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정조 이산
정조대왕은 대왕대비가 내린 행록과 혜경궁이 내린 행록 병판 김조순이 쓴 시책문 영의정 심환지의 애책문 행상호군 김재찬의 비문 대제학 홍양호의 시장 등은 몇 쪽 안 되게 간략하게 기술되었다. 그러나 행 지중추부사 이만수의 행장은 장문으로 길다. 여기까지의 글을 요약하여 기술한다.
할머니는 처음 8살에 만난 기록이 있고,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깊은 글을 절절히 쓰고 장인 김조순은 어찌 49세에 성상의 수명이 그칠 줄이나 생각했겠으며, 하늘이 수명을 연장해주지 않으니 대업을 마무리 못하신 것을 차마 말할 수 있겠으며 자리를 이어받고 예를 행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사물을 대할 때마다 교훈으로 남기신 음성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썼다.
(나의 관심은 김조순인데 영의정 김창집의 현손이며 서흥 부사 김이중의 아들이다, 노론 시파에 속한다. 딸이 순원왕후로 순조의 비로 간택되어 국구로 30년을 순조를 보필한다. 정조는 사망 직전에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했으나 결혼은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할머니 정순왕후에 의해 병조판서에 임명되자 곧 그를 비변사 제조도 겸임시킨다. 정순왕후가 천주교 엄금을 하교하자 신유박해가 시작된다. 노론 소론 남인 왕실 인사도 체포된다. 김조순 친족 김건순이 체포돼 처형된다. 순조가 15세가 되자 수렴청정이 거두고 김조순이 친정을 섭정한다. 정순왕후 6촌 김병주가 귀양 가 병사하고 정순왕후 친정 경주김씨 벽파가 숙청된다. 김조순의 10촌 김달순도 벽파로 사사시킨다. 벽파 당수인 김종수와 심환지도 추탈시킨다.)
다음은 지중추 이만수가 쓴 행장을 보자. 대행대왕의 성은 이씨, 이름은 산이며 영종의 손자로 장헌세자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혜빈 풍산 홍씨 영의정 홍봉한의 따님이다. 영종의 명에 의해 진종대왕의 후계자가 되고 모후도 풍양조씨 좌의정 조문명의 따님이다. 왕은 영종 28년 1752년 임신 9월 22일 기묘 축시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탄생했다. 백일이 안 되어 서고, 돌이 안되어 걸었으며, 말도 배우기 전에 문자를 좋아해 효자도나 성적도 같은 그림을 보기를 좋아했다. 큰아버지 효장세자의 후사로 종통을 이어받는다. 영종은 늘그막에 허구한 날 시탕이었으나 병세가 덜하면 곧 서연을 열었다.
화환 옹주의 양아들 정후겸은 성질이 비뚤고 조행이 없어 옹주만 믿고 오만무도하게 굴었고 홍봉한의 아우 홍인한은 제 형을 깔고 재상이 되었는데 야합한 무리와 말하기를 “홍씨를 공격하면 이는 동궁을 불리하게 만드는 일이다.” 퍼트렸다. 영종이 왕에게 국정을 이양할 뜻을 비치자 저들끼리 뭉치고 당여를 심어 국권을 농락하고 법을 무시 조정을 무너뜨리자 왕은 척리들이 국정 관여 폐습을 싫어했다. 전 참판 서병선이 소를 올려 대리 청정을 막는 홍인한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자 영종은 명선과 대신 대간을 입시를 명하고 홍인한 이익모는 사적에서 삭제하라 지시하고 서명선을 도총관으로 임명한다.
영종이 승하한다. 제신들이 嗣位할 것을 청하자 왕은 승낙지 않고 곡만 하다 성복일에 면복 차림으로 유교와 대보를 빈전 문밖에서 받고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영종의 유지를 받들어 효장세자를 진종대왕으로 추승하고 효순 빈을 효순 왕후로 추증했으며 묘는 영릉이라 했다. 면복을 벗고 상복을 입고는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사도세자에 존호를 추상하여 장헌이라 하고 수은묘는 영우원이라고 봉했으며 사당은 경모궁이라 하라.
대신들이 홍인한과 정후겸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자 인한 후겸을 귀양보내고 후겸 어미는 성 밖으로 내쫓았으며 신회는 삭탈관직하고 윤태연 윤양후는 정배 보냈다. 대신들이 홍인한 정후겸의 12가지 죄목을 거론하면서 목을 벨 것을 청했으나 왕은 허락지 않고 사사를 명했다. 법이란 만인에 공평해야 한다. 비록 지존의 임금이라도 자기 사익으로 이랬다 저랬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형을 결정해 집행하는 것도 죽기 전에 결안을 받고 죽은 후에도 반드시 율문에 따르는 것이 아조 4백 년의 변함없는 상전이다, 말한다. (참으로 동궁 시절을 회상하면, 일개 옹주의 아들과 제 형의 배경으로 벼슬을 한 외 종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었다. 정조 왕은 죽을 곤경이 허다했다. 동궁 시절에 영조의 앞에서도 홍인한은 이조와 병조의 일은 동궁이 알 필요가 없으니 보고치 말라는 무시를 받았음을 용서한 것이다. 정조의 친부를 뒤주에 넣어 죽게끔 몰고 간 척신들다운 발상이다. 네까짖 동궁쯤이야 우리가 늙은 할아비 왕이 죽으면 바로 교체할 수 있다는 역심이었을 것이다. 그를 그냥 사사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평정심이다. 연산 임금처럼 날뛰며 칼을 휘두르지 않고 조용히 천천히 죽을 놈들을 반성하게 만들면서 말려 죽인 셈이다.)
왕의 일은 궁 외에서는 선왕의 능에 찾아뵘은 일이 무수히 나온다. 능침을 하러 가는 길에 충신의 묘나 사당에 제물을 주어 제사를 지내게 하기도 한다. 길에서 만나는 백성을 보고 자기의 치세를 스스로 짐작하기도 한다. 한강의 수운은 시간이 오래 걸려 시한을 넘기기 일쑤고 물에 감기곤 한다. 한강의 배를 대오를 짜는 제도를 만들었다. 4개 진의 별장에서 담당을 정해 원근의 기일을 정해 안배된 물량을 운송하고 각 창고에 저장케 하여 어려운 인력 동원을 줄었다. 호송에 관한 법을 만들어 비변사에서 시행케 했다.
의빈 성씨가 낳은 문효세자가 죽어 효창 묘원에 장사지낸다. 그리고 곧 성 빈이 죽었다. 영우원에 배알하고 정릉과 선릉을 배알하기 위해 서빙고 나루에 머물러 있는데 밤사이 강물이 불어 수레를 돌릴 것을 대신들이 청원하자 과천 광주의 백성을 독려하여 역사를 끝내고 도강한다. 왕의 행차 길의 백성은 피곤한 것이다. 이때 아버지의 영우원을 수원으로 천장 키로 논의가 된다. 능 호를 현륭이라 정하고 수원부치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시킨다. 과천과 시흥에 행궁을 짖고 사근 평과 안양 참과 노량에 진정을 두어 연로에 머물도록 한다. 정조 28세의 일이다. 처음으로 한강을 건너는데 용주라는 배를 쓰지 않고 부교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정조 16년 현륭원이 완성 찾아뵙고 정조 17년에 수원부를 화성이라 바꾼다. 부사를 유수로 승격시키고 판관을 두어 보좌케 한다. 장용영은 장용사로 승격시킨다.
정조 18년 정월 초하루 인정전에 나아가 자전(할머니)의 오 순과 자궁(어머니)의 육순을 축하하고 조관은 70세 이상, 사서인은 80세 이상 자와 80이 못 되었어도 부부가 해로하고 있는 자는 모두 1계씩 품계를 올려주도록 명령했는데 모두 7만 5천 1백 46명이다.
(여기까지에 정약용 선생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점이 이상하다. 이는 행장을 지은 이만수의 개인 의견을 정사에 비춰서 쓴 것이라서 정약용 선생을 별로 생각지 않은 듯하다. 실로 이상하다. 아마 이때는 수원성 공사가 한창일 것이고 일 년 후 자궁 혜경궁의 회갑이 수원 즉 화성행궁에서 성대하게 치러지는데도 말이다.
능침 배알과 역적의 친국이나 행로 충신의 묘소나 성현의 사당의 이름은 많이 거명되는 데 현실적인 일은 없으니 행장의 의미가 퇴색된다).
처음으로 가을에 정조의 부스럼이 오래 낫지 않는다는 말이 등장한다. 가뭄이 계속되어 제신들은 묘당에 모이게 하고 대처할 방법을 모색하여 삼남의 도신들에게 유시를 내려 숨은 인재 발굴을 억울한 사람이 있는가 살피라 명한단다. 그런 사유로 겨울에 화성의 축조를 일시 중단하라 시킨다. 그리고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온양 행궁에 다녀온 이야기가 있다.
정조 22년 봄에 현륭원을 찾아뵙고 화성 부에 묵으면서 원 침을 모신지 10년에 이 부의 백성은 혜택이 없었으니 어찌 내 본의이겠는가? 정리 곡을 징수를 영원히 없애라 은전을 베푼다. 정조 24년 2월 11세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6월부터 부스럼이 심해진다. 농사는 때를 놓치면 안 되니 내 병 때문에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명한다. 28일 왕은 말을 못 하는 상태가 되고 유시에 영춘전에서 승하한다. 춘추 49세로 곁에 있던 이들은 대신과 각신 승지 사관뿐 환시나 궁첩은 한 사람도 없었다. 11월 간신일 자시에 현륭원 동쪽 해 좌에 장례를 모셔 건능이다.
2023.03.04.
조선왕들의 애책문과 시책문-2
이남철, 배용구 지음
공간의 힘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