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해룡고(高)의 '개혁 보고서'
학생이 보충수업 골라 듣고 수준따라 학년을 섞어 공부
전교생 690명인 시골학교 5년간 서울대에 19명 합격
전남 영광군 영광읍에 있는 해룡고교는 전교생이 690여명인 시골학교다. 한때 이 학교는 학생 수가 줄어 고민했지만, 최근 3년 동안 전국 57개 학교에서 500여명이 넘는 교사, 학부모들이 한 수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학교로 변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지난 5년간 해룡고가 서울대에 보낸 학생은 19명. 어려운 여건에선 빼어난 성적이지만 유명세를 떨칠 성적은 아닌 것 같다.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학생 중심, 학생 만족'을 내세운 시골학교의 혁신 때문이었다.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교사들이 학교 혁신의 주역을 맡도록 하는 것이 그 핵심 개념이다.
이 학교 학생들은 거의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 보충수업은 학생이 골라 듣고 수준에 맞게 학년을 섞어 공부하며 야간 학습도 4가지 메뉴를 놓고 학생들이 선택해 배우는 학교다. 최근 9년간 이 학교 개혁을 지휘한 박혁수 교장(53)이 말하는 해룡고 교육 개혁의 보고서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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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룡고 영어 랩(lab)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있는 박혁수 교장. 그는 “학교가 사교육을 이기려면 교사들의 노력 못지않게 장기적 안목으로 기다려주는 학부모 등 교육주체 간의 신뢰가 생겨야 한다”고 말했다./영광=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1단계: 교사 마인드를 바꾸라
지난 2001년 3월 해룡고에 기업체에나 있을 법한 기획홍보부가 생겼다. 부장은 박혁수 당시 교사. 목표는 학교의 중장기 발전계획 수립이었다. 우수학생 모집부터 나섰다. 첫해 완도·진도 등에서 5명의 학생을 스카우트했다. 박 교장은 "진학 실적이 엉망이니 잘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데려왔다"며 "어음 끊고 데려온 셈"이라고 말했다.
더 이상 '어음 끊기'를 하지 않으려면 본격 혁신이 필요했다. 먼저 교사들의 마인드 변화. 신문에 나오는 좋다는 학교는 모두 찾아다녔다. 경남 거창고에서는 다양성 교육을, 논산 대건고에서 인성교육을, 공주 한일고에서 기숙사 운영을, 전북 상산고에서는 방과 후 교육 등의 노하우를 배웠다. 이걸로는 부족했다. 잘 가르친다고 소문난 교사들을 모셔와 특강을 이어갔다.
◆2단계: 교사 스스로 문제를 파악하고 고치게 하라
2004년 교사 조직을 변화시켰다. 교무부장, 연구부장, 학년부장 중심에서 국어부장, 영어부장, 수학부장 중심으로 바꾸었다. 교과별로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 모의고사 성적을 분석하고 더 나은 수업 방식을 토론해 보고서를 제출하게 했다. 교사들이 달라졌다. 주어진 수업 채우기에 급급하던 수학 교사들은 "수업 시간을 더 배정해달라"고 요구했다. 본인들이 문제점을 찾아 해결책까지 고민하니 정답이 나온 것이다.
일부 과목은 교과팀끼리 1박2일 워크숍도 가고, 어떤 과목은 자체 교재 개발에도 나섰다. 박 교장은 "학생 중심 사고를 시작하니 교사들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3단계: 학생에게 선택권을 주라
이지영 교사가 가르치는 보충수업인 '옛 문학의 향기'(고전소설). 이 수업 수강생은 1학년 12명, 2학년 17명, 3학년 3명 등 32명이다. 학생들이 학교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강의 계획을 본 다음 학년 구분없이 신청했다. 3학년 박강구(18)군은 "처음엔 후배들과 함께 듣는 것이 좀 창피했지만 지금은 내 실력에 맞는 수업을 들을 수 있어 대만족"이라고 말했다.
학생 선택형 무(無)학년제 보충수업은 2005년부터 본격 시작됐다. 일부 교원단체들은 학생이 수업을 선택하면 국·영·수 아닌 일반 과목 교사들은 소외된다고 주장한다. 박 교장은 "학생들이 추가로 돈 내고 배우는 보충수업마저 교사들끼리 나눠 먹기 식으로 획일화하는 것은 소송감"이라고 일축했다.
2007년부터는 야간 학습도 4가지 메뉴를 주고 학생이 고르게 했다. ▲자율학습 ▲주요 과목의 보충수업 ▲EBS강좌 ▲인터넷 강의 등이다. 학교는 공간을 제공하고, 각각 담당 교사를 배치해 학생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4단계: 미래형 인재 교육과 과제
요즘 해룡고의 고민은 특기 교육이다. 박 교장은 "그동안은 학생들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개혁에 집중했지만 이제는 입학사정관이 요구하는, 잘하는 점을 더 잘하게 하는 교육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해룡고는 전교생의 신청을 받아 내달 초부터 동아리활동(CASS)을 시작할 계획이다. 박 교장은 "해룡고의 개혁은 지금도 진행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