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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4:1-12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식(子息) 교육에 대한 열의 하나만큼은 대단합니다. 특히 서울 강남에 사는 부모들은 일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열성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식이 좋은 대학을 나오는 것이 그 다음 사회 생활을 하는데, 필수적으로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자식이 유학의 길을 선택했을 때, 부모들이 겪어야 하는 희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부부가 떨어져서 한 사람은 직장 생활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녀를 따라 외국에 가서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합니다. 우리는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교육받는 것을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받는 이것입니다. 인간들에게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가지는 것은 이 세상 살 동안 잘 살기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영원(永遠)한 운명(運命)을 결정짓는 중요한 일입니다.
좋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모나 학생들이 많은 고생을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받는 일에는 놀랍게도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전에 베트남에서 전쟁이 끝난 행사로 시가행진을 크게 하는 것을 뉴스에 나왔습니다. 우리는 월남이 패망(敗亡)할 때,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미국 대사관 지붕에 있던 헬기가 떠나는 것으로 월남은 완전히 공산화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헬기를 타고, 패망하는 월남을 떠나고 싶었겠습니까?
아마 돈을 주고 그 헬기를 탈 수 있었다면, 사람들은 돈이란 돈은 다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헬기를 타는 것은 돈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에 중요한 것은 미국 시민권(市民權)이었습니다. 미국은 자기 나라 사람들만 태우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버려두고 월남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좀 더 안전하고, 행복한 나라의 시민권(市民權)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 시민권을 가지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아마 돈을 주고 미국 시민권을 살 수만 있다면, 돈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미국 시민권을 사려고 할 것입니다. 옛날 로마 시대에는 로마 시민권이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돈 많은 사람들은 거금(巨金)을 주고서라도 웬만하면, 로마 시민권을 사려고 했습니다. 또한 로마 시민권(市民權)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많은 특혜가 주어졌습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에게 천국(天國) 시민권(市民權)과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받을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은 다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미국 시민권을 얻거나,좋은 대학(大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열성적인 사람들이 천국 시민권이나, 하나님의 축복(祝福)에 대해서는 별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받는 유일한 조건을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아무 조건 없이 아무 공로(功勞)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받게 됩니다.
Ⅰ.구원에 대한 의심(疑心)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믿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存在)자체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진짜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구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인간들이 겪는 가장 심각한 병(病)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그냥 모를 수도 있지 하면서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 치명적인 부분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罪)에 오염되어 태어납니다. 마치 새로 태어나는 아기로 치면 선천적(先天的)으로 병(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선천적인 병(病)은 하나님을 인식(認識)하는 기능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병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나 돈이나 벌고, 할 수 있는 대로 이 세상의 행복(幸福)을 많이 가지고 누리면서 살다가 죽는 것을 복(福)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한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그때입니다. 우리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우리 안에 죽어 있는 기능을 살릴 수 있습니다. 물론 말씀을 듣는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치료되는 것은 아니지만,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는 죽은 부분이 치료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13:16절)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요8:47절)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이것이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를 지었고, 모두 당장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급박한 상행에 처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가진 라디오가 고장이 났습니다. 라디오를 고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하다가 가까스로 고쳐 처음으로 들은 뉴-스가 모든 인간은 죄를 지어 하나님 앞에서 당장 멸망당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몇 번 들어보아도 그 내용만이 반복적으로 나올 때, 비로소 심각한 사태를 느끼게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많은 불행이 있지만, 요행히 잘 피해 사고도 당하지 않고, 병도 걸리지 않고, 부도도 당하지 않으면, 복(福)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모든 인간들이 이미 사망(死亡)의 올무에 매여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이 세상에서 많은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복(福)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모든 인간들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쏟아지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정은 절대적으로 절망 상태입니다.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福音)이 말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엄청난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시민권(市民權)을 가질 수 있고, 축복(祝福)받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축복(祝福)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내용입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가만히 있는데, 수백억짜리 상(賞)을 받게 되었다면, 얼마나 좋아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祝福)은 수 백억짜리 복권이나, 상금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중의 복(福)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축복(祝福)은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귀한 축복(祝福)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의심(疑心)이 많은지, 아무리 좋은 것을 줘도 일단 의심부터 합니다. 그리하여 의심이 없어지면, 관심(觀心)을 가지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구원의 기회를 주지 않으시냐? 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복음(福音)을 들을 기회를 가진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福音)을 듣지도 못한 채, 살다가 죽게 됩니다. 사람들의 첫 번째 의심(疑心)은 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택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공평한 기회를 주지 않으시냐? 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왜 꼭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시느냐? 는 것입니다. 다른 여러 방법으로도 구원을 얻게 해주셔야 하는데, 예를 들어서 도(道)를 많이 닦거나, 선행(善行)을 많이 하거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해주셔야 하는데, 왜 그렇게 끔찍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만 믿어야 구원해 주시느냐? 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에 의심하는 것도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 것은 그냥 쉽게 결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하시고, 고민하셨고,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죽을 수 없는 아들을 죽게 하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祝福)은 단순히 지옥(地獄)에 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또 앞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복(福)을 가지는 상속자(相續者)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구원을 실천하시면서 두 가지를 결심하셨습니다.
첫째는 구원이 철저하게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똑똑하고, 자존심이 강하다 해도 어디까지나 피조물(被造物)에 불과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질그릇밖에 되지 못합니다. 즉 하나의 흙뭉치 밖에 되지 않는 인간들이 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갈갈이 찢어 놓은 것입니다. 이번의 구원을 통해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구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께 구원해달라는 말조차 할 자격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구원하실 권한도 있고, 멸망시킬 권한도 있으십니다. 구원받는 자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멸망 받는 구원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일부 사람들에게만 복음(福音)을 들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인간들에게는 복음(福音)을 듣는 것 자체가 엄청난 복(福)의 복(福)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인간들이 멸망해도 하나님께 불평할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질그릇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깨뜨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그릇은 오래 오래 소중하게 간직했다가 귀한 손님 접대용으로 쓸 수 있습니다.
둘째는 모든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한정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잘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죄가 모든 것을 다 흐트려 놓았는데,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 안에 한정 시켜 놓으셨습니다. 즉 감히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곧 사탄의 종이기 때문에 일체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에는 인간의 공로(功勞)라고는 일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100%가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영원토록 하나님만 찬양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Ⅱ.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救援) 지금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들이 많이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구원받기 위해 많은 공(公)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공로(功勞)를 세우든지, 아니면 경건하든지, 둘 중의 하나가 있어야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 얻을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전 재산을 희사하든지, 종교인이 되어 매일 도를 닦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요구하시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 일체 외적 조건을 보지 아니하시고, 오로지 믿음 하나만 보고 구원하십니다. 즉 이 사람이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한 사람이며,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며, 얼마나 인정을 받는 사람인가는 전혀 보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을 얼마나 절대적으로 믿느냐? 는 믿음만 보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 근거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들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절)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福)을 주시고, 자손들에게 복(福)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태어나면서 곧바로 하나님의 축복(祝福)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큰 공로(功勞)를 세운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많이 하고, 금식을 많이 해서 얻은 것입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偶像)을 섬기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지 바 되었다”는 것은 이삭에 관한 믿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늙어 도저히 아들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부인 사라도 늙어 더 이상 임신이 불가능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17:9절)...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라”고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그 전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찾아온 후부터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신 것은 낳을 수 없는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믿은 그때였습니다. 그러면 도대체‘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무엇인가를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중요한 축복(祝福)을 거저 주시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자신을 믿거나, 흑은 상식을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여기서‘믿는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믿는 이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내가 믿어온 것이나,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나, 이 세상이 믿는 것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만 옳다고 믿는 이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부터는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던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가진 믿음을 공유(共有)해야 합니다. 또한 어느 정도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대한 자신감과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부터는 이 세상에 대한 믿음이나,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나, 심지어 자신에 대한 믿음까지 모두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믿었습니다. 이것은 기생(妓生) 라합이 구원을 얻기 위해 여리고 성에 대한 모든 믿음이나, 신뢰를 버리고, 하나님을 택한 것과 같습니다. 또 룻이 조국 모압에 대한 모든 기대와 믿음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택한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해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전혀 살아본 적도 없는 가나안 땅으로 이민(移民)을 갔습니다. 나중에는 전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인데도 하나님께서 아이를 낳게 된다고 하시니까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아브라함이 이 세상이나 다른 사람이나, 심지어 자신에 대한 믿음을 한 순간에 버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이렇게 될 수 없습니다. 우선 여러 가지 어려움을 통해 자신의 무능과 죄 성을 철저히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평소 우리들의 마음은 길가나 돌짝 밭과 가시덤풀 같은 마음이어서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려면, 단단한 마음 밭을 갈아엎는 일대 마음속의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 앞에서 죽은 시체와 같은 상태에서 태양보다 더 강한 말씀의 역사가 임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진짜 신앙을 가지려면, 무슨 계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한 모든 믿음과 신뢰와 자신의 판단에 대한 믿음까지 모두 다 버릴 때,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미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어린 아이로 태어나게 되고, 그때부터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임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보면‘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의 핵심에는 바로‘의(義)’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인간이 모르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죄인을 의롭다고 하실 수 없고, 죄인에게 귀한 축복(祝福)을 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를 의롭다고 하십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을 붙잡는 그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십니까? 일단 이 사람은 자기가 틀렸고, 하나님만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무리 옳은 것 같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틀렸습니다. 이것이 인정되는 것이 구원의 첫 단계입니다. 즉 나는 소망이 없다고 믿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 때, 실제 그리스도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순간부터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판단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옳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결국 살아남을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공급되기 시작합니다. 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와 밖에서 기적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Ⅲ.믿음이 공로(功勞)인가? 그러면 궁금한 것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대단한 일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살아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불가능한 것을 응답받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다른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능력을 나타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아름다운 성자의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삶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4-5절)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은혜(恩惠)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으로 주거나,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그 대가로 받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 임금(賃金)입니다. 만일 일을 시켜놓고, 임금을 주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은 당장 항의할 것이며, 그래도 임금(賃金)을 주지 않으면, 법에 고소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믿음은 하나님과 연결된 호스입니다. 일단 하나님과 믿음의 호스가 연결되면, 무한정의 은혜(恩惠)와 축복(祝福)이 공급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호스가 막히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공로(功勞)가 될 수 있을까? 믿음은 공로(功勞)가 아닙니다. 왜냐면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민 구원의 손을 거절하지 않고 붙잡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붙잡기 위해 세상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 대단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세상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가진 기대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길을 가지 않고, 다른 길을 갔더라면, 얼마만큼 성공했을까? 하는 가상적(假想的)인 기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따라 가지 않고,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에 스스로 손해 본 것 같고, 어떤 의미에서 그런 결정이 대단한 것 같지만,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손해 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때 세상 적으로 대단한 학벌을 가진 젊은이들이 주님을 위해 모두 다 버리고 복음(福音)에 뛰어들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당신들은 주님 때문에 손해 본 것이 많지 않소?’그랬더니, 젊은이들이‘우리는 주님을 위해 손해 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 전능하신 분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때문에 크게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는 것은 등산을 하면서 벼락 맞은 나무를 버리고, 진짜 로프를 붙잡은 것입니다. 벼락 맞은 나무가 튼튼할 것 같지만, 위기의 순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썩은 나무를 붙잡았던 것을 놓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이것입니다. 이것은 손해가 아니라, 엄청난 축복(祝福)입니다.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믿음 없는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것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손해 봤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을 때,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때는 숨 쉬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계속 공급됩니다. 이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면, 도저히 끊어지지 않던 죄의 줄을 끊게 만듭니다.
또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던 유혹을 끊게 만듭니다. 이 능력은 불가능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도록 만듭니다. 그때 깨닫게 되는 사실은 우리가 버린 것이 썩은 고목나무였고, 벼락 맞은 나무였으며, 내가 어떻게 이런 기적을 체험하고, 이런 은혜를 받는 자가 되었을까? 하면서 감격해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시23:5절)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얼마나 감격스러운 고백입니까? 내 잔이 넘친다는 말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祝福)이 너무나도 넘치게 부어져서 이제는 조금도 하나님에 대해 섭섭한 것이나, 불만스러운 것이 없고, 오직 모든 것이 감격스러울 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기계(器械)이기 때문에 바르게 사용되려면, 우리 힘으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부어져서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 안에 기적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Ⅳ.다윗의 고백(告白) 구약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가장 풍성하게 받은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나라답게 만들었고, 가장 축복(祝福)받은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보통 목동(牧童)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한 목동(牧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수많은 젊은이들 중에서 보잘 것 없는 목동(牧童)을 가장 귀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신의 인물을 믿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믿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놀라운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에게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黙想)과 주어진 현실(現實)에 열심히 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黙想)하는 것을 좋아했고,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를 해서 시(詩)로 표현했습니다.
특히 시편 119편은 율법의 말씀을 얼마나 깊이 묵상(黙想)했는지, 시편 중에서 가장 긴 시(詩)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비천(卑賤)한 목동(牧童)이었지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곰이나, 사자가 와서 양(羊) 새끼를 물고 갈 때에도, 비겁하게 피하거나, 숨지 않고, 덤벼들어 양(羊)을 도로 찾아오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많은 젊은이들 심지어는 그의 형제들 중에서도 다윗을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왜냐면 그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공로(功勞)가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었으므로 다윗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모든 이스라엘 군인(軍人)들이 벌벌 떠는 골리앗을 물매돌 하나로 쓰러뜨려 죽였습니다. 다윗은 많은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많은 위기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죄(罪)였습니다. 7-8절)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에게 가장 무서운 적(敵)은 교만(驕慢)이었고, 죄(罪)였습니다. 다윗이 이 시(詩)를 쓴 때는 무서운 간음죄(姦淫罪)에 빠지고 난 후였습니다. 다윗은 잠시 방심하다가 한 여인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빠져 죄(罪)를 지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죄를 은폐(隱蔽)하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있던 여인의 남편을 불러서 재우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얼마나 강직한 사람인가 하면, 다른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는데, 자기만 아내와 잠을 잘 수 없다고 해서 집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를 죽이라는 왕(王)의 편지를 가지고 가서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다윗이 잠시 방심(放心)했을 때, 죄(罪)는 그를 무서운 살인자요, 간음자요, 최고로 악(惡)한 사람으로 타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살인하고, 간음한 사람이 가야할 곳은 지옥(地獄)이었습니다. 다윗은 무서운 죄를 저지르고서도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냥 죄를 품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대로 두면, 이 죄는 다윗을 지옥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어떻게 살인자(殺人者)가 이스라엘의 왕(王)일수 있습니까? 어떻게 간음(姦淫)을 행한 자가 이스라엘의 목자(牧者)일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의 죄를 터트려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자기 죄를 솔직하게 다 인정하고, 다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붙잡았습니다. 그때 다윗이 고백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요, 유명한 왕이 되는 것도 아니요, 부자(富者)가 되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 앞에서 죄(罪)없다고 인정받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행복들은 썩은 고목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이 세상에 대한 모든 믿음과 신뢰를 버리고, 하나님을 붙잡는 이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살고 죽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던져 버리는 이것입니다. 억울하게 죽음 수도 있고, 돈을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뒤로하고, 하나님의 말씀만 옳고,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 나의 모든 죄(罪)가 지워져 버립니다. 하늘에다 적어도 부족할 정도의 죄(罪)가 다 지워지며, 내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공급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셔서 존귀하게 하십니다. 죄를 이기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면,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위대한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모두 내 속의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기적은 모세가 일으킨 것이 아니고, 모두 예수님이 모세를 통해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또 엘리야의 기적은 엘리야의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엘리야를 통해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위대하게 사용된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의 장애인을 보았을 때,‘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신기하게 몰려들었을 때,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가 이 사람을 일으켰다고 선포했습니다.
주님은 오늘 살아계십니다. 우리를 통해 위대한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누구를 통해 그 일을 하십니까? 세상을 믿지 않고, 자기 생각도 믿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죽으라고 하시면, 죽고, 살라고 하시면, 살고, 있으라고 하시면, 있고, 가라고 하시면, 가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 이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왕 믿으려고 하면, 마지막 남은 내 생각이나, 고집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나를 완전히 풍덩 집어 던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542장*구주 예수 의지함이* 씨 뿌리는 자 다음카페 교회갱싱 성경연구원 카톡선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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