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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행 지 : 한강 9산 (서울시 영등포구, 강서구)
(당산, 선유봉(고양이산), 쥐산, 도당산, 염창산(증미산), 탑산, 궁산, 치현산, 개화산)
산 행 일 : 2022. 04. 30.(토)
산행코스 : 당산역 ~ 당산 ~ 당산 부군당 ~ 노들길나들목 ~ 양화대교 ~ 선유도(선유봉/고양이산) ~ 선유교 ~ 양화한강공원 ~ 쥐산(50.5m) ~ 안양천합수부 ~ 염창동둘레길 ~ 도당산 ~ 염창정 ~ 증미산/염창산(54.8m) ~ 염강나들목 ~ 가양구름다리 ~ 구암근린공원 ~ 허준박물관 ~ 탑산 ~ 공암/허가바위 ~ 소악루 ~ 궁산(74.4m) ~ 양천향교 ~ 겸재정선미술관 ~ 서울식물원습지원 ~ 서남물재생센터공원 ~ 치현산 ~ 치현정 ~ 방화근린공원 ~ 꿩고개 ~ 약사사 ~ 개화산(128.4m) ~ 개화역 (20km, 7시간 소요)
산행참석 : 4 백두
<산행지도>
정기 산행이 중단된 상태에서 산행을 원하는 분들이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근교 산행코스를 찾다가, 맥가이버란 분의 블로그에 소개된 '한강 9산' 산행기와 옛날 백두대간을 함께 걸었던 한성 형님의 '겸재 그림 길'이란 연재 기사를 참고하여 우리도 한강의 옛 모습과 달라진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며 한강에 얽힌 역사문화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이번 코스는 당산역에 출발하여 '당산'을 시작으로 한강을 따라 개화산역까지 한강변에 산재했던 9개 산(山)의 흔적을 탐방하는 코스인데, 이곳은 옛 양천현에 속했던 지역으로 선인들이 정자를 짓고 배를 띄워 풍광을 즐겼다는 '양천팔경'의 흔적을 겸재 정선의 그림 속 풍경과 비교하며 걸으면 더욱 재밌지 않을까 하여 '있는 길'과 '없는 길'을 이리저리 역어서 코스를 그려 봤다.
'양천 사람은 바람 마시고 죽을 마신다’, ‘양천원님 부임할 때 울고 나갈 때 운다’는 예기가 양천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강변 마을이라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면적은 얼마 되지 않고, 넓은 침수지대에 목초가 무성한 벌판이 있다. 지금은 아파트숲으로 변해있지만 옛날 한강변의 벌판은 바람이 세고 농사를 지어도 침수로 인하여 흉년이 들 때가 많아 이런 속담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양천은 아름다운 경치에 도성과 가깝기 때문에 명사들과 교류하기가 쉬운 곳이기도 했다. 궁산은 양천향교 뒤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으로 파산, 성산, 관산, 진산 등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조선시대까지 양천(현)은 지금의 서울 강서구와 양천구를 모두 관할하는 곳이었다. 현재 양천(현) 관아터, 양천향교 그리고 양천(현)의 진산이었던 궁산과 궁산 정상에 축조된 둘레 약 220m의 양천고성지는 행정구역상 서울시 강서구 가양1동에 속해 있다. 궁산 남쪽 평지에 관아가 있었고, 그 북쪽 언덕에 향교가 있으며, 정상 바로 아래에 소악루가 있다. 소악루 위쪽의 능선부를 감싸두른 성곽이 현재 '양천고성지'로 불리고 있다. 양천현 관아가 있던 곳은 현재 양천향교역 북쪽, 양천초등학교에서 겸재정선미술관과 흥원사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양천고성지가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행주산성과 더불어 의병들의 집결장소였으며, 6.25 동란 때에는 국군의 주둔지 역할을 한 곳으로 군사요충지였다고 한다.
한양도성 서쪽 들녘은 '서교'이다. 서교에는 연희궁 서잠실과 용산·마포 일대의 각종 창고만 있었다. 한강변에 전개되는 풍치는 가장 광활하고 웅대하였다. 양화진·성산·망원정·선유봉·공암 등지의 절경은 중국에서 온 사신들과 우리나라 사대부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정선을 비롯한 화가들의 화폭에도 담겼다. 서교의 승경은 한강, 강변의 산봉우리, 숲, 정자 등 자연 풍경과 인공시설들의 조화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서교의 승경은 범위가 넓어 용산(남호)팔경, 마포팔경, 서호팔경, 양천팔경, 파능팔경 등으로 나눈다. 그 범위는 용산에서 행주산성까지 이어진다.
그중 양화진·행호 일원의 절경 여덟 곳을 '양천팔경(陽川八景)'이라 하였는데, 선유봉·이수정·소요정·공암·소악루·개화사·낙건정·위래정 등이 바로 양천팔경(陽川八景)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하며 특히 선유봉의 소나무 숲이 가장 빼어난 절경으로 꼽혔다.
악루청풍(岳樓淸風) : 소악루의 맑은 바람
양강어화(楊江漁火) : 양화진의 고기잡이 불
목멱조돈(木覓朝暾) : 목멱산의 해돋이
계양낙조(桂陽落照) : 계양산의 낙조
행주귀범(杏州歸帆) : 행주로 돌아드는 고깃배
개화석봉(開花夕烽) : 개화산의 저녁 봉화
한산모종(寒山暮鐘) : 겨울 저녁 산사(개화산 약사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이수구면(二水鷗眠) : 안양천에 졸고 있는 갈매기
오늘 우리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인 겸재 정선이 나이 65세인 1740년에 양천현령으로 부임하여 1745년까지 양천현령으로 있으면서 남긴 '양천팔경첩', '경교명승첩' 등에 수록된 '양천팔경'의 흔적을 쫓아 그림에 담긴 옛 한강의 풍경과 지금의 풍경이 얼마큼 왜 변했는지를 생각하며 탐방을 이어가면 더욱 재밌는 트레킹이 되지 않을까 한다.
트레킹 거리가 20km로 짧지는 않지만 동네 산책길 수준이라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라고 공지하였으나 의외로 참가를 희망하신 분들이 적다. 아마도 최근들어 코로나19 방역 수준이 완화되어 모임의 인원 제한도 거의 해제 수준이고 야외 마스크 착용 의무도 풀렸으며 또한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이라서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나들이 계획이 많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물론 나도 5월의 공휴일이 이런저런 일정으로 빈틈없이 메워져 있고, 금번 한강 9산 트레킹은 햇볕에 노출이 되는 곳이 많아서 날씨가 더워지면 부담스러워지는 코스라 후일로 미룰까도 고려하였으나 부득이 예정대로 진행키로 한다.
가장 먼저 참가를 신청했던 박 점장님도 코19로 참석이 불가함을 알려와 더욱 의기소침한 느낌으로 2호선 당산역에 도착하였는데, 약속 장소인 8번 출구는 9호선 쪽에 있어서 한참을 헤매다가 역시나 헤매고 계시던 회장님을 만나 겨우 8번 출구에 도착하니 서여사님과 석여사님은 벌써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에 담겨진 한강의 풍경을 찾아 나서는 한강 9산 종주'라는 거창한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단출한 4명이서 당산역 8번 출구를 뒤로하고 사이좋게 걸음을 옮기다가,
좌측 골목으로 들어서며 당산중학교 방향으로 진행하면,
당산중학교 후문이 나오며 후문 앞에는 작은 동산(당산)이 있는 소공원이 자라하고 있는데,
소공원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2그루가 있는 당산이 있다.
<영등포구(永登浦區) 당산동(堂山洞)>
영등포(永登浦)의 명칭 유래는 확실치는 않으나, 일반적으로 영등(靈登)굿과 관계되어 변형 표기된 '영등(永登)'과 물가를 뜻하는 '포(浦)'가 합쳐진 명칭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당산동은 당산 1·2동 2개 동의 행정동을 보유한 법정동으로, 옛날에 이곳에 해당화 나무가 많아 늦은 봄에 많이 피었다 하여 당산동이라 불렀다고도 하며, 또 하나는 당산동 110에 우뚝 솟은 산이 있어 이를 단산(單山)이라 부르고 이곳에 부군당이 있어 당제(堂祭)를 지냈던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당산 정상의 580년 된 은행나무.
<당산 당산나무>
당산의 당산나무는 조선 초기 임금님이 쉬어간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식수한 것으로, 이후 동네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아 제사를 지내왔으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일대가 침수되자 동네사람들이 이 나무 밑으로 피신하여 무사하였다 하여 주변에 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한다.
아빠와 나들이 나온 딸들!
당산을 내려서서 도로를 60여 미터 따르면 자그마한 당집 건물이 나오는데 '당산동 부군당'이다.
<당산동부군당(堂山洞府君堂)>
이 부군당의 유래는 원래 현 위치에서 우측으로 30m쯤에 큰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는 곳에 터주가리를 만들어 놓고 조선조 초기부터 당제를 지내던 것을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많은 인명이 이곳에 피난하여 무사하였던 덕으로 마을의 28호를 보호하기 위하여 당집을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950년 4월에 건립된 것으로 당 안에는 아홉 신(神)이 그림으로 모셔져 있는데, 오른쪽에서부터 대동할아버지, 대감님, 장군님, 부군할아버지, 산신님, 칠성님, 삼불제석님, 대신할머니, 각씨님이다. 매년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마을의 안녕과 가정 및 주민의 건강을 기원하는 당제를 올리고 있다.
<부군당(府君堂)>
서울과 경기도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모셔 놓은 신당(神堂)으로, ‘부근당’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부군당(附君堂)’·‘부근당(付根堂)’·‘부강당(富降堂)’ 등으로도 표기한다. 『증보문헌비고』에 “본조 풍속에 도하 관부들에는 으레 수호신을 모신 한 작은 숲을 두고 그 사당에 지전(紙錢 : 종이돈)을 걸고 부군이라 일컫는다.”는 기록이 보인다. ‘부군’이란 본래 한(漢)나라 태수의 칭호였다고 하나, 부군당이란 옛날 관청 내에 두던 사당의 이름인 듯하다.
현재 부군당이라는 명칭은 다른 데서는 보이지 않고 서울에서 당산동·동빙고동·서빙고동·보광동·수유동·창전동·이태원동 부군당 등 10여 건이 조사, 파악되었다. 부군당에 봉안된 부군신은 마을을 보호해 주는 무신적(武臣的) 성격과 함께 풍요신적 요소도 지니고 있다. 무신적 성격은 굿을 할 때 부군신을 놀리는 ‘부군거리’에서 무당이 입는 무복이 장군의 복식인 구군복(具軍服)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부군당신의 생식적 풍요 요소는 부군당에 나무로 깎은 남근(男根)을 벽에 걸었다는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기록과 일본인 무라야마(村山智順)의 『조선의 무격(朝鮮の巫覡)』 부록 사진에서 알 수 있다.
부군당의 제의는 봄·가을에 마을에서 공동으로 지내는데 규모가 큰 당에서는 3년마다 한 번씩 대규모의 당굿을 올린다. 서울·경기지역의 대표적인 부군당으로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 1동에 있는 부군당을 꼽을 수 있다. 이 당은 이태원 1,000여 호에서 제의 비용을 모아 3년마다 당굿을 하고 마을회의에서 뽑힌 제관 12명이 당제를 주관한다. 선출된 제관은 당제 15일 전에 대동우물을 퍼내고 왼새끼에 백지술을 끼운 금줄을 쳐서 잡인을 금하고, 새로 괸 우물물을 길어다 조라술을 담가 제를 올린다. 당제는 유교식으로 하며 당굿은 일반 당굿과 달리 부군신을 위한 ‘부군거리’가 추가되며, 끝에 ‘황제풀이’를 하고 나서 ‘뒷전’을 하는 특징이 있다.
당산동부군당 안내판.
오늘 탐방할 9개의 산 중에서 첫번째인 당산과 당산동부군당 탐방을 마치고, 두번째 산인 선유봉을 찾아서 도로를 따라 600여 미터 진행하면 양화한강공원으로 이어지는 당산(노들길)나들목이 나오고,
한때 모든 지하보도를 '토끼굴'이라 불리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당산나들목'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연결통로를 지나면,
양화한강공원에 나서게 되고,
공원을 가로질러 한강변에 서면, 한강 건너편 옛 양화진(큰양화진) 옆으로 지금은 절두산성지로 잘 알려진 잠두봉이 건너다 보인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일대의 옛 모습을 그린 겸재 정선의 그림 '양화진(楊花津)'
[양화진(楊花津)]
잔잔한 물가에 깎아지른 절벽이 우뚝 서 있다. 일엽편주 몇 척이 강변 나루터에 정착해 있고 무심한 강태공만이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웠다. 무엇보다 절벽의 모양새가 특이하다. 마치 물속에서 솟구쳐 나온 용머리 같기도 하고 누에고치와도 닮았다. 현재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용머리 또는 누에고치를 닮았다 하여 용두봉(龍頭峰) 또는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려 온 봉우리, 정선이 그린 「양천팔경첩(陽川八로帖)」의 "양화진(楊花津)"이다.
지금은 절두산(切頭山)이라 부르지만 그 시절에는 잠두봉(蠶頭峯) 또는 용두봉(龍頭峯)이라 했다. 강가에 절벽을 이루며 솟구쳐 나온 산봉우리가 누에머리나 용머리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절두(切頭)'는 머리를 자른다는 뜻이다. 고종 3년(1866) 병인년 1월에 대원군이 천주교도들을 이곳에서 처형하면서 절두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 일대가 천주교 성지가 됐지만 본래는 양화나루가 들어서 있어 한양과 양천 사이에 물길을 이어주던 곳이다. 이곳에 나루가 설치된 것이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김포 인천 쪽에서 한양으로 들어오자면 이 나루를 건너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므로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조선 태조 3년(1394) 이후에는 이 나루의 효용이 매우 커졌으리라 짐작된다. 세종 32년(1450)에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한림학사 예겸(倪謙)이 한강에서 뱃놀이 대접을 받던 중, 이곳 잠두봉 양화나루에 들러 이런 시를 남겨놓았다.
'한강의 묵은(오래된) 나루 양화라 하네,
좋은 경치 찾아 정자 지으니 곁에는 물가,
떠나가 닿는 돛단배 아득히 멀고,
기러기 울음소리 모래밭에서 인다.’
이 시로 보면 세종 때에 이미 잠두봉 아래에 양화나루가 들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즈음에 벌써 경치 좋은 이 잠두봉 일대는 태종의 제7왕자인 온녕군 정(溫寧君 程·1397∼1453)이 차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겸이 올라가 쉬었던 정자도 온녕군 집 정자였을 것이다.
살짝 당겨본 절두산 모습.
양화한강공원 강변 산책로를 한강물과 함께 흘러내려가면,
옛날에는 섬이 아닌 한강 남쪽 기슭의 선유봉이 있던 선유도가 한강물에 떠 있다.
선유도는 본래 한강 남쪽 기슭의 선유봉이라는 작은 봉우리가 있었던 곳인데, 홍수로 물길이 바뀌어 한강 물길에 둘러싸인 선유도로 바뀌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홍수를 막고 길을 포장하기 위해 암석을 채취하면서 깎여나갔다.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서남부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으로 사용되다가, 2000년 12월 폐쇄된 뒤 서울특별시에서 164억 원을 들여 현재의 공원으로 꾸민 것이다. 한강의 역사와 동식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한강역사관·수질정화공원, 시간의 정원, 물놀이장 등의 시설이 들어서 있다.
선유도가 섬이 아닌 한강변의 봉우리였을 때를 그린 '선유봉(仙遊峰)'
[선유봉(仙遊峰)]
신선이 내려와 놀다 간 봉우리라는 의미의 선유봉은 '생김새가 고양이와 비슷하다' 하여 '고양이산', '괭이산'으로도 불렸다. 1962년 양화대교 건설 때 사라졌으며 현재 선유도가 옛 명소를 대신하고 있다. 정선은 우뚝 솟은 선유봉과 주변인가, 양화나루를 화폭에 담았다. 양화나루에는 오가는 배가 대기 중이며, 선유봉 자락에는 웅장한 기와집을 비롯하여 소박한 초가 마을이 표현되었다.
지금은 섬이 되어버린 선유도로 가기 위해 양화대교로 올라서면,
차를 타고 지날 때는 몰랐지만 선유대교 강북 방향으로 북한산이 멋지게 조망되고,
한강 상류 방향으로는 지금은 높은 빌딩에 둘러싸여 작은 언덕 수준으로 보이는 남산이 가늠된다.
여의도의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도로 좌측에 있는 선유도공원으로 가기 위해서 도로 아래로 P턴을 하는 우측 도로로 접어들어,
거울철에 가마우지를 비롯한 수많은 철새를 볼 수 있는 철새 전망대를 지나고,
도로 아래를 통과하여 진행하면,
누구나 무료입장이 되는 선유도공원 정문이 나온다.
<선유도공원(仙遊島公園)>
'신선이 노니는 곳'이었던 시절의 선유봉은 한강의 아름다운 정취와 서울의 산자락을 바라보는 경승지였다. 예로부터 번성했던 양화나루와 강 건너 망원정, 마포의 잠두봉을 잇는 한강의 정경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중국 사신들 사이에 "조선에 가서 양천현(양천구와 강서구 일대)을 보지 못했다면 조선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한강 일대의 빼어나 풍광을 지닌 곳이었다.
하지만 선유봉의 아름다움도 불운했던 한국의 현대사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1920년대 대홍수 이후로 제방을 쌓고 여의도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선유봉의 토석이 채취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선유봉은 흔적조차 남지 않아 사람들로부터 잊혀졌고, 결국 1976년부터 선유도는 정수장이 되었다.
이후 2002년 4월 26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화동 95번지 선유도에 정수장을 폐쇄하고 시민공원인 선유도공원을 조성하였다. 선유도공원은 양화대교 아래 선유정수장 시설을 활용한 재활용생태공원으로 부지 면적은 총 11만 400㎡이다. 선유도는 본래 선유봉이라는 작은 봉우리 섬으로 일제강점기 때 홍수를 막고, 길을 포장하기 위해 암석을 채취하면서 깎여나갔다.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서남부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으로 사용되다가 2000년 12월 폐쇄된 뒤 서울특별시에서 164억 원을 들여 공원으로 꾸민 것이다. 한강의 역사와 동식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한강역사관·수질정화공원, 시간의 정원, 물놀이장 등의 시설이 들어서 있다.
한강역사관은 송수펌프실 건물을 보수하여 만든 전시관으로 지하 1층과 지상 2층의 규모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면적은 1,151㎡이다. 한강유역의 지질과 수질·수종·어류·조류·포유류 등 생태계와 한강을 주제로 한 지도, 시민들의 생업, 한강변 문화유적, 무속신앙 등의 생활상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한강의 나루터 분포도와 교량·상하수도·댐과 한강 유역의 수해 등 한강 관리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황포돛배와 한강수계도를 그래픽과 사인으로 선보이는 전시공간과 멀티미디어 정보갤러리, 휴게공간, 전망창을 갖춘 만남의 공간 등도 마련되어 있다. 수생식물원에는 물봉선과 쇠뜨기·수련·검정말 등 각종 수생식물 1만여 본이 심어져 있고, 시간의 정원은 118종의 수목과 풀·꽃을 여러 개의 작은 정원에 나눠 심어 사계절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특히 시간의 정원은 세로 41m, 깊이 5m 규모의 침전지 2개를 활용한 것으로 이곳이 한때 수원지였음을 보여준다. 구조물의 칙칙한 색깔과 거친 표면, 불규칙한 선이 각종 식물들과 절묘하게 어울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밖에 200석 규모의 원형 소극장과 '카페테리아 나루' 등 부대시설도 들어섰으며, 자작나무 숲과 미루나무 길도 조성되어 있다. 공원에는 한강을 바라보면서 공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양평동 한강시민공원 양화지구와 선유도를 잇는 너비 4∼14m, 길이 469m의 보행전용 교량 선유교도 설치되어 있다. 무지개다리로도 일컬어지는 아치형의 선유교는 교량 아래에서 빨강과 노랑·초록·파랑 등 4가지 빛으로 조명을 비추어 야간에 더욱 아름답다. 공원은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개방한다.
<고양이산/괭이산/선유봉>
고양이산인 선유봉은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그 절벽의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고 하며, 중국 황하에 있는 저주봉과 같다고 하여 ‘저주봉’이라고도 불리었다. 1930년대에 일제가 대동아전쟁 수행을 위해 김포비행장을 건설하면서 도로를 개설하고자 이곳에 채석장을 개설하였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군이 계속하여 비행장 건설과 도로 개설을 위해 본격적으로 석재를 채취하여 현장에서 분쇄하고 도로포장에 사용함으로써 선유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제3공화국 시절 이곳에 제2한강교(양화대교)를 개설하였는데, 선유봉 자리를 중간에 두고 다리를 놓았다. 따라서 지금은 선유수원지가 자리잡고 있어 그 흔적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선유봉이 있던 선유도에는 산의 흔적은 전혀 없다. 선유수원지도 폐쇄되어 수원지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원을 만들어서 담수시설은 연꽃을 키우는 연못이 되었다. 선유정이란 정자가 있으며 서쪽으로 나무로 만든 고층 쉼터가 있는데 '선유교'라는 나무다리로 영등포구 양평동과 연결되고 있다.
선유봉이 자취를 감추어버린 곳에 만들어진 선유도공원 안내판.
지금은 섬으로 변해버린 선유봉의 자취와 선유도공원의 조성 내력 등에 관한 전시물이 있는 관리사무소와,
높은 온도에 사는 수생식물이 있는 온실은 후일 겨울철 탐방을 위해 남겨두고,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한적한 공원을 둘러보며 산책길을 따르면,
북한산 방향 한강변 조망이 좋은 선유정(仙遊亭)에 도착한다.
선유정에서 떡과 따스한 커피로 옛 풍류객들의 정취를 살짝 엿보는 시간을 가져보고는, 선유정을 뒤로하고 정수장을 수질정화공원으로 바꾼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공원 산책길을 따르면,
한강 물결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그네의자가 있는 카페를 지나게 되고,
이내 선유교와 연결된 '선유도 전망대'가 나오는데, 한강 조망이 사방으로 트인 멋진 전망대다.
양화환도
[양화환도(楊花喚渡)]
양화진(楊花津)은 서울 마포구 합정동(合井洞) 378의 30에 있던 나루다. 한양(서울)에서 김포 부평 인천 강화 등 당시 경기 서부지역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이 나루를 건너야 했다. 그래서 일찍이 한양의 외백호(명당의 바깥 서쪽 줄기)에 해당하는 길마재(鞍山) 줄기가 한강으로 밀고 내려오다 강물에 막혀 불끈 솟구친 바위절벽인 잠두봉(蠶頭峯, 용두봉: 龍頭峯 이라고도 했고 지금은 절두산:切頭山이라 한다) 북쪽 절벽 아래에 나루터를 마련하고 이를 양화나루라 하였다. 이곳에서 출발한 나룻배는 맞은편 강기슭인 경기 양천(陽川)군 남산(南山)면 양화리 선유봉(仙遊峯) 아래의 백사장에 배를 대었다. 이곳 역시 양화나루였다. 원래 양천 양화리에 있던 나루가 양화나루였기 때문에 이 양화나루에서 건너가는 한양 잠두봉 아래의 나루도 양화나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양천 양화리는 동네 한강가에 버드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버드나무의 꽃이 필 때면 장관을 이루었으므로 '버드나무꽃 피는 마을'이란 뜻으로 이런 이름을 얻었다. 잠두봉 아래 양화진에서 떠난 배는 빗금을 그으며 하류쪽으로 흘러가서 선유봉 아래 양화진에 당도하고 거기서는 다시 빗금을 그으며 잠두봉으로 올라갔었다. 이것이 한강 양쪽의 양화진 도강 현황이었다. 한강은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강바닥이 높아져 점차 큰 배가 상류로 올라가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나루도 하류쪽 나루의 효용가치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영조 30년(1754)에는 이 잠두봉 아래 양화나루에 어영청 소속의 진영(鎭營)을 베풀어 한강을 지키는 첫 관문으로 삼았다. 당연히 양화나루는 물론이고 주변의 공암나루, 조강나루까지 이 양화진 진장(鎭將)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
빈 배들도 그 아래 강변 모래톱으로만 즐비하게 정박해 있다. 양천쪽 선유봉 아래 모래밭은 아무것도 없는 빈 터뿐인데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가 앞뒤로 시종을 거느리고 나타나서 종에게 배를 부르게 하자 사공이 거룻배 한 척을 쏜살같이 몰아 건너오고 있다. 선비 일행이 서 있던 선유봉 아래 양화나루터는 지금 영등포구 양화동 양화선착장으로 변해 있다. 신선이 내려와 놀만큼 강가에 매혹적으로 솟구쳐 있던 선유봉은 1980년대 올림픽대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허물어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길손이 강 건너에서 소리쳐 부르면 사공이 배를 저어 건너와서 태우고 가던 260년 전 겸재 시대와 비교해 보면 어떠한가! 양화대교는 1965년 1월 25일에 제2한강교로 개통됐고, 1981년 11월에 확장된 뒤 1984년 11월 7일부터는 양화대교로 불린다. 잠두봉 아래 양화진과 강 건너 선유봉 아래 양화진 모두가 1936년 4월에 경성부 확장에 따라 서울로 편입되었다.
양화진과 남산 방향.
살짝 당겨본 북한산과 안산 방향.
난지도 하늘공원 방향.
오늘 탐방하는 9개 산 중에서 두번째인 선유봉의 흔적을 뒤로하고 쥐산을 향해 선유교를 건너는데,
우측 한강 하류 방향으로 성산대교 남단에 자리한 쥐산이 건너다 보이고,
선유교를 건너 계단을 따라 양화한강공원으로 내려서서,
한강자전거길과 나란히 이어지는 산책길을 따라 성산대교 방향으로 진행하면,
쥐산으로 갈 수 있는 양평2나들목을 지나게 된다.
쥐산/분동산을 가기 위해서는, 양평2나들목을 통과하여 노들길을 따라 안양천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육교를 건너 영등포아리수정수센터 후문 쪽으로 진행하면 우측으로 쥐산을 오를 수 있는 들머리가 나오는데, 지금은 쥐산을 두동강내면서 월드컵대교 남측 램프가 만들어지며 쥐산을 오르기가 무척이나 까다롭게 되었고, 쥐산 남측에 있던 인공폭포도 도로개설로 사라지고 없다. 이에 올 초에 갔던 사진 몇장으로 쥐산 탐방을 대신하고 오늘은 쥐산을 우회하여 바로 도당산으로 트레킹을 잇기로 한다.
양평2나들목을 지나면 나오는 성산대교 남측 자원순화센터 진입 회전교차로.
노들길을 따라 안양천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육교를 건너 영등포아리수정수센터 후문으로 이동.
월드컵대교 남단 램프 절개지의 빗물 수로가 쥐산 들머리.
진주강씨 양천공파 묘역 비.
돌아본 들머리와 안양천 방향.
쥐산 정상부에서 바라본 한강 하류 방향.
<쥐산/분동산(50.5m)>
영등포구 양평동 안양천 합수부 한강변에 자리한 쥐산은 양화나루 근처에 있는 고양이산(선유봉)과 대칭되는 이름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선유봉의 모습은 고양이가 쥐를 발견하여 발톱을 세우고 있는데 비해서, 쥐산은 먹이를 앞에 놓고 있던 쥐가 금방이라도 도망갈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해서 붙여졌다.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은 연꽃이 무척 많이 피어있던 연지(蓮池)로서 고려 때부터 임금이 연꽃을 구경하러 오기도 했으며 외국 사신들이 즐겨찾던 경치가 뛰어난 곳이었다. 쥐산에서는 분가루 같은 백토(白土)가 있어 바람 부는 날이면 근방 일대가 분이 날리는 것처럼 하얗다고 해서 분동산이라고도 하였다.
쥐산은 조선 숙종 때 첨중추부사였던 강효직(姜孝直)에게 사패지로 하사함으로써 진주강씨의 묘역으로 형성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웃하고 있는 고양이산 선유봉의 기(氣)에 눌려 32인 외에는 더 이상 모시지 않고 있다는 속설이 전한다. 안양천을 건너는 양화교 앞에는 한때 동양 최대를 자랑하던 인공폭포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고 있었지만 지금은 월드컵대교 남측 램프가 쥐산 가운데를 지나게 되어 옛날 김포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외국인에게는 서울의 아름다운 첫인상을 주던 인공폭포는 추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한편, 서울시 자료를 보면 "영등포구 양평동 한강변의 표고 50.5m의 쥐산은... 쥐산 북쪽 한강변에는 일찍이 이수정(二水亭)이 있었다"라고 설명하면서 서낭당이고개(염창동)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염창산은 모양새가 마치 쥐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쥐산이라고도 부른다고 하였다. 하지만 뒷부분의 '염창산'은 강서구 염창동에 있는 '증산'을 이르는 것으로 쥐산은 아니다. 쥐산은 선유도 서쪽의 안양천과 한강의 합류지점, 안양천 동쪽에 있는 작은 봉우리를 말하며, 지도상에도 50m의 등고선이 정상에 표시되어 있으므로 높이 50.5m도 일치하며 위치인 양평동도 일치한다. 다만 "쥐산 북쪽의 한강변에는 이수정이 있었다고 하는데..."가 "쥐산 서쪽의 안양천 건너편에는 이수정이 있었다"<도당산 참조>가 정확한 표현으로, 도당산인 동아아파트 뒤쪽 조그만 야산에 있는 이수정터 표시석은 잘못된 이치이다. 그러므로 쥐산은 월드컵대교 남측 램프가 지나는 봉우리를 말한다.
이수정(二水亭)
[이수정(二水亭)]
지금은 풍광이 많이 변하였지만 쥐산 북쪽 한강변에는 일찍이 이수정(二水亭)이 있었다. 겸재 정선의 이수정 그림은 그가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후 그린 그림으로, 배를 타고 양천에서 양화나루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라본 시각으로 그린 장면이다. 각도나 구도로 보아 안양천 하구가 한강으로 흘러들어 만드는 염창탄이 왼쪽 산봉우리들 사이로 이어지고 있고, 높이 솟은 절벽 위로 수림이 우거져 있으며, 그 사이에 누각 형태의 기와집이 반쯤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깎아지른 벼랑이 있고, 나루터에서 오솔길이 나 있는 산 위에 이수정이 보인다. -서울시-
쥐산에서 바라본 한강 상류 선유도 방향.
쥐산 동쪽 아래에 자리한 영등포아리수정수센터는 원래 안양천이 한강으로 합류하던 곳이었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후 1929년부터 9년에 걸친 안양천 하구 이설공사로 안양천 합수부가 현재의 지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월드컵대교 개설로 쥐산 탐방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하며 성산대교를 지나고,
북한산과 안산 방향 조망.
월드컵대교 건설공사장을 통과하여,
성산대교 북단과 북한산 방향.
쥐산을 우회하여 자전거를 타는 분들의 쉼터인 안양천 합수부를 지나게 된다.
쥐산을 우회하여 지고 이제 네번째인 도당산을 향해 안양천이 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의 안양천을 건너 좌틀하여 목동방향으로 진행하면,
이내 우측 염창현대아파트로 이어지는 진출입 통로가 나오고,
안양천 건너편으로 보이는 쥐산 방향.
올림픽대로 진출입 도로를 건너 우틀하여 진행한다.
염창현대아파트 옆 도로를 잠시 따르면 염창동둘레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은은히 풍겨오는 아카시아꽃 향기를 맡으며 잠시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아무런 표식이 없는 도당산(상산) 정상쯤을 지나게 되고,
<도당산(都堂山, 55.7m)>
도당산은 강서구 염창동 한강변, 즉 한강과 안양천 합류지점의 안양천 서쪽에 위치하여 동쪽에 자리잡은 쥐산과 마주보고 있다. 현재는 강서구 염창동 동아아파트 202동 뒤에 흔적이 남아있는 조그만 야산으로, 아파트를 건설하면서 한강변에 산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도당산은 남북방향이 절개지로서 북쪽은 올림픽도로, 남쪽은 아파트단지가 있는데, 정상에는 철망울타리만 자리잡고 있으며 정상 표시물은 없다. 아래쪽에는 염창정이란 정자와 그 옆에 이수정터 표시석, 치성단이 위치하고 있다.
무심히 도당산 정상을 지나는 백두들.
성산대교 방향.
한강 건너편 난지도 하늘공원 방향.
도당산을 지나 내려서면 '염창정(鹽倉亭)'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염창정(鹽倉亭)>
염창정은 조선시대 한여군 이덕연이 지었던 '이수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이 한강을 굽어보는 절경을 누리기 위해 정자를 지었고 그 이름을 임정(林亭)이라 하였는데 이 정자가 후에 효령대군의 딸이 물려받아 한산이씨 가문의 소유가 된다. 1630년 한산이씨 가문의 한산군 이덕연(李德演, 1555-1636)과 그 아우 이덕형(李德馨, 1561-1613) 형제가 이 정자를 고치고 '이수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두 갈래의 물이 하나로 합쳐지는 데 있는 정자라는 뜻의 이수정은 독특한 이름만큼 정선의 그림에 남을 만큼 절경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이수정은 개항 무렵 허물어졌으나 2000년 무렵 주민들의 복원 노력으로 2003년부터 염창동 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재건되었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문화마당소공원 조성사업'으로 염창정 및 그 주변 환경이 단계적으로 정비되었으며, 2010년 정자에 LED청사초롱을 달고 수목을 정비하여 오늘날의 염창정으로 갖춰지게 되었다.
상산 치성단.
이수정터 표석.
<이수정(二水亭)>
이수정은 강서구 염창동 도당산에 위치한 누정인데, 그 명칭은 중국 당대의 시선 이백(李白, 701-762)의 시에서 유래되었다. 이백은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에서 “삼산은 반쯤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졌고, 이수는 백로주를 끼고 둘로 나뉘었다."라고 읊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이덕연(李德演, 1555-1636), 이덕형(李德馨, 1561-1613) 형제는 양화진 남쪽 언덕 백로주와 마주 보는 위치에 정자를 지은 후 '이수정'이라 하였다. 양화진으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둘로 나뉘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백의 시가 떠오른 모양이다. 정선은 도당산 숲 속에 위치한 이수정과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 울타리를 정겹게 재현했다.
이수정(二水亭)
[이수정(二水亭)]
지금은 풍광이 많이 변하였지만 쥐산 북쪽 한강변에는 일찍이 이수정(二水亭)이 있었다. 겸재 정선의 이수정 그림은 그가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후 그린 그림으로, 배를 타고 양천에서 양화나루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라본 시각으로 그린 장면이다. 각도나 구도로 보아 안양천 하구가 한강으로 흘러들어 만드는 염창탄이 왼쪽 산봉우리들 사이로 이어지고 있고, 높이 솟은 절벽 위로 수림이 우거져 있으며, 그 사이에 누각 형태의 기와집이 반쯤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깎아지른 벼랑이 있고, 나루터에서 오솔길이 나 있는 산 위에 이수정이 보인다. -서울시-
이로 미루어보아 이수정의 위치는 이곳 도당산 서쪽 기슭이 아니라 쥐산의 기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염창정과 염창동 유래 설명판.
<염창동 명칭의 유래>
강서구 길목에 위치한 염창동은 조선시대 서해안의 염전으로부터 채취해 온 소금을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지은 소금창고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염창(鹽倉)에는 서해안과 남해안의 염전에서 모은 소금을 서해의 뱃길을 이용해서 한강 하구까지 들여오는데, 일단 한강 하구에 진입한 배는 마포 근방까지도 가게 되지만 소금의 경우는 자칫 물에 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곳에 소금을 부리고 다른 물품들과 마포까지 배로 운반되었다. 지금은 더 이상 소금배도 드나들지 않고, 한강변에도 많은 변화가 있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마을 이름에서 바로 그 역사를 알 수 있다. 장승배기, 아랫염창 등의 마을을 합쳐 염창리로 하였고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에 속하였다. 1914년에는 김포군 양동면에 속하였고, 일부는 가양리로 편입되었다. 1962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었고, 1977년 강서구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트레킹 출발 시간반만에 도당산 탐방까지 마치고 다섯번째인 증미산을 향해 염창동둘레길을 따르다가,
우측 한강변으로 이어진 염창나들목을 만나 예정에 없던 한강변 벤치에서 커피 브레이크를 갖는다.
다시 염창동둘레길로 복귀하여 이정표의 염창산 정상 방향으로 진행하면,
진한 향기를 풍기는 아카시아 나무 위로 반쯤 잘려나간 증미산이 나타나며 정상으로 이어진 데크목 계단길을 오르게 되고,
돌아본 한강 방향.
난지도 방향.
월드컵대교 방향.
삼거리에서 우측의 염장산 순환산책로를 두고 좌측 염장산 정상으로 향하면,
이내 정자와 그네의자가 마련되어 있는 염장산 정상부에 도착한다.
<증산(甑山)/증미산(拯米山)/염창산(55.7m)>
증산은 강서구 염창동에 위치한 높이 55.2m의 야산인데, 산책로 입구 이정표에는 증미산으로, 염창산 유래 안내판에는 염창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정상은 공동묘지로, 묘지 옆에 삼각점이 있지만 정상표시물은 없다. 정상에서는 한강과 강북지역의 산하가 멋지게 조망된다. 서쪽의 탑산·궁산과 동쪽의 쥐산과 더불어 한강변의 절경을 이루었다. 증산의 남쪽 기슭 염창동 20번지 일대에는 조선시대 국영의 소금창고(鹽倉)가 있었다. 염창동 100번지 작은 동산은 도당산으로 치성단이 있었다. -서울시-
염창산과 관련된 옛 고전에는 증산으로 표기되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염창리에 있는 산이라고 하여 염창산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원래 이름은 '일찍 증(曾)'이 아니고 '건질 증(拯)'자인 증산(拯山)인데, 조선시대에 이 산 아래 소금창고가 있었던 관계로 오늘날 염창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산에는 귀신바위와 김말손 장군 설화가 전해 온다.
소금배가 다니던 시절 이곳은 강물의 흐름이 급한데다가 목이 좁아 모래가 자주 메워져 염창탄(鹽倉灘)이라는 여울목이 생겨났다고 한다. 여기에서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받은 세곡미를 실어오는 배가 침몰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물에 빠진 쌀을 건지게 되므로 이 여울목은 증미탄(拯米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쌀을 건진다는 뜻의 증미(拯米)가 언제부터인지 증미(曾米)로 와전되어 현재의 증미산, 증산(曾山) 등의 이름으로 남았다. 그러나 원래 이름은 '일찍 증(曾)'이 아니고 '건질 증(拯)'자인 증산(拯山)이다. -강서구-
금성평사
[금성평사]
'금성의 평평한 모래펄'이라는 의미의 이 그림은 양천 쪽에서 바라본 지금의 난지도 부근의 승경을 근처의 금성산에서 이름을 따와 화제를 짓고 화폭에 담은 것이다. 원래 난지도는 모래내와 홍제천,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드넓은 저지대라서 한강 폭이 호수처럼 넓어져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광활한 한강줄기를 중경에 두고 근경과 원산의 대각선 구도로 경물을 배치하여 시원한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목멱조돈
[목멱조돈]
목멱산은 남산의 옛이름으로, 어느 날 남산으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본 정선은 이 풍경을 ‘목멱조돈’이라는 말과 함께 친우인 사천 이병언에게 전했는데, 사천 이병언은 그에 대한 화답으로 남산의 해돋이에 대한 내용을 시로 지어 보냈다.
曙色浮江漢(서색부강한)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觚稜隱釣參(고릉은조삼) 산봉우리들 낚싯배에 가리고,
朝朝轉危坐(조조전위좌)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初日上終南(초일상종남)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이 그림은 ‘낙산사’, ‘문암관일출도’와 함께 정선의 3대 일출 풍경으로 꼽히는 걸작이다. 남산과 함께 막 머리를 내미는 해의 모습을 절반만 보여주며 ‘가림과 숨김’의 미학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만리재, 애오개, 노고산, 와우산의 모습도 함께 보여주어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정선의 그림과 이병언의 시를 함께 보고 있으면 남산으로 떠오르는 아름다운 해돋이와 해가 비친 한강변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짐작이 간다.
한강 건너편 상류 남산(목멱산) 방향 조망.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그네의자에 앉아 한강 건너편의 북한산을 바라보며 '물멍', '산멍'을 즐기면 좋겠지만, 오늘은 산을 아홉 개나 넘어야 하기에 후일을 기약하고 증산 정상부의 전망대를 뒤로하면,
산 정상부를 차지한 공동묘지 한켠에는 숨겨진 삼각점도 눈에 띄고,
하산길로 들어서서 좁은 오솔길을 따라 내려서면,
다시 염창산 순환산책로를 지나게 되고,
염창양수장 방향 날머리로 내려서서,
강서구청 시설자재창고 뒷길로 들어서서 여섯번째인 탑산을 찾아 나선다.
황금내근린공원으로 들어서서 잘 단장된 산책길을 따르다가,
그냥 직진하여 가양대교 남단 도로를 건너서 구암근린공원으로 진행해도 되지만, 한강자전거길과 가양구름다리 조망을 위해 우측의 염강나들목을 통해 한강변으로 나서서,
한강자전거길 산책로를 따라 가양대교 아래를 통과하면,
다시 올림픽도로를 건너 구암근린공원으로 갈 수 있는 가양구름다리가 나온다.
가양구름다리 위에서 본 올림픽대로 여의도 방향.
한강 조망이 멋진 가양구름다리에서.
가양구름다리로 올림픽도로를 건너면 가을 단풍길이 멋지다는 구암근린공원에 들어서게 되는데,
<구암공원(龜巖公園)>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1471번지에 있는 허준(許浚) 기념공원으로 '허준공원'이라고도 한다. 《동의보감》을 지은 구암(龜巖) 허준의 출생지인 가양동에 부지를 마련한 공원이다.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의 허준 동상과 허가바위(서울기념물 11), 광주바위, 호수, 정자, 놀이시설 등이 있다.
허가바위는 어른 남자 2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동굴로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난리 때마다 사람들의 피신처로 쓰였다. 이 일대 최초의 지명인 제차파의(齊次巴衣:구멍바위, 동굴바위라는 뜻)의 유래지이기도 하며,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이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양천허씨의 발상지로도 알려져 있다. 호수는 올림픽대로가 건설되며 한강의 일부분이 잘려나와 만들어진 것으로, 호수 안에는 옛날 큰 홍수 때 경기도 광주에서 떠내려왔다는 광주바위가 있다.
예쁜 튤립 화단에서 추억을 남겨 보기도 하며,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의 구암 허준(許浚) 선생 동상 앞에 서면,
광주바위가 섬처럼 떠 있는 작은 호수가 내려다 보이고,
허준 선생이 살았던 시절에 백성들이 겪었을 시련을 떠올리며 호수 쪽으로 내려서면,
광주바위와 다른 두 개의 바위가 섬처럼 떠 있는 작은 호수에 내려서게 된다.
<작은 연못에 갇혀버린 광주바위>
80년대 올림픽대로가 뚫리면서 이곳 한강의 상당 부분이 육지화되고 하마터면 없어질 위기에 놓였던 이들 광주바위는 명(命)을 구해 연못이 된 곳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연못가에는 이 광주바위의 전설을 안내판과 만화로 살려 세워놓았는데,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옛날 경기도 광주에서 큰 홍수가 났을 때 커다란 바위가 물에 떠내려 왔다고 한다. 비가 그친 후 광주의 명물인 바위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 광주현감은 바위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위가 양천고을까지 떠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광주현감은 바위를 제자리로 옮겨 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세금을 내라고 요구했다. 양천현감은 거절하지 못하고 바위에서 자라는 싸리나무로 빗자루를 만들어 매년 세 자루씩 바치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한 생각이 들어 광주현감에게 바위를 도로 가져 가라고 하고는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바위를 가져갈 수 없었던 광주현감은 더 이상 세금을 내라는 요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본래 순박하고 인정 넘치는 양천 고을 사람들의 착한 심성과 멋진 광주바위의 풍광을 잘 나타내는 전설이다.
그런데 양천현 옛 지도를 보면 광주바위가 아니라 광제바위(廣濟岩)로 기록되어 있고, 그 옆으로 학천(鶴川)이 흐르고 있다. 이제 학천은 그 물길을 확인하기 어렵다. 한편으로는 이 광주바위 이름이 제차바위이기도 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구려 때 이 지역 이름이 재차파의(齊次巴衣)였으니 이 지명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광주바위가 있는 호수 전경.
우리가 아는 '놀이터'와 '노리터(老利攄)'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광주바위가 있는 호수 전경.
부부 음악가의 연주가 이어지는 정자.
이제 여섯번째인 탑산을 가기 위해 허준박물관 앞을 지나는데, 탑산의 반은 허준박물관의 약초원으로 편입되어 있어서 시간이 있으면 허준박물관을 둘러봐도 좋겠지만 오늘은 그 위치만 확인하고 지나쳐,
<허준박물관>
서울특별시 강서구가 한국의 전통의학인 한의학을 체계화한 구암 허준의 숭고한 인간애와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한국 최초의 한의학 전문박물관이다. 대표 소장품으로는 보물 신찬벽온방(보물 제1087-2호)과 구급간이방(보물 제1236-2호)이 있다.1999년 10월 착공해 2004년 11월 완공한 뒤, 이듬해 3월 23일 문을 열었다. 대지 면적은 1,725평, 건축면적은 543평, 연면적은 1,190평이다. 사업비는 총 141억 원이 들었다. 시설은 건축물과 부대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건축은 지상 4층 규모로, 층별 현황은 1층에는 관리사무실, 창고, 주차장, 기계실, 발전기실과 부대시설이 있다. 2층은 로비, 안내데스크, 시청각실, 체험교육실, 카페, 뮤지엄 숍, 휴게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3층은 기획전시실, 내의원과 한의원실, 허준기념실, 약초약재실, 의약기실, 어린이체험실, 건강체험실로 구성되어 있다. 허준기념실에는 허준의 저서와 한의학 관련 고서적, <동의보감> 제작 과정 및 집필 모형 허준과 한의학의 미래 등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약초약재실에는 <동의보감>에 나오는 약초, 동물약재, 처방별 약재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의약기기실에는 한의학의 주요 의약기기를 분야별로 구분한 자료가 실물로 전시되어 있다. 4층은 서울시 우수조망명소 중 한 곳인 옥상정원과 동의보감 속 약초가 심어져 있는 약초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물관 옆에는 허준근린공원과 대한한의사협회 건물(2005년 4월 말 완공)이 있다.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과 추석 당일은 휴관이다.
회장님의 말씀대로 '마음을 잘 다스려 미리 병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글귀가 적혀있는 벽보.
이정표의 '탑산약초원' 방향 탑산 정상으로 오르면,
각종 약초가 식재된 탑산 정상에 도착한다.
<탑산(塔山, 32.5m)>
탑산은 강서구 가양동 궁산 동쪽에 있는 나즈막한 봉우리이다. 탑산은 기슭에 공암나루터가 있던 산으로 진산(津山)이라고도 하며, 산에 오래된 탑이 서 있어서 이름하였다. 그러나 탑은 6·25 전쟁 때 무너진 후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고 일대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탑산 아래 절벽 밑 가양동 산 1-1번지에는 '구멍 뚫린 바위'가 있어 이를 흔히 공암바위 또는 허가바위라고 칭해오고 있다. 탑산 아래에 있는 이 바위 주변의 경관은 취수장이 세워지고, 올림픽대로가 개통되어 지금은 많이 변하였다. 이 구멍바위 때문에 이곳의 지명을 백제와 고구려는 제차파의현, 신라 경덕왕 때는 공암현이라 하였다. 바위의 한자 표기인 파의(巴衣)로부터 양천의 별호인 파릉(巴陵)이 생기게 되었다. 양천의 진산을 파산이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제차(齊次)는 갯가라는 뜻이다. -서울시-
탑산 정상 인증.
공암층탑
[공암층탑(孔岩層塔)]
'공암층탑'은 '구멍이 뚫린 바위'란 뜻의 '공암' 주변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공암은 양천(현재의 강서구 일대)의 옛 이름으로 허가바위, 광주바위라고도 불렀다. 산의 중턱에 옛 석탑 하나가 감추어져 있어서 '층탑'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래서 이 산의 이름을 현재까지도 탑산이라고 한다.
탑산을 내려서서 다시 한강 방향으로 진행하면,
공암나루터 표석과 '투탄금 이야기' 안내판이 자리하고 있고,
<공암나루(孔巖津)>현재에 강서구 개화동 강안에 있던 나루터로서, 강가에 구멍 뚫린 바위가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공암진, 공암나루터, 공암도(孔岩渡), 공암진나루, 공총, 공총진, 구멍바위나루 등으로도 불렸다. 한강 하류의 교통 요지로 양화도 관할 아래 있었으며, 진선 5척이 배속되어 있었다. 후에 관선은 폐지되고 사선이 있어 선가를 받고 인마의 통행을 맡았다. 행주산성 동쪽 덕수천(창릉천)이 한강으로 닿는 북포에 있던 나루가 공암나루와 연결되어 양천, 김포와 고양 간의 길목 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행주산성 서쪽 언덕과 김포 대안에 행주대교가 가설되어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공암나루는 서울로 가는 뱃길로 하류로는 조강진과 닿고 상류로는 양화진과 연결되는 중간참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강 건너편 고양이 행주나루와 연결되었다. -서울시-
공암진이란 나루의 이름은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둑 밖에 있는 두 개의 쌍둥이 바위에서 기인한다. 그 가운데의 하나가 구멍이 뚫린 구멍바위였던 까닭에 공암진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인데, 그에 얽힌 설화는 다음과 같다.
공암진은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둑 밖에 있는 두 개의 쌍둥이 바위에서 기인한 나루의 이름인데, 그중 하나가 구멍이 뚫린 구멍바위였던 까닭에 공암진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본래 이 바위들은 광주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어느 해인가 긴 장마에 휩쓸려 현재의 장소까지 떠내려 왔다고 한다. 이것을 기화로 광주의 사또는 해마다 양천 사또에게 세 개의 쑥대 빗자루를 세금으로 거두어 갔는데, 이 빗자루들은 이 쌍둥이 바위에서 저절로 자라난 쑥대로 만든 것이었다. 마침내 이것을 귀찮게 여긴 양천사또는 광주 사또에게 따졌다.
“이보시오 광주사또! 이렇게 꼬박꼬박 구실로 쑥대 빗자루를 받아갈 양이면 아예 이 바위들을 당신의 관할 구역으로 도루 가져가시오"
말문을 잃은 광주 사또는 다시는 세금을 걷어갈 수 없었고, 그 바위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광주바위로 불려지게 되었다.
양천땅에 소재하면서도 '광주바위'로 불려온 운명 때문이었을까? 이 바위들은 본래 한강의 흐르는 물살을 몸으로 거스르며 두둥실 떠 있던 바위섬이었는데, 지금은 한강 개발공사의 여파로 둑 너머 물 밖에 나앉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서울시-
<공암나루의 투탄금 이야기>
공암나루에는 아름다운 형제애의 전설이 전해진다. 공암 앞 안내판에 만화 형식을 빌려 이 이야기를 그려 놓았다. 원전은 동국여지승람인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공암진(孔巖津) 북포(北浦)라 하기도 한다. 현 북편 1리 지점에 있다. 바위가 물 복판에 섰고 구멍이 있으므로, 이것이 이름으로 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에 평민(平民)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워서 형에게 하나 주었다. 나루터에 와서 형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을 물속에 던지므로 형이 괴이하게 여겨서 물으니 대답하기를, “제가 평소에 형님을 독실하게 우애하였는데, 금을 나누어 가진 다음에는,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갑자기 생깁니다.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니, 강에 던져서 잊어버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다. 형이 말하기를, “네 말이 참으로 옳다” 하고, 형도 또한 금을 물에 던졌다. 그때 같은 배에 탔던 자는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뿐이었던 까닭에, 그 형제의 성씨와 거주하는 마을을 묻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그러나 성주이씨 세보에 따르면, 이 형제는 고려 말 충의로운 학자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이라고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조년의 시조 중 익숙한 한 수를 살펴보면,
梨花(이화)에 月白(월백)하고 銀漢(은한)이 三更(삼경)인제,
一枝春心(일지춘심)을 子規(자규)야 아랴마는,
多情(다정)도 病(병)인양하여 잠못드러 하노라.
높이라야 기껏 32m밖에 되지 않는 작고도 작은 산(탑산)이 이렇게 그림과 글로 남아 있는 까닭은 아마도 이런 스토리와 역사적 인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탑산이 공암(孔岩)으로 불리는 까닭은 작은 자연 석굴이 있기 때문인데, 겸재의 그림에는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으나 물가 가까이 그 석굴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 석굴은 온전히 남아 있다.
공암나루터 표석 바로 옆에는 공암바위(허가바위)가 있다.
<공암(孔巖)바위/허가바위>
허가바위는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한 탑산(塔山) 아래 계곡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의 천연동굴로, 1991년 12월 24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다. 강서구의 최초 지명이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었는데 ‘제차’는 차례 또는 갯가이고, ‘파의’는 바위라는 뜻인 것으로 보아 구명(區名)이 이곳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제차파의현’이라고 하였고 신라에서는 ‘공암’(孔岩)이라 하였으며, 『팔도군현지도』와 『경기도양천지도』에서 공암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지도』와 『경기도양천지도』에 의하면 공암이 한강의 북쪽을 왕래하는 나루였음을 알 수 있다. 『광여도』에는 공암진(孔岩津)과 양화진(楊花津)과 같이 한강을 넘나들던 나루가 표시되어 있는데, 공암진 옆에 공암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보면 “공암진을 북포(北浦)라 하기도 한다. 현 북편1리 지점에 있다. 바위가 물 복판에 세워져 있고 구멍이 있으므로, 이것이 이름으로 되었다.”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고려 태조가 견훤을 징벌하러 갈 때 공암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허선문이 이 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주고, 군량미를 제공하는 등의 공을 세워 ‘공암촌주(孔巖村主)’라는 벼슬을 받았다. 허선문은 90세를 넘긴 고령에도 고려 태조에 충성을 다했다. 그 자손이 공암 허씨로 공암은 양천(陽川)에 있으므로 곧 양천 허씨를 말한다는 기록이 『경기읍지』에 있다. 조선 세조(世祖) 때 북병사(北兵使)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허종(許琮) 외에 명의 허준(許浚), 허옹(許邕), 허침(許琛)과 같은 많은 인물이 이 바위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조선 선조 때에는 허준이 여기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이 굴을 책 읽기 좋은 별서(別墅)처럼 사용하였고, 이곳에서 최후를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근처에 허준의 아호(兒號)를 따서 조성한 '구암(龜岩)공원'이 있다.
이 바위는 위에서 보면 그리 높지 않지만 아래에서 보면 수직 절벽 형태의 꽤 높은 바위산이다. 색깔은 자색을 띠고, 바위 아래에는 천연동굴이 있다. 굴의 크기는 가로 약 6m, 세로 약 2m, 높이 약 5m이며, 1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구멍이 있어서 ‘공암바위’, ‘허가바위’ 또는 ‘허가바위굴’이라고 부른다. 양천 허씨의 시조인 허선문이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어서 주민들은 이곳을 양천 허씨의 발상지라고 말한다.
양천을 대표하는 성씨는 허씨였으니, 양천읍지에 의하면 이 석굴에서 양천 허(許)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이 출현했다고 한다. 그래서 공암은 일명 허가바위다. 허선문은 고려 태조(918∼943)가 견훤을 정벌하러 갈 때 90여 세의 나이로 도강의 편의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군량미까지 제공했었다. 태조 왕건은 허선문을 공암촌주(村主)에 봉하고 그 자손이 이 땅을 대대로 물려받아 살게 했다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양천현읍지를 보면 양천을 대표하는 성씨는 허씨(許氏)이다. 그 허씨 중 우리에게 가장 인상적인 이가 바로 의성 허준(許浚 1546~ 1615)인데, 이곳에는 허준박물관과 허준공원이 자리잡았다.
허준박물관 전시 내용 중에는 산허거사라는 이가 쓴 ‘파릉산집(巴陵散集)’이 있다. 파릉이란 양천 지역의 또 다른 이름이다. 거기에는 “許浚在於孔庵下漏屋 是洞作著 浚卒爲庵(허준은 공암 아래 비 새는 집에 거주하면서 이 동굴에서 저술했는데 여기에서 돌아가셨다?)”란 글이 있다. 아마도 허준의 동의보감은 이곳 허가바위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또한 이 공암은 양천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일성록에는 정조 21년(1797년) 9월 12일 정조가 장릉(章陵)에 행행(行幸)했는데 어가가 지나는 열 고을 유생들에게 시를 짓게 해서 상을 내렸다. 이때 양천(陽川)에는 “사방 들녘의 누런 벼 이삭을 보기 위하여 삼십 리 양천에 잠시 군사를 머물게 하다(爲看四野黃雲色 一舍陽川小駐兵)”로 부(賦)의 제목을 삼게 하고, “선유봉지주라 제하다(仙遊峯題砥柱)”로 시의 제목을 삼았으며, “공암(孔巖)”으로 명(銘)의 제목을 삼았으니 작은 언덕 같은 산은 결코 작지 않게 대접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랬나…, 겸재도 낮은 언덕을 우뚝한 산으로 그려 놓았다.
이제 겸재 그림에서 물결이 찰랑이고 한가하게 낚시를 담갔던 그 물길은 길이 되었다. 올림픽도로가 강을 가르면서 지나간 결과다. 저 넘어 강물은 이억년, 이조년 형제의 금 투척 사건으로 이후 투금탄(投金灘: 금덩어리를 던진 여울)이란 이름을 얻어 후세까지 전해졌다. 1700년대, 1800년대를 살다간 하려 황덕길(下廬 黃德吉: 1750~1827)은 이곳 두호(斗湖)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궁산 북쪽에 북두칠성의 국자 자루/斗柄처럼 우뚝한 바위가 있어 이 지역을 일명 두호라 했다 한다) 그의 문집 '하려집'에는 이 지역을 대상으로 쓸 시 제목 20 장(章)을 두호교거잡제(斗湖郊居雜題)라는 제목으로 적어 놓았다. 파산(巴山), 두호(斗湖), 투금탄(投金灘) 등등이다.
탑산과 허가바위 탐방을 마치고 공암나루근린공원을 따라 궁산을 향하는데,
허준박물관 옆의 소요정을 지나게 되고,
<소요정(逍遙亭)>
소요정은 조선 중기 재상 심정(沈貞, 1471~1531)이 양천현 동북쪽에 있는 공암 서쪽 강 연안에 지은 누정이다. 심정의 손자는 소요정이 한강 이남의 강가 누정 중에서 가장 뛰어난 승경이라고 자랑했다. 심정은 소요정을 짓고 무척 흡족했던 듯, 문장이 뛰어난 선비들에게 글을 청해 현판으로 걸었다. 이에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반허리진 산들은 술상을 밀치고 있고, 가을 골짜기는 술잔을 물리치고 있네(半山排案俎(반산배안조) 秋壑闢樽盂(추학벽준우))"라고 써주었더니, 심정은 자신을 놀리는 문장임을 알아채고 현판에서 뽑아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무슨 까닭인지 정선은 '소요정'에 누정을 생략하고 강물에 떠 있는 세 개의 웅장한 바위 덩어리만 그렸다. 아마도 정선이 이 장소를 그렸을 당시에는 벌써 소요정이 허물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소요정
[소요정(逍遙亭)]
소요정은 서울 강서구 가양동 탑산 남쪽 기슭에 있던 정자인데 고종 28년(1891)에 편찬된 ‘양천현읍지’에 이미 터만 남아 있는 것으로 돼 있다. 겸재가 영조 18년(1742)에 그렸으리라 생각되는 이 ‘소요정’에도 정자의 모습은 없다. 이때도 아마 터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정자는 그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만약 이때 정자가 남아 있었다면 겸재는 한강 하류인 서북방에서 물길을 거슬러 오르며 바라보는 시각으로 탑산과 광주바위를 그려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강 상류인 동남쪽에서 탑산 남쪽의 소요정을 바라보는 시각이거나, 적어도 강 가운데서 서쪽으로 소요정을 바라보는 시각을 취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요정이 있었다는 탑산 남쪽은 보이지도 않는 시각으로 탑산과광주바위를 그려놓았다. ‘공암층탑(孔岩層塔)’에서는 탑산 기슭 남쪽에 세워진 석탑을 보이게 하려고 시점을 허공에 높이 띄웠는데, ‘소요정’에서는 시점을 수면으로 낮춰서 허가바위 절벽에 가려 석탑조차 보이지않는다. 그러니 세 덩어리의 광주바위가 더욱 우람하게 앞을 가로막고 허가바위절벽은 까마득하게 솟아나서 그 위 탑산 뒤 봉우리를 압도한다. 허가바위 근처 강물에는 거룻배 한 척이 떠 있는데 삿갓 쓴 어부 두 명이 낚싯줄을 드리우고 태평하게 앉아 있다. 이 그림은 소요정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리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소요정이라는 그림 제목을 붙이면서도 소요정은 그 터마저 보이지 않게 그려 놓았다.
문제인 정권 보건복지부 블랙리스트 사건을 폭로한 '김태우' 수사관의 강서구청장 선거운동 현장을 지나고,
잘 가꿔진 공원 산책길을 따르면,
올림픽도로 연결 램프가 있은 가양나들목이 나오며 도로 건너편 궁산 들머리에 궁산둘레길 표시판이 세워져 있다.
궁산둘레길로 들어서서 호젓한 산책길을 따르다가,
양천향교 방향 갈림길에서 우측 소악루 방향 데크목 계단길을 오르면,
궁산 소악루 정자 바로 아래에 있는 쉼터에 도착하는데, 소악루에서 풍류를 즐기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즐거운 점심 식사를 하기로 한다.
양천현감의 소악루에서의 연회와는 비할바가 아니지만 나름 즐거운 점심식사를 하고는 언덕 위로 오르니, 중국 동정호의 악양루 경치와 버금간다 하여 이름지어진 소악루가 자리하고 있는데,
<소악루(小岳樓)>
소악루는 궁산 정상에서 약간 동쪽 가양동 산 6번지에 위치해 있다. 영조 13년(1737)에 동복현감을 지낸 이유가 벼슬을 버리고 악양루 옛터에 소악루를 짓고 시회와 풍류를 즐겼다. 소악루는 중국 동정호의 악양루 경치와 버금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뒤 겸재 정선이 부임하여 5년 동안 매일 올라 그림을 그리던 소악루는 중간에 소실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1994년 5월 강서구에서는 정선의 업적과 예술혼을 기린다는 취지에서 소실된 옛 터 바로 위에 새로 소악루를 지었다. 옛부터 소악루의 맑은 바람(岳樓淸風)은 양화강의 고기잡이 불(楊江漁火), 목멱산의 해돋이(木覓朝暾), 계양산의 낙조(桂陽落照), 행주로 돌아드는 고깃배(杏州歸帆), 개화산의 저녁 봉화(開花夕烽), 겨울 저녁 산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寒山暮鐘), 안양천에 졸고 있는 갈매기(二水鷗眠) 등과 더불어 파릉팔경(巴陵八景) 곧 양천팔경의 하나였다. 이곳은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이 1740년 7월 양천현감으로 부임하여 당대 진경시(眞景詩)의 태두 이병연과 그림과 시를 바꿔보자는 약조를 맺고 아름다운 주변의 풍경을 그렸던 곳이다. 정선은 늘 궁산 소악루에 올라 맑은 한강과 그 깊은 수심 속에 푸른 그림자를 드리운 명승과 멀리 목멱산을 보며 화필을 움직였다. 이에 화답으로 이병연은 파릉팔경의 하나인 목멱산의 아침 해돋이를 읊는다. 또 인왕산 서쪽 길마재의 봉화를 보고 있을 정선을 생각하며 안현석봉(鞍峴夕烽)이란 시를 지으니 이 또한 겸재 작품으로 그려진다. -서울시-
소악루
[소악루(小岳樓)]
현감 이유(李留)가 옛 악양루(岳陽樓) 터에 중건(重建)하고 『소악루(小岳樓)』라 하였다 한다. 양천현아 동쪽에 있었던 모양으로 바로 그 옆에 커다란 당(堂)이 종해헌(宗海軒)이다. 이 까닭은 경외명승첩(京外名勝帖)의 『종해청조(宗海聽潮)』와 비교해 보면 곧 알 수 있으니, 오른쪽 송림(松林) 사이의 건물이 소악루(小岳樓)인 모양이다. 그 앞에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강가에서 얼마 안 되는 곳 수양버들 사이에 연지(蓮池)가 보이는데 중도(中島)가 있다. 파산(巴山)의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감싸고 있는 가운데 동북(東北) 쪽인 한강으로 확 터져 있고 돛을 내린 고깃배와 한 척의 놀이 배가 보인다. 좌청룡(左靑龍)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바위 벼랑은 초묵(焦墨)으로 비껴 찍어 돼지발굽 모양 생기고 주봉(主峯)과 뒷산은 그냥 한 줄기 윤곽뿐이다. 멀리 관악산의 부리가 안갯속에 희미하다.
소악루 안내판.
<소악루(小岳樓)>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정자로, 1737년(영조 13) 동복현감을 지낸 이유(李楡, 1675~1757)가 경관과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자신의 집 부근 옛 악양루 터에 지었다. ‘소악루’란 중국 동정호의 웨양루[岳陽樓] 경치와 버금가는 곳이라 하여 붙인 이름으로,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 등이 이곳에 찾아와 그림을 그렸다.
당초 가양동 세숫대바위 근처에 세웠던 원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1994년 5월 구청에서 한강변 경관 조성 및 조망을 고려하여 현 위치에 신축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규모로서 화강석 8각 주춧돌에 민흘림 원기둥을 세운 5량집 겹처마 구조이다. 지붕은 단층 팔작지붕이며, 주위에는 조망하기 좋도록 난간을 둘러놓았다.
소악루 누각으로 오르니 멋진 한강 조망이 펼쳐지며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판이 자리하고 있다.
겸재 정선이 바라본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
안현석봉 - 안현의 저녁 봉화불
[안현석봉(鞍峴夕烽)]
해질녘 양천현아가 있는 궁산에서 강 건너편 안현의 봉화불을 바라본 전경을 그린 것이다. 안현은 길마재, 안산, 모악산이라고도 불리는 산으로, 현재 이화여대 뒷산이다. 원경에 정상부에 붉은 점으로 봉화를 표현한 안현이 와우산, 정토산과 이어져 펼쳐지고 있고, 근경의 좌우에는 궁산 자락의 울창한 수목 사이에 자리잡은 소악루와 탑산, 공암을 각각 배치하였다.
소악후월 -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
[소악후월(小岳候月)]
'소악후월'은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는 뜻으로, 『양천읍지』 누정조에 의하면, 소악루는 동복현감을 지낸 이유가 중국의 악양루를 모방해 1737년경 창건한 누각으로, 현재 가양동 궁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다. 왼쪽 하단에 사선으로 자리잡은 궁산자락 중턱 위에 소나무와 잡목으로 파묻힌 소악루가 있고, 그 너머로 이유의 본채로 보이는 기와지붕들이 있다.
소악루를 나와 궁산 정상부로 발걸음을 옮기노라면 '서울 양천고성지' 안내판을 지나게 되는데,
<양천고성(陽川古城)>
궁산의 정상부에 위치한 양천고성의 옛터는 사적 제3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이곳은 고구려 국경으로 행주산성, 파주의 오두산성과 더불어 한강 하구를 지키던 요새 중의 하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다가 행주산성으로 옮겨서 크게 승리하였다. 일제 때에는 김포 군용비행장 개설공사로 일본군이 주둔하였고, 6·25 전쟁 이후에도 미군에 이어 국군이 수년 전까지 계속 주둔하였던 관계로 궁산 정상 부근은 원형이 심하게 변경되어 있다. 옛 성터의 흔적인 적심적(積心石)과 그 당시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석재 등도 발견되었다. 지금은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석축과 겨우 몇십 미터 정도 되는 성벽 흔적이 남아 있어 석성인지 아닌지 얼핏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주변 일대의 경관이 수려하여 옛부터 내려오는 부군당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
양천고성지 안내판.
양천고성지 안내판 옆에는 '관산성황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한강 건너편 대덕산 뒤로 병풍을 두른듯한 북한산을 조망하며 오르니,
널찍한 잔디밭이 자리한 궁산 정상에 도착한다.
<궁산(宮山, 75,8m)>
서울의 서쪽 끝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한 산으로 조선시대 양천 고을의 진산이었다. 한남정맥의 끝자락으로 안산 수리산에서 북행하여 증산(甑山)이 되고 그 낮은 구릉이 한강으로 끝나면서 작은 봉우리를 이루어 놓고 있다. 따라서 한강을 따라 서쪽의 개화산, 동쪽의 탑산·쥐산·선유봉 등과 더불어 한강의 남안에 솟아 있어 강변의 절경을 이루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대동지지』 등에 이곳을 “성산(城山)에 고성이 있는데 그 둘레는 726척(약 218m)이고 지금은 성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산의 이름은 파산(巴山)·성산·궁산·관산(關山)·진산(鎭山) 등 다양하였다. 파산은 삼국시대에 주변의 땅이름이 제차파의(齊次巴衣)로서 이것에 연유된 것이며, 성산이라 함은 성이 있기 때문에 불린 이름이고, 진산은 양천고을의 관방설비가 되어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관산은 '빗장 관(關)’자를 썼는데, 한강을 지키는 빗장 역할을 했던 산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으로 건너편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을 빗장처럼 지킬 수 있는 산이다. 궁산은 양천향교가 있어서 궁(宮)으로 표시했던 것으로 공자를 숭배하는 표시로 불렸던 것이다. 현재 표준 명칭도 궁산이다.
궁산이 갖는 역사적 의미로는 임진왜란 때 전라창의사 김천일, 전라소모사 변이중, 강화의병장 우성전 등이 김포·통진·양천·강화·인천 등지의 의병들을 이끌고 이 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한강을 건너 권율 장군을 도와 행주대첩에 참가하여 크게 승리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양천현감들은 매일 저녁 궁산에 올라 강 건너 피어오르는 봉화를 바라보고 국가의 안위를 살피기도 하였다. 북쪽으로는 인왕산 서쪽 무악봉수를 살피고, 남쪽으로는 부천 장명산 봉화를 감시하였다. 동쪽으로는 목멱산 제5봉수를 살피고, 서쪽으로는 파주 오두산성과 개화산 봉화를 감시할 수 있었다.
궁산에는 춘초정·막여정·악양루·춘산와·제일정·소악루 등 많은 누정이 있었다. 특히 궁산 한강변의 뛰어난 절경은 중국 동정호의 악양루(岳陽樓)에서 바라보는 경치에 버금간다 하여 이곳에 지어진 악양루라는 정자가 있었다. 영조 때 이유(李楡)가 이곳에 와 악양루 옛터에 소악루를 짓고 명사들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다. 겸재 정선이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뒤 매일 이곳에 올라 소일하면서 한강변의 그림을 그렸다. 그 작품집 『한수주유(漢水舟遊)』야말로 오늘날 한강변의 옛 모습을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궁산의 정상에는 6·25 전쟁 때 군부대가 주둔하여 진지로 사용되어 아직도 평평한 꼭대기에는 휴일을 맞이한 인근 주민들이 솔밭 사이에서 소풍을 즐길 수 있다. 그 정상에서 한강변으로 조금 내려가면 난지도와 멀리 남산을 바라보며 복원된 소악루가 서 있다. -서울시-
궁산이라는 이름 외에도 파산, 성산, 관산, 진산 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궁산에는 옛날 백제의 양천고성지가 있고, 조선조 화가인 겸재 정선이 양천현감으로 재임하면서 그림을 그렸던 소악루가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고장의 인물을 배출한 양천항교가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집결장소였으며, 6.25 동란 때에도 국군이 주둔했던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지이다. (궁산은 조선시대 때 우리 고장 행정의 중심지였음) -강서구-
궁산 정상을 지나는 백두들.
지금은 없어진 전망대가 있었던 궁산 정상부를 뒤로하고 양천향교를 향하면,
우측 골짜기에 '후포도당'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제당이 자리하고 있고,
겸재 정선 미술관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두고 좌측 소로로 들어서 내려서면,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인 '양천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양천향교(陽川鄕校)>
궁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양천향교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8호로서 서울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조선시대 지방교육기관인 향교다. 양천향교는 유가(儒家)의 공자를 비롯한 자사·안자·맹자·증자의 동양 5성인을 비롯하여 송조(宋朝) 4현과 우리나라 18현인을 봉사하고 있다. 양천향교는 태종 11년(1411)에 창건되어 많은 인재를 길러냈으며, 1913년 김포향교에 통합되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다시 독립적으로 관리하게 되었으며 1981년 전면 보수 복원되었다. 현재 건물로는 대성전을 비롯 명륜당·전사청·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과 부속건물 등 8동이 있다. 오늘날 향교에서는 봄·가을 2회에 걸쳐 공자를 비롯한 27성현에게 석전제를 지내고 있으며, 매년 옛 진사시험을 모방하여 청소년 서예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또한 충효교실과 전통예절교실을 운영하며, 초·중·고생들을 대상으로 한글·서예·사군자 등을 지도하고 있고, 전통혼례식장으로도 개방 활용하고 있다. 향교 정문 좌측에는 1600년부터 1953년까지 양천현감·군수로 재직하였던 사람들의 선정비가 있다. 9개의 비석 중에 이덕소·송우연·김진교·서칠보·이한경·김보현 등 6개는 확인이 가능하나 나머지 3개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기어 확인할 수 없다. -서울시-
양천향교 내부 전경.
양천향교 명륜당에서 바라본 양천관아터 방향.
종해청조
[종해청조]
'종해청조'는 '종해헌에서 조수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로, 종해헌은 양천현아에서 현령이 집무를 보던 동헌의 명칭이다. 한강이 흘러드는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가 큰 지역으로, 난간에 기댄 채 누마루에 앉아 조수 밀리는 소리를 듣는 선비는 아마도 정선 자신일 것이다. 관아가 들어서 있는 궁산 중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종해헌을 위시한 부근의 풍경을 담았다.
양천향교를 나와 우틀하여 도로를 따라 언덕으로 오르면,
이내 겸재 정선 미술관 후문이 나온다.
<겸재정선미술관>
강서구에서는 진경산수화의 창시자이자 대성자인 겸재 정선의 위대함과 진경문화의 계승발전을 위해 양천현아지 인근에 지하1층/지상3층, 연면적 3,305㎡ 규모로 2009년 4월 ‘겸재정선미술관’을 개관하였다. 겸재는 영조 16년(1740)부터 영조 21년(1745)까지 양천(陽川)현령을 지냈으며, 이 시기는 그의 진경산수화풍이 절정기로 치닫던 때로 《경교명승첩》, 《양천팔경첩》 등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겸재정선미술관은 겸재기념실, 기획전시실, 진경문화체험실 등으로 구성되어, 겸재 정선의 그림·사상·일대기 등을 통해 겸재 정선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공간과 양천현아 모형 복원을 통해 강서구의 고유한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겸재정선미술관은 허준박물관, 양천향교, 양천고성지, 개화산 약사사 등 인접해 있는 역사문화자원과 연계하여 강서구의 역사교육장 및 관광거점지역으로 자리잡고 있다. -강서구-
겸재정선미술관 뒤편의 조형물에서.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 미술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조선 후기 유행한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로, 진경(眞境) 또는 동국진경(東國眞景)이라고도 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신조선 산수화(新朝鮮山水畫)라고도 하였다.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중기에 걸쳐 그려진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의 전통을 토대로 발전된 것이다. 앞 시기의 경향에 비하여 화단에서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며 성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높은 회화성과 함께 한국적인 화풍을 뚜렷하게 창출하며 전개되었다. 이러한 진경 산수화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회적 변동과 의식의 변모를 배경으로 유행하였다. 특히 종래의 방고(倣古) 행위의 형식화와 그 표현의 상투화에 대한 반성에서 당대의 현실을 통하여 고의(古意)와 이상을 찾으며, 가치를 재인식하고자 하였던 당시의 사상적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산천을 주자학적(朱子學的) 자연관과 접목시키고자 하였던 문인 사대부들의 자연 친화적 풍류 의식의 확산에 의한 탐승유력(探勝遊歷) 풍조의 성행과 주자학의 조선화(朝鮮化)에 따른 문화적 고유색의 만연 및 자주의식의 팽배 등도 진경 산수화의 발전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조류의 이념적 성향은 당시 집권층이었던 노론 문인 사대부들과 남인 실학파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실경의 소재는 조선 초기·중기와 마찬가지로 명승 명소(名勝名所)·별서 유거(別墅幽居)·야외 아집(野外雅集)류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금강산과 관동 지방, 서울 근교 일대의 경관이 가장 많이 다루어졌다.
대표작으로는 정선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간송미술관 소장), 「금강전도(金剛全圖)」·「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를 비롯하여, 강희언의 「인왕산도」(개인 소장), 김윤겸의 「영남명승첩(嶺南名勝帖)」(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김응환의 「금강산화첩」(개인 소장), 김석신의 「도봉산도」(개인 소장), 심사정의 「경구팔경도(京口八景圖)」(개인 소장)가 있다.
겸재정선미술관 탐방도 후일을 기약하고는 미술관 정문으로 나와,
도로를 가로질러 서울식물원 습지원으로 향하면,
돌아본 궁산 방향.
2018년에 개관하여 이제는 제법 운치있게 변한 서울식물원습지원 호수가 나온다.
<서울식물원>
서울식물원은 세계 12개 도시 식물과 식물문화를 소개하고 도시의 생태감수성을 높이기 위해 서울에 남은 마지막 개발지 마곡에 조성되었으며, 식물원과 공원을 결합한 이른바 '보타닉 공원'으로서 면적은 축구장 70개 크기에 달한다. 멸종위기 야생식물 서식지를 확대하고 번식이 어려운 종의 증식 연구, 품종개발 등 식물의 육성이라는 식물연구보전기관 본연의 역할은 물론, 도시 정원문화 확산의 교두보이자 평생교육 기관의 역할을 수행한다. 식물원은 열린숲과 주제원, 호수원, 습지원 등 4가지 공간으로 나뉘며, 그중 하이라이트는 식물문화센터와 야외 주제정원, 마곡문화관이 포함된 주제원이다.
호수 건너편 마곡나루역 방향.
서울식물원 탐방도 후일일 기약하고 양천로를 따라 여덟번째 산인 치현산을 향하면,
서남환경공원 테마산책길로 들어서게 되고,
<서남환경공원>
서울시의 9개 구와 광명시에서 나오는 하수를 처리하는 서남물재생센터는 마곡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부지면적은 1,065,000㎡이다. 하루 200만 톤의 하수를 처리하고 있는 물재생센터내에는 인근 주민들에게 휴식과 편의를 제공하고 쾌적한 도시 환경을 조성, 물재생센터가 혐오시설이라는 이미지를 전환시키기 위해 하수처리시설 외에도 분수대, 어린이놀이터, 풋살경기장, 연못,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우측에 서남물재생센터공원이 자리한 테마산책길에는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멋지게 도열해 있다.
멀리 담양까지 가지 않고도 마음까지 시원하게 뚫어주는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통과하면,
초딩시절 교정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플라타너스 숲길이 이어지다가,
우측으로 5월 17일 본격 개관을 앞둔 서남물재생센터가 웅장하게 보이고,
방화대교 아래 한강변 강서습지공원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르다가,
우측 도로로 내려서서 마곡서광아파트 뒤편 골목으로 진행하면,
치현둘레길소공원에 도착하여 치현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강서둘레길을 따르게 된다.
이정표의 '치현정' 방향 오름길을 따르다가,
치현산 남쪽 기슭의 정곡소공원에서 올라오는 널찍한 등로에 접속하여 우측으로 진행하면,
이내 아무런 표식이 없는 치현산 정상을 지나게 되고,
<치현산(雉峴山, 70m)>
치현산은 개화산 동북쪽 강서구 방화동 한강변에 위치한 산으로, 꿩이 많아 꿩사냥하기에 좋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치현산 정상 북동쪽 아래에 치현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방화대교와 강서한강공원, 행주산성이 내려다 보이는 조망 명소이다.
"조선시대 개화산에 설치되었던 두 개의 봉수대 가운데 동쪽 봉수대에 해당하는 표고 70.5m의 봉우리에 딸린 고개를 치현(雉峴), 곧 꿩고개라 하였다."라는 옛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 치현산은 '산'이 아닌 개화산에 딸린 고개 옆 작은 봉우리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치현산 정상부 이정표에서 아무런 표시가 없는 북쪽 방향 숲길로 내려가면,
자그마한 팔각정자인 치현정이 나온다.
<치현정(雉峴亭)>
치현산 북동방향 끝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하여 방화대교, 강서한강공원, 행주산성이 내려다보이는 조망명소로, 웅장한 정자는 아니지만 4계절 편안함을 주는 소박한 장소이다. 이곳 치현정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옛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杏湖觀漁)" 그림과 사천 이병연의 한시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행호관어
[행호관어]
행호에서 고기잡이하는 정경을 그린 것으로, 행호는 현재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덕양산(행주산성) 부근의 한강으로 호수처럼 넓다고 해서 '행호'라고 불린다. 중경의 산자락은 한강변의 빼어난 풍경을 자랑하는 승경지로, 당대 고관들의 별서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맨 좌측 벼랑 위 숨겨진 기와집 두어 채는 김동필(1678~1737)의 별서인 낙건정이, 가운데는 좌의정 송인명(1689~1746)의 장밀헌이, 맨 우측에 보이는 기와지붕들이 김시좌(1664~1727)의 귀거래정이다.
행주 앞강(杏州라고도 함)에서 늦은 봄이 되면 복어가 잡히고, 초여름엔 위어(葦魚 : 웅어)가 나서 사용원(司饔院)에서 낭관(郎官)을 보내어 이 계절의 별미(別味)를 바치게 하였다니 진도(津渡)의 임무 중에 고기잡이가 또 한 가지 일이었나 보다. 덕양산 서북쪽 능선이 안고 있는 서원촌 숲 한가운데 우뚝 선 루(樓) 같은 것이 귀래정인 모양이다. 오른편에는 왕(王) 자형 대지에 규모 있는 기와집들이 들어차고, 한강변 갯벌에는 포유(浦柳)가 즐비하다. 그 앞 강심(江)에는 쌍돛대 짐배 한 척이 낚싯배를 끌고 하류로 내려간다. 뒷산은 실제보다 엄청나게 높인 다음 미점(米點)으로 온통 점철하여 우거진 송림(松林)을 나타내고 있다.
<웅어>
밴댕이(소어)는 경기도 안산 지역의 안쪽 바다에서 나고, 제어는 속명으로는 웅어(위어)라고 하는데 한강 하류인 고양군 행주에서 잡힌다. 늦은 봄이 되면 대궐 음식을 준비하는 사옹원의 관리들은 (어부들이) 그물을 던져 잡은 웅어를 임금에게 진상하며, 생선 장수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횟감 사라고 소리치며 이것을 판다. [동국세시기]
귀래정
[귀래정(歸來亭)]
귀래정(歸來亭)은 지금의 행주산성(幸州山城) 뒤편 덕양산(德陽山) 줄기가 안고 있는 서원촌, 건너편 개화산(開花山)에서 바라다보는 곳에 있던 죽소(竹所) 김광현(金光炫: 1580~1658년)의 별서(別墅)였다. 이곳은 겸재 당시도 죽소(竹所)의 후손인 김시좌(金時佐)의 소유였다. 「귀래정(歸來亭)」 그림은 겸재의 훗날 작품인 「경외명승첩(京外名勝帖)」 중에서 「행호관어(杏湖觀漁)」라는 화제로도 그려지는데 자연과 건물의 배치 묘사가 거의 같다.
낙건정
[낙건정(樂健亭)]
낙건정(樂健亭)은 행주대교가 지나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덕양산 끝자락 절벽 위에 있던 정자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6조판서를 모두 역임한 낙건정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이 벼슬에서 물러나 ‘건강하게 즐기며’ 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낙건정(樂健亭)이란 이름은 송나라 때 대학자인 육일거사 구양수((六一居士 歐陽修·1007∼1072)의 ‘은거를 생각하는 시’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낙건정은 「경외명승첩(京外名勝帖)」의 「행호관어도(杏湖觀魚圖)」와 같은 경치를 보여주고 있고 또 이 화첩이 양천 주변의 8경을 그린 점을 감안할 때 양천(陽川)의 개화사(開花寺) 자리에서 한강 건너 행주의 새재골과 서원촌(書院村) 일대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산마루에서 강 건너의 덕양산(德陽山) 낙건정(樂健亭)을 내려다본 시각이 되는데 이런 부감법으로 행주의 강변 절벽과 송림에 싸인 누각에 초점을 맞추고, 그 왼편으로는 잔산(殘山) 너머 한강 하류가 서해로 빠지는 장관을 다소는 과장되게 표현하며 경승(景勝)의 운치를 돋우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겸재의 능숙한 시각 구성과 농담의 강한 대비로 회화적 효과를 거두는 것을 볼 수 있다.
치현정에서 바라본 방화대교와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 방향.
일산 방향.
대덕산 방향.
치현정을 돌아나와 다시 강서둘레길에 접속하여 개화산 방향으로 진행하면,
좌측 꿩고개공원에서 오는 산책길에 접속하여 우측 치현산 방향으로 진행하고,
우측의 꿩고개체육단련장을 지나면,
사거리 안부 갈림길인 꿩고개를 지나게 된다.
<꿩고개/치현(雉峴)>
조선시대 개화산에 설치되었던 두 개의 봉수대 가운데 동쪽 봉수대에 해당하는 표고 70.5m의 봉우리에 딸린 고개를 치현(雉峴), 곧 꿩고개라 하였다. 비포장길이었던 옛 방화동길의 이 고개에는 꿩이 많아 꿩사냥하기에 좋았다 한다. 방화리(傍花里)라는 동명이 생긴 후에는 방화고개라고도 하였다.개화산은 개화동에 위치한 해발 128.4m의 산으로 이곳 봉수대는 여수 돌산도에서 시발하여 전라도·충청도 방면의 해로를 통한 봉수였으며, 서울 회현동쪽 남산 산마루의 남산 제5봉으로 연결되었다. 동쪽 봉수대인 치현에서 봉화를 들었던 곳을 봉화뚝이라 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통신대가 주둔하고 있다. 봉수대의 직봉(直烽) 또는 간봉(間烽)이 있었던 지역은 오늘날에도 통신대의 주둔지이거나 기상관측소가 있는 곳이 많다. 치현 동쪽 끝에 자리한 마을을 정곡리(井谷里)라 하였는데, 마을 골짜기에 언제나 맑은 물이 흘렀다. 가뭄 때 다른 마을의 샘물은 말라도 이 마을만은 언제나 물이 마을을 돌아 흘렀기 때문에 ‘샘물이 돌아 흐르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돌정말 또는 돌샘말이라 하고 한자로 정곡리(井谷里)라 하였다. -서울시-
개화산 방향의 완만한 능선 산책길을 잠시 더 따르면,
지금은 고개같지도 않지만 옛날에는 큰 고개였다는 '큰고개'를 지나서,
<큰고개>
개화산과 치현이 이어지는 잘록한 허리부분을 큰고개라 불렀다. 행주나루로 가기 위해서는 지름길이었던 이 고개를 넘었는데, 은근히 높고 나무가 울창해서 대낮에도 혼자 넘기에는 으스스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고개를 넘으려면 대여섯 명이 모여서 횃불을 들고 넘었다고 한다.
토성고개는 큰고개에서 이어진 작은 고개에 해당하는 곳이다. 언뜻 보면 와우(臥牛)의 모양이기도 하고 복호(伏虎)의 모양이기도 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이러한 곳을 장지로 선정하면 부(富) 혹은 귀(貴)가 따른다 하여 명혈(名穴)로 여긴다. 그 때문인지 주변 일대에 무주묘(無主墓)인듯한 묘지 여러 기가 있다.
본격적인 개화산 오름길로 들어선다.
제법 산길같은 느낌이 드는 숲길을 잠시 오르면,
개화산 물순환 생태복원사업 준공기념비가 있는 쉼터를 지나게 되고,
좌측 방화중학교에서 약사사로 이어진 포장도로에 접속하여 우측 약사사 방향으로 진행하면,
옛날에는 개화사라 불렸던 약사사에 도착한다.
<약사사>
개화산(開花山) 약사사는 서울 강서구 관내 전통사찰 중 제1의 위상을 지닌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사찰이다. 도량 중앙에는 삼층석탑(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9호)과 석불(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0호)이 모셔져 있어 고려 후기의 창건 역사를 가늠케 한다.
1486년(성종 17년)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약사사가 주룡산에 있다고 나와 있다. 조선 후기 작성된 「양천읍지(陽川邑誌)」에 따르면 신라 때 '주룡'이라는 도인이 이 산에 머물렀다 하여 주룡산(駐龍山)이라 이름하였고, 주룡 선생이 돌아가신 후 기이한 꽃 한 송이가 피어 사람들이 개화산(開花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봉화를 받는 산이라 하여 개화산(開火山)으로도 불리었는데, 조선 초기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라도 순천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받아 남산 제5봉수에 전하였다고 한다.
1737년에 이르러 송인명(宋寅明)이 개화사(開花寺)에서 공부하고 재상이 되어 그 인연으로 절을 중수하였고, 순조 이후에는 약사사(藥師寺)로 개칭하였다. 1827년 송숙옥(宋叔玉)이 쓴 『개화산약사암중건기(開花山藥師庵重建記)』에 의하면 ‘약사암’이라 하고 삼한고찰(三韓古刹)로 표기하였다.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謙齋鄭歚, 1676~1759)은 개화사(開花寺)라는 제목으로 사찰과 주변 풍경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개화산의 울창한 숲과 한강변을 비롯한 빼어난 주변 경치로 인해 겸재 정선이 그림의 소재로 즐겨 찾았던 약사사! 겸재의 「개화사」라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 이 절은 냉천이 있어 병자가 목욕을 하면 오랜 병도 낫는 약수터로 불려졌다. 또한 이 절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석불과 약사사 3층 석탑이 있어 고려시대 역사의 흔적을 감상할 수 있다. 절의 창건은 삼한시대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고찰이다. 이 코스를 걷다 보면 자연스레 거치게 되므로 들려봄직하다. -강서구-
개화사
[개화사(開花寺)]
현재 서울 강서구 개화동 332의 12에 있는 개화산 약사사의 겸재 당시 모습이다. 그때는 주룡산(駐龍山) 개화사(開花寺)라 했기 때문에 개화사로 그림 제목을 삼았을 것이다.
이 그림이 영조 16년(1740)에 그려졌으니 개화사가 중수된 지 3년 뒤의 일이다. 그러니 막 중수를 끝마친 상태의 모습일 것이다. 주룡산 거의 상봉에 법당이 우뚝 솟아있고 그 법당 석축 아래에 3층 석탑이 그려져 있다. 석탑 오른쪽으로 요사채가 있는데 ‘ㄴ’ 자(字) 모양이라 아직 덜 지어진 듯하다. 이 그림보다 뒤에 그려진 서예가 김충현(金忠顯)씨가 소장한 개화사 진경을 보면 이 집이 ‘ㄷ’ 자 구조로 되어 있어서 이때는 아직 다 마무리되지 못한 상황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절 아래에 초가집 세 채가 섶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으니 이 집들도 절의 부속건물이었던가 보다. 절 뒤로는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마당 아래로는 버드나무가 고목이 되어 숲을 이루며 겹울타리를 치고 있다. 아마 강바람을 막으려는 배려로 조성한 방풍림일 것이다. 버들 숲 아래로 층층의 다락논이 보이나 가을걷이가 끝난 듯 논은 모두 텅 비었다. 산자락 끝은 바로 한강변 모래사장으로 이어지는데 모래사장에서 시작된 산길이 산골짜기를 따라 논과 산의 경계를 지으며 절로 오르고 있다. 왼쪽에 주룡산 최고봉이 있고, 거기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높고 낮은 봉우리들을 만들며 개화사를 3면에서 감싸고 강으로 내려왔다. 그러니 개화사에서는 한강 쪽으로만 시계가 열려있어 항상 한강을 내려다보고 그 건너 덕양산과 삼각산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게 된다. 이 그림에서는 쌍돛배가 떠가는 한강물이 바로 주룡산 밑을 스쳐지나고 있지만 지금 개화산 약사사는 한강과 상당히 떨어져 있다. 물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약사사 삼층석탑과 대웅전.
약사사를 돌아나와 개화산둘레길을 따라 봉화대와 개화산 전망대 방향으로 진행하면,
봉화대 아래에 위치한 개화산전망대에 도착한다.
<개화산전망대>
개화산 정상부 헬기장에 위치한 전망대로, 2011년 5월 근교산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되었으며 방화대교와 한강, 행주산성, 서울N타워, 월드컵 공원까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서울시 선정 조망 명소이다.
행주일도
[행주일도(涬州一棹)]
'행주일도'란 '행주의 배 한 척'이라는 말이다. 그림에 쓰여 있는 글씨는 ‘宿雲散墨點蘭洲 洞庭巴陵湘水流’로 보이는데, ‘파릉현(巴陵縣 : 악양루가 있는 현 악양시 지역) 동정호에 상수(湘水)가 흐른다’는 내용으로 보아 상상의 세계를 그린 사의(寫意) 산수화로 소상팔경(瀟湘八景) 중 하나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행주일도’는 1741년 봄 이병연이 행주에서 배를 타고 양천에 있는 정선을 방문하려고 했던 일과 관련된 작품이다.
북한산과 대덕산 방향 조망 안내도.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과 대덕산 방향.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 방향.
대덕산 방향.
안산과 남산 방향.
전망대는 이제 막 도착하는 아이들에게 내어주고 개화산 정상을 향하면,
개화산봉수대가 나오고,
<개화산봉수(開花山烽燧)>
개화산봉수는 개화산 북쪽 상봉에 있으며 속칭 봉화뚝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통신수단으로 설치한 이 봉수는 전라도 순천군 돌산도로부터 충청도·경기도 등의 해로를 거쳐 김포군 냉정산에 다다라, 이 봉수가 서쪽으로 냉정에 연결되고, 동쪽으로 서울 목멱산 제5봉에 전달된다. 조선 말기에 봉수제는 폐지되고 그 남은 터도 6·25 전쟁으로 미군부대가 주둔하면서 군사시설을 닦느라 흔적마저 없어졌다. 이곳은 옛 양천지역의 이름인 파릉(巴陵) 8경의 하나로 「개화석봉(開花夕烽)」에 해당하여 개화산의 저녁 봉화가 평화로운 한강변 경치를 한층 아름답게 꾸몄던 것이다. -서울시-
개화산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과 마주보는 산이다. 산정에 서면 삼각산과 도봉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한강과 임진강이 마주치는 조강(祖江)과 광활한 조해(祖海) 풍광을 아울러 조망할 수 있다. 또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인왕산.낙산.백악산.남산을 비롯해서 멀리 관악산과 그 사이를 굽이쳐 오는 한강 상류의 물길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소 중의 명소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참고)
임진왜란·병자호란 전까지는 봉화불을 올렸다 하며, 후에 개화산(開花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주장이 있다. 개발제한구역과 군사시설이 위치하고 있어 자연 그대로의 숲이 제법 울창한 것도 개화산(開花山)의 자랑이다. 이런 까닭에 개화동 곳곳에는 오래된 아름드리 나무들이 많이 있다.
봉화정 옆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아라뱃길전망대와 신선바위 방향의 개화산둘레길이고,
<봉화정(烽火亭)>
개화산 정상에 위치한 육각정자로 조선시대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라도 순천에서 오는 봉화를 받아 남산 제5봉수에 전하였던 곳이므로 봉화정이라 명칭을 제정하였다. 정상까지 올라와서 잠시 담소를 나누며 쉬어가는 휴게 공간이다.
우리는 개화산 정상을 차지한 군부대 방향 능선등로로 들어서서,
개화산 정상을 차지한 군부대를 우회하여 '개화산 정상 400m' 이정표를 따라 우측 산길로 진행하면,
호젓한 산길을 따라 실제 개화산 정상쯤을 우회하여 지나게 되고,
우측 원형철조망 안쪽 어디쯤이 실제 개화산 정상.
개화산 정상에서 남쪽 개화초교 방향 능선에 접속하여 능선길을 따르면,
파고라 쉼터가 있는 지능선의 작은 봉우리에 개화산 정상석이 자리하고 있다.
개화산 정상 인증.
<개화산/주룡산(開化山, 128.4m)>
개화산은 서울의 서쪽 끝 강서구 개화동에 위치한 잔구성 구릉산지이다. 『양천읍지』를 보면 개화산의 산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해의 산경은 백두산을 조종(祖宗)으로 하여 태백산에 이르고, 서쪽으로 굽이쳐 속리산이 된 다음 북행하여 청계산이 된다. 여기서 맥을 나누어 일맥은 북쪽으로 관악산을 이루고, 다시 북쪽으로 떨어져 양화도 선유봉이 되며, 일맥은 서북을 향하여 안산의 수리산·인천의 소래산으로 이루어져 북행해 와서 본현에 이르러서는 증산(甑山)이 된다. 증산은 산 모습이 예뻐서 군자봉이라고도 하니, 이것이 한 고을의 조봉(祖峰)이 되며, 일맥이 북향하여 주룡산(駐龍山)이 된다. 일명 개화산이라고도 하는데, 코끼리 형상으로 사자 형상인 행주산과 더불어 한강 하류의 양쪽 대안에 포진하여 서로를 바라보며 서해안을 통해 들어오는 액운을 막고, 한성에서 흘러나오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이라고 한다.
개화산은 일명 ‘주룡산’이라고도 했다. 신라 때 한 도인이 주룡선생(駐龍先生)이라 자칭하며 이 산에 숨어 살면서 도를 닦고 세상에 나오지 않다가 이곳에서 늙어 죽었다. 그가 이곳에 살 때 매년 9월 9일에는 동자 두 세명과 더불어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며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하였으므로 주룡산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자리에는 이상한 꽃 한송이가 피어났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이 산을 개화산이라 일컬었다. 지금의 개화사가 주룡 선생이 살던 옛 터라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 봉수대가 동·서 두 곳에 설치되어 있고, 봉수군과 봉대별장(烽臺別將)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봉수진이 있었던 산이라는 의미로 ‘開火山(개화산)’이라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두 개의 봉수대 중 동쪽은 방화동의 치현(雉峴)에서, 서쪽은 개화산에서 봉수를 받아 연락하였던 것이다. 개화산봉수는 여수 돌산도에서 시작하여 전라도·충청도 방면의 해로를 통한 봉수로, 회현 동쪽 산마루의 남산 제5봉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치현의 동쪽 봉수대는 현재 통신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봉화를 들었던 곳을 ‘봉화뚝‘이라 한다. 이렇듯 임진왜란·병자호란 전까지는 봉화불을 올렸다 하여 ‘開火山(개화산)’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開花山(개화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산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행주산성과 마주 본다. 산정에 서면 삼각산과 도봉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한강과 임진강이 마주치는 조강(祖江)의 광활한 풍광과 바닷물이 들어오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또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인왕산·낙산·북악·남산을 비롯해서 멀리 관악산과 그 사이를 굽이쳐 오는 한강의 물길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명소 중의 명소이다. 그래서인지 조선후기 화가로 이름 높은 겸재 정선(鄭敾)은 양천현감으로 있으면서 「열수팔경도」의 하나로「개화사」라는 제목으로 개화산과 절, 오솔길의 소나무숲과 그 아래 버들숲이 우거져 있고 전답이 있는 모습을 그렸다. 지금은 개발제한구역과 군사시설이 위치하고 있어 자연 그대로의 숲이 제법 울창한 것도 개화산의 자랑이다. 그리고 개화산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산신제를 지낸다. 개화산은 1977년 7월 9일 건설부고시 제138호로 개화동 산 17번지 일대 386,500㎡를 미시설 개화근린공원으로, 방화동 산 97-1번지 일대 18만㎡를 미시설 방화제2근린공원인 꿩고개근린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서울시-
오늘 한강 9산 종주 참석자 전원 인증.
개화산 인증을 마치고 개화초교 방향의 능선등로를 따라 내려서다가,
개화산둘레길을 만나 우틀하여 '하늘전망대'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면,
김포공항과 인천의 계양산이 조망되는 하늘길 전망대가 나온다.
<하늘길 전망대>
개화산 서측에 위치한 전망대로 특히 김포공항에서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바위 위 휴게공간과 소나무가 잘 어우러져 멋진 경관을 연출한다.
김포공항 뒤쪽 부천을 두르고 있는 야트막한 능선이 몇 해 전에 걸었던 한남정맥이다.
미타사 방향 개화산둘레길을 따라 잠시 더 진행하다가,
사거리 갈림길에서 개화산역으로 가기 위해 좌틀하여 내려서면,
미타사 입구 날머리에 도착하고,
<미타사>
서울의 서쪽 끝 개화산 자락 김포평야와 행주나루 끝에 걸쳐 있어 도심 속에 있는 사찰이면서도 평온함과 한적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미타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법당 옆 커다란 바위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미륵불입상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미륵부처님은 하나 같이 땅에서 솟아났다'는 이야기 등 무수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도로를 따라 개화역으로 이동하여,
9호선 개화역에 도착하여 재밌고 유익했던 한강 9신 트레킹을 마감한다.
백두산우회의 산행이라면 늘상 마냥 한사코 열심히 걷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우리의 방식이 항상 지고지순한 최고일 수는 없다.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달라질 것이다.그런 변화를 수용하고 오롯이 우리의 것으로 만들려는 태도 또한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오늘 뒤풀이는 서울 최고의 삼겹살 맛집인 강서구청 사거리 인근의 '해성식당'에서 가지려 했으나, '삼겹살'과 '회' 중에서 여성 회원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회'를 먹으려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향한다.
개화산역이 9호선 열차 출발역이라 좋은 자리를 골라 앉을 수 있고,
노량진역에서 하차하여 지하통로를 통과하면,
제주도에서 잠시 전에 도착한 김전무가 기다리고 있는 노량진수산시장에 도착한다.
재미난 산행에 이어 맛난 회로 오붓한 뒤풀이 시간을 가진다.
재미난 예기로 탐방을 이끌어 주시고,
푸짐한 뒤풀이까지 마련해 주신 회장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코로나로 함께 하지 못한 박 점장님의 쾌유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