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15. 동진16국 시대의 불교
‘새 통치이념’으로 황실에서 적극 수용
秦 이후 漢까지 법가. 유가. 도가 통치사상 모두 실패
수십년간 계속된 전란 상황도 민중들에 신앙확산 계기
<사진설명> 난주 병령사 석굴을 상징하는 대불. 병령사 석굴은 동진16국시대인 420년 무렵부터 존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불교신문 자료사진
중국불교는 그 초기부터 최고 권력기관인 황실로부터 민중에 이식(移植)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중국불교는 이른바 ‘국가불교’라는 특징을 지니게 되는데, 그 과정을 간략히 살피자면 다음과 같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의 통치자들은 국가통치를 위한 사상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주지하다시피 진(秦)은 제자백가 가운데 법가(法家)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중국을 통일하였지만, 너무 가혹한 법의 적용으로 실패하게 된다.
진을 이어 다시 중국을 통일한 한(漢)은 이른바 ‘무위이치(無爲而治)’의 도가(道家)계통의 황로학(黃老學)을 통치이념으로 삼는다. 그러나 무제(武帝)에 이르러서는 ‘백가를 물리치고 오직 유가만을 숭상한다(罷黜百家, 獨尊儒術)’는 정책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유가(儒家)는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의해 심각한 손상을 입고 있어 그 복원을 위해 ‘경학(經學)’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주석학 위주의 경학은 결국 무기력에 빠져 전한(前漢)을 무너지게 하는 원인이 됐다.
후한(後漢)의 통치자들은 새로운 통치사상을 찾기 위하여 고민을 하다가 한 무제로부터 개척된 서역로를 따라 중국에 전래되기 시작한 불교에 관심을 갖고, 그에 따라 초기도교인 황로도(黃老道)와 불교를 결합시키려 한다. 그러나 후한 말에 초기도교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결국 삼국으로 분열된다.
이로부터 보자면, 중국 본토의 제자백가 가운데 대표적인 법가.유가.도가, 그리고 초기도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치이념으로서 실패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삼국의 통치자들은 새로운 통치사상으로서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
특히 삼국 가운데 오(吳)의 통치자인 손권은 불교를 국교화하고, 역경과 다양한 불사(佛事)를 일으켜 민중들에게 불교를 이식시키고자 애썼다. 한편 위(魏)의 조조 역시 불교에 깊은 관심과 신앙을 보였지만, 국책으로 채택하기에는 권문세족의 반발이 너무 강해 불교와 유교, 도교를 교묘히 결합한 현학(玄學)을 통치이념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것은 서진(西晉)이 세워지면서 일단락되게 된다. 서진의 통치는 이른바 ‘공포정치’라고 할 만큼 극심한 정치적 숙청과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점철되면서 국력은 급격히 쇠약하게 되고, 그에 따라 북방의 소수민족들이 중국의 북방을 점령하게 된다.
이상의 과정에서 중국불교는 전래초기에 있어서 주로 권력의 최고기관인 황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중국은 이미 선진(先秦)시기로부터 북방의 소수민족들의 위협과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으로부터 철저하게 ‘이하론(夷夏論)’을 수립시키고 있었다.
이른바 자신들(夏)의 고급문화가 오랑캐(夷)의 저급한 문화와 차별이 있다고 믿는 민족적 배타주의에서 아무리 지고한 사상체계를 갖고 있는 불교라고 하여도 중국민중에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황실의 주도에 의한 불교의 수용은 극심한 반발을 받았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렇게 국가권력에 의하여 전개된 중국불교는 당연히 그 성격이 국가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
소수민족 16국 대승불교 받아들여 中華와 이질감 해소
권력층 주도해 ‘국가불교’자리잡았지만 국가주의 한계
서진의 몰락과 북방의 소수민족들이 진입하면서 대부분의 상류층이 남하하였고, 당시 남방의 중심지인 건강(健康, 지금의 남경)에서 동진(東晉)을 세우면서 이른바 ‘동진16국’시대가 전개된다.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동진16국’과 ‘남북조(南北朝)’시기는 가장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상에 있어서도 극심한 혼란과 농후한 ‘과도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불교의 중요한 맥락을 말한다면 동진이나 북방의 16국 모두 통치사상으로 불교를 채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서진의 몇 십 년 동안 지속된 전란의 상황은 중국민중들로 하여금 아주 빠르게 불교를 신앙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불교에 대한 신앙의 확산은 더욱 자연스럽게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을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북방 민족의 발흥은 불교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서한 말부터 왕래하기 시작하던 서역의 교통로가 북방 민족의 발흥으로 보다 활발한 교역로가 됐다. 그에 따라 서역에서 유행하고 있던 아비다르마 불교와 당시 새롭게 일어난 대승불교, 특히 용수(龍樹).제바(提婆)계통의 중관반야학 등이 전래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불교에 있어서 새로운 정보의 대량유입은 각각 남방과 북방의 불교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남방으로는 소승교학이 유행하였는데, 그것은 동진의 사상적 주류는 여전히 현학이었고, 현학이 지니고 있는 ‘의리(義理)’적 성격은 또한 소승교학과 유사하였던 원인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진의 불교를 ‘강남불교’라고 칭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은 바로 여산(廬山) 혜원(慧遠)스님을 꼽을 수 있다.
한편으로 북방의 소수민족을 지배계층으로 하는 16국에서는 통치이념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화(中華)에 뿌리를 두지 않는 것으로부터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이미 중국에 전래된 것과는 다른 새로운 불교를 부흥시킴으로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인 대다수의 중국민족과의 문화적 이질감을 해소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에 따라 때마침 북방에 유행하던 대승불교 반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한 북방의 불교학의 대표로서 마땅히 구마라집(鳩摩羅什)삼장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동진과 북방 16국의 불교는 그 성격이 크게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중국학계에서는 동진의 불교를 ‘의리불학(義理佛學)’, 북방불교를 ‘성공지학(性空之學)’이라고 칭한다. 이러한 남방과 북방의 차별은 결과적으로 중국불교의 사상적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특히 의리불학의 대표인 혜원스님과 성공지학의 대표인 구마라집 두 거장이 중국불교에 대한 미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이었지만, 이 시기에 남방과 북방의 불교교류는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특히 남.북방을 대표하는 혜원스님과 구마라집의 서신을 통한 담론은 당시 남.북방 불교의 차별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혜원스님은 구마라집이 장안(長安)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바로 서신을 보내어 ‘대승’의 ‘대의(大義)’ 등 여러 가지를 물었는데, 라집은 그에 대하여 하나하나 자세한 답변을 보냈다. 후인들이 그를 모아 정리하여 〈대승대의장(大乘大義章)〉의 제목으로 편집하여 전하고 있다. 〈대승대의장〉에는 모두 18항목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논하고 있는 것은 바로 ‘법신(法身)’의 문제이다.
주지하다시피 혜원스님은 ‘신불멸(神不滅)’의 입장에서 ‘법성론(法性論)’을 제시하고 있는데, ‘법신’의 문제는 바로 그 핵심에 있는 것이다. 혜원스님의 ‘법성’이론은 부파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로서 제시한 ‘승의아(勝義我)’와 ‘신불멸’을 결합하여 실체성을 띠고 있는 ‘법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이론은 ‘중관반야’의 ‘제법성공(諸法性空)’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상 한편에 집착된 것으로 ‘상을 제거하고 집착을 파함(掃相破執)’이라는 ‘반야’의 정신과는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다. 그에 따라 라집의 혹독한 비판과 함께 세세한 ‘성공(性空)’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혜원스님은 그에 승복하지 못하고 반복된 질문을 보내고, 다시 보다 자세한 답변을 얻어내지만 끝내 그의 이론을 바꾸지 못한다.
어쩌면 라집이 장안에 도래한 시기(401)는 혜원스님의 72세에 해당되고, 그 이후 서신을 통한 문답이 이루어졌으므로 평생을 통하여 건립한 이론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현학에 밝았던 혜원스님의 입장에서는 그의 ‘법성론’이 너무도 중국의 전통적인 정서와 부합하고 있다는 인식은 쉽게 라집의 비판에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혜원스님의 제자이면서 다시 라집의 제자가 된 도생(道生)의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에서 명쾌하게 해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마라집과 혜원스님의 서신을 통한 담론은 현학의 영향으로 ‘의리(義理)’적이고 ‘사변(思辨)’적인 부파불교의 이론이 유행하였던 남방에 대승, 특히 용수(龍樹).제바(提婆)계통의 ‘중관반야학’이 널리 퍼질 수 있게 했다. 또한 도생을 비롯한 수많은 혜원스님의 제자들이 라집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함으로써 남방의 ‘의리(義理)’와 북방의 ‘성공(性空)’이론이 결합하여 보다 성숙한 중국불교를 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불교에 있어서 구마라집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한 의의가 있다. 우선 그는 역경(譯經)에 있어서 그 이전의 ‘격의(格義)’적 방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하겠다. 다른 측면은 그가 역경한 불전(佛典)들에 의거하여 중국불교의 여러 학파와 종파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는 반야학의 핵심적인 논서인 〈중론〉, 〈십이문론〉, 〈대지도론〉과 〈백론〉을 번역하여 중국인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인도 대승불교의 중관학파를 접하게 하여 삼론종(三論宗)을 발생시킨다. 구마라집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걸출한 제자를 배출하였다는 것에 있다. 승조(僧肇), 도생(道生), 도융(道融), 승예(僧叡), 담영(曇影), 승도(僧導) 등 동진16국 시기의 중국불교를 이끄는 중요한 인물들은 거의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고 하겠다.
동진16국과 남북조 시기는 후한대에 전래된 불교가 이른바 ‘국가불교’로서 완전하게 자리 잡았다. 교의에 있어서도 인도불교와는 차별을 보이는 중국의 독특한 색채를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중국불교의 종파들이 서서히 형성되어 가는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황순일/ 동국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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