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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우리는 솔로몬의 지도력에 대해 상고했습니다. 자기가 되지는 못했지만 되고 싶었던 자기를 그리면서 솔로몬은 이러한 지도자 이러한 왕이 되었더라면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지도자론을 썼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여기에 후속 편으로서 내가 그렇다면 왜 실패한 인생을 살았는가? 그것을 스스로 진단하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을 하자면 솔로몬이 인생을 실패한 이유는 자기 한계를 몰랐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너무 교만했다는 것입니다. 그 교만의 원인이 무엇이며 내용은 무엇이냐? 그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가 됩니다. 이 솔로몬의 고민 그의 잘못된 생각들 이것이 옛날만의 것은 아니고 이 시대 모든 지성인들의 고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 과학과 철학이 지금도 고민하고 발버둥치고 있는 이 문제를 말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솔로몬은 역시 천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를 한 말씀, 한 말씀 잘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솔로몬이 바라본 인생의 객관적인 모습입니다. 솔로몬은 현실 속에 있는 모순을 발견했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본즉 악인은 장사 지낸바 되어 무덤에 들어갔고 선을 행하는 자는 거룩한 곳에서 떠나 성읍 사람의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악인은 장사 지내어 무덤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당연하지. 죽으면 장사 지내서 무덤에 들어가는 거지 뭐. 그렇게 새로울 것이 있나." 그런 말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서 장사 지내서 무덤에 들어갔다 라고 하는 말은 편하고 복되게 죽었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뜻은 악인이 명예롭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악인이 죽은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많이 참석해서 성대한 조문객을 맞았고 아마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 기념비도 세웠을 것입니다. 그런걸 봤다. 분명히 악인인데 종말이 너무 좋더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선을 행한 사람은 어떻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한 자는 거룩한 곳에서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거룩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도성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르게 선을 행하며 살려 했으므로 불의한 일에 항거하다가 그 도시에서 못살고 쫓겨나서 소위 망해서 낙향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도 떠나고 가문도 몰락하고 그런 가운데서 그는 다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슬프고 비참하게 인생을 끝냈습니다.
이러한 부당한 승리에 대한 모습들이 인생 속에 너무도 많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을 하겠습니까? 잘못 된 건데... 이럴 수가 없는데... 내가 적어도 배우기에는 이럴 수가 없는 건데... 내 상식 내 교육 내 교양으로 볼 때는 악인은 망하고 의인은 잘 된다고 배웠는데... 비록 살아서 잠깐 동안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의인이 고난 당할 수는 있어도 말년에는 적어도 죽을 때는 잘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죽음까지 장례식까지 보아도 악인이 끝까지 잘되더라. 그리고 의롭게 착하게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던 사람은 죽는 것까지도 참 초라하고 비참하게 죽어가더라. 그런 얘기입니다. 인생의 모순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11 절입니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 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 하도다"
징벌이 속히 오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죄지으면서 대담해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가지 실수할 때마다 벼락이 땅 땅 떨어진다면 누가 무서워서 죄를 짖겠습니까마는 그렇 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바로 바로 주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분노하지요. 어찌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럴 수가 있나? 왜 심판하지 않는가? 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분노하고 하나님은 과연 계신가? 하고 또는 정당한가? 그렇게 묻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정당한가? 이 것을 신정론이라 합니다. 고난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묻는 질문이 신정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당한가? 계신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더라는 겁니다.
이것이 첫 번째 모순입니다. 두 번째 모순, 14절입니다.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비슷한 말입니다.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이 있더라. 의인이 잘되지 않고 의인이 악한 것처럼 대우받고 또 악인이 의인처럼 대우받아서 선과 악이 혼합되어 모호해지더라. 잘한 사람은 벌받고 오히려 나쁜 짓 도적질 슬슬 하는 사람이 승진 잘 하고 인기와 명예를 한 몸에 독차지하더라. 이러한 소위 부조화스러운 일부 부조리한 일들이 비일비재 하다는 것입니다. 이 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법이 공의를 지켜준다고 하지만 어디 법이 공의를 그렇게 잘 지켜줍니까?
스폐인 속담에 멋있는 말이 있습니다. 법이란 거미줄과 같아서 파리만 잡고 정작 매는 잡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기가 막힌 말입니다. 법이란 거미줄과 같습니다. 10만원 받은 사람은 감옥 가고 인생 망신당하고 수십 수백억을 받은 사람은 끄떡도 않고 명예를 누리고 훈장도 받아요. 죽어서 장례도 잘 지내요. 오늘이 10월 27일이니까 어제가 십이륙사태 난 날입니다. 기념식 석상에서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박 대통령 기념관 세운답니다. 여러분 이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민주국가에서 20년 정권을 유지했습니다. 20년을 하려고 했습니다. 군사독재의 시발점입니다. 물론 나름대로 애쓰고 수고했습니다. 그래서 경제부흥도 그때 됐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것 하나 가지고 모두 옳다 하고 이제 와서 위대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 인심이 이런 것이란 말입니다. 그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정치의 슬픔이 있고 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까? 세월이 그런 것입니다. 세월이 가면 다 잊어지는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말을 잘 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대통령 기념관을 세우자 역대 대통령 그래서 이제까지 대통령들을 모두 조사해서 그들의 공과를 공평하게 기념할 수 있는 대통령 기념관을 짓자 한 사람의 기념관을 지으면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한 사람을 위한 기념관을 지었다고 합시다. 그럼 문제가 많을 것입니다. 지금도 여차하면 탱크 몰고 갈 것 아닙니까? 별 두개만 달면 안 그렇습니까? 탱크 몰고 가서 그냥 때려 부시고 정치 잘 해서 나중에라도 위대한 사람되면 될 것 아닙니까? 이 것이 역사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도 없는 얘기들을 이렇게 버젓이 한단 말입니다. 하도 지금 마음에 드는 분이 없으니까 옛날 생각하면서 그립다고 했다 합시다. 그런데 무엇이 위인이라는 말입니까? 닮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머리 헤어스타일까지 닮아가고 그 사람 흉내 내가지고 표 모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하고 관계를 강조하면서 인기를 얻어보려고 하는 정치가들도 많습니다. 이건 역사도 없고 양심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를 짔고도 말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위인이 된단 말입니다.
시대가 그런 겁니다. 세상이라는 것이 그렇다면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냔 말입니다. 야! 하나님이 어딨냐? 불공평한 세상인데 하나님이 있다면 세상이 이 꼴이냐? 하나님의 정의가 어딨냐? 쓸 때 없는 소리 관둬라. 도덕이니 진리니 그런 소리 하지 마라 헛소리다. 심판이 어딨어? 내 손으로 할 수 있으면 일어서서 남을 찍어누르고 사기를 치든지 해서 잘살면 될 것 아니야? 실패하면 역적이지만 성공만 하면 쿠데타도 영웅이다. 그런 가치관 가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밀어버려 하고 담대히 죄를 범하는 사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판이 무섭습니까? 여러분 사람들의 평판은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겁니다. 나폴레옹이 그랬습니다. 여론을 살짝 죽이면 된다고 그랬습니다. 이 것이 오늘 어제 일이 아닙니다.
요즘 언론 탄압해 가지고 문제가 심각해졌는데 술 먹고 너무 갑자기 해서 그래요. 천천히만 하면 얼마든지 역적도 영웅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충분히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말입니다. 미치광이처럼? 죄를 숭상하면서 살까? 아니면 정 반대로 사는 길도 있습니다. 여러분, 석가모니같이 인생이 고달프다 생. 노. 병. 사. 라고 하는 것이 한심해 참 사는 것도 힘들고 죽는 것도 서글프고 병든 것도 못 봐주겠고 죽는 것은 민망하다. 여기서 그가 얻은 결론이 무엇입니까? 네 글자, 인생무상입니다. 그러다가 아 하! 하고 깨달았습니다. 원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무상한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자가 부처입니다. 그것이 인생무상이라고 깨달은 것이 부처입니다. 전부 깨닫고 나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헛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마음먹기 나름이다라고 생각하고 한말이 일체유심조라 했습니다.
다 마음먹기 나름이다. 그래서 현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고 자기의 염세적 세계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이 객관적인 세계는 허깨비다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반신적이고 현실적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비현실적으로 되면 자기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 더 강하게 담대히 죄를 짓든지, 아니면 소극적이 되면 현실 부정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모순 속에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이러한 모순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도 못하고 그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이러한 세상 속에서 가슴이 부글부글 끓고 질문이 생길 때 선에 대하여 낙심이 생길 때, 12절을 읽어야 됩니다. 중요한 말을 13절에서 합니다. 악인의 삶은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본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되고 장수하는 것 같아도 그 삶 자체 속에 고통이 있겠고 더 구체적으로는 이 세상 속에서 판단 받지 못한 죄에 대한 심판 그 진정한 심판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현대 윤리학에 고민이 뭡니까? 윤리의 근거가 인간의 생이 이 세상뿐이라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데 대해서 윤리학자들은 답변할 수가 없다는데 윤리학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대개 왜 도덕적이 되고 왜 윤리적이 되느냐 하면 서로간의 유익을 그것을 통하여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너도 법규 잘 지키고 나도 법규 잘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 질서 있는 삶이 되잖아요. 그래서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만약에 지키는데 그러한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도 지킬 수 있습니다. 왜? 다른 사람이 칭찬 해 주면 지킬 수 있습니다. 남의 여론을 의식해서 다른 사람이 칭찬하지 안해도 지킬 수 있습니다. 내 맘에 스스로를 향한 기쁨이 있다면.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면, 소위 도덕적이고 윤리적이 되어서 유익이 하나도 없다면, 왜 윤리적이 되고 도덕적이 되어야 하느냐? 여기에 대하여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윤리의 근거는 신앙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마뉴엘 칸트가 말했습니
다. 내세가 없다면 인간은 윤리적일 이유가 없다. 궁극적인 이유가 없다. 신앙과 초월적 세계는 그러므로 논리적으로도 요청된다고 했습니다. 거기서라도 심판을 믿지 않으면, 죽어서 거기에서라도 심판을 믿어야만 그래야 끝까지 억울하게 죽은 의인이 위로 받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보이는 세상의 질서가 잡혀지려면 결국 신앙이 필요하고 이 세계를 초월하는 또 다른 세계 더욱 정의롭게 평가되는 그 세계가 필요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불의한 세상 속에서 불의를 더욱 담대하게 하거나 현실을 부정하는 그러한 극단주의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공평한 최후의 심판 그것을 꼭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 다음 15절입니다.
"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있을 것이니라"
"희락을 칭찬하노니" 그랬습니다. 희락. 기뻐하고 즐겁게 살아라. 그런 말입니다. 이 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쾌락주의로 빠지란 말입니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그렇게 하라는 말이냐? 아니면 쾌락주의자들의 모토와 같이 이 세상의 유일한 것은 오늘 내가 느끼는 쾌락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오늘의 쾌락에 몰두하라는 말입니까? 그런 말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모순되고 답답하고 억울한 일도 있습니다. 이해 안되는 일도 그러나 그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있다는 것입니다 온통 엉클어지고 분노한 사건만 일어나는 세상은 아닙니다. 나라꼴이 엉망이라도 내 가정에는 내 나름대로 행복이 있습니다. 나는 건강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뭔가 모순되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있고 내게 주어진 행복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15절 하반 절에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인생은 수고가 있습니다. 있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 무엇이? 하나님이 주신 내 삶의 작은 기쁨과 은혜. 여러분 우리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로마의 압제 하에 그분이 계셨는데 왜 그분은 로마를 쳐 부시지 않았을까? 부조리하고 포악한 권력인데 왜 로마의 칼을 내버려두었을까? 그리고 칼 밑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쓰다듬어주고 치료 주었는데 이것이 소극적인 것 아닙니까? 부정한 정권을 몰아만 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독일 신학자 본훼퍼가 그런 것 아닙니다. 히틀러를 죽여 버리면 되지 말야 왜 히틀러에게 피해 받은 사람을 위로하고 기도해주고 함께 눈물 흘려 주는걸 가지고 교회의 사명을 다했다고 하느냐 내가 죽이리라. 하다가 자기가 죽었지요. 근데 예수님은 실패할 분도 아닌데 왜 로마를 무너뜨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십자가를 졌을까? 빌라도를 이길 수가 없었을까? 이것이 중요한 인생의 문제입니다.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압제와 모순 속에서 가슴 터져하며 미치광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서도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신다. 아버지와의 만남은 기뻐. 그 속에서 위로 받고 사셨다고.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인생들은 이렇게 살수 없는 걸까? 예수님처럼. 여기에 이제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더 높은 권세자 그분의 다스림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악을 통해서라도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에 대하여 인간은 무지합니다. 더 높은 자의 귀한 섭리를 인정하지 못하므로 인간에게 실족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섭리(攝理) 라고 할 때 그 섭(攝)자가 제방 변에 귀 이 자가 세 개 붙습니다. 머리에 그리실 수 있으세요? 손수 변에 귀 이자 세 개가 섭 자입니다. 귀를 모아서 귀에다 손을 데고 잘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귀가 세 개입니다. 내 귀만 아니고 네 귀 우리 귀를 서로 합쳐서 잘 들어보자. 그러면 섭리가 들린다. 섭리가 있는데, 막 들으려면 안 되고 귀를 기울여 잘 들으려면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 모순 앞에서 이것이 무슨 하나님의 뜻이냐? 하고 하나님을 내 식으로 평가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분노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그게 아닌데...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불의한 일 모순된 사건 이해 못할 많은 일들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도 깊고 깊은 세계 높고 높은 차원에서 그분의 위대하신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기억하란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보이는 세계도 다 모르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고 감추워진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안다고 생각하느냐 말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어느 전문의사 한 분을 만났는데 그런 이얘기를 해서 웃었습니다. 혈압에 대해서 한번 물어보았는데, "혈압에 대해서 어느 정도 현대의학적으로 이해합니까?" "혈압에 대해서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10% 밖에 안돼죠. 나이 많은 사람이 혈압 때문에 고민하는데요. 혈압의 90%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져 10% 아는 것뿐입니다. 그 10% 아는 것 가지고 다 아는 것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게 전문의입니다."
의사 선생님들이 애써서 공부 많이 하시지만 인간의 지식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가를 겸손하게 인정해야 됩니다. 과학이 발달했습니다마는 지극히 작은 것도 다 헤아리지를 못 하는 것입니다. 별에 대해서 아나? 달에 대해서 아나? 인간이 그렇게 몸부림을 쳤습니다마는 아직도 인간의 발이 닿은 별은 달밖에 없습니다. 우주에 비해서는 눈꼽만큼 안다는 것입니다. 그걸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련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하면 16절입니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하는 노고를 보고자 하는 동시에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그 사람들이 지혜를 알고자 애써 궁구를 하는데 참 고생 많이 하더라. 어느만큼 잠도 못 자고 인생의 지혜 비밀을 캐기 위하여 애를 쓰더라. 근심 쉬고 한숨 쉬면서 인생이 무엇인가 내 천자를 그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철학 과학 예술 그들의 고민의 주체가 무엇입니까? 모두 인생이 무엇이냐는 끝없는 질문 속에 밤잠을 못 자더라. 인간들이 그런데 그 중에는, 17절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그 인생들 중에는 조금 남보다 더 아는 자가 있더라. 상대적으로 그러나 조금 더 알뿐입니다 그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조지 싼타야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알면 알수록 무지라고 하는 사막은 확장되어 가고 지식이라고 하는 신기루는 희미하게 뒤로 물러선다. 아무리 알고 알고 또 알려고 해도 점점 더 모르는 것 뿐 이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고백해야 하느냐?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고백해야 된다는 겁니까?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이 고백이 가장 인간의 진실한 고백이 되야 된다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겸손히 자기 한계를 인정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겸손이 나오고, 여기서 정직이 나오고, 여기서 더 높은 섭리에 대한 경외하는 마음이 나오고, 여기서 순종이 나오고, 바른 삶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떠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안다는 것입니다. 능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안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를 다 모르면서 말입니다. 보이는 세계 자체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뭘 알 수 있겠습니다. 만드신 분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데, 만든바 사실을 인정하겠습니까?
여러분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면 간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으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이크다. 끝입니다. 왜냐?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것은 마이크가 아니다. 마이크처럼 보이는 거겠지. 이건 절대로 마이크가 아니다. 그럼 무엇일까? 뭘로 만들었을까? 왜 여기있을까?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끝없이 복잡한 것입니다. 이 것이 철학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나는 다 알 수 있다고 해서 나온 사조가 무엇입니까? 계몽주의 아닙니까? 계몽주의 모또가 무엇인가? 죄가 어디 있느냐? 인간이 무지해서 그렇지, 더 많이 알게 되면 더 배워서 인간이 계몽이 되면 더 선해지고 세상은 천국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초월적이 천국은 없다. 안보이니까 우리가 완전히 인간이 되고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 때 우리는 신이 되고 그렇게 될 때 천국은 이루어진다고 인간은 생각한 것입니다. 이 것이 계몽주의입니다 여기서 자기 극대화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자기극대화를 지성의 속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러면 세계와 나를 동일시하는 관념주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관념주의란 무엇이냐? 생각이 절대적인 것이지 사실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관념주의입니다. 사실보다 생각이 우선하는 것이 관념주의입니다. 그런데 관념주의 속에서는 생각의 주체인 내가 창조주인 것입니다. 왜? 생각대로 되는 것이니까 사실보다 생각이 앞서잖아요. 그러면 생각하는 내가 창조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신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념주의의 결론은 자기 우상화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척하고 교만하고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평론하고 심판하고 내 나름대로 천국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공산주의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관념주의가 극대화되다가 2차대전이 꽝 터지지 않습니까? 2차 대전의 교훈은 인간은 계몽되지 않았다. 여전히 옛날부터 지금까지 죄인일 뿐이다라는 것을 사람들이 인정했습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차대전의 결론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인정해야 됩니다. 인간은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인간은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이 말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첫째는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그 말입니다. 이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두 번째, 나는 세상의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아마 내가 세상을 떠나기까지도 다 알지 못 할 것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세상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바꿀 뿐이지 나는 세상을 바꿀 수 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이럴 수 가 없다. 하나님은 정당하냐? 하나님이 있네 없네 하는 생각들이 어디서 오느냐. 내가 똑똑하고 다 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 속에서부터 온 교만의 그 뿌리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한 사람은 무엇을 믿어야 되느냐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믿고 의롭게 살면서 내가 이해하지 못 할 일에 대해서는 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큰 섭리 중에 있는 것을 믿고 오늘 내게 주어진 내 삶 속에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마치 아부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그의 길을 걸어갔듯이 이렇게 걸어가는 것이 이 모순된 세상 속에서 가장 바르게 살아가는 길이더란 말입니다. 세상의 이치, 역사의 복잡한 구조, 악인의 득세, 의인의 고난을 나는 다 몰라요, 하나님.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오늘 내 속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있고 나는 그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신뢰하며 걸어가겠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바른 자세더란 말입니다.
솔로몬으로 돌아옵시다. 왜 나는 실패했던가? 인생을 교만했지요.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의 신비를 내 힘으로 다 파헤치겠다고 생각했지요. 탐구하고 잠 안자면 통달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세상 문제를 내가 지혜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는 동안에 교만해졌습니다. 자기 우상화됐습니다. 다른 사람 무시하며 독선했습니다. 그리고 순리를 역행했습니다. 스스로 똑똑한 척하다가 분노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게되고 내 삶의 본분을 잃어 버렸다고 솔로몬은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앙드레 크라우치라고 하는 분이 쓴 시를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에겐 눈물과 슬픔이 많았고 의문이 많았으며
때로는 어떤 것이 옳은지 구별하지 못 한 적도 많았지만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은 내게 위로를 주셨네
시련은 나를 강하게 했고
때로는 사무치게 외로운 적도 많았지만
그 외로운 시간에 주님은 내가 당신의 것임을 말씀하셨네
나는 이제 신산 인하여 감사하고
계곡을 인하여 감사하며
폭풍을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하네
내게 그 어려움이 없었던들
나는 그분이 그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분임을 몰랐을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몰랐을 것이기에
모든 일을 통하여 모든 일을 통하여
오! 나는 예수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을 통하여 모든 일을 통하여
나는 당신의 말씀을 의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을 통하여"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높으심이 있습니다. 그 섭리를 인정하고 그 섭리 속에 분노하지 말 것이며 그리고 오늘 주신 이 현실 속에서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면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바르고 행복한 삶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우리인생에 한계를 사람들은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섭리를 부정하므로 스스로 무엇인가 주인이 되어서 해보려고 하고, 그 속에서 자기 갈등과 죄를 낳게 되고, 극단주의적 삶에 빠지게 됩니다. 아버지 우리에게 정직한 마음을 주옵소서. 그리고 겸손한 마음을 주옵소서. 원망하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 내가 하나님 보다 더 지혜롭다 생각하지 말게 하옵소서.
능히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 맡기고 나는 최선을 다하여 진리에 입각하여 바르게 살고 남은 모순은 하나님께 맡기게 해 주시고 내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사는, 그래서 단순하고, 그래서 행복하고,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그러한 삶이 주의 백성들의 삶 속에 이루어지게 하시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하나님께 따지며 질문하며, 하나님을 극복 해보려 하는 가운데서, 고단하고 피곤한 인생을 사는 일이 결단코 없도록 주님 도와주시고, 하나님 앞에 잔 꾀부리며 거북한 삶을 살지 않도록 주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