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주인공을 마르코로 볼 것인가 루디로 볼 것인가에 따라 영화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 같다.
먼저 주인공을 마르코로 볼 경우, 마르코는 마약중독자 엄마와 함께 살고있으며 다운증후군 장애를 가진 소년이다.
마르코는 자신을 돌봐주고 안전하게 지켜주고 사랑해주는 실제적 기능의 가족이 없다.
마르코의 엄마는 결국 감옥에 수감되고 마르코는 아동국에 거의 끌려가다시피 한다.
여기에서 아동국은 아동의 인격은 전혀 살피지 않으며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아동보호기관으로 묘사된다.
그러한 아동국에서 당연히 마음을 열 수 없는 마르코는 집으로 돌아가고자 아동국을 나온다.
그리고 그러한 마르코를 불쌍하게 생각한 루디는 마르코에게 선의를 베풀고 마르코는 루디의 진심에 마음을 열게 된다.
마르코는 루디와 그의 연인, 폴과 함께 살게 되고 마르코는 자신의 방이 생겼다는 사실에 너무나 신나한다.
마르코는 초콜릿 도넛을 좋아하고 학교에도 잘 적응하고 웃는 모습도 너무나 예쁜 소년이다.
루디와 폴 역시 진심으로 마르코에게 좋은 가족이 되어주기 위해 필요한 역할들을 하였고, 행복한 추억도 만들면서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갔다. 마르코는 루디와 폴과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나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그러나 이러한 마르코의 행복에도 곧 장벽이 생겼는데 그것은 루디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었다.
루디가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마르코의 성적 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 있고 또 분명 교육적으로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판단에 의해 마르코는 루디와 폴로부터 분리된다.
마르코는 루디와 폴과 함께 살고 싶다고 의사를 표현했고 그들의 선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나 사회에서는 그 선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자라는 성적 정체성이 마르코의 부모로 역할을 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을 내린다.
결국 수감에서 풀려난 마약중독자 엄마가 양육권을 되찾아가면서 마르코는 다시 불행한 과거로 돌아간다.
마르코는 방치되었고 필요한 보호와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한 체 집을 나와 떠돌다 다리 밑에서 죽게 된다.
이 관점에서 영화는 마르코가 비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사회적 문제점들을 제기 한다.
첫 번째, 법적 양육권에 대한 문제제기 (마르코의 엄마는 마약중독자였으나 법적 양육권은 실제적인 부모의 역할과 상관없이 우선권을 갖는다는 점)
두 번째, 아동국에서 아동을 대하는 비인격적 태도 (마르코를 일방적으로 끌고 가서 행정적 업무 외에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 결여됨)
세 번째,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루디는 마르코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아무도 마르코를 데려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음)
다섯 번째, 아동의 주체성 상실 (마르코의 욕구와 선택은 마르코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고 마르코의 주체성보다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더욱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침)
여섯 번째, 개인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마르코가 3일 내내 걸어다니며 마침내 죽을 때까지 아무도 마르코에게 따뜻한 관심을 주지 않았음)
일곱 번째, 마르코가 경험한 사랑을 빼앗았던 사회적 편견 (동성애자는 부모의 역할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회적 편견이 마르코와 루디&폴의 관계를 가로막음)
그러나 주인공을 루디로 본다면 영화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루디는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싶지만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여의치 않은 동성애자 남성이다.
루디는 여성모사 쇼댄서로 일을 하고 있으며 밤무대에서 한 남성(폴)과 눈이 맞아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다 루디는 이웃집에서 마르코라는 소년을 알게 되고 마약중독자 엄마로부터 방치되고 있는 마르코를 불쌍히 여긴다.
결국 마약중독자 엄마가 감옥에 수감되자 루디는 마르코를 돌보기로 결정하고 양육권을 양도받는다.
루디는 폴과 함께 마르코에게 좋은 부모의 역할을 해주고, 좋은 추억도 만들어가며 진심으로 사랑하고 행복한 날들을 보낸다.
그러나 루디와 폴의 관계가 드러나자 폴은 직장에서 동성애자라는 사실로 해고되었으며 루디는 사랑하는 마르코와 분리된다.
루디는 사랑하는 마르코에게 좋은 가정을 만들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걸림돌이 되어 부모의 역할과 자격에
의심을 받고 결국 양육권은 감옥에서 출소한 마약중독자 엄마에게 넘어가게 된다.
마르코가 그 엄마 곁에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안 루디는 너무나 괴로워하지만 동성애자라는 사회적 편견을 아직까지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결국 마르코는 비참하게 죽고 루디는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으로 한 아이가 죽게 되었다는 메시지를 사회적 인사들에게 보낸다.
그리고 영화는 루디가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의 극복을 의미하는 노래를 부르며 끝이 난다.
이 관점에서 영화를 바라보면 영화는 그저 동성애자의 따뜻한 진심과 선의도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가리어져 한 아이의 생명까지도 앗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드러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자마자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의 심각성'을 중심 축으로 스토리를 엮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마치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결과적으로 한 아이의 생명까지 앗아갔다는 뉘앙스의 논리처럼 느껴져서
동성애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 차별의 조건들로부터 인간이 보호받고 존중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영화상에서는
첫 번째 마르코 중심의 관점으로 문제가 제기되고 해결방안이 대두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이현실 선생님에 의하면 이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동성애 옹호가 아닌 사회적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말씀해주신것 같은데
나는 사회적 차별이라는 메시지로 읽혀지기에는 '동성애'에 대한 영화 감독의 주관이 이미 약간 편향되어 있었다고 느꼈다.
한 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영화상에서 루디가 마르코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부모였으며 정많고 따뜻한 가족의 역할을 해주었지만
루디와 폴이 진짜 부부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밤무대에서 만나 하루만에 성적 관계를 하고 동거를 하며 지낸 연인이었다.
둘이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해도 그렇게 짧은 기간에 온전한 부부로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인다.
둘은 언제라도 헤어질 수 있는 연인인데 만약 둘이 이별을 하고 마르코를 돌 볼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
마르코는 또 한 번 가정의 해체를 경험하며 더 큰 좌절과 상실을 경험할 수도 있다.
만약 이 영화가 실제 상황이라면 이러한 비판적 관점도 적용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댓글 주인공을 동성애자로 설정한데에도 물론 감독이 의도한 바가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영화를 통해 선생님들과 이야기하고자 했던 바는
동성애자라는 주인공의 상황보다 ‘동성애자=소수자=사회적 약자’라고 해석했을 때,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우리가 빼앗은 다른 이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으면 했었습니다.
다시 말해 동성애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어떤지 이야기 나눠보려 했던 것이 아니라,
‘나와 다름에서 오는 불편’ 혹은 ‘나와 무관한 일’이라는 자신도 잘 모르는 내 안에 잠재된 편견 때문에,
영화에서는 정작 마르코 중심(마르코의 행복)이 아닌 동성애에 초점을 맞춰 문제를 풀지 못했죠.
네 이현실 선생님이 영화를 통해 나누고자 했던 관점과 메시지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영화를 보던 당시에는 '동성애'라는 소재 속에 갇힌 관점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관점을 확장시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나누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만난 당사자가 이 영화와 같은 상황에 놓인 마르코라 가정한다면,
나는 마르코의 해피엔딩(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사회복지사로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기쁨샘이 이야기 한 것처럼 당사자 중심에서...
마르코 중심의 관점으로 문제가 제기되고 해결방안이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 당사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쁨샘이 소감에서 이야기한 내용 중에,
“루디와 폴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마르코를 양육하는 것은 성적 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 있고, 분명 교육적으로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동성애자라는 성적 정체성이 마르코의 부모의 역할을 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을 내린다.” 등의 몇 가지 구절에서 성소수자(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기쁨샘이 마지막에 덧붙인 내용에서...
만약 루디와 폴이 헤어진다면 ‘루디가 혼자 마르코를 보거나’ 혹은 ‘폴이 혼자 마르코를 보기’에는 두 사람이 함께 마르코를 돌보는 환경보다 부족하거나 열약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마르코, 루디, 폴 이 세 사람이 가족으로 만나게 된 데는 처음부터 세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루디와 마르코 두 사람이 가족의 모습으로 만나 출발하게 되었던 점,
또 “가정의 해체”라 표현하셨는데 루디 혹은 폴이 혼자 마르코를 돌본다하였을 때,
그럼 그 모습은 가족이라 볼 수 없을까요? 볼 수 없다면 그 이유는 왜일까요? 마르코의 친엄마도 혼자 마르코를 키웠는데 말이죠.
제가 "둘이 이별을 하고 마르코를 돌 볼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 마르코는 또 한 번 가정의 해체를 경험하며 더 큰 좌절과 상실을 경험할 수도 있다."라고 적었던 것은 루디와 폴이 이별 후 여의치 않은 상황으로 마르코가 다시 혼자 남는 상황을 생각하며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해지고 있지만 "이혼이나 배우자의 가출 등으로 가족 형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현상을 가족해체라고 한다"는 관점에 기인해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족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남은 구성원들은 가족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의하는 ‘가족’의 모습은 어떠한지 다시 생각해봅니다.
영화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바, 제가 영화를 통해 선생님들과 나누고자 했던 질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좋은 영화를 보며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기회를 가져보셨으면 했습니다.
긴 소감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남은 실습기간동안에도 동료들과 생각나누는 시간 많이 가져보시길 바라면서.. 화이팅입니다^^
제가 댓글을 너무 늦게 보았네요.. 이현실 선생님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심성의껏 댓글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