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유역을 비롯한 경남 해안 지대에는 서기전 1세기 초부터 한반도 서북부의 세형동검 관련 청동기 및 철기문화와 토기문화가 유이민과 함께 들어왔다. 서기 후 2세기 중엽에는 그 중에서 성장 속도가 빠른 김해 등지를 중심으로 사회 통합이 진전되어 김해 가야국 등 단위 소국이 출현하였다. 수로왕(首露王) 신화는 김해 지방 소국의 성립을 표방하는 정치 이념이었다.
이들은 2∼3세기에 걸쳐 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12개 소국들이 합친 변한 소국연맹 즉 전기 가야연맹체를 이루었고, 발전된 철기생산 능력과 양호한 해운 입지 조건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과 교역하며 발전해나갔다. 그 중에서도 김해 가야국[狗邪國]과 함안 안라국(安羅國: 安邪國)이 우월하였는데, 특히 해운 입지 조건이 좋은 김해의 가야국은 낙랑(樂浪)과 왜(倭) 사이의 원거리 교역 중계 기지로서 큰 세력을 떨쳤다.
변진(弁辰) 12국, 즉 전기 가야 12국에는 ①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②접도국(接塗國), ③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④고순시국(古淳是國), ⑤반로국(半路國), ⑥낙노국(樂奴國), ⑦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⑧감로국(甘路國), ⑨구야국, ⑩주조마국(走漕馬國), ⑪안야국(安邪國), ⑫독로국(瀆盧國)이 있다. 이 중에서 거의 확실하게 위치가 비정되는 곳은 밀양·고성·김해·함안·부산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개연성이 높은 개령·고령·창원·칠원·단성·함양 등을 포함하여 보면, 변진 12국의 범위, 즉 전기 가야의 영역은 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의 경역과 비교가 되면서 약간 차이가 나는 정도이다. 이를 좀 더 세분하여 보면, 전기 가야의 영역은 김해·창원·칠원·함안·밀양·부산 등의 낙동강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고령·개령 등의 낙동강 중·상류 지역과 고성·단성·함양 등의 서부 경상남도 지역이 포함된다. 여기에 나무널무덤[木棺墓]과 나무덧널무덤[木槨墓] 관계 유적이 발견된 지역 중에서 위의 영역 안에 들어가는 합천군·성주군·의령군·진주시 지방을 전기 가야의 영역에 추가해 넣을 수 있다. 또한 창녕군과 양산군 일대는 진한 또는 신라와 관련된 기사에서 그 이름이 보이나, 지리적 위치로 보아서는 때에 따라 가야연맹 소국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유적의 발견 사례도 없고 문헌 자료도 없지만, 그 외에도 거창군·하동군 등은 전기 가야 연맹의 영역 속에 포함된다.(<지도 1> 전기 가야 연맹 소국들의 위치)이 밖의 영남 지역은 대개 진한 12국의 영역으로 생각할 수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3세기 후반 이후의 유적에서는, 길이 8m 정도의 대형 덧널무덤이 설치되기 시작하고, 그 유물로서 청동솥[銅鍑], 쇠로 만든 갑옷과 투구, 기승용 마구(騎乘用馬具) 등의 북방문화 요소를 부장하였다. 이러한 유물·유적 상황은, 유적 입지 조건이나 부장 유물의 수준으로 보아 정치적 지배계급의 성장에 따른 좀 더 강한 국가체 출현을 상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4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낙랑 및 대방군을 병합하자, 가야연맹은 선진문물 교역 대상을 상실하면서 일시적인 혼란에 빠져, 고자국(古資國: 古史浦國), 사물국(史勿國), 골포국(骨浦國), 칠포국(柒浦國), 보라국(保羅國) 등의 이른바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김해의 가야국을 공격하는 내분을 겪었다. 가야국은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포상팔국의 군대를 물리쳤으나, 연맹의 분열상은 한동안 지속되었고, 김해 중심의 동부 가야는 왜와의 교역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4세기 중·후반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대방군의 옛 땅을 둘러싼 고구려와의 경쟁을 위해 가야 및 왜의 후원을 얻고자 하였다. 백제의 교역로 개척에 따라, 가야연맹은 다시 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일원적으로 통합되어, 백제-왜 사이의 중계 기지로서 안정적인 교역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가야의 중계 역할은 부(富)와 기술과 무력을 모두 갖춘 데서 나오는 것이지, 단순히 백제와 왜 사이의 교역을 위한 지리적 편의성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김해 가야국의 우월성은 철 생산과 철기 제작 기술과 무력의 측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김해 대성동 2호분에서 출토된 다량의 덩이쇠[鐵鋌]와 종장판 정결 판갑옷[縱長板釘結板甲], 철제 재갈 등의 유물은 이를 보여준다. 가야는 백제와 교역하는 대가로 일부 왜와 함께 동원되어 고구려의 동조세력인 신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방의 안정에 힘입어, 백제는 황해도 지역을 차지하고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4세기 말에 광개토왕이 즉위한 이후 황해도 지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의 패권 다툼은 고구려의 승리로 결말이 났고, 그 여파로 신라의 요청을 받은 고구려군이 낙동강 하류까지 내려와 임나가라(任那加羅)를 급습하였다. 이 정벌로 인하여, 고구려의 무력을 앞세운 신라는 결정적으로 가야보다 앞설 수 있게 되었으며, 백제는 가야 지역을 중개 기지로 하는 대왜 교역망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해의 가야국을 대표로 하는 전기 가야연맹은 소멸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가야 연맹권은 신라의 중앙집권 능력의 한계성으로 인하여 지역 기반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으나, 한동안 침체기를 겪게 되었다. 김해 지방에서 가야 연맹장의 무덤으로 보이는 대성동 고분군이 5세기 초 이후 급격히 축소되는 것은 그러한 사태를 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