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景行錄에 云하되 爲政之要는 曰公與淸이요 成家之道는 曰儉與勤이니
(경행록 운 위정지요 왈공여청 성가지도 왈검여근)
라
경행록에 이르길 “정사를 배품에 긴요한 것은 공평과 청렴이요, 집을 이루는 방도는 검소와 근면함이다.”고 하였다.
⋇ 公與淸(공여청) : 공평함과 청렴함.
⋇ 儉與勤(검여근) : 검소함과 부지런함.
(해설)
매년 발표되는 각 나라의(OECD :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 경제협력개발기구) 부패지수를 보면 아직도 우리나라는 상위그룹에 들지를 못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단단하게 연결되어진 고리를 하루아침에 잘라내기는 그리 녹녹치가 않다. 三緣主義(삼연주의)가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숨 쉬는 한 백년하청의 헛 발길질로 끝날 공산이 크다. 예로부터 관직에 나감을 최고의 가치로 삼던 공감대와 근대 산업화과정에서 외국자본의 차입과정에서 벌어지는 리베이트의 관행과 배금주의 사상이 가져온 온갖 역기능의 잔재, 官(관)과 유착 그리고 政經(정경)의 인척관계의 확대와 축적한 부를 사회에 환원보다 자식에게 상속하는 뿌리 깊은 관행의 결과이기도 하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고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란 명제를 오해하여 정당한 방법으로 피땀을 흘린 노력의 결과가 아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부를 축적하였고, 경제규모가 커지며 일기 시작한 개발바람은 부동산 열풍을 일으켰고 그에 편승한 많은 졸부들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로 인한 사회적 역기능도 늘어났으니 상속분에 대한 형제자매간의 다툼과 갈등, 부모 시해, 경제사범의 증가와 고가명품의 구입 등의 현상과 부익부 빈익빈의 대물림이 현실화되어 가고 있다.
공평과 청렴의 표본이 되어야 할 公的業務(공적업무)를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시키는가 하면 누구의 눈에도 확연하게 보이는 일들을 밀실행정을 통한 편파적이고 불공정한 형태로 변모되어 한 사람이 독점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러 가지 제도적인 측면에서 방지책과 수시 감찰을 통해 점검을 하지만 열사람이 도둑 하나 막지 못한다는 말처럼 당사자의 의지와 신념이 확고하지 못하면 유혹을 벗어나지 못한다. 염불보다 제사 밥에 눈이 멀어버리는 형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 꼴이요, 도둑에게 창고 열쇠 건내 주고 창고 지키라는 격이다. 국민의 편의를 생각하며 철저한 봉사와 무엇보다 우선하는 마음가짐과 법령에 의한 규제나 제한조건도 국민의 편에 서서 안 되는 방향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조그만 숨통이라도 트는 방법을 강구하는 성의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런 행정을 하고 싶어도 권한 밖의 일을 처리했다고 지적받고, 심지어는 뒷거래가 있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과 함께 징계까지 거론되는 현실 속에서 적극적인 일처리보다는 법대로 한다는 보신주의를 선택하기 십상이다.
건강과 행복 넘치는 가정을 이루는 것은 모두의 소망이다.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실천하고서 남은 여력은 미래를 대비한 저축을 하는 것이 보통 가정사이다. 소박하고 거칠지만 자기 분수에 맞게 살아간다. 그러나 대개 수입보다 더 많은 지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적은 보수에 치솟는 물가는 최저생계비용을 초과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아끼고 아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절망과 좌절감에 돌파구를 찾는다는 것이 엉뚱한 곳에 눈을 돌려 오히려 더 절망적이고 암담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선진국으로 간다함은 그만큼의 소득수준과 지출항목에서 엥겔지수보다 문화생활을 위한 비용이 증가함을 뜻한다고 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소비가 왕이다”란 말과 다양한 종류의 여가생활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지며 즐기는 인구도 증가함을 보인다. 사회안전망의 구축을 통한 복지에 대한 높은 수준의 제공 및 안정성 확보도 중요한 축을 이룬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발전해 나간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큰 부자는 하늘이 낳고, 작은 부는 근면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허황된 꿈을 쫒기보다는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며 작지만 차곡차곡 쌓아갈 때 튼튼하고 건실하며 행복 넘치는 가정이 이룩될 것이다.
屋下架屋(옥하가옥)
- 지붕 밑에 또 지붕을 만든다는 뜻으로, 독창성 없이 앞 시대인의 것을 모방만 함을 경멸해 이르는 말. -
魏(위)나라는 蜀(촉)나라와 吳(오)나라를 멸하여 천하를 통일한 후 국호를 晉(진)이라 고치고 낙양에 도읍을 정했다. 낙양에 庾仲(유중)이라는 시인이 있어 揚都(양도 : 남경)의 아름다운 풍경과 융성함을 노래한 “揚都賦(양도부)”라는 시를 지었다. 양도는 오나라의 도읍이었는데, 오나라는 이미 멸망한 후였지만 양자강을 앞에 두고 뒤로는 우람한 산이 있어 풍광이 매우 아름답고 번화한 도시로서 강남의 중심지였다. “양도부”는 그 표현이 특히 절묘하다는 평판을 들었는데,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이 시를 베껴 가는 바람에 낙양의 종이 값이 껑충 뛸 지경이었다.(庾仲初作揚都賦成 以呈庾亮 亮以親族之懷 大爲其名價云 “可三二京 四三都” 於此人人競寫 都下紙爲之貴 : 유중초작양도부성 이정유량 양이친족지회 대위기명가운 가삼이경 사삼도 어차인인경사 도하지위지귀) 그러나, 謝太傅(사태부)라는 고관은 그 시를 보고 “무얼 그 따위 시를 가지고 법석을 떠는가? 그런 시는 마치 지붕 밑에다 지붕을 만들어 놓은 것 같이 옛것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謝太傅云 不得爾 此是屋下架屋耳 事事擬學 而不免險狹 : 사태부운 부득이 차시옥하가옥이 사사의학 이불면험협)”하고 비웃다고 함.(출전 世說新語) ※ 庾(곳집 유), 揚(오를 양), 呈(드릴 정), 擬(모방, 흉내 의).
黃狗(황구)
중국 廣東(광동)지방에서 개고기를 香肉(향육)이라 하는데 속칭 “三六(삼육)”으로 통한다. 삼육은 중국발음이 향육의 발음과 같고 또 “3+6=9”의 “구”가 “狗(구)”의 발음과 같기 때문이라 한다. “三六經(삼육경)”이라는 개고기 요리책이 있는데, 그에 보면 “一黃(일황)- 二黑(이흑)-三花(삼화)-四白(사백)”으로 개의 털빛에 따른 맛의 랭킹을 매겨 놓고 있다. 곧 黃狗(황구)가 제일이요, 검은 개가 버금이며 얼룩진 개, 흰 개 순이다. 그래서 향육 요리를 파는 가게에서 요리를 내올 때면 반드시 노란 개꼬리를 미리 보임으로써 그것이 황구임을 증명하는 관습이 있다.
황구가 보신에 좋다는 것은 명나라 때 문헌 “본초강목”에도 명기돼 있다. “황구는 보신에 크게 좋으며(黃狗大補益人 : 황구대보익인) 여타의 색깔은 별 볼일 없다(余色微補 :여색미보)”고 했다.
중국에 있어 개를 먹는 역사는 고대 殷(은)-周(주)나라 때까지 소급된다. 그 시대의 무덤이나 祭場(제장)에서 개뼈다귀가 출토되고 있음으로 미루어 개는 고대 제사의 희생동물로서 필수였던 것 같다. 제사에 관련된 한자에 “犬(견)”자가 많이 들어 있은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祓(불)-然(연)-壓(압)-哭(곡)-伏(복)-獻(헌) 등 비를 빌거나 염병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싶을 때 개를 희생하고 있고 또 명절에는 성문에 개를 희생하여 불행을 몰고 오는 邪氣(사기)를 예방하고 있다. 희생에 황구가 선호되었음은 바로 황색이 중심색이요, 신명과 통하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 祓(푸닥거리 할 불).
희생음식은 그 신명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나누어 먹게 마련이다.
“禮記(예기)”에 보면 天子(천자)도 가을이면 개고기를 먹게 돼있고 또 한나라 때 개를 도살하는 사람은 祭官(제관)의 후예였다 한다.
중국에서는 廣東省(광동성) 말고 연변-흑룡강-길림 등 東三省(동삼성)에서도 地羊肉湯(지양육탕)이란 이름으로 개고기를 많이 먹는데 황구가 으뜸이라고 근간 상해에서 나온 중국 풍속사전에 적혀 있다. 바로 이 지역에 개를 토템으로 삼아 온 소수민족들이 많이 살아 온 땅이기 때문이며, 한국 보신탕의 뿌리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인가 싶다.
伏中(복중)에 들어섰다. 이 복중 時食(시식)을 겨냥하여 중국의 황구가 우리나라에 대량 수입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여기에서 기억해 둘 것은 들불(野火 : 야화)에서 사람을 살린 오수의 義犬(의견)이나 눈먼 고아를 인도하여 먹여 살린 개성의 正三品(정삼품)개를 비롯, 모든 한국의 義犬(의견)은 황구였단 사실이다.(이규태 코너 1991년)
13-3. 讀書는 起家之本이요 循理는 保家之本이요 勤儉은 治家之本이요 和順
(독서 기가지본 순리 보가지본 근검 치가지본 화순
은 齊家之本이니라
제가지본)
글을 읽는 것은 집을 일으키는 근본이요, 이치에 따름은 집을 잘 보존하는 기본이요, 부지런하고 절검하는 것은 집을 잘 다스리는 근본이요, 화목하고 공순한 것은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근본이다.
⋇ 循理(순리) : 이치(道理)에 따름.
⋇ 齊家(제가) : 집을 가지런히 함. 집을 편안하게 함.
(해설)
사람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시작이요 끝이 바로 가정이다. 가족이란 혈연 때문만이 아닌 혼자서는 살아가는데 많은 장애와 어려움을 겪게 진화된 사회 체제와 남과 여의 각각의 개체로서가 아닌 둘이서 라는 일심동체가 되어야만 비로소 원만하고 완벽한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의 단위인 가정이 되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가정이 튼튼하고 정의로우며 건전해야만 그 사회도 튼튼하고 건전하며 정의로운 질서가 유지하게 된다. 나무가 말라 죽는 것은 뿌리가 썩거나 훼손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인 것처럼 하나하나의 가정은 그 나라와 사회의 뿌리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풍이 있고 그 가풍을 유지하는 가훈과 법도가 존재한다. 면면히 이어져 내려 온 전통은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세상물정이 바뀌어도 그 근본은 변함없다. 다만,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용될 뿐이다. 아무리 거세고 빠르며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온다고 해도 뿌리만 살아 있으면 다시 줄기가 자라고 잎이 무성한 나무로 자라듯이 끈질긴 생명을 자랑한다.
한 세대에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자손대대로 이어져 가야 하는 중심역할을 할 기준이 있어야 한다.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그 빛을 발하는 바른생활과 처신에 도움이 되고 자양분이 되는 금언 같은 지혜가 담긴. 배움은 그를 더 발전시키며, 바른 이치와 바른 행동을 하는데 도움을 준다. 올바르고 화목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겸손하고 예의가 바르며, 어른을 섬기고 공경하며, 형제간에는 우애와 믿음이 탄탄한 이상적인 가정이라면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들에 나간다고 새지 않으랴”라는 속담처럼 밖에서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진정 필요로 하는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부장적인 대가족제도의 부정적 측면도 있지만 장점도 많이 가지고 있다. 사람으로 지녀야 할 인성을 자연스럽게 몸에 습득하게 되며, 사회생활에 필요한 예절과 기본 질서의식과 남을 배려하고 함께 하는 공동체의식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시대가 바뀌며 가정파탄이 증가하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거나, 맞벌이 부부의 증가가 청소년들의 탈선과 비행에 한 몫을 담당하지 않았는가 싶다.
예로부터 농사보다 더 힘든 것이 자식농사라 했다. 기성세대 보다는 좀 더 진취적이고 개혁적 성향을 보이는 것이 청소년들의 특권인데 그런 열정을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않고, 올바르고 생산적이며 건설적인 방향으로 유도해 줄 수 있는 안목과 지도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과감히 도전하는데 그 꿈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성공할 확률이 낮다, 상상력만 앞서 있다는 등의 이유로 무시하거나 코웃음 치지 말고 “실패는 성공의 아버지”라 했듯이 성공할 가능성 5%만이라도 있다면 적극적인 지지와 격려 그리고 실패하더라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불어 넣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아낌없는 조언과 충고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꿈을 잃어버린 무기력한 젊음 보다는 무모하고 허황되게 보이는 꿈일지언정 그 무언가에 자신의 젊은 열정을 쏟아 부을 대상이 있고, 그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그러한 젊음들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왔지 않았는가?
遠交近攻(원교근공)
-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먼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이해가 상반되는 가까운 나라를 치는 일. -
중국 전국시대 魏(위)나라의 策士(책사)였던 范睡(범수)는 타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협의를 받고 秦(진)나라로 피신하였다. 당시 진나라는 소양왕의 모후인 선태후의 동생 穰侯(양후)가 실권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齊(제)를 쳐서 자기 영토인 陶(도)를 확장하려 하였다. 이에 범수는 왕에게 “韓(한), 魏(위)의 양국을 거쳐 막강한 제를 침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제의 민왕이 악의에게 패한 것은 멀리 떨어진 초를 쳤으므로 동맹국의 짐이 무거워 離反(이반)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적에게 병력을 빌려 주고 도적에게 식량을 대준 셈으로 한. 위만 득을 보았습니다. 지금의 정세 하에서 진이 취할 방도는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는 치는 遠交近攻策(원교근공책)이 상책이라 생각합니다.”하고 간하였다. 이로써 범수는 재상이 되고, 원교근공책은 진의 국시가 되어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되었다고 함. (출전 史記 范)睡 蔡澤傳) ※ 睡(잘 수), 穰(볏짚 양).
(王曰: "願聞所失計." 雎曰: "大王越韓,魏而攻强齊, 非計也. 少出師則不足以傷齊,多之則害於秦. 臣意王之計, 欲少出師, 而悉韓,魏之兵, 則不義矣. 今見與國之不可親, 越人之國而攻, 可乎? 疏於計矣. 昔者齊人伐楚, 戰勝, 破軍殺將, 再 千里, 膚寸之地無得者, 豈齊不欲地哉? 形弗能有也. 諸侯見齊之罷露, 君臣之不親, 擧兵而伐之, 主辱軍破, 爲天下笑. 所以然者, 以其伐楚而肥韓,魏也. 此所謂藉賊兵而齎盜食者也. 王不如遠交而近攻, 得寸則王之寸, 得尺亦王之尺也. 今舍此而遠攻, 不亦繆乎? - 왕왈 “원문소실계.” 수왈 “대왕월한 위이공강제 비계야. 소출사즐부족이상제, 다지즉해어진. 신의왕지계, 욕소출사, 이실한, 위지병, 즉불의의. 금견여국지불가친, 월인지국이공, 가호? 소어계의. 석자제인벌초, 전승, 파군살장, 재 천리, 부촌지지무득자, 개제불욕지재? 형불능유야, 제후견제지파로, 군신지불친, 거병이벌지, 주욕군파, 위천하소, 소이연자, 이기벌초이비한, 위야, 차소위적적병이재도식자야. 왕불여원교이근공, 득촌즉왕지촌, 득척역왕지척야. 금사차이원공, 불역무호?)(출처 네이버 블로그 몽촌)
※ 睢(부릅떠 볼 수, 휴), 悉(다 실), 膚(살갗 부), 齎(가져올 재), 繆(얽을 무).
長壽村(장수촌)
영국작가 제임스 힐튼의 소설에 “잃어버린 지평선”이라는 게 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나 陶淵明(도연명)의 “桃源境(도원경)”이나 윌리엄 모리스의 “無可有鄕(무가유향)”같은 공상소설로 샹글리라가 바로 “잃어버린 지평선”의 이상향이다. 샹글리라가 위치한 곳은 세계의 지붕인 티베트領(령) 히말라야 산속이다.
샹글리라는 티베트 말로 샹글리 고개란 뜻으로, 한문으로는 花醉境(화취경), 梵語(범어)로는 大乳海(대유해), 라마僧(승)간에는 蓮中芯(연중심)으로 의역되어 있고, 유럽에서는 카페나 레스토랑의 이름으로 선호되고 있다. 인도의 과격해진 독립운동에 밀려 영국과 미국의 외교관, 선교사 등 4명이 소형 비행기를 타고 피난 가다가 길을 잃고 티베트의 히말라야 산중의 샹글리라 마을에 불시착을 한다. 그곳에서 환대받은 일행은 그곳에 눌러 살 작정을 하고 만다. 왜냐하면 그곳 주민들의 대부분이 1백 수 십대의 노인들로 최고령자는 2백세를 넘고 있으며 1백세 전후의 주민들은 어린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不老不死(불로불사)는 아니나, 不老長壽(불로장수)를 하는 샹글리라의 비결은 약간의 야채샐러드나 그레이프 프루츠와 녹차 한 잔이 고작인 一日一食(일일일식)의 소식이었다.
물론 이것은 공상소설에 불과하지만 작가 힐튼에 의하면 티베트 사람들은 그 옛날부터 히말라야 산속에 花醉境(화취경)이니 大乳海(대유해)니 연중심이니 하는 불로 장수촌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그들의 확신을 토대로 이 이상향을 재구성했다고 실토하고 있다.
일전 로이터 통신에 의하면 바로 그 티베트 오지의 둥지란 이름의 산마을이 소개되었는데, 샹글리라의 장수촌과 신기할 정도로 흡사하다.
2차 대전 초인 1942년 이래 50년 동안 산마을에서 죽어나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며, 최고령자가 1백 42세요, 1백 30세 이상의 노인만도 1백88명이나 된다고 보도했다.
장수할 수 있는 별다른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식생활에 있어 非肉質(비육질)의 무공해 식품을 먹되, 아주 少量(소량)이라는 것과 마음 편하게 사는 나름대로의 철학이 체질화된 것 이외는 별다른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했다.
미국작가 헨리 소로오는 문명생활과 완전히 떠나 2년 남짓 살아보고 그 체험으로 이상향을 그린 “숲속의 생활”에서 8개월 동안 콩, 옥수수, 과일, 소금 등 겨우 8달러74센트의 식량비 만으로 살아내고 있으며, 동서고금의 알려진 長壽村(장수촌)인 데서는 예외가 없다. 일전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의 통계발표에 보면 전 세계인구의 1/5이나 되는 7억8천만 명이 굶주려 기동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 하니 소식주의는 이래저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절실한 문제로 대두돼 나갈 것 같다.(이규태 코너 1992년)
13-4. 孔子三計圖에 云하되 一生之計는 在於幼하고 一年之計는 在於春하고
(공자삼계도 운 일생지계 재어유 일년지계 재어춘
一日之計는 在於寅이니 幼而不學이면 老無所知요 春若不耕이면 秋無所望이
일일지계 재어인 유이불학 노무소지 춘약불경 추무소망
寅若不起면 日無所辦이니라
인약불기 일무소판)
공자의 삼계도에 이르길 “일생의 계획은 어릴 때에 있고, 일 년의 계획은 봄에 있고,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으니, 어려서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아는 것이 없고, 봄에 만약 밭을 갈지 않으면 가을에 바랄 것이 없으며, 새벽에 만약 일어나지 않으면 그날에 힘써 일할 바가 없다.”고 하였다.
⋇ 三計圖(삼계도) : 일생의 계획, 일 년의 계획, 일일의 계획의 세 가지 계획도.
⋇ 無所知(무소지) : 아는 바가 없다. 아는 것이 없음.
(해설)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목표와 일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인력, 자재 및 소요예산과 소요기간 등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구체적인 계획 하에 실시하여도 차질과 예상치 못한 사태가 종종 발생하는데, 하물며 아무런 계획이나 준비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진행하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며 그에 따른 막대한 인력의 낭비와 예산의 손실 그리고 좌절과 자괴감에 따른 심리적 고통과 압박을 받게 된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은 현실임을 감안할 때 치밀한 사전계획과 구체적인 실행 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실패한 인생보다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은 모두의 소망이요, 바람이다. 그런데 누구는 성공의 삶을 살고, 누구는 실패란 그물 속에 갇혀 고통과 좌절의 삶을 살게 되는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어떻게 실현해 나갈 것인가? 앞 서 살아간 선인들의 교훈과 또 새롭게 전개될 미래에 대한 예측과 그에 따른 가능성과 확률은 수치상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도록 준비하는 노력과 집념 그리고 끊임없이 전진하는 의지가 중요하다. 대개의 경우 쉽게 싫증을 내거나 무엇을 하고 있는가? 란 회의에 빠져 들어 오랜 방황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특히나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 둘 성공이란 열매를 따먹고 그것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자신이 도전하는 꿈에 대한 의심과 조급함과 함께 혹시라도 내가 무능해서는 아닐까 하는 자기 확신이 심하게 흔들리는 위기의 순간도 맞이한다. 특히나 거듭되는 실패와 예기치 못했던 돌발 상황들이 가뜩이나 위축되고 갈 길 바쁜 발목을 잡을 때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무모한 도전은 성공의 확률보다는 실패의 확률이 높다.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지만, 구멍 난 항아리에 물을 채운다는 것은 속도와 시간과의 싸움이 된다.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빠른 대처를 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예지력이 필요하다.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 않고는 가을에 수확을 기대하지 못하듯이 배우지 못하면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눈 뜬 장님과 같아 늘 미로를 헤매듯이 올바른 방향과 잘못 됨을 알지 못하게 된다. 남 보다 앞서 가지 못하고 뒤로 쳐질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하든지 그에 대한 확신도 미래에 대한 예측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단, 타고난 지혜와 임기응변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몇 만 명에 한 두 명은 존재하기도 한다.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겠지만, 대체로 3요소(재물, 권력, 명예)를 벗어나지 않는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든가 “시작은 반”이란 말이 있듯이 무엇을 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즉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계획하고, 연초에는 일 년 계획을 세우며, 어려서 일생의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면 그것이 차곡차곡 쌓아져 마침내는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라. 알려면 배워야 하고, 수확의 기쁨을 위해서는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하며,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다. 이 세상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땀 흘린 노력의 대가는 땅처럼 정직하다.
遼東豕(요동시)
- 요동의 돼지라는 뜻으로, 견문이 좁아 세상에 흔한 일인지도 모르고 혼자서 자랑하는 것을 이르는 말. 동류로 遼東之豕(요동지시) -
후한 光武帝(광무제)가 낙양에 도읍한지 얼마 안 되어 천하는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고 곳곳에서 왕임을 자처하는 자가 많았을 때, 대장군 朱浮(주부)는 많은 곡창을 개방하여 백성에게 고루 나누어 주려고 하였다. 이때에 광무제를 도와 공을 세워 교만해진 漁陽(어양) 태수 彭寵(팽총)은 천하가 아직 불안하니 군량미를 확보해 두어야 한다며 곡창 개방을 반대하는 한편, 암암리에 모반의 계획을 추진해 나가고 있었다. 이를 안 주부는 낙양에 이 사실을 알렸는데, 이것을 알게 된 팽총이 노하여 주부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키자, 주부는 팽총에게 글을 보내어 “그대는 태수로서 군량만을 아끼고 있으나, 나는 조정의 적을 토벌하는 중임을 맡고 있기 때문에 賢士(현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는 바로 나라의 일이다. 내가 없는 사실을 천자께 보고했다고 생각하면 천자 앞에 나가 아뢰어도 좋다. 그대는 오만하게도 공이 크다고 여기는가? 옛날, 요동에서 머리가 흰 돼지새끼가 태어나자, 이는 특이하다고 여겨 왕에게 바치려고 강동까지 가보니, 그곳 돼지가 모두 희어서 부끄러워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만일 그대의 공을 조정에서 논하게 되면 저 요동의 돼지에 불과할 것이다.”하고 꾸짖었다. 그러나 팽총은 모반하여 燕王(연왕)이라 칭하다가 2년 후 토벌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출전 後漢書 朱浮傳)
까마귀 고기
우리나라에 있어 까마귀는 별반 인상이 좋은 새가 못된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는 시조도 그렇고, 까마귀가 울면 병이 생기거나 죽음을 예언하기도 했다. 까마귀가 밤에 울면 염병이 생기거나 마을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죽는 것으로 알았고(平安道 :평안도), 정월 초하루나 보름날에 까마귀가 울면 그해에 난리가 나거나 염병이 번지며(全羅道 : 전라도), 환자가 있는 집에서 까마귀가 울면 그 환자가 죽음에 임박한 것으로 알았다(忠淸道 : 충청도).
건망증이 있을 때 까마귀 고기를 먹었느냐 빗댄다. “本草綱目(본초강목)”에 까마귀 고기나 알을 먹으면 아침에 했던 일도 저녁에 잊어버리는 昏忘(혼망)에 걸린다 했는데 거기에서 비롯된 俗傳(속전)일 것이다.
인도에서도 까마귀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불경인 “大日經(대일경)”에 시기심을 烏心(오심)이라 했고 “僧伽羅刹所集經(승가나찰소집경)”에는 속임수 부리는 약은꾀나 탐욕의 상징적 존재로 까마귀가 나온다.
유럽에 있어 까마귀는 남쪽에서 부정적인데 북쪽에서는 긍정적이다. 희랍신화에 까마귀는 원래 은백색의 왕녀였는데 이 세상에서 제가 가장 아름답다고 오만을 부리다가 主神(주신)으로부터 검은 몸으로 변신 당한 것으로 나온다. 이솝 우화에서도 까마귀는 여우의 속임수 讚美(찬미)에 속아 고깃덩이를 떨어뜨리고 있다.
까마귀는 교활하고 말이 많아 고자질하는 새로 초서의 “새들의 議會(의회)”에 나온다. 한데 북유럽에서는 귀족적인 독수리에 대해 平民(평민)의 상징이요, 異敎(이교)에 대한 正義(정의)를 상징하며 덴마크 십자군의 紋章(문장)이 되고 있다.
“本草綱目(본초강목)”에 북쪽 추운 나라들에서는 까마귀 고기를 좋아하고 까치를 싫어하며 남쪽나라들에서는 까치를 좋아하고 까마귀를 싫어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하여 북쪽에서는 까마귀가 태어나 60일 동안은 어미가 먹이지만 자란 후에는 60일간 어미를 먹이는 反哺(반포)를 한다 하여 慈烏(자오) 혹은 孝烏(효오)라고도 하며 그 고기는 비리지 않아 먹기도 한다 했다.
고구려 大武神王(대무신왕) 때 부여 왕이 상서로운 새라 하여 까마귀를 바친 것이며 신라 炤知王(소지왕) 때 까마귀가 떨어뜨린 글을 보고 琴匣(금갑)을 쏘아 弑害(시해)를 면해 대보름날 마다 약밥을 지어 까마귀에 보은했다는 것도 바로 까마귀의 북방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북방 기마민족의 긍정적인 까마귀 이미지가 신라를 통해 일본에 건너가 일본왕국을 창시한 진무천황의 화살에 금까마귀(金鴉 : 금아)로 각광받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에는 까마귀를 애완용으로 기르는 사람이 없지 않으며 전래 동요 속에서 까마귀 우는 “까악! 까악!” 소리를 귀엽고 예쁘다는 뜻인 “가와이! 가와이!”로 부르고 있을 정도다.
일본 동해안의 한 농업 지방에서는 까마귀에 의한 농작물 손실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까마귀 고기 먹기를 장려하고 있다 한다. 쇠고기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맛있다 하여 특산품으로 개발할 계획이라 하니 전통적으로 까마귀 긍정문화권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이규태 코너 1991년)
13-5. 性理書에 云하되 五敎之目은 父子有親하며 君臣有義하며 夫婦有別하
(성리서 운 오교지목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며 長幼有序하며 朋友有信이니라
장유유서 붕우유신)
성리서에 이르길 “다섯 가지 가르침의 조목은,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는 서로 친함이,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가,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해설)
三綱五倫(삼강오륜) 가운데 오륜에 대한 것으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중요한 덕목을 가르치고 있다. 가정에서 시작하여 나라에 이르기 까지 한시라도 곁에서 떨어뜨리지 말아야 하며, 어느 때, 어느 곳,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음으로 무질서와 혼란, 다툼과 파탄, 미움과 원망 그리고 불신과 서로 간의 메 꿀 수 없는 괴리가 발생한다. 가정의 화평과 행복은 부부 간에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며 공동의 목표를 향한 단합과 어떠한 위기와 고난이 닥쳐도 함께 헤쳐 나가는 슬기로움, 그리고 양보와 배려와 함께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지켜갈 수 있다. 부모와 자신 간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으로 맺어졌기에 죽음으로도 끊을 수 없는 깊고도 깊은 연을 갖는다. 부모는 자식을 자애와 헌신으로 대하며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받들며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괴롭게 하는 일들을 삼가 하여야 한다.
사회건 나라건 웃어른에 대한 무조건적인 따름보다는 정의와 청렴에 근간을 두고 존경과 사랑을 나누어야 하며, 어떠한 사심도 개입되지 않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과 일을 행함에는 한곳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평성과 주관적인 판단이 되지 않는 절차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충과 효를 기본 바탕으로 하는 사회체제하에서는 무조건적이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최고의 선으로 불가항력의 영향력을 발휘하였지만 눈부시게 변화된 현재에 와서는 새로운 해석과 적용이 요구되고 있다. 다양한 가치관과 새로운 질서체계는 좀 더 탄력성 있고 현실적인 적응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주요 대상이 바뀌고 빠른 속도를 요하는 시스템 속에서 변화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들기에 절대가치도 바뀔 수밖에 없다.
사회생활도 환경의 변화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한 고을에서 자라난 죽마고우란 성어도 도시화에 밀려 존재조차 희미해지고 있으며, 어려서부터 시작되는 경쟁은 절친한 친구 한명을 만들기도 어렵게 하고 있다.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뢰를 줄 수 있는 친구,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게 믿음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신뢰를 줄 만한 친구를 가질 수 있을까? 평생을 두고 한 명만이라도 있다면 행복하고 성공한 삶이라 말하는데 과연 몇 명이나 그 기쁨을 누리고 있을까.
殷鑑不遠(은감불원)
- 은나라의 왕이 거울삼을 만한 것은 먼데 있지 않다는 뜻으로, 본받을 만한 좋은 前例(정례)는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 -
夏(하)나라의 桀王(걸왕)은 폭군으로 유명하나, 원래는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여 왕자다웠다. 그러다가 有施氏(유시씨)의 나라를 정벌했을 때에 공물로 보내 온 妺嬉(말희)라는 여인에 빠진 나머지 온갖 사치와 음락을 계속하는 바람에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졌다. 이러한 걸왕의 죄를 보다 못한 殷(은)나라의 湯王(탕왕)이 천명이라 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易姓革命(역성혁명)을 일으켜 은나라를 세웠다. 은나라는 약 600년 후 紂王(주왕)에 이르러 망하였다. 주왕도 출중한 지혜와 무용을 지녔으나, 有施氏(유시씨)의 나라를 정벌했을 때에 공물로 보내 온 妲己(달기)라는 여인에 빠져 酒池肉林(주지육림) 속에서 세월을 보냈다. 보다 못한 신하가 이를 간하기라도 하면 도리어 엄벌에 처하였다. 三公(삼공) 중 뒷날 周(주)나라의 文王(문왕)이 되는 西伯(서백)이 간하다가 갇혔는데, 그는 詩經(시경)의 大雅(대아) 蕩詩(탕시)의 구절을 인용하여 “은의 왕이 거울삼을 만한 것은 먼데 있지 않고, 하나라 걸왕 때에 있다(殷鑑不遠在夏后之世 : 은감불원재하후지세.)”하고 간하였다. 음락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던 주왕은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했다.(출전 詩經)
性的戱弄(성적희롱)
교육소설 “에밀”을 지은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사생아를 다섯이나 고아원에 버렸다면 곧이 듣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연상의 과부건 가정부건 제자건 하숙집 딸이건 닥치는 족족 성적희롱을 자행했다고 그의 “고백”에서 고백하고 있다.
“21세기의 倫理先生(윤리선생)”으로 불리기도 하는 근엄한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도 성적희롱으로 유명하다. 가정교사와 침대에 더불어 있는 것을 料理女(요리녀)에게 들키자. 그 요리녀에게 손을 대 입을 막고, 논문해석을 듣고자 찾아온 21세의 아가씨에게 60세의 노인이 구혼하고 있다.
성적희롱이란 그 농도가 진하고 덜 진하고의 차이는 있을망정 신분-계급-재산 등이 상위에 있는 남자가 하위에 있는 여자에게 권력이나 금력을 빙자하여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강요-강제하는 성행위이다. 이 같은 횡포에 대응하는 여성의 태도를 “테스형”과 “파미라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토머스 하디의 대하소설인 “더버빌의 테스”에서 귀족집의 하녀로 일하는 순정의 아가씨 테스는 그 집의 蕩兒(탕아) 알렉의 성적희롱에 희생되어 처절한 일생이 시작된다. 이집 저집 중노동을 하며 처참하게 사는 그녀 앞에 알렉이 나타나자 테스는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아 유린당한 인생을 보상하고 교수대에 올라선다.
리처드슨의 대하소설 “파미라”에서 동명의 파미라라는 테스와는 달리 성적희롱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슬기로운 처리를 하고 있다. 地主(지주)인 상전인 아들에게 성적희롱을 강요받은 하녀 파미라는 집요하게 막아 냄으로써 이 탕아로 하여금 정식결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옛날 함경도 변방으로 벼슬살이 갈 때면 단신 부임이 상식이요, 재임 중에 관아에서 일하는 官婢(관비)나 官妓(관기)에게 성적서비스를 강요하는 것이 관례가 돼있었다. 甲山萬戶(갑산만호) 황인섭은 열다섯 살의 관기 소춘풍에게 첩으로 들인다는 甘言(감언)으로 꾀어 동거를 한다. 벼슬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간 후 소식이 없자 소춘풍은 단신 상경하여 변심한 것을 확인한 후 가해자의 집 앞에 나뭇가지를 쌓아 놓고 올라앉아 분신자살을 하고 있다. 테스형 대응인 것이다.
江界(강계)의 邊防將(변방장) 이경무는 그곳 관비 巫雲(무운)에게 성적서비스를 강요했다. 이에 무운은 사타구니에 찜질, 살을 헐게 함으로써 惡瘡(악창)이 있다는 핑계를 대는 등 하여 희롱을 꾸준히 막아내어 파미라 처럼 자신을 구제하고 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통하여 파미라형은 빙산의 일각이요, 테스형이 빙산의 저각이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40%가 희롱을 당했다고 했으나 이에 저항한 것은 10명 중 한명 뿐이요, 10명 중 9명은 테스처럼 수난을 감내했다는 것이 된다. 토머스 미국 대법판사의 인준과정에서 제기된 성적희롱 파동은 용기 있는 항거와 폭로에 있다는 교훈만 남겼을 뿐 유야무야하게 끝난 것이 아쉽기만 하다.(이규태 코너 1991년)
性戱弄(성희롱)
새나 짐승들은 수컷이 암컷에게 성희롱을 당한다.
런던 리젠트공원의 孔雀(공작)의 춤은 유명한데 약 9m 간격으로 숫공작들이 암컷을 부르는 求愛(구애)의 춤을 춘다. 그럼 암공작은 짝을 결정하기까지 3∼7마리의 춤판을 거치며 선을 본다. 그리하여 펼쳐진 공작날개에 둥근 눈무늬가 보다 많이 박힌 놈을 골라 짝을 짓는다. 그 거치는 동안에 암공작들은 그 눈무늬를 확인해 볼 셈으로 성적교태를 부리는 성희롱을 하여 그 수놈으로 하여금 날개 짓을 하게 해놓고는 다른 춤판으로 옮겨가곤 한다.
두꺼비도 암컷에게 수컷이 성희롱을 당한다. 암컷은 수컷을 업어 짝을 지울 것처럼 하다가 보다 울음소리가 우렁찬 놈을 만나면 팽개치고 옮겨 업길 전전한다. 수놈에는 농도 짙은 성희롱이 아닐 수 없다. 한데 사람은 여자가 남자로부터 성희롱을 당한다. 동서고금에 이 성희롱을 가장 악덕시했던 게 우리전통사회요, 그 덕목이 바로 男女有別(남녀유별)사상이었다.
임진왜란에 난리를 피하려는 한양의 마님들이 한강나루에 몰려들어 앞 다투어 배를 타려고 아우성들이었다. 한 마님이 배를 못타고 서성대는 것을 뱃사공이 손을 끌어 배에 태워주었다. 배가 강심에 이르렀을 때 그 마님이 치마를 들러 쓰고서 몸을 던져 자결을 했다. 몸을 던지기 전에 데리고 가던 계집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손이 낮선 사내에게 이미 더럽혀졌으니 때 묻고 더 살아서 뭣하겠느냐.”고
생사기로에서 죽지 않기 위해 잡히지 않을 수 없었던 남녀접촉일망정 죽음으로 보상했다면 성희롱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남녀 간의 육체적 거리에서 뿐 아니라 言語距離(언어거리)에서도 聲色(성색)은 완전 증발시키고 있다. 선조 때 한양에서 아내의 간통을 적발한 남편이 그 아내의 국부를 돌로 쳐 죽인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을 다룬 형조에서는 임금까지 보시는 법문서인지라 국부라는 말을 쓰지 않고 사건의 진상을 표기하는데 무척 고민했다. 이에 함양 선비 吳一燮(오일섭)의 아이디어로 이렇게 적고 있다. “모가 나지 않은 돌로(以無方之石 : 이무방지석)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곳을 쳐 죽였다(打殺不忍見之處 : 타살불인견지처)”고
옛 선비들이 길가다가 음담패설을 들으면 귀가 더럽혀졌다 하여 집에 돌아와 귀씻이(洗耳 : 세이)를 하고, 길가다가 암탉이 수탉을 업고 있는 것만 보아도 눈이 더럽혀졌다 하여 눈씻이(洗眼 : 세안)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성희롱이 개재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을 우리 한국처럼 철저히 불식해 내린 어떤 나라도 없을 줄 안다. 그리고 나라에서 성희롱에 대한 배상판결이 내린 것은 그 억세었던 유별사상이 해진 겨푸대처럼 너덜거리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 된다. 이제 한국남자들은 옛 선비들처럼 유별에 추상같고 여자들은 유별에 손가락 태우는 열녀가 되어야 할 판이다.(이규태 코너 1994년)
13-6. 三綱은 君爲臣綱하고 父爲子綱하고 夫爲婦綱이니라
(삼강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
삼강은, 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되고, 아버지는 자식의 벼리가 되며,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되는 것이다.
⋇ 三綱(삼. 벼리, 줄을 칠 강) : 세 가지 벼리. “벼리”는 그물의 위쪽 코를 꿴 굵은 줄. 사물을 총괄하여 규제하는 것, 곧 도덕, 법칙, 규율 등을 의미함.
(해설)
삼강은 인간사에 가장 위에 있는 法道(법도) 내지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꼭 지켜져야 하는 근본을 말함이다. 근본이라 함은 흔들려서도 안 되고, 바뀌어서도 안 되는 절대의 선을 말함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즉 천. 지. 인으로 부르는 세상의 구성요체로 서로가 가지는 질서와 견제기능이 상실되지 않도록 하여야 제대로 운행이 이루어지는데, 그 어느 한쪽으로 힘이 쏠리는 불균형상태가 되면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소위 말하는 재앙이라든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하늘에 힘이 강성해 지거나, 약해지면 天災(천재)가 발생하고, 땅에 힘이 강성해 지거나, 약해지면 地變(지변)이 일어나며, 사람에 힘이 강성해지거나, 약하게 되면 人災(인재)가 발생하게 된다.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를 하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땅, 부부 간의 관계를 사람에 비유하여 볼 수 있겠다. 보이지는 않지만 강력하고 절대적인 힘이 팽팽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으며, 그 힘은 변화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특수한 존재로 계속 존속한다.
하늘은 모든 것을 주재하는 존재로서 어느 하나라도 소홀하거나 지나치면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다. 시작점이 어딘지도 모를 미약하여 감지조차도 힘든 이상 징후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거리가 멀어질수록 점차 그 실체가 들어나면서 탐욕스러운 먹이활동을 시작한다. 적게는 한 지역을 강타하지만 넓게는 몇몇 국가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벌이는 사상초유의 불상사를 연출하기도 한다. 세상사도 마찬가지로 작고 하찮아 보이는 국가의 정책이 국민들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하게 큰 경우가 대단히 많다. 충분하게 검증이 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정책들이 오히려 국민들의 생활전선에 태풍과도 같은 위력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한 나라가 융성하는 시기는 바로 천. 지. 인의 삼박자가 최고의 조화와 균형을 맞추어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는 때이다.
땅은 수확을 걷을 수 있도록 한다. 하늘의 기운과 사람의 정성과 노고에 의한 결과물이지만 그러한 결과가 나올 수 있게 지원하고 보호하며 성장하게 해준다. 환경적 요소에 따라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지만, 본래의 모습은 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결과물을 얻게 해준다. 변화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느리고 더딜지언정 쏟는 정성과 노력을 배반하지는 않는다. 다만, 또 다른 요인에 의하여 그 결과가 다를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 쌀은 불로 익혀야 밥이 되듯이 무언가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땀과 노력과 정성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야 결과물이 나타나게 된다. 원하든 것이건 아니건 간에.
一網打盡(일망타진)
- 그물을 한번 쳐서 물고기를 모조리 잡는다는 뜻으로, 한꺼번에 죄다 잡는다는 말. -
宋(송)나라의 인종은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학문을 숭상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善政(선정)을 베풀었다. 그때에 명신인 范仲淹(범중엄), 歐陽脩(구양수), 司馬光(사마광), 周敦頤(주돈이), 程顥(정호), 程頤(정이) 등이 황제를 보필하였다. 한편, 賢士(현사)들이 제각기 정론을 제기하게 되니 당파가 생기게 되어 자주 대신들이 바뀌게 되었다. 杜衍(두연)이 승상이 되었을 때에는 황제가 대신들과 상의하지 않고도 詔勅(조칙)을 내리는 것이 관례(이를 內降“내강”이라 함)였다. 그러나 두연은 政道(정도)에 어긋난다 하여 내강이 내려도 보류하였다가 10여 장이 모이면 황제에게 도로 반송하였다. 이 같은 두연의 행동은 聖旨(성지)를 마음대로 굽히는 것이라 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때에 두연의 사위 蘇舜欽(소순흠)이 공금을 횡령하여 제사를 지내고 손님 접대에 탕진하였다는 죄목으로 붙잡혔다. 두연을 못마땅하게 여겨 온 어사 王拱辰(왕공진)은, 기회는 이때다 하고 이를 엄중히 처단하였다. 그리고서는 손뼉을 탁 치면서 “일망타진했도다.”라고 말했다고 함.(출전 宋史 仁宗紀 : 송사 인종기)
※ 淹(담글 엄), 脩(포 수), 頤(턱 이), 衍(넘칠 연), 拱(두 손 맞잡을 공).
少林寺 拳法(소림사 권법)
무술영화에서 낮 익은 소림사 권법이 소림사 본고장에서 온 남녀高手(고수)들에 의해 피로되었다. 이 가운데에는 주정권법인 醉拳(취권), 원숭이 권법인 猴拳(후권), 뱀머리 권법인 蛇拳(사권), 사마귀 권법인 螳螂拳(당랑권) 등 무려 58개의 권법이 공개되었고 소림권법을 계승한 29대 최고수 永信(영신)스님을 비롯, 여자 棍術(곤술)의 일인자 將暉(장휘)등 각개 권법의 일인자 40명이 묘기를 겨룬 것이다.
중국의 권법은 크게 外家法(외가법)과 內家法(내가법) 두 유파로 나뉘는데 바로 외가법이 소림사 권법으로 뛰고 넘고 날아서 제압하는 動的(동적)인 무술이라면 내가법은 松溪(송계)권법이라 하여 인체의 穴(혈)인 급소를 짚어서 제압하는 靜的(정적)인 권법이다. 문헌에 보면 송나라 邊澄(변징)이란 고수는 소림사에서 3년간 외가법을 익히고 다시 송계문하로 들어가 다시 3년을 더 익혀 내외권법을 통합시키고 있는데, 당시 徽宗(휘종)의 부름을 받고 동해에 출몰한 倭寇(왜구)와 단신 대결하여 쇠창과 갑옷으로 무장한 왜구를 일당백, 권법으로 70명을 죽이고 있다. 중국 河南省(하남성)에 있는 소림사는 禪宗(선종)의 宗祖(종조)인 達摩(달마)대사가 들어가 面壁(면벽) 9년 만에 대통했다는 절이다.
소림사의 大雄殿(대웅전)은 1138년에 지은 중국의 대표적인 고건물로 보존돼 있고 달마대사의 면벽 9년의 현장인 初祖庵(초조암)은 신라 留學僧(유학승)이면 들르지 않은 스님이 없었다할 만큼 중국 굴지의 불교 성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림사가 권법무술의 발상지로 돼 버린 데는 이설이 많다. 절 가까이에 사는 노회하고 하얀 원숭이가 가르친 후권이 권법의 시작이라고도 하고 달마대사가 심신을 단련하는 禪(선)의 일종으로 창안한 것이라기도 한다. 하지만 소림사가 워낙 깊은 산속에 자리한 데다 순례자가 많으므로 도둑이 끓을 수 밖에 없으며 그에 대한 자위수단으로 스님 사이에 살생하지 않고 물리칠 수 있는 무술권법이 자생, 발달, 전승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隋(수)나라 때만 해도 열 번 이상 산적의 소굴이 되어 절을 점거하려 들었고 그럴 때마다 권법으로 대항하여 절을 유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명나라를 거치면서 소림사 권법은 다양하게 발달하여 義和拳(의화권)-太極拳(태극권)-龍王拳(용왕권)-羅漢拳(나한권) 등 72개 유파로 가지 뻗어 발달했으며 그중 한 유파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북한산성의 僧兵(승병)간에 전수되었으며 올림픽 종목인 柔道(유도)도 소림사 권법의 한 유파인 것이다. 그 本統(본통), 本流(본류)를 소림사 무술 스님들의 실연으로 본 것이다.(이규태 코너 1992년)
자료출처-http://cafe.daum.net/sungho52
박광순선생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