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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무더위 속에서 너무 수고하고 애쓰셨는데 이 저녁에 서로를 향해서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6월달부터 이러면 올해는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건지 이 세계적인 지금 기후가 우리도 남 얘기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참 들어 교회 안에 이렇게 있는데 목양실에 에어컨을 켜놔서 그래도 이제 시원함을 유지하는데 화장실을 한 번 갔다 오면 땀이 나는 거 비닐하우스 같은 우리 교회의 구조가 그래서 이런 날씨에 밖에서 지금 움직이시는 우리 동력자들은 얼마나 또 고생이 많으실까 여러 가지 마음이 쓰이는 날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아무튼 더위는 지금 우리의 힘으로는 뭔가를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한 물 많이 드시고 또 가끔 소금도 또 드시고 이게 또 여름에 이겨낼 수 있는 거라고 하니까 한번 이 시간들을 이제 앞으로 이제 시작인데 잘 이겨낼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벌써 우리가 개척 이제 7년째를 가고 있는데요. 제가 개척하고 개척을 이제 담임 목회자로 개척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우리 교회 성도들 말고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우연히 만나면 저에게 보통 뭘 물어볼까요? 사람들이 부흥하고 있나요? 성도 많이 늘었나요?
이 말이 어떤 말인지 예전에는 몰랐는데 개척하고 나서 그래도 초반에는 약간 분위기가 이렇게 우리가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세워지려고 하는 분위기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저도 신나게 얘 크게 부음은 아니지만 조금씩 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제가 표현했다가 코로나19의 목회자 세계에서는요 금기어가 돼버렸어요. 이 말이 그래서 서로 만났을 때 어떻게 부응하고 있나 이렇게 예전에 어른들도 이 젊은 목사들 만나면 그런 식으로 그 교회 잘 되고 있다는 말 들어 이런 식으로 덕담식으로 말했던 말들도 이제는 그 교회는 괜찮아 이런 식의 이제 말로 좀 바뀌어버린 것 같아요.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여러분들은 목회자가 아니어서 그 교회 좀 괜찮아 어떻게 부응하고 있어 이런 말 여러분들은 혹시 이런 질문을 안 받아보셨나요?
근데 우리가 여기에서 한번 이 부흥이라는 말이 뭔지를 좀 한번 오늘은 점검을 해보려고 합니다. 저 교회는 참 부흥하네라고 하는 우리가 일상적인 이 부흥이라는 말을 쓸 때 이 부흥이라는 말이 지금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 보통 부흥한다 그러면 인원적인 걸 먼저 떠올리고 저 교회는 얼마나 모여 주일 예배에 몇 명이 모이는지 또 헌금은 얼마나 되는지 교회 건물은 또 얼마나 규모가 있는지 프로그램은 어떠한지 교회가 또 어떠한 사회적인 사명을 감당하는지 또 이와 달리 예배의 열기가 뜨겁다든지 또는 예배를 통해서 많은 이들이 위로를 받는다든지 또 도전을 받는다든지 이런 것들을 약간 우리는 부흥의 특징이라고 생각을 하고 보통 부응하냐 또 부흥을 우리가 기대할 때도 약간 이런 쪽의 내용을 가지고 부응을 외칠 때가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부흥이라는 말에 약간 감성주의도 섞여 있는데요. 감성주의가 뭐냐면 예배를 드리면서 오늘 예배 때는 나는 좀 뭔가 이렇게 이렇게 가슴이 찌릿했어 뭐 이렇게 오늘 말씀에는 뭔가 이렇게 좀 도전이 됐어 아니면 말씀 가운데 좀 나에게 위로가 됐어 뭐 이런 식으로 아니면 예배 가운데 뭔가 새로운 에너지가 공급되는 것을 느꼈어라고 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성도들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물론 중요하죠. 그런데 이것을 하나의 부흥의 조건으로 이야기한다는 건 뭘 이야기하는 거냐면 내가 무엇을 느꼈느냐 그것이 부흥의 하나의 요소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으니까요. 교회 나오면 말씀 안에서 좀 위로가 되고 평안함을 얻기를 원하고 또 소망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좀 인원이 이렇게 작은 인원에서 조금 더 인원이 몇 명만 늘어도 여러분 우리 예배드릴 때 새벽 예배 때 한 사람만 새로운 분이 나타나도 그때 그날은 좀 힘이 나요. 수요일 저녁에도 한번 안 보이는 분이 보이면 더 이렇게 힘이 나기도 합니다. 주일도 마찬가지 두 주 전에 우람이가 탁 나타났을 때 우리 막 다들 막 확 환호했잖아요. 한 사람만 더 늘어도 우리가 막 이렇게 환호하는데 사람이 늘면 우리도 기쁘죠.
근데 중요한 건 심리적으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것도 이게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그리고 다 같이 뭔가 동일한 행동을 하면 거기서 얻어지는 에너지가 있다는 겁니다. 요즘 대형 교회가 점점 더 채워지는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 있어요.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리면서 그쪽에 계속 그런 사회적인 심리학적인 요소에 사람들의 더 이렇게 위로받는 듯한 그리고 뭔가 자기가 원하는 일들이 백화점 안에 있는 것처럼 다 누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를 하면 좀 부흥한다. 분위기가 좀 좋아지면 부흥한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어쩌면 그래서 수련회도 작은 교회들은 각자 자체적으로 한두 명을 데리고 수련회를 못하고 연합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몇 명이라도 더 모여가지고 같이 같이 찬양하고 같이 말씀 붙들고 분위기를 좀 쇄신하면 은혜를 받을 수 있으니까 근데 그걸 그 자체가 잘못됐다는 게 아닙니다.
근데 과연 하나님이 숫자에 연연하는 분이실까 외형에 연연하는 분이실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작은 교회 개척할 이유가 하나도 없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겉모양을 보는 분이 아니십니다. 호세아 6장 6절에 보면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라 불살라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화려한 제사가 아니라는 거예요.
막 휘향찬란하게 막 오케스트라가 동원된 어떤 그런 뭔가 사람들에게 확 감탄을 일으킬 만한 그런 예배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그 사랑을 느끼면 느낄수록 나도 하나님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화려하고 멋진 예배 좋죠. 교회가 정말 채워지고 더 세워져서 더 화려하게 더 멋지게 더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서 예배드리는 거 좋습니다.
근데 여러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감격했다면 그 뒤가 더 중요한 겁니다.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의 삶의 모습에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은 거기에 더 집중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됐다면 그 사랑을 가지고 삶에서 그 사랑을 나누고 하나님이 원하는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가?
하나님은 거기에 관심이 있으시지 교회에 나와가지고 예배드리는 인원 자리가 채워지고 좀 더 갖춰지고, 여기에 관심이 하나님은 더 있지 않다는 겁니다. 아무리 우리가 화려하고 감동적인 예배를 드렸다 해도 우리의 일상에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가 힘들다라고 표현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이사야 1장 11절에서 14절을 제가 세 번역으로 읽어드릴게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재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순양의 번제물과 살찐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숯, 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오이로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재물을 가지고 오지 말아라. 다 쓸데없는 것이다. 분양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놓고 못된 짓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화로운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을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 내가 너무 지쳤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엄청나게 많은 재물들을 막 가지고 와 가서 번제를 드리고 막 화려하게 예배를 드리는데, 지금 하나님이 그 예배에 뭐라고 말하세요? 역겹다 지겹다. 짐이 된다. 내가 지친다. 하지 마라.
하나님이 예배를 싫어해서 그러시는 걸까요? 구약 성경의 핵심은요. 예배와 제사입니다. 예배와 제사를 강조하신 하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원하는 건 예배와 제사를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더욱 알고 그들의 삶 가운데 걸맞는 그 삶의 자리에 가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 하나님의 사랑을 펼치는 확장시키는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근데 삶은 전혀 변화되지 않고 예배만 화려하고 거창하고 뭔가 재물만 잔뜩 드리는 그런 것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예배는요. 내가 감동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으로 내가 변화되는 것이 예배의 주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좀 예배에 대해서 내가 은혜받고 내가 뭔가 평안을 얻고 내가 응답을 받고 나 중심적으로 예배가 흘러왔던 부분들에 대해서도 돌이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또 부흥에 대한 잘못된 주의 외형주의입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뭔가 좀 더 규모가 있어야 우리가 뭔가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좀 더 늘어나야 뭔가 으샤으샤도 되고 또 돈이 좀 모여야 그 돈 가지고 뭔가를 할 수 있습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니죠. 근데 성경에 하나님은 숫자하고 전혀 상관없는 분으로 보이십니다.
기드온의 300용사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 잘 알죠. 미디안에 정말 모래알 같은 그 수많은 군인들이 그들을 쳐들어왔을 때 그들이 모인 군사는 3만 2천 명 위대한 군대와는 대접할 수조차 없는 작은 숫자였지만 하나님은 그마저도 많다고 하십니다. 너무 많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숫자로 이기면 자기들이 잘라서 이겼다고 스스로 자랑할까 하노라 하면서 돌려보내시면서 두 번에 걸쳐서 돌려보내고 나니까 300명이 남았죠.
인간적으로는 300대 16만 5천 그 모래밭과 같은 숫자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승리하게 하셨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을 때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력한 나라여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시대의 세계를 주름잡고 있어서 이스라엘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그 민족이 가장 적은 숫자였고 가장 약한 민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적은 숫자, 오히려 세상적으로 볼 때 화려하거나 힘 있어 보이지 않은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길 원합니다.
여러분 고대 신전, 그리스 이탈리아 이런 신전을 가보면 규모가 엄청나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이제 사진으로만 봐봤는데 그 규모가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 만들어놓은 그 규모를 성경에서 보니까 높이가 30m 정도 돼요. 신상 자체가 그 왕의 신상이. 근데 심지어 그걸 다 금으로 만들어 지금 시세로 따지면 아마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을 것 같습니다. 이집트 왕 18왕조의 오벨리스크도 높이가 33m, 우리가 알고 있는 스핑크스도 20m. 뭐 아무튼 고대 신전 뭔가 석상 이런 것들 보면 규모가 정말 이렇게 가면 입이 떡 부러질 정도로 규모가 상당해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이 거할 곧 성막을 지으라고 말하시는데요. 성막은 작은 텐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그 성막을 직접 설계하시고 설명하시잖아요. 근데 이 성막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여러분들 아십니까? 실제로 성막이 지어진 면적은요 약 20평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근데 그 성막에도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로 구분되잖아요. 지성서는 약 7평밖에 안 됩니다. 그 7평 안에 언약궤라고 하는 그것은 불과 길이가 1m, 너비가 5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 공간 어쩌면 세상적인 신정과 비교할 때 하나님은 너무나도 작고 초라한 그 공간에 본인이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전과 비교할 때 하나님이 있는 곳은 정말 작은 텐트에 불과한 그런 모습에 불과합니다. 근데 하나님은 그러니까 한마디로 규모에 관심이 없으신 거예요. 자신의 영광을 인간이 만들어낸 뭔가를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는 겁니다. 금박으로 도색한다고 자신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예수님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할 때 겨자씨에 비유했다는 걸 우리는 기억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건 규모가 아니라 규모가 아니고 그 안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커도 생명이 없으면 죽고 썩어버리는 것들이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작아도 겨자씨만한 씨앗이 생명이 있으면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고 새들이 깃들일 정도의 큰 모습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그러면 부흥이란 성경적인 부흥이란 무엇일까? 우리 한번 따라해볼까요?
부흥이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부흥이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멘 예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인간의 힘, 인간의 규모,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 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상에 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 인간들이나 어떤 모습이 아닌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부흥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말하는 부응했어라고 하는 그 개념 안에 들어있었던 규모 있는 많은 숫자 많은 재정 큰 건물 외형적으로 보이는 이것이 참된 부흥이 아니라 작더라도 좀 초라해 보이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이 드러내 보이시는 곳이라면 그곳이 부응하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는 부흥을 꿈꾸고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묵상하면서 아멘 지난주에는 제가 데살로니카 이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이 저에게 위로를 주신 게 뭐냐면 개척하고 나서 막 그 부담감이 저를 짓누를 때가 참 많거든요. 특히 이제 막 저를 짓누를 때가 특히 뭔가 이렇게 숫자적인 부분들도 저의 눈에 이렇게 보일 때가 있잖아요. 그리고 누군가가 또 이렇게 물어볼 때 그런 질문들이 저를 찌를 때가 있어요. 마치 그것이 다 제 책임인 것 같고 제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고 그래서 늘 죄송한 마음도 있습니다.
근데 그런데 하나님이 지난주에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나누면서 주신 말씀이 뭐냐 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계획하셨다. 교회는 하나님이 운영하신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실 것이다. 이 사실이 너무 큰 위로가 됐어요.
근데 오늘 말씀도요. 부흥에 대한 걸 다시 한 번 우리가 정립해 보면서 제가 다음 주에 이제 이 부흥 2편으로 그러면 우리가 도대체 부응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이 부분을 다룰 텐데 부흥에 대한 우리 잘못된 개념들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나니까 참된 부흥이 뭔가 아 그래 지금 내가 한 사람을 잡고 양육하고 있는 이 한 사람의 생명이 생명력 있게 살아나면 이게 우리 교회의 부흥이지 우리 다음 세대 아이들 중에 정말 멀리 떠나 있던 한 생명이 주님 앞에 돌아오고 그 영원히 주님을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그것이 우리 교회의 부흥이지 지금 재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상황적으로 어렵고 아픈 이들이 많고 이런 과정 속에서도 우리 안에 참된 믿음의 고백들이 일어난다면 그게 부흥이지 그런 하나님의 음성을 마치 듣는 것 같아요.
물론 숫자적인 부흥 우리 교회가 앞으로 더 건강하게 세워져서 하나님께서 이 원하는 일들을 마음껏 감당하길 원하는 것 그 마음 저도 당연히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우리 안의 생명력,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드러내게 하는 공동체 우리 나 신앙인이 되고 있는가 좀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좀 깊이 생각하고 우리 안에 잘못된 부흥에 대한 개념들이 정리되어지고 잘못된 추구점이 아니라 정말 생명력이 살아나고 우리 안에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고 더욱더 놀라운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우리 공동체 가운데 풍성하여서 저 교회는 자꾸 삼각 교회인데 뭔가 생동력이 있어 저 목사는 저 장로는 저 권사는 저 집사는 뭔가 좀 다른데 그런 생동력이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귀한 부흥의 역사가 우리 공동체 가운데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