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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차 백두대간 산행
성삼재-작은고리봉-만복대-정령치-큰고리봉-고기리
날짜:2013.06.16
거리: 12.6km
시간:5시간
반야봉과 지리산 주능선
10:03
깨닫음이란 새로운것에대한 자각이 아니라 번뇌 망상이 사라진 상태에대한 자각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무거운 안개가 산을 집어 삼킬듯 몰려 왔다.
안개에 위장된 세상이 제 본래의 세상이 아님을 알듯, 번뇌 망상에 가려진 마음이 제 마음이 아님을 확인하는 깨닫음.
산행도 분명히 그런 깨닫음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안개가 걷히자 민낯의 지리능선이 말갛게 얼굴을 드러낸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가 못하다. 어제부터 몸살 기운을 보이던 내 몸은 고리봉에 오르자 더 맥을 못쓰고 허느적거렸다.
산은 영문도 모른 채 계속 오름길이다. 함께 간 동료들이 민망한 내 모습을 보다못해 배낭을 뒤에서 들어 준다. 몸이 가벼워진 만큼걸음이 바빠져야하니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환자 신세가 된다. 늘 몸 관리를 한다고 했는데 이번 산행은 구간이 짧다고 방심 한 면이 없지 않다. 산은 언제나 산이다. 큰 산도 작은 산도 갚지 않으면 안되는 부채요, 포기할 수 없는 자식처럼 오로지 헌신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으니.
10:35
고리봉에서
오늘따라 일행들의 산행에 여유가 넘쳐보인다. 평소라면 어림없을 단체 사진을 담는다. 웃는 얼굴에 산행의 즐거움이 가득하다.
멀리 만복대가 넌저시 모습을 드러낸다. 키대로 자란 관목이 좁은 터널을 만들어 숲길을 헤쳐나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조금만 오르막길이 나와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형편없는 저질 체력을 탓하며 상황에따라 불가사이하게 변하는 내 한계를 곰곰히 생각해본다.
생각을 한다고 힘이 나는것도 아니다. 머리 속이 복잡하기만 하다. 조용히 지난 일을 복기하려했던 내 계획은 이렇게 처음부터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지난 산행에대한 기억마저도 뒤죽박죽이다.
담백한 겨울 동치미맛과 같았던 만복대 산행. 오늘은 그 얼큰하고 시원한 맛이 우러나지 않는다. 막걸리를 마신 뒤의 텁텁함. 꼭 그런 기분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일보다 당신을 잊는 일이 어쩌면 더 쉬울것이라 생각한적이 있었다.
지금은 노란 밀감처럼 쪼그라든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산길을 헤쳐 걸어 그대에게 다가가고 또한 멀어진다.
너를 마음 밖에 둔다는 일이 이다지도 힘든 일이랴.
보이지 않거나 만질 수 없는 온갖 추억들이,
너를 떠올리는 날보다 잊기로 한 날이 훨씬 더 괴로웁기에
너를 잊기 위해서도 너를 찾기 위해서도 나는 또 이 어리석은 걸음을 하게된다.
만목대 오르는 길 정비 공사가 한창이다. 야자수로 만든 멍석이 군데 군데 길에 깔리고 돌계단이 새로이 정비된다.
만복대
만복이 긷들은듯 두루뭉술한 모습이다.
은근히 뜨거워진 죽처럼 지리산 그 묵은 속내를 뭉긋하게 억누른 모습. 슬픔도 기쁨도 취하지않은 중용. 반야를 닮은 지혜. 만복대의 느리고 완만한 모습을 바라보며 떠올리는 느낌들이다.
그 은근하고 미세한 떨림에 내 마음의 주파수를 맞춘다.
아주 쓰지 않는 커피처럼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씁쓸함이 느껴졌다.
산정에서 자주 느끼는 느낌이다. 아쉬울것도,매달릴것도 없는 고요.
리얼리스트의 희망만이 현실이 된다는 체 게바라의 말처럼 현실이되어버린 산이 떡 내 앞에 가로누워있었다.
12:06
진정한 자유란 스스로를 통제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유가 없다는것은 구속된 상태를 의미하는것이 아니다. 삶의 관성에 옭매여 늘 하던것처럼 살게되고 그래서 일상의 틀로부터 한치도 벗어 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지리산 우련한 능선 위로 걱정이라고는 하나 없는 구름 조각들이 걸려있다.
내가 꿈꾸는 인생은 저런것이다. 거리낌이 없는 사고. 그것을 뒷받침 할만한 생활의 여유. 하고 싶은것을 하고 하기 싫은것을 하지 안을 자유. 딱 그만치다.
만복대로부터 정령치로 내려가는 길
내가 산을 올라 온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이 나를 용접하려했기 때문이다.
그 펄펄 뜨겁게 달군 열기로 나를 세상에 붙박으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비. 자유의 영혼을 좇아가는 나비다.
작은 불티 하나로도 온 뭄을 태울 수 있는 위태한 나비일 따름이다.
세상의 불꽃이 뜨거울수록 타들어가는 나비일 따름이다.
나비처럼 가벼워진 마음으로 만복대를 내려간다.
고리봉,세걸산 바래봉에 이르는 지리산 서북능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어득한 능선이 한여름 담벼락에 핀 능소화꽃 줄기같다.
산봉우리 하나 하나가 넝쿨에 길게 달린 꽃봉우리처럼 아름답다.
언젠가 세걸산 너머 저 봉우리를 이어걸은적이 있다. 길이 인상에 남을 아름다운 길이었다.
웅장한 지리산 주능선을 나란히 바라보며 장쾌하게 굽이치던 서북능. 지금은 초록이 짙게 내려 그 선예하고 오밀조밀한 겨울 능선의 칼칼함을 한층 가려버렸지만 길고 깊은 육자배기맛의 은근함은 그대로 살아있다.
반드시 오는 것 내일.
하지만 내일만큼 반드시 오는것 病死.
내일을 알면서 병사를 모른다면 어리석은 일.
내 삶을 파먹고 사는 내일이란 벌레에 저항해 오늘도 의연히 산을 오를것.
12:29
풀밭에서의 식사
목구명에 도무지 무언가가 넘어가지 않아 오늘도 미숫가루 한잔으로 점심을 대체한다. 내 몸상태는 산에서 느끼는 식욕이 말해준다. 밥먹기가 죽기만큼 싫으면 상태 불량이다.
我空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주제에의한 변주곡처럼 혹은 만조의 파도처럼 산이 넘실거리며 다가온다.
산의 너울에 마음을 맏긴다. 들짐승들이 새끼의 상처를 혀로 햝는듯한 크다란 위로의 파도다.
문득 我空이라는 불교 용어가 떠오른다. 나라고 할것이 따로없다는 뜻이다.
나와 세상 사이에 분별이 없는 느낌. 산너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산과의 깊은 유대감이 느껴졌다.
산으로부터 보호받는듯한 이 깊고 따뜻한 기분. 산이 주는 모성을 느꼈다.
뒤돌아 본 만복대의 모습
완연한 여름 산이다. 생각없이 성장하는 사춘기의 산이 아니라 깊은 숙려가 깃든 완숙한 느낌.
짙은 녹음만큼 큰 배려와 이해가 있는 산 진정한 남자의 용기가 느껴지는 산이다.
12:54
절정의 자유
13:14
정령치로 내려가며
정령치에서 바라 본 지리산 능선
13:19
정령치
첫 산행지였던 수정봉과 멀리 희미한 고남산이 보인다. 기억이 새롭다는것은 풍경이 새롭다는뜻이다. 갓 피어난 봄나물처럼 전날의 기억이 쌔록하다.
천지분간을 못하며 달려온 6개월의 산행길이 오롯이 뜨오른다. 이룬것도 모은것도 없는 시간이었다. 걸을수록 불확실한 걸음의 내면이 앙칼지게 나를 밀어낸다. 나는 백두대간을 완주하게 될까.
미래에대한 불안한 상념들이 두루미 천남성처럼 꼿꼿이 머리를 새웠다 무겁던 육신에 근심을 식히는 바람이 일었다.
무거운 어깨를 다시 한번펴자 산길에 대한 용기인지 새로운 삶에대한 활력인지 알수 없는 새로운 용기가 샘솟았다.
그 기운을 밑천 삼아 산을 또 오른다.
고리봉 오르는 길
智異山
지혜가 달라지는 산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와 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는 아직 지리산 산행 경험이 일천하여 지헤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지리산을 제집처럼 속속들이 알고있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본다.
그런 분들의 체력과 산에 대한 열정들을 보면 과연 명불허전의 지리산이다.
노고단과 만복대
13:45
전라남북도 갈림길에서
성삼재에서 여기까지의 길이 전라남도의 길이었다면 지금부터의 길은 전라북도에 해당된다. 저 아래 달궁계곡을 흐르는 물은 비록 전라도 땅에서 발원하지만 결국 낙동강물이된다.
만복대가 보이고 만복대에서 정령치에 이르는 대간길도 선명히 보인다.
만복대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곳이 노고단과 성삼재이다.
아주 예날 지리산 아래에는 달궁이라는 큰 성이 있었고 그 성을 지키기 위해 정씨 성을 가진 장수를 서쪽에 파견했는데 그곳이 바로 정령치다. 동쪽에는 황씨 성을 가진 장수를 파견하여 황령치라 하였다. 성삼재쪽은 전략적 요충이라 성이 다른 세명의 장수를 파견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姓三재다.
인근 팔량치에는 장수를 여덟명이나 파견했다고 하여 그리 이름을 붙였다한다.
13:51
고리봉, 작은 고리봉. 산중에 왠 고리들이 이렇게 많을까.
지리산을 조선 후기까지는 두류산이라고 했다. 우리가 걷는 백두대간길도 백두산에서 두류산을 이어걷는다고 하여 그 머리글을 따 백두대간이라 한다.
두류산의 두류는 백두산이 흘러왔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흘러 온 두류산을어딘가 붙잡아 둘 곳이 필요했다. 그 두류산을 묶은 끈을 걸어 둔 고리가 바로 고리봉인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렇다는 이야기다.
세걸산 너머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
풍경조차 연무에 맥을 잃은 가운데 지리산 주능선을 마주보며 장쾌하게 달리던 서북능도 마치 짙은 침묵의 호수 위에 한점 떠다니는 백조처럼 오늘은 말이 없다.
나른한 오보에의 음율이 쌩쌍의 백조를 연주하며 산마루에 걸려있다.
발걸음에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나를 받쳐야할 新生의 힘은 어디에도 없다. 맥빠진 텃새의 울음들이 더문 더문 바람에 섞여 지나간다. 그 어느것도 제자리가 아닌듯 겉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하산길이라고 하여 늘 내려가는것만 아니다. 급경사를 만나 정신없이 산을 내려가다 문득 장정들의 건각을 닮은 소나무를 만난다.
양철지붕 위의 뜨거워진 욕망처럼 너절해진 추억들이 떠오른다.
따뜻한 욕탕에 앉아 모락 모락 피어 오르는 김을 나른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으른 꿈을 꾼다.
오늘 산길이 그렇다.
노루발
15:02
주천면,추억의 장소다.
몇해전에 낙동 산악회를 따라 이 구간을 걸은적이 있다. 여기서 고기리 노치 마을까지 포장도로를 걸어가며 왜 이런짓을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 했던 바로 그 길이다.
하지만 여기도 엄연한 대간길임이 틀림없다. 재미도 없는 포장도로를 두번이나 걷는다는것은 어리석은 일 오늘은 더위에 지친 회원님들과 버스를 타고 기분좋게 패스.
15:10
다시 노치 마을
금년 일월 이곳을 출발하여 팔자에 없는 대간길을 헤매다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스무 한차례의 산행을 통해 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나는 여전히 후미고 나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산길에대한 두려움이 한낮의 뙤약볓에 으슥한 그늘을 만든다. 마음도 몸만큼 무겁다.
- 후 기 -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나는 걸었지만 나는 산행을 통해 아무것도 바란바 없다.
그렇다고 산행을 통해 얻는 고통을 후회하거나 원망할 수는 더욱 없는 노릇이다.
진정한 사랑이 댓가를 바라지 않는것처럼, 삶이 은연중에 사랑으로 완성되기도 하는것처럼 내 흘린 땀과 고통으로 인해 내 삶이 더 가슴으로 이해되기를...
Saint Saens "the Swan" from Carnival of the Animal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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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poll 님^^
지리산 서북능선 땀흘리며 걸었던 대간길이
아롱지며 상상으로 회상됩니다.
만복대 아래 중식시간 숲속에서 건네준 팥빙수 정말 잘 먹었습니다.
수십년을 다녀도 아이스케키는 먹어 보아도 팥빙수는 처음이구요ㅎㅎㅎ
이래저래 우연일치로 만복대가 맺어준 또 하나의 소중한 인연들
멀고 험한 대간길에 안산 즐산하시고 다음구간에서 또 만나요^^
올린사진들 소중히 잘 보고 갑니다.
동심이님 곁에서 함께 걸어봤다는것만으로도 소중한 추억이 될것같습니다.
늘 인자하신 모습,산에대한 강한 열정들을 지켜보며 저도 동심이님처럼 나이들어가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래로는 지리와 덕유를 이으며 서서히 속리로 들어갑니다요
입니다.....
위로는 태백과 설악의 자락에서
한걸음 한걸음 무거운 걸음 하시며 채곡 채곡 쌓아 가십니다
함께 해 주시는 동무가 있어 외롭지 않네요
건강 잘 챙기시어 다음 구간을 기약 하셔야죠
백두대간을 시작 한지도 벌써 반년이 되어 가는군요.
그동안 맑은공기.좋은 경치.좋은 사람들과 산행을 한다는게..
다시금 잘 했다는 생각과 지금까지의 모든 분들이 고맙게 느껴 지네요..
웅장하고 근엄한 산들을 정복하면서 나와의 싸움을 이겨간다는 생각에
더욱더 대간길이 그리워 집니다.
항상 같이 동행하는 님들이 고마울 따름 입니다.,
좋은글과 사진 잘 보고 갑니다.
지리의 고개들, 봉우리들 하나 하나에 이유없는 곳이 없군요.
무식 산꾼이 되지 않기 위해 산행 전 공부 좀 하고 가야겠습니다. 알고 가면 느낌이 다를 것 같습니다....
그냥 귀동냥 한것입니다.
지명의 유래를 알면 더 산길이 재미있고 산을 바라보는 관심도 달라질것 같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우리 고어,심지어는 백제시대나 신라시대에 쓰이던 언어의 화석같은것들이 지명에는 많이 남아있는것 같습니다.
지리산만 해도 두류-두리-디리-지리로 변했다는데 두리라는것도 달,들이라는 고어 즉 넓은 장소를 일컫는 말에서 나온것 같습니다.
늙은 영감에 가깝습니다. 모르고 지내시는 편이 좋을것 같네요 ㅋㅋ
느낌을 글로 거석해야 하는디...
풀지 못하는 슬픔이야...
그냥 느낌만 가지고 갑니다...
늙은영감? 그건아닌데요ㅋㅋ
산에서빙수드셔보셨나요?
폴님 점심메뉴 빙수 압권이었습니다
역시 이웃을 잘만닌야된다니까요.
잘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