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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벤담의 생애
제레미 벤담은 1748년 부유한 토리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던 그는세 살 때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종종 아버지의 책상에 앉아서 두꺼운 영국 역사 전집 따위를 읽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스쿨과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법학을 전공하여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1769년부터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 그는 곧 변호사를 그만두고 자유 연구가 겸 정책입안자로 전환하게 됩니다. 영국 법체계의 불합리성이 그를 절망시켰기 때문입니다.
사상가로서 벤담은 공리주의를 창시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의 정치적 원리들을 현실에 적용시켜 당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남녀의 평등과 경제적 자유, 교회와 국가의 분리, 동물의 권리, 고문 및 체벌의 폐지, 노예제 폐지, 이혼의 자유 등 여러 자유주의적 정책을 일관되게 제안했습니다. 그는 이자율의 자유화와 관련하여 애덤 스미스를 설득해 원래 반대하던 스미스를 찬성 쪽으로 돌려놓기도 했습니다. 또 그가 제안한 것 중 독특한 것은 파놉티콘이라 불리는 감옥입니다. 죄수가 들어있는 독방이 가장자리에 빙 둘러있고 중앙의 감시탑에서 간수 한 사람이 감시하는 이 감옥은 실제로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에 의해 근대사회구조를 잘 보여주는 구상으로 주목받았습니다. 또 벤담은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미라보를 비롯한 혁명지도자들과 서신 교환을 통해 프랑스 명예시민으로 위촉되었으며, 제임스 밀과 그의 아들 존 스튜어트 밀과 함께 공리주의를 사회적 원리로 널리 확산시켰습니다.
그는 노년에 런던대학의 설립에 관여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관여는 정치적 측면에서 매우 주목할 만 합니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이 학생들에게 교회에 다닐 것을 요구하는 것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런던대학은 완전한 자유의 원리가 구현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런던대학에서 인종과 신분, 종교나 빈부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교육받을 수 있기를 원했고 그것은 현재까지 런던대학의 핵심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이익의 합을 의미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그는 모든 도덕과 법률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관점에 기초해야 하며, 이러한 행복은 그 자신이 마련한 척도로 측정가능한 양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는 행복이 계속되면 만족감이 줄어드는 한계효용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소수에게 행복을 집중시키기보다는 최대 다수가 행복을 나누어 갖는 것이 전체 사회의 행복을 증대시킬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행복의 질 문제나 정의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행복을 양으로 측정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죠. 또,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의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다는 심각한 도덕적 딜레마를 남기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밀은 후일, 정의의 개념을 도입하여 공리주의를 보다 완전한 자유주의 철학 체계로 개편하게 됩니다. 벤담 자신도 이러한 약점을 인식해서인지 훗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경구에서 앞부분을 빼고, '최대의 행복'이라는 말로 대체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의 공리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유주의 국가의 법체계와 사회 조직 원리에도 핵심적인 근간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개인과 공동체 간의 이익에 있어서 개인의 이익에 확실한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공동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의 총합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경구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벤담의 정의와 밀의 공리주의와의 차이점은 공동체 영역에 존재하는 '정의'가 있느냐 여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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