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148:1-6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 칼빈
하나님께서 그 역사 하심에 있어 얼마나 찬양 받아 마땅하신 분인가를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시인은 땅 위와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께 찬양드릴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1) 먼저 시인은 천사들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곧이어 보잘것없는 짐승들과 듣지 못하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선포를 전합니다(1-10).
이러한 것은 곧 이 세상 어느 부분에서도 하나님께서 그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증거를 주고 계신 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들리지 않는 곳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2) 그런 다음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의 찬양을 전할 합당한 사자로서 지으신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11-13).
그러나 인간들 중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숫자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심사숙고하는데 눈이 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귀가 먹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그렇기 때문에 끝 부분에서 시인은 으뜸가는 증인들로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특별한 은사를 누리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하여 호소하는 것입니다(14).
1. 본문 1-2절은 “①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데서 찬양할지어다
②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 입니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천사들은 물론 별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하늘 자체와 허공에 가득한 공기, 그리고 그 속에서 자리잡고 있는 모든 것까지 포함시킵니다.
다음 구절에서 먼저 천사들을 언급하고 그 다음에 별과 하늘 위에 있는 물들을 이야기하여 구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에 관해서는 그들이 바로 이러한 목적, 곧 하나님의 종교적인 봉사에서 그 소명을 다하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찬양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순서에서 첫 번째로 등장한다고 해서 조금도 놀랄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가 묘사하는 저 놀라운 환상 속에서 스랍들이 서로 창화(唱和)하여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사6:3)라고 부르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 다른 여러 곳에서 천사들이 이러한 영광스러운 호칭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천사들과 같은 열정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 어떠한 연고로 권고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까?
또 천사들이 격려 받을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서 이토록 태만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천사들로 하여금 그 본분에 충실하도록 용기를 북돋우는 역할을 떠 맡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열정에 있어서도 천사들에게 도저히 미치지 못하며 오히려 훨씬 뒤떨어진 다윗은 감히 천사들을 권면하고 북돋을 수 있는 자로서의 자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중 어떤 것도 그의 의도 안에 들어 있는 바가 아닙니다.
다윗은 단순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있어서 택함을 받은 저 높은 천사들과 함께 거룩한 창화에 자신도 함께 참여하고자 하는 소망과 또한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증거하려 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비록 천사들은 이러한 찬양하는 일에 있어서 즉각적으로 행하고 또 보다 합당한 위치에 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있어서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함께 찬양할 벗으로서 천사들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부당할 것이 없습니다.
다윗은 2절 후반부에서 천사들을 하나님의 “군대” 라고 부릅니다.
그 까닭은 천사들은 항상 하나님 명령을 받고자 준비하며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다니엘도 이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단7:10) 라고 합니다.
이와 똑같은 이름이 별들에게도 붙여집니다.
별들은 그들 사이에서 지속되는 질서에서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명령을 수행함에 있어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민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사들이 군대로 불리는 것은 다른 기록들에서 천사들과 하늘 권세자들에 관한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을 통하여 그 권능을 행사하시기 때문입니다.
2. 본문 3-4절은 “③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④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입니다.
이 구절은 별들이야말로 그 감성(感性)과 지성(知性)에서 뛰어난 존재들이라고 하는 플라톤의 꿈에 아무런 찬동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시편 기자는 앞에서 그가 천사들에게 돌렸던 것과 같은 지위를 해와 달에게 주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단순히 마치 만물이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영광은 모든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시인은 말없이 비난하고 있는 것은 곧 인간의 배은망덕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 사실을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여 생각하기만 한다면 이러한 찬양의 교향곡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그 빛과 열과 그리고 다른 놀라운 효능으로써 그를 지으신 이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별들이 그 길을 달려가면서 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땅에 빛을 주는 것은 이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를 듣고 있다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귀가 먹고 느끼지도 못하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이들을 두고 우리 인간의 나태함을 책망하는 증거로 삼는 것입니다.
“하늘의 하늘” 이란 표현은 틀림없이 천국을 의미합니다.
고정되어 있는 별들은 혹성들 위에 있으며 혹성들 자신은 서로 다른 궤도 안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일식(日蝕)과 기타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천체의 현상들이 명백히 보여줍니다.
이처럼 훌륭한 설계를 두고 시인은 “하늘의 하늘”이라는 명백한 표현으로 합당하게 찬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실제로 하늘이 여러 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보여주신 비할 바 없는 지혜를 높여서 찬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 인간의 지혜와 과학적 기기로 발견할 수 있는 태양계나 은하계 내지는 천계가 얼마만큼 크고 많은 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인식 할 수 없으리만큼 또 신의 영역 만큼이나 무한한 것같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삼위 일체 하나님은 그 전체 우주보다 더 크신 분으로써 그밖에 계셔서 통치하시고 관리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하늘의 하늘” 이라는 말이 쓰인 것은 해와 달과 별들이 서로 혼란스럽게 마구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이 모두 제 자신의 위치와 그 하나하나에 부여된 거소(居所)를 지니고 있고 그들의 복잡한 운행로도 모두 세밀한 법칙으로 이루어진 까닭입니다.
“하늘”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시인은 공중의 일, 적어도 이 땅과 저 먼 하늘의 공간에 있는 모든 일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비를 가리켜 “하늘 위에 있는 물”이라고 부릅니다.
흑자들이 추측하는 것처럼 네 가지의 요소들 위에서 물이 생성된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반면에 시편 기자가 이러한 물이 하늘에 있는 것으로 이야기할 때 그가 가리키는 것은 명백히 비가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쓰여진 문자들에 너무 엄격히 집착하여 마치 하늘 위에는 물이 항상 비축되어 있는 어떤 바다라도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런 점에 관해 모세와 선지자들이 가장 이해가 더딘 사람에게도 합당하게 전해줄 수 있도록 매우 대중적인 어투로 이야기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압니다.
따라서 선지자들 이야기를 단순히 과학 법칙으로 압축시키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한 실례를 들면 바로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구절에서도 시인은 하나님께서 허공에다 물을 붙잡아 두고 계신다고 하는 신기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만약 물이 높이 떠올라 갔다든가 또는 흘러내리는 물이 텅 빈 허공 중에 걸려 있다고 한다면 도무지 대자연의 모습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은 다른 곳에도 마치 병속에 갇힌 것처럼 붙들어 매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시33:7) 시인은 이런 표현 형태를 모세의 말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창1:6)에서 빌어 썼습니다.
3. 본문 5-6절은 “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 음이로다
⑥ 저가 또 그것들을 영영히 세우시고 폐치 못할 명을 정하셨도다” 입니다.
이제 시인은 지력(智力)이 없는 사물들에 관해 말합니다. 그러므로 3인칭으로 말합니다. 이로부터 그가 지금까지 3인칭으로 이야기했던 이유는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인은 우리가 찬양함으로써 별들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비가 우연히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배우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인간은 하나님의 권능에 관한 두드러진 증거들을 끊임없이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참으로 부끄럽고 부주의하게도 그 위대하신 창조주의 모습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은 사악한 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원 이전부터 있고 영원히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 원자들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명백히 볼 수 있듯이 만물이 지닌 아름다운 질서는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갑자기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인은 특히 우리 주의를 끌만한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만물에 결코 파괴될 수 없는 법칙을 부여하셨다는 것을 덧붙여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손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이 사실로부터 도약하여 이제는 이 자연 질서가 그 자체로서 정립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느긋하게 앉아 계시는 줄로 생각하는 어이없는 우(愚)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참으로 합당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 위의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가르칩니다.
지금도 그분께서 명하심에 따라 움직이고 있고 처음에 지으신 물건들에 붙이신 것이 비밀의 능력이었다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그 모든 피조물들이 지금 그들에게 부과된 역할을 통해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도 그들의 다양한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기능과 직분이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애써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시편을 보면 하늘에서부터 땅과 바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은 다 찬송하라는 의미로 초청합니다.
이 시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늘 위에 있는 자들의 찬송을 독촉합니다(1-6).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만큼 하나님 의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찬송할 처지에 있습니다.
비록 하늘 위에 있는 자들이라도 땅 위에 있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송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말씀으로 명하여 지으시고 지금도 그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분의 성품과 그분께서 일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시148:7-14 너희 용들과 바다여
이 시편은 하나님께 찬송하는 일을 더욱 고조하기 위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다 찬송해야 될 것을 말합니다. 이 시편은 여호와를 창조자, 통치자 보존자로 가르치는(5, 6) 동시에 메시야(그 백성의 뿔)를 보내주실 자로 관망(觀望)합니다(14절).
1. 본문 7-10절은 “⑦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⑧ 불과 우박과 눈 과 안개와 그 말씀을 좇는 광풍이며 ⑨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⑩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입니다.
이제 시인은 이 세상의 보다 낮은 부분으로 옮겨서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그는 정확한 순서의 상제(常制)를 벗어나 있고 또 공중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인 불(번개), 눈, 우박, 광풍 따위를 함께 뒤섞어 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앞에서 언급되는 것이 마땅했을는지도 모르지만 시인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이해에다 역점을 둔 것입니다. 이들 말씀 전체가 의도하는 바는 우리가 그 어디로 눈길을 돌리더라도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증거들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고래들(칼빈 사역- ‘용들’ ; 한글 개역) 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바로 뒤에서 ‘심연(深淵)’ 또는 ‘깊은 곳’(칼빈 사역 - ‘바다’ ; 한글 개역)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 תנינים (탄니님)이 고래와 같은 바다의 물고기를 뜻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바다는 수없이 많은 경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자료를 바다에서도 취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합당할 뿐입니다.
다음으로는 올라가서 “우박과 눈과 안개”(폭풍우-칼빈 사역)를 취하여 이야기하는데 그는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충족케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구름이 덮인다든가 이 구름으로부터 단 한 방울의 물일지언정 빗방울이 떨어진다든가 또는 천둥이 무섭게 노호하는 것 등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이러한 변화 모두가 하나님께서 땅에 적당한 물을 대심으로써 사람의 자손에게 그의 선하심을 보이려 하시거나 폭풍이나 우박 또는 다른 재앙들로서 인간들의 죄악을 징벌하시려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의지를 따라 행해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여러 종류의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랫동안 계속된 가뭄과 열로 인하여 땅이 심히 그 입을 벌리고 기근이 닥쳐왔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심으로 즉시 비를 보내사 가뭄을 거두게 하실 수 있는 것과 같은 일들입니다. 반면에 끊임없이 내리는 비로 인하여 씨가 땅속에서 썩고 농작물이 그 결실에 이르지 못할 때면 우리는 맑은 날씨를 내려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천둥으로 경고를 받게 되면 이는 곧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천둥을 그 노여움으로 보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역시 하나님께서 모든 고통스러운 요소들을 진정시키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진리에 대하여 경건치 못한 자들이 비호하는 좁은 안식(眼識), 곧 자연계의 모든 사물은 태초부터 그들에게 부여된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일 뿐 하나님께서는 그저 느긋하게 지켜보실 뿐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굽어 살피시며 우리가 104편 4절에서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심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라는 말씀에서 하나님 뜻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지식을 굳게 확신해야만 합니다.
2. 본문 11-13절은 “⑪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사사며
⑫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⑬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 이로다” 입니다.
이제 시인은 그의 말씀을 인간들에게로 향합니다.
지금까지 시인이 하늘에서와 땅 모두에서 모든 피조물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들을 선포한 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이것을 명백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왕들과 방백들은 그들이 처한 지위의 현란한 영향 아래 그 눈이 멀어 이 세상은 그들을 위하여 지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들의 마음 속에 뿌리박은 교만으로 하나님을 멸시하게 되는 까닭에 시인은 특히 이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땅한 직분으로 마음을 기울일 것을 호소합니다.
또 이들의 이름을 먼저 언급함으로써 다른 자들보다 더욱 큰 의무 아래에 있으면서도 그들이 반드시 바쳐야 할 찬양의 헌물(獻物)을 감춤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나는 그들의 배은망덕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모든 사람은 마땅히 그 조건이 따르는 위치에 처하게 마련인고로 사람이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그리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면 갈수록 더욱더 거룩하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반포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땅히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르치고 그 길을 인도해야만 할 위치에서 오히려 이러한 보편적인 규례로부터 자신은 벗어난 것처럼 주장하는 왕들과 방백들의 사악성은 그만큼 더 용서받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총칭적인 용어인 모든 백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한꺼번에 모든 사람들에 대한 개괄적인 권면을 설파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번씩 방백들을 명시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이러한 방백들이 그 직분을 다하는 데 태만하여 마땅히 하나님의 찬양에로 마음을 돌리도록 촉구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연령과 성별에 따른 구분이 따르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고 모두 함께 한 마음으로 모든 정성을 이 목적에 쏟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노인”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길게 하시면 하실수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있어서 더욱 더 깊어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청년 남자”를 노인과 함께 결합시키는데 이것은 비록 젊은 청년 남자들이 지속적인 습관으로부터 얻는 체험이 보다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한창 때에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녀”에 관해 이야기함에 있어서 히브리어의 분사 םנ(감)은 ‘또한 역시’라는 뜻으로 단순히 감탄사적으로 쓰인 것이 아니고 이 말들을 보다 강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덧붙여진 것으로 비록 남성들 만큼 자유롭게 교육받지 못한 젊은 여성들이라 할지라도 집안에 있어서 주로 일하는 직분을 위해 태어난 것으로 간주되므로 만약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있어서 교회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 마땅한 직분을 행하지 않는 결과가 된다는 진리를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결국 가장 비천한 자들로부터 가장 권세 있는 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이 공통 규율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 본문 14절은 “저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거리로다 할렐루야” 입니다.
이미 앞에 있는 시편에서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전체로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이루신 일에서보다 교회 안에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 보인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손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모든 원수들에 대항하여 어떠한 위험에서도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권능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내용의 문장을 덧붙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지만 여기서 “뿔”이라는 말은 힘 또는 위엄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이에 따라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힘을 통하여 영화롭고 강력한 만큼 하나님의 복은 그의 교회와 그의 택하신 백성 가운데서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의 교회와 다른 적대적인 세력들 사이의 은근한 비교가 시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면에서 공격을 쉽게 당할 수밖에 없도록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거리로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에 대한 자축과 찬양을 위해 자기를 낮추시는 특별한 자비 속에서 부여받은 바 찬양에 대한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자손을 “저를 친근히 하는”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은혜로운 언약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잘것없고 멸시 당하는 한 나그네를 모든 나라들보다도 더 아끼심이 아니었더라면 이러한 친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이러한 구별을 오직 하나님의 단순한 사랑 속에 찾습니다.
결단코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비록 모든 세상이 똑같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써 자신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먼 낯선 자들이었고 또한 아담의 후손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자기에게로 가까이 불러 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모세도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32:8)라고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인이 하는 말은 왜 하나님께서 한 민족 불쌍하고 멸시받는 백성에게 이처럼 뛰어난 복을 베푸시고 그들을 자기에게로 택하여 맞아들이셨는가 하는 원인을 지적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4. 이 시편에서 시인은 땅위에 있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합니다(7-13) 이 부분에 있어서 그는 산들과 수목들과 짐승들까지도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도 찬송하여야 된다고 한 말씀은 인간으로서는 더욱 찬송해야 될 것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말하여 하나님께 대한 택자들의 찬송이 중요하고 지극히 큰 사실을 역설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하여 지음 받았으며 또 구원도 받습니다(엡1:6, 14, 롬11:36).
이 시편에서 시인은 땅위의 모든 자연물들과 택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입은 인생들이 그 대소를 물론하고 다 찬송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자연물들은 어떤 방식으로 찬송합니까?
그것들은 무죄하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을 순전히 그 자체에 나타냅니다.
그것이 찬송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더욱 합당하게 찬송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