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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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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가찬[何家饌]진(晉) 나라 하증(何曾)이 호사(豪奢)를 좋아하여 날마다 먹는 음식에 만전(萬錢)을 쓰고도, “젓가락 댈 데가 없다.”고 하였다 한다.
♣ 하간[河間]하간은 하간헌왕(河間獻王)의 약칭으로 한 경제(韓景帝)의 셋째 아들 유덕(劉德)인데, 민간의 선본(善本)을 많이 수집하고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산동(山東)의 제유(諸儒)들이 많이 종유(從遊)했다.
♣ 하간유객성[河間有客星]어떤 사람이 떼를 타고 은하에 올라 직녀(織女)와 견우(牽牛)를 보고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촉중(蜀中)의 엄군평(嚴君平)을 찾아가 물으라 하였다. 돌아와서 엄군평을 찾아가 그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군평이 대답하기를, “모 연월일에 객성이 견우성을 범했다.”고 하였다. 《博物志》
♣ 하간전[河間傳]하간의 지역에 대대로 전해오는 정악(正樂)을 이름.
♣ 하간전[河間錢]후한 환제(後漢桓帝) 때 경도(京都)의 동요(童謠)에 “하간의 미녀가 돈을 세는 데 능하여, 돈으로 집을 만들고 금으로 당을 만들도다[河間姹 女工數錢 以錢爲室金爲堂].” 한 데서 온 말인데, 하간의 미녀란 곧 하간으로부터 궁중(宮中)에 들어온 영제(靈帝)의 모후(母后)인 영락태후(永樂太后)를 가리킨 말이다. 《後漢書 五行志》
♣ 하감[賀監]당 나라의 풍류객 하지장(賀知章)을 말함. 그가 비서감(秘書監) 벼슬을 지냈으므로 붙여진 이름임. 만년에 현종(玄宗)에게 도사(道士)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하자 현종황제(玄宗皇帝)는 특별히 그에게 경호(鏡湖) 한 굽이를 하사하여 그 곳에서 지내게 하였다. 86세 때 죽었다. 《新唐書 卷一百九十六 賀知章傳》
♣ 하감청유[賀監淸遊]하감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고사로 일찍이 비서감(祕書監)을 지낸 하지장(賀知章)을 이르는데, 그는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임금으로부터 경호(鏡湖) 한 굽이를 하사받아 그 곳에서 은거하였다. 《唐書 卷一百九十六》
♣ 하감호[賀鑑湖]하 감호는 당(唐) 나라 하지장(賀知章)의 별칭으로, 현종(玄宗)이 그에게 감호 섬계(鑑湖剡溪) 일곡(一曲)을 하사한 데서 온 말이다.
♣ 하개[荷蓋]연꽃으로 만든 덮개.
♣ 하거[河車]하거는 본디 도사(道士)가 연단(鍊丹)하는 원료인 연(鉛)을 가리키는데, 단(丹)을 수련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 하거불각양풍비[下車不覺攘馮臂]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옛날의 습관이 나왔다는 뜻이다. 춘추 시대 때 진(晉) 나라에 풍부(馮婦)라는 자가 있어서 범을 잘 잡다가 착한 선비가 되었는데, 들판을 지날 적에 여러 사람이 범을 쫓고 있는 것을 보고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수레에서 내려오자 선비들이 비웃었다고 한다. 《孟子 盡心下》
♣ 하걸축조구[夏桀築糟丘]조구(糟丘)는 술지게미가 산처럼 쌓인 것을 말한 것으로, 하 나라걸왕(桀王)이 무도하여 음주(飮酒)에 탐닉했던 것을 가리킨 말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 卷四》
♣ 하결산조지[河決酸棗地]사기(史記) 하거서(河渠書)에 “한(漢) 나라가 일어난 지 39년 만에 하수(河水)가 산조(酸棗)에서 터졌고, 그 뒤 40여 년이 지나 원광(元光) 연간에 호자(瓠子)에서 터져 설상(齧桑)을 휩쓸고 회수와 사수에까지 범람했다.” 하였다.
♣ 하계[霞溪]하계는 권유(權愈)의 호인데 숙종 때 대사간과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 하계구가[夏啓謳歌]하(夏) 나라의 우(禹)가 죽은 뒤에, 백성들이 우의 아들 계(啓)에게 칭송[謳歌]하고 따랐다.
♣ 하계진[賀季眞]당 나라 초기의 시인인 하지장(賀知章)을 말하는데, 계진은 곧 그의 자이고, 호는 사명광객(四明狂客)이다.
♣ 하곡[荷谷]허봉(許篈)의 호.
♣ 하공[何公]하공은 진 무제(晉武帝) 떄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른 하증(何曾)을 말한다
♣ 하과[夏課]고려 때 선비들의 학습 관례. 5~6월이 되면 선비들이 절의 승방(僧房)을 빌려 약 50일 간 함께 모여 글을 읽는 것을 말하는데, 십이도(十二徒) 초창기에 성행하였다. 특히 최충(崔冲)의 문도는 귀법사(歸法寺)의 승방을 빌려 하과를 닦았는데, 그들 중 학업이 우수한 자들을 뽑아 각촉부시(刻燭賦詩)를 시험하여 우수한 자를 술로 표창하였다.
♣ 하과[夏課]옛날에 공부하는데 가을과 겨울에는 글을 읽고, 여름에는 글짓기를 일과(日課)로 하였다.
♣ 하관[荷冠]비를 막으려고 연잎으로 만든 고깔.
♣ 하괴[荷蕢]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거(隱居)한 현인을 말한다. 하궤는 삼태기를 진 사람으로 은거한 현인이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공자가 위(衛) 나라에서 경(磬)을 치고 있었는데 삼태기를 지고 공자의 집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주에 “이 역시 은거한 현인이다.”라고 하였다.
♣ 하괴[河魁]하괴는 문곡성(文曲星)을 말한 것인데, 이백(李白) 사마장군가(司馬將軍歌)에 “몸이 옥장에 거하매 하괴(河魁)가 임하고 붉은 수염 창 같은데, 머리에 쓴 관 산처럼 높아라.” 한 시가 있다.
♣ 하괴[荷蕢]하궤는 논어(論語)에 있는데 공자가 위(衛)에 있을 때, 삼태기를 멘 사람[荷蕢者]이 문 앞을 지나가며, 공자의 세상을 건지려고 다니는 것을 조롱한 은사(隱士)이다.
♣ 하교[河橋]이별하는 장소로 곧잘 등장하는 시어(詩語)이다. 보통 하교 양류(河橋楊柳)로 많이 쓴다.
♣ 하교일자다[河橋一字多]이별할 때에는 한마디의 말도 오히려 많다는 뜻. 하교는 교량(橋梁)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별을 읊은 시에 주로 등장한다.
♣ 하군[何窘]어찌나 군색한지.
♣ 하궤[荷簣]혼란한 세상을 피해 숨어사는 사람을 말한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삼태기를 메고 가던 사람[荷簣人]이 공자의 경쇠 소리를 듣고는 “경쇠 두들김이여, 마음이 세상에 있구나.[有心哉 擊磬乎]”라고 비평한 내용이 나온다.
♣ 하규[夏畦]증자(曾子)가 이르기를 “어깨를 으쓱이면서 아첨하여 웃는 짓이 무더운 여름날에 김매기보다 괴로운 일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인데, 하규(夏畦)는 곧 여름날 논밭에 나가 김매는 것을 말한다. 《孟子 滕文公下》
♣ 하낙도서[河洛圖書]주역(周易) 계사상(繫辭上)에 “하도는 중국 고대 복희씨(伏犧氏)가 왕 노릇 할 때 하수(河水)에서 용마(龍馬)가 그림을 가지고 나왔는데, 복희씨가 그 그림을 본떠 8괘(卦)를 그렸으며, 낙서 역시 우(禹) 임금 때 낙수(洛水)에서 거북이 그림을 가지고 나와 우 임금이 그것으로 홍범(洪範)을 지었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별을 가리킨 것이다.
♣ 하남[河南]하남 정씨(河南程氏)로, 송 나라 때의 유학자인 정자(程子)를 가리킨다.
♣ 하남백숙[河南伯叔]하남은 중국 낙양(洛陽)의 별칭. 하남의 형제는 그 곳에서 이학(理學)을 천명한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를 말한다.
♣ 하남시[河南詩]하남(河南)은 호가 명도(明道)인 정호(程顥).”부귀하여도 음하지 않고 빈천하여도 즐기니, 남아가 이 경지에 이르면 바야흐로 호웅일세.[富貴不淫貧賤樂男兒到此方豪雄]"라는 시를 말한다. 《二程全書 卷三十八 秋日偶成》
♣ 하내[河內]한나라 구순(寇恂)이라는 사람이 하내(河內)태수로 정치를 잘하여서 백성들이 임금께 구순이 임기가 끝났으니 한 임기만 더 있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탄원하였다 한다.
♣ 하내구공[河內寇公]하내 태수로 있던 구순(寇恂)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구순전(寇恂傳)에 “광무황제(光武皇帝) 건무(建武) 3년에 영천(潁川)에 도둑이 크게 일어나자, 하내 태수로 있는 구순을 불러 도둑을 치게 하였더니, 순이 이르러 도둑을 모두 평정하였다. 그 뒤 광무제의 남정(南征)에 종군하여 영천을 지날 때 영천 백성들이 거가(車駕)를 막고 ‘원컨대 폐하께서는 1년간만 더 구공을 머물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한다.
♣ 하내절[河內節]일찍이 하내(河內) 지방에 화재가 나서 천여 가호가 불탔으므로, 경제(景帝)가 급암(汲黯)을 시켜 그 곳을 순시하게 하였는데, 그가 하내에 갔다가 하남(河南) 지역을 둘러본 결과, 그 곳에는 수한(水旱)으로 인해 가난한 백성이 만여 가호나 되었는바, 그 중에 혹은 부자(父子)가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는 지경이었으므로, 그가 편의에 따라 부절(符節)을 가지고 하남의 창고 곡식을 흩어서 빈민들을 구제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二十》
♣ 하내학[河內學]하내는 중국 황하(黃河) 이북 지방으로 하남성(河南省) 일대를 말하는데, 송 나라 이학(理學)의 태두(泰斗)인 정이(程頤)의 출생지로서 정이를 가리킨다. 곧 정이의 학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임.
♣ 하담[荷潭]충청북도 충주(忠州) 가차산면(加次山面)에 있는 지명이다.
♣ 하담이립[荷擔而立]외적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짐으로써 백성들이 모두 가재도구 등을 등에 지고 어깨에 메고서 피난길을 떠나게 됨을 이른 말이다.
♣ 하당경북두[何當傾北斗]실권 없는 관직 생활은 아무 쓸모 없다는 뜻. 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에, “북에는 국자 모양의 북두성이 있지만 국이나 술을 뜰 수는 없네.” 하여, 관직에 있는 것이 허울일 뿐 별로 쓰임새가 없음을 비유하였음.
♣ 하당지질[下堂之疾]증자(曾子)의 제자인 악정자춘(樂正子春)이 당을 내려가다가 발을 다쳤다[下堂而傷其足]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禮記 祭義》
♣ 하대[夏臺]하대는 하(夏) 나라의 감옥 이름인데, 하 나라 걸왕(桀王)이 탕(湯) 임금을 이 감옥에 가두었었다. 《史記 夏紀》
♣ 하대[河垈]황하와 태산 사이의 지역, 즉 산동(山東)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나, 여기서는 중국의 대명사로 쓰였다.
♣ 하대관룡방[夏臺關龍逄]하대는 하(夏) 나라의 감옥 이름. 관룡방은 하 나라의 현신(賢臣)이었는데, 하왕(夏王) 걸(桀)의 무도함을 간하다가 감옥에 갇혀 죽임을 당하였다.
♣ 하대명년[何待明年]기다리기가 매우 지루함.
♣ 하덕지쇠[何德之衰]“초(楚)의 접여(接輿)가 노래하면서 공자 앞을 지나며 말하되, 봉이여, 봉이여, 왜 덕이 쇠한고[鳳兮鳳兮 何德之衰].” 하였다. 논어(論語)
♣ 하도[河圖]중국 고대 복희씨(伏羲氏)가, 용마(龍馬)가 도(圖)를 등에 지고 하(河)에서 나온 것을 보고 그 무늬를 법받아 팔괘(八卦)를 그었다 함.
♣ 하도낙서[河圖洛書]주역(周易) 계사(繫辭)에 “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라 하였음.
♣ 하돈[河豚]하돈(河豚)은 복어(鰒魚)의 이칭(異稱)이다.
♣ 하돈안본[河豚贋本]죽파시화(竹坡詩話)에 “미원장(米元章)이 다른 사람의 서화를 잘 바꾸는데 양차옹(楊次翁)이 국을 마련하여 밥을 대접하며 ‘오늘은 그대를 위해서 하돈 생선을 준비하였다.’고 하였는데 사실은 다른 생선이었다. 원장은 의심하여 먹지 아니하니 차옹은 웃으며 ‘공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이는 안본이다.’했다.” 하였음.
♣ 하동[河東]유씨(柳氏)를 두고 쓰는 별칭임.
♣ 하동부[河東賦]문장의 이름.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지어서 임금에게 올린 것이다.
♣ 하득무송편시백[賀得茂松偏是柏]훌륭한 사람에게는 훌륭한 친구가 많다는 뜻이다.
♣ 하락[河洛]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가리킨다.
♣ 하량[河梁]하량은 하수를 건너지른 다리인데, 한(漢)의 이릉(李陵)이 소무(蘇武)와 작별하면서 하량별(河梁別)이란 시를 썼었다. 《漢書 李陵傳》
♣ 하량곡[河梁曲]송별(送別)의 노래를 뜻함. 하량은 강의 다리를 이르는데, 한 소제(漢昭帝)가 즉위하여 흉노(匈奴)와 화친을 함으로써, 흉노에 사신갔다 19년 동안이나 억류되었던 소무(蘇武)가 한 나라로 돌아올 적에 이릉(李陵)이 소무를 송별하는 시에서 “서로 손 잡고 하량에 오르노니 나그네는 저문 날에 어디로 갈꼬[携手上何梁 游子暮何之]” 한 데서 온 말이다.
♣ 하로[賀老]이태백(李太白)을 적선(謫仙)이라고 일컬었던 당(唐) 나라의 하지장(賀知章)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비서감(祕書監)으로 있다가 그의 고향인 회계산 경호(鏡湖)의 도사(道士)로 나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현종(玄宗)이 경호(鏡湖) 1곡(曲)을 하사하였으므로, 경호를 하감호(賀監湖) 혹은 감호(鑑湖)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 시의 감호당이라는 당호(堂號)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참고로 이태백의 시에 “강동을 향해서 가고 싶다만, 정작 누구와 술잔을 들꼬. 회계산에 이미 하로도 없지 않나, 술 실은 배 노 저어 돌아올밖에.[欲向江東去 定將誰擧杯 稽山無賀老 却棹酒船回]”라는 구절이 나온다. 《李太白集 卷22 重憶》 소동파의 시에 “경호에 하감 같은 사람이 없어, 혜산의 길목에서 통곡하노라.[鏡湖無賀監 慟哭嵆山道]”라는 구절이 보인다. 《蘇東坡詩集 卷15 哭 景純》
♣ 하로동선[夏爐冬扇]여름의 화로와 겨울의 부채. 쓸모 없는 재능을 말한다.
♣ 하로아오어[賀老雅吳語]하로(賀老)는 당(唐) 나라 때의 시인 하지장(賀知章)을 이른다. 그는 현종(玄宗) 때에 벼슬이 비서감(祕書監), 예부 시랑(禮部侍郞)에 이르러 그만두고 도사(道士)가 되기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었다. 오어(吳語)는 남방(南方)의 방언을 가리키는데, 두보(杜甫)의 견흥시(遣興詩)에 “하공은 본디 오어를 잘하여, 관직에 있어도 항상 맑고 미치광이 같았네[賀公雅吳語 在位常淸狂].”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集 卷七》
♣ 하루[何陋]공자가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하자, 어떤이가 말하기를 “고루해서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군자가 사는데 무엇이 고루하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罕》
♣ 하류신난처[下流信難處]논어(論語) 자장(子張)에 “군자는 하류에 처하는 것을 싫어하나니, 천하의 악이 모두 그곳으로 모여들기 때문이다.[君子惡居下流 天下之惡皆歸焉]”라고 한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의 말이 실려 있다.
♣ 하륜[下淪]낮게 깔리다.
♣ 하리[何李]명(明) 나라 때의 시인인 하경명(何景明)과 이몽양(李夢陽)을 병칭한 말이다.
♣ 하리가[下里歌]장사를 치를 때 무덤 앞에서 부르는 노래란 뜻으로, 만가(挽歌)를 가리킨다.
♣ 하리백설[下里白雪]하리곡과 백설곡은 전국시대 초 나라의 곡명으로, 하리곡은 수준이 매우 낮고 백설곡은 매우 높다 하여 흔히 시 품격의 높낮이에 대한 대칭으로 쓰인다.
♣ 하막학부시[何莫學夫詩]공자가 제자들에게 왜 시경(詩經)을 배우지 않느냐고 질책하면서, 시는 일으킬 수 있으며 살필 수 있으며 무리를 지을 수 있으며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게 하며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고 하였다. 《論語 陽貨》
♣ 하만자[何滿子]사곡(詞曲) 이름. 하만(何滿)은 사람 이름인데, 그가 형장(刑場)에 나아갔을 때 자신의 속죄(贖罪)를 위하여 이 사곡을 비로소 만들었다고 함. 백거이(白居易)의 하만자(何滿子)
♣ 하목[霞鶩]하목은 낙하고목(落霞孤鶩)의 준말. 낙하는 지는 놀을 말하고 고목은 외로운 따오기. 당(唐) 나라의 문장가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지는 놀은 외로운 따오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은 긴 하늘과 함께 한빛일세[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한 말이 있는데, 이 구(句)는 가장 아름다운 표현으로 오늘날까지 일컬어진다.
♣ 하목융상[河目隆顙]공자의 얼굴을 묘사하여, 가어(家語)에 “하목융상(河目隆顙)”이라 했는데, 주에, “하목(河目)은 반듯한 눈”이라 했다.
♣ 하목해구[河目海口]공자의 얼굴이 하목(河目)이요 해구(海口)라 한다.
♣ 하미미종[河糜微尰]미종(微尰)은 각각 각기병(脚氣病)과 수종(水腫) 다리를 가리킨다. 하미(河麋)는 습한 저지대에 사는 사람으로 보통 참소하는 인간을 지칭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교언(巧言)에 “도대체 저 사람 누구인고, 습지에 사는 사람일세. 힘도 없고 용기도 없지만, 난리 일으키는 덴 선수로세. 각기병에 수종 다리, 어떻게 용기를 발휘하리[彼何人斯 居河之麋 無拳無勇 職爲亂階 旣微且尰 爾勇伊何]”라고 하였다.
♣ 하방[下方]상방(上方)은 주지승의 거처를, 하방은 일반 승려의 거처를 말한다.
♣ 하방회[賀方回]송(宋) 나라 때 사람으로 자가 방회인 하주(賀鑄)를 이름
♣ 하백[河伯]물을 맡은 신의 이름. 빙이(氷夷)혹은 풍이(馮夷)라고도 한다. 어떤 전설에 의하면 그가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어 수신이 되었다고 하고, 또는 그가 약을 먹고 물을 만나 신선이 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풍류를 알고 흰 얼굴에 큰 키를 지닌 미남으로 하반신을 물고기의 형태라 한다.
♣ 하백과량애[河伯誇兩涯]하백은 황하 귀신의 이름이고, 양애(兩涯)는 양쪽의 물가가 있는 강물을 가리킨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첫머리에 “가을 홍수가 밀어닥쳐 온갖 냇물이 황하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거대한 탁류를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양쪽의 물가에 있는 소와 말을 분별할 수가 없게 되자,[兩涘渚崖之間 不辯牛馬] 이를 보고 하백이 혼자 기뻐하여 으스대면서 천하의 아름다움은 모두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 하백망양[河伯望洋]하백은 황하의 수신(水神)인데, 그가 끝없이 광대한 바다를 바라보고는 멍하니 탄식을 했다는 데서, 즉 위대한 인품이나 높은 학문 앞에서 자신의 범용(凡庸)하고 천단(淺短)함을 느끼어 한탄함을 비유한 말이다. 《莊子 秋水》
♣ 하변영필[河邊靈匹]신령한 배필이란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을 말한다. 음력 7월 칠석(七夕)에는 은하수 동쪽에 있는 견우성과 서쪽에 있는 직녀성이 오작교(烏鵲橋)에서 서로 만난다고 한다.
♣ 하보릉파말[河步凌波襪]조식(曹植)의 낙신부(洛神賦) 문선(文選)에 “물결을 타는 가벼운 걸음에, 비단 버선에선 먼지 같은 물방울 튄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 하복[夏馥]동한(東漢) 진류(陳留) 사람으로 자는 자치(子治)이다. 영제(靈帝)때 국정의 잘못을 거침없이 말했던 이유로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환관들의 미움을 사 범방(范滂) 장검(張儉)과 함께 사류 집단의 괴수로 지목을 받았다. 나중에 영제가 체포령을 내리자 임려(林慮) 산중으로 도망하여 이름을 숨기고 대장간에서 고용살이를 하다가 죽었다. 《後漢書 卷六十七 夏馥傳》
♣ 하부자[賀夫子]명(明) 나라 사람인 하흠(賀欽)을 가리킨다.
♣ 하분[河汾]황하(黃河)와 분수(汾水) 사이의 지역을 이른 말인데, 한(漢) 나라의 대유(大儒)인 양웅(揚雄)과 수(隋) 나라의 대유인 왕통(王通)이 모두 여기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 하분일초정[河汾一草亭]호화와 사치를 극하다가 끝내 나라를 망친 수 양제(隋煬帝)로서는,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을 올렸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황하(黃河)와 분수(汾水) 사이로 돌아와서 초당을 짓고 1000여 명의 제자들을 가르친 왕통(王通)의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96 王績傳 註》
♣ 하비[下邳]하비는 지명(地名). 한(漢) 나라 장량(張良)이 하비의 다리 위에 나갔더니, 한 노인(老人)이 량의 옆으로 다가와서 다리 밑으로 신을 떨어뜨려 놓고 량더러 주워 오라고 하자, 량은 공손히 주워다 신겨 주었다. 그 후 노인은 마침내 책 한권을 량에게 주어, 그는 그 책을 읽고 뒷날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공신이 되어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史記 留侯世家》
♣ 하사[河沙]항하(恒河), 즉 인도 갠지스 강의 모래알. 헤일 수 없이 많다는 뜻으로 씀.
♣ 하사표[賀赦表]왕명으로 죄수를 놓아줄 때 하례를 올리는 글.
♣ 하삭[河朔]하북(河北). 황하(黃河)이북 지방.
♣ 하삭면[河朔面]하삭(河朔)은 옛날 황하(黃河) 이북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보통 북방을 뜻한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君爲江南英 面作河朔偉”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28, 諸公餞子敦 軾以病不能往 復次前韻》
♣ 하삭백[河朔百]후한 때 유송(劉松)이 하삭에서 피서(避暑)하면서 주야로 술을 마셨던 고사가 있다.
♣ 하삭원음[河朔袁飮]여름철에 함께 피서를 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읊던 추억을 말한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유송(劉松)과 원소(袁紹)의 자제가 황하(黃河) 북쪽 지방[河朔]에서 만나 삼복 더위를 피하려고 밤낮으로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해 보냈던 고사가 있다. 《初學記 卷3 註》
♣ 하삭음[河朔飮]무더운 여름철에 피서(避暑)한다는 명분으로 마련한 술자리를 말한다. 하삭은 하북(河北) 지방을 가리키는데, 후한(後漢) 말에 광록대부(光祿大夫) 유송(劉松)이 하북(河北)의 군(軍)을 진무하면서 원소(袁紹)의 자제들과 날마다 연음(宴飮)을 하고, 특히 삼복(三伏) 때에는 주야로 통음(痛飮)을 하여 일시적인 더위를 피했던 데서 온 말이다. 《初學記 歲時部上 夏避暑飮》
♣ 하삭주[河朔酒]하삭은 곧 하북(河北)인데, 후한(後漢) 때 유송(劉松)이 그곳에서 원소(袁紹)의 자제들과 함께 삼복(三伏) 때마다 주야로 술을 많이 마시어 일시적인 피서(避暑)를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하삭피서[河朔避暑]하삭은 황하(黃河) 이북의 땅인 하북(河北)을 말한다. 후한(後漢) 말엽에 유송(劉松)이 하삭에 있으면서 삼복(三伏) 무렵이면 항상 원소(袁紹)의 자제(子弟)와 함께 연일 주야로 술을 마시면서 피서했다 한다.
♣ 하산[夏山]하산은 성희안의 본관인 창녕(昌寧)의 옛이름이다.
♣ 하삼[荷衫]연잎으로 지은 옷으로, 고결한 선비의 조촐한 행색을 말한다.
♣ 하삽유령[荷鍤劉伶]진(晉) 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주덕송(酒德頌)’을 지은 유령이 늘 술병을 들고 나가면서 삽을 메고 따라오게 하다가[使人荷鍤而隨之] 자기가 죽으면 그 자리에 파묻도록 한 고사가 있다. 《蒙求 中 劉伶解酲》
♣ 하상[下殤]죽었을 때의 나이가 19세에서 16세까지를 장상(長殤), 15세에서 12세까지를 중상(中殤), 11세에서 8세까지를 하상(下殤)이라고 하는데, 8세 미만에 대해서는 모두 입어 주는 상복이 없다. 《儀禮 喪服》
♣ 하상곡[河上曲]같은 처지의 사람을 애처로워하는 뜻이 담긴 옛날 노래 이름이다. 춘추 시대 오(吳) 나라 대부 피리(被離)가 자서(子胥)에게 “무얼 보고서 희(喜)를 신임하느냐.”고 묻자, 자서가 “나의 원수는 희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상가(河上歌)를 듣지 못했는가. 동병상련(同病相憐)이요 동우상구(同憂相救)의 뜻이 담겨 있다.”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吳越春秋 闔閭內傳》
♣ 하상공[河上公]하상공은 한 문제(漢文帝) 때 하빈(河濱)에 은거했던 선인(仙人)을 말한다.
♣ 하상기맹롱[遐想起盲聾]하상은 세속을 초월하는 원대한 생각을 말한 것으로, 즉 원대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세상 일을 전혀 간섭하지 않음을 뜻한다.
♣ 하서[河西]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의 호이다.
♣ 하서과복[河鼠過腹]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초료(鷦鷯)는 깊은 숲에 깃들어도 나뭇가지 하나를 넘기지 못하고 두더쥐는 하수에서 물을 마셔도 제 배 차면 그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 하서지목책[下西知木柵]경주(慶州)에 있는 진보(鎭堡)의 하나.
♣ 하석[霞石]박정(朴炡)의 호이다.
♣ 하석상대[下石上臺]아랫돌을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굄. 즉 임시 변통으로 이리 저리 둘러맞춤을 말한다.
♣ 하선동력[夏扇冬曆]여름의 부채와 겨울의 새해 책력. 곧 선사하는 물건이 철에 맞음을 이름
♣ 하선호지[河先惡池]큰 일을 하려면 적은 일부터 먼저 한다는 말이다. 예기(禮記) 예기(禮器)에 “진(晉) 나라 사람은 하(河)에 제사하려면 먼저 호지(惡池)에 제사한다.[晉人有事於河 必先有事於惡池]" 하였다.
♣ 하성[夏城]하성은 창녕(昌寧)의 고호이다.
♣ 하손[何遜]하손은 남조(南朝) 양(梁) 나라 섬인(剡人)인데 8세에 능히 시를 지었으며 벼슬은 상서수부랑(尙書水部郞)을 지냈다. 문장이 유효작(劉孝綽)과 더불어 제명(齊名)하여 세상이 하유(何劉)라 불렀음. 하수부집(何水部集)이 있음. 《梁書 卷六百九十三》
♣ 하손동각시[何遜東閣詩]남조(南朝) 양(梁)의 시인. 그의 설중매화(雪中梅花)를 읊은, 동각(東閣)시가 유명하다.
♣ 하수[下壽]60세를 말한다.
♣ 하수[蝦鬚]주렴의 이명(異名)이다.
♣ 하수[夏首]하수의 어구. 장강과 갈라진 곳
♣ 하수부[何水部]양(梁) 나라 때의 문장가 하손(何遜)이 상서 수부랑(尙書水部郞)을 지냈기 때문에 이렇게 일컫는다.
♣ 하수조[何水曹]두보의 시에서는 양(梁) 나라의 뛰어난 시인으로 수부 원외랑(水府員外郞)을 지낸 하손(何遜)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하삼성(何三省)을 가리킨다.
♣ 하수황서어랍경[夏授黃書圄臘更]한(漢) 나라 황패(黃霸)가 하후승(夏侯勝)과 함께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할 적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간곡히 요청한 결과 그로부터 상서(尙書)를 배워 뒤에 현달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75 夏侯勝傳 卷89 循吏列傳 黃霸傳》
♣ 하승[下乘]열등마(劣等馬)와 같은 말.
♣ 하시[夏時]하시는 인월(寅月)을 세수(歲首)로 삼은 하(夏) 나라의 역(曆)을 말한다.
♣ 하시소천하[下視小天下]공자(孔子)는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 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 《孟子 盡心上》
♣ 하심[何沈]심약(沈約)과 하손(何遜)은 남북조 시대 남조의 시인인데, 심약은 박학하여 사성보(四聲譜)를 지었으며 하손의 시는 사조(謝脁)에 비교되었다.
♣ 하심주[荷心酒]정공각(鄭公慤)이 연잎[蓮葉]에다 술을 담아 두고 잠(簪)으로 찔러서 줄기와 통하게 하여 그 술을 마시니 맑고 서늘하였다.
♣ 하악[河嶽]황하(黃河)와 오악(五嶽).
♣ 하안[何晏]삼국(三國) 때의 위(魏) 나라 사람. 미남인 데다가 늘 얼굴에 흰 분을 바르고 다녀, 한때 유행이 되기도 하였다. 흔히 하랑(何郞)이라 부른다. 《三國志 卷九》
♣ 하안거[夏安居]여름 장마 때 중들이 선방(禪房)에 들어앉아 수도하는 기간을 말한다.
♣ 하액[霞液]이슬을 말한다. 오균(吳筠)의 유선시(游仙詩)에 “이슬은 아침에 먹을 수 있고 홍지(虹芝)는 저녁에 먹을 만하다.” 하였다.
♣ 하약[賀若]거문고 곡조에 하약(賀若)이 가장 담고(淡古)하다 하였음. 소식의 시에 “琴裏若能知賀若 詩中定合愛陶潛"이라 하였음.
♣ 하약필[賀若弼]수(隋) 나라 대장 하약필(賀若弼)이 진(陳) 나라를 쳐서 멸망시킨 일이 있었다.
♣ 하양[河陽]일찍이 하양 현령(河陽縣令)을 지냈던 진(晉) 나라의 문장가 반악(潘岳)을 가리킨다. 그가 현령으로 부임한 뒤에 그 고을에 온통 도리화(桃李花)를 심어 놓고 즐겼다는 ‘하양일현화(河陽一縣花)’의 고사가 전한다. 《白氏六帖 縣令》
♣ 하양[河陽]하양은 중국 황하(黃河)의 북쪽 기슭으로, 오늘날 하남성(河南省) 맹현(孟縣)의 서쪽에 있던 고을 이름이다.
♣ 하양만도리[河陽滿桃李]하양은 하남성(河南省) 맹현(孟縣)의 서쪽에 있는 고을. 진(晉)의 반악(潘岳)은 일찍이 이 고을의 원이 되어 곳곳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를 심었으므로 뒤에 전하여 미담(美談)이 되었다.
♣ 하양부[河陽賦]진(晉) 나라의 반악(潘岳)처럼 멋들어진 솜씨를 발휘하여 지은 시라는 말이다. 반악이 일찍이 하양 현령(河陽縣令)을 지냈으므로, 하양을 그의 별칭으로 쓰게 되었다.
♣ 하양수[河陽樹]하양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맹현(孟縣)의 동쪽에 있는 지명인데, 진(晉) 나라 때 반악(潘岳)이 이곳의 현령으로 부임하여서 온 고을 안에 복사나무와 오얏나무를 심어 온 고을이 꽃 천지가 되었다.
♣ 하양일현홍[河陽一縣紅]백낙천의 백씨육첩(白氏六帖) 권20에 “진(晉) 나라 반악(潘岳)이 하양(河陽)의 수령으로 나가서, 온 경내에 복사꽃과 오얏꽃을 두루 심자, 사람들이 이를 일컬어 ‘하양 일현화(河陽一縣花)’라고 하였다.”는 말이 있다.
♣ 하양일현화[河陽一縣花]진(晉) 나라 때 반악(潘岳)이 하양 현령(河陽縣令)이 되었을 때 하양현 안에 도리(桃李)를 많이 심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하양은 온 고을이 꽃이다.” 하였다.
♣ 하연[賀燕]경사 있는 집에 제비가 날아드는 것을 치하하는 손님에 비한다.
♣ 하염각소양락추[下鹽却笑羊酪麤]육기(陸機)가 왕무자(王武子)에게 가니 무자가 마침 양락(羊酪) 수곡(數斛)을 앞에 놓고 있다가 육기에게 묻기를, “강동(江東)에는 무슨 식물이 이것과 적대(敵對)할 만한가.” 하니, 육기가 답하기를, “순채국[蓴羹]인데 다만 소금콩[鹽豉]을 넣지 않소.” 하였다.
♣ 하엽배[荷葉杯]하엽배란 곧 연잎의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줄기를 통해서 술을 빨아 마시는 것을 말한다.
♣ 하예경사[何預卿事]당신의 일과 무슨 상관인가? ‘預’는 ‘與’와 통하며 ‘관여하다’, ‘상관하다’의 뜻.
♣ 하오[夏五]궐문(闕文)을 뜻하는 말로, 춘추(春秋)의 환공(桓公) 14년 조(條)에 ‘하오월(夏五月)’을 ‘하오’로만 기재하여 ‘월(月)’ 자를 빠뜨린 데서 온 말이다.
♣ 하옥[夏屋]문간의 행랑인데 넓으면서 낮은 집
♣ 하옥[瑕玉]티가 있는 구슬. 흠이 없으면 완전한 것인데, 아깝게도 흠이 있어 결점이 된다는 뜻. 옥에 티.
♣ 하원[河源]하원은 황하(黃河)의 근원을 말한다.
♣ 하위[河渭]黃河와 渭水를 가리킨다.
♣ 하유[下帷]서한(西漢)의 학자 동중서(董仲舒)가 강송(講誦)할 때 장막을 내리곤 하였으므로[下帷], 사람들이 그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21 儒林列傳 董仲舒》
♣ 하유[瑕瑜]옥의 티와 광택. 전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
♣ 하유동생[下帷董生]동생(董生)은 동중서(董仲舒)이다. 동중서가 장막을 내리고 외인과 떨어져 글만 읽었으므로 동중서를 하유노인(下帷老人)이라고도 한다. 환혼기(還魂記) 숙원(肅苑)에 “하유노인이 동산도 구경하지 못했다.[下帷老子不窺園]" 하였다.
♣ 하유불잠출[下帷不蹔出]방에 발을 치고 깊이 들어앉아 독서(讀書)에만 전념함을 말함. 《漢書 董仲舒傳》
♣ 하유선생어육경[下帷先生飫六經]서한(西漢)의 학자 동중서(董仲舒)가 장막을 드리운 채 강론을 하였으므로 제자들 중에서도 그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자가 있었으며, 독서에 심취한 나머지 3년 동안 집의 뜨락을 내다보지도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儒林列傳 董仲舒傳》
♣ 하육[夏育]주(周)나라 때 위(衛)의 용사(勇士).
♣ 하육[何肉]하육은 하씨(何氏)의 고기. 남제(南齊) 때 불교(佛敎)를 매우 신봉(信奉)하였던 하윤(何胤)이 육식(肉食)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 하음[何陰]양(梁) 나라 때 시(詩)를 잘 하기로 명성이 높았던 하손(何遜)과 음갱(陰鏗)을 병칭한 말이다.
♣ 하의[荷衣]연(蓮)잎으로 엮어 만든 은사(隱士)의 옷을 말한다. 초사(楚辭) 이소경(離騷經)에, “연잎을 재단하여 옷을 만듦이여, 연꽃으로는 치마를 짓도다.[製芰荷而爲衣兮 集芙蓉而爲裳]" 하였다.
♣ 하의[荷衣]연잎으로 만든 옷으로, 신선이나 도사, 은자가 입는 옷을 가리킨다. 초사(楚辭) 구가(九歌) 소사명(少司命)의 “연잎 옷에 혜초의 띠를 띠고 금방 왔다가 훌쩍 떠나네[荷衣兮帶 儵而來兮忽而逝].”에서 나온 것으로 역시 은사의 생활을 말한 것이다.
♣ 하의치[荷衣緇]하의는 연잎으로 지은 은자(隱者)의 옷을 뜻한 것으로, 전하여 풍진(風塵) 속에 분주하다가 세속의 더럽힘을 받은 것을 비유한 말이다.
♣ 하이[蝦夷]고대 일본 북단에 거주하던 미개 종족. 지금 일본의 북해도(北海道)를 이름.
♣ 하이가위[何以假爲]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거짓 직함을 띠고 갈 경우, 자신이 먼저 바르지 않기 때문에 바른 말을 할 수 없어서, 거짓 직함을 띠고는 갈 수 없다는 뜻이다.
♣ 하일진현[夏日晉賢]춘추 때 진(晉)나라의 어진 대부(大夫) 조순(趙盾)이 위엄 있기로 유명했다. 진 나라의 가계(賈季)가 조최(趙衰)를 겨울날의 해로, 조순을 여름날의 해로 비유했으니 겨울 해는 사랑스럽고 여름 해는 두려울 만하기 때문이다.
♣ 하자성혜[下自成蹊]사람들이 자연히 사모하여 찾아옴. 사마천(司馬遷)이 한(漢) 나라 장군 이광(李廣)의 인품을 극찬하면서 “복사꽃과 오얏꽃이 스스로 말하지는 못해도, 사람들이 좋아하여 찾아오기 때문에 그 나무 밑에는 절로 길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桃李不言 下自成蹊]”라고 평한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史記 李將軍列傳》
♣ 하잔여기산[霞殘餘綺散]사조(謝眺)의 시에, “여하산성기(餘霞散成綺)”라는 귀절이 있다.
♣ 하장[霞漿]하장은 신선이 먹는다는 선약(仙藥)이다.
♣ 하장군[賀將軍]명 나라의 총병관(摠兵官) 하세현(賀世賢)으로, 심양이 함락되면서 전사하였다. 《明史 卷271》
♣ 하절[下節]채찍을 당기다.
♣ 하정주황[夏鼎周璜]하우씨(夏禹氏)의 구정(九鼎)과 주 나라의 패옥처럼 시문이나 품격이 지금 세상과 달리 고풍(古風)스럽다는 말이다.
♣ 하조대[河趙臺]하씨(河氏) 집안의 총각과 조씨(趙氏) 집안의 처녀 사이의 사랑에 얽힌 일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고려 말엽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숨어 살았기 때문에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는 등의 설이 있다.
♣ 하주[荷裯]연꽃으로 만든 홑옷.
♣ 하주[賀鑄]하주는 성격이 강직하고 당세의 일을 논하기 좋아하여 조금만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가 아무리 당세의 권귀(權貴)일지라도 조금도 가차없이 마구 폄론(貶論)하였다 한다. 《宋史 卷四百四十三》
♣ 하중묵[何仲黙]하중묵은 명대(明代)의 시인(詩人) 하경명(何景明)을 가리키는데 중묵은 그의 자이다.
♣ 하증[何曾]진 무제(晉武帝) 떄 정치가. 자는 영효(穎孝).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르렀음. 하증은 본디 의식(衣食)의 사치를 극도로 하여 하루에 1만 전 상당의 성찬을 먹고 지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젓가락을 댈 데가 없다.”고 말했다 한다. 《晉書 卷三十三》
♣ 하지장[賀知章]당(唐)나라 때의 산음(山陰)사람. 자는 계진(季眞)으로 성격이 활달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글씨 잘 쓰고 술도 좋아했다. 중년에 벼슬길에 올라 태자빈객(太子賓客)ㆍ비서감(祕書監)등을 제수받았으나 늘그막에 그를 다 버리고 자호를 사명광객(四明狂客)이라고 하고서 전리(田里)로 돌아와 자기 집을 천추관(千秋觀)으로 꾸미고, 또 방생지(放生池)를 만들기 위해 호수를 구하다가 천자의 명으로 경호(鏡湖)의 섬계(剡溪)한 굽이를 하사받기도 하였음. 《唐書 列傳 隱逸》
♣ 하진[下陳]궁녀들을 말한다.
♣ 하징구곡[河澄九曲]황하수(黃河水)는 백 리(里)에 작은 구비, 천 리에 큰 구비, 이렇게 구곡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황하수가 천 년만에 한 번씩 맑으면 성인(聖人)이 날 큰 상서(祥瑞)라 한다.
♣ 하채[下蔡]하채는 고을 이름. 안휘성(安徽省) 봉대현(鳳臺縣)에 있다. 호색(好色)하기로 이름난 등도자(登徒子)가 부인을 하채에 두고 미색에 도취되어 헤어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호색하는 사람을 하채에 미혹한다고 한다. 《文選 卷十九 登徒子好色賦》
♣ 하천[下泉]하천은 시(詩) 조풍(曹風)의 편(篇) 이름. 진후(晉侯)가 조(曹)에 들어와 그 임금을 잡아가매, 조의 신하들이 주실(周室)에 왕이 있어 패자(霸者)를 제어하지 못함을 슬퍼한 시편이다. 그 첫 구는 다음과 같다. “冽彼下泉 浸彼苞稂 愾我寤嘆 念彼周京”
♣ 하청[河淸]성인이 태어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황하의 물은 본디 탁하여서 맑을 때가 없으나, 1천 년마다 한 차례씩 맑아지는데, 이는 성인이 태어날 조짐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천하의 태평을 말할 때는 흔히 “해안하청(海晏河淸)"을 대명사로 써 왔음.
♣ 하충[夏蟲]견문이 좁아서 사리에 어두움을 비유한 말,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여름 벌레는 얼음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하충남견[夏蟲南犬]식견이나 지혜가 모자란 것을 비유하는 말. 하충(夏蟲)은 여름 벌레란 뜻으로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여름 벌레와는 얼음에 대해 말할 수 없으니 이는 계절에 구애받기 때문이다.[夏蟲 不可以語於氷者 篤於時也]" 하였고, 남월(南越) 지방의 개는 눈[雪]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눈이 오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 여겨 짖는다 한다.
♣ 하침[下枕]취침(就枕)과 같음.
♣ 하침대무[河沈大巫]전국(戰國) 시대 위(魏)의 서문표(西門豹)가 업현(鄴縣)의 영(令)으로 있을 때, 그 지방 습관으로 하백(河伯 수신(水神))을 위하여 부녀(婦女)에게 장가들게 한다 칭하고 부녀를 물에 빠뜨리는 일이 있으므로, 서문표가 그 폐단을 고치려고 무당을 강물에 빠뜨렸던 고사이다. 《史記 滑稽傳 褚先生續》
♣ 하탁[荷橐]띠에 차는 붓주머니. 하포(荷包)와 같은 것으로 조그마한 주머니를 말한다. 통속편(通俗編)에 구양수(歐陽脩)의 글에 ‘자하가 주머니에 드리워졌다[紫荷垂橐]’는 말을 인용하여 “아마 후세의 하포와 같은 것인가보다.” 하였다.
♣ 하탐적수강[下探赤水强]장자(莊子) 천지(天地)에 “황제(黃帝)가 적수에 노닐다가 구슬을 잃어버리고 지(知)를 시켜 찾게 하였는데 찾지 못했다.” 하였음.
♣ 하탑[下榻]한(漢)나라 진번(陳蕃)이 예장태수(豫章太守)로 있을 때에, 서치(徐穉)가 오면 탑(榻)을 내려서 앉게 하고, 그가 가고 나면 다시 그 탑을 달아두며 서치가 또 오기를 기다렸다.
♣ 하탑빈붕지[下榻賓朋至]빈객(賓客)을 맞아 머물게 한 데 비유한 말이다. 후한(後漢) 때 진번(陳蕃)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으면서, 다른 빈객은 잘 접견하지 않았는데, 유독 서치(徐穉)가 오면 특별히 한 탑(榻)을 내려 깔아주고 그가 돌아가면 다시 그 탑을 매달았으므로 이른 말이다. 《後漢書 徐穉傳》
♣ 하택거[下澤車]하택거는 마원(馬援)이 향리(鄕里)로 돌아온 후에 항상 타고 다니던 수레로서, 전간(田間)의 진펄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가벼운 수레이다.
♣ 하택지거관단마[下澤之車款段馬]고향 시골의 편안한 생활을 뜻하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이 고생스럽게 남방을 정벌하면서 “하택거(下澤車)에 조랑말을 매어 타고서 향리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라는 말을 한 고사가 있다. 《後漢書 馬援傳》
♣ 하토사방[下土四方]천하를 말한다.
♣ 하통[荷筩]연잎의 한가운데 오목한 곳에 술을 담아 마시면서 이를 술통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 하퇴[夏頧]하 나라 때의 모자 이름이다.
♣ 하패[霞佩]신선(神仙)이 차는 옥을 말하는데, 전하여 패옥을 고상하게 이르는 말이다.
♣ 하평[河平]한 성제(漢成帝)의 연호.
♣ 하포[夏浦]하구. 지금의 한구
♣ 하표[霞標]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적성의 노을을 들어서 표지를 세운다.[赤城霞擧而建標]”고 한 데서 나온 말로, 붉은 노을을 가리킨다. 《文選 卷6》
♣ 하풍죽로[荷風竹露]하풍 죽로(荷風竹露)는 연꽃 바람과 대나무의 이슬을 말하니, 당 나라 맹호연(孟浩然)의 시구(詩句)를 말한다. 그의 하일남정회신대(夏日南亭懷辛大) 시에 “연꽃에서 바람 부니 향기 그윽하고, 대잎에서 이슬 떨어지니 소리 맑아라.[荷風送香氣 竹露滴淸響]" 하였다.
♣ 하피[霞帔]도사(道士)의 옷, 또는 부인(婦人)의 예복(禮服)을 말한다.
♣ 하필성장[下筆成章]붓을 내리면 문장을 이룸. 아주 뛰어난 문장가
♣ 하필약유신[下筆若有神]두보(杜甫)의 시 증위좌승(贈韋左丞)에, “만권의 책을 독파하고 나니 붓을 들어 글을 짓는 것이 신들린 듯하더라”하여, 자신의 공부를 술회하였음.
♣ 하하[下下]맨아래, 하지하(下之下)
♣ 하하[呀呀]입을 벌리는 모양, 맹수가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내는 모양, 웃음소리
♣ 하학상달[下學上達]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공부보다도 실천을 통한 수양이 참다운 배움이고 모두가 생활을 통한 향상을 배움이라는 뜻의 고사성어.
♣ 하해지택[河海之澤]강이나 바다처럼 넓고 큰 혜택.
♣ 하혜관비[下惠官卑]유하혜는 노(魯) 나라 현인인데, 맹자(孟子)가 그를 작은 벼슬을 수치로 알지 않았다고 칭찬하였다.
♣ 하황[河隍]하황은 하황(河湟)으로, 휘종이 잡혀갔던 오국성(五國城)을 가리킨다.
♣ 하황[蝦荒]하황해란(蝦荒蟹亂)의 준말로, 오(吳) 지방 풍속에 전하는 말인데, 즉 새우나 게는 마치 갑옷을 입고 창을 비껴든 것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것들이 많이 나타나면 이를 병란(兵亂)의 조짐으로 여긴 데서 온 말이다.
♣ 하회고택[河回故宅]하회 마을은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에 있는 마을로, 풍산유씨(豐山柳氏)의 세거지(世居地)인데 선조 때의 명상 유성룡(柳成龍)이 거처했던 옥연정사(玉淵精舍)ㆍ원지정사(遠志精舍)등 다수의 고택이 있다.
♣ 하후기의[夏侯妓衣]발(簾)의 다른 말.
♣ 하후씨이송[夏后氏以松]논어(論語) 팔일(八佾)에 “하후씨는 소나무를, 은 나라는 잣나무를, 주 나라는 밤나무를 심어서 사(社)의 신주(神主)로 삼았다.[夏后氏以松 殷人以柏 周人以栗]" 하였다. 여기서의 신주는 상고시대에 사[士地]의 신에게 제사지낼 때 신주의 표지(標識)로 삼았던 것을 말한다.
♣ 하후탄주[夏后呑珠]하(夏) 나라의 왕 우(禹)의 어머니가 꿈에 구슬을 삼키고 우를 배었다 한다.
♣ 하휴[何休]후한(後漢)의 학자. 자는 소공(邵公). 그는 육경(六經)에 정통했으며 특히 공양춘추(公羊春秋)를 좋아했음. 저서에는 공양해고(公羊解詁)ㆍ공양묵수(公羊墨守) 등이 있음.
♣ 하휴간[夏畦艱]태평 시대 사람처럼 초연하게 숨어살며 세상에 아첨하지 않음을 말함. 격양가(擊壤歌)에 “밭을 갈아먹고 우물 파서 물 마시니 임금의 힘이 우리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였고,맹자(孟子) 滕文公下에 “어깨를 움츠리며 아첨하는 웃음은 여름 이랑에 일하는 것보다 힘들다.” 하였음.
♣ 하흠[賀欽]하흠은 명(明) 나라 때의 사람으로, 자가 요공(堯恭)이며, 요동 광녕(廣寧) 사람이다. 일찍이 진백사(陳白沙)가 강론하는 것을 듣고는 그날 즉시 벼슬자리를 내던지고 가서 스승으로 섬기면서 학문을 배웠다. 그 뒤에 의무려산으로 들어가서 이학(理學)에 전념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감화시키니, 사람들이 의려 선생(醫閭先生)이라고 칭하였다.
♣ 학가[鶴駕]왕세자(王世子)를 말한다. 열선전(列仙傳) 왕자교(王子喬)에, “왕자교는 바로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인데, 일찍이 흰 학을 타고 가 구씨산(緱氏山)에 머물렀다.” 하였다. 이를 인해서 후대에는 태자의 거가(車駕)를 학가라고 하게 되었다.
♣ 학강구[鶴降緱]주 영왕(周靈王)의 태자(太子) 진(晉)이 왕을 간하다가 쫓겨났는데, 그는 젓대를 잘 불었고, 도사(道士) 부구생(浮丘生)과 숭고산(嵩高山)에서 30년을 같이 있었다. 그 후에 환량(桓良)이란 사람을 보고 “그대가 내 집에 가서, 7월 7일에 구씨산(緱氏山) 위에서 나를 기다리라고 전해 달라.” 하였다. 그날 집안 식구가 그곳에 이르니, 진이 백학(白鶴)을 타고 나타났다 한다. 《逸周書 太子晉解》
♣ 학개[鶴蓋]학개는 수레 뚜껑이 학 날개와 같다는 뜻이다. 유정(劉楨)의 노도부(魯都賦)에 “수레 뚜껑은 학과 같고 말은 뛰어노는 물고기 같다.” 하였다.
♣ 학경[鶴經]은자(隱者)들이 즐겨 읽는 상학경(相鶴經)의 준말이다. 송(宋) 나라 임포(林逋)의 ‘유제이힐임정(留題李頡林亭)’이라는 시에 “거문고도 없이 학경을 베고, 온종일 숲 정자에 누워 있노라.[無琴枕鶴經 盡日臥林亭]”라는 구절이 있다.
♣ 학경불가단[鶴脛不可斷]사물에는 각각 적절한 면이 있으므로 함부로 손익(損益)해서는 안된다는 뜻의 고사성어.
♣ 학곡[鶴谷]홍서봉(洪瑞鳳)의 호이다.
♣ 학관수류성[鶴觀水流聲]송(宋) 나라 소식(蘇軾)의 관기(觀棋) 시 서문에 “나는 본디 바둑을 둘 줄 모르는데, 일찍이 여산(廬山)의 백학관에서 혼자 노닐적에 고송(古松) 밑의 흐르는 물에서 바둑 두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四十一》
♣ 학교[鶴翹]소나무의 일종. 한악(韓偓)의 시에, “학교송을 등나무가 휘휘 감아 죽이누나.[野藤纏殺鶴翹松]”하였음.
♣ 학구소붕[鷽鳩笑鵬]작은 비둘기가 큰 붕새를 보고 웃는다. 되지 못한 소인이 위인의 업적과 행위를 비웃는다는 뜻.
♣ 학기[學記]예기(禮記)의 편명.
♣ 학두서[鶴頭書]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학서(鶴書)가 언덕 위로 달려온다.” 한 주에 “한(漢) 나라 때 선비를 초빙하는 편지를 마치 학의 머리처럼 쓰는 전자체(篆字體)를 이용한 까닭에 그 편지 명칭을 학두서(鶴頭書)라 했다.” 하였다.
♣ 학려구고[鶴唳九皐]시경(詩經) 소아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에서 울면 소리가 들판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野]" 한 데서 온 말이다. 구고는 수택(水澤)의 깊은 곳을 말한다.
♣ 학려진병산[鶴唳秦兵散]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진(晋)을 치다가 패하여 군사들이 달아날 때 바람 소리와 학(鶴)의 울음을 듣고도 진(晋)의 군사가 추격하는 줄 알고 놀래었다.
♣ 학려화정[鶴唳華亭]오(吳) 나라 명사(名士) 육기(陸機)가 진(晋)나라에 와서 벼슬하다가 화(禍)를 당하여 잡혀 죽으면서 탄식하기를, “화정(華亭)의 학(鶴) 우는 소리를 언제나 다시 들으랴.” 하였는데, 그것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중원(中原)에 와서 벼슬한 것을 후회한 것이다.
♣ 학령[鶴翎]국화의 일종.
♣ 학린[涸鱗]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에 있는 물고기로, 몹시 위급한 지경에 처한 것을 뜻한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내가 어제 오는데 중도에서 부르는 자가 있어서 돌아보니 수레 가운데에 붕어가 있어 말하되, ‘말되[斗升]의 물로 나를 좀 살려 주시겠소.’하였다. 내가 대답하되, ‘그러게. 내가 이제 남으로 오월(吳越)의 왕을 찾아가 달래어 서강(西江)의 물을 끓어다가 자네를 살려주리.’하였다. 붕어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를 차라리 마른 고기 가게에서나 찾게 될 것이오.’ 하였다.”라 하였다.
♣ 학림[鶴林]학림은 청 나라 예도손(倪稻孫)
♣ 학무[鶴舞]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악사(樂師)인 사광(師曠)이 거문고를 연주하자 검은 학이 목을 길게 빼면서 울고 깃을 펴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韓非子十過》
♣ 학발쌍친[鶴髮雙親]학의 털과 같이 머리가 하얗게 센 부모님. 부모님이 나이가 많이 들어 늙어 가고 있음을 뜻함.
♣ 학봉[鶴峯]안동(安東) 서쪽 20리 지점에 있는 학가산(鶴駕山)을 가리킨다.
♣ 학부[涸鮒]동해의 물고기가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 속에 있으면서, 한 말이나 한 되 정도의 물만 부어 주면 살아나겠다고 애원한 학철부어(涸轍鮒魚)의 고사가 있다. 《莊子 外物》
♣ 학부[學蔀]정학(正學)을 덮어 가린다는 뜻으로, 이단시되는 불교(佛敎)와 육구연(陸九淵)의 학문을 가리키는데, 명(明) 나라 때 진건(陳建)이 찬한 학부통변(學蔀通辯)의 명칭에서 온 말이다.
♣ 학사[壑蛇]소동파(蘇東坡)의 제야시(除夜詩)에 있는 구절인데, 구렁에 들어가는 뱀은 꼬리를 당겨도 나오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 학사[學士]학사는 당 나라 때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를 거쳐 국자 사업(國子司業)을 지낸 소원명(蘇源明)을 가리킨다.
♣ 학사연[學士宴]학사(學士; 고려시대 과거의 시관)가 과거 합격자 발표가 끝난 뒤 문생(門生)들과 함께 부모와 자기의 좌주(座主)를 찾아보고 여는 잔치를 말한다.
♣ 학사제염[學舍虀鹽]제염(虀鹽)은 나물과 소금으로, 소식(素食)을 하는 청빈한 태학(太學)의 관직을 말한다.
♣ 학상선[鶴上仙]선인들이 대개 학을 타고 노닌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말이다.
♣ 학상요천[鶴上遼天]수신후기(搜神後記)에 “정령위(丁令威)는 요동 사람인데 영허산(靈虛山)에서 도(道)를 배우고 학으로 변신하여 요동으로 돌아와서 공중에 배회하며 ‘새여 새여 정령위는 집떠난 지 천년 만에 이제 돌아왔네. 성곽은 그대론데 사람은 아니로다. 어찌 신선을 배우지 않고 무덤만 쌓여 있나.’라고 했다.” 하였음.
♣ 학서[鶴書]임금이 은사(隱士)를 부르는 조서(詔書)를 학서(鶴書)라 하는데, 고대의 예서(隸書) 자체(字體)에 학두서(鶴頭書)라는 자체가 있는데, 임금이 은사를 부르는 데는 학두서(鶴頭書)를 쓴다.
♣ 학서[鶴書]조정에서 보내는 사면장을 말하는데, 죄수를 사면할 때의 행사에 썼던 때문에 온 말. 송사(宋史) 예지(禮志)에 “누(樓)에 납시어 사면하고 비단실로 목학(木鶴)을 묶어 놓고 줄을 누 아래로 늘여 놓으면 선인(仙人)이 목학을 타고 제서(制書)를 받들고 내려간다.” 하였다.
♣ 학성[鶴城]울산(蔚山)의 옛 이름.
♣ 학성[鶴城]학성은 안변(安邊)의 고호(古號)이다.
♣ 학수경[鶴殊脛]장자(莊子) 변무(騈拇) 편에, 오리 다리는 짧고 학의 다리는 길지만 각기 그 본성이라 하였다.
♣ 학수고대[鶴首苦待]학처럼 목을 길게 빼고 애타게 기다림. 사람이나 어떤 상황을 애태우며 기다림.
♣ 학습수비[學習數飛]배워 얻은 것을 수시로 익히기를 어린 새가 날기를 익히듯 한다 는 것임. 논어(論語) 學而 “배워 얻은 것을 수시로 익히면 또한 기쁜 일이 아닌가.” 했는데, 그 주에 “익힘은 새가 자주 나는 것이니 배워서 마지않는 것이 새가 자주 낢과 같다.” 하였다.
♣ 학야[鶴野]옛날 요동(遼東) 사람인 정령위(丁令威)가 선술(仙術)을 배워서 뒤에 학(鶴)이 되어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울었으므로 요동을 ‘학 벌판[鶴野]’이라 한다.
♣ 학야[鶴野]학야는 만주 벌판을 가리키는 말로, 최보(崔溥)의 표해록(漂海錄)에 “광녕(廣寧)의 동쪽, 해주위(海州衛)의 서쪽, 요동(遼東)의 북쪽에 길게 뻗어 들어간 큰 들판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학야(鶴野)라고 하는 곳이다.”라는 말이 있다.
♣ 학어[鶴馭]태자의 수레로, 흔히 태자의 별칭으로 쓰인다.
♣ 학어승구[鶴馭昇緱]주 영왕(周靈王)의 태자인 왕자 교(王子喬)가 선인(仙人)이 되어 구산(緱山)에서 백학(白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列仙傳 卷上 王子喬》
♣ 학여불급[學如不及]배움은 언제나 모자라다고 생각하라. 학문은 쉬지 않고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으니, 따라잡기 위해서는 늘 시간을 아껴 더욱 정진해야 한다는 뜻.
♣ 학여전[鶴與錢]옛날에 네 사람이 모여서 각기 자기의 소원을 말하는데,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돈 만 관(萬貫)을 가지기가 소원이다.” 하였으며, 한 사람은, “나는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하늘에 오르기가 소원이다.” 하고 또 한 사람은, “양주자사(楊州刺史)가 되기가 소원이다.” 하니, 한 사람은, “나는 돈 만 관을 허리에 두르고 학을 타고 양주로 가겠다.” 하였다.
♣ 학역구[學易瞿]당 현종(唐玄宗) 때 태사감(太史監)을 지냈던 천축(天竺) 사람인 구담 실달(瞿曇悉達)을 말함.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어 대당개원점경(大唐開元占經) 110 권을 저술하였다.
♣ 학원유약[鶴猿有約]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속에 은거해 살 생각을 하였다는 뜻이다. 육조(六朝) 때 송(宋) 나라의 공치규(孔穉圭)가 자신과 함께 북산(北山)에 은거하던 주옹(周顒)이 벼슬길에 나선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 “향초로 엮은 장막은 텅 비어 학은 밤마다 원망의 울음 울고, 산인(山人)이 떠나고 없어 원숭이는 놀라서 우는구나.”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물에 갇힌 듯이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
♣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 학이지지[學而知之]배워서 앎.
♣ 학익진[鶴翼陣]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펴듯이 좌우로 길게 포위하는 진법(陣法)이다.
♣ 학일구[貉一丘]한(漢) 나라 양휘(楊揮)의 말에, “예와 이제가 한 언덕의 담비와 같다.” 하였으니, 동류(同類)란 말이다.
♣ 학자여우모성자여린각[學者如牛毛成者如麟角]배우는 사람은 소의 털과 같이 많고, 이룬 사람은 기린의 뿔과 같이 드물다.
♣ 학자탁련[鶴觜拆蓮]옛날 희극(戲劇) ‘학연화대(鶴蓮花臺)’에서 두 동녀(童女)가 연꽃 봉오리 속에 들어앉아 있다가 사람이 분장한 학이 나아가 주둥이로 쪼으면 동녀들이 깡충 뛰어나와 춤을 춘다. 《樂學軌範》
♣ 학장부단[鶴長鳧短]장자(莊子) 변무(騈拇)에 “오리 다리가 비록 짧아도 이어주면 걱정을 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어도 잘라주면 슬퍼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천성은 길어도 자를 것이 아니요 짧아도 이을 것이 아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학장주[壑藏舟]사물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바뀌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배를 골짜기에 감추어 두고 어살을 연못 속에 감추어 두면 든든하게 감추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밤중에 힘 있는 자가 그것을 짊어지고 달아날 수도 있을 것인데,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 학저[鶴邸]학저는 황태자 궁전을 학궁(鶴宮)이라고 한 데서 세자궁을 비유한 말이다.
♣ 학적천[鶴吊阡]진(晉) 나라 때 도간(陶侃)이 모상(母喪)을 당했을 적에 두 사람이 와서 조문을 하고는 두 마리의 학(鶴)으로 변화하여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陶侃傳》
♣ 학전주[鶴錢州]옛날 사람들이 모여 각기 소원을 말하는데, 혹은 양주 자사(楊州刺史)가 되고 싶다 하고, 혹은 돈을 흠뻑 가지고 싶다 하고 혹은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하늘에 오르고 싶다 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하되, “나는 허리에 10만 관 돈을 차고 학을 타고 양주에 올라가고 싶네.” 하였다.
♣ 학정[鶴頂]산다(山茶)의 일종. 산다의 일종으로 학정홍(鶴頂紅)이 있는데, 그 잎이 목서(木犀)의 잎과 같아 질이 단단하고 능각(稜角)이 있으며 차잎과 비슷하여 음료(飮料)로도 쓸 수 있기 때문에 차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함. 《群芳譜》
♣ 학제[學製]스스로 지방관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겸사의 말이다. 좌전(左傳) 양공(襄公) 31년에 “그대에게 좋은 비단이 있다면 사람을 시켜 옷 짓는 일을 배우는 데에 쓰게 하지 않을 것이다. 큰 고을은 몸이 의지하는 곳인데, 서투른 사람에게 다스리도록 한다면 오히려 좋은 비단을 사람보다 더 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 학주[壑舟]사람이 사는 것은 영원한 것 같지만 생사 변화하는 조화(造化)의 힘은 피하지 못한다는 것임.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배를 골짜기에 숨기고 산을 늪속에 숨겨 놓고는 이제 완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밤중에 힘센 이가 등에 지고 달아날 수가 있는데, 우매한 자들은 이런 사실조차 알지를 못한다.[夫藏舟於壑 藏山於澤 謂之固矣 然而夜半有力者負之而走 昧者不知也]”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 학주[鶴柱]선인(仙人) 정령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화표주(華表柱)에 날아 앉아 시를 읊은 고사를 말한 것임.
♣ 학주불자고[壑舟不自固]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큰 구렁에 배를 숨기고, 못에다 산을 숨겨 둔다면 견고하다고 할 만하나, 한밤중에 힘이 센 자가 이것을 등에 지고 달아나 버리면 어두운 자는 알지 못한다.” 한 데서 온 말로, 즉 아무리 견고하다는 것도 끝내 장담할 수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 학주이[壑舟移]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배를 골짜기에 감추어 두고 어살을 연못 속에 감추어 두면 든든하게 감추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밤중에 힘 있는 자가 그것을 짊어지고 달아날 수도 있을 것인데,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 학참군[郝參軍]진(晉) 나라 때 환온(桓溫)의 남만 참군(南蠻參軍)을 지낸 학륭(郝隆)을 가리킨다. 7월 칠석(七夕)에는 옷가지를 햇볕에 말리는 풍속이 있었는데, 학륭은 대낮에 누워서 자신의 뱃속에 들어 있는 책들을 햇볕에 쪼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排調》
♣ 학창[鶴氅]학창은 새털로 만든 갖옷에 대한 미칭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기선(企羨)에 “맹창(孟昶)이 영달하기 이전에 그의 집이 경구(京口)에 있었다. 그가 일찍이 보니 왕공(王恭)이 학창의를 입고 높은 수레에 탔는데 때마침 눈발이 약간 뿌리고 있었다. 맹창은 울타리 사이로 그 광경을 엿보고 감탄하기를 ‘이는 참으로 신선 속의 인간이다.[此眞神仙中人也]’ 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 학창의[鶴氅衣]신선들이 입는 새의 깃털로 만든 옷으로, 도포(道袍)를 뜻한다. 진서(晉書) 왕공전(王恭傳)에 “왕공이 언젠가 학창의를 입고 눈밭을 거닐었는데 맹창(孟昶)이 이를 엿보고는 ‘참으로 신선 세계 속의 사람이다.[此眞神仙中人也]’고 찬탄했다.” 하였다.
♣ 학철[涸轍]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에 괸 물에서 허덕이는 붕어를 이른 말로 매우 곤궁한 처지를 말한다. 《莊子 外物》
♣ 학철고어[涸轍枯魚]곤경에 처해 원조를 급히 청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수레 바퀴로 패인 야트막한 웅덩이[涸轍]의 물고기가 원조를 청하다 못해 “건어물 가게에서 나를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曾不如早索我於枯魚之肆]”라고 한탄한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莊子 外物》
♣ 학철부어[涸轍鮒魚]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운 곤궁한 처지를 가리킨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장자가 감하후(監河侯)를 찾아가 곡식을 빌려 하자, 그는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어 빌려주려 하였다. 장자는 성을 내면서 ‘나는 오다가 길에서 부르는 이가 있기에 돌아보니, 수레바퀴 속의 고인 물[涸轍]에 있는 붕어였습니다. 나는「붕어야! 왜 나를 부르는가?」하고 물었더니, 붕어는「나는 동해(東海)의 파신(波臣)인데, 그대는 나에게 한 말 [斗]의 물을 주어 살게 할 수 없겠는가?」하였습니다. 나는「좋다! 나는 오월(吳越)의 왕을 찾아가는 길이니, 서강(西江)의 물을 끌어다 주마.」하자, 붕어는 성을 내면서「나는 내가 늘 있던 물이 아니면 싫소. 나는 한 말의 물만 있으면 충분한데 그대는 이렇게 말하니, 차라리 나를 마른 생선 가게에서 찾는 것이 나을거요.」했습니다.’ 하고는 받지 않았다.” 하였다.
♣ 학철어[涸轍魚]장자(莊子) 외물(外物) 편에 나오는 말로, 수렛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처럼 곤경에 처하여 애타게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을 비유함.
♣ 학포번[學圃樊]번지(樊遲)는 공자의 제자로 일찍이 공자에게 벼를 심는 방법과 채전[圃]을 가꾸는 방법을 물은 적이 있다. 《論語 子路》
♣ 학포소인수[學圃小人須]수(須)는 공자(孔子)의 제자 번지(樊遲)의 이름.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번지가 농사를 배우려 하자, 공자가 소인이로구나 번수여, 예(禮)와 의(義)와 신(信)을 좋아하면 사방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을 텐데 왜 농사를 짓고 싶어하느냐.” 하였다.
♣ 학하소지여[學何所至與]배움이 어느 곳에 이르렀는가?
♣ 학학[嗀嗀]구역질하는 모양, 토하는 소리
♣ 학학[嗃嗃]엄하고 매우 심한 모양
♣ 학해[學海]학해는 학문의 바다로, 학문의 길이 바다처럼 가없음을 말한다.
♣ 학화웅담[學和熊膽]당(唐) 나라 때 유중영(柳仲郢)이 어려서 공부할 적에 그의 모친 한씨(韓氏)가 일찍이 약(藥)에다 웅담을 섞어 조제하여 중영에게 먹여서 건강을 돌봐주었던 데서 온 말이다. 《唐書 柳仲郢傳》
♣ 한가[漢歌]한가(漢歌)는 오랑캐를 쫓았으니 한(漢) 나라 노래 부르는 소리만이 있다는 것이다.
♣ 한가용비사수활[漢家龍飛泗水闊]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상정장(上亭長)으로 몸을 일으켰다.
♣ 한각반렴산[閑却半簾山]문을 닫고 산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 한간[韓幹]한간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이름난 화가(畫家)로서 특히 인물(人物)과 안마(鞍馬)의 그림에 뛰어났다고 한다. 처음에는 조패(曹霸)를 사사(師事)하였으나 뒤에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어 독보적 존재가 되었으며, 옥화총(玉花驄)ㆍ조야백(照夜白) 등의 말 그림이 특히 유명하다. 《尙友錄》
♣ 한간마도[韓幹馬圖]한간은 당 나라 남전(藍田) 사람인데 당서(唐書) 명화기(名畫記)에는 대량(大梁) 사람으로 되어 있다. 현종(玄宗)이 큰 말을 좋아하여 어구(御廏)에는 사십만 필이나 되었는데 그 중 준마(駿馬)를 한간이 모두 그렸는데 고금의 독보가 되었음. 소식의 한간마십사필시(韓幹馬十四匹詩)가 있음.
♣ 한강백[韓康伯]진(晉)의 한백(韓伯). 강백(康伯)은 그의 자임. 그는 집이 몹시 가난하였는데, 추운 겨울에 자기 어머니가 저고리를 만들어주면서 빨리 다림질을 하라고 하고, 계속하여 바지를 만들려고 하자, 강백은 자기 어머니에게 그만둘 것을 요청하였다. 그 어머니가 까닭을 물으니 강백이 대답하기를, “이 다리미 속에 불이 있으니까 다리미자루까지 따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위에다 따뜻한 저고리를 입었으니 그 따뜻함이 점차 아래까지 내려올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 그 어머니는 강백을 특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晉書 韓伯傳》
♣ 한강투석[漢江投石]한강에 돌 던지기. 지나치게 미미(微微)하여 전혀 효과가 없음을 비유하는 말.
♣ 한개광명원[漢改廣明園]한 선제(漢宣帝)가 생부(生父)인 사황손(史皇孫)의 무덤을 개장(改葬)한 것을 말한다. 무덤의 이름은 원래 도원(悼園)인데 광명(廣明)의 성곽 북쪽에 위치하였으므로 광명원이라고 가칭한 것이다. 《漢書 卷63》
♣ 한거부[閒居賦]벼슬하지 않고 한가로이 지냄. 옛 사람들이 허다히 세상에 숨어 한가롭게 살기를 좋아하는 뜻에서 한거부(閒居賦)를 쓴 이들이 많았다.
♣ 한거부[閑居賦]진(晉) 나라 때 반악(潘岳)이 지은 문장의 이름으로, 이것은 대개 세상 일을 다 잊어버리고 한정하게 지내는 뜻을 서술하고 있다.
♣ 한걸[寒乞]한걸은 의복이 남루한 걸인을 뜻하는 말이다.
♣ 한경기[韓景琦]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치규(稚圭), 호는 향설당(香雪堂) 또는 동고(東皐). 본관은 청주.
♣ 한계승추[韓洎繩樞]승추는 기둥에 노끈으로 지도리를 매단 문으로 가난한 집을 가리킨다. 송(宋) 나라의 한계는 그의 형 한부(韓溥)와 함께 문장을 잘하여 명망이 있었는데, 한계는 늘 형을 경시하여 “우리 형님의 글은 승추와 같아서 겨우 비바람만을 막을 뿐이고, 나의 글은 아름다운 오봉루(五鳳樓)를 꾸밀 수 있다.” 하니, 한부는 촉(蜀)에서 생산되는 좋은 종이를 주면서 시를 지어 말하기를 “형은 이 종이를 얻었으나 전혀 쓸데가 없기에 너의 오봉루 꾸미는 것이나 도우려 한다.[老兄得此全無用 助汝添修五鳳樓]" 하였다. 《宋史新編》
♣ 한고[漢皐]산의 이름이다. 주(周)의 정교보(鄭交甫)가 남으로 초(楚)에 가는 길에 한고대(漢皐臺) 아래를 지나다가 두 여자를 만나 두 구슬을 찬 것을 보고 그 구슬을 청하여 얻었다. 《韓詩外傳》
♣ 한고[漢錮]한 나라 말년에는 선비들이 나라의 정치를 논평한다고 수백명의 명사들을 모두 금고형(禁錮刑)에 처하였었다.
♣ 한고선자패경요[漢皐仙子佩瓊瑤]“정교보(鄭交甫)가 남으로 놀새 저 한고대(漢皐臺) 밑에 올라 두 여자를 만나니 옥을 차고 있었다. 교보가 눈짓하여 정을 돋우니, 두 여자가 찬 것을 풀어 주었다.” 《漢詩外傳》 한고(漢皐)는 산 이름. 호북성(胡北省) 서북.
♣ 한고연패[漢皐捐佩]주(周)의 정교보(鄭交甫)가 한고대(漢皐臺) 아래서 두 여인을 만나, 그들에게 “그대의 패물(佩物)을 갖고 싶다.” 하자, 두 여인이 정교보에게 패물을 주므로, 교보는 그 패물을 받아 품속에 간직하고서 10여 보(步)쯤 가다 보니 패물이 없어졌고, 두 여인도 없어졌다는 고사이다.
♣ 한곡편양휘[寒谷徧陽暉]당(唐) 나라 재상 송경(宋璟)이 인정(仁政)을 베풀었으므로 그가 밟고 가는 곳마다 따스한 봄볕이 묻어나온다[有脚陽春]고 일컬어졌던 고사가 전한다. 《開元天寶遺事 卷下》 또 전국 시대 추연(鄒衍)이 연(燕) 나라의 한곡(寒谷)에 가서 율관(律管)을 취주(吹奏)하자 기후가 따뜻해져 씨를 뿌릴 수 있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論衡 寒溫篇》
♣ 한공애태전[韓公愛太顚]한공(韓公)은 당(唐) 나라 한유(韓愈)를 이르는데, 그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폄척되어 있을 적에 태전(太顚)이라는 중이 썩 위인이 훌륭하므로 그를 불러서 같이 노닐고 또 서로 왕래도 하였으며, 그 후 조주(潮州)를 떠날 적에는 그에게 의복(衣服)을 남겨주고 작별을 하기까지 하여, 어떤 사람들에게 한유가 불씨(佛氏)를 숭봉(崇奉)한다는 오해를 받기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이 내용은 한유가 상서(尙書) 맹간(孟簡)에게 준 편지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 한공연압구[韓公宴狎鷗]한공은 조선 세조 때의 상신 한명회(韓明澮)를 이르는데, 한명회가 일찍이 압구정(狎鷗亭)을 짓고 거기서 노닐었으므로, 갈매기와 친하기만 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 한공오궁[韓公五窮]한공은 당(唐) 나라 한유(韓愈)를 가리키고, 오궁(五窮)은 한유가 지은 송궁문(送窮文)에 나오는 지궁(智窮)ㆍ학궁(學窮)ㆍ문궁(文窮)ㆍ명궁(命窮)ㆍ교궁(交窮)을 말한다.
♣ 한공월[韓公鉞]수(隋) 나라 한금호(韓擒虎)가 대장이 되어 진(陳) 나라를 쳐서 멸하였는데, 도끼[銊]는 임금이 출정(出征)하는 대장에게 내려주는 것이다.
♣ 한공탄순양[韓公呑荀楊]한공은 당나라 헌종(憲宗) 때의 한유(韓愈)인데, 유학문장(儒學文章)으로서 맹자(孟子)의 후계라 자칭하고 순자(荀子)와 양웅(楊雄)을 정상(精詳)하지 못하다고 비평하였다.
♣ 한관[漢關]중국의 변새(邊塞), 즉 변방을 뜻한다.
♣ 한관위의[漢官威儀]한(漢) 나라 조정 관원들의 복식(服飾)과 전례(典禮), 제도(制度)로, 번성한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제1권 광무제기 상(光武帝紀上)에, “사례(司隷)와 요속(僚屬)들이 보고는 모두들 기쁨을 금치 못하였으며, 늙은 아전들은 혹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날에 다시금 한관의 위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하였다.” 하였다.
♣ 한관의[漢官儀]전한(前漢)이 망한 지 10여 년만에 한(漢) 나라를 광복(光復)하려는 군사가 일어났는데, 유수가 관들을 설치하여 삼보(三輔)로 지나가니 늙은 백성들이, “오늘날에 야 한관(漢官)의 의기를 볼 줄을 몰랐다.”고 기뻐하였다.
♣ 한굉[韓翃]당 나라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군평(君平)이다. 대력(大歷) 십재자(十才子)의 한 사람이다.
♣ 한교악지위린[韓蛟鱷之爲隣]당 나라 때 한유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어 가 있을 적에 악어가 백성들을 침범하여 해를 끼치자, 제악어문(祭鰐魚文)을 지어 악어를 물리쳤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한구[韓歐]당송팔가(唐宋八家)의 일원인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
♣ 한구[寒具]방한용(防寒用)의 의복.
♣ 한구[韓駒]송(宋) 나라의 문신으로 자는 자창(子蒼). 소철(蘇轍)에게서 수업하였고, 벼슬은 저작랑(著作郞)을 거쳐 강주지사(江州知事)에 이르렀음. 저서에는 능양집(陵陽集)이 있음.
♣ 한구이보가봉류[韓仇已報可封留]장량(張良)은 본시 한(韓)의 세족(世族)으로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진(秦)에 대항하여 일어났다가 한 고조(漢高祖)를 만나 진을 멸하고 나중에 유후(留侯)로 봉해졌다.
♣ 한궁비[漢宮妃]한(漢) 나라 때 원제(元帝)의 후궁으로 있다가 흉노(匈奴)의 선우(單于)에게 시집간 왕소군(王昭君)을 말한다. “昭君拂玉鞍 上馬啼紅頰 今日漢宮人 明朝胡地妾”이라는 이백(李白)의 시로 더욱 유명하다. 《李太白詩集 卷3 王昭君》
♣ 한기[韓琦]송조(宋朝)의 명신. 뒤에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음. 《宋史 卷三百十二》
♣ 한난염량[寒暖炎凉]차가움과 따뜻함, 더움과 서늘함 곧, 흐르는 세월
♣ 한남재자[漢南才子]조식(曹植)을 말하는데 그가 업하(鄴下)에 있었다.
♣ 한녀금전규효경[漢女金鈿窺曉鏡]한녀는 한수(漢水)의 여신. 아름다운 여자가 화장대 앞에서 화장을 한다는 뜻.
♣ 한다폭소[寒多曝少]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천하에 손쉽게 생장하는 식물이 있다 하더라도, 하루 동안 햇볕을 쬐게 하고 열흘 동안 춥게 한다면[一日暴之 十日寒之], 제대로 생장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 한단[邯鄲]한단은 전국(戰國) 시대 조(趙) 나라의 서울. 전하여 조 나라를 가리킨 말이다.
♣ 한단가청구[邯鄲駕靑軥]한단은 당(唐)의 이필(李泌)이 지은 황량몽(黃梁夢)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노생(盧生)을 가리킨다. 한단의 나그네였던 노생은 허술한 단갈(短褐)을 입고 푸른 망아지를 타고 다녔는데, 하루는 도자(道者)인 여옹(呂翁)을 만나 자신의 곤궁한 신세를 한탄하였더니, 여옹은 주머니에서 베개 하나를 꺼내 주면서 “이것을 베고 자면 자네는 마음대로 부귀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노생은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꿈속에 온갖 부귀공명을 누렸다. 깨어나 보니, 자신이 자기 전에 주인이 누른 기장[黃梁]으로 떡을 찌고 있었는데 아직 다 익지 못하였다. 노생은 하도 허무해서 이상스레 여기자 여옹은 “세상일이 모두 이 꿈과 같다.” 했다. 여기에 한단이 나오므로 한단몽(邯鄲夢)이라고도 하며 침중기(枕中記)라고도 한다.
♣ 한단갱[邯鄲坑]전국 때 조(趙)의 도읍. 진(秦)의 장수 백기(白起)가 기병(騎兵)으로 조군(趙軍)을 대파하고 조의 장수 조괄(趙括)을 쏘아 죽이고 조의 항복한 군졸 45만을 장평(長平)에서 무찔러 죽였다.
♣ 한단금수사[邯鄲錦繡詞]삼국 시절 위(魏)의 한단 순(邯鄲淳)을 말한 것으로 그가 창아(蒼雅) 충전(蟲篆) 등을 잘 썼다고 함. 《三國志》
♣ 한단몽[邯鄲夢]황량몽(黃粱夢)과 같다. 즉 부귀공명이 덧없음의 비유이다. 당(唐) 나라 때 노생(盧生)이 한단(邯鄲)의 여사(旅舍)에서 도사(道士) 여옹(呂翁)을 만나 자신의 궁곤한 신세를 한탄하자, 여옹은 주머니 속에서 베개 하나를 꺼내 주면서 “이 베개를 베면 영달(榮達)할 수 있다.” 하였다. 이때에 그 주인은 황량(黃粱)을 찌기 시작하였는데, 노생은 이 베개를 베고 잠이 들어 꿈속에 미인(美人)인 최씨(崔氏) 여자에게 장가들어 훌륭한 자녀를 많이 낳았고 노생은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벼슬이 재상에 이름과 동시에 아들 5형제가 다 벼슬하고 손자도 10여 명이나 되었으며, 나이는 80세가 넘어서 죽었는데, 그 꿈을 깨고 나니 황량이 아직 익지 않았더라는 고사이다. 《枕中記》
♣ 한단보[邯鄲步]한단학보(邯鄲學步)의 준말. 연(燕) 나라의 소년 수릉(壽陵)이 조(趙) 나라 서울 한단 사람의 한가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배우려다 제 걸음까지 잊어버린 고사. 자기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만 냄을 이름.
♣ 한단불여수릉[邯鄲不如壽陵]남을 흉내내느니보다는 자기 고유의 것이 더 낫다는 말. 연(燕) 나라 수릉(壽陵)의 어린애가 조(趙)의 수도인 한단(邯鄲)에 와서 걸음걸이를 배우다가 결국은 자기 나라 걸음마저 잊어버리고 기어서 돌아갔다는 것임. 《莊子 秋水》
♣ 한단자[邯鄲子]한단은 전국 시대조(趙) 나라의 서울이었으므로, 전하여 한단자는 조씨(趙氏)를 가리키는 말이다.
♣ 한단주[邯鄲酒]뜻밖의 사태가 전개되면서 엉뚱하게 피해를 보는 것을 말한다. 초(楚) 나라에 바친 조(趙) 나라의 술은 진했고 노(魯) 나라의 술은 묽었는데, 앙심을 품은 초 나라의 관리가 이를 뒤바꿔서 바치자, 초왕(楚王)이 화를 내면서 조 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공격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莊子 胠篋》
♣ 한단지몽[邯鄲之夢]한단에서 여옹이 낮잠을 자면서 꾼 꿈에서 유래한 말로, 사람의 일생에서 ‘부귀란 덧없다’는 뜻.
♣ 한단지보[邯鄲之步]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의 걸음걸이를 배운다는 뜻으로, 자기의 본분을 잊고 공연히 남의 흉내를 내다보면 두 가지 다 제대로 할 수 없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한단학보(邯鄲學步)
♣ 한단청구하필치[邯鄲靑駒何必恥]청구(靑駒)는 한단몽에서 나오는 노생의 말[馬] 이름인데, 여기서는 곧 노생을 지칭한다. 아무리 푸른 사기 베개를 베고 노생의 한단몽처럼 허무한 꿈을 꾼다 한들 무어 그리 부끄럽겠느냐는 뜻이다.
♣ 한단침[邯鄲枕]인생의 영고 성쇠(榮枯盛衰)가 모두 꿈결처럼 헛되고 덧없는 것을 말한다. 이필(李泌)의 침중기(枕中記)에 “당 현종(唐玄宗) 개원(開元) 19년에, 도사(道士) 여옹(呂翁)이 한단(邯鄲)의 여관에서, 노생(盧生)이란 한 곤궁한 소년이 신세타령하는 것을 보고, 자기 베개를 빌려 주면서 ‘이 베개를 베고 자면 그대가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노생이 그 베개를 베고 잤는데 과연, 꿈속에 청하(淸河)에 사는 최씨(崔氏)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또 높은 벼슬을 두루 역임하여 부귀영화를 일평생 누리고 살다가 꿈을 깨어 본즉, 아까 여관 주인이 짓던 좁쌀밥이 채 익지 않았다. 이에 여옹이 웃으면서 ‘인간 세상의 일도 이 꿈과 마찬가지이다.’ 했다.” 하였다.
♣ 한단행[邯鄲行]장자(莊子) 추수(秋水)에 “子獨不聞夫壽陵餘子之學行於邯鄲與 未得國能 又失其故行矣"라 하였음. 이는 남의 것을 본뜨려고 하다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말함.
♣ 한당인[漢黨人]한(漢) 나라의 당인이란 곧 후한의 환제(桓帝)ㆍ영제(靈帝) 때에 걸쳐 이응(李膺)ㆍ진번(陳蕃)ㆍ두무(竇武) 등 우국지사들이 환관(宦官)의 발호를 미워하여 태학생(太學生)들을 거느리고 함께 그들을 공격하여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그들로부터 ‘조정을 반대하는 당인’으로 몰리어, 당시 뜻을 같이했던 1백여 인의 선비들과 함께 피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後漢書 黨錮傳》
♣ 한대[漢臺]공신으로 책록(冊錄)되었음을 뜻한다. 한대(漢臺)는 바로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공신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공신 28인의 초상(肖像)을 걸어 놓았던 운대(雲臺)를 가리킨다.
♣ 한대서경[漢代西京]한 나라가 장안(長安)에 도읍했었는데, 동한(東漢) 때에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장안을 서경이라 했다.
♣ 한도성어사[漢道盛於斯]두보의 시에서 한 나라는 문장이 심후해서 사마천(司馬遷), 사마상여(司馬相如), 유향(劉向), 왕포(王褒) 등 훌륭한 문장가가 많이 있었다는 뜻으로 쓰였다. 《杜詩澤風堂批解 偶題 註》
♣ 한랑설리파[韓郞雪裏葩]한유(韓愈)의 질손(姪孫)인 한상(韓湘)은 자신이 준순주(逡巡酒)를 빚어 잠깐 사이에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한유가 “네가 조화를 빼앗아 꽃을 피울 수 있단 말인가?”하자, 한상은 흙을 쌓아 놓은 다음 동이로 덮어놓았다가 잠시 후 동이를 치우니 푸른 모란 두 떨기가 피어 있었는데 그 잎에 작은 금자(金字)로 “구름은 진령(秦嶺)에 비껴 있는데 집은 어드메뇨. 눈이 남관(藍關)을 둘러 말이 가지 못하누나.”라 적혀 있었다. 그 뒤 한유가 좌천되어 조주(潮州)로 가다가 남관에 이르러 눈을 만나고서 그 뜻을 깨달았다 하는데, 이때 한유가 멀리서 찾아온 한상에게 준 시 좌천지남관시질손상(左遷至藍關示姪孫湘)에 역시 “구름은 진령에 비껴 있는데 집은 어드메뇨. 눈이 남관을 둘러 말이 가지 못하누나.”라 읊은 다음 “네가 멀리서 온 것은 뜻한 바 있어서임을 아노니, 장강(瘴江) 가에서 나의 유골을 거두어 주게.” 하였다. 《太平廣記》
♣ 한로[韓盧]전국 시대 한국(韓國)에서 생산된 준견(俊犬)의 이름.
♣ 한로입지완로적[漢老入地完老謫]한로(漢老)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말하고 완로(完老)는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을 말한다. 이덕형은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된 채 양근(楊根)에 내려가 그해에 죽었으며, 이원익은 광해군 7년(1615)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
♣ 한록사[韓錄事]고려 때의 명사(名士) 한유한(韓惟漢)을 말함. 그는 지리산(智異山)에 은거하면서 조행(操行)이 고상하고 조촐하여 세상일을 간섭하지 않았는데,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한유한이 처음 서울에 살았으나, 최충헌(崔忠獻)의 정사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는, 장차 난(亂)이 일어날 것이라 여기고, 처자(妻子)를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은거하였는데, 뒤에 나라에서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까지 취임하지 않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
♣ 한롱적[韓隴笛]농적은 농서 지방의 젓대 소리를 말한다. 한유(韓愈)의 화최사인영월시(和崔舍人詠月詩)에 “고을의 누대 어느 곳을 바라볼까 농서의 젓대 소리 이때에 듣네[郡樓何處望 隴笛此時聽]" 하였다.
♣ 한륙견척[韓陸見斥]당 헌종(唐憲宗) 때 한유(韓愈)가 황보박(皇甫鎛)의 배척을 받아 중용(重用)되지 못한 일과 당 덕종(唐德宗) 때 육지(陸贄)가 노기(盧杞) 등의 배척을 받은 일을 말한다. 《당서(唐書) 卷一百五十七, 卷一百七十六》
♣ 한름진진속[漢廩陳陳粟]사기(史記) 평준서(平準書)에 “太倉之粟 陳陳相因 充溢露積於外 至腐敗不可食”이라고 하였다.
♣ 한림[翰林]한림원(翰林院)의 학사. 문한(文翰)을 맡은 관원. 고려 후기와 조선에서는 예문관(藝文館)의 공봉(供奉)ㆍ봉교(奉敎) 이하의 관원을 한림이라 통칭하였다. 한(翰)은 새의 깃, 곧 붓을 뜻하고, 임(林)은 무리로 많이 모인 것을 뜻한다.
♣ 한림[翰林]하지장(賀知章)의 추천을 받고 당 현종(唐玄宗)을 알현한 뒤 바로 한림으로 임명되어 극진한 총애를 받았던 이태백(李太白)을 가리킨다.
♣ 한림취부황학루[翰林醉賦黃鶴樓]당(唐)나라 시인(詩人) 이백(李白)이 일찍이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으므로 한림이라 칭함. 그는 “나는 또 그대를 위해 황학루를 쳐부수겠다[我且爲君搥碎黃鶴樓].” 하였다.
♣ 한마공[汗馬功]말이 땀을 흘리게 한 공로, 즉 전공(戰功)을 말한다.
♣ 한만[汗漫]한만(汗漫)은 광대무변한 세계를 말한다. 장자(莊子)에, “한만과 더불어서 천지 밖을 기약한다.” 하였다.
♣ 한만유[汗漫遊]속세를 초월한 신선의 유람을 말한다. 옛날 노오(盧敖)가 북해(北海)에서 노닐다가 이인(異人)인 약사(若士)를 만나 함께 벗으로 노닐자고 청하자, 약사가 이에 응답하기를 “당신은 중주(中州)의 사람이다. …… 나는 구해(九垓) 밖에서 한만(汗漫)과 만날 약속이 되어 있으니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하고는 곧바로 구름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구해(九垓)는 구천(九天)을 말한다. 《淮南子 道應訓》
♣ 한매[寒梅]추운 날씨에 꽃이 피는 매화 나무를 말한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조물이 뭇 고목들 소생시키려 하기 전에, 제일 먼저 찬 매화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누나.[化工未議蘇群槁 先向寒梅一傾倒]”라는 표현이 보인다. 《蘇東坡詩集 卷22 再和潛師》
♣ 한매롱두신[寒梅隴頭信]친지(親知), 특히 모친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다. 남조 송(南朝宋)의 육개(陸凱)가 강남(江南)의 매화 한 가지를 장안(長安)에 있던 친구 범엽(范曄)에게 부치면서 “매화 가지 꺾다가 역마 탄 사신 만나, 농두의 벗 생각하고 부쳐 보내노라.[折梅逢驛使 寄與隴頭人]”라는 시를 지은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 한맹[寒盟]애공(哀公)이 오 나라 측과 회동하였는데, 오 나라에서 전에 했던 맹약을 다시 굳힐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애공은 자공(子貢)을 시켜 말하기를, “맹약은 신의를 단단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지킬 것을 정하고, 옥과 폐백으로써 상대국을 받들며, 말로 약속을 맺고, 신에게 밝히어 그 약속 지키기를 맹세하는 것이다. 일단 맹약을 맺으면 그것을 고칠 수는 없다. 또 고쳐 맹약 맺을 것 같으면 날마다 맹약 맺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지금 그 쪽에서 전의 맹약을 굳게 해야 한다고 하나, 전에 맺은 맹약을 다시 굳힐 수가 있다면 그 맹약을 식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若可尋也 亦可寒也]”하였다. 이후로 맹약을 파기하거나 잊는 것을 ‘한맹’이라 일컫게 되었다. 《春秋左氏傳 哀公 12年》
♣ 한맹운[韓孟雲]고려 후기의 문신(文臣) 한수(韓脩). 맹운(孟雲)은 그의 자(字). 문과(文科)를 거쳐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를 역임하고 뒤에 청성군(淸城君)에 피봉되었다. 문장과 서법(書法)에 능하였다.
♣ 한면[漢沔]한수(漢水)와 그 상류인 면수(沔水). 형주(荊州) 북쪽에 위치하고 있음.
♣ 한무가사[漢武歌詞]한 무제(漢武帝)의 가사.
♣ 한문[寒門]북극의 산. 북문.
♣ 한문공[韓文公]당(唐) 나라 중기의 유학자이며 문장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이름은 유(愈), 자는 퇴지(退之).
♣ 한문석로대[漢文惜露臺]노대는 임금이 천상(天象)을 관찰하는 장소를 말하는데, 한 문제가 일찍이 이 노대를 지으려고 기술자를 불러 견적을 빼본 결과 백금(百金)이 들게 되므로, 문제가 이르기를 “백금은 중산층 십호(十戶)의 재산에 해당되니, 어찌 이 대를 만들겠는가.” 하고, 그만두었다. 《史記 文帝紀》
♣ 한문절공[韓文節公]한 문절공은 시호가 문절이고 호가 복재(復齋)인 고려 때의 명신 한종유(韓宗愈)를 말한다.
♣ 한반장[漢盤掌]한무제(漢武帝)는 한 나라 제5대 황제이며 승로반(承露盤)은 신선이 되기 위하여 이슬을 받아먹는 그릇. 무제는 신선을 좋아하여 구리로 승로반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20길이나 되고 크기가 열 아름이었다. 이 위에 선인장(仙人掌)이 있어 이슬을 받고는 옥가루를 섞어 마시어 신선되기를 바랐다. 《漢書 卷六 孝武帝紀 三輔故事》
♣ 한발[旱魃]가뭄의 재앙을 일으킨다는 신화 속의 여신.
♣ 한발[捍撥]한발은 금은(金銀)이나 상아(象牙)로 장식한 비파(琵琶)를 타는 채를 말한다.
♣ 한부[恨賦]한부는 양(梁) 나라 때의 문인 강엄(江淹)이 지은 부인데, 고인(古人)들이 비색한 시운을 만나 뜻을 펴지 못하고 죽은 것을 탄식하여 지은 글로서, 매우 애절하기로 유명하다.
♣ 한비세난[韓非說難]세난은 30권으로 된 한비자(韓非子) 중의 한 편명으로 임금에게 유세하기 어려운 점을 날카롭게 분석한 글. 진왕(秦王)이 한비자의 글을 읽고 감동한 나머지 한(韓) 나라를 공격하면서까지 그를 보려고 하자, 한 나라가 그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그와 순자(荀子) 밑에서 동문수학한 이사(李斯)의 모함에 걸려 하옥되었고 끝내는 이사가 보낸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史記 卷六十三》
♣ 한비장군[漢飛將軍]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장 이광(李廣)을 말한다. 그가 북평 태수(北平太守)로 부임하자, 흉노(匈奴)가 “한비 장군이 왔다.”고 하면서 모두 피하고 몇 년 동안이나 침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漢書 李廣傳》
♣ 한빙지옥[寒氷地獄]불가에서 말하는 팔한지옥(八寒地獄). 곧 찬 얼음으로 고통을 받는 큰 지옥을 말한다.
♣ 한빙처[韓凭妻]송(宋) 강왕(康王)이 한빙의 아내 하씨의 미색을 탐내어 마침내 한빙을 붙잡아다가 벌로 고역(苦役)을 시키고는, 하씨는 자신이 차지했다. 하씨는 남몰래 사람을 시켜 남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시구(詩句)로 사랑을 위해 죽고자 하는 결심을 암시했다. 한빙은 편지를 본 후 오래지 않아 자살하였고, 하씨 역시 소식을 들은 후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그녀는 죽기 전 유언을 남겨 한빙과 같은 무덤에 장사지내 줄 것을 간절히 소망하였다. 송 강왕은 이것을 알게 된 후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고의로 그들을 양편으로 나누어 장사지내게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두 사람의 무덤에서는 하룻밤 사이 상사(相思)의 나무 두 그루가 자라나서 “뿌리는 아래에서 서로 얽히고, 가지는 위에서 엇갈렸고”, 원앙 한 쌍이 그 나무 위에 서식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떠나지 않고 목놓아 슬프게 울어대는데, 그 소리가 사람을 감동시켰다”. 사람들은 이 원앙 한 쌍이 다름 아닌 한빙 부부의 혼령이라고들 했다.
♣ 한사[寒士]한사는 가난한 선비라는 뜻이다.
♣ 한사료치척격최[漢使聊馳尺檄催]한 무제가 선우대(單于臺)에 오른 뒤 18만 대군을 거느리고 위엄을 떨치면서 선우에게 사신을 보내 고하기를 “남월왕의 머리는 이미 북궐에 걸어 놓았다. 선우 그대가 싸울 능력이 있으면 천자인 내가 직접 변경에서 기다릴 것이요, 싸우지 못하겠거든 속히 와서 신하로 복종하라.[南越王頭已懸於漢北闕矣 單于能戰 天子自將待邊 不能 亟來臣服]”하였다. 《漢書 卷6》
♣ 한사마[韓司馬]북제(北齊)의 한궤(韓軌)를 말한다. 대사마(大司馬)로서 유유(蠕蠕)를 정벌(征伐)하다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北齊書 卷十五 韓軌傳》
♣ 한사마[韓司馬]한퇴지는 당 나라 한유(韓愈). 배도(裴度)가 회서(淮西)를 칠 때에 한퇴지(韓退之)가 행군사마(行軍司馬)의 직책으로 종군(從軍)하였다.
♣ 한사사[漢使槎]한 무제(漢武帝) 때의 장건(張騫)이 대완(大宛)ㆍ강거(康居)ㆍ월지(月支)ㆍ대하(大夏) 등 멀리 서북방의 외국에 사신으로 나갈 때 뗏목을 타고 하수(河水)를 따라 올라갔다 한다.
♣ 한사승사[漢使乘槎]한 무제(漢武帝) 때 장건(張褰)이 사신 길에 뗏목을 타고 다녔다는 고사가 있다.
♣ 한사진동[漢士秦童]한 나라 방사(方士)는 한 무제(漢武帝) 때에 신선을 찾던 방사이고, 진(秦) 나라 동자(童子)는 진 시황(秦始皇) 때에 서불(徐巿)를 따라 삼신산(三神山)으로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러 갔던 동남 동녀(童男童女)를 말한다.
♣ 한산[寒山]당나라 시인 장계(張繼)가 한산사(寒山寺)를 지나다가 지은 시가 유명하다.
♣ 한산백[韓山伯]목은(牧隱) 이색(李穡)을 가리킨다.
♣ 한산자[寒山子]당(唐) 나라 때 천태산(天台山)에 있던 고승(高僧).
♣ 한산팔경[韓山八景]한산의 여러 가지 경치.
♣ 한산편석[韓山片石]뛰어난 문사(文士)가 떠나게 됨을 비유한 말. 한산은 곧 한릉산(韓陵山)을 이름. 양(梁) 나라 때 유신(庾信)이 남조(南朝)로부터 맨 처음 북방(北方)에 갔을 적에 당시 북방의 문사인 온자승(溫子昇)이 한릉산사비(韓陵山寺碑)를 지었으므로, 유신이 이 글을 읽고 베끼었는데, 남방의 문사가 유신에게 묻기를, “북방의 문사들이 어떠하던가?" 하니, 유신이 대답하기를, “오직 한릉산에 한 조각 돌이 있어 함께 말을 할 만하더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朝野僉載 卷六》
♣ 한상[韓湘]당(唐) 나라 때의 대문장가 한퇴지(韓退之)의 조카.
♣ 한상[韓湘]한상은 당(唐) 한유(韓愈)의 종손(從孫)으로서 도술(道術)에 심취하여 선인(仙人)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옴. 속선전(續仙傳)에 “한상이 도술을 좋아하며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언젠가 흙을 모으고 화분을 뒤짚자 바로 꽃이 피면서 꽃잎 위에 ‘구름은 진 나라 고개를 가로질러 가는데 집은 어디에 있는가. 남관에 눈보라치니 말이 가려 하지 않네.[雲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이라는 시구가 나타나게 하였다. 한유가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뒤에 조주(潮州)로 좌천되어 가면서 중도에 눈보라를 만났는데, 이때 한상이 눈을 무릅쓰고 찾아 왔기에 그곳의 지명을 물어보니 바로 남관이었다.” 하였음.
♣ 한생탈득동귀지[韓生奪得東歸志]항우(項羽)가 함양(咸陽)을 불태우고 동으로 돌아가려 하니 한생(韓生)이 “관중(關中)은 사방이 막힌 지역으로 토지가 비옥하여 도읍할 만한 곳입니다.” 하였으나 항우가 듣지 않았다. 《史記 卷七 項羽本紀》
♣ 한선[寒蟬]울지 못하는 매미로, 벙어리 매미를 말하는데, 흔히 일을 만나 아무런 역할도 못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 한선자[韓宣子]한 선자는 춘추(春秋) 시대 진(晉) 나라 대부 한기(韓起)를 말함. 선(宣)은 그의 시호. 각궁(角弓)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인데, 이 시는, 주(周) 나라 임금이 친족(親族)을 멀리하고 소인들을 가까이 하므로, 친족들이 임금을 원망하여 부른 노래이다. 한 선자가 일찍이 노(魯)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노 나라 대부 계 무자(季武子)와 연향(宴享)하는 자리에서 서로 수호(修好)를 잘하자는 뜻에서 시경(詩經) 각궁(角弓)의 “내 형제 내 겨레만은 서로 멀리하지 마시오.[兄弟婚姻 無胥遠矣]"라는 구절을 읊었던 고사이다. 《左傳 昭公 二年》
♣ 한섬노토[寒蟾露兎]예(羿)의 처(妻)인 항아(姮娥)가 불사약을 훔쳐 달로 달아나 두꺼비가 되었다는 전설과 옥토끼가 달 속에서 약초를 찧느라 절구질을 한다는 전설이 있다. 《後漢書 天文志上ㆍ楚辭 天問 注》
♣ 한소이두[韓蘇李杜]한유(韓愈)ㆍ소식(蘇軾)ㆍ이백(李白)ㆍ두보(杜甫)를 말한다. 한유는 당 헌종(唐憲宗) 때 불골표(佛骨表)를 올렸다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쫓겨났으며, 소식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다 항주 통판(杭州通判)으로 쫓겨나고 오대시안(烏臺詩案)으로 하옥되는가 하면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지방으로 좌천되었으며, 이백은 영왕 린(永王璘)의 막좌(幕佐)로 있다가 도망친 뒤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평정되자 사죄(死罪)에 걸려들었으나 곽자의(郭子儀)의 도움으로 야랑(夜郞)에 유배되었으며, 두보는 당 현종(唐玄宗) 때 사건에 연루되어 화주(華州)로 쫓겨났다가 검남(劍南)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 한속[寒粟]한기(寒氣)와 같은 뜻이다.
♣ 한수[寒羞]한수는 성찬(盛饌)을 먹은 다음 먹는 과일 따위를 말하는데, 시원한 음식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 한수[韓壽]한수는 진(晉) 나라 도양(堵陽) 사람으로 상당한 미모(美貌)를 갖추었고 사공(司公) 가충(賈充)의 부하가 되었다. 그러자 가충의 딸이 한수를 좋아하여, 가충이 천자(天子)에게 하사(下賜)받은, 서역(西域)에서 보내온 기향(奇香)을 훔쳐다 한수에게 주었는데, 이 기향이 한번 묻으면 그 향기가 한 달이 지속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四十 賈充傳》
♣ 한수[漢水]한양
♣ 한수명향[韓壽名香]한수(韓壽)는 진(晉) 나라 도장(道場) 사람으로 미모가 있었는데, 사공(司空) 가충(賈充)의 아전이 되었다. 충의 딸 오(午)가 수를 보고 좋아하여 저녁에 수를 불러 들여 기향(奇香)을 주었다. 이 향은 서월(西越)에서 조공한 것으로 사람이 한 번 품으면 한 달이 지나도 향기가 없어지지 않았는데 황제가 충에게만 준 것을 그 딸이 훔쳐서 수에게 주었다. 충이 이 일을 알고 수를 사위로 삼았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四十》
♣ 한습[寒拾]당(唐) 나라 고승(高僧)인 한산(寒山)ㆍ습득(拾得)이다.
♣ 한승상[漢丞相]조조(曹操)를 말한 것.
♣ 한식[寒食]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 이 날은 불을 금하고 찬 밥을 먹는다. 민간에서는 조상의 묘에 성묘를 한다.
♣ 한식상묘[寒食上墓]한식날의 성묘.
♣ 한신[韓信]한신은 한(漢)의 명장으로 유방(劉邦)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다음 그 공로로 초왕(楚王)에 봉해졌으나 뒤에 회음후(淮陰侯)로 강봉되었다. 국사는 온 나라가 추앙하는 선비란 뜻인데, 소하(蕭何)는 일찍이 한신을 칭찬하여 둘도 없는 국사라 하였다. 《史記 淮陰侯傳》
♣ 한신내배수[韓信乃背水]배수진은 물을 등지고 진을 치는 것이다. 한 나라 때 한신이 조군(趙軍)과 싸울 적에 군사 1만 명으로 배수진을 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배수진을 친 까닭을 한신에게 묻자, 한신은, “병법에 ‘사지(死地)에 몰아넣은 다음에야 살 길이 생기고, 망할 곳에 놓아둔 다음에야 살아날 길이 생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史記 卷九十二 淮陰侯列傳》
♣ 한신도앵[韓信渡甖]한 고조(漢高祖) 때, 위왕(魏王)이 배반하자 한신이 위 나라를 치기 위해 임진(臨晉)을 건널 적에 목앵부(木罌艀)에다 군사들을 태워 인솔하고 건너가서 위왕 표(豹)를 사로잡고 위 나라를 평정했던 일을 말한다. 《史記 卷九十二 淮 陰侯列傳》
♣ 한실의관[漢室衣冠]왕망(王莽)이 한 나라를 찬탈하여 세운 신(新) 나라 말에 회양왕(淮陽王) 유현(劉玄)이 낙양(洛陽)에 장차 도읍을 정하려 하면서 유수(劉秀)를 사예교위(司隷校尉)로 임명하여 미리 그곳에 가서 궁부(宮府)를 정돈하도록 하였다. 유수는 자기가 거느린 관속들에게 옛 한 나라의 의관을 입히는 등 과거의 제도를 복구하였는데 그것을 본 늙은 관리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오늘날 다시 한 나라 관원의 풍모를 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였다. 《後漢書 卷一 上 光武帝紀》
♣ 한아[寒鴉]반포(反哺)의 의리를 아는 까마귀로, 어미를 사모하는 효자를 비유한 말이다.
♣ 한안[汗顔]부끄럽거나 두려운 일을 하여 얼굴에 땀을 흘리는 자.
♣ 한안국[韓安國]한(漢) 나라 때 양 효왕(梁孝王)의 중대부(中大夫)였던 한안국(韓安國)이, 무슨 일로 죄를 받게 되었을 때 몽현(蒙縣)의 일개 옥리(獄吏)인 전갑(田甲)이 안국에게 욕을 하였다. 이때 안국은 그에게 말하기를, “죽은 재라고 해서 다시 불붙지 말라는 법이 있다더냐?" 하자 옥리가 대답하기를, “불이 붙기만 하면 오줌을 싸버리리라.”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안국은 다시 양(梁)의 내사(內史)가 되자 당시 옥리였던 전갑은 그를 찾아가 육단사죄(肉袒謝罪)를 하였다. 《史記 卷一百八》
♣ 한양도[漢兩都]전한(前漢)은 장안(長安)에 도읍하였으니 서도(西都)요, 후한(後漢)은 낙양(洛陽)에 도읍하였으니 동도(東都)이다.
♣ 한양역력앵무주[漢陽歷歷鸚鵡洲]당나라 최호(崔顥)의 황학루(黃鶴樓)에, “청천역력한양수, 방초처처앵무주(晴川歷歷漢陽水芳草萋萋鸚鵡洲)”라는 글귀가 있다.
♣ 한언환[韓嫣丸]금으로 만든 탄환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의 총신(寵臣)인 한언이 무제로부터 여러 차례 하사품을 받아 몹시 부유하였다. 항상 금으로 탄환을 만들어 새를 잡으러 다녔는데 새를 잡으러 갈 적마다 탄환을 10여 개씩 잃어버렸으므로 장안의 아이들이 그 탄환을 줍기 위해 한언의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西京雜記 卷4》
♣ 한여[翰如]이시우(李是釪)의 자.
♣ 한영[閒詠]한가롭게 읊조림.
♣ 한예용라[漢隷龍拏]한예는 한 나라 때에 성행했던 예서체(隷書體)를 말하고, 용이 끈다는 것은 곧 자획(字劃)의 모양을 형용한 말이다.
♣ 한옥[寒玉]한옥은 대나무를 뜻하는 시어(詩語)이다.
♣ 한옹[韓翁]한옹은 송(宋) 나라 때 한국공(韓國公)에 봉해진 부필(富弼)을 말한다.
♣ 한와[漢瓦]한와는 한 나라 시대 궁전(宮殿)에 사용했던 기왓장에 새긴 문자(文字)를 가리킨 말이다.
♣ 한와당[漢瓦當]’瓦當’의 ‘當’은 ‘鏜’인데 토기(土器)의 와(鍋)임. 한(漢) 나라 시대의 것을 말함.
♣ 한우[寒竽]한우는 오래도록 불지 않고 버려 둔 피리를 이르는데, 소식(蘇軾)의 화자유시(和子由詩)에 “나는 이제 학문을 폐한 게 한우와 같아서 오래도록 불지 않아 막히어 소리가 안 나려 하네[我今廢學如寒竽 久不吹之澁欲無]”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四》
♣ 한우충동[汗牛充棟]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이고 방 안에 쌓으면 들보에 닿을 정도란 뜻으 로, 장서(藏書)가 매우 많다는 뜻의 고사성어.
♣ 한원[翰院]한림원(翰林院)과 예문관(禮文館)의 겸칭. 한원(翰苑).
♣ 한원[翰苑]한림원(翰林院)의 약칭으로 예문관(藝文館)의 별칭임.
♣ 한원[漢源]한원은 은하수의 근원이다. 중국의 전설에 은하수는 바다와 서로 통해 있다고 전하는데, 해변에 사는 어떤 사람이 해마다 8월이 되면 뗏목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한번은 뗏목을 타고 은하에 당도하여 견우와 직녀를 보았다 한다. 흔히 하늘에 오르는 것에 비유한다. 이와 비슷한 전설로 한 무제(漢武帝) 때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나가면서 한수의 근원을 찾아보라는 무제의 명에 따라 뗏목을 타고 근원을 찾아가 견우와 직녀를 보고 돌아왔다는 말이 있다. 《博物志 卷三》
♣ 한원지[韓元之]원지는 한인급(韓仁及)의 자(字)이다.
♣ 한월[漢月]중국의 중원(中原) 사람이 변방 외국에 나가 고국을 그릴 때 쓰는 말로 고국의 달이란 뜻이다.
♣ 한월사편[韓鉞謝篇]한월과 사편(謝篇)은 한신(韓信)의 도끼와 사영운(謝靈運)의 시편을 말하는데, 옛날 장군들은 도끼를 잡고 출정(出征)하였다. 한신은 한 고조(漢高祖)의 명장으로 항우(項羽)를 이기고 천하를 통일하였으며, 사영운은 진(晉)의 문장가로 시문이 뛰어났으므로 곧 문무 겸전(文武兼全)하여 문반(文班)인 서반(西班)과 무반(武班)인 동반(東班)의 직책을 겸직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 한위공[韓魏公]한 위공(韓魏公)은 북송(北宋) 인종(仁宗) 때 현상(賢相) 한기(韓琦). 자는 치규(稚圭).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음. 한기가 일찍이 정자를 짓고 압구정이라 이름했었다.
♣ 한유[漢劉]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왕망(王莽)의 찬탈(簒奪)로 망한 한(漢)을 그가 중흥시켰다.
♣ 한유[韓柳]한유는 문장가인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을 가리키는데 일대 문호(文豪)로 유명했다.
♣ 한유[韓愈]당(唐) 나라의 유학가(儒學家)이며 문장가.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주창하였으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벼슬은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일찍이 사설(師說)을 지어 사도(師道)를 말하였다.
♣ 한유송원화[韓愈頌元和]원화는 당(唐)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반적(叛賊)들을 토평(討平)하여 나라를 중흥시키자, 한유(韓愈)가 원화성덕시(元和聖德詩)를 지었다.
♣ 한음[漢陰]송(宋) 나라 강하(江夏) 사람인 두감(杜淦)의 호임. 자칭 한음노인(漢陰老人)이라고 칭하고 사수(泗水) 부근에 은거하면서 농사를 지어 15년 만에 부자가 되었는데 그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수모를 견디고 벼슬하는 자들은 대부분 처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은 수모를 견디고 나는 노력을 한다. 모두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지만 그에 비하면 내가 낫지 않은가.” 하였다.
♣ 한음[漢陰]한수의 남쪽
♣ 한음기심[漢陰機心]한음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자공(子貢)이 기심(機心)에 대해 비웃음을 당한 것을 가리킨다.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자공이 남쪽으로 초(楚) 나라를 유람하고 진(晉) 나라로 돌아오다가 한음(漢陰)에서 어떤 노인이 마침 밭을 관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땅굴을 파고 우물로 들어가 항아리에 물을 담아들고 나와서 물을 주고 있었는데, 끙끙거리면서 힘을 무척 많이 들였는데도 효과는 적었다. …… 밭을 관리하던 노인이 성난 듯 얼굴빛을 바꾸고 비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우리 선생에게 들은 바로는, 기계를 가진 자는 반드시 기계를 쓸 일이 있게 되고, 기계를 쓰는 일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기계에 관한 마음 쓰임[機心]이 있게 되고, 기심이 가슴속에 있게 되면 순백(純白)함이 갖추어지지 않게 되고, 순백함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정신과 성격이 불안정하게 된다. 정신과 성격이 불안정한 사람에게는 도가 깃들이지 않는 법이다. 나는 알지 못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서 하지 않는 것이다.’ 하니, 자공이 부끄러워서 몸을 구부린 채 아무 말도 못하였다.” 하였다.
♣ 한음무기심[漢陰無機心]한음은 중국의 지명. 이 땅에 살던 한 노인이, 온 세상 사람들의 간사한 지혜와 교묘한 기계가 날마다 그 본심과 순박한 풍기를 해친다 하며, 기계(機械)를 만들어 쓰라는 권고를 물리치고 일부러 단지로 우물물을 퍼서 채소에 주었다. 기심(機心)은 간교한 마음. 《莊子 天地》
♣ 한음병[漢陰甁]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한음을 지나다가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이 물동이를 안고 우물로 들어가 물을 퍼 가지고 나와서 채소밭에 물을 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天地》
♣ 한의[漢儀]신국(新國) 왕망(王莽)이 한(漢)나라를 빼앗았다가, 뒤에 광복(光復)하려는 군사들이 일어나 유수(劉秀)가 보낸 관리들이 한관(漢官)의 의식(儀式)을 다시 회복하니, 백성들이 감탄하여, “오늘에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다시 볼 줄을 몰랐다.” 하였다.
♣ 한의[寒衣]추울 때 입는 옷.
♣ 한이부[韓吏部]한 이부는 곧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낸 한유(韓愈)를 이른다. 그의 석고가에, “對此涕淚雙滂沱”라 하였음.
♣ 한일참광정[寒日慘光晶]이백(李白)의 시에 “길게 호읍(號泣)하며 엄친과 이별하노라니, 일월도 참담하여 빛을 잃은 듯.[長號別嚴親 日月慘光晶]”이라는 구절이 있다. 《李太白集 卷1 古風》
♣ 한자[韓子]전국 시대 한비자(韓非子). 또는 그가 지은 책 한비자(韓非子)를 말하기도 함.
♣ 한자개진간힐자[韓子豈眞奸黠者]한유(韓愈)의 “관직도 없는 우리 동야, 너무도 쇠한 백발의 몸. 조금 교활한 나 한자, 장송에 붙은 덩굴인양 스스로 부끄러워.[東野不得官 白首誇龍鍾 韓子稍姦黠 自慙靑蒿倚長松]”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韓昌藜集 卷5 醉留東野》
♣ 한자애련[韓子愛聯]한자는 당 나라의 한유(韓愈)이며, 그가 석정연구시(石鼎聯句詩)를 짓고 서문(序文)을 붙인 것을 말한다. 《韓昌黎集 補遺》
♣ 한자파리완[韓子玻瓈盌]한유(韓愈)의 시에 “두세 명 도사가 그 사이에 자리잡고, 파리 옥배(玉盃)에 영액을 자꾸 따라 마시누나.[二三道士席其間 靈液屢進玻瓈盌]”라고 하였다. 《韓昌黎集 卷4 遊靑龍寺 贈崔大補闕》
♣ 한적[漢賊]중국과 중국을 거역하는 역적을 묶은 말로,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한 나라와 역적은 양립할 수 없다.[漢賊不兩立]”는 대목에서 나온다.
♣ 한전[漢傳]한전은 한서(漢書) 동방삭전(東方朔傳)을 가리킨다.
♣ 한전영잠련[漢殿領箴連]한나라 시대에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이라는 찬송하는 송을 왕포(王褒)라는 사람이 지은 일이 있다.
♣ 한절[漢節]한(漢) 나라 소무(蘇武)가 흉노에 사신으로 갈 때 가지고 갔던 절월(節鉞)을 말한다. 소무는 한 나라 무제(武帝) 때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는데도 굴하지 않은 채 온갖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소제(昭帝) 때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다. 《漢書 卷54 蘇建傳 蘇武》
♣ 한절[漢節]한(漢) 나라의 천자가 준 부절(符節)로, 사신을 가리킨다. 한 나라 때 소무(蘇武)가 흉노에 사신으로 가서 절개를 굽히지 않은 채 19년 동안이나 억류되어 있다가 돌아왔는데, 이로 인해 사신이 가지고 가는 부절을 한절이라고 하게 되었다.
♣ 한절치월[漢節馳越]남월(南越)의 왕 조타(趙佗)가 한 나라 문제(文帝) 때 스스로 왕이 되어 무제(武帝)라고 칭하였는데, 문제가 육가(陸賈)를 사신으로 보내어 타이르자 드디어 황제의 호칭을 버리고 신(臣)이라 칭하였다. 《史記 卷97 酈生陸賈列傳》
♣ 한정부[閒情賦]오랫동안 초야에 묻혀 있었음을 뜻함. 한정부는 진(晉)의 은사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글임.
♣ 한정영동상[漢廷迎董相]한정은 한(漢) 나라 조정을 말하고, 동상(董相)은 한 나라 무제(武帝) 때 강도상(江都相)을 지낸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한 나라 무제가 즉위하여서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의 선비를 많이 등용하였는데, 동중서는 현량(賢良)으로 뽑혔다. 동중서는, 하늘과 사람은 서로 감응한다는 요지로 대책을 올리면서 육예(六藝)의 과(科)와 공자(孔子)의 학술을 배우지 않은 자는 등용하지 말라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무제가 동중서를 강도상으로 삼았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 한제[漢帝]서한(西漢) 12제(帝) 212년과 동한(東漢) 12제 196년, 도합 24제 408년. 역조(歷朝) 중 국조(國祚)가 가장 길었다.
♣ 한제음풍[漢帝吟風]한 무제(漢武帝)가 분수(汾水)에 배를 띄우고 흔연히 중류(中流)에서 ‘추풍사(秋風辭)’를 지어서 늙음을 탄식하였다.
♣ 한제폐북관[漢帝閉北關]한제는 한 나라 무제(武帝)를 가리킨다. 소무(蘇武)가 흉노에 사신으로 간 뒤에 무제가 흉노와의 관계를 단절한 일을 말한다. 《漢書 卷54 蘇建傳 蘇武》
♣ 한제횡분악[漢帝橫汾樂]한 나라 무제(武帝)가 늘그막에 산서성(山西省)의 분(汾)하수에서 뱃놀이하면서 추풍가(秋風歌)를 지어서 노래하였다.
♣ 한주가곤이[漢主嫁昆夷]여기서 말한 곤이(昆夷)는 흉노(匈奴) 묵특(冒頓)을 가리키는데 한(漢) 나라가 흉노에게 자주 침공을 당하자 유경(劉敬)이 적장공주(適長公主)를 그들에게 시집보내어 화친을 하자고 제의한 것을 말한다. 《史記 卷九十九 劉敬叔孫通列傳》
♣ 한주상림[漢主上林]한(漢) 나라의 어원(御苑)인데, 그 속에 동물원도 있다.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上林賦)에 천자(天子)의 사냥하는 광경의 성대한 것을 말하였다.
♣ 한죽[汗竹]한죽(汗竹)은 사책(史冊)을 가리킨다.
♣ 한중[漢中]섬서성(陝西省)의 서남쪽을 흐르는 한강(漢江; 양자강의 큰 지류) 북안의 험한 땅으로서 진(秦)나라를 멸한 유방이 항우로부터 분봉(分封)받아 한왕(漢王)을 일컫던 곳.
♣ 한중[韓衆]제인(齊人)으로 단약을 먹고 신선이 되었다 함.
♣ 한중[漢中]한중은 익주(益州)로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 한중진미[閒中眞味]한가한 가운데 깃드는 참다운 맛.
♣ 한진[韓鎭]한진은 한(韓) 나라 진산(鎭山)으로 양산(梁山)을 말함. 주 선왕(周宣王) 때 제후인 한후(韓侯)가 재능이 출중하여 아래에서 주위의 소수 부족을 단결시키고 낙후된 지역을 개발하였다고 함. 시경(詩經) 大雅 韓奕에 “하늘 높이 솟은 양산에 하우(夏禹)께서 다스렸는데 한후가 밝은 덕 지녀 천자는 글에게 사명을 내렸네.[奕奕梁山 維禹甸之 有倬其道 韓侯受命]" 하였음. 혁(奕)과 혁(赫)자는 상통함.
♣ 한척삼[漢尺三]우리나라의 법령을 말한다. 한 나라 때 석 자 되는 죽간(竹簡)에 법령을 기록하였다.
♣ 한청[汗靑]사책(史策)을 가리킨다. 옛날 종이가 없어 대쪽에 글을 쓸 때, 먼저 대를 불에 지져 대의 기름과 파란 빛을 빼어 글씨도 쓰기 좋고 또 오래가도록 하였다. 이것을 죽간(竹簡) 또는 한청이라 하였는데 후세에는 사책의 별명으로 통용되었다.
♣ 한칠국[漢七國]한 경제(漢景帝) 때에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킨 일곱 나라. 즉 오(吳)ㆍ초(楚)ㆍ조(趙)ㆍ교서(膠西)ㆍ교동(膠東)ㆍ치천(菑川)ㆍ제남(濟南).
♣ 한침진경[漢寢震驚]후한서(後漢書) 권7 효환제기(孝桓帝紀)에 “6월 을묘일에 헌릉(憲陵)의 침옥(寢屋)에 천둥이 쳤다.”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이때 양 태후(梁太后)가 섭정하고 있었는데 그 오빠 양기(梁冀)가 권세를 멋대로 부리면서 이고(李固)와 두교(杜喬)를 억울하게 죽이자 천하가 원통하게 생각하였다.” 하였다.
♣ 한팽[韓彭]한(漢) 나라 고조(高祖) 때의 장수인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을 가리킨다.
♣ 한팽견지소유집[韓彭見躓蕭猶縶]한 고조(漢高祖)는 천하를 통일한 뒤에 공신(功臣)인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을 반역죄로 몰아서 죽이고 승상(丞相) 소하(蕭何)도 조그만 혐의로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 한팽역자취[韓彭亦自取]한신(韓信)과 팽월(彭越). 한신은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여 장량(張良)ㆍ소하(蕭何)와 함께 삼걸(三傑)로 칭해졌는데, 뒤에 여후(呂后)와 태자(太子)를 습격하려다 오히려 여후의 속임수에 떨어져 목이 잘렸다. 《史記 卷93》 팽월은 항우(項羽)를 섬기다 한(漢) 나라에 귀순하여 기공(奇功)을 세우고 양왕(梁王)에 봉해졌는데, 한신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한 나머지 병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보호하다가 고조(高祖)의 노여움을 사 마침내 효수(梟首)되었다. 《史記 卷90》
♣ 한팽저해[韓彭菹醢]한신(韓信)과 팽월(彭越), 두 사람이 다 한 고조(漢高祖) 부하의 명장(名將)으로 수훈(殊勳)을 세웠으나 그 뒤에 의심을 사 잡혀 죽었다.
♣ 한평동살안[閒評僮殺雁]장자(莊子)가 어느 집에를 갔었는데, 그 집 동자가 “기러기가 한 마리는 잘 울고 한 마리는 울 줄을 모르니 죽입시다.” 하니, 그 집 주인이 “울 줄 모르는 놈을 죽여라.” 하였다. 장자의 제자는 장자에게 “주인의 집 기러기는 재능이 없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는데, 선생님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장자는 “나는 재주와 재주 없는 그 중간을 택하겠다.” 하였다.
♣ 한풍[寒風]한풍은 말을 잘 알아본다는 상고 때 전설상의 인물이다.
♣ 한풍루[寒風樓]무주(茂朱)객사(客舍) 앞에 있던 누다.
♣ 한풍자[寒風子]옛날 말 관상을 잘 보는 사람. 《呂覽 觀表》
♣ 한한[汗汗]물의 광대한 모양
♣ 한한[暵暵]햇빛이 물건을 말리는 모양, 더운 모양
♣ 한항금속[寒缸金粟]등잔의 기름이 다 떨어져서 심지 끝이 타들어 가며 맺히는 불똥을 말한다. 한항은 기름이 없는 등잔으로, 한등(寒燈)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등잔 기름이 다하면서 불꽃도 짤막, 새벽 물시계 소리 역시 길게 드문드문.[焰短寒缸盡 聲長曉漏遲]”이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15 不睡》
♣ 한해[瀚海]몽고의 고원(高原) 동북쪽에 있는 북해(北海)를 뜻하기도 하고 사막의 별칭이기도 하다.
♣ 한해[瀚海]북쪽에 있다고 하는 큰 바다를 말한다. 이설(異說)이 분분한데, 지금의 호륜호(呼倫湖)를 지칭하는 것인 듯하다.
♣ 한해[翰海]한해는 몽고의 항원산(杭爰山)에 대한 음역(音譯)이다.
♣ 한해소조[韓海蘇潮]퇴지(退之) 바다 동파(東坡) 조수. 이기경(李耆卿)의 문장정의(文章精義)에 이르기를 “韓如海 柳如泉 歐如瀾 蘇如潮"라 하였음.
♣ 한헌제[漢獻帝]헌제는 후한(後漢)의 마지막 황제로 조조에게 계속 핍박을 당하다가 그 아들 조비(曺丕)에게 제위(帝位)를 넘겨주고 말았다. 《後漢書 卷九》
♣ 한혈기[汗血驥]천리마의 별칭.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에 “장군 이광리(李廣利)가 대완(大宛)을 정복하고 한혈마를 얻어 왔다.” 하였다.
♣ 한혈마[汗血馬]피와 같은 땀을 흘린다는 대원(大宛)의 준마(駿馬)이다.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에 “이사 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가 대원왕(大宛王)의 머리를 베고 한혈마를 잡아 바쳤다.”는 기사가 있다.
♣ 한형주[韓荊州]한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우러르고 사모하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말로, 당(唐) 나라 때 명신(名臣) 한조종(韓朝宗)을 말한다. 그가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을 때에 이백(李白)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 “살아서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질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번 한 형주를 알기 원한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古文眞寶 後集與韓荊州書》
♣ 한화야초[閑花野草]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저절로 자라는 야생 화초를 말한다.
♣ 한화유가이[漢貨猶可餌]명(明) 나라의 심유경(沈惟敬) 등이 기미책(羈縻策)을 써서 왜적과 화의(和議)를 맺은 뒤 그들의 군사를 본국으로 철수시킨 것을 말한다.
♣ 한화일종명[寒花一種名]한화(寒花)는 추운 계절에 피는 꽃으로, 보통 국화를 가리킨다. 야국(野菊)도 국화 종류의 하나라는 말이다.
♣ 한황[漢皇]중국 황제의 범칭(汎稱)으로, 중국에서 중세에는 한나라가 대표적인 왕조(王朝)이다.
♣ 한후[豻侯]들개 가죽으로 장식한 과녁.
♣ 할[喝]할은 큰 소리로 고함치는 것을 말하는데, 선종(禪宗)에서 학인을 제접(提接)할 때 쓰는 일종의 선기(禪機)이다.
♣ 할계[割雞]할계는 우도할계(牛刀割雞)의 준말로, 큰 재능이 아주 작은 데에 쓰임을 비유한 것이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재(武城宰)로 있으면서 훌륭한 정사를 펴자, 공자가 그 곳을 지나다가 자유에게 장난삼아 이르기를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割雞焉用牛刀]”하는 데서 온 말이다. 전하여 지방의 수령을 한다는 뜻이다.
♣ 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없다. 작은 일 처리에 큰 인물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비유.
♣ 할계우도[割鷄牛刀]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원이 되었을 때, 공자가 그 곳에 가서 현가(絃歌)의 소리를 듣고 웃으면서 이르기를 “닭 잡는 데에 어찌 소잡는 칼을 쓰리오[割鷄焉用牛刀]”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陽貨》
♣ 할관[鶡冠]할관은 할새의 깃으로 꾸민 관을 이르는데, 옛날에 특히 은사(隱士)가 이 관을 썼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할관체[鶡冠體]주(周) 나라 때 초(楚)의 은사(隱士)인 할관자(鶡冠子)가 3권 19편으로 나누어 저술하였다는 할관자(鶡冠子)의 판본의 서체(書體)를 말한다.
♣ 할마[瞎馬]할마는 애꾸눈의 말을 이르는데, 맹인(盲人)이 애꾸눈의 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못 가에 간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대단히 위험함을 비유한 말이다. 《世說新語 排調》
♣ 할목무전[割目無全]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솜씨 좋은 백정이 자신의 기예를 소개하면서 “처음에 소를 잡을 때에는 보이는 것이 온통 온전한 소뿐이더니, 삼 년쯤 지난 뒤에는 소의 각 부위(部位)만이 눈에 들어올 뿐 온전한 소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를 않았다.[未嘗見全牛也]”고 말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 할생[割牲]할생은 희생을 잡아 요리하는 것을 이른다.
♣ 함계설향[含雞舌香]상서랑(尙書郞)이 되는 것을 비유한 말. 계설향은 향명(香名)인데, 한(漢) 나라 때에 상서랑들이 계설향을 입에 머금고 임금 앞에 엎드려 일을 아뢴 데서 온 말이다
♣ 함곡관[函谷關]전국 시대(戰國時代) 진(秦) 나라가 설치한 진(秦)에서 산동 육국(山東六國)으로 통하는 관문(關門)으로 현재의 하남성(河南省) 영보현(靈寶縣) 서남쪽에 있는데, 효함(崤函)이라고도 한다.
♣ 함곡서자기[函谷西紫氣]주대(周代)에 함곡관의 영(令) 윤희(尹喜)가 누(樓)에 올라 사방을 관망하다가, 남극 노인성(南極老人星; 壽星)의 자기(紫氣)가 서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앞으로 성인이 이곳을 경과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노자(老子)를 만나서 도덕경(道德經)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關令二外傳》
♣ 함공[緘供]함답공사(緘答供辭). 함서(緘書)로 답하여 공술(供述)한 사연. 관원의 가벼운 비위에 대하여 사헌부(司憲府)가 함서로 추문(推問)하는 것을 함문(緘問)이라 하고, 함문당한 자가 함서로 답하는 것을 함답이라 하며, 함답에 진술한 내용을 함공이라 한다.
♣ 함관[函關]함곡관을 말하는데, 산동(山東)에서 진(秦)나라로 들어가는 관문(關門)이다.
♣ 함관자기[函關紫氣]노자(老子)가 서쪽으로 함곡관을 나갈 적에, 앞서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천문(天文)을 관측한 결과, 붉은 서기(瑞氣)가 관문 위로 떠 있음을 보고 노자가 그곳을 통과할 것을 미리 알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 六十三》
♣ 함관증해백마계[函關曾解白馬繫]진(秦) 나라 왕 자영(子嬰)을 말함. 유방(劉邦)이 패공(沛公) 시절에 다른 어느 제후들보다 먼저 진 나라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패상(覇上)에 이르자 진왕 자영이 흰 말 흰 수레를 타고 항복해왔는데, 이때 패공은 제장들 권유를 뿌리치고 자영의 결박을 풀어 주었음. 《史記 高祖本紀》
♣ 함구묘중인[緘口廟中人]주(周) 나라 후직(后稷)의 사당 앞에 금인(金人)이 있는데 그 입을 세 번 봉하고 등에다 “옛날에 말을 조심한 사람이다.”고 명(銘)을 한 고사에서 인용된 말이다. 《孔子家語 觀周 第十一》
♣ 함구무언[緘口無言]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이 없음
♣ 함궐[銜橛]말이 성을 내어 재갈이 벗겨지고 굴대가 부러져 수레가 전복되는 변고를 말한다.
♣ 함궐변[銜橛變]말이 달리다가 엎어지는 것을 보고 재갈[銜橛]의 변이라 한다.
♣ 함금[緘金]공자(孔子)가 후직(后稷)의 사당에 들어가니 금인(金人)이 있는데 그 입을 세 겹으로 봉했으며, 등 뒤에는 “옛날에 말을 조심하던 사람이다.”라고 새겨 있었다고 한다.
♣ 함노안[銜蘆雁]사람이 쳐 놓은 그물망이나 주살을 피하기 위하여 기러기가 본능적으로 입에다 갈대를 물고 다닌다는 고사가 있다. 《淮南子 修務訓》
♣ 함도천묘[含桃薦廟]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의하면, 중하(仲夏)의 달에는 앵도(櫻桃)를 사당에 천신(薦新)한다고 한다.
♣ 함도하시지[銜圖何時至]인군(仁君)의 출현을 고대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봉황은 원래 태평성대에나 나타나는 상서로운 새인데, 옛날 황제(皇帝)가 낙수(雒水) 위에서 노닐 때 봉황이 도서를 입에 물고 내려오자 황제가 절을 하고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春秋合誠圖》
♣ 함랑[咸郞]함씨(咸氏) 낭자(郞子).
♣ 함련[頷聯]율시(律詩)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 구를 말함.
♣ 함로[銜蘆]입에 긴 갈대를 문 기러기를 말한다. 기러기는 그물이나 주살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런 행동을 취한다고 한다. 시자(尸子) 권하(卷下)에 “기러기는 갈대를 물어 그물을 미리 피하고, 소는 진을 쳐서 호랑이를 물리친다.[雁銜蘆而捍網 牛結陣以却虎]”하였다.
♣ 함로이자방[銜蘆以自防]철저하게 자기 방어를 한다는 뜻으로 유향(劉向) 안부(雁賦)에 “순풍을 타고 날아 기력(氣力)을 돕고, 갈대를 물고 주살을 피한다.” 하였으며, 문선(文選) 좌사(左思) 촉도부(蜀都賦)의 주(註)에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서 주살을 방어하여 자신의 날개를 상하지 않게 한다.” 하였다.
♣ 함망[銜芒]음력 8월 중에 게의 뱃속에 벼의 까끄라기와 같은 것이 생기는데, 동쪽으로 가서 이를 해신(海神)에게 바친다고 하며, 이를 바치기 이전에는 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淵鑑類函 卷444 蟹》
♣ 함망해[銜芒蟹]음력 8월 중에 게의 뱃속에 벼의 까끄라기와 같은 것이 생기는데, 동쪽으로 가서 이를 해신(海神)에게 바친다고 하며, 이를 바치기 이전에는 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淵鑑類函 卷444 蟹》
♣ 함매[銜枚]급하게 행군(行軍)하여 남의 나라를 습격할 때에 소리나지 않게 말[馬]과 군사에게 입에 재갈을 물린다.
♣ 함매씨[銜枚氏]함매씨는 주(周) 나라 때 떠드는 것을 금지시키는 일을 관장했던 관직명이다. 《周禮 秋官》
♣ 함방원[含芳院]연산군이 의성위(宜城尉)의 집을 치우고 계평악(繼平樂)을 거처케 한 뒤 붙인 이름이다.
♣ 함벽[銜璧]항복하는 예로서,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여 손을 뒤로 결박하였으므로, 부득이 상대에게 바칠 예물인 옥벽을 입에 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左傳僖公 六年》
♣ 함부림[咸傅霖]여말 선초의 문신.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정평(定平). 고려 말에 병조 정랑(兵曹正郞) 등을 역임하고, 이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 3등에 들었으며, 이후에 또 동북면 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 등을 역임하였다. 《高麗史》
♣ 함분축원[含憤蓄怨]분한 마음(분노)을 품고 원한(원망)을 쌓음.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가짐
♣ 함사사영[含沙射影]모래를 머금어 그림자를 쏘다란 말로 암암리에 사람을 해친다는 뜻.
♣ 함삭[銜索]아가미에 새끼줄이 꿰어진 생선꾸러미란 뜻으로, 몸이 구속되어 있어 부모를 효도로써 봉양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 함삼[函三]함삼은 태극(太極)의 원기(元氣)가 아직 나누어지지 않아 천(天)ㆍ지(地)ㆍ인(人)이 하나로 혼합되어 있는 혼돈(混沌) 상태를 말한다. 《漢書 律曆志 注》
♣ 함상서[咸尙書]함상서는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낸 함유일(咸有一)을 가리킨다.
♣ 함서[緘書]고문진보(古文眞寶) 전집(前集) 악부 상(樂府上)에 “손이 먼 곳에서 와서 나에게 한 쌍의 잉어를 주길래, 아이를 불러 삶게 했더니 뱃속에 편지 한 폭이 들어 있었네.” 하였다.
♣ 함소[咸韶]요(堯)의 악(樂)인 함지(咸池)와 순(舜)의 악인 소무(韶舞).
♣ 함소리[含消梨]한 무제(漢武帝)의 동산에서 생산되었다는 배의 일종으로, 닷되들이 항아리만큼 커서 땅에 떨어지면 깨지기 때문에 주머니를 밑에 받치고 땄다고 한다. 곧 질좋은 배를 말한다.
♣ 함양[咸陽]진(秦) 나라 서울이었는데 항우(項羽)가 불을 놓아서 모두 태워버렸다.
♣ 함영[含景]초목(草木)의 꽃.
♣ 함영[咸英]황제(黃帝)가 만든 음악인 함지(咸池)와 제곡(帝嚳)이 만든 음악인 오영(五英)을 합칭한 말이다.
♣ 함우주주[銜羽周周]주주(周周)는 새의 이름인데, 이 새는 머리가 무겁기 때문에 하수(河水)에서 물을 마시려면 반드시 넘어지므로, 언제나 깃을 입에 물고 물을 마신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함유일[咸有一]함유일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냈는데, 그는 일찍이 의종(毅宗) 때 내시(內侍)에 들어가 교로도감(橋路都監)을 관장하면서 무당들을 교외로 추방하고, 음사(淫祠)를 불지르는 등 미신 타파에 힘썼다.
♣ 함이[含飴]후한(後漢)의 마 황후(馬皇后)가 만년에 이르기를 “나는 다만 엿 머금고 손자들이나 데리고 놀 뿐, 정사(政事)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엿을 머금는다는 것은 곧 치아가 없기 때문이다. 《後漢書 馬皇后紀》
♣ 함이[含飴]후한(後漢)의 마황후(馬皇后)가, “나는 엿이나 먹으면서 손자나 데리고 놀겠다. 더 이상 정사에는 간여하고 싶지 않다.” 한 데서 나온 말로, 늙은이의 만년의 안락한 생활을 뜻한다. 엿을 머금는다는 것은 곧 말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 함인시인[函人矢人]함인은 갑옷과 투구를 만드는 사람이고, 시인은 화살을 만드는 사람인데,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시인이 어찌 함인보다 인하지 않으랴마는, 시인은 오직 사람을 상하지 못할까 걱정하고, 함인은 오직 사람을 상할까 걱정한다[矢人豈不仁於函人哉 矢人唯恐不傷人 函人唯恐傷人].”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 함장[函丈]스승에 대한 경칭으로 스승이 제자 가르치는 자리를 말한다. 함(函)은 용납한다는 뜻이니 스승과 제자의 앉은자리의 거리가 한 발쯤 된다는 말이다.
♣ 함장[含章]주역(周易) 곤괘(坤卦)에 함장(含章)이란 말이 있는데, 아름다움[章]을 포함[含]한다는 뜻이다.
♣ 함장석[函丈席]지팡이를 용납하는 자리로, 후에 스승을 함장이라 일컬었으니 강석(講席)이라는 뜻과 같다.
♣ 함장전[含章殿]궁궐(宮闕)의 내전(內殿)을 말한다. 송 무제(宋武帝)의 딸 수양공주(壽陽公主)가 함장전 처마밑에 누워있는데 매화(梅花)가 공주의 이마 위에 떨어져 오출화(五出花)를 이루었다 한다.
♣ 함제[含睇]정을 품고 곁눈질하다.
♣ 함지[咸池]도당씨의 악가로서, 그 뜻은 대체로 요(堯) 임금의 덕이 지극히 커서 온전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음을 칭송한 것이다
♣ 함지[咸池]전설 속에 나오는 해가 지는 곳으로,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 “해가 양곡(暘谷)에서 나와 함지(咸池)에서 목욕한다.” 하였다.
♣ 함지[咸池]황제(黃帝)의 악(樂) 이름임. 주례(周禮)에, “함지(咸池)의 춤으로써 지신(地神)을 제사한다.” 하였음.
♣ 함지곡[咸池曲]요(堯) 임금의 악곡 이름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상대방의 시가를 높여 이른 말이다.
♣ 함지구소[咸池九韶]각각 중국 요(堯)와 순(舜)의 음악을 가리킨다.
♣ 함지욕일[咸池浴日]함지는 동방에 있다는 큰 못의 이름임. 회남자(淮南子) 천문(天文)의 “해가 양곡(暘谷)에서 나와 함지에서 목욕한다.”에서 나온 것이다.
♣ 함지출완유[咸池出阮隃]함지(咸池)는 황제(黃帝)의 풍악 이름인데, 황제가 영륜(伶倫)을 시켜 음률을 만들라고 하자 영륜이 대하(大夏)의 서쪽에서 완유산(阮隃山)북쪽으로 가 해계(嶰溪)골짝에서 대나무를 베어다가 십이율(十二律)을 만들었다고 함. 《呂氏春秋 古樂》
♣ 함척[含慼]슬픔을 머금다.
♣ 함체[陷滯]뜻을 펴지 못하고 소침하다.
♣ 함충[銜蟲]벌레를 물다.
♣ 함통[咸通]당나라 의종(懿宗)의 연호.
♣ 함포[含哺]함포고복(含哺鼓腹)의 준말로, 배불리 먹고 즐겁게 노는 것을 말한다.
♣ 함포고복[含哺鼓腹]실컷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림. 백성이 배불리 먹고 즐겁게 지내는 평화로운 모습
♣ 함함[嗛嗛]원한을 품은 채 참고 견디는 모양
♣ 함함[顑頷]굶주려 얼굴이 누렇게 뜬 모양.
♣ 함함[含含]보리가 잘된 모양
♣ 함함[檻檻]수레 굴러가는 소리
♣ 함함[唅唅]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모양
♣ 함향[含香]대언(代言)의 아칭(雅稱).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를 뜻한다. 옛날 상서랑(尙書郞)이 일을 아뢰거나 답변을 할 때 입 냄새를 없애려고 계설향(鷄舌香)을 입에 머금은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通典 職官 4》
♣ 함향기초[含香起草]임금의 언행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으로 좌우에서 시봉했다는 말이다. 옛날 임금에게 가까이 가서 아뢸 때는 입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계설향(鷄舌香)을 입에 물었다고 한다. 《通典 職官 4》
♣ 함향봉군[含香奉君]옛날에 상서랑(尙書郞)이 임금에게 주대(奏對)할 때에 구취(口臭)를 없애기 위하여 계설향(雞舌香)을 입에 머금었던 데서 온 말이다.
♣ 함향분궐하[函香分闕下]옛날 관찰사로 나가는 자에게 향 봉지를 나누어주었다.
♣ 함화록[㗸花鹿]양귀비가 꿈에 꽃을 문 사슴이 되어서 들에가 있었다고 한다.
♣ 함휼[銜恤]부모가 안 계시어 늘 마음속으로 근심 걱정하는 것. 시경(詩經) 소아(小雅) 요아(蓼莪)에 “나가면 근심 머금고 들어오면 의지할 곳 없다.[出則銜恤 入則靡至]"라 하였음.
♣ 함흥차사[咸興差使]함흥으로 보낸 사신(使臣). 심부름을 가서 아주 소식(消息)이 없거나 돌아오지 않음을 비유.
♣ 합[闔]오왕(吳王) 합려. 춘추시대의 오왕의 이름. 월왕 구천과 싸우다가 다쳐 죽음.
♣ 합고[合考]시관(試官)들이 모여 앉아, 뽑아 올린 시권(試卷)을 다시 고교(考較)하여 분류 해서 입격(入格)과 낙제를 결정하는 일.
♣ 합관요[篕寬饒]합관요는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인데 성격은 강직하였으나 인색하고 남을 해치기를 좋아하다가 남의 원망을 얻어 옥리(獄吏)에게 잡혀가서 죽었다. 그가 일찍이 평은후(平恩侯) 허백(許伯)에게 “나에게 술을 많이 권하지 마오. 나는 술에 미쳤으니 그대는 경계하라.” 했다. 《漢書 卷七十七》
♣ 합구초[合口椒]사헌부의 감찰(監察)을 이름. 당(唐) 나라 때에 법관의 직무를 산초(山椒)의 독(毒)이 있는 것에 비유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ㆍ이행사(裏行使)를 합구초(合口椒)라 하고, 감찰을 개구초라 호칭한 데서 온 말인데, 합구초는 가장 독이 많음을 뜻하고, 개구초는 독이 약간 덜함을 뜻한다. 《封氏聞見記 風憲》
♣ 합궁[合宮]문선(文選) 주(注)에 “황제(皇帝)의 명당(明堂)은 풀로 덮어서 이름을 합궁이라 하고 순(舜)의 명당은 풀로 덮어서 이름은 총장(總章)이라 하였다.” 하였음. 두보의 시에 “香飄合殿春風轉"의 구가 보임.
♣ 합근[合巹]바가지를 합한다는 것은 혼례 때에 신랑, 신부가 술잔을 세 번 교환하면서 끝잔은 한 개의 박을 둘로 나눈 잔으로 하는 것을 말하는데, 근례(巹禮)라고도 한다.
♣ 합덕[合德]한(漢) 나라 미녀(美女)의 이름이다. 조비연(趙飛燕)의 여동생으로 성제(成帝)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 살결이 매끄럽고 향 냄새가 났다고 한다. 《趙飛燕外傳》
♣ 합문[闔門]창합문, 하늘의 문. 《說文》
♣ 합벽연주차일신[合璧聯珠此一辰]최근 들어 많은 시편들을 서로 주고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 합사[溘死]갑자기 죽다
♣ 합승거[合乘車]벼슬할 만하다는 말. 대학(大學) 전십장(傳十章)에 “맹헌자(孟獻子)가 말하기를 ‘마승(馬乘)을 기르는 이는 닭과 돼지를 기르지 않는다.’ 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그 주에 “선비로서 처음 대부(大夫)가 된 자이다.” 하였음.
♣ 합영[合穎]옛날에 곡식 두 줄기의 이삭이 합해져서 큰 이삭이 된 상서로운 일이 있었다.
♣ 합옥[蓋屋]지붕을 덮음.
♣ 합잠[盍簪]뜻 맞는 이들이 서로들 달려와 회동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예괘(豫卦)에 “朋盍簪"이 있는데, 주석에 “합은 합친다는 뜻이고 잠은 빠르다는 뜻으로 모든 벗이 동시에 빨리 온다는 것이다.” 하였음.
♣ 합종연횡[合縱連橫]세로로 합하고 가로로 연결함.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행해졌던 외교 방식으로 합종책과 연횡책. 합종은 강한 자에 대항하여 약한 자들이 협력하는 것을 가리키고, 연횡은 강한 자와 약한 자가 결탁하는 것을 말함. 합종연횡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 최후로 남은 일곱 나라 가운데 진(秦)나라가 가장 강하였고 나머지는 6국은 약했는데, 서쪽의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남북으로 약한 6국[연(燕)⋅조(趙)⋅위(魏)⋅한(韓)⋅초(楚)⋅제(齊)]을 동맹시킨 소진(蘇秦)의 외교 전략을 합종이라 하고, 소진이 피살된 후 장의(張儀)가 이들 6국을 동서로 묶어 진나라를 섬기게 한 외교 전략을 연횡이라 한다.
♣ 합종책[合從策]전국시대, 강국인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6국 동맹책.
♣ 합좌[合坐]고려 때 도병마사(都兵馬使 ; 忠烈王 5년 이후에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개칭. )에서 문하(門下), 삼사(三司), 밀직(密直) 3부(部)가 모여서 국가의 중요한 사건을 처리하던 제도.
♣ 합좌소[合坐所]재상(宰相)들이 모여서 정무(政務)를 보는 자리.
♣ 합패여건도[合佩呂虔刀]정승이 되는 것을 말한다. 진서(晉書) 왕림전(王覽傳)에 “여건에게 패도(佩刀)가 있었는데, 장공(匠工)이 그 칼을 보고서 ‘반드시 삼공(三公)이 된 사람이라야 이런 칼을 찰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여건이 그 칼을 왕상(王祥)에게 주었다. 그후에 왕상이 죽을 무렵에 그 칼을 왕람(王覽)에게 주면서 ‘너의 후손들이 반드시 잘되어 이 칼을 차게 될 것이다.’ 했다.” 하였다.
♣ 합포[合浦]마산(馬山)의 옛 이름.
♣ 합포주[合浦珠]후한(後漢) 때 합포에서 구슬이 생산되었는데, 탐관오리가 많이 수령으로 오면서 잠시 구슬이 나오지 않다가, 맹상(孟嘗)이 태수로 부임하여 청렴한 정사를 행하자, 다시 구슬이 생산되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後漢書 循吏 孟嘗傳》
♣ 합포주환[合浦珠還]피폐해졌던 고을이 수령의 선정으로 인해 원상태로 회복된 것을 뜻함. 합포는 광동(廣東) 해강현(海康縣)에 있던 한대(漢代)의 군(郡) 이름임. 해변에 위치하여 곡식은 생산되지 않고 바다에서 진주를 수확하였는데, 역대의 군수들이 탐욕을 많이 부려 진주를 닥치는 대로 걷어가 진주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가 맹상(孟嘗)이 태수로 부임하여 수탈을 중지시키고 과거의 폐단을 개혁하자, 진주가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後漢書 卷七十六 孟嘗傳》
♣ 합포환주[合浦還珠]후한서(後漢書)에, “맹상이 합포 태수(合浦太守)가 되었는데, 그 고을은 곡물(穀物)이 생산되지 않고 바다에서 주보(珠寶)가 난다. 전자에 수령들이 이 구슬을 탐내어 사람을 시켜 마구 캐들이게 하니, 구슬이 점차 이웃 고을로 옮겨갔는데, 맹상이 도임하여서는 그 구슬이 다시 돌아왔다 함. 그래서 잃었던 물건이 다시 돌아온 것을 합포환주(合浦還珠)라고 함.
♣ 합합[溘溘]갑자기 들리는 물소리, 추운 모양
♣ 합합[嗑嗑]말이 많은 모양, 웃는 모양, 깔깔 웃는 소리
♣ 합합[呷呷]오리의 우는 소리, 여럿
♣ 합합[哈哈]웃는 소리, 농담, 또는 농담함, 남자
♣ 합환전[合歡殿]후비(后妃)가 거처하는 궁전을 말한다.
♣ 항간[行間]항오(行伍)의 사이라는 뜻이니, 즉 군중(軍中)이라는 말.
♣ 항갈[恒碣]항(恒)은 산서성(山西省) 영구현(靈邱縣)의 남쪽에 있는 항산(恒山)을 말하고, 갈(碣)은 직례성(直隷省) 동남쪽에 있는 갈석(碣石)을 말한다.
♣ 항기궁자미[恒飢窮子美]두보(杜甫). 그의 시에, “항상 굶은 어린 자식 안색이 처량하다.” [恒飢稚子色凄凉]한 것이 있다.
♣ 항남[巷南]항남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인 완적(阮籍)과 그 조카 완함(阮咸)이 살던 가난한 남쪽 동네로, 숙질간의 관계를 비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世說新語 任誕》
♣ 항두득고서[航頭得古書]동진(東晉) 때 매색(梅賾)이 큰 뱃머리[大航頭]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얻었다 한다.
♣ 항룡유회[亢龍有悔]항룡(亢龍)은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 그 이상 더 올라갈 수 없어 이젠 내려갈 도리밖에 없다는 의미. 부귀가 극에 달하면 패망할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로 쓰인다.
♣ 항맥오의백성가[巷陌烏衣百姓家]세대가 변천되어 천하에 임금이 바뀐 것을 비유한 말이다. 오의(烏衣)는 제비의 별칭으로, 옛날 왕씨(王氏)ㆍ사씨(謝氏) 등 명가(名家)에 깃들였던 제비가 지금은 일반 사람의 집에 옮겨 날아든다는 뜻인데, 유우석(劉禹錫)의 오의항시(烏衣巷詩)에 “옛날 왕사 집 당 앞의 제비가 일반 백성 집에 날아드누나[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 한 데서 온 말이다.
♣ 항백[巷伯]늙은 내시(內侍)를 이르는 말인데, 주(周) 나라의 신하 맹자(孟子)가 참소를 입어 내시로 좌천되자 항백이란 시를 노래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낮은 벼슬을 감수하였음을 비유한 것이다. 《詩經 小雅 巷伯》
♣ 항북유[巷北遊]같은 동네에서 함께 살면서 즐겁게 노닐던 때가 그립다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핍측행(偪側行)’ 시의 “궁박하기는 어쩜 또 그리도 궁박한고, 나는 골목 남쪽 그대는 골목 북쪽. 유감일세 같은 동네 이웃 살면서, 열흘에 한 번도 얼굴 대하지 못하다니.[偪側何偪側 我居巷南子巷北 可恨鄰里間 十日一不見顔色]”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杜少陵詩集 卷6》
♣ 항사[項斯]당 나라 사람. 그가 자신이 지은 시권(詩卷)을 가지고 양경지(楊敬之)를 찾아본 뒤부터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경지가 그에게 준 시에 “몇 차례 시를 보니 시마다 좋았지만 그 표격(標格)은 시보다 훨씬 나았어라. 나는 한평생 남의 선(善) 숨길 줄 몰라 만나는 사람마다 항사를 말하곤 하네.” 하였다.
♣ 항사[項斯]항사는 당(唐) 나라 시인인데, 양경지(楊敬之)가 그를 높이 사서 시를 짓기를, “평생에 남의 장점을 감출 줄을 몰라서, 가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면 항사 이야기를 한다네.” 하였다. 《南部新書》
♣ 항사[恒沙]항하(恒河)의 모래. 무수히 많다는 뜻이다. 항하(恒河)는 인도의 갠지스강을 말한다. 항하의 두 언덕이 다 모래이므로 부처가 그것을 취하여 최다(最多)의 수로 비유하였음. 금강경(金剛經)에 “諸恒河所有沙數 寧不多乎"라 하였음.
♣ 항산[恒産]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활 근거인 일정한 생업. 일정한 생활을 할 만한 재산.
♣ 항산사[恒山蛇]항산사는 항산에 있는 솔연(率然)이라는 큰 뱀을 말한다. 항산은 중국 하북성(河北省) 곡양현(曲陽縣)에 있는데 상산(常山)이라고도 한다. 《孫子兵法》 구지(九地)에 “상산에 솔연이라는 뱀이 있는데 머리를 때리면 꼬리가 덤벼들고 꼬리를 때리면 머리가 덤벼들며 한 허리를 때리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덤벼든다.” 하였다.
♣ 항산항심[恒産恒心]재산이 있어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는 뜻의 고사성어.
♣ 항성천[恒星天]항성이 달려 있는 하늘을 이름. 항성이란 곧 위치가 변하지 않는 별을 가리킨 것으로, 태양(太陽)과 이십팔수(二十八宿)가 바로 그것이다.
♣ 항심[恒心]언제나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떳떳한 마음(또는 착한 마음)
♣ 항아[姮娥]항아는 본시 예(羿)의 아내인데 예(羿)가 구해둔 불사약(不死藥)을 훔쳐 먹고 월궁에 도망가서 혼자 살았다.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예(羿)가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불사약을 얻어 왔는데, 이것을 항아(姮娥)가 도둑질해 먹고 신선이 되어 달 속에 들어가 월정(月精)이 되었다.” 하였다.
♣ 항아계수[姮娥桂樹]항아는 달을 가리킨 것으로 달에는 계수나무가 있으며 흰 토끼가 옥도끼로 약을 찧어 인간에 보낸다는 전설에서 나온 것이다.
♣ 항아분월[嫦娥奔月]예가 서왕모에게서 불사약을 부탁해 가져왔는데 예의 아내 항아(姮娥)가 이를 훔쳐먹고 월궁으로 날아가 버렸다. 항아는 약을 먹기 전 미리 유황(有黃)이라는 무당에게 그녀를 대신하여 점을 치게 했다 한다. 유황이 점을 친 후 항아에게 말하길, “점괘 결과가 매우 길하며, 그대는 홀로 서쪽으로 가게 될 터인데 두려워할 것이 없으며, 이후로 앞길이 밝으리라.”고 하였다. 항아는 무당의 말을 듣고 망설일 것도 없이 단호하게 불사약을 삼키고 월궁으로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허나 그녀가 월궁에 도착하자마자 뜻밖에도 두꺼비로 변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후세에 장기적인 유전 과정 중에서 약을 훔치는 내용은 약화되었고, 두꺼비로 변한 대목은 차츰 사라져서 항아는 결국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신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 항아지고서[姮娥之孤棲]옛날에 후예(后羿)가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두었더니, 그의 아내 항아(姮娥)가 그것을 훔쳐 먹고 월궁으로 도망가서 외롭게 산다는 신화(神話)가 있다.
♣ 항액[亢軛]수레의 가로목을 높이다. 나란히 달리다.
♣ 항왕[降王]항왕은 곧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을 이르는데, 그의 재위시(在位時)에는 특히 군웅(郡雄)이 할거함으로써 국력이 쇠퇴해짐과 동시에 후백제의 침공을 자주 받게 되자, 민심이 이미 기울어진 고려 태조(高麗太祖)에게 항복을 했던 것을 이른 말이다.
♣ 항왕목중동[項王目重瞳]항왕은 초왕(楚王) 항우(項羽)로 이름은 적(籍). 중동(重瞳)은 한 눈에 두 개의 눈동자가 있는 것으로 훌륭한 사람의 상(相)이라 한다. 사기(史記) 항우기찬(項羽紀贊)에 “옛날 순(舜) 임금이 중동이란 말을 들었는데, 항우도 중동이었다 한다.” 하였다.
♣ 항왕무뢰목중동[項王無賴目重瞳]항우(項羽)의 눈에 동자(瞳子)가 둘씩이라 한다. 항우가 눈에 동자가 둘씩이나 가졌으면서 한신과 같은 훌륭한 장수를 몰라보고 버려서, 자기의 적(敵)인 한왕(漢王)에게 가도록 하였다는 말이다.
♣ 항요[恒曜]항성(恒星)을 말함.
♣ 항장검무[項莊劒舞]홍문(鴻門) 잔치에서 항장이 패공(沛公)을 죽이고자 연석 앞에서 칼춤을 추었다.
♣ 항저외가성[降渚畏歌聲]옛날 요(堯)의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은 남편인 순(舜) 임금이 창오산(蒼梧山)에서 세상을 떠나자, 찾아 가다가 소상강(瀟湘江)을 못 건너고는 울면서 이 물에 빠져 죽으니, 이가 곧 상군(湘君)이다. 전국 시대 초(楚)의 충신 굴원(屈原)은 임금이 자기 말을 따르지 않자, 자신도 이 물에 빠져 죽으려 하여 초사(楚辭) 구가(九歌)를 지었는데, 이 중 상군(湘君)에 “황제의 딸이 북쪽 물가에 빠지니 아름다운 그 모습 아련히 나를 슬프게 하네.[帝子降于此渚 目眇眇兮愁予]" 한 말이 있다. 여기에서 말한 묘묘(眇眇)는 아름다움의 형용사이다.
♣ 항적[抗迹]높은 자취.
♣ 항주소일[杭州消日]당 선종(唐宣宗) 때 영호도(令狐綯)가 이원(李遠)을 항주 자사(杭州刺史)로 천거하자, 선종이 이르기를, “이원의 시에 ‘청산의 경치는 천 잔의 술을 싫어하지 않고, 백 일을 오직 한 판의 바둑으로 보내노라.[靑山不厭千杯酒 百日惟消一局棋]’ 하였으니, 이런 생각으로 어떻게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결국 영호도의 권유에 의해 그를 항주 자사로 제수하였는데, 과연 이원이 정사는 제쳐 두고 술과 바둑을 일삼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唐詩紀事 卷五十六》
♣ 항풍항우[恒風恒雨]노상 부는 바람과 노상 내리는 비.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보임.
♣ 항하[恒河]인도 갠지스 강의 음역(音譯)이다.
♣ 항하사[恒河沙]무수히 많다는 뜻이다. 항하는 인도의 갠지스강을 말한다.
♣ 항해[沆瀣]깊은 밤중에 내리는 이슬 기운인데, 도가(道家)에서는 이것을 수명(修命)의 약으로 들이마신다. 열선전(列仙傳) 에 “봄철에는 조하(朝霞)를, 여름철에는 항해를 복식(服食)한다.” 하였다.
♣ 항해금경[沆瀣金莖]항해는 한밤중에 생겨나는 감로(甘露)로, 선인들이 마시는 것이며, 금경은 높은 하늘의 이슬을 받는 승로반(承露盤)이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신선술에 미혹되어 감로를 받아 마셔 수명을 연장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건장궁(建章宮)에 신명대(神明臺)를 세우고 동(銅)으로 선인장(仙人掌) 모양을 만들어 세워서 동반(銅盤)을 떠받치고서 감로를 받게 하였다. 《漢書 卷25 郊祀志上》
♣ 항해부금경[沆瀣浮金莖]항해는 한밤중에 생겨나는 감로(甘露)로, 선인들이 마시는 것이며, 금경(金莖)은 높은 하늘의 이슬을 받는 승로반(承露盤)이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신선술에 미혹되어 감로를 받아 마셔 수명을 연장시키고자 하여, 건장궁(建章宮)에다가 신명대(神明臺)를 세우고 동으로 선인장(仙人掌) 모양을 만들어 세워서 동반(銅盤)을 떠받치고서 감로를 받게 하였다. 《漢書 卷25上 郊祀志》
♣ 항해정양[沆瀣正陽]항해(沆瀣)를 마시고 정양(正陽)으로 입을 씻는다는 구절이 있다. 천지의 정액(精液)이 새벽에는 항해가 되고, 낮에는 정양(正陽)이 된다는 것이다. 《楚辭》
♣ 항행[抗行]고결한 품행. 고결한 언행.
♣ 해가[薤歌]만가(挽歌). 상여(喪輿)가 나갈 때에 부르는 노래임. 해(薤)는 부추 종류인데 사람의 목숨이 부추 잎에 맺힌 이슬처럼 쉽게 소멸된다는 뜻에서 나온 뜻임.
♣ 해갑당[蟹甲鐺]게딱지솥. 작은 솥을 시속에서는 게딱지(蟹甲)라고 함.
♣ 해개지배량원근[海豈持盃量遠近]즉 큰 것을 볼 줄 모른다는 말이다. 반고(班固) 유통부(幽通賦)에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리고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본다.[旣傾蠡而酌海 遂側管而窺天]" 라고 하였다.
♣ 해객사[海客査]해변(海邊)에 8월이 되면 어디선지 떼배가 왔다가 간다 한다.
♣ 해객조[解客嘲]한(漢) 나라 때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초할 적에 어떤 객이 양웅에게 높은 벼슬은 하지 못하고 태현경(太玄經)만 초하고 있음을 조롱한 데 대하여 양웅이 이를 해명한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八十七》
♣ 해거도위[海居都尉]해거도위는 정조(正祖)의 딸 숙선옹주(叔善翁主)와 결혼하여 영명위(永明尉)에 봉해진 홍현주(洪顯周)를 이르는데, 해거는 바로 그의 호임. 홍현주는 홍석주(洪奭周)의 아우로서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 해곡[嶰谷]곤륜산(崑崙山) 북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으로, 옛날에 황제(黃帝)가 영륜(伶倫)을 시켜서 이곳에서 자라는 대나무를 잘라 황종(黃鍾)의 관(管)을 만들게 하였다고 한다. 《風俗通 聲音序》
♣ 해곡령[嶰谷伶]해곡(嶰谷)의 영윤(伶倫)이라는 말로, 음률(音律)에 능통한 사람, 혹은 문예에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옛날 황제(黃帝)가 영윤에게 성률(聲律)을 제정하도록 명하자, 그가 해계지곡(嶰谿之谷)의 대나무를 가지고 12율려(律呂)를 만들었다고 한다. 《呂氏春秋 仲夏紀 古樂》
♣ 해공[海空]강희맹(姜希孟)의 증김태수시(贈金太守詩)에 의하면 “처음 두류록을 보고 나서는 유람할 생각이 다시 이어졌는데 다시 해공사를 만나서 들어보니 행할 뜻이 날로 더욱 깊어지누나[初見頭流錄 勝遊思更續 復遇海空師 行意日彌篤]”하였다. 《私淑齋集 卷三》
♣ 해구맹[海鷗盟]전원(田園)으로 돌아가 살리라는 백구(白鷗)의 맹세를 말한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갈매기와 몹시 친하게 지냈는데, 갈매기를 잡을 마음을 가지고 바닷가로 나가니 갈매기들이 위에서 날면서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후대에는 마음을 툭 터놓고 상대를 대하거나, 세상을 피하여 은둔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列子 黃帝》
♣ 해국[海國]해국은 조선을 의미하는 말이다.
♣ 해궁[海宮]바다 속에 있다고 하는 용왕(龍王)의 궁전(宮殿)인데, 여기서는 부처님이 돌아간 지 7백 년 후에 남천축(南天竺)에서 태어난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용궁에 들어가서 철탑(鐵塔) 속에 감추어진 화엄경(華嚴經)을 가지고 나왔다는 전설을 말한 것이다.
♣ 해금지천풍[海禽知天風]장자(莊子) 지락(至樂)에 “바다 새가 날아와 노(魯) 나라 도성 교외에 이르자, 임금이 환대를 극진히 하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참고로 이태백집(李太白集) 권8 증임성노주부잠(贈任城盧主簿潛)에 “海鳥知天風 竄身魯東門”이라는 시구가 나온다.
♣ 해기[駭機]돌연히 촉발한 노기(弩機)라는 뜻으로 갑자기 발생한 화난(禍難)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後漢書 卷七十一 皇甫嵩列傳》
♣ 해기[薤鄿]해점은 해엽점(薤葉簟)의 준말로, 마치 부추 잎을 펴놓은 것처럼 보이는 대자리를 이름. 기주(鄿州)는 예로부터 죽산물(竹産物)의 명소(名所)로 알려졌다.
♣ 해낭[奚囊]해노(奚奴), 즉 어린 종자(從者)가 가지고 다니는 시고(詩稿)를 넣는 주머니를 말한다. 당(唐) 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이하소전(李賀小傳)에, “이장길(李長吉)이 매일 아침 해가 뜨면 제공(諸公)들과 노닐면서 항상 어린 종자를 데리고 나귀를 타고 다녔는데, 어린 종자의 등에다가 오래 묵은 비단 주머니를 지고 따라다니게 하였다. 그리고는 우연히 좋은 시구를 얻으면 즉시 시구를 써서 그 주머니에 넣었다.” 하였다.
♣ 해낭습추경[奚囊拾秋景]행음(行吟)하면서 얻은 시초(詩草)를 주머니에 넣는다는 뜻이다. 당(唐) 나라 때 이하(李賀)가 명승지를 구경하면서 얻은 시를 해노(奚奴)가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에 넣은 고사에서 온 말이다. 《新唐書 卷二百三李賀傳》
♣ 해노[奚奴]동복(童僕). 해노는 수행하는 어린 종자(從者).
♣ 해노습득[奚奴拾得]당(唐) 나라 때 이하(李賀)가 명승지를 구경하며 지은 시를 해노(奚奴; 종)가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에 담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해당부인[海棠夫人]두공부(杜工部) 두보(杜甫)의 모친을 가리키는 말이다. 두보는 모친이 해당부인(海棠夫人)이기 때문에 해당화에 대해서 하나의 시편도 남겨 놓지 않고 있다.
♣ 해당시[海棠詩]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권20에 수록되어 있는 ‘나의 우거인 정혜원 동쪽에는 온갖 꽃들이 산에 가득한데, 해당화 한 그루가 서 있건마는 그 고장 사람들은 귀한 줄을 모른다.[寓居定惠院之東 雜花滿山 有海棠一株 土人不知貴也]’라는 시를 말하는데, 동파의 시 중에서도 절창(絶唱)으로 꼽히는 이 시를 줄여 보통 ‘정혜원 해당시(定惠院海棠詩)’라고 부른다. 정혜원은 호북성(湖北省) 황주(黃州)에 있는 절 이름으로, 동파가 원풍(元豐) 3년(1080)에 유배된 뒤 이곳에 임시로 거처하였는데, 자기 고향인 파촉(巴蜀) 땅에 많이 피어 있는 해당화를 보고는, 자기나 해당화나 잘못되어 이곳 황주에 와 있다는 비감을 토로하고 있다.
♣ 해대[海岱]해(海)는 발해(渤海)를 가리키고, 대(岱)는 태산(泰山)으로, 그 사이의 산동 지방을 해대라 칭한다.
♣ 해동[海童]전설 속에 나오는 바다 속에 산다고 하는 신동(神童)의 이름이다.
♣ 해라[海螺]악기(樂器)의 한 가지인데, 큰 조개 껍데기로 만들어 피리처럼 분다고 한다.
♣ 해란[陔蘭]효성이 지극한 남의 아들에 대한 경칭이다. 문선(文選)에 나오는 속석(束晳)의 보망시(補亡詩) 가운데 “循彼南陔 言采其蘭”이라는 구절에서 연유한 것이다.
♣ 해랑[奚囊]당나라 시인 이장길(李張吉)은 놀러 나갈 때에 반드시 아이종[小奚]에게 주머니를 들고 따르게 하여, 시를 짓는 대로 그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서, 저녁에 돌아오면 주머니 속에 시가 가득 차 있었다. 당서(唐書) 이하전(李賀傳)에 “하(賀)는 매일 문밖을 나가면서 아이종을 시켜 등에 옛 금낭(錦囊)을 짊어지게 하고 보이는 것에 따라 글귀를 만들어서 그 금낭 속에 넣었다.” 하였다.
♣ 해로[薤露]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만가(挽歌)를 말한다. 고금주(古今注) 중권(中卷)에, “해로는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소리이다. 전횡(田橫)의 문인(門人)에게서 나왔는데, 전횡이 자살하자 문인들이 슬퍼하여 그를 위해 비가(悲歌)를 지은 것으로, 사람의 목숨이 풀잎의 이슬방울같이 쉽게 사라지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하였다.
♣ 해로가[薤露歌]초상 때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로서 후세에는 만장을 말함. 한(漢) 나라 초기 제왕(齊王) 전횡(田橫)이 나라를 잃고 자살하자, 그의 문도(門徒)들이 슬퍼하여 인생은 마치 풀에 맺힌 이슬과 같다고 노래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 가사에 “부추 위에 맺힌 이슬 어이 쉽게 마르나. 말라도 내일 아침 다시 젖는데. 인생은 한 번 가면 언제나 돌아오나.” 하였음. 해로와 호리(蒿里) 2장이 있다. 《古今注 音樂》
♣ 해로동혈[偕老同穴]부부가 함께 늙고, 죽어서는 한 곳에 묻힘. 곧 생사를 같이하는 부부의 사랑의 맹세를 뜻한다.
♣ 해로사[薤露詞]나물 잎에 맺힌 이슬과 같다는 뜻으로 만사(挽詞)를 의미함.
♣ 해로편[薤露篇]만시(挽詩)를 말한다. 옛날 만가(挽歌)에 해로(薤露)와 호리(蒿里)의 2장(章)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搜神記 16》
♣ 해마[害馬]말[馬]의 천성(天性)을 해친다는 뜻으로, 즉 본성(本性)을 해치는 것을 말한다. 《莊子 徐無鬼》
♣ 해만만[海漫漫]바다가 망망하다는 뜻인데, 바다 가운데 삼신산(三神山)을 찾아 신선을 구함을 풍자한 시의 제목. 풍유(諷諭)에 보임.
♣ 해망은조[解網殷祖]탕 임금이 들판에 나가다가, 사냥꾼이 그물을 사방으로 쳐 놓고 “모든 새짐승은 다 내 그물에 걸리라.”고 비는 것을 보았다. 이에 탕 임금은 너무 심하다 여겨서 세 군데를 터 놓고는 “피하기 싫은 새짐승만 이 그물에 걸리라.”고 빌므로 제후(諸侯)들이 듣고 그의 성덕(聖德)을 찬양하였다. 《史記 殷本記》
♣ 해망축[解網祝]탕(湯) 임금이 밖에 나갔다가 어떤 사람이 사면(四面)에 그물을 쳐 놓고 “상하 사방에 있는 짐승이 다 내 그물로 들어오라.”고 비는 것을 보고는, 탕 임금이 삼면의 그물을 걷어 버리고 일면만 남겨 두고서 그 사람에게 다시 “왼쪽으로 가려는 놈은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려는 놈은 오른쪽으로 가고 위로 올라가려는 놈은 올라가고 아래로 내려가려는 놈은 내려가라. 나는 나의 명을 범하는 놈만 취하리라.”고 빌도록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殷紀》
♣ 해부[海賦]목현허(木玄虛)의 해부(海賦)가 있다.
♣ 해분[解紛]해분은 분쟁을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 해사[薤詞]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만가(輓歌)를 말한다. 고금주(古今注) 중권(中卷)에, “해로(薤露)는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소리이다. 전횡(田橫)이 자살하자 문인들이 슬퍼하여 지은 비가(悲歌)로, 사람의 목숨이 풀잎의 이슬방울같이 쉽게 사라지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하였다.
♣ 해사수정격년회[海槎雖定隔年回]바닷가에 해마다 팔월(八月)이면 어디서인지 떼배[槎]가 왔다가 간다 한다.
♣ 해산도솔[海山兜率]어느 사람의 꿈에 바다 속의 산에 갔더니 정결한 집이 하나 있어 낙천원(樂天院)이라는 말을 듣고 백락천이 시를 짓기를, “바다 속의 산은 나의 돌아갈 곳이 아니요, 돌아간다면 응당 도솔천(兜率天)으로 돌아가리라.” 하였다. 그것은 백락천이 불교를 독실히 믿으므로 불경에 말한 대로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있는 도솔천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이다.
♣ 해산증대낙천래[海山曾待樂天來]당 나라 때에 어느 사람이 꿈에 바다 가운데 산에 들어갔더니, 신선이 사는 곳에 낙천원(樂天院)이란 집을 비어 두고, “장차 중국의 백락천(白樂天)이 죽어서 이 집에 올 것이다.” 하였다. 백락천이 그 말을 듣고 시를 짓기를, “나는 불법을 배우고 신선을 배우지 아니하니 아마도 그대의 이 말은 헛 전할 것일세. 해산이 나의 돌아갈 곳이 아니라 간다면 도솔천으로 갈 것일세.[吾學空門不學仙 悲君此語是虛傳 海山不足吾歸處 歸則應歸兜率天]”하였다.
♣ 해삼고[海三枯]많은 세월이 흐르는 것을 뜻한다. 한(漢) 나라 때의 신선(神仙) 왕원(王遠)이 마고(麻姑)를 초청하니, 마고가 봉래산(蓬萊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찾아보겠다고 하였다. 그 뒤에 마고가 와서는 스스로 말하기를, “그대를 만난 이래로 이미 동해가 세 번 뽕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지난번에 봉래산에 가 보니 지난번에 만났을 적보다 물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니 어찌 다시 육지가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神仙傳 麻姑》
♣ 해상도[海上桃]반도(蟠桃)를 말한다. 반도는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들이 먹는 복숭아로, 삼천 년마다 한 번 열매를 맺으며, 이 복숭아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창해(滄海) 속에 도삭산(度朔山)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큰 복숭아 나무가 있다.” 하였다.
♣ 해상옹[海上翁]한(漢) 나라 때 흉노(匈奴)에 사신갔다가 흉노에 의해 북해상(北海上)에 억류된 지 19년 만에야 풀려 돌아왔던 충신 소무(蘇武)를 가리킨다.
♣ 해상유의[海上留衣]헤어지면서 정표를 남긴다는 뜻이다. 한유(韓愈)가 조주(潮州)에 있을 적에 중 태전(太顚)과 친하게 지냈는데, 원주(袁州)로 떠나오면서 옷을 벗어 남겨 두어 이별의 정을 표하였다. 《唐宋八家文 卷3 與孟尙書書》
♣ 해서[楷書]이는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예서를 더욱 쉽게 규율화시킨 것이다. 해서(楷書)의 ‘楷’자는 ‘본보기’라는 뜻이 있는데, ‘사람들이 본받아서 쓸 만한 표준적인 글자체’라는 의미에서 해서(楷書)라는 명칭이 생긴 것 같다. 이를 정서(正書)라고도 하였다. 한나라 이후 점차 애호되어 6조시대를 거치면서 정착이 되어갔다. 이로써 한자는 점과 획으로 구성된, 완전히 추상적인 자형으로 바뀌었고 회화적인 특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대표적인 서체로 장맹룡비와 구성궁체, 안근례비 등을 들 수 있다.
♣ 해성[諧聲]육서(六書)의 하나. 형성(形聲)이라고도 함. 두 글자를 합하여 한 자를 이루어 한쪽은 뜻을, 한쪽은 의미를 나타내는 일. 예를 들면, 강(江)ㆍ하(河)는 다 ‘물수’ 변을 따랐으니, 물은 뜻, 공(工)ㆍ가(可)는 그 음임. 주례(周禮) 주(注)에는 이것을 해성(諧聲)이라 하였음.
♣ 해수[亥首]옛날에 해(亥)의 고자(古字)를 파자(破字)하여 “이(二)의 머리에 육(六)의 몸이다.[二首六身]" 한 설(說)이 있다.
♣ 해수[薤水]후한(後漢) 방삼(龐參)이 한양 태수(漢陽太守)가 되었을 때, 고사(高士)인 임당(任棠)이 말없이 염교[薤] 한 뿌리와 물[水] 한 잔을 내놓았는데, 이것을 보고는 “염교 뿌리를 뽑듯 위세를 부리는 토호(土豪)를 제거하고, 물처럼 나 자신을 맑게 하라는 뜻이다.” 하고 깨달아 선정을 베풀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龐參列傳》
♣ 해수불파[海水不波]주(周)나라 성왕(成王) 때에 월상씨(越裳氏; 국명)가 먼 곳에서 와서 흰 꿩을 바치며, “하늘에 모진 바람과 궂은 비가 없고, 바다에 험한 파도가 없은 지가 3년이나 되니 아마도 중국에 성인(聖人)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 해수하여신[亥首下如身]해(亥) 자 는 전(篆)으로는 ▣모양으로 썼는데, 옛날 산가(算家)의 기호로 그 글자의 머리를 세로 세운 ‘▣’는 이만(二萬)을 뜻하고, ‘▣’는 육천(六千), ‘▣’는 육백 육십(六百六十)을 뜻하였다. 따라서 해(亥) 자의 머리와 아래 몸통[身]을 다 합치면 2만 6천 6백 6십이 된다.
♣ 해숭도위[海嵩都尉]선조(宣祖)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한 윤신지(尹新之)의 봉호(封號)이다.
♣ 해시[海市]해시는 바람이 없는 조용한 날에 대기(大氣)의 밀도(密度)와 광선(光線)의 반사(反射)와의 관계로 인하여 멀리 해변(海邊)이나 사막(沙漠)의 상공에 성곽(城郭)이나 누대(樓臺) 등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신기루(蜃氣樓).
♣ 해시지와[亥豕之訛]서적을 베끼거나 책을 간행할 때 비슷한 글자는 잘못 쓰기 쉽다는 뜻의 고사성어.
♣ 해신독각[獬神獨角]해(獬)라는 짐승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요 상상의 동물인데, 사람의 마음속을 잘 알아본다고 한다. 예전부터 우리 나라 광화문 앞에 있는 해태라는 것이 그것이니, 그 궁문으로 드나드는 백관들을 충신인지 간신인지를 알아본다는 의미로 그렇게 궁문 앞에 세운 것이다.
♣ 해심려불측[海深蠡不測]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릴 수 없듯이, 천박한 식견으로 깊은 경지를 헤아릴 수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 해아삼[孩兒蔘]사람의 형체와 비슷하게 생긴 인삼을 말하는데, 이 삼이 특효가 있다고 한다.
♣ 해악[海嶽]사해(四海)와 오악(五嶽)을 말한다.
♣ 해안[蟹眼]게 눈알로, 물이 막 끓기 시작할 때의 작은 거품을 형용한 것이다.
♣ 해안[海眼]연못의 물이 빠져나가도록 만든 유출구(流出口)를 말한다. 연못을 만들 때 바다나 강으로 물이 빠져나가도록 땅 속으로 구멍을 뚫기 때문에 이렇게 이르는 것이다.
♣ 해안[海眼]연적(硯滴)의 모양을 이름. 중국 복주(福州)의 설봉(雪峯)에 조수(潮水)에 따라 나오는 샘이 있어, 조수가 오를 때면 물이 졸졸 나오고 조수가 물러가면 그치므로 이를 해안(海眼)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연적의 물방울 나오는 모양을 비유한 것이다.
♣ 해안[海眼]천안(泉眼)으로, 샘물이 빠져 나가는 구멍을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샘물이 땅속을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믿었으므로 이렇게 칭하였다.
♣ 해안사[海安寺]개성(開城) 서쪽 24리 봉명산(鳳鳴山)에 있었음. 《輿地勝覽》
♣ 해안어린[蟹眼魚鱗]게의 눈과 고기 비늘은 곧 차를 끓일 때에 물이 부그르르 끓어오르는 모양을 형용한 말이다.
♣ 해안하청[海晏河淸]천하의 태평을 말함.
♣ 해약[海若]북해 약(北海若)의 준말로, 약(若)은 바다 귀신의 이름이다. 널리 해신(海神)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 해양[海陽]광주(光州)의 고호임.
♣ 해양[海陽]해주(海州)의 옛 이름이다.
♣ 해어지화[解語之花]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미인을 이르는 말.
♣ 해어화[解語花]말을 이해하는 꽃. 즉, 미인을 일컫는 말. 당(唐)나라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에게서 유래한 말.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 “당 명황(唐明皇)이 비자(妃子)와 함께 태액지(太液池)의 천엽연(千葉蓮)을 구경하면서 비자를 가리켜 해어화라 하였다.” 하였다.
♣ 해엽[薤葉]부추잎을 죽 늘어놓은 것처럼 생긴 대자리를 가리킨다.
♣ 해엽점[薤葉簟]해엽점은 마치 부추 잎을 펴놓은 것처럼 보이는 대자리를 이름. 백거이(白居易)의 기이기주시(寄李鄿州詩)에 “낙매화곡의 젓대 소리에 봄은 다 가고 해엽의 자리 썰렁한 데서 가을인 줄 알겠네[笛愁春盡梅花裏 簟冷秋生薤葉中]”하였고, 또 기기주점여원구시(寄鄿州簟與元九詩)에는 “매끄럽기는 부추잎 펴논 것 같고 써늘하기는 와룡의 비늘 같구나[滑如鋪薤葉 冷似臥龍鱗]”하였다. 그런데 기주(鄿州)는 예로부터 죽산물(竹産物)의 명소(名所)로 알려졌다. 《白樂天集 卷十六, 續集 卷十五》
♣ 해오[蟹螯]게의 집게발 속에 든 속살로 진미의 한 가지. 진서(晉書) 필탁전(畢卓傳)에 “바른손에 술잔을, 왼손에 해오를 들고 주지(酒池) 속에 헤엄치면 한평생 만족하다.” 하였다.
♣ 해옥신주[海屋新籌]전설에, 세 사람의 노인이 함께 있는 자리에 어떤 자가 그 나이를 묻자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내 나이는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소년시절에 반고씨(盤古氏)와 지면이 있을 뿐이다.” 하고, 한 사람은 말하기를 “바다가 뽕밭으로 변하면 그때마다 산가지 한 개씩 놓아두었는데 이제까지 놓아둔 산가지가 이미 열 칸 집에 가득 쌓였다.” 하고, 한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먹은 반도복숭아는 그 씨를 곤륜산 밑에 버렸는데 그 높이가 이미 곤륜산과 같다.”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로, 장수하기를 축원하는 뜻이다. 《東坡志林 卷二 三老語》
♣ 해옥첨주[海屋添籌]옛날 세 노인이 함께 만난 자리에 어떤 자가 나이를 묻자, 모두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고 대답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말하기를 “바다가 뽕밭으로 변하면 그때마다 산가지 한 개를 놓았는데 지금까지 내가 하나씩 놓은 산가지가 열칸 집에 이미 가득찼다.” 하였다 한다. 《東坡志林 卷二》
♣ 해옥첨주[海屋添籌]장수(長壽)를 축하하는 말. 해옥은 선인(仙人)이 산다는 해상 선옥(海上仙屋)을 이르는데, 선학(仙鶴)이 해마다 산가지 하나씩을 물어온다는 전설에서 온 말이다.
♣ 해온풍[解慍風]남풍(南風)을 말한다.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남풍시(南風詩)를 지었는데, 그 시에 “남풍이 솔솔 붊이여, 우리 백성들의 울분을 풀 수 있겠도다. 남풍이 때맞추어 붊이여, 우리 백성들의 재산을 늘릴 수 있겠도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하였다. 《孔子家語 辨樂解》
♣ 해옹호구[海翁好鷗]바다 노인이 갈매기를 좋아한다는 말로, 사람에게 야심(野心)이 있으면 새도 그것을 알고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뜻의 고사성어.
♣ 해우[解牛]소를 잡다.
♣ 해우[薤盂]염교와 물주발을 가리킨다. 후한(後漢) 때 방삼(龐參)은 한양 태수(漢陽太守)로 부임하여 그 고을의 처사 임당(任堂)을 맨 먼저 방문하였다. 임당은 말 대신, 문 앞에 큰 염교 한 뿌리와 물 한 주발을 내다 놓은 다음, 어린 손자를 안고 그 옆에 엎드려 있었다. 그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물은 자기에게 청백하라는 뜻이요 큰 염교 뿌리는 자기에게 강성한 종친을 제거해 달라는 뜻이요, 손자를 안은 것은 불쌍한 백성을 돌봐 주라는 뜻임을 알고 깊은 감명을 받아 훌륭한 치적(治績)을 이룩하였다. 《後漢書 龐參傳》
♣ 해우[解雨]해우는 주역(周易) 해괘(解卦)에 “천지가 해산하매 뇌우가 일어나고, 뇌우가 일어나매 백과와 초목이 모두 싹이 터 나온다.[天地解而雷雨作 雷雨作而百果草木皆甲折]” 한 데 대하여, 상사(象辭)에 이르기를 “뇌우가 일어난 것이 해산이니, 군자가 여기에 의거하여 죄과를 사유한다.[雷雨作解 君子以 赦過宥罪]” 한 데서 온 말이다.
♣ 해우오혜[解牛悟惠]백정이 소를 잡아 뼈를 가르는 기술을 도(道)에 비유하여 문혜군(文惠君)에게 양생(養生)의 도를 깨닫게 하였다. 장자(莊子)
♣ 해우음나조[廨宇蔭蘿蔦]친지와 더불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규변(頍弁)에 “새삼덩굴과 더부살이, 소나무 잣나무에 뻗어 있네[蔦與女蘿 施于松柏]”라고 하였는데, 집전(集傳)에서 “이는 형제와 친척들이 이에 의지하여 화목한 생활을 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해운[海雲]신라 말기의 학자 최치원(崔致遠)의 호이다.
♣ 해운삼천[海運三千]바다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하면[海運], 대붕(大鵬)이 남명(南冥), 즉 천지(天池)를 향해 날아가는데, 이때 물결을 격동시키는 것이 삼천리에 달하고[水擊三千里], 회오리바람을 타고서 구만 리 위로 날아오른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첫머리에 나온다.
♣ 해운선적[海雲仙蹟]호를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運)이라고 했던 신라(新羅)의 최치원(崔致遠)이 가야산(伽倻山) 입산 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지금의 동백섬 동쪽 벼랑 넓은 바위 위에 ‘해운대(海雲臺)’라고 썼다는 글씨를 말한다.
♣ 해원[解元]과거의 향시(鄕試)에서 장원 급제한 사람을 말하는데, 본래 향시를 해시(解試)라 하였다. 주기수(珠璣藪)에 “향시에 첫째로 합격한 것을 해원이라고 하며, 또는 해수(解首), 영해(領解), 발해(拔解), 발해(發解)라고도 한다.” 하였다.
♣ 해월[海月]반달처럼 생긴 조개류라는 해석과 해파리라는 설이 있다.
♣ 해위[奚爲]전대(專對)는 나라의 전권대표로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해위는 쓸모없음을 의미함. 논어(論語) 子路에 공자가 이르기를 “시(詩) 3백 편을 외우고도 사방에 사명을 받들어 행함에 능히 나라를 대표[專對]하지 못하면 또한 무엇에 쓰겠느냐.[亦奚以爲]"고 한 것을 인용한 것임.
♣ 해율[嶰律]해(嶰)는 골짜기 이름인데, 곤륜산(崑崙山)의 북쪽에 있다. 황제(黃帝)가 영륜(伶倫)을 시켜 해곡(嶰谷)의 대를 베어 두 마디 사이를 잘라서 그것을 불어 황종(黃鐘)의 궁(宮)을 삼았다 한다.
♣ 해은[偕隱]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개자추(介子推)가 세상이 무도함을 비관하고 은거하려 하자, 그의 모친이 “나도 너와 함께 숨어살리라.” 하고, 마침내 함께 숨어살다 죽은 고사에서 온 말이다. 《左傳 僖公 二十四年》
♣ 해의반박[解衣盤礡]송원군(宋元君)이 그림을 그리려고 여러 화사(畵史)들을 불렀는데 그들은 모두 붓을 빨고 먹을 찍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인사도 없이 사관(舍館)으로 가므로 송원군이 사람을 시켜 엿보니, 그는 옷을 벗고 자유롭게 앉았으므로, 송원군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림 그릴 사람이로다.” 하였다.
♣ 해인[海印]해인삼매(海印三昧)는 부처의 깨달아 얻은 삼매인데, 큰 바다 가운데 모든 물상(物象)이 비치는 것처럼 부처의 지혜 바다[智海] 가운데 일체(一切)가 나타나는 것이다.
♣ 해자괴[諧者怪]해자(諧者)의 괴담(怪談)이라는 것은 장자(莊子) 소요위(逍遙遊)에" 제해(齊諧)란 괴이한 말들을 적은 책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八十二》
♣ 해장[海藏]복잡한 시중(市中)에 은거하는 것을 이름. 소식(蘇軾)의 시에 “바다처럼 수많은 사람 속에 한 몸이 숨는다[萬人如海一身藏]”하였다.
♣ 해점[薤簟]해점은 해엽점(薤葉簟)의 준말로, 마치 부추 잎을 펼쳐놓은 것처럼 보이는 푸른 대자리를 이른 말이다.
♣ 해정오두[解酲五斗]진(晉) 나라 유령(劉伶)이 한 번 술을 마시면 한 섬이요 해장할 땐 다섯 말의 술을 마셨다는 “五斗解酲”의 고사가 전해 온다. 《世說新語 任誕》
♣ 해제참[解齊驂]춘추 시대 제 나라의 현자(賢者)인 월석보(越石父)가 남에게 매인 몸이 되어 곤경에 처했을 때, 재상 안영(晏嬰)이 나갔다가 길에서 그를 만나, 왼쪽 참마(驂馬)를 풀어서 속(贖) 바치고 그를 빼내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晏嬰傳》
♣ 해제천규[海帝穿竅]쓸데없는 억지 짓을 말함. 남해(南海)의 제(帝)는 숙(鯈)이고, 북해(北海)의 제는 홀(忽)이며, 중앙의 제는 혼돈(渾沌)인데, 숙과 홀은 언제나 혼돈으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아왔다. 숙과 홀은 혼돈의 후의에 감격하여 그에게 보답할 꾀를 내기를, “사람에게는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그 구멍을 통하여 보고 듣고 먹고 숨쉬고 하는데, 그에게는 그것이 없으니 구멍이나 뚫어주자.” 하고 하루에 구멍 하나씩을 팠더니 7일 만에 혼돈은 견디다 못해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莊子 應帝王》
♣ 해조[海棗]무루자(無漏子)라는 과실의 별명. 그 나무가 곁가지 하나 없이 곧 바로 삼사십 길을 커 올라가 맨 꼭대기에 가서야 여남은 가지가 돋고 5년 만에 과실 하나가 여는데 아주 크고 달다고 함.
♣ 해조[解絛]속박을 벗어나는 것을 이름.
♣ 해조[解嘲]양웅(揚雄)이 쓴 글의 편명(篇名). 양웅이 태현경(太玄經)을 초하고 있으면서 초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누가 조롱하자, 양웅이 그 조롱에 대해 해명을 한 것이란 뜻으로 만들어진 이름임. 《文選 揚雄 解嘲序》
♣ 해조문[解嘲文]세상의 조롱을 스스로 해명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을 때, 권세에 아부하여 출세한 자들이 그의 담박한 생활 태도를 비웃자, 이를 해명하는 글을 지어 “해조(解嘲)”라고 명명하였다. 《漢書 揚雄傳下》
♣ 해조수[海鳥愁]노(魯) 나라에 원거(爰居)라는 바다새가 동문(東門)에 왔는데 사람들이 그 새에게 좋은 음식으로 제사를 드리니 그 새는 받아먹지 못하고 근심만 하였다 한다.
♣ 해조음[海潮音]부처가 설법(說法)하는 음성을 해조음이라 한다.
♣ 해조함석[海鳥銜石]옛날 염제(炎帝)의 딸이 동해(東海)에 빠져 죽어서 정위(精衛)라는 새가 되었는데, 그는 항상 서산(西山)의 목석(木石)을 물어 날라서 동해를 메꾼다는 전설에서 온 말이다.
♣ 해주[海籌]장수하는 것을 말한다. 통속편(通俗編) 축송(祝誦)에 “세 노인이 만나서 나이를 물으니 한 노인이 말하기를 ‘바다가 뽕밭[桑田]으로 변할 때마다 내가 산가지[籌] 하나씩 놓는데, 이제 10개가 되었다.’ 했다.” 하였다.
♣ 해중[奚仲]태고 시절 수레를 처음 만든 사람. 그 넋이 하늘로 올라 역시 별이 되었다고 함.
♣ 해촉사[獬觸邪]법관의 올바른 법 집행을 뜻함. 해(獬)라는 신수(神獸)는 부정한 사람을 만나면 뿔로 받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데, 그래서 또한 법관들이 해의 가죽으로 만든 관을 쓴다고 한다.
♣ 해촉자천원[駭矚玆川原]자안(子安)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산원은 광활하여 시야에 가득차고, 천택은 눈이 떡벌어져라 보는 눈을 놀라게 하도다.[山原曠其盈視 川澤盱其駭矚]” 한 데서 온 말이다.
♣ 해추[海鰌]바다의 미꾸리라고도 하는데 그 크기가 고래의 몇 10배나 된다고 옛 사람들은 믿었다.
♣ 해추[海鰌]병선(兵船)의 이름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동쪽에서 온 고래 같은 해적들이 병선을 몰아내는데, 바다 귀신은 머리 아홉 거북이는 눈이 여섯[長鯨東來驅海鰌 天吳九首龜六眸]”이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50 送馮判官之昌國》
♣ 해치[獬豸]짐승의 이름. 성질이 곧아서 사람의 말을 듣고 부정한 사람을 물어뜯는다고 함. 옛날에는 사법관(司法官)이 그 가죽으로 관을 만들어 썼음.
♣ 해치[獬豸]해치(獬廌)와 같은데, 뿔이 하나인 양(羊)이다. 이 짐승은 천성이 사람의 죄 있음을 잘 알므로 고요(皐陶)가 옥(獄)을 다스릴 적에 그 죄가 의심되는 것은 이 양으로 하여금 받아 보게 했다 한다.
♣ 해치관[獬豸冠]해치관은 옛날 법관(法官)들이 쓰던 관으로 사헌부(司憲府)의 관원이 되었음을 뜻한다.
♣ 해타[咳唾]뛰어난 시문(詩文)을 뜻한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의 “그대는 기침하며 내뱉는 저 침을 보지 못하는가. 큰 것은 주옥처럼 작은 것은 안개처럼 뿜어 나오곤 한다.[子不見夫唾者乎 噴則大者如珠 小者如霧]”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 해타명주[咳唾明珠]말을 뱉으면 그대로 훌륭한 문장이 되는 탁월한 재능을 형용한 말. 후한(後漢) 강엄(江淹)이 곽공(郭鞏)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침을 뱉으면 그대로 구슬과 옥이 되니, 녹록한 무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後漢書 文苑傳 趙壹》
♣ 해탈[解脫]석가는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의 사성제(四聖諦)와 입멸(入滅) 즉 해탈에 이르는 팔정도(八正道)를 설법하였다. 《阿含經》
♣ 해탑[解榻]후한(後漢)의 진번(陳蕃)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을 때 특별히 탑상 하나를 마련해 놓고는, 남주(南州)의 고사(高士)인 서치(徐穉)가 찾아올 때만 반갑게 맞으면서 내려 놓았다가 그가 돌아가면 다시 올려놓고 아무에게도 내려 주지 않았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徐穉傳, 陳蕃傳》
♣ 해패[解佩]당(唐) 나라 때 하감(賀監)이 장안에서 이백(李白)을 만나자, 차고 있던 금귀(金龜)를 풀어 술을 샀다 함. 금귀는 당 나라 때에 관리들이 차던 장식물. 한편, 정교보(鄭交甫)란 자가 강한(江漢) 기슭에서 두 강물의 여신을 만나 그 여인들이 차고 있는 패물을 갖고 싶어하자, 그를 좋아한 두 여신은 곧장 패물을 풀어서 주었다고 한다.
♣ 해폐편[解蔽篇]순자(荀子)의 해폐편. 해폐편은 인성(人性)이 물욕(物欲)에 가리워진 것을 주로 다루었음.
♣ 해포[解袍]당 목종(唐穆宗)이 매우 추운 날 한림원(翰林院)에 거둥했다가, 한림 학사 위수(韋綬)가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옷을 벗어 덮어 주고 갔던 고사가 전한다. 《淵鑑類函 卷54 用賢 二》
♣ 해하[解夏]중이 7월 15일 또는 8월 15일에 여름 동안 안거(安居)했던 제도를 풀고 출유기(出遊期)에 들어감을 말한다.
♣ 해하[垓下]해하는 현재의 안휘성(安徽省) 영벽현(靈壁縣) 동남쪽에 있는 곳으로 옛날 한 패공(漢沛公)이 초(楚) 나라의 항우(項羽)와 격전을 벌인 곳으로 항우가 한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망한 땅이다.
♣ 해하음릉도[垓下陰陵道]항우가 해하(垓下)에서 포위를 뚫고 탈출하여 가다가, 음릉(陰陵)에 이르러 길을 잃어 곤경을 당하였다.
♣ 해학비[海鶴悲]두보의 기상징군(寄常徵君)이란 시에 “초비(楚妃)가 당 위에서 빼어난 미색을 자랑하듯 지조를 지키더니, 해학(海鶴)이 섬돌 아래에서 사람을 향해 우는구나.” 하여, 자연 속에 은거해 살다가 관직에 나간 것에 비유하였다.
♣ 해해[偕偕]굳세고 씩씩한 모양
♣ 해해[咍咍]기뻐서 웃는 모양
♣ 해후사두쌍소병[邂逅沙頭雙素甁]두보(杜甫)의 시에 “백사장 언덕에서 술 두 병 말끔히 비웠나니, 손님은 다 취하고 나만 홀로 말똥말똥.[酒盡沙頭雙玉甁 衆賓皆醉我獨醒]”이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3 醉歌行》
♣ 해흥[海興]중국에 사신으로 왕래했던 해흥군(海興君) 이강(李橿)을 가리킨다.
♣ 행[幸]바라다, 희망하다.
♣ 행[行]행은 시체(詩體)의 하나이다.
♣ 행가[行歌]걸어가면서 노래하다.
♣ 행가고녕우[行歌叩寗牛]춘추 시대제(齊) 나라의 영척이 쇠뿔을 두드리며 노래하여 세상에 쓰이기를 요구했는데, 과연 제 환공(齊桓公)이 그 노래 소리를 듣고 그를 등용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說苑 尊賢》
♣ 행각[行脚]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수행함)
♣ 행단[杏壇]단(壇)의 이름.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유지(遺址)로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의 성묘(聖廟) 앞에 있다. 장자(莊子) 어부(漁父)에 “공자는 행단 위에 앉고 제자들은 그 곁에서 글을 읽었다.[孔子休坐乎杏壇之上 弟子讀書]" 하였다.
♣ 행단사자[杏壇四子]행단은 살구나무가 있는 단으로 공자(孔子)가 일찍이 강학한 곳인데,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大成殿) 앞이라 한다. 네 분은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ㆍ증점(曾點)ㆍ염유(冉有)ㆍ공서화(公西華)를 이르는바, 공자가 일찍이 이들에게 각자의 포부와 경륜을 물은 적이 있다. 《論語 先進》
♣ 행당맥락[杏餳麥酪]당(唐) 나라 때 음식의 한 가지.
♣ 행대[行臺]서장관(書狀官)의 별칭이다.
♣ 행등[行縢]베의 천으로 퇴육(腿肉)을 감는 각반(脚盤)을 말함.
♣ 행등[行燈]속에 등잔을 넣고 손으로 들고 다니게 된 등롱(燈籠)이다.
♣ 행락수급시[行樂須及時]좋은 시절이 가기 전에 즐겨 놀아야 한다는 뜻으로,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에 “행락을 즐김은 마땅히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하니, 어찌 앞날을 기다릴 수 있으랴.” 하였다. 《古文眞寶 前集》
♣ 행로[行露]행로는 시경(詩經) 소남(召南)의 편명(篇名)인데, 여인들이 정조를 굳게 지킬 것을 노래한 시이다.
♣ 행로난[行路難]악부잡곡(樂府雜曲) 가사 이름. 백거이(白居易)ㆍ이백(李白) 등이 노래한 행로난이 있는데, 악부해제(樂府解題)에 이르기를, “행로난은 주로 험난한 세상길 또는 이별의 쓰라림을 노래한 것으로 대부분 첫머리를 군불견(君不見)으로 시작하고 있다.” 하였음. 《樂府詩集 雜曲歌辭 行路難》
♣ 행료지수감읍주[行潦之水堪挹注]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충분히 자족(自足)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형작(泂酌)에 “저 멀리 길 바닥에 고인 물을 퍼다가 저기에 붓고 여기에 쏟아도 선밥 술밥을 지을 수 있도다.[泂酌彼行潦 挹彼注玆 可以▣饎]”라고 하였다.
♣ 행리[行李]행리는 사자(使者)ㆍ행인(行人) 또는 출행자(出行者)가 휴대하는 행장을 일컫기도 한다.
♣ 행림[杏林]살구나무 숲. 진정한 의술(醫術)의 도(道). 옛날 중국 오(吳)나라에 동봉(董奉)이란 의사(醫師)가 살았다. 동봉은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 주는 대신에 자기 뜰에다 살구나무를 심게 했다. 중병자는 다섯 그루, 가벼운 병세의 환자는 한 그루씩 심게 하니 몇 년 안 되어 십만 그루가 넘는 엄청난 살구나무 숲을 이루었다. 그는 여기서 나오는 살구나무 열매를 곡식과 교환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까지 했다 한다. 그래서 행림이라 하면 거룩한 의사의 도를 상징하며, 동시에 의사를 아름답게 부르는 말로도 쓰인다
♣ 행마[行馬]귀인(貴人)의 집이나 관서(官署)의 문 밖에 설치하는 말을 매어두는 제구. 사람의 출입을 금하는 데도 세웠음.
♣ 행명실기[行名失己]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겉으로 드러나는 명성만 좇을 뿐 자신의 신조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선비라고 할 수가 없다.[行名失己 非士也]”라는 말이 나온다.
♣ 행백리자 반구십[行百里者 半九十]백 리 길을 가려면, 구십 리를 가도 오십 리도 못 간 것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 행부[行部]자사(刺史)가 자기 관내를 순행하는 것. 한(漢)나라 때 행하던 제도로서 언제나 팔월이면 자사가 자기 관내를 순행하면서 죄수를 살피고 전최(殿最)를 매겼는데, 그를 일러 행부라고 하였음. 《後漢書 蘇章傳》
♣ 행불유경[行不由徑]지름길이나 뒤안길을 가지 않고 큰 길을 걷는다는 말로, 정정당당히 일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행서[行書]해서를 실용적인 데에서 더욱 빨리 쓰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글자의 발달 순서는 행서 → 초서 순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이다. 초서는 한대에 유행하였는데 빠르게 쓸 수는 있었으나 남이 알아보기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즉 초서와 느린 해서의 단점을 보완하여, 해서보다는 조금 획을 흘려서 쓰며, 초서보다는 덜 간략한 글자체를 유지하는 것이다. 행서는 생활서로서뿐만 아니라 획의 변화무쌍함 때문에 예술서로서도 각광을 받을 수 있었다.
♣ 행성[行省]정동성(征東省)과 같음.
♣ 행수단[杏樹壇]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는 곳, 즉 서원을 가리킨다. 공자(孔子)가 행단(杏壇)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인데, 우리나라는 행수(杏樹)를 은행나무로 여기는 데 반해 중국에서는 살구나무로 간주하고 있다.
♣ 행수화[行水火]수화는 사람의 정신과 같은 말로, 도가(道家)에서 심신을 수련하는 법의 하나임. 금단대요(金丹大要)에 “호흡으로써 신기(神氣)를 운용하고 신기로써 수화(水火)를 취하고 수화로써 태식(胎息)을 단련한다.” 하였다.
♣ 행시주육[行尸走肉]송장의 움직임과 같이 형태만 있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 무식한 사람을 멸시하는 말로 쓰인다.
♣ 행신가호[行身賈胡]장사하는 되놈[賈胡]이 보배 구슬을 감추기 위하여 제 배를 가르고 그 속에 넣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재물을 탐하여 제 몸이 죽을 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 행약[行藥]약을 마신 뒤에 약이 내려가라고 거니는 것을 말함. 두보의 시에 “行藥病涔涔"의 글귀가 있음.
♣ 행영[行營]외지에 나가 주둔해 있는 군영(軍營)을 말한다.
♣ 행우[行雨]행우 조운(行雨朝雲)의 준말로, 옛날 송 양왕(宋襄王)이 고당(高唐)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에 무산(巫山)의 신녀(神女)와 정사(情事)를 가졌는데, 그가 떠나면서 “저는 아침에는 조운(朝雲)이 되고 저녁에는 행우(行雨)가 됩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미인을 비유한 것이다.
♣ 행운유수[行雲流水]떠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 일의 처리에 막힘이 없거나 마음씨가 시원시원함.
♣ 행원[杏園]당대(唐代)에 진사(進士)에 합격된 선비에게 잔치를 내리던 곳. 그 모임을 탐화연(探花宴)이라 하고 준소(俊少)한 선비 세 사람을 뽑아 탐화사(探花使)라 한 다음, 이름있는 원(園)들을 두루 찾아 꽃을 꺾어 오도록 하여, 늦은 두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놀이도 가졌다.
♣ 행위[行違]출처(出處)를 시국에 따라서 하였음을 뜻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즐거우면 행하고 근심스러우면 떠나간다[樂則行之 憂則違之].” 한 데서 온 말이다. 《周易 乾卦 文言》
♣ 행유부득반구제기[行有不得反求諸己]행동을 해서 원하는 결과가 얻어지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원인을 찾아야 한다.
♣ 행음택반[行吟澤畔]전국 시대 초(楚)의 문호(文豪)이자 충신인 굴원(屈原)이 간신의 참소로 쫓겨나 곤궁한 처지에 있었음.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못가에서 한편 거닐며 한편 읊조린다.[行吟澤畔]" 하였음.
♣ 행인[行人]사신(使臣)과 같음. 조근(朝覲)ㆍ빙문(聘問)의 일을 관장하는 벼슬 이름. 주례(周禮) 주관(周官)에 대행인(大行人) 소관인(小官人)이 있는데, 추관(秋官)에 속한다.
♣ 행인안검간[行人按劒看]사기(史記)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에 “신이 듣건대 명월(明月)의 구슬과 야광(夜光)의 벽(璧)을 길에 있는 사람에게 던져 주면 칼자루를 잡고 흘겨보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 행장[行藏]행장은 용사행장(用舍行藏)의 준말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몸이 쓰여지면 도를 행하고 버려지면 물러나 간직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에서 나온 것으로, 출처(出處)나 행지(行止)를 가리킨다. 즉 진퇴(進退)를 말한다.
♣ 행장[行裝]여행할 때 휴대하는 의류 등 물품으로 곧 조정에 나가 벼슬하거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뜻함.
♣ 행조은후정[行調殷后鼎]은후의 국에 간을 맞추다. 정승으로 임금을 잘 보필한다는 뜻이다. 서경(書經) 열명 하(說命下)에 “만약 국을 끓이거든 그대는 염매(鹽梅)가 되어다오.” 한 데서 온 말이다.
♣ 행주[行廚]거둥 때 어선(御膳)을 맡는 임시 주방(廚房). 길을 가는 도중에 임시로 음식을 만드는 곳. 본디 도시락을 이른 말인데, 전하여 야외(野外)의 연회(宴會)를 뜻한다.
♣ 행주[行酒]술을 따르다. 술을 권하다.
♣ 행주[行籌]한 애제(漢哀帝) 때에 관동(關東) 백성의 전하는 말에 “서왕모의 산가지를 시행한다.[行西王母籌]”는 말이 있었는데, 여기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서왕모는 곧 원후(元后)가 장수할 조짐을 상징한 것이요, 행주(行籌)는 바로 국가의 주책(籌策)을 천하에 시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행지부창천[行止付蒼天]군자가 나라에 나가서 일을 하거나 물러나는 것을 하늘의 자연에 맡긴다는 것임. 맹자(孟子) 梁惠王下에 “대도가 행해지게 되면 암암리에 그것을 추진하는 자가 있고 정지하게 되면 그 역시 암암리에 저해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은 천명(天命)에 있으므로 행해지고 정지하는 일은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음.
♣ 행진[行塵]행진은 길에서 묻은 먼지를 말한다.
♣ 행채[荇菜]노랑어리연꽃. 조름나물과에 속하는 다년생 수초(水草).
♣ 행천만국병[行穿萬國兵]오랑캐를 한창 토벌 중인 전장(戰場) 가운데를 지나가리라는 말이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삼 년 동안 피리 소리 관산월 곡조, 천하 위한 군사 작전 바람에 초목이 쓸리도다.[三年笛裡關山月 萬國兵前草木風]”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6 洗兵行》
♣ 행춘[行春]행춘은 지방관이 자기가 관할하는 고을을 봄철에 순회(巡回)하는 것을 말한다.
♣ 행행[悻悻]발끈 성내어 원망하는 모양, 성미가 급하고 마음이 좁은 모양
♣ 행화우[杏花雨]살구꽃이 필 무렵, 즉 청명절(淸明節)에 내리는 비를 가리킨다.
♣ 행화천[杏花韉]예전 과거 볼 때에는 대개 살구꽃 필 때여서 전부터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행화는 관계가 깊다.
♣ 행화풍[杏花風]청명절(淸明節) 전후 살구꽃이 활짝 필 무렵에 부는 바람으로, 청명절 무렵에 부는 봄바람의 대명사이다.
♣ 향 일 화[向 日 花]해바라기.
♣ 향갑[鄕甲]면임(面任)을 말함.
♣ 향강[香姜]와연(瓦硯)의 일종. 양산집(楊愼集)에 “조조(曹操)의 동작대(銅雀臺) 기와는 이미 얻을 수 없게 되고 송 나라 사람이 수장한 것은 바로 고환(古歡)의 피서궁(避暑宮)ㆍ빙정대(氷井臺)ㆍ향강각(香姜閣) 기와이다.”라 하였음.
♣ 향거[香車]향거는 귀인(貴人)의 타는 칠향거(七香車)이다.
♣ 향공[鄕貢]향공은 당 나라 때 선비를 선발하는 제도의 하나로, 지방 고을에서 치르는 시험에 합격한 자를 말하는데, 곧 진사를 뜻한다.
♣ 향니[香泥]향기나는 진흙으로 여기서는 불상이나 법당의 주위에 쓰여진 흙을 말한다.
♣ 향등[香燈]제사를 지낼 때 쓰는 등불과 규문(閨門) 안, 곧 내실(內室)의 등불이란 두 가지 뜻이 있다.
♣ 향렵전[餉獵錢]호랑이 사냥을 명분으로 민간에서 거두는 경비를 말한다.
♣ 향로봉[香爐峯]여산(盧山)에 있으며, 백락천이 그 곳에 있었다.
♣ 향미[鄕味]새로 상번(上番)하여 올라온 군졸에게 고참자들이 상면(相面)한다는 명목으로 음식을 빼앗아 먹던 퇴폐적인 준례였다.
♣ 향벽견성[向壁見性]불교에서 면벽 참선(面壁參禪)을 하여 성을 보아 부처 된다[見性成佛]고 한 것을 말한다.
♣ 향사[香社]당(唐) 나라 때 백거이(白居易)가 향산(香山)의 중 여만(如滿)과 함께 결성한 모임인 즉 향화사(香火社)의 준말이다.
♣ 향사[鄕射]옛날에 마을에서 활을 쏘면서 술을 마시던 의례(儀禮)이다.
♣ 향사[鄕使]향사는 고향에 보내는 심부름꾼을 이른 말이다.
♣ 향산[香山]당(唐)의 백거이(白居易)를 말함. 거이(居易)가 형부 상서(刑部尙書)에서 벼슬을 그만두고 향산(香山)에 들어가 자호를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하였음. 《唐書 卷一百一十九》
♣ 향산[香山]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에 있는 산 이름.
♣ 향산결사[香山結社]당나라 백낙천(白樂天)이 만년(晩年)에 향산(香山)에서 아홉 노인과 결사(結社)하였다고 한다.
♣ 향산구로[香山九老]향산은 중국 하남(河南) 낙양(洛陽) 용문산(龍門山)의 동쪽에 있는 산. 당 나라 때 백거이(白居易)가 형부 상서로 있다가 그만두고 호고(胡杲)ㆍ길교(吉皎)ㆍ유진(劉眞)ㆍ정거(鄭據)ㆍ노정(盧貞)ㆍ장혼(張渾)ㆍ이원상(李元爽)ㆍ여만(如滿)등 나이 70이 넘은 노인들과 구로상치지회(九老尙齒之會)를 맺고 자기의 향산 별장에서 시를 지으며 놀았다. 《新唐書 卷一百十九 白居易傳》
♣ 향산로[香山老]향산(香山)은 향산거사(香山居士) 백거이를 가리킨다.
♣ 향산사[香山社]뜻이 맞는 일을 일생 동안 함께 하기로 맹약을 맺은 일을 말한다. 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가 향산(香山)의 승려 여만(如滿)등과 함께 향화(香火)의 결사를 맺은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통 향화사(香火社)라고 한다.
♣ 향산지각[響山池閣]향산은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산 이름으로, 그 아래 완계(宛溪)가 있는데, 왕 노공(王路公)이 여기에 정(亭)을 지었다. 지각(池閣)은 물가의 정자.
♣ 향상[香象]몸에서 향기가 나며 깊은 강이나 바다로 건너갈 수 있다는 상상(想像)의 코끼리.
♣ 향서절영매[鄕書折嶺梅]남조 송(南朝宋)의 육개(陸凱)가 장안(長安)에 있던 친구 범엽(范曄)에게 강남(江南)의 매화와 함께 시를 보냈던 고사가 전한다. 《太平御覽 卷970》
♣ 향성[香省]중앙 정부 기관의 숙직실을 가리킨다. 당(唐) 나라 때 문하성(門下省)에서 습유(拾遺)가 숙직할 때, 여시사(女侍史)가 숙직자의 의복을 향로에 쐬여 향기가 나게 했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 향소[香蘇]오난설의 재호(齋號)인 향소산관(香蘇山館)을 말함.
♣ 향안[香案]향로를 올려두는 탁자로 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가리킨 말이다.
♣ 향안리[香案吏]임금 곁에 시종(侍從)하는 문사(文士)를 뜻함. 당(唐) 나라 원진(元稹)의 시에 “내 본디 옥황상제의 향안 받들던 아전이라, 쫓겨나서도 봉래산 가까이 살게 되었네.[我是玉皇香案吏 謫居猶得近蓬萊]” 한 데서 온 말이다.
♣ 향엄동자[香嚴童子]자기 몸을 불살라 남을 공양한다는 뜻으로, 향을 해학적으로 비유한 말이다. 유마경(維摩經) 향적불품(香積佛品)에 “부처와 보살들이 함께 앉아 식사를 할 때, 향엄(香嚴)이라 불리는 천자(天子)들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내고서 부처와 보살들을 공양(供養)하였다.”고 하였다.
♣ 향우인[向隅人]공평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된 처지를 말한다. 한서(漢書) 형법지(刑法志)에 “집안에서 모두 술을 마시며 즐기는데, 한 사람이 벽을 향해서 슬피 울면, 즐겁던 분위기가 깨어지게 마련이다.” 하였다.
♣ 향우지탄[向隅之歎]그 자리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다 즐거워하나 자기만은 구석을 향하여 한탄한다.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한탄하는 말.
♣ 향원덕지적[鄕愿德之賊]향원은 신조와 주견 없이 그때그때 세태에 따라 맞추어서 주위로부터 진실하다는 칭송을 받는 사람을 말함. 그의 사이비한 행동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위(眞僞)를 판단하는 기준을 흐리게 만들므로 공자(孔子)는 그를 일러, 덕의 적이라고 하였음. 《論語 陽貨》
♣ 향음주례[鄕飮酒禮]상고 때에 시골 학교에서 3년 동안 가르쳐 학업이 성취되면 덕성(德性)과 문예를 시험하여 그 중에서 뛰어난 자를 조정에 천거하는데, 그때 향대부(鄕大夫)가 주인이 되어 그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 전송하면서 빈례(賓禮)로 대하여 술을 주고받을 때 일정한 의식이 있었음. 곧 시골 선비들의 순후한 풍속을 말함. 《儀禮 鄕飮酒禮》
♣ 향의[香蟻]술거품, 또는 술을 말한다.
♣ 향자손익[向子損益]상자(向子)는 후한(後漢)의 은사(隱士) 상장(向長)을 가리키는데, 그의 자(字)인 자평(子平)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노장(老莊)과 역(易)에 정통하였는데, 어느 날 주역(周易)의 손괘(損卦)와 익괘(益卦)를 읽고 나서 탄식하기를 “내가 이미 부귀는 빈천함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죽음이 삶보다 어떻다는 것만은 모르겠다.[吾已知富不如貧 貴不如賤 但未知死何如生耳]”라고 하였다 한다.《後漢書 逸民傳 向長》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仲尼甘旅人 向子識損益”이라는 구절이 있다.《杜少陵詩集 卷8 兩當縣吳十侍御江上宅》
♣ 향자식손익[向子識損益]상자(向子)는 동한(東漢)의 고사(高士) 상장(向長)으로, 자(字)는 자평(子平)이다. 일찍이 주역(周易)을 읽다가 손괘(損卦)와 익괘(益卦)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내가 이미 부귀가 빈천(貧賤)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만, 죽음과 삶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逸民傳 向長》
♣ 향자평[向子平]자평(子平)은 상장(向長)의 자(字).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녀의 혼사(婚事)를 다 끝내자 오악 명산(五嶽名山)을 유람, 그칠 줄 몰랐다고 함.
♣ 향적[香積]부처의 이름.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이 중향(衆香), 부처의 이름은 향적(香積)인데, 그 나라의 법의 향기가 십방 무량 세계에 주류(周流)한다.”《維摩經 香積品》
♣ 향적[香積]사찰(寺刹)의 승주(僧廚)를 말한다. 향적주(香積廚)의 준말인데 승가(僧家)의 식주(食廚)로서 대개 향적불국(香積佛國)의 향반(香飯)의 뜻을 취한 것임.
♣ 향적반[香積飯]향적반에 대해서는 유마경(維摩經) 향적품(香積品)에 “향적여래(香積如來)가 중향발(衆香鉢)에다 만향반(滿香飯)을 담아서 화보살(化菩薩)을 주었다.”는 말이다.
♣ 향적주[香積廚]절의 부엌을 이름.
♣ 향전[香篆]전문(篆文) 모양으로 만든 향인데 이를 태워 시각(時刻)을 잰다. 향보(香譜)에 “향전을 만들 적에 그 길이를 12신(辰)에 기준하여 1백 각(刻)으로 분등하는데, 타는 시간은 24시간이다.” 하였다.
♣ 향조[香祖]청 나라 반정균(潘庭筠)의 자(字)인데, 난공(蘭公)이라 하기도 한다.
♣ 향진[香塵]야유회를 나온 사녀(士女)들의 분 내음과 합쳐진 봄날 번화한 길거리의 화사한 분위기를 표현한 시어이다.
♣ 향평물관[向平勿關]상평은 자(字)가 자평(子平)인 한(漢) 나라의 고사(高士) 상장(向長)을 가리킨다.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나서 집안일을 완전히 정리한 뒤에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勿復相關]고 분부하고는 마음 내키는 대로 떠돌아다니며 오악(五岳) 등을 유람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高士傳ㆍ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向長》
♣ 향표칠서위선장[香飄七瑞圍仙仗]진 시황이 바다를 건너가서 해뜨는 곳을 보고자 하여 석교(石橋)를 만들 적에 신인(神人)이 돌을 몰아서 바다로 내려보냈는데, 이때 돌이 빨리 내려가지 않으면 신인이 매양 돌에 채찍질을 하여 강제로 몰아 내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향혼[香魂]미인의 죽은 영혼이라는 뜻의 시어(詩語)이다.
♣ 향화사[香火社]향불과 등화(燈火)는 다 함께 불전(佛前)에 공양하는 물건으로서, 서로 마음이 계합(契合)되는 불교도의 결사(結社)를 말하는데, 당(唐) 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향산(香山)의 승려 여만(如滿)과 함께 향화사를 결성한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166 白居易列傳》
♣ 향회입연식[嚮晦入宴息]주역(周易) 수괘(隨卦) 상사(象辭)에, “군자는 하늘이 어두워지면 들어가서 편안히 쉰다.” 하였다.
♣ 허[墟]마을
♣ 허격[許格]이안눌(李安訥)의 문인. 자는 춘장(春長), 호는 숭정처사(崇禎處士) 또는 창해(蒼海). 시문(詩文)에 능했음.
♣ 허공언[許功彦]공언은 허성(許筬)의 자이다.
♣ 허곽품인[許郭品人]후한(後漢) 명사(名士) 허소(許劭)와 곽태(郭泰)가 인물을 잘 알아보기로 유명하였다.
♣ 허기[虛器]허기는 이름과 실제가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 허령[虛靈]명덕(明德)을 말함. 대학(大學) 명덕의 주에 “명덕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어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온갖 이치를 구비하고 만사를 수응하는 것이다.” 하였음.
♣ 허령불매[虛靈不昧]마음에 찌꺼기나 가린 것이 없어 사물을 환하게 비춰보는 것. 사람의 마음은 공허하여 형체가 없으나, 그 기능은 거울처럼 맑고 환함을 이른다. 대학(大學) 경일장(經一章) 명덕(明德)의 주석에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타고난 것으로, 허령불매하여 뭇 이치[衆理]를 갖추어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하였다.
♣ 허례허식[虛禮虛飾]예절, 법식 등을 겉으로만 꾸며 번드레하게 하는 일
♣ 허뢰[虛籟]공산(空山)에서 바람 없이 일어나는 소리를 이름.
♣ 허무[虛無]허무(虛無)는 강물을 가리킨다.
♣ 허무맹랑[虛無孟浪]말이나 행동이 터무니없이 허황되고 전혀 실상이 없음
♣ 허문정공[許文正公]문정은 원(元) 나라 학자 허형(許衡)의 시호. 자는 중평(仲平)이며, 호는 노재(魯齋). 세조(世祖) 때 국자 좨주(國子祭酒)가 되어 훌륭한 교육을 시행했으며 정주학(程朱學)에 밝아 많은 저서를 남겼다. 《元史 許衡傳》
♣ 허미수[許眉叟]미수는 조선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허목(許穆)의 호.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고, 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전서(篆書)에는 동방의 제1인자로 칭해진다. 저서에는 미수기언(眉叟記言)ㆍ경설(經說)ㆍ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등이 있음.
♣ 허미숙[許美叔]미숙은 허봉(許篈)의 자(字)이다.
♣ 허백[虛白]허실생백(虛室生白)의 약어(略語)로 빈집이 훤한 것을 들어 물욕이 없는 순수한 마음을 가리킨다. 청정무욕(淸淨無慾).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의 “텅 빈 방에서 하얀 광채가 뿜어 나온다.[虛室生白]”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허백유실[虛白幽室]빈 방이 훤히 빛나는데 길상(吉祥)이 머무른다. 마음이 비는 것을 이른다. 장자(莊子)
♣ 허비경[許飛瓊]신선인 서왕모(西王母)가 한 무제(漢武帝)와 연회를 함께 할 때 시녀(侍女)인 허비경에게 진령(震靈)의 피리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한다.《漢武帝內傳》 또 당(唐) 나라 사람 허혼(許渾)이 꿈에 요대(瑤臺)에 올라가 선녀 3백 인과 노닐 적에 허비경의 부탁을 받고 “새벽의 요대에 이슬 기운 청랑한데, 좌석에 오직 허비경만 보이더라. 아직 속진(俗塵) 남아 속세의 인연 못 벗은 몸, 하산하는 십 리 길 달빛만 환하더라.[曉入瑤臺露氣淸 坐中唯有許飛瓊 塵心未盡俗緣在 十里下山空月明]”라는 시를 지었는데, 허비경이 자기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다고 하여 ‘坐中唯有許飛瓊’이라는 구절을 ‘天風飛下步虛聲’으로 고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太平御覽 卷70 引用註》
♣ 허빈[虛牝]노자(老子)에서 나온 말인데, 여기서는 물이 낮은 데로 흘러 모이는 구렁이나 바다를 말한 것이다.
♣ 허빈척[虛牝擲]허빈은 텅 빈 계곡으로, 쓸모없는 땅을 말한다. 한유(韓愈)의 시에 “가련타 쓸데없이 정신만 허비할 뿐, 황금이 허빈에 던져진 듯했소그려.[可憐無益費精神 有似黃金擲虛牝]”라는 구절이 있다. 《韓昌黎集 卷4 贈崔立之評事》
♣ 허사[許汜]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 유비(劉備)와 당시의 호사(豪士) 진등(陳登)을 평할 적에 “내가 난리통에 하비(下邳)를 지나다가 그를 찾았을 적에, 손님을 대접할 줄 몰라 자기는 높은 평상, 손님은 낮은 평상에 눕게 했었다.” 하자, 유비가 “그대는 고사(高士)라면서 나라에 충성할 마음은 갖지 않고 농토나 구하고 집터나 묻기 때문에 그처럼 박대한 것이다.” 하였다. 《三國志 魏志 陳登傳》
♣ 허사[許史]허사(許史)는 한 선제(漢宣帝)의 장인인 허백(許伯)과 선제의 외가(外家)가 되는 사고(史高)의 집안을 가리킨다. 권문 귀척(權門貴戚)을 일컬을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漢書 卷77 蓋寬饒傳 註》
♣ 허사김장[許史金張]허는 한 선제(漢宣帝) 허 황후(許皇后)의 부친인 허광한(許廣漢), 사는 선제의 조모인 사양제(史良娣)의 오빠 사공(史恭)과 그의 아들 사고(史高)로, 허사라고 하면 보통 귀척(貴戚)을 가리킨다. 김장의 김은 김일제(金日磾), 장은 장안세(張安世)로, 두 가문이 모두 한 나라 때 7대에 걸쳐 황제의 은총을 받고 현달(顯達)하였으므로, 보통 권문세가(權門勢家)의 뜻으로 쓰인다.
♣ 허사지호귀[許史之豪貴]허씨는 선제(宣帝)의 처가요, 사씨(史氏)는 그의 외가이다.
♣ 허산전[許山前]산전은 허성(許筬)의 호이다.
♣ 허순[許詢]진(晋) 명사(名士) 자는 현도(玄度). 진 나라 사람으로 지둔과 동시대였다. 그는 산수간(山水間)에 놀기를 놓아하여서 여러 번 지둔을 찾았다.
♣ 허신직설[許身稷契]직설(稷契)은 순 임금의 명신(名臣)이었던 후직(后稷)과 설(契)을 이르는데, 두보(杜甫)의 자경부봉선현영회(自京赴奉先縣詠懷) 시에 “두릉에 한 선비가 있으니, 늙을수록 뜻은 더욱 졸렬하여라. 자신 허여함이 어찌 그리 어리석은고, 그윽이 후직과 설에 비한다오.[杜陵有布衣 老大意轉拙 許身一何愚 竊比穮與契]"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四》
♣ 허실광생백[虛室光生白]진리(眞理)에 도달함을 비유한 말. 텅 빈 방에는 햇빛이 들어와 밝다는 뜻으로, 즉 사람의 마음도 텅 비워서 물욕을 없애면 도를 깨닫게 된다는 데서 온 말이다. 《莊子 人間世》
♣ 허실생백[虛室生白]허실은 물욕이 전혀 없는 텅빈 마음을 비유한 것이고, 흰 빛이란 곧 도(道)를 비유한 것으로, 즉 마음을 텅비워 물욕을 없앰으로써 도가 생기어 길한 징조가 와서 머물게 된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저 빈 틈을 보아라. 텅 빈 방에서 광채가 뿜어 나오지 않느냐. 길상은 부동(不動) 속에 자리하느니라.[瞻彼闋者 虛室生白 吉祥止止]”라는 말이 있다.
♣ 허실자생명[虛室自生明]사람이 상념(想念)을 끊으면 절로 진리(眞理)에 도달하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 허실자요[虛室自曜]실중(室中)을 활짝 개방(開放)해 놓으면 절로 밝은 광선(光線)이 들어온다는 데서 온 말로, 즉 사람의 마음이 무념 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르면 절로 진리(眞理)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이른 말이다. 《莊子 人間世》
♣ 허심[虛心]대[竹]가 속이 비었기 때문에 허심(虛心)이라 한다.
♣ 허심탄회[虛心坦懷]마음을 비워 너그럽고 편안하게 함. 마음속에 사념(邪念)이 없는 너그럽고 편안한 마음. 비우고 마음속에 아무런 선입견이나 거리낌없이 솔직한 태도로 품은 생각을 터놓고 말함.
♣ 허약허[許若虛]약허(若虛)는 허실(許實)의 자(字)이다.
♣ 허옥여[許沃余]옥여는 허계(許啓)의 자(字)이다.
♣ 허위류전[許魏留鐫]중국의 사신인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을 가리킨다. 이들은 명종(明宗) 22년에 사신으로 나왔다.
♣ 허유[許由]중국 상고(上古) 시대의 고사(高士)로서 요(堯)가 천하를 양보하려 하자 거절하고 기산(箕山)에 숨었으며 또 그를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 하자 영수(潁水) 물가에 가서 귀를 씻었다 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요 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물려주려고 하니, 허유는 ‘당신이 천하를 다스려 천하는 이미 잘 다스려졌습니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계승한다면 나는 장차 명예를 위하라는 말입니까? 뱁새가 깊은 숲에 서식(棲息)하여도 한 개의 나뭇가지에 의지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돌아가십시오.’ 하고 사양했다.” 하였다.
♣ 허유기표[許由棄瓢]당요(唐堯) 시절의 고상한 은사였던 허유(許由)가 기산(箕山)에 숨어살며 물을 떠 마실 그릇이 없기 때문에 손으로 늘 움켜 마셨는데 그것을 본 어떤 사람이 바가지 한 짝을 그에게 주었다. 허유는 그 바가지로 물을 퍼 마시고는 나뭇가지에다 걸어 두었더니 바람이 불면 딸그락 딸그락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그러자 허유는 그것이 번거롭다 하여 바가지를 버리고 다시 손으로 움켜 마셨다고 함. 《琴操》
♣ 허자[許子]초당(草堂) 허엽(許曄)
♣ 허장성세[虛張聲勢]명성과 위세를 헛되이 펼쳐 놓음. 거짓으로 위세를 꾸미고 헛된 소리로 사람을 위협함. 실력은 없으면서 허세만 부림.
♣ 허정[虛靜]텅 빈 마음으로 만물을 모두 받아들이고, 스스로 고요히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만물의 실상을 가감없이 그대로 비쳐 주는 것을 말한다.
♣ 허정[許靖]후한(後漢) 말엽에 동탁(董卓)을 죽이려다 실패한 뒤 촉한(蜀漢)에 들어가서 태부(太傅)가 되었는데, 인재를 아끼고 후진을 이끌어 주며 청담(淸談)을 즐겼다. 일찍이 “영재(英才) 위사(偉士)로서 대사를 도모할 만한 지략(智略)을 지녔으며, 항상 남을 먼저 위하고 자신을 뒤로 돌렸다.[先人後己]”는 평판을 얻었는데, 승상 제갈량(諸葛亮) 역시 그의 인품을 흠모하여 절을 하곤 하였다 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葛洪尸定解 許靖力難任”이라는 구절이 있다.
♣ 허정라면[虛庭羅麪]속석(束晳)의 면부(麪賦)에 “가는 밀가루가 눈[雪]처럼 날린다.” 한 말을 인용하였다. 문견후록(聞見後錄)에는 “그의 집에서 밀가루를 가공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하였다.
♣ 허제[虛祭]허위(虛位)를 차려 놓고 지내는 제사.
♣ 허주[虛舟]사공 없이 떠도는 배처럼 의탁할 곳이 없는 처지를 말한다.
♣ 허주[虛舟]세상일에 대해 담박한 마음으로 대하여서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외편(外篇) 산목(山木)에, “배를 나란히 하고 황하를 건널 적에 만약 빈 배[虛舟]가 와서 자기 배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아무리 속이 좁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성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한 사람이라도 그 배 위에 있다면 곧 소리쳐서 저리 가라고 할 것이다.” 하였다.
♣ 허주[許州]함양(咸陽)의 고호임.
♣ 허중위이[虛中爲离]이괘(离卦)는 “☲이므로 가운데의 획이 비었다[離虛中].” 한다.
♣ 허지[許支]허씨는 진(晉) 나라 때 명사(名士)였던 허순(許詢)으로 선비를 가리키고, 지씨는 진 나라 때 고승이던 지도림(支道林)으로 승(僧)을 가리키는데, 이들 둘은 서로 교유하면서 아주 친하게 지내었다. 《世說新語 文學》
♣ 허창[許昌]중국 하남성(河南省) 중부에 있는 도시. 서주(西周)와 춘추(春秋)시대에는 허국(許國)의 땅이었으며, 진(秦)나라 때에는 허현(許縣)이라고 불렀고, 동한(東漢) 말기에는 수도(首都)가 되었다. 1913년에 허창현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47년 시(市)로 승격하였다. 현재 29개의 민족이 거주한다.
♣ 허창해[許滄海]창해는 조선 인조(仁祖) 때 사람 허격(許格)의 호. 그는 병자호란에 우리나라가 청 나라에 굴복하자, 유시(遺詩)를 남기고 자살하였다.
♣ 허필[許佖]호는 연객(煙客), 자는 여정(汝正),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보다 학문에 열중하였다. 영조 때 시서화(詩書畫)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이름났었다.
♣ 허행원수맹일전[許行願受氓一廛]맹자(孟子)에 있는 말인데, 등(藤)이라는 나라에서 맹자의 권고를 듣고 정전법(井田法)을 실시하였는데, 신농씨(神農氏)를 말하는 허행(許行)이 등 나라에 와서 토지 한 구역을 얻어서 농사지었다고 하였다.
♣ 허허남화생[栩栩南華生]남화생은 곧 남화진인(南華眞人)에 추증된 장자(莊子)를 말하는데, 이 말은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옛날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기뻐하며 훨훨 날으는 나비가 분명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허혼[許渾]당(唐) 나라 사람. 자는 중회(仲晦)ㆍ목주(睦州)ㆍ영주(郢州)의 자사(刺吏)를 역임하였고 시(詩)에 능하였으며, 저서에는 정묘집(丁卯集)이 있음.
♣ 허흡[噓吸]허흡은 마치 사람의 호흡처럼 대기(大氣)가 동탕(動蕩)한다는 뜻으로 바람을 가리키는데, 장자(莊子) 천운(天運)에 “風起北方 …… 孰噓吸是”라는 표현이 있다.
♣ 허희[歔欷]흐느껴 울다.
♣ 헌가체부[獻可替否]시행해야 할 것을 적극 권장하고, 시행하면 안 될 것을 폐지하도록 강력히 진언(進言)하는 것을 말한다.
♣ 헌각[軒閣]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의 누각으로, 성군의 궁전을 뜻한다.
♣ 헌거[軒擧]높이 솟는 기상으로 의기가 당당함을 말한다.
♣ 헌공롱[獻空籠]전국(戰國) 시대 제왕(齊王)은 변사(辯士) 순우곤(淳于髡)을 시켜 초왕(楚王)에게 학(鶴)을 바치게 하였는데, 순우곤은 도중에서 학은 놓아주고 초 나라에 이르러 빈 새장만을 바치면서 “신(臣)이 제왕의 사신이 되어 학을 가져왔는데 도중에 학에게 물을 먹이다가 그만 놓쳐버렸습니다. 신은 즉시 죽어 사람들의 시비를 끊고 싶었습니다만 신이 만일 죽는다면 우리 임금에게 선비를 죽게 했다는 누명을 끼쳐 드릴까 염려되옵고, 단 딴 학을 사서 대신 바치려 하였으나 이것은 신(信)이 아니므로 왕을 속이는 것이며, 딴 나라로 가버리려고 하였으나 이렇게 되면 우리 제초(齊楚)의 두 왕의 사신이 불통할까 두려워하여 이대로 와서 죄를 청합니다.” 하였더니 초왕은 도리어 기뻐하며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事文類聚 後集 卷四十二 羽虫部》
♣ 헌근[獻芹]옛적에 들에 사는 한 백성이 미나리 나물을 먹다가 맛이 좋다 하여 임금에게 바치려 하였다.
♣ 헌금[軒禽]헌금은 수레를 타는 새로, 위의공(衛懿公)이 학을 좋아하여 수레에 태우고 다녔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 헌길[獻吉]헌길은 명(明) 나라 학자 이몽양(李夢陽)의 자이다.
♣ 헌납[獻納]송나라 때의 명신(名臣)인 부필(富弼)이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가서 헌(獻) 자와 납(納) 자를 쓰는 일을 가지고 거란의 임금과 다툰 일을 말한다. 부필이 거란에 사신으로 갔을 때 거란의 임금이 세폐(歲幣)를 더 바치기를 요구하면서 부필에게 말하기를, “남조(南朝)에서 나에게 세폐를 보내면서는 마땅히 올려 바친다는 ‘헌(獻)’ 자를 써야 하고, 아니면 바친다는 ‘납(納)’ 자라도 써야 한다.” 하자, 부필이 이 두 글자를 쓸 수 없다고 다투었다. 그러자 거란의 임금이 “남조에서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 이 두 글자를 쓰지 못할 일이 뭐가 있는가. 만약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쳐들어간다면 후회가 없겠는가?”하니, 부필이 말하기를, “만약 부득이 군사를 출동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면 곡직(曲直)을 가지고 승부를 결정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거란측에서 부필의 뜻을 굽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직접 송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결정하게 하였다. 부필이 조정에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거절하여 저들의 기세가 꺾였으니 허락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마침내 ‘납’ 자를 써서 거란의 사신에게 주었다. 《宋史 卷三百十三 富弼列傅》
♣ 헌납[獻納]헌납(獻納)은 좋은 계책을 임금에게 바침이다.
♣ 헌릉[獻陵]당 고조의 능.
♣ 헌말[獻襪]옛날에 장지(長至; 동지)를 밟는다는 뜻에서 동지일(冬至日)이면 시부모에게 버선을 지어 올리는 풍속이 있었던 데서 온 말인데, 조식(曹植)의 하동지표(賀冬至表)에 의하면 “버선 일곱 켤레를 바치며 아울러 말송을 드린다.[獻襪七緉 幷爲襪頌]”하였다.
♣ 헌말송[獻襪頌]위(魏) 나라 때 조식(曹植)의 하동지표(賀冬至表)에 “버선 일곱 켤레를 바치며 아울러 말송을 올립니다.[獻襪七緉 幷爲襪頌]”하였다.
♣ 헌면[軒冕]옛날에 대부(大夫) 이상의 고관이 타던 수레와 입던 옷으로, 현달하여 고관이 되는 것을 말한다.
♣ 헌부재명조질군[獻賦才名早軼群]한 무제(漢武帝)가 사마상여의 자허부(子虛賦)를 읽고 감탄한 나머지 그를 대궐에 불러들이자, 상여가 그 사부(詞賦)는 제후의 일을 노래한 것이라며 다시 천자의 수렵을 소재로 하여 상림부(上林賦)를 지어서 바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 헌상[軒裳]고관이 타는 수레와 관복
♣ 헌수[獻酬]헌수는 서로 술을 주고받는 것으로 주객(主客) 간의 예의를 뜻한다.
♣ 헌신저힐[軒臣沮頡]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의 신하 저송(沮誦)과 창힐(蒼頡). 이 두 사람이 함께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었음.
♣ 헌양[헌陽]언양(彦陽)의 고호임.
♣ 헌옥재월[獻玉再刖]솥의 발이 두 개가 부러졌으므로 한 말이다.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에 “초(楚) 나라 화씨가 초산(楚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었다. 이를 여왕(厲王)에게 바쳤는데, 옥공(玉工)에게 감정하게 하였던 바 돌이라 하므로 화씨의 왼쪽 발을 잘랐다.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르자 또 바쳤는데, 감정시킨 결과 또 돌이라 하였으므로 그의 오른쪽 발을 잘랐다.” 하였다.
♣ 헌우[軒虞]황제(黃帝)와 순(舜) 임금이다.
♣ 헌우초[軒芋艸]물가에 나는 냄새가 나는 풀.
♣ 헌원[軒轅]중국 상고 때 신농씨(神農氏)다음의 천자인 황제(黃帝)를 가리킨다.
♣ 헌원대[軒轅臺]황제(黃帝)가 살았었다는 헌원구(軒轅丘)에 쌓았던 대(臺)인데, 지금 하남성신정현(新鄭縣) 서북에 있다.
♣ 헌원성[軒轅星]왕후를 상징한다고 믿어진 별 이름이다.
♣ 헌원탁록[軒轅涿鹿]헌원씨(軒轅氏)가 탁록의 들에서 치우(蚩尤)와 크게 싸웠다 한다.
♣ 헌저[軒翥]높이 오르다.
♣ 헌전[軒躔]헌원성(軒轅星) 별자리로, 옛날에 여주(女主)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 헌지추우[軒墀簉羽]헌지는 조정의 수레와 섬돌을 말하는데, 옛날 춘추 시대 위 의공(衛懿公)이 학을 기르기를 좋아한 나머지 대부(大夫)의 수레에 학을 태우고 돌아다녔던 고사가 있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수레와 섬돌에 올랐던 학처럼 총애받고, 사냥 나간 문왕(文王)이 태공망(太公望) 얻은 듯하였다네.[軒墀曾寵鶴 畋獵舊非熊]”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3 投贈哥舒開府翰》
♣ 헌체[獻替]헌가체부(獻可替否)의 준말. 헌체는 시행할 만한 것은 진언하고 시행하지 못할 것은 폐기해 버린다는 뜻으로, 국사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가리킨다. 곧 간쟁한다는 뜻임. 《春秋左傳 昭公 二十年》
♣ 헌폭헌[獻曝軒]송(宋) 나라의 농부가 추운 겨울을 간신히 넘긴 뒤 봄철의 따뜻한 햇볕을 쪼이고는 임금에게 이 햇볕을 바쳐 중상(重賞)을 받고 싶다고 한 ‘야인헌폭(野人獻曝)’의 고사를 인용하여 명명한 것이다.
♣ 헌학[軒鶴]춘추시대 위의공(衛懿公)이 학을 매우 좋아하여 학에게 벼슬을 내리고 수레에 태워 함께 다녔다는 데서 나온 말로, 아무런 능력도 없이 벼슬자리에 앉아 국록을 먹는 것에 비유한다. 《左傳 閔公 二年條》
♣ 헌헌[憲憲]성하게 일어나는 모양, 기뻐하는 모양
♣ 헌호[軒昊]중국 태고의 제왕인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와 태호 복희씨(太昊伏羲氏)의 합칭으로, 순박하던 태고시대를 가리킨다.
♣ 헌황제율순탄금[軒皇制律舜彈琴]헌황은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로, 그의 치세에 천지의 기운이 조화되어 풍기(風氣)가 정대하였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영륜(伶倫)으로 하여금 12율려(律呂)를 만들게 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21 律曆志》 또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어 남풍(南風)의 시를 노래하자 천하가 다스려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禮記 樂記》 참고로 난세(亂世)를 비유한 표현으로 두보(杜甫)의 “헌원은 율 만들기를 그만두었고, 순 임금은 비파 타기를 멈추었네.[軒轅休製律 虞舜罷彈琴]”라는 시구가 있다. 《杜少陵詩集 卷23 風疾舟中伏枕書懷》
♣ 헌훤[獻喧]남에게 크게 소용이 되지 않는 물건을 바친다는 뜻의 고사성어.
♣ 헌희[軒羲]상고 시대 성왕(聖王)인 헌원씨(軒轅氏)와 복희씨(伏羲氏)를 합칭한 말로, 태평 성대를 의미한다.
♣ 헐후[歇後]헐후체(歇後體)를 말함. 즉 어떤 성어(成語)의 뒷말을 약하고 그 윗부분만으로 전체의 뜻을 나타내는 일종의 은어(隱語). 예를 들면, 서경(書經) 오자지가(五子之歌)의, “이궐자손(貽厥子孫)”에서, 이궐만을 따서 자손을 나타내고, 동 군진(君陳) 편의 “우우형제(友于兄弟)”에서 우우만을 따서 형제를 나타내는 것과 같은 것임. 신당서(新唐書) 정경전(鄭綮傳)에. “정경(鄭綮)이 시를 잘하여 그 말에 배해(俳諧)가 많으므로 세상이 모두 정오(鄭五)의 헐후체라 일렀다.”라고 보인다.
♣ 헐후체[歇後體]뒷말을 약한 시체.
♣ 험윤[玁狁]험윤은 북방의 오랑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유월(六月) 편 주자(朱子)의 주(註)에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이 이미 별세하자 주(周) 나라 왕실이 점점 쇠미하였다. 그리고 팔세(八世)를 지나 여왕(厲王)이 포학하자 주 나라 사람들이 그를 축출하여 체(彘) 땅에 거주하게 하니, 이에 험윤이 침략하여 경읍(京邑)에 이르렀다. 여왕이 죽고 아들 선왕(宣王)이 즉위하여 윤길보(尹吉甫)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하였다.
♣ 험희[險巇]질투하는 마음이 음험하다.
♣ 혁노[赫怒]시경(詩經) 대아(大雅) 황의(皇矣)의 “王赫斯怒”에서 나온 말로, 황제가 크게 한 번 성내어 오랑캐에게 위엄을 보여 준다는 말이다.
♣ 혁면[革面]허물을 고침. 주역(周易) 혁(革)괘 상륙(上六)에, “君子豹變 小人革面”이라고 보임.
♣ 혁부호변[革孚虎變]“큰 사람이 범처럼 변한다.[大人虎變]”는 말이 주역(周易) 혁(革)괘에 있는데, 해석하되, “제도를 손익(損益)하고 창제하여 문장의 미가 찬연히 볼 만하여 범처럼 변함과 같음이 있다.”는 것이다.
♣ 혁장[鬩墻]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형제끼리 집안에서는 다투지만, 밖에서는 서로 감싸주네[兄弟鬩于墻 外禦其務]” 한 데서 온 말인데, 곧 어렸을 때를 가리킨 말이다.
♣ 혁지홍곡[奕志鴻鵠]학문에 전념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천하의 고수인 혁추(奕秋)에게 바둑을 배우면서 한 사람은 전념으로 배우고 한 사람은 ‘기러기가 오면 잡아야지’ 하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배우면 재주는 같지만 결과는 다르다.”고 한 말을 지칭한 것이다. 《孟子 告子上》
♣ 혁혁[奕奕]사물이 큰 모양, 아름다운 모양, 빛이 번쩍하는 모양, 왕성한 모양, 가는 모양, 춤추는 모양, 근심하는 모양, 연속되는 모양
♣ 혁혁[嚇嚇]하하 웃는 웃음소리
♣ 혁화[革華]혁화는 가죽신을 가리킨 말이다.
♣ 현가[絃歌]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는 것으로, 전하여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것을 뜻한다.
♣ 현가[絃歌]현악(絃樂)에 맞추어 노래 부른다는 뜻으로, 정사를 함에 있어서 법도가 있어 백성들이 안락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노(魯) 나라 때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예악(禮樂)으로 가르쳤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현가하였다고 한다. 《論語 陽貨》
♣ 현가락[絃歌樂]어려움 속에서도 예악(禮樂)을 견지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재액(在厄)에 “외부와 두절된 상태에서 이레나 양식이 떨어지고 채소국도 충분히 먹지 못해 종자(從者)들이 모두 괴로워했는데도 공자만은 더욱 강개하여 강송하며 현가(絃歌)를 끊이지 않았다.” 하였다.
♣ 현가무성[絃歌武城]조그마한 고을 수령의 어진 정사를 말한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원으로 있을 때에 공자가 갔더니, 고을에 현가(絃歌)의 소리가 울려 퍼지자, 공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닭을 잡는 데에 어찌하여 소 잡는 칼을 쓰느냐.”고 농담을 한 고사가 있다. 학교를 설치하고 교육을 시키는 데 예와 악[禮樂]을 가르치므로 줄을 퉁기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 현가지[弦歌志]세상을 예악(禮樂)으로 다스리려는 뜻을 이름. 일찍이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원이 되었을 때 공자가 그곳을 가니 현가의 소리가 들렸다는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陽貨》
♣ 현가지호성[絃歌至虎城]현가는 거문고나 비파 등으로 시나 노래를 읊는 것이며 호성(虎城)은 무성(武城)으로 고려 혜종(惠宗)의 이름을 휘(諱)한 것임. 공자(孔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무성의 원이 되었었는데 공자가 그 고을에 가자, 곳곳에서 현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공자는 자유가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다스린다 하여 매우 기뻐한 일이 있었다. 《論語 先進》
♣ 현감[玄鑑]깊은 견해, 임금.
♣ 현개경[玄介卿]거북 또는 귀갑(龜甲)을 지칭하는 말로, 장수(長壽)를 뜻한다.
♣ 현거[懸車]현거속마(懸車束馬)의 준말로, 험난한 역정(歷程)을 뜻한다.
♣ 현거[懸車]수레를 달아매고 다시 출세하지 않을 뜻을 보인다는 말. 후한서(後漢書)에 “진식(陳寔)이 여러 번 부름을 입고도 나서지 않음과 동시에 문을 닫고 수레를 매달았다[陳寔屢徵不起閉門懸車].” 하였다.
♣ 현거[懸車]재상이 늙어 퇴직한 뒤에는 수레를 달아매 놓고 다시 출입하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한(漢) 나라 때 설광덕(薛廣德)이 연로(年老)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나온 뒤 천자가 하사한 안거(安車)를 매달아 놓고 자손에게 전하여 영광으로 삼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 곧 치사(致仕)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漢書 卷七十一 薛廣德傳》
♣ 현검[懸劍]춘추 시대 오(吳) 나라 계찰(季札)의 고사. 처음 먹은 마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뜻함. 계찰이 상국(上國)으로 사신가는 길에 서(徐) 나라 임금을 잠깐 찾아보았는데, 서 나라 임금이 계찰의 보검(寶劍)을 보고는 그것을 갖고 싶어하면서도 차마 말을 못하였다. 그러자 계찰은 마음속으로 그 칼을 그에게 주기로 약속하고 떠났었는데, 그후 계찰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곳에 들르니 서 나라 임금이 이미 죽었으므로, 계찰이 “내가 처음에 마음속으로 이미 허락한 것이니, 그 사람이 죽었다 해서 내 마음을 변할 수 없다.” 하고, 그 칼을 그의 묘수(墓樹)에 걸어두고 떠났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三十一 吳太伯世家》
♣ 현경[玄經]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태현경(太玄經)을 가리킨다. 양웅이 좋아하는 술도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였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중에 가끔씩 문자를 물으러 오는 자들이 주효(酒肴)를 싸 들고 왔다는 고사가 있다. 《漢書 揚雄傳下》
♣ 현경실[懸磬室]아무것도 없는 집을 가리킨다. 국어(國語) 노어(魯語)에 “노(魯) 나라의 창고가 텅 비어서 마치 틀에 매달려 있는 경쇠와 같다.” 했으므로 이른 말이다.
♣ 현경자[玄卿子]먹의 이칭.
♣ 현경초[玄經草]양웅(揚雄)은 은거(隱居)하면서 태현경(太玄經) 초고(草稿)를 만들었다.
♣ 현경취후종조백[玄經就後從嘲白]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을 때에 벼락감투를 쓴 자들이 “완전히 검지 못하고 아직도 하얗다.[玄尙白]”고 조롱들을 하였는데, 여기에 기인하여 후대에 공명(功名)을 이루지 못한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漢書 揚雄傳下》
♣ 현곡[玄谷]정백창(鄭百昌)의 호이다.
♣ 현곤[玄袞]제사를 지낼 때 입는 예복이다.
♣ 현공[玄公]호가 현옹(玄翁)인 신흠(申欽)을 말한다.
♣ 현관[玄關]불가(佛家)의 말. 입도(入道)의 관문을 말함. 불문(佛門)에 귀의(歸依)하는 입구를 가리킨 말로, 곧 선사(禪寺)의 궁(宮殿)에 들어가는 문이다. 《運步色葉集 玄關》
♣ 현관[玄關]현묘(玄妙)한 도(道)와 관문. 보등록(寶燈錄)에, “현관을 크게 열고 바른 눈을 유통케 한다[玄關大啓 正眼流通].” 하였다. 또 도를 닦는 집의 문을 지칭하기도 한다. 당시(唐詩)에, “수풀 밑에 현관(玄關)을 닫았네.” 하였는데 이는 절[寺]을 말한 것이다.
♣ 현관[賢關]현자(賢者)의 경지에 통하는 관문이란 뜻으로, 전하여 학문과 덕행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가리켜 말한다. 또는 태학(太學)의 뜻으로도 쓰인다.
♣ 현관동규벽[賢關動奎壁]문운(文運)이 열리었음을 뜻함. 규성(奎星)은 문장(文章)을 주관하고, 벽성(壁星)은 문서(文書)를 주관한다고 하므로 이른 말이다.
♣ 현관폐자운[玄關閉子雲]현관은 집의 문을 말하고, 자운(子雲)은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자이다. 그가 애제(哀帝) 때에 두문불출하고 집에 꼭 들어앉아 태현경(太玄經)을 초(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漢書 卷八十七 揚雄傳》
♣ 현괘[礥卦]양기(陽氣)가 아주 약해서 뚫고 나오려고 해도 나오지 못하는 괘상. 《太玄經 礥》
♣ 현구[玄駒]개미의 별칭. 깜깜한 땅속을 치달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 현구[玄龜]수경(水經) 낙수(洛水) 주(注)에 “황제(黃帝)가 동으로 하수(河水)를 순행하여 낙수를 지나면서 단(壇)을 갖추고서 벽(璧)을 물에 넣고, 하수에서 용도(龍圖)와 낙수에서는 구서(龜筮)를 받았는데 적문(赤文) 전자(篆字)였다.” 하였음.
♣ 현국[顯國]장신(張紳)의 자(字)이다.
♣ 현궁[玄宮]제왕의 분묘(墳墓)를 뜻하는 말이다. 임금이나 왕후의 재궁(梓宮)을 묻는 광중(壙中)을 말한다.
♣ 현규[玄圭]검은 옥으로 만든 규벽(圭璧). 우(禹)가 치수를 끝내고 그 성공을 순(舜)에게 고하면서 예물로 올린 규벽. 《書經 禹貢》
♣ 현규[玄圭]우 임금이 치수(治水)할 때 가지고 갔다가 돌아와 바친 검은 색 홀[圭].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우임금은 현규를 바치고 성공을 고했다.[禹錫玄圭 告厥成功]" 하였다.
♣ 현기[蠉蚑]꿈틀거리는 벌레의 모양으로 고전(古篆)의 자획(字畫)을 가리킨 것이다.
♣ 현기[玄機]현기는 심오하고 미묘한 기틀을 말한다.
♣ 현기련[蚿夔憐]가까이 지내며 서로 돕는 것을 비유한 말. 현은 발이 백여개나 달린 벌레의 이름이고, 기는 발이 하나만 달린 짐승의 이름으로,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기는 현을 부러워한다.[夔憐蚿]" 한 데서 온 말이다.
♣ 현녀[玄女]전설에 나오는 천상(天上)의 선녀(仙女)로, 황제(黃帝)에게 병법(兵法)을 가르쳐 주어 치우(蚩尤)를 제압하게 했다 한다. 《史記 五帝本紀》
♣ 현노[賢勞]혼자서만 나랏일에 고생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대부가 균평하지 못하여서 나 혼자만 종사하게 해 홀로 어질다 하네.[大夫不均 我從事獨賢]”하였다.
♣ 현노철련여[賢路輟連茹]군자 한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 천하의 현재(賢才)가 모여드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태괘(泰卦) 초구(初九)에 “띠풀의 뿌리를 뽑듯 동지들이 모여드니 길하다.[拔茅茹 以其彙征 吉]”하였다.
♣ 현단[玄壇]천단(天壇)과 같은 말로,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壇)을 이름.
♣ 현단아양금[絃斷峨洋琴]자신을 알아주던 친구가 죽었다는 뜻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백아(伯牙)는 금(琴)을 잘 탔고, 종자기(鐘子期)는 소리를 잘 들었다. 백아가 금을 타면서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아아(峨峨)하기 태산(泰山)과 같구나.’ 하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양양(洋洋)하기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였다. 그 뒤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금을 타지 않았다.” 하였다.
♣ 현담[玄談]심묘(深妙)한 이야기란 뜻으로, 즉 황로(黃老)의 도(道)를 말한다. 이백(李白)의 시에 “청론은 손뼉을 치게 하는데, 현담에 또다시 절도하누나.[淸論旣抵掌 玄談又絶倒]" 하였다.
♣ 현당[玄堂]무덤을 말하는 것으로 죽었다는 말이다. 문선(文選) 사조(謝眺) 제경황후애책문(齊敬皇后哀策文)에 “푸른 장막을 언덕에 폈으니 현당의 사립문이 열렸구나.” 하였다.
♣ 현대[玄臺]현대는 황천과 같은 말이다.
♣ 현덕[玄德]삼국 시대 촉한(蜀漢)을 세운 유비(劉備)의 자. 그는 제갈량(諸葛亮)을 초빙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몸소 찾아가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고사를 남겼다.
♣ 현덕[玄德]서경(書經) 순전에, “현(玄)한 덕이 요임금께 들리다[玄德升聞].” 하였음.
♣ 현덕류우환[玄德類虞鰥]우순(虞舜)이 홀아비로 있을 때에 그윽하고 미묘한 덕[玄德]이 요(堯) 임금에게 알려져서 딸을 주고 벼슬을 주었다.
♣ 현덕실저[玄德失箸]현덕은 삼국 시대 촉(蜀) 나라 유비(劉備)의 자이다. 조조(曹操)가 천하 영웅으로는 자신과 유비밖에 없다고 하자, 유비가 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떨어뜨렸는데 그때 마침 천둥이 울리자 유비가 조조에게 성인의 말을 인용하여 해명하였다고 한다. 《蜀志 先主劉備傳》
♣ 현도[玄道]노장학(老莊學)을 말한다. 도덕경(道德經) 1장에 “玄之又玄 衆妙之門”이라 하였다.
♣ 현도[玄度]진(晉) 나라 때 사람으로 산택(山澤)에서 노닐기를 매우 좋아하고, 청담(淸談)을 즐겼던 동진(東晉)의 명사 허순(許詢)의 자(字)이다.
♣ 현도[玄都]현도는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한다.
♣ 현도관[玄都觀]중국 협서성(峽西省) 장안현(長安縣) 숭녕방(崇寧坊)에 있던 수ㆍ당(隋唐)시대 도관(道觀)의 이름인데, 당(唐) 나라 문장가 유우석(劉禹錫)이 즐겨 놀았던 곳이라 한다. 유우석이 그곳에서 간화시(看花詩)를 읊었음. 장안지(長安志)에 “수 나라가 장안 옛 성에서 이곳으로 통도관(通道觀)을 옮기고 현도(玄都)로 이름을 고쳤다.” 하였음.
♣ 현도국[懸渡國]나라 이름. 서양잡조(西陽雜俎) 경이(境異)에 “오모산(烏耗山) 서쪽에 현도국이 있는데 길이 험하여 줄을 타야만 넘어갈 수 있다.” 하였다.
♣ 현도단[玄都壇]신선들이 수련(修鍊)하는 단(壇). 현도(玄都)에는 반고진인(盤古眞人)ㆍ원시천존(元始天尊)ㆍ태원성모(太元聖母)가 있다 한다. 《枕中記》
♣ 현도도수[玄都桃樹]현도는 당(唐) 나라 때 장안(長安)에 있던 관(觀) 이름인데,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낭주 사마(朗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10년 만에 풀려 경사에 돌아와 보니, 현도관에 이전에 없던 복숭아나무를 한 도사(道士)가 새로 많이 심어 놓았으므로, 그 복숭아나무를 당시의 권신(權臣)들에 비유하여 풍자하는 뜻으로 시를 지었는바, 그 시에 “서울 거리 뿌연 먼지가 얼굴을 스치는데, 사람들이 모두 꽃구경 갔다 온다 말하네. 현도관 안에 있는 천 그루 복숭아나무는, 모두가 이 유랑이 떠난 뒤에 심은 거라오[紫陌紅塵拂面來 無人不道看花回 玄都觀裹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 한 데서 온 말이다.
♣ 현도심지둔[玄度尋支遁]현도는 동진(東晉) 때의 명사였던 허순(許詢)의 자이고, 지둔(支遁)은 역시 동진 때 고승(高僧) 이름이다. 허순은 평소 산택(山澤)에 노닐기를 매우 좋아하였고, 특히 고승 지둔과는 서로 친근하게 종유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 현도종도춘[玄都種桃春]현도관은 당(唐) 나라 때 장안(長安)에 있던 도관(道觀)의 이름이다. 현도관에는 본디 아무런 꽃도 없었는데, 유우석(劉禹錫)이 낭주 사마(朗州司馬)로 폄척되었다가 10년 만에 풀려나 돌아와 보니, 그 동안에 어느 도사(道士)가 현도관에 선도(仙桃)를 가득 심어 놓아서 꽃의 화려하기가 마치 붉은 놀[紅霞]과 같았으므로, 유우석이 꽃구경한 제군(諸君)에게 준 시에 “장안 거리 붉은 먼지가 얼굴을 스치는데, 사람마다 꽃구경하고 돌아온다 하누나. 현도관 안의 복숭아나무 일천 구루는, 모두가 유량이 떠난 뒤에 심은 거라오[紫陌紅塵拂來 無人不道看花回 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 한 데서 온 말이다.
♣ 현동[玄同]물아(物我)의 차이가 없음을 이름. 노자(老子) 현덕(玄德)에 “자신의 빛을 부드럽게 하고 세속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현동이라 한다[和其光同其塵 謂之玄同].”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서로 의기가 투합함을 이른 말이다.
♣ 현동[玄童]이른 나이에 죽은 영특한 소년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아들 동오(童烏)가 아홉 살 때에 태현경(太玄經)의 저술을 도울 정도로 총명했는데 그만 일찍 죽고 만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法言 問神》
♣ 현두자고[懸頭刺股]머리를 노끈으로 묶어 높이 걸어 잠을 깨우고 또 허벅다리를 찔러 잠을 깨운다. 학업에 매우 힘쓰는 것을 말한다.
♣ 현람[玄覽]형이상학(形而上學)적 탐구를 말한다. 도덕경(道德經) 10장에 “마음을 씻고 현묘하게 관찰하여 하나의 오류도 없게끔 한다.[滌除玄覽 能無疵乎]”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현량[賢良]현량은 관리를 등용하는 하나의 과목이다.
♣ 현량책[賢良策]한 문제(漢文帝)가 조서(詔書)하여 현량(賢良)ㆍ방정(方正)ㆍ문학(文學)ㆍ재력(材力)의 4과(科)를 두고, 재주 있는 선비를 들어서 차서를 따르지 않고 등용했다. 《漢書 文帝紀》
♣ 현려[縣黎]미옥(美玉)의 이름인데, 사기(史記) 범휴전(范睢傳)에 의하면 “주(周) 나라에는 지액(砥砨)이 있고, 송(宋) 나라에는 결록(結綠)이 있고, 양(梁) 나라에는 현려가 있고, 초(楚) 나라에는 화박(和朴)이 있었는데, 이 네 가지 보배는 천하의 명기(名器)가 되었다.” 하였다.
♣ 현려[懸黎]현려는 아름다운 옥(玉)의 이름.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양(梁) 나라에는 현려가 있고, 초(楚) 나라에는 화벽(和璧)이 있어 천하의 유명한 보물이 되었다.” 하였다.
♣ 현령동음어여회[玄齡同音於如晦]당태종 때에 두 사람이 같이 재상의 자리에 있어 합심하여 임금을 도왔다. 세상에서 어진 정승을 말할 때에는 방두(房杜)라 일컬었다.
♣ 현로[賢勞]혼자서만 나랏일에 고생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대부가 균평하지 못하여서 나 혼자만 종사하게 해 홀로 어질다 하네.[大夫不均 我從事獨賢]”하였다.
♣ 현로[玄老]자가 경숙(敬叔)인 신흠(申欽)의 호가 현옹(玄翁)이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 현로탄[賢勞歎]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하늘 아래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땅이요, 그 땅 위에 사는 사람 모두 왕의 신하인데, 그 신하들 공평하게 고루 쓰지 않으시어, 나만 혼자 잘났다고 죽도록 일하누나.[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大夫不均 我從事獨賢]”라는 말이 있는데,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는 이 시가 “막비왕사 아독현로[莫非王事 我獨賢勞]”로 인용되어 있다.
♣ 현륭원[顯隆園]경기도 화성군(華城郡) 안룡면(安龍面) 화산(花山)에 있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이다.
♣ 현릉[玄陵]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을 이름. 현릉은 그의 능호(陵號).
♣ 현리[玄리]검은 용.
♣ 현매[俔妹]하늘의 누이동생에 비유할 만한 성덕(聖德) 있는 여인이란 뜻으로, 주 문왕(周文王)의 비(妃) 태사(太姒)를 일러 시경(詩經) 대아(大雅) 대명(大明)에 “대방에 자식 있으니 하늘의 누이에 비유하리로다[大邦有子 俔天之妹]” 한 데서 온 말이다.
♣ 현명[玄冥]동신(冬神). 형살(刑殺)을 담당하는 북방(北方)의 신(神)으로 동장군(冬將軍)을 말한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맹동, 중동, 계동의 달은, 그 제(帝)는 전욱(顓頊)이고 그 보좌하는 신(神)은 현명(玄冥)이다.” 하였다. 수신(水神). 우사(雨師)라고도 한다.
♣ 현명[玄明]약의 이름.
♣ 현모양처[賢母良妻]자식에게는 어진 어머니면서 남편에게는 착한 아내
♣ 현무[玄武]별이름. 현무는 북방 현무에 두(斗)ㆍ우(牛)ㆍ여(女)ㆍ허(虛)ㆍ위(危)ㆍ실(室)ㆍ벽(壁)의 일곱 별이다.
♣ 현무구진[玄武鉤陳]현무(玄武)는 북방을 가리키고, 구진(鉤陳)은 자미궁(紫微宮) 밖의 군대를 상징하는 별자리 이름으로, 대궐의 근위병(近衛兵)을 뜻한다.
♣ 현무칠숙[玄武七宿]북방의 일곱 별인 두(斗)ㆍ우(牛)ㆍ여(女)ㆍ허(虛)ㆍ위(危)ㆍ실(室)ㆍ벽(壁)의 통칭 현무(玄武)는 거북으로 나타내며 북방의 태음신(太陰神)을 상징함.
♣ 현묵[玄黙]한(漢) 나라 문제(文帝)가 몸소 현묵(玄黙)을 닦아서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렸다 하는데, 현묵(玄黙)이란, 현묘(玄妙)한 도(道)를 묵묵히 생각하여 법령이나 군사를 너무 떠벌리지 않고 백성을 절로 교화되게 하는 것이다.
♣ 현문[玄門]현묘한 문(門)인데, 불가(佛家) 도가(道家)이다.
♣ 현보[縣譜]고을을 다스리는 데 대한 전가(傳家)의 비결을 뜻함. 남제(南齊) 때 부승우(傅僧祐)가 산음령(山陰令)으로 치적의 명성이 높았는데, 그의 아들인 부염(傅琰) 또한 송 무제(宋武帝) 때에 무강령(武康令)ㆍ산음령(山陰令)을 지내면서 뛰어난 치적을 올려 백성들에게 부성(傅聖)이란 칭호를 받기까지 하여 부자(父子)가 모두 치적의 명성이 높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씨(傅氏)들에게는 치현보(治縣譜)가 있는데, 자손들이 서로 전하면서 남에게는 보여 주지 않는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南史 卷七十》
♣ 현비[翾飛]가볍게 나는 모양.
♣ 현빈[玄牝]도가(道家)의 용어로, 새끼를 낳는 암컷, 즉 도(道)를 말한다.
♣ 현빈지신[玄牝之神]만물을 내는 도(道)를 말한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6장에 “골짜기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러 현빈(玄牝)이라 한다.” 하였다.
♣ 현산[峴山]현산은 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 남쪽 3리 지점에 있는 산이다.
♣ 현산방공[峴山龐公]후한(後漢) 때 현산 남쪽에 은거하면서 유표(劉表)의 초청을 사절한 고사(高士) 방덕공(龐德公)을 말한다.
♣ 현상[玄霜]신선(仙藥)이 먹는다는 불로장생의 선약.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에 “선가(仙家)의 상약(上藥)에 현상ㆍ강설(絳雪)이 있다.” 하였다.
♣ 현상[玄裳]학(鶴)의 이칭(異稱)인 현상호의(玄裳鎬衣)의 준말. 현상호의는 곧 흑색의 상(裳)과 백색의 상의(上衣)라는 뜻이다.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에, “학이 검은 치마 흰 저고리로 배를 스쳐 지나 갔다.” 하였다.
♣ 현상백[玄尙白]현(玄)은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을 가리키면서 검다는 뜻을 내포하고, 상백(尙白)은 아직도 여전히 희다는 말인데, 양웅을 조롱한 이 말이 후대에는 공명(功名)을 성취하지 못했다고 잘못 비평할 때 종종 쓰이게 되었다. 《漢書 揚雄傳下》
♣ 현상우객[玄裳羽客]학(鶴)의 모양을 일컫는 말이다.
♣ 현석[玄石]천일주(千日酒)를 마시고 잠이 들어 삼년상까지 치룬 후에야 깨어났다는 사람.
♣ 현석천년환부성[玄石千年喚不醒]중산(中山) 사람 적희(狄希)가 한 번 마시면 천 일 동안 깨지 않는 술을 만들었는데, 유현석(劉玄石)이 이 술을 마시고 취해 쓰러진 나머지 가족들에 의해 무덤 속에 매장까지 되었다가 천 일 만에 깨어났던 고사가 전한다. 《博物志, 搜神記》
♣ 현선야당부[玄蟬惹螗斧]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운 나머지 그 뒤에 올 재화(災禍)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매미는 이슬에만 정신이 팔려 사마귀가 다가오는 것을 모르고 그 사마귀 역시 황작(黃雀)이 노리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螳螂捕蟬 黃雀在後”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莊子 山木ㆍ說苑 正諫》
♣ 현섬호[玄纖縞]현(玄)은 검은 비단이며, 섬(纖)은 세로는 검은 실로 가로는 흰 실로 짠 비단이며, 호(縞)는 흰 비단이다.
♣ 현성[玄成]현성은 당 태종(唐太宗)의 명신(名臣) 위징(魏徵)의 자이다.
♣ 현성작경[玄成作鏡]현성은 당(唐) 나라 위징(魏徵)의 자(字). 위징이 죽자 당 태종(唐太宗)이 탄식하기를 “동(銅)으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衣冠)을 바룰 수 있고, 옛것으로 거울을 삼으면 흥망(興亡)을 알 수 있고,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득실(得失)을 밝힐 수 있다. 짐이 항상 이 세 거울을 보화로 하여 과실을 방지하였는데 지금 위징이 죽었으니 거울 하나가 없어졌다.” 하였다. 《唐書 魏徵傳》
♣ 현송[絃誦]현송은 금슬(琴瑟)을 탄주(彈奏)하면서 낭송하는 것으로 학업의 일종이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봄에는 시를 외우고 여름에는 거문고를 탄다.” 하였다.
♣ 현수[絃手]양민(良民)이나 천민(賤民)중에서 음악을 아는 여자를 통칭하는 말.
♣ 현수[峴首]양양(襄陽)의 별칭이다. 타루비(墮淚碑)로 유명한 진(晉) 나라 양호(羊祜)의 현산비(峴山碑)가 양양현(襄陽縣) 남쪽의 현수산(峴首山)에 있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 현수갈[峴首碣]양양(襄陽)의 현산(峴山). 양호(羊祜)를 추모하여 세운 비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며 양호의 덕을 추모하여 눈물을 떨어뜨리므로 타루비(墮淚碑)라 불렀다.
♣ 현수공조고[峴首空弔古]진(晉) 나라 양호(羊祜)가 현산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다 비감에 젖어 눈물을 흘리며, “우주가 있고부터 이 산이 있었을 터이고 지금 우리처럼 이 산에 오른 이 가운데 현인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모두 인몰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니, 이를 생각함에 비감이 든다.” 하였다. 《太平御覽 荊州圖記》
♣ 현수교[賢首敎]불교의 한 종파(宗派)로 화엄종을 말한다. 중국의 중 현수(643~712)에 의하여 크게 이루어진 종파이므로 이렇게 말한다.
♣ 현수금릉[玄叟金陵]현수는 상촌의 별호가 현옹(玄翁)이므로 상촌을 가리키고, 금릉은 경기 김포(金浦)의 옛 이름이다. 곧 상촌이 계축옥사로 삭탈관작되어 김포의 선영 밑으로 돌아와 계부(季父) 광서(光緖)의 두 칸짜리 농가에서 하루암(何陋菴)이라 편액을 걸고 거처하였던 것을 이른다.
♣ 현수단갈[峴首短碣]진(晉) 나라 양호(羊祜)가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있었을 때의 정사를 잊지 않기 위하여 백성들이 현수산(峴首山)에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올렸는데, 그 비석을 바라보고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으므로 타루비(墮淚碑)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羊祜傳》
♣ 현수비[峴首碑]진(晉) 나라 양호(羊祜)가 양양(襄陽)을 다스릴 적에 현수산에 올라가 노닐면서 “우리처럼 이곳에 와서 노닐던 걸출한 인물들이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는 생각을 하면 슬퍼지지 않을 수 없다.”고 탄식을 하며 감개를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는데, 뒤에 백성들이 양호를 사모하여 이곳에 세운 비석을 보고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으므로 타루비(墮淚碑)라는 별칭이 있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羊祜傳》
♣ 현수풍류[峴首風流]지금 호북성양양현(襄陽縣) 남쪽에 있는 산인데, 진(晉) 나라 양호(羊祜)가 오(吳) 나라의 접경인 양양을 진수(鎭守)할 때 이 산에 올라 놀았는데, 그가 죽자 사람들이 그 자리에 비를 세우니 보는 자가 모두 슬프게 울어 타루비(墮淚碑)라 하였다.
♣ 현순[懸鶉]메추리는 꼬리 부분에 유독 털이 없어 마치 옷이 짧거나 갈갈이 찢어진 것과 같으므로, 무릇 해진 옷을 현순이라 한다.
♣ 현안[玄晏]현안은 진(晋) 나라 때의 은사인 황보밀(皇甫謐)의 호인데, 그는 조정의 소명(召命)이 수없이 내렸으나 한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일생 동안 풍비(風痺)로 시달리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서음(書淫)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집이 가난하므로 항상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평생 글만 읽어 백가서(百家書)에 다 통했다고 한다. 일찍이 좌사(左思)를 위해 삼도부(三都賦)의 서문(序文)을 지어 주자 낙양(洛陽)의 지가(紙價)가 뛰어올랐다는 고사가 전한다. 《晋書 卷五十一》
♣ 현안간서연유병[玄晏看書緣有病]현안은 진(晉) 나라 때 은사(隱士)인 황보밀(皇甫謐)의 호인데, 그는 평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뒤에는 풍질(風疾)까지 얻어 신음하면서도 끝내 책 읽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晉書 卷五十一》
♣ 현안병[玄晏病]남이 부탁해 오는 비평이나 시문을 써 주며 저술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현안(玄晏)은 진(晉) 나라 황보밀(皇甫謐)의 자호(自號)이다. 일찍이 좌사(左思)의 삼도부(三都賦) 서문을 써 주자 낙양(洛陽)의 지가(紙價)가 급등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51》
♣ 현안선생[玄晏先生]현안은 진(晉) 나라 황보밀(黃甫謐)의 호.
♣ 현안일생장와병[玄晏一生長臥病]현안(玄晏)은 진(晉) 나라 황보밀(皇甫謐)의 호이다. 황보밀이 풍비(風痺)에 걸려 반신불수가 되었으면서도 침식(寢食)을 잊고 독서하여 서음(書淫)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51》
♣ 현안자[玄晏子]진(晉) 나라의 은자(隱者) 황보밀(皇甫謐)의 호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고상한 뜻을 지니고 학문에 종사하였는데, 무제(武帝) 때 여러 번이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벼슬하지 않았다. 주경야독하며 백가(百家)의 전적에 통효하였고, 침정과욕(沈靜寡欲)한 성품으로 고상한 뜻을 지녔었다 한다. 《晉書 卷51》
♣ 현안저문[玄晏著文]현안(玄晏)은 진(晉) 나라 황보밀(皇甫謐)의 호임. 저술에 뜻을 두어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고 글만 지었으며, 만년에 풍병을 앓으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그의 저술은 제왕세기(帝王世紀)ㆍ열녀전(列女傳)ㆍ고사전(高士傳)ㆍ갑을경(甲乙經)등이 있다. 《晉書 卷五十一 皇甫謐傳》
♣ 현안포질[玄晏抱疾]현안은 진(晉) 나라 조나(朝那) 사람인 황보밀(皇甫謐)의 호이다. 그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평생 동안 저술에만 종사하여 제왕세기(帝王世紀)ㆍ열녀전(列女傳)ㆍ고사전(高士傳)ㆍ갑을경(甲乙經) 등을 지었는데, 만년에 풍병을 앓으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한다. 《晉書 卷五十一 皇甫謐傳》
♣ 현애석[懸艾夕]5월 5일 밤. 옛날 초(楚) 나라 풍속에 5월 5일이 되면 모두 어울려 백초(白草)를 밟고 쑥을 캐서 사람처럼 만들어 문 위에다 매달고는 그것으로 독기(毒氣)가 침범 못하도록 액막이를 삼았음. 《荊楚歲時記》
♣ 현어[懸魚]생선을 달아매는 것, 곧 청백한 관리를 가리키는 말. 후한(後漢)의 양속(羊續)이 태수(太守)로 있을 때 어떤 이가 생선을 바쳤는데, 양속이 이를 먹지 않고 달아 두면서 관리들을 경계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문자이다. 《後漢書 羊續傳》
♣ 현언[玄言]현언은 현묘한 말이란 뜻으로 노자(老子)ㆍ장자(莊子)의 말을 일컫는다.
♣ 현영[玄英]겨울의 별칭.
♣ 현영[顯榮]입신하여 번영함, 이름을 날리다.
♣ 현옹[玄翁]신흠(申欽)의 호이다.
♣ 현옹[玄翁]현옹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이다. 영조 때의 문신으로 그림에도 능한 조선 후기 문인화(文人畵)의 대표자이다.
♣ 현요[炫曜]밝게 비침. 빛나다.
♣ 현운[玄雲]검은 구름.
♣ 현원[玄元]현원황제(玄元皇帝)의 준말로, 당(唐) 나라 때에 노자(老子)에게 올린 존호(尊號)로서 즉 노자를 가리킨다. 구당서(舊唐書) 예의지(禮儀志)에, “開元二十年正月己丑 詔兩京及諸州各置玄元皇帝廟一所…… 天寶二年正月丙辰 加玄元皇帝 尊號大聖祖三字”라고 보임.
♣ 현원궁[玄元宮]당대(唐代)에 도교(道敎)를 중히 여긴 나머지 노자(老子)를 현원황제(玄元皇帝)로 받들고 각처에 사당을 세웠는데, 서울의 사당은 현원궁(玄元宮)이라 하고 각 지방의 사당은 자극궁이라고 불렀다.
♣ 현원성조[玄元聖祖]당(唐) 나라는 노자(老子)를 숭봉(崇奉)하여 시조(始祖)로 삼고 높여서 현원황제라 하였음.
♣ 현원태상군[玄元太上君]노자(老子)를 높인 말이다.
♣ 현위[弦韋]현은 활시위이고 위는 다룬 가죽인데 활시위는 팽팽하고 다룬 가죽은 느슨한 것이므로, 전국 시대 위(魏) 나라 서문표(西門豹)는 본디 성미가 급한 때문에 느슨한 가죽을 몸에 찼고, 춘추 시대 진(晉) 나라 동안우(董安于)는 본디 성미가 느슨한 때문에 팽팽한 활시위를 몸에 차고서 각각 자신을 반성했던 데서 온 말이다. 《韓非子 觀行》
♣ 현의[玄衣]제사를 지낼 때 입는 검은색 옷인데, 여기서는 검은 학을 뜻한다.
♣ 현익돈장[玄黓敦牂]고갑자(古甲子)에 현익은 임(壬), 돈장은 오(午)에 해당되어 임오년을 뜻한다.
♣ 현인[眩人]현인은 요술쟁이이다.
♣ 현인주[賢人酒]맑은 술을 ‘성인(聖人)’이라 하고 탁한 술을 ‘현인(賢人)’이라 하는데, 위(魏) 나라 때에 금주령이 내려 주객(酒客)들이 쓴 은어(隱語).
♣ 현재[玄宰]시문(詩文)에 능하고 글씨와 그림의 대가였던 명(明)의 동기창(董其昌)의 자(字).
♣ 현재[玄齋]영조(英祖) 때의 화가(畫家)인 화가인 심사정(沈師正)을 가리킨다.
♣ 현재[玄宰]진재(眞宰)와 같은 말임.
♣ 현전추옥급[玄筌抽玉笈]도가의 서적을 읽는다는 것임. 현전은 현묘한 말을 적은 책으로 도가서를 말하고, 옥급은 옥으로 장식한 책상자로 진기한 책을 담아 놓은 상자에 대한 미칭임.
♣ 현절릉[顯節陵]후한 명제(後漢明帝)의 능호임.
♣ 현절사[顯節祠]병자호란 때 척화(斥和)한 홍익한(洪翼漢)ㆍ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 등 삼학사(三學士)를 제향하는 사우임. 광주(廣州)에 있음.
♣ 현정[懸旌]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심신(心神)이 안정되지 못하는 것을 현정(懸旌)이라 한다.
♣ 현정[玄亭]현정은 초현정(草玄亭)의 준말로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칩거하며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한 곳이다. 양웅이 술을 좋아하면서도 집이 가난하여 마시지를 못했는데, 가끔 호사자(好事者)들이 술과 안주를 들고 와서 글자를 묻곤 하였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漢書 卷87下 揚雄傳》
♣ 현정[玄亭]호가 현헌(玄軒)인 신흠을 가리킴.
♣ 현제[玄帝]북방(北方)의 신으로, 동신(冬神)인 현명(玄冥)을 말한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의 달은, 그 제(帝)는 전욱(顓頊)이고 그 신(神)은 현명(玄冥)이다.” 하였다.
♣ 현제우의[玄帝羽儀]겨울 귀신의 위엄스러운 덕(德)을 말한다. 현제(玄帝)는 북방을 주관하는 귀신으로 전욱(顓頊)을 가리킨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전욱이 도를 얻어 현궁(玄宮)에 거처하고 있다.” 하였다.
♣ 현종[玄蹤]현종은 심오한 자취를 이름.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이로(二老)의 현종을 밟아오르도다[躡二老之玄蹤]” 한 데서 온 말이다.
♣ 현주[玄珠]검은 구슬이란 뜻으로, 즉 도(道)의 본체(本體)를 일컫는 말인데, 옛날 황제(黃帝)가 적수(赤水)의 북쪽에서 유람하다가 현주를 잃어 버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天地》
♣ 현주[玄酒]고대(古代) 제사에 사용하던 청수(淸水)를 말한다. 예기(禮記) 예운(禮運)의 “현주는 실에 있고 예잔은 호에 있다.[玄酒在室 醴醆在戶]”는 대목에 대한 공영달(孔潁達)의 소(疏)에 “현주(玄酒)는 물이다. 빛이 검기 때문에 현(玄)이라 하는데, 태곳적에는 술이 없어 물로 술을 대신하였기 때문에 현주라 한다.” 하였다.
♣ 현주[玄洲]북해(北海) 가운데 있다는 섬 이름인데, 여기에는 신선이 살고 금지옥초(金芝玉草)가 많이 있다고 한다.
♣ 현주[玄酒]소옹(邵雍)의 동지시(冬至詩)에 “……현주는 맛이 바야흐로 담담하고 대음은 소리가 정히 드물어라……[玄酒味方淡 大音聲正希]" 한 데서 보이는데 현주는 곧 찬물[冷水]을 말한다.
♣ 현주[玄洲]조찬한(趙纘韓)의 호이다.
♣ 현진[玄津]불교에서 말하는 고해(苦海)의 바다를 말한다.
♣ 현진자[玄眞子]당(唐) 나라 장지화(張志和)가 남포위(南浦尉)로 좌천되어 있다가 다시 소환되었으나 다시는 벼슬하지 않고 강호에서 낚시와 술을 즐기면서 자칭 연파주도(煙波酒徒)라 하는 한편, 현진자(玄眞子)라는 책을 짓고 자호를 이에 따라 현진자라 하였다. 청약립녹사의(靑蒻笠綠簑衣)라는 사(詞)를 지었다.
♣ 현책[玄冊]성균관(成均館)의 정록청(正錄廳)에 당직(當直)한 관원이 당시의 정사(政事) 중에서 중요한 사항을 기록하여 두는 책.
♣ 현천장[玄川丈]현천은 원중거(元重擧)의 호이며 장(丈)은 높임말이다.
♣ 현철유차액사신[賢哲猶嗟厄巳辰]후한(後漢) 정현(鄭玄)의 꿈속에 공자가 나타나서 “일어나라, 일어나라. 올해는 진년(辰年)이요, 내년은 사년(巳年)이다.”라고 알려 주었는데, 정현이 꿈을 깨고 나서 “진(辰)은 용(龍)이요 사(巳)는 뱀[蛇]이니, 용사(龍蛇)의 해에는 현인이 탄식한다고 하였다.” 하고는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그해 6월에 죽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5 鄭玄傳》
♣ 현초[玄草]한(漢) 나라 학자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을 초(草)한 것을 말한다.
♣ 현친[顯親]효경(孝經)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를 드러나게 하라.” 하였다.
♣ 현탑[懸榻]한(漢) 나라 진번(陳蕃)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을 때에 객(客)을 접하지 않고 한 탑(榻)을 만들어서 오직 높은 선비인 서치(徐穉)가 오면 그 탑을 내리어 앉게 하였다가 서치가 돌아가고 나면 다시 그 탑을 달아 두었다 한다. 《後漢書 徐穉傳》
♣ 현택[玄宅]현택은 묘지의 별칭이다.
♣ 현토[玄兎]한사군(漢四郡)의 하나였던 현도군(玄兎郡)을 말한다.
♣ 현포[懸圃]곤륜산(崑崙山) 꼭대기에 있다는 신선의 거소(居所)이다.
♣ 현포[玄圃]곤륜산(崑崙山) 정상의 신선이 사는 곳으로, 다섯 군데의 금대(金臺)와 12개의 옥루(玉樓)가 있는데,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만발해 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 현포[懸匏]현포는 움직이지 않고 매달려 있는 뒤웅박을 말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내가 어찌 박이더냐. 어찌 한 곳에 매달려 있어 음식도 먹지 못하겠느냐.[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이라는 말이 있다.
♣ 현포원[玄圃園]곤륜산에 있다는 선경(仙境)을 말하는데, 태자의 처소를 말하기도 한다.
♣ 현풍[玄風]심원(深遠)한 도(道). 도가의 청허사상(淸虛思想)을 말함.
♣ 현하[懸河]말이나 문장을 잘하는 것을 말한다. 현하는 하수(河水)를 달아 놓았다는 뜻으로 입에서 말이 줄줄 끊임없이 나오는 것을 일컫는다. 진(晉)의 왕연(王衍)은 매양 말하기를 “곽상(郭象)의 말을 들으면 하수를 달아 놓고 물을 쏟듯하여 끊기지 않는다.” 하였다. 《晉書 卷五十 郭象傳》
♣ 현하구변[懸河口辯]흐르는 물과 같이 거침없이 술술 나오는 말. 현하웅변(懸河雄辯)
♣ 현하지변[懸河之辨]강물이 쏟아져 흐르는 듯 한 말솜씨. 거침없이 말을 잘함
♣ 현학[玄鶴]진(晉)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 조수(鳥獸)에 “학이 1천 년 지나면 푸른 색이 되고 2천 년 지나면 검은 색으로 바뀌는데, 이것이 이른바 현학(玄鶴)이다.” 하였다.
♣ 현학략주회[玄鶴掠舟回]소식(蘇軾)의 ‘후적벽부(後赤壁賦)’에, “마침 외로운 학이 강을 가로질러 동으로 오는데, 날개는 수레바퀴 같고 검은 치마에 흰 비단 옷차림으로 길게 울며 내 배를 스쳐 서쪽으로 날아가네.” 하였다.
♣ 현행[顯行]밝게 떠가다. 운행하다.
♣ 현헌[玄軒]신흠(申欽)의 호이다.
♣ 현헌자[玄軒子]현헌은 상촌 신흠의 당호(堂號)로 상촌을 뜻함.
♣ 현현[泫泫]눈물이 흐르는 모양, 이슬이 맺히는 모양
♣ 현현[俔俔]두려워하는 모양
♣ 현현[嬛嬛]정숙한 모양.
♣ 현현형우거[鞙鞙珩瑀琚]시경(詩經) 위풍(衛風) 목과(木瓜)에 “값싼 모과를 나에게 주기에 값진 태옥으로 보답하노라[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서로의 우호(友好)를 나타낸 말이다.
♣ 현호[懸弧]생일을 말한다. 옛날에 무(武)를 숭상하여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대문 왼쪽에 활을 매달아 놓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禮記 內則》
♣ 현호사방심[懸弧四方心]호는 뽕나무로 만든 활인데, 옛날 사내아이를 낳으면 뽕나무 활 여섯과 쑥대 화살 여섯으로 천지 사방에 하나씩을 쏘아서, 그 아이가 장래에 천지 사방에 공업(功業)을 세우기를 기원했던 데서 온 말이다. 또 활을 문 위에 걸어놓는 것은 아이가 장래에 반드시 활을 쓸 일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 현호수적[懸瓠樹績]당 헌종(唐憲宗) 때 이소(李愬)가 눈 오는 밤에 오원제(吳元濟)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唐書 卷154》
♣ 현호일[懸弧日]남자의 생일을 뜻함. 고대의 풍속에 집안에 남자가 태어나면 문 왼편에 활 하나를 걸어두었다 한다.
♣ 현화[玄花]대부(大夫)가 허리에 띠는 잡대(雜帶)의 이름이다.
♣ 현화[玄花]현화는 눈[目]을 말한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시(貞觀吟詩)에 “화살에 눈이 빠질 줄 어떻게 뜻했으랴[那知玄花落白羽]" 하였는데, 이것은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칠 때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백우전(白羽箭)을 맞고 눈이 빠진 것을 말한다. 《東人詩話》
♣ 현화낙백우[玄花落白羽]당 태종이 친히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와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패하여 돌아갔는데, 당서(唐書)엔 숨겨 기록이 없으나, 우리 나라에서 전하는 말로는, “안시성주 양만춘([梁]楊萬春)이 쏜 화살이 태종의 눈을 맞혔다.” 하였는데, 현화(玄花)는 눈이고, 흰 깃[白羽]은 백우전(白羽箭) 곧 살[矢].
♣ 현화백우[玄花白羽]화살에 맞아 눈이 빠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시(貞觀吟詩)에 ‘주머니 속에 한 물건 뿐이라 하니, 눈이 화살에 떨어진 줄을 어찌 알겠나?[自謂囊中一物耳 那知玄花落白羽]’라고 하였다.
♣ 현화사[玄化寺]황해도 우봉현(牛峰縣[靈鷲山])에 있음.
♣ 현황[玄黃]채색 비단 등의 예물을 가리킨다. 《書經 武成》
♣ 현효[玄枵]이아(爾雅) 석천(釋天)에, “玄枵虛也”라 한 그 주에, ‘정북방에 있는 별의 이름이다.’고 했음. 즉 허성(虛星)의 별칭.
♣ 현훤[懸貆]시경(詩經) 위풍(魏風) 벌단(伐檀)에 “애써 뛰고 달려 사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네 집 뜰에 오소리가 매어 달릴꼬.[不狩不獵 胡瞻爾庭有懸貆兮]"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저자 자신이 사냥을 않고도 돈을 주고 고기를 사 먹을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 현휘[玄暉]현휘는 남제(南齊)의 시인 사조(謝脁)의 자(字)이다.
♣ 혈[穴]삼(蔘)을 사들일 수 있도록 허가하는 문서임.
♣ 혈구[穴口]강화(江華)의 고호.
♣ 혈구[絜矩]혈구지도(絜矩之道)의 준말. 혈구는 표준으로 잰다는 뜻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법.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도덕상의 법도를 말한다. 대학(大學)에 “윗사람에게 내가 싫었던 것이면 나의 마음을 미루어 아랫사람에게 베풀지 않으며, 아랫사람에게 싫었던 것이면 나의 마음을 미루어 윗사람에게 베풀지 않아야 하니 이것을 혈구의 도(道)라 한다.” 하였는데, 구(矩)란 네모꼴의 표준인바 사람의 마음에 비유한 것이다.
♣ 혈구지도[絜矩之道]나의 척도로 남을 생각하여 바른 길로 이끄는 도덕 규범을 말한다. 《大學 治國平天下章》
♣ 혈규주중도[穴竅珠中度]공자(孔子)가 구곡보주(九曲寶珠)를 얻어서 실을 꿰려고 하나 꿸 수가 없었는데 상간(桑間)의 여인이 구멍에 꿀을 발라 개미로 하여금 꿰게 하라고 가르쳤다.
♣ 혈사[血射]은(殷) 나라 임금 무을(武乙)이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서 나무에 걸어 두고 활로 쏘아 터뜨리고는, “내가 하늘과 싸워서 이겼다.” 한 일이 있다.
♣ 혈의탁정괴[穴蟻託庭槐]인생이 도시 꿈속의 일이라는 뜻이다. 당(唐) 나라 순우분(淳于棼)이 괴목(槐木)의 남쪽 가지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괴안국(槐安國)에 가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꿈을 깨어 괴목 아래를 보니 큰 개미굴이 있었더라는 이른바 남가일몽(南柯一夢)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異聞集》
♣ 혈지승[穴紙蠅]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선을 공부하는 사람을 마치 광명(光明)을 찾는 파리가 창문을 바른 종이 한 장을 뚫으려고 애쓰는 데에 비유하였다.
♣ 혈혈[泬泬]공허한 모양
♣ 혈혈[孑孑]장구벌레, 모기의 유충, 짧음, 작음
♣ 혈혈단신[孑孑單身]혈혈(孑孑)은 고단하게 외로이 서 있는 모양을 가리킴. 그러므로 혈혈단신이라 하면 의지할 곳 없는 홀몸을 말함.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홀홀단신으로 틀리게 쓰이는 경우가 있다.
♣ 혐로[嫌老]늙은 것을 혐오함.
♣ 혐중육[嫌重肉]한 무제(漢武帝) 때의 재상이던 공손홍은 자봉(自奉)에 검소하여 조석 때마다 고기를 한 가지 이상 놓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史記 平津侯主父列傳》
♣ 혐체[嫌遞]벼슬아치가 상관과 선대(先代) 때의 혐의가 있음으로 해서 체직되는 일.
♣ 협[脅]협록(脅鹿). 우사(雨師)로서 팔족양두(八足兩頭)인 사슴의 형체를 지님.
♣ 협가[鋏歌]칼자루를 치면서 부르는 노래로, 재주를 가지고서도 등용되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는 노래이다. 제(齊) 사람 풍환(馮驩)이 맹상군(孟嘗君)의 문객(門客)이 되었으나 중용되지 못하였다. 이에 풍환이 세 번이나 자기의 칼자루를 두들기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첫 번째는 “긴 칼아 돌아갈지어다. 밥상에 고기가 없구나.” 하고, 두 번째는 “긴 칼아 돌아갈지어다. 외출함에 수레가 없구나.” 하고, 세 번째는 “긴 칼아 돌아갈지어다. 살 집이 없구나.” 하였다. 《史記 卷75 孟嘗君列傳》
♣ 협객행[俠客行]협객에 대해 지은 행(行)은 행. 시체(詩軆)의 하나.
♣ 협견첨소[脅肩諂笑]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어깨를 옹크리고 아첨하며 웃는 것은 여름에 밭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다.[脅肩諂笑 病于夏畦]”라고 한 증자(曾子)의 말이 소개되어 있다.
♣ 협광[挾纊]윗사람이 보살펴 주고 격려하므로 추운 것을 잊는다는 말이다. 좌전(左傳) 선공12(宣公十二)에 “초자(楚子)가 소(蕭)를 치는데, 신공 무신(申公巫臣)이 말하기를 ‘군사들이 매우 춥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삼군(三軍)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격려니, 군사들이 모두 솜을 낀 듯하였다.” 한다.
♣ 협굴[俠窟]협객의 소굴.
♣ 협류[峽纍]산골짜기에 갇힌 사람이란 뜻이다.
♣ 협률랑[協律郞]협률랑은 음률(音律)을 조협(調協)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직명이다.
♣ 협리서호[篋裏西湖]협리는 협중집(篋中集), 서호는 서호백영(西湖百詠)을 말하는데, 협중집은 당(唐) 나라 원결(元結)이 찬한 것이고, 서호백영은 송(宋) 나라 동사고(董嗣杲)가 찬한 칠언(七言) 시집(詩集)이다. 심천운(沈千運)ㆍ왕계우(王季友)ㆍ간적(干逖)ㆍ맹운경(孟雲卿)ㆍ장표(張彪)ㆍ조미명(趙微明)ㆍ원이(元李)의 시를 수록하였다. 《唐書 元結傳》
♣ 협마[夾馬]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동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송 태조 조광윤이 태어난 곳이다.
♣ 협비선[挾飛仙]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 “날으는 신선을 끼고 놀았으면[挾飛仙而遨遊].”라는 말이 있다.
♣ 협사행[狹邪行]악부(樂府)의 이름. 세로(世路)가 험협(險狹)하고 사벽(邪僻)하여 정직한 선비가 용납되지 못함을 노래한 것이다.
♣ 협상모[頰上毛]문장이나 그림에 손을 한 번 대어 정신이 번쩍 들게 잘 됨을 말한다. 진서(晉書) 고개지전(顧愷之傳)에 “일찍이 배해(裵楷)의 초상을 그리고 뺨 위에 털 세 개를 더 그리니 보는 사람들이 자못 신명하게 된 것을 느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 협시사한월[挾矢射漢月]흉노족이 침입해 오는 것을 말한다. 흉노족이 군사를 일으킬 때에는 항상 달이 차고 지는 데에 따라서 하는데, 달이 찰 때면 나와서 싸우고 달이 이지러질 때면 군사를 물린다.
♣ 협신[浹辰]자일(子日)에서 해일(亥日)까지라는 말로, 12일을 뜻한다.
♣ 협안[夾岸]강가 언덕을 끼고.
♣ 협액의초북해장[挾腋疑超北海長]맹자(孟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는다.” 하였다.
♣ 협야[俠斜]진달래라는 말이다.
♣ 협야[夾野]협야는 인황의 시조인 신무 천황(神武天皇)으로, 이때에 이르러서 대화주(大和州)에 들어가서 중적(衆賊)을 소탕한 뒤 천황이라 일컫고 국도를 정하였다.
♣ 협원[峽猿]죽은 자식에 대한 정으로 인해 애가 끊어질 듯 슬프다는 뜻이다. 협원(峽猿)은 무협(巫峽)의 원숭이로, 세설신어(世說新語) 출면(黜免)에, “환공(桓公)이 삼협(三峽)의 중간에 이르렀을 때 부오(部伍)의 군사 가운데 새끼 원숭이를 잡은 자가 있었는데, 어미 원숭이가 강가를 따라오면서 백 리를 가도록 떠나지 않고 따라오다가 드디어 배 위로 뛰어 올라왔는데, 배에 올라오자마자 곧바로 죽었다. 이에 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내장이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 환공이 이 말을 듣고는 노하여서 그 군사를 내쫓았다.” 하였다.
♣ 협제씨[夾漈氏]협제는 산 이름인데, 송(宋) 나라 정초(鄭樵)가 여기에서 글을 읽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협제선생이라 칭하였다. 《宋史 卷四百三十六》
♣ 협제중화[協帝重華]순(舜) 임금을 찬미하는 말인데, 소(疏)엔, “순(舜)이 요(堯)를 이어 그 문덕(文德)을 거듭 빛낸다.” 했다.
♣ 협주[挾鑄]관청에 소속되어 관전(官錢)을 주조(鑄造)하는 장인(匠人)들이 관청의 허락을 받아 별도로 돈을 주조하는 것을 말함. 대개 관(관)에서 용광로 10개를 설치하고서 5일 동안은 관전을 주조하고, 하루는 그 장인들로 하여금 물력(物力)을 준비하여 자체적으로 돈을 주조하도록 허락하고 있는데, 이것을 협주(挾鑄)라고 한다.
♣ 협진궁[挾秦弓]진나라에서 활을 만들다.
♣ 협탄[鋏彈]전국(戰國) 때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문객(門客) 풍환(馮驩)이 제 빈궁한 신세를 탄식하며, 검(劍)의 손잡이[鋏]를 타면서 노래하기를, “긴 칼아, 돌아갈지로다. 밥먹을 제 생선도 없네.”라고 하였다.
♣ 협파개[愜爬疥]한유(韓愈)의 시에, “번거로움을 덞이 종기를 째는 것 같아라. 옴 오른 데를 긁듯이 정말 기분이 시원하다네.[祛煩類決癰 愜興劇爬疥]”하였다.
♣ 협협[悏悏]두려워서 숨을 죽이는 모양
♣ 협협[浹浹]축축하게 젖는 모양
♣ 협협[歙歙]두려워하는 모양
♣ 협협균박새[挾筴均博塞]장(臧)과 곡(穀) 두 사람이 양을 먹이다가 둘 다 양을 잃었는데, 장은 책을 들고 독서에 여념이 없었고, 곡은 도박을 즐기고 놀았음. 《莊子 騈拇》
♣ 형[兄]시인(詩人)들이 매화를 매형(梅兄)이라고 쓰는데, 이것은 황정견(黃庭堅)의 수선화(水仙花) 시(詩)에, “산번화는 아우요, 매화는 형이다[山礬是弟 梅是兄].” 한 데서 나온 것이다.
♣ 형[荊]우공구주(禹貢九州)의 하나. 지금의 호남(湖南)의 땅. 전(轉)하여 초(楚)나라의 땅.
♣ 형[衡]형은 선기옥형(璿璣玉衡)으로서 천문 관측 기구이다. 《書經 虞書 舜典》
♣ 형가[亨嘉]역(易) 건괘(乾卦)의 “형은 훌륭한 사람들의 모임이다.[亨者 嘉之會也]"에서 나온 말로서 우수한 인물들이 일시에 성대하게 모이는 것을 비유한 것임.
♣ 형가[荊軻]형가는 전국 때 제(齊) 나라 사람. 연 태자(燕太子) 단(丹)을 위하여 진시황(秦始皇)을 죽이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였음. 연태자가 진시황을 죽이려고 자객(刺客) 형가를 보내며, 신물(信物)로 독항(督亢) 땅을 바치겠다고 지도(地圖)를 함에 넣어 보내었는데, 형가가 지도 밑에 감추었던 비수(匕首)로 진시황을 찌르려다가 실패하자, 진시황이 크게 노하여 연나라를 쳐서 멸하였다.
♣ 형강[荊江]형강은 금강(錦江)의 별칭이다.
♣ 형갱[鉶羹]형갱은 경건하게 차린 제사 음식을 뜻한다.
♣ 형경[荊卿]형경은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려 했던 자객 형가(荊軻)의 존칭인데, 진시황(秦始皇)의 녹로검(鹿盧劍)에 오히려 죽임을 당하였다. 도연명집(陶淵明集) 4권에 ‘영형가(詠荊軻)’라는 오언시(五言詩)가 전한다.
♣ 형경분월계[衡鏡分月桂]형경(衡鏡)은 과거에서 인재를 뽑기를 저울과 거울처럼 평(平)하고 밝게 한다는 것이며, 월계는 과거에 오르는 것을 달 가운데 계수꽃을 꺾는 데 비한다.
♣ 형경전[荊卿傳]형경은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자객(刺客) 형가(荊軻)를 말하며, 그의 전은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보인다.
♣ 형고[滎皐]형양(滎陽)과 성고(成皐). 모두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크게 싸우던 곳.
♣ 형공[荊公]형공은 송(宋) 나라 때의 재상으로 형국공(荊國公)에 봉해진 왕안석(王安石)을 말한다.
♣ 형군문[邢軍門]임진란 때 우리나라에 왔던 명 나라 장수 형개(刑玠)이다.
♣ 형극[荊棘]가시덩굴로, 소인들에 비유한 말.
♣ 형극동타영[荊棘銅駝影]나라가 망한 것을 탄식한 말이다. 동타(銅駝)는 동(銅)으로 만든 낙타(駱駝)를 말하는데, 동진(東晉) 때 색정(索靖)이 매우 선견지명이 있어 천하가 곧 어지러워질 것을 예측하고는 낙양 궁문(洛陽宮門) 앞에 서 있는 동타를 가리키면서 “얼마 후에는 가시숲 속에 섰을 너를 보겠구나.” 하며 탄식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索靖傳》
♣ 형극매동타[荊棘埋銅駝]세상이 난세라는 말. 진(晉)의 색정(索靖)이 선견지명이 있었는데, 앞으로 난세가 닥칠 것을 미리 알고 낙양(洛陽)의 궁문 앞에 세워진 구리낙타를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네가 가시밭 속에 있게 되는 꼴을 보겠구나.” 하였다는 것임. 《晉書 索靖傳》
♣ 형낭독서자[螢囊讀書子]형설지공(螢雪之功)의 고사에 나오는 차윤(車胤)을 가리킨다.
♣ 형담창화[荊潭唱和]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 제4권 중의 형담창화시서(荊潭唱和詩序)에 의하면, 형남(荊南)의 복야(僕射) 배도(裴度)와 호남(湖南)의 양공(揚公)이 주고받은 시를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라 하였다.
♣ 형둔[亨屯]형통과 곤액(困厄).
♣ 형등[螢燈]진서(晉書)에, “차윤(車胤)이 박학(博學)하였는데 집이 가난하여 기름을 구할 수 없어 여름철에는 반딧불을 잡아 사낭(紗囊)에 담고 밤새도록 글을 읽었다.”라고 보임.
♣ 형림[蘅林]산에 나는 두형(杜蘅)이라는 향초(香草)의 숲을 뜻한다.
♣ 형만[荊蠻]중국 남방의 오랑캐 이름이다.
♣ 형망환이극[形忘歡已極]장자(莊子) 양왕(讓王)의 “뜻을 기르는 자는 형체를 잊는다[養志者忘形].”에서 나온 것으로, 자신의 형체 등 겉치레를 잊고 상대방과 마음을 주고받아 한없이 기쁘다는 것이다.
♣ 형모[衡茅]형문(衡門)과 모옥(茅屋)을 줄인 말로, 보잘것없는 누추한 집을 말한다.
♣ 형문[衡門]나무막대기를 가로질러서 대문을 만든 것으로, 오두막집의 초라한 사립짝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은자(隱者)가 사는 곳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진풍(陳風) 형문(衡門)에, “형문의 아래 깃들 만하도다. 샘물이 졸졸 흐름이여 주림을 잊겠도다.[衡門之下 可以棲遲 泌之洋洋 可以樂飢]" 하였다.
♣ 형문[荊門]호북성(湖北省)에 있는 산 이름으로, 장강(長江) 가에 있는데, 형세가 몹시 험고하여 옛날부터 파촉(巴蜀)과 형오(荊吳) 사이의 요새였다.
♣ 형박[荊璞]초(楚) 나라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얻은 박옥(璞玉)으로, 전하여 현량(賢良)한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 형박삼헌[荊璞三獻]초(楚) 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여왕(厲王)에게 드리니 왕이 속인다 하여 그 왼발을 잘랐다.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또 드리니 또 속인다 하여 그 오른발을 잘랐다. 문왕(文王)이 서자, 이에 박옥을 안고 형산 아래서 울거늘 왕이 사람을 시켜 물으니, 그가 말하되, “신(臣)이 발 잘린 것을 서러워함이 아니오라, 보옥을 돌이라 일컫고 곧은 선비를 속임꾼이라 하니, 그래서 서러워하노이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박옥을 쪼개니 과연 그 속에 옥이 있었다.
♣ 형범숙존[荊凡孰存]초왕(楚王)이 범군(凡君)과 같이 앉았는데, 초왕의 좌우(左右)에서 범(凡)이 망하였다고 세 번 외쳤더니, 범군이 “범(凡)이 망했다는 것이 나의 존(存)한 바를 상실(喪失)시키지 못하며, 초(楚)의 존(存)한 것도 왕의 존한 바를 존하게 하지 못한 것이니, 이로써 본다면 범이 망한 것도 아니고 초가 존한 것도 아니다.” 하였다. 장자(莊子)
♣ 형벽수주[荊璧隋珠]한 시대의 뛰어난 인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형벽은 춘추 시대 초(楚) 나라 변화(卞和)의 화씨벽(和氏璧)을 말하고, 수주는 뱀이 수후(隋侯)에게 보은(報恩)했다는 명월주(明月珠)를 말한다.
♣ 형벽유장박[荊璧猶藏璞]아름다운 자질을 비유하는 말. 형산에서는 좋은 옥이 많이 나는데, 갈기 전에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 형봉[衡峯]형봉(衡峯)은 중국 형산(衡山) 남쪽에 있는 회안봉(回雁峯)을 가리키는데, 이 봉우리가 매우 높으므로 기러기가 가을이면 이곳에 와서 이 봉우리를 넘지 못하고 그냥 있다가 봄이 되면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형부나함택[荊府羅含宅]진(晉) 나라 나함(羅含)이 환온(桓溫)의 별가(別駕)로 있을 때, 형주(荊州)의 강릉(江陵) 서쪽 소주(小洲) 위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92 文苑傳 羅含傳》 두보(杜甫)의 시에 “유신과 나함 모두 강릉에 집이 있었건만, 봄 오고 가을 가며 누구의 집이 되었는고.[庾信羅含俱有宅 春來秋去作誰家]”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1 舍弟觀赴籃田取妻子到江陵喜寄》
♣ 형산[荊山]형산은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산으로 옥(玉)이 나는 명산이다.
♣ 형산[衡山]형주(衡州)에 있는 남악(南岳)으로, 일찍이 한유(韓愈)가 산양(山陽)에서 북쪽으로 돌아가다가 이곳을 경유하면서 시를 지었다.
♣ 형산운자제[衡山雲自霽]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이 감동한다는 말. 한유(韓愈)가 일찍이 형악묘(衡嶽廟)에 알현(謁見)하였을 적에, 때마침 가을 장마가 들어 음산한 기운이 잔뜩 꼈으므로, 마음을 가다듬어 기도를 드렸더니 구름이 걷히고 날이 말끔히 갰다고 한다. 《古文眞寶 潮州韓文公碑 註》
♣ 형산읍옥[衡山泣玉]춘추 시대 초(楚) 나라 변화(卞和)가 형산에서 옥박(玉璞)을 얻어 여왕(厲王)에게 바치자, 옥이 아닌 돌로 왕을 기만했다 하여 그의 왼쪽 발꿈치를 베었다. 그 후에 다시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역시 옥이 아니라 하여 또 그의 오른쪽 발꿈치를 베었다. 그래서 변화가 그 옥박을 안고 형산 아래에서 통곡하였다 한다.
♣ 형상[荊桑]뽕나무의 일종으로 오디가 많이 열린다 한다.
♣ 형석[衡石]형석의 형은 저울이고, 석은 1백 20근을 말하는데, 진시황(秦始皇)이 매일 반드시 1백 20근의 각종 서류를 재결(裁決)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秦始皇紀》
♣ 형설[螢雪]동진(東晉)의 차윤(車胤)이 집이 가난하여 반딧불이를 주머니에 많이 잡아넣어 그 불빛으로 글을 읽고, 손강(孫康)이 눈[雪]빛에 의지해 글을 읽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 형설지공[螢雪之功]반딧불이와 눈으로 쌓은 공.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면서 열심히 학업에 정진[苦學] 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한 것을 비유한다. 중국 동진(東晋) 때의 차윤(車胤)은 가난한 시절 얇은 비단 주머니에 넣은 반딧불이의 빛으로 글을 읽고, 손강(孫康)은 눈(雪) 빛에 책을 비추어 글을 읽었다는 고사가 있다.
♣ 형수[荊樹]가시나무 숲으로, 형제간에 함께 살아온 곳이란 뜻이다. 옛날에 어떤 형제가 갑자기 헤어지게 되었는데, 문밖에 가시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나무들도 오히려 함께 모여서 즐겁게 사는데, 하물며 우리가 갈라서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다시 화목하게 지냈다고 한다. 《孝子傳》
♣ 형수[荊樹]형수는 가시나무로, 옛날 형제 세 사람이 재산을 똑같이 나누고 오직 자형수(紫荊樹) 한 그루만 남았으므로, 이를 3분으로 쪼개서 나누어 갖자고 서로 의논하였는데, 그 다음날 이 나무가 불에 탄 듯이 절로 말라죽었다. 그러자 그 형이 크게 놀라고 슬퍼하여 나무를 쪼개지 않으니, 그 나무가 다시 살아나서 꽃이 피므로, 형제들이 서로 감동하여 분가하지 않고 아주 우애 있게 살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齊諧記》
♣ 형수화[荊樹花]형수(荊樹)는 마편초과의 낙엽 활엽 관목인 작살나무를 말한다. 잎은 길둥근 모양으로 마주 나고 여름에 자줏빛의 잔꽃이 피어 정원의 관상수로도 쓰인다. 한(漢) 나라 때 조성(朝城) 사람 전진(田眞)이 두 아우인 경(慶)ㆍ광(廣)과 함께 부모의 재산을 나누어 갖기로 의논하여 전부 고르게 배분한 뒤에 집앞에 있는 작살나무만 남았는데, 그것마저 베어 세 동강으로 잘라 갖기로 합의하고 이튿날 나가 보니 불에 타버린 것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전진은 깜짝 놀라 말하기를 “나무는 본디 한 뿌리인데 동강낸다는 말을 듣고 말라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나무보다 못한 것이다.” 하자, 나무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에 감동한 형제들은 재산을 도로 합치고 효도하는 가문이 되었다 한다. 곧 형제가 함께 사는 정겨운 고향집에 비유한다. 당 나라 허혼(許渾)의 정묘시집(丁卯詩集) 제최처사산거(題崔處士山居)에 “형수에는 꽃이 있어 형제들 즐거워하고 유자 숲에 열매 없어 자손들이 바쁘다네 [荊樹有花兄弟樂 橘林無實子孫忙]”하였다.
♣ 형승지지[形勝之地]지세(地勢)가 험고(險固)한 요해지(要害地)를 가리킨다.
♣ 형신홀개합[形神忽開闔]닫기는 것은 자는 것이요, 열리는 것은 깨는 것이다.
♣ 형악[衡岳]중국대륙의 남쪽에 위치한 큰 산 이름.
♣ 형애제공[兄愛弟恭]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형을 공경해야한다는 뜻.
♣ 형액월제감구내[衡扼月題堪區耐]장자(莊子)에, “말이 굴레도 고삐도 없이 마음대로 풀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이 본성인데 백락이 나와서 굴레를 씌우고 고삐를 매니 말은 본성을 잃고 말았다.” 하였다.
♣ 형양[桁楊]형양은 죄인의 수족에 채우는 형구(刑具)를 말한다.
♣ 형양[滎陽]정홍명을 가리킨다. 형양이 중국 하남성(河南省) 정현(鄭縣)인 까닭에 정씨(鄭氏)를 보통 형양으로 일컫고 있다.
♣ 형양[衡陽]중국 형산(衡山) 남쪽 즉 형양(衡陽)에 회안봉(回雁峯)이 있는데, 이곳을 기점으로 해서 기러기들이 남북으로 왕래하며 이동한다고 한다. 참고로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기러기의 군진이 추위에 놀라, 형양 물굽이에 소리가 끊어졌네.[雁陣驚寒 聲斷衡陽之浦]”라는 표현이 있다.
♣ 형양금[荊楊金]형주(荊州)와 양주(楊州)에서 나는 금으로, 품질이 좋은 금을 말한다.
♣ 형양묵흔[滎陽墨痕]형양(滎陽)은 시(詩), 서(書), 화(畫)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던 당(唐) 나라 정건(鄭虔)을 가리킨다. 집이 가난해 종이를 구할 수 없자 감나무 잎에 붓글씨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新唐書 卷202》
♣ 형양안[衡陽雁]무슨 일을 아주 단절하지 못하고 늘 도로 되풀이하는 데에 비유한 말이다. 형양(衡陽)에 회안봉(回鴈峯)이 있는데, 기러기가 언제나 이 산봉우리에 이르러서는 봉우리가 너무 높아 더 이상 넘어가지 못하고 봄이 되면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 형여[荊廬]형산(荊山)과 여산(廬山). 형산은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산으로 옥(玉)이 나는 명산이고, 여산은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명산이다.
♣ 형역[形役]마음이 육체적 생활의 노예가 되어 사역(使役) 당하는 것을 말한다. 즉 외물(外物)로 인해 자유의지(自由意志)가 구속됨을 말한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이미 스스로 마음을 가지고 형체의 역사 삼았으니 어찌 실의에 빠져 슬퍼만 하리오.[旣自以心爲形役 奚惆悵而獨悲]" 하였음.
♣ 형옥[荊玉]형옥은 형산(荊山)에서 나오는 옥으로 초(楚) 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형산의 박옥(璞玉)을 얻어서 세 차례에 걸쳐 초 문왕(楚文王)에게 올린 일이 있었음. 바로 화씨벽(和氏璧)을 말한다.
♣ 형원[荊猿]몹시 슬프게 우는 원숭이를 뜻한다.
♣ 형이상하[形而上下]형이상은 형기(形氣)가 나타나기 전으로 바로 이치를 말하고 형이하는 형기가 나타난 후로 바로 기운을 뜻함.
♣ 형인[衡人]형인은 주례(周禮)의 관명으로 특히 산림을 관장하는 사람을 말한다.
♣ 형인양월[荊人兩刖]유명한 변화읍벽(卞和泣璧)의 고사임. 초 나라 사람 변화가 옥돌을 얻어서 초 여왕(楚厲王)에게 바쳤으나 속임수를 쓴다고 여겨져 왼쪽 발이 잘렸는데, 무왕(武王) 때 또 바쳤다가 같은 이유로 오른쪽 발마저 잘리자 원통한 심정으로 옥돌을 안고 울었다고 함. 《韓非子 和氏》
♣ 형제이난[兄弟二難]형제가 서로 우열이 없이 덕행이 똑같이 뛰어남을 이름. 후한(後漢) 때 진식(陳寔)의 여섯 아들 가운데 기(紀)와 심(諶) 두 아들이 가장 덕행이 뛰어났는데, 진식이 그들을 평하기를 “원방(元方)은 형 되기가 어렵고, 계방(季方)은 아우 되기가 어렵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六十二》
♣ 형제혁장[兄弟鬩墻]형제가 담장 안에서 싸운다. 동족상쟁(同族相爭)을 말한다.
♣ 형주[荊州]형주는 당 현종(唐玄宗) 때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지낸 한조종(韓朝宗)인데, 평소에 숨은 인재를 발탁하길 좋아하여 최종지(崔宗之)ㆍ엄무(嚴武) 등을 조정에 천거하였으므로 당시의 선비들이 그의 인정을 받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이백(李白)의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 “평생에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지기보다는 한형주가 한번 알아주기를 원할 뿐이다.[生不用封萬戶侯 但願一識韓荊州]”라고 하였다.
♣ 형주[荊州]호남성(湖南省)
♣ 형주고사[荊州古事]형주(荊州)의 고사란 곧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선주(先主)가 위(魏) 나라 조조(曹操)의 공격을 받아 쫓겨서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에게 가 의지하고 있었던 일을 가리킨 것이다. 《三國志 卷三十二》
♣ 형주면[荊州面]당(唐) 나라 때 명신(名臣) 한조종(韓朝宗)을 말한다. 그가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을 때에 이백(李白)이 글을 올려 이르기를 “살아서 만호후 봉함이 필요치 않고, 다만 한 형주를 한 번만이라도 보는 것이 소원이다.” 하였다. 《古文眞寶 卷二 與韓荊州書》
♣ 형주하행득신조[荊州何幸得身遭]당(唐) 나라 한조종(韓朝宗)이 형주 장사(荊州長史)로서 후배들을 잘 이끌어 주어 사인(士人)의 추앙를 받았는데, 이백(李白)이 그에게 보낸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 “이 세상에 태어나 만호후가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그저 한형주를 한 번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生不用萬戶侯 但願一識韓荊州]고 사람들이 이야기한다.”는 글이 실려 있다.
♣ 형창[螢窓]형창은 진(晉) 나라 때 차윤(車胤)이 밤에 개똥불을 모아서 그 빛을 이용하여 글을 읽으며 고학(苦學)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서재를 말하기도 한다.
♣ 형창설안[螢窓雪案]중국 진(晉)나라 차윤(車胤)이 반딧불로 글을 읽고, 손강(孫康)이 눈빛으로 글을 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 갖은 고생을 하며 꾸준히 학문을 닦은 공을 이름.
♣ 형처[荊妻]남에게 자기 아내를 낮추어 일컫는 말.
♣ 형초[荊楚]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 형피수돈[形疲瘦頓]몸이 피곤하고, 마르고 초췌하다.
♣ 형해구이망[形骸久已忘]우정(友情)이 매우 친밀하여 자기의 형체도 잊어버리고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을 말한다.
♣ 형해득실[形骸得失]형해를 벗어나는 것은 불교의 유심론(唯心論)의 진리를, 득실을 하나로 본다는 것은 모든 사물을 도(道)의 본체에서 보면 하나같이 같다는 노장(老莊)의 설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
♣ 형해자소혜중산[形骸自笑嵇中散]육신에 대한 집착을 멀리 떠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혜 중산은 진(晉) 나라 때 중산대부(中散大夫)에 임명되었던 혜강(嵇康)으로, 일찍이 양생론(養生論)을 지었으며 직접 연단(鍊丹)을 하기도 하였다. 《晉書 卷49》
♣ 형형[泂泂]물이 맑고 깊은 모양
♣ 형혹[熒惑]화성(火星)의 별칭. 하늘의 법성(法星)으로 이 별이 나타나면 재화와 병란(兵亂)이 뒤따른다 한다. 춘추위(春秋緯)에 “적제(赤帝)의 신(神)이 형혹이 되어 남방에 위치한다.” 하였다. 화신(火神).
♣ 형화[荊花]형제를 비유한 말이다. 옛날 전진(田眞)의 형제 3인이 재산을 똑같이 나누고 나니, 오직 자형수(紫荊樹) 한 그루만 남았으므로, 이것을 셋으로 쪼개서 나누자고 의논하고서 다음 날 그 나무를 베러 가보니, 나무가 이미 말라 버렸다. 그래서 전진이 크게 놀라 아우들에게 말하기를, “이 나무의 뿌리가 하나인지라, 장차 쪼개 나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마른 것이니, 우리는 나무만도 못하다.” 하고는, 나누었던 재산을 다시 합하여 형제간에 아주 화목하게 살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續齊諧記 紫荊樹》
♣ 혜[蕙]난의 일종
♣ 혜가[慧可]선종(禪宗)의 제2조(祖) 혜가(慧可). 그는 40세 때에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로 후위(後魏)의 고승(高僧) 보리달마(菩提達磨)를 찾아가 눈[雪] 속에 앉아 가르침을 청하여 도를 닦고 의발(衣鉢)을 전수받아 선종(禪宗)의 법통(法統)을 이어 제이조(第二祖)가 되었다.
♣ 혜가단비[惠可斷臂]후위(後魏) 때 고승으로 중국 선종의 제2조가 되었다. 그는 달마에게 도를 받을 때 그의 왼팔을 잘라서 자기의 굳은 뜻을 보였다.
♣ 혜각[慧覺]불교 용어로, 선각자(先覺者)의 큰 지혜를 스스로 깨우쳐 아는 것을 말한다.
♣ 혜감[慧鑑]중[僧] 만항(萬恒)의 시호(諡號). 속성은 박(朴)이다.
♣ 혜강[嵇康]진(晉)의 명사(名士) 자는 숙야(叔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성미가 괴이하여 큰 버드나무 아래서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두들기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양생(養生)을 잘하면 팽조(彭祖)의 수명을 따를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또 양생론(養生論)을 저술하기도 하였으나, 참소를 당해 나이 40에 죽었다. 《晉書 嵇康傳》
♣ 혜강라[嵇康懶]혜강(嵇康)의 글에, “나는 게을러서 머리에 빗질도 아니한다.” 하였다.
♣ 혜강라작서[嵇康懶作書]진(晉) 나라 때 혜강이 자기에게 벼슬하기를 권유한 친구 산도(山濤)에게 보낸 절교서(絶交書)에서 일곱 가지 감당할 수 없는[七不堪] 조건들을 죽 열거했는데, 그중 네 번째의 조건 속에 “나는 본디 글을 잘 짓지 못하거니와 또한 글짓기를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嵇中散集 卷二》
♣ 혜강양생[嵆康養生]진(晋)나라 혜강이 양생론(養生論)을 지었으나 뒤에 남의 모함을 입어 죽음을 당한 것을 말한다. 혜강이 상수(尙秀)와 연단(鍊鍛)하고 있을 때 종회(鍾會)가 찾아왔는데, 혜강이 무정하게 대하자 이에 유감을 품고 종회가 문제(文帝)에게 모함을 한 결과 해를 당하였다. 《晉書 卷四十九》
♣ 혜계[醯鷄]견문이 좁음을 뜻한다. 열자(列子) 천단(天端)에, “공구(孔丘)는 도에 대해서 마치 혜계와 같다.” 하였다.
♣ 혜계[醯鷄]혜계는 술단지에 생기는 작은 벌레로서, 선생의 가르침으로 학문이 성취됐다는 비유이다.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공자(孔子)는 도(道)에 있어 혜계를 열어준 사람과 같다. 그분이 술단지의 뚜껑을 열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천지의 위대한 참모습을 모를 뻔하였구나.” 하였다.
♣ 혜계천[醯鷄天]혜계는 초파리인데, 범위가 좁음을 말한다.
♣ 혜고[蟪蛄]매미의 일종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하루살이 버섯은 초하루와 그믐을 알지 못하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朝菌不知晦朔 蟪蛄不知春秋]”라는 내용이 있다.
♣ 혜고비[蟪蛄悲]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을 말한다. 장자 소요유에 “조균(朝菌)은 초하루와 그믐을 알지 못하고, 매미[蟪蛄]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 혜공상[惠公喪]춘추 시대 때 노(魯) 나라 혜공이 죽었을 때 마침 송(宋) 나라와의 전쟁이 있었고, 태자인 환공(桓公)이 어려서 장례의 의식이 불충분한 점이 있었다. 이에 다시 개장(改葬)을 하였는데, 이때도 혜공의 뒤를 이은 은공(隱公)이 태자인 환공이 있다는 이유로 상주(喪主)가 되기를 사양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春秋左傳 隱公 1年》
♣ 혜기[惠氣]여간한 기운. 지기. 신인.
♣ 혜능[惠能]남종(南宗)을 이룩한 육조(六祖) 혜능(惠能)대사. 속성(俗姓) 노(盧)씨. 그가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오조(五祖) 홍인(弘忍)에게 인가(印可)되어 의발(衣鉢)을 전해 받고 남해(南海)에 가서 조계(曹溪)에 살며 남종을 창시했다.
♣ 혜련[惠連]남조(南朝) 시대 송(宋) 나라의 시인인 사영운(謝靈運)의 동생 사혜련(謝惠連)을 가리키는데, 10세에 시작을 잘하였고, 형인 사영운은 그를 사랑하여 더불어 시를 지으면 좋은 구가 얻어졌다고 한다. 후대에는 시문 가운데에서 흔히 동생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쓰이게 되었다.
♣ 혜문[惠文]혜문은 주후혜문(柱後惠文)의 준말로, 법관(法官)과 무관(武官)이 쓰는 모자이다. 장창의 동생 장무(張武)가 양국(梁國)의 상(相)으로 나가면서 “양국은 대도(大都)로서 이민(吏民)이 조폐(凋敝)한 상태이니, 마땅히 주후혜문(柱後惠文)으로 탄치(彈治)해야 한다.”고 말하자, 장창이 이를 듣고서 웃으며 안심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張敞傳》
♣ 혜문관[惠文冠]주후혜문관(柱後惠文冠)의 준말로, 법관(法官)이 쓰는 관을 말한다. 전국 시대 조(趙) 나라 무령왕(武靈王)이 호복(胡服)을 본떠 초미(貂尾)로 치장해서 쓰던 관(冠)인데, 진(秦)이 조(趙)를 멸망시킨 뒤에 이를 근신(近臣)에게 주었다. 무변대관(武弁大冠) 또는 번관(繁冠)이라고도 한다. 《後漢書 輿服志》
♣ 혜보[惠甫]조선 정조 때의 사가(四家)의 하나인 유득공(柳得恭)의 자이다.
♣ 혜보[徯父]혜보는 한치응(韓致應)의 자이다.
♣ 혜산수[惠山水]혜산천(惠山泉)을 가리킨다. 혜산은 혜산(慧山)으로 쓰기도 한다. 이 샘은 중국 강소성(江蘇省) 무석현(無錫縣) 서쪽인 혜산에 있는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 혜산천[惠山泉]혜산(惠山)은 중국에 있는 산. 그 산 밑에 세 못[池]이 있는데, 맑고 맛이 좋다 한다. 부근의 주민들이 그 샘물로 술을 빚어 혜천주(慧泉酒)라 이르는데, 맛이 청렬(淸冽)하다고 하며, 또 그 물로 차를 달이면 그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 혜생[嵇生]삼국시대 위(魏) 나라 초군(譙郡) 사람인 혜강(嵆康)으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기풍이 출중하고 박식하였으며 노장(老莊)을 숭상하였다.
♣ 혜생재위루[嵇生才爲累]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인 진(晉) 나라 혜강(嵇康)이 악인을 원수처럼 미워하다가 마침내는 종회(鍾會)의 참소를 받고 사마소(司馬昭)에게 살해당하였는데, 그가 죽기 전에 감옥에 갇혀 있을 적에, 옛날 선인(仙人) 손등(孫登)이 “그대는 재주는 많으나 식견이 부족하여 오늘날 세상에서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부디 많은 것을 구하려 하지 말라.[今子才多識寡 難乎免于今之世矣 子無多求]”고 한 충고를 떠올리고는, “옛날에 부끄럽게 충고를 받았나니, 지금 손등을 볼 면목이 없구나.[昔慙下惠 今愧孫登]”라는 내용의 시 ‘유분(幽憤)’을 지어 자책(自責)하였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49 嵇康傳ㆍ世說新語 棲逸》
♣ 혜성하[蹊成下]문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비유한 말. 한서(漢書) 이장군전(李將軍傳)에 “도리(桃李) 밑에 오솔길이 생겼다.” 하였는데, 그 주에 “도리는 본래 말을 못하지만 꽃과 열매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마다 도리 밑으로 가 자연히 오솔길이 생기게 된다. 이는 이 장군이 말을 안 해도 사람들이 그에게 감화된 것이 있어 믿고 추종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혜소[嵇紹]몽구 중(蒙求中) 嵇紹不孤(혜소불고)에 “진(晉) 나라 혜소의 자(字)는 연조(延祖)이다. 그의 아버지 강(康)이 산도(山濤)와 친하였는데, 강이 사형을 당할 무렵에 아들 소에게 ‘산도가 생존해 있으니 너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후에 과연 산도가 소를 천거하여 비서승(祕書丞)이 되었다.” 하였다.
♣ 혜숙야[嵇叔夜]혜숙야는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을 말함. 숙야는 그의 자. 혜강은 방외(方外)의 선비로서 세속을 초탈하여 산택(山澤)에 노닐면서 약(藥)이나 캐며 지냈는데, 갑자기 억울한 누명을 입고 동시(東市)에서 처형되었다. 《晉書 卷四十九》
♣ 혜시오거[惠施五車]장자(莊子) 천하(天下)에 “혜시(惠施)는 방술이 많으니 그 책도 다섯 수레가 된다.”는 말이 있다.
♣ 혜심환질[蕙心紈質]마음이 순결하고 성정(性情)이 고아(高雅)한 것을 말한다.
♣ 혜안[慧眼]불가에서 말하는 오안(五眼) 가운데 하나로서 즉 진리(眞理)를 통찰(洞察)하는 안식을 말한다.
♣ 혜약[蕙若]매우 향기로운 난초.
♣ 혜양[蕙纕]혜양은 향초를 허리에 띠는 것을 말하는데 즉 충직함을 비유한 것이다. 《楚辭 離騷》
♣ 혜완[嵇阮]혜완은 진(晉)의 명인 혜강(嵇康)과 완적(阮籍)으로 죽림(竹林)에 은거하여 술을 마시고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다. 두보(杜甫)의 정건(鄭虔)을 행각하며 지은 유회태주정십팔사호(有懷台州鄭十八司戶) 시에 “당신은 진정 혜완의 부류, 그나마 또다시 세상의 혹평을 받았구려.[夫子嵇阮流 更被時俗惡]”라는 구절이 있다.
♣ 혜요[彗妖]혜성은 전란(戰亂)을 상징하는 불길한 별로 인식되었다.
♣ 혜원[慧遠]원공(遠公)이라고도 한다.
♣ 혜원법사[慧遠法師]중국 동진(東晉) 때 여산(廬山)에 백련사(白蓮社)를 세우고 수도하였다.
♣ 혜원불금도령음[惠遠不禁陶令飮]혜원은 동진(東晉) 때의 고승(高僧)인 혜원 법사(惠遠法師)를 말하고, 도령(陶令)은 일찍이 팽택 령(彭澤令)을 지낸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혜원 법사가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社)에서 혜영(慧永)ㆍ혜지(慧持)ㆍ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 등 고사(高士)들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는 도잠을 부르자, 도잠이 “만일 나에게 술 마시는 것을 허락해 준다면 즉시 가겠다.” 하니, 혜원 법사가 그것을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 혜원유[惠遠遊]혜원(惠遠)은 중국 정토종(淨土宗)의 초조(初祖)로 숭봉되는 진대(晉代)의 고승(高僧)이다. 여산(廬山) 기슭 동림사(東林寺)에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18인의 현인과 서로 노닐었는데, 두보(杜甫)의 시에 “그야말로 여산의 길목에 들어서서, 혜원 따라 노니는 듯싶기만 하오그려.[似得廬山路 眞隨惠遠遊]”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11 題玄武禪師屋壁》
♣ 혜위모[蕙爲茅]초사(楚辭) 이소경(離騷經)에 “전혜(荃蕙)가 변하여 띠풀이 되었다.” 한 데서 온 말로,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변한 것을 비유한 말인데, 여기서는 유능한 사람이 무용지물로 변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 혜자[惠子]이름은 시(施). 전국 시대 송(宋) 나라 사람. 양(梁) 나라의 재상을 지내고 변론(辯論)에 능했으며, 장주(莊周)와 친절하였음.
♣ 혜자기지어[惠子豈知魚]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호량(濠梁) 위에서 놀 때 물고기가 나와 뛰놀자, 장자가 이르기를 “저 물고기가 즐거워서 저렇게 노는 것이다.” 하니, 혜자가 대꾸하기를 “그대가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가 즐거워하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하였는데, 이를 가리킨다. 《莊子 秋水》
♣ 혜장[蕙帳]향초(香草)로 만든 휘장. 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혜장이 비어 있으니 밤에 학은 집 떠난 주인을 원망하네.[蕙帳空兮夜鶴怨]" 하였다.
♣ 혜전탈우[蹊田奪牛]가벼운 죄에 대한 처벌이 혹독하다는 뜻의 고사성어.
♣ 혜주[惠州]중국 광동성 혜양현(惠陽縣) 서쪽에 위치한 고을. 송(宋)의 소식(蘇軾)이 귀양살이하던 곳임.
♣ 혜주반[惠州飯]혜주밥은 동파가 혜주로 귀양갔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임. 황정견의 시에 “飽喫惠州飯 細和淵明詩"라 한 구가 있음.
♣ 혜중산[嵇中散]혜중산은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을 말하는데, 중산(中散)은 곧 혜강이 중산대부(中散大夫)를 지냈으므로 이른 말이다. 그는 시대가 좋지 아니함을 알고 고의로 게으름을 부리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었다.
♣ 혜초[蕙草]혜초는 향초(香草)로, 곧 현자(賢者)의 높은 지조를 표시한다. 주자집주(朱子集註)에, “蕙 草名 本草云薰草也 陳藏器云卽零陵香也”라 했음.
♣ 혜함상[嵇含狀]진(晉)의 혜함이 지은 남방초목상(南方草木狀)을 가리킨다.
♣ 혜혜[嘒嘒]매미의 울음소리, 소리가 부드럽고 가락에 맞는 모양
♣ 혜홍[惠洪]송(宋) 나라 각범선사(覺範禪師)의 이름. 그는 선(禪)에 깊고 또 시를 잘 하였다.
♣ 혜화[蕙華]혜초(蕙草), 좋은 향내가 나는 난초에 속하는 풀.
♣ 혜화문[惠化門]혜화는 서울의 동북편 문 이름.
♣ 호[號]본 이름이나 자(字) 이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
♣ 호[乎]於 와 뜻이 같음.
♣ 호가[壺歌]진(晉) 나라 왕돈(王敦)이 대장군(大將軍)으로 큰 공을 세웠는데, 만년에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술을 마실 때마다 조조(曹操)가 지은 “늙은 천리마 구유에 누웠어도 뜻은 언제나 천 리 밖이요, 열사의 나이 비록 늙었어도 장한 그 마음 변함이 없네.[老驥伏 志在千里 烈士暮年 壯心不已]”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타호(唾壺)를 두드려 타호가 모두 깨지곤 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豪爽》
♣ 호가[浩歌]호가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는 뜻이다.
♣ 호가[胡笳]호인(胡人)들이 갈대의 잎을 말아서 만든 피리를 말하는데, 그 소리가 매우 애원(哀怨)의 정을 나타낸다고 한다. 한(漢) 나라 때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서 들여왔다 한다.
♣ 호가박[胡笳拍]후한(後漢) 때 채옹(蔡邕)의 딸 문희(文姬)가 지은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말하는데 가락이 매우 애처롭다 한다.
♣ 호가행[浩歌行]당 나라 이하(李賀)가 지은 칠언 고시의 제목으로, 봄날에 교외에서 벗들과 술자리를 벌여 놀면서 자신의 불우함을 큰소리로 노래한 것이다. 《李賀詩集 卷一 浩歌》
♣ 호가호위[狐假虎威]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림. 자신은 아무 실력도 없으면서 남의 권세를 믿고 위세를 부림. 강한 자의 위세를 빌어 약한 자에게 군림함.
♣ 호각[弧角]구면상(球面上)의 양대원(兩大圓)이 서로 교착하여 이루어진 각(角)을 이름.
♣ 호각지세[互角之勢]호각(互角)은 쇠뿔의 양쪽이 서로 길이나 크기가 같다는 데서 나온 말, 서로 겨루는 형세.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아주 팽팽하고 대등한 상황을 뜻함.
♣ 호경[呼庚]군량미가 떨어진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13년 조(條)에, “오(吳)의 신숙의(申叔儀)가 공손유산씨(公孫有山氏)에게 군량미를 요청하자, 대답하기를, ‘만약 수산(首山)에 올라가서 경계호(庚癸乎)라고 외치면 보내주겠다.’ 하였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두예(杜預)의 주(注)에, “경(庚)은 서방으로 곡식을 주관하고, 계(癸)는 북방으로 물을 주관한다.” 하였다.
♣ 호계[壺界]신선 세계를 말한다. 동한(東漢) 때 비장방(費長房)이 어떤 노인을 따라 술병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안에 신선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費長房》
♣ 호계[虎溪]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 서남쪽에 있는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앞의 시내 이름이다. 진(晉) 나라 때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이곳에 살면서 손님을 전송할 때 이 시내를 건넌 적이 없었는데 하루는 도잠(陶潛)과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하면서 진진한 얘기를 나누다가 그만 호계를 건너자 호랑이가 울었으므로 한바탕 크게 웃고 헤어졌다. 본시 호계를 건너면 호랑이가 울곤 하였다 한다. 《蓮社高賢傳》
♣ 호계별[虎溪別]호계는 계곡 이름이다. 진(晉) 나라 때의 고승(高僧)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적에 하루는 도잠(陶潛)과 육수정(陸修靜) 두 고사(高士)를 전송하면서 3인이 서로 도의(道義)가 부합하여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도 모르게 호계를 지나쳐 버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호계삼소[虎溪三笑]혜원대사는 여산(廬山)에 있으면서 어떤 귀한 손님이 왔다가 가더라도 산문 밖에 있는 호계(虎溪)까지 밖에 전송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은 도연명과 사령운이 왔다 가는데, 그들을 전송하며 이야기하다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시내를 건너 얼마를 더 갔었다. 그제야 깨닫고 세 사람이 모두 크게 웃었다 한다. 그래서 그것을 호계삼소(虎溪三笑)라 한다.
♣ 호계평류[瓠繫萍流]매달려 있는 뒤웅박처럼 계속 머물러 있게 되거나 물에 떠내려가는 부평초마냥 길을 떠나게 되거나 실의에 차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 호공[壺公]정두원의 호가 호정(壺亭)이다.
♣ 호공[胡公]호공은 후한(後漢)의 호광(胡廣)을 가리킨다. 《後漢書 卷 44 胡廣傳》
♣ 호공능축지[壺公能縮地]옛날에 호장공(胡長公)이라는 사람은 축지법을 잘했다고 한다.
♣ 호관[壺關]중국 호구산(壺口山)을 말함.
♣ 호관[虎觀]진사시(進士試)를 용호방(龍虎榜)이라 부른 데서 나온 말로, 나라에서 과거를 치르는 장소를 말한다.
♣ 호관친림[虎觀親臨]한(漢) 나라 장제(章帝)가 백호관(白虎觀)에 모든 선비들을 모아 경의(經義)를 토론하게 하고 친히 결재하였다. 그 논의(論議)를 기록한 것이 백호통(白虎通)이란 책이다.
♣ 호광[毫光]호광은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털[毫]에서 나온다는 빛을 말한다.
♣ 호구[狐丘]고향을 잊지 아니함. 여우가 죽을 때는 제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죽는다고 함. 호사수구(狐死首丘)
♣ 호구[虎丘]중국 오현(吳縣)에 있는 산 이름. 오 나라 임금 합려(闔廬)를 장사지낸 지 3일 만에 범이 묘 위에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호구(虎丘)라 하였다 한다. 호구 동서에 절이 있는데 동의 것은 동사(東寺), 서의 것은 서사(西寺)라고 이른다. 《越絶書》
♣ 호구지계[狐丘之戒]다른 사람으로부터 원망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의 고사성어.
♣ 호구지책[糊口之策]입에 풀칠이나 하는 방책. 겨우 끼니를 이어가기 위한 방책. 먹고 살 방법을 이름
♣ 호군련세시수처[縞裙練帨是誰妻]소식(蘇軾)의 매화시(梅花詩)에, “흰 치마 보얀 수건이 옥천 가의 집이라네.” 했는데 냇가의 매화꽃을 가리킨 말이며, 한유(韓愈)의 오얏꽃을 읊은 시에 “흰 치마 보얀 수건과 다름이 없네.” 한 것은 오얏꽃이 매화꽃과 다르지 않다는 말. 임포(林逋)는 매화와 학을 사랑하여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았다 한다.
♣ 호권[虎圈]범을 기르는 곳을 이름. 전하여 범 기르는 곳을 관장하는 소신(小臣), 즉 호권색부(虎圈嗇夫)의 준말로, 낮은 벼슬을 비유하기도 한다.
♣ 호기[呼旗]4월 8일 아이들이 장대에 종이를 오려붙여 이것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미포(米布)를 요구하여 놀이 비용으로 삼았는데 그 장대를 말함.
♣ 호기[灝氣]천지의 정대(正大)하고 강직(剛直)한 기운을 말한다.
♣ 호기진등[豪氣陳登]아무리 유명 인사라 하더라도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예 상대도 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진등이 국사(國士)의 명성을 갖고 있는 허사(許汜)가 찾아왔을 때, 손님 대접도 하지 않고서 자기는 큰 침상 위에 누워서 자고 허사는 그 밑에서 자게 했던 고사가 있다. 《三國志 卷7》
♣ 호노[楛砮]호시석노(楛矢石砮)의 약칭으로 탱자나무 비슷한 나무로 만든 화살과 돌화살촉이라는 뜻인데, 주 나라 때 동방 민족인 숙신국(肅愼國)에서 공물로 바치던 것이다. 《國語 魯下》
♣ 호당[湖堂]문신들에게 여가를 주어 글을 읽게 하던 곳.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독서당(讀書堂)을 말한다. 조선 세종 8년에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이 왕명에 따라 시작하였고 병자호란 후 폐지되었다.
♣ 호당독서[湖堂讀書]문관(文官) 가운데 문학에 뛰어난 사람에게 말미를 주어 오로지 학업을 닦게 하던 일. 사가독서(賜暇讀書).
♣ 호대[縞帶]멀리 흘러가는 강물이 마치 하얀 띠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쓴 표현이다.
♣ 호도격주[號咷擊柱]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는 진(秦) 나라의 의법(儀法)을 모두 버리고 간소화시키자, 뭇 신하들이 술을 마시며 공(功)을 다투고, 취한 자는 혹 망녕되이 부르짖으면서 칼을 뽑아 기둥을 치기도 했던 일을 가리킨 말이다. 《漢書 叔孫通傳》
♣ 호두[虎頭]진(晉)나라 때의 화가 고개지(顧愷之). 그의 소자(小字)가 호두(虎頭)이므로 세칭 고호두라 한다. 세상에서 재(才), 서(書), 치(癡)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 호두[鄠杜]한(漢) 나라 때 서도(西都) 근방 부풍(扶風)에 있는 호현(鄠縣)ㆍ두양현(杜陽縣)을 말한다. 한서(漢書) 원후전(元后傳)에 “여름에는 어숙현(篽宿縣)ㆍ호현ㆍ두양현의 사이에서 노닌다.” 하였다.
♣ 호두수부[虎頭水府]서주(徐州)의 성동(城東)에 석담(石潭)이 있어 사수(泗水)와 통하는데, 날이 가물 때에는 그 석담 가운데 범의 머리를 넣어주면 구름이 있고 비가 내린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十六 起伏龍行序》
♣ 호두연타청모장[壺頭鳶墮靑茅瘴]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공격하며 호두산에 이르렀을 때 혹독한 무더위를 만나 역사(疫死)하는 사졸들이 늘어나고 자신도 병에 걸리자 “찌는 듯 치솟아 올라오는 독기에 솔개도 물속에 툭툭 떨어지나니, 고향에서 편히 살자던 소싯적의 그 말을 누워서 떠올린들 어떻게 될 수가 있겠는가.[毒氣熏蒸 仰視鳥鳶跕跕墮水中 臥念少游平生時語 何可得也]”라고 탄식했던 고사가 있다.《東觀漢記 馬援傳》 청모(靑茅)는 향기가 독한 남방의 띠풀이다.
♣ 호두전신[虎頭傳神]호두는 동진(東晉) 때의 문인화가(文人畫家)인 고개지(顧愷之)의 자. 고개지는 매양 사람을 그릴 때마다 수년 동안 눈을 그리지 않으므로 누가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초상을 그려서 정신(精神)을 전하는 것은 바로 이 눈동자에 달려 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호량[濠梁]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에 있는 호수(濠水)의 가교(架橋). 옛날 장자(莊子)가 자기 친구인 혜자(惠子)와 함께 호량에서 노닐면서 물고기의 낙(樂)에 대하여 서로 얘기를 나누었던 데서 온 말로, 즉 친구들끼리 물가에서 노닒을 비유한 것이다. 《莊子 秋水》
♣ 호량변[濠梁辨]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장자와 혜자(惠子)가 호량(濠梁)의 강 위에서 어락(魚樂)에 대해 서로 논쟁한 것.
♣ 호량유[濠梁游]친한 벗끼리 둘이 만나 노닒을 비유한 말. 장자(莊子)가 자기 친구인 혜자(惠子)와 함께 호수(濠水)의 다리에 앉아 물고기를 구경하며 노닐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秋水》
♣ 호려[虎旅]호분(虎賁)과 여분(旅賁)으로, 즉 위사(衛士)를 가리킨다.
♣ 호련[瑚璉]호(瑚)와 연(璉)은 모두 고대에 종묘(宗廟)에서 서직(黍稷)을 담던 소중한 제기(祭器)로서, 그 귀중함으로 인해 큰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재능을 소유한 자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자공이 묻기를 ‘저는 어떠한 그릇입니까?’ 하자, 공자가 이르기를 ‘너는 호련이다.’고 하였다.” 하였음.
♣ 호련기[瑚璉器]훌륭한 인재를 말한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자공(子貢)이 ‘저는 어떻습니까?’ 하니, 공자가 ‘너는 그릇이다.’ 하였다.’무슨 그릇입니까?’ 하니, ‘호련이다’ 했다.[子貢問曰 賜何如 子曰 汝器也 曰 何器也 曰 瑚璉也]" 하였다.
♣ 호령[狐嶺]남태령의 별칭이다.
♣ 호로[葫蘆]약초의 이름인 호로파(葫蘆巴)의 준말인데, 본초(本草)에 의하면 이 약초를 의가(醫家)에서 장부(臟腑)의 허냉증(虛冷症)에 쓴다고 되어 있다.
♣ 호로[葫蘆]호로는 당 나라 등산거(鄧山居)가 독약을 화살에 발라 짐승을 쏘았는데 그 자리에서 넘어지므로 모호로(毛葫蘆)라 하였다.
♣ 호로[葫蘆]호로는 의양화호로(依樣畫葫蘆)의 준말로, 곧 옛사람을 본뜨기만 하고 새로운 생각을 창안해 내지 못함을 이름. 송(宋) 나라 도곡(陶穀)의 시에 “가소롭다 한림 도 학사는 해마다 모양따라 호로병을 그리누나.[堪笑翰林陶學士 年年依樣葫蘆]" 하였다.
♣ 호룡도[虎龍韜]병법(兵法)에 깊은 조예가 있는 것을 말한다. 주(周) 나라 여상(呂尙)이 지은 육도(六韜)라는 병서(兵書) 속에 용도(龍韜)와 호도(虎韜)의 편명이 들어 있다.
♣ 호리[蒿里]산동성(山東省)의 태산(泰山) 남쪽에 있는 산 이름. 옛 중국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혼백이 여기에 머문다고 하므로, 전하여 묘지를 뜻한다.
♣ 호리[毫釐]호리는 극히 미세한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경해(經解)에 “호리에서 잘못되면 천 리까지 틀려진다.[差若毫釐 繆以千里]" 하였다.
♣ 호리건곤[壺裏乾坤]호리병 속에 펼쳐져 있다고 하는 신선 세계를 가리킨다.
♣ 호리곡[蒿里曲]사람이 죽어 상여가 나갈 때에 부르는 노래. 즉 만가(輓歌)를 말한다. 해로가(薤露歌)는 왕공(王公)ㆍ귀인(貴人)에 대한 것에 반해, 호리는 사대부와 서인(庶人)에 대한 것이다.
♣ 호리별유천[壺裏別有天]후한(後漢) 때 한 노인이 시장에서 약(藥)을 팔았는데, 자기 점포 머리에 병 하나를 걸어 놓고 있다가 시장을 파하고 나서는 매양 그 병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때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는데, 다만 비장방(費長房)이 그것을 알고 그 노인에게 가서 재배(再拜)하고 인하여 노인을 따라서 그 병 속으로 들어가 보니, 옥당(玉堂)이 화려하고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가 그득하여 함께 술을 실컷 마시고 나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호리애만[蒿里哀挽]죽은 이를 애도하여 짓는 장송가(葬送歌)를 말하는데, 왕공(王公) 귀인(貴人)들에 대해서는 보통 해로곡(薤露曲)이라 하고, 사대부와 서인에 대해서는 호리곡(蒿里曲)이라 한다. 《史記 田儋傳 注》
♣ 호리옥경[壺裏玉京]술단지 속은 신선 세계를 말하고, 옥경(玉京)은 신선들이 사는 천상의 나라를 말한다. 동한(東漢) 때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에서 약을 파는 노인이 술단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따라 들어가 보니, 그 안에는 신선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費長房》
♣ 호리유천[壺裏有天]동한(東漢) 때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을 관리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시중에 어떤 노인이 약을 팔면서 가게 앞에다가 술단지[壺] 하나를 걸어 놓고는 시장이 파하자 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비장방이 누각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 그 노인에게 가서 노인과 함께 그 술단지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옥당(玉堂)이 있었으며, 그 안에서 좋은 술과 기름진 안주가 끊임없이 나왔다. 이에 둘이 함께 마시고는 취해서 나왔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費長房》
♣ 호마[胡麻]호마는 참깨임.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연간에 유신(劉晨)과 완조(阮肇)가 천태산(天台山)에 들어가서 약을 캐다가 두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들이 집으로 데리고 가서 호마밥을 지어주었다 한다. 《續齊諧記》
♣ 호마연북풍[胡馬戀北風]호마는 북쪽 오랑캐의 말이고, 월조(越鳥)는 남쪽 월(越) 나라의 새이다. 고문진보(古文眞寶) 전집(前集) 고시(古詩) 행행중행행(行行重行行)에 “북쪽 오랑캐의 말은 북풍에 의지하고, 월(越) 나라의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트네.” 하였다.
♣ 호마호우[呼馬呼牛]훼예(毁譽)를 남들이 말하는 대로 따름을 말함. 장자(莊子) 천도편(天道篇)에 보임.
♣ 호모경[胡母敬]진(秦) 나라 태사령(太史令)을 지냈음. 사주(史籒)의 대전(大篆)을 간소화하여 소전(小篆)을 만들었음.
♣ 호모부가[毫毛斧柯]수목을 어릴 때 베지 않으면 마침내 도끼를 사용하는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화(禍)는 미세할 때에 예방해야 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 호묘[湖泖]호묘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삼묘호(三泖湖)를 가리킨 것으로, 예찬(倪瓚)이 평소에 삼묘호를 왕래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한다.
♣ 호문[互文]이리저리 연결되는 문체.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평생에 백우선도 영락했고 평생에 교룡갑도 영락했다.”는 식으로, 윗구의 평생이 아랫구에도 내려가고, 아랫구의 영락이 윗구에도 올라와서 전체의 뜻을 보완해 준다.
♣ 호미[狐媚]음사한 방법을 써서 다른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을 말한다. 진서(晉書) 석늑재기 하(石勒載記下)에, “대장부가 행하는 일은 정정당당하여 일월처럼 환해야 하는 법이니, 끝내 조맹덕(曹孟德)이나 사마중달(司馬仲達) 부자(父子)처럼 고아나 과부를 속여 여우처럼 미혹시켜서 천하를 차지하지는 않겠다.” 하였다.
♣ 호박가[胡拍笳]채양(蔡襄)이 호가 십팔박(十八拍)을 썼는데, 안방 여인의 자태가 있었다.
♣ 호배[虎拜]천자를 배알하여 절하는 것을 말한다. 호(虎)는 주 선왕(周宣王)때의 어진 신하 소목공(召穆公)의 이름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강한(江漢)의 “소호는 엎드려 머리 조아리고 임금님 은덕을 사례했네[虎拜稽首 對揚王休]"에서 나온 말로, 대장이 임금께 절하는 것을 뜻한다.
♣ 호백구[狐白裘]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가죽을 여러 장 모아 이어서 만든 갖옷. 귀족‧고관 대작(高官大爵)만이 입을 수 있었던 데서 귀족의 상징물이 되기도 했다고 함. 호구(狐裘)라고도 일컬음.
♣ 호복기사[胡服騎射]어떤 일에 착수할 만전의 태세를 갖추다란 뜻의 고사성어.
♣ 호복림중석[虎伏林中石]한(漢)나라 이광(李廣)이 사냥 나갔다가 풀 속의 돌을 보고 범인 줄 알고 쏘았더니 살이 박히기에 가서 보니 돌이었다. 《漢書 李廣傳》
♣ 호복의[濠濮意]호량(濠梁)은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논한 곳이고, 복수(濮水)는 장자가 초(楚) 나라 왕의 초빙도 거절한 채 낚시를 하던 곳으로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나오는 곳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간문제(簡文帝)가 화림원(華林園)에 들어가서는 좌우를 돌아보며 “마음에 맞는 곳을 찾으려면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울창하게 우거진 이 수목 사이에 들어서니, 호량과 복수 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저절로 든다.[會心處不必在遠 峠然林木 便自有濠濮間想也]”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 호부견자[虎父犬子]아버지는 잘났는데 아들은 못나고 어리석음.
♣ 호분[胡紛]기름과 분을 섞어 죽과 같이 만든 도료. 석명(釋名) 석수식(釋修飾)에 “胡紛, 胡, 餬也. 脂和以塗面也.”라 하였다.
♣ 호분[虎賁]범이 짐승을 때려잡듯 하는 용사(勇士)를 말한다. 한(漢) 나라의 벼슬 이름인데, 용력 있는 장사를 여기에 편입시켜 호사(虎士) 8백 인을 거느리고 왕이 출입할 때에 앞뒤에서 호위하는 일을 맡았다. 국책(國策)에, “진(秦)은 호분(虎賁)의 군사가 백여 만이다.” 하였음.
♣ 호사다마[好事多魔]좋은 일에는 마가 많이 낀다. 좋은 일이 있을 땐 이상하게도 이를 방해하는 궂은 일이 많이 생김. 또는 좋은 일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그 만큼 노력과 고충이 뒤따른다는 말
♣ 호사무인송주전[好事無人送酒錢]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가난해서 좋아하는 술도 못 먹고 있었는데, 호사자(好事者)들이 가끔씩 술과 안주를 가지고 찾아와서 배우며 노닐었다 한다. 《漢書 揚雄傳下》
♣ 호사수구[狐死首丘]고향을 잊지 않음. 여우가 죽을 때면 제가 살던 언덕 쪽으로 머리를 돌린다고 함. 《淮南子 說林訓》
♣ 호사유피[虎死留皮]호랑이가 죽으면 가죽을 남김과 같이 사람도 죽은 뒤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말
♣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호사인[好事人]물으러 오는 사람. 한 나라 양웅(揚雄)은 술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집이 가난해 마시지를 못했는데, 호사자(好事者)가 술과 안주를 싸들고 와서[載酒肴] 종유(從游)하며 배웠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漢書 揚雄傳 贊》
♣ 호사자[好事者]술병을 들고 찾아와서 글을 묻는 사람들을 말한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좋아하는 술도 못 먹을 정도로 집이 가난하였는데, 인적이 드문 그 집에 이따금씩 호사자가 술과 안주를 들고 찾아와 글을 배웠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87 下 揚雄傳贊》
♣ 호사필수구[狐死必首丘]여우는 죽을 때 반드시 머리를 살던 언덕으로 향한다.
♣ 호사휴호지[好事携壺至]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집안이 가난하여 좋아하는 술을 마시지 못하고 있었는데, 호사자들이 술과 안주를 싸들고 와서 종유(從游)하였다고 한다. 《漢書 揚雄傳》
♣ 호산[壺山]여산(礪山)의 옛 이름이다.
♣ 호상[滈翔]높이 날다.
♣ 호상[湖湘]호상은 동정호(洞庭湖)와 상강(湘江)을 말한다.
♣ 호상락[濠上樂]장자와 혜시(惠施)가 징검다리 위[濠梁之上]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토론을 벌인 이야기가 장자(莊子) 추수(秋水) 말미에 나온다.
♣ 호상원지[濠上遠志]장자(莊子)가 혜자(惠子)와 만나 호량(濠梁)위에서, 뛰노는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 문답하던 시속을 초월한 뜻. 《莊子 秋水》
♣ 호생[好生]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好生之德 洽于民心"의 대문이 있음.
♣ 호성홀혜패[胡星忽彗孛]안녹산(安祿山)이 반기(叛旗)를 들고 일어난 것을 말함인데, 안녹산은 원래 흉노(匈奴) 족속이었다.
♣ 호소[縞素]흰색의 상복(喪服)을 말한다.
♣ 호손입낭[胡孫入囊]호손은 원숭이의 별칭이다. 송(宋) 나라 매성유(梅聖兪)가 끝내 관직 하나를 얻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당서(唐書)를 개수(改修)하라는 조칙을 받자, 자기 아내에게 “내가 실록을 개수하게 되다니, 얻기 힘든 호손이 자루 속에 절로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吾之修書 可謂胡孫入布袋矣]”고 했다는 일화가 구양수(歐陽脩)의 귀전록(歸田錄) 2권(卷)에 수록되어 있다.
♣ 호수[狐首]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하는 인지상정을 말한다. 여우가 죽을 때에 옛날 살던 곳으로 머리를 둔다는 “狐死首丘”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禮記 檀弓上》
♣ 호수[湖叟]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었던 정세아(鄭世雅), 그의 호가 호수(湖叟)이고 자는 화숙(和叔),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 호수[虎宿]백호(白虎)의 성수(星宿)로서 즉 서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 호수매치[胡首埋置]국경을 침범하였다가 잡혀 참수된 호인의 머리를 한성부(漢城府)가 호인이 왕래할 때 지나는 길가에 묻어두어 징계가 되게 하는 것.
♣ 호수면낭[皓首當年未免郞]한(漢) 나라 풍당(馮唐)이 흰머리가 되도록 낮은 관직인 낭관으로 있다가 문제(文帝)가 마침 낭서(郞署)를 지나다가 그와 문답하여 보고 그의 인재를 알아준 일이 있다.
♣ 호수한사[皓首漢駟]젊은 나이에 사신(使臣)으로 호국(胡國)에 들어가 억류생활을 하다가 19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보니 머리가 이미 하얗게 변했다는 한(漢) 나라 소무(蘇武)의 고사로 사람의 불우(不遇)를 뜻한다.
♣ 호숭[呼嵩]한 무제(漢武帝)가 숭산(嵩山)에 올랐더니, 신하들이 말하기를, “산이 만세(萬歲)를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하였다. 여기서는 곧 만세를 부른다는 말이다.
♣ 호승[胡僧]서역(西域)에서 온 중을 말한다.
♣ 호승[胡繩]향기로운 풀 이름.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 자기 자신을 깨끗하고 향기롭게 가꾼다는 뜻으로, “계수나무를 들어 난초 꿰달고, 호승으로 노끈을 길게길게 꼬리.[矯菌桂以紉蘭兮 索胡繩之纚纚]”하였음.
♣ 호승[胡僧]호승은 인도의 중이란 뜻이다.
♣ 호시[楛矢]호시는 호목(楛木)으로 만든 화살인데, 주 무왕(周武王) 때에 숙신씨(肅愼氏)가 이 화살을 조공했다는 데서, 즉 사방 오랑캐들이 중국에 귀순하여 조공함을 뜻한다. 국어(國語) 노어(魯語)에 “공자가 진(陳) 나라에 있을 때 새매가 진후(陳侯)의 뜨락에 날아와서 죽었는데 돌촉의 싸리나무 화살에 관통된 것이 길이가 한 자가 넘었다. 진후가 사람을 시켜 새매를 가지고 공자에게 가서 물으니 공자가 이르기를 ‘이 새매가 멀리 왔다. 이 화살은 숙신씨(肅愼氏)의 화살이다.’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 호시[怙恃]믿어서 의지하는 것. 자식의 호시는 부모요, 신하의 호시는 임금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육아(蓼莪)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구를 믿으며 어머니가 없으면 누구를 의지하랴!" 하였다.
♣ 호시[虎市]저자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을 하면 믿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韓非子 內儲說》
♣ 호시[弧矢]호시는 상호봉시(桑弧蓬矢)의 준말로, 아들을 낳았음을 뜻함. 옛날에 아들을 낳으면 뽕나무로 만든 활과 쑥대로 만든 화살 여섯 개로 천지(天地)와 사방(四方)을 향하여 한 개씩 쏘았던 데서 온 말인데, 그것은 곧 남아(男兒)가 사방에 웅비(雄飛)하기를 축원하는 뜻에서라고 한다. 《禮記 內則》
♣ 호시석노[楛矢石砮]탱자나무 비슷한 나무로 만든 화살과 돌화살촉이라는 뜻인데, 주 나라 때 동방 민족인 숙신국(肅愼國)에서 공물로 바치던 것이다. 《國語 魯下》
♣ 호시원[弧矢願]호시는 뽕나무로 만든 활과 쑥대로 만든 화살로, 천하를 경략하고자 하는 큰 뜻을 말한다. 옛날에 아들이 태어난 뒤 3일이 지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서 천지 사방에 활을 쏘아, 남아로 태어났으면 응당 사방을 돌아다닐 뜻을 품어야 함을 표상하였다. 《禮記 內則》
♣ 호시장도[弧矢壯圖]천하를 경략하고자 하는 큰 뜻을 말한다. 고대에 아들이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서 천지 사방에 활을 쏘아, 남아로 태어났으면 응당 사방을 돌아다닐 뜻을 품어야 함을 표상하였다. 《禮記 內則》
♣ 호시지[弧矢志]호시는 상호봉시(桑弧蓬矢)의 준말로,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을 말한다. 쑥은 어지러움을 막는 풀이고 뽕나무는 모든 나무의 근본이라 하여 상고 때 사내가 태어나면 뽕나무로 만든 활에 쑥대화살 여섯 개를 천지와 동서남북에 쏘아 보내 장부의 뜻이 원대하여 천지 사방에 있음을 표시하였다 한다. 곧 장부의 원대한 포부를 말한다. 《禮記 內則》
♣ 호시탐탐[虎視耽耽]범이 사나운 눈초리로 먹어를 노려본다는 뜻으로 날카로운 눈초리로 형세(形勢)를 노려보는 것을 말함.
♣ 호식내열[虎食內熱]장자(莊子) 달생(達生)에 “옛날 노(魯) 나라의 단표(單豹)라는 사람은 바위굴 속에 살면서 물만 마시어 나이 70세가 되어서도 얼굴이 어린애 같았는데 불행히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고, 장의(張毅)라는 사람은 아무데라도 가리지 않고 두루 다녔는데 나이 40세에 내열병(內熱病 심장에서 열이 나는 병)이 나서 죽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그 뒤떨어진 것을 보충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가 말하기를 ‘안(정신)을 기르는 데만 전적으로 힘쓰지 말고, 밖(몸)을 너무 드러내지도 말아서 안과 밖이 똑같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지인(至人)이 되는 것이다.’고 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호아[虎兒]미불(米芾)의 아들 미우인(米友仁)의 이름이 호아임.
♣ 호아[虎牙]호아(虎牙)는 장군(將軍)의 명호(名號)로, 동한(東漢)의 용장(勇將)인 개연(蓋延)과 요기(姚期)가 각각 호아장군과 호아대장군에 임명된 고사가 전한다.
♣ 호아[胡娥]호아는 흉노(匈奴)의 여자를 이른다.
♣ 호아멱추성[呼兒覓秋聲]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가 가을 기운이 만물을 숙살 조락(肅殺凋落)시키는 데에 느낌이 있어 지은 추성부(秋聲賦)에 “구양자(歐陽子)가 밤에 글을 읽는데 서남쪽에서 쌀쌀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내가 아이를 불러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나가 보라 하였더니, 아이가 들어와 말하기를 ‘별과 달은 밝고 깨끗하고 은하수는 하늘에 있으며, 사방에 인기척은 없는데 소리가 나무 사이에서 났습니다.’고 했다.” 한 데서 온 말로, 즉 가을이 왔음을 비유한 말이다.
♣ 호안[胡眼]불자(佛者)의 눈을 이른다.
♣ 호앙천랑[胡昂天狼]호묘성(胡昴星)과 천랑성(天狼星). 옛날에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이 두 별이 나타나 요기(妖氣)를 부린다고 믿었다.
♣ 호어[濠魚]호수(濠水)에서 사는 피라미로, 한가롭게 노니는 물고기를 말한다. 장자(莊子)가 혜자(惠子)와 호숫가 봇둑 위를 걷다가, “피라미가 나와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군. 피라미는 참 즐거울 거야.” 하니, 혜자가, “자네는 피라미가 아닌데 어떻게 피라미가 즐거울 것이란 것을 아는가?”하자, 장자가,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가?”하니, 혜자가, “나는 자네가 아니라서 본시 자네를 알지 못하네. 자네도 본시 피라미가 아니니 자네가 피라미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네.” 하였다. 《莊子 秋水》
♣ 호언장담[豪言壯談]실지 이상으로 보태어서 허풍쳐 하는 말.
♣ 호연[浩然]맹호연(孟浩然)인데, 당(唐) 나라 양양(襄陽) 사람이다. 시로 명성이 크게 났으며, 왕유(王維)와 함께 왕맹(王孟)으로 불렸다.
♣ 호연지기[浩然之氣]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도 큰 원기(元氣), 도의에 뿌리를 박고 공명 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는 도덕적 용기, 사물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
♣ 호연희연[皞然熙然]광대하고 자득한 모양을 말한 것으로, 즉 성왕(聖王)의 정치는 마치 천지의 자연과 같아서, 백성들이 그 태평 성대에 살면서도 전혀 누구의 덕으로 그렇게 사는지조차 모르는 아주 자연스러움을 뜻한다.
♣ 호염읍[胡髥泣]황제(黃帝)가 형산(荊山) 아래서 솥을 주조하고 나자, 용(龍)이 호염(胡髥; 턱수염)을 내려 황제를 맞이하니, 황제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므로, 소신(小臣)들은 함께 올라가지 못하고 떨어뜨린 황제의 궁검(弓劍)과 용의 수염만 안고 통곡했던 데서 온 말로, 역시 임금의 죽음을 비유한 말이다. 《史記 封禪書》
♣ 호오[好惡]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 호오봉[胡五峰]오봉은 송(宋) 나라 학자 호굉(胡宏)의 호.
♣ 호우[湖右]호서(湖西). 곧 충청도(忠淸道).
♣ 호우호마[呼牛呼馬]장자(莊子) 천도(天道)의 “저번에 자네가 나를 소라고 불렀을 때 내 자신도 소라고 생각했고 나를 말이라 불렀을 때 또한 말이라 생각했다.”에서 나온 것으로, 자신에 대한 남들의 실없는 칭찬이나 비방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 호원[胡元]원(元) 나라가 이민족(異民族)에게서 일어났으므로 이렇게 부름.
♣ 호원감목[胡元監牧]원(元) 나라 때에 제주도를 거마(車馬)를 관장하는 방성(房星)의 분야(分野)라 하여 이 곳에 말의 목장(牧場)을 두고 단사관(斷事官)이나 만호(萬戶)를 두어 목축을 주관했던 데서 온 말이다.
♣ 호월[胡越]호(胡)는 북쪽 지방에, 월(越)은 남쪽 지방에 있었으므로 거리가 먼 것을 칭한다. 매우 소원(疏遠)함을 비유한 말이다.
♣ 호월고풍[壺月高風]송(宋) 나라 도학자 이동(李侗)의 높은 인격을 말한다. 송사(宋史) 권428에 “등적(鄧迪)이 일찍이 주송(朱松)에게 말하기를 ‘원중(愿中)은 마치 빙호추월(冰壺秋月)과 같아 한 점 티가 없이 맑게 비치니 우리들이 따라갈 수가 없다.’ 하였다.” 하였다.
♣ 호위[虎闈]호위는 궁성의 호문(虎門)과 같은 말로, 호문의 좌측에 있던 국자감(國子監)의 별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성균관(成均館)을 말하기도 한다.
♣ 호위[虎衛]호위는 왕의 근위병을 가리킨다.
♣ 호위문견[胡威問絹]호위는 진(晉) 나라 호질(胡質)의 아들. 그의 아버지가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을 적에 위가 가서 뵙고 돌아오는데, 비단 한 필을 주므로 위가 꿇어 앉아 “아버님께서 청백하신데 어디서 이 비단을 얻으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질이 “이것은 내 봉급에서 남은 것으로 너의 생활에 보태주는 것이다.” 하자, 위가 그제서야 받았다. 《晉書 卷九十》
♣ 호유[胡荽]향초 이름
♣ 호음[湖陰]조선 시대 문신(文臣)인 정사룡(鄭士龍)의 호이다.
♣ 호의[狐疑]의심(疑心)하여 결정(決定)하지 못함 또 그 사람
♣ 호의[縞衣]자신의 아내를 겸칭(謙稱)한 말. 시경(詩經) 정풍(鄭風) 출기동문(出其東門)에 “흰 저고리 초록 치마가 그래도 나의 사랑이로다[縞衣綦巾 聊樂我員]” 한 데서 온 말이다.
♣ 호자[胡仔]송(宋) 나라 사람. 호는 초계어은(苕溪漁隱).
♣ 호자[瓠子]한 무제(漢武帝) 때 이곳에서 황하수가 터졌다고 한다.
♣ 호자가[瓠子歌]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지은 노래 이름이다. 무제 때 황하수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복양현(濮陽縣)에 있는 호자(瓠子)의 둑을 터뜨리자,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를 시켜서 터진 곳을 메우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에 무제가 사방에 가 봉선(封禪)한 뒤에 친히 이곳으로 와 급인(汲仁)과 곽창(郭昌)으로 하여금 군사 수만 명을 징발하여 메우게 하였는데, 장군(將軍) 이하가 모두 등에 짐을 지고 가 메우면서 기원(淇園)의 대나무를 모두 잘라다가 채워넣어 마침내 공사를 완공하였다. 그러자 무제가 호자가를 짓고는 이곳에다가 선방궁(宣房宮)을 세웠다. 《漢書 卷6 武帝紀》
♣ 호장[壺漿]어진 관원이 지나가면 백성들이 항아리에 미음을 담아 가지고 바치면서 환영한다는 뜻이다.
♣ 호장백일선[壺藏白日仙]한(漢)나라 비장방(費長房)이 여남시(汝南市)의 연리(椽吏)로 있었는데, 시(市)에 한 노인이 병[壺] 하나를 매달아 놓고 약(藥)을 팔다가, 일을 마치고 나면 매양 병 속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데, 비장방이 누상(樓上)에서 그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찾아가 절하고 술과 안주를 대접하며, 같이 병 속에 들어가기를 간청하였다. 병 속에 들어가 본즉, 화려한 집과 좋은 음식들이 가득 찼었다.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신선(神仙)인데 허물을 짓고 귀양왔다.” 하였다.
♣ 호저[縞紵]흰 명주띠와 모시옷. 춘추 시대 오(吳) 나라의 계찰(季札)이 정(鄭) 나라의 자산(子産)에게 흰 명주띠를 선사한 데 대하여 그 답례로 자산이 계찰에게 모시옷을 선사한 고사에서 온 말로, 벗 사이의 선물 또는 교의(交誼)의 뜻으로 쓰인다. 《左傳 襄公二十九年》
♣ 호저회[縞紵懷]춘추 시대에 오(吳) 나라 계찰(季札)이 정(鄭) 나라 자산(子産)에게 흰 명주 띠를 선사하고, 자산은 그 답례로 계찰에게 모시옷을 보낸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호전[胡銓]송(宋)의 여릉(廬陵)사람으로 호가 담암(澹菴). 고종(高宗)때 추밀원 편수관(樞密院編修官)으로서 당시 진회(秦檜)가 금(金)과의 화의를 주장하여 금나라 사신이 강남 지방을 조유(詔諭)한다는 명분으로 임안(臨安)에 이르자, 호전이 글을 올려 진회와 손근(孫近) 및 금나라 사신 왕륜(王倫) 세 사람의 목을 베야 한다고 상소했다가 진회의 노여움을 사, 후에는 길양군(吉陽軍)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 후 진회가 죽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여 그를 다시 봉의랑(奉議郞)에 복위시키고 이어 소대(召對)하였음. 《宋史 卷三百七十四》
♣ 호접[蝴蝶]나비.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옛적에 장주(莊周)가 꿈에 범나비가 되었는데, 깨어 보니 바로 장주였다.” 하였음.
♣ 호접공[蝴蝶空]장자(莊子)가 꿈에 나비[蝴蝶]가 되어서 펄펄 날아 다녀 보았는데, 그때에는 자기가 그대로 나비로만 생각하였지 장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꿈을 깨어서 사람이 되고 보니, 자기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으나 실상은 나비가 정말인데 사람이 나비 꿈속에서 잠시 화(化)한 것인지, 그렇다면 세상은 그 나비와는 관계없다는 말이다.
♣ 호접몽[胡蝶夢]중국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았다는 고사. 장자는 꿈도 현실도, 삶도 죽음도 구별이 없는 세계를 강조했다.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것도 한낱 만물의 변화상에 불과한 것이다. 곧, 외물과 자아의 구별이 없는 세계를 강조한 말이다.
♣ 호접이망양[蝴蝶已亡羊]호접은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피아(彼我)의 구별을 잊고 놀았다는 데서, 꿈꾼 것을 뜻하고 양(羊)을 잃었다는 것은 옛날 양자(楊子)의 이웃 사람이 양을 잃고 찾으러 나갔으나 갈림길이 많아서 찾지 못하고 말았다는 고사에서, 이미 잃어버린 것을 뜻한다.
♣ 호접지몽[胡蝶之夢]나비의 꿈. 어느 날 장주(莊周,)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꿈에 내가(장주가) 나비가 되어 기분 내키는 대로 유쾌하게 훨훨 날아다니면서 즐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장주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잠을 깨고 보니 틀림없는 나(장주)였다. 꿈이 워낙 생생하다 보니 도대체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나비가 꿈속에서 내가 되어 있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와 나비는 겉보기엔 분명 구별이 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사물(만물)은 서로가 본질적으로 같은 하나의 존재이다. 만물들이 세상에 존재할 때 겉모습이 나(사람)와 나비처럼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은 만물들의 단순한 변화일 뿐이지, 서로가 본질이 다른 절대적인 변화가 아니다. 즉, 이 세상 만물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닌 동일한 본질을 가진 하나의 존재이며, 그 만물들은 각기 변화된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나를 포함한 모든 사물(만물)은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하나이다
♣ 호접진[蝴蝶陣]호접진은 진법(陣法)의 하나로 왜적들이 즐겨 썼다. 임진왜란 중이던 계사년(1593)에 명 나라에서 구원병으로 나왔던 제독(提督) 이여송은 벽제(碧蹄)에서 왜적의 유인에 말려 그만 진흙 속에 빠져 탄 말이 나오지 못했다. 이여송은 몹시 위급하게 되었는데 지휘사(指揮使) 이유승(李有昇)의 구원으로 다행히 탈출하였으나 이유승은 끝내 왜적에게 잡히어 죽고 말았다. 이여송은 그의 사위 왕심(王審)을 불러 보고 크게 통곡하였다. 《再造藩邦志 卷二》
♣ 호정[壺亭]호정(壺亭)은 정두원(鄭斗源)의 호이다.
♣ 호정교[胡釘鉸]남부신서(南部新書)에 의하면, 호생(胡生)이란 자는 만두 만드는 것으로 업을 삼으며 백빈주(白蘋州) 가에서 살았는데, 그 곁에 고분(古墳)이 있어서, 매양 차를 마시게 되면 반드시 한 잔을 올리곤 하였다. 하루는 꿈에 어떤 사람이 말하되, “나의 성은 유(柳)인데, 평생에 시(詩)를 잘하고 차마시기를 즐겼었다. 그대가 차를 나눠 준 은혜 감사하고 있으나 갚을 길이 없으므로 그대에게 시를 가르쳐 주고자 한다.” 하므로, 호생은 능하지 못함을 들어 사양하자 유(柳)는 강권하며, “다만 그대 뜻대로만 하면 된다.” 하여, 호생은 마침내 시를 잘하게 되었다. 그래서 호생의 시체(詩體)를 후인들이 호정교체(胡釘鉸體)라 일렀다 함.
♣ 호조비화[好鳥飛花]이 백의 시에, “좋은 새는 봄을 맞아 뒷동산에서 노래하고, 나는 꽃은 술을 보내어 처마 앞에 춤을 추네[好鳥迎春歌後院 飛花送酒舞前簷].”라고 하였음.
♣ 호주[互足]서로 연관성이 있음.
♣ 호주[壺洲]호주는 선산(仙山)인 방호(方壺)와 영주(瀛洲)를 뜻하는 시어(詩語)이다.
♣ 호주두목[湖州杜牧]당(唐) 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일찍이 호주(湖州)에 가서 친구인 자사(刺史)의 주선으로 10여 세쯤 된 미녀를 만났는데, 이 때 두목이 약속하기를 “지금은 데려갈 수 없으니, 의당 10년 뒤에 내가 호주자사가 되어 오겠다. 그때에 내가 오지 않으면 다른 데로 시집을 가도 좋다.” 하고는 서로 헤어졌다가 14년 뒤에야 호주자사가 되어 가 보니, 그녀는 이미 시집을 가서 두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를 잠시 만나 보고 헤어지면서 이별을 슬퍼하여 지은 시에 “스스로 봄을 찾아간 것이 더디었으니 굳이 슬퍼하며 꽃다운 시절 한할 것 없네 미친 바람이 짙붉은 꽃 모두 떨어뜨리어 푸른 잎 그늘 이루고 열매가 주렁주렁하구나[自是尋春去較遲 不須惆悵恨芳時 狂風吹盡深紅色 綠葉成陰子滿枝]” 한 데서 온 말이다.
♣ 호중[壺中]신선이 사는 세계를 말한다. 동한(東漢) 때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에서 약을 파는 노인이 술단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따라 들어가 보니, 그 안에는 신선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後漢書 方術列傳 費長房》
♣ 호중구화운[壺中九華韻]소식(蘇軾)의 호중구화시(壺中九華詩)의 운을 이르는데, 호중구화시의 자서(自序)에 의하면 “호구(湖口) 사람 이정신(李正臣)이 기이한 돌을 가지고 있는데, 아홉 봉우리가 영롱(玲瓏)하고 마치 격자창 모양으로 생겼으므로, 내가 백 금(百金)을 주고 그것을 사다가 나의 구지석(仇池石)과 짝을 만들고 싶었으나, 마침 남쪽으로 옮겨가게 되어 틈을 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선 이를 ‘호중구화’라 명명하고 또 시로써 기록하는 바이다.” 하였다. 《蘇東坡集 卷三十八》
♣ 호중멱구환[壺中覓九還]술병 속은 신선 세계를 말하고, 구환단(九還丹)은 아홉 차례 달인 단약(丹藥)으로, 이를 먹으면 신선이 된다고 한다.
♣ 호중세월[壺中歲月]선인(仙人) 호공(壺公)이 병 속에서 별천지(別天地)를 누리고 지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즉 별천지의 뜻으로 쓴 말이다.
♣ 호중일[壺中日]한(漢) 나라 비장방(費長房)이 신선을 따라 병 속에 들어가 본 즉 별천지가 있었다.
♣ 호중일월[壺中日月]후한 때 신선 호공(壺公)이 시장에서 약장수를 하면서 장이 파하면 그때마다 병 속[壺中]으로 들어가므로, 시연(市掾)으로 있던 비장방(費長房)이 그를 따라 병 속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에 별천지(別天地)가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費長房傳》
♣ 호중장일월[壺中藏日月]선인(仙人) 호공(壺公)의 호로병 속으로 비장방(費長房)이 함께 들어가 보니, 그 안에 일월(日月)이 걸려 있고 신선 세계가 펼쳐져 있더라는 전설이 전한다. 《神仙傳 壺公》
♣ 호중천[壺中天]선경(仙境)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이 선인(仙人) 호공(壺公)을 따라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서 선경의 즐거움을 한껏 누렸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神仙傳 壺公》
♣ 호중천지[壺中天地]선경(仙境)이나 승경(勝境)을 가리키는 호천(壺天)을 말한다. 동한(東漢) 때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을 관리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시중에 어떤 노인이 약을 팔면서 가게 앞에 술단지[壺] 하나를 걸어 놓고 시장이 파하자 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비장방이 누각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 그 노인에게 가서 노인과 함께 그 술단지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옥당(玉堂)이 있었으며, 그 안에서 좋은 술과 기름진 안주가 끊임없이 나왔다. 이에 둘이 함께 마시고는 취해서 나왔다. 《後漢書 卷82 方術傳下 費長房》
♣ 호중한[壺中閒]호중(壺中)은 병 속이란 뜻으로, 후한(後漢) 때 선인(仙人) 호공(壺公)이 시장에서 약을 팔다가 장이 파하면 문득 병 속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이를 본 비장방(費長房)이 한번은 그를 따라 병 속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에 엄연한 별천지(別天地)가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八十二》
♣ 호증[胡曾]당 나라 사람으로 글에 능하였다. 함통(咸通) 연간에는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의 서기(書記)로 있다가 뒤에 고병(高騈)에게 발탁되었는데, 모든 전주(箋奏)가 그의 손에 의하여 지어졌으며 저서로는 영사시(詠史詩)ㆍ안정집(安定集) 등이 있다. 《尙友錄 卷三》
♣ 호지원[胡地怨]한 나라 원제(元帝) 때 궁녀인 왕소군이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제의 총애를 입지 못하다가 궁중 화가(宮中畫家)의 농간에 의해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가게 되었는데, 흉노의 땅으로 갈 적에 비파를 들고 변방 땅을 지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서 슬퍼한 것을 말한다. 《漢書 卷94下 匈奴傳》
♣ 호창[浩倡]소리가 성대한 모양
♣ 호천[壺天]선경(仙境)이나 승경(勝境)을 말한다. 동한(東漢) 때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을 관리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시중에 어떤 노인이 약을 팔면서 가게 앞에 술단지[壺] 하나를 걸어 놓고 시장이 파하자 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비장방이 누각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 그 노인에게 가서 노인과 함께 그 술단지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옥당(玉堂)이 있었으며, 그 안에서 좋은 술과 기름진 안주가 끊임없이 나왔다. 이에 둘이 함께 마시고는 취해서 나왔다. 《後漢書 卷82 方術傳下 費長房》
♣ 호천[壺天]호천은 동천(洞天)과 같은데 도가(道家)에서 신선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술이기(述異記)에 “인간의 36개 동천 가운데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은 10개이고 그 나머지 26개는 구미지(九微誌)에 나오기는 하나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 호천망극[昊天罔極]하늘처럼 넓고 커서 다함이 없음. 넓고 큰 부모의 은혜가 하늘과 같이 끝이 없음을 이르는 말
♣ 호천세계장[壺天世界藏]후한(後漢) 때 호공(壺公)이란 선인(仙人)이 시장에서 약(藥)을 팔면서 밤이 되면 병 속으로 들어갔는데, 한번은 시연(市掾) 비장방(費長房)이 그곳을 따라 들어가보니, 완연하게 별천지가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費長房傳》
♣ 호청경[虎聽經]범이 불경 읽는 소리를 듣는다는 뜻인데, 육귀몽(陸龜蒙)의 고원사시(孤園寺詩)에 의하면 “암석 위에는 진리 깨친 사람이요, 창문 앞에는 불경 듣는 범이로다[石上解空人 窓前聽經虎]”하였다.
♣ 호초축팔백곡[胡椒蓄八百斛]당(唐) 나라 원재(元載)의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니, 호초(胡椒)가 8백 곡(斛)이요, 다른 재물도 그와 같을 정도로 많았다.
♣ 호추[胡雛]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安祿山)은 본래 호인(胡人)이었으므로 호추(胡雛)라 하였다.
♣ 호축계[好祝雞]전설에 옛날 낙양(洛陽)의 선인(仙人)이 시향(尸鄕)의 북산 밑에서 백여 년 동안 닭을 기르며 살았는데, 천여 마리의 닭에게 각기 이름을 붙여 주어 부르고 싶은 닭의 이름을 부르면 밖에 돌아다니던 닭이 제이름을 듣고 찾아왔다 한다. 《列仙傳 上》
♣ 호치[皓齒]희고 깨끗한 이. 곧 미인을 뜻하는 말이다.
♣ 호치단순[皓齒丹脣]아름다운 여자의 붉은 입술과 흰 이를 말한다.
♣ 호탁씨[壺涿氏]주(周)시대에 수충(水蟲)제거를 맡았던 사람.
♣ 호탕백구[浩蕩白鷗]두보(杜甫)의 시(詩)에, ‘백구가 호탕한 데 빠지니 만 리에 누가 능히 깃들랴[白鷗沒浩蕩 萬里誰能馴].’ 한 구절이 있다. 이것은 높은 선비가 세속을 멀리 떠나감을 말한 것이다.
♣ 호포[戶布]신역을 지지 않는 양인이 그 대신 국가에 군포(軍布)를 바쳐오던 제도로 하여 파생한 여러 가지 폐단을 막기 위해 새로 시도한 제도. 효종(孝宗)은 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종래에는 그것을 양인들에게만 부과해오던 것을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일정한 양의 베를 바치게 하였음.
♣ 호포천[虎跑泉]중국 강서성 구강현 남쪽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뒤에 있는 샘. 진(晉)의 혜원(慧遠)이 연사(蓮社)의 여러 현자들과 상방봉(上方峯) 꼭대기에서 놀면서 물길이 너무 멀어 걱정이었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바위 밑을 후벼파서 샘을 만들었다 하여 생긴 이름임. 《淸一統志》
♣ 호표개합[虎豹開闔]병서에 육도(六韜) 삼략(三略)이 있는데 육도는 용도(龍韜)ㆍ호도(虎韜)ㆍ표도(豹韜) 등이다. 열었다 닫았다는 말은 변화개합(變化開闔)한다는 뜻이다.
♣ 호표구관[虎豹九關]임금 곁에 강포한 자들이 있음을 비유한 말. 초사(楚辭) 초혼(招魂)에 “호표들이 천제(天帝)의 궁중문을 지키면서 아랫사람들을 물어 죽인다.[虎豹九關 ▣害下人些]" 한 데서 온 말이다.
♣ 호표도[虎豹韜]강태공(姜太公)의 육도(六韜)ㆍ삼략(三略) 중에 호도(虎韜)ㆍ표도(豹韜)가 있다.
♣ 호표부[虎豹符]고대에 왕이 군대를 이동하고 장수를 파견할 때 이용하는 신물(信物)임. 범의 형태로 구리쇠로 만들며 등에 문자를 새기는데, 이것을 두 쪽으로 나누어 오른쪽은 대궐에 놓아두고 왼쪽은 군사를 거느린 장수나 지방 장관에게 넘겨줬다가 군대를 이동할 때 조정의 사신이 그것을 가져가 서로 맞춰보고 틀림이 없으면 비로소 효력이 발생한다.
♣ 호한부인[呼韓婦人]한(漢)나라 궁녀 왕소군(王昭君)이 흉노(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면서 말 위에서 비파를 타서 애절한 심정을 하소연하였다.
♣ 호함[頀咸]호는 탕(湯)의 음악 대호(大頀)이고, 함은 요(堯)의 음악 대함(大咸)인데, 전아한 고대의 음악을 뜻한다.
♣ 호해[湖海]호해(湖海)는 호남(湖南)과 해서(海西)이다. 강호와 같은 말이다.
♣ 호해[壺孩]호해는 단지에서 나온 아이라는 뜻으로, 궤속에서 나온 신라의 탈해왕(脫解王)과 알지(閼智)에 얽힌 설화인 듯하다.
♣ 호해[湖海]호해의 기백이란 광대하고 당당한 호기(豪氣)를 말한다.
♣ 호해고루[湖海高樓]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 진등(陳登)이 당시 위명(威名)이 있었고 또한 오만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그가 죽은 뒤, 허사(許汜)가 유비(劉備)와 함께 천하 사람의 인품을 논할 적에 허사가 “진등은 호기 높은 호해(湖海)의 선비였다. 옛날 내가 난리를 만나 하비(下)에 들러 진등을 찾아보았는데, 그는 나를 손으로 취급하지 않고 오랫동안 얘기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은 큰 와상에 올라가 눕고 나는 아래 작은 와상에 눕게 하더라.”고 말하니, 유비가 말하기를 “그대는 국사(國士)의 명망을 지니고서도 우국 망가(憂國忘家)를 하지 않음으로써 진등이 그대를 싫어했던 것이다. 그러니 무슨 연유로 그대와 얘기를 나누었겠는가. 나같았으면 나는 백척루(百尺樓)에 올라가 눕고 그대는 맨 땅에 눕게 했을 것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三國志 卷七》
♣ 호해기[湖海氣]호협한 기개를 말한다. 후한(後漢) 말 국사(國士)의 칭호를 받았던 허사(許汜)가 진등(陳登)을 찾아가서 소인배나 발언할 말을 하다가 진등에게 무시당해 형편없는 잠자리에서 자고 나와서는 진등에 대해 “호해지사(湖海之士)라서 아직도 호기(豪氣)가 없어지지 않았다.”고 불평한 고사가 있다. 《三國志 魏志 陳登傳》
♣ 호해의[湖海意]세속을 벗어나 은거하고자 하는 뜻을 이름.
♣ 호해조역만[岵峐岨嶧巒]호(岵)는 초목이 있는 산이고 해(峐)는 초목이 없는 산이며, 조(岨)는 돌산 위에 흙이 있는 것이고 역(嶧)은 연결된 산이며, 만(巒)은 산이 작으면서도 높은 것이다.
♣ 호현[弧懸]상고 때의 풍속에 아들을 낳으면 대문 왼쪽에 활 한 개를 걸어두었다는 데서 태어난 날을 가리킨다.
♣ 호형염[虎形鹽]특히 제사에 쓰는 소금으로서, 단단하게 범의 모양으로 만든 소금을 말한다.
♣ 호형호제[呼兄呼弟]서로 형이라 부르고 아우라 부름. 즉, 스스럼없이 형제라 부를 수 있는 아주 절친한 사이.
♣ 호호[好好]기뻐하는 모양, 몹시 좋음, 좋은 사람을 좋아함
♣ 호호[浩浩]넓고 큰 모양, 물이 엄청나게 많이 흐르는 모양, 길이 길게 이어지는 모양, 번쩍이며 빛나는 모양
♣ 호호[扈扈]넓은 마음, 선명한 모양
♣ 호호[滈滈]물이 희게 빛나는 모양
♣ 호호[昈昈]붉은색 무늬가 있는 모양
♣ 호호[戶戶]집집마다
♣ 호호[昊昊]크고 성한 모양
♣ 호호[皓皓]희고 깨끗한 모양.
♣ 호호악악[灝灝噩噩]법언(法言)에 “상서는 호호하며 주서는 악악하니라[商書灝灝甬 周書噩噩甬].” 하였다. 호호(灝灝)는 넓고 휑한 모양, 악악(噩噩)은 엄숙한 모양을 말한다.
♣ 호호정[浩浩亭]함경남도 이원(利原)의 객관(客館) 동쪽에 있는 정자로, 동쪽으로는 바다, 앞에는 평야가 펼쳐져 있다.
♣ 호홀[毫忽]극히 작은 분량(分量)이나 척도(尺度)를 가리킨 말이다.
♣ 호화[狐火]호화는 불을 켜 놓고 여우 울음을 한 것을 말한다. 진(秦) 나라의 폭정(暴政)에 반기를 든 진승(陳勝)은 처음 거사(擧事)할 적에 사람들을 따르게 하기 위하여, ‘진승이 왕이 된다[陳勝王]’는 글을 비단에 쓴 다음 잡아놓은 고기의 뱃속에 넣었으며, 동모자(同謀者) 오광(吳廣)에게 근처의 총사(叢祠)에다가 사람을 시켜 초롱불을 켜놓고 여우의 울음으로 ‘초 나라가 일어나고 진승이 왕이 된다.[大楚興 陳勝王]’고 하게 하였다. 《史記 陳涉世家》
♣ 호화첨춘[護花添春]연산군 때 흥청(興淸)들의 보인(保人)을 호화첨춘(護花添春)이라 하였고, 흥청에게 지공하는 명부를 호화첨춘기(護花添春記)라 했음.
♣ 호후[虎吼]석가모니(釋迦牟尼)의 설교 소리가 마치 호랑이 울음처럼 웅장했다는 것. 즉 사자후(獅子吼)와 같다. 사자가 울면 온갖 짐승이 겁내는 것처럼 염불하는 소리에 뭇 마귀가 숨어 버린다는 비유이다. 《涅槃經》
♣ 호흡분상로[呼吸分霜露]위세가 대단하여 뭇사람에게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함을 비유한 말. 후한 순제(後漢順帝)의 후비인 양 황후(梁皇后)의 오라비 양기(梁冀)가 발호(跋扈)하여 위세가 천하를 진동하였으므로, 그를 일러 “거동은 산해를 돌이키고 호흡은 상로를 변화시켰다[擧動回山海 呼吸變霜露].”고 평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七十八》
♣ 혹도[惑道]혹도는 우주의 진리와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망심(妄心)이다.
♣ 혹도고주혹명차[或棹孤舟或命車]전구(全句)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의 귀절. “혹명건거(或命巾車), 혹도고주(或棹孤舟).”의 ‘건거(巾車)’는 씌우개 있는 수레이나, 농촌의 달구지로 번역한다.
♣ 혹리[酷吏]혹리는 혹독한 아전.
♣ 혹세무민[惑世誣民]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임. 이단의 설로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속임.
♣ 혹약[或躍]용(龍)이 막 용사(用事)할 즈음을 말한 것으로,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사효(九四爻)에 “혹 뛰거나 못에 있으면 허물이 없으리라[或躍在淵 無咎]” 한 데서 온 말이다.
♣ 혹자의봉사[或自疑封事]한유(韓愈)가 좌천되어 부임하는 도중에 지은 시 가운데 “어쩌면 상소한 내용 때문인 듯도 하나, 상소한 그 자체가 어찌 이유가 될 수 있나.[或自疑上疏 上疏豈其由]”라는 구절이 있다. 《韓昌黎集 卷1 赴江陵途中…》
♣ 혹청혹탁[或淸或濁]굴원의 어부사(漁父詞)에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는다.”는 말이 있다.
♣ 혹혹[惑惑]미혹한 모양
♣ 혹혹[掝掝]사리에 어두운 모양
♣ 혼가필[婚嫁畢]후한 때 은사(隱士) 상장(尙長)이 자녀의 혼가(婚嫁)를 다 마친 뒤에 집안 일에서 일체 손을 떼고 동지 금경(禽慶)과 함께 삼산(三山)ㆍ오악(五岳)을 두루 노닐면서 일생을 마쳤던 고사이다. 《嵇康 高士傳》
♣ 혼가필[婚嫁畢]후한 때 은사(隱士) 상장(向長)이 자녀들의 혼사(婚事)를 다 마치고 북해(北海)의 금경(禽慶)과 함께 천하의 명산(名山)을 찾아 나선 뒤로는 그 거취를 아는 이가 없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혼경위[混涇渭]경수(涇水)는 흐리고 위수(渭水)는 맑으므로, 전하여 청탁과 시비의 구별이 없어짐을 비유한 말이다.
♣ 혼돈[混沌]천지가 개벽하기 전 원기(元氣)가 나누어지지 않아 모호하게 한 덩어리로 된 상태를 말한다. 남화경[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보임.
♣ 혼돈개벽[混沌開闢]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뜻으로, 당쟁(黨爭)에 시달린 영조(英祖)가 이 광좌(李光佐)를 다시 기용하면서 ‘오늘 이전의 모든 일은 일체 거론하지 말라. 감히 거론하면 목을 베겠다.’하고, 내세운 탕평(蕩平)의 다른 이름이다.
♣ 혼돈득칠규[混沌得七竅]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에 “남해제(南海帝) 숙(儵)과 북해제(北海帝) 홀(忽)이 중앙제(中央帝) 혼돈(渾沌)의 후한 대우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사람들은 다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고 하는데 혼돈만이 없으니 한번 시험해 보자.’ 하고, 하루에 구멍 하나씩 뚫어 이렛만에 구멍 일곱을 뚫었는데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하였다.
♣ 혼돈사[混沌死]숙(儵)과 홀(忽)이 혼돈에 구멍을 뚫으니 혼돈이 죽었다는 말이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에 있는데, 소박한 그대로 두지 않고 팔괘를 그은 것을 말한다. 혼돈은 천지가 나뉘어지기 이전의 원기 즉 자연을 상징한 말로서, 이것이 죽었다는 것은 곧 인간의 작위(作爲)와 분별(分別) 따위가 참된 자연을 파괴시켰다고 풍자한 말이다.
♣ 혼돈옹[混沌翁]혼돈은 고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중앙을 담당한 상제 이름이다. 원래는 눈, 귀, 코 등 일곱 구멍이 없었는데, 하루에 한 구멍씩 파 나가자 이레 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에 실려 있다.
♣ 혼비백산[魂飛魄散]혼이 날아가고 넋이 흩어짐. 매우 크게 놀라 정신이 없음.
♣ 혼속유하[混俗柳下]유하는 곧 춘추(春秋) 시대 노(魯) 나라의 유하혜(柳下惠)를 가리키는데, 맹자(孟子) 만장하(萬章下)에 “유하혜는 화(和)의 성자(聖者)이다.” 하였다. 여기서 말한 화(和)는 곧 세속과 잘 융화함을 말한다.
♣ 혼야왕[渾邪王]흉노에 속한 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우(單于)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무리를 이끌고 한 나라에 투항하였다. 《史記 匈奴傳》
♣ 혼연일치[渾然一致]섞여서 하나를 이룸. 분간할 수 없게 잘 섞여 한 덩어리가 됨. 차별 없이 서로 합치함.
♣ 혼융[渾融]한데 뒤섞다.
♣ 혼적군주유[混迹群侏儒]동방삭처럼 익살을 부리며 도회술(韜晦術)을 발휘할 줄을 모른다는 말인데, “옛날 사람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 세상을 피했지만 나는 조정에 들어와 세상을 피하고 있다.”는 동방삭의 말이 전해 온다. 《史記 卷126》
♣ 혼점[混點]그림을 그리는 법. 잎을 그릴 때 찍는 점을 이름. 장원형(長圓形)의 횡점(橫點)으로 소밀취산(疏密聚散)을 적당하게 찍는 점임.
♣ 혼정[昏定]밤에 잘 때에 부모의 침소에 가서 밤새 안녕하시기를 여쭙는 말.
♣ 혼정신성[昏定晨省]저녁에 잠자리를 살펴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핌. 아침 저녁으로 부모를 극진하게 모시는 도리. 부모의 안부를 물어서 살핌. 곧, 부모님께 효도하는 자식의 올바른 도리를 말함.
♣ 혼첨절강도[魂添浙江濤]절강(浙江)에 조수(潮水)가 가장 세차게 들어오는데 그것은 오자서의 성낸 혼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 한다.
♣ 혼취[混吹]한데 섞여서 피리를 불었다는 말로, 실력도 없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의 일종의 겸사(謙辭)이다. 제 선왕(齊宣王) 때 남곽처사(南郭處士)가 피리를 불지도 못하면서 악공들 속에 끼어 흉내만 내다가 한 사람씩 솜씨를 보이게 하자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韓非子 內儲說上》
♣ 혼탈무[渾脫舞]공손대랑(公孫大娘)은 당(唐) 나라 때 교방(敎坊)의 기녀(妓女)로서 검무(劍舞)를 매우 잘 추었는데, 그가 혼탈무를 출 때에 승(僧) 회소(懷素)는 그 춤을 보고서 초서(草書)의 묘(妙)를 터득했고, 서가인 장욱(張旭) 역시 그 춤을 보고서 초서에 커다란 진보를 가져왔다고 한다.
♣ 혼혼[渾渾]물이 흐르는 모양, 물결이 서로 따르는 모양, 흐려짐, 어지러워짐, 단서가 없음, 큼, 심오하여 알기 어려운 모양
♣ 혼혼[涽涽]생각이 어지러운 모양, 흐린 물, 탁수
♣ 혼혼[昏昏]정신이 가물가물하고 희미함, 어둠침침함, 조는 모양
♣ 혼혼[惛惛]정신이 허리멍덩한 모양, 일에 마음이 팔려 열중하는 모양
♣ 홀[圭]고대에 제후가 조회(朝會)나 회동(會同)때 손에 갖는 도구. 모양이 윗 부분은 둥글고, 아래가 모진 길쭉한 옥(玉).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주던 일종의 지휘권의 상징물.
♣ 홀[笏]수판(手版). 홀은 옛날에 왕과 고관(高官)이 손에 쥐던 작은 판. 천자는 옥으로, 제후(諸侯)는 상아(象牙)로, 대부는 대[竹]로 만들었음. 할 말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홀(笏)에다 썼다.
♣ 홀과소선지주[忽過蘇仙之舟]소동파[蘇仙]의 적벽부(赤壁賦)에, “외로운 학이 나의 배[舟]를 스치고 지나가는데 날개가 수레바퀴와 같다.” 한 구절이 있다.
♣ 홀만상[笏滿牀]당(唐) 나라 때 최림(崔琳)의 문족(門族)이 워낙 창성하여 종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상홀(象笏)이 상탑에 가득했다는 데서 온 말로, 집안에 벼슬아치가 많음을 뜻한다.
♣ 홀현홀몰[忽縣忽沒]문득 나타났다가 문득 사라짐.
♣ 홀홀[惚惚]모호한 모양
♣ 홀홀[忽忽]문득, 갑작스레, 황홀한 모양, 소홀해서 일을 돌보지 않는 모양, 문득 떠나가는 모양, 실망한 모양, 헤매는 모양, 도는 모양, 명백하지 않은 모양. , 잊어버리는 모양
♣ 홀홀[囫囫]온전한 모양, 동글동글하고 단단한 모양
♣ 홍간조오객[虹竿釣鼇客]당 나라 이백(李白)을 칭하는 말. 전하여 인품이 호매(豪邁)함을 비유한다. 당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이백이 재상(宰相)을 찾아뵙고 쪽지에다 “바다에서 자라 낚는 나그네.[海上釣鼇客]"라고 써 바쳤다. 재상이 묻기를 “선생은 자라를 낚을 때 낚싯줄을 무엇으로 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무지개로 낚싯줄을 삼습니다.” 하였다.
♣ 홍개정[洪介亭]개정은 청 나라 홍점전(洪占銓)의 호임.
♣ 홍거절[鴻擧絶]한(漢) 나라 고조(高祖)가 척부인(戚夫人)의 아들을 사랑하여 태자를 바꾸려 하였다가 상산(商山)의 사호(四皓)가 와서 태자를 보호하는 것을 보고 척부인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태자에게 우익(羽翼)이 생겼으니 움직이기 어렵다.” 하고 노래를 부르기를, “기러기가 높이 날았으니 그물을 칠 수 없네.” 하였다.
♣ 홍격기적[鴻隙譏翟]한서(漢書) 권84 적방진전(翟方進傳)에 “적방진이 승상이 되어서 여남(汝南)의 홍격파(鴻隙陂)를 허물도록 아뢰었으므로, 관개(灌漑)와 어별(魚鼈)의 다대한 이익을 받고 있던 고을 사람들이 무척이나 원망하였다.” 하였다.
♣ 홍경[弘景]남북조(南北朝) 시대 양(梁) 나라의 은사. 남제 고제(南齊高帝) 때에 제왕(諸王)의 시독(侍讀)이 되었다가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는데, 양 무제(梁武帝)가 즉위한 뒤에는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하였으므로, 당시에 산중재상(山中宰相)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梁書 卷五十一》
♣ 홍경망[洪景望]경망(景望)은 홍방(洪雱)의 자(字)이다.
♣ 홍경비[弘慶碑]고려 현종(顯宗)이 병부 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을 시켜 절을 짓게 하고 이름을 봉선홍경사라 내리는 동시에 비를 세워 한림학사 최충(崔冲)을 명하여 글을 짓게 하였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비만 남았음. 백광훈(白光勳)의 “秋草前朝事 殘碑學士文 千年有流水 落日見歸雲"이라는 시가 있음.
♣ 홍경사[弘慶寺]고려 추숭왕(追崇王) 안종(安宗)의 원당(願堂).
♣ 홍경사비[弘慶寺碑]고려 현종(顯宗)이 직산(稷山) 북쪽 15리 지점에 승려 형긍(逈兢)에게 명하여 사찰을 건립하게 하고, 병부 상서 강민첨(姜民瞻) 등에게 감독을 명하여 2백여 칸의 거찰(巨刹)을 세우게 한 뒤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의 이름을 내렸는데, 그 뒤 절은 없어지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최충(崔冲)이 글을 지은 비석만 남아 있게 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6 稷山縣》
♣ 홍계통[洪季通]계통(季通)은 홍명형(洪命亨)의 자(字)이다.
♣ 홍곡[鴻鵠]맹자(孟子) 고자(告子) 상편에, “두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치는데, 한 사람은 전심치지(專心致志)하여 혁추(奕秋)의 시키는 것만 듣고, 한 사람은 홍곡(鴻鵠)이 날아온다면 활을 당겨서 쏠 것만 생각한다.” 하였다. 마음에 다른 것을 생각하는 비유.
♣ 홍곡영렴연작기[鴻鵠寧嬚燕雀欺]훌륭한 사람은 못난 사람의 업신여김을 개의치 않음을 비유한 말. 연작은 제비나 참새 따위의 작은 새이며 홍곡(鴻鵠)은 큰 새이다. 옛날 진승(陳勝)은 자기의 뜻을 몰라주는 사람에게 “연작이 어떻게 홍곡의 뜻을 알겠는가?[燕雀安知鴻鵠之志哉]" 하였다. 《漢書 卷三十一 陳勝傳》
♣ 홍관일[虹貫日]이른바 백홍관일(白虹貫日)의 흉조(凶兆)를 말한다. 흰 무지개는 병란(兵亂)을 상징하고 해는 임금 즉 국가를 상징한다.
♣ 홍교[虹橋]홍교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다리로 이 지역은 옛날 초(楚) 나라의 땅이었다.
♣ 홍교[虹橋]홍교는 무지개 모양처럼 굽은 다리. 또는 무지개 다리로 신선들이 다니는 다리이다.
♣ 홍군[紅裙]붉은 치마, 즉 기녀(妓女)를 지칭하는 말이다.
♣ 홍기[紅旗]작전용 군기(軍旗)를 말한다.
♣ 홍노[洪爐]큰 용광로로, 만물을 생성하는 본원(本源)을 말한다.
♣ 홍농도하[弘農渡河]태수가 선정을 하여 호랑이가 강을 건너 피해감. 진(晉)의 유곤(劉琨)이 홍농 태수(弘農太守)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호랑이가 새끼를 업고 그를 피해 황하를 건너갔다고 함. 《淵鑑類函》
♣ 홍니[紅泥]붉은 찰흙. 한(漢)나라 때 황제가 내리는 조서는 붉은 찰흙으로 봉함을 하였다 하여 흔히 왕이 내리는 글을 뜻한다.
♣ 홍니[鴻泥]홍니는 설리홍조(雪裏鴻爪)의 약칭인데 행종(行蹤)이 정처 없이 우연히 서로 만난 것을 이름. 소식의 화자유민지회구시(和子由澠池懷舊詩)에 “人生到處知何事 應是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 하였음.
♣ 홍당[哄堂]어사대의 관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한꺼번에 떠들썩하게 웃는 것을 말한다.
♣ 홍대[紅帶]고려 때 4품 이상의 문관(文官)이 띠던 띠로 정대를 말한다.
♣ 홍도[鴻都]홍도는 한(漢) 나라 때의 문명(門名)인데, 영제(靈帝) 때에 그 안에 학궁을 설치하고 제생(諸生)을 모집하였는바, 척독(尺牘)ㆍ사부(詞賦) 등을 가지고 천여 명이나 시험을 보았고, 홍도문 학사(鴻都門學士)를 두어 학문을 숭상하게 되었다 한다. 《後漢書 靈帝紀》
♣ 홍도설니[鴻蹈雪泥]생각없이 우연히 지나쳐 온 과거의 행적을 말한다. 소동파(蘇東坡)의 시 ‘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澠池懷舊)’에 “지나온 인생길 뭐와 비슷하다 할까, 눈 밭 위의 기러기 발자국 같다 하리. 눈 위에 우연히 흔적을 남겼을 뿐, 기러기 다시 날면 동으로 갈지 서로 갈지.[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 홍라[紅羅]명 나라의 별칭.
♣ 홍라기성[紅羅記姓]무관(武官)이 되었음을 뜻함. 송(宋) 나라 때 악비(岳飛)가 장군이 되어 역적 이성(李成)을 토벌할 적에 붉은 비단으로 기치(旗幟)를 삼고 그 위에다 자기의 성인 악(岳) 자를 수놓아가지고 출전했던 데서 온 말이다. 《宋史 卷三百六十五》
♣ 홍려[鴻臚]홍려는 중국 조정의 조하(朝賀)나 경조(慶弔)의 의식 때 그 의식의 진행을 맡은 관직이다.
♣ 홍려시[鴻臚寺]홍려시는 외교를 맡은 직책이다.
♣ 홍련녹수막중빈[紅蓮綠水幕中賓]남제(南齊) 유고지(庾杲之)가 왕검(王儉)의 위군 장사(衛軍長史)가 되었을 때 당시에 왕검의 막부를 연화지(蓮花池)에 비겼으므로, 안륙후(安陸侯) 소면(蕭沔)이 이를 찬미하여 말하기를 “유경행이 녹수에 떠서 부용에 기대고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가.[庾景行 汎綠水 依芙蓉 何其麗也]”라고 했던 고사가 있다. 경행(景行)은 유고지의 자(字)이다.
♣ 홍련막[紅蓮幕]막부(幕府)를 말한다. 남사(南史) 제49권 유고지전(庾杲之傳)에, “왕검(王儉)이 유고지를 위장군장사(衛將軍長史)로 삼으니, 안륙후(安陸侯) 소면(蕭緬)이 왕검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말하기를, ‘막부의 원료(元僚)는 참으로 선발하기가 어려운데 유경행(庾景行)이 푸른 물에 떠다니다가 부용꽃에 의지하게 되었으니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왕검의 막부를 연화지(蓮花池)라고 하였으므로 소면이 글을 보내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하였는데, 후대에는 홍련막을 막부의 미칭으로 쓰게 되었다.
♣ 홍련막리빈[紅蓮幕裏賓]훌륭한 상부(相府)의 막료(幕僚)를 비유한 말로, 전하여 일반적으로 대신의 막료의 뜻으로 쓰임. 진(晉) 나라 때 재상 왕검(王儉)이 유고지(庾杲之)를 장사(長史)로 삼자, 소면(蕭緬)이 왕검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성부(盛府)의 원료(元僚)는 실로 선발하기 어려운데, 유고지의 인품은 마치 ‘푸른 물에 떠서 연꽃에 의지한 것[泛綠水依芙蓉]’ 같으니, 어찌 그리도 화려한가.”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왕검의 상부를 연화지(蓮花池)라 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南史 庾杲之傳》
♣ 홍렬[鴻烈]서명. 홍렬훈(鴻烈訓)의 약인데, 즉 회남자(淮南子)임.
♣ 홍로[洪爐]큰 용광로로, 만물을 생성하는 본원(本源)을 말한다.
♣ 홍로[鴻臚]각종 의식(儀式)을 관장하는 아문인 통례원(通禮院)의 이칭.
♣ 홍로[洪鑪]홍로는 큰 용광로로,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지금 천지(天地)를 큰 용광로로 생각하고 조물주를 훌륭한 야금(冶金)쟁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디로 가든 안 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홍로점설[紅爐點雪]홀로상일점설(紅爐上一點雪)의 준말. 뜨거운 불길 위에 한 점 눈을 뿌리면 순식간에 녹듯이 사욕이나 의혹이 일시에 꺼져 없어지고 마음이 탁 트여 맑음을 일컫는 말이다. 크나큰 일에 작은 힘이 조금도 보람이 없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 홍록현[紅綠眩]대단히 취하여 물건의 빛깔을 잘 구별하지 못하게 됨을 이름. 소식(蘇軾)의 시에 “나는 취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어 홍록의 빛 아른거림만 느끼었네[我醉都不知 但覺紅綠眩]”하였다.
♣ 홍루[紅淚]여인의 눈물을 가리킨다.
♣ 홍류적[鴻留迹]정처없이 떠도는 인생의 허무한 자취를 말한다. 소식(蘇軾)의 “떠도는 인생살이 무엇과 같다 할꼬, 눈 위에 찍힌 기러기의 발자국. 우연히 발톱 자욱 남겨 놓고는, 날아가면 어찌 다시 동서남북 따지리요.[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는 시구에서 나온 것이다. 《蘇東坡詩集 卷3 和子由澠池懷舊》
♣ 홍류화저[虹流華渚]세자가 태어남을 상상하는 것이다. 온자승순묘비(溫子昇舜廟碑)에 “무지개 기운 신령을 내려 요씨의 터에 성인이 탄생되었다.”는 말이 있음.
♣ 홍릉담[紅綾餤]당(唐) 나라 희종(僖宗)이 바야흐로 떡을 먹다가 그때 진사(進士)들이 곡강(曲江)에서 문희연(聞喜宴)을 한다는 말을 듣고 어주(御廚)에 명하여 사람 수효대로 각기 홍릉병담(紅綾餠餤)을 하사했다.
♣ 홍릉병[紅綾餠]붉은 비단으로 겉을 싼 맛좋은 떡의 일종으로 중국의 왕이나 고관 귀족의 집안에서 주로 먹었다.
♣ 홍린약빙[紅鱗躍氷]효성이 지극함을 말한다. 진서(晉書) 권49에 “왕상은 효도가 극진하였는데, 어머니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하므로 강에 가서 옷을 벗고 얼음 깨고 고기를 잡으려 하자, 잉어 두 마리가 얼음 위로 뛰어나왔다.” 하였다.
♣ 홍매[洪邁]송 나라 반양(鄱陽) 사람으로 자는 경로(景盧), 호는 용재(容齋)이다. 경(經)ㆍ사(史)ㆍ백가(百家)와 의학ㆍ복서ㆍ천문ㆍ산술 등 서적을 두루 읽었으며 효종(孝宗) 때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가 되었다.
♣ 홍면숙[洪勉叔]면숙(勉叔)은 홍무적(洪茂績)의 자(字)이다.
♣ 홍명익[鴻冥弋]벼슬을 우습게 보는 고사(高士)의 비유이다. 가물가물 나는 기러기를 활 쏘는 사람이 어찌 잡으랴. 《法言》
♣ 홍모[鴻毛]기러기 털로, 아주 가벼운 것을 뜻한다.
♣ 홍모척[鴻毛擲]기러기털을 집어던졌다는 것은 더없이 귀중한 목숨을 사물 가운데 가장 가볍다는 기러기털처럼 여겨 미련없이 버렸다는 것이다.
♣ 홍몽[鴻濛]우주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있어 온 천지의 원기, 혹은 그와 같은 혼돈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끝없이 펼쳐진 바다나 하늘을 뜻하기도 한다.
♣ 홍무[洪武]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 홍무체[洪武體]홍무는 명 나라 태조의 연호로, 그때 새로 나온 서체라는 뜻이다.
♣ 홍범[洪範]서경(書經)의 편명. 홍(洪)은 대(大), 범(範)은 법(法)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큰 법이라는 뜻. 기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진술한 것인데, 모두 9조목으로 되어 있어 홍범구주(洪範九疇)라 칭한다.
♣ 홍범구주[洪範九疇]홍범은 서경(書經)의 편명(篇名)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이란 뜻이며, 구주는 아홉 가지 무리란 뜻으로 옛날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 낙수(洛水)에서 거북이가 나왔는데 그 등에 1에서 9까지의 점이 그려져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보고 홍범 구주를 만들었다 하는데, 첫번째는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ㆍ토(土)의 오행(五行)이고, 두 번째는 모(貌)ㆍ언(言)ㆍ시(視)ㆍ청(廳)ㆍ사(思)의 오사(五事)이며, 세 번째는 식(食)ㆍ화(貨)ㆍ사(祀)ㆍ사공(司空)ㆍ사도(司徒)ㆍ사구(司寇)ㆍ빈(賓)ㆍ사(師)의 팔정(八政)이고, 네 번째는 세(歲)ㆍ월(月)ㆍ일(日)ㆍ성신(星辰)ㆍ역수(曆數)의 오기(五紀)이며, 다섯 번째는 황극(皇極)이고, 여섯 번째는 정직(正直)ㆍ강극(剛克)ㆍ유극(柔克)의 삼덕(三德)이며, 일곱 번째는 우(雨)ㆍ제(霽)ㆍ몽(蒙)ㆍ역(驛)ㆍ극(克)ㆍ정(貞)ㆍ회(悔)의 계의(稽疑)이고, 여덟 번째는 우(雨)ㆍ양(暘)ㆍ욱(燠)ㆍ한(寒)ㆍ풍(風)ㆍ시(時)의 서징(庶徵)이며, 아홉 번째는 수(壽)ㆍ부(富)ㆍ강녕(康寧)ㆍ유호덕(攸好德)ㆍ고종명(考終命)의 오복(五福)과 흉단절(凶短折)ㆍ병(病)ㆍ우(憂)ㆍ빈(貧)ㆍ악(惡)ㆍ약(弱)의 육극(六極)이다.
♣ 홍범수[洪範數]서경(書經) 홍범의 아홉 조항의 수를 말하는데, 그 아홉 조항은 곧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오복(五福)이다.
♣ 홍벽천구[弘璧天球]홍벽(弘璧)과 천구(天球)는 다 아주 귀중한 보옥(寶玉) 이름인데, 즉 그런 귀중한 보옥처럼 소중하게 여겨진다는 뜻이다.
♣ 홍보[鴻寶]홍보는 한(韓) 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베개 속에 비장(祕藏)했다는 도술서(道術書), 즉 홍보원비서(鴻寶苑祕書)를 말한다. 이 책에는 신선이 귀신을 시켜 금단(金丹)을 만드는 방술이 적혀 있다고 한다.
♣ 홍부[紅腐]오래되어서 붉게 썩은 곡식을 말한다. 한서(漢書) 가연지전(賈捐之傳)에 “태창의 곡식이 붉게 썩어서 먹을 수 없다.” 한 말이 있다.
♣ 홍불자[洪佛子]송 나라 선화 연간에 홍호가 쌀을 풀어 6만 5천 사람을 살리매 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손을 이마에 얹으며 불자라고 불렀다. 만년에,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되, “경의 뜻이 임금을 잊지 않거늘 어찌 짐을 버리고 가는가.” 하였다.
♣ 홍비명명[鴻飛冥冥]기러기가 까마득하게 난다는 말은, 높이 초월하거나 멀리 가는 사람에게 비유하여 쓰는 말. 양자(揚子)의 법언(法言)에, “기러기가 아득아득 날아가니 활 쏘는 사람이 어찌 잡을소냐[鴻飛冥冥 弋人何簒焉].” 한 것에 보이는데, 즉 어지러운 세상을 미리 보고 벼슬자리를 떠나는 것을 비유함.
♣ 홍비명원음[虹飛明遠飮]한 나라 때 무지개가 내려와 궁중의 샘물을 다 마시는 바람에 물이 고갈되었다는 고사가 전하는데, 이런 현상은 재해(災害)가 앞으로 없어지는 상서(祥瑞)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漢書 武五子 燕刺王旦傳》
♣ 홍비준저[鴻飛遵渚]얼마 후에는 조정으로 돌아가게 될 것임을 뜻함. 시경(詩經) 빈풍(幽風) 구역(九罭)에 “기러기는 날아서 물가를 따르나니 공이 돌아갈 곳이 없으랴[鴻飛遵渚 公歸無所]”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주공(周公)이 동산(東山)에 가 있을 적에, 동인(東人)들이 주공이 곧 그 곳을 떠나 조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서로 주공을 그리워하여 부른 노래다.
♣ 홍사미[虹沙彌]무지개 사미란 말로, 고려 때 미천한 소생으로서 중이 된 왕자, 즉 소군(小君)을 가리킴. 무지개는 한 끝은 땅에 닿고, 한 끝은 하늘에 닿기 때문에 소군은 왕자이기는 하나 어미가 천함을 비유한 것이다. 사미(沙彌)는 출가(出家)하여 십계(十戒)를 받은 남자를 말한다.
♣ 홍사신[洪士信]사신은 홍여순(洪汝諄)의 자(字)이다.
♣ 홍삼[紅衫]오난설(吳蘭雪)의 시화(詩話)에 “홍삼배화(紅袗拜花)"가 있으므로 그를 가리킴.
♣ 홍상[紅裳]아름다운 여자
♣ 홍설[紅雪]복숭아꽃을 표현한 말.
♣ 홍섬[洪暹]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문장에 능하고 경서(經書)에 밝았음. 저서에는 인재집(忍齋集)ㆍ인재잡록(忍齋雜錄)이 있음. 의정(議政)까지 되었으며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 홍성민[洪聖民]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으로 찬성까지 되었으며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 홍속[紅粟]오래 저장한 나머지 썩어서 붉게 변한 미곡이다. 보통 시에서는 풍부한 물자를 표현할 때 사용한다.
♣ 홍속[紅粟]큰 창고에 듬뿍 쌓여 빨갛게 썩어 가는 곡물을 말한다.
♣ 홍수[紅袖]송(宋) 나라 때 위야(魏野)가 구준(寇準)과 함께 어느 절에 가 놀면서 똑같이 시를 써 붙여 놓았다가, 뒤에 다시 함께 그 절을 찾아가 보니, 구준의 시는 푸른 깁으로 잘 싸서 보관하고 있고, 자신의 시는 먼지가 잔뜩 낀 채 그대로 있으므로, 그들을 따라갔던 관기(官妓)가 붉은 소매로 그 먼지를 털어 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홍숙경[洪叔京]숙경은 홍호(洪鎬)의 자(字)이다.
♣ 홍술[洪術]고려 초기의 의성부(義城府)의 성주(城主)인 김홍술(金洪術)을 가리키는데, 왕 태조(王太祖) 12년에 견훤(甄萱)의 군대가 의성에 쳐들어와 김홍술이 전사하자, 왕 태조가 울면서 자신의 팔을 잃었다고 애통해 했다 한다.
♣ 홍시[鴻視]공자(孔子)가 위령공(衛靈公)과 이야기하는데, 위령공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날아가는 기러기를 쳐다보므로 공자는 곧 위(衛)나라를 떠나서 다른 나라로 갔다.
♣ 홍아[紅牙]붉은 향나무로 만든 악기로, 악곡의 장단을 조절하기 위해 치는 널판지이다.
♣ 홍안선왕[鴻鴈宣王]시전(詩傳)에 있는 홍안(鴻雁)장은 주나라 선왕(宣王)이 국가를 중흥시킨 업적을 찬양한 시이다.
♣ 홍안소년[紅顔少年]나이가 젊고 얼굴이 곱게 생긴 남자.
♣ 홍안택중음[鴻雁澤中吟]유민(流民)이 배고파 우는 참상을 기러기 소리에 비긴 것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홍안(鴻雁)에 “기러기 날아와 못 가운데 모였다……기러기 날아와 슬피 울어대네……" 하였는데 집전(集傳)에는 “유민이 기러기의 슬피 우는 모습을 자신의 처지에 비겨서 이 시를 만든 것이다.” 하였다.
♣ 홍애[洪崖]서산(西山)에 있는 큰 절벽을 말하는데, 여기에 은거했던 상고(上古)의 선인(仙人) 홍애 선생(洪崖先生)이 일컫기도 한다.
♣ 홍애견박[洪崖肩拍]홍애는 옛날 신선(神仙)의 이름인데, 문선(文選) 곽박유선시(郭璞遊仙詩)에 “왼손으로 부구(浮丘)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홍애(洪崖)의 어깨를 친다.” 하였다.
♣ 홍애자[洪厓子]보통 홍애 선생(洪厓先生)으로 불리는 상고(上古)의 선인(仙人)이다. 위숙경(衛叔卿)이 몇 사람과 장기를 두었는데, 그 아들 도세(度世)가 “아까 장기를 둔 분은 누구입니까?”하고 묻자, 바로 홍애 선생이었다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神仙傳 二 衛叔卿》
♣ 홍애자[洪厓子]홍애선생(洪崖先生)이라고도 하는 상고의 선인(仙人)을 가리킨다.
♣ 홍약[紅藥]사조(謝眺)가 중서성(中書省)에서 지은 중서성입직시(中書省入直詩)에, “붉은 작약꽃은 뜰에서 펄럭인다.[紅藥當階翻]”는 구(句)가 있다. 당 나라 때 중서성이 궁문의 서쪽에 있었다.
♣ 홍연[弘演]홍연은 춘추 시대 위 의공(衛懿公)의 충신인데, 그가 타국에 사신 간 동안에 적인(狄人)이 쳐들어와서 위 의공을 죽이어 그의 살을 다 먹어 버리고 간(肝)만을 남겨 놓았으므로, 홍연이 돌아와서는 의공의 간을 향해 복명을 한 다음, 자기의 배를 갈라 뱃속의 것들을 모두 꺼내고 임금의 간을 자기 뱃속에 넣고 죽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呂氏春秋 卷十一 忠廉》
♣ 홍연대소[哄然大笑]입을 크게 벌리고 떠들썩하게 껄껄 웃는 큰 웃음
♣ 홍엽제시[紅葉題詩]당 희종(唐僖宗) 때 우우(于祐)가 어구(御溝)에서 시(詩)가 적힌 붉은 나뭇잎 하나를 주웠는데, 그 시에 “흐르는 물은 어이 그리 급한고, 깊은 궁중은 종일토록 한가롭네. 다정히도 붉은 잎새 작별하나니, 인간이 있는 곳으로 잘 가거라.[流水何太急 深官盡日閒 殷勤謝紅葉 好去到人間]" 하였으므로, 우우 역시 붉은 나뭇잎에다 “일찍이 나뭇잎에 깊은 원망 쓴 것을 보았나니, 나뭇잎에 시 써서 누구에게 부쳤던고?[曾聞葉上題紅怨 葉上題詩寄阿誰]"라는 시를 써서 다시 어구에 흘려 보낸 결과, 이 시는 당시 궁녀(宮女)였던 한 부인(韓夫人)이 주웠다. 그런데 뒤에 희종이 궁녀들을 풀어 시집을 보내게 되자, 공교롭게 우우와 한 부인이 서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홍우[紅雨]붉은 꽃잎이 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형용한 표현.
♣ 홍우점[鴻羽漸]기러기가 날 때 서서히 상승하듯이 벼슬이 점점 올라감을 말한다. 홍점(鴻漸).
♣ 홍우정[洪宇定]홍우정은 조선조 선조~효종 연간의 지사(志士)로 자는 정이(靜而), 호는 두곡(杜谷). 조정에서 누차 벼슬에 임명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영남 문수산(文殊山)에 은거, 생애를 마침. 저서에는 두곡집(杜谷集)이 있음.
♣ 홍운[紅雲]제왕을 상징한 것. 하늘의 옥황상제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홍색 구름이 감싸고 있다고 함. 《翼聖記》
♣ 홍운봉일상[紅雲捧日上]황제의 궁궐을 가리킨다. 선인(仙人)이 사는 곳에는 늘 붉은 구름이 에워싸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侍臣鵠立通明殿 一朶紅雲捧玉皇”이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6 上元侍飮樓上三首呈同列》
♣ 홍운전[紅雲殿]옥황상제의 궁궐로, 늘 붉은 구름으로 에워싸여 있다고 한다.
♣ 홍운전각[紅雲殿閣]황제의 궁성(宮城)을 가리킨다. 선인(仙人)이 사는 곳에는 늘 붉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 홍원로[洪元老]원로는 홍명구(洪命耈)의 자(字)이다.
♣ 홍유보불[弘儒黼黻]홍유는 신라의 명유(名儒) 설총. 보불은 관복(官服)에 수놓은 무늬인데 곧 훌륭한 예악문물(禮樂文物)을 가리킨다.
♣ 홍유손[洪裕孫]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叢). 조선조 세조가 찬위(簒位)하자 세속의 영화를 버리고 남효온(南孝溫)ㆍ이총(李摠) 등과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 노장(老莊)을 토론하며 시주(詩酒)로 세일을 보내어 청담파(淸談派)로 일컬어졌음.
♣ 홍유효법곤[鴻猷效法坤]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상(上)에 “지혜는 높이는 것이요, 예법은 낮추는 것이니, 높이는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요, 낮추는 것은 땅을 본뜬 것이다.[知崇禮卑 崇效天 卑法地]”라는 말이 나온다.
♣ 홍의[紅衣]천주교(天主敎)를 말한 것. 홍의주교(紅衣主敎).
♣ 홍이상[洪二相]홍언박(洪彦博)을 가리킨다.
♣ 홍이포[紅夷砲]성능이 우수한 대포를 말한다. 홍이(紅夷)는 안남(安南)의 서쪽에 있는 나라로 대포를 잘 만들었다.
♣ 홍익인간[弘益人間]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 국조(國祖) 단군의 건국이념으로 고조선개국 이래 우리나라 정치, 교육의 기본정신임.
♣ 홍일점[紅一點]본래는 푸른 잎 가운데 오직 한 송이 붉은 꽃이 피어 있는 것, 혹은 여럿 속에서 오직 하나 특별한 것을 가리킴. 오늘날에는 많은 남자들 사이에 단 한 사람뿐인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임.
♣ 홍자[紅紫]홍색(紅色)과 자색(紫色)의 꽃을 말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간색(間色)인 보랏빛이 정색(正色)인 적색(赤色)의 지위를 침범하는 것이 보기 싫고, 음란한 정(鄭) 나라 노래가 아악(雅樂)을 어지럽히는 것이 밉다.”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홍자탈주(紅紫奪朱)’라는 성어(成語)가 나오게 되었다.
♣ 홍장[紅粧]홍장은 주로 어여쁜 여인을 뜻하는 말이다.
♣ 홍점[鴻漸]“기러기가 점점 나아간다[鴻漸].”는 말이 주역(周易)에 있으며, 벼슬이 아래로부터 위로 차츰 올라감을 비유하였다.
♣ 홍점[鴻漸]당 나라 육우(陸羽)의 자인데 상저옹(桑苧翁)이라 자호하였다. 태상시 태축(太常寺太祝)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두문 저서(杜門著書)하였는데 세상에 전하는 것은 오직 다경(茶經) 3권뿐임.
♣ 홍점반[鴻漸磐]높은 경지에 도달했음을 비유한 말. 주역(周易) 점괘(漸卦)에 “기러기가 점차 물가로 날아간다. 기러기가 점차 반석 위로 날아간다. 기러기가 점차 육지로 날아간다.[鴻漸于干 鴻漸于磐 鴻漸于陸]”하여 점차로 진취하는 기상을 논한 데서 온 말이다.
♣ 홍정[紅丁]버섯의 별칭이다.
♣ 홍정[紅亭]붉게 장식한 요정(料亭), 즉 기생집을 말한다.
♣ 홍정[紅旌]붉은 깃발.
♣ 홍제원[洪濟院]조선 시대에 중국 사신(使臣)이 서울로 올 때 성(城)안에 들어오기 전에 묵던 공관(公館)으로, 지금의 서울 홍제동에 있었다.
♣ 홍준저[鴻遵渚]사명(使命)을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감을 뜻함. 주공(周公)이 일찍이 동쪽 지방을 다스리러 가 있을 적에 그 곳 백성들이 주공을 만나보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러기가 물가를 따르듯이 주공도 의당 조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여 노래하기를 “기러기는 날아서 물가를 따르나니 공이 돌아갈 곳이 없으랴 너에게서는 이틀 밤만 묵을 것이다[鴻飛遵渚 公無所歸 於女信處]” 한 데서 온 말이다. 《詩經 豳風 九罭》
♣ 홍중실[洪仲實]중실은 홍세영(洪世英)의 자이다.
♣ 홍진라착편[紅塵懶着鞭]벼슬을 재촉하는 조정의 소명(召命)이 정말 지겹다는 말이다.
♣ 홍질발[紅叱撥]홍질발은 당 현종(唐玄宗) 때 대완국(大宛國)에서 공물(貢物)로 진상한 천하 명마(名馬)의 이름이다.
♣ 홍추[鴻樞]추밀원(樞密院)을 말한 것.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요직을 말한다. 추신(樞臣). 홍(鴻)은 아칭(雅稱).
♣ 홍탕[弘湯]공손홍과 장탕.
♣ 홍택방[洪澤芳]택방(澤芳)은 홍영(洪霙)의 자(字)이다.
♣ 홍평보[洪平甫]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홍간(洪侃). 평보는 자이고, 첨의사인(僉議舍人)으로 있다가 동래 현령(縣令)으로 폄(貶)되어 왔으며 재임중 세상을 떠났다.
♣ 홍포[紅袍]조정 고위 관원이 입는 붉은색 조복(朝服)을 말한다.
♣ 홍한[紅汗]유사(遺事)에 “귀비가 매년 여름철에는 얇은 비단옷을 입고 시녀들을 시켜 부채질을 하여도 그 열(熱)이 해소되지 않고 땀이 나는데 붉고 매끄러운 가운데 향내가 많아, 혹 수건에 씻으면 그 빛깔이 홍도화(紅桃花)와 같았다.” 하였다. 또 현종유록(玄宗遺錄)에 “귀비가 마외역(馬嵬驛)에서 목매어 죽었을 때 고역사(高力士)가 목맨 비단을 가져왔는데 눈물 자국이 다 담혈색(淡血色)과 같았다.” 하였다.
♣ 홍홍[泓泓]물이 깊은 모양, 물이 맑은 모양
♣ 홍화[弘化]홍화는 서경(書經) 주관(周官)에 “소사(少師)ㆍ소부(少傅)ㆍ소보(少保)는 삼고(三孤)이니, 삼공의 다음 관원으로서 교화를 넓혀야 한다.[貳公弘化]” 한 데서 온 말로, 즉 삼공의 다음 벼슬인 찬성(贊成)에 해당하는 말이다.
♣ 홍화보[洪和輔]홍화보는 자는 경협(景協)인데 영조 때 파주 목사(坡州牧使)ㆍ동부승지ㆍ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 홍희[洪熙]명 나라 인종(仁宗)의 연호로, 1년 만에 인종이 죽었다.
♣ 화각[畫角]옛날 군중(軍中)에서 사용했던 뿔피리.
♣ 화간[禾竿]정월 대보름날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수수깡으로 벼이삭 조이삭의 모양을 만들어 다는 것.
♣ 화간[花間]화간은 후촉(後蜀)의 조숭조(趙崇祚)가 편(編)한 화간집(花間集)의 준말로, 내용은 곧 당(唐) 나라 말기 여러 명가(名家)들의 사(詞)인데, 진진손(陳振孫)은 이를 전사(塡詞)의 시조(始祖)라고 하였다.
♣ 화개[華蓋]화개는 임금이나 고관이 사용하는 호화로운 일산이나 귀족이 타는 수레의 덮개를 말하는데, 흔히 존귀한 사람의 행차를 말할 때 인용된다.
♣ 화개성[華蓋星]대제성(大帝星) 위의 아홉 개의 별로 마치 천제(天帝)의 자리를 덮어 주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晉書 天文志上》
♣ 화견[禾絹]황제를 가리킨다. 남사(南史) 송기 하(宋紀下) 명제(明帝)에, “중서사인(中書舍人) 호모호(胡母顥)가 전권(專權)을 행하여 아뢰면 허락받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이르기를, ‘화견이 눈을 가리고 승낙을 하니 호모(胡母)가 큰 주머니를 벌리고 있다.’ 하였다.” 하였는데, 화견은 상(上)을 가리키는 것이다.
♣ 화경[花卿]당(唐)의 맹장(猛將) 화경정(花敬定)을 이른다.
♣ 화경[華鯨]화는 종(鐘), 경은 동목(橦木)으로, 곧 종과 장대를 말한다.
♣ 화계두노장[花溪杜老莊]사천성(四川省) 성도시(成都市) 서쪽 교외의 금강(錦江) 지류인 완화계(浣花溪)에 두보(杜甫)의 ‘완화초당(浣花草堂)’이 있었다.
♣ 화곤[華袞]옛날 왕공(王公) 귀족(貴族)이 입던 화려한 의복인데 영총(榮寵)을 말한다. 서언고사장예류(書言故事獎譽類)에 “남이 포창해 줌을 사례하니 영광이 화곤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전하여 화곤은 제왕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 화곤부월정노사[華袞鈇鉞正魯史]화곤은 고관이 입는 화려한 예복(禮服)이고, 부월(鈇鉞)은 형벌에 쓰는 작두와 도끼로, 역사서에서 포폄(褒貶)을 가해 기리고 내치는 것을 말하며, 노사(魯史)는 노 나라의 역사로 춘추(春秋)를 말한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저술하면서 포폄의 뜻을 붙여서 저술하였다.
♣ 화공[畫栱]건물의 대들보를 받치는 기둥 위에 있는 방형(方形)의 나무인 두공에 단청(丹靑)을 베푼 것을 말한다.
♣ 화공[化工]화공은 천공(天工) 즉 조물(造物)과 같은 기막힌 기예의 소유자를 뜻한다.
♣ 화관[華館]중국 사신이 머무는 관소.
♣ 화광[和光]노자(老子)에, “그 빛을 혼동하게 하며 그 먼지를 같이한다[和光同塵].”는 말이 있는데, 세상과 화합하여 다른 체하지 않음을 뜻한다.
♣ 화광동진[和光同塵]화광(和光)은 빛을 늦추는 일이고, 동진(同塵)은 속세의 티끌에 같이 한다는 뜻. 자기의 지혜를 자랑함 없이 오히려 그 지혜를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동화함을 말한다. 부처⋅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지혜와 본색을 감추고 모습을 바꾸어 인간계에 나타남.
♣ 화괴[花魁]매화(梅花)의 별칭인데, 또는 난초[蘭]와 연꽃[藕花]의 별칭으로 쓰기도 한다.
♣ 화교[和嶠]화교는 사람 이름. 도량이 좁다는 뜻으로 인용한 것이다. 진서(晉書) 권 45 화교전(卷四十五 和嶠傳)에 “화교가 태감(太監) 순욱(荀勗)의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겨 한수레에 같이 타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 화교애전[和嶠愛錢]화교는 진 혜제(晉惠帝) 때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이른 명신(名臣)이었으나, 재산이 매우 많아 왕자(王者)와 견줄 만하였는데도 성품이 지극히 인색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특히 두예(杜預)는 그를 일러, 돈을 탐하는 버릇[錢癖]이 있다고까지 하였다. 《晉書 卷四十五》
♣ 화교자촉[和嶠刺促]화교는 진 무제(晉武帝) 때의 대신으로 매우 임금의 총애를 받았는데, 반악(潘岳)이 당시에 산도(山濤)ㆍ왕제(王濟)ㆍ배해(裵楷)ㆍ화교 등이 임금의 총애받는 것을 그르게 여겨, 각도(閣道)에다 요(謠)를 만들어 쓰기를 “왕제는 말의 가슴걸이와 같고, 배해는 말의 꼬리 끈과 같으며, 화교는 너무 바빠서 쉬지를 못한다.[王濟鞅 裵楷緧 和嶠刺促不得休]”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五十五》
♣ 화교전[和嶠錢]화교는 진 혜제(晉惠帝) 때에 벼슬이 태자태부에 이르렀고 가산(家産)도 대단히 풍부하였으나, 그는 성품이 매우 인색하였으므로, 두예(杜預)가 “화교는 돈에 대한 탐벽이 있다[有錢癖嶠].”고 한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四十五》
♣ 화국수[華國手]한림원(翰林院)이나 사관(史館)에 벼슬하여 제고(制誥)나 외교(外交)에 관한 문장(文章)을 짓는 것을 나라를 빛내는[華國] 문장이라 이른다.
♣ 화궁[花宮]불사(佛寺)를 일컫는 말이다.
♣ 화극[畫戟]당(唐) 나라 때 3품 이상 고위 관원의 저택 문 앞에 세워 두었던 채색(彩色)한 목창(木槍)으로 고관의 집을 뜻한다.
♣ 화금[火金]옛날 불씨를 만들던 도구, ‘부시’
♣ 화기염염경조벽[火旂焰焰驚趙壁]붉은 깃발은 한(漢) 나라는 적색(赤色)을 숭상했으므로 곧 한 나라 기를 가리킨다. 한신은 진여를 맞아 싸울 적에 거짓 패하여 달아나면서 미리 군사들에게 조 나라 군사들이 추격해 오는 틈을 타서 한 나라의 붉은 깃발을 꽂도록 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발견한 조 나라 군사들은 크게 놀라 도망쳤으므로 한신은 쉽게 승리하였다. 《漢書 韓信傳》
♣ 화누역경[火耨力耕]’역(力)’은 ‘도(刀)’의 잘못임. 삼국유사(三國遺事) 엄장광덕전(嚴莊廣德傳)에 “대종역경(大種力耕)"이라 한 것도 “화종도경(火種刀耕)"의 잘못임.
♣ 화담[花潭]서경덕(徐敬德)의 호이자, 개성 박연폭포 아래에 있던 못 이름.
♣ 화당[華堂]관원의 역소(役所)를 가리킨다.
♣ 화당[畫堂]화당은 단청한 큰 집.
♣ 화당전위[畫堂傳位]황제가 죽고 황태자가 제위(帝位)에 오르게 된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성제(成帝)가 갑관 화당(甲館畫堂)에서 태어나 적황손(適皇孫)이 된 고사에서 유래하여 이후 화당을 황태자의 전고(典故)로 쓰게 되었다. 《漢書 元后傳》
♣ 화덕[火德]염제 신농씨(炎帝神農氏)가 화덕(火德)으로 왕(王)하였음.
♣ 화덕[和德]천지 음양의 조화.
♣ 화도박수[鞾刀帕首]무인(武人)의 상복(常服)임.
♣ 화도편[和陶篇]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시에 화운(和韻)한 시편(詩篇)을 말한다.
♣ 화두[話頭]종사(宗師)가 어떤 법을 말하여 후배를 지도하는 것이 마치 훌륭한 장인(匠人)이 재료를 마음대로 다루어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이, 선(禪)을 참구할 때에는 종사로부터 크게 의문되는 한 법을 받아 일념으로 그 의문을 참구하여 심지(心地)를 깨닫게 하는 공부의 한 방법이다.
♣ 화령[和寧]화령은 함경도 영흥(永興)의 고호이다.
♣ 화록[畫鹿]정홈(鄭弘)이 어느 날 자기 수레 뒤에 백록(白鹿)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주부(主簿)에게 묻자 “삼공(三公)의 수레에는 다 사슴을 그렸는데 지금 백록이 뒤를 따르니 명공(明公)은 반드시 재상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한 고사이다. 한서(漢書)
♣ 화록점상[畵鹿占祥]재상이 될 상서. “정홍(鄭弘)이 임회(臨淮) 태수가 되어 행차하는데 두 사슴이 수레를 따라 오는지라, 주부(注簿) 황국(黃國)이 절하며 하례하되, 듣건대 삼공(三公)의 수레에는 사슴을 그린다 하오니, 명부(明府)께서 마땅히 재상이 되리이다.” 하였다. 홍이 과연 태위(太尉)가 되었다.
♣ 화룡[火龍]더운 기운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양. 왕곡(王轂)의 고열행(苦熱行)에, “축융이 남으로 와 화룡을 매질하니, 화기가 이글이글 하늘을 불사르네.[祝融南來鞭火龍 火旗焰焰燒天紅]" 하였음.
♣ 화룡점정[畵龍點睛]용을 그릴 때 마지막으로 눈동자에 점을 찍어 완성시킴. 곧, 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하여 일을 끝냄. 남양(梁)나라 장승요(張僧繇)가 용을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점 찍으니 용이 살아 움직여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 화룡지사백제월[火龍之祀白帝月]화룡은 간지(干支)로 병진(丙辰)을 뜻하고 백제(白帝)는 가을을 맡은 신(神)이므로, 즉 1616년인 병진년 가을을 가리키는데, 이때에 광해군(光海君)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기 위해 김제남(金悌男)을 추형(追刑)하였고, 참신(讒臣)정조(鄭造) 등은 광해군의 비행을 적극 도우면서 선량한 조신(朝臣)들을 많이 처벌하였다.
♣ 화류[花柳]화가 유항(花街柳巷)의 준말. 기생 또는 유곽(遊廓)을 말함.
♣ 화류[驊騮]화류는 대추 빛깔의 준마(駿馬)로 주 목왕(周穆王)이 타고서 서왕모(西王母)를 만나러 갔다는 팔준마(八駿馬)의 하나이다.
♣ 화륜[火輪]화륜은 해를 가리킨다.
♣ 화리[花梨]종려나무[棕櫚]이다.
♣ 화림[花林]화림은 안음(安陰)의 고호이다.
♣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꽃이 열흘 동안 붉은 것은 없음. 한번 성하면 반드시 쇠퇴함. 부귀영화(富貴榮華)가 오래가지 못함을 비유
♣ 화문[花門]거연해(居延海)에서 북쪽으로 3백 리 되는 곳에 있는 산 이름으로, 당 나라 초기에 보루를 설치하고서 오랑캐의 침입을 막았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회흘(回紇)에게 점령당하였다. 뒤에는 이로 인해 회흘의 대칭(代稱)으로 쓰이게 되었다.
♣ 화미구미[畫眉求媚]한(漢) 나라 장창(張敞)은 위의(威儀)가 너무도 부족하여 그 아내에게 잘 보이려고 항상 아내의 눈썹을 그려 주었다. 《漢書 張敞傳》
♣ 화미장경윤[畫眉張京尹]한(漢) 나라 선제(宣帝) 때 경조윤(京兆尹)을 지낸 장창(張敞)을 이름이니, 평양(平陽) 사람으로 자는 자고(子高)이다. 벼슬에 있을 때마다 치적이 많았으며 일찍이 그의 아내를 위해 눈썹을 그린 일이 있었다. 《漢書 卷七十六 張敞傳》
♣ 화반[火伴]화반(伙伴)이라고도 쓰는데 동반(同伴)을 일컬음.
♣ 화발치진[華髮緇塵]화발은 백발을 뜻함이고, 치진은 풍진(風塵)에 분주하여 의복이 검어짐을 말한다. 사조(謝朓) 수왕진안시(酬王晉安詩)에 “누가 경락(京洛)에 오래 머물면서 흰옷을 치진에 더럽히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 화벽[和璧]옛날 초(楚) 나라 사람 화씨(和氏)가 초산(楚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가지고 여왕(厲王)에게 바치니, 여왕은 돌을 가지고 거짓말을 한다고 그의 왼발 발꿈치를 잘라버렸고, 그 후 또 무왕(武王)에게 바치니, 무왕 역시 거짓말을 한다고 그의 오른발 발꿈치를 잘라버렸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그후에 마침내 문왕(文王)에게 바치니, 문왕은 옥인(玉人)을 시켜 그 박옥을 다듬게 하여 보물을 얻자, 마침내 화씨벽(和氏璧)이라 불렀다 하였다.
♣ 화병[畫餠]능력이 없음을 비유한 말. 위 문제(魏文帝)의 조서에 “허명(虛名)만 있는 사람은 마치 땅바닥에 그려 놓은 떡을 먹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였다.
♣ 화보[花譜]사철 동안 피는 꽃을 시절순으로 그린 책.
♣ 화복동문[禍福同門]화와 복은 모두 자신이 불러들인다. 화복유기(禍福由己), 화복무문(禍福無門)
♣ 화복무문[禍福無門]“화와 복은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부르는 대로 온다[禍福無門 惟人所召].”는 옛말이 있다.
♣ 화복무문화불단행[禍福無門禍不單行]화(禍)와 복(福)이 들어오는 정해진 문이 없으며, 화는 한 번만 행해지지 않는다.
♣ 화봉[華封]요(堯) 임금 때에 화봉(華封) 사람이 요 임금에게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의 세 가지 일로 축수했다는 화봉삼축(華封三祝)의 준말로, 곧 임금에게 축수하는 것을 뜻한다. 《莊子 天地》
♣ 화봉삼축[華封三祝]옛날 화(華)의 봉인(封人)이 요(堯)를 두고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를 축원했다는 고사. 《莊子 天地》
♣ 화봉인[華封人]화(華) 땅의 봉인이란 뜻인데, 요(堯) 임금이 화 땅을 시찰나갔을 때 그 봉인이 요임금에게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 세 가지로 축원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天地》
♣ 화불단행[禍不單行]불행은 홀로 가지 않음. 불행은 종종 하나로 그치지 않고 여러 개가 잇달아 한꺼번에 옴
♣ 화사[畫蛇]화사첨족(畫蛇添足)의 준말로, 뱀은 본디 발이 없는데 발을 그린다는 뜻으로서 즉 소용없는 일을 비유한 말이다.
♣ 화사착족[畫蛇着足]옛 사람이 술 한 잔을 놓고는 각각 뱀을 그려서 먼저 그리는 사람이 그 술을 마시기로 하였는데 한 사람이 먼저 그려서 다시 뱀의 발을 그렸다. 나중 그린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먼저 그렸어도 발이 있는 것은 뱀이 아니다.” 하고는 술을 빼앗아 먹었다. 《戰國策》
♣ 화사첨족[畫蛇添足]뱀의 발. 뱀을 그리는데 실물에는 없는 발까지 더하여 그림. 쓸데없는 짓. 안 해도 될 쓸데없는 일을 덧붙여 하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침
♣ 화산[花山]강화부(江華府) 남쪽 5리쯤에 위치한 산으로 곧 강화를 가리킨다.
♣ 화산[花山]고종(高宗) 때 옮겨 도읍했던 강도(江都)의 주산(主山).
♣ 화산[華山]삼각산(三角山)을 이름인데, 진(秦)ㆍ한(漢)의 수도(首都) 장안(長安) 뒷산 근처의 산인 화산에 견준 것이다.
♣ 화산[花山]안동(安東)의 옛 이름이다.
♣ 화산[華山]화산은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상(商)을 정벌한 뒤에 전쟁이 끝났다는 뜻에서 말을 방목하였던 곳이다.
♣ 화산[崋山]화산은 중국의 오악(五嶽) 가운데 하나임.
♣ 화산기[華山畿]악부(樂府) 가곡(歌曲)의 한 가지이다. 송 소제(宋少帝) 때에 한 선비가 화산기로부터 운양(雲陽)을 가다가 여관에서 약 18~19세쯤 된 여인을 보고는 좋아하였으나 어찌할 수가 없어 마침내 심질(心疾)을 얻어 죽게 되자, 자기 모친에게 유언하기를 “나를 장사지낼 적에 화산을 경유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모친이 그의 말대로 관(棺)을 싣고 화산을 들러 그 여인의 문앞에 이르자, 말이 더 이상 가지 않으려고 마구 버티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목욕하고 단장한 다음, 문을 나와서 노래하기를 “화산기여, 그대는 이미 나를 위해 죽었으니, 혼자 살아서 누구를 위해 이 몸 바치랴. 예뻐할 때처럼 좋아한다면, 관목이 나를 위해 열려다오[華山畿 君旣爲儂死 獨活爲誰施 歡若見憐時 棺木爲儂開]”하니, 관목이 과연 열리자 그 여인이 관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죽으므로, 마침내 그 선비와 합장하여 이를 신녀총(神女冢)이라 부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화삼변[禾三變]벼가 세 번 변함. 회남자(淮南子)에, “부자(夫子; 孔子)는 벼가 세 번 변하는 것을 보고서 탄식하며 하는 말이, ‘여우가 죽을 적에는 언덕으로 머리를 향하는데, 나는 벼에로 머리를 향하련다.’ 하였다.” 했다. 이는 도(道)가 행해지지 않아서 귀여(歸歟)의 탄식을 내보인 것이다. 벼란 것이 싹이 나서 그 싹이 빼어나 열매를 맺으니, 무릇 세 번을 변해 고개가 드리워 그 뿌리로 향하는 때문이다.
♣ 화삼월[火三月]진 나라 궁궐 아방궁(阿房宮)이 얼마나 굉장하였던지 항우가 거기에 불을 질렀더니 불이 석 달이 되도록 꺼지기 않았다 한다.
♣ 화삽[畫翣]관(棺)을 치장하는 것인데 그 모양이 부채와 같다. 상여가 나갈 때에 수레를 가리고 곽(槨)에 넣을 때에는 널을 가리는 것이다. 《禮記 檀弓上》
♣ 화삽[畫翣]상여의 양쪽에 세우고 가는 제구(祭具)이다. 원래는 깃으로 만들었으나 후세에 네모진 화포(畫布)에 다섯 자 길이의 자루를 달고 깃털로 장식하였다. 《禮記 喪大記》
♣ 화상치[畵象治]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에 “옛날에는 백성들이 순박하므로 죄인의 옷에 오형(五刑)의 형상을 그려 입게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서로 경계하게 하였다.” 했다.
♣ 화서[華胥]화서는 열자(列子) 황제(黃帝)에 “옛날 황제(黃帝)가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근심하고 있었는데, 낮잠을 자다가 꿈에 화서 나라에 가서 그 나라가 아주 태평하게 다스려지는 것을 구경했다.”는 고사이다.
♣ 화서국[華胥國]전설에 나오는 이상국(理想國)으로, 엄주(弇州)의 서쪽, 태주(台州)의 북쪽에 있다고 하는 나라인데, 일찍이 황제(黃帝)가 꿈에 가보았다는 평화스러운 나라. 열자(列子) 황제(黃帝)에 “황제가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걱정하다가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화서국에 갔다. 그 나라에는 관장(官長)이 없어도 다스려지고, 백성들은 생사에 대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살고 있었다.” 하였다.
♣ 화서지몽[華胥之夢]황제(黃帝)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화서국(華胥國)에 가서 그 나라가 잘 다스려진 것을 보았다는 고사에서, 길몽(吉夢) 또는 그냥 꿈의 뜻으로도 쓰인다.
♣ 화서풍일[華胥風日]태평시대의 뜻. 열자(列子) 황제(黃帝)에 “황제씨가 낮잠을 자던 중 꿈속에 화서의 나라에서 놀았는데, 그 나라는 임금도 없이 자연스럽게 살았고 백성들도 욕심이 없었다. 꿈을 깬 후 깨달음이 있어 천하를 잘 다스렸다.” 하였음.
♣ 화석[華席]번화한 자리
♣ 화석[花石]이율곡(李栗谷)의 화석정(花石亭)을 가리킨다.
♣ 화석정[花石亭]본디 지돈녕(知敦寧)으로 시호가 강평(康平)인 이명신(李明晨)의 별장인데, 그가 죽은 뒤에 여기가 황폐해졌다가 그의 손자인 이의석(李宜碩)에 이르러 다시 그 자리에 중건(重建)되었다.
♣ 화성[火城]당 나라 때 원단(元旦)이나 동지(冬至)가 되면 크게 조회를 열어 촛불을 수백 개 베풀었는데, 이를 화성(火城)이라 했음. 《唐國史補》
♣ 화성[化城]법화(法華) 제 칠유(七喩)의 하나. 여러 사람이 보배 있는 곳을 찾아가다가 길이 험악하여 사람들이 피로해하므로, 그때에 길잡이가 한 계교를 내어 신통력으로써 임시로 큰 성(城)을 나타내어 여기가 보배 있는 곳이라 하자, 여러 사람이 대단히 기뻐하여 이 성에서 쉬었다. 길잡이는 여러 사람의 피로가 풀림을 보고는 이 화성을 없애버리고, 다시 참으로 보배 있는 곳에 이르게 하였다 한다. 그래서 이 화성을 방편교(方便敎)의 깨달음에, 참으로 보배 있는 곳을 진실교(眞實敎)의 깨달음에 비유한다. 불사(佛寺)의 별칭.
♣ 화성[畫省]상서성(尙書省)을 말한다. 상서성 안에 호분(胡粉)으로 벽을 바르고 옛날 현인과 열사를 그려놓았기 때문에 화성이라 한다.
♣ 화성[華省]청직(淸職)의 관청을 가리키는 말이다. 맡은 직무가 임금과 밀접하고 존귀한 관서.
♣ 화성[花城]하양(河陽)의 옛 이름이다.
♣ 화성[火城]횃불로 성(城)을 에워싸서 성을 수비하는 것을 이름. 양(梁) 나라 때 양간(羊侃)이 후경군(侯景軍)의 핍박을 받았을 때 성(城) 주위에 횃불을 많이 던져 화성을 만들어서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데서 온 말이다.
♣ 화성부[華城府]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
♣ 화성함향[畫省含香]시종신이 있는 관아를 말한다. 옛날 상서랑(尙書郞)이 임금에게 아뢸 때에는 입 냄새를 없애기 위하여 계설향(鷄舌香)을 입에 머금었다 한다. 《通典 職官 4》
♣ 화성흘연[化城屹然]법화도사(法華道師)가 험한 길 가운데서 변화(變化)를 부려 한 성(城)을 만들어 피로한 대중(大衆)들을 그 안에 들어가서 쉬게 하였다. 《法華經》
♣ 화속전[火粟田]나무를 베어 버리고 밭을 개간하여 한 해만 경작하고 묵혀 버리는 전지를 일컬음.
♣ 화수[火樹]등불의 빛이 성한 것을 말함.
♣ 화수[火樹]영산홍의 꽃이 불같이 붉은 것을 비유한 것임. 백거이의 시에 “火樹風來飜絳焰 瓊枝日出晒紅紗"라 하였음.
♣ 화수[火宿]화수는 심수(心宿)라 부르며 28수(宿) 중 동방 창룡칠수(蒼龍七宿)의 하나이다.
♣ 화숙[和叔]화숙은 박순(朴淳)의 자(字)이다.
♣ 화숭[華嵩]중국 오악(五嶽)의 하나인 화산(華山)과 숭산(嵩山)으로 높은 산의 대명사가 되었다.
♣ 화승[華勝]머리를 꾸미는 꽃 모양의 장식물.
♣ 화승[花勝]화승은 부인의 머리에 꽂는 채색 조화(造花)를 말한다.
♣ 화승상투[花勝相投]중국에서 정월 7일 인일(人日)에 일곱 가지 채소국을 먹고 채단(綵緞)을 오려서[翦綵] 머리 장식[花勝]을 만들어 서로 선물하고 머리에 꽂고 다니며 높은 언덕에 올라가 시를 읊는 풍속이 있었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이것은 전설적인 선녀 서왕모(西王母)가 머리에 꽂고 있던 대승(戴勝)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장수(長壽)와 행복을 비는 뜻이 담겨 있다.” 하였다.
♣ 화시[華始]한(漢) 나라 때의 음악 이름. 음률을 만물의 영화(英華)의 시작에 비긴 것이다.
♣ 화시감온포[花時甘縕袍]꽃피는 계절에 아직도 솜옷을 좋아한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권7 유우(遺遇)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시구이다.
♣ 화식[火食]속세에 사는 사람. 화식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함은 신선 같다는 얘기이다. 《王直方詩話》
♣ 화식전[貨殖傳]사기(史記) 열전(列傳)의 하나로서 이 글은 모두 재물을 불리는 일에 관해서 기술한 것이다.
♣ 화신풍[花信風]소한(小寒)에서부터 곡우(穀雨)까지 모두 8개 절기인데 그것을 날짜로 따져보면 1백 20일이며, 매 5일이 하나의 철이 되어 모두 24철이 되고 철마다 한 종류의 꽃 소식이 서로 응한다 하여 이것을 이십사번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이라 부른다. 이것은 시기에 맞춰 차례로 피어나는 봄철의 꽃에 의해 흘러가는 세월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봄바람 속에 이십사번 꽃 가운데 한 번의 꽃이 또 피었다는 것이다.
♣ 화씨[和氏]화씨벽(和氏璧) 고사의 주인공인 변화(卞和)를 말한다.
♣ 화씨박[和氏璞]춘추 시대 초(楚) 나라 변화(卞和)가 산중에서 얻은 옥박(玉璞)을 말하는데, 이것이 천하에 뛰어난 보옥(寶玉)이었으므로, 여기서는 훌륭한 인품에 비유한 것이다.
♣ 화씨벽[和氏璧]초(楚) 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초(楚) 나라 여왕(厲王)에게 올리니, 여왕이 옥공(玉工)을 시켜 감정하게 하였다. 옥공이 돌이라고 하니 임금이 속였다고 하여 좌족(左足)을 베어 버렸다. 여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또 박옥을 올리니, 무왕이 옥공을 시켜 감정하게 하였는데 또 돌이라고 하매 그 우족(右足)을 베어버렸다. 그후 무왕이 죽고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가 박옥을 안고 형산 아래에서 통곡하니, 문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연유를 물었다. 변화가 말하기를 “보옥을 돌이라 하고 정직한 선비를 간사한 자라고 하니, 그것이 슬퍼서 그런다.” 하였다. 왕이 마침내 옥공을 시켜 박옥을 쪼개보니 과연 진귀한 보옥이 나오므로 드디어 화씨벽(和氏璧)이라 이름하였다. 《韓非子 和氏》
♣ 화씨성[和氏城]전국 시대 조(趙) 나라가 화씨벽(和氏璧)이란 보옥을 얻었는데, 진(秦) 나라가 15개의 성과 바꾸자고 했다.
♣ 화씨양[華氏羊]춘추 때에 송(宋) 나라 화원(華元)이 양(羊)을 잡아 여러 사람을 대접하였는데, 그 어자(御者) 양침(羊斟)은 얻어먹지 못하여 불평을 품었다가, 그 뒤에 송 나라와 정(鄭) 나라가 싸울 때에 양침이, “전일에 양을 잡아 대접할 때는 당신의 마음대로 하였지마는, 오늘 전쟁에 수레를 모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 하고는 화원의 탄 수레를 몰고 정 나라 군중으로 달려들어갔으므로 화원이 패하였다.
♣ 화씨지박[和氏之璞]화씨는 변화(卞和)인데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이다. 변화가 옥덩이 하나를 발견하여 전후로 초 나라 여왕(厲王)과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모두 기만의 죄로 몰려 양쪽의 발꿈치가 잘렸다. 문왕(文王) 때에 이르러 변화가 또 옥덩이를 안고 형산(荊山) 밑에서 통곡하자 문왕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 옥덩이를 쪼개어 가공한 결과 보옥(寶玉)을 얻었는데 이를 화씨벽(和氏璧)이라고 일컬었다. 《韓非子 和氏》
♣ 화씨지벽[和氏之璧]천하에서 가장 이름난 옥. 초(楚) 나라의 변화(卞和)가 형산(刑山)에서 얻은 유명한 구슬. 조(趙)에서 그것을 얻었으며, 진(秦) 나라에 가져갔다가 오롯이 돌려왔다.
♣ 화악[華嶽]중국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오악(五嶽)의 하나.
♣ 화악[龢樂]화악은 오음(五音)을 가지고 악곡(樂曲)을 조율시키는 것을 말한 것으로, 국어(國語) 주어(周語)에 “오성으로 악을 고르고 율로써 오성을 균평하게 한다.[聲以龢樂 律以平聲]" 한 데서 온 말이다.
♣ 화악루[花萼樓]당 나라 양황제(讓皇帝)가 흥경궁(興慶宮) 서남쪽에 다락을 짓고 화악상휘지루(花萼相輝之樓)라 제액(題額)하였다. 제왕(諸王)들이 풍류를 아뢰면 반드시 곧 불러 다락에 오르라 하여 같은 탑(榻)에 앉아 즐기며 황금과 비단을 하사한 고사가 전한다. 화악(花萼)이란 이름은 대개 시경(詩經)에 있는 상체의 꽃[常棣之華]의 뜻을 취한 것인데 상체꽃은 형제의 우애(友愛)에 비유한 것이다. 《舊唐書 讓皇帝憲傳》
♣ 화양[華陽]은자(隱者)가 사는 곳을 가리킴. 양(梁)의 도홍경(陶弘景)이 구곡산(句曲山)에 숨어살며 자호를 화양은거(華陽隱居)라고 하고, 무제(武帝)가 예를 갖추어 맞이하려했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음. 《梁書 陶弘景傳》
♣ 화양건[華陽巾]은자(隱者)가 쓰는 두건. 신선전(神仙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경조(京兆)사람인 위절(韋節)이 화산(華山)의 남쪽 기슭에 은거하면서 호를 하양자(華陽子)라고 하였으며, 그가 쓰고 다니는 두건을 화양건이라고 하였다.”
♣ 화양귀마[華陽歸馬]화양은 화산(華山)의 남쪽. 주(周) 무왕(武王)이 주(紂)를 치는 전쟁을 끝낸 뒤에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말[馬]을 화산(華山)에 돌려보내고 군수 물자를 나르던 소는 도림(桃林)의 들에 놓았다 한다. 《書經 武成》
♣ 화양동[華陽洞]화양동은 도가(道家) 삼십육동천(三十六洞天)의 제 8동으로 모군(茅君)이 다스리는 신선들이 산다는 곳이다.
♣ 화양은거[華陽隱居]산중에 은거하면서도 매양 국사를 자문받았던 양(梁) 나라 때의 도홍경(陶弘景)을 힐난하는 말이다. 도홍경은 은사(隱士)로서 자호가 화양은거(華陽隱居)이며, 일찍이 제 고제(齊高帝) 때에 제왕시독(諸王侍讀)을 지냈고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하였다. 그는 특히 음양(陰陽)ㆍ오행(五行)ㆍ선술(仙術)ㆍ의술(醫術) 등에 뛰어났는데, 양 무제(梁武帝) 때에는 모든 국가의 대사(大事)를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으므로 당시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南史 卷七十六 隱逸下》
♣ 화어소장[禍於蕭墻]소장은 병풍으로 가까운 데에서 화란이 싹튼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계씨(季氏)에, “나는 계손(季孫)의 걱정이 전유(顓臾)에게 있지 않고 소장(蕭墻) 안에 있을까 걱정이다.” 하였다.
♣ 화엄누각풍[華嚴樓閣風]경각간에 이루어진 것을 말함.
♣ 화엽난겸여각치[花葉難兼如角齒]뾰족한 뿔이 달린 짐승은 예리한 이빨이 없듯이 꽃이 아름다운 초목은 대체로 잎이 곱지 않다는 것이다.
♣ 화영[華英]예쁜 꽃.
♣ 화예부인[花蕊夫人]오대(五代) 후촉주(後蜀主)인 맹창(孟昶)의 부인인데, 문장에 능하여 궁사(宮詞) 1백 수(首)를 지었다. 후촉이 망한 후에도 항상 후촉을 잊지 않고 맹창의 초상에 제사하였다.
♣ 화옥[華屋]화옥은 화려한 집으로 영화로운 삶을 뜻함.
♣ 화옥산구[華屋山丘]흥망성쇠와 인생의 무상함을 뜻하는 말이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조식(曹植)의 공후인(箜葔引)의 “살아서 화려한 집 거처하더니, 쓸쓸히 산 언덕으로 돌아갔구나.[生在華屋處 零落歸山丘]”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 화옹[禾翁]호가 화곡(禾谷)인 정사호(鄭賜湖)를 말함.
♣ 화완포[火浣布]남방에서 난다고 하는 베 이름으로, 세탁할 때 불 속에다 넣으면 베는 빨갛게 되고 때는 베 빛으로 되는데, 끄집어내어 털면 하얗게 된다고 한다.
♣ 화왕[花王]모란을 가리킨다.
♣ 화왕풍간서[花王諷諫書]화왕이 풍간한 글. 설총이 장미꽃과 할미꽃의 이야기로 임금에게 풍간한 화왕계(花王戒)를 가리킴.
♣ 화요[花妖]유사(遺事)에 “처음에 목작약(木芍藥)이 있어 어느 날 갑자기 한 가지에 두 송이가 피었는데, 아침에는 짙붉고 한낮에는 짙푸르고 해질 무렵에는 노랗고 밤중에는 희어, 낮과 밤으로 그 향기롭고 고움도 각기 달랐다. 임금이 ‘이는 꽃나무의 요정(妖精)이니 의아해할 바가 아니다.’ 했다.” 하였다.
♣ 화요입벽도[花妖入壁逃]화요는 화월(花月)의 요귀(妖鬼)인데, 기생 따위들이 가까이하지 못하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육훈(陸勳) 집이지(集異志)에 “무삼사(武三思)가 첩을 두었는데 얼굴이 절색이어서 사대부들이 모두 그를 방문하여 구경하였다. 어느 날 양공(梁公) 적인걸(狄仁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그의 첩이 도망가버려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삼사가 사방으로 수색해 보니, 벽틈에 숨어서 ‘나는 화월의 요귀인데, 하늘이 나를 보내어 당신을 모시고 이야기도 하고 웃으면서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양공은 일세의 정대(正大)한 사람이므로, 내가 볼 수 없습니다.’ 했다.” 하였다.
♣ 화용[華容]미인(美人)
♣ 화용월태[花容月態]꽃같은 얼굴과 달같은 자태. 아름다운 여자의 고운 얼굴과 자태를 이르는 말.
♣ 화우[火牛]등에다가 용 무늬를 그려 넣고, 양쪽 뿔에다가 병기를 매달고, 꼬리에 기름 먹인 섶을 매단 다음, 여기에 불을 붙여서 적진으로 돌진하게 하는 소를 말한다. 전국 시대 때 연(燕) 나라가 제(齊) 나라를 쳐들어와 제 나라의 모든 성이 함락되고 즉묵성(卽墨城)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그때 전단(田單)이 즉묵성에 있으면서 이 화우를 이용해 한밤중에 연 나라 군사를 쳐 승리를 거둔 뒤, 그 승세를 타고 삽시간에 제 나라의 72성을 수복하여 거의 망해 가던 제 나라를 재건하였다. 그리고는 당시 거(莒) 땅으로 피해 있던 양왕(襄王)을 맞이하여 임치(臨淄)로 들어갔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 화우[花雨]부처가 설법을 할 때 제천에서 꽃비가 쏟아져 내렸다는 불경의 기록을 인용하여, 불문(佛門)의 신령스러운 자취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쓰이게 되었다.
♣ 화우지계[火牛之計]쇠뿔에 칼을 잡아매고 꼬리에 기름 바른 갈대 다발을 매단 다음 그 소떼를 적진으로 내모는 전술.
♣ 화운[火雲]여름에 더운 기운을 머금은 붉은 구름.
♣ 화웅[畫熊]수레의 식(軾)을 곰의 형상으로 꾸민 화려한 수레를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여복지 상(輿服志上)에 “삼공(三公)과 열후(列侯)는 녹교(鹿較)ㆍ웅식(熊軾)에 검은 깃발을 단 수레를 탑승한다.”고 하였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中丞問俗畫熊頻 愛弟傳書綵鷁新”이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8 奉送蜀州柏二別駕 將中丞命 赴江陵 起居衛尙書太夫人 因示從弟行軍司馬位》
♣ 화웅권학[和熊勸學]어머니가 자식 교육에 정성을 들인 것을 비유한 말. 당(唐) 나라 때 유중영(柳仲郢)의 모친 한씨(韓氏)가 곰의 쓸개를 수종(數種)의 약재와 섞어 환(丸)을 지어서 공부하는 여러 자식들에게 주었던 데서 온 말이다.
♣ 화원[花園]고려 최영(崔瑩)이 송도(松都)의 화원(花園)에서 이성계(李成桂)에게 잡혔다.
♣ 화원[華元]춘추 시대 송(宋) 나라 우사(右師)로서, 어느날 염소를 잡아서 그 부하 군사를 먹이는데, 그 어자(御者) 양짐(羊斟)이 참여하지 못하였다. 급기야 싸우는데 양짐이 말하기를, “지난날 염소는 그대 마음대로 했으니, 오늘날 일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 하였음. 《左傳 宣公 二年》
♣ 화원귀[華元歸]화원(華元)은 춘추 시대 송(宋) 나라 장군으로, 침입해 온 정(鄭) 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던 중에, 앙심을 품은 마부가 수레를 몰고 적진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포로로 잡혔다가 다시 도망쳐 돌아온 고사가 있다. 《史記 卷38 宋微子世家》
♣ 화월[花月]아름다운 기첩(妓妾)을 비유함. 당(唐) 나라 때 무삼사(武三思)에게 소아(素娥)라는 기첩이 있어 천하의 절색(絶色)이었으므로, 당시 사대부들이 모두 가서 구경을 하는지라, 적인걸(狄仁傑) 역시 따라가 보았더니, 그녀가 나오지 않고 벽 틈에 숨어서 말하기를 “나는 화월(花月)의 요괴(妖怪)로 상제(上帝)의 명을 받고 공(公; 무삼사를 가리킴)의 마음을 방탕하게 만들려고 내려왔는데, 적공(狄公)은 한 시대의 정인(正人)이므로 내가 만나볼 수 없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화유[火維]남방(南方)을 말한다. 남방은 화(火)에 속한다.
♣ 화유[火維]남방화(南方火)에 해당한다 하여 형산(衡山)을 달리 이른 말인데, 한유(韓愈)의 알형악묘시(謁衡嶽廟詩)에 “화유의 땅은 거칠어서 요괴가 많기에 하늘이 귀신의 힘 빌어 웅을 지키게 하였네[火維地荒足妖怪 天假神柄司其雄]”하였다.
♣ 화음[華陰]후한(後漢) 장해(張楷)가 화음산(華陰山)에 숨어살며 도술(道術)을 부려 사방 5리(里)에 안개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後漢書 卷36 張楷傳》
♣ 화의[化衣]이교(李嶠)의 상전원시(想田園詩)에 “벼슬 따라 이곳저곳 괴롭기만 하구나, 풍진 속에 옷 바꿔 입은 지가 오래로군.[游宦勞牽網 風塵久化衣]" 한 시가 있다.
♣ 화이부동[和而不同]군자는 사람들과 친화하되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는다. 곧 대인관계에 있어 중용의 덕을 지켜, 다른 사람과의 친화를 도모하되 편당(偏黨)을 짓지 않는 태도.
♣ 화익[畫鷁]화익는 배 앞에 그려 붙인 수조(水鳥)의 상(像). 익은 잘 나는 물새인데 수신(水神)을 제압한다고 한다.
♣ 화익선[畫鷁船]익(鷁)이라는 물새의 형상을 선수(船首)에 새긴 배. 이 새는 풍파를 잘 견디어 내므로 이 새를 장식한다고 한다. 《淮南 本經訓》
♣ 화일[化日]만물(萬物)을 화생(化生)시킨다는 뜻에서 늦은 봄의 일기를 이른 말이다.
♣ 화일[畫一]한(漢)나라 초대(初代) 승상(丞相) 소하(蕭何)가 죽은 뒤에, 후임으로 조참(曹參)이 들어 와서 소하가 제정한 법을 그대로 준수하니, 백성들이 좋아하여 노래하기를, “소하가 법을 제정한 것을 획일(畫一)한 것 같은데, 조참은 그것을 잘 지키네.” 하였다.
♣ 화자[華子]화자는 화양 은거(華陽隱居)ㆍ화양 진인(華陽眞人)이라 자호한 양(梁) 나라 때의 은사 도홍경(陶弘景)을 이르는데, 그가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할 적에 양 무제(梁武帝)가 나라에 대사(大事)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산중의 재상이라고 일컬었다. 《梁書 卷五十一》
♣ 화자발[和子鉢]중국 오대시대에 화웅(和凝)이라는 사람이 주시관으로 있을 때에 범질(范質)이라는 사람의 성적이 매우 좋아서 당연히 장원으로 뽑힐 사람인데도, 전에 자기가 13번으로 합격하였지만 지금 세상에 이름이 높은 것을 생각하고 이 범질도 13번으로 합격시키고 나의 의발(衣鉢)을 이 사람에게 전한다고 말하였다는 고사.
♣ 화잠[華簪]현달(顯達)한 고관이 쓰는 화려한 머리 장식이다.
♣ 화재어호한[禍在魚狐閒]진(秦)나라의 수졸(戍卒)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 군사의 마음을 선동하기 위한 술책으로 비단에다, “진승이 왕이 된다.”고 글을 써서 물고기 뱃속에 넣어 사람을 시켜서 그 물고기를 팔게 하였고, 또 밤에 오광이 숲속의 신사(神祠)에 몰래 들어가서 여우의 소리로, “진승이 왕이 된다.”고 울었다.
♣ 화저[花猪]돼지를 말함. 소식(蘇軾)의 시에 “五日一見花猪肉 十日一遇黃鷄粥"이라고 한 구가 있음.
♣ 화전[花甎]꽃무늬를 놓아 만든 벽돌. 한림원(翰林院)에 화전을 깔았으므로 한림원을 말한다. 당(唐) 나라 한림원이 있는 북청(北廳) 앞의 섬돌을 꽃벽돌로 장식하였는데, 겨울에는 해 그림자가 꽃벽돌의 다섯 번째 계단에 이르렀을 때 한림학사들이 입직(入直)했다 한다. 한림지(翰林志)에 “북청(北廳) 앞뜰에 화전(花甎)을 깐 길이 있다" 하였다.
♣ 화전[花甎]당(唐) 나라 때 대궐 북청(北廳) 앞에 꽃무늬의 벽돌길이 있었는데, 겨울철이면 해그림자가 다섯 벽돌에 이를 때가 바로 입직(入直)하는 시각이었으나, 한림학사(翰林學士) 이정(李程)은 천성이 게을러 항상 늦게 와서 해그림자가 여덟 벽돌을 지나서야 도착함으로써 당시에 모두 그를 팔전학사(八甎學士)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31 李程列傳》
♣ 화전원부진[火傳不盡]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활활 타는 장작불, 화력(火力)이 다해 가도, 그 불씨 남아 있어 꺼질 줄을 모른다.[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라고 하였다.
♣ 화전유염[華牋濡染]화전은 종이를 가리킨다. 곧 종이에다 내 글을 쓰겠다는 말이다.
♣ 화접시[化蝶翅]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 마음에 흐뭇하여 주(周)인 줄을 몰랐더니, 문득 깨고나니 장주였다. 《莊子》
♣ 화접유룡[化蝶猶龍]장자(莊子)와 노자(老子), 화접은 장자가 “꿈에 나비[蝴蝶]가 되었다.” 한 말을 인용한 것이며, 유룡은 공자가 노자를 “용과 같다.[猶龍]" 한 것을 인용하여 한 말이다.
♣ 화정[和靖]어려서 고아가 되어 빈한한 생활을 하며 학문에 힘을 쏟으면서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채 서호(西湖)에서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살았던 송(宋) 나라 임포(林逋)의 시호(諡號)이다. 그는 항주(抗州)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살면서 20년 동안 속세를 나가지 않았고, 매화를 심고 학(鶴)을 기르면서 일생을 마쳤다.
♣ 화정림[和靖林]화정은 송(宋) 나라 임포(林逋)의 시호(諡號)로,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해 살았다. 서화를 잘 그리고 시를 잘 지었으며, 장가도 들지 않고 자식도 없이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기르면서 지냈으므로 세상에서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하였다. 《宋史 卷457 隱逸列傳 林逋》
♣ 화정사녹[和靖辭祿]화정은 송(宋) 나라 윤돈(尹焞)의 호이다. 윤돈은 정이(程頤)의 문인(門人)으로, 여러 차례 천거를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宋史 卷428 道學列傳 尹焞》
♣ 화정재월선[華亭載月船]진(晉) 나라 육기(陸機)는 화정에 살면서 학(鶴) 우는 소리를 듣곤 하였는데, 뒤에 참소를 입어 죽게 되자 “화정의 학 우는 소리를 어찌 다시 들을 수 있으랴.” 하였다. 《晉書 卷五十四 陸機傳》
♣ 화정지학[華亭之鶴]부귀영화로 인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경우로서, 진(晉) 나라 육기(陸機)가 일개 나그네로 성도왕 영(成都王穎)에 의해 갑자기 후장군 하북대도독(後將軍河北大都督)에 오름으로써 시기하는 자들의 참소를 입고 수감되었는데, 그가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탄식하기를 “내가 옛날에 듣던 화정의 학 울음소리를 어찌 다시 들을 수 있으랴.”고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陸機傳》
♣ 화정택[和靖宅]화정(和靖)은 송(宋) 나라의 은군자(隱君子) 임포(林逋)의 시호이다. 임포가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처자(妻子)도 없이 매화와 학만을 좋아하였으므로 당시에 사람들이 “梅妻鶴子”라고 하였다 한다. 《世說新語補 棲逸》
♣ 화정학[華亭鶴]화정은 상해(上海)의 옛 이름이다. 진(晉) 나라 때에 육기(陸機)라는 사람이 서울에 와서 버슬하다가 생명을 잃게 되었는데 죽을 때에, “아, 고향 화정의 학 우는 소리를 어찌 다시 들을 수 있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한다.
♣ 화정학려[華亭鶴唳]화정(華亭)의 학소리는 장한과 동시의 사람인 육기(陸機)가 오(吳)나라에서 왔다가 잡혀 죽으며, “화정의 학(鶴) 우는 소리를 언제나 다시 들으랴.” 하였다.
♣ 화제[花蹄]꽃모양 같은 마소의 발굽.
♣ 화제[火齊]불을 알맞게 땜.
♣ 화제[火帝]오방(五方) 천제(天帝)의 하나인 염제(炎帝)로 여름을 맡은 신(神)인 적제(赤帝)를 가리킨다. 남방과 여름과 불을 담당한다고 한다. 불은 방위로는 남쪽이고 사시(四時)로는 여름이며 색깔은 적색이다.
♣ 화제[火齊]화제주(火齊珠)의 준말로 보주(寶珠)의 일종이다. 자주색이 찬란한 옥으로 가볍기가 운모(雲母)와 비슷하다고 한다.
♣ 화조[花朝]음력 2월 12일이 모든 꽃의 생일(生日)이라 하여 그 날을 화조(花朝)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는 15일을 화조라고 한다고 함. 《提要錄》
♣ 화조[火棗]화조는 안기생(安期生)이 먹던 오이 크기의 대추를 말하는데, 그 과일을 먹으면 우화(羽化)하여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한다. 《史記 封禪書. 漢武內傳》
♣ 화조절[花朝節]음력 이월 십오일은 백화(百花)의 생일이라 하여 화조절이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몽량록(夢梁錄)의 이월망(二月望)에 보인다. 어떤 책은 이월 십이일, 혹은 이월 이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화종구생[禍從口生]재앙은 입에서 나온다.
♣ 화주[火珠]상투를 짠 뒤에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물건. 산호(珊瑚) 따위로 만드는 동곳을 이름.
♣ 화주[和州]영흥(永興)의 고려 초 이래의 이름. 현종(顯宗) 9년 화주 방어사(防禦使) 본영을 두었고, 고종(高宗) 때 이곳을 지키던 장수가 반란하여 원(元) 나라에 붙었는데, 공민왕(恭愍王) 5년에 군사를 보내어 수복하였다.
♣ 화주선학거[華柱仙鶴去]요동(遼東)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도(道)를 배워서 학이 되었다. 나중에 요동에 돌아와 성문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으니, 어떤 소년이 활을 들어 쏘려 하기에, 날아가면서 말하기를, “새야 새야 정령위야,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인제야 돌아왔구나. 성곽은 옛날 같다만 사람은 다르구나. 어째서 신선을 안 배우고 무덤들만 총총한고.” 했다 한다.
♣ 화중인[畫中人]운대(雲臺)나 기린각(麒麟閣)과 같은 공신각(功臣閣)에 화상(畫像)으로 그려져 안치되리라는 것이다.
♣ 화중지병[畵中之餠]그림 속의 떡. 탐이 나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사물. 곧, 그저 바라만 보았지 소용이 없음. 또는 실속 없는 일을 비유
♣ 화지고침[畫紙敲針]두보의 시에, “늙은 아내는 종이를 그어 바둑판을 만들고 어린 자식은 바늘을 두드려 낚시를 만든다.”는 구절이 있다.
♣ 화창[華倉]화창은 옛날의 명의(名醫)인 창공(倉公)과 화타(華陀)를 합칭한 말이다.
♣ 화처[花妻]천인(賤人)이 본처 이외에 딴 여자를 얻은 것을 이르는 말. 첩이라고 감히 부를 수 없어서 붙여진 이름.
♣ 화청궁[華淸宮]당(唐)의 궁전 이름. 여산(驪山)의 온천(溫泉) 지대에 있는 궁전으로 처음에는 탕천궁(湯泉宮)이라 하였다가 현종(玄宗) 때에 와서 화청궁(華淸宮)으로 이름을 고치고 온천은 화청지라 하고, 그 곳에 행행하여 잔치를 베풀고 양귀비와 즐겼음. 《唐書 玄宗紀》
♣ 화청지[華淸池]화청지는 섬서성(陝西省)에 있던 당(唐) 나라 화청궁(華淸宮)의 온천 욕지(浴池)인데, 양 귀비(楊貴妃)가 여기에서 목욕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 나온다. 안사(安史)의 난에 당 현종(唐玄宗)이 촉(蜀) 땅으로 피난갈 때, 군사들의 원성(怨聲)에 어쩔 수 없이 양귀비를 마외(馬嵬)에서 죽게 하고는 거기에 묻어 주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76 楊貴妃傳》
♣ 화초[華貂]궁중의 담비가죽.
♣ 화초주맹[花草主盟]모란을 화중왕(花中王)이라 한다.
♣ 화촉[華燭]결혼을 상징하는 붉은 색 양초를 일컫는 고사성어.
♣ 화총[花驄]푸른 털과 흰 털이 뒤섞인 얼룩말로, 곧 썰매를 가리키는데, 당 현종(唐玄宗)이 타고 다닌 준마 이름이 바로 옥화총(玉花驄)이었다고 한다.
♣ 화축[華祝]화축은 화봉삼축(華封三祝)의 준말로, 당요(唐堯) 때 화(華) 땅에 봉해진 사람이 요임금에게 장수하고[壽] 부유하고[富] 아들을 많이 낳기[多男子]를 축원하였다는 데서 임금에게 다복하기를 축원한다는 용어로 쓰인다. 《莊子 天地》
♣ 화태수신재초방[禍胎須信在椒房]옛날 한 나라 때에 황후 있는 궁중의 내전(內殿)을 호초(胡椒)로 방 바람벽을 발랐으므로 황후 있는 내전을 초방이라 한다. 여기서는 안녹산이 문제가 아니라 궁중 안에 있는 양귀비가 문제라는 말이다.
♣ 화택[火宅]불교 용어로, 번뇌(煩腦)가 많은 속세를 이르는 말이다. 법화경(法華經) 비유품(譬喩品)에 “편안치 못한 이 삼계, 불타는 집과 같도다.[三界無安 猶如火宅]" 하였다.
♣ 화택[火澤]주역 64 괘 중의 하나인데, 상리하태(上離下兌) 즉 상괘(上卦)와 하괘(下卦)가 위로 치솟는 불과 아래로 스며드는 늪으로 되어 있어 서로 어긋나는 상황을 상징함.
♣ 화택천대[火宅泉臺]이승과 저승이라는 말이다. 화택(火宅)은 삼계화택(三界火宅)의 준말로 고통이 가득한 이 세상을 뜻한다.《法華經 譬喩品》 천대(泉臺)는 땅속의 묘혈(墓穴)을 가리킨다.
♣ 화토필[花吐筆]송(宋) 나라 강엄(江淹)이 일찍이 뛰어난 문장으로 유명하였으나, 꿈속에서 곽박(郭璞)에게 오색붓을 돌려준 뒤로는 재주가 상실되었다 한다.
♣ 화판[花判]당 나라 때 중서사인(中書舍人)들의 오화판사(五花判事)를 말한다.
♣ 화포[和炮]’포화(飽和)’와 같은 뜻임. 당 나라 양숙(梁肅)의 하소이상손사군인군시(賀蘇二常孫使君隣郡詩)에 “民樂其敎 且飽其和"가 있음.’炮’는 ‘飽’와 통용함.
♣ 화표[華表]옛날 교량이나 궁전, 능묘(陵墓) 등에 세운 거대한 돌기둥이다. 요동(遼東)사람 정령위(丁令威)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술을 배우고, 죽어 학이 되어 고향인 요동으로 날아와서 성문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搜神後記》
♣ 화표주[華表柱]무덤 앞에 있는 망주석으로, 요동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날아와서 앉았던 곳이다. 한 나라 때 요동 사람 정령위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그 뒤에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이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 하였다. 《搜神後記》
♣ 화표중래학[華表重來鶴]정령위(丁令威)는 원래 요동 사람이었는데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다가 뒤에 학으로 변하여 자기 고국 요동으로 날아가서 그곳 성문 화표주(華表柱) 위에 앉았었다. 《搜神後記》
♣ 화표지주[華表之柱]요동(遼東)의 정령위(丁令威)가 신선이 되어 갔다가 뒤에 학으로 변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화표(華表)의 기둥에 앉았다.
♣ 화표천년학[華表千年鶴]정령위(丁令威)의 고사를 말한다. 무덤 앞에 있는 망주석으로, 요동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날아와서 앉았던 곳이다. 한나라 때 요동 사람 정령위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그 뒤에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이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 하였다. 《搜神後記》
♣ 화표학[華表鶴]화표의 학(鶴)이란 곧 한(漢) 나라 때 요동(遼東)의 정령위(丁令威)란 사람이 영허산(靈虛山)에서 선술(仙術)을 배워 학으로 변하여 자기 고향에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앉았었다는 이야기가 도잠(陶潛)의 수신후기(搜神後記) 권1에 전한다.
♣ 화하도[花下倒]대단히 취한 것을 이름.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 “석양은 현산의 서쪽으로 지려 하는데 흰 두건 거꾸로 쓰고 꽃 아래서 방황하네[落日欲沒峴山西 倒著接▣花下迷]” 한 데서 온 말이다. 《李太白集 卷六》
♣ 화학[化鶴]화학은 학으로 변한 사람. 한(漢) 나라 때 요동에 사는 정령위(丁令威)가 도술을 배워 신선이 되었는데 천년이 지난 뒤에 학으로 변하여 그의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搜神後記 卷一》
♣ 화헌[華軒]높은 벼슬아치가 타는 수레를 말한다. 초헌(招軒).
♣ 화현[花縣]현(縣)의 소재지를 아름답게 일컫는 말이다. 진(晉) 나라 하양 영(河陽令) 반악(潘岳)이 고을 안에 온통 도리(桃李)를 심었으므로 ‘하양일현화(河陽一縣花)’라는 말이 생겨났던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白氏六帖 卷21》
♣ 화협훈[華協勛]순(舜)임금의 일명은 중화(重華). 요(堯)임금의 일명은 방훈(放勛)이다.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중화가 제에게 협화하였다[重華協予帝].” 하였다.
♣ 화형[花形]화형은 풍수설에서 산수(山水)의 발맥(發脈).
♣ 화호각곡[畫虎刻鵠]흉내를 내다가 제대로 안 됨. 후한(後漢) 마원(馬援)이 자기 조카 엄(嚴)과 돈(敦)에게, 용백고(龍伯高)를 배우다가 제대로 안 되더라도 이는 고니를 새기다가 제대로 안 되면 그래도 집오리 정도는 될 수 있는 격이어서 괜찮지만, 두계량(杜季良)을 배우려다 제대로 안 되는 날이면 이는 범을 그리려다가 되레 개를 그리는 꼴이 되어 안 된다고 하였음. 《後漢書 馬援傳》
♣ 화호로[畫葫蘆]모방해 본뜬다는 말. 송(宋) 나라 도곡(陶穀)의 문한(文翰)이 당대의 으뜸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철거하니 태조가 웃어 이르되, “듣건대 한림의 제서(制書) 초학이 다 전의 사람들의 옛 초본을 검사하여 사구(詞句)만 바꾼 것이라 하니, 이는 소위 본[樣]대로 호로박을 그린 것이다.” 하니 도곡이 시를 짓되, “우스워라, 한림 도학사는 해마다 본[樣]대로 호로박만 그리누나.” 하였다.
♣ 화호불성반위구자[畵虎不成反爲狗子]범을 그리다가 잘못하여 강아지가 됐다는 말.
♣ 화호불성호[畫虎不成虎]학문과 기예의 성취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이 조카인 엄돈(嚴敦)을 훈계하면서, “고니를 그리다 보면 오리와 비슷하게라도 되겠지만, 호랑이를 잘못 그리면 거꾸로 개처럼 되기 십상이다.[刻鵠不成尙類鶩 畫虎不成反類狗]”라고 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馬援傳》
♣ 화호유구[畵虎類狗]서툰 솜씨로 어려운 일을 하려다 도리어 잘못되는 것, 결과가 목적과 어긋난다는 뜻의 고사성어.
♣ 화홍옥백[花紅玉白]두목(杜牧)의 송이군옥시(送李群玉詩)에 “玉白花紅三百首 五陵誰唱與春風"의 글귀가 있음.
♣ 화후[火候]도가(道家)에서 단약(丹藥)을 소련(燒煉)할 적에 불의 열도(熱度)를 조절하는 것을 이르는데, 전하여 단약 고는 것을 가리킨다. 참동계의 주에, “옛날부터 단서(丹書)가 있어 화후(火侯)의 공용(功用)을 나타냈는데, 이것을 화기(火記)라 이른다.” 하였음.
♣ 화훈[華勛]요순(堯舜)처럼 훌륭한 임금. 요(堯)는 공[勛]이 크다 하여 방훈(放勛), 순(舜)은 요의 뒤를 이어 거듭 밝았다 하여 중화(重華)라 한 데서 온 말.
♣ 화희[和熹]한나라 장제(章帝)의 황후인 등씨(鄧氏)이니, 그는 그 아들인 화제(和帝)가 일찍 죽고 그 아들이 어린데 섭정이 되어 잘 운영해 갔었다.
♣ 확[臛]고깃국인데 나물이 들어간 것을 羹이라 하고 나물이 들어가지 않은 것을 臛이라 한
♣ 확금자불견인[攫金者不見人]돈을 움켜쥔 자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 명예나 이욕에 미혹된 사람은 도리를 저버리거나 눈앞의 위험도 돌보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 확삭옹[矍鑠翁]늙은 나이에도 젊은이처럼 원기가 왕성하여 용맹스러운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확삭은 용맹스런 모양. 후한(後漢) 때의 복파장군(伏波將軍)이었던 마원(馬援)은 나이가 많았는데도 당시 무릉(武陵)의 만족(蠻族)들이 강성하여 토벌할 만한 자가 없자, 자신이 출정(出征)할 것을 자원하였다. 광무제(光武帝)는 나이 많은 것을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자,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무용을 과시하는데 매우 늠름하였다. 광무제가 보고는 감탄하며 “확삭하도다. 이 노인이여[矍鑠哉是翁也]" 하고는 마침내 마원을 보내어 평정하였다. 《後漢書 馬援傳》
♣ 확상[矍相]확상은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의 성 안 궐리(闕里)의 서쪽에 있는 지명으로, 공자가 이곳에서 활쏘기를 하였다고 한다.
♣ 확상사[矍相射]확상은 지명인데, 공자(孔子)가 일찍이 문인들과 함께 확상의 채마밭에서 대사례(大射禮)를 행했던 데서 온 말이다. 《禮射義》
♣ 확상의[矍相儀]확상은 중국 산동성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지명. 확상포(矍相圃)라 함. 공자가 이 곳에서 활쏘기를 하였음. 《禮記 射義》
♣ 확상포[矍相圃]공자가 제자들과 활쏘기를 익혔다는 곳으로 산동(山東) 곡부현(曲阜縣) 궐리(闕里) 서쪽에 있는 지명이다. 《禮記 射義》
♣ 확호불발[確乎不拔]매우 든든하여 흔들리지 아니함.
♣ 확확[廓廓]공허한 모양
♣ 환[環]빙 둘려 끊어지지 않은 고리.
♣ 환각주인지[喚却主人知]주희(朱熹)가 이르기를, “서암(瑞巖)의 중[僧]은 매일 항상 스스로 자신에게 묻기를 ‘주인옹(主人翁)은 성성(惺惺)하는가?’ 하고, 또 스스로 답하기를, ‘성성하노라.’고 하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心經 卷一》
♣ 환갑[還甲]61세. 태어난 해의 갑(甲)이 다시 돌아옴(還). 회갑(回甲), 화갑(華甲)
♣ 환결[環玦]옛적에 신하가 죄를 얻어 쫓겨나면 국경에서 임금의 명령을 기다린다. 임금이 환(環)을 주면 돌아오라[還]는 것이요, 틈이 벌어진 결(玦)을 주면 영영 오지 말라[訣]는 것이다.
♣ 환골[換骨]탈태환골(奪胎換骨)의 준말. 뼈대를 바꿔 끼고 태(胎)를 바꿔 쓴다는 뜻으로, 옛사람이 지은 시문(詩文)의 취지를 취하여 어구(語句)나 결구(結構)만을 바꾸는 것.
♣ 환골법[換骨法]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신선술(神仙術)의 하나로서, 금단(金丹)을 삼켜 범골(凡骨)을 선골(仙骨)로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 환골탈태[換骨奪胎]뼈대를 바꾸고 태를 탈바꿈함. 얼굴이나 용모가 변하여 전보다 더 아름답게 됨. 옛 사람이 지은 시문의 뜻과 어구를 자기 것으로 소화한 뒤, 그것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시문을 지음. 남의 문장을 본떴으나 그 형식을 바꿈.
♣ 환과고독[鰥寡孤獨]홀아비⋅과부⋅고아⋅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사람.
♣ 환궁[還宮]환궁(還宮)은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오성과 육률과 십이율관은 돌아가면서 서로 궁이 된다.[五聲六律十二管還相爲宮]"고 한데서 온 말이다.
♣ 환궤[闤闠]환은 시원(市垣)이고 궤는 시(市) 밖의 문이다. 좌사(左思) 위도부(魏都賦)에 “設闤闠以襟帶"라 하였음.
♣ 환규[桓圭]환규는 육서(六瑞)의 하나로 공작(公爵)이 갖는 9촌(寸)의 홀(笏)을 말한다.
♣ 환기조[喚起鳥]지빠귀 과(科)에 속하는 새로, 밤 오경(五更)부터 날이 샐 때까지 운다고 한다.
♣ 환난상구[患難相救]근심과 재앙을 서로 구하여 줌.
♣ 환노훈[換爐熏]오래도록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눔을 뜻한다.
♣ 환도적신장[宦途積薪場]벼슬길. 장작을 쌓는 데 있어 나중에 쌓는 것을 위에 올려놓듯이 나중에 벼슬한 자가 선배보다 중용되고 선배는 항상 미관 말직에 있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한(漢)나라 급암(汲黯)이 무제(武帝)에게 말하기를, “폐하의 사람 쓰는 것은 섶 쌓는 것과 같아서 뒤에 온 놈이 위에 있습니다.” 하였다.
♣ 환동약[還童藥]나이는 늙었어도 얼굴이 동자(童子)같이 된다는 약을 말한다.
♣ 환득환실[患得患失]물건을 얻기 전에는 그것을 얻으려고 걱정하고, 얻은 후에는 잃지 않으려고 걱정한다.
♣ 환로적신[宦路積薪]나무를 쌓는 데 있어 나중에 쌓는 것을 위에 올려놓듯이, 나중에 벼슬한 자가 먼저 벼슬한 사람보다 중용되어 먼저 벼슬한 사람은 항상 미관 말직에 있음을 한탄한 것인데, 한(漢) 나라 때 급암(汲黯)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폐하께서 뭇 신하들을 쓰는 것은 마치 나무를 쌓는 것과 같아서 나중에 벼슬한 자가 윗자리에 있게 됩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汲黯傳》
♣ 환륜[奐輪]진(晉) 나라 문자(文子)의 집이 완공되었을 때, 대부인 장로(張老)가 그 으리으리한 규모를 보고는 “아름답다 높고 크며, 멋있다 없는 게 없네.[美哉輪焉 美哉奐焉]”라고 노래하였다. 《禮記 檀弓下》
♣ 환목어[還目魚]동해 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이른바 ‘도루묵’. 한문으로는 목어(木魚) 혹은 환맥어(還麥魚)라고 한다.
♣ 환문[桓文]춘추 시대에 패제후(霸諸侯)였던 제(齊) 나라 환공(桓公)과 진(晉) 나라 문공(文公)을 말한다.
♣ 환방[圜方]둥글고 모난 것.
♣ 환백[歡伯]환백은 기쁨을 가져다 주는 어른이라는 뜻으로, 술의 별칭이다. 역림(易林) 감지태(坎之兌)에 “걱정을 없애 주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술을 환백이라고 한다.[酒爲歡伯 除憂來樂]”하였다.
♣ 환부작신[換腐作新]낡은 것을 바꾸어 새 것으로 만듦.
♣ 환비[桓碑]나무를 깎아 석비(石碑)처럼 만들어 묘혈(墓穴)의 네 구석에 세워서 하관(下棺)을 하도록 만든 장치를 말한다.
♣ 환서위박[喚鼠爲璞]옛날 정(鄭) 나라 사람이 마른 쥐[乾鼠]를 박옥[璞]이라면서 주(周) 나라 사람에게 팔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환선[紈扇]한 성제(漢成帝)의 후궁 반첩여(班婕妤)가 총애를 받다가 뒤에 조비연(趙飛燕)에게 밀려나서 원행가(怨行歌)를 짓기를 “새로 재단한 제(齊) 나라 비단이, 희고 깨끗하기 눈과 같구나. 재봉하여 합환선을 만드니, 둥글기가 보름달 같네. ……부채를 상자 속에 버려두고, 은혜가 중도에 끊어질까 걱정일세.” 한 데서 온 말이다.
♣ 환선원[紈扇怨]부채가 여름에는 쓰이다가 가을이 오면 버려지는 것인데, 이것을 젊은 시절에 남자의 사랑을 받다가 나이들면 버림받는 여자에게 비유한 것이다.
♣ 환속[還俗]승려가 되었다가 다시 본가(本家)로 돌아오는 것을 말함. 송서(宋書)에, “사문(沙門) 혜휴(惠休)가 문장을 잘하므로, 세조(世祖)는 명하여 그로 하여금 환속하게 했다. 본래 성(姓)은 탕(湯)이었다.” 하였음.
♣ 환속절교인[還屬絶交人]혜강이 산도(山濤)에게 아들 혜소(嵇紹)의 일을 부탁한 것을 말한다. 혜강이 일찍이 산거원(山巨源)에게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絶交書)를 보냈었는데, 형장(刑場)에서 아들 혜소에게 말하기를 “거원이 있으니, 네가 고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巨源在 汝不孤矣]”라고 하였다. 산도는 그 뒤에 과연 혜소를 천거하여 비서승(祕書丞)으로 삼았다. 《晉書 嵇康傳ㆍ蒙求 中 嵇紹不孤》
♣ 환신[幻身]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영상과 같은 것이 사람의 몸이라는 불교의 용어(用語).
♣ 환심수초부[還尋遂初賦]원래 뜻했던 은거 생활로 되돌아간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손작(孫綽)이 천태산(天台山) 자락인 적성산(赤城山)에 푯말을 세우고 은거 생활을 즐기면서 ‘수초부(遂初賦)’를 지었는데, 뒤에 벼슬하다가 환온(桓溫)의 뜻을 거슬려 반대 상소를 올리자, 환온이 불쾌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수초부대로 살려 하지 않고 남의 국가에 대한 일을 간섭하는가.[何不尋君遂初賦 知人家國事邪]”라고 했던 고사가 전해 온다. 《晉書 孫綽傳》 참고로 손작의 ‘천태산부(天台山賦)’에 “赤城霞起而建標”라는 시구가 있다.
♣ 환아경[換鵝經]진(晉) 나라 때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거위를 매우 좋아하여, 도사(道士)의 집에 거위가 있음을 보고는 그것을 갖고 싶어하자, 그 도사가 “도덕경(道德經)을 써 주면 거위를 주겠노라.”고 하니, 왕희지가 마침내 도덕경을 써 주고 그 거위를 가져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환아서[換鵞書]진(晉) 나라의 왕희지(王羲之)가 평소 거위를 사랑하였는데, 하루는 산음 도사(山陰道士)에게 거위가 많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글씨를 써 주고 거위를 둥우리 째 가져왔다는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 환어[鰥魚]물고기의 이름인데, 이 물고기는 근심이 많아서 밤잠을 못 잔다고 한다.
♣ 환영[桓榮]후한 패군(沛郡) 용항(龍亢) 사람으로 자는 춘경(春卿)이다. 상서(尙書)에 조예가 깊어 수백 명의 문생을 가르쳤으며, 광무제(光武帝) 때 태자소부(太子少傅)와 태상(太常)을 지내고 명제(明帝) 때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 환영실유손[桓榮實有孫]후한 때 환언(桓焉)이 조부 영(榮)과 아버지 욱(郁)의 학행(學行)을 잘 계승했음을 말한다.
♣ 환위[環衛]대궐을 지키는 군사. 금위(禁衛)와 같다.
♣ 환유북산래[歡侑北山萊]주인과 손님이 흥겹게 음식을 서로 권한다는 것. 시경(詩經) 小雅 南山有臺에 “남산에는 삿갓풀 북산에는 명아주풀[南山有臺 北山有萊]"에서 나온 것임.
♣ 환이[桓伊]진(晉) 나라 사람. 음악을 잘하고 악기를 잘 다루었는데, 왕휘지(王徽之)가 청계(淸溪) 곁에다 배를 대놓고 있을 때 그 언덕 위를 환이(桓伊)가 지나가고 있었다. 왕휘지가 사람을 시켜 그에게 한 곡조 들려줄 것을 부탁하자, 이 때 환이는 이미 현귀(顯貴)한 신분이었지만 상대가 휘지인 것을 알고 수레에서 내려 세 곡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들 둘은 서로 생판 모르는 사이였으나 음악을 끝내고는 둘 사이에 한 마디 대화도 없이 그냥 수레에 올라 유연히 가버렸다. 《晉書 卷八十一》
♣ 환이[桓伊]진(晉)나라 초국(譙國) 질현(銍縣)사람으로, 젓대를 잘 불어 당시에 강좌(江左)에서 으뜸이었다 한다.
♣ 환이[桓伊]환이는 진(晉) 나라 사람으로 음악에 뛰어나서 강좌(江左)의 일인자로 일컬어졌는데, 그가 일찍이 청계(淸溪)를 지날 적에 왕휘지(王徽之)가 본디 지면(知面)도 아닌 처지에 사람을 시켜 그에게 한 곡조 연주해 주기를 청하자, 그는 선뜻 수레에서 내려와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젓대 세 곡조를 연주하고는 바로 수레를 타고 가버렸다고 한다. 《晉書 卷八十一》
♣ 환이[桓彝]환이는 진(晉)의 충신으로 자는 무륜(茂倫)인데 천성이 활달하고 조감(藻鑑)이 있었다. 반적(反賊) 소준(蘇峻)을 공격하다가 힘이 다했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고 살해를 당하였다. 《晉書 桓彝傳》
♣ 환이무쟁[桓伊撫箏]충신을 알아줄 이 없음을 한탄한 말이다. 진(晉) 나라 명장 환이가 임금 앞에서 쟁(箏)을 타면서 원시(怨詩)를 노래하기를 “임금 되기도 쉽지 않거니와, 신하가 되기는 참으로 어렵네. 충신한 일은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의심받는 걱정만 있다오[爲君旣不易 爲臣良獨難 忠信事不顯 乃有見疑患].”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八十一》
♣ 환저기[環滁記]송(宋) 나라 구양영숙(歐陽永叔) 즉 구양수(歐陽修)가 지은 ‘취옹정기(醉翁亭記)’를 말한다. 그 글 첫머리에 “저주(滁州)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모두가 산뿐이다.[環滁皆山也]”라고 했기 때문이다.
♣ 환정[宦情]벼슬살이를 하고싶은 욕망.
♣ 환제산여수[環滁山與水]제주는 중국에 있는 고을 이름인데,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의 취옹정기(醉翁亭記)에 “제주를 빙 둘러싼 것은 모두 산이다.[環滁皆山也]”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 환주[環柱]진시황(秦始皇)이 연(燕) 나라에서 보낸 자객(刺客) 형가(荊軻)의 칼에 쫓기어, 궁중에서 기둥을 돌며 피하던 고사를 인용하여 비유하였다.
♣ 환중[環中]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곳. 즉 시비(是非)를 초월한 절대의 경지를 말함. 《莊子 齊物論》
♣ 환중[環中]환중은 공허한 곳으로 시비를 초월한 절대적인 경지를 말하는데 장자(莊子)의 “피와 차를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을 도추(道樞)라고 한다. 문의 지도리는 환중을 얻어야 무궁한 것에 응할 수 있으니 시란 하나의 무궁한 것이며 비 또한 하나의 무궁한 것이다.[彼是莫得基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而應無窮 是一無窮 非亦一窮]"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莊子 庚桑楚ㆍ齊物論》
♣ 환천[還賤]공사천(公私賤)으로서 천역(賤役)을 면하였던 자를 천역으로 돌려보내는 것.
♣ 환천[環穿]왔다갔다하다.
♣ 환체[換遞]벼슬아치가 서로 교환됨으로 해서 체직되는 일.
♣ 환추[豢芻]곡식을 먹는 동물과 풀을 먹고 사는 동물로 맛있는 고기.
♣ 환한[孚渙汗]임금의 조서(詔書)나 칙명(勅命)의 반포를 비유한 말. 땀은 한번 나오면 다시 들어가지 못하듯이, 조서나 칙명도 한번 반포하면 다시 거두지 못하고 반드시 시행해야 하므로 이른 말이다.
♣ 환해[宦海]관계(官界)를 바다에 비유하여 환해(宦海)라고 부르는데, 관직에 있는 것은 험한 바다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풍파(風波)가 많아 승침(升沈)이 무상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다.
♣ 환형[還衡]수레멍에를 돌리다.
♣ 환호도강[懽虎渡江]후한 때 유곤(劉昆)이 강릉 태수(江陵太守)로 있을 적에 그의 인정(仁政)에 감화된 나머지 평소 호환(虎患)이 극심했던 그 고을에서 마침내 범들이 모두 새끼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멀리 가 버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七十九》
♣ 환호작약[歡呼雀躍]기뻐서 소리치며 날뜀
♣ 환혼[還魂]원래는 죽은 사람이 다시 소생하는 것을 말하는데, 과거시험에서 첫 심사에 낙제했다가 재차 심사에서 합격된 것을 말하기도 한다.
♣ 환환[洹洹]물이 흐르는 모양, 성한 모양
♣ 환환[桓桓]굳센 모양, 용맹스러운 모양
♣ 환환[歡歡]기뻐하는 모양
♣ 환환[渙渙]물이 성하게 흐르는 모양, 광택이 있는 모양
♣ 환환[奐奐]빛남, 밝은 모양
♣ 환환[丸丸]순하고 곧음
♣ 활계회종리지서[活計會從ꝃ地鼠]두더지는 땅을 마치 쟁기질하듯 뒤지는 것이므로, 전하여 농사지어 먹고사는 데에 비유한 말이다.
♣ 활락도[豁落圖]몸을 수양하는 방법이 적혀 있는 도서(道書)를 말함.
♣ 활연[豁然]문득, 갑자기.
♣ 활인원[活人院]전에 벼슬하던 문사(文士)로서 승문원(承文院)에 들어와 학관(學官)이 되었다가 이로 말미암아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된 사람이 많으므로, 사람을 다시 살리는 곳이라 하여 승문원의 별명이 된 말이다.
♣ 활활[滑滑]진흙이 미끄러운 모양
♣ 활활[活活]“활활”은 틀린 독음, 올바른 독음과 뜻은 “괄괄; 물이 기운차게 흐르는 소리, 미끄러운 것, 진창을 걷는 일”임.
♣ 황[簧]피리 등의 악기의 얇은 떨림판, 즉 리드(reed)이다. 혀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보통 갈대로 만든다.
♣ 황각[黃閣]한대(漢代)에 승상(丞相)이 나라 일을 보던 곳을 황각이라 불렀는데, 그곳 문을 누런 색으로 칠했었기 때문이다. 당(唐) 나라 때에는 문하성(門下省)도 황각이라 불렀다. 자각(雌閣)이라고도 하는 것은 옛날엔 노란 칠을 흔히 자황(雌黃)으로써 했기 때문이다.
♣ 황각조갱[黃閣調羹]의정부(議政府)에서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황각은 의정부의 별칭이고, 국을 끓인다는 것은 재상이 국가의 일을 다스리는 것을 비유한 말로, 서경(書經) 열명 하(說命下)에, “만약 국을 끓일 경우에는 너를 소금과 매실로 삼겠다.” 하였다.
♣ 황간[黃幹]황간은 주희(朱熹)의 사위이며 고제(高弟)로서 호는 면재(勉齋)이다. 주희가 일찍이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가 상례(喪禮)ㆍ제례(祭禮) 두 편을 황간에게 맡겨 이를 완성하게 하였으며, 임종시에 그에게 도통(道統)을 전했다. 《宋史 卷四百三十》
♣ 황감[黃甘]황감은 황감(黃柑)과 같은 것으로 밀감임.
♣ 황감동정[黃柑洞庭]감자[柑]는 동정(洞庭)에서 나는 것이 유명하다.
♣ 황감저작[黃甘抵鵲]중원(中原)에서는 귀중히 여기는 것을 변방에서는 천히 여긴다는 뜻으로 곤산(昆山)의 곁에서는 옥이 흔한 때문에 옥박(玉璞)을 까마귀나 까치에게 던져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황갑[黃甲]과거(科擧)의 갑과(甲科)에 급제한 사람을 이름. 갑과 급제자의 명단(名單)은 특히 황지(黃紙)에 썼던 데서 온 말이다.
♣ 황강[黃崗]일명 황강(黃岡)으로, 유배지(流配地)를 뜻하는 말이다. 송(宋) 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5년(1082) 즉 ‘적벽부(赤壁賦)’를 짓게 된 임술년(壬戌年)에 소동파(蘇東坡)가 그곳으로 귀양을 갔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 황강[黃岡]황주(黃州)의 별칭이다.
♣ 황강고사[黃崗故事]송(宋) 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연간에 소동파(蘇東坡)가 황강(黃崗)에 귀양갔을 때 그의 아우 자유(子由)도 균주(筠州)로 좌천되어 내려왔으므로 오랜만에 해후하여 함께 노닌 고사가 있는데, 소동파의 ‘감구시(感舊詩)’ 서문에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蘇東坡詩集 卷33》
♣ 황강유편[黃崗遺篇]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를 가리킨다. 황주(黃州)에 유배된 그가 송(宋) 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5년(1082) 즉 임술년에 양세창(楊世昌)과 함께 적벽(赤壁)에서 두 차례 뱃놀이를 하고 나서 그 감회를 전(前)ㆍ후(後)의 두 적벽부로 써내었다. 황강(黃崗)은 보통 황강(黃岡)이라고 하는데 바로 황주(黃州)를 뜻한다.
♣ 황강적[黃岡跡]황강은 호북성(湖北省) 황강산(黃岡山) 동쪽에 있는 황니판(黃泥坂)을 말한 것으로,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 “두 손이 나를 따라 황니의 판을 지났다.[二客從予 過黃泥之坂]"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황거[黃裾]수령(守令)이 행차할 때 앞을 인도하며 갈도(喝道)하는 졸노(卒奴)배.
♣ 황건적[黃巾賊]후한(後漢) 때 장각(張角) 등을 말한다.
♣ 황견[黃絹]아름다운 시문(詩文)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때 위(魏) 나라의 무제(武帝)가 양수(楊脩)와 함께 조아비(曹娥碑) 아래를 지나다가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양수에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양수가 안다고 하자, 무제가 “경은 내가 알아낼 때까지 말하지 말라.” 하였다. 30리를 더 가서 무제가 알아내었다고 하면서 양수에게 딴 종이에 뜻을 쓰게 하였다. 양수가 쓰기를, “황견(黃絹)은 색사(色絲)로 절(絶) 자이고, 유부는 소녀(少女)로 묘(妙) 자이고, 외손은 여자(女子)로 호(好) 자이고, 제구는 수신(受辛)으로 사(辭) 자이니, 절묘호사(絶妙好辭)입니다.” 하였는데, 무제가 쓴 것도 양수와 같았다. 《世說新語 捷語》
♣ 황견묘[黃絹妙]절(絶)의 파자(破子) 은어(隱語)로, 조조(曹操)가 일찍 조아비(曹娥碑) 아래를 지나는데 양수(陽修)가 좇았다. 비 등에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舊)란 8자가 쓰여 있거늘, 양수가 풀이하되, “황견(黃絹)은 색실이니 글자로 절(絶)자, 유부(幼婦)는 젊은 여자이니 글자로 묘(妙)자, 외손(外孫)은 딸의 아들이니 글자로 호(好)자, 제구(제舊)는 쓴 것을 받는 그릇이니 글자로 사(辭)자이니 이른바 절묘호사(絶妙好辭)란 말이다.” 하였다.
♣ 황견유부[黃絹幼婦]‘절묘(絶妙)’라는 두 글자의 은어(隱語)로, 아름다운 시문(詩文)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때 위(魏) 나라의 무제(武帝)가 양수(楊脩)와 함께 조아비(曹娥碑) 아래를 지나다가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양수에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양수가 안다고 하자, 무제가 “경은 내가 알아 낼 때까지 말하지 말라.” 하였다. 30리를 더 가서 무제가 알아 내었다고 하면서 양수에게 딴 종이에 뜻을 쓰게 하였다. 양수가 말하기를, “황견(黃絹)은 색사(色絲)로 절(絶) 자이고, 유부는 소녀(少女)로 묘(妙) 자이고, 외손은 여자(女子)로 호(好) 자이고, 제구는 수신(受辛)으로 사(辭) 자이니, 절묘호사(絶妙好辭)입니다.” 하였는데, 무제가 쓴 것도 양수와 같았다. 그러자 무제가 “나의 재주가 경에게 못 미치는 것이 30리이다.” 하였다. 《世說新語 捷語》
♣ 황계[璜溪]반계(磻溪)의 이칭. 태공 망(太公望)이 이곳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황옥(璜玉)을 얻었기 때문에 이렇게 일컫는다.
♣ 황계[荒鷄]삼경(三更) 이전, 즉 새벽이 되기도 전에 우는 닭으로, 그 소리는 보통 악성(惡聲)이라고 하여 불길한 조짐으로 받아들여졌다.
♣ 황계[黃鷄]진(晋)나라 조적(祖逖)이 밤에 유곤(劉琨)과 같이 자다가, 황계(荒雞)의 소리를 듣고 발로 유곤을 차서 일으키고 춤을 추면서, “이것은 나쁜 소리가 아니다. 황계는 새벽이 되기 전에 일찍 우는 닭을 말하는데 황계가 울면 난리가 난다.” 하였으니, 이는 조적이 한 번 시세를 타서 공명을 세울 큰 뜻이 있는 것이었다.
♣ 황계백일세쟁영[黃雞白日歲崢嶸]백거이(白居易)의 시(詩)에, “황계는 새벽을 재촉하고, 백일은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재촉한다.[黃鷄催曉丑時鳴 白日催年酉時沒]”하였다.
♣ 황계백일최[黃鷄白日催]백거이(白居易)의 ‘취가(醉歌)’에 나오는 “누런 닭은 새벽을 재촉하여 오전 두 시에 울고, 하얀 해는 해를 재촉하여 오후 여섯 시에 진다.[黃鷄催曉丑時鳴 白日催年酉時沒]”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白樂天詩後集 卷1》
♣ 황고산[黃孤山]황고산은 조선조 중종 때의 명필로 이름은 기로(耆老), 자는 태수(鮐叟), 본관은 덕산(德山), 고산은 그의 호다. 특히 초서를 잘 썼다.
♣ 황고집[黃固執]황고집은 평양인(平壤人) 황순승(黃順承)의 별명으로, 성품이 아주 강직하여 그 당시 사람들이 황고집이라 하였다. 어느 명절날[節日] 새벽에 말을 타고 성묘(省墓)하러 가다가 평양 보통문 밖에서 도적을 만나자 말[馬]을 주면서 “의복은 제사를 지내야 하므로 주지 못하겠다.” 하니, 도적이 황 고집인 줄을 알고 즉시 말을 돌려주고 달아났다고 한다. 《松岳集》
♣ 황곡[黃鵠]고니의 일종으로 한 번 날면 천리를 간다 한다.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황색을 띤 대조(大鳥)의 이름인데, 전하여 대재(大才)가 있는 사람에 비유한다.
♣ 황곡가[黃鵠歌]한 무제 때 강동왕(江東王) 건(建)의 딸 세군(細君)을 공주로 삼아 오손국(烏孫國)의 곤막(昆莫)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곤막이 늙은 데다 언어도 통하지 않자 공주가 비수(悲愁)에 젖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원컨대 황곡이 되어 고향에 돌아갔으면.[願爲黃鵠兮歸故鄕]”이라 하였다 한다. 《漢書 西域傳下 烏孫國》
♣ 황공로[黃公壚]진(晉) 나라 왕융(王戎)이 혜강(嵇康)과 완적(阮籍) 등과 청담(淸淡)을 하며 술을 먹었던 주점 이름이다. 세설(世說)에 “왕융(王戎)이 황공의 주로(酒壚)를 지나면서 객에게 이르기를 ‘내가 옛날에는 혜숙야(嵇叔夜)ㆍ완사종(阮嗣宗)과 함께 이 술집에서 실컷 취하며 즐겼는데, 이 두 사람이 죽은 뒤로는 이곳이 비록 가까우나 까마득하기가 산하(山河)가 막힌 것 같이 여겨진다.’고 하였다”. 하였다.
♣ 황공비략[黃公祕略]병법(兵法)에 능통했다는 말이다.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에게서 태공 병법(太公兵法)을 전수받아 한 고조(漢高祖)의 작전을 도왔던 고사가 있다. 《漢書 張良傳》
♣ 황공주로[黃公酒壚]죽림칠현(竹林七賢)인 왕융(王戎)과 혜강(嵆康), 완적(阮籍) 등이 질탕하게 마셔대던 술집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를 회상할 때 흔히 비유하는 표현이다. 혜강과 완적이 죽은 뒤 왕융이 상서령(尙書令) 신분으로 이곳을 지나가다가 옛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관직에 매인 자신의 처지를 탄식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傷逝》
♣ 황과[皇荂]옛날 가곡 이름. 《莊子 天地》
♣ 황관[黃冠]농부의 관. 도사(道士)가 쓰는 관. 전하여 도사를 지칭하기도 함.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농부는 황관을 쓰는데, 황관은 풀로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 황관귀경호[黃冠歸鏡湖]황관은 도사(道士)의 관인데, 당(唐) 나라 때 하지장(賀知章)이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도사가 되어 임금으로부터 경호(鏡湖) 한 굽이를 하사받아 그 곳으로 가서 은거했던 데서 온 말이다. 《唐書 卷一百九十六》
♣ 황구소아[黃口小兒]어린 아이라는 뜻. 참새 새끼의 황색 주둥이(黃口)에서 연유한 말.
♣ 황구아[黃口兒]참새의 새끼를 말한다.
♣ 황구요탁[黃口謠啄]악부시집(樂府詩集) 맹호행(猛虎行)에 “배고파도 맹호에게 붙여 먹지 않고 해 저물어도 참새에게 붙여 깃들이지 않는다.” 했는데, 자신의 청렴하지 못함을 이들도 싫어한다는 겸사로 인용한 듯하다.
♣ 황구첨정[黃口簽丁]黃口는 새 새끼처럼 어린아이의 입이 노랗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 어린아이라는 뜻 어린아이를 장정으로 군적(軍籍; 군인 명부)에 올림. 어린아이도 장정으로 군적에 올려 세금을 착취하던 조선말 탐관오리들의 횡포
♣ 황궁[黃宮]도가(道家)의 말로 머리[腦頂]를 이름.
♣ 황권[黃卷]책을 가리킨다. 옛날에 좀이 슬지 않도록 황벽(黃蘗) 나무의 즙을 짜서 서책에 발랐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 황권공부[黃卷工夫]황권은 옛날 좀을 막기 위하여 종이를 황색으로 물들여 책을 만들었으므로 경전(經傳)에 대한 공부를 말한다.
♣ 황권의장정[黃卷擬章程]경서(經書)의 교훈으로 자신의 법도를 삼을 것이라는 뜻이다.
♣ 황극[黃棘]나무 이름. 노란 꽃에 둥근 잎.
♣ 황극[皇極]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규범. 홍범(洪範)에 있는 말인데, “크게 중정(中正)한 도”라는 뜻이다.
♣ 황금대[黃金臺]대(臺) 이름인데, 전국 시대 때 연(燕) 나라 소왕(昭王)이 제(齊) 나라에 원수를 갚고자 천하의 현사(賢士)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역수(易水) 가에 쌓았다는 대(臺)로, 그 위에 황금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지금도 뒷사람이 쌓은 대가 있어 연경팔경(燕京八景)의 하나인 금대석조(金臺夕照)로 유명하다.
♣ 황금압[黃金鴨]누런 향로(香爐)를 이름. 서갱(徐鏗)의 시에, “香烟結霧籠金鴨”이라는 것이 보임.
♣ 황기[黃綺]하황공(夏黃公)과 기리계(綺里季). 진(秦)나라 말기에 상산(商山)에 들어가 숨어살던 이른바 상산사호(商山四皓) 중의 두 사람. 《高士傳》
♣ 황녕[黃寧]도교의 황정경(黃庭經)의 도를 수련하여 이루는 일.
♣ 황노직[黃魯直]황노직은 송(宋) 나라 때의 황정견(黃庭堅)을 말한다. 노직은 그의 자.
♣ 황당[黃堂]태수(太守)가 거처하는 청사(廳舍)를 가리킴. 옛날에 태수 청사의 벽을 자황(雌黃)으로 바른 데서 연유된 것이다. 《吳郡國志》
♣ 황당리[黃堂理]황당은 한(漢) 나라 때 황각(黃閣)을 일컫는 말로 곧 승상부(丞相府)를 말하며, 섭리는 직책을 잘 수행하여 천지(天地)를 조화(調和)한다는 뜻이다.
♣ 황당무계[荒唐無稽]말이나 행동이 허황되고 터무니가 없음
♣ 황대[璜臺]은의 마지막 왕 주가 쓰던 술 연못.
♣ 황대과[黃臺瓜]당나라 무후(武后)가 자기의 아들을 자꾸 죽이므로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황대 밑에 외를 심었더니 셋 따고 나중에는 넝쿨만 안고 돌아오네.” 하였다.
♣ 황대권만[黃臺捲蔓]황대(黃臺)는 언덕 이름. 당(唐)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태자 홍(弘)을 독살하고 차자인 현(賢)을 태자로 봉했는데, 이때 현이 고종(高宗)을 곁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감히 상(上)에게 말하지는 못하고 깊은 걱정에 빠진 나머지 황대고사(黃臺苽辭)라는 노래를 지어 악공으로 하여금 그를 늘 노래하게 하여 상과 후(后)가 느끼고 깨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가사 내용이, 익은 외를 하나 둘 다 따고 나면 끝에 가서는 덩굴을 걷어 안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되어 있음. 《唐書 建寧王倓傳》
♣ 황도[黃圖]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황도(黃圖)가 나오는데, 삼보궁관(三輔宮觀)ㆍ능묘(陵廟)ㆍ명당(明堂)ㆍ벽옹(辟雍)ㆍ교전(郊田) 등을 기록하였다.
♣ 황도[黃道]태양(太陽)이 운행하는 궤도(軌道). 천구(天球)의 황도(黃道)는 양 옆으로 각각 8도로서 도합 16도인데 그 구간을 황도대(黃道帶)라 한다. 해와 달과 주요 행성이 이 길로 운행된다고 함.
♣ 황도[黃道]해와 달이 다니는 길. 전(轉)하여 제왕이 다니는 길을 말하기도 한다. 진서(晉書) 제12권 천문지(天文志)에, “해에는 중도(中道)가 있고 달에는 구행(九行)이 있는데, 중도란 것은 황도(黃道)이며, 광도(光道)라고도 한다.” 하였다.
♣ 황도[皇圖]황도는 제왕(帝王)이 통치하는 판도(版圖)이다.
♣ 황도[黃道]황제의 의범(儀範)을 말한다.
♣ 황도일[黃道日]황도일은 음양도(陰陽道)의 측면에서 일을 거행하기에 가장 좋은 길일(吉日)을 말한다.
♣ 황독[黃獨]황독은 토란의 이명(異名). 옛날 형악사(衡岳寺)의 중 명찬선사(明瓚禪師)가 성품이 게을러 음식 찌꺼기를 먹는다 하므로 이필(李泌)이 이상하게 여겨 찾아가 보니, 화롯불에 토란을 굽고 있었다 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동곡현가(同谷縣歌)에 “황독은 싹이 돋지 않았는데 산에는 눈이 마구 퍼붓고[黃獨無苗山雪盛], 짧은 옷은 자주 당겨도 정강이를 못 가린다.[短衣數挽不掩脛]"하였다.
♣ 황두랑[黃頭郞]오행(五行)의 생극(生克)으로 보아 토극수(土克水)라 하여 토(土)는 황색(黃色)이므로 옛날에 배를 관리하는 벼슬아치들을 모두 누른 모자를 쓰게 하고 이름하여 황두랑(黃頭郞)이라고 하였음. 《漢書 鄧通傳》
♣ 황량[黃粱]인간 세상의 영욕(榮辱)이 한바탕 꿈처럼 부질없는 것을 가리킨다. 한단(邯鄲)의 노생(盧生)이 객사(客舍)에서 여동빈(呂洞賓)을 만나 자기의 곤궁한 신세를 한탄하였더니, 여옹이 베개 하나를 주며, “이것을 베고 누우면 뜻대로 되리라.” 하였다. 노생은 베개를 베고 누웠더니 모든 것이 소원대로 되어, 부귀공명(富貴功名)을 80년간 누리다가 깨고 보니 한바탕의 꿈이었는데, 여관 주인이 짓던 메조[黃粱] 밥이 채 익지도 않은 짧은 동안이었다 한다. 《枕中記》
♣ 황량몽[黃粱夢]황량몽은 곧 한단몽(邯鄲夢)과 같은 말이다. 황량은 누른 기장. 당 덕종(唐德宗) 때 심기제(枕旣濟)가 우언(寓言)으로 지은 침중기(枕中記)에서 나온 말로서, 인생의 부귀영화는 허무하다는 뜻으로 인용된다. 침중기에 의하면, 당 현종(唐玄宗) 7년에 매우 가난한 노생(盧生)이란 젊은이가 한단(邯鄲)의 객사에서 여옹(呂翁)이란 도사를 만나 그가 준 요술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그 베개 속으로 들어가 자기가 평소에 동경하던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꿈을 깨보니, 객사의 주인이 짓고 있던 기장밥이 아직 익지 않았다고 하였다.
♣ 황량미숙[黃梁未熟]당 나라의 침중기(沈中記)란 소설에 노생(盧生)이 한단(邯鄲) 여숙에서 도사(道士) 여옹(呂翁)을 만나 그가 주는 베개를 베고 꿈을 꾸어 출장입상(出將入相), 자손이 모두 영달(榮達), 80년의 호화를 누리다가 문득 깨니, 여숙 주인이 짓던 누른 조밥이 아직 익지 않았다.
♣ 황량불과편시증[黃粱不過片時蒸]부귀 공명이 덧없음을 비유한 말. 당(唐) 나라 때 노생(盧生)이라는 사람이 도사(道士) 여옹(呂翁)의 베개를 베고 잠을 잤는데, 좁쌀밥 한 번 짓는 동안에 온갓 부귀공명을 누린 꿈을 꾸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황량숙[黃粱熟]인간 세상의 부귀공명이 덧없음을 비유한 말. 당(唐) 나라 때 노생(盧生)이란 자가 도사(道士) 여옹(呂翁)의 베개를 빌어 잠을 잤더니, 메조밥을 한 번 짓는 동안에 부귀 공명을 다 누린 꿈을 꾸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황량일취몽[黃粱一炊夢]당(唐) 나라의 도사(道士) 여옹(呂翁)이 기장밥을 짓는 동안, 곤궁함을 탄식하는 노생(盧生)을 위해 부귀 공명을 누리는 꿈을 꾸게 해 주었던 고사로서, 인생의 영화(榮華)라는 것도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의미이다. 한단지몽(邯鄲之夢)이라고도 한다. 《沈旣濟 枕中記》
♣ 황량지몽[黃粱之夢]당(唐) 나라 때 노생(盧生)이란 사람이 도사 여옹(呂翁)의 베개를 빌어 잠을 잤더니, 메조밥을 한 번 짓는 동안에 부귀공명을 다 누린 꿈을 꾸었다는 고사로, 즉 부귀공명이 덧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 황려[黃驪]경기도 여주(驪州)의 고호. 여강(驪江)에서 누른 말과 검정 말이 나왔다 하여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 한다.
♣ 황로[黃壚]죽림 칠현(竹林七賢)들이 모여서 노닐던 황공주로(黃公酒壚)로, 보통 세상을 떠난 벗을 추억할 때 쓰는 표현이다. 《世說新語 傷逝》
♣ 황로태반시교친[黃壚太半是交親]벗들 대부분이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왕융(王戎)이 혜강(嵇康) 완적(阮籍)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함께 노닐다가, 그들이 죽고 난 뒤에 생전에 어울려서 술을 마셨던 황공(黃公)의 주점[黃壚]을 지나면서 옛 추억에 잠겼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傷逝》
♣ 황록[隍鹿]세상의 일은 진위(眞僞)가 서로 뒤섞여 있는 가운데 마치 환영(幻影)이나 꿈을 꾼 것처럼 득실(得失)이 무상(無常)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정(鄭) 나라 때 어떤 사람이 나무를 하다가 사슴을 잡아 해자[隍]에 감춰두고 기뻐하며 돌아왔는데, 얼마 후에 감춰둔 곳을 깜박 잊어 그 일이 꿈 속에서 일어난 일이거니 생각하고 중얼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다른 사람이 듣고, 그곳을 찾아가 보니 사슴이 있었다. 집으로 가져 와서 그의 아내에게 그 내력을 얘기하고는 “내가 사슴을 얻었으니 그 사람은 참 꿈을 꾼 것이다.” 하니, 그 아내가, “당신이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꿈 속에서 만난 것이며, 이제 사슴을 얻었으니 당신이 참 꿈을 꾸었소.” 하였다. 그날 밤에 사슴을 잃은 나무꾼이 정말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따라 사슴을 가져 간 사람을 찾아내어 송사를 일으켰더니, 재판관이 그 사슴을 각각 반분하도록 하였으며, 뒷날 정군(鄭君)이 이 얘기를 듣고, “그 재판관도 꿈 속에서 그 사슴을 반분하라 한 것이 아니냐.” 하였다는 고사(故事). 《列子 周穆王》
♣ 황룡부[黃龍府]거란(契丹)에서 설치한 부의 이름으로, 치소(治所)가 길림성(吉林省) 농안현(農安縣)에 있는데, 여기서는 효종이 볼모로 잡혀 가 있던 심양(瀋陽)을 가리킨다.
♣ 황룡부우주[黃龍負禹舟]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에 “우(禹) 임금이 남방을 순행하다가 강을 건너는데 황룡(黃龍)이 배를 짊어지니, 배가 움직이지 못하였다. 모두들 두려워했으나 우 임금은 웃으며 ‘내가 천명(天命)을 받았다.’ 하고는 태연하자, 황룡은 머리를 숙이고 도망쳤다.” 하였다.
♣ 황룡축[黃龍舳]황룡은 수(隋) 나라 때에 만든 군함(軍艦)의 이름이다.
♣ 황류[黃柳]이제 막 새순을 내놓은 버들가지를 말한다.
♣ 황류[黃流]황류는 강신할 때 땅에 붓는 술로 검정 기장으로 빚고 울금초(鬱金草)로 색깔을 낸 누런 색깔의 귀한 울창주(鬱鬯酒)를 가리킨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아름다운 옥 술잔에 황류가 가득 담겨 있네. 점잖은 군자님께 복록이 듬뿍 내리시길.[瑟彼玉瓚 黃流在中 豈弟君子 福祿攸降]”이라는 말이 나온다. 귀한 인재라는 뜻.
♣ 황릉묘[黃陵廟]옛날 순(舜)임금이 강남 지방을 순시하다가 호남(湖南) 지방 소상강(瀟湘江)가에 있는 창오산(蒼梧山)에서 죽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그의 두 왕비는 그가 죽은 데까지 쫓아갔으나, 그의 죽은 곳을 찾지 못하고 역시 그 지방에서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을 열녀라 하여 소상강가에다 사당을 지어놓고 제사지내었는데, 그 사당을 황릉묘(黃陵廟)라고 한다. 이비묘(二妃廟)
♣ 황릉사[黃陵祠]황릉묘(黃陵廟)는 순(舜)의 이비(二妃)의 사당인데, 순이 남순(南巡)하다가 창오산(蒼梧山)에서 죽자 이비는 소상강 가에서 슬피 울다가 죽었다.
♣ 황리몽[隍裏夢]옛날 정(鄭) 나라의 나무꾼이 사슴을 잡아 늪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藏諸隍中] 그 장소를 잃어버리고는 꿈속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뒤에 진짜 꿈속에서 그 사슴을 찾아 가져간 사람을 알아내고는 소송을 벌인 결과 반절씩 나눠 갖게 되었다고 한다. 《列子 卷3 周穆王》
♣ 황마[黃馬]누른 말. 양(梁) 나라 유준(劉峻)의 광절교론(廣絶交論)에 “황마가 달리는 듯한 농담, 벽계(碧鷄)가 치오르는 듯한 웅변이다.” 하였다.
♣ 황마[黃麻]임금이 내리는 조서(詔書). 당(唐)나라 때에, 내사(內事)에는 백마지(白麻紙), 외사(外事)에는 황마지(黃麻紙)에다 조서를 썼었음. 《翰林志》
♣ 황매[黃梅]음력 4월을 말함. 매실이 4월경이 되면 노랗게 익으므로 붙여진 이름임.
♣ 황매선사[黃梅禪師]황매선사는 홍인(弘忍)을 말하는데, 선종(禪宗) 제5조(祖)이다. 4조 도신(道信)에게 심인(心印)을 받았고 6조 혜능(慧能)에게 전하였다.
♣ 황매우[黃梅雨]매실이 누렇게 익을 무렵 내리는 비. 보통 6월 중순부터 7월 초순에 걸쳐 내리는 장마비를 말한다.
♣ 황매절[黃梅節]매실이 누렇게 익는 때인 초여름을 말한다.
♣ 황면[黃面]누른 얼굴은 궁한 선비의 꼴이다.
♣ 황면로[黃面老]황면로는 곧 도금(鍍金)한 불상(佛像)을 말한다.
♣ 황명[蝗螟]황명은 메뚜기나 이화명충 등 곡식을 해치는 곤충으로, 인간의 각종 탐욕을 비유한 말인데, 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에 “내경(內景), 외경(外景), 중경(中景)의 황정(黃庭)에서 자라는 가곡(嘉穀)에 황명(蝗螟)이 발생한다.”라는 말이 있다. 소식(蘇軾)의 시 ‘부용성(芙蓉城)’의 말미에 “안으로 수렴하여 삼정을 살피면서, 가곡에 황명이 생기지 않도록 하오시라.[願君收視觀三庭 勿與嘉穀生蝗螟]”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삼정(三庭)은 바로 황정(黃庭)이다. 《蘇東坡詩集 卷16》
♣ 황모[黃帽]누른 빛깔의 모자. 오행(五行)의 생극(生克)으로 보아 토극수(土克水)라 하여 토(土)는 황색(黃色)이므로 옛날에 배를 관리하는 벼슬아치들을 모두 누른 모자를 쓰게 하고 이름하여 황두랑(黃頭郞)이라고 하였음. 《漢書 鄧通傳》
♣ 황모어랑[黃帽漁郞]황색은 오행(五行)으로 쳐서 토(土)에 속하는데, 오행의 생극(生剋)으로 보아 토가 수(水)를 이기기 때문에 배를 만지는 자는 모두 황색모를 썼다고 한다. 《漢書 鄧通傳》
♣ 황모촌[黃茅村]초가집으로 이루어진 시골 마을. 주희(朱熹)의 매화를 읊은 시에, “나부산 아래 황모촌 마을에, 소공(蘇公)은 신선이 되어 가고 시혼만 남았구나.” 하였다.
♣ 황문교[黃門交]즉 黃門校로서 石崇의 호위병.
♣ 황미백미[黃米白米]태감(太監) 이광(李廣)이 공주(公主)가 병이 나서 약을 쓰다가 잘못되자 두려워서 자살하였다. 효종이 그의 집 안을 수색해서 뇌물을 바친 자의 이름을 적은 명단을 찾아냈는데, 황미(黃米)와 백미(白米)를 백 석을 바치고 천 석을 바쳤다고 기록된 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효종이 “이광이 하루에 얼마나 먹기에 이렇게 많은 쌀을 받았는가?”하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이것은 은어(隱語)입니다. 황미는 금(金)을 말하고 백미는 은(銀)을 말합니다.” 하였다. 《史略 卷九 孝宗敬皇帝》
♣ 황미옹[黃眉翁]동방삭(東方朔)이 홍몽(鴻濛)의 늪에서 노닐다가 별안간 황미옹을 만났는데, “나는 화식(火食)을 끊고 정기(精氣)를 흡수해 온 지가 이미 9천여 년이 된다. 3천 년 만에 한 차례 뼈를 바꾸고[反骨] 뇌를 씻었으며[洗髓], 2천 년 만에 한 차례 뼈를 찌르고[刺骨] 털을 갈았으니[伐毛], 나는 태어난 이후로 세 차례 뇌를 씻고 다섯 차례 털을 갈았다.” 하였다. 《西京雜記》
♣ 황반자[黃半刺]반자는 도호부(都護府)의 통판(通判), 즉 판관(判官)의 별칭이다.
♣ 황발[黃髮]아주 늙은 노인
♣ 황발송[黃髮頌]황발송은 시경(詩經) 노송(魯頌) 비궁(閟宮)의 “누런 머리털에 검버섯이 피다[黃髮台背]”에서 온 말인데, 노인의 흰머리가 다시 누렇게 되는 것은 곧 장수(長壽)의 조짐이라 한다.
♣ 황백[黃白]어린 아이와 죽은 사람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말함.
♣ 황백[幌帛]주례(周禮)에 “황씨(幌氏)가 실[絲]을 맡아, 삶고 빨아서 마전한다.” 하였다.
♣ 황벽[黃蘗]황벽은 산 이름인데 당 나라 단제선사(斷際禪師) 희운(希運)의 별칭임. 황벽종(黃蘗宗)ㆍ조계종이 있음.
♣ 황벽인배휴[黃蘗引裴休]황벽은 당(唐) 나라 단제선사(斷際禪師) 희운(希運)의 별칭임. 고승전(高僧傳)에 “희운이 배 상국(裵相國)의 청으로 완릉(宛陵)의 개원사(開元寺)에 있으면서 사방에서 모여드는 제자를 가르쳤는데, 배 상국도 이곳에서 희운에게 득법(得法)했다.” 하였다.
♣ 황변녹[隍邊鹿]꿈속에서 있었던 허무한 일을 말한다.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에, “들판에서 나무를 하고 있던 정(鄭) 땅 사람이 사슴을 만나서 잡은 다음 이를 죽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고 가져갈까 염려되었다. 이에 사슴을 끌어다가 해자 속에다 감추고는 풀로 덮은 다음 몹시 기뻐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감추어 둔 장소를 잊어버리고는 마침내 꿈속에서 있었던 일로 여겼다. 그 사람이 길을 내려오면서 그 일을 떠들어대자, 곁에 있던 사람이 듣고는 그 말에 따라 찾아가서 사슴을 얻었다.” 하였다.
♣ 황복[荒服]오복(五服)의 하나로, 중국 경사(京師)에서 2천 5백 리 떨어진 변원(邊遠)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주 본기(周本紀)에 “이만(夷蠻)은 요복(要服)이요, 융적(戎翟)은 황복(荒服)이다.”라는 말이 있다. 전(轉)하여 교화 밖의 만이(蠻夷)를 가리킨다.
♣ 황봉[黃封]임금이 하사한 술을 이름. 궁중에서 빚은 술은 누른비단으로 봉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궁중의 맛좋은 술을 가리킨다.
♣ 황봉주[黃封酒]임금이 하사한 술.
♣ 황분[皇墳]삼황(三皇)의 분서(墳書)라는 뜻으로, 즉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黃帝)의 글을 말한다. 《孔安國 尙書序》
♣ 황비[黃扉]승상, 삼공(三公), 급사중(給事中) 등 최고위 관원을 가리키는 말로, 그들의 문에 황색 칠을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 황비자달[黃扉紫闥]주황색 문은 재상의 집을, 보라색 문은 대궐을 가리킨다.
♣ 황비주획[黃扉籌畫]정승의 위치에서 수립한 정책을 말한다. 옛날 승상이나 삼공(三公) 등의 집무실에는 황색으로 문을 칠했는데, 이를 황비(黃扉)라 하였다.
♣ 황비피현[黃扉避賢]재상의 지위를 후배에게 물려주려고 했다는 말이다. 옛날에 재상 등 고관의 관청 문을 황색으로 칠했던 고사가 있다. 피현(避賢)은 현재(賢才)에게 길을 비켜 준다는 말이다.
♣ 황사[黃沙]황사는 사막(沙漠)이란 뜻이다. 왕창령(王昌齡)의 종군행(從軍行)에 “사막의 백번 싸움에 쇠 갑옷 뚫리었네[黃沙百載穿金甲]" 하였다.
♣ 황사[黃沙]황사옥(黃沙獄)의 준말로, 진(晉) 나라의 조옥(詔獄)의 이름으로, 감옥 속의 고통을 말한다.
♣ 황사랑[黃四娘]두보의 강반독보심화(江畔獨步尋花)라는 시에, “황사랑의 집에 꽃이 길에 가득하다[黃四娘家花滿蹊].”란 귀절이 있는데, 황사랑은 어떤 여자인 듯하며 두자미의 시에 실렸기 때문에 전하여졌다는 것이다.
♣ 황산[黃山]황산은 김유근(金逌根)의 호.
♣ 황산곡[黃山谷]황산곡의 성명은 황정견(黃庭堅)이요, 산곡은 그의 호이다. 그는 송(宋)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시대 사람이다.
♣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이성계(李成桂)ㆍ이두란(李豆蘭) 장군이 고려 우왕 6년(1380)에 지리산 근방 황산에서 왜적 아기발도(阿只拔都)군을 물리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선조 10년(1577)에 세운 승전비(勝戰碑)로,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雲峯面) 화수리(花水里)에 있었는데 왜정 때 파괴되고 지금은 파편만 남아 있다 한다. 김귀영(金貴榮)이 비문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쓰고 남응운(南應雲)이 각자(刻字)하였다.
♣ 황삼[黃衫]수(隋), 당(唐) 시대에 소년들이 입었던 화려한 황색 복장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황삼 입은 소년이여 자주 와서 즐기시오, 동으로 흐르는 물처럼 청춘도 그렇게 지난다오.[黃衫年少來宜數 不見堂前東逝波]”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0 少年行 2》
♣ 황상[黃裳]적처(嫡妻)를 뜻한다. 한편, 주역(周易) 곤괘(坤卦) 육오(六五)의 효사(爻辭)인데, 길상(吉祥) 또는 사람의 내면에 갖춘 덕을 뜻하기도 한다.
♣ 황상곤도[黃裳坤道]주역(周易) 곤괘(坤卦) 육오괘사(六五卦辭)에 “황상을 입었으니 매우 길하다.”고 하였는데, 그 주에 “황색은 중앙의 색이고 치마는 하의이니, 중도를 지켜 아래에 있으면 매우 길하다.”고 하였다.
♣ 황상길[黃裳吉]주역(周易) 곤괘(坤卦) 육오 효사(六五爻辭)에 “누른 치마라 크게 길하다.[黃裳元吉]" 하였는데, 곤괘는 여자(女子)의 상(象)인바, 황색은 중색(中色)이며 치마는 아래에 있는 것이므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분수를 알아 자신을 낮게 처하면 하다는 뜻이다.
♣ 황색상미[黃色上眉]상리형진(相理衡眞)에 “두 눈썹 사이에 자황색(紫黃色)이 떠오르면 반드시 기쁜 일이 있게 된다.” 하였다.
♣ 황석[黃石]한(漢) 나라의 개국공신인 장량(張良)에게 이상(圯上)에서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전수해 준 노인이 나중에 황석(黃石)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장량이 죽은 뒤에 그 황석과 함께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한,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장막 속에서 작전 계획을 수립하여, 일천 리 밖에서 승부를 벌써 결정지은 것은 자방의 공이다.[運籌策帳中 決勝千里外 子房之功也]”라고 칭찬한 고사가 있다.
♣ 황석공[黃石公]선인(仙人). 진(秦) 나라 말기에, 하비(下邳)의 이교(圮橋)에서 한 노인이 장량(張良)에게 병서(兵書) 일편(一篇)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왕자(王者)의 스승이 될 것이다. 13년 후에 네가 나를 제북(濟北)에서 만날 것인데, 곡성산(穀城山) 아래 누런 돌[黃石]이 바로 나일 것이니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留侯世家》
♣ 황석공비결[黃石公祕訣]장량이 황석공(黃石公)에게서 소서(素書)라는 비결(祕訣)을 받았는데, 그 글 속에, “성공하고 나면 물러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 황선[黃璿]자는 성재(聖在), 호는 노정(鷺汀), 본관은 장수(長水), 처신(處信)의 아들이다. 영조 4년 이인좌(李麟佐)의 변란 때 경상도 관찰사로서 역전(力戰)하여 공을 거두고 그날 밤에 죽었다.
♣ 황성[皇宬]명(明) 나라의 장서각(藏書閣)인 황사성(皇史宬)을 말한다. 이 집은 명 나라 궁중에 있었으며, 실록(實錄)과 비전(祕典)을 간직하였다.
♣ 황소[黃蘇]황소는 황정견(黃庭堅)과 소식(蘇軾)으로 송체(宋體)를 말한다.
♣ 황소송[黃小松]소송은 청 나라 황이(黃易)의 호.
♣ 황송당[黃松堂]송당은 황윤길(黃允吉)의 호이다.
♣ 황수[潢水]낙동강(洛東江)의 일명.
♣ 황수[黃綬]황수동인(黃綬銅印)의 준말로, 지방 수령이 차는 황색 인끈을 말한다.
♣ 황순우잠[黃純于潛]태현경(太玄經) 현(礥)의 “지하에 순수히 숨어 있다.[黃純于潛]”한 데서 온 말인데, 현(礥)은 곧 물(物)이 생(生)하기 어려움을 뜻하고, ‘지하에 순수히 숨어 있다’는 것은 바로, 동짓달에 양기(陽氣)가 지하에 숨어 있으면서 만물(萬物)의 근해(根荄)를 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
♣ 황씨[慌氏]옛날 옷 빛깔을 관장하던 오공(五工) 중의 하나. 흰 실과 비단을 손질하는 일을 맡았었다. 《周禮 考工記》
♣ 황아[黃芽]연단(鍊丹)의 결과로 얻게 되는 정화(精華)를 말한다.
♣ 황아백설[黃芽白雪]도가 양생술에서 비약(秘藥)으로 쓰는 연분(鉛粉) 등의 약물.
♣ 황양[黃壤]황양(黃壤)은 누런 흙인데, 여기서는 죽어서 땅 밑에 묻힌 것을 말한다.
♣ 황양[黃楊]황양목(黃楊木)은 빨리 자라지 않는 나무인데 윤달이 드는 해에는 다시 작아진다 한다. 그러므로 “황양은 윤달 드는 해에 액(厄)을 당한다[黃楊厄閏年].”는 고시(古詩)가 있다.
♣ 황양[潢洋]흐트러져 몸에 맞지 않음.
♣ 황양액윤년[黃楊厄閏年]윤년에는 황양목 즉 회양목이 액운을 당한다는 말이다. 이 시제는 소식(蘇軾)의 “뜨락의 초목 봄이 오면 무수히 자라건만, 오직 황양목은 윤년에 재앙을 당한다네.[園中草木春無數 只有黃楊厄閏年]”라는 시구에서 나온 것인데, 소식의 자주(自註)에 “속설(俗說)에 의하면, 황양목이 1년에 한 치씩 더디게 자라다가 윤년을 만나면 오히려 세 치가 줄어든다고 한다.”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11 監洞霄宮兪康直郞中所居四詠 退圃》
♣ 황어[黃魚]잉어 종류의 바닷물고기. 일생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지내고 산란기에만 하천으로 올라오는데, 비가 오려고 할 때면 높이 뛰어올랐다가 물 위에 떨어지곤 하며, 조밀하게 어군(魚群)을 형성하여 동행하는 습성을 보인다.
♣ 황여[皇輿]임금이 탄 수레.
♣ 황예[荒穢]거칠고 잡초만 무성하다.
♣ 황옥[黃屋]임금의 수레.
♣ 황옥거[黃屋車]황옥거는 노란 비단으로 덮개를 한 천자의 수레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천자를 가리킨 것이다. 즉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이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을 쳐들어와 인조가 피신해 있는 남한산성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있었던 일을 말한다.
♣ 황왕제패[皇王帝覇]중국 고대의 정치(政治)에 삼대(三代)는 순수한 왕도(王道)요, 한(漢)은 패도(覇道)를 섞었다 한다.
♣ 황우[黃虞]태평 성대를 이름. 중국의 전설시대인 5천년 전에 황제(黃帝)라는 임금이 있었고, 그 후에 우순(虞舜)이 있었으므로 그 둘을 합하여 황우(黃虞)라고 말한 것이다.
♣ 황우지혁[黃牛之革]주역(周易) 혁괘(革卦)에, “공고히 하는 데는 누런 소의 가죽을 쓰라.[鞏用黃牛之革]”하였다.
♣ 황우패[黃牛佩]한(漢) 나라 공수(龔遂)가 발해군(勃海郡)에 태수(太守)로 갔는데, 그곳에 도적들이 난리를 일으켰다. 공수는 그들을 귀순시키면서 검(劍)을 찬 사람에게, “너는 왜 소[牛]를 차고 있느냐.” 하고, 도(刀)를 찬 사람에게는, “너는 왜 송아지를 찼느냐.” 하였다. 그것은 검(劍)은 소 한 마리 값이고, 도(刀)는 송아지 한 마리 값에 해당하니, 그것을 팔아서 소를 사고 송아지를 사서 도둑질을 버리고 농사를 지으라고 교화시키는 말이다.
♣ 황우협[黃牛峽]산 모습이 황소처럼 생겼다는 장강(長江)의 협곡 이름이다.
♣ 황운[黃雲]벼나 보리가 누렇게 익어서 논밭에 그득히 서 있는 모습을 비유한 말이다.
♣ 황운[黃雲]왕의 어머니 또는 왕비를 상징한 것. 제요(齊堯)의 어머니가 두유(斗維) 들에서 태어났을 때 황색 구름이 그 위를 늘 덮고 있었다는 것이다. 《宋書 符瑞志》
♣ 황운십경추[黃雲十頃秋]벼 이삭들이 누렇게 익어 넘실대는 모습을 표현한 말로, 황금 들판과 같은 말이다.
♣ 황원락일원서오[荒原落日怨棲烏]반포(反哺)하는 까마귀를 보니 불효자의 심정이 더욱 절실해진다는 말이다.
♣ 황월[黃鉞]황월은 천자(天子)가 정벌(征伐)할 때 쓰는 황금으로 장식한 도끼. 서경(書經) 주서(周書) 목서(牧誓)에 “왼손으로는 황월을, 오른손으로는 백모(白旄)를 잡고 지휘하였다.”라 하였다.
♣ 황유[黃楡]누렇게 변한 느릅나무라는 뜻으로, 이 나무가 많은 북쪽 변방의 요새지를 가리킨다.
♣ 황유기명[黃楡丌銘]누른빛의 느릅나무로 만든 책상에 대한 명이다.
♣ 황유백초[黃楡白草]변새(邊塞)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를 가리킨다. 황유는 북방의 변경 지대에서 자라는 나무이고, 백초는 서역(西域)의 목초(牧草)로서 다 자라면 희게 색깔이 변한다고 한다. 참고로 당(唐) 나라 장적(張籍)의 시 양주사(涼州詞)에 “봉림관 물 하염없이 동쪽으로 흘러가고, 백초와 황유는 예순 해를 넘겼도다.[鳳林關裏水東流 白草黃楡六十秋]”라는 구절이 있다.
♣ 황의[黃衣]미관 말직(微官末職)을 가리킨다.
♣ 황의한록[皇矣旱麓]시경(詩經) 대아(大雅) 황의장과 한록장을 말함.
♣ 황이[黃耳]진(晋) 육기(陸機)의 애견(愛犬) 이름. 대통[竹筩]에 넣은 주인의 편지를 목에 걸고 몇 천리를 뛰어 육기의 고향 오도(吳都)에 가 전하고, 답장을 받아 가지고 낙양(洛陽)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한다.
♣ 황이균[黃耳菌]귀 모양으로 생기고 누른빛이 나는 버섯.
♣ 황익성[黃翼成]익성은 조선조 초기의 명재상인 황희(黃喜)의 시호(諡號)이다.
♣ 황익성공[黃翼成公]익성(翼成)은 조선 초기의 명상(名相)인 황희(黃喜)의 시호이다.
♣ 황자파[皇子陂]장안 남쪽 위곡(韋曲) 부근의 명승이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제오교 동쪽 물에 한을 흘려보내고, 황자파 북쪽 정자 시름이 서렸어라.[第五橋東流恨水 皇陂岸北結愁亭]”이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6 題鄭十八著作丈故居》
♣ 황작풍[黃雀風]음력 5월에 부는 바람을 말한다. 풍토기(風土記)에 “5월에 바람이 불어 더위를 식히는데 황작장풍이라 한다.[仲夏長風扇暑 名黃雀長風]" 하였다.
♣ 황장[黃腸]백목(柏木)의 황심(黃心) 부분의 판재(板材)로 만든 장구(葬具)인데, 즉 잣나무의 심재로 만든 관(棺)을 말한다.
♣ 황장사우게[黃腸思苃憩]백성들이 지방관의 선정(善政)을 앙모(仰慕)함을 비유한 말. 주(周) 나라 소공(召公)의 선정에 감격하여 그 지방 백성들이 그가 일찍이 쉬었던 감당(甘棠)나무를 소중히 여겼던 데서 온 말이다. 《詩經 召南 甘棠》
♣ 황정[黃精]식물(植物)이름. 약초로 쓰이고 특히 신선이 식량으로 먹는다고 함. 또는 보양강장제로 오래 먹으면 신선이 되어 장생(長生)한다고 함. 《博物志》
♣ 황정[黃鼎]청 나라 상숙(常熟) 사람으로 자는 존고(尊古), 호는 광정(曠亭)인데 만호(晩號)는 정구노인(淨垢老人)이다. 산수를 잘 그려 화품(畫品)이 초일하였으며 평생에 유람을 좋아하여 천하의 산수를 다 보았으므로 붓끝에는 모두 생기가 있었음.
♣ 황정[黃庭]황정(黃庭)은 마음을 말함. 황(黃)은 중앙의 색, 정(庭)은 사방의 중앙으로서, 우리 몸의 중심이 된다고 도가(道家)에서 주장하는 상단전(上丹田 뇌중(腦中))ㆍ중단전(中丹田 심중(心中))ㆍ하단전(下丹田 비중(脾中))을 말한다. 《雲笈七籤》
♣ 황정[黃庭]황정경(黃庭經)을 말한다. 도가(道家)의 경문(經文) 이름으로 네 종류가 있다. 위 부인(魏夫人)이 전한 것이라 하는 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 왕희지(王羲之)가 쓴 황정외경경(黃庭外景經), 그 밖의 황정둔갑연신경(黃庭遁甲緣身經), 황정옥추경(黃庭玉樞經)이다. 세상 사람이 위에 든 네 가지를 황정경이라 일컫는다.
♣ 황정[黃庭]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에 “내경(內景), 외경(外景), 중경(中景)의 황정(黃庭)에서 자라는 가곡(嘉穀)에 황명(蝗螟)이 발생한다.”라는 말이 있다.
♣ 황정경[黃庭經]도가(道家)의 경전(經傳)으로, 신선(神仙)의 장생법(長生法)을 말한 경(經)인데, 칠언시(七言詩)로 되어 있다.
♣ 황정경[黃庭經]도교의 경전에 대한 통칭. 운급칠첨(雲笈七籤)에, 황정 내경경(內景經), 황정 외경경(外景經), 황정 둔갑연신경(遁甲緣身經)의 세 이름이 나오며, 그밖에 황정 양신경(養神經), 황정 중경(中經), 황정 오장육부진인옥축경(五臟六腑眞人玉軸經) 등의 몇 가지 이름이 있다. 도가에서 말하는 양생(養生)의 글들로, 상청(上淸)의 진경(眞經)을 남악(南岳)의 위부인(魏夫人)이 그의 제자에게 주어서 여러 번 전하였는데, 뒤에 절강(浙江)을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 빠뜨려 버리고, 황정경 1편만 남아 전한다고 한다.
♣ 황정경[黃庭經]황정경은 노자황정경(老子黃庭經)의 준말로, 도교(道敎)의 경서를 가리킨다.
♣ 황정욱[黃廷彧]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으로 부원군이며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 황정환백아[黃庭換白鵝]글씨에 뛰어났음을 비유한 말. 진(晉) 나라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일찍이 산음(山陰)의 도사(道士)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써 주고 거위[鵝]와 바꾼 일이 있으므로, 이백(李白)이 그 고사를 전용하여, 글씨에 뛰어난 하지장(賀知章)을 보낸 시에 “경호의 흐르는 물 맑은 물결 넘실대니, 광객의 돌아가는 배에 흥취도 많아라. 산음의 도사를 만일 서로 만나며는, 응당 황정경 써주고 흰 거위와 바꾸리[鏡湖流水漾淸波 狂客歸舟逸興多 山陰道士如相見 應寫黃庭換白鵝].” 한 데서 온 말이다. 《李太白集 卷十六》
♣ 황제[黃虀]거친 채소.
♣ 황제승천[黃帝升天]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황제(黃帝)가 형산(荊山) 아래서 구리[銅]로 솥[鼎]을 주조하다가 솥이 다 이루어지자, 턱에 수염을 드리운 용(龍)이 내려와 황제를 맞으므로 황제가 그를 타고 하늘에 올랐다.” 하였다.
♣ 황종[黃鐘]십이율(十二律)의 하나인데, 곧 십이율의 기본음(基本音)이 된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중동(仲冬)의 달은 율이 황종에 해당한다.[仲冬之月 其音羽 律中黃鐘]" 하였다.
♣ 황종[黃鍾]황종은 12율(律) 가운데 양률(陽律)에 속하는 여섯 종류의 율 중 첫 번째 율이고, 대려는 여섯 음률(陰律) 중 네 번째 율로서, 음악이나 시문이 장엄하고 정대한 것을 비유할 때 곧잘 병칭해서 쓴다.
♣ 황종[黃鐘]황종은 옛 음악에서 12율(律)가운데 하나로 소리가 가장 크고 웅장한 것인데, 길이의 단위를 정할 때 황종 길이의 90분의 1을 1분(分)으로, 10분을 1촌(寸)으로, 10촌을 1척(尺)으로, 10척을 1장(丈)으로, 10장을 1인(引)으로 한다고 한다. 《漢書 律曆志》
♣ 황종[黃琮]황종은 황색의 서옥(瑞玉)으로 제사(祭祀)에 쓰는 옥임.
♣ 황종률[黃鍾律]후기법(候氣法)에 의하면, 밀실(密室) 안에 명주베[緹]를 깔고 십이 율관(十二律管)을 각 방위대로 안치한 다음, 각 율관 속에 갈대재[葭灰]를 채워 놓으면, 각 기(氣)가 이를 때마다 해당 율관의 재가 날리게 되는데, 특히 동지(冬至)의 기가 이르면 황종율관의 재가 날므로 이른 말이다.
♣ 황종손와부[黃鍾遜瓦缶]황종은 아악률(雅樂律)의 이름으로 질장군과는 크게 좋고 나쁜 차이가 있으므로, 전하여 좋고 나쁜 것에 대한 인식이 전도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
♣ 황종재동[黃鐘纔動]황종관이 움직인다는 것은 곧 황종률관(黃鐘律管)에 넣어둔 갈대재[葭灰]가 동지절(冬至節)에 이르러 날아 움직이는 것을 이른 말이고, 큰 소리가 고요하다는 것은 곧 송(宋) 나라 소옹(邵雍)의 동지시(冬至詩)에 “찬 물은 맛이 바야흐로 담담하고 지극히 큰 소리는 고요하기만 하네[玄酒味方淡 大音聲正希]” 한 데서 온 말이다.
♣ 황종해우이[黃鍾駭牛耳]황종은 현자(賢者)에 비유한 말이고, 황소 귀는 곧 사이비의 소인에 비유한 것이니, 즉 현자가 소인을 증오하는 뜻이다.
♣ 황주[皇州]제도(帝都) 즉 서울을 말함.
♣ 황주[黃紬]황주는 황색 명주 이불을 말하는데, 송 태조(宋太祖)가 일찍이 한 현령(縣令)에게 경계하기를 “황주 이불 속에 늦게까지 누워서 직무를 폐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했다 한다.
♣ 황주고각[黃州鼓角]황주는 중국 호북성(湖北省)의 지명이고 고각은 군중에서 사용하는 북과 나팔이다. 소동파 시에 “황주의 고각소리 그 또한 다정하다. 남쪽으로 날 보내 먼 길 아니 마다했네[黃州鼓角亦多情 送我南來不辭遠]"라고 하였다.
♣ 황주피[黃紬被]누런 명주 이불을 말함. 송 태조(宋太祖)가 일찍이 한 현령(縣令)에게 이르기를 “근신하여 황주피(黃紬被) 속에 누워서 청사를 비우지 말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황죽[黃竹]주 목왕이 사냥을 나가서 지었다는 노래 이름.
♣ 황죽가[黃竹歌]주 목왕(周穆王)이 황대(黃坮)의 평택(苹澤)에서 사냥할 때 날씨가 몹시 춥고 우설(雨雪)이 퍼부어 얼어죽은 사람이 있음을 듣고, 애절한 뜻을 노래한 3장(章)의 황죽시(黃竹詩)를 이름이다.
♣ 황중정색[黃中正色]청(靑)ㆍ적(赤)ㆍ흑(黑)ㆍ백(白)ㆍ황(黃)의 오색을 각각 사방(四方)과 중앙에 배열하면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중앙은 황색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오색을 오방(五方)에 배열하는 것은 오행설(五行說)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데, 황색은 중앙의 토(土)로 가장 존귀하게 보아 황제의 일용복식(日用服飾)이 모두 황색으로 되어 있다.
♣ 황지[黃紙]임금의 조서(詔書)를 누른 종이에 쓰므로, 전하여 임금의 조서를 말한다.
♣ 황지서[黃支犀]황지(黃支)는 남해(南海)에 있었던 나라다. 한서(漢書) 평제기(平帝紀)에 “황지국에서 무소를 바쳤다.” 하였다.
♣ 황지제명[黃紙題名]과거에 급제하여 관원으로 임명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조서(詔書)를 내리거나 이부(吏部)에서 전형(銓衡) 결과를 위에 보고할 적에는 황색 종이를 사용하였다.
♣ 황진[黃陳]송(宋) 나라의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를 가리킨다.
♣ 황진도원[黃眞桃源]황진은 무릉 도원(武陵桃源)을 처음 발견했다는 어부 황도진(黃道眞)을 가리키며, 도원(桃源)은 호남성(湖南省) 도원현(桃源縣) 도원산에 있는데,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폭포가 있어 선경(仙境)으로 칭하게 되었다.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진(晉) 나라 태원(太元) 때에 무릉(武陵)에 어부가 시내를 따라 가다가 이 도원에 이르러 보니 마치 선경과 같았다. 그는 그곳을 내려왔다가 다시 찾으려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하였는데, 이는 진(秦)의 난리를 피하여 들어간 사람들이라 한다.
♣ 황창랑[黃昌郞]황창랑은 신라 어느 대의 사람인지 모르나,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그가 여덟 살 난 어린애로써 신라왕과 꾀하여 백제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백제 저자에 가서 검무를 추니 저자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검무를 추라 하니, 창랑이 그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 한다.
♣ 황천[皇天]하늘의 경칭(敬稱).
♣ 황천벽락양망망[黃泉碧落兩茫茫]당 나라 백락천(白樂天)의 장한가(長恨歌)에, “양귀비(楊貴妃)의 혼령이 있는 곳을 두루 찾을 때에 위로는 푸른 창공, 아래로는 황천(黃泉), 두 곳이 망망(茫茫)하여 다 볼 수 없다[上窮碧落下黃泉 雨處茫茫皆不見].”란 구절이 있다.
♣ 황초[皇初]개벽(開闢) 할 때, 즉 태고(太古) 시대를 말한다.
♣ 황초[黃初]삼국(三國) 시대 위 문제(魏文帝; 曹丕)의 연호로, 이 연간에는 특히 훌륭한 시문가(詩文家)가 많아 황초체(黃初體)라는 시체(詩體)가 이룩되기도 했다.
♣ 황초체[黃初體]황초는 위 문제(魏文帝)의 연호이므로, 즉 황초 연간의 시체(詩體)를 이른 말이다.
♣ 황총상미[黃摠上眉]돌아갈 생각에 기쁜 기색을 띤다는 뜻이다. 옛날의 점치는 법에서 누런 기운이 미간에 생기는 것은 공경(公卿)이 될 상으로 보아 아주 좋은 조짐으로 여겼다. 《太平御覽 卷364》
♣ 황총요성[荒塚遼城]요동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도를 닦아 신선이 된 뒤 천 년 만에 학을 타고 고향 땅에 돌아왔는데, 어떤 소년이 활을 들고서 쏘려고 하자 공중을 배회하면서 “성곽은 여전한데 사람들은 다르나니, 어찌 도를 안 배우고 무덤만 저렇게 즐비한고.[城郭如古人民非 何不學仙塚壘壘]”라고 말하고는, 하늘 높이 날아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搜神後記 卷1》
♣ 황추포[黃秋浦]황추포는 조선 선조(宣祖) 때 사람 황신(黃愼), 추포는 그의 호. 그가 선조 28년(1595)에 명(明) 나라 책봉사 이종성(李宗城)을 따라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바람을 만나 물길이 험하므로 바다 귀신에게 맹세하는 글[誓海文]을 지어 고하고 제사지냈다. 그의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8월 25일 기사에 자세하다.
♣ 황침[黃綅]지방 수령은 구리 도장에 노란 인끈을 찬다고 하여 수령을 뜻한다.
♣ 황파[黃把]인삼(人蔘) 철에 외인이 몰래 들어와 인삼을 캐어 가는 것을 막는 한편 인삼을 캐어 모으기 위하여 강계(江界) 일대에 나누어 보내는 군대. 인삼의 열매가 붉어진 때[丹節]에 보내는 것으로 단파라 하고, 인삼 잎이 노래지기 시작할 때[黃節]에 보내는 것으로 황파라 한다.
♣ 황패[黃霸]한(漢)의 순리(循吏). 한(漢) 나라 때 양하(陽夏) 사람으로 영천 태수(潁川太守)가 되어 청렴한 관리로 이름을 얻었다. 무제(武帝)의 말기부터 벼슬하기 시작하여 여러 지방관(地方官)을 거치는 동안, 치적이 천하의 제일로 알려졌고, 뒤에 벼슬이 승상(丞相)에 이르렀으며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다. 《漢書 循吏 黃霸》
♣ 황표정사[黃標政事]단종(端宗)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정사(政事) 때에는 법에 따라 망단자(望單子)에 세 사람의 이름을 적기는 하되, 의정부(議政府)와 이조(吏曹) 또는 병조(兵曹)의 당상관(堂上官)들이 의논하여, 쓸만한 사람을 가려서 한 사람의 이름에 미리 황지(黃紙)로 표를 붙여서 입계(入啓)하면, 임금은 표가 붙어 있는 사람의 이름에 낙점(落點)만 하였다. 낙점은 본디 임금의 뜻을 표명하여 재결(裁決)하는 것인데, 신하에 의하여 미리 정해지고 임금은 다만 붓으로 점을 쳐서 형식만을 갖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와 같은 변칙적인 인사행정을 가리켜 황표정사라 하였다. 황표정사는 이듬해 3월부터 없어졌다.
♣ 황풍[皇風]임금의 덕(德)을 아름답게 일컫는 말이다.
♣ 황하[黃河]중국 제2의 대하(大河)인데, 황하수가 맑아지면 성인(聖人)이 난다는 전설이 있다.
♣ 황하기일징[黃河幾日澄]혼탁한 세상을 탄식한 말이다. 황하는 원래 혼탁한 물인데, 옛말에 “황하가 천 년 만에 한 번 맑아지고,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聖人)이 나온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황하서류자곤륜[黃河西流自崑崙]한 무제(漢武帝) 때 장건(張騫)이 서역(西域)과 통한 뒤로 계속 사신이 왕래하였는데, 한서(漢書) 장건전(張騫傳)에 “한 나라 사신이 황하의 근원인 끝까지 가 보니, 그 산엔 옥이 많았으므로 캐 왔다. 천자가 옛 도서(圖書)를 상고해 보니 황하수가 나오는 산은 곤륜산(崑崙山)이다.” 했으므로 한 말이다.
♣ 황하소식[黃河消息]어질고 성스런 임금이 나와 태평 성대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송사(宋史) 악지(樂志)에 “백성이 편안하고 풍속이 좋아지면 황하수가 맑아지고 바닷물도 조용하다.” 하였다.
♣ 황하재보[黃河再報]황하수(黃河水)가 누렇고 탁한데, 천 년(千年)만에 한 번씩 맑으면 반드시 성군(聖君)이 나서 태평성대(太平聖代)가 온다는 말이 있다.
♣ 황하제일천[黃河際一千]황하(黃河)는 대단히 탁한 강물이다. 그러나 그 물이 1천 년에 한 번씩 맑아지고, 맑아지면 성인이 나서 세상을 지극히 태평하게 다스린다고 하였다.
♣ 황하청유사[黃河淸有俟]황하는 진흙과 모래가 많이 끼어 물이 항상 혼탁하므로 옛적에는 황하가 맑아지면 상서로운 일로 여겼음. 좌전(左傳) 양공(襄公) 8년 조(條)에 “俟河之淸 人壽其何"라는 말이 있는데 시기(時機)의 만나기 어려움을 말한 것임. 습유기(拾遺記)에 “황하는 천년만에 한 번 맑는다.” 하였음.
♣ 황하해탁[黃河解濁]황하수는 천 년에 한 번쯤 맑아진다 하는데, 성인이 나오면 맑아진다 한다.
♣ 황학루[黃鶴樓]신선 자안(子安)이 황학을 타고 찾아왔었다는 누각으로, 지금의 중국 호북(湖北) 무한시(武漢市) 사산(蛇山) 장강(長江)가에 있었다 한다. 경치가 아름다워 고금의 수많은 시인 묵객이 그곳을 찾아 경치를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唐) 이백(李白)이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남방으로 쫓겨가던 도중 황학루에 올랐던 일이 있다.
♣ 황학루[黃鶴樓]호북성(湖北省) 무창현(武昌縣) 서쪽 황학기(黃鶴磯) 위에 있는 누대로 양자강과 한수(漢水)를 굽어볼 수 있고 천리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보응록(報應錄)에 “강하군(江夏郡)에 신씨(辛氏) 한 사람이 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어느 날 남루한 옷차림의 한 노인이 와서 술을 청하자 두말 없이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주었다. 이렇게 반년 동안 계속하였는데, 하루는 그 노인이 와서 술값을 갚아야겠다고 하면서 그 집 벽에다가 황학(黃鶴)을 그려 주었다. 술 취한 사람이 탁자를 치며 노래하자 이 그림 학이 나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이를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므로 신씨는 큰 돈을 벌게 되었다. 하루는 그 노인이 다시 와서 피리를 불자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왔고, 노인은 이어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신씨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황학루를 세웠다.” 하였다.
♣ 황학유선[黃鶴遊仙]사람의 죽음을 뜻함. 촉(蜀) 나라 비문위(費文褘)가 신선이 되어 황학을 타고 황학산에서 쉬어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황향[黃香]가난한 집안에서 겨울에는 자기 몸의 체온으로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침상에서 시원하게 부채를 부쳐 드리는 등 극진하게 어버이를 모셨다는 후한(後漢)의 효자 이름이다. 《東觀漢記 黃香》
♣ 황향온정[黃香溫凊]온정은 아들이 어버이를 봉양함에 있어 겨울에는 따습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드리는 것으로, 전하여 어버이를 효성으로 봉양하는 것을 이르는데, 후한(後漢) 때 황향(黃香)이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아버지를 섬기면서 항상 여름이면 부친의 와상과 베개에 부채질을 하여 시원하게 하고, 겨울이면 자신이 부친의 이부자리 속에 먼저 드러누워 자리를 따습게 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八十》
♣ 황형영자[煌螢映字]진(晉)의 손강(孫康)이 등유(燈油)가 없어 눈[雪]빛을 이용하여 글을 읽었던 고사를 인용하였다.
♣ 황홀[恍惚]가누지 못하다. 정신이 아득하다.
♣ 황홀[怳惚]어렴풋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다는 뜻에서 즉 도(道)를 가리킨 말이다.
♣ 황홀[荒忽]정신이 아득한 모양. 아득하다.
♣ 황화[皇華]사신 행차를 말함. 시경(詩經) 소아(小雅) 황황자화(皇皇者華)의 “皇皇者華 于彼原隰 駪駪征夫 每懷靡及"에서 나온 말임.
♣ 황화[皇華]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인 황황자화(皇皇者華)의 약칭으로, 곧 천자의 사신을 일컫는 말이다. 황황자화서(皇皇者華序)에 “황황자화는 임금이 사신을 보낼 적에 예악(禮樂)으로써 보내는 것이니, 멀리 가서 빛냄이 있을 것을 말한다.” 하였다.
♣ 황화곡[黃華曲]황화는 중국 조(趙) 나라 서울 한단(邯鄲)에 있는 산 이름으로 그 주위의 민간에서 부르는 평범한 곡이다. 백악천시집(白樂天詩集) 권2 속고시십수(續古詩十首)에 “한단에서 창녀를 진상했는데 황화라 그 곡조를 능히 불렀네[邯鄲進倡女 能唱黃華曲].” 하였다.
♣ 황화오백년[黃花五百年]장한(張翰)의 시(詩)에, “누른 꽃이 마치 금을 뿌려놓은 것 같다[黃花如散金].”는 명귀(名句)가 있다. 이백(李白)의 시에, “장한의 황화귀는 풍류 오백 년이로다[張翰黃花句風流五百年].” 한 귀가 있다. 그것은 장한과 이백의 사이가 오백년이 된 것이었다.
♣ 황화재[皇華才]황화는 본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인데, 사신으로 가서 시를 짓는 재주를 말한다.
♣ 황화절[黃花節]9월 9일의 중양절(重陽節)을 말한다.
♣ 황화집[皇華集]명 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올 때 접반관(接伴官)과 화답한 시집(詩集)이다. 압구정(狎鷗亭)은 조선 세조(世祖) 때 한명회(韓明澮)가 지은 정자인데, 정자의 이름을 우리나라에 온 중국 사신 예겸(倪謙)이 지었으며, 그 후 자주 중국 사신을 압구정에서 연회하면서 시를 화답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일컬은 것이다.
♣ 황화취죽본비진[黃花翠竹本非眞]화엄좌주(華嚴座主)가 대주화상(大珠和尙)에게 묻기를 “선사(禪師)께서는 어찌하여 푸른 대는 모두 법신(法身)이요, 누런 꽃은 반야(般若)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까?”하니, 대주화상이 대답하기를 “법신은 형상이 없으므로 푸른 대에 응하여 상(象)을 이루는 것이요, 반야는 앎이 없으므로 누런 꽃을 대하여 상(相)을 드러내는 것이지, 저 누런 꽃과 푸른 대에 의해서 반야와 법신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指月錄》
♣ 황화회미급[皇華懷靡及]황화는 곧 사신(使臣)을 가리킨다. 시경(詩經) 소아 황황자화(皇皇者華)에 “빛 어려 환한 꽃은 언덕이며 진벌에 피어 있네. 부지런히 달리는 사나이는 행여 못미칠까 걱정일세.[皇皇者華 于彼原濕 駪駪征夫 每懷靡及]" 한 데서 온 말이다.
♣ 황황[洸洸]물이 흘러서 어떤 곳에 이르는 모양
♣ 황황[遑遑]마음이 몹시 급하여 허둥지둥하는 모양, 갈 곳 없이 헤매는 모양.
♣ 황황[徨徨]방황하는 모양, 어슷거리는 모양
♣ 황황중니[遑遑仲尼]황황(遑遑)은 마음이 몹시 급하여 허둥대는 모양. 후한서(後漢書) 소경전(蘇竟傳)에 “중니(仲尼)는 황황하였고 묵자(墨子)도 황황하였으니 매우 사람을 걱정해서이다.”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국가나 백성을 위하여 몹시 노력한 공자를 닮겠다는 뜻이다.
♣ 황황특달천화연[煌煌特達泉火然]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사단(四端)을 확충하고, 발달시키기를 불이 처음 타듯, 샘물이 처음 흘러나오듯 하라.” 하였다.
♣ 황회원[黃會元]회원은 황여일(黃汝一)의 자이다.
♣ 황효[黃驍]여주(驪州)의 고호인 황요(黃饒)의 착오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 황효[黃驍]황효는 중국 절강성에 있는 지명으로 진(晉)의 명사 사영운(謝靈運)이 일찍이 이곳의 원이 되었다.
♣ 홰홰[翽翽]퍼덕퍼덕. 날개치는 소리
♣ 회[會]30운을 1회라 한다. ☞ 원회운세(元會運世)
♣ 회[會]박자. 리듬.
♣ 회가[回軻]안회(顔回)와 맹가(孟軻)를 합칭한 말이다.
♣ 회거[回車]정신을 차려 제 길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옛날 음악을 금기시 했던 묵자(墨子)는 고을 이름이 조가(朝歌)라는 것을 알고 수레를 돌렸으며, 효자로 유명한 증자(曾子)는 승모(勝母)라는 이름의 고을을 만나자 수레를 돌렸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魯仲連鄒陽列傳》
♣ 회거질어[回車叱馭]한(漢) 나라 왕양(王陽)이 익주 자사(益州刺史)로 부임할 때 공래산(邛郲山)의 구절판(九折阪)을 넘으면서 산길이 너무 험한 것을 보고는 “어버이에게 받은 이 몸을 가지고 어찌 이 험로(險路)를 자주 왕래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얼마 뒤에 병을 핑계 대고 사직하여 장안으로 수레를 돌렸는데, 뒤에 왕존(王尊)이 익주 자사로 부임할 때에는 구절판에서 마부를 꾸짖으며 “말을 힘차게 몰아라. 왕양은 효자지만 왕존은 충신이다.”라고 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王尊傳》
♣ 회거피조가[回車避朝歌]음악을 금기로 여겼던 묵자(墨子)가 조가(朝歌)라는 고을을 지나게 되자 이를 피하여 수레를 돌렸다는 ‘회거피조가(回車避朝歌)’의 고사가 전한다. 《漢書 鄒陽傳》
♣ 회검[會劍]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명검이 서로 헤어졌다가 다시 합쳐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張華傳》
♣ 회계금일[會稽今日]고향 땅의 태수(太守)가 되었음을 뜻함. 한 무제(漢武帝) 때 주매신(朱買臣)이 처음 대단히 곤궁했다가 뒤에 엄조(嚴助)의 천거를 받아 고향인 회계의 태수가 되었는데, 이 때 무제가 그에게 “부귀(富貴)하여 고향에 가지 않으면 마치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면서 회계태수를 제수했었다. 《漢書 卷六十四》
♣ 회계산[會稽山]춘추 시대 월왕 구천(越王句踐)이 오왕 부차(吳王夫差)에게 대패하여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에 올라가 머물렀던 일이 있다.
♣ 회계산예[會稽山瘞]우(禹)의 무덤. 우가 순행하다가 회계산(會稽山)에 이르러 붕서했다고 함. 《史略》
♣ 회계서갑[會稽棲甲]춘추 시대 월왕 구천(越王句踐)이 오왕 부차(吳王夫差)의 공격을 받고 부초(夫椒)에서 패하여 남은 군대를 이끌고 회계산(會稽山)으로 올라가 주둔했던 고사에 비유한 말이다. 《史記 卷四十一》
♣ 회계선생고사자[會稽先生姑射姿]종이의 재료인 닥나무[楮] 껍질을 형용한 말이다. 옛날 중국의 회계(會稽) 지방에서 종이를 공물로 바쳤으므로, 한유(韓愈)도 모영전(毛穎傳)에서 “회계의 저 선생과 친하게 벗으로 지냈다.[與會稽楮先生友善]”고 하였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서 고야(姑射)는 묘고야산(藐姑射山)의 준말로, 그곳에 거하는 신인(神人)의 피부가 마치 얼음과 눈 같다.[肌膚若氷雪]고 하였다.
♣ 회계정[會稽亭]회계정은 회계에 있는 난정(蘭亭)이다. 동진(東晉) 왕희지(王羲之)가 난정기(蘭亭記)를 짓고 글씨를 썼다. 《古文眞寶》
♣ 회계지산음[會稽之山陰]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킨다. 회계산은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의 남동쪽에 있는 명산이며, 산음은 산의 북쪽이란 뜻이다. 왕희지의 난정기(蘭亭記)에, “영화(永和) 9년 계축 늦은 봄 초승에 회계산의 산음에 모였다.” 하였다.
♣ 회계지치[會稽之恥]전쟁에 진 치욕을 말한다. 춘추시대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회계산(會稽山)에서 싸워 포로로 잡혔다가 굴욕적인 강화를 하고 풀려났던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
♣ 회계천년적[會稽千年跡]회계산의 구루비(岣嶁碑)를 말하는데 우비(禹碑)라고도 칭한다. 하우(夏禹)가 치수(治水)할 때 각(刻)한 것이라고 전해오는데 모두 70여 자이다.
♣ 회계회인[會稽懷印]한(漢) 나라 때에 주매신(朱買臣)이 일찍이 파직을 당하고 나서 회계군(會稽郡)의 수저승(守邸丞)에게서 기식(寄食)을 했었는데, 뒤에 주매신이 회계 태수가 되어서는 예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인끈을 품속에 감추고서 도보로 군저(郡邸)에 들어가니, 회계군 아전들이 한창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침내 주매신이 방으로 들어가 수저승과 밥을 먹고는 인끈을 약간 드러내자, 수저승이 앞으로 다가와서 자세히 보니 바로 회계 태수의 인장이었으므로, 관아의 모든 아전들이 처음에는 비웃다가 나중에는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고향의 지방관이 되어 감을 비유한 것이다. 《漢書 卷六十四》
♣ 회광[回光]도가(道家)의 수련법(修鍊法)의 하나인 회광반조(回光返照)의 준말이다.
♣ 회귤[懷橘]오(吳) 나라의 육적(陸績)이 여섯 살 때 구강(九江)에서 원술(袁術)을 만나 보았는데, 원술이 귤을 내어 먹게 하였다. 육적이 귤 세 개를 가슴 속에 품고 가지고 가다가 하직인사를 할 때 땅에 떨어졌다. 원술이 웃으면서 “육랑(陸郞)은 빈객으로 와서 귤을 숨겨 가지고 가는가?”하니, 육적이 꿇어앉으면서 “가지고 가서 어머니께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원술이 몹시 기특하게 여겼다. 《三國志 吳志 卷57 陸績傳》
♣ 회귤도위지[淮橘渡爲枳]남쪽에서 자라는 귤나무를 회수 북쪽에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고 한다.
♣ 회극[回極]하늘을 말한다. 초사(楚辭) 후어(後語) 권6 구탄(九歎) 원사(怨思)에 “아홉 신명을 하늘에 불러모은다.[徵九神於回極]”고 하였다.
♣ 회근[回巹]회근은 회혼(回婚)과 같은 뜻으로 혼인한 지 61년이 되는 해를 말한다.
♣ 회금점슬[回琴點瑟]안빈낙도(安貧樂道)를 비유한 말. 안회는 도시락밥 한 그릇, 물 한 그릇으로 누추한 시골에 살면서도 도를 즐기는 마음을 변치 않았고, 증점(曾點)은 공자가 일찍이 그의 뜻을 물었을 때 대답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면 관자(冠者) 5~6인과 동자(童子) 6~7인으로 더불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읊으며 돌아오렵니다.”고 하였다. 《論語 先進》
♣ 회남[淮南]중국 하남성 동백산(桐柏山)에서 발원하는 회수(淮水) 이남의 땅. 그 이북을 회북(淮北)이라 하는데 회남의 유자가 회북으로 가면 탱자가 되어버린다고 함.
♣ 회남[淮南]회남은 곧 회남자(淮南子)를 가리킨 말이다.
♣ 회남객[淮南客]닭을 미화한 말.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선약(仙藥)을 먹고 승천하였는데, 그 약 찌꺼기를 주워 먹은 개와 닭도 모두 승천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 회남계[淮南桂]회남은 한(漢) 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을 말함. 그가 지은 초은사(招隱士) 노래에, “계수나무 떨기로 자라누나 산골 깊은 곳에. 꼿꼿하고 굽은 가지 서로서로 얽히었네.[桂樹叢生兮山之幽 偃蹇連卷兮板相繚]”라 하였다. 《楚辭 卷八》
♣ 회남계견[淮南鷄犬]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신선이 되어 승천(昇天)할 때, 그가 먹다가 남긴 선약(仙藥)을 핥아먹고 뒤따라 하늘로 올라갔다는 개와 닭들로, 권세에 빌붙어 아부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論衡 道虛》
♣ 회남목낙장년비[淮南木落長年悲]회남은 회남왕 유안(劉安)으로, 그가 지은 회남자(淮南子)에 “낙엽지자 장년이 슬퍼한다.[木落長年悲]”하였다.
♣ 회남소산[淮南小山]산림(山林)에 은거하려는 뜻을 말한다. 한(漢) 나라 때 회남왕 안(淮南王安)이 천하의 준걸들을 모아 시를 짓게 한 뒤 시경(詩經)의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를 본떠 소산(小山)과 대산(大山)으로 시를 분류하였는데, 소산에 속하는 초은사(招隱士)라는 시 속에 굴원(屈原)을 흠모하며 산택(山澤)에 은거하려는 뜻이 담겨 있는 데에서 유래된 고사이다. 《楚辭 卷8 招隱士》
♣ 회남자[淮南子]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과 그의 문객들이 편찬한 잡가서로서, 그 안에는 아주 많은 고대 신화가 보존되어 있다. 본래 도(道)를 논한 내편(內篇) 21편, 잡설(雜說)을 실은 외편(外篇) 33편, 도합 54편이었는데, 산일(散佚)되고 지금 전하는 것은 내편이라 함. 이 책은 찬자가 그의 빈객(賓客) 방술지사(方術之士)를 동원하여 도교(道敎)에 촛점을 두고 종횡무진으로 논한 백과전서류의 책이라 함. 주석서(註釋書)에는 후한 고유(高誘)의 주(註)가 있음. 《四庫全書總目提要 子部》
♣ 회남초은어[淮南招隱語]조정의 소명(召命)을 뜻한다. 한(漢) 나라 회남왕(淮南王) 안(安)이 옛 풍도를 좋아하여 숨어사는 천하의 위걸(偉傑)들을 불러모으자, 모두 그 덕을 사모하여 그에게 모여든 뒤 자칭 소산(小山) 대산(大山)이라고 일컬었는데, 초사(楚辭)에 나오는 이 초은(招隱) 시는 회남 소산왕(淮南小山王)의 작품이라고 한다.
♣ 회남총계[淮南叢桂]초사(楚辭) 가운데 회남소산왕(淮南小山王)이 지은 초은사(招隱士)에 “계수가 총생함이여, 산의 깊은 곳일레.[桂樹叢生兮山之幽]" 하였다.
♣ 회남한[淮南恨]나이가 들어서 낙엽이 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는 것을 말한다. 회남자(淮南子)에 “낙엽 지자 장년이 슬퍼한다.[木落長年悲]”하였다.
♣ 회대[恢台]4월을 말함. 초사(楚辭) 구변(九辨)에 “收恢台之孟夏兮"라 하였다.
♣ 회동관[會同館]명(明) 나라에서 외국의 사신(使臣)을 접대하던 집이다.
♣ 회동무원[懷東武園]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15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원제(原題)는 ‘청주의 길가에서 폭설을 만나 동무원정이 생각나기에, 시 한 수를 지어 교대하러 온 공주한에게 부치다.[大雪靑州途上 有懷東武園亭 寄交代孔周翰]’이다.
♣ 회동습역소[會童習役所]연산군 때 각사(各司)의 나이 어리고 영리한 종들을 뽑아서 궐문 밖에 번갈아 있게 하였는데 이를 ‘회동습역소’라 했다. 그리고 훈동관(訓童官)이란 관리로 그들을 인솔하고 귀뚜라미, 잠자리 등의 곤충을 잡아 바치게 하였다.
♣ 회랭[灰冷]불교의 용어로, 즉 아무 욕심도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 회령령[會寧嶺]요동의 연산관(連山關)과 낭자산(狼子山)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 회로[回老]당(唐) 나라 때의 도사(道士)로서 팔선(八仙)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 여동빈(呂洞賓)을 가리킨 것으로, 소식(蘇軾)의 유효숙회호구시(劉孝叔會虎邱詩)에 나타나 있고, 또 소식의 회선생과호주시(回先生過湖州詩)에 의하면, 소식의 당시에 회도인(回道人)이라 자칭한 은사(隱士)도 있었는데, 여기서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蘇東坡集 卷十一, 十二》
♣ 회로동안일[晦老同安日]회로는 회암(晦庵)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심경부주(心經附註) 3권 우산지목장(牛山之木章)에 “내가 소년 시절에 동안에 있으면서 밤에 종소리를 들었는데, 그 한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이 마음은 벌써 제멋대로 다른 생각을 하려고 달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철저히 반성한 끝에, 학문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뜻을 전일하게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嘗記少年時在同安 夜聞鍾聲 聽其一聲未絶 此心已自走作 因是警省 乃知學爲須是致志]”라는 주희의 말이 실려 있다.
♣ 회록[回祿]불귀신 이름인데, 보통 화재의 뜻으로 쓰인다.
♣ 회맹비색[晦盲否塞]회는 달이 없는 그믐이고 맹은 눈이 먼 봉사이며 비는 숨이 막히는 것이고 색은 냇물이 막히는 것으로, 사람의 양심과 학문이 어두워지고 행해지지 않음을 이른다.
♣ 회명[晦明]해가 져서 날이 밝을 때까지. 낮과 밤. 초목이 무성함, 조상(凋傷).
♣ 회문[回文]시사(詩詞)의 별체(別體)이다.
♣ 회문[廻文]직금 회문(織錦廻文)의 준말. 시체(詩體)의 하나로서 시중(詩中)의 자구(字句)가 서로 회환(廻環)하여 뜻이 통하게 된 것이다. 이 시체는 진(晉) 나라 두도(竇滔)의 처(妻) 소씨(蘇氏)로부터 시작되었다. 소씨는 속문(屬文)에 능하여 그 남편 두도가 진주 자사(秦州刺使)에서 유사(流沙)로 귀양가자 소씨는 8백 40자로 된 회문선도시(廻文旋圖詩)를 지어 보냈는데, 그 내용이 무척 처절하였다 한다. 《晉書 竇氏妻蘇氏傳》
♣ 회문금[回文錦]여인이 낭군에게 보내는 시문을 말한다. 전진(前秦)의 여인 소혜(蘇蕙)가 유사(流沙)에 가 있는 낭군 두도(竇滔)를 그리워하며 비단을 짜서 ‘회문선도시(回文旋圖詩)’를 보낸 고사가 있다.
♣ 회문시[廻文詩]시사(詩詞)의 별체(別體)로 회문(回文)이라고도 하는데, 진(晉) 나라 때 소백옥(蘇伯玉)의 아내가 지은 반중시(盤中詩)에서 비롯되었으며, 전진(前秦)의 두도(竇滔)의 아내가 선기도(璿璣圖)를 지으면서 체제가 크게 갖추어졌다. 이 시체는 시구(詩句)를 바둑판의 눈금처럼 배열하여 끝에서부터 읽거나 또는 중앙에서 선회(旋回)하여 읽어도 시가 되며, 평측(平仄)과 운(韻)이 서로 맞는다. 예컨대, 소식(蘇軾)의 제직금화시(題織錦畫詩)에 “봄이 늦으니 꽃은 지고 벽초만 남았는데, 차가운 밤 달은 오동나무에 반쯤 걸려 있네. 멀리 날아가는 기러기 따라가니 변성에 해 저문데, 성긴 발에 비 뿌리니 수각이 비었어라.[春晩落花餘碧草 夜涼低月半枯桐 人隨遠雁邊城暮 雨映疏簾繡閣空]" 하였는데, 이 시를 거꾸로 읽으면 동(東) 자 운이 변하여 진(眞) 자 운이 되며 뜻이 통하고 평측이 모두 맞는다.
♣ 회문집구[回文集句]위에서 내려 읽거나 아래에서 치읽거나 다 말이 되는 시체(詩體)의 한 가지. 진(晉) 나라 소백옥(蘇伯玉)의 처(妻)가 지은 반중시(盤中詩)가 발단이 되었고, 전진(前秦)두도(竇滔)의 처(妻)가 선기도(璿璣圖)를 지음으로써 체제가 크게 갖추어졌다. 그 굴곡(屈曲)하여 문(文)을 이룬 것은 반중시의 유항(遺響)이요, 반복 왕환하여 좌우로 서로 통하는 것은 선기도의 제작이다. 지금은 문인들의 유희(遊戱)로 되었음. 집구(集句)는 옛사람들이 지어 놓은 글귀를 도아서 시를 만드는 것.
♣ 회문체[廻文體]시사(詩詞)의 별체(別體)로 회문(回文)이라고도 하는데, 진(晉) 나라 때 소백옥(蘇伯玉)의 아내가 지은 반중시(盤中詩)에서 비롯되었으며. 전진(前秦)의 두도(竇滔)의 아내가 선기도(璿璣圖)를 지으면서 체제가 크게 갖추어졌다. 이 시체는 시구(詩句)를 바둑판의 눈금처럼 배열하여 끝에서부터 읽거나 중앙에서 선회(旋回)하여 읽어도 시가 되며 평측(平仄)과 운(韻)이 서로 맞는데, 여기서는 뜻만 통할 뿐, 운은 맞지 않는다. 직금체(織錦體).
♣ 회박상월[懷璞傷刖]춘추 시대 초(楚)의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옥덩이를 얻어 초의 여왕(厲王)과 무왕(武王)에게 차례로 바쳤으나 옥이 아니라는 죄목으로 좌우(左右)의 발꿈치 베는 형을 당했다가 그 뒤 문왕(文王)에게 옥이라는 것을 인정받아 이전의 억울함을 씻었다고 한다.
♣ 회벽[懷璧]벽옥(璧玉)을 가지고 있다는 뜻. 좌전(左傳) 환공(桓公) 10년에 “필부(匹夫)에게 죄가 없다. 그 벽옥을 가진 것만이 죄이다.” 하였다.
♣ 회벽시구나원여[懷璧是懼那願餘]“필부가 옥 구슬을 갖고 있다가, 그것을 탐낸 사람에 의해 죄목에 걸려 처벌을 받았다.[匹夫無罪 懷璧其罪]”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傳 桓公 10年》
♣ 회벽죄[懷璧罪]좌전(左傳) 환공(桓公) 십년(十年)에 “우숙(虞叔)에게 옥(玉)이 있었는데, 우공(虞公)이 요구하자 우숙이 주지 않았다가 뉘우치고 말하기를 ‘필부(匹夫)가 죄(罪)는 없지만 보물을 가진 것이 곧 죄이다.’ 하고는 그 옥을 우공에게 바쳤다.” 하였다.
♣ 회벽필부죄[懷璧匹夫罪]춘추좌전(春秋左傳) 환공(桓公) 10년에, 필부가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구슬을 가지고 있자 이를 탐낸 사람이 구슬을 소지한 것을 죄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
♣ 회보[懷寶]천하를 구제할 경륜이 있으면서도 나오지 않고 은둔함을 말한다. 양화(陽貨)는 벼슬하지 않는 공자에게 “보배를 품고도 나라의 혼란함을 내버려둔다.” 하였다. 《論語 陽貨》
♣ 회봉[回俸]3승포(升布)를 ‘상목(商木)’이라 하고, 5∼6승포를 ‘회봉(回俸)’이라 함. 그런데 무명, 즉 면포의 품질은 날 80올을 1새[승(升)]로 하여 기준을 삼는데 새수가 많은 것일수록 곱다.
♣ 회북강남[淮北江南]중국 양주(楊州)를 말함. 서경(書經) 우공(禹貢)에는 “淮海惟楊州"라 했고, 이아(爾雅)에는 “江南曰楊州"라 하였음.
♣ 회비반야문종률[灰飛半夜聞鍾律]황종(黃鍾)의 길이는 9촌이고, 12율(律) 중에 동짓달에 해당한다. 황종을 땅에 세워서 묻고 그 관 속에 갈대 재를 채운 다음 흰 천을 덮어서 둔다. 밤중에 동지 기운이 오면 재가 천에 올라붙는데, 그것을 보아서 비로소 정확한 음률을 가늠한다. 만약 관이 짧거나 길면 재가 올라붙지 않는다고 한다.
♣ 회비제실황종동[灰飛緹室黃鍾動]갈대 재[葭灰]를 악기(樂器)의 율관(律管) 속에 넣어서 기후(氣候)를 점치는 데 있어, 동지절(冬至節)에는 황종관(黃鐘管)의 갈대 재가 비동(飛動)하는 것을 말한다.
♣ 회사[回寺]산사(山寺)에 출입하면서 폐풍을 일으키는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 회사[懷沙]초사(楚辭) 가운데의 편명(篇名)으로,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이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기 직전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후대에는 이를 인해 충분(忠憤)을 못 이겨서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회사[會査]회동사문(會同査問). 두 사람 이상의 관원이 모여서 함께 죄상(罪狀)을 따져 물어 밝히는 것.
♣ 회사노겸명불후[會使老謙名不朽]소식(蘇軾)이 지은 시 ‘남병의 겸 스님을 전송하며[送南屛謙師]’에 “내가 이에 뜻이 있어 다경의 뒤를 이어, 겸 스님의 이름을 불후히 해 주려 하였다네.[先生有意續茶經 會使老謙名不朽]”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1》
♣ 회사부[懷沙賦]회사는 모래와 자갈이 깔려 있는 곳으로, 굴원(屈原)은 더러운 세상과 함께 사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멱라수(汩羅水)에 빠져 죽어 자신의 시신이 멱라수의 모래 위에 진열되기를 원하였다. 이에 회사부를 짓고 끝내 멱라수에 몸을 던져 익사하였다. 초사(楚辭)에 수록되어 있다.
♣ 회사후소[繪事後素]본질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있음을 뜻하는 고사성어.
♣ 회산[檜山]창원의 옛이름
♣ 회산[淮山]한(漢) 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산이라는 뜻으로, 사방의 선비를 초빙하여 극진하게 대우하며 글을 짓게 했던 고사가 전한다. 《楚辭 淮南小山 招隱士》
♣ 회상[迴翔]돌아서 날다.
♣ 회서박적[淮西縛賊]당(唐) 나라 헌종(憲宗) 때 장군 이소(李愬)가, 한밤중에 군사를 인솔하고 큰눈을 맞으며 70여 리를 달려 채(蔡)에 당도해서 반적(叛賊)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아, 회서(淮西)를 평정하고 큰 공을 세웠던 일을 말한다. 《唐書 一百三十三 李愬傳》
♣ 회서훈업[淮西勳業]당(唐) 나라 헌종(憲宗) 때 회서(淮西)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원제(吳元濟)의 도당을 평정한 배도(裵度)의 공을 말한다. 《古文眞寶 後集 平淮西碑》
♣ 회석[懷石]굴원(屈原)은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충신이었는데, 참소를 받아 귀양을 가서 어부사(漁父辭)를 지어 깨끗한 자신은 탁한 무리들과 어울릴 수 없음을 말하였으며, 뒤에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었다. 사기(史記) 굴원전(屈原傳)에 “마침내 회사(懷沙)의 부(賦)를 짓고 스스로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乃作懷沙之賦 遂自投汨以死]" 하였다. 회사의 부에는 굴원이 죽어야 했던 이유를 자세히 밝혔으므로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지으면서 이 말을 썼던 것인데, 뒷사람들은 잘못 돌을 품고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오인하고 사(沙) 자를 석(石) 자로 바꾸어 ‘회석’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 회석[回舃]수령직을 마치고 다시 조정에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 섭현(葉縣)의 수령이었던 왕교(王喬)가 물오리 두 마리를 타고서 서울에 올라오곤 하였는데, 이를 잡아서 살펴보니 옛날에 하사했던 상서성(尙書省)의 나막신 한 짝[一舃]이 있더라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後漢書 方術列傳 王喬傳》
♣ 회선[回仙]당(唐) 나라 때의 선인(仙人) 여동빈(呂洞賓)의 별칭이다.
♣ 회설[回雪]기녀(妓女)가 옷소매를 번득이며 춤추는 자태의 경묘(輕妙)함을 이른 말이다.
♣ 회소[懷素]당(唐) 나라 때의 고승(高僧)으로, 특히 초서(草書)에 뛰어났다.
♣ 회소곡[會蘇曲]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9년에 육부(六部)의 호칭을 정하고 중간을 나누어 둘로 만든 다음, 왕녀(王女) 2인으로 하여금 각각 부내(部內)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편을 나누어 7월 보름날로부터 매일 이른 아침부터 대부(大部)의 마당에 모아놓고 길쌈을 하여 이경(二更) 쯤에 일을 끝내곤 해서 8월 보름날까지 일을 계속하고 나서는 그 공(功)의 많고 적음을 상고하여, 진 쪽에서는 주식(酒食)을 마련하여 이긴 쪽에 사례를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잔치에 가무(歌舞)와 백희(百戲)를 모두 베풀었으므로, 이를 가배(嘉俳)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때에 진 집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기를 ‘회소 회소(會蘇會蘇)’라 하였는바, 그 음조가 슬프고도 우아하였으므로, 후인들이 그 소리를 인하여 노래를 지어 회소곡이라 이름하였다.
♣ 회수함풍상[懷袖含風霜]어사대는 직책이 음살(陰殺)의 속성을 띠고 있는 관계로 문(門)이 북쪽 귀퉁이에 있었다 하며, 이와 함께 불법(不法)을 규탄하기 때문에 어사의 직책을 풍상(風霜)의 직임이라고 하였다 한다. 《通典 職官 御史臺》
♣ 회심[灰心]불도를 닦는 마음을 뜻함. 모든 망상(妄想)을 여의고 진여(眞如)의 경지에 도달함을 말한다.
♣ 회심지처불필재원[會心之處不必在遠]자기 마음에 적합한 바는 반드시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님.
♣ 회안[淮安]경기도 광주(廣州)의 고호이다.
♣ 회안봉[回雁峯]중국 형산(衡山) 남쪽에 있는 봉우리, 이 봉우리가 매우 높으므로 기러기가 가을이면 이곳에 와서 이 봉우리를 넘지 못하고 그냥 있다가 봄이 되면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회암[晦庵]주자(朱子)의 호.
♣ 회암감우시[晦庵感遇詩]회암은 주희(朱熹)의 호(號). 감우시는 원래 진자앙(陳子昂)이 지은 것으로 이것을 본따 재거감흥(齋居感興)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여기에 “무엇 때문에 구양자가 붓을 잡으면서 지공한 것을 몰라 당경에다가 주기를 어지럽혔나. 이 범례를 그 누가 용납하리.[云何歐陽子 秉筆迷至公 唐經亂周紀 凡例孰此容]" 하였다. 《朱子大全 卷四》
♣ 회암정[晦庵亭]송 나라 주희(朱熹)가 강학(講學)하던 정자. 회암은 주희의 호요, 무이산(武夷山)은 그 정자가 있던 산이다.
♣ 회양[淮陽]한 무제(漢武帝)의 특명으로 회양 태수(淮陽太守)에 부임했던 급암(汲黯)을 말한다. 《漢書 卷50 汲黯傳》
♣ 회양와십년[淮陽臥十年]한 무제(漢武帝) 때에 급암(汲黯)이 울적한 심정을 안고 회양 태수(淮陽太守)로 부임하여 맑은 정사를 펼치다가 급기야는 10년 만에 그곳에서 죽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50 汲黯傳》
♣ 회여[晦汝]김광현(金光炫)의 자(字)이다. 인조 10년에, 사친을 추숭하려는 인조에게 아부하는 대사간 유백증(兪伯曾)을 탄핵했다가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
♣ 회옹[淮翁]호가 동회거사(東淮居士)인 신익성(申翊聖)을 말한다.
♣ 회옹[晦翁]회옹은 송 나라 주희(朱熹)의 호. 중국 건녕부(建寧府) 숭안현(崇安縣)에 있는 무이산(武夷山)에 주자가 무이정사(武夷精舍)라는 강학(講學)의 장소를 조성하고 그 경내에 한서관(寒棲館)을 지었으며, 그 곳에서 지은 반초은조(反招隱操)에 “나는야 양지쪽 숲에 봄날의 붉은 꽃을 사랑하고[我愛陽林春葩晝紅]”라 하였다. 《朱子大全 卷九 武夷精舍雜詠》
♣ 회왕노회운[淮王蘆灰暈]회왕은 한 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다. 유안은 한 나라 고제(高帝)의 손자로 도술(道術)에 뛰어났는데, 그가 지은 회남자(淮南子)에 “갈대를 태운 재로 그렸는데, 달무리가 이지러졌다.[畫蘆灰而月暈闕]”하였다.
♣ 회요검빈[回夭黔貧]청빈한 생활을 고수하다가 일찍 죽고 말았다는 말이다. 회요는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가 요절(夭折)한 것을 말하고, 검빈은 춘추 시대 제(齊) 나라의 은사(隱士)인 검루(黔婁)가 죽은 뒤에 시신(屍身)을 덮을 이불이 없을 정도로 청빈하게 살았던 것을 말한다.
♣ 회우[回愚]공자(孔子)가 말하기를, “회[顔回]는 나와 말할 때에는 시종 ‘예, 예’ 하기만 하여 어리석은 줄 알았더니, 나가서 하는 것을 보면 잘 발휘하니, 어리석은 것이 아니로다.” 하였다.
♣ 회우당이문[會友當以文]논어(論語) 안연(顔淵)에 “군자는 학문을 통해 벗을 모은다.[君子 以文會友]”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실려 있다.
♣ 회원[檜原]회원은 회산(檜山), 즉 창원의 옛 이름이다.
♣ 회위[會圍]회시(會試)의 별칭.
♣ 회유렵[會有獵]임금으로부터 부름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주 문왕(周文王)이 위수(渭水) 가로 사냥을 나갔는데, 강 태공(姜太公)이 곧은 낚시로 반계(磻溪)에서 고기를 낚다가 문왕을 만났다 한다.
♣ 회윤대[悔輪臺]무제가 만년(晩年)에 국경에서 윤대(輪臺)를 개척하다가 뉘우치고 파하는 조서(詔書)에, “세상에 어찌 신선이 있으랴.” 하는 구절이 있다.
♣ 회음표모[淮陰漂母]회음은 강소성(江蘇省) 회안현(淮安縣)의 서북쪽에 있었던 지명. 표모(漂母)는 빨래하는 부인으로 한신(韓信)에게 밥을 주었던 부인을 말한다. 한신(韓信)이 젊었을 때 집이 가난하여 굶고서 회음성(淮陰城) 밑에서 고기를 낚고 있었는데, 빨래하는 부인[漂母]이 그를 동정(同情)하여 여러 날 밥을 먹였다. 한신이 감사하여, “내가 성공하면 부인에게 후히 갚겠습니다.” 하니, 부인이, “내가 왕손(王孫)을 동정한 것이지, 어찌 뒷날의 갚음을 받기를 바란 것입니까.” 하였다. 그 뒤에 한신이 초왕(楚王)이 되어서 빨래하던 부인을 찾아서 금 천 근을 주었다.
♣ 회음후[淮陰侯]회음후는 한 패공(漢沛公)의 대장이었던 한신(韓信)의 봉호이다.
♣ 회의유모귀[懷宜遺母歸]삼국(三國) 시대 육적(陸績)이 나이 6세에 원술(袁術)의 집에 갔다가 그가 주는 귤 3개를 품고 작별 인사를 하다가 땅에 떨어뜨리자 원술이 “네가 손님으로서 어찌 귤을 품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가져다가 모친에게 드리려 합니다.” 한 고사이다. 《三國志 卷五十七 吳志 陸績傳》
♣ 회인탈[恢刃奪]백정[庖丁] 위(魏)의 문혜군(文惠君) 앞에서 소를 가르는데[解], 칼을 척척 놀려 힘줄과 관절(關節) 사이를 도려내어도 뼈는 다치지 않는 신기(神技)를 부리며 문혜군에게 설명하는 말이, “저 뼈는 틈이 있고 칼날은 부피가 없으니, 없는 부피로써 있는 틈에 집어넣으면 휑하게[恢恢]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莊子》
♣ 회자[膾炙]잘게 썬 회와 구운 고기. 시가 아름다워 음미할 만한 것을 비유함.
♣ 회자[回刺]회자는 승문원의 신진이 귀복(鬼服)을 입고 밤에 선진을 찾아보고 사진(仕進)의 허락을 얻어내는 일이다.
♣ 회자인구[膾炙人口]칭찬받는 화제거리로서 널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림을 이르는 말. 날고기 회와 구운 고기처럼 사람의 입에 오르내림.
♣ 회자정리[會者定離]한 번 만나는 이는 반드시 이별하는 것이 정한 이치라는 것.
♣ 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의 호이다. 김안로(金安老) 일당에게 축출된 뒤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한동안 전념하였다.
♣ 회적오시[晦迹吳市]오시문졸(吳市門卒)의 약칭으로 오현(吳縣) 저자의 문지기인데,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숨는 것을 뜻한다. 한(漢) 매복(梅福)이 왕망(王莽)이 나라의 권력을 독단하자 처자를 버리고 숨어 성명을 바꾸고 오현 저자의 문지기가 되었다는 설에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六十七》
♣ 회조슬[懷祖膝]동진(東晋) 왕술(王述)의 자(字)가 회조(懷祖)인데, 그의 아들 탄지(坦之)와 함께 부자(父子)가 명사(名士)이었다. 탄지를 사랑하여 장성(長成)한 뒤에도 무릎 위에 안았다.
♣ 회조청명[會朝淸明]시경(詩經) 대아 대명(大明)에 있는 말로 무왕(武王)이 주(紂)와 회전(會戰)하던 날 아침이 청명했으므로 한 말인데, 지극히 인(仁)한 자가 지극히 불인(不仁)한 자를 치기 때문에 하늘도 도와서 날씨마저 청명하다는 뜻이다.
♣ 회주[回周]두루 돌아다니며 둘러 보다.
♣ 회중물[懷中物]감귤을 가리킴. 후한(後漢) 때 육적(陸績)이 나이 6세 때에 구강(九江)의 원술(袁術)을 찾아가 뵈었는데, 원술이 감귤을 내놓자, 육적이 세 개를 품속에 넣고는 작별인사를 하다가 감귤이 땅에 떨어지므로, 원술이 말하기를 “육랑(陸郞)은 손님으로서 감귤을 품속에 넣었단 말이냐?”하니, 육적이 꿇어앉아 대답하기를 “돌아가서 어머니께 드리려고 합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陸績傳》
♣ 회차질어[回車叱馭]한(漢) 나라 왕양(王陽)과 왕존(王尊)이 서로 앞뒤로 익주 자사(益州刺史)가 되었는데, 왕양은 험준하기로 유명한 구절판(九折阪)을 넘을 때 “어버이가 주신 소중한 이 몸을 받들고서 어떻게 자주 이 고개를 넘어다닐 수 있겠는가.” 하면서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서 돌아갔고, 왕존은 이와 반대로 “왕양은 효자(孝子)이지만 나는 충신(忠臣)이다.”라고 하면서 마부를 재촉하여 급히 넘어갔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76 王尊傳》
♣ 회창[會昌]당 무종(唐武宗)의 연호이다.
♣ 회창이상국[會昌李相國]회창은 당 무종(唐武宗)의 연호. 이 상국(李相國)은 곧 회창연간에 재상이 되었던 명상 이덕유(李德裕)를 말함. 선종(宣宗) 즉위 후 이덕유가 참소를 받아 애주사호참군사(崖州司戶參軍事)로 폄척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唐書 卷一百八十》
♣ 회채[淮蔡]회서(淮西)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당 헌종(唐憲宗) 때 회서 절도사(淮西節度使) 오원제(吳元濟)가 모반하여 그를 토벌할 적에 장군(將軍) 이소(李愬)가 마침 큰 눈이 내리던 밤에 회서를 쳐들어가서 오원제를 사로잡고 끝내 회서를 평정했던 고사에서 온 말.
♣ 회청대[懷淸臺]파촉(巴蜀)의 과부(寡婦) 청(淸)이란 여인이 자기 선업(先業)을 잘 지켜 재물로써 자신을 보호하여 침범을 당하지 않았으므로, 진시황이 그녀를 정부(貞婦)라 하여 회청대(懷淸臺)를 지어 표창하였다 한다. 《史記 貨殖傳》
♣ 회총시위[懷寵尸位]임금의 총애를 믿고 물러가야 할 때에 물러가지 않고 벼슬자리만 헛되이 차지함을 가리키는 말.
♣ 회추[會推]회동추문(會同推問). 두 사람 이상의 관원이 모여서 함께 죄상(罪狀)을 따져 물어 밝히는 것.
♣ 회태[恢台]넓고 큰 모양. 거대한 것.
♣ 회태[恢台]만물을 크게 길러 주는 첫 여름을 말한 것이다.
♣ 회퇴[灰堆]잿더미.
♣ 회풍[回風]회오리바람.
♣ 회풍[檜風]회풍은 시경(詩經) 국풍(國風) 가운데 하나인 망국(亡國)의 풍인데, 그 나라 이름이 회(檜)이다.
♣ 회피조제기[薈彼朝隮氣]임금이 군자(君子)를 멀리하고 소인배만 가까이 하는 것을 풍자한 내용. 시경(詩經) 조풍(曹風) 후인(候人)에, “뭉게뭉게 뭉게구름이 남산을 아침에 기어오르네.[薈兮蔚兮南山朝隮]”하여, 남산에 비록 아침 구름이 피어오르더라도 그것이 큰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실 수는 없다는 뜻으로, 소인배가 아무리 임금의 신임을 받더라도 끝내 국가에 도움될 일은 하지 못한다는 비유를 한 것임.
♣ 회해진등[淮海陳登]회해(淮海)는 강해(江海) 혹은 호해(湖海)와 같은 뜻으로서, 뜻이 원대하고 호방하여 속인들과 왕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진등(陳登)이 허사(許汜)의 방문을 받았을 때, 말 상대도 해 주지 않으면서 자기는 높은 침상 위에서 자고 허사는 낮은 곳에 눕게 하였는데, 뒤에 허사가 유표(劉表) 및 유비(劉備)와 얘기하면서 “陳元龍湖海之士 豪氣不除”라고 불평했던 고사가 전해 온다. 원룡(元龍)은 진등의 자(字)이다. 《三國志 卷7》
♣ 회핵[懷核]대궐에서 임금이 하사한 과실을 먹었음을 뜻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임금 앞에서 과실을 하사받았을 때, 과실에 씨가 있으면 그 씨를 품안에 간직해야 한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임금이 하사한 것을 공경하여 과실의 씨를 감히 임금 앞에서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 회현방[會賢坊]회현방은 오늘날의 서울 중구 회현동 일대이다.
♣ 회화묵[懷化墨]좋은 먹을 지칭하는 말이다. 고미(顧微)의 광주기(廣州記)에 “회화군에서 해자를 파서 많은 석묵(石墨)을 캐내는데 먹이 매우 좋아서 글씨를 쓰기에 알맞다.” 하였다.
♣ 회화본후소[繪畫本後素]“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고 난 다음에 하는 것이다.”고 한 공자의 말에서 온 것으로, 즉 사람도 아름다운 바탕이 있은 다음에야 문식(文飾)을 가할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 회회[恢恢]넓고 큰 모양, 여유가 많은 모양
♣ 회회[回回]돌고 도는 모양, 빛나는 모양, 마음이 어지러운 모양, 원망하는 소리의 형용, 큰 모양, 언제나, 회회교의 준말
♣ 회회[洄洄]물이 흐르는 모양, 어리석은 모양, 마음이 어두운 모양
♣ 회회[晦晦]어두운 모양
♣ 회회[徊徊]일정한 목적 없이 걸어서 왔다갔다 함
♣ 회회호[恢恢乎]넓고 큰 모양.
♣ 회흘입포도[回紇入蒲萄]청(淸) 나라 사신이 또 서울에 들어왔다는 말이다. 포도궁(葡萄宮)은 한(漢) 나라 궁전 이름으로, 애제(哀帝) 때 흉노의 선우(單于)가 중국에 오면 이 궁전에 거하게 하였다.《漢書 匈奴傳下》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 ‘세병마(洗兵馬)’에 “京師皆騎汗血馬 回紇餧肉葡萄宮”이라는 구절이 있다.
♣ 획금[獲禽]지방관이 되어 고을을 잘 다스리는 것을 비유한 말. 춘추 시대 정(鄭) 나라의 재상 자피(子皮)가 윤하(尹何)에게 어느 고을을 맡겨 다스리게 하려고 하자, 자산(子産)이 윤하의 무능함을 들어 말하기를 “비유컨대 마치 사냥하는 일과 같으니, 활쏘고 말타기에 익숙하면 금수를 잡을 수 있거니와, 만일 일찍이 수레에서 활을 쏘아보지 않았다면 우선 수레가 뒤집힐까 두려워할 것인데 어느 겨를에 짐승 잡을 생각을 하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左傳 襄公三十一年》
♣ 획리가[畫鯉歌]소식(蘇軾)의 획어가(畫魚歌)를 전용(轉用)한 말이다. 획어는 갈고리로 고기를 끌어올린다는 뜻으로 소식은 당시의 신법(新法)이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은밀히 풍자하여 지은 획어가에서 “날 춥고 물 말라 고기가 진흙 속에 있는데, 쟁기질하듯 짧은 갈고리로 물을 그어대네. 물가의 부들 꺾이고 물풀도 산란해져라, 이 뜻이 어찌 잔고기인들 남겨 둘손가.[天寒水落魚在泥 短鉤畫水耕犁 渚蒲披折藻荇亂 此意豈復遺鰍鯢]"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八》
♣ 획린[獲麟]기린은 성군(聖君)의 태평 시대에나 나오는 신수(神獸)인데, 난세(亂世)에 기린을 잡았다[獲麟]는 대목에서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저술하다 절필(絶筆)한 고사가 전한다.
♣ 획린[獲麟]노 애공(魯哀公) 14년에 애공이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기린을 잡았는데,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나의 도가 궁해졌구나.” 하였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쓰다가 이 때에 이르러 중지하였다. 《史略 卷 1》
♣ 획사[畫沙]높은 경지의 필법(筆法)을 뜻하는 말이다. 서예 공부를 할 때 송곳으로 모래 더미 위에 글씨를 쓰는 것처럼 공을 들여야[以錐畫沙] 비로소 강건하고 묘한 필법이 나온다고 한다.
♣ 획야분주[畫野分州]들을 그어 고을을 나눔.
♣ 획어가[畫魚歌]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지은 것으로, 그 내용은 대략 “가을날에 물 빠지고 고기는 진흙에 있는데, 쟁기질하듯 갈고리로 물 그어 고기를 잡네. 부들을 꺾어 치고 물풀을 짓밟아라. 이 뜻이 어찌 미꾸라지나마 남겨 두리오. ……[天寒水落魚在泥 短鉤畫水如耕犁 渚蒲披折藻荇亂 比意豈復遺鰍鯢]" 한 것인데, 이는 바로 당시 포학한 위정자들이 국가의 법제를 무너뜨리고 백성을 괴롭히는 처사에 대하여 풍자한 것이었다. 《蘇東坡詩集 卷八》
♣ 획연[砉然]살과 뼈가 갈라지는 소리.
♣ 획연[謋然]순식간에 갈라지는 모양.
♣ 획연[騞然]칼로 자르는 소리.
♣ 획일[畫一]획일(畫一)은 일(一) 자를 그어 놓은 듯 정제(整齊)한 법이란 뜻으로, 즉 한(漢) 나라 초기에 소하(蕭何)가 만든 법을 가리키는데, 소하가 죽은 뒤에는 조참(曹參)이 상국(相國)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일체 소하의 법만을 준수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曹相國世家》
♣ 획지성하[畫地成河]잠확유서(潛確類書) 에 “강동(江東)의 하육(夏育)이 큰 솥을 메고는 땅을 그어 하천을 만드는 환술이 있었다.” 하였다.
♣ 획지위뢰[劃地爲牢]태평한 시대를 상징하거나 행동을 어떤 범위 안으로 한정하더라도 어기지 않고 지킨다는 뜻의 고사성어.
♣ 획획[▣▣]괴려한 모양, 사리에 어그러져 온당하지 아니한 모양, 완고한 모양
♣ 횡거[橫渠]횡거는 송(宋) 나라 장재(張載)의 호인데, 그의 마음 수양하던 대략이 그가 저술한 서명(西銘)ㆍ동명(東銘)에 나타나 있다. 장재는 57세 때 여대방(呂大防)의 천거로 지태상예원(知太常禮院)이 되었다가 유사(有司)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宋史 卷四百二十七 張載傳》
♣ 횡경표맥[橫經漂麥]한(漢) 나라 때 사람 고봉(高鳳)이 한 번은 아내가 밭에 가면서 보리를 마당에 널어 놓고, 그에게 닭을 보라고 부탁하였는데, 마침 비가 와서 보리 멍석이 떠내려갔으나 그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장대만 들고 글을 읽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一百十三》
♣ 횡금[橫金]금어선화대(金御仙花帶)에 어부(魚符)는 차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한편 한림학사 이상 정상서(正尙書)들이 금어선화대에 어부까지 차는 것은 중금(重金)이라고 한다. 《容齋四筆 仕官捷疾》 어부(魚符) 없이 금어선화대(金御仙花帶)만 차는 것으로, 직학사(直學士)ㆍ정시랑(正侍郞)ㆍ급사중(給事中) 등이 패용하였다.
♣ 횡당[橫塘]남경(南京)의 서남쪽 강구(江口)의 둑[堤] 이름.
♣ 횡사[橫斜]매화(梅花)를 뜻함. 송(宋) 나라 때 처사(處士) 임포(林逋)의 산원소매시(山園小梅詩)에 “성긴 그림자는 맑고 얕은 물에 비끼어 있고 은은한 향기는 황혼의 달 아래 부동하누나[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 한 데서 온 말이다.
♣ 횡사[黌舍]학교와 같다. 북사(北史) 유란전(劉蘭傳)에 “횡사(黌舍)를 세웠는데 생도가 2백 명이었다.”라 하였다.
♣ 횡사곡직[橫斜曲直]가로 세로과 굽고 곧음를 말함. 송 나라 소옹(邵雍)이 하도낙서(河圖洛書)를 풀이하면서 서로 연결되고 유통되어 횡사곡직에 모두 통하여 하도낙서가 피차 구분이 없다고 했다. 《易學啓蒙 卷一》
♣ 횡사소영량삼지[橫斜疎影兩三枝]매처학자(梅妻鶴子)로 유명한 송(宋) 나라의 은자(隱者) 임포(林逋)의 천고(千古)의 절창(絶唱)으로 일컬어지는 시 ‘산원소매(山園小梅)’에 “얕고도 맑은 물에 비친 가로 비낀 성긴 그림자,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 그윽한 향기 떠도누나.[疏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라는 표현이 있다.
♣ 횡사영[橫斜影]보통 매화(梅花)를 시적(詩的)으로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 횡삭[橫槊]횡삭부시(橫槊賦詩)의 준말. 마상에서 창을 뉘어놓고 시를 짓는다는 말로 진중(陣中)에서 시가를 읊는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다. 남사(南史) 영환조전(榮桓祖傳)에 “조조와 조비는 말에 타면 창을 뉘어놓고 시를 읊고 말에서 내리면 담론(談論)을 즐긴다.[曹操曹丕上馬橫槊下馬談論]" 하였다.
♣ 횡삭부시[橫槊賦詩]군대가 출정(出征)하는 도중에 말 위에서 창을 들고 호탕한 기운으로 지은 시를 말한다. 조조(曹操)가 수군(水軍)을 적벽강(赤壁江) 위에 결진시켜 놓고 유유히 시를 읊던 고사가 있다.
♣ 횡삭제시[橫槊題詩]조조(曹操)와 그 아들 조비(曹丕), 조식(曹植) 등이 전쟁터에서 생애를 보내면서 때때로 장창을 비껴 들고 시를 짓곤 하였기 때문에[往往橫槊賦詩] 그들의 강개(慷慨)한 비가(悲歌)가 옛 시인보다도 더 곡진한 점이 있었다는 말이 당(唐) 나라 원진(元稹)의 두보(杜甫)에 대한 묘비명(墓碑銘) 속에 나온다. 《舊唐書 卷190下 文苑傳 杜甫傳》
♣ 횡삼[橫參]밤이 깊었다는 뜻이다. 삼성(參星)은 서쪽에 뜨는 별인데, 밤이 깊으면 서남방으로 비껴 뜬다.
♣ 횡선사[橫宣使]거란에서 고려에 연례(年例)에 의한 사신 외에 별도로 보내오던 사신(使臣)을 말한다.
♣ 횡설수설[橫說豎說]가로로 말하고 세로로 말함. 조리가 없는 말을 되는 대로 지껄임
♣ 횡진작랍[橫陳嚼蠟]여색에 마음이 없다는 뜻. 능엄경(楞嚴經)에 “횡진을 당하면 밀을 씹듯 하라.[當橫陳時 味如嚼蠟]" 한 말에서 온 것인데, 횡진은 미색이 옆으로 눕는다는 뜻이며, 밀은 꿀에 비하여 아무런 맛도 없으므로 무미(無味)한 것을 가리킨다.
♣ 횡해린[橫海鱗]바다를 가르던 물고기는 큰 뜻을 품은 사람을 뜻한다. 《莊子 逍遙遊》
♣ 횡해장군[橫海將軍]바다를 횡행한다는 뜻으로 지은 한대(漢代) 장군의 명호. 한 무제(漢武帝)가 반란을 일으킨 동월(東越)을 치기 위해 한열(韓說)을 보내면서 처음으로 이 명호를 수여하였다. 《史記 東越列傳》
♣ 횡행백마[橫行白馬]남조 양(梁)의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켜 건강(建康)을 함락시키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는데, 그가 백마를 타고 다녔던 데에서 유래하여 반란자를 백마라고 일컫게 되었다. 《隋書 卷22 五行志上》
♣ 효[詨]‘규(叫)’의 뜻.
♣ 효경[梟獍]효파경(梟破獍)의 준말로 악인(惡人)의 비유. 효는 올빼미인데 어미새를 잡아먹는다 하며 파경은 아비를 잡아먹는 나쁜 짐승이라 한다.
♣ 효렴선[孝廉船]진(晉) 나라 때 효렴으로 천거된 재사(才士) 장빙(張憑)이 당시의 고사(高士)이던 유담(劉惔)을 찾아가 하룻밤을 묵으면서 청담(淸談)을 나누고는, 이튿날 유담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돌아오는데, 유담이 그를 대단하게 여기어 다시 장효렴(張孝廉)의 배를 찾으라고 명하여 그를 데리고 가서 간문제(簡文帝)에게 천거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七十五》
♣ 효렴선[孝廉船]진(晉) 나라 장빙(張憑)은 효렴(孝廉)으로 선거(選擧)되어 서울로 오면서, 그 재주를 믿고 당시의 명사(名士) 유담(劉惔)을 찾아가겠다 하니, 동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장빙이 유담에게 가니, 유담이 그의 재주에 놀라서 하룻밤을 유숙시키며 이야기하였다. 장빙이 나와 배에 돌아오니, 동행하는 이들이, “어디서 잤는가.” 하고 묻는데, 장빙은 웃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잠깐 뒤에 유담이 사람을 보내어 장효렴의 배를 찾으니, 배에 있는 동행들이 놀랐다.
♣ 효로기일척[梟盧期一擲]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 주(註)에 “하나의 주사위만 있고 여러 주사위의 도움이 없으면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 마치 만승(萬乘)의 상(相)도 중사(衆士)의 도움이 없으면 공업을 이룰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였다.
♣ 효릉[崤陵]하남성(河南省) 낙녕현(洛寧縣) 서북쪽에 있는 효산(崤山)으로 춘추 시대 진(晉) 나라와 진(秦) 나라의 격전지(激戰地)였다.
♣ 효매[孝梅]옛날에 용광한(龍廣寒)이란 사람이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다. 6월 1일에 어머니의 수연(壽筵)을 베풀면서 북창(北窓)을 열고 축수(祝壽)하는 술잔을 올리려고 하자, 홀연히 매화가지 하나가 창 안으로 들어왔는데, 향기가 몹시 좋았다. 이에 사람들이 이를 ‘효매’라고 칭하였으며, 사대부들이 각자 시를 지어서 선사하였다. 《淵鑑類函 卷271 孝》
♣ 효맹[崤鄳]중국 하남성(河南省)의 서북쪽에 있는 효산(崤山)과 동남쪽에 있는 민액(鄳阨)으로, 모두 험절(險絶)한 요새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 효빈[效嚬]무턱대고 남의 흉내를 낸다는 뜻이니, 즉 남의 것을 잘못 배운다는 말이다. 월(越) 나라 미인 서시(西施)가 심장병이 들어 심장을 움켜쥐고 얼굴을 찡그렸더니, 그 마을의 어떤 추녀(醜女)가 그걸 보고 아름답게 여겨 자기도 심장을 움켜쥐고 얼굴을 찡그렸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莊子 卷四 外篇 天運》
♣ 효산[崤山]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산 이름으로 고대의 군사 요지였다.
♣ 효선경[孝先經]한(漢) 나라 변소(邊韶)의 자(字)는 효선(孝先)인데, 문학으로 이름이 있어 제자 수백 명을 교수(敎授)하였다. 하루는 낮잠을 자는데 제자들이 몰래 조롱하기를, “변효선(邊孝先)은 배가 볼록한데 낮잠만 자누나.” 하니, 변소가 잠결에 그 말을 듣고 곧 답하기를, “변효선은 볼록한 배는 오경(五經)의 상자[筒]이다.” 하였다.
♣ 효선경사편편복[孝先經笥便便腹]효선(孝先)은 후한(後漢) 때 변소(邊韶)의 자이다. 변소는 문장에 뛰어났고 제자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변소전(邊韶傳)에 “뚱뚱한 배는 오경상자이다.” 하였다.
♣ 효시[嚆矢]옛날 전쟁 때 전쟁을 개시할 때 신호용으로 쏘는 화살(矢). 인마(人馬)살상용과 달리 끝이 뭉툭한데다가, 구멍이 뚫려 있어 이를 쏠 때 윙-하는 소리가 났기에 ‘우는 화살’이란 뜻에서 ‘효시’라 함. 곧, 어떤 일의 시초
♣ 효아총[孝鵝塚]당(唐) 나라 천보(天寶) 말년에 덕청(德淸)에 사는 심조(沈朝)의 집에 거위가 있었는데, 알을 낳다가 장(腸)이 밖으로 비어져나와 죽고 말았다. 그러자 새끼 거위가 슬피 울면서 모이를 쪼아먹지 않았으며, 지푸라기로 어미 거위를 덮고는 풀을 물어다가 어미 거위 앞에 놓고 마치 제전(祭奠)을 올리는 것처럼 한 다음 길게 몇 번 울고는 죽었다. 이에 심씨가 기이하게 여겨 묻어 주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를 ‘효아총’이라고 하였다. 《淵鑑類函 卷426 鵝》
♣ 효자[梟者]올빼미는 어미새를 잡아먹는다 하여 악인(惡人)을 비유한 말이다.
♣ 효제[孝悌]“요순의 도는 효제일 따름이다[堯舜之道孝悌而已矣].”라는 말을 가리킴. 《孟子 告子下》
♣ 효제인지본[孝弟仁之本]효도와 공경은 인의 근본이다.
♣ 효제충신[孝悌忠信]孝[효도]는 부모를 섬기는 자식의 도리, 悌[공손함]은 윗사람을 대하는 아랫사람의 도리, 忠[충성, 자신의 마음을 다함]은 임금을 섬기는 신하의 도리, 信[믿음]은 친구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로, 유교의 대표적인 덕목이다. ]
♣ 효증[殽脀]상대를 위하여 저민 고기를 적대(炙臺)에다 올려놓는 것. 국어(國語) 주어(周語)에, “친척이 모여 잔치하면 효증(殽脀)이 있다.” 하였음.
♣ 효표론[孝標論]효표(孝標)는 남조 양(南朝梁) 나라 유준(劉峻)의 자(字)로, 그가 지은 ‘광절교론(廣絶交論)’이 유명하다.
♣ 효함[崤函]하남(河南)의 험요지(險要地)인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을 가리킨다.
♣ 효회호음[鴞懷好音]덕을 닦아서 오랑캐들까지 감화시킴을 이름. 시경(詩經) 노송(魯頌) 반수(泮水)에 “날으는 저 올빼미, 반궁의 숲에 앉아서, 우리 뽕 열매를 먹고는, 우리 좋은 소리에 감화되도다[翩彼飛鴞 集于泮林 食我桑葚 懷我好音]” 한 데서 온 말이다.
♣ 효효[嘐嘐]이상(理想)이 높아서 옛 사람만 본받으려 한다는 뜻이다.
♣ 효효[曉曉]교묘하게 말하는 모양
♣ 효효[憢憢]두려워하는 모양
♣ 효효[嘵嘵]두려워하는 소리
♣ 효효[哮哮]많은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 효효[囂囂]뭇 소리가 시끄러운 모양, 뭇 사람이 원망하고 근심하는 소리나 모양,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모양, 제 분에 만족하여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 모양, 허무한 모양
♣ 효휴애일[孝虧愛日]오래 할 수 없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라, 효자는 날을 아낀다[愛日]는 말이다.
♣ 후[堠]후는 이수(里數)를 기록한 토대(土臺)로, 한 후는 5리를 말한다. 정자통(正字通)에 “10리는 쌍후(雙堠), 5리는 척후(隻堠)이다.” 하였다.
♣ 후경[後勁]뒤를 맡은 정병(精兵)을 말함. 좌전(左傳) 선공(宣公) 22년에 “中權後勁"이 있음.
♣ 후과[侯瓜]진(秦) 나라 광릉(廣陵) 사람인 소평(召平)이 동릉후(東陵侯)에 봉해졌었는데, 진 나라가 망한 뒤에 집이 가난하여 장안(長安)의 성 동쪽에 오이를 심어 생활하였다 하여 나온 말이다. 《史記 卷五十三 蕭相國世家》
♣ 후관[侯館]원래 관망용 소루(小樓)를 말하는데, 보통 왕래하는 관원이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역관(驛館)을 가리킨다.
♣ 후관이양월[候管移良月]초겨울 시월달이 돌아왔다는 말이다. 옛날에 절후(節候)를 알기 위해 대나무 통[竹管] 속에 갈대막을 태운 재를 채워 놓았는데, 절기가 돌아오면 해당되는 대나무 통 속의 갈대 재가 저절로 들썩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고 한다.《後漢書 志第1 律曆志上》 양월은 10월의 별칭이다.
♣ 후교[後交]자세히 알아 본 뒤에 맺는 교분(交分). 수(隋) 나라 왕통(王通)의 중설(中說) 위상(魏相)에 “군자는 먼저 가려 뽑은 다음에 교분을 맺고[君子先擇而後交] 소인은 먼저 교분을 맺고 나서 가려 뽑기 때문에 군자는 허물이 적고 소인은 원망이 많아지게 된다.” 하였다.
♣ 후락[後樂]‘천하의 근심거리를 누구보다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누구보다도 뒤에 즐긴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말을 줄인 것으로,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온다.
♣ 후래[後來]그 지역의 지방관으로 부임한 우수한 후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 후래삼배[後來三杯]술자리에서 뒤 늦게 온 사람에게 먼저 권하는 석 잔의 술.
♣ 후령[緱嶺]주 나라 왕자진(王子晉)이 신선이 되어 후령(緱嶺)에서 학을 타고 갔다.
♣ 후리[候吏]도로(道路)에 빈객(賓客)을 전송하고 맞이하는 아전을 말한다.
♣ 후망[厚亡]노자(老子) 9장과 44장에, 많이 쌓아 놓으면 무너지는 것도 엄청나다[多藏必厚亡]는 말이 있다.
♣ 후명[後命]귀양 보낸 죄인에게 사약(死藥)을 내리는 것을 이른 말이다.
♣ 후목분장[朽木糞牆]썩은 나무에 조각하거나 부패한 벽토에 흙칠을 하여도 소용이 없다는 뜻. 쓸모 없는 사람을 비유하기도 하고 혼란한 세상을 비유하기도 한다.
♣ 후목불가조[朽木不可雕]공자의 제자 재여(宰予)가 낮에 잠을 자자, “썩은 나무에는 무엇을 새겨 볼 수가 없다.[朽木不可雕也]”고 공자가 평한 일화가 전한다. 《論語 公冶長》
♣ 후문[侯門]귀인(貴人)의 저택을 일컫는 말이다.
♣ 후문건절[後門建節]옛날 장군(將軍)이 환군(還軍)할 적에 맨 뒤에 국문(國門)을 들어오는 것을 공(功)으로 삼은 데서 온 말이다.
♣ 후문치자[候門稚子]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어린애는 문에서 기다리고 술은 통에 넘치누나.”란 말이 있다.
♣ 후미석독[厚味腊毒]국어(國語) 주어(周語) 하편에 “맛좋은 음식에는 심한 독이 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후미실석독[厚味實腊毒]국어(國語) 주어 상(周語上)에 “맛 좋은 음식에는 실로 극독물이 들어 있다.[厚味寔腊毒]”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후미(厚味)는 중한 녹봉(祿俸)을 비유한 말이다.
♣ 후백[侯伯]후작(侯爵)과 백작(伯爵)이다.
♣ 후보[候補]어떤 벼슬자리에 결원(缺員)이 있을 때 그 자리에 나아갈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 후삭육마[朽索六馬]몹시 위태로운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오자지가(五子之歌)에, “만백성을 대함에 썩은 고삐로 여섯 마리 말을 몰듯이 두려움을 느낀다.” 하였다.
♣ 후산[侯狦]한(漢) 나라 때의 흉노(匈奴)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의 이름인 계후산(稽侯狦)의 준말이다.
♣ 후삼만호[侯三萬戶]한나라의 장량이 유방(劉邦)을 도와 항우(項羽)를 쳐서 천하를 통일하는 공을 세우고서도 명철보신(明哲保身)하여 3만 호 되는 유후(留侯)로 봉해진 것을 말한다. 《史記 卷五十五 留侯世家》
♣ 후색[朽索]서경(書經)에 “내가 만백성에 임함에 송구함이 썩은 밧줄로 여섯 말[馬]을 제어함 같다[予臨非民 懍乎若朽索之馭六馬].” 하였다.
♣ 후생[侯生]한(漢) 나라의 저명한 학자 양웅의 제자인 후파(侯芭)를 말한다.
♣ 후생[侯生]후생은 진시황 때의 방사이다. 진 시황의 명을 받아 같은 방사인 석생(石生) 등과 함께 선인(仙人)의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러 간 적이 있었다.
♣ 후생가외[後生可畏]후생은 뒤에 태어난 사람, 후배, 젊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후생은 두려워할 만함. 후배는 선배들보다 나아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후배가 나이 40~50이 되어도 세상에 이렇다 할 명성이 알려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별로 두려워할 것이 없다. 《論語 第9篇 子罕 22章》
♣ 후생입도사[侯生入屠肆]전국(戰國) 시대 신릉군은 위(魏)나라 공자(公子)인데, 성문(城門)에 문지기 노릇하는 후생(侯生)이란 노인이 어진 사람이란 말을 듣고, 연회(宴會)에 초대하기 위하여 신릉군이 친히 영접하러 가서 수레에 태우고 오는데, 중도에서 후생이, “내가 친한 사람 주해(朱亥)라 하는 자가 백정들 가운데 있는데 잠깐 같이 들러서 갑시다.” 하고 신릉군이 수레를 끌고 그리로 갔다. 후생은 그 사람과 일부러 오랫동안 서서 이야기하니 같이 간 하인들이 모두 후생을 가만히 욕하였다. 그러나 신릉군은 말고삐를 잡고 더욱 공손하였다. 후일에 마침내 후생과 주해의 도움으로 조(趙)나라를 구(救)하는 공을 이루었다.
♣ 후설[喉舌]왕명을 출납하는 요직을 말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왕의 명을 출납하니 왕의 후설이다" 하였다.
♣ 후승[後乘]임금의 수레 뒤를 따르는 종신(從臣)이라는 뜻으로, 즉 조정 안의 신하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 후시[後市]연복(延卜). 조선 중기 연경(燕京)에 파견되었던 사행이 귀환할 때 그들을 맞이하러 들어가는 수백필의 쇄마(刷馬)편을 이용하여 의주(義州)에서 물화(物貨)를 수집한 봉성(鳳城)의 장사치들이 복물(卜物)을 운반 매매하는 것을 말한다.
♣ 후시[後時]좋은 때를 잃다.
♣ 후신고[後薪高]뒤에 벼슬길에 나왔으나 앞에 나온 사람보다 벼슬이 더 높음. 한 무제(漢武帝) 때에 신진(新進)들의 벼슬이 선배보다 높이 오르는 자가 많으니 급암(汲黯)이 아뢰기를, “폐하(陛下)의 사람 쓰는 것은 섶[薪]을 쌓는 것과 같아서 뒤에 오는 것이 위에 올라갑니다.” 하였다. 또, 휴효위(劉孝威) 원시(怨詩)에 “후신이 따라서 다시 높이 쌓였구나.[後薪隨復積]" 하였다.
♣ 후실유선성[後實逾先聲]선성(先聲)은 먼저 소문을 내어 적의 기세를 꺾어 놓는 것이고, 후실(後實)은 뒤에 실속있게 대비책을 강구해 놓는 것을 말한다. 《史記 淮陰侯傳》
♣ 후안무치[厚顔無恥]얼굴이 두꺼워 수치스러움을 모름. 뻔뻔스러움.
♣ 후영중일언[侯嬴重一言]후영은 전국시대 위(魏) 나라의 은사(隱士)로서 신릉군(信陵君)의 빈객이 되었는데, 신릉군이 조(趙)를 구원할 때 진비(晉鄙)를 죽여 병부(兵符)를 빼앗은 뒤 한단(邯鄲)의 포위를 풀게 하였음. 이때 연로하여 직접 따라가지 못하고 기일을 따져 자결함으로써 전송하겠다고 약속하였는데, 실제로 그 말대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음. 《史記 卷七十七 侯嬴傳》
♣ 후예[后羿]후예는 요(堯) 임금 때 활을 잘 쏘던 사람인데, 때마침 해가 열 개나 떠서 초목이 시들고 백성들이 굶게 되자, 후예를 시켜 아홉 개의 해를 쏘아 떨어뜨리게 하였다고 한다. 《淮南子 本經訓》
♣ 후예사일[后羿射日]회남자(淮南子) 본경훈(本經訓)의 기록에 의하면, 요 임금 때 하늘에 10개의 태양이 나타났다 한다. 태양은 본래 생명의 원천이지만 10개의 태양이 동시에 공중에 떠오르자 강물이 고갈되고, 경작지가 갈라지면서 농작물이 다 말라죽는 등, 과다한 햇빛은 모든 것을 구워 태워버려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멸종될 지경에 처했다. 그러자 천제(天帝)는 예(羿)라는 신을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이 같은 난리를 피우는 태양을 잘 타이르도록 하였다. 후예는 화살을 매긴 활의 시위를 당겨 숨을 죽이고 정신을 모으더니 단숨에 아홉 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트렸다. 지구상의 기후는 정상을 회복하였다. 후예가 다시 독사와 맹수를 쏘아 죽이자 백성들은 안정된 생활을 꾸려갈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후예는 민중을 위해 해를 제거해준 영웅이다.
♣ 후원년[後元年]인생의 한 세대가 새로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 후장[堠墻]적정(敵情)을 살피기 위하여 흙으로 쌓은 보루(堡壘)를 말함.
♣ 후정옥수[後庭玉樹]노래 이름을 뜰[後庭]과 나무[玉樹]에 비유한 것이다. 진 후주(陳後主)가 매양 빈객을 불러 장귀비(張貴妃) 등을 데리고 잔치하고 여러 귀인(貴人)에게 시를 짓도록 하여 그 중에서 잘된 것을 뽑아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곡조를 만들었는데, 뒤에 옥수ㆍ후정 2곡으로 나뉘었다.
♣ 후정화[後庭花]진 후주(陳後主) 때의 가곡명(歌曲名)으로, 후주가 연회를 베풀 적에 귀인(貴人)ㆍ여학사(女學士)ㆍ압객(狎客) 등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여, 그 중 가장 잘 된 것을 뽑아 악곡(樂曲)을 붙이고 아름다운 여인을 선발, 이를 노래부르고 춤추게 하면서 즐겼는데 그 중 한 곡이 바로 이 후정화이다.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陳書 皇后傳》
♣ 후제[后帝]두예(杜預)의 주에, “后帝 堯也”라 하였음.
♣ 후조[後凋]소나무와 잣나무를 말한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의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송백이 끝까지 시들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 후종[候鍾]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 후직[后稷]후직(后稷)은 뒤에 주(周)의 시조(始祖)이자 요(堯)의 신하로서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임. 그의 어머니 강희(姜姬)가 거인(巨人)의 발자국을 밟고 느낌을 받아 그를 잉태하여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게 여겨 좁은 골짝에다 내다버렸으나 지나가는 마소들이 그를 밟지 않고 피해 갔다. 그리하여 다시 얼음판 위에다 버렸더니 이번에는 새가 와서 날개로 덮어주는 것이었다. 그를 이상히 여겨 다시 주워다 기르면서 그의 이름을 기(棄)라고 하였다는 것임. 《史記 卷四》
♣ 후천[後天]후천은 황제(皇帝)가 만든 역을 말한다.
♣ 후천도[後天圖]문왕(文王)이 그렸다고 하는 팔괘방위도(八卦方位圖). 복희(伏羲)의 선천도(先天圖)에 대한 말로 천지 이치의 변화를 나타내 놓은 것.
♣ 후천앵[後薦櫻]한여름 이후라는 뜻이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천자(天子)는 중하(仲夏)의 달에 앵두를 침묘(寢廟)에 올린다.” 하였다.
♣ 후청호[侯鯖護]후정은 오후정(五侯鯖)의 준말이고, 호는 한 성제(漢成帝) 때 사람 누호(婁護)인데, 누호가 성제의 외삼촌들인 왕씨(王氏) 5후(侯)가 선사한 어육(魚肉)을 합쳐 요리하여 진기한 음식을 만들었다 한다. 정(鯖)은 물고기와 육고기를 합쳐 요리한 맛좋은 음식임. 《西京雜記 卷二》
♣ 후토[后土]토지를 맡은 신, 국토.
♣ 후파[侯芭]한 나라 거록(鉅鹿) 사람. 한(漢) 나라의 저명한 학자 양웅(揚雄)으로부터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을 전수받은 사람 이름으로, 가난하게 살았던 양웅에게 문자를 배우러 오는 이들만 이따금씩 주효(酒肴)를 싸 들고 찾아오곤 하였는데, 거록(巨鹿) 사람 후파(侯芭)만은 항상 양웅을 따라다니며 극진히 모셨고, 양웅이 죽은 뒤에는 분묘(墳墓)를 세우고 삼년상을 지내기까지 하였다 한다. 《漢書 卷87 揚雄傳 贊》
♣ 후파수태현[侯芭守太玄]한(漢) 나라 때 후파(侯芭)가 양웅(揚雄)을 지극히 모신 결과, 양웅으로부터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 등의 저술을 물려받아 지키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87 揚雄傳 贊》
♣ 후황가수[后皇嘉樹]귤나무를 말한다. 후황은 후토(后土)와 황천(皇天)으로, 천지(天地)를 가리킨다.
♣ 후회막급[後悔莫及]잘못을 저지르고 뒤늦게 뉘우쳐도 이미 때가 늦어 미칠 수가 없음.
♣ 후후[喣喣]선웃음을 치는 모양, 아첨하여 웃는 모양
♣ 후후[姁姁]즐기는 모양, 상냥한 말씨, 화락한 모양
♣ 훈가[勳家]훈가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집안을 말한다.
♣ 훈득운향[薰得芸香]교서관(校書館)에 재직함을 비유한 말. 운향은 운초의 향기란 뜻인데, 장서실(藏書室)에는 본디 운초로써 좀벌레를 물리치므로 이른 말이다.
♣ 훈맹[勳盟]나라에 훈공이 있어 각종 공신에 봉하여 있는 사람으로서 공신 회맹록(功臣會盟錄)에 서맹 서명(誓盟署名)한 사람.
♣ 훈모[訓謨]훈모는 서경(書經) 6체(體) 중의 2체를 가리킨다.
♣ 훈부[勳府]공신을 맡은 관청
♣ 훈성[暈腥]맵고 냄새가 강한 채소와 어육(魚肉). 흔히 고기 반찬을 말한다.
♣ 훈유[薰蕕]훈(薰)은 향초(香草)이고 유(蕕)는 악취 나는 풀인데, 이 두 가지를 섞어 놓으면 10년이 지나도 오히려 악취가 남는다고 하였다. 즉 선(善)은 소멸되기 쉽고 악은 제거하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 “일훈(一薰) 일유(一蕕)는 10년이 가도 오히려 남은 냄새가 있다[一薰一蕕十年尙有餘臭].”라 하였다. 《左傳 僖公四年》
♣ 훈유소복[薰蕕韶濮]시비와 선악을 비유한 말. 훈은 향초(香草)이고, 유(蕕)는 악취(惡臭)가 나는 풀이며, 소(韶)는 순(舜) 임금의 음악 이름이고, 복상음은 옛날 복수(濮水) 가에 유행했었다는 음란한 음악을 말한다.
♣ 훈죽씨[獯鬻氏]북방의 만족(蠻族) 이름으로 후금(後金) 즉 청(淸) 나라를 가리킨다.
♣ 훈지[塤篪]악기(樂器) 이름. 훈(壎)은 흙으로, 지(篪)는 대나무로 만들었는데, 시경(詩經) 소아 하인사(何人斯)에 “백씨는 훈을 불고 중씨는 지를 분다.[伯氏吹壎 仲氏吹篪]" 한 말이 있으므로 우애하는 형제간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쓰이게 되었다.
♣ 훈지[壎篪]훈(壎)은 질나팔이고 지(篪)는 젓대인데, 자신의 하찮은 시(詩)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 훈지[壎之]훈지는 금응훈(琴應壎)의 자이다.
♣ 훈탁[暈柝]야경 돌 때 치고 다니는 딱딱이같은 것이다.
♣ 훈풍[薰風]순 임금의 금곡(琴曲)에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불평을 풀어줄 만하고, 남풍의 때맞춤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해주네.”라는 노래가 있다 함. 《孔子家語 辨樂解》
♣ 훈풍곡[薰風曲]순(舜)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남풍지훈혜(南風之熏兮)’라는 노래를 부르고 신하들과 즐기었다.
♣ 훈풍수전량[薰風水殿涼]당 나라 문종(文宗)은 유공권(柳公權)과 여름날에 연구(聯句)를 짓는데,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에 서늘함이 나도다.”[薰風自南來 殿角生微涼]이라는 유공권의 시구(詩句)가 유명하다.
♣ 훈풍화순현[薰風和舜絃]순(舜)임금이 훈풍(薰風) 노래를 지어 거문고로 노래하여 백성을 위무하였다 한다.
♣ 훈현곡[薰絃曲]임금의 시문(詩文)을 비유한 말.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어 타면서 남풍시(南風詩)를 지어 노래하였는데, 그 노래에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성냄을 풀어 줄 만하도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한 데서 온 말이다.
♣ 훌훌[欻欻]움직이는 모양
♣ 훤[萱]망우초(忘憂草). 원추리는 본디 모친이 거처하는 북당(北堂) 앞 뜰에 심는 것이므로, 모친 건강을 상징한 말이다.
♣ 훤당[萱堂]살아 계신 남의 어머니를 일컬음. 옛날에 어머니는 북당(北堂)에 거처하는데 그 뜰에 원추리[萱]를 심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백혜(伯兮)에 “어찌 원추리를 얻어서 북당[背]에 심어볼까.[焉得諼草 言樹之背]"라 하였는데, 훤(諼)은 바로 훤(萱) 자와 같다. 그 전(傳)에 배(背)를 북당(北堂)이라 일컬었으므로 세속에서 모친을 ‘북당’이라고도 칭한다.
♣ 훤배[萱背]훤배는 시경(詩經) 위풍(衛風) 백혜(伯兮)의 “망우초(忘憂草) 좀 얻어서 북쪽 뒤꼍에 심었으면. 떠난 사람 생각에 내 마음만 병드누나.[焉得萱草 言樹之背 願言思伯 使我心痗]”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으로, 북당(北堂)이 주부의 거실이라는 점과 연결되어 모친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악부(樂府)의 청상곡(淸商曲) 가운데 ‘오야제(烏夜啼)’라는 금곡(琴曲)이 있는데, 하안(何晏)이 옥(獄)에 갇혔을 때 그의 딸이 밤중에 까마귀 소리를 듣고서 지었다고 한다.
♣ 훤불조[萱不彫]어머니의 계신 곳을 훤당(萱堂)이라 하는데 시경(詩經)에서 나온 말이다.
♣ 훤초[萱草]사람의 근심 걱정을 잊게 해 준다는 풀 이름으로, 망우초(忘憂草)라고도 한다.
♣ 훤초[萱草]원추리. 옛날에 어머니는 북당(北堂)에 거처하는데 그 뜰에는 원추리를 심었으므로, 전하여 남의 모친을 훤당(萱堂)이라고 부른 데서 온 말이다.
♣ 훤초원[萱草怨]훤초(萱草)는 사람의 시름을 잊게 한다는 애완초(愛玩草)인데, 사람이 이미 세상의 번뇌를 해탈한 때문에 훤초도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 훤총대영춘[萱叢對靈椿]어머니를 훤당(萱堂)이라 하고 아버지를 춘부(椿府)라 한다.
♣ 훤훤[嚾嚾]떠들썩한 모양
♣ 훼복[卉服]풀옷을 입는다는 뜻으로, 미개인 특히 섬 오랑캐를 가리킨다. 한서(漢書) 지리지 상(地理志上)에 “도이훼복(島夷卉服)”이라 하였다.
♣ 훼성[毁性]상중(喪中)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목숨을 잃는 것을 이른다.
♣ 훼장[喙長]육여경(陸餘慶)이 모든 일에 있어 말로는 잘하나 판결력이 부족하므로 사람들이 “말할 적에는 부리가 석 자나 길어지고 판결할 적에는 손이 닷 근처럼 무거워진다.”고 조소하였다. 《唐書 陸餘慶傳》
♣ 훼포[卉袍]도이(島夷)들이 입는 풀로 만든 옷을 말한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도이는 훼복을 입는다.[島夷卉服]" 하였다.
♣ 휘[徽]한(漢) 나라 말기의 은자(隱者) 사마휘(司馬徽)를 말한다.
♣ 휘과회일[揮戈回日]무용(武勇)을 말한다.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초(楚) 나라 노양공(魯陽公)이 한(韓) 나라와 싸웠는데, 싸움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해가 저물므로 창을 휘두르니 해가 삼사(三舍)나 뒤로 되돌아갔다.” 하였는데, 삼사는 28수(宿) 중 별 세 자리라 한다.
♣ 휘근수[揮斤手]초(楚) 나라 영인(郢人)이 자기 코끝에다 파리 날개 만한 흙을 바르고 장석(匠石)을 시켜 그를 깎아내라 하자, 장석이 자귀를 휘둘러 그 흙을 완전히 깎아냈는데도 코는 아무렇지 않았다 한다.
♣ 휘근착[揮斤斲]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에 “옛날 초(楚) 나라 서울 영(郢)에 사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코 끝에다 흰 흙을 파리 날개처럼 얇게 발라 놓고 목수로 하여금 그 흙을 떼어내도록 하자, 목수가 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자귀를 휘두르되 코는 상하지 않고 흙만 사뿐히 떼어냈다.” 한 고사가 있다.
♣ 휘금[揮金]벼슬을 그만두고 편안하게 즐기면서 만년(晩年)을 보내는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의 태부(太傅) 소광(疏廣)이 나이가 많이 들어 은퇴하자, 선제(宣帝)와 황태자가 많은 황금을 선물로 주었는데, 고향에 돌아와서 날마다 주연을 베풀며 이 황금을 소비했던 고사가 있다.《漢書 疏廣傳》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사리상 휘금해야 마땅하리니, 옥패(玉佩) 소리 울리는 일 어찌 내 몸에 맞으리요.[揮金應物理 拖玉豈吾身]”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0 秋日寄題鄭監湖上亭 三》
♣ 휘당[麾幢]관원이 순행(巡行)할 때의 기치(旗幟)를 말한다.
♣ 휘명[諱名]이름을 휘함.
♣ 휘묵[徽纆]죄에 걸림을 뜻함. 휘는 세 겹으로 된 밧줄을 말하고, 묵은 두 겹으로 된 밧줄을 말한 것으로 모두 죄인을 포박하는 데 쓰는 것이다.
♣ 휘성협국풍[徽聲恊國風]군자의 배필이 되기에 적합한 요조숙녀(窈窕淑女)였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국풍(國風) 주남(周南) 관저(關雎)에 “窈窕淑女 君子好逑”라 하였다.
♣ 휘쇄만의진[揮洒滿衣塵]진(晉) 나라 유량(庾亮)이 위세를 부리는 것을 왕도(王導)가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바람이 불어 먼지가 휘날리면 “유량의 먼지가 사람을 오염시킨다.”고 하면서 부채로 먼지를 털어 내었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輕詆》
♣ 휘옥주[揮玉麈]옥 불자[玉麈]는 아름다운 먼지떨이를 가리키는데, 진(晉) 나라 때 사람들이 청담(淸談)을 나눌 적에 매양 이 불자를 휘둘렀던 데서 온 말로, 즉 조용히 담화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 휘유[徽柔]아름다운 도리로 백성을 다스려 화락하게 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 휘음[徽音]원래 휘금(徽琴)이라는 거문고 소리인데, 후비의 아름다운 덕행과 언어를 뜻한다.
♣ 휘일퇴[揮日退]회남자(淮南子) 각명훈(覺冥訓)에, “전국 시대 때 초(楚) 나라의 노양공(魯陽公)이 군대를 거느리고 한(韓) 나라의 군대와 싸움을 하였는데, 싸움이 한창 달아올랐을 때 하늘의 해가 저물었다. 이에 노양공이 창을 한 번 휘두르자 하늘의 해가 3사(舍)를 뒤로 물러났다.” 하였다.
♣ 휘전[徽纏]포승(捕繩)의 별칭.
♣ 휘정[彙征]휘정은 떼지어 나온다는 뜻. 주역(周易) 태괘(泰卦) 초구효사(初九爻辭)에 “띠 뿌리를 뽑는 상(象)이라 떼지어 나오니 길하다.[拔芧茹 以其彙征吉]" 하였는데, 이는 태평세상을 만나 현인(賢人)들이 위로 나아가려는 뜻을 품고 서로서로 추천해서 진출하는 상이라 한다.
♣ 휘주객[麾麈客]고라니[麈] 꼬리는 먼지를 잘 제거하는 것인데, 그것을 자루[柄]에다 꽂아서 먼지를 터는 것이므로, 진(晉) 나라의 명사(名士)들이 청담(淸談)을 할 때에 반드시 손에 주미를 쥐고 이리저리 흔들면서 이야기하였다. 주미의 자루를 백옥(白玉)으로 하였다.
♣ 휘필경운연[揮筆傾雲煙]두보(杜甫)의 시에, “이백(李白)은 술 한 말에 시 백 편, 붓을 휘두르면 땅에 떨어져 구름 연기와 같다.” 하였다. 이것은 문장을 잘한다는 말이다.
♣ 휘호장전[揮毫張顚]초성(草聖)으로 일컬어지는 당(唐) 나라의 장욱(張旭)이 술에 취하면 문득 초서(草書)를 쓰곤 하였는데, 운필(運筆)을 할 때 크게 부르짖으며[揮毫大呼] 머리카락에 먹물을 묻혀서 휘갈겨 쓰곤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미치광이 장욱[張顚]’이라고 불렀다 한다. 《書斷 張旭ㆍ新唐書 卷202》
♣ 휘휘[徽徽]아름다운 모양
♣ 휘휘[暉暉]하늘이 맑아 밝은 모양
♣ 휴[蠵]큰 거북의 일종이다.
♣ 휴간수상포[休看水上泡]물거품을 보면 오늘의 놀이도 아쉽고 허망한 생각이 들 것이라는 뜻이다.
♣ 휴광매호소회자[休光每護昭回字]시경(詩經) 대아(大雅) 운한(雲漢)에 “환한 저 은하수가 밝게 하늘에서 운행한다.” 하였다. 주 선왕(周宣王)이 여왕(厲王)의 뒤를 이어, 혼란했던 정치를 바로잡으려 할 때, 가뭄을 걱정하여 은하수를 바라보며 하늘에게 빌었는데 이 시는 잉숙(仍叔)이 이 일을 아름답게 여겨 지었다 한다.
♣ 휴구[休咎]휴구는 화복(禍福)과 같은 말로, 정치를 하는 데에 있어 이 다섯 가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화복이 정해진다는 뜻이다. 《書經 洪範》
♣ 휴기사[携妓謝]진(晋) 나라의 사안은 산천을 유람하면서도 반드시 기생을 수종시켰다고 함.
♣ 휴기위기[携妓圍碁]사안이 동산에 은거해 있을 때 산천을 유람하면서 늘 기생을 데리고 다녔다 한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되어 출정(出征)하여, 조카인 사현(謝玄) 등을 보내 막게 하고는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마침 승전보(勝戰譜)를 알리는 편지가 당도하자 그는 편지를 읽어보고는 기쁜 기색이 없이 태연히 바둑을 두었다. 이에 손님이 어떻게 되었는가 묻자, 사안은 느릿한 목소리로 “아이들이 적을 물리쳤다는군.” 하였다. 그러나 바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너무 기쁜 나머지 문지방에 걸려 나막신 굽이 부러진 줄도 몰랐다 한다. 《晉書 卷七十九 謝安列傳》
♣ 휴기재동산[携妓在東山]동진(東晉) 때 사안(謝安)이 처음 동산(東山)에 은거하였는데, 그는 비록 산수(山水) 간의 청흥(淸興)을 즐기면서도 매양 유상(游賞)할 때는 반드시 기녀(妓女)를 수행시키곤 하였다.
♣ 휴덕[休德]미덕.
♣ 휴문[休文]휴문은 남조(南朝) 양(梁)나라 심약(沈約)의 자이다.
♣ 휴문대감위[休文帶減圍]양(梁) 나라 심약(沈約)의 자가 휴문이다. 그가 친하게 지내던 벗인 서면(徐勉)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병세를 말하면서, “뒤의 차도(差度)가 앞의 차도만 못하고 뒤의 위독함이 앞의 위독함보다 심하여 백 일에 수십 일은 늘 혁대(革帶)의 구멍을 옮겨야 하는 처지입니다.” 하였다.
♣ 휴문수[休文瘦]휴문(休文)은 심약(沈約)의 자. 송 나라 육구몽(陸龜蒙)의 시에 “나 또한 휴문처럼 야위었는데 그대는 숙보마냥 청아하구려[我亦休文瘦 君能叔寶淸].” 하였다.
♣ 휴성[虧成]휴성(虧成)은 결함과 완전, 성공과 실패를 뜻하는 말로, 세상 일에 손을 대면 결함이 생기고 아예 손을 대지 않으면 완전해진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가야금의 명인 소문(昭文)이 연주를 하면 성(成)과 휴(虧)가 있고, 연주를 하지 않으면 성과 휴가 아예 없어진다.” 하였다.
♣ 휴양[睢陽]춘추시대 송(宋)나라의 땅.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시(商邱市).
♣ 휴언아마수군마[休言我馬殊君馬]처지는 비록 다를지라도 의기(意氣)는 서로 투합한다는 말이다. 이백(李白)의 군마황(君馬黃)이라는 시 가운데 “그대는 노랑 말, 나는 흰 말. 말 색깔은 달라도 마음은 본래 격의 없네.[君馬黃 我馬白 馬色雖不同 人心本無隔]”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李太白集 卷5》
♣ 휴언제갈사[休言諸葛死]인품이 훌륭한 사람은 죽어도 산 것과 다름없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침을 비유한 말이다. 삼국(三國) 시대 촉한(蜀漢)의 제갈량이 오장원(五丈原)의 진중(陣中)에서 죽자, 부하인 강유(姜維) 등이 제갈량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군대를 인솔하여 퇴각할 적에 위(魏)의 사마의(司馬懿)가 촉군(蜀軍)의 퇴각 소식을 듣고 추격해오다가 촉군이 응전(應戰)하는 자세로 퇴각하는 것을 보고는, 제갈량의 죽음을 알지 못한 그는 제갈량을 두려워하여 후퇴하였으므로, 이때 백성들이 사마의를 겁쟁이로 여겨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도망치게 했다.”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三國志 諸葛亮傳 注》
♣ 휴언출산초[休言出山草]끝내 은거할 것을 다짐한 말로 산을 나간 풀이란 곧 원지(遠志)를 가리킨다. 동진(東晉) 때에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 은거하다가 대사마(大司馬) 환온(桓溫)의 부름을 받고 처음으로 나갔을 적에 마침 어떤 이가 환온에게 원지를 보내왔으므로, 환온이 사안에게 “이 약초의 일명은 소초(小草)이니, 어찌하여 한 약초를 두 가지로 부르는가?”하고 물으니, 사안이 즉시 대답하지 못하므로, 이때 곁에 있던 학륭(郝隆)이 곧바로 대답하기를 “이것은 매우 알기 쉽습니다. 산에 그대로 있을 때는 원지이고 산을 나가면 소초가 되는 것입니다.” 하자, 사안이 매우 부끄러워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은자(隱者)가 다시 세상에 나가 벼슬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世說新語 排調》
♣ 휴욕[休浴]휴가(休暇)와 같은 말임. 한(漢) 나라 법에 관리가 근무한 5일 만이면 한 차례의 휴욕(休浴)을 얻는데, 휴식하며 목욕한다는 뜻임.
♣ 휴유주선짐[携幼酒先斟]도잠(陶潛)의 시 가운데에 “기장 찧어 맛좋은 술을 빚고는, 술 익으면 나 혼자 맛을 본다오. 내 옆에선 어린 아기 재롱 떠는데, 말을 배우는지라 대체 무슨 소린지.[舂秫作美酒 酒熟吾自斟 弱子戲我側 學語未成音]”라는 구절이 나온다. 《陶淵明集 卷2 和郭主簿》
♣ 휴전[休傳]전하지 말라.
♣ 휴징[休徵]휴징은 서경(書經) 홍범(洪範)의 복서(卜筮)에 관한 길조(吉兆)를 말하는데, 시우(時雨)ㆍ시풍(時風)을 모두 휴징(休徵)이라 하였다.
♣ 휴휴[休休]도를 즐겨 마음 편안히 지내는 모양, 마음이 너그러운 모양, 아름답고 큰 모양
♣ 휴휴[咻咻]앓는 소리, 입김이 나오는 모양, 호흡하는 모양
♣ 휴휴[休休]휴휴는 선미(善美)함을 뜻한다. 《書經 周書 秦誓》
♣ 휼[譎]속임수.
♣ 휼간[譎諫]바로 말을 하지 않고 빗대서 말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을 이름. 가어(家語) 변정(辯政) 편에, “충신(忠臣)이 임금을 간함에 다섯 가지 의(義)가 있으니, 첫째 휼간이다.” 하였음
♣ 휼주[恤酒]술 잘마시던 허봉(許篈)과 강서(姜緖)를 홍문관 소리(小吏)가 일컫던 말. 즉 애주(愛酒)와 같은 말임.
♣ 휼휼[恤恤]근심하는 모양
♣ 휼휼황황[矞矞皇皇]만물이 봄을 당하여 발양(發揚)하고 생장(生長)하는 모습을 말한 것임.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에 “物登明堂 矞矞皇皇"이라 하였음.
♣ 흉노치백년[匈奴値百年]오랑캐는 백 년의 운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오랑캐가 망할 때가 왔다는 말이다.
♣ 흉도[兇徒]두보의 시에 “北闕任群兇”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군흉은 토번(吐蕃)의 군사를 유도한 고휘(高暉)ㆍ왕헌충(王獻忠) 등의 무리를 가리킨다.
♣ 흉리함[胸裏函]속에 품고 있는 학문이 넉넉하다는 뜻이다. 한 나라 때 변소(邊韶)가 뱃속에다가 오경(五經)을 모두 품고 있었다고 한다.
♣ 흉만갑[胸萬甲]가슴속에 만 명의 갑병(甲兵)이 들어 있는 것처럼 훌륭한 지략이 있다는 뜻이다.
♣ 흉수[凶水]북방의 강 이름.
♣ 흉억장과간[胸臆藏戈干]위세(威勢)가 대단함을 비유한 말이다.
♣ 흉외뢰[胸磈磊]진(晉)나라 완적(阮籍)이 말하기를, “가슴에 생긴 불평 덩이가 있어서 술을 부어야 한다.” 하였다.
♣ 흉유성죽[胸有成竹]매사에 착수하기 전에 이미 충분한 복안이 서 있다란 뜻의 고사성어.
♣ 흉중갑[胸中甲]가슴속으로 치밀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말이다. 위(魏)의 최호(崔浩)와 송(宋)의 범중엄(范仲淹)의 고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통 “胸中十萬兵”, “胸中甲兵”의 숙어로 사용된다.
♣ 흉중생진[胸中生塵]가슴에 먼지가 생긴다. 사람을 잊지 않고 생각은 오래 하면서 만나지 못함을 일컫는 말이다.
♣ 흉중성죽[胸中成竹]대나무를 그리기에 앞서 이미 가슴속에 대나무가 이루어져 있음. 일을 처리함에 있어 마음속에 이미 빈틈없는 계획이나 방법이 이루어져 있어야 함
♣ 흉중운몽[胸中雲夢]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에 “가을에 청구(靑丘)에서 사냥을 하고 멀리 동해 밖에서 자유로이 노닐며 운몽택과 같은 8~9 개의 큰 늪을 목구멍에 삼켜도 가슴에 전혀 막히지 않는다.” 한 것에서 나온 말로, 넓은 강산이 자신의 도량과 견줄 만하다는 것이다. 운몽택은 오늘날 호북(湖北) 안륙현(安陸縣) 남쪽에 위치하였던 초(楚) 나라의 이름난 큰 늪의 이름이다. 《史記 卷一百一十七 司馬相如傳》
♣ 흉중지거륜력록[胸中之車輪轣轆]고통으로 말미암아 가슴속에 먼지가 끼어 있다는 비유이다.
♣ 흉최외[胸崔嵬]완적(阮籍)이 말하기를, “가슴속에 덩어리가 있기 때문에 술을 마시어 거기에 붓는다.” 하였다.
♣ 흉탄운몽[胸呑雲夢]가슴속이 매우 광대함을 이름.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上林賦)에 “초(楚) 나라의 운몽택은 사방이 9백 리나 되는데, 운몽택 같은 것 8, 9개를 삼켜도 가슴속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흉허[凶墟]반신(叛臣)의 궁실(宮室)을 허물고 오지(汚池)로 만든 곳을 가리킨다.
♣ 흉회운몽[胸懷雲夢]문장으로 학식이 풍부한 것을 가슴속에 운몽(雲夢)같은 큰 호수가 일곱 여덟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 흉흉[恟恟]두려워서 어수선한 모양
♣ 흉흉[洶洶]법석대고 떠듦, 파도가 어지럽게 일어나 세찬 모양, 두려워 떠는 모양, 시끄러운 소리, 다투며 호소하는 모양
♣ 흉흉[兇兇]썩 거친 모양, 시끄럽게 떠들며 다투는 모양, 두려워하는 모양
♣ 흉흉[哅哅]큰소리로 떠드는 소리, 또는 소란한 모양
♣ 흑곤륜[黑昆侖]흑곤륜은 옛날 남해(南海)에서 수입해온 흑인 노예(黑人奴隷)의 종족을 가리킨다.
♣ 흑두공[黑頭公]젊어서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이른다.
♣ 흑두삼공[黑頭三公]젊은 정승을 말한다. 송(松)자는 공(公)자가 있으므로 솔을 정승될 징조에 인용(引用)한다.
♣ 흑룡[黑龍]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에 “천금(千金)의 구슬이 저 깊은 바다 속 흑룡의 턱 아래에 숨겨져 있다.”라고 하였다. 여룡(驪龍)은 흑색의 용을 말한다.
♣ 흑삭장군[黑槊將軍]후위(後魏) 우율제(于栗磾)를 가리킴. 그는 무예(武藝)가 남보다 뛰어나 흑삭(黑矟)을 즐겨 사용하고 말을 달리면서 좌우로 활을 쏘기도 하였다. 유유(劉裕)가 요홍(姚泓)을 치려고 하면서 그에게 작전 도로를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편지에 ‘흑삭공(黑矟公) 휘하(麾下)’라고 써서 보내니, 율제가 장(狀)을 올려 아뢰자, 태종(太宗)이 허락하면서 흑삭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삭(槊)은 삭(矟)과 같다. 《魏書 卷三十一 于栗磾傳》
♣ 흑산융[黑山戎]후한(後漢) 말에 하북(河北) 지방을 점거한 황건적(黃巾賊)으로, 청(淸) 나라 군대를 가리킨다.
♣ 흑수[黑水]곤륜산(崑崙山)에서 나오는 물 이름
♣ 흑수[黑水]백호(白湖) 윤휴(尹鑴)를 가리키는 말. 그가 여주의 여강(驪江)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와 대립하였던 노론(老論)측에서 일컫는 말로, 원래 ‘여휴(驪鑴)’라 했던 것인데, ‘여(驪)’자는 ‘검다’는 뜻이므로 흑(黑)이라 바꾸어 소인(小人)의 뜻으로 쓴 것이며, 강(江)은 물(水)이므로 이를 합하여 ‘흑수’라 한 것이다.
♣ 흑수[黑水]흑룡강(黑龍江)을 말한다. 금사(金史) 세종기(世宗紀)에 “여진(女眞) 출신으로, 그 지역에 혼동강(混同江)과 장백산(長白山)이 있었는데, 혼동강은 또한 흑룡강이라고도 불렀으니, 이른바 ‘백산 흑수(白山黑水)’가 바로 그것이다.” 하였다.
♣ 흑수현지[黑水玄阯]문선(文選) 서경부(西京賦) 주에, “黑水玄阯 謂昆明靈沼之水阯也 水色黑故曰玄阯也”라고 보임.
♣ 흑우생백독[黑牛生白犢]검은 소가 흰 송아지를 낳았다는 말로, 재앙이 복이 되기도 하고 복이 재앙이 되기도 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흑운저지횡[黑雲低地橫]임금이 미행한다는 뜻. 한 고조(漢高祖)가 대업(大業)을 이루기 전에 망탕산(芒碭山)에 숨어 있었는데, 그가 있는 곳에는 늘 검은 운기(雲氣)가 서려 있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흑의랑[黑衣郞]흑의랑(黑衣郞)은 왕궁의 시위(侍衛)이다.
♣ 흑자사[黑子絲]안씨가훈(顔氏家訓) 모현(慕賢)에 “묵자가 실을 물들이는 사람을 보고서 탄식하며 ‘파랑색을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랑색을 물들이면 노랗게 되니 물드는 것이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했다.” 하였음.
♣ 흑접부[黑蝶賦]흑접부는 흑색의 나비를 읊은 부로 남조(南朝) 때의 은사(隱士) 심인사(沈麟士)가 지었다. 그는 여러 사람의 추천을 뿌리치고 늙도록 독서에 힘썼으며, 일찍이 흑접부를 지어 자기의 뜻을 부치었다. 《南史 沈麟士傳》
♣ 흑제[黑帝]겨울을 맡은 신(神)이다.
♣ 흑책정사[黑冊政事]고려시대 정사(政事)가 문란한 것을 비웃던 말. 흑책(黑冊)이란 아동들이 쓰는 후지(厚紙)에다 검은 색과 기름을 먹여 글씨를 연습하게 하는 종이인데, 정사에 관한 문서가 너무도 지저분하고 복잡했으므로 여기에 비유해서 이른 말이다. 즉 인물에 대한 전주(銓注)를 할 때에 그것을 멋대로 고치고 바꾸고 하여 그 문서의 주묵(朱墨)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 흑첨향[黑甛鄕]흑첨(黑甛)은 낮잠 자는 데에 비유한 말로 캄캄하고도 맛이 달다는 뜻이다. 서청시화(西淸詩話)에 “남쪽 사람은 술마시는 것을 연포(軟飽)라 하고, 북쪽 사람은 낮잠 자는 것을 흑첨(黑甛)이라 한다.” 하였다.
♣ 흑초[黑草]사행(使行) 때 진주(陳奏)하기 위하여 작성하는 표문(表文)이나 주문(奏文)의 초안(草案)을 말한다.
♣ 흑치[黑齒]남쪽 야만(野蠻)의 나라를 이름.
♣ 흑풍취동연산북[黑風吹動燕山北]북송(北宋) 말기에 연경(燕京)이 금(金) 나라 오랑캐의 침입으로 함락되고, 송 나라는 결국 양자강(揚子江) 남쪽으로 쫓겨갔던 사실을 뜻한다.
♣ 흑화[黑花]돌보아줄 사람도 없이 고독하게 늙어 가는 병든 몸이라는 말이다. 흑화는 시력이 떨어져 눈이 침침해지는 것을 표현한 시어(詩語)이다.
♣ 흔석[狠石]마치 엎드린 양(羊)처럼 생긴 돌을 말한다.
♣ 흔흔[慁慁]근심으로 마음이 어지러운 모양
♣ 흔흔[忻忻]기뻐하는 모양
♣ 흔흔[欣欣]기뻐하는 모양, 스스로 만족하는 모양, 초목이 무성하고 신선한 모양
♣ 흔흔[掀掀]높이 솟은 모양, 높이 치켜드는 모양
♣ 흔흔[昕昕]밝은 모양, 환히 아는 모양
♣ 흘간산두동살작[紇干山頭凍殺雀]당(唐) 나라 때 “흘간산 꼭대기 얼어 죽는 참새들, 어찌하여 좋은 곳에 날아가 살지 않나.[紇干山頭凍殺雀 何不飛去生樂處]”라는 말이 유행하였는데, 당(唐) 나라 소종(昭宗)이 떠돌아다니다 이 말을 거론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資治通鑑 唐昭宗 天佑元年》
♣ 흘간산두무동작[紇干山頭無凍雀]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하층민들도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말이다. 흘간산(紇干山)은 일명 흘진산(紇眞山)으로, 여름에도 늘 눈이 쌓여 있기 때문에 “흘진산 꼭대기 참새 한 마리 죽었구나, 어찌하여 날아가서 즐겁게 살지 못했는고[紇眞山頭凍死雀 何不飛去生處樂]”라는 속요(俗謠)가 있었다고 한다. 《讀史方輿紀要 山西 大同府 大同縣》
♣ 흘흘[吃吃]껄껄웃는 모양, 또는 그 소리
♣ 흘흘[仡仡]높고 큰 모양, 힘세고 용맹스러운 모양
♣ 흘흘[屹屹]산이 높이 우뚝 솟은 모양
♣ 흠마[廞馬]출상(出喪) 때에 견거(遣車)를 끄는 말. 견거는 생체(牲體)를 싣는 수레이다.
♣ 흠명[欽明]요임금의 덕.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옛날 요 임금을 상고해 보건대 공경하고 밝았다.[欽明]" 하였음.
♣ 흠앙[欽仰]흠모하여 우러르다.
♣ 흠전[欠典]잘못된 전례(典禮)를 말한다.
♣ 흠흠[欽欽]사모하여 잊지 못하는 모양, 삼가는 모양, 걱정하는 모양, 종소리가 가락에 맞는 모양
♣ 흡흡[吸吸]구름이 움직이는 모양, 슬퍼하는 모양
♣ 흡흡[洽洽]넉넉하고 부드러운 모양
♣ 흡흡[恰恰]새의 울음 소리, 때마침, 화합함
♣ 흡흡[歙歙]일치하는 모양, 걱정하는 모양
♣ 흥경원[興慶園]인조(仁祖)의 친부모인 정원군(定遠君)과 계운궁(啓運宮)의 묘소 이름이다. 뒤에 조정 신하들의 많은 논란 끝에 정원군과 계운궁이 각각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됨에 따라 흥경원도 장릉(章陵)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김포읍(金浦邑) 풍무리(豐舞里)에 있다.
♣ 흥공[興公]흥공은 진(晉) 손작(孫綽)의 자(字). 어려서부터 고상한 뜻을 지녔으며 박학(博學)하고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그가 지은 수초부(遂初賦)와 천태산부(天台山賦)는 세상에 유명하다.
♣ 흥공부수초[興公賦遂初]흥공(興公)은 진(晉) 나라 손작(孫綽)의 자(字)이다. 손작이 젊어서 산수(山水)에 노닐며 은거하는 고상한 생활을 할 뜻을 수초부(遂初賦)로 표현하였다.
♣ 흥공수초[興公遂初]흥공은 진(晉) 나라 때 손작(孫綽)의 자이고, 수초(遂初)는 벼슬을 버리고 야인(野人)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숙망을 이룬다는 뜻인데, 손작이 일찍이 고상한 뜻이 있어 이에 수초부(遂初賦)를 지어서 자신의 뜻을 피력했었다. 《晋書 孫綽傳》
♣ 흥기여[興起予]공자가 복상(卜商)과 시(詩)를 말하다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나를 흥기시키는 이는 상(商)이므로, 같이 시를 말할 만하구나.” 하였다.
♣ 흥노[興奴]당(唐) 나라 때 특히 비파(琵琶)를 잘 타기로 유명했던 배흥노(裵興奴)를 말한다.
♣ 흥례[興禮]울산(蔚山)의 고호임.
♣ 흥망성쇠[興亡盛衰]흥함과 망함, 번성함과 쇠퇴함. 흥하여 번성함과 쇠하여 멸망함
♣ 흥진도문회[興盡到門廻]진(晉) 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밤눈[夜雪]이 막 개고 달빛이 청명하자 갑자기 섬계(剡溪)에 있는 친구 대규(戴逵)가 문득 생각나서, 배를 타고 밤새도록 갔다가 막상 대규의 집앞에 당도해서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되돌아왔는데, 누가 그 이유를 묻자 “내가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서 되돌아온 것이니, 꼭 안도(安道)를 볼 필요가 있는가.”고 답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八十 王徽之傳》
♣ 흥진방환[興盡方還]진(晉) 나라 왕자유(王子猶)가 눈 오는 밤에 배를 타고 섬계(剡溪)로 대안도(戴安道)를 찾아갔으나,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흥이 나 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니 하필 안도를 보아선 무엇하리오[乘興而來 興盡而去 何必見].” 하였다.
♣ 흥진비래[興盡悲來]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픔이 옴. 흥망과 성쇠가 엇바뀜을 일컫는 말
♣ 흥진회도[興盡回棹]진(晉) 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일찍이 산음(山陰)에 살 적에 어느 날 밤 눈이 막 개고 달빛이 청량하자, 문득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戴逵)가 생각나므로, 즉시 조그마한 배를 타고 대규의 집을 향하여 밤새도록 가서 그의 집 문 앞까지 가서는 들어가지 않고 배를 돌려 되돌아왔다. 그러자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본디 흥이 나서 왔다가 흥이 다하여 되돌아가는 것이니, 어찌 꼭 안도(安道; 대규의 자)를 만나볼 것이 있겠는가.”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八十》
♣ 흥진회선[興盡回船]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눈 내린 밤에 친구 대안도 생각이 나서 그 집 앞까지 배를 저어 갔다가 그냥 돌아왔는데, 누가 그 이유를 물으니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서 돌아왔다.[乘興而行 興盡而返]”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任誕》
♣ 흥폐[興廢]시경(詩經) 대서 소(大序疏)에 “왕자(王者)의 정사에는 흥폐(興廢)가 있다. 그래서 신령들에게 제사 지내지 않은 적이 또한 없다. 하지만 태평한 정치를 이루지 못하면 신령에게서 은혜로운 힘을 기대할 수도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태평 정치를 이루는 것이 신공(神功)에 보답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 희강[姬姜]희씨(姬氏)ㆍ강씨(姜氏). 희(姬)는 주(周) 나라 성(姓)이고. 강(姜)은 제(齊) 나라 성인데 큰 나라였으므로 그 국족(國族)의 여자에 대한 통칭이었으나, 미녀(美女)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두 성씨가 항상 혼인 관계를 맺곤 하였다 한다. 《左傳 成公 9年》
♣ 희견[餼牽]공가(公家)에서 공급하는 음식이다.
♣ 희경[羲經]복희씨(伏羲氏)가 지은 경서라는 뜻으로 주역(周易)을 가리킨다.
♣ 희고[希古]자신도 훌륭한 고인(古人)처럼 되기를 희망함을 뜻한다.
♣ 희고역운원[豨膏易運圓]돼지 기름은 수레 굴대에 발라서 바퀴가 잘 굴러가게 하는 것인데, 송(宋) 나라 소식(蘇軾)의 술고이시견책루불부회시(述古以詩見責屢不赴會詩)에 “청명한 때에 누차 밀어준 건 고마우나 돼지 기름이 어찌 모난 바퀴를 굴릴 줄 알랴[多謝淸時屢推轂豨膏那解轉方輪]” 한 데서 온 말이다.
♣ 희공술[姬公術]희공은 주공(周公)을 이른 말로, 일설에 주공이 지었다고 하는 구장산술(九章算術) 즉 방전(方田)ㆍ속미(粟米)ㆍ차분(差分)ㆍ소광(少廣)ㆍ상공(商功)ㆍ균수(均輸)ㆍ영부족(嬴不足)ㆍ방정(方程)ㆍ구고(句股) 등 아홉가지 최초의 산법(算法)을 말한다.
♣ 희공음[喜跫音]궁벽한 곳에 외로이 있으면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반갑게 여긴다는 데서 온 말로, 친구가 찾아온 것을 비유한 말이다. 《莊子 徐無鬼》
♣ 희구[喜懼]어버이의 연세가 고령(高齡)이라는 말이다.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어버이의 연세를 자식들은 주목해야 할 것이니, 한편으로는 오래 사셔서 기쁘고 한편으로는 쇠해지셔서 두려운 마음이 들게 될 것이다.[父母之年不可不知 一則以喜 一則以懼]”라고 한 공자의 말이 있다.
♣ 희구이위구[戲韭以爲九]남제(南齊) 때 유고지(庾杲之)가 매우 청빈하여 밥 먹을 때면 매양 구저(韭葅)ㆍ약구(瀹韭)ㆍ생구(生韭)로만 반찬을 하므로, 임방(任昉)이 희롱하기를 “그 누가 유랑(庾郞)이 가난하다고 했는가. 식탁에 항상 27종의 반찬이 오르는 걸.” 하였는데, 27종이라는 것은 곧 3×9〓27의 뜻으로 ‘韭’의 음이 ‘구’이기 때문에 구(九)자의 뜻으로 해석하여 농담을 붙인 것이다. 《南齊書 卷三十四 庾杲之傳》
♣ 희기선종저처생[噫氣先從底處生]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저 대지가 숨을 내뿜는 것, 그것을 바람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이 오직 불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번 불어왔다 하면 일만 개의 구멍이 성내어 부르짖기 시작한다.[夫大塊噫氣 其名爲風 是唯無作 作則萬竅怒呺]”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 희년[稀年]두보(杜甫)의 시 곡강(曲江)에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나온 것으로, 나이 70세를 뜻한다.
♣ 희노동군저[喜怒同群狙]장자(莊子)에, “저공(狙公)이 잔나비를 기르는데 하루에 밤을 일곱 개씩 주는데, 아침에 세 개를,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 하니 뭇 잔나비들이 성을 내다가 다시 아침에 네 개를,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 하니 잔나비들이 기뻐하였다.” 했다. 실제는 같은데 기뻐함과 성냄이 다르다는 뜻이다.
♣ 희노애락[喜怒哀樂]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 사람이 느끼는 온갖 감정
♣ 희노임군저[喜怒任群狙]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던 저공(狙公)이 여러 원숭이에게 상수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성내므로,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씩을 주겠다고 하니, 그제는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齊物論》
♣ 희농[羲農]희농은 상고 시대 제왕인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와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를 합칭한 말이다. 중국 전설시대에 처음으로 짐승을 기르기 시작한 사람을 복희(伏羲)라 하였고, 처음으로 농사짓기 시작한 사람을 신농(神農)이라 이름하였다.
♣ 희단거동[姬旦居東]희단(姬旦)은 주공(周公)을 말함. 희는 주(周) 나라의 성이고, 단은 주공의 이름임. 주 무왕(周武王)이 죽고 아들 성왕(成王)이 즉위하였으나, 성왕이 어리므로 주공이 그를 도와 섭정(攝政)을 하자, 주공의 형인 관숙(管叔)ㆍ채숙(蔡叔)이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과 함께 모반을 하고 또 나라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주공이 성왕에게 불리할 것이다.”고 하므로, 주공이 그들을 정벌차 동쪽으로 나가 2년 동안 있으면서 그들을 모두 베어 죽이고 인심을 진정시킨 사실을 말한다. 《史記 魯周公世家》
♣ 희도[姬度]주 무왕(周武王)의 아우 채숙(蔡叔)을 이름. 도(度)는 그의 이름임. 무왕이, 관숙(管叔)과 함께 주의 아들 무경(武庚)의 봉국(封國)인 은(殷)을 감시하도록 하였는데, 끝에 가서 유언(流言)을 퍼뜨리고 무경과 함께 반(叛)하였음. 《孟子 公孫丑 下》
♣ 희령공자[熙寧孔子]희령은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이고, 공자(孔子)는 바로 송 신종 때에 재상(宰相)으로 있으면서 신법(新法)을 만들어 시행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던 왕안석(王安石)을 비유한 것인데, 맨 처음 그를 공자라 칭하게 된 고사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 희륜[羲輪]일어(日馭)의 이칭임. 희화(羲和)가 모는 수레라는 뜻으로, 흐르는 세월을 가리킨다. 희화가 여섯 필의 말이 끄는 수레 위에 태양을 싣고 날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운행한다는 전설이 있다. 《初學記 卷1 引 淮南子》
♣ 희린[戲麟]진실이 없는 것은 끝내 가짜임이 나타난다는 뜻으로 기린 놀이를 들어서 한 말. 기린 놀이는 나귀 위에다가 기린의 가죽을 입혀 마치 진짜 기린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데, 기린의 가죽을 벗기고 보면 도로 하나의 당나귀일 뿐이다.
♣ 희만가황죽[姬滿歌黃竹]주목왕(周穆王) 희만(姬滿)이 눈 속에 황죽가(黃竹歌)를 지어 불렀다.
♣ 희무파옹[喜舞破瓮]옛날 어느 사람이 밤에 자리에 누워서, “조그만 그릇을 가지고 장사를 하여 차차 항아리를 마련하고 더 보태어 큰 독[甕]을 사겠다. 그리하여 차차 부자[富]가 되겠다.”고 공상(空想)을 실컷 하다가 기뻐서 일어나 춤을 추던 끝에 옆에 있는 술독을 깨뜨렸다 한다.
♣ 희문[羲文]복희씨(伏羲氏)와 주 문왕(周文王)으로, 복희씨는 팔괘(八卦)를 그리고 주 문왕은 괘사(卦辭)를 지었다고 한다.
♣ 희문[希文]송(宋) 나라 때의 현상(賢相) 범중엄(范仲淹)의 자이다. 그는 특히 기절(氣節)을 숭상하였고, 위엄과 병략(兵略) 또한 뛰어나서, 그가 변방을 지킬 적에는 오랑캐들이 그를 용도노자(龍圖老子)라 호칭하였고, 또한 “소범노자(小范老子)의 가슴 속에는 수만(數萬)의 갑병(甲兵)이 들어 있다.”며 서로 경계하기까지 했었다. 《宋史 卷三百十四》
♣ 희문[羲文]희문은 성이 희씨(姬氏)인 문왕을 가리킨다.
♣ 희문우락[希文憂樂]희문은 송 나라 재상 범중엄(范仲淹)의 자인데 그의 악양루기(岳陽樓 記)에 “其必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라 하였음.
♣ 희반[戲斑]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떤다는 말로, 늙은 모친을 봉양하는 것을 가리킨다.
♣ 희백[希白]송(宋) 담주(潭州) 사람. 순화각첩(淳化閣帖)을 모각(摸刻)하여 담주 군재(郡齋)에 두었으므로 순화첩(淳化帖)을 담본(潭本)이라 하였음.
♣ 희백[羲伯]요(堯) 임금 때 천문(天文)ㆍ역상(曆象)을 맡은 관리.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이에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시어, 넓은 하늘을 받들어 따르게 하다.” 한 주에 “희씨는 곧 희백이다.” 하였다.
♣ 희사점촉화[喜事占燭華]촛불 심지에 꽃이 피면 재물을 얻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두보 시 “燈火何太喜"의 주석에 보임.
♣ 희생[犧牲]희(犧)나 생(牲)은 모두 제사 지낼 때 사람 대신에 썼던 소나 양 등의 살아 있는 짐승을 말함. 기독교의 구약에 자주 나오는 희생제사란 바로 살아 있는 소나 양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제사에 바쳐지는 희생물인 소나 양이 주인 대신에 바쳐지는 것처럼 남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내놓는 것을 말함.
♣ 희수[喜壽]77세. 喜를 초서로 쓴 글자를 위에서부터 보면 ‘七 十 七’이기 때문이다.
♣ 희수[稀壽]오래 살다 수(壽)자는 연세가 높은 경우에 사용하는데, 70세를 희수(稀壽)라 한다.
♣ 희신보[喜神譜]희신은 신태(神態)를 이름. 송 나라 때 속어(俗語)에 화상(畫像)을 희신이라 하였음. 송백인(宋伯仁)의 매화희신보(梅花喜神譜)가 있는데 그 안에 매화의 각종 형태를 그렸기 때문에 이른 것임.
♣ 희씨[姬氏]주(周) 나라 성씨이다.
♣ 희씨[犧氏]태양의 신인 희화(曦和)로, 여기서는 태양을 가리킨다.
♣ 희아[羲娥]해를 몬다는 신인 희화(羲和)와 달에 산다고 하는 항아(姮娥)로, 전하여 세월을 뜻한다.
♣ 희안지[希顔志]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희망하는 뜻을 말한 것이다.
♣ 희양[曦陽]광양(光陽)의 고호임.
♣ 희양[餼羊]매월 초하루에 조상의 사당에 제사지낼 때 희생으로 쓰는 양. 논어(論語) 八 佾에 “자공이 고삭례(告朔禮)에 쓰는 희양을 없애려고 하자, 공자께서 ‘사(賜; 자공의 이름)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 하였다. 여기서는 곧 벼루가 낡아 쓸모는 없으나 평소에 애용하던 정을 생각하여 그대로 보존하겠다는 뜻임.
♣ 희어[羲馭]해를 뜻한다. 고대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동부 바닷가 지역으로 해가 뜨는 곳이라 하였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희중(羲仲)에게 나누어 명하여 우이(嵎夷)에 머물게 하니 양곡(暘谷)이란 곳인데, 나오는 해를 공경히 맞이하였다.” 하였다.
♣ 희어[羲馭]희화(羲和)가 해를 몬다[馭]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해를 지칭한다. 희화는 고대 신화 속에 나오는 해를 모는 신이다.
♣ 희언[希言]들어도 들리지 않는 말.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서 나온 말임.
♣ 희와[義媧]희와는 복희씨(伏羲氏)와 여와씨(女媧氏)의 병칭으로, 이들이 부부 관계를 맺어 인류를 탄생시켰다는 중국의 신화가 있다. 《淮南子 覽冥訓》
♣ 희와[希窩]현덕승(玄德升)의 호이다.
♣ 희우[犧牛]장자(莊子) 열어구(列御寇)에 “그대도 희생용 소[犧牛]를 알고 있겠지. 비단옷에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이다가 태묘(太廟)로 끌고 들어가나니, 그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하였다.
♣ 희우정[喜雨亭]본디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정자인데, 이것을 바로 성종(成宗) 때에 와서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집을 고쳐 짓고 이름을 망원정(望遠亭)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성종은 매년 농사 때마다 여기에 거둥하여 농사일을 관찰했다고 한다.
♣ 희우표[喜雨表]감우(甘雨)를 기뻐하여 올리는 표문(表文).
♣ 희원야기잠[希元夜氣箴]희원은 송의 학자 진덕수(眞德秀)를 말한다. 그의 밤기운의 청신한 마음, 즉 물욕에 더럽혀지지 않은 마음을 길러야 한다는 뜻을 경계한 야기잠이 유명하다. 《西山文集 卷三十三 夜氣箴》
♣ 희이[希夷]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14장에 “보아도 안 보이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안 들리는 것을 희(希)라 한다.” 하였다. 인간 세상이 아닌 명계(冥界)를 가리킨다.
♣ 희이[希夷]송(宋)의 진박(陳博)을 말함. 진박이 오대(五代) 시절에 화산(華山)에 숨어살면서 도를 닦고 벽곡(辟穀)을 하여 한번 잠이 들면 1백여 일을 깨지 않고 계속 잤는데, 후에 송(宋)의 태조(太祖)가 등극하자 그제야 웃으면서 이제야 세상이 안정을 찾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종(太宗)은 그에게 희이선생(希夷先生)이라는 호를 내렸다. 《宋史 卷四百五十七》
♣ 희자[喜子]거미[蜘蛛]의 별칭인데, 거미가 내려오면 기다리는 사람이 온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 희절극[喜折屐]매우 기뻐한다는 뜻. 진서(晋書) 사안전(謝安傳)에 “사안은 그의 조카 사현(謝玄)이 부견(苻堅)을 격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도 전혀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두던 바둑을 계속하다가, 바둑을 끝내고 안으로 들어갈 적에야 속으로 얼마나 기뻤던지 나막신의 굽이 부러지는 줄도 몰랐다.” 하였다.
♣ 희주[姬周]주(周) 나라 무왕(武王)과 성왕(成王)을 보좌했던 주공(周公)을 가리킨다. 주공의 성(姓)이 희씨(姬氏)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 희주[姬周]희주는 희성(姬姓)인 주 문왕(周文王)을 이름.
♣ 희준[犧樽]소의 형상으로 만든 종묘(宗廟)의 제기(祭器).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백 년 된 나무를 깎아 술 그릇[犧樽]을 만들고 거기에 청황(靑黃)으로 꾸민 다음, 나머지 토막들은 구덩이 속에 내버리는데, 희준과 그 토막들이 미추(美醜)의 차이는 있다 해도, 본성(本性)을 잃은 점에서는 똑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 희지구만전[羲之九萬牋]진(晋) 나라 왕희지(王羲之)가 회계내사(會稽內史)가 되었을 적에, 사안(謝安)이 가서 종이를 달라고 청하였더니, 고(庫)에 전지(牋紙)가 9만(萬) 장이 있었는데 모두 내 주었다.
♣ 희지적[羲之炙]자신을 알아주어 우대함을 뜻한다. 왕희지가 주의(周顗)를 찾아 본 일이 있었는데, 의가 보고 기특히 여겨 당시 귀하게 여기던 우심적(牛心炙)을 자리에 있는 손님을 제쳐놓고 먼저 희지에게 먹였다. 이로 인하여 희지의 이름이 알려졌다. 《晉書 王羲之傳》
♣ 희창[姬昌]주(周) 나라 문왕(文王)을 가리킨다. 희는 주 나라의 성씨이고, 창은 문왕의 이름이다.
♣ 희채[戲彩]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나이 많은 자식이 색동옷을 입고 부모님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을 말한다. 북당서초(北堂書鈔) 제129권에,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세에 부모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항상 색동옷을 입고서 어린아이 시늉을 하면서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하였다.
♣ 희편[羲鞭]희화(羲和)는 해[日]가 탄 수레를 몰고 다니는 자. 이백(李白)의 장가행(長歌行)에, “큰 힘으로 하늘 땅이 돌아가는데 희화의 채찍 멎을 때가 없다네.[大力運天地 羲和無停鞭]"하였음.
♣ 희헌[羲軒]상고 시대의 성왕이었던 태호 복희씨(太昊伏羲氏)와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를 합칭한 말이다.
♣ 희헌[羲獻]희헌은 진(晉) 나라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와 그의 아들 헌지(獻之)를 말함.
♣ 희홍[戲鴻]명(明) 나라 동기창(董其昌)이 진(晉), 당(唐) 이래의 서법(書法)을 모각(摹刻)해서 16권으로 만든 서첩(書帖) 이름이다.
♣ 희홍[戲鴻]훌륭한 글씨를 말한다. 서법요록(書法要錄)에 “종요(鍾繇)의 글씨는 의기(意氣)가 넘쳐 마치 나는 기러기가 바다를 희롱하며, 춤추는 학이 하늘을 나는 것 같다.” 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 희화[羲和]역사 속에서의 희화(羲和)란 장력지관(掌曆之官) 즉 일관(日官)이 된다. 하지만 신화 속에서의 희화는 태양을 수레에 태우고 달리는 태양의 어머니이다.
♣ 희화[羲和]요(堯)의 시대에 희(羲)는 해를 맡은 벼슬이고 화(和)는 달을 맡은 벼슬이다.
♣ 희화[羲和]태양을 모는 마부 이름이다. 매일 여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에 태양을 싣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운행하다가 해가 들어가는 우연(虞淵)이라는 곳에서 멈춰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 희화[羲和]희씨(羲氏)와 화씨(和氏)는 요임금 때의 천문(天文)을 맡은 일관(日官)이다.
♣ 희화여자[羲和女子]해의 수레를 모는 어자(御者). 희화국의 여자라 한다. 《山海經》
♣ 희화편[羲和鞭]희화(羲和)는 해[日]가 탄 수레를 몰고 다니는 자. 이백(李白)의 장가행(長歌行)에, “큰 힘으로 하늘 땅이 돌아가는데 희화의 채찍 멎을 때가 없다네.[大力運天地 羲和無停鞭]" 하였음.
♣ 희황[羲皇]복희씨(伏羲氏) 이전 즉 태고(太古) 때의 희황상인(羲皇上人). 번잡한 세속을 버리고 뜻을 고상하게 가짐을 일컬은 말. 진(晉)의 도잠(陶潛)은 항상 말하기를 “월북창 아래 누워서 시원한 바람이 잠깐 불어오면 스스로 ‘희황상인’이라 이른다.” 하였다. 《晉書 卷九十四 陶潛傳》
♣ 희황[羲皇]희황상인(羲皇上人)의 준말로, 태고(太古) 때 사람을 일컬으며, 전하여 세상을 잊고 편히 숨어사는 사람을 말한다. 진서(晉書) 은일전(隱逸傳)에 “도잠(陶潛)이, 여름에 한가히 북창 아래 누워 산들바람을 쐬면서 스스로 희황상인이라 하였다.” 한다.
♣ 희황북창하[羲皇北窓下]은거 생활이 매우 만족함을 뜻함. 진(晉) 나라 때 고사(高士)인 도잠(陶潛)이 일찍이 “여름날 북쪽 창 아래 높이 드러누워 있을 때 맑은 바람이 솔솔 불어오면 내가 스스로 희황상인(羲皇上人)이라 이르노라.”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九十四》
♣ 희황상인[羲皇上人]진(晉) 나라 때의 은사(隱士) 도잠(陶潛)의 자호이다. 도잠이 북창(北窓) 아래 높이 누워서 희황상인이라 자칭한 데서 온 말이다. 도연명(陶淵明)의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에 “五六月中 北窓下臥 遇涼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이라 하였다. 도잠은 본디 음률(音律)을 몰랐으므로, 줄 없는 거문고(無絃琴)하나를 두고서 매양 친구들과 모여 술이 거나할 때면 이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거문고의 운취만 알면 되었지, 어찌 줄의 소리를 수고롭히랴.[但識琴中趣 何勞絃上聲]”하였다. 《晉書 卷九十四》
♣ 희황시[羲皇時]희황은 복희씨(伏羲氏)로, 태고의 시대를 말한다.
♣ 희황인[羲皇人]물욕의 속박이 없는 태고 시대의 백성이란 뜻이다. 도잠(陶潛)이 여름철에 한가로이 북창(北窓) 아래 누워 있다가 맑은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바로 희황 이전의 사람이다.” 했다. 《晉書 隱逸傳》
♣ 희희[嘻嘻]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는 모양, 즐거워 웃는 소리
♣ 희힐설천비[羲頡洩天秘]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어 쓰기 시작하였다는 말이다. 복희는 팔괘(八卦)를 그어 서계(書契)를 만들었고, 황제(黃帝)의 신하였던 창힐은 새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창작하였다고 한다. 《孔安國 尙書序》
♣ 힐굴오아[詰屈聱牙]힐굴오아는 문장이 몹시 어렵고 난삽하여 읽기가 힘듦을 말하는데,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주고와 은반은 힐굴오아하다.[周誥殷盤 詰屈聱牙]”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첫댓글 선생님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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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자료를 잘 이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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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자료를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학장부단의 이야기는 장자의 병무편이 아니라 '변무편'으로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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