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연애 엄금' 많던 산업화 시대…
회사 측 절교 요구에 커플 동반 자살도
1963년 11월 15일 부산 금정산 기슭에서 한 시곗줄 제조 업체의 남녀 직원이 나란히 숨진 채 발견됐다. 21세, 19세의 남녀는 회사 동료로 만나 3년째 몰래 연애 중이었다. 사내에 소문이 나자 회사 간부가 종업원 50여 명을 모아놓고는 사내 연애를 '공개 규탄'한 게 젊은 커플을 극심한 충격에 빠뜨렸다. 사측은 "동료 간 교제는 절대 용납 못 한다. 사랑을 하지 말든지 직장을 떠나라"고 요구했다. 청년은 회사 측의 요구를 받은 지 5일 만에 "차라리 저승에서 그녀와 살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함께 음독했다. 조선일보는 16일 자 신문에 '같은 직장 연인들의 정사(情死)'라는 제목을 붙여 대서특필했다.
1970년대 후반 여성 취업이 증가하면서 사내 연애를 둘러싼 갈등도 점점 늘어갔다. 생산성 증대가 지상 과제이던 산업화 시대여서 기업들은 방관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 시절엔 회사 전화로 여사원을 찾는 남자의 전화가 걸려 오기라도 하면, 이를 받은 남자 사원이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운운하며 '정중하게 치근거리는' 일이 많던 시대였다. 여사원의 연애 자체를 마뜩잖게 여겼으니 사원 간 연애는 더 달갑지 않았다. 해당 커플만 업무에 소홀해지는 게 아니라, 사내에 알려지면 그 얘기로 커피 자판기 앞에서 입방아 찧느라 다른 사원들 생산성까지 떨어뜨린다는 견해도 제기됐다. 어떤 회사엔 '사내 연애 금지'라고 쓴 액자가 내걸렸다. 1979년엔 한 은행의 남녀 은행원이 연인 사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은행 측이 여성에게만 사표를 강요했다. 커플이 이를 거부하고 결혼해 신혼여행을 다녀왔더니, 남편은 경남 진주로 아내는 강릉으로 발령 나 있었다. 명백한 보복 인사였다. 금융노조는 물론, 여성계까지 들고일어나 '이 은행에 넣은 모든 예금 인출하기 운동을 펴겠다'고 강력 항의했다.
1980년대까지도 사내 커플은 해고를 피하려고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 몰래 데이트를 했다. 도심 벗어나는 '교외파', 업무 관계 미팅인 척 만나는 '위장 데이트파'도 있었다. 좀 더 간이 큰 남녀는 등잔 밑이 어둡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회사 건물 아래층 다방에서 만났다. 밀회의 긴장감이 둘 사이 애정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말도 있었지만,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남자 회사원은 "동료들이 내 여자에게 '지나친 친절'을 베푸는 걸 보고도 참는 게 큰 고통"이라고 했다. 코앞 연인에게 애정 표현을 제대로 못 하던 사내 커플들에게 결정적 도움을 준 것은 컴퓨터 시대의 개막이었다. 1990년대 활발히 보급된 PC통신, 이메일·채팅 서비스는 사내 연인 간 은밀한 소통의 수단이 됐다. 1997년 모 그룹 전산운영부가 사원들 간 이메일 내용을 슬쩍 들여다봤더니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가 '사랑'이었다.
지난주 보도에 따르면 중국 광저우 지역 기업의 45%가 사내 연애를 금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사내 교제를 달가워하지 않는 기업들이 있어도 예전에 비할 바 아니다. 사내 커플이 결혼하면 보너스를 준 기업도 있다. 그 회사 경영진은 "좋아하는 상대가 회사에 있다면 출근할 때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긍정적 기운은 회사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길게 보면 사내 연애가 회사의 저력을 단단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 눈 돌린 것이다. 근시안적 생산성에 집착하던 기업들이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는 데 반세기쯤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