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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먹고사는 것이 오고, 그 다음에 도덕이 온다“
(Erst kommt das Fressen, dann kommt die Moral.)
-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t Brecht), 희곡 『서푼짜리 오페라』 중.
4. 경제적 붕괴, 정치적 붕괴
월가에서 주식시장이 폭락했을 때, 독일 정치인들이 처음부터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의외로 그들의 1순위 관심사는 뉴욕의 주식시장이 아니었습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미국식 투기 광풍이 마침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정도로 받아들였죠. 미국인들이 또 너무 신나게 돈놀이를 하다가 크게 넘어졌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베를린의 장관들과 의원들은 잠시 혀를 찼고, 신문은 며칠 동안 검은 화요일을 떠들었고, 그러고 나면 독일은 다시 독일 문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경제는 미국 단기자본과 외국 신용에 깊이 묶여 있었습니다. 미국의 지갑이 마른다는 것은 독일 은행의 숨통이 조여든다는 뜻이었고, 독일 은행의 숨통이 조여든다는 것은 기업, 지방정부, 그리고 라이히 재정이 차례로 말라붙는다는 뜻이었습니다. 독일은 자기 집 마당에서 물을 긷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수도관은 뉴욕의 어느 은행 지하실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하실에서 누군가 밸브를 잠근 것입니다.
그런데도 독일 정치권은 다른 문제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바로 영 플랜(Young Plan)이었습니다.
영 플랜은 독일 배상문제를 다시 조정하는 거대한 합의였습니다. 원래 1,320억 금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떠돌던 배상 부담을, 원금 360억 라이히스마르크, 이자까지 합하면 총 1,120억 라이히스마르크 정도로 재구성하고, 그것을 1988년까지 분할 상환하라는 계획이었습니다. 평균적으로 보면 매년 국가예산의 7.3퍼센트를 배상금으로 납부하는 셈이었습니다.
듣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숫자였지만, 그래도 루르 공업지대에 외국 군대가 다시 들어오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독일 정치에서 “덜 끔찍한 것”은 종종 “합리적 대안”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헤이그에서 연합국 대표단과 직접 협상을 주도하던 중앙당 소속의 게오르크 치머만(Georg Zimmermann) 재무차관은 빠른 비준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영 플랜의 통과가 시장에 예측가능성을 더해줄 것이며, 세계적 불황이 예상되는 지금 독일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예측가능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치머만은 혁명도, 민족의 분노도, 노동자의 절규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좋아한 것은 숫자가 제자리에 놓이는 순간이었습니다. 문제는 1929년 말의 독일에서 숫자들이 제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비르트 총리에게도 영 플랜은 반드시 통과되어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외교 정상화, 배상 안정화, 시장 안정, 국제신용 회복의 문제였습니다. SPD, DDP, DVP 등 연립정당들도 큰 틀에서는 비슷한 생각이었습니다. 독일은 이미 충분히 얻어맞았고, 이제는 적어도 맞는 일정을 달력에 적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양극단의 급진주의자들에게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KPD는 “사회파시스트들이 독일 노동자를 국제금융자본에 팔아넘긴다”고 외쳤습니다. DNVP는 “공화주의자들이 베르사유의 쇠사슬에 새 자물쇠를 채웠다”고 비난했습니다. 둘의 정치적 언어는 서로 달랐지만, 결론은 비슷했습니다. 갚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영 플랜은 독일을 용서해주는 문서가 아니었습니다. 독일이 앞으로 어떻게 맞을지를 시간표로 정리해주는 문서였습니다. 급진주의자들이 그것을 싫어한 이유는 계획이 너무 엉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행정적으로 잘 정돈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으로 강요받은 배상금이라면 배째라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합리적인” 배상 방법을 조약 형태로 받아들이면, 그 다음 미납은 저항이 아니라 연체가 됩니다.
온 나라가 영 플랜 수용 여부를 두고 논쟁에 빠져 있는 동안, 내각 안의 정당들은 당장의 큰 재정개혁을 미뤘습니다.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고, 기업들이 하나둘씩 도산하고, 길거리에는 점점 더 많은 실업자가 나앉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 플랜만 통과되면 시장이 안정될 것”이라는 신화는 굳건했습니다.
신화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보관함에 가까웠습니다. 불편한 문제는 모두 그 안에 들어갔습니다. 실업보험, 세수 부족, 지방정부의 단기차입, 기업 도산, 은행 유동성 문제. 장관들은 시장의 안정을 논했고, 회의록은 두꺼워졌고, 실업자 수는 얌전히 늘었습니다. 물론 실업자들은 전혀 얌전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회의장 안에서는 숫자로만 나타났습니다.
DNVP가 “독일인 노예화 방지법(Volksbegehren gegen die Versklavung des Deutschen Volkes)”을 앞세워 국민투표 운동까지 벌인 끝에, 1929년 12월의 격렬한 논쟁을 지나 영 플랜은 결국 비준되었습니다. 외교관들은 안도했고, 내각은 숨을 돌렸고, 신문은 독일이 다시 국제신용의 길로 들어섰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미뤄둔 서류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들은 독일 정치인들보다 인내심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더 잔인했습니다.
그중 가장 먼저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은 실업보험이었습니다.
독일의 실업보험은 기업 경영자와 노동자에게서 보험료를 걷어 실직한 노동자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구조였습니다. 정상적인 불황이라면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대공황이 정상적인 불황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실업자는 너무 빠르게 늘었습니다. 기업은 사람을 내보냈고, 내보내진 사람은 보험금을 신청했고, 보험금은 국고를 향해 입을 벌렸습니다. 제도는 숨이 찼습니다. 정부는 새로운 입법을 통해 부족분을 메우거나, 지급액을 줄이거나, 누군가에게 더 많은 돈을 내라고 해야 했습니다.
SPD는 이 문제에서 매우 강경했습니다. 실업보험 위기는 실제 역사에서도 헤르만 뮐러 내각을 무너뜨린 계기였지만, 이 대체역사에서 SPD는 더더욱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1929년 피의 5월(Blutmai) 이후 SPD는 이미 “노동자를 쏜 정당”이라는 낙인을 안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은 선전문구가 아니라 현실이었습니다. ADGB 내부에는 KPD 세포가 자라고 있었고, RGO는 제명자와 불만분자를 받아먹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실업보험 삭감에 동의한다면, SPD의 노동자 기반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SPD의 입장은 기묘하지만 단호했습니다.
우리는 공산당을 때려잡을 수는 있다. 하지만 실업자를 굶기면 공산주의자가 늘어난다. 그래서 동의할 수 없다.
이것이 당시 SPD의 논리였습니다. 반공좌파의 논리라고 불러도 좋았습니다. 빨갱이를 막기 위해 노동자의 최소권리는 지켜야 한다는 것. 경찰봉과 실업급여가 같은 정당의 손에 들려 있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일수록 대체로 현실에 가까웠습니다.
SPD는 곧바로 고소득자와 경영자의 분담금을 늘려 위기에 대응하자는 안을 냈습니다. 그러나 내각 내 지형은 SPD에게 좋지 않았습니다. 1928년 말 당수에 오른 중앙당의 루트비히 카스(Ludwig Kaas)는 당을 점점 우경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총리는 비르트였지만, 중앙당 전체가 비르트의 당은 아니었습니다. 당내 우파는 비르트가 SPD와 ADGB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매달 국고잔액을 들여다보는 치머만 차관은 SPD의 요구사항이 감당 불가능하다고 선을 긋고 있었습니다. 그는 SPD의 주장을 도덕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숫자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치머만은 비르트에게 사회민주당의 도덕을 반박할 생각은 없지만, 그 도덕을 지급할 계좌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잔인한 말이었습니다. 틀리지 않아서 더 잔인했습니다.
중산층과 기업가들의 정당인 DDP와 DVP에게도 SPD의 요구는 거의 모욕에 가까웠습니다. 지갑에 돈이 조금 더 많다고 해서 무제한으로 의무를 짊어져야 한다는 논리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자기들도 불황 속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랬습니다. 독일의 중산층은 공산주의를 무서워했고, 세금고지서도 무서워했습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지는 그날 우편함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따라 달랐습니다.
1930년 3월,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고 싶었던 비르트는 마지막 타협안을 냈습니다. 실업보험 급여의 즉각 삭감은 유보한다. 보험료는 인상한다. 공무원과 고정급 봉급생활자에게 한시적 연대부담금을 부과한다. 담배, 주류, 사치품에 붙는 세금을 높인다. 행정적 낭비를 줄이고, 부정수급을 단속한다. 그리고 그래도 부족한 돈을 어떻게 충당할지는 가을에 다시 논의한다.
비르트의 타협안은 모두를 조금씩 살리는 안이라기보다, 모두에게 조금씩 죽어달라는 안처럼 들렸습니다.
SPD는 대반발했습니다. 봄에 죽으나 가을에 죽으나 똑같은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습니다. 가을에 다시 논의한다는 말은, 가을에 다시 목을 조르겠다는 예고처럼 들렸습니다. 중앙당 우파는 급여 삭감이 없다는 점을 싫어했습니다. DVP는 기업을 또 두들겨 팬다고 했습니다. DDP는 표정이 복잡했습니다. 치머만은 다시 숫자를 보았습니다. 숫자는 아무 논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부족했습니다.
비르트는 거의 SPD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불타고 있는 사람의 다리를 붙잡아 봤자, 그 사람은 물을 찾으러 뛰어갈 뿐입니다.
흥미롭게도 SPD는 비르트의 안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점이 문제였습니다. 틀린 안은 공격하면 됩니다. 말도 안 되는 안은 선전으로 찢어버리면 됩니다. 하지만 그럴듯한 안은 훨씬 위험합니다. 한 번 받아들이면 다음번에는 자신들의 논리가 발목을 잡습니다. 마치 극단주의자들이 영 플랜을 반대한 논리와 비슷했습니다. 합리적 타협은 때때로 정치적 퇴로를 막습니다.
결국 비르트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헌법 제48조의 비상대권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카마릴라(camarilla)라 불리는 대통령 주변 보수세력은 비르트를 살려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비르트 개인을 특별히 증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비르트 내각에 SPD가 붙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대통령 주변의 보수관료, 군부 인사, 재계와 대농장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SPD 없는 정부를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비상대권은 의회내각을 살리는 장치가 아니라, 의회내각을 지나쳐 가는 문이어야 했습니다.
그 문을 지나 등장한 사람은 하인리히 브뤼닝(Heinrich Brüning)이었습니다.
중앙당 우파, 보수관료, 재정긴축파,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기대하는 재정보수주의자였습니다. 브뤼닝은 SPD 없는 대통령내각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그는 구원자처럼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장부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 편이 더 무서웠습니다. 1930년 독일에서는 숫자와 긴축과 비상명령에 잘 어울린다는 것만으로도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브뤼닝은 곧바로 긴축안을 비상명령으로 추진했습니다.
원역사의 SPD도 브뤼닝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공산당, 나치, DNVP의 위협을 막기 위해 싫지만 억지로 용인정책(toleration)을 택했습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내각의 목숨줄을 쥔다는 측면에서는, 아주 불편하지만 꽤 쓸 만한 거래였습니다.
하지만 이 대체역사의 SPD는 더 급했습니다. 당장 브뤼닝 내각을 끌어내리지 않는다면, “은행독재를 도운 노동자정당”으로 낙인찍힐 판이었습니다. KPD는 이미 전단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SPD가 한 번 더 물러서면, ADGB 기층은 더 크게 흔들릴 것이고, RGO는 더 많은 사람을 받아먹을 것이고, KPD는 “사회파시스트의 마지막 가면이 벗겨졌다”고 외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SPD는 KPD가 발의한 비상명령 해제안에 찬성했습니다. 그 표결판에 같이 서는 것은 굴욕이었습니다. 그러나 굴욕과 자살 중에서 고르라면, 정당은 대체로 굴욕을 고릅니다.
결국 의회 과반 득표로 대통령 비상명령은 해제되었습니다. 브뤼닝 내각은 시작하자마자 무너졌습니다. 대통령내각 체제가 출범하자마자 박살난 것입니다. 힌덴부르크 주변의 사람들은 의회를 우회하려 했지만, 우회도로도 라이히슈타크 표결장 앞에서 끝났습니다.
브뤼닝 붕괴 후 선택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의회 안에는 안정 다수가 없었습니다. 의회 밖에서 세운 대통령내각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재총선뿐이었습니다.
비르트는 의회 안에서 무너졌고, 브뤼닝은 의회를 우회하려다 무너졌습니다. 영 플랜은 통과되었지만, 재정은 더 나빠졌고, 실업보험은 폭발했고, SPD는 더 궁지에 몰렸고, 중앙당은 더 오른쪽으로 기울었고, 대통령 주변은 더 노골적인 해법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독일 정치에는 몹시 단순한 결론만 남았습니다.
말로도 안 되고, 명령으로도 안 된다면, 누군가는 주먹으로 해보려 할 것입니다.
5. 갈색 광대 집단
비르트와 브뤼닝 이후, 독일 정치에 남은 것은 선거였습니다. 평범한 나라라면 민주주의의 정상적 절차였겠지만, 1930년의 독일에서 재총선은 차분한 의견수렴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포스터를 붙이는 사람보다 포스터를 찢는 사람이 더 바빴고, 유세장에는 연설자보다 질서유지대가 먼저 도착했습니다.
대통령내각은 출범하자마자 박살났습니다. 힌덴부르크 주변의 보수관료들은 의회를 우회하고 싶어 했지만, 우회도로도 라이히슈타크 표결장 앞에서 끝났습니다. 비르트의 중도정치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브뤼닝의 대통령정치는 출발선에서 넘어졌습니다. 의회는 여전히 산수를 못 했고, 거리의 정치조직들은 자신들이 답을 알고 있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나치당 지도부는 이 순간을 기회로 보았습니다. 괴벨스는 곧바로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비르트는 말로 실패했고, 브뤼닝은 명령으로 실패했으며, 이제 독일은 의지를 요구한다고요. 듣기에는 그럴듯했습니다. 적어도 당 기관지의 제목으로는 충분했습니다.
히틀러는 여전히 합법노선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총선에서 나치당이 다시 도약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브뤼닝의 실패, 실업자의 증가, KPD의 급성장, SPD의 피로감, 중앙당의 우경화. 모든 것이 나치당에게 유리해 보였습니다. 원래 역사였다면 바로 이 무렵 나치당은 독일 중산층의 불안과 분노를 대량으로 빨아들였을 것입니다. 공산당을 막아줄 무서운 사람들. 체제정당들을 혼내줄 신선한 야만인들. 질서를 회복할 거친 의사들.
문제는 이 세계의 나치당이 이미 너무 많이 망가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쿠노 백작은 떠났습니다. 상류층 후원망은 줄었습니다. 당 재정은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SA가 너무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슈테네스의 반란은 끝난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발터 슈테네스는 사실상 지도자 원리(Führerprinzip)를 기반으로 하는 당에서 그 지도자에게 반역을 일으켰다가 결국 실패했지만,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으니까요. 그 사건 뒤 베를린의 갈색 셔츠들은 아주 단순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뒤집어엎으면 협상이 열린다. 퓌러는 화를 내지만, 결국 우리를 버리지 못한다. 당중앙은 신문을 가질 수 있지만, 거리는 우리가 가진다.
그들은 점점 더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퓌러는 우리를 필요로 한다.
히틀러는 총선으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SA는 거리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둘 다 “운동의 승리”라고 불렀지만, 승리의 장소가 달랐습니다.
이 불일치를 중산층이 보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많은 중산층 유권자에게 나치당은 위험하지만 쓸모 있는 도구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공산당을 막아줄 깡패. 표현은 천박했지만, 위기의 시대에는 그런 표현도 어느 정도 현실적 계산처럼 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림이 달라졌습니다. 나치당은 공산당을 막아주기 전에 자기 집 창문을 먼저 깨부술 놈들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중산층은 공산주의를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대체로 신문 1면, 선거연설, 공장집회, 붉은 깃발의 형태로 먼저 찾아왔습니다. SA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토요일 밤 맥주 냄새를 풍기며 바로 가게 앞에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KPD는 계급투쟁을 말했습니다. SA는 의자를 던졌습니다. 어느 쪽이 더 위험한가의 문제는 이론적으로 복잡했지만, 어느 쪽이 먼저 생활공간에 들이닥치는가는 훨씬 쉽게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이 상황을 되돌리려 했습니다. 그는 SA를 다시 장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꺼낸 카드가 오토 바게너(Otto Wagener)였습니다. 바게너는 자유군단 출신이었고, 경제학 박사였으며, 당 경제정책에도 밝았습니다. 귀족 살롱형 인물도 아니었고, 군사적 배경도 있었습니다. 히틀러 입장에서는 SA와 당중앙 사이를 다시 묶어줄 만한 인물처럼 보였습니다.
SA는 즉시 반발했습니다.
바게너가 특별히 무능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훨씬 단순했습니다. 그는 슈테네스가 아니었습니다. 베를린 SA는 바게너를 “박사님”이라고 비꼬았습니다. RFB가 곤봉을 들고 오는데 박사학위로 막을 거냐는 식이었습니다. 농담은 조잡했지만, SA 내부에서는 꽤 잘 먹혔습니다. 갈색 셔츠들은 바게너의 경력보다 그가 “우리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았습니다.
바게너 임명 시도는 히틀러의 권위 회복이 아니라, 그 권위가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SA는 이제 지도자를 임명받는 조직이 아니라, 지도자를 승인하려 드는 조직처럼 굴기 시작했습니다. 히틀러는 이것을 반역이라고 느꼈고, SA는 이것을 현장의 자존심이라고 불렀습니다.
바게너 사건은 히틀러가 SA를 다시 장악하려다 실패한 첫 번째 장면이었습니다. 슈트라서의 당내 ’문필 봉기‘는 그 실패에 이념을 붙였습니다.
오토 슈트라서(Otto Strasser)는 히틀러의 합법주의와 상류층 타협을 “민족사회주의 혁명의 배신”으로 규정했습니다. SA의 실제 요구는 이념적으로는 거칠었고, 실무적으로는 매우 분명했습니다. 돈을 달라. 의석을 달라. 지휘권을 달라. SS 특권을 줄여라. 슈테네스를 인정하라. 듣고 있으면 혁명이라기보다 노조 교섭에 가까웠습니다. 다만 교섭장에 곤봉이 조금 많았을 뿐입니다.
슈트라서는 여기에 사상을 붙였습니다.
그는 이것이 돌격대의 예산투쟁이 아니라, 민족사회주의 혁명의 사회주의적 본질을 지키는 투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언어에는 반자본주의, 푈키셔 민족주의(Völkischer Nationalismus) , 반공주의, 기독교적 도덕주의, 길드적 사회주의, 강한 국가권위와 지방분권적 행정에 대한 꿈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마르크스 없는 사회주의, 자유주의 없는 반자본주의, 계급투쟁 없는 혁명. 당 안의 불만분자들에게는 딱 필요한 말들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슈트라서를 겨우 출당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승리라기보다 문제를 당 밖으로 밀어낸 것에 가까웠습니다. 슈트라서는 새 조직을 세웠습니다. 정식 명칭은 독일사회주의혁명전선(Deutschsozialistische Revolutionsfront)이었습니다. 너무 길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곧 그것을 흑색전선(Schwarze Front)이라고 불렀습니다.
흑색전선은 당 밖에 있었지만, 당 안을 향해 말했습니다. 특히 SA 불만파에게 말했습니다. 히틀러는 자본가와 살롱귀족에게 운동을 팔아넘겼다. 당중앙은 거리의 피를 의회 명부로 바꾸어 먹고 있다. 진짜 민족사회주의는 갈색 셔츠 속에 남아 있다.
슈테네스는 행동을 주었고, 슈트라서는 그 행동에 문장을 주었습니다. 그 조합은 곧 베를린의 술집, 인쇄소, SA 지부 사무실을 타고 번져나갔습니다.
여기에 헤르만 에르하르트(Hermann Ehrhardt)의 이름이 더해졌습니다.
에르하르트는 단순한 우익 모험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영사조직(Organisation Consul), 비킹 연맹(Bund Wiking), 자유군단, 정치암살, 비밀군사조직, 백색테러의 냄새를 달고 다니는 이름이었습니다. 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와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Matthias Erzberger) 암살의 기억은 아직 독일 공화파와 중산층에게 생생했습니다. 그 이름들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총성과 자동차 엔진 소리와 함께 돌아오는 악몽이었습니다.
에르하르트가 모든 것을 직접 지휘했다는 식으로 사건이 깔끔하게 정리되지는 않았습니다. 지휘명령서 한 장 대신, 인쇄소 영수증과 연락책의 성씨와 술집 이름이 흘러나왔습니다.
베를린 SA에 흘러간 무기 일부가 비킹 연맹 잔존망에서 나왔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슈테네스파 연락책 중 한 명이 과거 영사조직 주변 인물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흑색전선의 선전물이 에르하르트계 우익 인쇄소에서 찍혔다는 정황도 드러났습니다. 압수문건에는 암호명과 약속장소와 익숙한 성씨들이 흘러나왔습니다. 하나하나는 애매했습니다. 모이면 냄새가 났습니다.
쿠노 백작은 이 냄새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류층 모임을 돌며 말했습니다. 나치당은 정당이 아니라 영사조직의 손자들이라고요. 쿠노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그 손자들에게 와인을 뒤집어쓴 적이 있었습니다.
이 폭로는 나치당 이미지에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나치당은 공산당을 막아줄 거친 방패처럼 보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의 이름이 떠오른 순간, 그 방패에는 예전에 라테나우와 에르츠베르거를 향했던 총구의 그림자가 비쳤습니다. 중산층에게 그것은 반공이 아니라 정치살인의 재림이었습니다. 공산당이 무섭다고 해서, 백색테러의 후배들에게 집 열쇠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상류층만 물러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치가 탐내던 또 다른 청중, 즉 바이마르를 경멸하지만 SA의 발소리도 천박하게 여기는 보수혁명 지식인들도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에드가 융(Edgar Julius Jung) 같은 인물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의회주의도 얕보았고, 자유주의도 싫어했으며, 마르크스주의는 혐오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치당을 보며 점점 더 노골적으로 경멸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에게 나치당은 국가개혁이 아니었습니다. 맥주홀의 쓰레기통이었습니다. 혁명이 아니라 소음이었습니다.
독일의 미래를 의자 부수는 SA 대원들에게 맡길 수는 없다는 데에는, 보수혁명가와 자유주의자가 뜻밖에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둘 다 그 사실을 입 밖에 내고 싶어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SA는 이런 반응을 읽지 못했습니다. 아니, 읽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브뤼닝 붕괴 후 재총선이 결정되자, 슈테네스파는 대규모 행동을 주장했습니다. 의회정치의 파산은 입증되었다. 정부가 거리를 포기했다. 적색전선전사동맹(RFB)이 베를린을 삼키려 한다. 민족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 “베를린 진군(Berlin Putsch)”이 준비되었습니다.
명목은 국민방위행동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쿠데타, 시위, 폭동, 무력시위, 선거운동, 당내 압력행사가 한데 섞인 정치적 잡탕이었습니다. SA는 정부를 전복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포기한 거리를 민족이 접수하러 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내부 문건으로 보면 웅장했습니다. 외부에서 보면 폭동 예고장이었습니다.
SA 행동대가 베를린으로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히틀러 당중앙은 공식적으로 자제를 요청했습니다. 너무 세게 막지는 못했습니다. 괴벨스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민족의 건강한 분노”라는 표현을 찾아냈습니다. SS는 SA를 감시하려 했지만 아직 약했습니다. 힘러의 친위대는 충성심은 충분했지만, 충성심으로 갈색 셔츠 수백 명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경찰은 긴장했습니다. RFB도 움직였습니다. SPD계 국기단(Reichsbanner Schwarz-Rot-Gold)은 집회 보호를 준비했습니다. 철모단(Stahlhelm)도 자기 사무실과 우익 집회를 지키기 위해 출동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과 중산층은 불안하게 신문을 읽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자기 거리와 자기 상점을 지켜줄 정치적 몸이 없었습니다. 경찰이 오지 않으면 끝이었습니다. 경찰이 와도 끝일 수 있었습니다.
베를린 진군은 곧 예고된 사고가 되었습니다.
SA는 원래 RFB 사무소를 치러 갔다가 철모단 지역사무소를 박살냈습니다. 누군가는 주소를 잘못 알았고, 누군가는 그냥 창문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DNVP 지방조직의 선거차량은 “적색 자금 운반차”라는 이유로 뒤집혔습니다. 그 차에 실려 있던 것은 전단지와 낡은 확성기뿐이었습니다. 기독교 노조 사무실은 ADGB 지부로 오인되어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어느 거리에서는 RFB와 SA가 맞붙으려는데 철모단이 끼어들었고, 순식간에 삼파전이 되었습니다. 경찰이 도착하자 SA는 공화국 경찰이 적색을 보호한다고 외쳤고, KPD는 파시스트 폭동이 시작되었다고 외쳤습니다. 둘 다 자기 선전에 필요한 장면을 얻었습니다. 시민들은 유리창을 잃었습니다.
희극적이었습니다. 동시에 피투성이였습니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신문은 매일 폭력 사건을 실었습니다. 어느 신문은 SA의 무모함을 공격했고, 어느 신문은 RFB의 도발을 강조했고, 어느 신문은 경찰의 무능을 탓했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가게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논조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영업장이 정상적으로 열릴 수 있느냐였습니다. 나치당은 거리에서 더 크게 보였습니다. 문제는 유권자들이 점점 그 거리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DNVP는 난처해졌습니다. 원래라면 나치와 반공·반베르사유 전선에서 협력할 수 있었습니다. 후겐베르크는 히틀러의 대중동원력을 탐냈습니다. 그러나 SA가 철모단과 DNVP 조직까지 두들겨패는 상황은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철모단은 격분했습니다. 공산당과 싸우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그런데 왜 우리 사무실을 부수느냐. 아주 정당한 질문이었습니다. 다만 SA가 그 질문을 들으러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DNVP 원내 세력은 나치를 점점 통제불능 폭력집단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후겐베르크 언론은 처음에는 사건을 축소하려 했지만, 에르하르트 연루 의혹이 터지자 방어선이 무너졌습니다. 우파 전체가 백색테러의 냄새를 다시 풍기게 되었습니다. DNVP는 나치와 선을 그으려 했습니다. 늦었습니다. 우파 정치는 이미 진흙탕에 발목을 담근 뒤였습니다.
KPD는 이 모든 상황에서 최대의 반사이익을 얻었습니다. 놀랍게도 KPD가 특별히 새로운 것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르트 붕괴, 브뤼닝 실패, SA 폭동, 에르하르트 의혹이 차례로 KPD의 기존 문장 옆에 증거처럼 붙었습니다.
KPD는 베를린 진군을 파시즘의 본질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SPD를 향해 외쳤습니다. 너희는 노동자를 쐈고, 실업자를 팔았고, 이제 파시스트를 막지도 못한다.
물론 KPD의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중산층에게는 너무 무서웠습니다. 농촌에는 약했습니다. 가톨릭 지역에서는 중앙당 기반이 단단했습니다. SPD 조직노동자 중 일부는 여전히 KPD를 위험한 모험주의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도시 실업자, 급진 청년노동자, 금속·운수·항만 노동자, RGO 주변 조합원에게는 KPD가 가장 그럴듯한 목소리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KPD는 적어도 몇 달 전부터 같은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는 무너진다. 사회민주주의는 배신한다. 파시스트는 온다. 이제 거리로 나오라.
히틀러는 수습하려 했습니다. 공식 성명에서 그는 당이 합법적 투쟁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SA의 민족적 열정을 완전히 비난하지도 못했습니다. 슈테네스파를 처벌하면 SA가 더 들고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처벌하지 않으면 중산층과 우파 후원자가 더 떠났습니다. 그는 다시 애매한 말을 골랐습니다.
나는 무질서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 민족의 건강한 분노를 범죄로 만들 수도 없다.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슈테네스파는 히틀러가 자기들을 필요로 한다고 믿었습니다. 슈트라서는 히틀러가 겁쟁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쿠노 백작은 상류층에 저 사람은 자기 사람들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퍼뜨렸습니다. 에드가 융 계열은 국가개혁을 맡길 수준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괴벨스는 신문에서 단결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독자들은 활자보다 사진을 먼저 보았습니다. 사진 속에는 단결이 아니라, 뒤집힌 선거차량과 피 묻은 보도블록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1930년 7월 총선은 피투성이 장외선거전으로 치러졌습니다. 선거장은 정책토론보다 거리조직의 충돌로 채워졌습니다. SA, RFB, 국기단, 철모단, 경찰이 곳곳에서 충돌했습니다. 포스터는 붙자마자 찢겼고, 유세장은 보호대 없이는 열기 어려웠고, 지방신문은 매일 밤 누가 누구를 때렸는지 세어야 했습니다. 숫자를 세는 일은 독일 관료가 잘했지만, 이번 숫자들은 너무 자주 피를 묻히고 왔습니다.
결과는 나치당에게 쓰라렸습니다.
나치당은 의석을 잃었습니다.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층 급진우파, 일부 실업자, 폭력적 반공층, 히틀러 개인 숭배층, 몇몇 지방조직은 남았습니다. 그러나 중산층과 상류층, 안정지향 반공표는 빠져나갔습니다. 그들은 공산당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깡패나 고용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DNVP는 아주 살짝 의석을 늘렸습니다. 나치에 실망한 일부 우파가 돌아왔지만, DNVP는 너무 낡고 무거웠습니다. 독일 중산층이 새 우산을 찾고 있었는데, DNVP는 우산이라기보다 오래된 장롱 같았습니다. 비가 새지는 않을지 몰라도, 들고 뛰기에는 너무 무거웠습니다.
SPD는 더 줄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원내 1당으로,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조직노동자, ADGB 상층, 공화국 충성층, 지방 기반은 남아 있었습니다. 다만 SPD는 이제 점점 더 피곤한 정당처럼 보였습니다. 공화국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그 공화국이 누구를 지키고 있는지 설명하는 일이 날마다 어려워졌습니다.
최대 수혜자는 KPD였습니다. 원역사 1930년 선거에서 나치가 차지했던 대공황의 최대 수혜자 자리를, 이 세계선에서는 KPD가 가져간 셈입니다. KPD는 이번 선거에서 승리했다기보다, 자기 비관론의 배당금을 받았습니다. 무려 109석을 획득하며, SPD와 별로 차이도 안 나는 원내 2당의 자리를 거머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주의 중산층은 아직 자기 집을 찾지 못했습니다. DDP, DVP, 경제당(WP)은 약했습니다. 점잖은 사람들은 많았지만, 점잖은 사람들을 지켜줄 조직은 없었습니다. 신문 사설은 있었지만, 집회장 문 앞에 세울 청년은 부족했습니다. 변호사는 있었지만, 거리의 쓰레기와 공포를 치울 손은 부족했습니다.
1930년 7월의 선거에서 독일 유권자들은 나치당에게 한 가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공산당을 싫어한다고 해서, 아무 깡패나 고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고용할 만한 점잖은 경비원도 아직 없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늙었고, 보수주의자들은 낡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피곤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너무 무서웠고, 나치들은 너무 더러웠습니다. 독일 중산층은 잠시 정치적으로 고아가 되었습니다.
다음에 누군가 깨진 유리창을 치우겠다고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의외로 오래 쳐다보게 될 것이었습니다.
6. “500일 혁명계획”
1930년 7월 총선에서 독일공산당이 획득한 109석은 단순한 의석 증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조명을 통째로 돌려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원내 제1당인 사회민주당은 118석이었습니다. KPD는 그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습니다. 지난 1929년 3월 총선에서 깜짝 성과를 거두었던 나치는 다시 20석대 초반으로 주저앉았습니다. 거리에서는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갈색 셔츠들은 여전히 주먹을 휘둘렀지만, 의회 안에서 “극단주의 세력”이라는 이름표를 가장 크게 달고 들어온 쪽은 이제 나치가 아니라 공산당이었습니다.
나치가 겁을 주는 방식은 조잡했습니다. 유리창, 맥주 냄새, 뒤집힌 선거차량, 그리고 자기들끼리도 통제하지 못하는 돌격대. 반면 KPD의 109석은 더 차갑고 정돈된 공포였습니다. 의석표에 숫자로 찍혀 있었고, 회의록에 남았으며, 신문 사설의 첫 문단을 차지했습니다.
공화국의 중도파는 처음에는 나치의 부진을 보고 한숨을 돌렸습니다. 그 한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나치가 실패한 자리에 공산당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작은 항의정당이 아니라, 사민당과 거의 맞먹는 원내 제2당으로 말입니다.
독일의 국회의사당 안에서 109명의 공산당 의원이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이제 공산주의가 거리의 고함이나 공장지대의 삐라만이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산안 표결장에도 있었고, 의사진행 발언에도 있었고, 의원면책특권 뒤에도 있었습니다. 국가가 불온세력을 감시하던 시대에서, 불온세력이 국가의 회의록을 작성하게 만드는 시대가 온 셈이었습니다.
시선을 독일 밖으로 넓히면, KPD의 성공은 국제공산주의 운동 전체에 하나의 중대한 선례가 되었습니다. 코민테른은 오랫동안 세계혁명을 말해왔지만, 말과 의석수는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독일에서, 그것도 유럽 최대의 산업국가 중 하나에서 공산당이 사민당을 턱밑까지 추격했습니다.
모스크바의 회의실 공기는 달라졌습니다.
KPD 측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 헤르만 레멜레(Herman Remmele)는 그 분위기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시끄럽게 붙잡은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이른바 “500일 계획(План пятисот дней)”이라는 문건을 들고 왔습니다. 제목부터 대단했습니다. 독일을 당장 사회주의화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성급했고, 낙관적이었고, 자신감이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1930년의 독일에서는 그런 문건이 완전히 미친 소리처럼 들리지만은 않았습니다.
실업자는 늘고 있었습니다. 기업은 쓰러지고 있었습니다. 의회는 자꾸 새로 열렸다가 새로 무너졌습니다. SPD는 피곤했고, 중도파는 벌벌 떨었고, 나치는 더러웠습니다. 독일 자본주의가 정말로 금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레멜레는 그 금을 혁명의 문틈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모스크바 회의실에서 책상을 연거푸 내리치며 열변을 토했다고 전해졌습니다.
우리(KPD)는 반동주의자들과 파시스트, 제국주의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어느 정부보다도, 페트로그라드 2월 임시정부보다도 더 빨리 탄약을 소진해버릴 것입니다.
책상은 견뎠습니다. 회의록 작성자는 잠시 펜을 멈췄습니다. 통역은 숨을 골랐습니다.
오토 빌레 쿠시넨(Otto Wille Kuusinen)과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 같은 코민테른 간부들, 그리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총서기 부하린과 전연방공산당 총서기 스탈린은 KPD의 급성장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레멜레가 침을 튀기며 말할 때, 이들은 일단 박수를 쳤습니다. 적어도 면전에서는 그랬습니다.
코민테른의 회의실에서 박수는 늘 진심과 규율 사이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레멜레의 열정은 유용했습니다. 독일 KPD는 실제로 성장했습니다. 사회파시즘 노선은 적어도 독일에서는 선거 결과로 보상을 받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SPD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노동계급 안에서 독자적 공산주의 노선을 밀어붙였더니, 109석이 나왔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선전문구를 만들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최상층, 특히 실제 권력을 쥔 스탈린과 부하린에게는 목에 걸린 생선가시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레멜레의 급진적 계획 자체야 통과시킨 뒤 코민테른 중앙에서 통제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문건은 고칠 수 있었습니다. 구호는 바꿀 수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빠른 일정은 “정세 변화에 따른 탄력적 적용”이라는 말로 늦출 수 있었습니다. 혁명가들은 종종 시간표를 만들었고, 관료들은 그 시간표에 각주를 달았습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 중에는 중국공산당의 왕밍(王明)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회의실의 공기를 조금 더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1928년 스탈린, 부하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의 ‘연합반대파’가 트로츠키를 실각시킨 결정적 이유는 NEP만이 아니었습니다. 보다 직접적인 명분은 중국 공산당을 둘러싼 결정적 실패였습니다. 트로츠키는 국민당 대신 군사실력자 우페이푸(吳佩孚)와 손잡는 노선을 밀었고, 그 실험은 경한-월한철도 파업 사건을 계기로 파국을 맞았습니다. 중국 혁명은 한때 세계혁명의 다음 장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보고서 위의 낙관보다 훨씬 거칠고, 피비린내 나고, 통제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 중국 사회주의 운동의 실권을 잡은 것은 전임자보다 더 신중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모험주의적인 취추바이(瞿秋白)와 리리싼(李立三)이었습니다. 이들의 전면적 폭동노선 속에서 중국공산당의 세력은 나날이 깎이고 있었습니다. 혁명은 계속 선언되었지만, 조직은 줄었습니다. 구호는 커졌지만, 거점은 사라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레멜레의 “500일 계획”을 승인한다는 것은 취추바이-리리싼 노선을 승인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로 읽힐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트로츠키를 축출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전략적 실패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무도 그 질문을 회의장에서 큰 소리로 묻지는 않았습니다. 모스크바의 고위 회의에서 너무 정확한 질문은 대개 예의 없는 행동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밀회의가 열렸습니다.
쿠시넨은 문장들을 정리했습니다. 디미트로프는 독일 정세의 가능성과 파시즘 폭력의 위험을 함께 언급했습니다. 스탈린은 독일당이 너무 커져 제멋대로 생각하게 둘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부하린은 독일 자본주의의 위기가 분명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선거 결과와 권력 장악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들의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레멜레의 열정은 살린다. 레멜레의 시간표는 죽인다.
그리하여 뒤이어 열린 1930년 9월 제7차 세계 코민테른대회에서 “500일 계획”은 부결되었습니다. 독일 대표단은 분노했습니다. KPD 대의원들은 자신들의 109석이 모스크바의 회의탁자 위에서 너무 얌전하게 접히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대안을 요구했습니다. 단순한 위로문이나 원칙론으로는 안 되었습니다. 독일로 돌아가 당원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 즉 프로핀테른의 솔로몬 로조프스키(Solomon Lozovsky)가 수정안을 들고 나왔습니다.
문건의 제목은 이러했습니다.
〈생활노동전선 장악을 위한 행동계획(План действий по овладению бытовым трудовым фронтом)〉
레멜레의 계획이 국가권력의 시간표였다면, 로조프스키의 계획은 노동계급 생활세계의 점령도였습니다. 그것은 봉기 명령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평화로운 문건도 아니었습니다.
수정안의 핵심 문장은 짧고 강했습니다.
의회가 아닌, 공장을 장악하라. 무산자 노동계급의 생활조직을 사회파시스트들의 기만적 기구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여, 부르주아 중심 질서와 그에 복무하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방위조직, 실업자위원회, 문화단체의 관료들이 결코 혁명을 위한 계급적 일치단결을 침해할 수 없게끔 하는, 비가역적인 조치를 즉각 실시하라. 사회파시즘적 국가-기계장치에 대한 저항적 파괴를 다른 어떤 것보다 최우선시하라.
대회장은 조용해졌습니다.
레멜레의 계획보다 덜 화려했습니다. 독일을 500일 안에 사회주의화한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베를린에 붉은 깃발을 꽂는 일정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차분한 얼굴을 한 전면전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중도좌파에 대한 선전포고였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SPD와 그 주변 세계 전체에 대한 전면전이었습니다. SPD 지도부만이 아니라, ADGB의 노동조합 관료, 협동조합 임원, 노동자체육회 간부, 노동자합창단 지도자, 실업자 지원조직의 사민주의 활동가, 국기단의 지역 책임자까지 모두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로조프스키의 문건은 노동계급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회민주주의 기구를 “부르주아 질서의 노동관리기관”으로 다시 명명했습니다.
단어 하나가 바뀌면 적이 늘어났습니다.
제2차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당장 일으키자는 것은 막았습니다. 그 점에서 모스크바 지도부는 안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였다면 이런 급진노선이 통과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계선에서는 달랐습니다. KPD의 109석이 모든 사람의 판단을 조금씩 밀어붙였습니다. 독일에서 성공했으니, 더 밀어도 된다는 생각이 회의실 곳곳에 깔렸습니다. 문건을 읽는 이들은 자기들이 조심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폭동을 막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승인한 것은 폭동보다 더 넓은 형태의 파괴였습니다.
현장에서 이 행동계획은 분명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코민테른은 대전쟁 직후부터 1920년대 초까지 활발했던 공장점거 운동을 다시 승인했습니다. 도산 위기에 몰린 공장, 임금체불이 발생한 사업장, 자본가가 폐쇄를 선언한 작업장에서 노동자위원회가 생산과 회계를 장악하는 것을 혁명적 자기방위로 인정했습니다.
SPD와 국기단을 때리기 위해서라면, 슈트라서의 흑색전선, 심지어 일부 좌파적 돌격대와 비공식적으로 공조하는 것도 묵인하겠다는 암시가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도 공식 문서에 “갈색 셔츠와 악수하라”고 쓰지는 않았습니다. 코민테른은 그렇게 무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회파시즘적 방위기구에 맞선 현장 차원의 반관료적 대중행동” 같은 문구가 들어갔습니다. 번역하면, 상황을 봐서 모른 척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1920년 합법주의를 극렬히 반대하며 떨어져나간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 일부의 KPD 복당도 사실상 승인되었습니다. 어제까지 좌익모험주의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오늘은 혁명적 노동자민주주의의 생생한 전통이 되었습니다. 코민테른의 언어에는 이런 재활용 능력이 있었습니다.
문건은 “국가 안의 노동자국가”를 세우라고 부추겼습니다. 공장에는 노동자통제위원회, 동네에는 실업자위원회, 노조에는 적색반대파, 거리에는 노동자 자기방위대, 문화단체에는 사회민주주의 관료에 맞선 혁명적 소조. 국가권력은 아직 장악하지 않는다. 대신 국가가 닿는 모든 곳에 다른 국가의 싹을 심는다.
독일 대표단은 결의에 찬 얼굴로 베를린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받아온 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날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비슷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대표단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공산당(PCF)의 신임 총서기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éz)와 노동위원장 가스통 몽무소(Gaston Monmousseau)는 이 독일식 행동계획을 프랑스 상황에 맞게 번역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곧 ‘삼총사(Les Trois Mousquetaires)’라 불리게 될 인물들을 중용했습니다. 자크 도리오(Jacques Doriot), 앙리 바르베(Henri Barbé), 피에르 셀로르(Pierre Célor). 세 사람 모두 기껏해야 20대 후반, 30대 초반이었습니다. 젊다는 것은 늘 장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의 공산당에서는 아주 그럴듯한 결격사유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앞글자를 따 “BCD 노선”을 내세우며 프랑스 정치권을 뒤흔들기 시작했습니다. 도리오는 파리 교외와 생드니의 거리에서, 바르베는 청년조직과 선전기구에서, 셀로르는 조직장부와 지방세포에서 움직였습니다. 토레즈는 얼굴이었고, 몽무소는 척추였으며, 도리오는 목소리였고, 바르베는 주먹이었고, 셀로르는 장부였습니다.
프랑스 이야기는 나중에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 공화국에는 독일 못지않게 긴 회의와 짧은 주먹이 많았으니까요.
문제는 독일이었습니다.
1930년 가을부터 거의 즉시, 행동계획은 종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기업이나 공장이 어음 만기를 버티지 못하고 도산하면 노동자들이 그대로 작업장을 장악했습니다. 경영진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노동자위원회가 출입문을 통제하고, 회계장부 공개를 요구하고, 생산중단을 “자본가의 사보타주”라고 규정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실제로 생산을 이어가려 했고, 어떤 곳에서는 그저 공장 문을 걸어잠그고 붉은 천을 내걸었습니다. 둘 사이의 차이는 신문보다 현장 회계장부가 더 잘 알았습니다.
자본가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제적으로 공장을 닫아버리고 노동자들의 월급을 끊었습니다. 생산을 인질로 정부를 협박하는 “자본 파업(capital strike)”이 시작되었습니다. 공산당은 이것을 자본가 계급의 계급전쟁이라고 불렀고, 자본가들은 사유재산 방어라고 불렀습니다. 노동자들은 월급날을 보았습니다. 월급날은 양쪽의 이론보다 훨씬 잔인했습니다.
독일의 거리와 공장은 순식간에 1919년으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공장문 앞에는 노동자위원회가 섰고, 길모퉁이에는 RFB와 국기단이 서로를 노려보았으며, 경찰은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덜 맞을지 계산했습니다. 도산한 기업의 사무실에서는 경리직원이 금고 열쇠를 들고 울먹였고, 현장 노동자들은 그 금고 안에 자기 임금이 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믿음은 때때로 회계보다 빨랐습니다.
가장 기민하게 반응한 것은 육중한 SPD도 아니었습니다. SPD는 회의가 필요했습니다. 성명도 필요했습니다. 책임소재 검토도 필요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문명국가의 정당한 절차였지만, 공장문은 그 사이에 이미 잠겨 있었습니다.
양로원 조직 같은 DNVP와 철모단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분노할 줄은 알았지만, 늙은 분노에는 기동력이 부족했습니다. 나치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자기들 내부의 슈테네스파와 슈트라서파 문제를 제대로 묶지 못했습니다. 중앙당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벌벌 떠는 사제와 재무관료들의 모임은 독일이 회계장부와 고해성사 사이에서 구원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했지만, 공장점거에는 둘 다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늦는 동안, 몇몇 사람들은 움직였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독일민주당(DDP)의 라이히슈타크 의원이자 방송영화계의 스타이자 연예인, 도리나 이다 리하르츠슐러(Dorina Idda Richartz-Schuller)였습니다.
젊은 시절 그녀는 “디디(Didi)”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했습니다. 잡지 표지와 영화관 로비 카드, 엽서와 광고지 속에서 도리나는 웃고 있었습니다. 카메라가 그녀를 사랑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뒤 전쟁이 왔고, 검열이 왔고, 망명이 왔고, 공화국이 왔고, 정치가 왔습니다. 1930년의 도리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상주의는 오래전에 전쟁터의 필름과 함께 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여전히 카메라를 어디에 세워야 하는지 아는 감각이 남아 있었습니다.
정치인들은 위기를 강령으로 보았습니다. 도리나는 장면으로 보았습니다.
공산당이 공장문을 닫고 붉은 깃발을 걸면, 그것은 장면이었습니다. 자본가가 선제 폐쇄를 선언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끊으면, 그것도 장면이었습니다. SA가 몰려오면 사람들이 창문을 닫는 것, RFB가 행진하면 상점주가 간판을 안으로 들이는 것, SPD 국기단이 도착하면 거리 전체가 피곤한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 모두 장면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장면들 속에서 아직 비어 있는 자리를 보았습니다. 누군가는 깨진 유리창을 치워야 했습니다. 누군가는 정치 때문에 망가진 생활을 다시 생활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도리나는 자유주의자들이 국민에게 설명할 말이 너무 많고, 보여줄 장면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도리나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세간에서는 내연관계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돌았습니다. 그런 소문은 대개 정치적으로 쓸모없었지만, 신문 판매에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국군(Reichswehr)의 정장 입은 “정치군인”, 막시밀리안 폰 프렌츨라우(Maximilian von Prenzlau) 대령이었습니다.
프렌츨라우는 군복보다 정장을 더 자주 입는 장교였습니다. 그 점만으로도 독일에서는 충분히 수상해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군부의 언어와 의회의 언어를 모두 알아들었고, 둘 다 완전히 믿지는 않았습니다. 거리의 폭력을 혐오했지만, 폭력의 정치적 효과는 과소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공산당의 공장점거를 보며 그는 단순한 치안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에 다른 명령체계가 생기는 문제라고 판단했습니다.
도리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프렌츨라우는 구조를 보았습니다.
둘 다 같은 결론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나치가 실패한 반공의 자리를 누군가가 차지할 것입니다. SPD는 너무 피곤했고, DNVP는 너무 낡았고, 중앙당은 너무 겁을 먹었고, 군은 너무 노골적으로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자유주의자들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낡은 이름을 버리고 거리와 생활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느냐였습니다.
그리고 그 언어는 사설문이 아니었습니다.
빗자루와 카메라였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도리나 리하르츠슐러(Dorina Richartz-Schuller), 일명 “디디(Didi)”
막시밀리안 폰 프렌츨라우(Maximilian von Prenzlau) 대령
도리나와 막시밀리안, 1930년
독일 연극계의 스타, 초창기 영화의 선구자 디디. 모두가 사랑하던 그녀는 지금 어떻게 되었나? (1911년 사진)
1916년 2월, 베르됭 전투. 제8브란덴부르크 보병연대 제64번, II대대 임시지휘관 프렌츨라우 대위. 참호의 기억은 그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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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으악 세상에..
도리나 시트를 다시 보니 배우 설정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최대한 미형으로 뽑아봤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이미지 이젠 너무 잘나와서 좀 무섭네요ㅋㅋ
@렌지파일 “1920년대 후반 독일에서 찍은 흑백사진 풍으로 생성해줘”라고 하니까 귀신같이 알아듣네요..
쿠노는 나치 상대로 분탕 치는거에 제대로 맛을 들인거 같네요ㅋㅋㅋㅋㅋ
기본적으로 보수혁명주의자라서 돌격대한테 잡아먹힌 나치는 사회주의자들보다 더 혐오합니다(?)
@E.E.샤츠슈나이더 설마 나치도 혐오하고 사회주의도 혐오해서 뭔가 하려고 하는 자유주의자들이랑 동맹 맺는건 아니겠죠(?)
@로콘 ”독일 특색 자유주의“ (…)
흠.... 나치즘도, 슈트라서주의도 실패했고 공산당은 파벌싸움의 떡밥이 나왔군요 사민당 공격하다가 찐 사화파쇼가 나올 떡밥이 있네요(?)
+아닛.... 자크 드리오라니! 설마 제 3의 위치 비스무리한게 나오나요?
”1871년의 파리 코뮌은 1789년부터 이어진 프랑스 국민혁명(revolution nationale)의 두 번째 전기이다. 우리는 국민공산주의의 명령으로 노동자와 생산자가 서로를 증오할 필요가 없는 국가를 직조해낼 것이다.“
이런 느낌..?
@E.E.샤츠슈나이더 크억! 진짜 제 3의 위치인 동시에 프랑스 파시즘이네요.... kpd가 비판하던 그 사회파쇼의 가장 무서운 부류 아닌가요(....)
빗자루라니까 빗자루를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았던 브라질 전 대통령 자니우 쿠아드루스가 생각나는군요.
이 글에 아주 잘 맞는 영상을 소개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3wTKU7Pxo4
PLAY
대충 저 세계선의 독일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