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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
갈라디아서 6장 17절
사람은 살면서 흔적을 남깁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자화상입니다. 그 흔적들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남긴 흔적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존경을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비난과 모욕을 받기도 합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박지성 선수의 발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아주 못생긴 발이었습니다. 대부분 그런 못생긴 발은 감추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런 발을 보았다고 해서 칭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못생긴 박지성 선수의 발을 보고 엄청난 칭찬과 찬사를 남겼습니다. 그건 그의 발이 박지성이라는 선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흔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의 발은 상처투성이에 못생긴 발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상처 많은 발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리고 어떤 영화를 보는데 거기에 경찰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파트너와 함께 행동을 하는데 갑자기 자기가 가진 상처들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칼에 맞은 상처, 총에 맞은 상처, 찢어지고 꿰맨 상처, 대부분 그런 상처들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그 경찰은 매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오히려 누가 더 많은 상처를 가졌는지 자랑까지 하는 걸 본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찰 앞에 한 조폭이 잡혀왔습니다. 온통 몸에 문신자국이었습니다. 조폭들도 자기의 문신이 더 무섭고 멋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자기 몸에도 칼자국이 있고, 꿰맨 자국이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런 문신이나 상처를 보고 칭찬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경찰한테 한 대 맞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상처라고 다 같은 상처 아니고, 흔적이라고 다 같은 흔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는 감추고 싶은 상처를 가졌고, 부끄러운 상처를 가졌습니다. 비난과 모욕을 당하는 상처를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2015년을 다 살고 나면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까요? 우리는 과연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게 되까요?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는 발자취를 남기게 될까요? 우리는 잘 모르겠으니 상관없다고 할까요? 하지만 우리는 몰라도 다른 이들은 알고, 결정적으로 내 삶의 흔적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끄러운 인생의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라도 자랑스러운 인생의 흔적을 남기기 바랍니다.
윌란드 액커먼의 「도둑과 성자」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살던 가난한 형제가 이웃집의 양을 훔치다가 잡혔습니다. 동네 주민들은 이 형제들에게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말라고 또 도둑이라는 의미로 그들의 이마에 ‘ST’라는 영문을 불로 달굴 쇠로 지졌습니다. 이 말은 ‘Sheep Thief’라는 말로 ‘양 도둑놈’이라는 낙인입니다. 어디에 가도 이들의 이마에 있는 글자를 보면 그들이 양을 훔친 사람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게 됩니다. 그래서 형은 그 수치를 평생 안고 살 자신이 없어 결국 견디지 못하고 이마를 가지고 동네를 떠나 멀리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뉘우치며 동네에서 선한 삶을 살기를 결단합니다.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면서 남을 돕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노인인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동네에 한 길손이 지나가다가 그 노인의 이마에 선명하게 찍힌 ST라는 낙인을 보고는 동네 사람들에게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한 참 생각한 후에, 그동안 보아온 노인의 아름다운 삶의 흔적을 돌아보며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내가 알기로는 ST가 ‘Saint’(성자)의 약자인 인 것 같습니다!” 라고 했답니다. 그 흔적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결정도 내릴 수 있고, 그래서 정말 잘못을 저지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에 따라 그의 실수와 잘못도 전혀 다른 흔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구제불능이라고 단정 짓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바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선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럼 변할 수 있습니다. 바뀔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그렇게 변화된 삶을 산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사울(Saul)입니다. 그는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다소라는 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바울은 율법 공부를 위해 유대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가말리에 문하에서 열심히 율법을 공부해 율법자가 될 자격을 다 갖춘 엘리트입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도 대단한 열심을 가졌습니다. 율법에 어긋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반하는 어떤 것에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의 믿음과 신념으로 볼 때 예수는 분명 가짜 메시아였습니다. 짝퉁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도 전부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서 모두 배교한 죄인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따라는 자들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고 심지어 죽게하는 것도 너무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바울의 흔적은 유대인들의 눈으로는 대단한 열심과 열정과 충심을 가진 율법 선생이라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 바울은 흉포자요. 포악자요,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바로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러 가던 중에 하늘에서 찬란한 빛 가운데 들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는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믿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은 분명 흉악하고 포악한 흔적이 지난 자였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예수를 위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예수를 전하는데 그의 생명도 아끼지 않는 예수의 흔적을 지닌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면 바울처럼 새로운 흔적을 지닌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럼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울이 말하는 ‘흔적’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스티그마타’ 혹은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이 말은 노예 또는 짐승의 소유가 그 주인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그 몸에 불로 된 인두로 지져 새기는 낙인입니다. 어디에 가더라도 그 소유주가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찍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스티그마타’라는 말은 자기에게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종이나 노예 또는 짐승에게나 쓰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은 오직 예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울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종이 이렇게 자신 있게 자기가 종이라고 밝힐까요? 그런데 바울은 아주 적극적으로 자신이 예수의 종이며, 예수의 노예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님으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오직 예수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 예수의 종이라고 아주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성도들 역시 이런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런 낙인이 찍혀야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예수 믿는데 손해를 보더라도 절대 거짓말 하지 않을거야!” “ 저 사람은 이번에도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게 뻔해!” “저 사람은 절대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아” “저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이면 어김없이 예배드리러 교회에 갈 사람이야!” “저 사람은 이번에도 남을 돕는데 늘 앞장서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늘 정직한 사람이야!” 이런 낙인이 찍혀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낙인이 찍히는 것이 두렵습니까?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 수 있나? 목사님이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해서는 결코 세상을 살 수 없지! 맞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세상을 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만 살고 끝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사는 방식대로만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경계해야 할 말이 있다면 ‘적당히’라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신념과 방식 앞에 이 ‘적당히’라는 말만 넣으면 의미가 너무 달라집니다. 주일성수도 적당히, 예배도 적당히, 찬송도 적당히, 헌금도 적당히, 기도도 적당히, 봉사도 적당히....다 이런 식입니다. 그럼 천국은....천국도 적당히 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 이 세상의 방식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예수의 노예이며, 예수의 소유라고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아담과 하와 이래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늘 남의 탓만 해 왔습니다.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는 자기가 먼저 먹고 난 선악과를 남편 아담에게도 주었고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허물에 대해 눈을 뜨게 되면서 무화과로 치마를 엮어 해 입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찾으시자 그들은 나무 숲 사이에 숨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일에 대해 물으시자 아담은 하와를 지목하고, 하와는 뱀을 지목합니다. 결국 자기 탓이 아니라 다 남의 탓이라는 것이지요.
남 탓만 하는 인간의 손가락은 늘 앞을 향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손가락은 전부 자기를 향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늘 자신에게는 관대합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이해를 못한다고 여깁니다. 자기의 잘못은 늘 그럴듯한 이유와 핑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잘못할 때는 가차 없이 비난하고 징계하려 듭니다. 죄성이 있는 인간은 늘 자기중심적입니다. 이기적입니다. 자기는 사랑합니다. 그러나 남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이 남길 수 있는 흔적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면서 남을 짓밟고,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나쁜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것이 바울의 자랑이었고, 자신을 높이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 십자가를 통과하고 예수 부활을 확신하고 난 후에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기를 높이고,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삶을 똥처럼 여기며 다 버립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고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전하는 삶을 삽니다. 예수를 위해 고난과 고통을 당해도 전혀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하며 기뻐하기까지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바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히 십자가의 상처를 그대로 가진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에서 온 어떤 사람들이 전한 다른 복음에 속은 것을 알고는 이렇게 호통을 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인다고 외칩니다. 바울은 예수 십자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히 그 손에 상처를 지닌 예수님을 깨닫고 나서는 너무 감사하고 감격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상처를 지우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통해 바울은 자신 역시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종이요, 노예가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일생을 예수를 전하고 사는데 온 생애를 다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 27권 중에서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서신이 13권이나 됩니다. 바울은 진정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예수의 합당한 종으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우리 몸에도 예수 십자가의 흔적이 남을 것입니다. 내 얼굴에, 내 언어에, 태도에, 습관과 인격과 관계에 모든 삶에 예수의 흔적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딱딱한 딱지가 되어 굳어 버립니다만 예수의 십자가 흔적은 시간이 지나도 잘 아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늘 아픕니다. 저립니다.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아픔과 저림과 고통은 절대 바꿀 수 없는 영광을 얻게 할 것입니다. 주님 역시 십자가의 고통을 넘어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No Cross, No Crown!’(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
우리는 물질을 사용해도 예수의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우리는 봉사와 헌신을 해도 예수의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찬송할 때도 예수의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일생 동안 예수의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오늘 졸업을 하는 우리 학생들 역시 지금까지 공부했던 학교에서 흔적들을 남겼을 것입니다. 졸업은 그 흔적에 대한 확인입니다. 내가 살아온 것에 대한 마침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졸업은 또 다른 흔적을 남기기 위한 시작입니다. 앞으로 훌륭한 믿음의 흔적들을 남기는 우리 학생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드린 시간 때문에 내가 써야할 시간이 손해를 보고, 주님께 드린 봉사 때문에 내가 해야 할 꼭 필요한 일이 손해가 되고, 주님께 드린 물질 때문에 내가 꼭 써야할 곳에 돈을 쓰지 못하는 어려움이 생길 때 우리는 그것을 희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예수의 흔적이 남지 않겠습니까? 사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순간에 타협을 하며 그 예수의 흔적을 지워버립니다. 그리고 힘들었다고만 합니다. 하지만 그 힘들고 어려운 것을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주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흔히 그런 것과 그럴 뻔 한 것은 다른 것입니다. 당한 것과 당할 뻔한 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의 흔적을 남기기보다는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흔적을 남기고 사셨습니까? 그게 나만의 흔적이었다면 이제라도 바울처럼 예수의 흔적을 남기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예수를 위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도망치고, 굶고, 잠도 못 잤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예수의 복음을 온 세상에 기쁨으로 전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나의 흔적을 많이 남긴다 한들 예수님이 기뻐하실까요? 세상에 남겨진 나만을 위한 흔적이 천국에서 어떤 효력이 있을까요? 주님과도 천국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흔적이라면 이 땅에서 애쓰고, 힘쓰고, 노력하며 사는 아등바등하는 모든 흔적인 헛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과 믿음의 흔적들이 오직 예수님과 관계된 흔적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로 매를 맞아도, 비난을 받아도, 놀림을 당하고 손해를 당하고 쓰러지고 넘어질지라도 오직 예수의 흔적을 몸에 새겼다고 자랑스럽게 고백하는 바울처럼 이 예수의 흔적을 자랑하고 사는 믿음의 성도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