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내기 그얘 열일곱살일때 우린 참 다정했었다.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가깝게 사랑을 하면 연애한다고 소문이나서 꼭 결혼을 해야만 되는 줄 알았었다.
그래서 나는 그얘와 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멈췄거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우리집이 너무 가난해서 그랬었다.크면은 가난만은 면해야 한다는 생각. 각박관념은
무엇보다도 철이들면서 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기에 때문이다. 그얘와 결혼하면 우리도 가난한데
우리둘은 가난을 벗어나갈 정도의 생활력 그러니까 기본이 잡혀지지 않아서 그얘가 좋긴 하지만
우선은 나는 시골을 떨쳐나가 서울로 어떻게든 가려고만 했었다.
제일하고 싶은 건 극장의 영화광고 그리는 게 꿈이였는 데 기회가 오지를 않했다.
그시절 우리고향서천에는 극장이 하나 있었는 데 그 극장에서 영화광고를 그리는 분이 오도바이를 타고 다니는게
멋이 있어 보였었다. 또 나는 그런 미술은 소질이 있다고 충분히 그정도의 그림은 그릴수 있다고 그림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신문배달 할때다 새벽에 아침먹고 있으면 신문지국장이라는 큰 형님의 키큰
친구분이 높은 7호차 자전거를 타고 오셔서 집앞에서 때르릉 때르릉 소리를 내면 달려나가 자전거안장 앞 차대에
앉아서 산모퉁이 왜길도 떨어지지않고 1시간정도 달려서 면소재지 계룡리 버스정거장에서 장항에서 오는 신문을
받아서 재정리접어서 50여부 겨드랑에 끼고 5.6게부락을 다니며 신문 배달을 하고 저녁때 집에 돌아오면 그얘는
저만한 지동생을 업고 우리집에 와서 기다리다 반갑게 맞아주곤 했었다
그러니까 이맘때 보리꽃이 필무렵이다. 그얘를 만나면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둘이는 달빛을 받으며
집뒤 언덕넘어 묘마당으로 가서 잔디밭에 앉아 달빛에 빛나는 서해바다.때론 뛰여노는 물고기들이 비늘에서
발사되는 천연광채를 바라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했던지 새벽녁에야 그 얘 집 마당에
서서 방에 들어가는것을 보고 나는 우리집으로 오곤 했었다.
어제 우리산우회제204회 정기산행여행에 성원해주신 회원님 동호인 대전시민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지난 2002년도 3월부터 "인간으생명의숲으로산우회" 를 창립한다고 서울에 근무하면서도 일찍 퇴근하여 대전
특허청에 가서 산우회명칭 특허를 내느라 몇번을 다녔었고 그 해 3월4월 사전 예비모임을 두번을 거쳐서 기억코
옛 새서울 호텔에서 발대식겸 창립총회를 거쳐서 첫산행은 소백산을 등산 했습니다.
그래도 나름 그때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서 산우회를 발족하였기에 흔들림 없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제 남해미조항 멸치축제관광트레킹 여러분의 협조로 원만히 끝냈습니다. 모처럼 먹어보는 멸치회라서 그런지
그런대로 맛이 상큼하고 좋았습니다. 모두들 맛있다고 말씀들을 하셨으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17년의 끝마무리는 돌아오는 차내에서 백두산에 다녀오면서 사가지고 온 중국술 일명 정력주로 1.2호차
다니며 권하는 것으로 흥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재밋게 돌아와 흔적을 올리는 것도 부족하지만 회장인 저의 몫으로 생각합니다.
열일곱살 먹었던 그때 그 여자얘는 지금 잘 살고 있습니다.공무원으로 시집을 가고 싶었던 그얘 원래 심성이
착하고 부지런하며 남을 어려워하는 성격으로 자식들도 훌륭하게 성장하여 국가사회의 일환으로 열심히 산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흔히들 인생은 정답이 없다고 말들을..저도 그 말을 자주쓰곤 합니다.
저는 원래 모순덩어리로 이런 글을 써도 될련지 모르지만 ! 그러나 인생은 한번지나면 다시 돌릴수 없기에 순간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꼭 좋은 일이.
복이 들어온다고 합니다.그래서 우리 산우회를 위해서 제가 근력이 있는 데 까지 누가 회장을 해도 지금보다
더 멋지게 운영되도록 돕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 얘처럼 우리산우회도 열일곱살을 넘었으니 더 성숙하게
회원님동호인께 사랑하겠습니다. 누구나 쉽게 오셔서 여유를 기지시고 삶의 멋을 창출하도록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사랑합니다.
2019년5월6일 남해미조항 멸치축제관광트레킹에 다녀와서
인간은생명의숲으로산우회장 홍 종 희 흔적을 남깁니다.
(2019년5 월8 일 발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