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만 일당을 올려 봐, 다른 집에서 상거래 질서를 해친다고 난리지. 우리도 까짓 일당 만 원씩 올려 주고 싶어. 허지만 도배 일당이야 우리가 주는 게 아니고 손님들이 내는 것인데 그렇게 일당이 세지면 다른 물가는 안 올라가겠어? 국민경제를 생각해 봐도 그렇고, 달라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올리라는 소리가 안 나올 텐데...... 좌우지간 그 일은 따로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 일 말야, 사정이 급하니까 오늘은 오만 원 쳐줄께."
일당 만 원을 더 받게 되어서가 아니었다. 그 정도면 박사장 내외가 어지간히 애간장이 탔을 것이고, 특별한 경우라고 전제했지만 일단 오만 원으로 일당이 계산된다면 그대로 일당이 인상될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원수지고 살 사이도 아니고, 어쩌면 박사장 내외의 장사수완으로 꾸준히 일감을 얻는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 정도에서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서는 것이 나주에 덜 쑥스러울 듯싶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어제 하루 겪어 본 찜통 같은 방 안에서 뒹굴기보다야 널찍한 아파트에 가서 일하는 편이 훨씬 수월할 듯싶어서 더 이상 버티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렇다고 금방 안색을 바꿀 수는 없다. 상호는 짐짓 찜찜한 표정으로 한마디 더 던졌다.
"아줌마도 안 붙여 줍니까? 혼자 풀칠까지 하란 말씀은 아니겠죠."
"아이구, 그럼. 아마 지금쯤 신림동 아줌마가 거기 가 있을 거야. 이사가는 사람한테서 열쇠 받아서 대충 치워 놓고 있으라고 했어."
신림동 아줌마라면 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되는 햇내기였다.
"왜 하필 그 아줌마예요. 날씨도 더운데 일손 빠른 사람을 붙여 줄 일이지....."
"아유, 한가한 소리 하시네. 내가 오죽하면 이 꼭대기까지 찾아왔을까. 모두 풀이야. 우리집 달력 못 봤어? 시월까지 새까맣게 차 있잖아. 그 아줌마라도 붙여 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아침 안 먹어도 되겠어? 밥 맛 없을 텐데 나가서 해장국을 먹는게 낫지 않겠어? 아침 사주고 내가 차로 데려다 줄께."
아무래도 문 앞에 데려다 놓아야 마음을 놓을 모양이었다. 감기라면 몰라도 배탈에 해장국 먹어 봤댔자 화장실 들락거리느라 다리만 후들거릴 게 뻔했지만, 어차피 아침을 걸러야 하는 판에 조금 이르긴 해도 에어컨 틀어 놓은 박사장 자가용에 실려 가는 편이 훨씬 낫지. 상호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침은 생각 없고, 날 더워지기 전에 일찍 시작하는 게 아무래도 덜 고생일 테니 지금 나가지요, 뭘."
"아유, 그래. 지씨는 시원시원해서 좋다니까. 그럼 얼른 내려와, 요 밑에 차 세워 놓았는데 나 먼저 가 있을게."
아무래도 신림동 아줌마가 마음에 걸렸지만 내일은 주씨가 나올테니 하는 데까지만 해보자는 쪽으로 선선히 마음을 돌렸다.
중복이 며칠 안 남았으니 푹푹 찌는 날씨야 당연했다. 채 옮겨 가지 못한 짐들을 문간방에 모아 놓고 문이란 문은 있는 대로 다 열어 놓았는데도 들어오는 바람은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슬레이트 지붕에서 쏟아지는 후끈후끈한 열기를, 담벼락에 등을 바싹 들이댄 벽의 손바닥만한 창문 하나와 부엌으로 통하는 방문에 어쩌다 고개를 들이대는 바람으로 견디는 집보다 훨씬 나은 편이다. 여름이니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고, 그런 더위에 일을 하면서 시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정상적인 인간으로서는 무리라고 상호는 애써 비를 맞듯이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무시해 버렸다. 텅 빈 뱃속이 좀 허출하기는 했지만 상호는 아파트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거실 문턱에 걸터앉아 담배 한 대를 물었다. 모두 지겨운 더위를 피해 달아났는지, 아니면 에어컨 바람이 새어나갈까 봐 꼭꼭 잠그고 들어앉아 있는지 사방이 조용했다. 거실 벽을 마저 뜯어내고 나면 오전의 일은 끝날 것이고, 냉방장치가 되어 있는 상가로 들어가 점심 한 끼 때우고 나면 그럭저럭 두시는 될 것이다. 다섯시까지는 큰방 하나 정도야 끝나게 되겠지, 그 정도면 그리 손해보는 하루는 아니다. 공연히 오락가락하면서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여자의 실내화 소리만 아니라면 기분 나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쩌자고 저 여자는 어울리지도 않는 빨간 실래화를 끌고 돌아다니는 것인지. 게다가 배실배실 웃는 꼴이라니.....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일손이 빠른 편이었다. 여자는 타고난 천성이 부지런한 모양이었다. 잠시도 틈을 내지 않고 벽지를 뜯어내면서도 조금만 바닥이 지저분해지면 재빨리 쓸어내곤 했다.
"좀 쉬었다 합시다."
그래도 여자는 들은 척도 안 한다. 어쩌면 안 들리는 건지도 모른다. 하기는 스스로 알아서 눈치껏 피워야지, 남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은 들은 다음에야 요령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상호는 곱지 않은 눈길로 여자를 좇았다. 그런데 여자의 걸음걸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종이 쓰레기를 안고 왔다갔다하는데도 꽤 맵시를 부리는 것 같았다. 이 더운 여름날에 찢어 낸 도배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남의 집에서, 어디서 주워 신었는지는 모르지만 한겨울에나 신는 털이 부얼부얼한 실내화를 끌고 저렇듯 진지하게 맵시를 내가며 걸어다닐 사람이라면 최씨의 말대로 맹초 더하기 쑥, 맹쑥일 수밖에 없다. 상호는 제법 반반한 편인 그녀의 얼굴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 신림동 아줌마 말야, 골때린다. 일 나와서 처음 얼마 동안은 종일 올려다봐서 모가지가 말을 안 들을까 봐 집에 가서는 죽어라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더니 그 잘난 서방이 돈벌러 다닌다고 서방 무시하냐고 두들겨패더라면서 틈만 나면 고개를 처박고 다니는 거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최씨 아저씨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니까 오해 마세요 하면서 실실 웃는다. 그건 그래도 애교로 봐준다. 한번은 말야, 오십 칠 평 아파트에 일 나갔는데 안방 목욕탕에 들어가더니 안 나오는 거야. 그래서 가보았더니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그러면서 날더러 비데를 가리키며 이게 뭐예요 하고 묻는 거야. 내 참, 그걸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어. 그래서 장난 좀 치느라고 뒤보고 나서 힘들면 물 받아 먹나 보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지. 그랬더니, 아, 글쎄 그 맹쑥이 곧이듣고 찍 뿜어 나오는 물을 낼름 받아먹는 거야. 야, 아무리 없이 살아도 그렇지, 변기 안에서 물이 나오면 대충 그 부분 어딘가에 필요한가 보다고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냐. 밑씻는 물이라고 제대로 아르켜 주었더니 하는 말 좀 봐라. 잘사는 사람들은 머리도 좋은가 봐요...... 허긴 머리를 잘 굴렸으니까 잘사는 거지만 이건 나사가 한 서너 개쯤 풀린 게 틀림없어.
비데의 물을 받아먹은 이야기를 최씨의 흰소리라 친다 해도 맹쑥 이라는 별명이 신림동 아줌마에게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생전 실없는 농담 한 번 내비치는 적이 없는 입 무거운 주씨마저도 그녀의 별명에 걸맞은 일화를 고백했으니까.
- 착해 빠져서 그런 건지,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그러는 건지...... 저번에 같이 일 나간 집 말야, 냉장고에 덕지덕지 테이프를 붙여 놓고 나가서 찬물 한 컵 마실 수가 없더라구. 우리가 뭐 도둑질하러 들어간 사람도 아닌데 냉장고 안에 뭐 그리 값나가는 게 있다고.... 그런데 그 아줌마가 어떤 방 붙박이장을 열더니 어머나 하더만. 그래서 보니까 이불이며 옷들을 널어 놓은 그 안에 마늘 꾸러미를 한쪽에 매달아 놓았더만. 마늘 한 접 도둑맞는 것보다 거기 걸어 놓은 비싼 옷 마늘 냄새 뺄려면 드라이 값이 더 나가겠더구만, 글쎄 도배하러 온 사람들이 마늘 못 먹어 걸신들린 줄 알았나, 그 안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은 거야. 화도 안 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드만. 그런데 그 아줌마가 왜 놀랐는고 하니 얼마나 알뜰하게 살림을 하는 사람이면 이렇게 잘사는 집에서 이런 것을 하찮이 안 여기고 소중하게 간수하느냐는 거야. 그래서 복받아 잘사는 모양이라나. 내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