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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李花 원문보기 글쓴이: 이강석
중종대왕 이 역은
1488 년 무신년 성종 19 년 3 월 5 일 기사일에
성종대왕의 차남으로 대궐에서 태어났다 ( 원숭이띠 )
부왕 성종이 32 세에 얻은 아들이다
7 살에 진성대군에 봉되고 그 해 부왕 성종이 38 세로 승하하였다
모친은 성종 계비 정현왕후 파평 윤씨로 우의정 윤 호의 여식이다
19 세 때 1506 년 9 월 2 일 반정군에 추대되어 조선 제 11 대왕으로 등극하였다
중종은 세 번 왕비를 맞이 하였다
첫 배위는 단경왕후 거창 신씨다
중종이 진성대군시절 잠저에서
1499 년 연산 5 년 12 살에 맞이 한 조강지처로 좌의정 신 수근의 여식이다
진성대군 장인 신 수근은 연산군의 장인 영의정 신 승선의 아들로
음보로 관직에 나와 정승된 사람이다
연산군은 자신의 처남 신 수근을 몹시 총애 하였다고 전한다
신씨의 조부 신승선은 연산군의 장인이며
세종의 4 남 임영대군의 사위이기도 하다
단경왕후는 중종보다 1 살 연상으로
1487 년 정미년 성종 18 년 1 월 14 일생이다 ( 양띠 )
1506 년 9 월 2 일 20 세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패하고 남편이 보위에 오르자 그 날 왕비가 되었다
며칠 뒤 9 월 6 일 (9 일 ) 연산군의 부인 신씨의 조카라는 이유로
공신들이 억지로 왕과 이혼 시켰다
왕과 사이가 좋았던 신씨는 매일 인왕산에 올라가
치마를 바위에 펼쳐 놓고 임금을 그리워 하였으나 끝내 연락을 받지 못하였다
소생없이 1577 년 정사년 명종 12 년 정사년
12 월 7 일 병술일에 71 세로 졸하였다
능은 온릉으로 양주군 장흥에 있다
재배 장경왕후 파평 윤씨는
파원부원군 윤 여필의 여식으로 왕 보다 3 살 어리다.
1491 년 성종 22 년 신해년 7 월 6 일 경진일생으로
한양 호현방에서 태어났다 (돼지띠 )
1506 년 중종이 즉위하고 후궁을 선발 할 때
병인년 16 세에 후궁으로 선발되어 숙의 첩지를 받았다.
이듬 해 17세에 왕비로 책봉 되었다
윤씨는 성품이 착하여 시어머니 정현왕후와 중종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대개 반정공신들의 양녀들이 었던
중종 후궁들에 휩 싸여 기를 펴지 못 했다.
1515 년 중종 10 년 을해년에 중종의 원자 ( 훗날 인종 )를 낳고
산후풍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일이 이미 어그러진 것을 알고 임금이 왕비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말하시오 하니
은혜를 입음이 지극히 크니 다시 말씀 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장경왕후 파평윤씨는 원자를 낳고
일주일 후 25 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남매를 남기고 가기에 너무나 한스러웠던지
왕비의 시신은 죽은지 여러날 지났으나 염 하기에는 체온이 산 사람 같아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소생으로
인종대왕___조선 제 12 대왕이다. 중종의 원자이다.
효혜공주___연성위 김 희에게 시집 갔다 김 안로의 아들이다
김 안로는 중종조 간신으로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김 안로는 인종을 보호 한다는 명목으로 권력을 쥐고 농단하였다
낳자 마자 모친을 잃은 인종은 누님을 무척 의지 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공주가 네 살때 모친을 잃었고 동생 인종과 우애가 각별했다
장경왕후 윤씨가가 죽은 뒤 한 때
첫 배위 단경왕후 신씨를 다시 복위 하자는 의론이 있었으나
반정공신들이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아들을 낳아 임금 되면 보복이 두려워서 였다
삼배 문정왕후 파평 윤씨
1501 년 연산 7 년 신유년 10 월 22 일 정묘일생으로
파산부원군 윤 지임의 여식이다 ( 닭띠 )
1517 년 정축년 중종 12 년
17 세에 태평관에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 보다 13 살 어리다
1544 년 44 세에 중종이 승하하여 과부되고
1565 년 을축년 명종 20 년 4 월 7 일 계유일
65 세로 궁중 소덕당에서 졸하였다
아들 명종이 12 세에 즉위하여 대비로 수렴첨정하였다
불교와 미신을 숭상하여 국고를 낭비한다는 지탄을 받았다
친정 동생 윤원형등과 국정을 농단 한다는 평을 들었다
인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능은 서울시 노원구 태릉이다 7 월 17 일에 장사 지냈다
소생으로
명종대왕___조선 제 13 대왕이다
의혜공주___청원위 한 경록에게 시집 갔다
효순공주____능원군 구 사안에게 시집 갔다
경현공주___영천위 신 의에게 시집 갔다
신 의는 신숙주의 5 대 손이다 조부 신 항이 성종의 부마이다
신 항은 연산군과 절친하였다
부마의 부친 신 수경은
문정왕후의 오라버니 윤원로와 함께 왕실을 이간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신 의도 평판이 나빴다
인순공주___일찍 죽었다 문정왕후 소생 공주들은 초호화 저택에 살았다고 한다
후궁 소생
경빈 박씨소생__경빈은 상주 출신으로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반정공신 박원종이 양녀 삼아
궁중에 들여 보낸 사람으로 미모가 출중하였다고 전한다
경빈은 세자인 인종이 자신의 소생 복성군 보다 어려 복성군을 세자로
추대 하려 모사를 꾸미다 발칵 되어 아들과 함께 사사 되었다
사위는 맞아 죽고 옹주는 폐서인 되었다
복성군___명종은 복성군의 양자로 하성군을 지목하여 대를 잇고
제사 지내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선조대왕이다
선조는 파양하고 다시 명종의 양자가 되어 왕 위에 올랐다
이런 일로 이 때 부터 왕실에 대한 적통시비가 일어나 신뢰가 떨어지기 시작 했다
복성군은 행실이 아주 나빠 백성들의 지탄을 받았다
혜순옹주__
혜정옹주___당성위 홍 려에게 시집 갔다
숙의 홍씨 소생
해안군
희빈 홍씨 소생___희빈은 중종반정공신 홍 경주의 여식으로
기묘사화 즉 낙엽에 꿀을 바른 사건 조광조 축출과 관련있다
금원군
봉성군 이 완____중종의 8 자이다 총명하고 어질며 효성스러웠다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2 년 지나 사형 당하였다
창빈 안씨 소생___창빈은 안산 안씨로 집안이 미천 했으나
부친 안 탄대와 근신하고 삼가하여 평판이 좋았다
중종이 승하하자 당시 대궐 법도에 따라 3 년이 지나자
후궁처소 인수사로 나가 살아야 했는데 문정왕후의 특명으로 대궐에서
살았다
영양군 이 거
덕흥대원군 이 초___조선 14 대왕 선조대왕의 생부다
명종대왕은 후사가 없어 중종대왕의 손주들을 자주 궁궐에 불러다 가르쳤는데
그 중 창빈 안씨 소생 덕흥군 3 형제가 명종의 총애를 받았고
그 중에서도 막내 하성군이 뛰어나므로
왕비 인순왕후 심씨와 남몰래 양자 삼기로 약속 하였다
그 하성군이 조선 제 14 대왕 선조이고
덕흥군은 임금의 아버지라 덕흥대원군에 추승 된 것이다
명종대왕은 덕흥군 아들들을 만나고 난 뒤 꼭
덕흥군은 참 복인이야 했다고 전한다
정신옹주___청천위 한 경우에게 시집 갔다
숙의 이씨 소생
덕양군
정순옹주___여성위 송 인에게 시집 갔다
송 인 은 학식이 깊고 인품이 뛰어나 선조대왕이 아끼고 자문하고 우대 하였다
선조시대 초에 퇴계 이 황이 당대 최고 명필로 인정 하여 유명 해졌다
역대 부마중 이런 사람은 드물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의 고모인 여산 송씨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아버지 남편 아들 즉 삼종이 모두 영의정과 평안도 관찰사 지내고 평생
복을 누리고 할 일 다한 여성으로 세계여성열전에 이름이 올라갔다
숙원 김씨소생
숙정옹주___능창위 구 한에게 시집 갔다
정릉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소재 중종대왕릉이다
부모의 묘 선릉 동편에 있다
처음 고양 희릉에 장사 지냈으나
명종 17 년 9 월에 현재 위치로 이장하였다
중종은 성종의 제 2 자로
무신년 1488 년 성종 19 년3 월 5 일 기사일 대궐에서 태어났다
1544 년 갑진년 11 월 25 일 57 세로 승하 재위 39 년이다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가 공희라 공희대왕이라 한다
7 살 때 부왕이 승하 하여 이복형 연산군이 즉위하였으므로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냈다
그나마 첫 배위 거창 신군부인이 연산군의 처 조카로 무사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연산군은 배위 신씨와 처남들을 몹시 사랑 했다고 전한다
중종반정이 일어 났을 때
우의정 김 수동의 명을 받고 반정군이 제일먼저 진성대군집으로 몰려가 호위 하였다
군마의 소란에 놀란 대군이 칼을 빼들고 자결하려 하니
군부인 신씨가 소매를 붙들고 만류하며 말하기를
만일 군사의 말머리가 우리집을 향해 있다면 우리는 이제 죽음이 있을 뿐이고
말과 군인이 집을 등지고 바깥 쪽을 바라 보고 있으면
공자님을 호위 하러 온 것 입니다 알아 보고 난 뒤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하여 종을 시켜 문틈으로 엿 보게 하였다
그 시각 이미 신군부인의 친정 아버지 좌의정 신 수근과
삼촌 형조판서 신 수영등은 반정에 협조 하지 않아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영리한 신씨는 진성대군과 사이가 좋기로 소문났고
시어머니 정현왕대비에게도 효성이 지극하여 평판이 좋았었다
그러나 중종이 즉위하자마자 공신들이 죄인의 가족이라 신씨를 폐서인 시켜
궁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다
열 아홉살의 어린 중종은
그대들이 아뢴 일이 매우 당연한 줄 알지만 조강지처인데 어찌하리오하였다
반정군이 신들도 이미 헤아린 것이오나
종묘사직의 큰 일에 대해 어찌 하겠습니까
빨리 결단하시고 지체 마소서 하며 다그쳤다
( 중종 반정 공신들의 횡포는 도가 지나쳐 민심을 잃었다
당시 대신중 가장 민심을 얻고 있던 김 수동에게
가서 반정을 알리고 협조를 부탁하니
내 목 부터 베라고 책상 위에 목을 뉘었다
김 수동은 진성대군을 옹립하였다는 말에 대궐에 입궐하여
반정군이 미처 손 쓰지 못한 진성대군 사저를 호위케 하고
연산군에게도 공손한 예를 갖추었다
동요된 민심은 김 수동이 협조 하고 박원종이 사퇴 하였다는 말에
크게 무마 되었으나 뒤에도 공신들의 횡포가 극심하였다
나중에는 백성들도 보위에 오르고 오래 도록
그 들을 제압하지 못하는 중종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 했다 )
이 에 어린 왕이 두려워 종묘사직이 지중한데
어찌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겠느냐 마땅히 중의에 따르겠다 하고 전교를 내렸다
하여 왕비 신씨는 그날 밤으로 임금과 헤어져
세조의 사위 하성위 정현조 ( 정인지 아들 )의 집으로 쫓겨 났다
얼마 후 부터는 영희전 별궁으로 옮겨 살았다
신씨는 대궐에서 반드시 임금이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 보며
그리워 할 줄 알고 인근 인왕산 바위에 올라가 자신의 치마를 바위에
펼쳐 놓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또 임금은 명나라 사신이 오면 모화관에서 접견하면서
그 틈에 근처 신씨 집에 자신의 애마를 보냈다
그러면 신씨는 꼭 중종이 좋아했던 우유를 넣은 타락죽을
직접 쑤워 손에 들어 직접 먹여 보내곤 했다
공신들이 다 죽었건만 더 무서운 문정왕후가 왕비로 들어와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하고 중종이 12 년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중종은 성품이 어질고 효성 스럽고 부지런하고 사치를 싫어하고 검소 하며
유람이나 구경 소리를 좋아 하지 않았다
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페위되고 성종의 제 2자라 하여
그 들의 추대로 조선 제 11 대 왕으로 등극 하였다
중종반정 주역은 지중추부사 박원종__
누님이 성종의 형 월산대군처로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패륜아 연산군이 이 큰 어머니를 겁탈하여
임신 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자 박원종이 대노하여 반정을 결심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박원종은 성종임금의 친 형 월산대군 ( 성종과 3 살차이 )과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 ( 성종보다 8 살아래 )의 처남이기도 하다
이조참판 성 희안__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반정을 치밀 하게 계획 한 사람이다
이조판서 유 순정 그리고 군기시첨정 박 영문
수원부사 장 정 사복시 첨정 홍 경주등이 있다
반정공신들이 그 날 대궐에 진입 하기전에 먼저
연산군의 측근 임사홍등과 왕비 피붙이
좌의정신 수근 신 수영형제등을 목 베었다
그 들은 모두 음보로 판서를 역임 하였는데
부친 신 승선 처럼 근신 하지 않고 교만하고 방자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신 수근 형제는 연산군과 진성대군 둘 중 하나를 선택 하라고
다그치는 반정군에게 의리를 무시 할 수 없다고 말하여 죽음을 맞았다
그 들을 도륙한 사람은 군졸 이 심인데 얼굴과 군복이 피 투성이였으나
공을 증거 삼으려고 삼일 동안 갈아 입지 않고 활보하고 다니니
모두 추하게 여겼다
1515 년 을해년 중종 10 년 중종에겐 경사가 겹친 한 해 였다.
원자를 얻었고 알성시에서 조광조를 등용하여
그 동안 자신과 왕실을 능멸하고 겁박해 온
부패세력 반정공신들을 견제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암 조 광조는 한양 조씨로 34 세에 알성문과 을과에 합격하였다
그는 얼굴이 옥과 같이 청수하고 아름다웠다고 전한다
성리학자 김 굉필에게 수학하고 성리학의 대가가 되어
일찌기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그는 중종에게 철인 군주주의 이론을 강의하며
왕도정치를 열어 갈 것을 주청 하였다
아울러 왕 부터 혁신적으로 솔선수범할 것을 주청 드렸다
그는 임금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517 년 중종 12 년 홍문관 교리로 있으면서
일종의 민간 자치 규율인 여씨향약을 전국에 실시케 하였다.
또 1518 년 중종 13 년 부제학으로 있을 때
소격서를 폐지 하여 찬사 받았다
소격서는 왕실의 기도처로 국고를
크게 낭비 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당시 불교와 미신이 왕실서 부터 널리 숭상되어 사회에
끼치는 폐단이 매우 컸는데 왕실이 앞장서서 지탄 받고 있었다
1519 년 중종 14 년 대사헌이 되어 현량과를 실시 하여
30 대 신진 사림을 대거 등용하고 훈구파는 능력이 있어도 외직으로 보냈다
또 중종반정공신 책록과정에서
거의 공훈이 없는 76 명 까지 보상 하는 바람에 국고가 탕진 된 것이라 하여
그 들의 위훈을 삭제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 하여
훈구파의 원한을 사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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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종도 자신에게도 너무 감당키 어려운 요구를 하는 조 광조의 언행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대궐 후원에 주초위왕이라는
글씨가 새겨 진 나뭇잎 하나가 후궁 홍씨 시녀에게
발견되어 임금에게 전달되게 되었다
주자와 초자가 합치면 조자가 되는데
이는 앞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면서 기고만장한 조 광조가 역심을 품고
꾸민 연극이라고 임금을 부추겨 의심을 증폭시켰다
이간에 넘어 간 임금은 뚜렷한 물증이 없는 이상한 사건을
훈구파에게 맡겨 마침내 조 광조를 능주에 유배 시켰다 사사 하였다
이를 기묘사화라 하는데
공신 홍경주가 낙엽에 꿀로 주초위왕이라는 글씨를 써서
벌레가 갉아 먹기를 기다렸다 사건을 일으켜
조 광조에게 복수 한 것이다
이 일로 개혁은 4 년만에 물 거품이 되었고
계속 훈구와 신진이 번갈아 가며 갈등하고 대립 하는 습속이 더 커져 갔다
매우 총애 하여 국정을 맡기더니 변덕을 부려 죄가 없는데
지켜주지 않고 하루 아침에 사사 시키니 임금은 인심을 잃고 말았다
그릇이 작은 임금을 만나 애석하게 조 광조가 갔지만
새로운 나라를 열어 가야 한다는 여망은 더욱 널리 퍼져 갔다
중종은 조 광조와 함께 신바람 나는 정치를 한 4 년 동안
업적도 많이 쌓고 선조대에 원한도 많이 풀고 신원 복위 시킨 일이 부지기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