울의 그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행26:14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하셨습니다. 바울의 날마다 죽는 그 믿음도 고난 속에서 배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도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교만하지 않는 비결을 가졌습니다(고후12:7). 청년 김익두도 날마다 말씀 보며 회개하며 자기를 죽였기에 예수님이 나타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후2:11-12) 3.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누구에게 나타나셨습니까?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막16:9에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그랬습니다.자기를 사랑하면 절대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나를 잊고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늘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늘 주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요14:21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도 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이 기도를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실 것이며 달라진 모습으로 다음 주에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고 내가 나타나면 주님의 모습은 숨겨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사는 것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만사는 주님의 나타나심에서 해결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말씀 앞에서 날마다 죽어지고 순종하고 충성하고 사랑하며 더욱 변화 되십시다. 그래서 항구적인 하나님의 임재의 은총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가장 평안하고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죄사함을 받고 죄의 가리움을 입은 자는 복있는 자로다!"
이 말은 실로 축복의 말입니다. 죄사함이 없다면 축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확실한 믿음을 갖는 것은 참 행복의 유일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죄사함 없이 행복하다는 것은 마치 어느 때 영원한 구덩이에 빠질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제거되었다는 하나님의 확증을 소유하기 전에는 확고한 행복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죄사함에 대한 불확실은 항상 죄의 무거운 짐을 느끼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틀림없이 근본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주님께서 다 지고 가셨나 아니면 아직도 마음(양심)에 남아 있느냐를 구별하지 못하는 모호한 의혹 상태에 있다면 이것은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이 죄사함에 관해서 설명하기 전에 먼저 독자들에게 아주 정확하고 확실한 개인적 질문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실하고도 안정된 확증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내가 이 질문을 초두부터 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식적으로는 알고 설교도 하면서 자기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는 것은 주제넘은 것으로 고집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이 용서받았다는 귀중한 사실에 대해서 항상 의심하는 것이 오히려 겸손의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는다는 추상적인 것이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겸손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은 다음의 성경 구절 앞에서 문외한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6-4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골 1:14) 여기서 우리는 "용서"와 "죄사함"과 "죄"라는 말이 주의 이름으로 설교된 것을 봅니다.(이 단어들은 위의 3개의 성경 구절에 똑같이 들어 있다.) 그리고 위의 말씀을 듣고 믿은 자들은 다 죄사함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모든 족속"의 범주에 속한 에베소, 골로새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요, 그 내용은 예수의 이름으로 얻는 죄사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복음을 믿고 "죄사함"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제넘은 것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던가? 아니면 "죄사함"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이 경건하고 겸손한 것이었던가?사실 그들은 사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즉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외인이요 손"이었습니다. "악을 도모하는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다이아나 신"에게 의심 없이 무릎을 꿇고 절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우상과 악한 행습에서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죄사함"의 말씀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말씀들은 진실이었습니까? 아니면 거짓이었습니까? 이 말씀들은 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까? 그것은 모두 신화 속의 꿈같은 그림자였습니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까? 그 말씀에는 죄사함에 대한 확실성도, 정확성도, 확고 부동한 것도 없단 말입니까? 이 질문이야말로 아무도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로부터 해명을 요구하는 질문들인 것입니다. 만일 참으로 죄사함에 대해서 깨우친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사도 시대에는 어떻게 그 사실을 깨우칠 수 있었습니까? 만일 1세기에 깨우칠 수 있었다면 지금 19세기에는 왜 그 사실을 깨우칠 수 없단 말입니까?(C. H. 매킨토쉬는 1820-1896년대의 사람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 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4-8)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어느 때나 죄사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고히 알려져 왔습니다. 위에 인용한 성경 구절의 하나만으로도 죄사함 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거짓 가르침을 누르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신기하고도 귀한 축복을 깨달은 사람들을 성경에서 발견한다면 나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 우리가 성경을 열고 각종 악습에서 죄책감을 느낀 사람들이 죄사함을 받은 것을 발견한다면 아무리 사악한 악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확실성으로 자신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 다윗, 히스기야, 중풍 병자 등 그 외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사함을 믿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주제넘고, 추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그들의 마음 속에서 죄사함에 대해서 의심했다면 그것을 겸손하고 경건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어떤 이들은 그들을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에 관계되는 한 그들이 특별한 경우였던, 아니였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성경 속의 그들도 자신의 죄사함에 대해서 확실할 수 없다는 주장에는 틀림없이 반박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감정과, 연약성과, 과오와, 죄지을 가능성에 쉽게 영향을 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글 쓰는 입장에 있든, 독자의 입장에 있든 온전한 죄사함의 복음을 듣고 기뻐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귀중한 문제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고수하는 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할 만한 성경적 근거도 없이 고집합니다. 성경에 있는 이 모든 예들이 우리에게 선례로 제시 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경우라고만 한다면 이것은 진실일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가. 아브라함의 경우를 주목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3-25)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고 했습니다.(창 15:6) 성령님도 역시 우리가 믿으면 의롭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 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 10:43)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인데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죄사함에 대해서 거리낌 없이 전했을 때 그 내용의 진의가 무엇이었느냐입니다. 그들은 죄사함에 대해서 확신 할 수 없다는 사상을 열심히 전달하려고 애썼을까요? 안디옥 회당에서 바울이 청중들에게 "우리는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복음)을 전합니다" 라고 했을 때 아무도 자신의 죄사함에 대해서 확신 할 수 없다는 사상을 전한 것입니까? 만일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과 염려가 남게 된다면 어떻게 그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만일 아무도 죄사함에 대한 확신을 즐길 수 없다는 것이 진리라면 사도들의 전체 설교는 뒤집혀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의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알 것은 아무도 자신의 생애 동안에는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는지, 못받았는지를 알 사람은 없는 이것이라" 사도들의 전체 설교와 가르침에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까? 사도들은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난 구세주를 믿는 믿음의 적절한 결과로 얻는 죄사함을 가장 확실하고 충실한 방법으로 어디서나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교사들이 너무나 강하게 주장하는 가르침은 사도들의 그것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즉 우리 모든 죄의 온전한 용서를 믿는다는 것은 위험한 추측이라는 견해라든지, 영원한 의혹 속에서 사는 것이 절대자 앞에서 겸손한 태도라는 주장이 곧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하고 평안한 안식을 믿고 즐길 수 없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수 없습니까? 또는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희생에 맡길 수 없는 것입니까? 소망 없는 혼돈 속에 영혼을 버려두는 것이 복음의 유일한 효과일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나는 믿지 못합니다. 성령님은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증거하시지만 나는 그 증거를 믿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과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멸시하는 것과 성령님의 기록을 믿지 못하는 것이 경건과 겸손이라면 이것은 너무도 슬픈 일입니다. 이런 것이 복음이라면 믿음으로 화평과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그때부터 안녕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면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게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77-79) 라는 말씀은 그때부터 헛된 것입니다. 만일 이 "구원의 소식"을 아무도 알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복음이 주어졌다는 말입니까?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문제는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속여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즉시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여 왔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과 죄를 제거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확고히 믿을 수 없다고 핑계될 수 있을까요?(성경을 사람의 글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종종 그렇게 생각한다-역자 주) 인간은 스스로 속여왔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를 신뢰하기가 두렵다. 인간은 타인을 속여왔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도 속일 것이 두렵다. 이것은 흔히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때때로 율법과 육적 경건주의가 사람들에게 입힌 외식적 옷을 벗겨서 그들의 상태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리를 알고, 교단이 인정하는 건전하고 계몽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옹호자로 자처하며 나설 때 그들의 주장을 흠없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해 보는 것도 우리의 임무입니다. 만일 그들이 주장하기를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고 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고, 인간이 생활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최상의 것은 혹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나라에 갈지도 모른다는 연약한 소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단호히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그들의 가르침을 배척해야만 합니다. 거짓 신학은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확신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어느 쪽을 믿어야 할까요? 전자는 어두운 의혹과 두려움을 주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확증을 심어 줍니다. 전자는 우리를 우리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게 하지만, 후자는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지하게 합니다. 어느 쪽에 가담할 것입니까?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볼 때 그 안에는 아무도 영원한 구원을 확신 할 수 없다는 사상들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나는 단호히 성경에는 그런 사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성경 어느 부분에서나 분명한 방법으로 모든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용서와 영접에 대한 가장 밝은 확신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묻겠습니다. 성경에 있는 가장 완전한 확증을 즐기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과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사역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확신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성령님에 의해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의 현재 다루고 있는 문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독자들이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께서 해주시는 한 안전하다는 사실을 소유할 수 있다는 충분한 확증을 갖고, 이 연구를 마치기 바랍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죄사함에 대한 확증을 즐길 수 있다면, 왜 나의 독자들이라고 해서 그와 똑같은 확증을 즐길 수 없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입니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내가 죄사함에 관한 복음을 단순히 믿기만 하면 그때 나는 용서받은 것이요, 의롭게 된 것이요, 주님께 영접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나의 모든 죄를 그가 갖고 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모든 죄를 그분께 담당시켰습니다. 그분은 그 모든 죄를 지고,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 점의 죄도 없이 하늘로 오르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나의 모든 죄 때문에 형벌을 받으신 그분이 지금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계신다면 나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를 공격하던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죄를 짊어진 그분 그리스도에게 떨어졌습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그분이 받았기에 나는 부활과 영광을 받으신 구세주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영원한 용서를 받고 영접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나의 독자들이여, 이것을 믿습니까?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습니까? 타락된 죄인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와 진실된 마음으로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였습니까?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성경대로 죽으셨다가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당신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의롭게 된 것입니다. 영접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여진 것입니다. 사실 당신은 불쌍하고 연약한 피조물이요, 매 순간마다 거역하는 악의 성품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명이요, 당신의 지혜요, 당신의 의요, 당신의 거룩이요, 당신의 구속이요, 당신의 모든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서 하늘에 항상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죽었고, 계속 깨끗이 보존하기 위해서 살으셨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죽음이 하실 수 있는 한 깨끗해 졌고, 그분의 생명이 당신을 보존하는 한 깨끗하게 보존되어집니다. 그분은 스스로 당신을 위해서 책임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변화시킨 상태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을 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분과 하나가 된 것을 보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두운 율법과 외식주의와 거짓 신학의 복도를 걷지 말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것들은 여러 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죄를 짊어지고 잘못 인도된 불쌍한 심령들의 한숨과 통분과 함께 뒤범벅이 되어 들려 온 소리들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충만한 기쁨으로, 부활하시고 영광 받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선 것을 안다면, 지상에서의 당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고, 하늘에 예비 된 영화로운 집에서 영원히 살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죄사함이란?(2) 하나님의 권위로 당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를 원하면서 성령의 가르침에 따라 말씀 안에서 죄사함의 과제를 계속 풀어 나가도록 합시다. 다음 3가지 항목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 둘째, 하나님의 죄사함의 양(크기) 셋째, 하나님의 죄사함의 방법(형태) 위의 열거한 세 개의 항목은 우리가 이 과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분명하고도, 충분하고, 명확한 도움을 줍니다. 우리가 먼저 죄사함의 기초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면, 더욱 죄사함의 양(크기)에 감사하게 될 것이요, 또한 죄사함의 방법을 더 알기를 원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를 상고하는 동안 계속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 죄 때문에 염려 속에 있는 독자들이 이 귀한 진리를 이해하여야만 한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취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죄사함의 기초가 확실히 깨달아지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난 심령(양심)이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관해서 인간은 모호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즉 죄인을 영접하려는 하나님의 준비, 죄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준비, 심판의 자리에 보내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뜻, 그리고 속히 죄인을 은혜의 장소로 보내려는 하나님의 안타까움 등,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인간은 모호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유죄로 판명난 자가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운 분이시면서도 구세주로 계시고, 또 죄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얼마나 깨끗한 분이시면서 하나님의 속성이 얼마나 이 모든 것을 조화시켜 왔는가를 알기 전에는 진실로 깨우침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화평에 대해서 문외한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유죄를 선포하실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우리 양심에 부어지면 죄는 절대로 하나님의 존전에 그냥 나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죄는 어느 곳에서 발견되든지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에서만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다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방법이 이해되고 믿어지기 전에는 심한 염려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심판도 실제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알아져야 하고 정식으로 상고되어야 합니다. 공의는 만족되어야 합니다. 양심은 깨끗함을 입어야 합니다. 사탄은 잠잠케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귀한 구속 사역은 공의의 하나님과 칭의(稱義)를 받은 죄인의 달콤한 밀월을 즐길 수 있는 기초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구속 사역 속에서 저주받은 죄를 보게 되고, 공의가 만족해하는 것을 보게 되고, 율법의 중요성을 보게 되고, 죄인이 구원받는 것을 보게 되고, 원수 마귀가 당황해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창조 시에는 이런 것을 결코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피조물들이 표면에 나타난 능력과 지혜와 선양(goodness)을 즐겼으나, 첫 창조는 공의를 통과한 은혜 같은 것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공의와 화평" 또는 "자비와 진리"의 아름다운 조화 같은 것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갈보리에서 보여지도록 예비해 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점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공의롭고 의로운 분이신가요? 하나님은 영광스런 해답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해답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다루었습니다.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이 새롭고 영원한 부활의 기초 위에서 죄인을 다루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점 일획의 죄라도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제거하실 수는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 위에 의로운 진노를 퍼부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믿는 죄인(구원받은 성도)위에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모든 기록은 장엄하도다. 죄는 심판 받았고, 죄인은 구원을 얻었도다" 귀한 말씀입니다. 두려워하는 모든 죄인들은 믿음의 눈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음에 안정된 평화를 주는 진리의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도 만족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나도(믿는 사람) 만족합니다. 여기서 나의 죄스럽고 고통스런 양심은 달콤한 쉼을 발견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앞에 검은 산 그림자같이 증대해 가는 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영원한 진노로 나를 위협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보혈은 하나님의 시야에서 그 모든 죄들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 모든 죄는 사라진 것입니다.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납덩이처럼 하나님의 망각의 수렁 밑바닥에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나는 이제 자유자 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 때문에 못 박히셨고, 이제는 일점의 죄도 없이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그분의 자유를 나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인 것입니다. 얼마나 굳건한 기초입니까? 누가, 무엇이 그것을 간섭할 수 있을까요? 공의는 그 기초를 확보했습니다. 고통의 양심은 그 안에서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공의자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 계시의 빛과 능력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단순하고 확실하고 만족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공의자로 계시하신다면 나는 그 계시된 말씀 속에서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적 영광이 죄인에게 비췰 때, 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를 심판하신 분이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죄인을 의롭다 하셨음을 보게 되고, 깨닫고, 믿고,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두려움에 가득찬 독자들이여! 간청하노니 죄사함의 참 기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고통 속에 있는 불쌍한 양심이 영원불변의 죄사함의 기초 위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죄사함의 양(크기)과 죄사함의 방법을 아무리 숙고할지라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물어보겠습니다. 이 순간 완성된 구속 사역의 기초 위에서 안식할 수 있는 은혜로부터 당신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도데체 무엇입니까? 말해 보십시오. 당신은 절대로 굽히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십자가보다 더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다른 것을 필요로 합니까? 하나님께서 의칭(義稱) 받은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완전한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한 그 기초가 바로 십자가가 아니었습니까? 이에 대해서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만족합니까?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충분하신 분이 아닙니까? 당신은 아직도 자신 안에 있는 어떤 다른 것, 즉 당신 자신의 방법이라든가, 당신 자신의 사역이라든가, 당신 자신의 생각이라든가, 당신 자신의 감정 같은 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헛된 것인 줄 알고 중지하십시오. 당신은 결코 다른 것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무언가 찾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장애물이 될 것이요, 손해거리요, 방해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도 충분한 자요, 동시에 당신에게도 충분할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당신은 진실로 행복할 것입니다.(그렇게 되기 전에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아마도 이 순간 유일한 죄사함의 기초인 온전하고 충만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당신에게 안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 실질적인 깨달음과 흥미를 갖고 두 번째 항목인 죄사함의 양(크기)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2. 죄사함의 양(크기)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서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충분한 구속 사역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죄에 적용되는 실제적인 자유를 붙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노래하면서도 그 가사의 능력 있는 내용에 심취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를 누가 그 큰 은혜로 용서하실까!" 그들은 주께서 단지 죄의 일부분만 짊어진 것으로 느끼는 것 같습니다. 즉 그들이 회심 시의 죄까지만 주께서 짊어지신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매일 짓는 죄에 대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마치 매일 짓는 죄는 과거의 죄를 용서하신 것과는 다른 기초에서 다시 용서되어지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따금 심히 낙담하고 매우 시달리는 생활을 합니다. 그들이 모든 죄에 해한 온전한 죄사함의 예비를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알기 전에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와 그 죄를 자백(시인)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성도가 그렇게 자기 죄를 자백함에 대해 무어라고 말했던가?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자! 왜 사도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라고 말하고 있으면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사"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모든 죄의 문제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제거되고 평온하게 되었다는 기초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의로운 대언자로서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죄사함에 관한 한 다른 어떤 기초 위에서 미쁘시고 의로우실 수 없습니다. 믿는 자들의 죄는 십자가에서 전부 속죄된 것입니다. 만일 하나의 죄라도 남았다면 그들은 영원히 버리운 자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하찮은 죄라도 하나님의 성역에는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첨가해서 말한다면 만일 믿는 자들의 모든 죄가 예수의 죽음으로 속죄되지 않았다면 그때는 자백(시인)으로도 안되고, 기도로도 안되고, 금식으로도 안되고, 그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용서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미쁘시고 의로운" 성품에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기초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직 "미쁘시고 의로운" 성품으로만 이 기초를 꼭 실천하셔야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기초가 곧 하나님께는 찬양이 되고, 우리들에게는 최고의 안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독자들이 다음과 같이 부르짖을 것을 상상해 봅니다. "무어라고요? 당신은 우리의 미래의 죄까지도 다 속죄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고 저주받은 시기로부터 미래의 죄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믿는 자들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을 때로부터 18세기 동안 미래였습니다.(C. H .맥킨토쉬는 19세기 사람임) 만일 이 미래의 죄에 대한 생각이 우리가 범할 수 있는 미래의 죄와 관련지어 볼 때 어려움에 부딪힌다면, 그리고 현재 그 문제가 아직도 미해결로 남아 있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범해 온 과거의 죄에 관해서도 매우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미래의 죄에 대한 모든 복잡함이 하나님의 견지에서 보기보다는 습관적으로 우리 인간 자신의 견지에서 십자가를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미래의 죄에 대한 언급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오직 인간적인 것이요, 세상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영원한 현재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의 죄들)가 십자가의 영원한 공의의 눈길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죄가 죄를 짊어진 자 곧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놓여졌던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으로 죄사함의 영원한 기초를 세웠고, 그러므로 믿는 자마다 각자의 생애의 어느 한 순간, 또는 자신의 역사의 어느 한 경점에서, 또는 자신의 경력의 어느 한 지점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의 믿음의 귀로 듣게 되고 그 순간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확실함과 확신을 갖고 거리낌 없이, 불안함도 없이, 주저함도 없이 "주께서 나의 모든 죄를 주의 등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오직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 10:17)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응답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강도를 예로 들어 봅시다. 유죄 선고를 받은 죄인으로서 그는 자기 옆에 매어달린 복된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곳에서 그 강도는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죄인에서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 갈 하나님이 주시는 자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적격자가 되기 위해서 그 자신 속에 그 자신과 함께 할 어떤 다른 것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낙원에 들어 갈 자격을 받은 후 낙원에 가는 대신 허락 받고 십자가에서 내려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즉 못은 뽑혀지고 자유롭게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아마도 그는 그의 자연성 속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각 속에서나, 말과 행동에서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하나님이 주신 자격과 적합함을 상실할 수 있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자격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지상에 남아서 50년을 더 살았다 할지라도, 그는 어느 날 첫 번째 얻은 동등한 자격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만일 용서받은 죄인이 죄를 범한다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죄에 대한 진정한 자백(시인)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기 이전에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죄사함과는 전혀 다른 각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방해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의 자격은 절대로 상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와 허물은 비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귀중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속죄된 것입니다. 그분의 희생에 의해 믿는 자는 죄와 저주의 장소에서 의로움과 온전한 은혜의 장소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 하나의 의로운 행위도 없었던 상태에서, 단 하나의 죄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는 상태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는 은혜 안에 서 있고, 은혜 아래서 살고, 바로 그 은혜를 호흡하며, 하나님의 시야 외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누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으랴?) 거기에는 반드시 자백(시인)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어쨌단 말입니까? 그래도 죄사함과 죄의 씻음은 역시 십자가에서 해답을 주신 하나님의 "미쁘고 의로운" 성품에서 세워진 기초 위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십자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쁘심과 의로우심, 그리스도의 대언자로서의 사역, 우리의 모든 자백, 우리에 대한 모든 용서, 우리의 모든 성결, 모든 교제의 회복,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귀중한 보혈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죄사함의 양(크기)이라는 항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또 다른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먼저 믿는 자가 하나님과의 하나 됨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양자로 들어가는 것이요, 성령님이 함께 거하심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죄를 온전히 용서하셨음을 의미하고 있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현재 한정된 주제 안에서 죄사함의 기초와 죄사함의 크기(양)를 생각해 보면서 죄사함의 방법(형태)이라는 몇 마디 말로 결론을 맺을가 합니다. 3. 죄사함의 방법(형태) 우리는 얼마나 많은 행위를 의뢰하고 있는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내면적, 실질보다는 외형적 형태에서 좀 더 능력을 취하려 합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그래요, 나는 그가 나에게 은혜를 베풀었음을 압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은혜에 따른 모든 좋은 것도 갖고 가 버리기 위함이었지요"(이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때때로 있는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자신의 방법대로 행하십니다. 그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그분은 그 큰 일들을 실천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있음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분의 실제적 행위가 위대할 뿐 아니라 그분의 실천하시는 방법(형태) 또한 매력적인 것입니다. 한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 복음 7장에서 바리새인 시므온에게 하시는 주님의 감동적인 말을 살펴봅시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원문에는 이 말이 있음-역자 주) 탕감하여 주었으니…"(눅 7:42) 위 말씀에서 단순히 빚에 관해서만 생각해 볼 때, 어떤 방법이었든 결과는 동일하게 둘에게 적용되었습니다.(둘 다 탕감되었다는 뜻) 그러나 둘 중에 누가 "기쁘게"라는 말의 영적 능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포기했을까요? 둘 중 누가 그분의 적나라한 실제 방법을 보고 싶어했을까요? 빚 준자는 그 빚의 양에 대해서 투덜대며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이 투덜댐은 판단하려는 마음이므로 모든 은혜의 고마움을 삭감시킬 수 있습니다.(세상 사람들의 은혜는 때때로 그렇다) 다시 말하면 "기쁘게 하는" 은혜의 방법이 실제에 있어서 은혜의 가치를 보기보다는 더 높이는 것입니다. 잠시 늘 영적 풍성함을 주는 우리에게 친숙한 누가 복음 15장을 살펴봅시다. 여기에는 3가지 비유가 있는데, 매 비유마다 능력 있고, 아름다운 방법을 보여 줍니다. 목자가 자기의 양을 찾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찾느라고 애썼던 모든 괴로움을 불평하였습니까? 아니면 자기 앞에서 양 자신이 스스로 집으로 가도록 다루었습니까? 둘 다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그 양을 자신의 어깨에 메었습니다. 어떻게? 그 무거움과 괴로움을 불평하면서 말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즐거움"으로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방법을 깨닫습니다. 목자는 양을 다시 찾은 기쁨을 보여주었습니다. 양은 안전하게 그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비록 과거에 벼랑에 있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자, 누가 그의 "기쁘게"라는 말을 포기할까요? 누가 그분의 매혹적인 모습의 적나라한 행위의 본질을 깨닫기를 원할까요? 또 한 여인과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촛불을 켜고, 집을 쓸고, 찾았습니다. 어떻게? 활기 없이, 싫증난 모습으로, 무관심하게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심전력으로 일하는 사람처럼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이것은 진짜 잃어버린 은전을 찾고자 하는 여인의 분명한 모습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불쌍하게 타락한 아들의 돌아옴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주목해 봅시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아버지는 잘못을 저지른 아들은 집밖의 어느 누추한 곳으로 쳐 박으려고, 한 종을 보내지 않았고, 또는 부엌 같은 데로 들어가게 하지도 않았고, 아들이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 자신이 친히 뛰어 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아버지로서의 위엄도 제쳐놓고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단순히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이 전심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나타내야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실제적 사랑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모습으로도 그 사랑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다른 성경 구절에서도 하나님의 죄사함의 방법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성경 말씀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인간 마음에 베푸시는 능력있는 모습을 은혜로 깨우쳐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침에 즈음하여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하노니, 하나님의 죄사함의 기초가 무엇이며, 죄사함의 크기(양)가 얼마나 큰 것이며, 죄사함의 방법(형태)이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알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그 기초가 하나님 보좌만큼이나 안전하며, 그 크기가 무한하며, 그 방법(형태)이 모든 심령들이 바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죄사함의 문제가 풀려서 만족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아직도 죄사함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고 있습니까? 그가 이런 방법으로 당신들 앞에 실제적으로 죄를 용서해 놓고 죄사함의 기초와, 죄사함의 크기(양)와, 죄사함의 방법(형태)을 보여 줄 때 당신은 주저할 것입니까? 그분은 당신에게 마음 문을 열고 그의 생각이 얼마나 철저한가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분은 두 팔을 벌리고 당신을 영접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십자가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분의 손은 죄사함의 기초를 만들었고, 다 이루었음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그곳에 나아와 안식을 누리기를 간청합니다. 더 나아가 항상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당신을 위하여 예비하셨습니다. 지금 축복의 성령님께서 당신에게 임하시어 이 모든 일들을 확실하게, 충만하게 알게 하시고, 죄사함을 믿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모든 죄를 "기쁘게" 그리고 "영원히" 용서하셨습니다. .....................................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1) 1. 회심이란 무엇인가? 데살로니가 전서에는 참으로 "진짜 회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현저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 우리는 독자들과 함께 이 모습을 연구하기로 하자. 우리가 지금 큰 실수를 하고 있지 않다면, 즉시 흥미 있고 유익 된 연구를 하게 될 것이다. 이 연구는 이 글의 제목인 "회심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확실한 해답을 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을 얻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요즈음 여러 사람이 하나님의 훌륭한 능력으로 회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하나님께 진실로 회심한 모든 심령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다. 우리는 신성한 회심의 절대적이고 필요 불가결한 우주적 필요성을 믿는다고 말로만 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졌고, 또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야만인이든, 수크다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개신교인이든, 로마카톨릭교인이든, 다시 말해서 국적이 무엇이든 간에 또는 교회에서의 직분이 무엇이든 또는 그의 신학적 신조가 무엇이든 간에 꼭 회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직통으로 지옥과 연결된 넓고도 영원한 길목에 있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모태로부터 기독 신자가 된 사람은 없다. 또한 누구든지 교육으로 기독 신자가 될 수도 없다. 누가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교육으로 또는 물세례로 또는 어떤 종교적 의식으로 기독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치명적 실수이며 엄청난 기만이며 영혼에 대한 사단의 기만술인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신성한 회심에 의해서 기독 신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께로 향한 진실 된 회심이 절박하고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강조하는 바이다. 이것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이것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본다면 엄청난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자기 앞에 끝없는 영원한 내세가 펼쳐져 있는데도 불멸의 존재인 영혼이 자신의 회심의 엄숙한 문제를 거역한다는 것은 죄책감을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우매함인 것이다. 이 최대로 중요한 문제와 비교해서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별로 견줄만큼 의미 있는 것은 없다. 우리 주위에서 분요하게 사람들의 생각과 에너지를 몰두시키고 빼앗아 가는 여러 가지 일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향하는 심령의 중요하고도 엄청난 회심의 문제와 비교해 볼 때 한낱 저울 위에 묻은 작은 먼지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상거래의 투자라든가, 모든 돈버는 계획이라든가, 이익 되는 투자의 흥미진진한 문제라든가, 모든 쾌락 추구 곧 극장, 음악회, 무도회, 당구, 카드놀이, 주사위 놀이, 경마, 사냥, 음주 등 이름 댈 수도 없는 수많은 여러 가지 일들 즉 이런 것들은 마음에 만족이 없는 가련한 사람들이 추구하고 붙잡으려고 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은 마치 아침 안개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물거품과 같은 것이며, 굴뚝의 연기이며, 가을 낙엽과 같이 모두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며, 후에는 고통스런 공허만 남긴다. 이런 사람들은 회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족이 없고, 그 심령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무시무시한 질문이다. 상거래의 흥분과 정치적 싸움(권력투쟁)과 야망과 돈벌이와 쾌락 추구 끝에는 무엇이 남는가? 왜 인간은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 누구든지 이 죽음의 문제를 뛰어 넘을 수는 없다. 이 죽음과의 싸움을 피할 길은 없다. 우주의 모든 재물로도 무자비한 원수 사단의 손에서 한 순간의 휴식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의학적 기술로도, 모든 애정 어린 친척이나 친구들의 염려와 그들의 모든 눈물과 한숨과 간구로도 그 무서운 순간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며, 공포의 왕 사단으로 하여금 그의 무서운 칼을 거두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음은 어떤 인간의 예술로도 처리 될 수는 없다. 그 죽음의 순간은 인간의 생활의 모든 아름답고 매혹적인 것들과 마음의 이음줄이 끊겨지면서 틀림없이 찾아온다. 즐겁게 지냈던 사랑하는 친구들과 매혹적인 일들과 모든 탐욕의 대상물들은 포기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세상이 천 개가 있다 할지라도 이 충격을 피할 수는 없다. 죽음은 대면하여 똑바로 보아야만 한다. 이것은 무서운 신비이며, 엄청난 사실이며, 확실한 실제인 것이다. 이 죽음은 하늘 아래 모든 회심하지 못한 남녀와 아이들 앞에 우뚝 버티고 서 있다. 죽음이란 년, 월, 일, 시, 즉 시간의 문제인데 그 시간 속에 있는 헛되고 공허한 그림자 같은 것들을 굉장한 실재를 갖고 있는 영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분계선을 통과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성경에서 해답을 얻자. 성경 외에는 해답이 없다. 인간은 자신의 헛된 사상으로 선뜻 대답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상을 주입시키려 한다. "먹고, 마시고, 그리고 내일 죽자!" 이 얼마나 허황된 자만심인가! 그것은 헛된 속임수다. 이것은 이 세상 신에 의해서 가려진 인간의 바보 같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불멸의 영혼이 소멸될 수 있단 말인가? 에덴 동산에서부터 인간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 영혼을 소유한 자가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절대로 소멸되는 영혼이 아니다. 영혼은 틀림없이 영원히 존재한다. 회심을 한 사람이든, 또는 회심을 하지 않은 사람이든 영혼은 영원성을 지내고 있다. 오, 모든 사려 깊은 심령에 이 얼마나 무거운 생각인가! 어느 누구도 이 광대한 사상을 습득하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초월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자.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의 단 한 구절이 만개의 인간 마음의 주장과 이론을 쓸어버리기에 충분하다. 죽음은 소멸인가? 아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말에 주목하시라. 이 말은 오직 자신의 죄 속에서 죽는 사람과 불신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기독도에게는 성경 여러 군데에서 언급한 대로 심판은 영원히 지나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죽으면 그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죽음 이 후에는 심판이 있다. 그러면 심판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성경은 엄숙하고도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이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1-15) 이 모든 것들은 말씀이 표현하는 한 확실한 것이다. 거기에는 한 점의 이의나 거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에게는 전혀 심판이 없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어쨌다고? 죽으면 끝이라고? 아니다. 오히려 불못 속에서 영원히, 영원히 있게 된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그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든 간에 자기 앞에 죽음과 심판과 불못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매순간의 맥박 소리는 점점 더 두려운 곳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독자께서 머지 않아 영원 속에 빠져든다는 사실은 내일 아침 태양이 다시 뜬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것이다.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없고, 회심하지 않았다면, 또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심판의 모습은 불못으로 나타날 것이요, 그것은 끝없이 영원한 것이다. 독자들께서는 이런 무서운 주제로 우리가 오래 상고하는 것에 대해 아마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그 따위 말이 사람들을 회심케 할 수 있겠는가?" 설사 이런 말이 사람들을 회심시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회심의 필요성은 알게 할 것이다. 그들에게 다가 올 절박한 위험은 알게 할 것이다. 다가 올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도록 권면은 할 것이다. 왜 축복 받은 사도는 벨릭스와 함께 "다가 올 심판"에 대해서 언쟁을 하였던가?(행 24장) 그것은 틀림없이 벨릭스로 하여금 그의 악한 길과 생활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설득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왜 청중들에게 영원한 곳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강조를 했던가? 왜 주님은 자주자주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을 말했던가?(막 9:48) 그것은 틀림없이 그들에게 위험을 알게 할 목적으로 하셨을 것이고 그러하므로 그들이 그 위험으로부터 도망하여 그들 앞에 제시된 소망을 붙잡고 피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보다 더 현명한가? 우리가 그분보다 더 온화한가? 우리가 사람을 회심시키기 위해서 보다 나은 방법을 찾아낸 적이 있던가? 주님께서 당시 사람들에게 강조했던 주제와 같은 것을 독자들에게 강조한다고 해서 염려할 것이 있겠는가! 누구든지 회심하지 않으면 크고 흰 보좌 앞에 불가피하게 서게 되며, 불못에 던지운다는 확실한 말씀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교묘히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위축되야 하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금하는 바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회심하지 못한 독자들에게 엄숙히 말하는데, 이 중요한 영혼의 문제에 집중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그 무엇도 이것에 대해서 독자로 하여금 거역하게 해서는 안된다. 세상의 어떤 걱정거리나 즐거움이나, 어떤 직업도 이 중요한 문제의 심각성에서 독자로 하여금 돌이켜 못 보게 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세상 모든 것을 얻고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그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아니면 "사람이 자기 목숨과 바꿀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 16:26) 오, 만일 당신께서 구원받지 못하고 회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대에게 지금 간청하노니,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고 구원받고 하나님께로 회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바란다. 이것이 바로 그의 왕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도 최소한 이 문제를 알게 되기를 믿고 싶다. 그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그의 말씀은 절대로 없어질 수 없다.(마 24:35) 땅과 지옥의 모든 권세와 인간과 악마라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헛되게 할 수는 없다. 당신 앞에 두 길 중 하나가 놓여 있다. 지금 회심하든지 아니면 이후로 영원히 멸망하든지 둘 중 하나다. 이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고, 이런 견해에서라면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회심하지 못한 자에게 말로나 글로나 지금 이 순간 다가오는 진노에서 벗어나 축복의 구세주에게로 도피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열의를 다해서 열렬히 강조하는 것이 지나친 일이겠는가?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다. 그분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두 팔 벌리고 환영하고 계시다. 그리고 사랑스럽게 은혜의 말씀으로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자는 결코 내어쫓지 않으리라"(요 6:37b)라고 말씀하신다. 2.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성경은 성경의 권위에 머리를 숙이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의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이 말씀은 그 말씀 자체의 영적 권위와 엄숙함과 함께 타락한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이 지구상의 수십 억 인구 중 단 하나의 예외도 있을 수 없다. 회심(돌이킴)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그렇게 될 수도 없다. 회심하지 못한 모든 영혼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구며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조금도 문제되지 않는다. 만일 내가 회심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사단의 수하에서 내 죄로 인하여 흑암의 권세 하에 있으며 지옥 길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일 수 도 있다. 흠 없는 명사일 수도 있다. 높은 위치의 종교 지도자일 수도 있다. 또는 포도원의 일꾼일 수도 있다. 주일 학교 교사일 수도 있다. 복음을 시인했다고 하는 교회의 공직자일 수도 있다. 자격 있는 선교사일 수도 있다. 집사, 장로, 목사 또는 카톨릭 주교일 수도 있다. 또는 가장 자비심 많은 사람일 수도 있고, 종교단체나 자선단체에 아낌없이 바치는 기부금 수여자일 수도 있다.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나의 인격과 도덕적 영향력 때문에 우러러 보임을 받는 자일 수도 있고, 선망의 대상일 수도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거나,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사람들이 바라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모든 것을 소유한 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심하지 못했다면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자요, 사단의 왕국에 속한 자요, 죄책감의 소유자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으로 직통하는 넓은 길목에 서 있는 자다. 이것은 바로 마태 복음 18:3의 우리 주님의 말씀의 정확하고 분명한 의미이며 능력인 것이다. 이 말씀 앞에서는 피할 길이 없다. 그 말씀은 태양 빛과도 같이 분명한 말씀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 말씀은 우리 세상에 엄청날 정도로 위엄 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위엄으로 이 지상에 있는 모든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돌이키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거리를 배회하고, 짐승보다 못할 정도로 타락한 술주정뱅이에게나, 또는 회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전 직임을 맡은 자에게나, 또는 몇 날, 몇 주, 몇 달, 몇 년이라 할지라도 계속 금주하는 것을 자랑하며 항상 방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우월감을 갖는 절대 금주자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요, 똑같이 자신의 죄 속에 갇혀 있고, 똑같이 영원한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술주정뱅이에서 돌이켜 방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축복할 만 하다. 그러나 술 취함에서 돌이켜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도덕성을 자랑하며, 그러한 자만심으로 자신을 헛된 데로 자신을 속여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술주정뱅이와 절제 자 사이에 외형적 차이점은 있다. 즉 금주 자는 자신의 절제하는 마음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자신의 도덕성을 자랑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옳다고 하는 헛된 사상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술주정뱅이는 틀림없이 잘못된 모습이다. 모든 사람은 술주정뱅이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회심하지 못한 상태의 절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도 마찬가지 사실이다. 둘 다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다. 전자나 후자나 다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것이 절대 필수적인 것이다. 사회 각층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또는 여러 생활 수준의 사람들로부터, 도는 모든 피부색의 사람들로부터, 모든 사회 계급으로부터, 그리고 해 아래서의 모든 환경의 사람들로부터 동일한 질문을 받게 된다. 이런 크나큰 질문에 대한 해답에는 그들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 있다. 그들의 외모가 어떻든,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너희가 돌이키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나는 돌이켰는가(회심했는가?)" 라는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엄청난 질문이다. 인간의 언어로 이 질문의 중요성과 위엄을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것이다. 한 인간이 매일 또는 매년 이 귀한 질문에 대한 확실하고도 확정적인 해답 없이 계속 이 생각에만 몰두한다는 것은 최고의 어리석은 자로 지목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더욱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만일 인간의 자신의 세상 문제를 불확실하고도, 가장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 내버려둔다면, 그는 가장 악하고 못된 자기 무관심과 자기 부정이라는 송사에 자신을 드러내는 꼴이 된다. 그러나 영혼 구원과 비교해서 현세에서 무엇이 가장 긴박하고도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을까? 불멸의 영혼의 유익과 비교해 볼 때(불멸의 영혼은 가장 중요한 영원의 실재이다.) 모든 세상 염려는 단지 여름 타작 마당의 겨와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이 진실로 하나님께로 회심했다는 분명하고도 평안한 확신 없이 단 한 시간이라도 쉴 수 있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되는 소리다. 회심한 심령은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분계선을 통과한 사람이다. 그 분계선은 흑암의 자녀와 빛의 자녀를 구별하는 분계선이며, 이 악한 현세와 하나님의 교회를 구별하는 분계선이다. 회심한 심령에게는 사망과 심판은 뒤에 있고 오직 영광만이 앞에 있다. 그는 이미 그 자신이 천국에 있는 것처럼 천국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 이미 천국에 속한 자가 된 것이다. 그는 흠 없는 자녀의 명칭을 소유한 자며, 어두움이 없는 내세를 소유한 자다. 그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알며,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와 친구로 알며, 성령을 자신의 축복의 위안자, 또는 인도자와 선생으로 안다. 또한 천국은 자신의 밝고도 행복한 가정으로 안다. 오! 회심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믿는 자들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9-10) 자! 이제 이 회심이 무엇인지, 참으로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하심을 받을 것인가? 거기에 한 점의 실수라도 있다면 치명적 재난으로 판명될 것이다.많은 사람이 회심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참으로 우리는 이 제목 하의 매우 중요한 어떤 사실에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즉 그 사실이라는 것은 우리의 원수이며,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원수인 사단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회심에 대해서 잘못된 길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만일 사단이 계속적으로 사람들은 이 회심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케 하는 데로 이끌지 못한다면, 한 술 더 떠서 사단은 그 회심의 본질에 대해서 사람들은 눈을 가리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여러 방법으로 이 세상 오락이 몹시 헛되고,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여 자신의 생활 변화의 긴급한 필요성을 알게 될라치면, 그 최고의 속임 자는 그런 사람을 오히려 종교적인 사람이 되게 하여 예배 형식과 의식과 행사에 바쁘게 하여 무도회나, 파티나, 극장이나, 콘서트나, 음주나, 놀음이나, 사냥이나, 경마를 다시 말해서 모든 쾌락이나 오락을 버리게 하면서 오히려 종교적 생활에 빠지게 하며 또 모든 종교 행사에 부지런히 참석케 하여 성경도 읽게 하고, 기도도 하게 하고, 구제도 하게 하며, 큰 종교 행사나, 그 지방의 자선 단체를 지원하는데 헌신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은 회심이 아니다. 사람은 위의 모든 것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독실한 종교인이 자기의 전 생활을 철야라든가, 금식, 기도, 금욕, 구제 행위 등을 실천하면서도 전혀 회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시들어 가는 나뭇잎이나, 꽃 등, 무가치한 대상물을 추구하면서 전 생활을 보내는 사냥꾼이나, 사려 깊지 못한 세상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생활인 것이다. 상기 두 인물(철저한 종교인과 세상 취미 생활자)들은 틀림없이 서로 외형적으로 크게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회심하지 못했다. 둘 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밖의 사람들이다. 둘 다 자신들의 죄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사실 하나는 "악한 행위(골 1:21)"에 몰입한 자요, 다른 하나는 "죽은 행실(히 6:1)"에 빠진 자다.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다. 그 둘은 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요, 소망 없고, 끝없는 고통의 길에 있는 자들이다. 만일 구원의 회심을 못했다면 다른 한 쪽과 마찬가지로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 속에서 자신들의 들어 갈 자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회심은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유대교나, 이방 종교나, 마호멧교나, 또는 카톨릭교에서 개신교로 전환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회심하지 않을 수 있다. 틀림없이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지적 기준에서 볼 때 개신교인이 되는 것은 마호멧 교인이 되는 것보다 나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서 볼 때 그들은 모두 공통 플랫트홈에 있는 것이고, 둘 다 회심하지 못한 것이다. 진실로 이쪽이나 저쪽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회심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회심은 어떤 종교 제도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 종교제도가 항상 순수하고, 항상 건전하고, 항상 권위가 있는 제도라 할지라도 말이다. 사람이 기독교 내의 가장 존경스러운 종교 단체의 한 일원이 될 수는 있다. 그러면서도 회심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영원한 멸망의 길에 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신학적 신조에서도 그렇다. 사람이 어떤 위대한 기준인 종교적 신념에 가입할 수도 있다. 39개도(영국 국교의 신조)나, 웨스트 민스터 고백이나, 요한 웨슬레의 설교문에나, 폭스나, 바클레인이나, 또는 어떤 다른 신조에 가입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회심하지 못하고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상태에서 한 가닥의 소망의 빛조차 없는 비참하고도 영원한 우울한 장소인 지옥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가닥의 하나님의 생명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합법적으로 종교 문답을 할 수 있다 해도, 그 종교적 제도나 신학적 신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제도나 신조가 심령을 살릴 수 없고, 구원할 수 없고, 영생을 줄 수는 없다. 사람이 매일 매일 계속해서 맷돌을 돌리는 말과 같이, 한 해 한 해 종교라는 기계 장치 위에서 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황량하고 단조로운 죽은 행실로 제자리걸음만 하는 격이다. 그런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에서 끝장 날 것인가? 죽음! 맞다. 바로 끝은 죽음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아! 바로 이것이 문제다. 하나님께 이 질문의 중요성과 심각성이 보다 진지하게 알려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 그 자체는 더욱 만월의 빛 가운데서 아마도 종교적 신념의 제도로서 옹호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지식적으로 영광스런 은혜의 교리와 함께 충만하고도 값없이 받는 복음으로, 행한 것 없이도 받은 구원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칭의에 거의 입문하여 기뻐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영광스런 신약적 기독교 교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다. 사람이 이 교리를 믿고 기쁨을 지식적으로 시인할 수도 있다. 그는 능력있는 작가로 기독교 교리를 옹호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또는 복음을 웅변적으로 열의를 다해 설교할 수도 있다. 이 모두가 사실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이 전혀 회심하지 못하고,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귀한 복음의 진리에 익숙해진 나머지 오히려 마음이 굳어져서 스스로 속임을 당하고, 파멸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복음의 진리는 그 사람의 이해력을 초월하지 못하고, 그의 양심에 도달되지도 못하고, 그의 마음을 감동하지 못하고, 전혀 그의 영혼을 회심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가장 극단적인 예만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 믿고 기뻐한다고 하면서, 또한 실제로 하나님의 복음을 설교하면서, 또는 기독교 교리의 가장 특이한 모든 진리를 가르치면서도 아직도 회심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영원의 길로 향하고 있다면, 이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불행은 없으리라. 이 불행은 그가 한 때 믿고 죽어 가는 모든 사람의 귀에 가장 영광스런 복음의 소식을 실제로 설교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때문에 그 불행은 더욱 최고조에 달하는 것이다. 오! 독자여 당신이 누구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당신에게 간청하는 바이다. 위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 당신의 모든 주의력을 집중하길 바란다. 당신의 오류 없는 진짜 회심이 하나님 앞에서 확인될 때까지는 한시라도 안일한 마음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3.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지금까지 어떤 경우에라도 회심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또 어느 정도 무엇이 참 회심이 아니라는 것도 지적했기 때문에 이제는 진짜 회심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겠다. 그래서 성경 말씀의 확실한 가르침에 접근해야만 한다. 우리는 보다 못하지 않고, 보다 틀리지 않은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이 회심했다고 하는데 전혀 회심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난 것에 대해 몹시 염려되는 바다. 소위 회심했다고 하는 많은 간증이 나오고 또 그런 소문을 듣고 있는데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볼 때 적합 되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다고 고백하고 또 그렇게 믿어 주고 있는데, 그들이 단순히 무감각한 청중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 마음에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영적 움직임은 없고, 양심에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실제적 활동도 없고, 세상과 함께 철저한 부서짐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의 영향력을 받아 감정의 작용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 들고, 또는 어느 복음 전도자의 감정이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든다. 그러면서도 자아(self)는 판단 받지 않고, 오히려 세상과 자연에 대한 집착은 계속 있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열의는 없고, 또한 신약 성경에 기록된 회심의 특성을 지닌 그런 진짜 회심자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심하는 그런 회심자를 찾고 있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천박한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시도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은혜로운 복음 전도 사업에 몰두하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성경의 밝은 빛으로 그 문제를 상고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언급하는 바이다. 그리고 많은 복음 사역자들이 얼마나 성경 원리에서 이탈하고 있는가를 알리기 위함이다. 아마도 우리의 복음 사역에 많은 인간적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도록 맡기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사역의 능력과 효율성 자체를 신뢰하는 믿음이 부족하다. 아마도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려는데 신경을 쓰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 선풍을 일으키는데 많은 할애를 하는 것 같다. 아마도 좋은 결과를 보려는 욕심에서 많은 회심자들의 일시적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도자들은 그들을 회심으로 인정해 주고, 공중 앞에서 공포까지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열의가 위축되겠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들의 열심을 더 강렬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남모르게 더 열심을 간구할 것이며, 공중 앞에서는 청중들에게 더 열렬히 호소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의 중요성을 보다 깊이 깨닫게 되고, 우리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역사하심이 와야 함을 전적으로 확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소중히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우리를 바른 자세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바른 자세란 지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역사하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자아를 비운 마음으로 의뢰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골방에서나 공중 앞에서나 회심의 영광스런 사역에 관한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보다 똑바른 마음으로 직면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황금 같은 알곡과 잘 익은 열매가 열릴 것이다. 그럴 때 진짜 회심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회심은 그 회심 자체가 증거 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회심자와 함께 회심의 신용장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럴 때 진실로 우리의 마음은 귀한 영혼들이 구원받음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이 회심한 경우를 일일이 세고, 우리들의 사역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자만심과 자기 만족 속에서 거들먹거리는 어리석은 우리들의 마음과 비교해 볼 때 참으로 귀한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예배하는 마음 자세가 우리 자신의 이름을 위대한 설교자로 또는 대단한 복음 전도자로 땅 끝까지 드러내는 것보다 얼마나 훌륭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자세인가! 진실로 영의 인격으로 판단해 볼 때 우리의 사역은 비교조차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 맡길 때 복음 사역의 위엄과 실제적 효과와 중요성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 사역자들의 마음에서는 행복과 영적 평안함과 실제적 효과는 점점 증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하게 되고 계속될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이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서는 어떻게 묘사되었는가를 알아보자.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1-3) 이것은 참 기독교의 위대한 근본원리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사도 바울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생활 속에 드러난 확실하고도 의심할 바 없는 증거로 알게 된 것이다. 즉 한 성도가 택함을 입었을 때, 알 수 있는 바로 그 동일한 방법으로 알았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축복 받은 사도는 그의 일상생활 자체가 그 자신이 설교하는 복음의 해설자였던 것이다. 그는 복음으로 살았다. 바울은 성도들로부터 무엇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의 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설교했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밤낮 없이 일하고 수고했다. 그는 사랑스럽고 유순한 유모와 같이 그들 가운데 함께 있었다.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직분에 대해서나, 자신의 권위에 대해서나, 자신의 은사에 대해서나,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나, 다른 지역에서의 기적 행함에 대해서 전혀 과장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사랑하고 낮아진 자세에서 난체하지 않고, 열심을 다하는 헌신하는 사역자였다. 그러한 그의 생활 자체가 회심의 일을 했고, 그의 전 생활이, 그의 영이, 그의 생활 모습이, 그의 태도가, 그의 생활 습관이 그의 설교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모든 사역자들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천박한 사역이 사역자의 천박성에 결과임을 바울의 생활 태도로 믿게 된다. 능력은 어디에 있을까? 성령의 드러남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충만한 확신"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들의 설교에는 혹 이런 생활의 부족함은 없지 않은가? 유창한 언어구사가 많을 수 있다. 소위 재치라는 것도 많이 발휘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귀를 즐기고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많은 것들이 일시적으로 유익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단순한 호기심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오! 거룩한 기름부음은 어디 있으며, 살아 있는 열의와 깊은 진지함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럴 때 일상 생활과 습관이 산 해설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주께서 그의 사역자들의 마음에 작용하여 그의 사역을 되살아나게 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때 우리는 사역의 열매를 보다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회심의 일이 사역자에게 달렸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괴기한 생각은 멀리멀리 안녕이다! 그런 일은 전적으로, 절대적으로 성령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이 모든 의문점을 해소한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는 말씀은 사역의 모든 부분과 매 경우마다 항상 바르게 붙들어야 할 말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성령님은 보통 어떤 도구를 사용하실까? 우리 사역자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주님의 마음에 드는"것은 어떤 그릇일까? 그것은 비고, 깨끗한 그릇이다. 우리는 과연 그런가? 우리는 자신을 비웠는가? 우리의 손은 깨끗한가? 우리의 교제, 우리의 방법, 우리의 환경은 깨끗한가?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주께서 그의 거룩한 봉사에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이 중요한 문제에서 은혜 받기를 바란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온통 감동하사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을 정도로 보다 합당한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을 계속 진행하자. 그 전체의 내용은 능력으로 가득차 있다. 한편에는 사역자의 특성이요, 다른 한편에는 사역 자체의 특성인데, 그 특성들은 우리에게 매우 세심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저희가 우리에게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 1:6-9) 이것이야말로 참 사역이다. 그 사역은 그 자체에 신임장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헛된 것이나 불만족이 전혀 없다. 그 일에 대해서 어떤 비평도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주님의 인침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분명함을 줄 수 있는 확고함이 있다. 회심의 역사는 행해졌고, 그 회심의 결과는 기쁨 충만함으로 뒤따랐다. 그 증거는 더 멀리 더 넓게 펴져 갔다. 그래서 사역자는 자신의 사역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회심자의 수를 세어 드러낼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직접하신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었는데 거기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고, 그 사역에 또 다른 말을 더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사도는 충만한 확신으로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설교한 것 뿐이다. 거기에는 헛됨도 없고, 그의 증거에 대해서 의심 할 수조차 없다. 그는 그 자신의 설교 내용을 믿고, 그 내용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설교했을 뿐이다. 그것은 어떤 단순히 알고 있는 지적 진리의 유창한 언어구사가 아니었다. 어떤 틀에 박힌 열매 없는 교리 강연이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고 말고다. 그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의 퍼부음이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말씀의 의미를 깊숙이 느끼는 그러한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설교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가슴에 와 닿은 모든 것을 수령한 것이었다. 데살로니가에서의 그의 사역이 그러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고,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적 참 열매였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 흥분도 아니고, 선동도 아니고, 들뜸도 아니고, 리바이벌 붐을 일으키려는 시도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울 정도로 고요했다. 사도 행전 17장에서 사도는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행 17:1-2) 귀하고 능력 있는 강론이었다. 하나님께 구하노니 우리 가운데서도 그보다 더한 역사가 있기를 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 17:3) 이 얼마나 단순한가! 성경으로 예수를 설교했다. 그렇다 여기에 위대한 바울의 설교의 비밀이 있다. 그는 살아 계신 인격자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능력으로, 살아 있는 말씀의 권위로 설교했다. 이 설교가 산 믿음으로 받아들여졌고, 회심자들의 생활 속에서 산열매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고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그것은 단순한 틀에 박힌 설교가 아니고, 종교 대담도 아니다. 오직 자신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설교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한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4. 탐심은 우상숭배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의 마지막 두 절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 구절들은 회심의 참 특성에 대해서 특이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 구절들은 아주 분명하게 데살로니가 교회 회심자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적 깊이와 확실성과 충만함과 실제성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는 실수라고는 없다. 거기에는 그 자체의 신임장을 갖고 있다. 그것은 결코 불확실한 사역이 아니었다. 그것을 믿기 위해 어떤 세심한 테스트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분명하고도 실수 없는 하나님의 사역이었으며, 모든 회심자들에게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었다. "저희가 우리에게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그래서 이제 간략하지만 납득이 갈 만한 회심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깨달을 수 있게 됐다. 회심은 어떤 기점에서 어떤 다른 기점으로의 전환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우상으로부터 돌이켰다. 거기에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 즉 그들의 과거 생활과 관습에서 단번에 그러면서도 영원한 돌이킴이 있었다. 즉 그것은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에너지를 지배하고 휘어잡고 있었던 세상 것들에 대한 전적인 포기였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안에서 그들 자신의 전체 과거 생활을 판단했을 뿐만 아니라 솔직하게 그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떤 어정쩡한 행위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애매하다거나 모호함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생애 속에서 특별한 기점이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도덕적인 면에서나 실 생활면에서도 엄청난 변화의 기점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들의 어떤 의견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떤 새로운 이론의 수용도 아니었다. 또는 그들의 지적 견해에서의 어떤 변화도 아니었다. 전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전체 과거의 경력이 하나의 엄청난 어두움의 괴물과 같은 거짓 생애였음이 엄숙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의 실제적인 확신이 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은 그들의 심령에 강하게 들어갔고 그 진리의 빛의 능력 속에서 그들은 자신과 그들의 과거 전부를 심판 내렸던 것이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이 세상 것의 철저한 부서짐이 있었다. 조금도 세상 것은 남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신비한 변화를 가져왔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능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의 심령에 간절히 호소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바울 사도의 데살로니가 방문에 대해서 영감으로 설명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 17:2).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살아 있고 영원한 말씀에 직접 연결시키려 애썼던 것이다. 거기에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감정이나, 생각에 작용하는 어떤 인위적 시도도 없었다. 그런 것은 축복 받은 사역자 바울에게는 무가치한 것이었다. 바울은 그런 시도는 믿지 않았다. 그의 신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뿐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자세로 확인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쉬지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이점이 바로 생동감 있고 지고한 중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능하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데살로니가에서 이런 위대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축복 받은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감사가 채워졌다. 바울이 기뻐한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자기와 연결된 점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었다는 점이었다. 하나님과의 연결은 소멸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말은 인간이 소멸될 때 함께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참 사역자로서 이 점을 깨우쳤고, 또한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신성한 열심히 생겼고, 그의 모든 사역에서 그가 전한 복음을 들은 모든 심령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에게 의뢰하지 않기를 바랬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요, 사역자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하는 말씀을 들어보자."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여기서 우리는 참 복음 사역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증거"와 "성령의 나타남"이다. 즉 말씀과 성령이라는 말이다. 이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모든 인간의 영향력이라든가 인간의 능력,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에너지에 의한 결과는 철두철미하게 무가치한 것이다. 그렇다.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사역자들은 자기네들이 나열하고 지껄여 온 자기네들의 두드러진 사역의 결과로 마음이 부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거짓된 영향력을 받은 불쌍한 심령들은 속은 것이 되고, 전적으로 거짓된 곳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고 거짓 신앙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전체 사역은 최고의 재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전지 전능의 영적 능력과 성령의 활력 하에서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거하게 될 때는 그렇지 않다. 그 때는 데살로니가에서 보여진 경우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엄숙한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모든 의문점을 뛰어넘어 누가 참 사역자인지 분명하게 판가름나는 것이다. 복음 사역이 신임을 얻게 되는 것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의 사역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사역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영원히 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을 돌리자!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에서의 그의 사역의 결과를 셈하거나 떠버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 자신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드러냈다. 그것이 진짜 사역이었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인침이 확고히 그 사역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바울은 매우 만족했다. 이점이 바로 스스로 마음을 비운 모들 사역자들에게는 만족을 주는 것이다. 바울은 말씀을 전달했고, 그 말씀 자체가 심령을 살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마음에 간절히 호소했던 것이다. 그 말씀은 좋은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풍부한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이제 그 결과를 살펴보자. "우상을 버리고"(살전 1:8). 여기서 우리는 회심하지 못한 모든 세상 사람들의 생활을 한 마디로 알 수 있다. 그것은 모두 "우상"이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포장되어 우리 마음에 던져진다. 우상 숭배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가축이나 돌에만 머리 숙이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사로잡은 모든 세상 것이 우상이다. 어떤 대상에 마음을 복종시키는 것이 우상 숭배다. 또 그것에다 마음을 빼앗기는 자는 우상 숭배자다. 이런 말이 자존심 강한 어떤 사람에게는 불쾌하게 들릴는지 몰라도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이 점에서 이 말은 엄연한 진리인 것이다. "탐심"이라고 불리 우는 일반적인 큰 죄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영감 받은 바울 사도는 "탐심"을 무엇이라고 했던가? 그는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했다.(골 3:5)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돈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금이라는 우상 앞에 머리를 조아리던가? 탐욕은 무엇인가? 좀더 얻고자 하는 욕망이거나,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애착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신약에서 그 두 가지 형태를 다 보게 된다. 그리스 원어에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내포하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얻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던지, 아니면 쌓아 두려는 욕망을 가졌든지 이 둘은 다 우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표면적으로는 같은 모습이 아니라 전자는 더 얻고자 하는 욕망은 쓰기 위해서 예비하는 것과 연관시킬 수 있다. 후자 곧 쌓아 두려는 욕망은 반대로 일반적으로 저장하려는 강렬한 정신과 연결되어진다. 예를 들어 큰 사업 능력을 갖춘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장사에는 천부적 재능이 있다. 그의 손안에서는 모든 것이 불어나는 것 같다. 그에게는 사업에 대한 진짜 열정도 있고, 돈을 버는데 그칠 줄 모르는 갈급 함도 있다. 그의 목적은 오직 더 버는 것이고, 숫자를 더 늘리는 것이고, 사업체를 더 강화시키는 것이요, 그리고 그 자신의 사업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다. 그는 사업의 분위기 속에서 살고 번창하고 흥청거리며 살아간다. 그는 처음에 몇 푼 안되는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며, 드디어 자랑 할 수 있는 사업 왕자 자리까지 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구두쇠는 아니다. 그는 얻기 위해서는 돈을 쓸 자세도 갖추고 있다. 그는 엄청날 정도로 노임도 나누어준다. 화려한 대접으로 유흥도 베푼다. 아낌없이 대중들에게 여러 배로 되돌리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 각층으로부터 우러러 보이게 되고, 존경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더 얻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탐심의 사람 즉 우상 숭배자이다. 실제로 그는 금을 만지며, 돈주머니를 주무르면서 밤을 지새며 즐기는 어리석은 구두쇠를 경멸하는 사람이다. 원래 구두쇠들은 환상적인 먼지(돈을 말함)를 보며, 그것으로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하며 즐긴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가족을 위한 생활 일용품에는 인색하다. 그는 저축된 귀한 돈 뭉치의 일부를 쓰기보다는 넝마 조각을 걸치고 남 보기에 불쌍하리만큼 보이면서 거리를 누비는 사람이다. 그도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벌어서 어떻게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돈 그 자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그는 쌓는 재미로 산다.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쌓아 두기 위해서 산다. 그의 지배적 욕망은 수많은 넝마 조각과 함께 죽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괴상망칙한 욕망이다. 이 둘은 현저하게 다르다. 그러나 그 둘은 다 한 지점에서 만난다. 그 둘은 동일한 플랜트 홈에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둘 다 탐심의 사람이요, 둘 다 우상 숭배자들이다. 이 말이 거칠고 심각하게 들릴는지 모르나, 이 말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권위에 복종해야만 한다. 성령이 우상 숭배라고 선포하는 바로 그 탐심의 죄를 사람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엾은 저질의 구두쇠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업 왕자와 비교된다는 것은 쇼킹한 일이다. 타인들 속에서 위와 같은 경우를 보는 것과 우리 자신 속에서 그것을 판단 내리며 볼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사실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 내리며 볼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만이 심령을 비추고 영적 존재인 우리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다. 그리고 탐심의 죄를 끄집어 낼 수 있다. 얻기를 추구한다는 것 즉 더 얻으려는 욕망, 즉 사업 정신, 다시 말하면 돈을 버는 능력 즉 계속 얻으려는 욕망은 인간 세계에서는 매우 존경받은 일이다. 비교적 몇 안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견지에서 그런 모습을 가증한 것으로 본다. 자연성은 인간의 생각이다. 자연성은 세상에서 찾아지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찬양하고 숭배한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마음은 나름대로 우상을 갖고 있다. 한 사람은 금을 숭배하고 다는 사람은 쾌락을 숭배하고 또 다른 사람은 권력을 숭배한다. 회심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우상 숭배자다. 회심한 자라 할지라도 우상의 영향력을 뛰어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요일 5:21)고 경계의 말씀을 했던 것이다. 독자들이여, 우리가 이 문제를 더 진행하기 전에 여러분께 확실하고도 예리한 질문을 해도 되겠는가? 당신은 참으로 회심했는가? 당신은 그렇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당신은 구원받은 기독교의 기초석을 갖추고 있는가? 그렇다면 참으로 우상에서 돌이켰는가? 당신은 진실로 세상과의 관계가 끊어졌는가? 그리고 구원받기 이전의 자아와의 관계가 끊어졌는가? 당신은 마음속에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고 있으며, 또한 당신의 이전의 전 생애 즉 그것이 환락의 생활이었던지 또는 무분별하고 어리석고 돈벌기에만 급급한 생활이었던지 또는 가증하고 사악하고 비참한 생활이었던지 또는 그리스도가 없고, 믿음 없는 무가치한 단순히 의례적인 종교 생활이었던지 간에 그런 생활을 지금 심판하고 있는가? 대답해 보시라. 당신의 생활이 어떤 것인가? 철저하게 솔직해 보시라. 지금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신의 진지한 열의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우리 모임 안에 슬프게도 이런 면에서 철저한 결단이 없음을 깨닫고 괴로워하고 통탄하는 바이다. 우리는 분명하고도 강렬하게 "우상으로부터 돌이키지" 못하고 있다. 구습은 성격이나, 외향이나, 정신이나, 태도가 회심을 바라고 있지 않다. 우리는 슬프게도 우리의 옛 자아를 너무나 좋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세상적인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터놓고 좋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엄청난 일들이다. 우리는 이 점이 복음과 영혼 구원의 진행 과정에서 슬프게도 방해 거리가 되고 있음을 염려하는 바이다. 증거의 말씀은 우리가 전하는 사람들의 귀에 무능력하게 들려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조차 진실하게 믿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의 회심자들에게 말하듯이 직접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살전 1:8) 우리에게는 깊고도 능력 있는 확실한 회심이 부족하다. 소위 역사 하심이 있다는 모임에서도 무기력함과 연약함과 모호함이 부끄럽게도 실망스러울 정도로 만연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5) 5. 성도의 기업 자 이제 우리는 회심의 주제에 대한 긍정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상 버림" 즉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휘어잡았던 모든 사물로부터의 돌이킴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그것들은 헛된 것이며 어리석은 것이며, 우리의 어둡고 캄캄했던 모든 지난날들의 정욕과 쾌락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도 행전 26:18에 있는 말씀과 같이 "이 악한 세대"로부터의 돌이킴이다. 그러나 회심은 그 이상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회심은 단순히 죄된 세상과 사단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라면 너무나 협소한 것이 되리라. 회심은 우리들의 모든 비참한 과거 생활과 영적 타락으로부터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건짐을 받은 것이라는 면에서 보면 확실한 은혜임에는 틀림없다. 회심은 이 세상 신과 이 세상 임금의 비참한 속박으로부터의 건짐이요, 악한 자의 손아귀 안에 있는 헛되고 공허한 세상으로부터의 건짐이요, 한 때 우리를 휘어잡았던 사악한 세상 애착 즉 죄에 대한 사모와 죄된 행실로부터의 건짐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 문제점을 다루고 있는 모든 면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그러나 다시 반복해서 말하는데, 회심에는 그 이상의 것이 더 있다. 우리는 마음에서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한 댓가로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의문을 떠올리곤 한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모든 것을 부정만 하는 제도인가? 우리가 만일 이 세상과 나 자신과의 이음줄을 끊는다면, 또는 우리의 과거 쾌락과 오락을 포기한다면,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등진다면, 그 대가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데살로니가 전서 1:9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러한 모든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준다. 충분하고도 확실하고, 분명하고도 납득이 갈 만한 해답을 준다. 그 해답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는 말씀이다. 참으로 귀한 해답이다. 그렇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의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귀한 해답이다. 나의 과거라는 우상 대신 얻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 세상의 헛되고 죄된 즐거움 대신 무엇을 얻었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세상의 부와 영예와 세상의 우월감 대신 무엇을 얻을 것인가? 하나님이다. 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럽고도 완전한 대치인가? 탕자가 먼 나라에서의 넝마 조각 대신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바로 그것은 아버지 집에 있는 최고의 옷이었다. 돼지의 쥐엄 열매 대신 무엇을 얻었던가? 그것은 아버지께서 친히 예비하신 살찐 송아지였다. 먼 나라에서의 비참한 고역 대신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환영이었고, 아버지 자신의 품이었고, 바로 아버지의 식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복된 대치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항상 참 회심 속에 있는 두 면(곧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의 감동적이고도 인상적인 예를 탕자의 비유에서 쉽게 얻지 않는가? 이 비길데 없는 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멋진 회심인가! 얼마나 멋진 우상으로부터의 돌이킴이며, 하나님께로의 돌아감인가!" 감히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느 인간의 언어가 감히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품안에서 아버지의 온화한 사랑의 빛에 쏘임을 받는 그의 감정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헌옷, 쥐엄 열매, 돼지, 종살이, 냉냉하게 굳어진 자아, 궁핍, 기근, 비참, 도덕적 타락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영원히 없어졌다. 그 대신 이루 말할 수 없는 밝고도 행복한 가정의 기쁨과 게다가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주위에서는 축제의 즐거움이 되살아났고, 또한 그의 돌아옴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신 채워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예인가? 귀하고도 거룩한 사실에 대한 예이다. 하늘의 기준에서 볼 때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참 회심에 대한 예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헛되고 어리석은 세상 것의 포기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곧 그것은 하나님 앞으로의 인도됨이다. 고향으로 돌아옴이다. 아버지 품으로의 되돌아옴이다. 가정으로의 돌아옴이다. 어떤 틀에 박힌 메마른 공식 문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전능한 역사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지체, 하늘나라의 상속자에 대한 이야기다. 바로 이것이 참 회심이다. 독자들께서 충분히 납득하기 바란다. 이 위대한 사실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안일하게 있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흑암에서 빛으로의 돌이킴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세력과 우상 숭배로부터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 현재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강렬한 말 같아도, 복스럽게도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들어보자.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무엇이라고? 우리가 죽은 후에 하늘나라라고? 아니다. 지금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이다. 로마서 5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롬 5:10-11) 이것은 아주 중요한 원리이다. "돌이킴"이라든가, "하나님께로 돌아선다" 라는 말속에 함유되어 있는 모든 의미를 설명한다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힘든 일이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주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그분 자신의 온전하신 영접으로 하나님의 존전으로 인도하신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신임장으로, 그분의 미덕으로, 그분의 피의 대가로, 그분 자신의 가장 고귀한 이름의 향기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과 우리를 연결하시고 그가 갖고 계신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시고, 그분의 자격까지도 나누어주신다. 다만 하나님으로써의 그분 자신의 위치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것만은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온전하게 그분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니라"(요 14:19)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 15:11)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또 요한 복음 17장에서 신비스런 주님의 기도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본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6-10)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 17:14)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26) 자, 이제, 이보다 더 고상하고 더 축복스러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으리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그처럼 일치되고,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과 같은 사랑을 나누듯이 그분과 전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 그분의 평화, 그분의 기쁨, 그리고 그분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이 모든 사실이 한 피조물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이며, 특성인 것이다. 지옥 구덩이의 영원한 공포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것, 죄 사함 받는다는 것, 씻음을 받는다는 것,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 아담이 잃은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 등,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동일한 기초로, 동일한 특성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자비이며, 축복이며, 사랑의 배려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사랑과 호의 속에서 하나님께로 인도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아들의 위치와 동일하게 일치된다는 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의 전지 전능만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걸작품인 것이다. 자,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말하는 회심 속에 다 내포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엄청난 큰 은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그런 것이다. 비록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때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사악한 일로 마음에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라도, 여러 가지 정욕과 쾌락에 빠졌을 때에라도, 우상을 섬기고, 영적으로 눈이 멀었고, 죄와 사단의 타락한 종이 되었을 때에라도, 진노의 자녀로 곧바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때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중 최대의 선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축복과 사랑과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마음에 우리가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마음 자세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보다 뒤쳐지는 자리를 선물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일이 못된다. 영감 받은 사도 바울이 이 엄청난 은혜로 감탄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3-7) 여기 얼마나 깊은 사랑과 충만한 은혜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역사 속에서 영원히 하나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의 지혜에 알맞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배려로 자신의 은혜의 부요함을 보이신다. 우리의 죄사함, 우리의 칭의, 우리의 온전한 구원, 우리를 영접함, 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베푸신 것인데 이 모두는 이 광대한 온 우주 안에서 영원히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위치말고, 다른 위치에 우리를 둔다면 이것은 영광스런 하나님 자신의 요구에 미치는 것이 못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마음 속 사랑에 대한 만족한 해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두가 너무나 신비하다. 너무 훌륭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인간에게 대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즐거움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고귀해서 확고히 받아들이기 힘들 수는 있을는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 자신의 마음속 사랑에 따라 우리에게 역사 하시고 그리스도의 대가를 기초로 해서 활동하신다. 탕자는 품꾼 중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그럴 수 없었다. 집에서 종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아들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든지, 둘 중 하나다. 만일 행한 공적에 따라 대우한다면 우리는 아들의 위치는커녕 종의 위치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전혀 우리의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의 이름에 따른 것이다. 바로 이것이 회심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로 인도되었다. 이보다 못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단순히 우상에서 돌이켜, 그것들이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는 실제로 바로 하나님 존전에 인도된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기쁨을 만끽하고, 그와 동행하며,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생수를 찾으며, 소멸되지 않은 근원으로 인도되며,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그분 안에서 찾으며,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은 만족하게 되고, 또한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가 우상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절대로 안된다. 과거의 우리의 대상물을 갈망하고 따라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분깃을 깨닫는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에서, 아버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아버지의 상에 같이 앉아 있으면서 돼지나 쥐엄 열매를 찾았던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고, 믿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탕자가 복된 사랑의 가정이라는 밝고도 거룩한 곳에 자신이 살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먼 나라를 한숨 지며 바란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말하고 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돌이켰다고 고백하고, 잠시동안은 그것을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금방 그들은 열의가 식어지고 지치고 만족을 잃는다. 그들 내면의 역사는 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진짜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된 것이 아니다. 우상은 잠시 포기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관련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그들 마음에 만족을 찾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참 교제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의 만족감과 심령의 안식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간이 흐름을 따라, 그 가련한 심령들은 세상을 한번 더 바라게 되고, 그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평상시보다 더 많은 탐욕으로 어리석게도 헛된 것에 몰입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슬픈 모습이다. 매우 실망스런 모습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오히려 보다 큰 비난을 퍼붓는다. 그리고는 사단의 옹호자가 되어 회의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회심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떠나 버린다. 참으로 회심한 심령은 단순히 이 악한 세상에서 헛된 꿈과 기만을 버리고 떠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서나 영원한 곳에서나 원하는 모든 진실 된 것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거룩하게 세상과 분리된 사람이다. 영원히 세상과 끊어진 사람이다. 그의 눈은 철저하게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 자신이 이미 세상을 심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준으로 이미 세상을 측정한 사람이다.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저울로 세상을 달아보았고 세상에 대하여 영원히 등을 돌린 것이다. 대신, 저주받은 나무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진지하고, 당당한 목적을 찾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은 바로 그를 구원키 위함이요, 영원한 불못에서 구원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승리케 위함인 것이다.
-------------------------------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6) 6. 내 영혼아 하나님만 바라라. 데살로니가 전서 1:9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깊고도 충만한 신비의 능력에 감동을 받게 된다. 그것은 마치 광맥을 집어넣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잠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는 풍요롭고도 암시적인 구절을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진정 그 말씀 속에 있는 능력과 충만함을 이해하고 있는가? 한 심령이 하나님께로 인도된다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연약하고, 필요할 때마다 그분을 우리의 방패와 능력으로 안다는 것, 우리의 인도자와 조언자로 안다는 것, 우리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로 전적으로 다가가서 전적으로 그분만 의뢰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당신은 심령 속에서 이 모든 깊고도 오묘한 축복을 알고 있는가?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자녀이고, 진정으로 회심한 심령이라면 그 회심을 안다는 것은 당신의 즐거운 특권이요, 따라서 그 회심 없이는 한시라도 기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면 이 세상이나 영원 속에서 우리의 필요를 그분 안에서 찾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심령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세상에는 없다. 우리가 만일 온 우주의 부요를 다 소유하고 그 부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취한다 할지라도 해 아래서는 다 채워지지 않고 오직 고통과 공허만이 남게 될 것이다. "나 전도자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내가 마음 가운데서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 깨달았도다."(전 1:12-17)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 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 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1:18-2:11)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에 의해 기록된 모든 것은 그런 시들어 가는 말뿐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모든 술잔과 세상 즐거움은 쓰레기 같이 소모되도록 허락된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 되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 도다."(전 1:8) 가련한 인간의 마음은 세상 것으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영원성을 지닌 인간의 심령의 목마름을 세상 것으로 채워 주지 못한다. 물질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물질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모든 인간의 심령에서 증명된다. 조만간 모든 사람이 철저히 드러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귀머거리 귀를 지금 그런 진리의 말씀으로 돌이킬 수 있다. 반대로 성령님의 음성을 거절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이 가련한 세상이 실질적인 위안과 행복을 줄 수 있다는 망상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세상의 부요와 명예와 공덕과 쾌락과 물질적 위로에 열심히 몰두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너무 늦게 깨닫는 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누가 복음에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눅 16:19 이하 참고) 그 부자와 같이 지옥에서 눈이 열린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는가? 하나님의 존전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하는 한 심령의 공포를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밖에 어두움에 버리워져 이를 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깨달아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지옥에서 고통의 불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한 가닥의 소망의 빛조차 없이 영원하고도 깊은 해결할 수 없는 어두운 구렁텅이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것인가? 오, 그런 사람은 아마도 조만간에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닥쳐올 심판에서 도망했을 것을, 복음으로 눈앞에 온 은혜의 소망을 붙잡았을 것을, 일찌감치 하나님께로 돌이켰을 것을" 그러나 슬프게도 이 세상 신은 그들의 마음을 가렸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사단은 그들을 세상 것에만 몰두하게 했다. 사업이라든가, 돈벌이, 쾌락, 세상 걱정, 정욕 등 세상 모든 일에만 몰두하게 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복음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게 했다. 이 복음과 비교해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은 저울 위에 티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잠시 본 주제에서 벗어난 것 같다.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특별히 성도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 안에서 모든 자원을 찾아야 함을 강조하는 바이다. 우리는 잠시 주제에서 벗어났는데 실은 회심하지 못하고 무관심한 사람이 혹 이 글을 우연히 읽게 될 때 그의 귀에 경고의 말을 주기 위함이다. 우리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간청하는 바이다. 그리고 회심한 성도들에게는 은혜로 돌이켜 주신 그분 하나님과 더 깊은 친교를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회심'이라는 제목 하에서 이 글을 쓰면서 우리 앞에 두 가지 일이 놓여 있음을 안다. 곧 회심하지 못한 심령들은 하나님께 회심하라는 것과 이미 회심한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라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 안에서 찾은 심령의 평안한 생활을 매일 살아가면서 그 실제적인 회심의 중요성에 대해서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그러한 확신 있는 생활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는 매우 기이한 모습으로 비치게 된다. 사실 그러한 확신 있는 생활은 이 세상에 담대히 말할 수 있게 될 때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비법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얻은 것을 지속적으로 감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에게 기대려는 강렬한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할 것이며, 우리가 다소 탄식하며 얻은 세상 것에 우리를 매달리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세상 것들은 우리에게 실망만 주었고, 하나님을 경멸하게 했던 것들이다. 우리는 동정과 도움과 상담을 위해 하나님께 직접 매달리기보다는 사람을 찾는 경향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것은 정말 심각한 실수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요, 담을 수 없는 물통마저 우리 스스로 부셔 버리는 격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결과는 불모와 황폐뿐이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우리에게 실망만 안겨 준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왜냐하면 사람의 팔에 기댄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터득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살펴보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렘 17:5-6)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다음의 말씀을 보자.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니라"(렘 17:7-8) 살아 계신 하나님의 팔에 의지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찾고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어떤 환경에서나 우리의 자원을 그분 안에서 찾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믿는 마음에는 결코 실망을 주시지 않는다.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이후에라도 실망을 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응답을 우리로 하여금 계속 기다리도록 하신다. 그러나 그 기다림 속에서 시간이 흘러 때가 되어 응답이 임하게 되면, 우리 마음은 찬양으로 가득 차게 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19)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위급할 때마다 그분은 우리에게 충족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인 사실이어야 하고 단순히 말로만의 고백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연약한 인간에게 기대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이것은 슬픈 기만술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런 기만술에 빠지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람을 찾고 있으며, 또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의 부족한 것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고, 또한 하나님을 불 명예롭게 한다. 그 결과는 실망과 혼돈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좀더 솔직하게 살펴보자.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는 귀한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정말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 구절 속에는 참 행복과 참 거룩의 본질이 있다. 심령이 참으로 하나님께로 실질적으로 돌아올 때는 참 진리와 참 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과 안식과 온전한 만족을 알게 된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 품속에 있는 것들이다. 거기에는 피조물을 의지하려는 어떤 기회도 있을 수 없다. 나는 혹 혼돈 속에 있지는 않은지? 나는 나의 길 인도를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다. 그분은 자신의 눈길로 나를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얼마나 완전한 인도함인가! 어느 인간이 나를 위해 이보다 더 훌륭한 인도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을 한번에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거동을 알고 계신다.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모든 문제의 근원과 결과를 알고 계신다. 그분은 실수 없는 인도자시다. 그분의 지혜에는 오류가 없고 게다가 그분은 나를 완벽하게 사랑하신다. 어디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인도자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나는 부족하단 말인가? 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소유주시다. 우주의 모든 보물이 그의 섭리 속에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에게 유익된 것이라면 주실 것이다. 만일 그 반대라면 안일함보다는 오히려 고통이 나에게 유익될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왜 피조물을 찾아야 하는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우리의 부족함을 인간에게 가서 찾아야 하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실제로 믿음의 기초를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을 단순히 의뢰하는 생활을 포기하는 것이리라. 그것은 실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불명예롭게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은 나를 실망시키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그것은 나의 몸과 혼과 영을 택하시어, 세상에서나 영원한 세계에서도 나를 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배신하는 꼴이 된다. 그분은 스스로 나의 부족을 예비하시겠다고 맹세하셨다. 비록 그 예비물이 아무리 많고, 아무리 크고,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말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그분의 말씀은 이렇다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물론 하나님은 피조물을 사용하시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다. 축복 받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고후 7:6) 바울은 위로를 위해 하나님을 찾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디도를 보내어 바울을 위로하셨다. 만일 바울이 디도를 바랬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다른 모든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유일한 언급은 하나님을 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라는 말씀뿐이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위급한 때에라도 그분은 우리의 확실한 자원이 되신다. 우리는 동정을 위해서도, 기타 모든 것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 하리로다"(시 62:5-6) 이렇게 하나님만 찾는 가장 축복된 습관이 그분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사람을 무가치한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서 그분의 분명한 도구로 사용되어 나에게 전달자로 오는 사람을 어떻게 무가치하게 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통로로 사용되는 그 사람을 내가 의뢰할 자원으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통로로만 가치 있게 보는 것이다. 이것으로 모든 것은 분명해 진다. 회심의 참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로 인도된다면 그것은 그분 안에서 우리의 완전한 가리개(covering)를 찾기 위함이요, 우리 마음의 완전한 대상을 찾기 위함이요, 시종 우리의 위급한 때를 맞아 완전한 자원을 찾기 위함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두자. 참으로 회심한 심령은 모든 피조물을 의뢰함으로부터, 또는 인본적 소망으로부터, 그리고 세상 성취로부터 돌아서서, 살아 계시고, 참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와 자신의 모든 부족함을 찾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하리라. 7.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는 지금 "회심"이라는 제목의 실제적인 면을 깊이 상고함에 이르렀다. 데살로니가전서 1:9에는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라는 말씀도 있다. 이 말씀은 진실로 회심한 모든 진실한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깊은 흥미를 준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전 생애는 회심의 순간부터 생이 끝날 때까지 진실된 영과 진실된 열심과 진실된 지적 봉사로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귀한 우리의 특권이며, 때문에 신성한 의무가 있다고 말로만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의 문제도 아니며, 어떤 생활 수준의 문제도 아니며, 또는 어떻게 우리가 부름을 받았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회심되었을 때 꼭 한가지 실천할 일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의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을 추구하거나, 하나님의 직접 가르침인 말씀에 위배되는 일을 찾는다면 그 즉시 우리는 그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말이다. 충실한 종의 그 첫 단계는 어떠한 위선에서도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바로 이 기준에서 시험을 거쳐야 한다. 기독도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아야만 한다. 즉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금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포기되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생애에서 우리 자신의 부름을 하나님의 명예와 연결할 수 없다면 비록 우리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할지라도, 또는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는 자로 발견되기를 바란다 할지라도 단연코 그 부름은 포기되어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길을 열어 주시기를 바래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자. 하나님은 믿음의 심령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우리의 할 일은 심령에 목표를 갖고 하나님께 몰두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앞에 평탄한 길을 열어 주신다. 처음에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 길은 좁고 험난하고 외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을 위해 기다리는 것뿐이다. 단 한시라도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반대되는 어떤 것과도 연관되어서는 안된다. 온순한 양심과 성실한 눈과 헌신적 마음은 많은 문제를 안정시킬 것이요, 많은 어려움을 해결하고, 많은 장벽을 무너뜨릴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본성이 움직이도록 허락만 된다면 많은 당혹함 속에서도 잘 인도해 주실 것이다. "눈은 마음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우리 심령의 목표가 진실하게 그리스도께 있고, 진실하게 그분의 이름과 주장에 있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긴다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귀한 계시의 보고를 활짝 열어 생명의 빛을 흠뻑 부으면서 납득시키실 것이다. 그러함으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태양 광선처럼 명쾌한 길을 보게 되고, 확고한 걸음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순간이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회심되었다는 귀한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생명의 열매는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우리가 회심하지 못했을 시절에는 우상을 섬겼고, 여러 가지 정욕과 오락에만 심취했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로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속죄된 온전한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이켰고,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안식과 만족을 찾은 것이다. 이 세상의 시간 속에서나 또는 영원한 곳에서도 피조물을 바랄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얻을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새 생명의 소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모든 보물을 저장해 두셨다. 믿음으로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가 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며, 사랑 안에 뿌리박고, 사랑 안에 기초를 두어 성도들과 함께 그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알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지혜를 전해 주시며, 그분으로 인해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우리 안에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충만하고, 만족하고, 강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김에 온 영과 혼과 육을 바칠 수 있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견고하며, 요동치 않고 항상 주님의 일에 만족하게 쓰임 받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다른 할 일이 없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로 실천될 수 없는 어떤 일이라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말이 놀랍게도 모든 문제를 단순하게 한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즐거운 권리이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부름과 정반대 되는 세속적 부름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때때로 듣곤 한다. 그것이 참 공덕인지 아닌지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된다. 바울은 천막을 만들면서도 한편 교회를 세웠다. 그는 양편(천막 만드는 일과 교회를 세우는 일) 모두로 주 예수님을 섬겼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일은 거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말이 마음에 진실로 간직된다면, 이 말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일상생활의 가장 단순한 일에도 주님 자신과 연관을 맺게 한다. 그럴 때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의 일에 가담하시어 거룩한 위엄을 부여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관심을 가져 주신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에서 방해 거리를 찾기보다는 오히려 그 일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한 실제상의 지혜와 은혜를 찾아 주님을 시중드는 일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의 거룩한 이름은 우리의 가장 작은 실생활에서도 영광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한 문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해진 행동반경의 범주를 넘어 어떤 신비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부를 예로 들어보자. 어떻게 그녀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그녀는 심방도 못하고 대화도 나눌 수 없다. 그녀의 행동 범위는 집주인의 그늘에 있어야 하고, 만일 그렇지 못하면 집주인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만일 그녀가 이 집, 저 집을 심방만 한다면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며, 실제로 하나님의 정해진 일을 거부하는 격이 된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들어보자. "종들로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떼어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딛 2:9-10) 우리는 여기서 종이 복종과 겸손과 정직함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자신의 믿음 정도에 따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복음 전도인이 거룩하고 고귀한 자신의 사명에 따라 세계를 두루 다니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또 다른 성경 구절을 보자.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말고, 그리스도의 종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 6:5-8) 이 얼마나 사랑스런 모습인가! 이 얼마나 멋진 종의 모습인가! "두려워하고 떨며"라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오늘날 어디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어디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거룩한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성한 눈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디에 자원하는 섬김의 마음이 있겠는가? 슬프게도 오늘날 고집과 교만한 마음과 자고와 자기 기쁨과 자기 유익만을 위하는 자만을 보게 된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주님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며,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일인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부름 받은 자 같이 우리를 다듬어 갈 모든 감각에 절실히 눈뜰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위의 말씀은 모든 진실한 기독도들에게는 가장 흔한 가정 일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며 영광을 돌려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은혜의 신호등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대부분의 기독도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 마음에 있는 실제적인 진리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정부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영광을 낮추시어 우리의 매일의 가정 생활에서의 맡겨진 조그마한 일과도 연결하신다는 사실을 은혜로 알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것은 마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우리의 모든 작은 일에도 하나님은 위엄과 유익과 원기를 주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7) 여기에 모든 문제의 귀중한 비밀이 담겨 있다. 급료를 위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주님을 섬기기 위한 일이다. 이는 하늘의 보상을 유업으로 받기 위하여 주님을 바라보는 자세이다. 오, 이 모든 것이 보다 충실하게 깨달아지고, 우리 가운데서 보다 드러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만 됐더라면 전 기독도 생활에 영적 고상함이 있었으리라! 그렇게만 됐더라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좋은 해답을 주었으리라! 모든 사람에게는 비웃음과 흠잡기가 얼마나 맥없는 비난인가! 기독교인들의 영적 고상함이 수만 명의 지식인들의 논리보다 훨씬 낫다. 열심 있고, 헌신적이며, 거룩하고, 즐거운 자기 희생의 기독교인들의 생활보다 더 강렬한 표현은 없으리라. 그리고 이런 생활은 4면이 벽으로 둘러 쌓여 있는 좁은 부엌에서 생활하는 진실한 기독도 가정부에 의해서도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진실한 기독자의 실생활은 회의주의자나 불신자들에게 가장 올바른 가능성 있는 해답을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막고 기독교인들을 법 아래로 집어넣으려는 자칭 법통들에게는 가장 만족스런 해답을 준다. 하나님의 사역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도전적일 때, 우리는 단순하게 이렇게 말하게 된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말로 설교해야 하겠는가?"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악한 일"과 "죽은 행실" 외에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골 1:21, 히 6:1) "육신에 있는 자들(회심하지 못한 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그들이 어떤 그럴듯한 방법으로 참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설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방법은 오직 사람들의 눈에 티끌만 더할 뿐이요, 사람들의 마음 눈을 감기게 할 뿐이요, 사람들의 심령을 속일 뿐이요, 손에 거짓 가르침을 들고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뿐이다. 하나님께 향한 참 회심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이다. 무엇이 회심자로 하여금 그렇게 될 수 있게 할까? 그는 생명을 얻기 위해 또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새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은 하나님의 값없는 영원한 선물인 것이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을 행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는 부름을 받았단 말인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언제? 어디서? 그 해답은 어떤 방법으로도 가능하며, 항상 실천할 수 있는 것이며, 어느 곳에서도 되는 일이다. 회심한 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만일 그가 다른 어떤 것을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진짜가 아닐 것이요, 은혜의 주님에 대해서는 불신자일 것이다. 주님은 섬기는 일을 위해 부르시기 이전에 먼저 그에게 새 생명을 주었고, 은혜를 주었고, 능력을 주셨다. 그러므로 섬기는 일만이 허락되는 것이다. 그렇다 기독교인는 섬기기 위해서 부름을 받는다. 이 사실을 잊지 말자. 기독교인에게는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거룩하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도록 드릴 권리가 주어졌다. 이것이 합당한 예배다.(롬 12:1) 이런 모습이야말로 모든 의문점을 해소시킨다. 그런 모습이 모든 어려움을 제거한다. 그런 모습이 모든 대적을 잠잠케 한다. 그런 모습이 모든 것을 제자리에 안정시킨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어느 곳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다. 신약 성경에 보여진 기독 신앙은 믿는 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열매인 것이다. 그것은 기독도의 매일의 생활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가 재생되는 것이다. 기독도가 만지는 모든 것, 그가 행하는 모든 행위, 그가 말하는 모든 말, 그가 살아가는 전 생활이 주일 아침부터 다음 토요일 저녁까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라는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어야 하며,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의 영에 감동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바램은 성도들의 생활이 보다 훌륭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주님의 사랑하는 성도들이 어디서든지 성령님의 감동 속에서 보다 열성적이고, 철저하고, 온 마음이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자세가 되어 주님에 대한 귀한 섬김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8. 당신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데살로니가 전서 1장 마지막 절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그 구절은 매우 확실하고 강력한 어조로 데살로니가에서의 뚜렷하고도 충만한 사도 바울의 깊은 이해력있는 증거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곳 데살로니가의 새 회심자들 속에 있었던 밝고도 실제적인 믿음 생활을 드러내고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살아 계시고 참 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이것은 은혜로 행한 것이었다. 또한 특별한 능력과 원기와 열의로 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믿건데 그보다 더한 것이 또 있었는데 곧 만일 이것이 없었더라면 사랑하는 성도들의 회심과 신앙 속에서 엄청난 결함이 있을 뻔했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돌이켜 회심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바로 이 사실에 깊은 관심을 두기 바란다. 밝고도 복된 주님의 재림의 소망은 바울 사도의 설교 속에 있는 복음의 진지한 부분이며, 또한 그의 복음 사역으로 말미암아 회심한 사람들의 내적 신앙의 성실한 부분이기도 하다. 축복의 종 바울은 온전한 복음을 전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위대한 일을 성취했음을 전파함과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그 계획의 영원한 기초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주께서 하늘에 올라 하나님 우편에서 승리의 자리에 앉아 성도들을 드높이고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사실도 설파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오신다고 전했다. 첫째는 자기 백성을 자신에게 이끌어 하나님 아버지의 집 깊숙한 곳에 거하게 하기 위함이요,(그 장소는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그 후 그들과 함께 지상에 오시어 원수들을 심판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왕국으로부터 불법을 행하는 대적자 모두를 끌어내고 자신의 영광스런 통치를 땅 끝까지 이루기 위함이다. 이 모든 내용이 사도 바울이 전한 귀한 복음 속에 있다. 데살로니가의 회심자들은 바로 그 복음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사도행전 17장에서 간접적이지만 매우 흥미 있는 이 복음의 내용을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영감 받은 기자는 불신의 유대인들이 바울의 설교에 대해서 어떻게 반대하고, 평가한 내용을 기록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행 17:5-7) 이것이 주의 종들의 설교를 들은 불신자들의 불쌍하고 무식하고 편견적인 생각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생각 속에서 위대하고 엄숙한 진리의 요소를 볼 수 있는데 즉 환경에 따른 세상 제도의 완전한 멸망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의 설립이다.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겔 21:27) 그러나 주님의 재림과 왕국이 사도 바울의 설교 속에서 당시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교훈이 현재에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는 점이다.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이러한 축복된 소망으로 돌이켰을 뿐만 아니라 그 소망 안에서 섰고, 안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매일의 삶을 그러한 밝은 소망 안에서 사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한 신조의 부분으로만 받아들이기 위한 건조하고 메마른 어떤 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실상이요, 심령 속에 있는 강력한 영적 능력이었다. 즉 이 세상에서 완전히 마음을 분리시킨 어떤 귀하고 흠 없는 거룩하고도 지고한 소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순간 순간 밖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 다시 강조하는데,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이었다. 데살로니가 전, 후서에는 다른 서신에서 합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계시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전, 후서가 바울 서신 중에서 가장 초기의 글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주목하게 된다. 그 서신서들은 신앙 면에서 어린 모임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독자들께서 이 두 서신을 단번에 읽어보면 8개의 각 장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기록되어 매 장마다의 주제와 연관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제 1장에서는 주의 재림이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항상 보존되어 마음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주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에서의 긴 여정의 끝에 가서는 찬란하게 빛나는 빛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 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기다린다고 말하니"(살전 1:9-10) 무얼 기다린다는 말인가? 자신들의 죽음을? 아니다. 그러한 내용이 아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은 없어졌다. 죽음은 신자들의 소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무얼 기다리라고 가르침을 받았던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살전 1:10a) 그렇다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 주목하시라.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b) 이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구주시며, 위대한 구속자의 인격이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비참함을 담당하신 분이며, 우리를 위해 영원하신 심판자의 손길로부터 진노의 잔을 받아 영원히 비워 버리신 분이시다. 그분은 모든 구름을 제거하셨고, 그리함으로 우리는 그 구름 너머에 있는 천국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고 영원 속을 끝없이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찬란한 영광과 축복만을 바라보게 되었고, 이는 마치 끝없는 행복을 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 은혜로우신 구원자의 재림을 아침,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밤까지 바라보며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인 구주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실상인가!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 그 날의 일을 시작하면서, 비록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때로는 마루를 닦는 일일 수도 있고, 복음을 설파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밝고도 복된 소망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 얼마나 구별되고 고상한 것인가! 저녁 어두움이 우리를 엄습하기 전에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주님의 재림을 맞이한다는 것은 너무나 거룩하고 구별된 일이다. 이것이 광신자의 꿈이고, 열광자의 환상이겠는가? 아니다. 이것은 소멸될 수 없는 진리이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가장 귀한 기독 신앙의 바로 그 기초 위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의 인성을 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밟으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분께서 이 땅에서 가련하고 타락된 인간들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며 일하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분이 죄가 들끓는 이 황폐한 세상의 감각으로 한숨짓고, 눈물을 흘리시며 신음하였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분이 십자가를 지고,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을 옹호하셨고,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셨고, 마귀의 역사를 멸하시고, 지옥의 모든 권세를 공개적으로 보이셨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려 원죄를 소멸하시고, 역사의 시작부터 은혜로 하나님의 이름을 믿게 되는 모든 사람들의 자범죄를 짊어지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사흘 밤, 사흘 낮을 땅 속에 누이셨고, 주의 첫날에 무덤에서 일어나 죽음을 이기시어 새로운 피조물의 머리가 되시고, 최소한 오 백 여명의 증인들에게 보이신 후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부활 후 50일 만에 성령을 보내어 사도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여 땅 끝까지 그분의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오순절로부터 지금까지 그분이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대언자가 되시어, 곧 거룩한 대제사장이 되시어 우리의 죄와 허물과 부족함을 위해 중보자로서 우리의 모든 연약성과 슬픔을 동정하시며, 지속적으로 우리의 기도와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려 아름다운 향기를 흠향케 하시는 것이 사실인가? 이 모든 것이 사실이며, 진실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 모두가 틀림없는 사실이며, 이것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놀랍게도 확실함과 충만함과 함께 심도있게 능력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모두가 바로 성경의 확고한 기초가 된다. 이 기초는 어떠한 세상의 권세라도, 또는 지옥의 권세라도, 또는 인간과 마귀의 어떤 권세라도 방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자, 이제 주님의 재림의 복된 소망도 정확하게 위와 같은 권위에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로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신 것이 사실인 것처럼, 자라서 어른의 신분이 되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무덤에 누이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하늘의 위엄의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주께서 주의 백성을 자신에게 영접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주님은 오늘밤에 오실 수도 있다. 그가 언제 오실런지 아무도 모른다. 그건 어느 때고 오실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그분께서 지체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1800년의 오랜 기간 동안(필자는 1820년에 태어났다) 주님은 식을 줄 모르는 사랑과 자비와 동정심으로 기다려 오셨다. 그 모든 기간 동안 온전한 구원이 드러나기를 예비하셨고, 동시에 심판도 예비하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오랜 고통과 인내로 기다려 오셨고, 지금도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언젠가는 도적같이 주님은 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오심을 소망하고 항상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러한 마음 자세로 살 것을 가르쳤다. 사도 바울도 실은 그렇게 살았다. 복된 재림의 소망은 그의 매일의 생활 습관과 감정에 긴밀히 밀착돼 있었다. 그것은 그의 노고의 매일의 생활 습관과 감정에 긴밀히 밀착돼 있었다. 그것은 그의 노고의 열매였던가?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바울은 그들 모두를 그때 그곳에서(주님의 재림 때) 만나기를 바랬다. 어느 원수도 그 모임을 방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 2:18) 매우 기이한 일이고, 괴기한 일이다! 그때도 그랬었다. 사단은 다니엘의 시대에도 자기의 임무대로 하나님의 천사를 방해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간절히 보기 원하는 일에도 방해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가 즐겁게 모이는 그 모임은 방해할 수 없다.(하늘의 모임을 말함-역자 주) 그 모임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순간일까! 얼마나 귀한 결합일까! 얼마나 달콤한 만남일까! 얼마나 멋진 오랜 친구들의 인사가 될 것인가!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욱 멋진 것은 주님 자신이다. 주님의 미소야말로 최고의 멋짐인 것이다. 바로 주님의 환영이다. 주님의 감동어린 "참 잘 했노라"라는 말일게다. 이 얼마나 귀하고 심령을 감싸주는 소망인가! 복된 사도의 생각과 가르침 속에 있는 그 엄청난 장소에 대해서 우리는 놀랄 필요가 있겠는가? 사도는 지난 모든 경우를 회상하며 모든 주제와 연관시킨다. 그것은 구별된 생활과 실제로 경건으로 이어지는 문제인가?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이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2-13) 독자들이여, 특별히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마지막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자.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이 얼마나 감탄할만한 지혜가 비치고 있는가! 사도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친구들(성도들)로 인해서 실족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오류에 대해서 직접 관여하려 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미 자는 자들이 주님 재림 때 만남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의 오류는 다음의 짤막한 문장으로 완전히 해소되고 있다. 즉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이다. 한 사람도 그 기쁨의 만남과 잔치에서 누락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복된 확신이다! 이것은 현재 살면서 보이는 것 이외에는 아무도 주님의 재림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승리적 해답인 것이다.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비록 그들이 무식하고, 실수 많고, 방황하고, 넘어지고, 연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복된 주님인 우리 심령의 영원한 사랑 공급자는 그 복된 순간에서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내어쫓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한량없는 은혜로 인해서 우리는 신앙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살게 될 것인가? 아니다. 그 은혜는 항상 내재하는 지각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의 모든 것을 판단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에 거슬리는 우리 자신의 모든 방법을 분별할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이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 주님의 재림의 소망 역시 마음 속에 밝고도 생생하게 간직되어 진다면 틀림없이 우리의 성품과 우리의 생활을 깨끗하고, 거룩하고, 고상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렇게 해주지 못한다. "자기 안에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주께서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케 하느니라"(요일 3:3) 사람이 어느 때고 주님 맞이할 소망으로 살아가면서 그의 마음이 세상일에 집착하고, 돈버는 일이라든가, 자기 멋대로의 행동이라든가, 오락 등 헛되고 어리석은 일에 마음이 붙잡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자. 우리가 하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매일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면 시간 속에서의 피부적 감각 생활에는 좀 느슨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의 재림을 지식으로 단순히 교리로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에나, 성격에나, 실생활 속에 아무런 효과도 미치지 못하면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예언의 진리를 단순히 지식으로만 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귀한 보혈로 우리 죄를 씻어 주신 주님을 맞이할 밝고도 복된 소망으로 가득찬 모든 영적 실재와 실질적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다. 우리 속에 이러한 일들이 허다하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참되고 적절한 소망의 능력을 이처럼 잃고 살아가고 있음은 심히 두려운 일이다. 주님 재림의 진리는 우리가 쉽게 거론할 수 있는 단순한 교리로만 받아들이기에 매우 익숙하다. 때문에 우리는 재림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서 토론도 하며, 사람들과 논쟁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확실하게 잡았다고 고백하는 신앙에다 거짓된 우리 자신의 세상적 태도와 마음과 세상적 기질을 더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 주제 하에서 슬프고도 비참한 우리의 단면을 더 추구하지 않으련다. 주께서 우리를 살피사 은혜로 치유하시어 우리의 심령을 높여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망을 적절하게 재생시켜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은 찬란한 새벽 별을 맞이할 소망이리라.(벧후 1:19참조)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명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이 "아멘 주여 어서옵소서" 라는 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이 글을 끝맺어야겠다. 우리는 독자들과 함께 두 서신서(데살로니가 전, 후서)를 통해 데살로니가인들이 돌이켜 주님의 재림의 소망을 갖게 됨이 곧 사도 바울의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면으로 또한 기독자의 생활 양상으로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건대 참 회심으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한다면 복된 주의 재림의 소망은 절대로 중단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드러냈다. 참 회심자는 우상에서 돌이켜 즉 세상과의 연관을 끊고, 또한 옛 자아와 관계를 끊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이 생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나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발견하여, 그만을 섬기며 결국에는 하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자다. "참 회심이란 무엇인가?"(Conversion, What is it?) 라는 질문에 대한 참되고 적절한 해답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당신은 참으로 돌이켜 회심했는가?(즉 당신은 참으로 구원받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일 당신이 회심했다면 당신의 생명은 지금 그 회심(구원)을 선포하며 살고 있는가? ........................................ 어떤 때는 구원받은 것 같고…… 어떤 철학자는 자기의 고민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태어난 이상 누구나 꼭 한 번은 죽어야 하는데, 지금 나는 살아 있는 그것이다". 그렇습니다. 흐르는 물에서는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이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며,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어떤 사람에게는 갑자기,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서서히 다가오지만 그 어떤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죽음 저편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을 뿐 그 중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을 뿐, 그 중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중간에서 머뭇거리는 것이나(왕상 18:21),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것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고 계십니다(계 3:16).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든지, 멸망을 받아 지옥에 가든지 둘 중의 하나에 속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입니까? 다행히 구원을 받아 아름다운 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히 기쁨을 누린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만, 만약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드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지옥에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처럼 두렵고 기가 막힌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 일이 이렇게 중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구원받은 것 같고, 또 어떤 때는 구원받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때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며칠 전,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집사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 저는 오래 전부터 예수님을 믿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예, 예수님은 저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을 진실로 믿으십니까?" "예, 저는 진실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으시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이제는 죄인이 아니죠?" 그 집사님은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저는 하나님 앞에 늘 부족한 죄인입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대신하셨다면 왜 또 죄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믿을 때까지의 죄는 용서해 주셨지만 그 후에 짓는 죄는 항상 회개함으로서 받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죄인으로 계십니까?" "예, 저는 그래서 날마다 새벽이나 집회시간에 나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심히 겸손한 모습으로 허리를 굽히며 말했습니다. "집사님은 모든 죄를 다 회개하셨습니까?" "………"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심령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못한 죄는 하나도 없습니까?" "……(작은 목소리로) 회개하지 못한 죄가 조금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주님이 오신다면 주님 맞으실 확신은 있으십니까?" "지금 죽는다면 하늘나라에 가실 확신은 있으십니까?" 저는 다시 한번 확실하게 물었습니다.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아니면 못 받으셨습니까?" "(자신이 없는 목소리로) 어떤 때는 구원받은 것 같고, 어떤 때는 구원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집사님은 구원받지 못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저편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을 뿐 중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죄가 한 호리라도 있다면 지옥에서 결코 나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6)".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 이러한 어정정한 믿음을 갖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함정은 회개하면 죄가 용서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가장 악랄한 사단의 도구입니다. 회개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죄를 용서받는 도구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강도짓을 하다 붙잡힌 한 죄인이 재판관 앞에서 통곡을 하며 자기 죄를 회개하고 뉘우쳤습니다. 그러면 재판관이 그 죄인의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것을 보고 그를 용서해 줍니까? 그 죄인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 죄 때문에 형벌 받아야 하는 것은 또 다른 별개의 문제입니다. 재판관은 법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하여 판결할 것입니다. 그 죄인은 자기의 눈물과 회개에 상관없이 법에 따라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후 그 사람이 형량을 다 마치고 나오면 재판관이 또 그를 잡아다 재판을 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죄 값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재판관 앞에서도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 용서는 회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롬 6:23).죄의 삯에 대하여 다른 것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죽음과 영원한 형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상충되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공의도 이루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구원도 주시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요일 4:9,10).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심으로 바로 우리가 죽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른 것이 되었으며 죄 값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는 죄로 인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나쳐 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때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난 죄는 용서되었으나 이후부터 범하는 죄는 자기 자신이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가 용서되는데 그 주님의 십자가는 지금부터 1,900여 년 전의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를 기점으로 볼 때 우리의 죄 중에 주님의 십자가로부터 미래의 죄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현시점에서 볼 때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있지, 1900여 년 전의 그 갈보리 십자가에서 보면 모두가 미래의 죄입니다. 그런데 어떤 건 용서받고 어떤 건 용서받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죄도 주님의 십자가에서 보면 미래의 죄입니다. 그러나 그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롬 3:24)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생애의 모든 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골 2:13). 이제 모든 것은 확실해졌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못 받은 것 같기도 한 것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기의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이며, 구원받은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 저의 모든 죄를 책임져 주시고 해결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님께서 저의 영원한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주님을 마음에 영접해 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제 "나도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 가운데 기쁨으로 주님을 기다리시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의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OK냐? OP냐? 어느 날 공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좌석 체크를 하고 수속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쪽 편에서 소동이 있어 가서 보니 어떤 젊은 부인이 통사정을 하며 비행기를 타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지금 저쪽 공항에 자기를 맞기 위하여 남편과 아들이 나와 있으며, 지금 가지 못하면 모든 일을 그르친다며 간곡히 부탁했지만 공항 직원은 도저히 이 표로는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표는 OP표였습니다. 그 부인은 표를 살 때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비행기표에는 OK표와 OP표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표는 생김새도 똑같고 금액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글자의 차이는 참으로 큰 것입니다 OK표는 자석이 확실히 예비되어 있는 것으로 항공사 측이 그의 탑승을 보증하는 표입니다. 그러나 OP표는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 없을지 그때 가 봐야 아는 표입니다 OP표는 OK표를 가진 사람이 무슨 일이 갑자기 생겨 가지 않을 때를 예상하여 파는 대기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OP표를 가지고는 자기가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 늘 불안하고 초조해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나라에 가려 하지만 이 OP표를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늘나라에 가게 될지 못 가게 될지는 그때 가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을지 지옥일지 그때 가 봐야 안다는 것처럼 불안하고 두렵고 초조한 것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비행기야 못타면 다음 비행기를 탈 수도 있고 또 비행기를 못타면 배를 탈 수도 있지만 이 하나님의 심판은 단 한번에 결정되는 것이니 세상에 이처럼 크고 무서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갈지 못 갈지 그때 가봐야 안아는 사람은 바로 OP표를 가진 사람과 같으며 그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 행위가 심판 때 인정받아서 구원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마태복음 7장 22,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기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또 누가복음 13장 25-2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이 사람들은 다 자기의 행위를 의지한 사람들로서 영원히 쫓겨남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에 대한 보증이 주님께 있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OK표를 가진 사람은 어떻습니까? 예를 들면 십자가에 달렸던 한 강도는 주님께 자기를 부탁하고 의지했을 때 비록 그 강도의 생애가 추악하고 저주스러웠을지라도 주님은 그 강도의 구원을 주님께서 친히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 강도는 주님 앞에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을지라도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것이 바로 OK표입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느 표를 갖고 계십니까? OK입니까! OP입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죄의 삯은 사망 어떤 사람이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 백화점은 가격 정찰제를 하기 때문에 할인을 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마음에 드는 옷을 보고 가격을 물었습니다. "예. 그 옷은 10만원입니다". "너무 비싸군요. 7만원만 합시다". "안됩니다. 10만원 주셔야 합니다". "뭘 그러십니까? 그럼 8만원 드리겠습니다"하며 그 사람은 값을 치르려 했습니다. 점원은 "그렇게는 절대로 안됩니다. 이곳에서는 할인을 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10만원 주셔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꼭 10만원을 다 내야 합니까?" 그 사람은 할 수 없이 제값을 다 주고 그 옷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할인을 하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죄에 대해 치러야 할 값은 사망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으므로(롬 3:23) 누구나 죄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죄 값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 죄 값에 대하여 "사망"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기의 죄 값을 그 값보다 덜 치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회개하면 죄가 용서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이 회개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아서 무더기로 지옥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회개하면 죄가 용서된다는 말씀이 한 구절이라도 있습니까? 물론 회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을 했다고 해서 죄가 용서되겠습니까? 앞에서도 잠깐 예를 들었지만 어떤 강도짓을 한 사람이 잡혀서 재판을 받게 될 때에 그가 재판장 앞에서 잘못했다고 회개하면 그 죄가 그냥 용서가 되겠습니까? 그가 잘못을 시인하고 돌이키겠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회개했다고 그 죄가 용서되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회개하는 것과 그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은 다릅니다. 그가 죄에서 해방되는 길은 죄의 값을 치르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하여 해방을 받으려면 자기의 죄 값을 치르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죄 값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까? 새벽기도입니까? 선행입니까? 십일조입니까? 교회에 등록하는 것입니까? 찬송하는 것입니까? 성경공부 하는 것입니까? 율법을 잘 지키는 것입니까? 주기도문을 열심히 외우는 것입니까? 십계명을 잘 외우고 치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할 때 죄의 값이 치러집니까? 하나님 앞에서 할인하려 하지 마십시오. 죄에 대한 판결은 죄인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재판장이 내리는 것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언도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 죄의 삯은 오직 사망일뿐입니다. 사망 이외에 죄의 값을 지불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결코 할인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자신의 노력을 멈추십시오. 죄의 삯은 행위가 아닙니다. 이제 겸손한 마음으로 앉아 손을 모으고 눈을 들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거기에 누가 달렸습니까? 그분은 누구십니까? 그분은 왜 그렇게 매달리셨으며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까? 그분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렇게 죽어야 했습니까? 성경은 주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주 예수님)가 온 것은 섬김을 닫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대속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죽어주는 희생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주 예수님은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죽은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여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사랑하는 여러분!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똑같습니다. 여기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네 사람이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식대를 모두 지불하였을 때 다른 세 사람도 역시 식대를 지불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세 사람은 식대를 지불한 적이 없지만 그들은 낸 것과 똑같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당신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당신은 이미 죽은 것으로 하나님이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에게서 죄의 값을 다 받으셨습니다. 당신의 죄의 값은 지불되었고 다 치러졌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큰 소리로 선포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의 뜻은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아무 죄도 묻지 않으십니다. 주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는데 무슨 죄가 또 남아 있겠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며 그 삯은 이미 지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치를 죄 값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 모든 행위를 멈추고 당신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신 주 예수님을 가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감사드리십시오. "주님! 참 감사드립니다. 저의 죄의 삯을 대신 치러주신 주 예수님, 참 감사드립니다"라고, 지금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 되었느니라"(롬 3:23,24). 그의 눈은 불꽃같고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막 4:22). 이 세상에는 숨겨진 것도 많고 감추어진 것도 많습니다. 온갖 비리와 부정이 드러나지 않고 역사 속에 묻혀진 것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치계나 경제계, 또는 교육계와 사회 각 분야의 비리는 그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 시간 그런 외적인 모든 분야를 떠나서 조용히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지난 과거의 행적과 모든 생각들을 돌아다본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비밀은 드러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눅 8:17)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살펴보시는 주님의 눈은 불꽃같습니다(계 1:14, 2:18, 19:12). 이 불꽃은 어둠을 밝히며, 숨겨진 것을 드러내며, 감추어진 것을 남김없이 나타내는 하나님의 불꽃입니다. 그 때 감추어졌던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납니다.사람은 외모를 보고, 그가 입는 옷을 보고, 그의 직장을 보고, 그의 문벌과 학벌을 보고 그를 판단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은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실 뿐입니다. 주님의 불꽃같은 눈이 우리의 마음 깊숙이 감추어진 부분을 샅샅이 살펴보실 때 우리는 얼마나 무섭고 두렵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의 행적 중에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숨겨진 행위들, 자기도 그러한 일을 하면서 그러한 일을 행하는 이들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했던 모든 위선들…. 다른 사람들이 알면 깜짝 놀랄 그 부끄러운 사실들이 모두 밝혀질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 구상하며 즐겼던 모든 죄악들이 그날 큰소리를 지르며 다 튀어나올 것입니다. 저는 일전에 어느 분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의 문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에게 "당신은 당신의 모든 과거를 잘 알고 계시는 어머니 앞에서도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한참동안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흔들며 어머니 앞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어머니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 작은 죄가 따로 없으며 오직 죄가 있느냐, 없느냐가 있을 따름입니다. 죄의 기준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롬 3:23)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며 영원한 지옥 형벌입니다(롬 6:23). 하나님 앞에서 속이거나 숨기려 하지 마십시오. 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직 죄인인 것을 솔직히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시며 자기를 낮추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여기 실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에게 임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두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두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이 말씀은 죄인만이 받을 수 있는 복된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께 나아오셔서 당신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완전한 형벌을 받으신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시므로(요 1:12) 심판에 이르지 않게(요 5:24)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데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 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면 주 예수님께서는 한 생명의 가치를 온 천하보다 귀하다 하셨습니다(마 16:26). 그 생명은 이 세상에서 그에게는 오직 하나뿐이며 전부입니다. 그는 생명을 잃어버리는 순간 온 천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한 생명의 가치를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귀한 생명을 갖고 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고 있습니다. 한가지 예로 지구의 넓이는 대략 5억 9백만㎢로 평수로 계산하면 154조 2천 6백억 평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의 가치를 지구의 넓이보다 더 크다 하셨습니다. 사람의 평균 수명을 70년으로 할 때 하루의 가치는 약 60억 평에 해당합니다. 오늘 하루를 지나면 우리의 생명은 그만큼 줄어든 것이며 하루에 해당하는 엄청난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숱한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은 겨우 내 집 마련하는 것이며 일생을 다 바쳐 50평짜리 아파트 한 채 구하는 정도의 것임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얻지 못한 채 허망하게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허다하며 혹 얻었다 할지라도 죽을 때 가져갈 수 없는 것뿐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갖고 세상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을 얻기 위해 일생을 다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여러 제자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주님보다 은 삼십을 택한 가룟 유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재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 2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말씀인가요? 주님보다 은을 택한 사람. 영원한 생명보다 돈을 택한 사람 가룟 유다! 그는 지금 어디 있을까요? 어찌 가룟 유다 뿐이겠습니까? 오늘날도 주님을 믿지 아니하고 세상을 택한 사람들은 다 똑같습니다. 주님보다 이 세상에 명예, 지위, 돈, 쾌락, 술, 인기 등등. 성경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세계적으로 하루에 죽는 사람이 약 23만명이며 매일 매일 그렇게 죽어갑니다. 열흘에 230만, 백일에 2,300만, 일년에 8,000만여명씩 죽어갑니다. 죽음은 물밀 듯이 그렇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존귀한 생명을 갖고 천한 것을 추구하다가 속절없이 죽어갈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그러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을 사용해서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생명보다 귀한 것이어야 하며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어야 하기에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요 18:36). 그것은 하늘에 속한 것이며(빌3:20), 하나님의 선물이며(엡 2:8), 구원이며(롬 10:13), 영생입니다(요일 5:13). 이 영원한 생명은 주님께 있으며 주님을 모셔들인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요 6:47)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진정한 기쁨은 어디에 있을까요? 돈이나 명예 재물을 얻는 데 있을까요? 그런 것을 추구하다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의 고난을 받는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러한 것이 부족하고 없을지라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 영원한 생명을 찾고 소유했다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참 잘했다"할 것입니다. 주님은 장차 당신께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리라" 하시지는 않으시겠습니까? 다듬지 않은 돌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제단을 쌓는 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단을 쌓을 때는 반드시 다듬지 않은 돌로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출 20:2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신 27:5,6). 다듬지 않은 돌! 하나님께서는 제단에 사용하는 돌은 정으로 쪼거나 철로 다듬으면 부정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벽돌 굽는 일을 하거나 돌을 다듬는 일을 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어떤 종교 제단을 만들거나 큰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은 다듬지 않은 돌이 쓰여졌고 애굽의 우상 전각은 잘 다듬어진 돌이나 벽돌이 쓰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하나의 예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우리를 다듬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만큼 다듬어 질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가증하게 보시고 부정하다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대다수의 종교는 끊임없는 자기 연마를 요구하고 있으며 도를 쌓거나 공을 드리는 등의 노력으로 잘 다듬어져서 일정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가르침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주님은 수고와 무거운 짐을 다 정리하고 오라 하시지 않고 그냥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종교와 신앙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잘 다듬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실 것을 믿고 나아간다면 그것은 신앙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나아오는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오래 전에 들은 한 예화가 생각납니다. 영국의 어떤 유명한 화가가 인생의 진솔한 모습을 그리고자 모델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어떤 지하도를 지나다가 한 구걸하는 남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를 보자 남루한 모습이지만, 그의 꾸밈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나온 진실을 발견하고는 그를 그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화가는 걸인에게 가까이 가서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모델로 삼고 싶으니 내일 우리 집으로 와 주시오"하고는 명함과 함께 얼마간의 돈을 주었습니다. 그 걸인은 그러한 제의를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더구나 자기를 모델로 삼겠다고 한 그 화가는 당대에 제일가는 화가였습니다. 그래서 그 걸인은 생각하기를 '내가 비록 거지라 빌어먹기는 해도 인물이 괜찮은가 보다'하고는 '이왕 그릴려면 더 나은 모습을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화가가 준 돈을 갖고 맨 먼저 간 곳이 목욕탕이었습니다. 목욕탕에서 말끔히 씻고 나온 그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손질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 가서 새옷을 사 입고는 마지막 남은 돈으로 구두를 사 신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말쑥한 신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정식 모델이 되면 많은 돈을 받으리라 생각하여 있는 돈을 다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곧 그는 명함에 적혀 있는데도 그 화가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거지는 자기의 달라진 모습에 화가가 크게 기뻐하리라 생각했고 자기가 매우 자랑스러웠습니다. 이윽고 화가가 나와서 그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문간에 서 있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그 거지는 화가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고는 자기가 그 지하도에서 구걸하던 걸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그 화가는 말할 수 없이 실망하고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리고 말하기를 "당신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하고는 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가식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원하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께 간다면 주님은 자신의 손으로 우리를 주님의 뜻에 맞게 다듬어 주실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가려진 십자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커다란 전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은 드러내려 하는 것이요, 다른 한편은 가리우려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없이 치열한 전쟁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것으로 우리의 생명에 관한 것이며 또한 죄에 관한 것입니다. 태어난 이상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한계에 있어서 죄와 그 결과에 대한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죄와 그 무서운 결과로부터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또 어떻게 구원하시려는지를 밝히 드러내려 하시고, 사람을 멸망시키고 파멸에 이르게 하려는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이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가리우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쉽게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하여 구원의 길을 단 한가지 방법으로 만드셨는데 이것을 온 천하에 다 증거하십니다. 사단 또한 사람이 구원받는 길이 단 한가지 방법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오직 그것을 가리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그 하나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입니다. 그분은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가? 그분에게 무슨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만한 죄가 있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분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벧전 2:24).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았다"(고후 5:21).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15:3). 등등 이렇게 성경은 주님의 죽으심의 이유가 우리 죄 때문이며 우리의 죄 문제를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속죄 제물이었다고 분명히 밝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러한 말씀을 교묘하게 덮어씌운 사단의 술수에 속아넘어간 숱한 교인들을 만나보게 됩니다. 사실 오늘날의 교인들 중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라는 것을 모르는 교인은 없습니다. 제가 만나본 많은 교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죽으신 이유에 대하여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시 "그렇다면 하늘나라에 가실 수 있으시겠네요?"라고 물으면 어찌 그리 약속이나 한 듯이 "아직 부족해서요", "회개를 더 해야죠"라든가 "아직도 죄가 많이 있어서"라며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되물으면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주일 성수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죠"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제자의 십자가에 가리워진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단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성실한 교인으로 만들어 교회 일에 충실하고 종교생활에 열심하게 함으로 스스로 속게 만들로 있습니다. 사단은 오직 구원의 십자가만을 가리우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기독교적인 것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교회 일에 열심하게 하여 직분을 받게 하고 봉사와 헌신 또는 기도와 찬송, 방언 등으로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 같은 뚜렷한 이단은 결코 두려워할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정통이라 하는 교회들이 기독교적(종교적)인 것에 뒤덮혀 율법적 사고와 행위적인 일들을 가르치며 요구하는 것이 참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 또는 율법에 얽매여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사단의 계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열심과 노력에 의지하는 십자가를 우리 주님의 갈보리 십자가에 대신하여 섬기는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 귀하신 주님이 생명바쳐 이루신 십자가의 공로를 그러한 것으로 대신하지 마시고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공로로 완전한 죄사함을 얻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 당신을 대신하여 죄의 삯을 완전히 지불하신 우리 주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요1:12) 진실된 갈보리의 십자가를 행위의 십자가로 가리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두 개의 산 얼마 전 한라산에 등반한 적이 있었습니다. 몇몇 성도들과 더불어 아침 일찍 시작한 한라산 등반은 정상에서 잠시만 있다 내려와도 저녁 늦게서야 끝나는 힘든 산행이었습니다. 한라 서쪽의 영실 계곡을 타고 가파른 언덕을 숨을 몰아쉬며 기어가듯이 오르면 넓은 평원이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 한참 걸으면 윗새오름 대피소를 만나는데 여기는 기후의 변화가 심한 곳으로 안개를 만나면 길을 잃어버리기가 쉬운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윗새오름 대피소를 지나 정상을 향해 계속 가면 갑자기 눈앞에 우뚝 서 있는 기암절벽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서도 수직으로 300여 미터 높이로 서 있는 이 거대한 봉우리야말로 한라정상이며 백록담으로 한라산을 등반하는 이의 마지막 남은 힘까지도 소진시키는 최후의 난코스입니다. 숨이 턱에 찬 채 다섯 계단 오르고 쉬며 또 일곱 계단 오르며 쉬다가 저는 성경에 나오는 한 높은 산이 생각났습니다. 그 산은 한라산보다 500여 미터나 더 높은 시내산이었습니다. 이 시내산은 해발 2400여 미터의 험준한 산으로 온통 바위로 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산에 강림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내려 주셨습니다.출애굽기 19장과 20장을 보면 열 개의 거룩하고 엄위한 하나님의 계명이 떨어지던 그날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무섭고도 두렵기가 한이 없었습니다. 말씀을 보면 그 산의 사면에 경계를 정하고 그곳을 침범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임을 당했으며(출 19:12), 짐승이나 사람이나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있었고 큰 나팔 소리에 진중 백성이 다 몸을 떨었습니다. 출 20:18절에 "백성이 떨며 멀리 섰다" 했고 19절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매 우리가 죽을 것 같으니 모세가 대신 말해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돌판에 기록한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았으며 그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오는 날 결국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출32:28). 시내산은 사막 가운데 있는 곳으로 높고 험준하며 무섭고 두려운 곳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법이 있고 심판이 있는 곳입니다. 모세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그 즉시 죽임을 당하는 곳입니다(출 33:20-23). 저는 한라산을 오르며 주님이 방문하셨던 또 하나의 나지막한 산을 생각했습니다. 그곳은 갈보리 산이며, 산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언덕입니다. 그곳은 사람이 많이 사는 예루살렘 성에서 가까운 곳이며(요 19:20) 10여 미터의 낮은 언덕이었습니다. 오래 전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엄위하신 그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갈보리 언덕에 와 주셨습니다.시내산에 오셨던 분과 갈보리 언덕에 오셨던 분은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갈보리 언덕에는 사방으로 쳐진 경계선도 없었고 우레나 번개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에서 주님은 범죄한 우리를 죽이는 대신에 스스로 죽어주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를 죽이는 대신 자신이 죽으시고 말았습니다.주님은 그곳에서 강도의 죄를 대신하심으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 올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불의와 허물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그곳은 높은 산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올라올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다 내게로 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도 올 수 있는 곳이며, 어린아이들도 올 수 있는 곳입니다. 부자도 올 수 있는 곳이며 가난한 자도 올 수 있습니다.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도 올 수 있습니다. 건강한 자 뿐 아니라 연약한 자도 부르십니다. 죄가 조금밖에 없는 사람뿐 아니라 아주 많이 있는 사람도 올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세상 죄를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주님은 우리의 죄, 다시 말해서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온전히 담당하셨고(벧전 2:24)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으며 (히 9:12)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히 10:17)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주님을 만나시기 위하여 어디에 서 계십니까? 무거운 십계명을 등에 지고 높은 시내산 밑에서 떨고 계십니까? 아니면 갈보리 언덕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아래 와 계십니까? 시내산에서는 가장 의로웠던 모세라도 정죄를 받았는데 갈보리에서는 가장 죄인이었던 강도라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만나시기 위해서 한라산보다 더 높은 시내산을 오르려 하십니까? 지금,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갈보리로 오십시오. 주님은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 하나님의 은혜 당신의 삶에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6살 먹은 아들이 하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아들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 번 가정해 봅시다. 그 살인자에 대한 당신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만인 당신의 힘으로 그 살인자를 죽인다면 그것은 복수가 됩니다. 만일 당신이 잠잠히 앉아 사회의 공권에 맡겨 법정으로 하여금 그를 처형하게 한다면 이는 공의가 됩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살인지를 용서하고 당신의 집에 초청해서 함께 살며 또한 그를 당신의 아들로 입양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됩니다. 물론 당신은 이와 같은 예는 하나의 가상일 뿐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다른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당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의해 지옥에 갈 판결을 받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그 판결대로 집행하신다 해도 당신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당신이 행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불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 값으로 대신 죽게 하기 위해서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셨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 아들이 당신 죄를 대신해 죽으신 것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면 당신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주께서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고 하늘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기 위하여 그 자신을 속죄물로 드리셨다면 당신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겠습니까?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오직 한가지 표현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께서 하고 계신 일입니다. 이 예는 진리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며 가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에게 한없는 호의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기 위해 다섯 가지 간단한 성명(聲明)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는 지옥에 가야할 죄인들에게는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호의이다. (2)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구원을 베푸신다. (3) 주 예수님께서 갈보리 동산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한 속죄제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 (4) 하나님의 은혜는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사람이 그 스스로 얻거나 만들 수 없다. (5) 하나님의 은혜는 제한이 없다. (1)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호의 하나님의 은혜는 지옥에 가야할 죄인들에게는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만한 행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그 어떤 것을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은혜는 베푸시기로 하셨다면 그 이유는 사람들 편에 잇는 것이 아니라 전능자 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이를 조심스럽게 주목해 보십시오. 선한 사람들, 올바른 사람들, 도덕적인 사람들이 아닌 바로 죄인들에게 말입니다. 은혜는 본래 그 성격상 하나님께로부터 불의한 자들에게 흘러내립니다. 은혜는 언제나 불의한 자와 저주받은 죄인들에게만 그 효력을 발할 수 있습니다. "선을 드러내는 것은 공의이지 은혜가 아니기 때문에 은혜는 의인을 찾지 않습니다. 은혜는 구원하고 거룩케 하며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저주받은 죄인, 죄를 지은 자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무능한 자들을 찾습니다"(C. I. 스코필드). 죄인들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만한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그 공의로운 법에 의하면 죄인들은 그 죄로 인해 죽어야 하며 영원히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란 이와 같은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값없이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구원을 베푸십니다. 구원이란, 이 세상에러 죄의 형별과 죄의 권능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 그리고 오는 세상에서 죄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값없이 주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에는 전혀 대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은 이것을 하나님께로부터 그냥 받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구세주를 자신의 죄에 대한 대속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영과 혼과 몸에 대한 영원한 안녕을 주께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베풀어지는 은혜 - 주 예수께서 갈보리 동산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한 속죄제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못본체하고 눈감아 준다거나 그냥 용서해 준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죄를 범한 죄인을 벌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법은 마땅히 집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그 스스로 자신의 죄 값을 지불해야 한다면 그는 영원히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 법을 지키시면서 그 사랑하시는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죄없는 독생자를 죄인들 대신 죽게 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사람들이 지불해야 할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의 죄 값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죽어야할 그 자리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모든 것이 충분히 충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주와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제공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은혜를 "그리스도를 희생한 댓가인 하나님의 풍요"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 그리고 부활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구원받기를 원하는 불경건한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게 했습니다. (4) 돈으로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전체든 부분적이든 돈주고 사거나 노력해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은혜를 율법, 행위 그리고 빚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행한대로 받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순종하는 자에게 이 땅에서의 지속적인 삶을 그리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행위의 원칙은 사람이 행한대로 그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행한 대로 정확히 그 보상을 받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빚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섬김(일)을 받았으면 그에게 수고에 대한 댓가를 지불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아닙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있다면 그는 구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구원합니다. 구원은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보상이 아닙니다. 구원은 일을 아니할지라도 불의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로마서 4:4-5). 구원은 사람들이 청결한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불해야 할 빚이 아닙니다. 구원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친절입니다. 일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예를 들어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당신을 초청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진수성찬 앞에 앉아 값진 음식들을 먹을 것이며 그곳의 모는 것들은 당신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매우 즐거운 저녁이 되겠죠! 이제 저녁이 끝난 후 대통령이 문 앞까지 나와 당신에게 작별인사를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떠나면서 당신은 500원 짜리 동전 하나를 대통령의 손에 쥐어주면서 "친절히 대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은 참 즐거웠습니다. 저를 위해서 많은 돈이 들었을 것 같은데 적은 일부나라 제가 먹은 것을 담당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시겠습니까? 그것이 대통령의 친절에 대한 합당한 자세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버릇없고 무례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이와 같습니다. 노력해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제시하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바울이나 막달라 마리아나 그대에게나 모두 무료이니 값없이 오라". 은혜라는 말에 무엇이 붙거나 조건이 주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며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로마서 11:6). (5) 누구에게나 베풀어지는 은혜 이제 마지막 요점인 "하나님의 은혜는 제한이 없다"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나의 죄악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지불하기를 원했던 값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밖에는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매춘부들, 간음자들, 음행한 자들, 거짓말쟁이들, 속이는 자들, 살인자들, 불신자들, 무신론자들 그리고 종교적인 외식가들... 모두 죄악 가운데 깊이 물든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수세기를 걸쳐 하나님은 모욕과 거부를 참아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자들은 돌에 맞고 핍박을 받아왔으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에 대한 복된 소식을 전하고 계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믿는 죄인들에게 주신 높은 신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상속자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죄와 죽음과 지옥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그리스도와 같이 영원히 살게 될 하늘나라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시인들과 예술가들, 주권자들, 평민들, 순교자들 그리고 죽어 가는 강도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오고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너무 인간적이다"(마틴 루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인간들과 같은 분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가를 별로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셨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더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를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서 우리는 먼저 그분은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신명기 33:27). 하나님만이 홀로 위대하시며 이 세상에서 그와 같은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애굽기 15:11). 하나님은 아주 위대하시기 때문에 이 땅에서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아주 작게 보입니다.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이사야 40:22, 23). 세상의 민족들이라도 하나님에게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이사야 40:15, 17). 하나님은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려야 마당하신 분입니다(디모데전서 6:15-16). "이러한 분은 우리가 존경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그는 그 위엄에 있어 유일하시며 존귀에 있어서도 유일하십니다. 그리고 완전함에 있어서도 뛰어나십니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시면서 만물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지만 아무 것도 사람들에게서 취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시는 분입니다(사도행전 17:25). 그는 어떤 사람이나 물건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스스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완전한 기쁨이나 만족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들에게 어떠한 의무도 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빚진 것이 없으며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의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그의 은혜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로마서 11:35, 36). 하나님의 지식은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 미래 어느 것이든 그가 모르시는 것은 없습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태복음 10:30).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누가복음 12:6). 아무도 하나님을 가르친 자가 없고 조언한 자도 없습니다"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이사야 40:13, 14).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로마서 11:33, 34).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지식을 생각했을 때 그는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시편 147:5)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는 감추일 것이 없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브리서 4:13).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창세기 16:13). 하나님은 스스로 잊어버리기로 한 것 외에는 잊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죄 외에는 잊지 않으십니다(히브리서 8:12). 하나님은 만유 위에 뛰어 나십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역대상 29:11-12). "가로되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역대하 20:6). 모든 피조물의 주로서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시편 135:6). 이 말은 그는 그의 기뻐하시는 대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편 115:3). 하나님의 동기나 행함에 대해서는 아무도 물을 권한이 없습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다니엘 4:35).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바르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누구도 이에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는 가장 고상한 피조물보다 월등히 높으시며 하늘과 땅의 주가 되십니다. 아무에게도 복종치 않으시고 아무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며 완전히 독립적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시며 오직 그의 기쁨 그리고 언제나 그의 기쁘심을 따라 행하십니다. 아무도 그를 가로막을 수 없고 그를 훼방할 수 없습니다"(인용 글).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사무엘상 15:29).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어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수기 23:19).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라기 3:6).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야고보서 1:17).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하십니다. 그는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는 죄를 변호하거나 벌하지 않고 눈감아 주실 수 없으십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한일서 1:5).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이사야 6: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하박국 1:13).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죄를 다루시는 모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은 죄를 지어서 자기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 지은 사람들에게 그의 모든 진노를 쏟아 부으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드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셨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벌하지 않으실까요?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인들을 대신해서 그의 아들을 죽으실 때 세 시간 동안 그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그의 거룩을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또한 그의 전능하심을 나타냅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시편 62:11). 그의 권능은 창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머리 위에 있는 저 하늘과 별들은 측량할 사람이 없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편 8:3, 4). 하나님의 능력은 그의 우주를 붙잡고 계심에 또한 나타나 있는데 모든 것-식물, 짐승, 사람, 채소-들을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능력이 가장 크게 나타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것이었습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에베소서 1:19-20).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고린도전서 1:9). 그는 그의 약속하신 것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후회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예레미야애가 3:22). 하나님은 선하십니다(나훔 1:7). 그의 선하심은 모든 이들에게 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그들 죄 가운데 죽는 것을 허용하시지만 이는 조금도 그의 선하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태복음 20:15). 하나님은 인내하시며 오래 참으십니다(로마서 2:4). 그는 이교도들과 불신자들의 공격을 참으시며 악을 선으로 갚으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십니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편 57:10).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편 103:11).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십니다(에베소서 3:18). 하나님의 사랑은 그 넓이와 높이, 길이 그리고 깊이에 있어서 제한이 없습니다. 그는 사랑이셔서 엄청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봅니다(요한일서 4:7-11). 하나님의 사랑은 공명정대하며 우주적입니다. 결코 이기적이 아닙니다. 그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로마서 8:35-39). 나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의 피조물들이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욥기 11:7). 하나님은 우리 마음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신 분이십니다. "그의 위대하심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는 모든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크시며 어떠한 말로도 그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이해와 생각의 한계를 초월한 분이심을 생각할 뿐입니다"(노바티안). 경이로운 것은 이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관심을 두시고 그들 대신 고난 당하고 피흘려 죽게 하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성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하나님의 위대하심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너무 인간적이듯 사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너무 신성시하는 면이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 아주 어두운 그림을 보여 주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대해 정직하다면 인간이 그렇게 어둡다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사람은 경건치 못한 죄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사람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으며 날 때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했습니다"(시편 58:3). 사람은 죄 짓는 짓을 가르칠 필요가 없으며 어릴 때부터 자연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의는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가르쳐야 합니다(잠언 22:15).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며(시편 51:5) 하는 일을 통해서도 죄인입니다(로마서 3:23). 그 자신이 죄인이며 하는 것도 죄악된 것들입니다. 사람은 그가 하는 것보다 그 속에 있는 것이 더 죄악된 것입니다(마가복음 7:15-23). 그 안에는 부패와 부정 그리고 죄악의 오물 구덩이가 있습니다(예레미야 17:9). 사람의 중심의 생각은 지금 당장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은밀한 생각들이 기록된 책을 만들 수도 없으며 또한 그와 같은 책을 만드는 것을 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지난 주에 했던 추악한 생각들을 다니면서 선전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수세기를 통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추악한 생각-그들 마음의 부패성을 드러내는 생각-들을 공공건물의 벽에 써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사랑들이 생각해주기를 원하는 자신과 본래의 자신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가면을 씁니다. 인간에게는 본래의 모습인 '자아'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자아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외식자들입니다. 어떤 이는 사람에 대해 말하기를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홀로 있을 때의 그가 진정한 그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한복음 3:19)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실수나 죄를 볼 때에는 굉장히 불쾌해 하며 혐오감을 가지고 봅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러한 죄를 지을 때는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로마서 2:3). 이 죄는 모든 사람 즉 육신을 가진 부모 밑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은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로마서 3:10-12) . 죄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목구멍이나 혀, 입술, 입, 발, 눈 등 지체의 모든 부분에도 그 영향을 미 쳤습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3:13-18).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 이웃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죄를 짓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 우상을 만들어 그것에 절하므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은 사람의 형상이나 새, 네 발 가진 짐승, 그리고 기어다니는 벌레들의 형상입니다(로마서 1:23). 사람은 그의 생명과 양식, 의복, 그리고 안식처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합니다. 그는 그의 부모나 대통령 또는 주권자들은 욕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주님이나 하나님의 이름은 헛되이 불러 모욕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20:7).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갖는 대신 적개심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잊을 수 있을 때 기뻐하고 하나님을 생각할 때면 슬퍼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그 이웃에게도 죄를 짓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만 죄를 범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죄를 짓도록 부추깁니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로마서 1:32).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잠언 4:16). 사람은 이기적입니다. 그 자신이 우선이어야 하며 자기 길을 가기를 좋아합니다(이사야 53:6). 그는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간음이나 음란, 그리고 여러 형태의 부도덕한 성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오염시킵니다(로마서 1:26-27). 사람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거짓을 말합니다. 사람은 참으로 신뢰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이사야 2:22).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예레미야 17:5). "...사람은 다 거짓되되..."(로마서 3:4).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이 닥치고 그것이 자신에게는 그 영향을 미치지 아니할 때 기뻐합니다. 그리고 분을 발하며 그 이웃에 대하여 악의를 품습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자에 대하여 시기하고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훔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더 의로운 자들을 보면 어떠합니까? 그도 더 의롭게 살려고 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삶이 자기의 양심에 괴로움이 되므로 그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요한복음 3:19-20). 사람은 하나님과 그 이웃에 대하여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하여서도 죄를 짓습니다. 그는 술취함이나 부도덕 그리고 방탕을 통하여 그 자신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재능을 낭비하며 그의 소유를 허비합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상담을 거부하며 그의 친한 친구를 거절합니다. 그가 이것을 아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 자신에게 있어 가장 큰 원수입니다. 성경에 인간의 죄악된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예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비참하게 타락되고 더럽혀진 인간을 묘사하기 위하여 문둥병 환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8:2). 사람은 중풍병 환자(요한복음 5:5), 귀머거리(마가복음 7:32), 벙어리(마가복음 9:17), 소경(요한복음 9:1), 그리고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은 자(에베소서 2:1)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타락하고 더럽혀졌으며 무력하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람들의 죄에 대한 절정은 지금부터 약 1,900여년 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 예수 그리스도 -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그는 모든 면에 있어 온전한 분이셨지만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훔치거나 죽이기 위해 또는 멸망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면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요한복음 10:10). 그러나 그의 피조물인 사람들은 "이는 상속자니 죽이자"(누가복음 20:14)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보리 동산의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 - 간음자들, 술취한 자들, 거짓말쟁이들, 도둑들 그리고 살인자들 - 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신은 알콜 중독자들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그는 이렇게 했습니다! 사람은 정말 지옥에 갈 짓 밖에 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자비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조금도 없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은 불의하며 심판받을 일 외에는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죄인들을 위한 대속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에는 "오! 내가 누구이기에 주께서 나 같은 자를 위해 돌아가셨단 말인가"라는 외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용서받지못하는 罪 서론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라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우리 주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의 용서를 제시하는 복음 속에 포함된 단 하나의 두려운 예외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으되 단 하나는 예외입니다!복음은, 인간의 죄가 더한(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 5:20)고 선언합니다. 복음은, 자진하여 갈보리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시키신 주 예수님의 중재사역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신성모독)죄 "가 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또 구속(救贖)은 죄인들의 경험으로부터 저 가공할 죄들이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라는 위의 말씀과 같이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코 사함받을 수 없는 그 단 한가지 예외적이고 두려운 죄는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심사숙고해 보고자 하는데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죄를 깊이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결코 지은 적이 없으면서도 자기는 그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비통한 낙심 가운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그것을 피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도 그 죄에 관하여 애매모호한 개념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관하여 단 한번 말씀하셨지만 그분의 말씀과 및 그 관련 사건은 마태복음 12장 22∼37절, 마가복음 3장 22∼30절, 누가복음 11장 14∼23절 세 곳에 약간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마태복음 12장 22∼3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이 말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의문이 떠오르며, 동시에 그에 대한 해답이 본문에 암시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1)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무엇인가? (2) 이 죄는 왜 용서받지 못하는가? (3) 이 죄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무엇인가? 도대체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무엇이길래 그렇게 많은 의견들이 피력되고 있으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혼동 가운데 빠져 걱정하고 있을까요?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사실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거나 또는 범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를 받은 사람들이 다름 아닌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종파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바리새인들"이었으며, 성경 문헌에 전문가였던 "서기관들"이었습니다(막 3:22)!이 놀랄만한 사실은 어떠한 것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해당되지 않는지를 즉시 가르쳐 줍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주색잡기나 살인 등 어떤 한가지 특정 죄악, 불순(不純), 또는 범죄도 아니며, 오랜 "허랑방탕"과 폭력의 생활도 아닙니다.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 혹은 모든 사람들은 십계명에 관하여 말할 때 부자 청년 관원이 우리 주 예수님께 했던 말과 똑같이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 10:20).도덕에 관한한 그들 각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백합화처럼 흠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지었거나 거의 짓고 있다고 경고하신 대상들은 바로 그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그 다음으로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사항은 그 용서받지 목하는 죄가 분명히 어떤 형태의 성령에 대한 범죄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아마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삼위일체 중의 한 분으로서 육신을 입고 오신 제2위(位)가 되신다는 것을 알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성령도 삼위일체 중의 한 위(位)가 되신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영향력으로서 인간들에게 역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신약성경이 점차로 전개되어 감에 따라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 자신은 성령의 개체성(個體性)을 알고 계셨으며, 현재의 우리가 충분한 계시에 비추어 그분의 말씀을 생각해 볼 때에 그분이 성령의 개체성을 분명히 암시하셨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성령의 개체성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 주님의 엄숙한 말씀이 약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한 위(位)되심을 모르고서도 성령에 대하여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지을 수도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허나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다름아닌 성령을 "훼방하는"(모독하는) 죄라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말씀의 초점이었습니다.31절을 다시 주목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그렇다면 훼방(모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비방하거나 중상하거나 모욕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옛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모욕했습니까? 그 종교적 위선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마 12:24).따라서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 훼방죄란 은혜롭고 거룩한 성령의 활동을 마귀에게서 난 것으로 모독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役事)를 사단의 역사(役事)라고 말하는 것이 성령 훼방죄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문맥을 감안하여 볼 때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그 성령 훼방죄가 왜 무서운 성격을 띠고 있었는지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성령 훼방죄를 용서받을 수 없도록 만드는 요소는 바로 이성적으로 알면서도 고의적이고 결정적이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의 사악한 성령 훼방죄가 단순히 무지 탓이었다면 그것은 즉시 용서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의 사도 바울이 성령 훼방죄를 지은 것은 무지 탓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와 그 제자들에 대한 그의 악감은 대단히 심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용서를 받았던 것은 그가 알지 못하고 행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하지만 우리 주님에게 그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관하여 경고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무지탓으로 성령을 훼방한 것이 아니었으며, 문맥은 이것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행하시던 그 자애로운 기적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은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들에게조차 즉시 감지되었으며, 그러기에 그들은 자동적으로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외쳤던 것입니다(마 12:23). 그들은 주님에 의해 행해지는 기적들이,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대로 여호와의 성령이 장차 오실 메시야를 통해 행하시리라고 하신 것과 같은 것임을 금새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보통의 지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논리적으로도 명백하게 실증되는 문제였습니다.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마 12:26).이 말씀은 연역적인 논증이었습니다. "또 내가 바살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혹은 제자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마 12:27).이 말씀은 대인논증(논자(論者)의 주의, 성격, 지위, 직업 등을 이용하여 그 이론을 논난하며 또한 변호하는 법-역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주님의 결론을 논리적으로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 :28).그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役事)를 마귀 탓으로 돌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훼방(모독)이었습니까?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살면서 가르치셨고, 기적을 행하셨고,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고, 승천하셨고, 성령을 부어 주셨기에,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복되신 성부 및 성령과 영원토록 동등하시다는 사실이 실증되고 선포되었기에 그분의 사역을 마귀 탓으로 돌리는 것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옛날의 바리새인들이 성령을 훼방(모독)한 것과 똑같이 현재도 하나님을 명백히 훼방(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역사(役事)이든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이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역사(役事)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마귀에게서 난 것으로 돌리는 것이 바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이 죄는 왜 용서받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왜 이 성령 훼방죄가 용서받지 못할까요?그 첫번째 이유는 이 죄가, 나중에 회개하고 돌이킨 어떤 죄가 아니라 요지부동한 마음 자세에 기인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심지어 이 죄는 탕자가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며" 오랫동안 탐닉했던 그런 종류의 죄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죄는 이성적으로 완고하게 성령을 거역하는 죄라기보다 저질적인 욕망에 굴복하는 죄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극도의 패역한 일을 저지르고, 자기 생애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 주지만 나중에는 이것을 통회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1절을 펴서 읽어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감사하옵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가장 타락한 탕아들에게도 베풀어질 수 있으며, 또 실제로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종류의 범죄는 마태복음 12장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저지르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이 저질렀던 범죄는 육신의 연약이나 영적인 무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참 빛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려는 확고한 마음 자세요,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겠다고 결심하고, 알면서도 고의로 영혼의 문을 닫아버렸으므로 용서의 사랑의 광채가 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용서를 미리 배제했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 다른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왜 그런 종류의 죄가 용서를 미리 배제할까요? 탕자가 나중에 자신의 "허랑방탕한" 생활을 회개했으며, 다른 수많은 사람들도 나중에 자기 죄를 실제로 회개했듯이 그 사람들도 자신의 마음 자세를 나중에 회개할 수 없었을까요?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만일 그 바리새인들이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 지점에까지 실제로 도달했다면 그들의 죄는 용서를 미리 배제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가 회개를 미리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이 기점에서 분명하면서도 신중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사람들이 결코 용서받지 못할 만큼 죄를 지었다든지 혹은 안지었다든지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요점을 더욱 분명하고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들이 그런 죄를 지었다고 잠시 가정합시다. 이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 하나님의 참 빛을 고의적으로 완고하게 거절했기 때문에 이제는 결국 회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말살되어 버릴 정도로 완고한 상태에 돌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실은 회개를 배제하는 까닭에 용서도 배제하는 죄의 상태가 곧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누구든 이러한 지점에까지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완고한 거절의 과정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으며, 이것이 결국 그 사람의 주인이 되면 회개의 가능성을 말살시켜 버리고 맙니다. 인간은 회개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제가 잘 아는 어떤 목회자로부터 저는 무서운 임종 장면을 지켜보았던 경험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죽어가던 그 사람은 죽음을 물리치려고 몸부림치면서 불쌍한 손을 무익하게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는 죽음과 그 너머의 두려움으로 인해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발광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지만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 전에 발작적으로 다음과 같이 신음하며 울부짖었다 합니다. "나는 죽기 전에 회개한다고 말했는데 회개가 되지 않아!회개가 되지 않아! 나는 도무지 회개할 수 없어!" 그렇습니다. 사람은 회개의 가능성이 말살되어 버린 그 시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회개가 없으면 더이상 용서도 없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용서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행위의 죄도 아니며, 심지어는 오랫동안 계속되는 죄악도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묘사한대로, 하나님과 그 진리에 대하여 악한 마음으로 거부해 온 과정을 통해 형성된 마음의 상태입니다.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해 우리 주님이 대속 제사를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악하고 더러운 죄라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계속된 죄악들도 통회하기만 한다면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가능성이 말살된 상태의 영혼은 용서받을 수 없으며, 이것은 마치 의사가 암을 용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하나님의 성령과 그 역사(役事)를 의식적으로 오랫동안 거부해 온 과정을 통해 형성된 요지부동의 마음 상태입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죄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마음속에 실제적으로 깨닫게 해주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모든 경건한 덕목들을 생성시키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무서운 사실은 사람이 이와 같은 것들을 알면서도 미워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 과정이 시작되고 이것은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종말을 맞이하여 결코 용서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때 그 사람 속을 비추었던 빛은 어두움으로 변할 수 있으며,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이 지점에 실제로 도달한 사람은 결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는 빛을 미워하는 일을 영원토록 계속할 것입니다. 그들은 귀신처럼 "믿고 떨기는" 하지만(약 2: 19)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의 정점에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과거의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 전체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씀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이런 지점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은혜가 더 이상 베풀어진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밀랍을 녹이는 태양은 동시에 진흙을 응고시킵니다. "버려두라" - 이것은 실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용서가 있을 수 없는 것은 회개의 가능성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죄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세번째 질문을 다루기 전에 먼저 확실히 알아야 할 사실은, 사람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실제로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엄숙한 말씀은 허구에 대한 경고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 죄를 범할 수 있으며, 또 범해 왔습니다. 사단도 그 죄를 범했습니다 그의 최초의 범죄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범죄의 역사 가운데서 알지 못하고 죄를 지었거나 흑은 유혹을 받아서 죄를 지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지성을 가지고, 자기가 하나님의 빛과 사람을 대적하는 죄를 짓고 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늘 스스로 죄를 지어 왔습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죄를 지어 왔으며, 도저히 회개할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전혀 용서받을 수 없고 오로지 불못행일 뿐입니다. 타락한 천사들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던 것 같습니다.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유전(遺傳) 따윈 전혀 생각해 볼 수 없습니다. 타락한 천사들은 순전히 자발적으로 죄를 범했으며,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이성적(理性的) 반역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회개의 가능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그들 속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용서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지옥뿐입니다. 바로와 헤롯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 당시의 종교적인 위선자들도 역시 이 죄에 매우 근접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면서도 고의적인 위선으로,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을 마귀의 소행이라고 말할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주님께서 그들 중 일부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근대의 아돌프 히틀러 같은 사람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었는지 우리는 궁금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도 역시 다음처럼 동일한 특징과 과정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양심의 계획적인 억누름, 계속적인 기만과 사기, 완전히 비정상적으로 되어 버린 도덕성, 그래서 검은 것을 희다하고, 악을 선이라 하며, 마귀를 하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시편 2편이 만일 세상 끝날과 관계있는 말씀이라면 그것은 마치 세상의 권력자들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아마겟돈으로 가는 전조와도 같이 짓게 될 것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여간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다른 각도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으며, 이것은 참으로 우리를 위로해 줍니다. 즉, 자기가 혹시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짓지나 않았나 염려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실상 그러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고민하는 그 자체가 바로 그들이 그러한 죄를 짓지 않았음을 입증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간에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사람도 과거의 죄가 어떠하든지 간에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자기 죄를 자각하고, 다가오는 심판을 두려워하며, 구원의 길을 알기 원하고, 더 나은 생활을 하기 소원하는 죄인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감정과 소원과 참회가 다 성령의 역사이며, 따라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정로를 벗어난 그리스도인들과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낙담시키기 위해, 자기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얼마나 잘 이용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로우신 성령님께서는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여러분 모두는 이 말씀 속에 포함됩니다!고(故 G. 캠벨 몰간(Campbell Morgan)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시험기간(수습기간) 중에는 범해질 수 없습니다. 그 죄는 한 시간 안에 범해지거나 한 행동으로 범해지지 않습니다. 그 죄는 시험기간(수습기간)이 끝날 때까지 분명하고 확고부동하게 취해진 자세의 결과입니다. 그 기간은 사람이 이생과 내생의 경계선을 넘어가야 끝납니다. 우리는 은혜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에는 성령님이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저는, 하나님을 끝끝내 버리는 사람만 하나님도 결국 버리신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용서받지 못하는 죄로 진행되는 그 과정이 시작조차 되지 않도록 우리는 한 순간도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죄는 십중팔구 다음과 같은 세방식으로 시작됩니다. 연기(延期), 가정(假定), 가식(假飾).성령의 내적인 활동에 의해 영혼들은 자신의 영원한 구원에 관하여 각성하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를 구원하는 복음의 진리와 주 예수님의 능력을 깨닫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연기합니다. 이렇게 하여 긴박감은 점차 가라앉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될수록 연기하는(미루는) 일은 점점 쉬워집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반응을 나타내는 영혼의 힘이 손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점점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영혼은 만성적인 무능(無能)으로 회개할 수 없게 되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고 마는 것입니다. 다른 경우로는 영혼이 하나님에 관하여 그릇된 가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구원받기를 원하긴 하지만 그 시간은 스스로 선택합니다. 그들은 죄의 자각과 돌이킴, 회개와 중생(重生)이 인간의 의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어리석게도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다른 경우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이르는 과정이 가식에 의해 야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즉, 하나님과 자기 양심에게 솔직하지 못함으로써, 변화되지 않은 마음이 여전히 죄를 품고 있는데도 구원을 받은 것처럼 꾸밈으로써 발생합니다. 그들의 말의 실상은 이렇습니다. "물론 저는 복음을 믿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저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쉽사리 포기할 수 있어요." 사람이 이런 치명적인 자기 기만에 습관적으로 빠지면 급기야 그 마음은 처음에 잘못임을 알았을지라도 그것이 진짜 사실이라고 믿게 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검은 것이 희게 되고, 횐 것이 검게 되며, 그 마음 자체가 거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제가 추측하기로는, 처음부터 거절하거나 배척하거나 반항하는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 악한 과정은 단지 연기하거나 가정하거나 가식하거나 하는 식으로 매우 완곡하게 시작되며, 그 이유는 거의 예외 없이 그 마음이 애지중지하는 것들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에 기인합니다. 오, 우리는 참다운 헌신을 사랑하는 구주께 드려, 하나님의 영원한 실재들을 어리석게 장난하는 일을 결코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성경에는 끝내 용서받지 못하는 죄로 변하고마는 이 과정을 잘 보여주는 예들이 세가지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사울, 헤롯, 이 세 왕이었습니다. 1. 애굽 왕 바로 먼저 바로를 생각해 봅시다(출 1 :14장). 첫 눈에 알아보게 되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괴롭히려고 잔인한 계교를 꾸밀 만큼 악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연속적인 "재앙"이 퍼부어짐으로써 참되신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로 증명되었으며, 그러기에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는 전혀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이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거역차기로 결심하고 말았습니다. 단지 인간이 알면서도 감히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지만 고(故) F. B. 마이어(Meyer)의 글에서 인용한 다음의 문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고압적이고 안하무인격인 자세로 묻는 바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애굽의 절대군주들이 지녔던 무제한적 권력을 고려해야 합니다. 각 바로는 태양의 아들이었습니다. 바로는 가장 위대한 신(神)들에게 총애를 받는 것으로 묘사되며, 또 그 신들과 함께 신전 깊숙한 곳에 앉아 똑같은 숭배를 받는 것으로 묘사되는 존재였습니다. '바로의 생명을 걸고'라는 표현은 최고의 맹세였습니다. 애굽 온 땅에서 바로의 허락없이는 아무도 수족을 놀리지 못했습니다. 거대한 애굽은 바로 그를 위해 존재했으며, 다른 모든 인민들은 그를 위해 살았고, 고난당했고, 죽었습니다. 미지의 원천에서 흘러 토양을 비옥하게 했던 저 도도한 나일 강도 그를 위해 흘렀습니다. 그 엄청난 숫자의 사제들과 마법사들, 아전들도 그를 섬기며 수종들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보좌에 앉아 백성들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은채 불쌍한 인민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백성들의 눈물과 신음, 그들의 속박의 울부짖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하지만 바로의 위엄을 더욱 높이기 위해 합당한 희생이 강요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현재의 절대 군주는 최근에 자기 장군들을 통해 큰 승리를 획득했으며, 이 성공은 그의 오만을 크게 부풀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오만한 조소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순종하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 하니라'(출 5:2).이 대답의 핵심은 '듣고'(순종하고)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이 자기에게 청원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보다 더 큰 권세를 지니신 분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을 보았으며, 이것은 그의 속살을 찔렀던 것입니다. '나도 역시 신(神)인데 그런 나에게 이런 명령을 감히 내리면서 나보다 더 강하다는 이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금까지 존재조차 알지 못하던 저 하나님이란 누구인가!한 꾸러미의 노예들의 하나님이 아닌가! 그런데도 어찌 저들이 감히 내 앞에서, 그리고 사제들과 아전들과 고관들 앞에서 하찮은 신(神)에 관해 입을 연단 말인가!'이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으로서 교만하고 허세부리며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영혼 속에서 그 치명적인 과정(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이르는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로의 마음이 18번이나 "강팍하여져서" 거절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약 절반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었고, 그 나머지는 바로 자신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회개치 않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상대적 반작용이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께 도전하며 자신을 강팍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저희 마음의 정욕대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롬1:24,26,28). 예루살렘을 향하여 한탄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 속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너희는 ... 못하리라"(마 23:37∼39).2.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바로의 경우보다 덜 심각하긴 하지만 애처롭기로는 훨씬 더 한 것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경우였습니다. 그의 이력은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초기의 약속 단계, 나중의 쇠퇴 단계, 최후의 실패 단계. 그의 출발은 우월한 신체, 높이 칭찬받을 만한 성격, 성령에 의해 갖추어진 특별한 영성, 자기 주위에 있던 경건한 사람들, 훌륭한 조언자인 사무엘 선지자와 더불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완고함과 하나님께 대한 거역은 그의 생애를 점점 더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급기야 제사장의 특권을 범하는 교만한 행동을 저질렀고(삼상 13장), 그런 다음에는 경솔하게도 하나님께 불순종했으며(14장),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또 불순종함과 동시에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15장). 그런 다음에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켜 소멸하였으며, 소인처럼 다윗을 시기하다가 결국 악마같이 그를 세 번이나 살해하려 하였고,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수개월 동안 그를 추적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령을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하나님의 성령도 그를 저버리셨고, 마침내 그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도다"(삼상 28:15).그리고 그처럼 훌륭한 약속과 더불어 출발했던 사울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물을 정도로 타락하였고, 결국 자살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습니다!그렇다고 사울이 우리 주님의 말씀하신바 그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생애는 그 죄에 이르는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 로마의 영주였던 헤롯 왕 마지막으로 로마의 영주였던 헤롯 왕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에 그의 경우는 두드러진 사례입니다 마가복음 6장 20절에 기록된 대로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활 속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그러나 헤롯은 자기 형제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탐하여 불법적으로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헤롯은 요한을 통해 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지 혜로디아를 통해 오는 죄의 음성을 듣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요한을 옥에 가두고,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써(17∼19절) 성가신 하나님의 음성을 자신에게서 제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음 과정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일한 사건이 언급된 누가복음 3장 19,20절에서 누가는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과 "이 위에 한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는 헤로디아를 기쁘게 하려고 요한의 목을 베는 일까지 자행했습니다(막 6:27).하지만 이 때에도 양심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죄의식을 가지고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그 후에 헤롯은 예수님도 죽이려 했으며(눅 13:31),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날 아침 빌라도가 보낸 사람들에 의해 헤롯 앞으로 끌려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누가복음 23장 9절에는 헤롯이 "여러 말로 물었으나" 예수님은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생활 가운데서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묵살되어 온 하나님의 음성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분노와 좌절에 빠진 헤롯은 이제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사랑은 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요, 이것이 바로 그리로 가는 과정입니다. 거절된 사면장 미국 서부에 한 성실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카드놀이를 하다가 몹시 다투던 끝에 그만 이성을 잃고 권총으로 상대를 쏴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교수형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소한 시비가 죽음을 부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청년을 사랑하던 친척들과 이웃들은 진정서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이 다른 마을, 다른 도시에서도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 진정서에 서명했습니다. 결국 그 진정서가 주지사에게까지 전달이 되었습니다. 바구니 가득 쌓인 진정서를 읽은 주지사는 그 청년을 사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주지사는 사면장을 써서 주머니에 넣고, 성경을 들고 형무소로 찾아갔습니다. 주지사가 형무소 감방으로 가까이 갔을 때 청년은 벌떡 일어나 철장문으로 다가오며 소리쳤습니다."여기 오지 마시오! 보기도 싫소. 당신같은 사람은 벌써 일곱 번이나 만났오. 나도 집에서 종교생활을 했단 말이요.""그러나 잠깐만 젊은이, 내가 젊은이를 위해 가지고 온 것이 있으니 ... ""듣기 싫어요! 만일 당장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간수를 부르겠소." 청년은 화를 내면서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젊은이 ..." 주지사는 간청하듯 말했습니다. "내가 젊은이를 위하여 가장 좋은 소식을 가져왔소. 말좀 하게 해주시오.""듣기 싫어요. 당장 나가지 않으면 간수를 부르겠소"여러번의 간청에도 청년은 주지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지사는 슬픈 마음으로 돌아서서 나왔습니다. 잠시 후, 간수가 오더니 "저, 지금 주지사님이 방문하고 갔는데... 그분은 자네의 사면장을 주머니에 넣고 왔으나 자네가 들으려 하지 않더군.""뭐라구요, 주지사님이? 오... 이런, 제게 펜과 종이를 좀 가져다 주십시오." 청년은 주저앉아 울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경외하는 주지사님,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주지사님께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주지사는 그 편지를 읽은 후 그 편지 뒤에다 『이 사건에 더이상 흥미가 없소』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청년의 사형 집행일이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할 말은 없는가?""예, 있습니다. 미국의 모든 청년들에게 이 말을 전해 주십시오. 내가 죽는 것은 살인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살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주지사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사면장을 거절한 결과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거절한다면 이보다 몇천배 더 슬픈 일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사실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다면 거절한 그 죄는 결코 사함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힘으로 처리할 수 없는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벧전 2:24). 그 많던 모든 죄가 예수님의 피로 씻어졌습니다(엡 1:7). 영원히 씻어진 것입니다(히 10:12)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 10:17).이제 당신의 모든 죄는 사면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멸망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어리석은 청년과 같이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예수님 믿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거절한다면 멸망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거절하여 멸망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사면장을 거절하여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된다면 그 청년의 말과 같이, "내가 멸망하는 것은 내 죄 때문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요 3:18).예수님 앞에 나오십시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 예배의 성공자 (창 4:3-5) 이 시간에 “예배의 성공자”라는 제목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자가 되길 원합니다. 가정에 성공하고, 신앙에 성공하고, 교육에 성공하고, 사업에 성공하고, 추구하는 어떤 일에 성공하고, 목회도 성공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성공은 인생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간 부자와 같이 인생에 성공하지 못하면 가장 불행합니다. 우리의 수없이 많은 노력은 성공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도 실패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성공하기를 원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성공하게 해주셔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다 성공할까요? 오늘 저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진정 성공하려면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배의 성공자만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도 성공자가 되게 해주십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서 참으로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예배의 성공자만 되면 다 성공한다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워털루 전쟁에서 참패하여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한참 눈을 감고 회상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전투가 치열하던 어떤 주일이었죠. 그때 나는 졸병이었지만 아침에 철모를 벗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린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가 내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예배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지금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처럼 유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의미 깊은 이야기입니다. 이 실화는 나폴레옹에게만 적용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가인은 예배의 실패자였지만 아벨은 예배의 성공자였습니다. 그 결과 가인의 인생은 실패로 끝났지만 아벨의 인생은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있고 그의 후손을 통해서 영원히 빛나고 있습니다. 예배에 실패한 가인은 죄도 다스리지 못합니다. 살인죄를 짓고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가인의 자손은 문명을 발달시키지만 어둠 속에 방황합니다. 그러나 예배의 성공자인 아벨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형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의인 아벨의 피라고 한 것을 보아 자기를 미워하고 죽인 원수까지도 용서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지금 밝고 밝은 천국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예배하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과 온갖 아름다운 복이 임합니다.그럼 예배의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1. 항상 예배함입니다. 필리핀 마닐라에 갔더니 가톨릭교회인데 하루 24시간 미사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우리 개신교도 각 도시마다 교회와 교파를 초월하여 24시간 예배하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일이 오면 각 교회에서 예배하고 언제든지 예배드리고 싶을 때는 찾아와서 예배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라와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구약의 성도들은 안식일과 특별한 절기 외에도 매일 하나님께 제사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매일 두 번 상번제를 드렸습니다. 상번제란 항상 드리는 번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매일 마음속에서 예배하는 생활이어야 하지만 예배드리는 수효도 중요합니다. 한 주간에 한 번으로는 부족합니다. 20세기 저명한 신학자 칼바르트는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우리 예배의 분량이 구약 성도들의 분량만큼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주의 모든 정규예배 뿐 아니라 매일 조석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크고 작은 특별집회에 참여하여 예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늘 기도와 찬송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찬양 테이프나 콧노래로라도 늘 찬송하십시오. 우리의 예배에는 소리가 있다는 점에서 참 감사합니다. 찬송소리 기도소리 설교소리 음악소리 소리가 있습니다. 묵상하면 영혼에는 잔잔한 도움이 있지만 소리 내어 예배하고 기도하면 영혼도 살고 능력도 임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9장을 보면 적그리스도가 나와서 성도를 박해할 것이 예언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박해하느냐? 그 핵심이 성소를 훼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하게 합니다. 마귀는 예배만 못 드리게 하면 자기들이 성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퍼젼은 "많은 원수가 있어서 제단의 불을 끄려고 한다. 그러므로 아침마다 성경의 나무를 더하고 기도의 바람을 보태어 제단의 불이 영원이 꺼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배에 등한히 하는 것은 마귀시험입니다. 모든 시험을 이기고 항상 예배하여 예배의 성공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준비 된 예배를 드림입니다. 아벨의 제사도 준비한 예배였습니다. 일 년간 양을 치면서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위해 흠도 없고 점도 없고 티도 없는 건강한 양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보다 먼저 피 없이 드렸으므로 농사만 지은 것이지 진리의 믿음 준비가 제대로 되지 못한 준비 되지 못한 제사였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곡식이므로 반드시 동생 아벨의 피의 제사에 곁들여 드려야 합니다. 아무리 성급해도 준비 없이 먼저 드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인도 그 제물도 열납 되지 못했습니다.이처럼 구약의 제사도 얼마나 준비하는 제사였는지 모릅니다. 성전론을 하면서 말씀드렸지만 제사장들은 한 번의 제사를 위해서 오랫동안 자기를 거룩하게 하며 준비합니다. 대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한 주간 앞서 들어가 폐쇄된 공간에서 자기를 준비합니다. 일상 모든 것이 예배인데 무슨 준비냐고 할지 모르지만 특히 정한 예배를 위해서는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를 위해서 한 주간 동안 온 성도들이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시간에도 일찍 나와서 기도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부흥하는 교회마다 기도부대가 있습니다. 교인들이 예배 시작 1-2시간 전에 교회 기도실에 와서 예배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도록 기도합니다. 그런 교회는 부흥은 물론 온 세상에 영향을 끼칩니다. 이처럼 외형적인 목표가 아니라 가장 은혜로운 교회를 목표로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쓰시는 교회가 될 것이고 마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강력한 요새가 될 것입니다.그리고 모세가 선 자리가 거룩한 자리였던 것처럼 예배하는 공간마저도 거룩하게 됩니다. 요즘 숯도 굽고 찜질도 하는 찜질방이 있습니다. 들어가 보면 숯을 굽는 가마에는 나무도 불도 꺼내어 찾아볼 수 없지만 들어가 있으면 땀이 나고 뜨끈뜨끈합니다. 이처럼 늘 예배하면 그 공간도 거룩해집니다. 신령한 예배를 자주 드리면 예배하는 공간까지도 은혜로운 장소가 되어 악령은 떠나고 훈훈하니 성령의 역사가 강합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이 아닌 때도 그 자리만 오면 은혜의 훈훈함을 느낍니다. 기도 많이 한 장소에 가면 기도가 잘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가정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라는 공간에 온갖 나쁜 에너지는 떠나가고 평안함이 오게 됩니다. 3. 하나님이 임하시는 예배입니다. 이사야 6장에 하나님을 모시는 스랍천사가 나옵니다. 이 스랍천사와 같이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임하십니다. 어떻게 예배했습니까? 사6:2-3을 보면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면서 예배했습니다.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린다는 뜻이요, 또 날개로 발을 가린다는 것은 겸손과 거룩으로 나를 낮춘다는 의미요, 두 날개로 날며 영광을 돌린 것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크게 영광을 돌렸는지 문지방의 터가 요동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듯이 이런 자세로 하나님께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임하심이 없는 예배라면 실패입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공연입니다. 그곳에는 공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는 하나님이 성령의 불로서 임하십니다. 그 때 우리 영혼이 그 손의 어루만지심을 느끼고 희열을 느끼고 살아나고 그 품안을 체험합니다. 아벨의 제단과 가인의 제단의 차이점은 가인의 제단에는 하나님의 임하심이 없고 아벨의 제단에만 임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하는데 신령이란 영으로 드린다는 뜻으로 율법의 형식이나 의식적 예배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간절함도 없이 늘 하던 대로 모여 흩어지는 식의 성의 없는 예배라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한 부부가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면서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박 집사 자동차가 3,000cc로 바뀐 것 보았어요?" 라고 묻자, 남편은 "못 보았는데"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다시 아내가 "어느 성도님 부인이 밍크코트 입은 것 보았어요?" 다시 남편이 "아니 몰랐어" 그러자 다시 아내가 "그러면 오늘 설교할 때 목사님 넥타이가 조금 삐뚤어 진 것 보았어요?" 라고 질문하자, 남편은 "설교 듣느라고 정신이 없었어" 하나도 못 봤다고 하니까 아내가 열 받아 남편에게 "그러면 오늘 성가대 찬양하던 이 집사 입술 립스틱으로 진하게 칠한 것 보았어요?" 라고 물어보자, 남편은 역시 "그것도 못 보았는데."라고 대답합니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아내는 "아니, 당신은 예배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을 하나도 못 보았어요? 예배 시간에 잠만 잤어요?" 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눈을 가리워서 눈물만 났지."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배입니다. 남편은 예배를 잘 드렸지만 아내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구경꾼만 된 것입니다.그리고 진정으로 드린다는 것은 이단의 비 진리가 아닌 진리의 예수님이 증거 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단의 교주가 예수님 자리에서 영광을 받는 그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도 우리가 예배하는 주일날 같은 시간에 찬불가를 부르며 예불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그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령과 진리 안에서 열심히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그곳에 찾아오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의 성공자가 모든 것의 성공자입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은 예배 하나에 달렸습니다. 한국교회의 희망도 예배에 달렸습니다.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십시다. 예배하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우리 모두 항상 예배하고, 예배를 준비하고, 하나님이 임하시는 예배를 드려 하나님께서 크게 영광 받으시고 우리 영혼이 살고 모두가 사는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긍휼을 구합시다.(호14:1-3) 2000년 6월 25일 주일낮예배 그날도 주일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이 민족의 비극적인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진 후에 정부의 고민 중에 하나가 6.25행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것입니다. 북한을 괜히 자극해서 모처럼 조성된 화해의 분위기를 망칠 수 없다는 분석입니다. 정치적으로, 또 정책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중요한 과제를 앞두고 우리 신앙 인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점거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호세아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오늘 주신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돌아오라는 말은 떠났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호세아 선지는 외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증거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실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는 외칩니다. "네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호세아가 예언하고 있던 북왕국 이스라엘은 역사상 두 번째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여로보암 2세가 40년간을 통치했었는데 거의 다윗과 솔로몬에 시대에 버금가는 영토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고 밝혀지고 있습니다.창고에는 먹을 것으로 가득하고 항아리에는 포도주가 넘칩니다. 들에는 양과 소가 풀을 뜯고 있고 곡식이 영글어 넘실댑니다. 이삭의 무게가 무겁습니다. 거리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낙네들의 모습이 보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상에는 살진 송아지와 양이 올려집니다.실로 풍요로운 삶입니다. 앗수르도 무섭지 않으며 수리아도 겁나지 않습니다. 적당한 외교력과 군사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든든한 나라가 어찌 기울어지겠습니까?그런데 여러분! 여로보암 2세의 통치기간을 주전 793년에서 753년으로 잡습니다. 그가 41년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완전히 함락된 연대가 주전 722년입니다. 여로보암이 그 위를 스가랴에게 넘긴 후 약 31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비참하게 아주 비참하게 멸망당합니다. 여로보암 1세에 의해 시작된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 210년을 마감합니다. 그 번영이 한 세대 30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번영의 시기에 축복 가운데 태어난 갓난이가 만 30살이 되던 해에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슬픈 역사입니다. 축복 가운데 태어난 아이가 30이 되어 망국의 한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알아야 합니다. 6.25는 이 민족에게 내려진 심판의 막대기였습니다. 일제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제의 탄압과 우상숭배 강요 앞에 의연하게 저항했습니다. 피를 흘리며 견디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일제의 강압에 견디지 못하고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해석하면서 우상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하나님 품에 안기신 한경직 목사님께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탬플턴 상을 수상하시면서 이 사람은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부끄러운 사람이어서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노라고 수상 소감을 밝혀서 모두를 머리 숙이게 한 적이 있습니다.한국기독교가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셔서 1945년 이 민족에게 해방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수여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민족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신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싸우고 이념과 정파의 이익과 정권의 창출 때문에 해방이라는 놀라운 선물은 포장지가 벗겨지자마자 싸움으로 짓밟혀지고 있었습니다.일반 역사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신학교가 나뉘고 분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우상숭배와 혼란과 분쟁이 가득했습니다. 6.25는 이 민족에게 내려진 심판의 회초리였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전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호세아 선지는 오늘도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예언자 호세아는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방법의 하나를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말씀합니다.여기서 말씀이란 이스라엘과 하나님께서 맺으셨던 언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자손 만대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약속을 파기하고 있습니다.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사는 방법은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의지가 무엇이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외운다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다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말씀을 제대로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음을 알아 하나님의 마음으로 내가 선 삶의 장에서 그 마음을 펼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입니다.1945년 우리 나라가 해방을 맞이하고 미국의 군정시대를 살게 되었는데 1945년 10월에 미군정 한국인고문관으로 11명이 임명되었는데 그 중 6명이 그리스도인이었고 그리스도인 중 3명은 목사였습니다. 뿐 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은 평가하기를 기독교정권이었다고 할만큼 기독교인들이 많았고 교회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국회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아 개회할 때마다 기도하고 시작했습니다.그 시대에 우리 민족에게는 세 가지 과제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민족국가 건설, 둘째는 일제잔재 척결을 통한 건전한 민족정신 함양, 셋째는 민족 생존 경제 기반 건설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이승만 정권은 이것을 온전히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취약한 분단국가만 남겨 놓았다고 혹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직장에서의 일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교육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돈을 벌 때 하나님의 마음으로 벌어야 합니다. 정치를 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자랄 때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이 목사님은 어려서 잘 믿으시는 어머님의 신앙지도 아래 자라났습니다. 일주일 내내 논과 밭에서 일하시다가 주일만 되면 옷을 깨끗하게 한복으로 갈아입으시고 교회에 가셔서 예배드리시고 봉사하십니다.새벽부터 일어나셔서 교회에 가십니다. 그리고는 교회에 가시기만 하시면 눈물을 흘리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주일 동안 썩어진 세상일만 위해서 하루종일 죽을지 살지 모르고 일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오늘이라도 겨우 주 앞에 나와서 주의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씀이 "너 같이 믿음 좋은 놈이 주의 일 하다가 죽어야지 어떻게 세상일 하면서 살겠느냐? 너는 커서 꼭 목사가 되거라" 가르치셨습니다.그래서 그때마다 '목사가 되어야 만 주의 일을 하는 것이구나.' 생각했고 '월요일부터는 토요일까지는 세상일만 하고 주일은 주의 일을 하는구나' 그렇게 여겼습니다.이 분이 커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니 뭔가 잘못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만약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만이 주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이 일생 주어지는 시간의 몇 %나 주의 일을 하는 것일까? 우리 몸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없는 불행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영원한 죄인이 될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한국교회가 달라질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직장이, 내 삶의 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가는 말씀의 실천 도장이 되어야 합니다. 지지난 수요일에 시편50편을 읽으면서 드렸던 말씀을 다시 강조하려고 합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을 좀 바꾸셔야 합니다. 주일예배는 일주일간 잘 못 살다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무장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달픈 인생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주일 예배를 통하여 새 힘을 얻고 기운을 얻어 인생 길을 좀더 활기차게 걸어가기 바라는 바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소극적이고 말씀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오히려 주일예배 잘 드리기 위해서 일주일을 건강하게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서서 예배 드리기 위하여 우리 삶의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소망하십니다. 내가 하루종일 가서 일하는 일터, 내가 서 있는 삶의 장이 제사를 드리는 번제단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번제단에서 드리는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드려야 할 제사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여러분! 예배 준비하시고 오셨습니까? 옷을 챙겨 입고, 헌금을 준비하고 시간에 맞추어서 예배 드리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일주일의 삶이 곧 예배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 준비 잘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잘해야 합니다. 정말 잘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못산다'는 말을 합니다. '누구 누구 못산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뜻입니까? 돈 얘기입니다. 가난하다는 의미입니다. 가난이 잘 못 사는 것입니까? 게을러서 그렇다면 문제가 있고 불의해서 그렇다면 그렇고 성실하지 못해서 그렇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의식들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가난해도 잘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돈을 버는 방법이 중요합니다. 승진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방법입니다. 출세 자체보다 그 과정이 중요합니다.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돈 벌고 승진하고 출세하고 공부하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살 길에 대하여 계속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세요.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세아는 이스라엘의 번영의 이유를 되짚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번영할 수 있는 이유는 앗수르와의 외교정책 때문이요, 그리고 이집트에서 수입한 마구간에 매여진 훈련된 말들 때문이고, 풍산의 신이 자신들을 도운 까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매력 있고 의지할 만한 것들입니다.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참 양식과 참 안전의 발판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무엇이 있습니까? 오늘 주신 본문 다음에 구절들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5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호 14: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호 14:6)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호 14:7)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호 14: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여러분 우리는 민족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저는 요즈음 남북정삼회담을 놓고 많은 생각을 합니다. 매스컴을 통하여 최초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신의 모습을 우리 국민 앞에 드러냈습니다. 평가가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김정일 쇼크니 김정일 신드롬이니 별 말들이 시중에 가득합니다. 마치 김정일이 이 나라 통일을 가져다 줄 것 같은 분위기가 있는 듯 합니다. 얼마 전 까지 정신병자 취급하고 왜곡된 인간이요, 전쟁놀이를 즐기는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평화주의자처럼, 실력 있는 지도자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게 사람의 마음이요, 이 마음이라는 것이 간사합니다.여러분! 사람 보아서는 안됩니다. 통일은 하나님만이 우리 민족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이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를 긍휼이 여기시도록 어느 때 보다도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통일이 사람의 손에 맡겨지고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지면 이 민족은 통일을 이루고도 엄청난 시련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새벽마다 심야기도회마다 기도하십시오. 통일이라는 과제는 몇 명이 지고 가는 것이 아니고 지고 갈 수 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요, 우리 모두의 삶에 엄청난 변화들과 영향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마음으로 삽시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시다. 하나님 앞에 이 민족 앞에 부끄럼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