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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묵상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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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둘로 나뉩니다. 한쪽은 투덜거리며 예수님을 떠나갔고 다른 한쪽은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그분과 함께 머뭅니다. 제자들이 갈라지는 결정적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 바로 당신이시라고, 그 빵을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이의 말을 잘 듣는 것은 때로는 힘들지만 때로는 위로가 될 때가 많습니다.
대개 힘든 경우는 상대의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고,
위로가 될 때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애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지니는 일입니다.
빵이 먹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배고파야 빵을 먹고, 배고픈 삶을 살아야 빵에 대한 간절함을 지니게 됩니다.
예수님을 떠나간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위로보다는 불편함으로 다가온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자신들의 배고픔을 채워 주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우리는 무엇에 배고파하는지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흔히 돈과 명예, 권력에 비판적인 것이 신앙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돈, 명예, 권력에
배고파하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돈을 배고파하되 어떻게 쓸 것인가, 명예를 소중히 여기되 그 명예를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
그리고 권력을 지향하되 그 권력을 더욱 올바로 힘 있게 사용하려면 어떤 삶을 추구할 것인가 되물어야 합니다.
신앙적 배고픔은 돈과 명예, 권력을 내려놓는 데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명예, 권력을 하느님 안에서, 이웃들과의 나눔 안에서 제대로 사용하면서 체험합니다.
나를 위한 배고픔을 ‘우리’를 위한 배고픔으로, 하나의 빵이라도 함께 먹는 만찬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들이 예수님 곁을 지키는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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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겨울이 깊어 가면 강은 얼게 됩니다. 신기하게도 꽁꽁 언 강에 ‘숨구멍’이 생기는 걸 봅니다. 자연은 그렇게 어려움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몸도 마음도 지쳐갈 때입니다. 문자를 받으며 잠시 웃을 수 있었습니다. 부활계란이 있습니다. 예쁜 그림과 글로 부활계란을 만들곤 합니다. 이번에 받은 문자에는 모두 마스크를 쓴 부활계란이 있었습니다. 돌무덤에서 예수님께서 나오려고 하니까 경찰이 예수님께 ‘stay at home'이라고 말하는 문자도 있었습니다. 두 개의 똑같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소파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사진입니다. 2019년에는 ’게으른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2020년에는 ’시민의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댓글을 달았습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희망의 빛을 보면 좋겠습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글이 지치고 힘든 이웃에게 ’숨구멍‘이 되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방역과 대응을 뉴스에서 봅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 투명한 정보의 공개, 광범위한 조사, 의료진의 헌신, 정부의 발 빠른 대응에 관한 내용입니다. 한국의 방역체계와 의료체계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국의 진단키트와 의료물품이 코로나19로 힘들어하는 나라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정부는 정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여력이 되는 대로 진단키트와 의료물품을 수출하거나,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진단키트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미국이 한국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117개 국가에서 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런 뉴스를 접하면서 한국인으로서 뿌듯한 마음입니다. 코로나19에 대해서는 한국이 ‘숨구멍’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활약을 보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애네아스라는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애네아스는 일어나 걸을 수 있었습니다. 병이 들어 죽었던 도르카스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타비타 일어나시오.’ 그러자 죽었던 도르카스는 일어났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도르카스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으로 다락방에 숨어있던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고기나 잡겠다고 말했던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들을 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초대교회 신앙인들에게 ‘숨구멍’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주시는데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다시금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훌륭하게 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을 치유하고, 죽은 사람까지 살려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립니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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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 새벽을 열며.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빠다킹신부님.
오랜만에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들 중년의 나이로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만난 후 얼마 안 지나 그 무게감이 사라집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당시에 사용했던 말투가 나옵니다. 지금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욕도 섞어가면서 말이지요.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그때 시간 낭비를 참 많이 했어.”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많이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당구장, 만화방, 오락실……. 공부해야 할 시간에 다른 것들을 참으로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친구가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그때는 시간 아까운 줄 모르는 나이잖아.”
당시의 어른들은 시간 낭비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다가는 나중에 후회한다면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말을 많이 들으면서도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후회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먼 훗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의 한 장면이 되기 때문이며, 그 시간 역시 중요했던 시간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간이든 의미가 담겨 있다면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그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갈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느냐?” 하면서 떠날 구실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도 이 정도였으니, 당시 예수님을 반대했던 종교지도자들의 적대적인 모습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힘들고, 함께 하는 것이 힘들었을까요? 예수님 안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하는 시간이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아까울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때로는 듣기 거북한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며, 또 함께하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주님께만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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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행동을 절제하면 잘못된 길에 빠질 일이 없다(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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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기적이다.
“희망이 기적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본 멋진 문장입니다. 이 문장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희망을 보지 못하게 하는 상황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상황에서 희망을 찾은 사람은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형제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여유 있게 살고 있지만, 옛날에 친구 빚보증을 잘못 서서 한밤중에 빚쟁이들을 피해서 도망을 쳤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망치는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성당에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당 안에서 큰 위로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할 분이 계셨는데, ‘이분을 잊고 있었구나’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하고 계셨음을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얻은 힘으로 재기를 해서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주님을 통해 희망을 얻을 수 있었고, 그 뒤로 모든 잘 풀렸습니다.”
이분 역시 희망을 통해 기적을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희망이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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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3주 토요일-육은 진정 아무 쓸모가 없는가?
요한복음에는 몇 가지 중요한 주제들이 있습니다.
말씀, 빛, 생명 이런 것들을 집요하게 얘기합니다.
지난 한 주간은 빵에 대한 6장의 말씀을 내내 들었는데
그래서 6장은 빵이 주제인 것 같고 그렇게 얘기해도 무방하지만
더 정확히 얘기하면 생명이 주제이며 생명을 주는 빵이 한 주제이고
오늘은 여기에 더해 생명을 주는 말씀이 또 다른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주는 빵이 있고, 생명을 주는 말씀이 있다는 것인데
이 말을 뒤집으면 빵이라고 하여 다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요,
말도 한 사람을 살리는 말도 있지만 고꾸라트리는 말도 있다는 거지요.
그러면 어떤 빵과 어떤 말이 생명을 준다는 말입니까?
이에 대해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일 뿐 아니라
당신 입에서 나온 말들도 생명의 말씀인데
그것은 당신의 말씀이 영의 말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영의 말이란 어떤 말인지 보겠습니다.
우선 영의 말이란 사랑의 말이라는 것을 쉽게 볼 수 있겠습니다.
성령을 얘기할 때 우리는 진리의 성령이라고도 하지만
제일 많이 떠올리는 것이 바로 사랑의 성령이시지요.
그런데 사랑의 성령이라는 말씀도 우리는 하느님이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에게서 나온 영도 당연히 사랑의 영이라는 뜻에서
지극히 관념적으로 얘기할 수도 있지만
악령과 비교하면 매우 실제적인 뜻에서
사랑의 성령이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지요.
복음을 보면 주님의 수많은 행적은 악령과의 싸움에 대한 얘기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막달라 마리아의 얘기입니다.
그녀는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죽음의 삶을 살다가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여인인데 구원받은 뒤에 그녀는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도 이런 영혼들이 실로 많고,
적어도 마귀 병과 정신병의 경계에 있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주님께서는 오늘도 이들에게서 나오라고 악령에게 명령하심으로써
이들에게서 악령을 물리치시고 정신의 병을 치유해주십니다.
다음으로 영의 말씀은 초월케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 말씀 중에서 영은 생명을 준다는 말씀은
사랑의 말씀이기에 그럴 것이라는 점에서 쉽게 동의하지만
영은 생명을 주지만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에는 의아함이 있습니다.
아무리 요한복음에 영지주의의 영향이 있다고 하지만
진정 이 말씀은 이원론적인 뜻에서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인가요?
왜 육이 아무 쓸모가 없겠습니까?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육이 쓸모가 있고,
주님께서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와 같아지시려고
우리와 똑같은 육을 취하셨는데 이것을 일컬어 육화(Incarnatio)라고 하지요.
그러니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이 육이 아주 쓸모가 있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아무 쓸모가 없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살기 위해서는 육적인 것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땅 위에서 사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이 살덩어리를 지니고 살지만
썩어 없어질 이 살덩어리에 영원히 매이지는 말아야 할 것이고
지금도 현실적 필요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육적인 것에서 초월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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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김레오나르도김찬선 2 시간 전 <2002. 05.02. 07시 현재>
오늘 저의 강론에 더하여 어제 박 루케시오 형제의 강론을 꼭 읽어보시면 요한 복음 6장의 모든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젊은 형제들이 아주 설득력있게 들려주는 강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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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루케치오 신부님 <동영상>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만물은 아버지께로 연결된다.
살은 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빵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육신과 영혼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상은 천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세계 안에서 만물은 아버지 하느님게로 연결됩니다. 바로 그런 의식을 오늘 복음을 통해 가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만물을 아버지께로 건너가는 사다리로 삼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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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성체순례자 2 시간 전 <2002. 05.02. 07시 현재>
성모성월을 시작하며
아득한 세월
이천 년 훌쩍 넘는 무수한 날
한 날 한 시 빠짐없이
노심초사 두 손 모아 기도하셔도
성모님이니까... 하였습니다.
생명보다 귀한 아들
십자가 험한 죽음
그 고통 참아내며
다른 자식들 살리시는
사랑의 모진 순명!
성모님이니까... 하였습니다.
심장에 깊게 박힌 일곱 칼!
꿰찌르고 후벼파는 고통!
참으시고 인내하셔도
성모님이니까... 하였습니다.
하나하나 살리려는 절박한
모성적 사랑,
우리 향한 사랑앓이로
피눈물 흘리셔도
성모님이니까... 하였습니다.
온갖 십자가 내던지며 돌아서는 철없는 자식들 속썩여도 전혀 끄떡도 하지 않는 성모님이니까... 하였습니다.
급할 때만 달려 가
살려달라 매달리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 가 징징거려도
다 들어주시고
늘 함께 해 주시기에 성모님이니까... 하였습니다.
온전하지 않은
마음 한 조각
성모님, 감사!
성모님, 고맙!
건성섞인 감사의 말
그래도 애지중지 보살펴주시기에
성모님이니까... 하였습니다.
지 죄로 엎어지고 쓰러지고 또 엎어진 채 강짜부려도
어서 일어나자!
툭툭 털어주시며
괜찮다 괜찮아,
속이 썪어뭉그러져도 성모님이니까... 하였습니다.
어서 가자,
예수님께 가자,
내 아들 예수한테 가자, .
당신 잘못인양 감싸주시기 급급한, 그것이 그냥 당연한
성모님이니까... 하였습니다.
문득 지나온 날들
돌아보니
성모님과 부비며 기대고 함께 걸어온 길들,
같이 살아온 날들.
마음 들어 엄마를 바라보니
나 때문에,
우리 때문에,
한없이 눈물흘리며 소리 죽여 기도하시는
우리 엄마 성모님!
아! 우리 엄마 성모님 한테 나는 정말로 정말로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안 되는 짓만 하는 우리 새끼들 위해
오늘도 두 손 모아
하염없는 기도하시는
우리 엄마 성모님께 나는 정말로 정말로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이제 정말 우리 엄마 성모님께 이 모양 이대로의 나를 고스란이 내맡기고
엄마의 그 눈물 그 아픔 함께하는 작은 아이 되겠습니다.
우리 엄마 성모님!
고마워요.
사랑해요. 엄마!
십자가의 사랑으로
당신 엄마
우리 엄마로
내어주신
사랑의 우리 예수님!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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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생명의 빵" 이야기는 논쟁의 이슈가 예수님의 몸(살)에서 "말씀"으로 옮아가면서 일단락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일부 제자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분을 따라다니던 동안에도 그분의 말씀과 뜻을 온전히 다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이번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기괴하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제자들이 투덜거리며 의혹으로 동요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진리를 이야기하기를 그치지 않으십니다. 완곡하게 표현하시지도, 절충안을 제시하시지도 않으시지요.
예수님의 몸은 생명입니다. 또 그분 말씀도 생명이지요. 예수님 자신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4,16 참조).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9).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다니지 않게 된 상황에서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베드로라고 당신 몸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예수님 말씀을 전부 이해했겠습니까마는, 자신이 이해하는 한도 안에서 신의를 지킵니다.
제1독서에서는 베드로가 일으킨 두 가지 치유 기사가 연달아 나옵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사도 9,34).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사도 9,40).
베드로는 자신의 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치유의 기적을 베풉니다. 되살리는 생명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영과 육의 현실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육신의 욕구와 필요를 돌보며 공동체 안에서 건강하고 조화롭게 지내면서, 동시에 우리 영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니까요. 우리는 육의 생명이든 영의 생명이든, 모든 생명이 "생명이신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진리를 잊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 말씀이 우리에게 쉽고 달콤한 위로를 주지 않더라도, 어쩔 땐 오히려 쓰디쓴 도전이 되더라도, 말씀과 성체로 무장한 이는 생명이신 주님을 소유하였기에 뒤돌아서지 않습니다. 생명의 탯줄이 주님과 단단히 연결되었기에 설령 육신이 스러지더라도 더욱 생기 넘치고 싱싱하게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갈 테니까요. 이렇게 생명의 빵과 생명의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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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
이번 한 주간 우리는 '생명의 빵'(요한6,22-69)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거부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6,60)
그리고 투덜거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8)
오늘은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아타나시오 성인은 그리스도교 초기에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했던 아리우스 이단과 싸우면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두루 믿는 정통 신앙을 지켜내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떠나간 많은 제자들의 모습이 아리우스 이단자들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51)
예수님의 신성(하느님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고도 신성을 지니신 그리스도로 믿고 있고, 매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살을 받아모시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
오늘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해 겸손하게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도록 합시다!
또한 영적 양식을 신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애쓰고 있는 이 땅의 많은 사제들께도 감사를 드립시다!
생명의 빵인 그리스도의 몸을 합당하게 받아모시고, 우리도 너를 살리는, 아니 너와 나 그리고 모두를 살리는 생명이 되어 봅시다!
나도 예수님처럼 너에게 먹히는 존재가 되어 봅시다!
오늘도 화이팅~~!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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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 이영근님.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 양주 올리베다노
오늘 <복음>은 그동안 우리가 들어오던 <요한복음> 6장의 끝부분입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을 “생명의 빵”(35절, 48절), “하늘에서 내려온 빵”(41절)이라 밝히시며,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고 선포하시자, ‘유대인들’은 서로 수군거리고(41절) 말다툼(52절)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순명으로 실행하는 사람, 곧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그들 안에 머무를 것”(54절, 56절)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도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라고 투덜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1-63)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이 생명의 빵’일 뿐만 아니라, 이제 당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씀”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고, “영”인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은 말씀을 발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발설한 말씀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이를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씀은 읽는 이 안에서 자란다.”고 표현합니다.
이토록, 성령께서는 <에제케엘서>(37,1-14)에서 보여주듯이, 죽은 문자인 마른 뼈들에 생기를 돋게 하고 뼈와 살이 붙게 하고, 문자를 성체가 되게 하여 우리가 받아먹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은 “생명을 주는 영”(로마 8,2)이라는 합니다. 이처럼, 참으로 신비롭고 놀랍게도, 참 생명이 영으로 말씀이 되시어 육화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의 대담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육화를 활성화시키시는 분이시다.”
바로 여기에, ‘성령의 도유된 독서’(lectio untionis), “성령으로 기름칠 된 독서”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가 생겨나게 됩니다. 성령께서 “말씀의 동반자이며 해석자”가 되시어 성경을 읽는 이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계시헌장>(12항)과 <가톨릭교회 교리서>(111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건네주는 것이므로,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 속내를 꿰뚫어 읽어야 한다. 그러기에, 성령을 통해서 쓰려진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남은 열 두 제자들에게 자유로운 응답을 요청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계시한 바에 따라,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으며, 하느님의 거룩한 분임을 믿어 왔고 또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예수님을 ‘떠난 제자’와 ‘남는 제자’가 분리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어왔고 그래서 아는 자들’은 남은 제자가 되었는데, 알고 믿고자 한 제자들은 떠나갔음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는 ‘알고 믿는 것’보다 ‘믿어서 알게 되는 삶’이 먼저임을 깨우쳐줍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씀을 먹는 ‘말씀의 영성체’를 알아듣게 됩니다. 곧 먼저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에제키엘서(3,1-3), 예레미아서(15,16), 요한묵시록(10,8-10)에는 명령에 따라 말씀을 ‘먹은’ 표현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리게네스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쪼개진 말씀을 먹는 것”으로,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는 “파스카의 어린 양을 먹는 것”으로 표현하고, 히에로니무스는 “복음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성찬례에서뿐 아니라, 성경 독서 중에도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생명이신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먹음으로 실행하게 하소서. 저희가 무엇을 하더라도 언제나 당신 말씀과 함께 하고, 말씀 속에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주님!
제가 떠나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 제 자신이오니, 저 자신을 떠나게 하소서.
떠나온 자신마저 떠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고 흔들리면서도 당신 장막에 머물게 하소서!
흔들릴수록 더욱더 뿌리 깊게 내리는 믿음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도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 희망에 제가 달려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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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 부활 3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라
어떤 사람이 전혀 새로운 사실을 얘기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되도 않는 소리라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기대를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데 전혀 다른 소리를 하면 속이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갖게 됩니다. 누구든 자기가 기대하고 바라는 쪽으로 얘기하면 신이 나고 기분 좋아 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못마땅해 하고 담을 쌓게 됩니다. 그러나 큰 사람은 자기의 기대를 뛰어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줄도 알고 거기서 깨우침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듣기에 거북해 하였습니다. 모르면 스승의 가르침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인데 그렇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무엇인들 비위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도 내 마음이 인간적인 욕망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림의 떡'이 되고 맙니다.
어른 신부님들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본당의 책임을 맡으면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3분의 1이라도 되면 성공이라네. 3분의 1은 관망하는 사람이고 또 3분의1은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그러니 누구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용기를 가지고 추진하게.”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나약함을 지니고 사는 신부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여전히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을 두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자유를 허락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 믿음은 하느님께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결국 ‘떠날 테면 떠나라. 잡지 않겠다.’라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아있던 제자 중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6,69).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 만큼 자신의 것을 버리고 그분의 것으로 채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바로 내 생각과 다른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너도 떠나겠느냐?’ 아닙니다. 당신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따르다 보면 당신을 알게 되리라 확신하며 그저 따르겠습니다. 훗날 당신을 등질지 모르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당신이 나의 전부입니다.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을 따르고 당신을 느끼기까지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당신을 저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기적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당신의 살과 피를 내 주시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칩니다. 당신의 몸을 생명으로 주시지만 합당하게 모시기에도 벅찹니다. 그러나 지금 포기하면 당신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기에 당신께 매달립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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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우리를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시는 주님
-영이며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
새벽 독서의 기도, 다음 시편 구절이 은혜로웠습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자비하심을, 중생에게 베푸신 그 기적들을
애타는 영혼을 흐뭇하게 하시고, 굶주린 영혼을 복으로 채우셨도다”-
어제의 유쾌한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수녀원에서 고백성사드린후 원장수녀님과 이야기 나누는 도중 부원장 수녀님이 휴가 간다기에 잘 됐다 싶어 강복을 드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의 축복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고치시고 살리시는, 치유와 구원의 축복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요세파 수녀님과 가족 모두에게 축복을 내리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마침 차량봉사하신 두 분 수녀님께 드릴 선물이 없을까 생각하던중 기발한 축복 생각이 떠올라 강복을 드리니 흡사 제가 강복 받은 듯 참 뿌듯했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루카, 토비아 수녀님에게 축복을 내리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며칠전 인상적인 기사를 영적으로 해석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코로나 환자 40%는 확진자가 증상 전 전파”기사를 읽는 순간, “우리 수도자처럼 주님 축복의 확진자는 증상이 없어도 존재 자체로 알게 모르게 이웃에게 축복의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성 아타나시오 주교학자 기념일입니다. 그 험난한 4세기 5차례의 유배중에 ‘주님의 용사勇士’로서 맹활약을 하며 78세 장수하신 모습을 통해 새삼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임을 실감합니다. 성인은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비롯하여 많은 성서 주석, 시편 주해등을 남겼고, 대 바실리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와 함께 동방의 4대 교부중 한분입니다.
특히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해 정통교리를 수호한 성인의 업적을 존 헨리 뉴만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 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였다. 참으로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해 저술한 그의 뛰어난 저술과 연설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우리에게 끊임없는 용기와 희망, 회개의 표지가 되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성인들입니다. 성인의 이런 위대한 업적들은 결코 안일한 환경에서가 아닌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이뤄진 일임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여전히 오늘도 베드로의 후계자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통해서 또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어제 노동자 성 요셉 기념미사를 봉헌하신 교황님의 강론 서두 말씀입니다.
“오늘 노동자들에게 봉헌된 날, 우리는 노동자 성 요셉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우리 모두 노동자들 모두에게 일이 주어지고 정당한 임금이 주어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들 모두가 ‘노동의 존엄’과 ‘휴식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참 아름답고 감동적인 공감이 가는 강론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된 교황님의 삶임을 입증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은총의 부활시기에 우리 대한민국에도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허상이 드러난 서방 선진국들과 달리 방역 선진국으로 떠오른 한국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총아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뉴욕의 호프라 대학교 세계적 경제지리학자 장 폴 로드리게의 말입니다.
“한국은 저임금을 활용해 생필품을 생산하는 곳이 아니다. 반도체와 조선사업, 자동차등 여러 분야에서 놀라운 기술 경쟁력을 갖췄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산업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글로벌화가 계속된다. 한국은 기술력뿐 아니라 투명성도 갖춘 나라다. 투명성과 신뢰는 한국이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얻은 자산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글로벌 기업이 아주 선호하는 나라가 됐다.”
얼마나 고무적인 객관적 평가입니까? 투명성과 신뢰,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진실하고 성실하고 절실하게 살아갈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은 복음의 열 두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고 물으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주님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영과 생명이 충만한 삶이며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다음 시몬 베드로의 응답은 그대로 오늘 우리 모두의 응답이자 신앙고백이 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정말 주님을 두고 갈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영과 생명을 주시는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를 깨달을 때 시편 화답송의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그대로 미사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를 통해 구원의 기적을 행하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오늘의 우리를 통해서도 구원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베드로를 통해 중풍병자 애네아스를 고치시고 죽은 도르카스를 살리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애네아스가 도르카스가 상징하는 바 우리들입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타비타를 살리시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베드로는 우는 이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신 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시자 타비타는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부활한 애네아스, 타비타입니다. 불러 주라 있는 이름입니다. 사랑을 가득 담아 정다이 ‘이름’을 불러주는 자체가 구원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치유받은 애네아스, 또 다시 살아난 타비타, 모두 베드로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일꾼’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일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합니다. 이와 연관되어 교황님의 강론중 생각나는 내용이 있습니다.
“증거와 기도는 함께 간다(Witness and prayer go together). 증거와 기도없이 여러분들은 사도적인 강론을 할 수 없다. 아무리 강론이 아름다워도 아버지의 도움의 활동 없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끌어들일 수 없다.”
즉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열어 기적을 일으키게 하고, 기도에 이어 기적의 증거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주 예수님께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베드로를 통해서도 그대로 입증되는 진리입니다. 베드로의 기도와 기적의 증거에 이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중풍병자 애네아스를 고쳐 주시고 죽은 타비타를 살리신 똑같은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영과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며, 우리의 영적 중풍병을 고쳐 주시고, 무기력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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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9,31-42
요한 6,60ㄴ-69
영적인 길과 육적인 길은 반대 방향이다
우리는 14세기 교황이 약 70여 년 동안 프랑스 아비뇽에 죄수처럼 갇혀 살았던 ‘아비뇽 유배’를 기억합니다. 이 발단은 ‘돈’이었습니다.
영적인 종교에 육적인 욕구가 개입된 것입니다.
프랑스 필립 4세는 교황청으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싫어하였고 결국 힘을 이용해 교황을 로마가 아닌 아비뇽에 머물게 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십자군 전쟁을 하며 지나치게 돈을 많이 쓴 영향도 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군인들이 다시 돌아갈 가정이 없어져 그들이 약탈해온 재물로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성전 기사단’입니다.
필립 4세는 ‘성전 기사단’이 소유한 막대한 재산과 토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필립 4세는 교황을 잡아놓고 성전 기사단을 해체해 재산을 몰수하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그가 교회를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육적인 것을 찾았기에 영적인 소리를 하는 이의 입을 막은 것뿐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믿었는지는 주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덕분으로 교회는 이후 로마파와 프랑스파, 그리고 공의회 파가 정한 3명의 교황이 생기는 분열과 혼란까지 겪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현대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전에 한국 교회 주교단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것에 대해 교회를 비판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신자들도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주교들보고 옷을 벗어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집회가 끝나고 나면 주일미사를 하고 경건하게 성체를 영하고 해산하였습니다.
이렇게 지금도 종교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말하면 거북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머무신다면 주교단이 결정한 것은 영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육적인 것을 추구하면서도 교회에 머무는 것은 어쩌면 가리옷 유다와 같을 수 있습니다.
유다는 머물기는 하되 언제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교회에 스며든 세속적 사상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영과 육을 하나로 보는 일원론입니다.
5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던 유다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영 거북해서 듣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을 듣고는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떠나갑니다.
왜 거북할까요? 자신들이 원하는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갤럭시 스마트폰만 쓰는데, 아이폰이 좋다고 말한다면 그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떠한 말이 듣기에 거북한 이유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듣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영화였습니다.
그들의 뜻과 반대되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열두 사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던 것일까요?
누구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때나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지만, 그것도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께 머물렀습니다.
그분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예수님 말씀이 거북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거슬리고, 영이며 생명을 추구하는 이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예수님께 머물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라고 하십니다.
결코, 육을 추구하는 방향과 영을 추구하는 방향이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빛과 어둠은 반대지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하는 저를 ‘극단적 이원론자’로 비평합니다.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영과 육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요한복음의 핵심이요 가톨릭교회 교리의 핵심입니다.
일원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하느님은 태양과 비를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내려주신다고 말하며 하느님은 이렇게 자비하시므로 결국 지옥도 없을 것이고 어둠도 빛에 속하게 될 것이며 육체도 영과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영과 육에 섞이게 만들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게 만드는, 아주 많이 잘못된 신앙을 심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의 교회에 육이 섞이면 교회까지도 자신의 육에 속하게 만들어 이용하게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속하려면 영을 선택할 것인지 육을 선택할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사람이 두 반대되는 길을 갈 수 없고, 두 의자에 동시에 앉을 수 없습니다.
돈도 좋고 예수님도 좋을 수 없습니다.
세상도 좋고 하느님 나라도 좋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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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9,31-42
요한 6,60ㄴ-69
가끔씩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꿀보다 더 단 말씀, 깊은 우물 속의 차가운 물처럼 시원한 말씀이 될수도 있습니다.
마치 번개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정수리부터 발끝을 통과하며 우리를 전율케하고, 깨우치게 하며 새 삶에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예수님 말씀은 ‘듣기 너무 거북한 말씀’, ‘걸림돌이 되는 말씀’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의혹하고 불신하며, 결국 꼬투리 잡고, 그 결과 예수님을 떠나가게 됩니다.
놀랍게도 한때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지지하며, 목숨까지 바칠 기세로 예수님을 추종했던 제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떠나간 이유는?
그들이 추구했던 지향점과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던 사명 사이의 큰 간극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탓할 게 아닙니다.
떠나감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우리 안에서도 숱하게 반복됩니다.
그저 육의 이끌림에 따라 살때,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 살게 됩니다.
본능에만 따라 살때,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영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 예수님의 말씀은 별 의미 없는 말씀, 구름잡는 이야기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세상의 논리로만 예수님 말씀을 대할 때, 그 말씀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알쏭달쏭한 문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예수님의 말씀 하나를 화두로 붙들고, 묵상하고 또 묵상할 때, 조금씩 우리의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영혼이 열릴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은 꿀보다 더 단 말씀, 생명수보다 더 값진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늘 위를 생각하시며 아래를 내려다보시는데, 떠나간 제자들은 한사코 아래만 내려다봤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래의 세상만이 전부인양 뚫어지게 아래만 바라봤습니다.
가끔씩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봐야겠습니다.
물론 아래, 이 세상, 때로 구차스럽게 보이는 일상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위와 아래, 영혼과 육신, 하늘과 땅은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아래만 바라보는 사람들, 자신의 삶 속에 영적인 측면은 초라할 정도로 위축되고,
그저 육에 따라,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최종적인 도착지는 비참이요, 죽음일 것입니다.
한 명 한 명 떠나가는 제자들의 모습 앞에 마음이 몹시 슬퍼지셨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복음 6장 67절)
시몬 베드로의 대답이 참으로 기특하고 갸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6장 68~69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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