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배는 오지 않았다. 여객 터미널 밖에는 종일 내린 눈이 쌓여 있고, 푸른 파도 휘몰아치는 흐릿한 백설표 유리창의 틈새로 어시장이 줄지어 서 있었다. 멍게와 해삼은 왔다갔다 티격태격 시샘하고, 우럭과 광어는 깜박깜박 졸다깨다 눈돌리고, 찬바람 들이킨 놀래미는 뒤집어져 드러 누었다. 누이들과 그리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나는 시장의 귀퉁이에 있는 평상에 앉아 시샘하는 해삼과 멍게를 주문했다. 바닷물 끌어들인 연이은 고무다라 수면에는 등푸른 고등어가 푸른 바다의 전설을 노래하고 있었다. 산다는 것이 때론 작은 연못 속 연잎 위의 꼼지락거리는 청개구리의 몸짓처럼, 한 봉지에 담긴 멸치에 섞인 꼴뚜기처럼 도시의 골목길을 서성이는 낯선 이방인이 된 듯 느껴지기도 했다. 마른 기침소리 내며,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매운탕에 소줏잔 기울이는 어부들의 평상 너머로 싸목싸목 함박눈은 다시 나부끼고... 고무다라 속 등푸른 고등어는 그리웠던 순간을 생각하며 푸른 바다의 전설을 목놓아 노래하고 있었다.
3. 한생애 사무치는 일이 있었냐고 묻길래 2
떡갈나무 잎사귀 달린 풋도토리 물고 가는 아가다람쥐에게 양은냄비 가득 담은 어머니의 마음을 찾아 나선 산고양이에게 전봇대 전선에 줄지어 앉아 재잘대다 사철나무 한 그루에 쏙쏙 숨어드는 참새떼가족에게 유채꽃 노란 물결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돌담과 담쟁이풀에게 푸른 바다 속 암석에 찰싹 엎드려 숨 죽이고 있는 전복과 해삼에게 그리고 힘껏 물질하다 숨 고르는 해녀 할머니에게 거북바위와 범바위 바라보며 푸른 바다의 전설을 들려주는 느린 해안의 오솔길과 빨간 우체통에게 파릇파릇 봄배추 수확하는 아낙네의 고운 머릿결 매만지는 솔 숲 바람에게 동백나무 그늘 아래 반야심경 낭송하는 백상선원의 누이스님에게 산봉우리 큰 바위 얼굴로 생겨나 기나긴 세월 깎여내려와 이젠 파도와 더불어 반짝이는 해변의 크고 작은 조약돌에게
한 생애 사무치는 일이 있었냐고 별님과 달님이 어깨동무하고 묻길래 빙그레 웃음 지어요
4. 아카시아 흰 꽃 바라보며
아카시아 흰 꽃 바라보며 비오는 돌다리 연못 노란 우산 들고 걸으니 내 몸에 향긋한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머리엔 능소화 수줍게 살짝 웃고 발등엔 감자꽃 방긋 피어 나더니 마른 가슴에 흰 아카시아 청춘이 뚜욱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카시아 꽃잎에 왠 가시냐고 하지만 오늘은 이처럼 가시 많은 나무에 향기 머금은 흰꽃이 피었다고 하염없이 본다
돌다리 연못 돌아 시골성당으로 향하던 나는, 청춘의 시린 가슴에 새겨진 가시를 뽑으려다 슬며시 그만 두었다
5. 어머니와 산고양이
소년의 어머니는 전남 남해안 청산도 백련암에 계시면서 텃밭을 일구고 새벽 예불을 하시고 저녁포행을 일삼아 하셨다. 탑골 마을에 장녀로 태어나 돈지마을 언양김씨 장남에 시집와서 토끼도 기르고 병아리도 부화하는 총명한 살림꾼이었다. 6.25전쟁전 시집와서 3남 2녀의 대가족을 알뜰살뜰 키우시고 현명한 아내로, 자애로운 어머니로, 억척스런 생활력으로 누구보다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고 살아 오셨다. 돈지부락 산 너머 사는 탑동댁으로 불리셨고, 서울에 이사를 오셔서는 장갑을 짜고, 공덕동 가죽옷 공장에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는 부지런하고 솜씨좋은 재봉틀 재단사셨다. 소년의 어머니는 봄, 가을 청산도 백련암에 아버지와 스님누이와 기거하시면서 텃밭을 일구고, 새벽 예불을 하시고 저녁포행을 일삼아 하셨다.
상추, 고추, 고구마, 배추와 무우 그리고 산울타리를 따라 아버지와 천궁, 작약, 더덕등도 심으셨다.
소년의 어머니는 아름답게 심성을 가꾸시면서 청산도 탑동보살로 성불하셨다.
6. 아버지의 서울구경
소년의 아버지는 아침밥을 챙겨 드시고 무료 지하철을 타고 서울구경을 다니셨다. 한창때, 봄에는 고향집에 기차로 내려가 모내기 일을 머물며 하셨고, 농한기에는 서울로 올라와 건어물 장사를 하셨다. 6.25 전시에 통신병으로 강원도 구석구석을 다니셨고, 민족종교인 증산교에 심취해 총각시절 호남 일원을 짚신신고 빗자루 들고 다니셨다. 일정 때, 할아버지가 무명을 온 몸에 두르고 겨울철 정읍에서 함경도 일원으로 광목을 팔러 다니셨듯이. . . 한때는 숙부의 주선으로 한국전력에 근무하면서 전쟁전 서울에 머물렀던 적도 있으셨다. 소년의 아버지는 아침밥을 챙겨 드시고 무료 지하철을 타고 서울구경을 다니셨다.
동대문 운동장 고물상가 종묘 탑골공원 청계천변 철물상가
점심은 탑골공원에서 무료로 드셨고 노인분들과 어울려 장기를 두시고 봄볕을 즐기셨다.
소년의 아버지는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면서 서울구경을 다니셨다.
7. 이천호국원 가는 길
햇볕 따사로이 반겨주는 이천호국원에 아버지, 어머니의 묘소가 있습니다.
살구꽃 아내와 감꽃 아이들과 충북 오송에 사는 나도 아버지, 어머니와 정답게 살던 기억을 떠올리며 두 분을 만나려 갑니다.
탑이 있는 동네에서 시집 온 어머니는 탑동댁으로 불리셨고요. 병아리와 토끼와 뽕나무 누에고치를 제법 잘 길러 지혜롭다는 동네어른들의 평판이 있었고요.
경순왕 일곱째 아들이 시조인 언양김씨 31대인 아버지는 선비의 고장 출신답게 올곧게 3.15 부정선거에 맞섰고, 정읍지역의 동학사상과 민족종교인 증산교에 심취했고 6.25전쟁 때 군대복무를 2회나 했던 특별한 경험도 있으셨지요.
저희 3남 2녀 자식걱정은 그만 하시고, 두 분 손 꼭 잡고 돈지부락 고향길과 청산 유채꽃밭도 함께 거니세요
사랑합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8. 황토재 길
산나물 담은 소쿠리 이고 말목 5일장을 싸목싸목 다녀오는 허리굽은 할머니의 친근한 길
배들벌판 황소 앞세우고 쟁기질하러 가는 지게 맨 할아버지의 묵묵한 길
만석보 돌아 사발통문 들고 무명 저고리 휘날리며 녹두밭 질러 가는 농민의 비장한 길
슬레트 지붕 갈고 새마을 녹색 깃발 나부끼는 잘 살아 보세 아버지의 보릿고개 길
이제 나는 살구꽃 아내와 감꽃 아들과 손잡고 봄비 내리는 그 질펀한 황토재 길을 걸어요
9. 백양로 길
백양로 길은 나의 앞에 놓여 있어요 강물을 거스르는 등푸른 연어의 힘찬 날개짓처럼 풋도토리 입에 문 아가 다람쥐의 상냥한 눈동자처럼
백양로 길은 나의 앞에 놓여 있어요 별 헤는 밤 풀벌레의 노래처럼 어두운 광 모닥불 기다리는 고구마의 싹눈처럼
나는 알아요 이 새로운 길의 역사를 여기서 나는 그대와 어깨동무하고 질펀한 우리의 봄길을 뚜벅뚜벅 걸어 갈테야요
첫댓글 고향 냄새 묻어나는 시와 정겨운 사진들 잘 봤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고향 정읍의 시골마을과 전남 청산에서 지낸
시간을 떠올리며 그리운 분들 만나보았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여기서 동키짱님 글을 감상합니다 멋지셔요 잠시 청산도에 추억을 떠 올려 봅니다
하하 반가운 다래향님의 고우신 발걸음에 포근합니다.
한실문예창작과 포시런문학회의 기둥으로,
사랑스런 남편과 성숙한 두 자녀의 첫 시집의 축하 글처럼,
산사의 그윽한 풍경소리와 사계절의 맑은 정취를 담은 사찰시를 읊듯,
늘 건강하시고 가족분들과 행복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우아 멋지신 동키짱님
글 속에 빠져있다가 갑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탄생 하는듯 합니다
늘 포용의 넓은 마음과
상큼한 첫사랑의 깊은 감성이 기쁘고 고마왔습니다
포시런의 문우님들이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기회되면 함 낭만 교수님과 뵙도록 하겠습니다
고우신 걸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