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만남의 연속이 아닐까 싶다. 이 세상 삶은 마치 기차 여행같기도 하다. 기차여행 같은 짧은 시간에서도 좋은 인연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 특별한 만남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러니깐 고등학교 2 학년때다. 겨울방학을 맞아, 10 개월 동안 열심히 한 중앙일보 신문배달을 그만두고 가족이 너무 그리워 고향 백야도로 내려갔다. 보고싶었던 가족을 만나 즐거운 며칠을 보냈다. 어머니를 뵙고나니 살것 같았다. 새학기가 되어 여수 역에서 상경열차를 탔다. 신학기라 기차는 만석이었다. 입석으로 서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기차가 순천역에 정차했을 때, 눈에 익은 창덕여고 교복을 단정히 입은 귀여운 여학생이, 할머니와 기차를 타더니 마침 비어있는 바로 내 앞 좌석에 앉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뛰었다. 남원, 전주, 대전, 수원을 지나는 동안 여러 차례 나는 그녀와 관심어린 눈길을 주고 받았다. 영등포 역을 통과할 때는 웬지 그냥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얼른 내 이름과 주소를 적은 메모지를 서울역에 도착해서 잠깐 눈인사 할 때 얼른 전해주었다. 일주일 후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바로 가까이 위치한 성북동 주소에 ‘박ㅇㅇ’란 이름이 예쁜 글씨로 써있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고, 며칠 후 우리는 반갑게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서로 호감을 갖고 사귀기로 약속했다. 창경원 돌담길을 걷기도, 걸으며 정답게 이야기도 했다. 난생 처음으로 이성(異性)의 부드럽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 만났을 때는 “두 오빠들이 모두 재수를해서 대학에 겨우 입학했어요.” 라며, 아들의 재수하는 것을 지켜 본 그녀의 어머니께서 ,열심히 입시준비를 해야 할 나를 무척 염려한다고 말했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만남은 결코 꽃길은 아니었다 그때 그 어머니의 염려 탓도 있었지만, 3 학년이 되자 정작 대학입시 준비에 온 정성과 신경을 쏟아야 했던 나는, 더 이상 여유롭게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서로의 관심은 계속되었다. 그녀로부터 격려 담긴 편지와 그녀가 참가했던, ‘문학의 밤’의 초대장을 받곤했었다. 나는 무학여고 문학의 밤에는 참석해서 축하해주었지만, 다른학교 문학의 밤 때는 길을 나섰다가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입시 준비로 너무 바쁘기도 했고, 축하해 줄 꽃다발 하나 준비할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극도의 어려움에 처하기도 한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면 무척 고맙고 감동으로 남을 것이다. 그해 후반기는 대입준비로 무척 힘든 시기였다. 열심히 공부를 해야하는데 도데체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수험생에게 필요한 영양분과 효과적인 수면 저 멀리 살았던 것이다. 나는 시장통 싸구려 밥집의 밥 한 그릇으로 하루 식사를 때웠고, 탁한 공기로 가득찬 독서실은 휴식과 수면을 취하기에는 아주 비위생적이었다. 극심한 어려움에 처한 나는, 고향 집으로 여러 차례 급하게 도움을 청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답장은 오지않았다. 무리해서 공부한 탓에, 책상에 앉아 집중해 책을 보려고 고개를 숙이면, 마치 작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 맞는 통증을 느끼곤 했다. 점차 공부에 대한 집중력도, 의욕도 줄어 내 인내와 용기가 바닥을 치고있었다. 대학입학시험 낙방의 좌절은 극에 달했다. 그 때에 “이틀 내로 여수로 내려오너라.” 아버지의 전보를 받았다. 늦긴 했지만 조금은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겠거니 희망에 부풀었다. 가까스로 2차 대학 입시원서를 접수하고는, 기차표를 구해 급히 여수로 내려갔다.
다음 날 이른아침, 여수에 도착해서 이사간 집을 찾아가 어머니를 만났을 때, “느그 아부지가 기다릴텐께 빨리 신항(新港)으로 가봐라.”라는 전언에 신항으로 뛰어갔다. 그때 활어 무역선을 타고 일본으로 막 출항하려던 선장인 아버지를 가까스로 나는 만날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 나에게 평생 결코 잊지 못할 너무나 섭섭한 말 한 마디를 남겼다.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채 그냥 출항하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집으로 와서, 동생들 공부나 돌봐주다가 빨리 군대나 가거라.”라고. “고생한다. 공부 마무리를 잘 해라!” 라는 격려의 말과 작은 도움을 기대했던 나는, 아버지의 그 한 마디 말이 왜 그리 서러웠고 서운했었는지... 오동도 뒤 수평선너머로 아버지가 탄 배가 사라질 때까지, 언덕에 앉자서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 넋이 나가 겨우 비틀대며 간신히 귀가했다. 그 날 밤 절망에 빠져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나는, 그 동안에 몇 차례나 편지로 격려해주었던 창덕 고녀 박양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 일 년 동안 여러 차례 고마운 격려를 해주었는데도, 대학 입학을 포기해서 너무 미안하고 가슴이 아픕니다.”라고. 낙담에 밤새 뒤척이다 잠들었던 나는, 다음 날 아침에 늦게서야 일어났고, 결국 써놓았던 편지를 시내까지 걸어나가서 아픈 마음을 위로받으려는듯 우체통에 넣고 말았다.
이 허탈한 마음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수 없었다. 내 자신 스스로 감당이 되지 않았다. ‘아! 이 얼마나 못난 짓인가!’, ‘서울 하늘아래서 부족한 나에게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던, 오직 한 사람 그 어린 여학생에게 실망을 전하다니.’...정신을 차리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못난 결정을 한 내 자신을 꾸짖다 보니, 오기가 발동했다. 드디어 마음을 고쳐 먹고 어머니와 누나의 협조를 받아, 그날 저녁 급한 마음으로 서울행 열차를 탔다. 입학원서를 미리 접수하고 귀향한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더니 그렇게 상경해서 치른 2차 대학 입학시험에서, 나는 결국 한양대학교 공대 건축공학과에 합격해서, 오래동안 소망했던 건축가가 되려던 나의 꿈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었다. 그 후 여수 집에 도착했더니, 반가운 편지 한 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 달 보름달이 뜨면 밝은 달을 보며 성공적으로 대학에 합격하기를 빌었습니다.”라고 적혀 있고 (처음 만남 떼 보름달이 떴음) “편지를 받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만 울었습니다.”라는 고운 마음이 적힌 편지였다. 그녀의 편지가 따뜻한 큰 위로가 되었던 기적같은 편지왕래였다. 한층 더 그런 그녀가 보고 싶었고 몹시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해 그 겨울 그렇게 기차에서 우연이지만, 운명처럼 만났던 그 소녀와의 만남은, 내가 절망에 빠져 대학입학과 건축가가 되려는 꿈을 포기 할 뻔했을 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었던,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너무나 소중한 축복의 만남이었다. ***교정필***7/15/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