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페넬로페의 인내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로 떠나던 그날, 페넬로페는 갓 결혼한 새색시나 다름없었고 아들 텔레마코스는 아직 어머니의 품에서 겨우 젖을 떼던 갓난아기였다. 그러나 그 후로 십 년의 전쟁이 흘렀고, 다시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남편의 소식조차 없이 흘러갔다. 스무 해에 가까운 그 긴 세월 동안, 페넬로페는 홀로 이타카의 궁전을 지키며 남편이 살아 돌아오리라는 한 가닥 믿음만을 붙잡고 버텨왔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오디세우스가 어딘가의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 수군거렸지만, 그녀만은 그 소문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트로이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다른 장수들이 하나둘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서, 이타카는 물론 인근 섬의 귀족 가문 젊은이들이 하나둘 페넬로페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오디세우스의 왕국은 비옥한 땅과 풍족한 재산을 지닌 매력적인 자리였고, 홀로 남은 아름다운 왕비 페넬로페는 그들에게 더없이 탐나는 존재였다. 처음에는 몇몇에 불과했던 구혼자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침내는 백여 명이 넘는 무리가 되어 궁전에 눌러앉기에 이르렀다.
이 무례한 자들은 페넬로페가 자신들 중 하나를 남편으로 선택하기 전까지는 결코 물러나지 않겠노라 버티며, 매일같이 오디세우스의 궁전에서 잔치를 벌였다. 그들은 왕의 소와 돼지와 염소를 마구잡이로 잡아 배를 채웠고, 귀한 포도주 창고를 거리낌 없이 축냈다. 궁전의 하녀들 가운데 일부를 유혹하여 타락시키기까지 하는 등, 그들의 오만방자함은 날이 갈수록 도를 넘어섰다. 페넬로페는 그런 그들의 무례함을 지켜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지만, 힘없는 여인의 몸으로 그들을 강제로 내쫓을 방법이 없었다.
페넬로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지혜를 짜냈다. 그녀는 구혼자들을 불러 모아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연로한 시아버지 라에르테스가 훗날 세상을 떠났을 때 입힐 수의를 자신이 손수 짜야 하니, 그 옷감을 다 완성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 일을 끝내지 않은 채 재혼한다면, 시아버지의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르는 셈이 되니 이는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명분이었다. 구혼자들은 마지못해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약속에는 페넬로페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비밀이 숨어 있었다. 그녀는 낮 동안에는 시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부지런히 베틀 앞에 앉아 수의를 짜나갔다. 하지만 밤이 깊어 모두가 잠든 뒤에는 몰래 횃불을 밝히고, 낮에 짜놓은 옷감의 실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풀어냈다. 그렇게 낮에 짜고 밤에 풀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그녀는 겉으로는 부지런히 일하는 듯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결코 그 옷감을 완성하지 않은 채 시간을 붙잡아 두었다. 이 기막힌 계책 덕분에 그녀는 무려 삼 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동안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매일 밤 홀로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
그러나 완벽해 보였던 그녀의 계책도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궁전의 시녀들 중 한 명이 구혼자들과 내통하며 그 비밀을 몰래 일러바친 것이다. 어느 날 밤, 구혼자들이 불시에 그녀의 방으로 들이닥쳤을 때, 마침 페넬로페는 촛불 아래서 낮에 짠 옷감을 다시 풀어내고 있는 현장을 그대로 들키고 말았다. 그녀의 삼 년에 걸친 지혜로운 속임수는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구혼자들은 격노하며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거세게 몰아붙였고, 그녀는 결국 그 수의를 완성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다.
하지만 계책이 발각된 이후에도 페넬로페는 결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겉으로는 구혼자들의 압박에 못 이기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새로운 구실과 지혜를 짜내어 최종 선택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뒤로 미루었다. 그녀는 밤마다 자신의 침실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이름을 되뇌었다. 남편이 이십 년 가까이 소식조차 없다는 사실은 세간의 눈으로 보면 이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페넬로페의 가슴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꺼지지 않는 한 줄기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지혜롭고 용맹한 사람이었음을, 그리고 그가 반드시 살아서 이 궁전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무렵 아들 텔레마코스는 이미 어엿한 청년으로 자라나 있었다. 아버지 없이 홀로 자란 그는 어머니를 향한 구혼자들의 무례함을 지켜보며 깊은 분노와 무력감에 시달렸지만, 아직 어린 나이 탓에 그들을 힘으로 몰아낼 수도 없는 처지였다. 마침내 그는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고자 아테나 여신의 도움을 받아 몰래 배를 타고 필로스와 스파르타 등지로 먼 여행을 떠났다. 아들마저 자리를 비운 궁전에서, 페넬로페는 이제 그야말로 홀로 그 모든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구혼자들이 아들의 목숨까지 노리고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을 때는 걱정과 두려움에 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페넬로페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아침 궁전의 살림을 살피고, 늙은 유모 에우리클레이아와 몇몇 충직한 하인들에게 의지하며 흔들림 없이 궁을 지켜나갔다. 밤이면 홀로 방에 앉아 남편과 함께했던 짧았던 신혼의 나날을 떠올리고, 그가 전쟁터로 떠나던 마지막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며 그리움을 삭였다. 때로는 꿈속에서 남편의 환영을 보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신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희망의 징표라 믿고 싶어했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지만, 페넬로페는 그 오랜 기다림 속에서도 자신의 정절과 지혜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구혼자들의 재물과 권세에 흔들리지 않았고, 그들의 위협과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의 그 끈질긴 인내와 흔들림 없는 믿음이야말로, 어쩌면 바다 저편에서 온갖 시련을 헤쳐온 남편 오디세우스의 지혜와 용기에 견줄 만한 것이었다. 궁전 안 오만한 자들의 술렁임 속에서도,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굳건하게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댓글 열녀가 따로 없네~~
이 소설을 읽는다,
오디세이 영화를 본다.
다시 이 소설을 읽는다.
이게 순서 인듯 합니다.
그래도 영화를 먼저 보고 이 글을 읽으니 영화의 모든 장면이 다시 떠올라서 너무 좋습니다.
731부대에 이어서 아침마다 기다리는 읽을거리 입니다.
당연히 두분께 감사드리지요.
감사합니다
미리 읽어 보고 영화를 보면 더 좋은데
나도 영화보기전에 가족에게 미리 신화 줄거리를 설명해주고
관람하니 이해가 간다고 했어요,
영화는 시간을 뛰어넘고 장소를 뛰어넘는 장면이 많아서
혼란스럽지요
8장 20절까지가 오디세이 영화와 일치합니다
이 영화는 기본이 2번은 보아야 한다고 하던데
@이광춘 맞아요,
귀하의 글을 다 읽고 영화 한번 더 갈까 고민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