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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베라에서의 불평(1-3)
쓰라린 시련들은 인간 생활에서 늘 일어나는 경험이며, 우리 모두에게 닥치는 일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당황케 하고 놀라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나에게만 일어나도록 하실까?’라고 묻습니다. 시련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닥칩니다. 불평과 원망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그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것은, 불평과 불만이 하나님께 대한 커다란 불신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1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1-3)
이스라엘 백성들은 1-10장까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질서에 따라 잘 조직되고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은 불평의 여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출애굽 직후부터 이어진 불평이 11-14장까지 이어집니다: 다베라에서의 첫 번째 불평(11:1-3), 음식에 대한 불평(11:4-35) 그리고 아론에 대한 불만(12:1-16)으로 불신으로 인한 약속의 땅 거절(13:1-14:45)을 당합니다.
다베라에서의 첫 번째 불평 내용은 아주 간단하게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인 장소가 어디인지, 백성들의 불평 이유가 무엇인지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짧지만 소위 광야 불평 내용이 가지고 있는 모든 형태의 패턴이 모두 나타납니다. 그래서 다베라 불평 줄거리는 이후에 이어질 다른 불평 내용들의 샘플처럼 소개되는 것 같습니다. 33:16-17에서는 광야 여정을 시내 광야, 기브롯 핫다아와, 하세롯 세 곳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다베라라는 지명 자체가 있었는지조차 논쟁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9:22에서 다베라와 기브롯 핫다아와를 다르게 명명하고 있기 때문에 다베라라는 구별된 장소가 실제로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백성들이 정확히 무엇에 대해 불평하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들이 악하게 불평했으며, 그 불평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지금은 불평의 내용보다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불평하는 그들의 모습 자체가 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떠날 때를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얼마나 희망에 부푼 여행을 시작했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몇 날이 지나지 않아서, 광야의 어려운 환경을 만나자마자 신속하게, 지속적으로 불평합니다. 하나님의 선대를 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불신앙과 불평입니다.
백성들의 불평에 대해 하나님이 즉각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으셨고, 진노하셨고, 여호와의 불을 보내셨습니다(1). 문학적으로 동사만 반복함으로 주어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형태입니다. 출애굽기에 나타나는 광야 불평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전개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백성이 광야에서 불평할 때 하나님께서 공급하심으로 응답하시지만, 민수기에서는 즉각적인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여호와의 불을 보내 백성의 진영 끝을 사르게 하셨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여호와의 불은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상징이든, 심판의 상징이든 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해서 사용됩니다(출 3:2;19:18; 레 9:24;10:2).
‘여호와의 불’은 진영 끝에 임했는데, 진영 끝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정결의 영역인 진영 안과 밖을 나누는 경제 지점을 뜻합니다. 첫 번째 불평 줄거리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백성들 한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영 끝에 걸쳐있는데, 이후 줄거리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진영 안쪽으로 점점 더 그 중심을 이동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불이 진영 끝을 사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진영의 경계 지점에 있는 텐트나 물체들을 불태웠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진영 끝에 있던 백성을 불살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레위기 10장 2절에서는 여호와의 불이 나타났을 때 심판의 대상이던 나답과 아비후를 불살랐습니다.
즉각적으로 나타난 여호와의 심판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모세는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고 곧 하나님께 중보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그치게 하십니다. 모세는 이곳의 이름을 ‘다베라’라고 불렀습니다. 다베라는 ‘불태움’을 의미합니다.
기브롯 핫다아와에서의 불평(4-15)
이 시대는 반항의 시대입니다. 불평, 불만, 원망의 시대입니다. 어디를 돌아보아도,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반항적이며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모든 인간의 마음이란 그렇게도 타락한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이스라엘 백성들만 강퍅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고 불신앙적인이며 완악하고 강퍅한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4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7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8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9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10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11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12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13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15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4-15)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과 원망은 그들 중의 어떤 무리, 즉 들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에 의하여 부추겨졌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면서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연합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실체로 애굽의 음식을 탐하고 갈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 백성들의 불평(4-9)
다베라에서 불평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했지만, 과거의 사건에서 백성들은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신속하게 불평하며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합니다. 그런데 그 불평은 훨씬 광범위하고 심각해 보입니다.
이번 불평은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주도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함께 살고 있는 이방 족속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실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수많은 잡족들이 이스라엘과 함께 출애굽 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들의 불평은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라는 말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출애굽기의 병행 구절에서 표현된 것과는 약간 다른 무게를 가집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소위 ‘누가’라는 관점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그들이 애굽 땅에서 누렸던 것들에 대한 묘사에 집중한 반면, 민수기는 ‘누가’라는 의문사를 추가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 이야기와 모세의 리더십 이야기를 연결합니다. 그들의 불평은 현실의 어려움과 애굽에 있었을 때의 과거를 대비하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기억을 떠올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모든 것들을 값없이 먹었다고 회상합니다. 비록 음식의 목록들은 과장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값없이 먹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애굽에서 풍성하게 누릴 수 있었던 애굽의 음식들은 자신들의 힘겨운 노예 생활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들은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과 구원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기억하든 간에, 그들의 애굽 생활은 대단히 고달팠고 그 고통의 중합으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었었다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출 2:23-25).
본문의 방점은 고기가 없음이 아니라 ‘값없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공짜 만나를 먹는 것처럼, 자기들 소유의 짐승을 잡지 않고도 값없이 고기 먹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불평은 만나에 대한 불평으로 옮겨 갑니다. 처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을 때 감사하며 감격했지만, 이제 일상이 되어 내리는 만나는 더 이상 감사 제목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라는 말에는 만나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2) 모세의 불평(10-15)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은 자연스럽게 모세의 중보기도로 이어져야 하는데, 이번에는 양상이 다르게 전개됩니다. 백성들이 각각 장막 문에 서서 우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향하여 크게 진노하셨습니다(10).
그런데 모세는 백성을 꾸짖거나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리지 않고, 대신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아마도 모세는 백성들의 불평에서 은근히 자신의 지도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부분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불평에는 그와 백성들과의 거리감이 현저하게 느껴집니다.
모세는 먼저 이스라엘 언약 백성들을 “이 모든 백성”(11,12,13)이라고 지칭하면서 백성들과의 거리감도 뚜렷하게 느껴지게 합니다. 백성들이 극단적으로 떼를 쓰고 있다고 항변합니다. 모세의 기도에 힘들고 외로운 ‘나’가 가득합니다.
15절에서는 모세의 불평스런 마음이 극대화합니다. 급기야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주시길 간구합니다. 모세의 불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음식과 관련된 불평에서 시작해서 자기 지도력의 문제로 명확히 옮겨갑니다. 백성들에게 고기를 공급할 수 없음을 인정함으로 더 이상 자신이 백성들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14).
모세가 지도력의 한계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이 본문의 표현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14절의 “나 혼자”라는 표현은 이중으로 강조된 형태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음식을 두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자기 지도력의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는 모세를 향해서도 응답하셔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망각과 하나님에 대한 몰이해에서 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조금도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먹던 음식이 없어서 그것을 먼저 구하기 전에 없는 것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불평을 너무 쉽게 늘어놓고, 이스라엘 백성은 영향을 받습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가 멈출 때 기억의 왜곡이 일어났고, 자신들을 멸망으로 이끌 무모한 선택을 충동적으로 감행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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