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위안부 속임수 내가 봤다” 日지도층 앞 작심 연설 (25)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관심
생전의 JP가 중앙일보에 현대사 증언을 연재했던 2015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이었다. 1965년 양국 수교는 곡절과 파란의 역사였다. 김종필(JP) 중앙정보부장은 61년 이케다 총리와 비밀회동, 62년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돌파구를 마련한다. JP는 한·일 수교에 담긴 협력과 우호를 양국 전중(戰中)세대의 작품으로 회고한다. 그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등 일본 전후(戰後) 지도층이 전중세대의 고뇌와 결단에 어이없는 상처를 내고 있다고 비판한다. JP는 2005년 양국 수교 40주년 때 이야기로 증언을 시작한다. 그는 격정적으로 과거를 회고하면서 오늘을 돌파할 경륜과 지혜를 내놓는다.
2005년 6월 3일 도쿄 게이단렌(經團連)회관의 강연이 떠오른다. 그 행사는 일본의 정·재계 인사, 정부의 국장급 이상 관료, 언론사 대표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 초청강연’이었다.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讀賣) 회장이 마련하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가 나와 함께 초청된 자리다. 나는 현역 정치인일 때 묻어두었던 가슴속 얘기를 40분간 쏟아냈다. 전후세대가 모르는 과거사를 얘기해 줬다.
“올해(※2005년) 일본인들은 일·러 전쟁 승리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그 승리가 식민지로 직진(直進)하는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외부의 지배와 침략을 당해 본 경험이 드물기 때문에, 특히 지도층 인사들은 강자·지배자·가해자의 시각과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중들은 외교적 수사를 억제하고 역사 인식으로 바로 들어간 내 얘기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여러분의 영웅이겠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침략의 발상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에겐 메이지 유신의 원훈(元勳)이지만 한국인에겐 침략의 원흉(元兇)으로 불립니다. 일본과 아시아 국가 사이엔 국경을 넘으면 영웅이 역도(逆徒)가 되고 역도가 영웅이 되는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 현대사 소사전: 메이지유신(明治維新·1868년)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將軍) 체제를 무너뜨리고 왕정(천황) 복고를 이룩한 변혁. 메이지 정권은 학제·징병령·조세 개정 등 개혁을 추진하고, 서구 선진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여 근대국가로 탈바꿈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고, 중국(청나라)과 러시아의 전쟁에서 차례로 승리했다.
장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나는 “올해는 고종의 황후인 민비가 일본의 미우라 공사 일당에 의해 참살된 지 110년 되는 해입니다. 이런 일이 일본의 황거(皇居)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시면 한국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역사적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설을 마쳤는데 행사장은 조용했다. 충격을 받은 듯 모두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현역에서 정치를 할 때 ‘언젠가는 가슴은 아프겠지만 일본 사람들에게 직설법으로 이런 얘기를 해야겠다’는 뜻을 품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해야 할 때를 가려야 하는 법이다. 이 시점은 내가 정계를 떠난 지 얼마 안 됐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일본의 지도층이어서 한마디하면 일반 국민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때가 왔다는 생각으로 마음먹고 연설을 했다.
日총리 면전에 “돈 많이 내라”…나라 일으킬 밑천 필요했다 (26)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관심
1961년 가을, 고민이 깊어갔다. 혁명정부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나라의 빈곤을 몰아내고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해법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다. 때마침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11월 14일 정상회담을 하자고 공식 초청했다. 나는 박 의장의 방미를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 협상 타개와 연계하려 했다. 오랜 시간 속에 숙성된 생각이었다. ‘나라를 일으키려면 밑천이 있어야 한다. 밑천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대일(對日) 청구권뿐이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극비리에 중앙정보부 일본 라인을 통해 나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일본 총리의 면담을 추진시켰다. 박정희 의장에게는 일이 거의 성사된 단계에서 보고드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일절 모르게 했다. 내가 이렇게 비밀을 유지한 까닭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외국 총리를 만나는 외교 행위에 비밀을 다루는 국가 정보기관의 장이 나설 성격이 못 되는 것이었다. 한·일 회담 재개 같은 민감한 문제가 사전에 새나가면 꼭 가타부타하는 사람들이 생겨 일을 그르치게 하는 것도 보안을 지켰던 이유였다. 박 최고의장 옆에는 벌써부터 재간을 부리며 일일이 반대할 이유를 찾아내 문제를 일으키는 측근들이 생겼다.
🔎 인물 소사전: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1899~1965)
제 5, 6, 7차 한·일 회담 당시 일본 총리(1960~64년). 히로시마 출신으로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했다. 1925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대장성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재무·통산장관을 지내고 1960년 자민당 총재에 취임, 같은 해 총리에 올랐다. 일본 고도성장의 기초를 닦고, 안보조약을 기본노선으로 하는 친미정책을 추진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비밀회동에 이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정상회담을 통해 한·일 회담에 속도를 냈다.
61년 10월 24일 도쿄 왕궁 앞에 새로 지은 뉴 팔레스라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옥상에 올라가 봤는데 그 앞 도로가 줄지어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장관(壯觀)이었다. 오다이바(お台場)란 동네를 보니 집집마다 지붕 위에 안테나가 직립(直立)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부러웠다. ‘어떤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반드시 이런 나라를 만들겠다. 기필코 경제성장을 이루겠다’는 결기가 일었다.
1961년 11월 11일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왼쪽 둘째)이 일본 총리 관저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왼쪽) 등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오른쪽은 제6차 한·일 회담에 참석 중이던 정일영 대표. 박 의장은 이튿날 이케다 총리와 그의 집무실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한·일 국교 정상화 현안을 조속히 타결하는 데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이튿날 오전 11시 일본 국회의사당에 있는 총리실에서 이케다 총리를 만났다. 나는 “11월 중순에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에 가시게 됐습니다. 박 의장이 방미하는 길에 도쿄에 들러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우리 혁명과업 중 하나입니다. 회담을 위한 회담이 아니라 해결을 위한 회담을 해야겠습니다”고 용건을 얘기했다. 이케다 총리는 “한·일 회담은 양국의 앞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박 의장께서 도쿄에 오시면 국빈으로 잘 모시겠습니다”고 답했다.
내가 다시 “두 분의 만남을 위해 제가 먼저 와서 길을 깔아드리는 셈입니다. 그러니 이젠 총리의 친서를 휴대한 특사를 한국에 보내 박 의장의 일본 방문을 정식으로 초청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