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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우가 부르는 노래
-직녀에게
박방희
직녀님, 직녀님, 베틀 위의 직녀님!
날줄 씨줄 촘촘히 세계사를 쓰면서도 아직 북을 못 놓고 있는 우리 직녀님, 반세기
넘게 지나 귀밑머리 희끗해도 서로 알아는 보겠지요. 마음 거울 들여다보고 또 보며
오래 그리워했으니! 아득히 물안개 너머로 바라보다 학같이 목이 길어진 직녀님,
역사의 사래 긴 밭 아직도 못다 갈고 짜야할 베 끝없어도 직녀님, 직녀님, 언제까지
서로 그리며 꿈속에서나 오갈 것인가요? 세상 잠든 고요한 새벽, 직녀님 베틀 소리
꿈결인 듯 들려오니 견우의 소치는 소리도 강을 건너겠지요. 해마다 피는 앵두꽃 속에
직녀님 모습 찾아보고, 서리 하늘 기러기 떼에 한자소식 기다리다가 다시 맞는 칠월칠석,
쟁기 부숴 배 만들고 베 끊어 돛 만들면 오작교 없이도 오갈 수 있으려니! 바라보면
지척인 그곳, 땅길 물길 하늘길 열어 하나로 오가는 나라 만들어, 아침엔 해 띄우고
저녁에는 달 띄우며 새날 새 역사를 시작해요. 직녀님, 직녀님, 우리 직녀님!
평양의 인력거꾼
統一되면 평양 가서 인력거를 끌어보리
일제 때 만세 부른 시가지 구석구석, 평양 감옥 붉디붉은 벽돌담 돌아나와 푸른
물결 찰랑이는 대동강 나루까지, 버선코같이 솟아오른 궁궐 지붕 바라보며 옷고름
풀어놓은 옛 골목들을 거슬러, 대한제국에서 고려 신라 고구려까지 긴긴 역사의
뒤안길 굽이굽이 휘돌며
그리운 남남북녀 태워 냅다 달리고 싶네
내가 지금 실업한 이유도 거기 있다네
나사 하나로 박혀 있다 갑자기 빠져 나가
잘 도는 남쪽 체제를 펑크 내선 안 되기에
못 만난 동포들 태워 구석구석 누비다가
오르내릴 때 손잡아 주고 진창이라도 만나면
흙 묻은 고무신 아래 등이라도 넙죽 대며
오래 금기된 사랑 뜨겁게 하고 싶네
그 옛날로 되돌아가 새 역사 쓰고 싶네
살아서 못다 한 사랑 죽어서라도 하고 싶네
우편번호가 생긴 獨島
우리 땅이라면서 우편번호도 없던 독도에 새 주소와 우편번호가 생겼다
우편번호 799-805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7번지 서도 1반, 동도 1반으로
이제 새벽이 안개 속에서 길 잃고 헤매다가 아침에 늦는 일 없겠다 뱃고동 소리도
실족하지 않고 찾아와 둥지 속 잠든 텃새들 깨울 것이다
싱글벙글 해님 새 주소로 찾아와 환한 햇살 뿌리고 가면, 먼데서 온 바람도 저를
잊은 꽃들 흔들어 깨우겠다 낮에는 파도소리 갈매기 알 쓰다듬어 부화시키고 밤에는
달님 환하게 떠오르면 별님도 제 번지에서 반짝이리
서도의 구멍바위 물개바위 가제바위 지네바위 권총바위 미륵바위, 동도의 독립문
바위로 오징어 명태 상어 고래 연어 대구 송어 떼들 어김없이 찾아오고 외로운 우
레 소리도 더 이상 허방 딛지 않고 번개도 곧 바로 내리치겠지 무지개도 제 자리에
바로 걸리니 바위 속 슴새 둥지들도 문패 달겠네
여뀌풀 꽃등 달면 남태평양 구름도 더듬지 않고 제 번지로 와 그늘을 드리우고 가
끔씩 빗방울로도 방문하니 일기예보도 잘 맞겠네 등대 불빛에 실려 경비초소의 휘
파람소리 더 멀리 날아가고 육지로 부치는 편지며 소포도 계급장처럼 자랑스레 우
편번호 달고 날아가겠지…….
우편번호 단 생각이 뭉게뭉게 구름처럼 피어나는 외로운 섬 獨島
사랑채 이야기
-할아버지 추억
사랑채에 나가면 갓 쓰신 할아버지, 학같이 앉아 계시다가 심심하시면 한 번씩 툇
마루까지 뻗어 나온 장죽을 입에 무시고 에헴! 기침하신다. 그러면 누군가 냉큼 달
려가 담뱃대에 가득 담배 재어 불을 붙이면 방안의 할아버지, 보료에 비스듬히 기
댄 채 담배를 피우신다. 한 모금, 두 모금, 한참 지나도 연기가 안 나오고 장죽 속
의 담배가 다 타 들어갈 동안 불만 반짝일 뿐 하얀 연기 할아버지 입과 코로 뿜어
나오지 않는다. 이제 재만 남은 담뱃대를 뻑 뻑 마저 빠실 즈음에서야 할아버지 늙
어 오래 된 몸 구석구석 갈라지고 깨진 틈 두루두루 적시고 배이고 스미고 난 뿌연
연기들이 뭉클 뭉클 피어오르며 온 방안 가득 차오른다. 그 매콤하고 하얀 연기에
싸여 신선 같은 할아버지 웃음소리가 둥실 둥실 떠오르고 이윽고 할아버지마저 지
붕을 뚫고 떠올라 구름 위로 높이높이 하늘로 올라가신다.
그 할아버지 이젠 안 계시고 사랑채엔 장죽만 남아 오랫동안 세월을 뻑뻑 피우고,
담배 심부름하던 어린 손자는 어른이 되어 있고.....
출근
침대가 나를 밀어낸다
스프링의 뼈마디가 들고 일어나
접힌 몸 내동댕이친다
수도로 가 잠을 씻는다
눈곱으로 남은
간밤의 꿈들을 떼 내면
세숫대야는 내게 찬물을 뒤집어씌운다
식탁에 앉는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번갈아 몸을 밀어 넣는다
넥타이가 목을 조른다
아침 8시가 댕, 댕, 뒤통수를 친다
버스는 좌석에 나를 앉히지도 않고
거리의 신호등은
파란 눈 빨간 불 껌벅이며
서라, 달려라, 달려라, 서라, 서슬 푸르다
정신없이 횡단보도 급히 건너면
난 또 한 생을 건넌 것이다
사무실 문이 아득히 공중에 떠 있다
엘리베이터가 흡입하여 상승시킨다
거대한 블랙홀처럼
거기 너도나도 빠져든다
저녁 국수
살평상에 앉아 국수 한 그릇 합니다
저녁이 와서 앉고, 지나가던
바람도 와 젓가락질을 합니다
초저녁별이 하나 둘 떠오르고
비워 낸 국수 그릇에 어둠이 채워집니다
국숫물에 가라앉은 어둠까지 마시니
반짝하고 전깃불이 켜집니다
불빛 속에 화안히 드러나는 바닥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가득합니다
보리차 물로 소리 나게 입을 헹궜습니다
의자
의자이고 싶다
조용히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빈 의자이고 싶다
다소곳이 저를 비워
더 넉넉한 의자이고 싶다
누군가 와 쉬어가는 의자
허물없이 앉았다가는
그런 의자이고 싶다
잠시 더듬는 생각
지친 영혼이 꾸는 꿈도 보듬으며
나그네의 선잠을 받치는 의자이고 싶다
그 사람 뒤돌아봄 없이 떠나도
그를 그리며
오래도록 추억하는 의자이고 싶다
의자이고 싶다
누군가 쉬고 간 뒤의 의자이고 싶다
그 사람 다시 오지 않아도
그의 체온과 숨결, 꿈마저 안아 들인 채
영원히 그가 되어 앉아 있고 싶다
미루나무 식당
미루나무 식당에는 미루나무가 있다
그 아래 개울이 있고
미루나무 우듬지로도
한 줄기 푸른 강이 흘러
징검돌로 놓인 까치집과
오가는 사람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며
깍, 깍, 호객하는 까치가 있다
미루나무 식당에는
소주 백세주 동동주 산머루주에
요강 뚫는 복분자주
자주 몽롱해지는 안개주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 파전에
매미소리로 무친 도토리 묵채
개울물 소리로 다갈다갈 볶은
닭찜이 나온다
저녁이면 배고픈 별들 모여드는
미루나무 식당에는
언제든 따르릉 전화가 있고
불 켜진 간판의 그림닭이
낮에 죽은 닭들을 대신해 한 번씩 꼬끼오, 운다
까치밥
그건 꽃이야 아니, 마음이 켜놓은 등燈이야 배고픈 날짐승이 꿈꾸는 마지막 희망
이야 그래, 무슨 요령소리처럼 찰랑찰랑 맑은 소리를 내기도 하는 기항지의 등대
같은 거야 똑, 마지막 것까지 따려니 감나무 보기 미안하고 하늘 보기 허전해서,
하나만 두려니 또 야박해서 참꽃 다발처럼 몇 개 달아두고 가볍고 환한 마음으로
내려왔는데 외출에서 돌아올 때마다 불 켠 듯 전기 들어온 듯 환하게 요령 흔드는
몇 알의 까치밥이 어두운 세상 등불이 되어 저문 고샅길도 밝았으니 동지섣달 설한에
삭아 없어져도 내 마음속 빈자리에 불을 켜고 달려 있어 겨우내 빈 가슴 훈훈하였으니
옳아, 하늘에 달아둔 건 배고픈 까치밥이 아니라 가난한 내 마음의 밥이고 저무는
날의 내 꿈이었느니!
배추를 묶다
머리에 수건 쓴 아주머니들이 밭고랑에 앉아 배추를 묶는다
비끼는 햇살도 묶는지 언저리가 더 환하다
그 바람에 수건 아래 내려 깐 농부農婦의 근심이 들킨다
왜, 근심거리는 묶지 않고 그저 감추고만 있는지
왜, 시퍼런 삶은 속이 차오르도록 단단히 묶지 않는지
아낙들은 그걸 묶는 대신 스스로를 말뚝에다 묶는다
그 많은 한숨과 새털 같은 나날에도 다시 밭고랑에 나와 엎드린 것을 보면!
작년에 그랬듯이 올해도
자신들의 몸을 거기에 묶어 놓은 것이다
국밥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답, 초로初老의 두 남자가 고속도 휴게소 간이식당 문을 열고
나왔다 방금 그들은 각자 돈 8000원을 내 상대방이 먹은 식사 값을 지불하였다 김
씨는 박 씨를 대접했고 박 씨는 김 씨를 대접했다 헤어지기 전,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손을 마주잡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조금 전, 그들은 우연히 식당의 한 테이블에 앉아 국밥 한 그릇씩 시켜먹으며 눈
이 마주쳤다 서로의 처지를 한눈에 알아보아 의기투합했고 정이 통하여 술은 아니
지만 마음은 벌써 몇 순배나 돌고 돌았던 것이다
그들이 나눈 대화도 고작 몇 마디에 불과했다 서로의 행선지와 시절의 어려움과
나이 먹음에 대해 얘기했으나 그보다 더 많이는 미소 띤 얼굴로 서로 바라보는 것
으로 대신하였다 그 나이쯤이면 말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기 마련이다
물론 이처럼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가슴에서 우러난 진정한 호의로 식사 값을 서로 내고자 가벼운 실랑이를 벌였고,
계산대 앞에서 끝이 없을 것 같던 이 광경은 누군가 솔로몬의 지혜를 발견함으로써
쉬이 결말이 났던 것이다
“그럼, 내 밥값은 선생이 내시구려. 선생 밥값은 내가 내리다!”
그렇게 타협이 되어 실랑이는 끝나고 저마다 지갑을 열어 상대방의 국밥 값을 지
불하였다 초면의 그들은 서로 대접할 수 있어서 기뻤고 대접받음으로 해서 감사했다
......그리고 각자의 길을 갔다
모르는 사람과의 인사
저녁답에 모르는 사람과 인사했다
뭐 다른 일은 없었다
산에 오르기 위해 올라가고
한 여자 길 따라 내려왔다
나도 그도 챙이 긴 모자를 썼다
동류항이 있었다면 오로지 그뿐
길 옆 소나무 밑을 지날 때였다
서로 안 본 체하면서 보았는지
그녀가 가벼이 목례를 했다
나도 얼른 목례로 답했을 뿐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갑자기 공기가 뜨거워지고
주변이 수런거리더니
매미가 울음을 뚝 그치고
그늘마저 이리저리 흩어진다
그냥 스치며 목례한 것, 그뿐인데
손목을 잡거나 눈을 맞춘 것도 아닌데
무슨 은밀한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수상쩍어 하는 것은 웬일?
이놈들이 귀신 찜해 먹었나
나도 모르는 일을 어찌 알까
내 몸의 피 흐름이 좀 더 빨라지고
스치며 가는 길이 환해졌고
그녀 귓불이 조금 붉어졌을 뿐인데
아카시아 꽃향기 더 진해졌을 뿐, 그뿐인데…….
첫사랑
오늘도 첫사랑
내 사랑은 모두 첫사랑
열 번 스무 번 사랑도
오로지 첫사랑이려니
꼭 세상 처음과 같은 이 사랑
처음 만난 사람에 처음 느끼는
아침 같은 사랑
이 떨림! 이 눈부심!
그대를 향해 걸음마 하며
이제 막 망울로 맺히는
꽃봉오리 같은 이 사랑
소녀의 초경같이 붉고
향기로운 내 사랑은
모두 첫사랑이고
언제나 첫사랑이니
오늘도 그대는 나의 첫사랑!
백내白川
어느 해 여름 장마에 큰물이 지고 백내 황톳물이 학교 가는 길을 가로막아 그 도
도한 흐름 앞에 망연히 서 있을 때, 임께서 함께 건너자며 손 내밀었지요. 가늘고
긴 팔뚝으로 파르라니 또 다른 강이 흐르는데 그 손 잡고 둥둥 허리까지 차오는 물
건넜지요. 물 다 건너면 잡은 손 놓아야 된다는 생각에 아득히 손잡고 떠내려갔으
면 했지요. 우리 20리 등하굣길 둑에 핀 두 떨기 꽃처럼 한정 없이 떠내려가 먼먼
바다에 가 닿아도 좋으리라 생각했지요. 젖은 교복치마 내리며 임은 내게 미소 지
어 보이곤 돌아서 갔지요. 그때 우리가 건넌 게 그저 백내의 냇물뿐이었는지, 우리
인연의 한 굽이를 건너거나 이승의 한 생을 건넌 것은 아니었는지, 그 여름 손잡고
내 건너던 때 생각하며 멍하니 오래 서 있곤 하지요. 새하얀 팔뚝에 흐르던 파란
정맥의 강이 내게로 흘러 들어와 내 몸은 언제나 임 있는 쪽으로 열리는데, 임께선
언제 돌아와 이승의 못다 건넌 내 마저 건너려는지, 혼자서는 못 가 닿을 피안으로
임 손잡고 건너갈 꿈꾸며 아직도 까까머리 중학생은 그 냇가에 서 있는데…….
민둥산에서 하룻밤
저기 웬 수도승인가,
머리 빡빡 깎고 장좌불와長坐不臥 하네
저기 웬 늙은 소인가
천천히 되새김질하며
하늘 아래 누워 노을을 뱉고 있네
오랜 수행이 빚은 모습
가릴 것도 치장할 것도 없이
곳곳에 바위를 앉혀 중심을 잡네
표정은 있되 변화는 없고
산은 있으되 숲은 없으니
바람 불어도 고요함을 지키네
묵언정진黙言精進이 쌓은 내공으로
무심무량無心無量의 경지에 오르니
안이 더 깊고 큰 山
언제나 느긋하고 넉넉한 품으로
인자함과 기다림을 가르치고
억만년 억새를 풀어 키우며
안으로 절벽을 감춘 山
떠오른 달을 목말 태우고
별들의 길마로 지워진
아름다운 민둥산에서 하룻밤!
눈雪
하늘에도 삶이 있어
벼랑 끝에 내몰린 생들이
뛰어내리고 있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아득한 절망으로의 투신
처음은 캄캄하다가
하얗게 질리며
눈은 눈감고 내려
땅에서도 밟히는 흰 눈이 된다
하늘에서 땅으로 유배된
가여운 영혼들
사람들이여, 발밑의
눈을 함부로 밟지 마라
밀려난 자의 마지막 사랑으로
지상의 헐벗은 것들 덮어주고
이윽고 한 모금 눈물로 녹아
목마른 것들을 적시고 간다
|박방희|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85년부터 무크지『일꾼의 땅』과 『민의』『실천문학』등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이후 동시, 동화, 소설, 수필, 시조 부문 신인상을 받거나 신춘문예 당선 또는
추천되었다. 푸른문학상, 새벗문학상, 불교아동문학작가상, 방정환문학상, 우리나라좋은
동시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사)한국시조시인협회상(신인상)등을 수상하고 그외 문예지
게재 우수작품상과 아르코 창작기금 지원도 수회 받았다. 시집과 동시집, 시조집, 수상집 등
24권의 작품집이 있고 최근 금복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했다. 현재 마천산 자락에서 전업
작가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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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
2인 1조가 되어 낭송하시면 더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