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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또 영화를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 파치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벌써부터 카리스마와 분위기가 느껴지는 존재다.
내가 지금껏 태어나서 본 많은 영화들 속에는 수많은 배우들이 출연했었다. 그 중에는 내 가슴 속에 강렬하게 각인된 명배우들이 있었다. 가령, 톰 행크스, 더스틴 호프만, 잭 니콜슨, 니콜라스 케이지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바로 이 배우. 알 파치노 만큼 강렬하고 인상적으로 내 마음에 각인된 배우는 없었다. 그는 어떤 영화에서나 최고였다. 이제, 내가 본 영화만을 대상으로 그의 커리어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겠다.
내가 그를 처음 접한 <대부>(1972)에서 그는 선량한 청년에서 아버지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암흑계의 대부가 되어야 하는 운명을 선택한 마이클 콜레오네 역을 맡아, 말론 브란도의 존재감에 뒤지지 않는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고, 뒤이어 <대부 2>(1974)에서도 가족을 지키고 패밀리의 사업을 부흥시켜야 하는 냉철한 대부의 모습을 카리스마 있게 연기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뜨거운 오후(1975)>에서는 종전의 대부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약간은 가볍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사회에 반항적이고, 친근함을 가진 게이 캐릭터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연기해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중 하나이고, 이 영화에서의 알 파치노의 연기가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또, 이 영화 속 젊었을 적 알 파치노의 모습은 청춘배우로서의 멋진 모습도 간직하고 있다.
80년대에 들어서 알 파치노는 또 한번의 혁명적인 일을 해내고야 마는데, <스카페이스>(1983)에 출연한 것이다. 자신이 평소에 존경해 마지않던 초창기 필름 느와르 시절의 대배우 폴 무니의 영화 <스카페이스>(1932)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에서 알 파치노는 세계 영화 팬들의 가슴 속에 각인되는 영화 역사상 최고의 카리스마 연기를 펼쳤다고 평가받았다. 90년대 들어서도 알 파치노는 왕성한 활동을 펼쳤는데, 그 시작은 <대부 3>(1990)이었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시리즈로 평가받는 대부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작품에서 알 파치노는 역시나 그를 중심으로 확실하게 위치시키는 힘을 발휘하며 인상 깊은 명연기를 펼쳤다.
그리고, 2년 뒤 그는 우리 모두가 다 기억하는 탱고 신이 인상적인 영화 <여인의 향기>(1992)에 출연하면서 또 한번 평단과 관객에게 최고의 찬사를 듣게 된다. 어찌 보면 이 지점이 알 파치노 연기 인생의 전환점이라 해도 맞을 것이다. 지금껏 8번 아카데미 연기상에 노미네이트되어서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던 알 파치노는, 이 영화로 마침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아카데미와의 오랜 악연을 청산했다.
알은 이 영화에서, 삶에 의욕을 잃은 뒤 여인의 향기에 관심이 많고 성질이 괴팍한 맹인 퇴역 장교 프랭크 슬레이드 역을 맡아, 프랭크가 한 고등학생과 우정을 나누며 인생과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과정을 정말 그만의 스타일로 완벽하게 연기했다. 여성 팬들은 이 영화 속 알 파치노의 모습을 매우 좋아하기도 한다.
이어서 알 파치노는 쉬지도 않고 <칼리토>(1993)에 출연한다. 이 영화는 알 파치노 때문에 제목이 칼리토에서 알 파치노로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될 정도로 알 파치노에 의한 알 파치노를 위한 영화다. 여기서도, 그는 그의 장기인 갱스터 역을 맡아 인생과 희망과 허무에 대해서 그 특유의 깊은 눈빛으로 훌륭하게 연기했다. 그 이후에도 <도니브래스코>(1997), <애니 기븐 선데이>(1999)에서 기억에 남을 호연을 선보였다.
2000년대에도 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는다. 현실과 가짜 사이에서 고뇌하는 영화감독 역을 맡은 <시몬>(2002)에 이어서, 로빈 윌리엄스와 함께 출연한 스릴러 영화 <인썸니아>(2002)에서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두 얼굴의 형사 역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이어서, <목격자>(2002), <리크루트>(2003) 같은 스릴러에서도 그의 존재감을 여지 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1년 뒤, <베니스의 상인>(2004)에서는 특유의 ‘감정 폭발’ 연기를 하면서, 최고의 카리스마로 다른 배우들을 압도하는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이후, 지금까지도 그는 <투포더머니>(2005), <88분>(2007), <오션스13>(2007) 등에 출연하며 칠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그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
더 덧붙이자면, 나와 50년이나 세월의 차이가 있는 이 배우를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이 배우가 외로움과 고독의 정서를 가장 잘 표출해내기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내가 그런 정서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또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폭발적인 연기력과 눈빛의 강렬함이 나를 사로잡은 것 같다. 소원이 있다면,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만 만나보고 싶다.
[출처] 알 파치노 -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 (2009년 작성)|작성자 filmmaker Kyu
본명 Alfredo James Pacino
출생 1940.4.25
출생지 미국 뉴욕 주 사우스 브롱크스
스타성 영화광들의 전설적 배우, 강건한 사실주의와 거친 목소리의 갱스터들의 대부,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많은 도전을 요하는 역할들을 용감하게 선택, 아카데미상 1회 수상과 8회의 후보 지명
출연작
The Merchant of Venice(2004)
Insomnia(2002)
Any Given Sunday(1999)
The Insider(1999)
The Devil's Advocate(1997)
Donnie Brasco(1997)
City Hall(1996)
Looking for Richard(1996)
Heat(1995)
Carlito's Way(1993)
Scent of a Woman(1992)
Glengarry Glen Ross(1992)
Frankie and Johnny(1991)
The Godfather: Part Ⅲ(1990)
Dick Tracy(1990)
Sea of Love(1989)
Revolution(1985)
Scarface(1983)
Cruising(1980)
And Justice for All(1979)
Dog Day Afternoon(1975)
The Godfather: Part Ⅱ(1974)
Serpico(1973)
The Godfather(1972)
The Panic in Needle Park(1971)
수상작
Scent of a Woman(1992)
후보작
Glengarry Glen Ross(1992)
Dick Tracy(1990)
And Justice for All(1979)
Dog Day Afternoon(1975)
The Godfather: Part Ⅱ(1974)
Serpico(1973)
The Godfather(1972)
뉴욕 주 브롱크스에서 태어난 알 파치노는 미국 배우 대부분—아니 세계 배우 대부분—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잣대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때로 감독이기도 했으며(<뉴욕 광시곡>, 1996) 할리우드의 두둑한 돈주머니에 큰 덕을 입은 사람임에도 예술적으로 다양한 방향을 추구하는 성향의 배우인 파치노는 그 본질상 철저히 미국적인 사람이다. 그는 이국적인 외모임에도 그런 제한을 뛰어넘어 주류를 재정의하는 데 기여했고 여러 가지 장애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한때 미남이었던 얼굴도 피부가 쳐지기 시작하며 젊음의 광채를 잃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심오하고도 위험해 보이는 미소의 주름이 새겨졌고 형형한 눈빛의 둥그런 눈은 그가 만화 스타일의 악당(<딕 트레이시>, 1990)이든, 주인공이든(<대부 2>, 1974)이든, 괴물(<데블스 애드버킷>, 1997)이든, 노동계급의 평범한 사람(<프랭키와 자니>, 1991)이든 그가 철저히 표현해내기만 한다면 그 인물들에게 캐리커처 같은 느낌을 더해주었다. 그는 역동적인 연기의 폭을 순식간에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우리가 주로 찬탄하는 것은 그의 연기에서 드러나는 한층 섬세한 세부들, 예컨대 그가 대단히 풍부한 표현력으로써 사용하는 그의 아주 큰 두 손 같은 것들이다.
한마디로 그의 신체적인 특징은 잘생긴 남자들이 흘러넘치는 분야에서 '잘생겼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파치노가 거의 두 세대에 걸쳐 영화계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앵글로색슨계 엘리트 백인들과는 대조적인 그 신선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욱 주목할 점은, 그가 연기한 역할들이 경우에 따라 말과 행동이 무대 또는 스크린에서 사라지는 지점에 놓이며, 파치노가 자신의 개성을 뚜렷이 새긴 곳도 바로 이 지점이라는 것이다. 리 스트라스버그의 지도를 받으며 메소드 연기를 익힌 그는 자신의 연기 기술을 특정한 수준까지 연마했다.
그리하여 확립된 그의 스타일은, 감정적 상태들을 포착하고 신체적 연기를 통해 그 감정들을 구체화하는 일에 주력을 쏟는 것이며, 동시에 그의 중요한 공동작업자들인 시드니 루멧과 노먼 주이슨,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이클 만 같은 감독들의 영역인 배경과 장식과 조명들을 잘 활용하는 데까지 미친다. 그리하여 파치노는 197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배우 경력 내내 파치노 하면 한두 가지 예외(<광란자>, 1980, <혁명>, 1985)는 있지만 거의 언제나 수준 높은 작품들을 연상시킨다는 점이 그를 그렇게 존경받는 배우로 만든 것이다.
수십 년에 걸쳐 그는 스스로 하나의 전설로, 다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배우로 자리 잡았으며, 마치 기적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지금은 나이와 함께 거칠어졌지만 원래는 여자처럼 약한 목소리에 체구도 작은 데다 이탈리아계였음을, 더구나 당시는 그런 특징들로는 잘되어야 조연 배우로 머무는 시절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파치노는 노동계급의 영웅인 동시에 신사들의 모범이기도 한데, 이는 그의 연기력에 대한 증언인 동시에 그의 깊은 숙고에서 나온 장인정신이 발휘된 결과이다.
대부에서 벗어나기
<형사 서피코>(1973)의 주인공 서피코와 <뜨거운 오후>(1975)의 요령 없는 은행 강도 소니, <도니 브래스코>(1997)의 마피아 부하 레프티 루제로, 아니면 <스카페이스>(1983)의 광기어린 토니 몬타나를 보자. 그 모든 길이 현대 미국 영화의 기반인 <대부>(1972)를 통과한다. 알 파치노는 영원히 마이클 콜레오네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 한 번의 연기—그야말로 한 생애의 역할인—로 살인과 형제 살해와 실패한 사랑과 힘의 축적을 배경으로, ‘노력하면 다 된다’는 아메리칸 드림과 가문에 대한 충성의 악몽과 20세기 이민자들의 경험 전체를 구현해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인의 향기>(1992)의 프랭크 슬레이드 중령 같은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에도 잘 맞는다. 그 연기로 그는 아카데미상과 골든글로브상을 받았다. 또 <히트>(1995)나 <인사이더>(1999), <칼리토>(1993), 또는 HBO가 텔레비전용으로 각색한 토니 쿠시너의 <엔젤스 인 아메리카>(2003)에서 그에게 에미상을 안겨준 자극적이고 짓궂은 로이 콘 같은 역할들이 더 돋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파치노는 같은 세대 배우들 중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우뚝 서 있다.
연극에 빠지다
알 파치노는 연극에도 엄청난 기여를 했다. 어린 시절에는 학교 연극으로 따분함을 달랬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너무 가난해서 오디션을 보러 가기 위해 버스 요금을 빌려야 할 정도였다. 영화로 진출했을 때 그가 맡은 초기의 역할들은 그가 무대에서 처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까칠하고 현실적인 역할들과 유사한 분위기를 갖는다. <백색공포>(1971)에서 그가 그려낸 마약중독자도 그렇다. 세월이 지나면서 파치노는 영화에 집중했지만, 연극은 여전히 그의 첫사랑으로 남아 있다.
그는 유명한 메소드 연기 코치 리 스트라스버그와 함께 연기를 공부했고 스트라스버그는 나중에 <대부 2>에서 하이먼 로스 역으로 파치노와 함께 출연했다.· 그는 <인디언은 브롱크스를 원한다>로 무대에서 자신의 존재를 처음으로 부각시켰고 그 연극으로 오비상을 받았다. 후에 그는 토니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그는 보스턴의 데이비드 휠러 극단의 오래된 단원이다.·그가 2002년에 오프브로드웨이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르투로 우이의 저지 가능한 상승>에 출연했을 때, 입장료는 오프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높은 액수(115달러)를 기록했다.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팬인 그는, 그 대시인을 더 많은 관객에게 알리기 위해 <뉴욕 광시곡>을 감독하고 제작하고 주연까지 해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나는 내가 배우로 인식되기를 바란다. 나는 무비스타가 되고자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ㅡ스티븐 제이 슈나이더, 『501 영화배우』, 정지인 역, 마로니에북스,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