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트기 전, 새벽부터 김포공항은 제주도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한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여유롭게 도착했구나 라는 생각이 하마터면 비행기 못 탈 뻔했구나 라고 생각이 바뀌기 까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틈바구니를 간신히 뚫고 지정된 좌석에 앉고 나서야 아 나 이제 정말 제주도로 떠다는구나 라는걸 체감할 수 있었고 이륙 후 창밖으로 보이는 몽환적인 모습과 간간히 SNS에서 봤던 수국들이 수북이 제주도를 덮고 있는 사진들을 봐가며 한껏 기분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서귀포로 향하는 버스를 바로 타고 지체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차창 밖으로 드문드문 펴 있는 수국들을 보며 이제 진짜 여름이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중간에 걸려온 전화에 당분간 육지로의 귀환은 불가함을 알린 채 오롯이 이곳에서의 순간들을 즐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체크인 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아 있어 빠르게 짐을 맡긴 후 이번 여행의 첫 행선지인 혼인지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혼인지에 가까워질수록 길가에 수국들의 개체수가 늘어나고 있었고 동시에 내 기대 또한 동반 상승하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1) 혼인지에 깃든 이야기
지난 3월 무작정 제주도의 벚꽃을 보기 위해 찾았던 삼성혈을 포함해 혼인지와 함께 '탐라국'의 건국 설화가 담겨 있는 장소로 유명하다. 삼성혈이 탐라국의 시조들이 나타난 장소라면 혼인지는 건국 시조들의 결혼에 관련된 설화가 깃든 공간이며, 조성된 관람로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그들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 자리하고 있어 혼인지에 대한 설명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이곳을 찾은 관람객들이 편하게 오갈 수 있도록 삼공 주추 원각으로 향하는 길 따라 수국이 만발해 있었고 그 주변으로 방대한 규모의 연못이 조성돼 있었다. 거의 바람이 불지 않아 거울과 같은 모습을 눈에 고스란히 담을 수 있었고 길 따라 빼곡히 식재된 수국들의 향연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순간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내게 선물하기 충분했다. 덩달아 싱그럽게 내뿜는 청아한 모습들이 주변에 흩어진 산소들을 한 움큼 움켜쥔 채 수국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혼인지의 하이라이트 삼공주 추원각 주변으로 이미 수국들이 한창 절정을 뽐내고 있었다. 탐라국의 시조들과 혼인을 올린 이들을 모시기 위한 공간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설화 속에 깃든 이야기와 함께 수국들이 뿜어내는 청아함은 묘한 조화를 자아내며 공간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 줬고 수국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동안 천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의 결혼기념일을 함께 기념할 수 있도록 자연스레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듯했다.
(2) 수국의 성지
이곳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깊숙한 지역까지 돌아본 후 다시 혼인지 초입 부분으로 들어와 주변을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의 분위기를 담아간다.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수국으로 뒤덮인 이곳을 전세 낼 수 있다면 삼공 주추 원각으로 향하는 관람로를 따라 웨딩마치를 올려 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분위기가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기분 좋게 만들어 준다. 덩달아 관람로를 걷는 사람들의 이어지는 탄성은 한껏 고조된 내 기분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혼인지의 수국들은 관람로 초입을 지나 드넓은 연못이 형성된 부분을 시작으로 다른 색의 수국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싱그러움과 청아함으로 주변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보통 수국을 식재하고 난 다음 토양의 산성 농도에 따라 색의 변화 여부를 관찰할 수 있다고 하지만 여기선 관련 사실들을 잊을 정도로 통일된 색감 덕분에 현실로부터 잠시 벗어나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끽한 채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오는 향긋한 꽃 향기가 기분을 더욱 좋게 만들어 줬다.
보통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고 기대치가 높아졌을 때 기대가 충족되지 못한다면 실망하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SNS에서 사진과 영상으로 보던 그 순간 이상의 분위기를 이곳에서 만끽할 수 있었고 오히려 사진과 영상으로 이 순간을 100% 담을 수 없어 정말 아쉽다는 생각이 많이 들 정도로 주변 어디를 돌아봐도 온갖 곳들이 포토 스폿으로 가득했다.
산소 덩어리를 한 껏 물고 쉽게 놓아주지 않던 꽃망울들이 싱그러운 꽃 향기를 더 맑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문득 그리스를 여행할 적 산토리니 이아 마을에서 느꼈던 그날의 분위기가 내 안에서 되살아 나는 듯했다. 비수기에 찾은 산토리니는 맑은 하늘 대신 먹구름이 에게 해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라 마을과 이아 마을 전반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청량한 분위기는 성수기 시즌 산토리니 분위기를 생각나게 해 줬으며 왜 이곳에서 이온음료 촬영이 이뤄졌는지를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주변을 카메라에 담아 가며 문득 이곳에서 이온음료 촬영이 진행된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수국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고개를 잠시 치켜 드니 보이는 맑은 하늘까지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킬 수 있는 요소들은 이곳에 전부 모여 있었다. 더불어 내 시선과 손가락도 함께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어느덧 다시 추원각에 도달할 수 있었다.
(3) 사진 촬영을 위한 필수 코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기대한 만큼 또는 그 이상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곳이었다. SNS에 새로운 사진을 올리기 위해 스마트폰 카메라를 필두로 DSLR과 미러리스를 대동한 사람들이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한 분주함 마저 이곳의 분위기를 한껏 들뜨게 만들어 줬다. 더불어 제주도에서 한창 활동 중인 사진작가들을 대동한 채 웨딩 스냅부터 각종 콘셉트의 스냅사진을 담기 위한 사람들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었는데 서로 같은 구도를 마주한 채 서로를 배려하며 본인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 또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나처럼 혼인지를 혼자 찾은 여행객들 또한 심심치 않게 마주할 수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혼자 괜찮아 보이는 포인트를 찾아 돌아다니던 와중에 사람들의 촬영 부탁에 스마트폰을 건네받고 사진을 담아 주던 와중에 스마트 폰 삼각대를 활용해 의상까지 준비한 채 인생 샷을 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촬영 직전 삼각대를 활용해 구도를 확인한 후 스스로 그 프레임 안에 들어가 열심히 포즈를 취하는 그 모습과 순간을 담고자 하는 열정이 무더위를 뚫고 내가 있는 곳까지 전달되는 듯했다.
(4) 만족스러웠던 여행의 시작
시작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아침 일찍 제주도에 도착한 후 체크인 전 짐을 맡긴 직후 도착한 혼인지는 내 모든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절정의 기량을 가감 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더불어 흐르는 바람결 따라 잔잔하게 다가오는 예감 이번 제주도 여행은 왠지 너무 좋을 것 같다는 생각과 더불어 앞으로 여행이 내게 있어 어떤 의미로 자리하게 될지 수만 가지 행복한 생각들이 쉴 새 없이 스쳐 지나갔다.
더불어 한라산이 선사해 주는 고립감은 서귀포 주변을 한창 쏘다니던 내게 이곳을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자세히 순간을 묘사할 수는 없었지만 작년 여름 영주 부석사에서 마주했던 그 수국과 제주도의 여름 그 초입에 서서 절정의 순간에 마주했던 순간의 수국은 같은 듯 180도 완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바닷바람 혹은 이곳에 깃든 설화 때문인지 괜스레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혼인지에서부터 시작된 5일 동안의 제주도 일정, 벌써부터 어떤 모습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