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피기 전부터 ‘한번 가자 한번 가자’ 큰언니가 숨겨놓은 꿀 항아리라도 있다는 듯 재촉하셨는데 이래저래 미루어지다가, 벚꽃이 다 지고 흰 이팝꽃이 지천인 오월에서야 드디어 익산 언니네 간다. 여든셋 큰언니부터 예순여섯 살 막내인 나까지, 과거 젊었던 어느 날에 걱정스레 지금을 상상했던 대로 결국 모두 노인이 되었다. 그나마 운전을 여전히 잘하는 내 남편이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 최 서방은 아직 젊은이라나 사십 대라나. 언니와 오빠의 과한 칭찬으로 그가 신나게 운전대를 잡을 수 있으니 천만다행.
길가에 잘 자란 이팝나무들이, 농사철이면 바삐 논두렁길을 걸어가시던 어머니의 광주리 속 쌀밥 같은 이팝꽃을 풍성하게 이고 있다. 밤새 눈이 내렸던 아침 눈꽃처럼도 보인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이팝꽃은 처음 본다 처음 봐 이쁘다 이뻐! 꽃을 좋아하는 큰언니가 어린애처럼 좋아하신다. 고향과 고향 집과 고향 사람들을 공유한 형제자매가 함께 가는 길. 이보다 더 편안하고 따스하고 정겨운 시간이 있을까. 코로나로 누구와 무엇을 공유한 지가 언제였을까. 외로움과 쓸쓸함으로 삭막해져가는 요즈음이니만큼, 어릴 적 이야기 한 토막으로도 냉기가 서려 있던 가슴이 아랫목처럼 뜨뜻해지는 시간이다.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고 농사지으며 바삐 사는 익산언니가 함열역으로 나오셨다. 국화교육장에 가는 날이란다. 점심을 함께 먹은 후 시간에 맞춰 가실 요량이시란다. 역 앞에 추어탕집이 그리도 유명하단다. 어리굴젓에 뜨끈한 쌀밥을 비벼 먹으면 둘이 있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라서 형부가 살아생전에 이곳이 단골집이었단다. 뚝배기밥이 나오자마자 어리굴젓부터 한 수저 떠다가 비벼서 먹어보는데, 꽤 진하고 깊은 맛이다. 젓갈을 싫어하는 내가 세 번을 먹었다. 추어탕은 유명하다는 집을 여럿 다녀봐서인지 먹어본 맛 중의 하나에 불과했지만, 밥은 편안한 사람과 먹어야 제맛이라 했던가.
언제나 여행처럼 언니와 오빠와 그는 오후 내내 고스톱을 쳤다. 너는 방에 들어가 쉬어라. 언제나처럼 그렇게 말씀하셨고 언제나처럼 나는 방에 들어가 누워서 법륜 스님의 말씀을 들었다. 상대방을 고치려 하지 마라. 상대방 때문에 속상한 것은, 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상대방에 대한 내 마음일 뿐이지 상대방이 나를 속상하게 하려고 일부러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을 미워하지 마라. 내 마음에 미움이 쌓여가면 나만 괴로워지는 것. 나를 편안하게 하려고 노력하라.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려 본다.
둘째언니가 국화교육장에서 저녁때쯤 돌아오셨고 한우집에 가서 배불리 고기를 먹고 돌아왔다. 두 번째 고스톱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재미있을까? 둘째언니와 내가 고스톱을 싫어해서 다행이지 싶다. 언니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니는 하모니카를 잘도 불었다. 허공을 멋들어지고 구슬프게 불었다. 국화모종을 심어 자신이 원하는 모양대로 길러가는 국화 분재에도 열심이시다. 자동차가 없어 리어카에 국화 화분을 싣고 국화전시장까지 끌고 갔다는 이야기는 눈물겹다. 얼마나 국화 분재에 마음이 쏠려있었으면 그 무거운 것을 끌고 가셨을까 싶다. 국화 모종을 이리저리 철사로 엮어 자신이 구상한 모양으로 기르는 8개월의 시간 동안 언니는 행복하시다고 했다. 모양이 완성되고 국화꽃이 피어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한 달여의 시간은 행복의 극치라 하셨다. 세상만사 다 잊고 몰두할 수 있는 취미생활이야말로 최고의 보약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침은 누룽지를 끓여서 간단히 먹어요. 매번 그렇게 강조해서 우리가 말하지만, 둘째 언니는 매번 또 아침상을 차리신다. 밭둑에서 따 놓은 고추나물 무침, 어제저녁에 밭에서 뽑아온 마늘쫑 볶음, 조카가 보내준 보리굴비 구이, 때마다 정성스레 담가놓으신 장아찌 세 가지. 밭에서 바로 따 온 상추 한 접시. 소고기미역국, 그 바쁜 와중에 호박전까지 부치셨다. 어제 담가놓은 열무김치도 알맞게 익었다. 한 상 가득이다. 건강식이다. 최고! 최고!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여든 살 둘째 언니. 여든 살이라는 세월을 텃밭에 묻어놓으시기라도 했나. 세월을 거름 삼아 새싹이 돋아나는 나무라도 되는가. 젊은이처럼 움직이신다. 부지런하시다.
일어나자마자 시작된 고스톱은 아침 식사 후 다시 시작되었다. 둘째 언니와 나는 산책에 나섰다. 아침인데 바람도 불고 찬 기운이 느껴지나 햇살은 화사하다. 야트막한 산 언덕을 올라가니 아카시아 나무들이 즐비하다. 아카시아꽃이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가장 싱싱한 아카시아를 따서 언니가 한 입 베어 물고 나한테도 주신다. 나도 한입 가득 물고 어릴 때처럼 먹었다. 향기롭다. 고향이다. 고사리밭을 만나 재미있게 고사리를 끊었다. 묶어두었던 강아지를 데리고 나섰더니 호들갑스럽게 깡충거린다. 언니와 신이 난 강아지와 아침 햇살과 바람과 나무와 풀들을 함께 찍었다. 얼마나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풍경인가. 팔순에도 이런 시간과 마주하며 살아가는 언니는, 그만큼 건강을 유지하고 계신 것 같다. 도시의 말끔한 생활보다야 번잡하지만 꽃과 나무와 풀을 좋아하는 언니이고 보면 복 받은 여생이지 싶다. 형부가 살아 계셨으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인생은 마음대로 가 주지를 않는다.
익산에 올 때마다 들리고는 하는 강경 칼국수집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기다리는 맛도 맛을 더해준다. 해물이 가득하고 쫄깃한 국수는 일품이고 청량 고춧가루로 담근 김치는 톡 쏘는 맛이어서 국수와 잘 어우러지는 맛이다. 배도 부르고 마음도 부르다. 칼국수집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젊음은 도대체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아무리 웃어도 쓸쓸하다.
언니와 오빠가 차에 기름을 만땅으로 채워주셨고 밥도 사주셨고 우리 마음에도 행복이 만땅으로 채워졌다. 모두 만족하며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막내 심술보를 터트리고야 말았다. 이번처럼 고스톱만 칠 거면 네 분이 여행 다니세요 나는 안 갑니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반복되는 고스톱이건만, 어제 법륜스님의 ‘상대방을 고치려 하지 말라’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놓고도, 내 심술보는 풍선에 바늘을 찔러댄 듯 빵 터지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 그에게 한참 싫은 소리를 들었다. 뭐하러 그렇게 말해 재미있게 잘 다녀왔구먼 그 좋던 기분 한방에 망쳐놓으면 좋아?
고스톱을 치지 않는 여든의 둘째 언니가 나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 있을까? 우리가 익산에 내려갈 때마다 아픈 날일지라도 새벽부터 일어나 따스한 밥상을 차리시는 언니, 형제들에게 무엇이든 주려고만 애쓰시는 언니. 오늘 아침에도 구운 계란을 만들어 열 개씩 나누어주셨다. 열무김치를 가져가라고 나에게 누누이 말씀하셨다. 언니만한 아우 없다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