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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전 연대 석좌교수) 옛 시골의 기억 옛날 시골 공중목욕탕에 가면 흔히 볼 수 있었던 그러나 요즘은 볼 수 없는 정경이 있다. 뜨거운 탕 속에 단수 혹은 복수의 노인이 몸을 담근 채 별로 매력 없는 쉰 목소리로 고저장단이 있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눈을 감고 다른 목욕 손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아경이 되어 소리를 하는 것인데 알고 보니 시조의 창을 하는 것이었다. 아주 느리게 창을 해서 한번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 모를 지경이었다. 어쩌다 들른 목욕탕에서 이런 괴이한 소리와 정경을 접하게 되면 어린 마음에 우선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들이 점령한 탕 속에 들어가는 것도 내키지 않아 대충 수건으로 몸이나 닦고 나와버리곤 하였다. 좋은 감정이나 행복한 기분이 지속되면 엔도르핀이란 천연 진정제가 생성된다는 것은 이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구체적 세목에서만은 조금씩 다른 설명이 있는 것 같다. 한참 되지만 영국의 어느 의과대학에서 발표한 사실이라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 엔도르핀 생성에 가장 유효하다는 토막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노래를 듣고 음악을 듣는 것도 괜찮지만 직접 노래를 부르는 것이 최고라고 당시의 토막 뉴스는 전하고 있었다.
행복과 건강 그 보도를 접하고 떠오른 것이 옛날 시골 공중목욕탕에서 목도한 고령 시조꾼들이었다. 온탕에 몸을 담그는 것은 몸을 쾌적한 상태로 만들어 그것만으로도 소소한 대로 행복 경험이 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는 “우리가 항상 낙으로 삼는 것은 먹기 잔치, 라이어, 춤, 깨끗한 옷, 온수욕(溫水浴), 그리고 잠자리”라는 대목이 보인다. 어느 왕자가 하는 말인데 고전 세계의 축복 받은 귀족들이 추구한 행복의 구체적 세목을 보여준다. 그러니 쾌적한 온탕 속에서 무아경이 되어 시조창을 하는 노인들은 마구 생성되는 엔도르핀의 효험을 만끽하며 점입가경으로 황홀경으로 빠져들어간 것이 아닌가. 그들은 현대의 의학 지식과 관계없이 행복한 상태로 빠져드는 최고의 방법 혹은 건강 증진법을 체득해서 실천한 것이 아닌가! 옛 시골에서는 마을마다 또 부지런하다고 호가 난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었다. 시계가 없는 옛 농촌에서는 대개 일출과 일몰 시간에 맞추어서 일상생활의 리듬을 조정한다. 그러니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마을에서 호가 난 근면 노인들은 집안일에 아주 충실하면서 노름과 같은 일탈이 없었다. 그러니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날씬한 몸매에다 기운찬 목소리로 동네에서 늘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규칙적인 농사일에 전념하니 하루하루가 근로와 운동의 날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건강하고 또 마을의 해결사가 되어서 이웃에서도 인망이 높아 어르신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동네 의원의 조언이나 계도를 받음이 없이 몸에 밴 근면과 성실이 건강의 기반이 된 것이다. 계도가 있었다면 그것은 선대가 보여준 본보기였을 것이다.
그들의 희망 사항 시조창에 열중하던 노인들에게 은근히 흰자위를 굴리고 호감 없이 바라본 죗값을 치르게 된 셈인지 어느새 뜻밖의 고령자가 되고 이 구석 저 구석 신체의 부조를 느끼는 처지가 되었다. 마음이 몸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섬기는 것이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몸이 단연코 갑이요 마음은 을에 지나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일삼아 건강 정보를 나누고 걱정을 나누는 고령자 모임에도 전보다 자주 가게 되었다. 시골 중학 동기 동창 모임 같은 것이 그중의 하나다. 해마다 줄어가는 동창생의 소식을 주고받는데 단연 으뜸가는 화제는 건강과 미구에 닥칠 삶의 끝자락에 대한 불안이다. 귀 기울이는 사람보다 떠들어대는 사람이 더 많은 이런 모임에서 그나마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은 어떻게 하면 가까운 가족에게 부담되지 않게 또 큰 고통 없이 세상을 뜨느냐는 것이 중요 당면 과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일 두려운 것이 치매증이라는 것에도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구체적 사례를 들먹이면서 오만 정 다 떼놓고 세상 뜨는 것의 무참함을 말하기도 한다. “철들자 망령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그전엔 망령 혹은 노망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비유적으로 쓰는 경우가 많아 노인의 경우 없는 언동을 두고 폭넓게 쓰였다. 조금 더 엄밀성을 부여하기 위해 치매라는 말이 쓰이더니 요즘은 인지장애 혹은 인지증이라고 하는 경우도 많다. 말이 촉발하는 편견을 배제하기 위한 고려에서 나온 의학 용어인 것 같다. 후진국이 개발도상국가로 불리게 되는 것과 비슷한 경로를 거쳐 쓰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인지장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많이 쓰고 가령 외국어 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는 구체적 사례를 거론하는 경우도 있다. 실지로 백세가 넘은 일본 노인의 일상을 다룬 다큐를 국내 공영방송이 내보낸 적이 있다.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 정정한 사이비(似而非) 노인은 매일 아침 냉수마찰을 하고 외국어 공부를 하고 노인복지센터에서 건강 관련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그가 한글 습득을 위해 작성한 노트도 보여주었다고 기억한다. 활발한 두뇌 활동이 인지장애 예방이 된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활용을 해야 신체 기관의 퇴화를 막을 수 있다는 원리에서 유래한 말이다.
발견의 눈길 현대 의학이 이러한 사실을 밝혀내기 전부터 가령 노년에 외국어 공부를 해서 정신을 단련하는 등의 관행은 널리 시행되고 있었다. 앞서 말한 백세 넘은 젊은 노인의 경우 특정 외국어를 마스터하자는 것이 아니고 두뇌 훈련의 새 소재와 재미를 찾아서 건강도 도모하자는 것이 일거양득의 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적 목표를 설정하고 외국어 공부에 나선 사례는 수두룩하다. 20세기 미국 비평의 장로이자 최고의 영어 산문가라는 평가를 얻었던 에드먼드 윌슨은 만년의 병상에서 개인 교사를 초빙해 헝가리어를 공부하였다. 혁명 후의 소련을 방문하기 전에 러시아 말을 공부해서 푸시킨을 읽었다는 그는 헝가리의 푸시킨이란 호가 난 시인을 읽기 위해서 헝가리어를 공부한 것이다. 우리에겐 『한국전쟁비사』의 저자로 알려진 I. F. 스톤은 대학을 중퇴하고 저널리즘에 투신했는데 한 학기 동안 그리스어를 공부한 적이 있었다. 60대 후반에 그리스어를 다시 배워 고전을 읽고 81세 되던 해에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상자했다. 그리스어는 배우기 어려운 말로 알려져 있고 그래서 영어에서도 “It’s all Greek to me”는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정통 사회민주주의자를 자임하는 역사가 토니 주트는 체코 반체제 인사의 도움 요청 편지를 받고 나서 그로서는 충격적인 사달을 겪게 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중년에 체코어를 공부하기 시작해서 수동적인 이해에서는 마스터를 했다. 처음엔 하루 두 시간씩 자습했으나 나중엔 근무하던 학교에서 정식 수강을 했다. 이런 문인 학자들의 뒤늦은 외국어 공부가 인지장애 예방을 위한 조처로 취해진 것은 물론 아니다. 지적 호기심과 인문학적 열정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것은 명시적 이유이고 잠재적으로는 근접해오는 삶의 종언이 주는 심리적 불안으로부터의 도피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점증해오는 몸의 횡포와 위협으로부터 마음의 자율을 확보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구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젊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곧 늙음을 늦추는 방법이라는 함의가 있다. 지혜는 심오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깝고 평범하고 하찮아 보이는 유서 깊은 일상에 널려 있다. 행복의 파랑새처럼 지혜 또한 우리 주변에서 발견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