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아동들과,수녀님들과의 만남은, 알로이시오 신부님과의 만남이었다.
오래 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자원봉사활동을 가게 되었는데 그 곳이 바로 서울 소년의 집이었다.
그 후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1998년-1999년 한국에 교환교수로 오게 되었는데, 고등학교 때 자원봉사활동을 했던 친구들과 만나 또다시 찾게 된 곳이 서울 소년의 집이었다.
난 1년간의 교수생활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2005년 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영구 귀국 후,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나는 다시 전에 봉사활동을 다녀 익숙한 소년의 집을 또 찾게 되었다.
자원봉사 영역이 일반 봉사와 전문봉사가 있는데, 나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영역이 상담이라 전문봉사 영역을 선택하였다.
이 후 서울과 부산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아동 상담을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남편도 아동들의 상담에 참여하게 되면서, 마리아수녀회와 더 많은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지금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들과 또 내가 알고 있는 좋은 외부 자원들을 마리아수녀회에 연계하여, 아동들의 정서, 심리적인 측면에 직접 간접으로 도움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아동들이 더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니며 활동하고 있다.
그 동안 내가 경험한 최상의 경험은 역시 아동들과의 만남이었다.
한번은 말을 전혀 하지 않는 2학년 아동을 상담하게 되었다.
상담초기에는 나에게도 전혀 말을 하지 않았으며 너무 어려웠다.
나는 그 아동을 우리 집에 초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을 시도하던 중,
그 아이와 줄넘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아이 앞에서 줄넘기를 하다가 그만 넘어졌다.
그 아이는 그것이 그렇게 신기했는지,“ 선생님, 선생님도 줄넘기하다가 넘어졌어요.”
하며 비로소 말문이 열렸다.
이후 계속적인 접촉으로 말문이 열렸으며, 지금은 학교에 다니며 잘 지내고 있다.
다른 아동의 경우, 주위에서 하는 이야기가, 초등학교 3학년이 너무 잔인하다는 것이다. 곤충들을 잡아서 죽이기도 하고, 또래아동과는 달리 벌레를 잡아 죽인다는 것이다.
상담을 하던 중, 나는 그 아동이 곤충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나는 곤충에 관련한 책이나 관심을 가질만한 곤충모형도 보여주면서, 곤충전시회도 같이 가기도 하였다.
지금은 고등학생으로 운동도하고 열심히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예가 있지만...
별 문제 없이 잘 사는 아이들도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특별히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 아동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내 눈에는 그런 아동들이 너무너무 예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문제 있다고 생각한 아동들이 정서적 안정을 통해, 그리고 나의 작은 도움과 관심으로 올바로 성장할 수 있을 때, 매우 보람 있고 마음속 큰 기쁨을 느꼈다.
나는 어렸을 때 막연하게나마 고아원이나 양로원 같은데서, 어렵고 소외된 이웃들과 삶을 함께 나누는 나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는데, 내게 그러한 선과, 이웃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또 나와 큰 인연의 만남은 마리아회 수녀님들이다.
40년 전 수녀님들의 사진을 보면, 그 옆에는 항상 아동들이 있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수녀님들 곁에는 아동들이 있다.
일반 가정이라면 부모가 나이가 들면서 자식들도 나이가 들지만, 수녀님들은 항상 그 또래의 아동들과 함께하는 수녀님들의 모습 자체가, 내게는 최상의 양육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내가 아동들을 상담하자면 시간이 일정치가 않았다.
한번은 아동과의 상담이 늦은 밤까지 진행되었는데, 수녀님은 상담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동과 함께 가는 모습을 보았다.
또 내가 아는 수녀님은 연세가 많은 편인데, 소년의 집의 여러 행사와 축구부나 합주부의 여러 행사가 있으면, 빠짐없이 참례하시고 격려해 주셨다.
졸업생들의 경조사와 대학생들의 졸업식에도 참여하시면서, 진짜부모이상으로의 역할을 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또 2007년 마리아수녀회 남미지역의 여러 아동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함께 동행 했던 김 수녀님께 들은 이야기다.
수녀회의 초창기 때 이야기로,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고 했다.
어느 날 길거리에 방치된 부랑인들의 시신을 보고, 그 시신을 수습해서 수녀님들과 함께 있는 행려 구호소로 모셔왔다고 했다. 그때 영안실에는 비가 와서 미처 장례지내지 못했던 시신이 5구나 있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경찰소에서는 거리에서 죽은 사람이나 곧 임종할 사람들을 자꾸만 모셔왔다고 했다.
시신을 더 이상 모실 곳이 없어서, 수녀님의 옆방, 문주 방을 넘으면 시신이 있는 곳에서 잠을 잤는데, 밤중에 화장실에 가려고 문을 열면, 시신 위를 넘어야 화장실에 갈수 있기 때문에 비는 쏟아지고, 시신에 걸려 넘어지기도하고 그때는 좀 무서웠었다는 수녀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수녀님들의 나이는 20대인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내가 성인성녀들과 함께 살고 있구나.’ 라는 강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이제 생각해보니 수녀님들의 영웅적인 이 모든 활동은, 하느님과, 또 창설자 알로이시오 몬시뇰의 타는 듯한 열정과, 창설정신이 수녀님들 각자 영혼 깊숙이 침투되어 있었기 때문임을 이제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와, 아동들과, 수녀님들과의 만남은, 바로 그런 창설자와의 만남이고 인연임을 새삼 의식 하게 된다.
지금도 때때로 아동들과 관련해서, 수녀님들이 나의 의견을 물어 오시면 나는 송구스럽다.
한 평생을 아동들과 함께 살아온 수녀님들께, 내가 답을 한다는 것이 송구스럽지만 그래도 수녀님들께 나의 작은 보탬이라도 줄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너무 기쁘다.
첫댓글 우리 수녀 회와 최 성애 박사님과의 만남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생각합니다.
첫 번째 봉사... 두 번째의 봉사 활동, 세 번째의 봉사활동을 통하여 이제는 가족이 되어
특별한 인연으로 수녀님들과 아이들에게 참으로 큰 힘이 되어 주고 계시는 최 박사님을
우리가족들에게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천천히 글을 다 잃고나니, 두 눈에서 눈물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