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석의 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 1 - 16 (끝) 回 |
[고수석의 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 16 回 (끝)] 김정일과 후진타오 |
 | 북한도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중국이 거두었던 효과를 기대했습니다
첫째, 외부의 위협(특히 미국)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1956년 한 때나마 든든한 안보의 후원자로 믿었던 소련이 배신하자 자기 생존의 본능에 따라 핵을 보유하려고 했지요. 북한도 1992년 중국이 한 · 중 수교를 맺으면서 자신을 배신하자 더 이상 중국을 믿을 수 없어 생존의 본능에 따라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지요.
둘째, 국가위신이라는 명목 아래 국가는 국제정치 혹은 국내정치의 정책 및 전략적 필요성으로 핵을 보유하려고 했습니다. 북한은 핵보유국이 된다는 것이 중국처럼 자신의 과학 및 산업의 힘을 증명해 보이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핵무기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강대국들로부터 이목을 끌 수 있다고 계산했지요.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이후 북한의 계산대로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가 북한을 집중했지요.
1964년의 중국과 2006년의 북한은 전 세계에서 보면 약소국이었지요. 그리고 양국은 당시 외부의 위협이 있었지요. 중국은 미국 · 소련, 북한은 미국 · 한국이 자국을 위협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약소국인 중국과 북한은 핵무기를 선택했습니다. 약소국이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핵무기를 선택할 경우 그 유용성은 군사적으로 거의 없지만 정치적 · 심리적인 측면에서 유용성이 있지요.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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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15)] 김정일과 후진타오 |
 | [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15)] 김정일과 후진타오
1964년 10월 16일 신장 지치구 뤄부포(羅布泊) 사막에 세워진 높이 120m 철탑 위에 중국 최초의 원자탄이 터졌습니다. 오후 3시 섬광과 함께 버섯구름이 일었지요. 오후 5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인민대회당에서 음악무용극 ‘동방홍(東方紅)’ 출연자 3,000여명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1차 핵실험 성공을 발표했습니다.
중국이 1958년부터 1964년까지 7년 동안 1차 핵실험에 쏟아 부은 돈이 적어도 40억 달러에 달합니다. 그 당시 중국의 연평균 GNP가 500억 달러에 불과했으니 핵개발 비용이 GNP의 1.5%나 되었지요.
핵무기 개발에 소요된 비용은 공업화와 민간 생활 향상을 위해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재래식 정규군의 장비와 무기 현대화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있었지요.
1959년 있었던 펑더화이(1898~1974)와 황커청(1902~1986) 등을 포함한 군부숙청도 핵무기 개발을 위시한 국가 자원의 할당에 대한 지도층 내의 의견 대립이 그 발단이었습니다. 핵무기 개발의 문제는 중국의 군부 및 당을 위시한 권력층 내의 끊임없는 충돌의 원인이 됐다고 할 수 있지요. 북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경제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엄청난 비용을 들여 핵개발을 했지요. 핵개발 할 당시 중국과 북한의 지도자들은 경제난보다 안보를 선택했습니다. 우선 배고픔보다 생존이 더 급했던 것이지요.
저우언라이는 1964년 12월 “우리는 핵실험을 성공했다. 서방인들이 우리를 줄 곧 불러왔던 ‘동양의 늙은이’라는 별명은 이제 떨쳐버릴 수 있게 됐다” 고 강조했습니다. 중국은 성공적인 핵실험을 통해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지요.
중국은 실제로 1971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됐고 강대국 정치서열에 참여할 수 있는 티켓을 얻은 것도 성공적인 핵실험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UN 대표였던 차오관화(1912~1983)는 1971년 11월 26일 UN에서 핵무기에 대한 중국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발표했습니다.
첫째, 중국은 미 · 소와 같은 핵강대국의 대열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므로 비핵보유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가 참가하는 세계회의에서 핵무기의 완전금지 및 폐기의 문제를 검토한다.
둘째, 핵보유국은 이미 중국이 실행한 것 같아 언제 어느 상황하에서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셋째, 특히 비핵보유국, 비핵지역, 평화지역으로 설정된 곳에서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
넷째, 외국 영토에 있는 모든 핵기지를 철거하고 핵부대, 핵무기 및 운반수단을 철수한다.
중국이 최초불사용(No-First-Use=NFU)을 선언한 것은 주변국이 불안감을 가져 핵무기 개발을 하려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자신이 NFU를 약속함으로써 미국과 소련으로 하여금 같은 약속을 하도록 도덕적 압력을 가하는 것이지요.
중국은 아슬아슬하게 1960년대 후기와 1970년대 초기에 핵강대국(특히 소련)의 선제공격을 모면했으며 1970년대 후기에 미 · 중간의 수교로 미국에 의한 핵공격의 가능성마저 줄였습니다. (계속)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3-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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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14)] 김정일과 후진타오 |
 | [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14)] 김정일과 후진타오
후진타오가 평양에 갔을 때 그는 작심한 듯 김정일에게 중국의 경제 발전과 개혁 · 개방의 성과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면서 설명했습니다. 그는 “1974년부터 2004년까지 중국은 연평균 9.4%씩 성장해 국내 총생산액이 1,473억 달러에서 1조 6,494억 달러로 늘어났습니다. 2004년 말까지 중국에서 실제로 사용한 외국 직접 투자액은 누계로 5,621억 달러에 달합니다” 라고 전달했지요.
그리고 그는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가장 큰 개발도상국으로써 인구가 많고 기초가 약하며 발전이 매우 고르지 못하고 발전 과정에서 여전히 적지 않은 모순과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중국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의기 분발하여 개혁 · 개방과 현대화 건설을 밀고 나가고 있으며 초보적으로 부유한 사회를 전면적으로 건설할 데 대한 웅대한 목표를 실현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위업의 새로운 국면을 끊임없이 개척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라고 말했어요.
후진타오는 중국식 사회주의의 성과를 설명해 김정일에게 개혁 · 개방의 필요성을 간접적으로 강조했습니다. 이는 덩샤오핑이 1983년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에게 개혁 · 개방의 성과와 문제점을 설명한 것과 비슷합니다. 비록 개혁 · 개방은 어렵지만 극복할 수 있는 선택이라는 것이지요.
후진타오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결국 핵을 선택했지요. 후진타오는 참을 만큼 참았는지 행동으로 그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중국은 북한이 핵실험을 한 지 4일 만에 열린 유엔 대북 제재 결의안 1718호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1718호는 군사적 공격을 제외한 모든 경제제재가 포함돼 있지요.
류젠차오 중국 대변인은 “북한은 반드시 국제사회의 호소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야 하며 빠른 시일 내에 6자 회담에 복귀해야 합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중국은 유엔의 각종 결의안을 이행할 것이며 1718호 결의안을 엄격히 준수할 것” 이라고 밝혔지요.
중국은 한반도의 비핵화의 원칙 속에서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엄중한 문책과 제재의 동참을 호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우려해 핵실험에 대한 군사적 공격에는 반대했습니다.
북한은 2006년 10월, 2009년 5월, 2013년 2월 세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했지요. 김정일은 보란 듯이 성공했습니다. 중국의 핵실험과 북한의 핵실험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의 핵실험을 먼저 꺼내겠습니다. 중국은 1956년부터 핵무기를 가지려고 했습니다. 중국은 당시 국제적으로 고립됐고 미국은 물론 소련과도 대립했던 시기였지요. 마오쩌둥은 “원자탄을 가져야 한다. 남들에게서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 물건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고 말했습니다. 지금 북한이 미국은 물론 한국과 대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지요.
마오쩌둥은 중 · 소 관계의 악화로 소련 과학자들이 철수(1959~1961년)한 뒤 ‘596 프로젝트’를 진행했지요. 596은 중국이 독자적 핵개발에 나선 1959년 6월을 뜻합니다. 소련 과학자들이 철수할 즈음 중국은 이미 독자적인 핵개발 능력을 확보했습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서기처 총서기였던 덩샤오핑은 연구원들을 만나 “비장한 마음으로 일해라. 잘못했을 경우 모든 책임은 우리 서기처가 진다” 고 다그쳤지요. 그 때 덩샤오핑이 맡았던 총서기는 지금의 총서기가 아닙니다. 지금의 총서기에 해당하는 당시의 직책은 당주석 이었습니다. 당시 당주석은 마오쩌둥이 맡고 있었지요. (계속)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3-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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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13)] 김정일과 후진타오 |
 | [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13)] 김정일과 후진타오
2006년 10월 9일 오전 10시 15분.
후진타오는 제16기 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6중 전회)를 진행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북한이 20분 뒤에 핵실험을 한다는 보고를 받았지요. 김정일이 이런 중요한 일을 사전에 협의도 없이 20분 전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입니다.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는 2시간 전에 알려준 것과 대조적이었지요.
후진타오는 몇 개월 전부터 그토록 달랬지만 결국 눈앞의 현실로 드러나자 망연자실할 뿐이지요. 그는 긴급회의를 소집해 중앙외사영도소조(조장 후진타오)와 외교부 보고를 듣고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중앙외사영도소조는 중국의 대외정책을 결정하고 주도하는 기구입니다. 후진타오는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중국의 입장을 발표합니다.
루젠차오 대변인은 “북한이 국제사회의 광범위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悍然)로 핵실험을 했다” 고 말합니다. 여기서 쓰인 ‘제멋대로(悍然)’라는 표현은 중국어에서 극도로 분개할 경우에 사용하지요. 1969년 소련과 우수리강 국경분쟁과 1979년 베트남과 무력충돌 때 사용했다가 27년 만에 외교부 대변인의 입에서 나왔지요. 후진타오의 분노를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2003년 3월 국가주석이 된 이후 후진타오는 북핵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이유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과 이로 인한 대중 압박이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지요.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 29일 연두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습니다. 이에 앞서 미국 국방부는 2002년 1월 8일 의회에 핵태세보고서(NPR, Nuclear Posture Review)를 제출하면서 선제 핵공격과 실전용 소형 핵무기 개발을 대한 의지를 담았습니다.
과거의 미국의 핵전략은 상대방이 핵을 먼저 사용하지 않는 한 핵으로 보복하지 않고 비핵국가에 대해서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안전보장 개념이었지요. 북한은 이런 미국의 입장 변화에 ‘일사부전’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후진타오는 이런 대외적인 악조건에서 취임했고, 미국은 그에게 적극적으로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미국은 중국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국의 생각과 달리 북한은 중국의 압력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학계에서는 중국의 대북 영향력을 놓고 찬반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요.
일부는 미국의 시각처럼 그 동안의 북 · 중 관계를 고려해 중국이 압력을 행사하면 북한이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중국이 강대국이고 북한이 약소국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중국의 주장대로 북한도 엄연한 주권국가이기 때문에 중국이 압력을 행사하더라도 선별적으로 따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 논쟁의 결과를 보면 후자가 판전승을 거두었습니다. 중국이 북한에 어느 정도 압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압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진타오가 선택한 것은 ‘적극적인 설득’입니다. 그 가운데 일정 부분 압력도 포함돼 있었지요. 그는 우선 제2차 북핵 위기를 대화로 풀기 위해 6자 회담을 기획하고 2003년 8월부터 차분히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북한이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자 난항을 거듭합니다.
그 때마다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 (2003년 10월 29~31일), 리창춘 정치국 상무위원 (2004년 9월 10~13일), 탕자쉬안 국무위원 (2005년 7월 12~14일), 우이 부총리 (2005년 10월 8~11일), 후이량위 부총리 (2006년 7월 10~15일) 등을 보냈지요. 그리고 이들이 방북할 때는 경제 지원도 포함돼 있었지요.
우방궈 상무위원장이 방북했을 때는 북한의 요구대로 ‘대안친선유리공장’을 건설해 주었지요. 건축 비용은 약 2,400만 달러가 들었습니다. 이것만으로 부족해 후진타오는 김정일을 2004년 4월, 2006년 1월 등 두 차례 중국으로 초청했고 자신도 2005년 10월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계속)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3-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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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12)] 김정일과 후진타오 |
 | [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12)] 김정일과 후진타오
김정일은 영빈관에서 첸치천 일행을 맞습니다. 그 자리에는 제1차 북핵 위기의 해결사였던 북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도 배석했지요. 첸치천은 중국 정부가 한반도 비핵화를 원하고 있다는 점과 동시에 북핵 문제는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을 모색하겠다는 방침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첸치천은 중국의 개혁 · 개방의 역사를 설명합니다. 그는 “중국이 개혁 · 개방으로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됐습니다. 그것은 평화적인 국제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했지요. 우리 방식을 당신들에게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경험을 공유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첸치천은 김정일이 싫어한 덩샤오핑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설명은 덩샤오핑이 했던 말과 똑같았지요.
김정일도 이에 질세라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그는 “북한과 중국은 조건이 전혀 다릅니다. 북한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나라입니다. 중국 같은 대국이 아니지요. 경제 개혁이 중국에 도움이 됐을지 모르지만 중국 방식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평화로운 국제 환경이 조성돼야 경제가 발전한다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평화로운 환경에서 살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땅에 평화로운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것은 미국 잘못이지 우리 탓은 아니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중국과 북한을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위 두 사람의 대화만큼 양국의 입장을 솔직하게 드러낸 대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우언라이 이후 중국 최고의 외교관으로 평가받던 첸치천이었지만 일단 한 발짝 물러선 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중국은 제2차 북핵 위기가 심각해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이 북한과 미국을 중개할 것이며 이를 위한 3자 회담을 주선하려고 합니다. 장소는 베이징이 어떻겠습니까? 꼭 참여해 주시길 바랍니다” 라고 제안했지요.
이에 김정일은 난색을 표시했지만 첸치천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첸치천은 “3자라고 하지만 주역은 북한과 미국입니다. 북한과 미국이 논의하고 중국은 잠자코 듣기만 할 것입니다. 중국이 있던 없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북한과 미국이 만나는 것이 중요하지요. 미국은 다자회의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3자 회담은 그런 미국의 입장을 감안한 것입니다” 라며 설득했습니다.
김정일은 잠시 귀가 솔깃했습니다. 그는 “북미 양자 회담은 확실히 가능하겠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첸치천은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대답했고 김정일은 “그러면 참가하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김정일이 미·중과의 3자 회담에 참가하기로 결정하는데 중국의 설득이 결정적 역할을 한 셈입니다. 중국은 이후 개최된 3자 회담과 그 연장선인 6자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의 역할을 절충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습니다.
중국이 제2차 북핵 위기 해결과정에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중국 외교노선의 변화라고 할 수 있지요. 이를 통해 중국이 얻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북핵 회담을 성사시킴으로써 국제 사회에서 책임 있는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했습니다. 둘째, 북핵 문제를 단순히 중국과 한반도 차원이 아니라 동북아 지역으로 확대하면서 이 지역에서 미국보다 중국의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셋째는 북핵 문제를 원만히 해결함으로써 미 · 중 관계를 우호적으로 발전시켜 국제사회에서 운신의 폭을 확대했습니다. (계속)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3-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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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11)] 김정일과 후진타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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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의 화평발전을 북한에 적용하면 중국은 적극적인 외교간섭으로 한반도에서 전쟁가능성을 줄이고 평화지향적인 모습을 국제사회에 선전하는 이중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후진타오는 2003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통해 국가주석이 되자마다 ‘북한 핵위기관리를 위한 영도소조’를 새롭게 구성했지요. 조장은 본인이 직접 맡았습니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국 대통령 특사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개발 의혹을 제기했고 이에 북한이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면서 발생한 제2차 북핵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지요.
후진타오는 장쩌민보다 김정일에게 공격적이었습니다. 중국 제4세대의 성향이라고 보면 됩니다. 북한의 돌발적인 행동을 과거처럼 감싸고 이해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후진타오는 2003년 8월 김정일에게 “끊임없는 전쟁 준비를 중단하고 허약한 경제를 건설하는 일에 집중하라” 고 충고했지요.
그는 자신과 중국의 원로 세대는 전통적으로 북한과의 밀접한 동맹관계를 중시했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한반도의 비핵화를 보장하기 위해 국제사회와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시사하면서 3가지 제안을 했어요.
첫째, 북한이 경제자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둘째, 중국식 개방정책을 추진하며 셋째,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을 중단함으로써 주변국들과 관계 개선을 한다면 중국이 앞장서서 북한의 안보를 국제적으로 보장하고 북한 경제 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지요.
그의 제안은 왕이 현 외교부장(8월 7일 방북), 쉬차이허우 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8월 20일 방북) 등의 대북 외교사절을 통해 북한 지도부에 전달했지요.
후진타오와 김정일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6자회담입니다. 6자회담은 2003년 8월 27일~29일 열린 제1차 회담을 시작으로 2008년 12월 수석대표회의를 끝으로 현재까지 열리지 않고 있어요.
제1차 6자회담으로 얘기하기 전에 그 보다 4개월 앞서 열린 3자 회담(2003년 4월 23~24일)부터 시작하지요.
3자 회담은 중국이 2003년 3월 첸치천 부총리, 왕이 부부장, 푸잉 아주국장을 김정일이 잠시 묵고 있었던 북한 삼지연에 보내 그에게 다자회담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면서 시작됐어요. 북한이 NPT를 탈퇴한 지 2달여만입니다. 과거 제1차 북핵 위기때 ‘강 건너 불구경’하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어요. (계속)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3-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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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10)] 김정일과 후진타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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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의 외교전략은 화평발전입니다. 한마디로 평화적 발전이지요. 이는 평화적 부상이라는 화평굴기(和平굴起)에서 출발한 개념입니다. 화평굴기는 2003년 11월 3일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부교장이었던 정비젠이 아시아 보아오 포럼에서 ‘중국의 평화적 부상의 새로운 방향과 아시아의 미래 (中國和平굴起新道路和亞洲的未來)’라는 주제로 강연하면서 처음으로 제기했습니다.
이 개념은 2003년 12월 후진타오 주석의 ‘마오쩌둥 탄생 110주년 기념 좌담회’ 와 원자바오 총리의 하버드 대학 강연 등에서 전폭적으로 지지를 받으면서 중국 제4세대 지도부의 외교전략으로 등장했지요. 정비젠은 후진타오의 측근으로 후야오방(1915~1989) 전 총서기의 비서와 중앙선전부 부부장을 역임한 외교브레인입니다.
정비젠이 발표한 화평굴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민주정치를 기본 내용으로 하는 경제체제와 정치체제의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평화부상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든다.
둘째, 인류 문명의 성과를 대담하게 받아들이는 한편 중화문명을 널리 알림으로써 평화부상을 실현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를 만든다.
셋째, 도시와 농촌의 발전, 지역의 발전, 경제사회의 발전,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발전, 국내 발전과 대외개방을 포함한 다양한 이익관계를 통일적으로 고려해 평화부상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 정비젠은 화평굴기론을 제기하면서 과거 강대국의 등장이 독일과 일본처럼 전쟁과 갈등을 수반했다면 중국의 부상은 평화적이라는 점에서 여느 역사적 사례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지요.
하지만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화평굴기는 평화보다는 굴기에 주목하면서 중국위협론을 다시 촉발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받지요. 그러자 중국 지도부는 2004년 4월 이후 화평굴기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이를 수정해 발전시킨 화평발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은 2005년 12월 ‘중국의 화평발전 노선(中國的平和發展道路)’이라는 백서에서 화평발전을 후진타오 정부의 외교노선이라고 밝히지요. 백서에서 화평발전은 평화적인 방식과 과정을 통해 중국의 발전을 실현하는 것이며 중국의 발전을 통해서 세계 평화와 공동번영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중국 정부는 화평발전이 중국의 현대화 건설의 필연적 결과이며 중국 역사문화와 전통의 필연적 선택이고 동시에 오늘의 세계발전의 필연적 추세라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발전이 세계에 ‘위협’이 아니라 거대한 ‘기회’라는 점을 강조하지요.
중국의 이런 외교정책의 변화는 북한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중국은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때 미국과 북한의 문제로 규정하고 가능한 제3자의 입장을 취했지요. 그러나 2003년 제2차 북핵 위기가 발발하자 다자간 협상에 의한 문제해결에 동의하고 6자회담을 중재할 뿐 아니라 북한을 다각적으로 설득해 6자회담에 참여하도록 종용합니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지요. (계속)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3-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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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9)] 김정일과 후진타오 |
 | [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9] 김정일과 후진타오
그동안 김정일과 덩샤오핑 · 장쩌민의 관계를 다뤘습니다. 이 시기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북 · 중 관계는 혈맹에서 전통적 우호협력 관계로 변했고 둘째, 북핵 1차 위기를 거치면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우려가 커졌고 셋째, 중국의 부상에 따라 대북 영향력도 확대됐다는 것이지요.
오늘부터 김정일과 후진타오를 다루겠습니다. 덩샤오핑 · 장쩌민과 김정일이 ‘불편한 동거의 역사’ 였다면 후진타오와 김정일은 어떤 역사였을까요?
김정일과 후진타오는 1942년생으로 동갑내기입니다. 굳이 생일로 따지자면 김정일이 2월 16일생이고 후진타오는 12월 21일생이지요. 김정일이 10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두 사람의 공식 직책을 살펴보면 후진타오는 중국 공산당 총서기, 국가주석,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 중국의 당 · 정 · 군을 쥐고 있었지요. 김정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노동당 총비서, 국방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 등.
국방위원장이 북한 정부를 대표하는 헌법상의 직책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지요. 김정은은 아버지와 같은 직책을 피하기 위해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라며 ‘제1’을 추가한 것입니다. 북한은 1998년 9월 헌법개정으로 북한 정부를 대표했던 국가주석을 폐지하고 그 권한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넘겼지요. 명목상입니다.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2004년 4월 (베이징), 2005년 10월(평양), 2006년 1월(베이징), 2010년 5월(베이징), 2010년 8월(베이징), 2011년 5월(베이징) 등 6차례입니다. 후진타오가 국가주석이 되기 이전에 중국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제1서기 (1984년)과 정치국 상무위원 (1993년) 으로 평양을 방문했지만 두 사람이 만났는지는 문헌상에 없어요.
후진타오는 2002년 11월 8~14일 열린 중국 공산당 당대회에서 장쩌민의 바통을 이어받아 총서기에 선출됐습니다. 신중국 제4대 황제였지요. 그를 지지했던 제4세대는 장쩌민으로 대표되는 제3세대와 생각이 달랐어요. 외교전략은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화평발전(和平發展)으로, 경제전략은 선부론(先富論)에서 균부론(均富論)으로 바꾸지요. 북한과의 관계는 외교전략에 해당되므로 화평발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외교적 변화는 국제환경의 변화, 국내상황의 변화, 그리고 그 양자의 복합적 변화라는 동인에 의해 영향을 받지요. 후진타오 체제는 국제적 환경에서 다시 제기된 중국위협론(China Threat Theory)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중국의 부상에 대한 국제적 협력을 유도해야 했어요. 국내적 상황은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제3세대 지도부와 차별화된 외교전략이 필요한 상황이었고요.
중국위협론은 1990년대 장쩌민을 비롯한 중국의 제3세대 지도부가 경제적 부흥을 바탕으로 종합국력의 신장 및 강대국화를 시도하자 1997년 출판된 리처드 번스타인 · 로스 먼로의 The Coming Conflict with China 와 2000년에 출판된 빌 거르츠의 The China Threat: How the People's Republic Targets America에서 제기됐지요. (계속)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2-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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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8)] 김정일과 장쩌민 |
 | [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8] 김정일과 장쩌민
장쩌민은 2002년 10월 북핵 위기가 다시 발발하자 대북 강경책으로 일관한 미국 부시 행정부와 보조를 맞추려고 했어요. 그는 2002년 11월 제16차 당대회를 통해 총서기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물려주지만 2003년 3월 15일까지 국가주석으로 있는 동안 미국과 한 목소리를 냈지요. 장쩌민은 2003년 1월과 2월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2003년 1월 10일)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장쩌민은 만약 김정일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두 가지를 걱정해야 했어요.
첫째, 일본의 핵무장 충동과 함께 미국이 대만에 핵탄두를 배치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둘째, 북한이 경제 제재로 붕괴하면 중국은 사회주의 형제국가의 붕괴를 지켜보게 될 뿐 아니라 대규모 난민을 맞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지요.
그는 ‘애매한 현상유지’ 를 통해 두 가지의 극단적인 상황을 피하고자 했어요. 장쩌민은 북핵 문제를 접하면서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김정일과 가까이 할 필요가 있었지요. 김정일도 북한 보다 미국에 더 가까이 가고 싶어하는 장쩌민을 멀리할 수 없었어요.
김정일은 장쩌민과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기 때문에 북 · 중 관계가 더 돈독해지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어요. 장쩌민이 과거보다 더 실용적인 여건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자신보다 16살 많은 장쩌민과 좋은 관계 속에서 북한이 처한 경제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북한의 경제성장을 기대할 뿐이었지요. 그래서 김정일은 2000년과 2001년 두 차례 중국을 방문하면서 베이징, 상하이 등에서 중국의 경제성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요. 그 결과로 2002년 7월 경제관리개선조치, 개성공단 본격화 등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습니다.
장쩌민과 김정일은 가슴보다 머리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가슴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진한 공감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양국의 실리를 위해 겉으로는 웃었지만 치열하게 두뇌 싸움을 한 것이지요. 장쩌민은 김정일이 과감한 개혁 · 개방을 도입해 경제 발전을 지속하고 중국의 든든한 지원자가 돼 주기를 기대했지요. 김정일도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지만 중국식으로 과감하게 따라가기는 여전히 주저했지요.
장쩌민과 김정일. 두 사람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양국의 지도자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외교 관계도 새롭게 정리(혈맹→전통적 우호협력 관계)하고 새 출발을 했지요. 결국 새로운 출발은 북한과 중국을 더 이상 혈맹이라고 부르지 않게 됐습니다. (끝)
다음은 ‘김정일과 후진타오’ 편이 이어집니다.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2-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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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7)] 김정일과 장쩌민 |
 | [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7)] 김정일과 장쩌민
북한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아사자가 300만명에 달했어요. 북한은 이 시기를 ‘고난의 행군’ 이라고 정하고 위기를 극복해 나갔지요.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이 1938년 12월~1939년 3월 일본군의 토벌작전 때문에 만주에서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100일간 행군했던 어려운 시기를 말합니다.
그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김정일은 1997년 조선노동당 총비서가 됐어요. 아버지가 없는 북한을 통치하는 진정한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지요. 아버지가 사망한 1994년부터 총비서가 된 1997년까지 3년간은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북한을 통치했어요.
중국 권력도 1997년이 큰 분기점이었습니다. 중국 개혁 · 개방의 총설계자인 덩샤오핑이 1997년 2월 19일 사망했지요. 장쩌민은 공산당 총서기 · 국가주석 ·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을 쥐고 있었지만 덩샤오핑이 생존했을 때는 종이호랑이였지요. 이제 드디어 장쩌민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1997년은 김정일과 장쩌민에게 최고지도자로서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해였습니다. 북 · 중 관계는 1992년 한 · 중 수교이후 7년간 냉각기를 거친 뒤 1999년부터 조금씩 녹기 시작했어요. 그 사이 양국 수뇌부의 상호 방문은 일절 없었지요. 관계 정상화는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1999년 6월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시작됐지요.
장쩌민은 김정일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 답은 장쩌민이 밝힌 16자 방침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전통을 계승하고(繼承傳統), 미래를 향하며(面向未來), 선린우호(睦隣友好) 속에 협력을 강화한다(加强合作)이지요. 이것은 장쩌민이 2001년 9월 3~4일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에게 제시한 내용이지요.
한마디로 북한과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애매한 현상유지’를 하고 싶다는 뜻이지요. 제1차 북핵위기(1993~1994)나 광명성 1호 발사(1998년 8월) 등 동북아 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이나 북한의 급변 사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미이지요.
장쩌민은 1999년 6월 3~7일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 김영남 위원장에게 양국의 관계를 혈맹 관계에서 전통적 우호협력 관계로 바꾸자고 전달했어요. 이는 덩샤오핑이 1978년 이후 사용하기를 꺼렸던 ‘혈맹’이라는 단어 대신에 양국 관계를 공식적으로 ‘전통적 우호협력’으로 정리하자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2001년 평양을 방문해 그런 입장을 16자 방침에 담았지요.
장쩌민이 ‘혈맹’ 대신에 ‘전통적 우호협력’으로 대신하자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중국은 자신의 실리에 따라 북한이 반대할 수 있는 결정도 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특히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함에 따라 과거의 부담에서 벗어나 관념적인 관계에서 실제적인 관계로 발전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둘째, 무조건적인 대북 군사 지원이 아니라 ‘북한 남침은 불(不)지원, 한미 북침은 불(不) 좌시’의 입장을 나타냄으로써 북한의 남침과 한미의 북침 모두를 견제하고 싶었지요.
셋째, 북한 체제의 붕괴는 중국에도 위협적이므로 경제적 지원은 그대로 유지하며 미국의 대북 제재는 반대하겠다는 것이지요.
장쩌민은 과거 선배들과 달리 북한과 거리를 두려고 했어요. 과거 선배들은 북한을 고려하면서 미국을 생각했다면 장쩌민은 대미 관계 속에서 김정일을 생각했지요. 그는 중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어요. 반면 북한과는 적정한 거리를 두면서 관계를 유지해야 했지요. 과거 1972년 닉슨의 방중으로 미 · 중 관계가 데탕트를 맞았지만 북 · 중 관계가 불편해진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었지요. (계속)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2-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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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6)] 김정일과 장쩌민 |
 | [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6)] 김정일과 장쩌민
장쩌민은 위기를 극복하고 총서기에 유임됐지만 덩샤오핑이 여전히 건재한데다 최대 정적인 천시퉁(1930~2013) 베이징시 서기가 그를 견재해 외부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제1차 북핵 위기가 터진 것이지요.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내세운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숨기고 실력을 키워라)의 자세로 일관했어요. 장쩌민은 원칙적 입장을 표명하고 매우 소극적이며 미온적인 자세로 대응합니다. 그의 원칙적인 입장은 3가지였지요. 한반도의 비핵화를 선호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지지하며, 북핵 문제는 제재보다는 대화로 풀어야 한다.
이에 따라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어떤 압력행사에 반대했으며 국제사회의 중재 요청에도 소극적으로 대처했지요. 장쩌민은 저우언라이가 제창한 평화공존 5원칙의 하나인 ‘내정 불간섭’을 북한에 그대로 적용한 것입니다.
장쩌민의 이런 입장은 1994년 6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사회 차원의 대북제재 결의안에 기권함으로써 나타났지요. 하지만 이 결의안은 찬성 28, 반대 1(리비아), 기권 4(중국, 레바논, 인도, 시리아)로 통과됐어요. 장쩌민은 경제적 실리(미국)와 정치적 실리(북한) 가운데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장쩌민의 이런 태도에 속인 탄 쪽은 1993년에 출범한 미국 클린턴 행정부였지요. 클린턴은 클린턴대로 고민이 많았어요. 클린턴 집권 초기 외교 라인을 보면 크리스토퍼 국무장관, 레이크 국가안보보좌관, 버거 국가안보 부보좌관 등 대서양주의자(Atlanticist) 였지요. 냉전적 이슈였던 군비통제와 군사안보 문제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북한을 경험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어요.
따라서 클린턴은 중국이 나서서 중재 역할을 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요. 클린턴은 중국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한 핵보유국이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국제사회의 안정과 평화에 이바지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북핵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으로 생각했어요. 착각이었지요. 장쩌민은 국내 입지가 아직 탄탄하지 않은 상황이라 가급적 첨예한 국제 문제에 휘말리기 싫어했어요.
장쩌민은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로 제1차 북핵 위기가 해결될 때까지 이런 입장을 유지했어요. 그는 미국에 협조하는 것보다 주권 존중 및 내정 불간섭 원칙을 강조하면서 북한 편향적 목소리를 내지요. 장쩌민의 태도에 섭섭했던 클린턴은 제네바 합의 이후 집권 초기부터 중국과 마찰을 일으켰던 인권 · 교역문제의 연계 카드를 다시 꺼냈어요. 클린턴은 최혜국 대우(MFN) 연장,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일시 좌절, 올림픽 연기 등으로 중국에 응수했지요.
북핵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김일성 주석이 1994년 7월 8일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북한은 북핵 위기를 더 고조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장쩌민은 조문을 통해 김정일에게 “비할데 없이 침통한 심정으로 마음속 깊은 애도와 가장 정성 어린 위문을 전한다” 고 전달했습니다. 제네바 합의 이후 장쩌민은 1995년부터 중단됐던 대북 원조를 재개하면서 국제가격제와 현금결재 대신에 다시 우호가격제로 전환하지요.
북한은 김일성 사망 이후 건국(1948년) 이후 최대의 내우외환을 겪습니다. 내우는 1993년 냉해, 1994년 우박 피해, 1995~1996년 홍수 피해, 1997년 가뭄 피해 등 자연재해였고, 외환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한소 · 한중 수교 등 국제적 고립이었지요. 내우외환이 겹치면서 북한 조기 붕괴론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계속)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2-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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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5)] 김정일과 장쩌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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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물러설 길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를 더 화나게 한 것은 중국이 무역거래 방식을 변경해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중국과 북한은 수교(1949년 10월 6일) 이후 줄곧 국제 가격의 절반 이하로 상대방에게 물품을 공급하는 우호가격제를 적용했지요.
그런데 중국이 우호가격제 대신에 국제가격제와 현금 결제를 요구한 것이죠. 중국이 탈냉전의 세계사적 변화에 맞게 혈맹 관계에서 전통적 우호협력 관계로 바꾸려는 의도가 담긴 결정이었지요. 중국의 새로운 조치는 가뜩이나 경제난으로 고통 받고 있던 북한에게 뒤통수를 때리는 격이었지요. 정치지도자는 정치적 압박보다 경제적 압박을 더 고통스러워합니다.
김정일은 한 · 중 수교 이후 중국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었지요. 혹시나 했던 중국의 ‘배신’이 현실로 드러나자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김정일은 한 · 중 수교 직후 최고 간부들에게 “러시아와의 관계도 기대할 수 없고 앞으로는 중국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정신적 원자탄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사상과 현재 만들고 있는 물질적 원자탄과 노동 3호 미사일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고 말했지요.
북한의 핵개발은 북 · 중 동맹이 약화됨에 따라 유일한 안보적 대안이 됐어요. 따라서 그는 핵개발에 한층 박차를 가했지요. 한국과 1991년 12월 31일 체결한 ‘남북한 기본합의서’에 명기한 한반도 비핵화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는 한 · 중 수교가 체결한 이듬해인 1993년 3월 13일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합니다. 이유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영변 핵시설 가운데 핵폐기물 저장소로 추정되는 두 개의 의혹시설에 대해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주권침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지요. 북한의 NPT 탈퇴는 제1차 북핵 위기의 시작이었습니다.
제1차 북핵 위기에서 중국은 강 건너 불구경을 했어요. 중국은 제1차 북핵 위기를 전적으로 북한과 미국의 문제로 인식했지요. 게다가 중국은 북한이 핵개발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어요. 왜냐하면 중국은 1960년대 핵무기 제조를 위해 해외에서 훈련된 중국인들에게 크게 의존했지만 북한은 그런 인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장쩌민은 과거 마오쩌둥 · 덩샤오핑 만큼 북한을 몰랐어요.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갑자기 총서기가 됐지요. 그 이전에도 북한과 인연도 없었어요. 북한과 인연은 총서기가 된 이후 1990년 첫 해외 순방지로 평양에 갔다 오면서 시작됐지요.
그의 관심은 국내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것이 우선이었지요. 다행히 든든한 후원자인 원로들의 지원으로 1992년에 개최한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총서기에 유임됐지요. 하지만 총서기가 되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어요.
덩샤오핑이 1992년 2월 남순강화를 통해 대담한 개혁과 적극적인 개방을 촉구했으나 장쩌민은 공개적인 지지표명을 주저했어요. 장쩌민을 지원했던 천윈(1905~1995), 덩리췬(1915~2015) 등 보수 원로들이 경제특구의 폐지를 주장했기 때문이지요. 이에 분노한 덩샤오핑은 한때 장쩌민의 교체를 심각하게 생각했지요. 덩샤오핑은 총서기 후보로 차오스, 리톄잉, 천시퉁 등을 고려했어요.
위기에 몰린 장쩌민을 구한 사람은 그의 책사 쩡칭홍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이었지요. 쩡칭홍의 도움으로 장쩌민은 비록 늦었지만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에 대한 지지표명을 했고 총서기에 유임될 수 있었어요. (계속)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2-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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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4)] 김정일과 장쩌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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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1926~) 전 중국 국가주석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두 사람의 만남은 항상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모두 네 차례나 만났지요. 그 가운데 김정일이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2000년 5월이 가장 드라마틱했지요. 그 때가 두 사람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었습니다. 전 세계 언론들은 ‘은둔의 지도자’의 중국 방문과 그 해 6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의 렌즈에 담았지요.
장쩌민은 과거 중국 지도자들이 김일성을 대한 것처럼 그를 따뜻하게 맞았습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은 양국의 ‘혈맹 관계’를 유감없이 과시했지요. 장쩌민과 김정일이 만나기까지는 8년(1992~2000년)이라는 긴 냉각기가 필요했어요.
그 8년의 시작은 1992년입니다. 바로 한 · 중 수교가 체결된 해이지요.
한 · 중 수교는 김정일에게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요. 당시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공화국 원수 등 북한의 주요 요직을 맡아 80살의 아버지를 대신해 북한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한 · 중 수교는 한 · 소 수교(1990년 9월 30일)에 이어 북한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결정타였지요. 김일성은 그래도 중국과의 오랜 인연을 고려해 중국에 점잖게 얘기를 했지요. 그는 한 · 중 수교 체결하기 한 달 전에 평양을 방문한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에게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중국과의 우호 관계 증진을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일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계속해서 자주적으로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또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정일은 몇 년 뒤 1998년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을 방문해 완융상(萬永祥) 대사에게 한 · 중 수교에 대해 아무런 의의가 없다는 뜻을 전달했지요. 김정일은 “한 · 중 수교는 중국공산당이 결정한 사안으로 조선은 0.001%도 이견이 없다. 나 자신 역시 아무런 이견이 없다. 다만 조중(북한과 중국) 친선만 변하지 않으면 충분하다” 고 희망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만 해도 거칠게 표현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지요.
장쩌민은 첸치천의 방북 보고를 받고 매우 흡족해 했어요. 장쩌민은 ‘숨은 거인’ 덩샤오핑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덩샤오핑은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이 많았지요. 그는 중국의 경제 발전과 한국 · 대만의 외교 단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한 · 중 수교를 서둘렀지요.
덩샤오핑은 그의 생각을 1989년 5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김일성에게 “중국의 한국 정책은 중국 내정에 관한 문제이며 중국의 독자적인 입장에 따라 추진해 나갈 것” 이라고 말했지요. 게다가 그는 김일성의 감정을 무시하면서까지 “한국과의 교역은 지리적으로 가까우며 거래하기도 좋아 중국에게 좋은 시장” 이라고 덧붙입니다.
이런 덩샤오핑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장쩌민은 북한의 입장을 배려하면서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서둘렀지요. 한국의 북방정책과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 맞아 떨어져 1992년 8월 24일 중국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한국의 이상옥 외무장관과 중국의 첸치천 외교부장이 수교에 서명했습니다. (계속)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2-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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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3)] 김정일과 덩샤오핑 |
 | [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3)] 김정일과 덩샤오핑
덩샤오핑과 면담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온 김정일은 “이제 중국 공산당에 사회주의 · 공산주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존재하는 것은 수정주의뿐이다. 그리고 중국의 지도자들을 수정주의자” 라고 비난했지요.
이 말을 전해들은 덩샤오핑은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로 인해 중국의 운명이 위협받는 사태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 텐데” 라고 개탄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일은 김일성이 수습해 표면적으로 가라앉았지요. 하지만 중국 지도부는 김정일을 주의 깊게 보게 됐고 김정일 역시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됐지요. 김정일에 대한 중국의 우려는 몇 달 뒤에 현실화 됐어요.
바로 버마(지금의 미얀마)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1983년 10월 버마 아웅산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과 각료들에 대한 테러였지요. 아웅산 테러는 한국이 중국 · 소련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자 김정일이 북한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테러를 강행한 것으로 알려졌지요. 한국에 대한 일종의 강력한 경고였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중국을 경악시켰지요. 무엇보다 국경 주변의 안정화를 중시하던 중국에게 북한이 얼마나 파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였지요.
당시 중국 지도자들은 국가원수를 상대로 테러를 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어요. 김정일이 몇 달 전 ‘대를 이은 우호’를 강조했다는 점과 중국에 전혀 ‘귀뜸’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망이 더 컸던 것이지요.
아들이 저지른 ‘대형 사고’를 결국 아버지가 수습할 수 밖에 없었어요. 김일성은 이 사건의 실무 책임자인 대남비서 김중린(1924~20100을 퇴진시키고 그 자리에 외교부장인 허담을 앉혔지요. 허담은 김일성 고모의 사위로 1970년부터 북한 외교를 이끌어 왔어요. 한 마디도 북한 외교의 틀을 잡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외교부장에는 김영남(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임명했어요.
아웅산 테러 이후 덩샤오핑은 김정일을 만나지 않습니다. 덩샤오핑은 그 사건 이후 1997년 사망하기 전까지 김일성만 세 차례 만났어요. 김정일은 덩샤오핑이 사망한 뒤 2000년 5월 베이징을 방문해 덩샤오핑의 뒤를 이은 장쩌민 국가주석을 만났지요. (끝)
다음 [알쏭달쏭 북·중 이야기]는 김정일과 장쩌민 편입니다.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2-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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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2)] 김정일과 덩샤오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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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도자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마오쩌둥(1893~1976)은 김정일을 만난 적이 없어요. 그래서 덩샤오핑(1904~1997)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덩샤오핑의 외교정책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도광양회(韜光養晦)였지요.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다는 뜻입니다. 덩샤오핑은 1980년대 미 · 소 냉전이 지속되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큰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경제에 올인 했습니다.
덩샤오핑이 도광양회를 내세우며서 심혈을 기울인 것은 다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독립 자주 외교를 통해 미국과 소련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고 둘째는 경제현대화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이데올로기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지요. 셋째는 중국 국경 주변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4개 현대화(국방, 과학기술, 농업, 공업)와 연결돼 있었죠.
이 가운데 김정일과 관련된 사항은 세 번째입니다. 이 번에는 이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중국과 국경을 접한 나라는 러시아 · 몽골 · 아프가니스탄 · 베트남 · 북한 등 모두 14개국입니다. 그 가운데 동맹을 맺은 유일한 나라는 북한이지요. 북한은 한국과 정전상태이고 한국에는 미군이 주둔해 덩샤오핑의 입장에서는 다른 국경보다 관심이 더 컸어요. 만약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 그가 이루고자 하는 중국의 현대화는 물거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덩사오핑에게 김정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김정일이 1983년 6월 2일~12일 중국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김정일이 1980년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김일성의 후계자 지위를 부여 받은 이후 첫 해외 방문이었지요. 중국도 북한 후계자를 각별하게 대했어요. 김정일이 만난 중국 지도부의 면면들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덩샤오핑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후야오방 총서기, 자오쯔양 총리, 리셴녠 정치국 상무위원, 덩잉차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등 당시 중국 최고 지도층이었지요.
김정일은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연형묵 노동당 비서, 현준극 전 주중대사 등 그의 최측근을 데리고 갔어요. 덩샤오핑은 김정일에게 개혁 · 개방에서 겪은 어려움을 들려주었어요. 79살의 덩샤오핑은 41살의 김정일에게 무슨 일을 개혁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며 정책을 추진할 때에도 쉬지 않고 조정하고 검토해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달했지요.
그리고 중국 농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했어요. 덩샤오핑은 자신의 설명을 듣고 김정일이 개혁 · 개방에 관심을 갖기를 바랐어요. 그것이 중국 국경의 안정화와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덩샤오핑의 기대와 달리 김정일이 던진 질문은 엉뚱했지요. 그는 “만약 조선에 전쟁이 나면 중국이 지원해 줄 수 있는가” 였지요. 덩샤오핑은 약간 놀라면서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 라고 넘겨버렸지요.
덩샤오핑은 김정일이 방중 기간에 중국의 개혁 · 개방의 현장을 보았기 때문에 호전적인 질문보다는 중국과 연관된 북한의 경제에 관한 질문을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계속)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2-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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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알알쏭달쏭 북 · 중이야기(1)] 김정일과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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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아직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74년 후계자로 확정된 뒤 1983년 중국을 방문해 덩샤오핑을 만난 것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할 수 있지요. 혈맹으로 출발한 양국 간에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김정은과 중국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김정일과 중국 얘기를 먼저 하려고 합니다.
김정일에게 중국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그를 만났거나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전하는 얘기나 북한 문헌들을 보면 중국은 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자 북한을 배신한 나라이지요. 그가 생전에 “중국을 믿지 말라” 고 한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김정일이 중국을 부러워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첫째,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입니다. 김정일이 2001년 1월 중국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가 표현한 대로 중국은 개혁 · 개방을 통해 천지개벽을 했지요.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북한 주민들에게 약속했던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살게 해 주겠다” 는 한 약속을 자신도 지키지 못했기에 중국이 마냥 부러웠지요.
둘째, 미국과의 관계개선입니다. 중국은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극적인 방중에 이어 1979년 국교 정상화로 미국의 위협을 줄일 수 있었지요. 이후 중국은 안심하고 개혁 · 개방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고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지요.
김일성도 닉슨 대통령의 방중을 계기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했어요. 그러나 저우언라이 총리를 통해 미국에 타진했지만 키신저 국무장관의 무반응으로 결국 실패로 끝났지요.
김정일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경제개발은 중국처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6자회담 보다는 미국과의 양자회담을 더 선호했지요. 하지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과감한 결정을 늦게 내렸고 결정한 내용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늦어 결국 결실을 거두지 못했어요.
그러면 김정일이 중국을 배신자로 생각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중국의 개혁 · 개방 노선입니다. 중국은 1978년 12월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3중전회)를 열고 개혁 · 개방을 선포했지요. 국경을 접한 중국이 사회주의의 대원칙인 계획 경제를 버리고 과감하게 시장경제를 도입한 것을 당시 36살의 김정일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3중전회가 끝난 이틀 뒤 김정일은 ‘우리 식대로 살아 나가자’ 라는 구호를 내놓지요. 중국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력갱생을 외치지요.
둘째, 한 · 중 수교입니다. 북한은 중국이 한국과 손을 잡은 것을 용서할 수 없었지요. 가뜩이나 1990년대 동구 유럽이 무너지면서 불안에 떨고 있는 중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충격이 더 컸습니다. 북한은 이에 질세라 노태우 대통령의 방중(1992년 9월)에 맞춰 중국을 “제국주의에 굴복한 변절자이자 배신자” 라고 비판했지요.
김정일은 한 · 중 수교 이후 더 이상 중국으로부터 자국의 안보를 보호받기 힘들게 되자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중국이 핵무기를 가지는 과정과 비슷했지요. 중국도 1964년 중소 분쟁이 지속되고 더 이상 소련으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고 판단되자 핵실험의 단추를 눌렀지요. (계속) -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2-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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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 ·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한국의 미래가 통일에 있다는 신념으로 구체적인 통일 방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 연구에 입문해 지금까지 평양을 5차례 다녀오는 등 한국의 헤로도토스를 꿈꾸고 있습니다. 고려대에서 북중동맹의 변천과정과 위기의 동학으로 박사학위 취득. 新 통일국부論 http://blog.joins.com/ssk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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