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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제바달다가 오법을 불교교단의 통규로 정해서 모든 승려가 지켜야할 규칙으로 삼자고 한데 있음. 이는 중도를 말한 붓다의 관점과는 다름.
중도주의와 엄격주의 분파
붓다는 만년에 노년의 마하가섭에게 여러 겹으로 기운 누더기는 무거우니 가벼운 할절의를 입는 것이 어떠냐고 했음. 그러나 두타행을 선호하는 엄격주의자 마하가섭은 무거워도 누더기가 더 좋다고 하면서 붓다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음.
.. 결국 제바달다는 자신의 엄격주의를 지지하는 무리들과 더불어 불교의 한 분파를 형성함. 이 엄격주의는 이후 1천년이 넘도록 인도에 잔존하는데 현장의 '대당서역기' 권 10과 법현의 '불국기' 그리고 의정의 '남해귀기내법전'에서 단편적으로 볼 수 있음.
15) 붓다의 열반과 엄격주의의 승리
사리불, 목건련의 입적과 교단의 공백
붓다의 수제자는 사리불과 목건련임. 두 제자는 후일 최고의 불교대학으로 일컬어지는 나란다사 인근 지역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친한 친구였음. 발지론 권 19에서는 두 제자를 특별히 존중하여 '쌍현'으로 칭하고 있음. .. 사리불은 붓다의 깨달음과 중도주의를 잘 체득한 인물인데 붓다보다 먼저 입적함. 사리불의 입멸에 압서 목건련도 입적하는데 이는 불교 교단의 제자그룹에 공백이 발생하는 것을 의미함.
실제로 잡아함 권 24 '포살경'의 기록을 보면 붓다는 두 제자가 입적하고 나서 '교단이 텅 빈것같다'고 애도를 표현함.
붓다의 입적을 기준으로 하는 불기
사리불과 목건련의 입적 후 얼마 되지 않아 붓다마저 바이샬리에서 마지막 안거를 끝으로 쿠시나가르에서 입멸함. 붓다는 두 그루의 사리수 사이에서 머리를 북으로 두고 오른 쪽으로 누운 채 열반하였다고 함. 이는 서쪽을 보고 입적하여싸는 의미인데 출가와 깨달음이 동쪽을 향해 이루어진 것과는 반대상황임. 이는 해가 동에서 떠올랐다가 서쪽으로 지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가 결합한 것임. .. 불교에서는 붓다가 입적한 해를 기준으로 불기를 계산함.
엄격주의자 마하가섭의 교단주도
붓다의 입적후 교단의 주도권은 엄격주의자인 마하가섭에게 넘어감. 흔히 마하가섭은 붓다보다 연배가 위인 것으로 알려져 있음. 그러나 현장의 대당서역기 권 9에 따르면 붓다가 입적한 후 20년뒤에 선정에 드는 것으로 보아 붓다보다 젊은 인물이었을 것임.
12두타행
12 두타법 | 내용 |
분소의 | 버려진 천으로 만든 누더기만 입는다 |
삼의 | 수행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의복만 사용한다 |
걸식 | 탁발에 의지해서만 음식을 섭취한다 |
일좌식 | 한자리에서만 먹는다 |
일단식 | 하루에 한번만 먹는다 |
중후불식장 | 정오가 지나서는 물을 제외한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 |
아란야처 | 고요한 수행처에만 거처한다 |
재총간 | 무덤 사이에서 거처한다 |
재수하 | 나무 아래에서 거처한다 |
재노지 | 지붕이 없는 노지에서만 거처한다 |
상좌 | 언제나 앉아있고 밤에는 눕지 않는다 |
수좌 | 방석이 아닌 풀위에만 앉는다 |
엄격주의자였던 마하가섭이 불교교단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불교초기의 장점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옴. 붓다의 중도주의가 빛을 잃고 경직되었기 때문임. 붓다는 입멸전 아난에게 계율가운데 불필요한 것을 없애거나 개변하라고 말했음. 하지만 붓다 입멸후 마하가섭은 그 기준이 모호하다며 모든 계율을 무조건적으로 묵수할 것을 주장함. 현재까지도 불교는 붓다 당시 계율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마하가섭의 주장에 따른 것임.
그러나 계율이란 깨달음이라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 또한 사회에서 법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대나 문화 등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서 함께 능동적으로 변화해야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음.
16) 마하가섭이 주도한 1차 결집
붓다의 장례를 주도한 마하가섭
초기불교의 승려들은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범이 되는 붓다의 깨달음과 입멸에 관하여 관심이 많았음. . 붓다는 열반에 들기 3개월전 바이샬리에서 자신의 입멸에 대해 고지함. 붓다가 입멸한 후 며칠뒤 마하가섭은 도착하여 장례를 주도함.
사리를 모시고 불탑을 건립하는 재가인
.. 붓다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모인 종족과 국가는 총 여덟곳으로 당시 불교가 전파된 지역과 그 유행 양상을 짐작해 보게 함. '유행경'에서는 사리를 분배받은 나라를 '쿠시나가르, 파바, 차라, 라가마, 비유제, 가비라, 바이샬리, 마가다라' 8개국으로 기록함. 이들은 분배받은 사리를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가 각기 불탑(근본 8탑)을 건립함
마하가섭이 주도한 경전편찬회의
붓다 열반이후 승려들은 불교의 전통을 유지하고 붓다의 가르침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결집 즉 경전을 편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낌. 장례의 주관자였던 마하가섭이 주도하는 첫번째 결집이 이루어짐. .. 결집은 마가다국 외곽의 산 중턱에 위치한 칠엽굴에서 3개월에 걸쳐 이루어짐. 참석인원이 500명이어서 '500결집'이라고 함.
결집(합송)
고타마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글로 남기지 않았으므로 고타마 붓다가 입멸하게 되자 그의 가르침의 내용이 올바르게 후대에 전해질 것인가가 의심스러워졌다. 고타마 붓다의 제자인 마하가섭(摩訶迦葉)은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옳게 파악해 놓지 않으면 사이비 설법이 세상에 나돌아 결국에는 정법정률(正法正律)이 없어지게 될 것임을 두려워하여 고타마 붓다가 입멸한 다음 해의 우계(雨季)에 왕사성 밖의 칠엽굴(七葉窟)에 500명의 비구를 모아놓고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결집(結集)을 거행하였다. 이때의 결집을 오백결집(五白結集)이라 한다. 다문제일(多聞第一)의 아난(阿難)이 경(經)을 독송하고 계율을 지키는 데에 으뜸인 우바리(優婆離)가 율(律)을 송출(誦出)하였다. 경이라 함은 교리와 사문에 관한 설법이며, 율은 행위와 교단에 관한 규정이다.
제1회 결집 당시에도 이미 신구(新舊) 사상의 대립이 엿보이게 되었는데 고타마 붓다의 입멸 후 약 100년이 지나자 계율에 대한 새로운 설을 제창하는 자가 나타나 불교의 교단은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로 분열되었다. 이에 바이샬리(Vaisali, 吠舍離)에서 야사(耶舍)가 중심이 된 700명의 상좌부 장로가 모여 주로 율장(律藏)을 편집하고 교단의 통제에 힘썼다. 이를 칠백결집이라고도 한다. 일설(南傳島史 등)에 따르면 이에 불복한 진보적인 비구들이 1만명의 다수인을 모아 독자적인 결집을 열었다고 한다. 이를 대결집(大結集)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보수적인 상좌로부터 이탈하여 대중부를 형성하였다.
남방에 전해진 불교에 의하면 아쇼카왕 시대에 싯타르타의 입멸 후 약 200년이 지난 때에 1000명의 비구들이 모여 율(律), 경(經), 논(論)의 삼장(三藏)을 결집하였다고 한다. 이를 천인(千人)결집이라고 부른다.
17) 마하가섭과 아난다의 관계
초기교단을 주도했던 석가족과 왕사성파
붓다의 중도주의는 불교교단을 우선하기보다는 개인의 완성(깨달음)을 중요시함. .. 대표적인 두 집단이 석가족과 왕사성 주변의 왕사성파. 왕사성파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2년 후 왕사성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교화에 성공하면서 시작됨. 이때 우루빈라가섭 500명, 나제가섭 300명, 가야가섭 200명의 가섭 3형제가 붓다의 제자가 됨. 이후 사리불과 목건련이 250명의 제자를데리고 와서 붓다의 제자가 됨. 우루빈라가섭은 나이가 많아 이후에 사리불과 목건련쪽에 흡수됨.
석가족 집단은 붓다가 출가한 지 8년 뒤 고국인 가라비국으로 귀향했을때 붓다의 사촌들이 중심이 되어 석가족 다수가 출가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됨.
석가족 집단과 왕사성파의 충돌
석가족과 왕사성파는 두차례 충돌하며 두번 모두 왕사성파가 승리함. 그러나 최종승리는 아이러니하게 석가족에게 돌아감. 첫번째 충돌은 붓다 말년에 일어난 일로 교단의 승계와 관련이 있는 제바달다와 사리불의 충돌임. 이 충돌은 사리불의 왕사성파가 승리하고 제바달다는 교단에서 독립하는 것으로 일단락 됨.
두번째 충돌은 붓다 입멸후 쿠시나가르에서 발생함. 붓다의 장례를 주관한 왕사성파 마하가섭과 아난다 사이에서 장례문제로 충돌한 것을 말함. 석가족 집단(아난다)와 왕사성파(마하가섭)의 충돌은 1차결집때까지 이어짐. 1차 결집때 아난다는 사소한 계율은 없애도 된다는 붓다의 마지막 유언을 들어 계율의 유연성을 주장함. 하지만 마하가섭의 모든 계율을 그냥 지키자는 주장이 통과되면서 아난다의 시도는 무력화됨. 이후 마하가섭이 붓다 입멸후 20년 후에 입적하게 되는데 이후 불교교단은 아난다의 주도로 신속하게 재편됨.
이는 붓다의 입멸후 100년뒤에 발생하는 2차 결집(700인 결집)에서 불교교단을 대표하는 고승 8명 중 여섯명이 아난다의 제자라는 점에서 분명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