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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들뢰즈와 가타리, 최명관, 민음사, 1994(원 1972) 608쪽.
Deleuze et 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Minuit, 1972, p. 494.
기계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이래로 “너비를 지닌 신체”를 지칭한다. 그 너비 양태인 신체는 사유의 양태인 의식을 생기 있게 하고 또한 끝맺게 한다. 이런 불가분의 개인적 신체에서 생기있게(animer)하는 기계를, 현대에서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 “생산하는 기계”라고 한다. 근대철학에서 데카르트에게 이신론자(déiste)라, 스피노자를 무신론자(athée)라고 부르는 것은, 신체를 다루는 방식인데, 자연[본성]에서 이법(raison)이 있으며, 이 이법은 창조적 신과는 별개라는 관점 때문이다. 데카르트도 스피노자도 “신”이란 용어를 쓰지만, 종교적 의미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신, 즉 이법, 그리고 그것은 원인성이지, 창조자, 말하는 자, 명령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가 근대의 관점을 넘어서 “기계”라고 하는 것은, 근대에서 양태의 차원에서 기계를 다루는데 비해, 속성의 차원에서 기계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계가 자기 생산(생산하는 자연)이 거의(?) 무한하며, 게다가 하나의 질서, 하나의 계열 또는 두 가지 계열만이 아니라, 인간이 이제까지 배제했던 영역(터전)에서도 여러 계열들이 있다는 것이다(스피노자는 두 가지 계열만을 인간이 인식한다고 한 것은 데카르트의 사유의 계승일 것이다). 다양체가 나올 것이다(이분법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이항대립은 근대의 질병적, 광기의 사유인 이유이다). 그러면 여러 계열들 각각이 자기의 현존하는 근거(raison)를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벩송은 일찍이 라이프니츠가 플로티노스 계열이라는 것을 보았는데 비해, 들뢰즈는 (아마도 벩송의 강의록을 읽지 못해서? 읽을 수가 없었기에) 늦게서야 1988년에 라이프니츠의 총족 이유율(raion suffisante)을 다루었다. “모든 것은 이유를 갖는다‥…” 그 이유(raison)는 자연의 이법(raison)으로부터 생긴 문제로 보게 되면, 이오니아학파, 소크라테스, 퀴니코스, 스토아의 전통에서 섭리 또는 이법(Raison)을 아나르키(anarchie)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칸트는 이성(Vernunft, Rasion)을 인간의 인식적 능력에 한정하여, 그 능력을 정신에 접목시키려 했던 착한 심성인데, 그 한계로서 기계의 작동을 무시 또는 배제 하면서 자아의 오류추론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57LKB)
부족이나 왕국이 성립하기 이전에 토지를 차지하는 씨족과 종족(인종)은 토지를 어떻게 대했을까? 또는 자연을 어떻게 대했을까?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또한 내버려둘 수 있는 것이었을까? 떠돌이든 정주적이든 한 씨족의 삶이 다른 씨족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 연관과 혼인관계가 부족을 만들었을까? 부족들 사이의 연관 또는 동맹은 가부장적 제도를 지닌 부족들 사이의 동맹이었을까? 이런 조직화가 모계였을까 부계 였을까?
전승의 이야기에서 신관과 전제(참주) 사이의 관계를 다룬 것은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의 13장, 기원전 7000년-포획장치에서이다. 원시 토지 사회체에서도 채권자와 채무자가 있었을까? 기록이 아니라도, 우리표현으로 “은혜를 갚겠습니다.”와 같은 채권과 채무관계가 성립한다면, 그것은 상부상조를 넘어서 암암리에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성립할 것이다. 이런 관계는 정주적일 때일 것이다. 노마드는 이름 없는 들판이나 골짜기에서 생을 마감하면 채권자와 관계없이 들판의 동물들의 양분이 되었을 뿐이며, 자연의 온순환에 되돌아갔다고 할 것이다. 이런 노마드의 생각이 정주의 형태 다음이었을까? 정주의 형태 이전에 노마드가 있었는데, 안전과 자기보존의 욕망이 노마드 보다 정주를 선택하게 되었을까? 인간의 자연 속에 인간관계보다 자연관계가 먼저이지 않을까? 인간관계는 코드화를 명령과 계약에 의해 만들 수 있었지만, 자연관계는 무작위적이고 우발적이라 숙명 또는 섭리라는 용어를 만들었을 것 같다. (57LKE)
제1장 욕망하는 기계들 Les machines désirantes 7-59 [몸의 기능] [의식의 역량]
제2장 정신분석학과 가족주의: 신성가족 Psychanalyse et familialisme : La Sainte famille 60-162.
제3장 야생인들, 야만인들, 문명인들 Sauvages, barbares, civilsés 163-324.
- 01절 등기를 행하는 사회체 Socius inscripteur 163-170
- 02절 원시 토지기계 La machine territoriale primitive 170-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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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원시토지기계(原始土地機械) La machine territoriale primitive 222 (170-180)
[대지라는 충만한 신체에 새겨진 등록(지층들, 기념물, 글쓰기), 그에 비해 인간 신체 위에 등록(DNA, 기록, 글쓰기, écriture)이 있다. 생명체에서 자료입력(본능 기입)이 잘 된 것은 곤충이며, 인간에서 입력(자료 data, 기억)만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언어(language)를 만들고 기억의 전수를 위해 글쓰기(écriture)하며, 글 써진 잔인한 체계가 인간에게 추억 이상의 현실(현재상황)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서 말투(paroles)의 기억을 부여하는 것이다. 토지에는 등기가 있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 인간노동력의 기억(기술기계, 사회기계)을 만든다. 기술기계는 삶을 편리하게 하지만 인간의 평등성을 가져오지 않았다. 분배는 말투(예술기제, 소비기제)가 필요하다. / 원시 사회체에는 두 가지가 작동한다. 하나는 가족계(모계든 부계든), 다른 하나는 결연(혼인)이다. 씨족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가계와 외부와 연관해서 결연이 있다. 전자에서 생물적 기억, 후자에서 기표적 기억이다. 전자는 행정적 위계적인데 비해, 후자는 정치 경제적이고 권력에 연관이 있다. 이점에 전제 제도에서 결연의 문제에 관계한다. 전제에서 말하자면 외척과 대외 관계가 권력의 핵심인 셈이다. (40TKE)]
3.2.1. 대지의 충만한 신체 Le corps plein de la terre 170 -
영토성(territorialité)의 용어는 겉보기에만 애매하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거기에서 주거지의 원리 또는 지리적 분포의 원리로서 이해한다면, 원시사회기계가 영토성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엥겔스(Engels, 1820-1895)의 정식에 따르면, 오직 국가 장치만이 토지적인 것이다. 이 국가 장치는 “국민을 세분하지 않고 토지를 세분하는”것이요 부족 조직을 지리적 조직으로써 대체한다. 하지만 친족관계가 대지에 우선하는 듯이 보이는 곳에서도 지연의 중요성을 제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170)
그러므로 야생의 원시 사회체야말로 엄밀한 의미에서 유일의 토지기계였다. 그러한 기계의 기능작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가 있기 전에, 결연과 부자[가계]관계를 거부(굴절)하는 것(décliner alliance et filiation), 대지 위에 신체의 계보를 거부하는 것. (171)
3.2.2. 부자 관계와 결연: 둘의 불가환원성 Filiation et alliance: leur irréductibilité 171-180 -
만일 이 [토지]기계가 굴절(déclinaison)이라 할지라도, 알리앙스를 부자관계에서, 알리앙스들을 가족적 계보들에서 연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171)
[영국 인류학자인] 리치(Leach, 1910-1989)는 매우 다른 모계제들(régimes matrimoniaux)의 예들을 인용하는데, 사람들은 모계제들(régimes matrimoniaux)로부터 상응하는 집단들의 부자관계 속에서 차이를 추론할 수 없다.많은 분석들 속에서 “강조점은 단선적인 연대적 그룹에서 내적 연결에 관한 것이, 또는 공통의 부자관계를 갖는 다른 그룹들 사이에 연결에 관한 것이다. ... 그러나 측면(latéral) 구조의 연속성은 그러한 방식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연속성은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에 연쇄적 경제적 관계들에 의해 오히려 유지된다‥… 혼인관계의 연속성을 표시하는 것은 공공연한 부채(dettes)의 현존이다.”
부자관계는 행정적이고 위계적이지만, 결연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위계질서와 혼동되지도 않고 이것으로부터도 연역되지도 않는 한에서 권력을 표현하며, 또 행정과도 섞이지 않는 한에서 경제를 표현한다. 부자관계와 혈연은 원시자본의 두 형태(deux formes d’un capital primitif), 고정자본과 순환자본 즉 부자관계의 저장과 부채의 유동적 덩어리이다. 이것들에 두 가지 기억(deux mémoires)이 대응하는데, 하나는 부자관계의 생물학적 기억이며, 다른 하나는 결연과 말투(paroles)의 기억들이다. (172).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결연이 부자관계로부터 파생되지 않으나, 이 둘 모두 본질적으로 열린 순환을 구성한다. (172)
3.2.3. 마을의 도착자들과 지연 집단들 Le pervers de village et les groupes locaux -
맑스주의자는, 원시사회에서 친족관계가 지배적이라 할 경우에, 그것이 경제적 정치적 요인(facteurs, 인자)들에 의해서 지배적이라고 한 것을 상기시키는 것은 일리가 있다. (172)
리치는 지연적 가계(lignées locales)라는 심급을 정확하게 분간해내는데 .. 그것은 같은 장소, 가까운 장소에 살면서 결혼을 기계적으로 구체적 실재성을 형성해 나가는 그룹이다. (172)
친족관계는 하나의 구조가 아니라, 하나의 실행(pratique 관례), 실천(praxis), 절차, 심지어는 전략(stragégie)이다. 베르뜨(Louis Berthe, 1927-1968)는 혼인[결연]과 위계질서의 연관을 분석하면서, 그가 제시하기를, 요소들[성원들] 사이에 모계적 연결들을 허락하도록 허용하기 위해서 한 마을이 제3자로서 개입하며, [그런데] 두 절반의 이접은 구조의 엄밀한 관점으로부터 연접들을 금지하였다. “제3항은 마치 진솔한 구조적 요소로서보다 마치 하나의 절차(un procédé)로서 훨씬 더 잘 해석되었다.” (173)
“나는 므루(Mru)족의 사람들에게서 이와 비슷한 것을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들 각자는 마치 순환이 닫히면, 그 결과 생기게될 보상 같은 것을 숫제 모르는 듯이 행동하며, 채권자-채무자의 행동을 강조하면서, 불균형한 관계를 증대시킨다.”
친족관계의 체계는 [사실상 열려 있는데] 정치 경제적 관계를 절단하는 한에서 닫혀있다. (173)
3.2.4. 부자관계적 저장과 결연의 부채덩어리들
- Stoc filiatif et blocs de dette d'alliance 173-
[친족체계에서는 열려있지만] 전적으로 흐름을 코드화하는 시도가 문제이다. 어떻게 기표의 연쇄와 생산의 흐름이 상호 적응하고 또 각각의 죄기(l’étreinte, 포옹)을 보증하는가? 유목적인 위대한 사냥꾼은 흐름들을 따라가며, 그 흐름들을 그 자리에서 고갈시키고 흐름과 더불어 이동한다. (173)
[인종학자인] 삐에르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가 묘사한 고독한 사냥꾼은 자기의 힘과 자기의 숙명과 더불어 하나를 이루고, 더욱 빨라지고 또 왜곡된 언어로 자기의 노래를 내던진다. 나, 나, 나, “나는 능력있는 자연이다. 성내며 공격하는 자연이다!”이러한 것은 사냥꾼의, 즉 덤불과 숲속에 사는 위대한 파라노아[편집증자]의 두 가지 특성들인데, 즉 흐름들과 더불어 실재로 이동하는 것, 신과 직접적인 부자관계를 갖는 것이다. (173-174)
(클라스트르는 과야키족(les Guayaki)에게서, 어떻게 죽은 동물들과 수렵인들 사이의 이접(disjonction)이 – 근친상간의 금지와 비슷한 이접이 - 이 야영지에서 사냥꾼[수렵인]과 살아있는 동물 사이에 연결(connexion)로 이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사냥꾼은 자기가 잡은 포획물을 소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4)
파라노이아인 다음에는 또는 그와 동행하여 도착자가 있다. - 때로는 동일인이 두 상황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174)
그래서 원시 영토성 위에서 결혼들을 기계로 만드는 것은 지역적 집단들의 고도로 도착적인 활동이다. [정신과 의사인] 앙리 애(Henri Ey, 1900-1977)가 다른 경우들에서 말하듯이, 정상적 또는 비병리적 도착성[도착증]이다. 그 다른 경우들에서는 “선별, 세련, 계산의 심리적 작업”이 드러난다. (174-175)
3.2.5.기능적 불균형: 규준의 잉여가치
- Déséquilibre fonctionnel: plus-value de code – 175
흐름의 선취(les prélèvements)는 시니피앙의 연쇄 속에서 부자관계의 저장(un stock filiatif)을 구성한다. 그러나 거구로 연쇄의 이탈들은 결연[동맹]의 동적인 부채들(des dettes mobiles)을 또한 흐름들의 방향을 정하고 인도하는 부채들을 구성한다. (175)
쿨라(le Kula)에 있어서, 목걸이와 팔찌의 순환이 어떤 장소들에서, 어떤 경우에 정지되어 다시 저장물이 된다. 생산적 연결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부자 관계의 이접들이 없이는 생산적 연결들이 없으나, 결연과 인물들의 혼인을 통하여 횡적인 연결들을 재구성하지 않는 부자관계의 이접은 없다. (175)
어디선가 일종의 값의 균형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요청하게 된다면, 관계가 분명히 불균형인 데서는 그것이 병리학적 결과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175)
찬 경제(éconimie froide)란 투자도 없고, 돈도 없고, 시장도 없고, 교환하는 상업관계도 없다. 그러한 경제의 탄력(ressort)은 반대로 도리어진정한 규준 잉여가치에 있다. (176)
(“우두머리는 화려한 축제를 벌여서 소멸하는 가치를 소명하지 않는 위신으로 바꾼다. 이런 식으로 재산의 소비자가 결국에는 최초의 생산자이다.”)코드[규준]의 잉여가치는 잉여가치의 원시적 형태이다. 모스(Marcel Mauss, 1872-1950)의 유명한 정식에 대답하는 한에서: 증여된 사물의 정령(esprit), 즉 그 물건들의 힘이, 증여는 욕망과 권력의 토지적 기호 즉 재물의 풍부함과 결실의 원리이기에, 고리로 갚아져야 한다. 불균형은 병리학적 귀결이라기보다 기능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176)
요컨대 결연의 관계를 따라 시니피앙의 연쇄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흐름들의 차원에서 코드[규준]의 잉여가치를 낳는다. 여기서 부자관계의 혈통들 간에 지위(statut)의 차이가 생긴다. ... 코드[규준]의 잉여가치는 원시 토지기계의 여러 조작을 실현한다. 즉 연쇄로부터 선분들을 이탈(détacher, 분화)시키는 것, 흐름으로부터 선취를 조직하는(organiser) 것, 각자에게 귀속되는 몫을 분배하는(répartir) 것. (176-177)
3.2.6. 그것은 스스로를 뒤틀리게 하면서만 작동한다
- Ça ne marche qu'en se détraquant – 177
원시 사회들에 역사가 없고, 그 사회들이 원형들과 그것들의 반복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고 하는 생각은 아주 근거가 박약하고 부적절한 생각이다.이런 관념은 인종학자에게서가 아니라 오히려 유대-크리스트교의 비극적 의식에 집착했던 이데올로그들에게서 생겼다. 이데올로그들은 역사의 “발명”으로 비극적 의식을 인정하기를 원했다. (177)
모든 사회기계들에서 역사의 현전은 부조화 속에서 잘 나타난다.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 1908-2009)가 말하듯이 “잘못 이해될 수 없을 정도로, 사건의 표시(la marque)가 발견된다.”그러한 불협화들(discordances)을 해석하는 여러 방식들이 있는 것은 진실이다. 관념적[방식]으로, 현실적 제도와 상상되는 이상적 모델 사이의 간격에 의해서 해석하는 방식; 도덕적으로, 법률과 위반의 구조적 연결을 불러내는 방식; 마치 사회 기계가 그것의 재료들을 더 이상 처리할 능력이 없게끔 하는 마모 현상이 문제기 되는 방식이 있다. (177)
어떤 사회 기계가 잘 기능하지 않아야한다는 것은 기능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정확하게 선분체계(le système segmentaire)에 관하여 제시할 수 있다. 이 선분체계는 언제나 자기자신의 폐허 위에 자기를 재구성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이 체계들에서 정치적 기능의 조직화도 동일하다. 그 조직화는 자기의 무능력을 지적하면서만 자기를 효과적으로 행사하게 한다.(177)
사회기계의 한계는 마모(l’usure)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장(le raté)이다. 사회기계는 삐꺽거리면서, 뒤틀리면서(en se détraquant), 작은 폭발을 터뜨리면서 작동한다. (178)
자본주의는 이것을 깨달아, 자기에 관하여 의심하는 일을 그쳤고,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마멸에 의해서 사회기계가 죽을 가능성을 믿는 일을 포기했다. 모순들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다. 그것이(ça) 뒤틀리면 뒤틀릴수록, 정신분열증화하면 할수록, 그것은(ça) 아메리카 방식으로 더 잘 나아간다.(ça marche mieux) (178)
3.2.7. 선분기계 Machine segmentaire - 178.
비록 이와 같은 방식이 아닐지라도, 이 관점에서 원시 사회체 즉 결연과 부자관계를 굴절하는(décliner alliance et filiation) 토지기계를 고려해야 한다. 이 기계는 선분기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족과 가계라는 이중 장치를 통해서 가변적 길이의 선분을 잘라내기 때문이다. (178)
또 이 선분들은 제1, 제2, 제3의 지역적 부족적 토지 단위들인데, 여기에도 역시 이것들의 지배영역들과 결연[동맹]들이 곁들여져 있다. “부족지역들 간의 분할점은 각 지역에 결부된 가계들의 씨족 구조의 분기점이 된다. 씨족들(clans)과 가계들(lignages)은 뚜렷이 구별되는 응집적 집단들이 아니라, 지연 공동체에 합체시켜서 이 공동체 내부에서 구조적으로 기능한다.” (178)
부자관계의 양도할 수 없는 것과 결연의 가변적인 것 사이에는 온갖 종류의 침투들이 있고, 이 침투들은 선분들의 가변성과 상대성에서 유래한다. (179)
선분기계는 부자관계가 변동하고 결연이 유동하는 동안, 경쟁, 갈등, 단절을 배양한다. 전체 체계는 두 극 사이를 왕복한다. 하나의 극은 다른 집단들과 대결함으로써 융합(la fusion)의 극이요, 다른 하나는 결연과 부자관계를 자본으로 삼아 독립을 갈망하면서 새로운 가계를 끊임없이 형성함으로써 생기는 분열(la scission)의 극이다. (179)
파브레(Jeanne Favret, 1934-) “선분조직의 완강함은 역설적으로 그 매카니즘이 충분히 효과적이지 못하여, 그 두려움이 조직 전체의 원동력으로 있어주기를 요구한다”고 한다. 이 때 어떤 두려움(crainte)인가?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비록 항상 외부로부터 들이닥치고, 그것들의 개방 속에 밀려들기는 하더라도, 사회적 형성작업은 이것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이 치명적이고 우울한 예견을 한다. (179)
3.2.8.1. 탈규준화한 흐름들에 대한 큰 두려움 La grande peur des flux décoés -
3.2.8.2. 안으로부터 나타나지만 밖으로부터 오는 죽음
- La mort qui monte du dedans, mais qui va du dehors. 179
[밖으로부터 오는 것은 야만인이다.]
선분 영토 기계는 융합을 쫓아내고, 족장제(chefferie, 추장제)의 기관들을 집단과의 관계에서 무력하게 함으로서 권력의 집중을 막는다.탈규준화한 흐름은 맹목적이고 말없는 사회체 위를 흐르면서 탈토지화 하는데, 이와 같은 일은 악몽인데, 원시기계가 전력을 다하여 모든 선분 접속으로 악몽들 좇아내려 한다. (179)
원시기계는 교환, 상업, 공겁을 모르지 않지만, 원시기계는 이것을 쫓아내고, 지역화하고 지구별로 나누고, 제한하며, 상인과 대장장이를 종속적 지위에 묶어둔다. (180)
외디푸스 즉 근친상간의 두려움, 이것은 탈규준화[탈코드화]의 두려움이 아닌가? 자본주의가 보편적 진리라면, 이것은 자본주의가 모든 사회조직체에 음화(陰畫, le négatif)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다. (180)
그러나 인종학자들은 주목하였는데, 원시 계급들(proto-classes)을, 제국기계에 의해 조직된 카스트(des castes)과 선분 원시기계에 의해 분배된 신분들(des rangs)과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지적하고 있다. 계급, 카스트, 신분을 구별하는 기준들은 고정성이나 침투성, 상대적으로 닫혀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열려 있는지 등에서 찾는 것이 아니다. ... 그런데 신분들은 원시 토지 코드화[규준화]와 불가분이며, 카스트는 제국의 국가적 초코드[초규준]와 불가분이다. 계급은 자본주의 조건에서 상업과 공업의 생산과정과 상대적이다. (180)
그러므로 계급들의 기호(le signe) 아래 역사 전체를 읽을 수 있으나, 이것은 맑스에 의해 지적된 규칙들을 준수하면서 또 계급들이 카스트들과 신분들의 음화(陰畫, le négatif)인 한에서만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확실히 탈코드화의 체제는 조직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두운 조직화, 가장 힘든 수량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코드들을 대체하며, 또 항상 반대로 추론하여(a contrario) 코드들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40TKE) (4:25, 56WMG) (8:06, 57L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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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2. 원시토지기계 La machine territoriale primitive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독일 공산주의 혁명가, 혁명적 사회주의자, 철학자, 언론인, 역사가. 자본론 제1권: 자본의 생산방식(Das Kapital. Buch I: Der Produktionsprocess des Kapitals, 1867) Marx, Introduction généale à la critique de l'économie politique, 1857, Pléiade, I.
1820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독일 철학자. L'Origine de la famille, de la propriété privée et de l'État, 1844.
1872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 프랑스 사회학자. “프랑스 인류학의 아버지” 증여론(Essai sur le don, 1925)
1900 앙리 애(Henri Marie Jean Louis Ey, 1900-1977), 프랑스 신경학자, 정신과 의사. 본발(Bonneval, Eure-et-Loir) 정신과 병원의 주치 의사.
1902 에반스-프리챠드(Edward Evan Evans-Pritchard, 1902-1973), 영국 인류학자. 옥스퍼드 대학 사회 인류학 교수,
1908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 프랑스의 인류학자.
1910 리치(Edmund Ronald Leach, 1910-1989), 영국 인류학자. 그는 말리노프스키(Malinowski, 1884-1942)의 강의를 들었다. 1차대전 중에 버마 여행. Political Systems of Highland Burma: a study of Kachin social structure. 1965), Rethinking Anthropology, 1961)(fr. Critique de l’anthropologie, 1968).
1927 베르뜨(Louis Berthe, 1927-1968) 프랑스 인류학자. 인도네시아 발리, 자바, 티모를 여행과 종족들 연구자. Aînés et cadets: l'alliance et la hiérarchie chez les Baduj (Java occidental).[1965년 논문]
1930 뢰플러(Lorenz G. Löffler, 1930-2013), 스위스 인종학자. 대학교수, "L'Alliance asymétrique chez les Mru", L'Homme, juillet 1966
1934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 프랑스 인종학자, 인류학자. 남아메리카 탐구자. "L'Arc et le panier", L'Homme, avril 1966.
1934 파브레-사다(Jeanne Favret-Saada, 1934-) 보호령 튀니지 태생, 1958년 철학교수자격, 인류학, 특히 시골 마법사에 관한 전문가. « La segmentarité au Maghreb », achevé en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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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야키족(Les Guayaki), 파라과이 동부의 열대 숲에서 20세기까지 몇몇 가족을 이루며 노마드 무리로 살며 사냥과 수집을 하는 원주민. Clastres, P., Ethnologie des indiens Guayaki. La vie sociale de la tribu, L’Homme, vol. 7, n°4, 1967, 5-24 p. Clastres, P, Chronique des Indiens Guayaki. Ce que savent les Aché, chasseurs nomades du Paraguay, Paris, Plon, coll. « Terre humaine », 1972.
카친족(The Kachin peoples, lit. '"red soil"'), 보다 정확하게 카친 웅퐁족(the Kachin Wunpong이며 카친족 연합이라 불린다. 참조: 리치(Edmund Ronald Leach, 1910-1989)의 Political Systems of Highland Burma: a study of Kachin social structure. 1965).
쿨라(le Kula), 뉴 기니아(Nouvelle-Guinée)에서 상호호혜의 경제적 교환들의 체계.
한, 위키: 선물경제. 위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는 증여론(Essai sur le don, 1925)라는 책을 통해, 선물을 주고받는 교환체계와 증여가 인간관계의 모든 부분에 관여하면서 사회구조를 작동시키고 있다는 점을 보였다. / 치누크(chinook : 미국 북서부 컬럼비아 강 유역에 사는 아메리카 인디언)어로 '식사를 제공하다' 또는 '소비하다'라는 뜻을 지닌 포틀래치(potlatch)는 북서부 아메리카의 부족 생활 전체에서 나타나는 부족 간 교환의 대표적인 형태다. 모스는 부족들의 생활이 물건을 서로 주고받는 선물체계에 기반해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포틀래치로 설명했다. 모스는 아메리카의 포틀래치, 남태평양의 쿨라, 뉴질랜드의 하우(hau) 등의 행태를 통해 "선물이 사회생할의 중요한 기초"라는 사실을 찾아냈다. 또한 주고받음이라는 교환 행위 뒤에 숨어 있는 '호혜성'의 원리를 발견했다. / 인류 학자 조나단 패리(Jonathan Parry, 1957-)에 따르면, 선물의 본질에 대한 논의와 경제 체제를 구성하는 별개의 선물 교환 영역은 문제시 되어 왔는데, 그 이유는 근대 서양의 시장사회에 근본한 자민족중심적인 선물경제의 개념을 마치 그것이 여러 문화가 섞였으며 역사를 조망하는 듯한 개념으로 적용되어왔다는 데에 있다. / 또한 말리노프스키(Malinowski, 1884-1942)와 마르셀 모스(Mauss, 1872-1950)는, 예를 들어 쿨라(Kula)와 같은 일부 의례적인 선물 형태들이 왜 트로브리안드 섬(Trobriand islands)을 여행한 후에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쿨라 교환에서 받은 선물들은, 어떤 면에서는, 기부자의 재산으로 남아 있다. / 말리노프스키의 쿨라링(Kula ring)에 관한 연구는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마르셀 모스와의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패리(Jonathan Parry, 1957-)의 관점에 따르면 말리노프스키는 개인 간의 물질 교환과 선물을 주는 그들의 비이타적인 동기를 강조했다. / 프랑스 인류 학자 모리스 고델리에(Maurice Godelier, 1934)는 선물의 수수께끼(L'Énigme du don, Paris, 1996)에서 분석을 더 진행했다. 알버트 스커버(Albert Schrauwers, ?-?)는 와이너와 고델리에가 (트로브리안드 섬의 쿨라, 북서 태평양 원주민의 포틀래치, 인도네시아 남부 술라베시(Sulawesi)의 토라자(Torajah) 등에서) 예로 들었던 사회의 종류에 대해 논쟁해 왔다. 그는 특정한 친족 집단과 함께 확인된 토지 소유지를 보존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총 소유권이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 프랑스 작가인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는 La part Maudite 1949에서 경제 이론을 세우기 위해 모스의 주장을 사용한다: / 크리스 그레고리(Chris Gregory, 1947-)에 따르면, 호혜는 우리가 선물증여에서 특징짓는 것처럼 동적인 교환 관계다. 그레고리는 친구나 적에게 선물증여를 함으로써 그들이 빚을 지게 되면,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믿는다.
(9:35, 57LK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