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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50. [역경의 열매] 남진 (1-27)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들은 팝송에 완전히 빠져
친구가 부른 ‘오 캐럴’에 귀가 번쩍…동네 레코드가게 달려가 당장 구입 집에오면 네다섯시간씩 따라불러
가수 남진 장로가 지난달 16일 경기도 용인 새에덴교회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다.
언론인이 될 수도 있었다. 장남이었기에 목포일보 발행인이었던 아버지의 대를 이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원체 노래가 좋았다. 그래서 인생길이 바뀌었다.
나는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27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목포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지금은 폐교된 경복중학교에 다녔다. 1950년대 한국에도 서양의 팝음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들은 팝송은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닐 세다카의 ‘오! 캐럴’이었다. 가사가 이랬다. “오! 캐럴, 아임 소 인 러브 위드 유!(Oh! carol, I'm so in love with you!· 오! 캐럴, 나는 너와 사랑에 빠졌어!)”
이 노래를 처음 접한 것은 친구 덕분이었다. 하루는 친구가 학교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참 재미있어 보였다.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여서 “어떤 노래냐”고 물으니 “요즘 유행하는 ‘오 캐럴’”이라 했다. 그날 동네 레코드가게로 달려갔다. 레코드가게 주인이 “요즘 이 노래가 더 유행한다”며 몇 가지 노래를 추천해줬다. 폴 앵카의 ‘다이애나’라는 노래였다. 레코드판을 사서 날마다 들었다. 전축이 귀한 시대였지만 유복한 환경이어서 가능했다.
학교에 갔다 집에 오면 전축부터 틀었다. 팝송을 좋아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심취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데뷔작인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노래에 빠져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구해서 들었다. 흑인 가수 냇 킹 콜의 ‘모나리자’도 좋았다.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앤디 윌리엄스와 펫 분의 노래도 들었다.
냇 킹 콜은 폐암으로 일찍 별세했다. 그는 미국성공회 로스앤젤레스교구 성제임스교회의 성가대원이었다. 흑인의 성가대 참여가 금지된 시기여서 냇 킹 콜 때문에 담임신부가 쫓겨난 적도 있다고 한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참 매력적이었는데 한국에선 가수 최희준의 목소리가 냇 킹 콜과 비슷했다. 그가 부른 ‘맨발의 청춘’이 바로 냇 킹 콜 스타일의 노래다. 최희준도 원래는 미8군 무대에 섰던 가수였다. 인기가수였던 패티 김과 현미도 미8군에서 노래했는데 냇 킹 콜의 노래를 많이 불렀다. 이들은 모두 처음에는 팝송을 부르던 가수였다.
학교에 다녀오면 하루 네다섯시간씩 노래를 듣고 따라불렀다. 공부는 하지 않고 노래에만 빠져 살았다. 지금도 그때처럼 노래가 좋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만드신 듯하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다. 나보다 더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 부르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도 나처럼 음악에 미치지는 않았다. 온종일 듣고 부르고 그렇게까지는 않았다.
노래에 심취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얼굴은 성형할 수 있지만 발성은 인위적으로 고칠 수 없다. 좋은 목소리를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 같다. 연습을 하면 소리가 좋아질 수 있지만 특유의 목소리를 갖는 건 다르다. 이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정리=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 [역경의 열매] 남진 (1)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들은 팝송에 완전히 빠져
* [역경의 열매] 남진 (2) 서커스 열리면 수업 빼먹고 구경하며 따라다녀
* [역경의 열매] 남진 (3) 버릇 없어질까 늦둥이 장남에게 엄했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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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45년 전남 목포 출생. 목포고,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 ‘서울플레이보이’로 1965년 가수 데뷔, 1969~71년 월남 파병, 1971년 서울 시민회관 첫 리사이틀 공연, 2006년 대한민국가수협회 초대회장, 대표곡 ‘둥지’ ‘님과 함께’ ‘빈잔’ ‘울려고 내가 왔나’ 등.
***[역경의 열매] 남진 (2) 서커스 열리면 수업 빼먹고 구경하며 따라다녀
아버지 반대에도 연극영화과 진학, 가수 되겠다는 말에 교사 어머니 충격
남진 장로(오른쪽)가 서울 경복중학교 1학년 때 친구와 함께 사진을 촬영했다. 왼쪽 사진은 돌잔치 모습.
배우는 나의 또 다른 꿈이었다. 감사하게도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연극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음악과 함께 연극에도 빠져들었다.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서울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목포로 돌아와 목포고에 진학했다. 연극부에 가입해 연기를 배우며 크고 작은 무대에 올랐다. 전라도 콩쿠르대회에도 학교 대표로 출전했다. 아버지는 반대하셨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것도 영화배우를 꿈꿨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서커스가 유행이었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게 쉽지않은 시절이었다. 서커스는 연극에 신파, 악극, 쇼, 국악, 마술까지 망라한 종합 엔터테인먼트였다. 고등학생이 서커스를 보러 갔다 발각되면 퇴학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서커스가 열리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보러 갔다. 학교 수업도 빼먹을 정도였다.
노래하고 춤추며 코미디까지 하는 서커스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서커스를 보고나면 친구들과 함께 그대로 따라하곤 했다. 친구들은 똑같이 따라하지 못했지만 나는 달랐다. 그게 소질이었다. 어떤 작품을 봐도 신기하게 모두 기억이 났고 기가 막히게 흉내를 냈다.
가수 남일해의 쇼를 봤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빨간구두 아가씨’를 부른 남일해는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였다. 오직 그분만이 가수로 불렸다. 인기가수였던 남일과 이미자도 남일해에 비하면 무명에 가까웠다. 무대에선 남일해가 항상 마지막에 나와 노래를 불렀다. 이미자는 앞 순서였다. 최고의 스타가 공연의 마지막 순서를 장식하던 때였다.
쇼를 보러 다니는 나의 머릿속에는 온통 연극과 노래뿐이었다. 예능 말고 다른 분야에는 관심이 없었다. 교내 연극부에서는 극작가 차범석의 ‘시골’을 연습해 무대에 올렸다. 연극부를 좋아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콩쿠르대회에 나가면 학교마다 보름씩은 연습을 했다. 그럼 수업시간에 빠질 수 있었다. 공부하기 싫었던 나는 그게 좋아서 더 열심히 연극을 했다.
아버지(김문옥)는 집안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전형적인 옛날 어르신이었다. 국회의원, 목포일보 발행인, 정미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낸 아버지는 늘 바쁘기도 했다. 공부를 싫어하는 내게도 별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2남7녀 가운데 여섯째로 장남이었던 나의 교육은 모두 어머니에게 맡겼다.
장남이 가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꽤 충격을 받으셨을 것 같다. 그 시절에는 오직 공부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교사를 했던 어머니는 교육열이 높았다. 담임선생님과 교무주임, 교감선생님까지 아들의 가정교사로 둘 정도였다. 당시 목포에서 교감선생님까지 가정교사로 둔 학생은 내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공부를 정말 싫어했던 게 틀림없다. 공부를 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정교사가 방문하면 자리에 앉아는 있었다. 하지만 금세 머리가 아파왔다. 그렇게 열정을 쏟았는데도 공부를 하지 않으니까 어머니는 결국 장남의 공부를 포기하셨다. 대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며 도우셨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아프기 시작했던 아버지는 입원까지 하며 4년을 투병하셨다. 어머니는 아들이 걱정할까 봐 아버지가 아프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으셨다.
***[역경의 열매] 남진 (3) 버릇 없어질까 늦둥이 장남에게 엄했던 아버지
도정공장하며 신문사 사장·국회의원 등 부자였던 아버지 바빴던 모습만 기억
남진 장로의 아버지 김문옥 의원(사진 왼쪽)과 어머니 장기순 여사의 젊은 시절 모습.
아버지(김문옥·金文玉)는 1896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현 목상고등학교의 전신인 목포간이상업고를 졸업했다. 할아버지 때부터 집안에 곳간이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신용을 중시하고 강직한 분이었다. 쌀장사를 시작했는데 잘됐다. 이내 목포에서 제일 큰 도정공장을 운영했는데 이름이 ‘남일정미소’였다. 미국 포드사에서 만든 세단 자가용이 1953년 우리 집에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자가용을 타고 나갈 때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운전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집안이 성장하는 모습과 항상 바쁜 아버지의 모습이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전라남도곡물협회장과 전남정미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대한식량공사 전남지부장, 목포상공회의소 회장, 목포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될 때 참여해 전남도당 당원이 됐다. 1960년 현역이자 민주당 구파인 정중섭 전 의원을 꺾고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어렸을 때 집에는 조병옥 신익희 장면 선생과 박순천 여사가 종종 찾아왔다. 목포에 오면 하룻밤을 자고 가는 곳이 우리 집이었다. 그분들과 같이 한방에서 잔 기억도 있다. 그때 사진을 찍어놓았으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때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분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어렸던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어른들이 중요한 얘기를 했다는 느낌만 남아있다.
중학생 때다. 집에서 탁구를 하고 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상현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당시 30대였던 그분들에게 용돈을 주시곤 했다. 김 전 상임고문은 김 전 대통령이 운영하던 웅변학원에서 일했던 인연으로 동교동계 정치인이 됐고 6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어른들의 그런 인연을 어깨너머로 보아온 게 지금도 뜻 깊게 느껴진다.
그때의 인연 때문일까.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후에 청와대에 행사가 있으면 나를 부르곤 했다. 내 자리는 대통령이 앉는 헤드테이블에서 멀지 않은 테이블이었다. 하루는 대기업 회장들 사이에서 식사하는 내 모습이 머쓱해 보였는지 김 전 대통령이 나를 가리키며 “남진은 남씨가 아니고 김씨”라며 “정치인으로서 가장 큰 은혜를 받은 분이 남진의 부친”이라고 소개했다. 아버지가 1960년 목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때 김 전 대통령은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했다. 낙마했지만 이듬해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됐다.
아버지께 나는 50세에 얻은 늦둥이 장남이었다. 그래서일까. 안타깝게도 아버지와의 추억이 그리 많지 않다. 아버지는 항상 바빴다. 옛 어른들처럼 보수적이고 말수도 적었다. 한번도 내 엉덩이를 두드려주거나 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던 것 같다. ‘부잣집 아들이 오냐오냐 자라면 버릇이 없어진다’는 생각도 하셨던 것 같다. 아들에게 용돈도 주지 않고 늘 엄하셨다.
말썽꾸러기 장남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으셨을까. 내가 ‘공부파’였다면 아버지가 기뻐하셨을까. 이제는 알 방법이 없다. 아버지는 1966년 별세하셨다. 내가 가수로 성공하기 전인 대학생 때였다.
***[역경의 열매] 남진 (4) ‘엘리트 어머니’ 늦은 귀가엔 피가 나도록 회초리
말썽 부리고 공부 안하는 건 용서…1994년 돌아가신 뒤 그리움에 ‘어머님’ 노래 3년 동안 못불러
남진 장로의 어머니 장기순 여사(사진 오른쪽)가 아버지 김문옥 전 의원과 함께 돌을 맞이한 남 장로를 안고 있다.
어머니 장기순 여사는 1905년생으로 서울 진명여고의 전신인 진명여학교를 나오셨다. 전남에서 태어나 서울의 진명여학교에 다닐 정도였으면 인텔리 여성이라 불릴 만했다. 일본에서 유학한 뒤 고등학교 선생님까지 지낸 교육자셨다. 어머니는 1946년 중앙대의 전신인 중앙여대를 설립하고 학장이 된 임영신 여사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런 어머니였으니 늦둥이 장남인 날 얼마나 신경 썼겠는가. 아무리 해도 안 되니 ‘남진이는 공부로는 방법이 없겠구나’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내가 가수가 됐을 때 가장 열심히 지원한 분이 어머니였다. 나도 자식을 키워보니 어머니는 참 훌륭한 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게 내겐 행운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교육 모두를 어머니에게 일임했다. 언론인이자 정치인, 기업인으로 바빴기에 집에 오는 날이 많지 않았다. 늦둥이 귀한 아들이었지만 어머니는 나를 엄하게 키웠다. 혼도 많이 나고 매도 많이 맞았다. 학교에서 워낙 말썽꾸러기였으니 그럴 만했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면 모범생이 될 텐데 유독 나는 말썽꾸러기들과 어울려 지냈다. 축구부나 연극부원, 학교 깡패들과 친하게 지냈다. 학교에는 불우한 친구도 많았다.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게 예사였던 친구들이었다. 그런 친구들은 대궐 같았던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다.
어머니께서 나를 가장 엄하게 혼 낸 것은 집에 늦게 들어올 때였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날벼락이 쳤다. 그렇게 엄하지 않았다면 나도 친구들처럼 문제아가 되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아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봐주어도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것만큼은 양보하지 않으셨다. 커다란 회초리로 따끔하게 맞는데 피가 날 정도였다.
“어머님 오늘 하루를 어떻게 지내셨어요. 백날을 하루같이 이 못난 자식을 위해 손발이 금이 가고 잔주름이 굵어지신 어머님…”(남진의 노래 ‘어머님’ 중)
1994년 어머니께서 하늘나라로 돌아가시고는 3년 동안 ‘어머님’이라는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그 곡은 1986년 김중순씨가 작사하고 고봉산씨가 작곡했다. 마치 내 삶을 얘기하는 노래 같았다. KBS 가요무대에 나가면 꼭 부르던 노래였는데 감정이 북받치니 부를 수가 없었다. 공부하기 싫어하고 말썽꾸러기였던 나를 위해 고생한 어머니가 지금도 무척 그립다.
어머니는 불교 신자였다. 하지만 공부를 많이 한 분이어서 그런지 종교적으로는 자유로웠다. 어느 종교를 믿더라도 열심히만 믿으라고만 했지 절에 다녀야 한다는 말씀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 자애로운 어머니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연임이 틀림없다.
돌이켜 보건대 자식으로서 어머니에게 너무 큰 아픔을 드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은 세월이 지날수록 뼈에 사무쳤다. 지금도 어머니에 대한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 죄송한 마음뿐이다. 자식을 낳고 키워보니 어머니가 왜 날 키우다 쓰러지기까지 하셨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2남 7녀 중 여섯째인 내겐 누나들이 많다. 그중 제일 친한 누나는 바로 위 다섯째 누나다. 그 누나의 아들이 나보다 한 살 위다. 누나는 나처럼 예술을 좋아했다. 노래도 잘했는데 당시에는 점잖은 집 딸이 가수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수를 하지 않고 결혼을 했다. 내가 가수로 성장한 데는 다섯째 누나의 영향도 있었다.
***[역경의 열매] 남진 (5) 산장에서 부른 팝송 한 곡… “작곡가 소개 시켜줄게”
영화배우 꿈꾸며 단역으로 출연… 당시 남일해 히트곡 작곡가 소개 받아 노래학원 여학생에게 반해 등록
남진 장로(사진 왼쪽 두 번째)가 1965년 서울 중구 한동훈음악학원에서 가수 지망생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다. 오른쪽 두 번째는 가수 이상열씨.
처음에는 배우가 되고 싶어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당시 영화배우를 꿈꾸는 무명 신인들은 서울 충무로에 있는 대한극장에 모였다. 그곳 근처 다방들은 신인을 찾는 감독들이 집합하는 장소였다. 거기서 단역을 모아 영화가 만들곤 했다. 나도 그곳을 서성이다 캐스팅돼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한 친구가 “서울 강북구 우이동 산장에 가면 딸기밭이 있다”며 놀러 가자고 보채 따라갔다. 한참을 노니 어두워졌다. 내려오는데 한 산장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고 불빛이 반짝였다.
들어가니 샹들리에 아래서 남녀가 춤을 추고 있었다. 밴드는 블루스와 지터벅(지르박)을 연주했다. 함께 간 친구 중 하나는 목포방송 전속 가수를 할 정도로 소질이 있던 친구였다. 나는 레코드판을 따라 부르는 수준이었지만 그 친구는 가요를 제대로 했다. 인물도 좋고 노래도 잘했다.
산장 안이 난리가 났다. 내가 아니라 친구 때문이었다. 무대 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기가 막히게 했다. 앙코르가 나오고 2창, 3창이 이어졌다. 산장 주인은 맥주 한 상자를 선물로 내놓았다.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져 친구처럼 해보고 싶었다. 앞으로 나가 “나는 가요는 모르지만 팝송은 안다”며 냇 킹 콜의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 하는데 주인이 갑자기 찾아와 “노래 한 번 해볼래”라고 말했다. 친구와 나를 헷갈리는 줄 알았다. 주인이 “학생이 팝송 불렀잖아. 목소리가 특이한데 노래나 한번 해봐”라고 말했을 때 나를 지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화번호를 달라고 해서 별 기대감 없이 장난삼아 건넸다.
몇 개월이 지났을까. 어느 날 갑자기 “나 마스터요”라며 산장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이고,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라고 물으니 주인은 “좋은 작곡가를 만나서 널 얘기했다”며 “잠시 시간을 내서 보자”고 했다. 당시에는 어른의 부탁이라면 거절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서울 중구 을지로에 있는 명보극장 근처로 갔다. 파출소 2층에 카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동훈 선생님을 만났다. 당시 최고의 가수는 남일해였는데 그가 부른 ‘첫사랑 마도로스’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 곡을 작곡한 분이 한 선생님이었다.
카페에서 한 5분을 보냈을까.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남일해가 카페에 들어왔다. 한 선생님과 남일해는 30분쯤 신곡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으로 가까이서 남일해를 보는데 얼마나 뚫어지게 봤으면 그가 입었던 복장이 정확히 기억이 난다. 감색 바지에 빨간 양말, 낚싯줄 같은 가는 실로 짜인 프랑스산 옷을 입고 있었다.
남일해가 가고 나니 한 선생님이 내 자리로 왔다. 산장 주인이 나를 열심히 소개했다. 차를 마신 뒤 근처에 있던 한 선생님의 음악학원으로 갔다. 가요를 모르니 팝송을 한 소절 불렀다. 산장 주인은 “목소리가 참 괜찮다”며 한 선생님에게 노래를 배우라고 권했다.
그때만 해도 노래를 배울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내 또래 여학생 3명이 학원으로 올라왔다. 그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목포에서 올라온 지 1년도 안 된 내겐 여자친구가 없었다. 한눈에 그에게 반했다. 바로 학원에 등록했다. 여학생과 함께 차를 마시고 아이스크림이라도 먹겠다고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남진 (6) 선배 최희준의 팝송 스타일 흉내 낸 데뷔곡 실패
음악학원 1년 반 다니고 첫 앨범 “방송국서 왜 안 부르지…” 좌절, 레코드회사에서 전속 가수 제안
남진 장로(사진 왼쪽)가 1960년대 후반 가수 최희준과 함께 사진을 촬영했다. ‘맨발의 청춘’을 부른 최희준은 남 장로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65년 대학교 2학년에 다닐 때는 사회를 너무 몰랐다. 한동훈음악학원에서 1년 반을 연습하고 레코드판을 냈다. 판만 내면 방송에서 내보내주는 줄 알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방송은 나오지 않았다. 방송에 나오려면 PD와 연이 있어야 했지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일가친척 중에 연예인도 없는 데다 관례상 PD에게 돈봉투라도 건네야 했는데 누가 얘길 해줬어야 알지 그런 건 전혀 몰랐다.
판을 만들어 준 한동훈 선생님도 고지식한 분이었다. 여학교 음악 선생님이었는데 올곧은 분이었다. 돈봉투를 생각할 분이 아니었다. 데뷔는 늦어졌지만 정통파 음악가인 한 선생님에게 제대로 음악을 배웠다는 점은 감사했다. 한 선생님은 피아노를 잘 쳤고 한국 최초의 샹송 가수라 불리던 분이었다. 휘뚜루마뚜루 가르치는 게 아니라 기초부터 잘 다지며 가르쳤다.
당시 나는 발성연습을 하는 게 참 싫었다. 발성을 모르고서도 노래를 부를 수는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한 선생님은 어떻게든 나에게 발성부터 호흡까지 기초를 가르치려 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내 음악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한 선생님께 배운 기초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 선생님이 단순히 노래만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한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지금도 감사 드린다.
가요를 배울 때는 좋아하는 가수의 스타일도 따라서 배우게 된다. 지난해 별세한 최희준을 참 좋아했다. ‘맨발의 청춘’을 부른 최희준은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종점’ ‘하숙생’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등 발매하는 곡마다 히트를 했다. 그때는 최희준의 시대였다. 최희준은 팝송으로 단련된 가수였다.
초창기 내 음악에서 최희준을 빼놓을 수 없다. 가요를 불렀다기보다는 최희준의 노래를 따라 했다는 게 맞다. 최희준이 아니었다면 가요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요를 부르려 할 때마다 노래 자체가 삐걱거렸기 때문이다. 내 발성은 트로트 발성이라 보기 어렵다. 나훈아의 발성과도 전혀 다르다. 트로트 발성을 배우면 제대로 할 수가 없으니 팝송 스타일로 불렀다. 신인 가수들은 가요계 선배의 노래를 배워서 불러야 했던 때다. 그래야 노래를 할 수 있었다. 팝송을 불렀던 최희준의 노래를 듣고 가요가 좋아졌다.
나의 데뷔곡인 ‘서울 플레이보이’와 ‘쓸쓸한 크리스마스’가 최희준을 모창하며 부른 노래들이다. 내가 방송에서 노래를 부르니 최희준이 부르는 줄 알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최희준의 모창 가수로는 히트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너무 똑같았던 것이었다. 데뷔작은 처참히 실패했다. 좌절했다. 그러다 운명의 순간이 왔다.
1년 후 우연히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전속 가수 제안이 왔다. 레코드사를 찾아가 작사가 김중순을 만났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데 자주 만나자고 해 몇 번을 내리 만났다. 오아시스레코드는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뒤쪽에 있었다. 하루는 김중순과 중국집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 좋은 곡을 준비하니 네가 한 번 준비해 봐라”고 말했다. 대낮인데 자장면 먹고 남은 찌꺼기를 안주 삼아 빼갈(고량주)을 한참 마셨다. 그가 바로 훗날 최고의 작곡가 중 하나로 불리게 되는 김영광이었다.
***[역경의 열매] 남진 (7) “노래 제목이 퇴폐적”… 새 음반 금지 당해 낙향
너무 억울해 휴학하고 목포로…좌절에 빠져 하루하루 보내며 노래도 안 듣고 그만둘까 생각
1966년 신인 가수 시절 때의 남진 장로(오른쪽)의 모습. 왼쪽부터 가수 이상열 문주란씨.
1966년 작곡가 김영광은 무명이었다. 발매한 레코드판도 한두 개밖에 없었다.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일하려고 서울로 올라와 근처 여관을 잡아 놓고 있었다. 그가 날 여관으로 불러 가보니 기타가 하나 있었다. 기타를 연주하며 나에게 노래를 따라 해 보라고 했다. 자신이 만든 12곡 중 3곡을 나에게 맡긴다고 했다. 레코드판에 12곡이 들어가던 때였다.
그해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울려고 내가 왔나/ 섬아가씨’ 레코드판은 신인가수 격이었던 성태미 송춘희 성재희와 함께 3곡씩을 맡아 만든 앨범이었다. 무명이었던 내가 나름대로 유명세가 있던 이들과 함께 앨범 제작에 참여한 것이다. 내가 불렀던 곡은 ‘울려고 내가 왔나’와 ‘토요일 오후’ ‘연애 0번지’다. 연애 0번지의 경우 룸바 스타일의 곡이었다. ‘밤바 밤바 바밤바’ 리듬이 팝송과 같았다.
‘울려고 내가 왔나’는 트로트 스타일이다. 나는 당시 트로트를 불러본 적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한 달을 연습했다. 참 하기가 싫었다. 이 노래를 빼고 2곡만 부르면 안 되냐고 물을 정도였다. 김영광도 가수 지망생이나 다름없던 내가 3곡이나 부른다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며 직접 부르겠다고 했다.
몇 달이 지나 서울 중구 장충동의 녹음실로 가수들이 모였다. 김영광이 ‘울려고 내가 왔나’를 부르기 위해 마지막 차례로 녹음실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음이 높게 올라가지 않았다. 중성적인 목소리를 내는 소위 ‘옐로우 보이스’였다. 몇 번을 해도 안 되니 녹음실에 눈치가 보였다. 녹음실 예약하기가 쉽지 않던 때였다.
사람들은 “빨리빨리 녹음하자”며 그 곡을 내가 부르도록 떠밀었다. 이전에 이 곡으로 연습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노래를 부르는데 돌아가신 아버님이 생각났다. 부모님과의 추억이 떠올랐다. 감정이 북받쳐왔다. 감정을 담은 그 한 번의 노래로 녹음을 마칠 수 있었다.
새 레코드판이 나오자 해야 할 일은 방송국에 다니는 것이었다. 당시 라디오방송으로 첫째는 동아일보에서 운영하던 라디오방송국인 동아방송이었고 둘째는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 있던 CBS 기독교방송이었다. 방송국 PD들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곡을 소개하니 반응이 좋았다. 아침에 눈만 뜨면 방송국에 다니는 게 일이었다.
하루는 동아방송 음악 담당 PD가 ‘너 일루 와봐’ 해서 찾아갔다. 그 PD는 대뜸 “너 금지 당했어”라고 통보했다. “왜 금지입니까”라고 물으니 연애 0번지라는 곡의 제목이 퇴폐적이라고 했다. ‘무한’ 또는 ‘아픔’ 같은 심오한 뜻이 담겼든, 신체 특정 부위를 형상화했든 무조건 금지라고 했다. 어렸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0’이라는 숫자 하나 때문에 금지된 것이다. 사실 ‘0’에는 별 의미가 없었다. 맥이 빠져서일까. 그날 포장마차로 달려가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던 소주를 진탕 마셨다.
고향인 목포에 3개월 정도 내려가 있었다. 그때가 가을이었다. 학교는 휴학했다. 사회에 대해 무엇을 알았겠는가. 처음으로 사회생활의 아픔을 느꼈다. ‘숫자 0이란 무엇인가’ ‘이 곡이 왜 금지가 됐는가’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1번지 2번지는 재미가 없으니 0번지라 한 것인데 억울하기만 했다. ‘이런 게 사회구나’ 느끼며 좌절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노래를 그만둘까 생각도 했다. 어떤 노래든 아예 듣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남진 (8) ‘울려고 내가 왔나’ 인기 폭발하자 전국 순회공연
1968년 ‘마음이 고와야지’ 엘비스 창법으로 춤추며 노래… 10대 소녀팬 ‘오빠 부대’ 탄생
1966년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발매한 '울려고 내가 왔나' 레코드판. 당시 무명 가수였던 남진 장로는 아랫줄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이 앨범으로 남 장로는 일약 스타가 된다.
목포 바다는 포근했다. 가수는 폐가 생명이다. 어릴 때 목포에서 자주 수영을 했던 게 가수로서 큰 도움이 됐다. 냇가에서 ‘개헤엄’을 잘했다. 호남에서 납세자 순위 1위였던 아버지에겐 요트가 있었다. 아버지는 요트를 타고 여름이면 바다를 다녔다. 내가 지금 하루 70곡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어릴 적 바닷사람이었던 덕분이다.
겨울이 왔다.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불러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 살 때였다. 아들이 걱정됐던 어머니도 서울에 잠시 올라오셨다. “가수로 뜨고 있었는데 곡이 금지됐습니다”라는 말은 아들로서 참 하기 힘든 말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금일봉을 주었다. 그러곤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곡이 참 좋더라고 말씀해 주셨다.
사실 ‘울려고 내가 왔나’보다 ‘연애 0번지’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곡이었다. 하지만 금지곡이 됐으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의 위로에 용기를 얻어서일까. 다시 방송국에 가서 “이 트로트를 틀어주십시오”하고 부탁했다.
‘울려고 내가 왔나’는 이전의 트로트와 조금 달랐다. 딱히 정의하자면 ‘팝뽕짝’이다. 팝송 같으면서도 트로트 같은 노래였다. 그런데 그 곡이 당시 최고의 히트곡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PD들 사이에선 나에 대한 동정여론도 있었던 것 같다. 신인가수가 애써 준비한 노래가 금지곡이 된 게 불쌍해 보이지 않았을까. 프로그램마다 ‘울려고 내가 왔나’를 한 번씩 틀어줬는데 금세 폭발적인 반응이 왔다. 레코드 가게가 많던 서울 청계천이 난리가 났다는 얘기까지 들려왔다.
‘울려고 내가 왔나’는 대성공이었다. 청계천의 음반도매상에게서 ‘울려고 내가 왔나’로 레코드판 제목을 바꾸고 내 이름과 사진을 제일 크게 싣겠다는 연락이 왔다. 가수 남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건 그 곡에서부터였다.
‘연애 0번지’가 금지되지 않았다면 ‘울려고 내가 왔나’가 히트가 됐을까. 작곡가 김영광이 목이 아프지 않았다면 그 곡을 내가 부를 수 있었을까. ‘울려고 내가 왔나’는 연이어 일어난 우연이 만들어 낸 나의 인생곡이었다. 명성을 얻자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야간열차를 타고 대구나 광주에 내려가면 극장 PD를 소개받아 공연했다. 하루가 숨 가쁘게 흘러갔다.
‘울려고 내가 왔나’가 히트하자 다음 곡은 만들기가 어려웠다. 그게 유명 가수의 제일 큰 어려움이 아닐까 싶다. 천재 작곡가로 불리던 박춘석은 1966년 만났다. ‘가슴 아프게’가 박춘석과의 인연으로 나온 것이다. 박춘석을 만난 건 내 삶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이듬해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그 후 히트곡을 1년에 두세 곡씩 발표했다. ‘김포가도’ ‘별아 내 가슴에’ ‘너와 나’ ‘우수’ ‘가슴 아프게’ 등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냈다.
당시 팬들은 손뼉 치고 환호하고 그런 게 없었다. 남일해 등 가요 무대에 선 선배들은 모두 점잖은 분들이었다. 춤추는 가수는 팝송을 부르는 가수들뿐이었다. 가요를 부르는 가수들은 춤을 추지 않았다.
‘마음이 고와야지’는 1968년 처음 부른 노래다. 이 곡은 트위스트 느낌의 곡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창법, 무대 액션과 비슷하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나의 춤과 노래가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때 10대 소녀들이 ‘오빠’라며 나를 보고 환호했다. 소녀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빠 부대’의 첫 시작이었던 셈이다.
***[역경의 열매] 남진 (9) 영화 62편 주연 맡아… 여배우들과 스캔들 기사
빠르게 노래하고 춤 춘 최초 가수, 연영과 4학년 때 ‘신필름’과 계약 당시 발표한 노래가 거의 영화로
장로(왼쪽 위)가 1967년 출연한 영화 ‘가슴 아프게’의 포스터.
‘오빠 부대’라는 단어는 시사상식사전에도 수록돼 있다. 연예계나 스포츠계의 팬 집단을 일컫는다고 풀이한다. 1980년대 조용필이나 1990년대 서태지가 오빠 부대를 본격적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원조는 나라고 단언할 수 있다. 1966년부터 많은 여성 팬들이 나를 ‘오빠’라 부르며 환호했다. 작곡가 박춘석과 함께 ‘가슴 아프게’ ‘마음이 고와야지’ 등 고고리듬의 빠른 노래를 발표했을 때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빠른 노래가 없던 당시에 빠르게 노래하고 춤도 춘 최초의 가수였기 때문이다.
1967년 한양대 연극영화과 4학년 학생이었을 때 나는 ‘신필름’과 계약해 영화 ‘울려고 내가 왔나’를 촬영했다. 문희와 남정임이 상대 여배우였다. 당시 신문 인터뷰에서 나는 “좀처럼 영화배우가 될 기회가 없었다”며 “그래서 노래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노래는 제쳐두고 영화에 전념하겠다고도 했다. 미국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와 같이 가수로 떠 배우로 성공한 예가 외국에도 꽤 있었다.
워낙 인기가 있었으니 당시 내가 발표한 거의 모든 노래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울려고 내가 왔나’ ‘우수’ 등 70년대 중반까지 62편의 영화를 찍었다. 모두 주연을 맡았다. 가수로서 인기가 많으니 흥행이 됐고 연기도 썩 나쁘지 않았다. 영화 제의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뛰어난 영화배우가 되는 게 원래 꿈이었기에 열심히 연기했다.
많은 작품을 촬영했지만 50년 정도 지난 일이니 일일이 기억은 안 난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옛날 영화를 방영하는데 내가 나오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다. 다작을 했기에 이게 내 작품인지 다른 사람 작품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당시에는 영화 한 편을 찍는 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극영화과 학생이었기에 지금 봐도 연기를 못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옛날 영화는 이별을 소재로 한 슬픈 영화들이 많았다. 표정연기도 슬픈 표정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슬픈 표정 연기를 잘했다. 지금 보면 저 어린 나이에 슬픈 표정을 어떻게 연기했는지 대견스럽다. 요즘 연예계에서 스물 두세 살이면 아기처럼 보인다. 그 어린 나이에 연기와 노래를 모두 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동시 녹음이 아니라 후시녹음이어서 성우가 더빙을 했다는 사실이다. 동시녹음을 했다면 전라도 사투리를 쓰니 제대로 됐을 리가 없다. 옛날 영화의 남자 주연 배우 목소리를 들으면 발음이 참 중후하고 멋지다. 그런 목소리가 내게서 어떻게 나오겠는가. 당시 영화배우의 더빙은 남자 성우 이창완, 여자 성우 고은정이 대세였다. 멋있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배우 중 자기 목소리로 연기하는 사람은 몇 사람 안 됐다. 최무룡과 허장강 정도가 자기 목소리를 냈다. 김희갑은 70% 정도 본인이 목소리를 냈다. 나와 신성일은 성우의 덕을 많이 봤다.
여배우 문희, 남정임과는 스캔들 기사가 참 많이 나왔다. 연예 담당 기자들도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는 주간지도 거의 없고 ‘아리랑’ 등 월간지가 많았다. 스타라고 해봤자 나를 포함해 배우 신성일 등 몇 사람뿐이던 시절이었다. 요즘처럼 촬영 후 뒤풀이라도 같이하면 몰라도 그때는 뒤풀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서 스캔들 거리도 찾기 어려웠다. 그래도 ‘카더라’ 식의 스캔들 기사가 났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면 “문희의 인기가 상승했는데 인기를 손상하고 있다나” 식으로 추측성 어조가 많다. 하지만 그들과 연애를 하진 않았다.
***[역경의 열매] 남진 (10) 일본 오가며 영화 촬영… 연예인 세금 납부 1위
박춘석에게 받은 ‘지금 그 사람은’ 인기 얻자 라디오연속극·영화로… 극장 공연 땐 1000여명 서서 관람
남진 장로(왼쪽)와 작곡가 박춘석이 1970년대 초 함께 찍은 사진. 박춘석은 남진의 히트곡인 ‘가슴 아프게’ ‘빈잔’ ‘지금 그 사람은’ 등을 작곡했다.
1960년대는 천재 작곡가 박춘석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부른 ‘가슴 아프게’ ‘빈잔’을 비롯해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기러기 아빠’ ‘섬마을 선생님’ 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장르도 넘나들었다. 그는 7세 때부터 피아노를 친 클래식 피아니스트였고 재즈도 연주했다. 피아노를 접하기 어려웠던 시절 굉장한 선구자였던 셈이다.
나뿐 아니라 나훈아 패티김 문주란 하춘화 등 많은 이들이 박춘석의 곡을 받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음악 산업의 양대 산맥이었던 오아시스레코드와 지구레코드의 전속 작곡가를 했다. 2700여곡을 작곡하며 국내 대중가요계에선 가장 많은 곡을 작곡한 이로 알려져 있다.
1930년생인 박춘석은 20대인 1956년 ‘비 내리는 호남선’을 작곡하며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그해 이승만 전 대통령의 라이벌이었던 민주당 대선후보 신익희 선생이 호남선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하며 ‘비 내리는 호남선’은 신익희 선생의 추모곡이 됐다. 이 때문에 박춘석은 경찰의 조사도 받았다. 정치적 탄압을 받은 것이다. 신익희 선생이 별세하기 3개월 전에 쓰인 곡이었기에 오해는 풀렸다.
1967년 나의 히트곡인 ‘지금 그 사람은’ 역시 박춘석이 작곡한 노래다. 이 노래를 바탕으로 라디오연속극이 제작돼 방영되기도 했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접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대중들에게 라디오연속극은 인기가 많았다. 일본을 오가며 사랑을 쟁취하는 젊은이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감동했다.
곡과 라디오연속극이 모두 성공하자 영화로도 제작됐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본을 가봤다. 당시 이례적으로 일본을 오가며 제작한 영화의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다. 최근 이 영화가 TV에 방영되는 걸 우연히 보고는 나도 깜짝 놀랐다. 정말 오래전 영화다.
당시에는 연예인들의 세금 납부액이 중요 뉴스로 보도되던 시대였다. 1968년 나는 연예인 중 세금 납부 1위를 했다. 내가 낸 세금은 46만4000원. 삼양라면 한 봉지가 10원, 서울 시내버스 요금이 5원 하던 시대였다. 1인당 1년 소득이 100달러였을 때니 어마어마한 돈을 세금으로 낸 셈이다. 가수는 무대 공연 외에 별다른 수입원이 없던 시절이었다. 야간 업소도 거의 없었다. 나는 주로 영화에서 돈을 벌었다.
당시 공연은 현재 서울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서울시민회관에서 자주 했다. 서울에선 미아리극장 영등포극장 신촌극장 청량리극장 신사동극장 노벨극장에서도 공연을 했다. 지방에선 부산 보림극장, 대구 신도극장이 유명했다. 지방의 군 단위로만 가도 서울의 웬만한 극장보다 시설이 좋은 예술회관이 많았다. 서울에는 시설이 좋은 극장이 없어 오히려 지방이 부러웠다. 서울의 극장들은 좌석도 200석 정도여서 내가 공연할 때면 1000여명이 와서 서서 봐야 했다.
공연은 일주일 내내 이뤄졌다. 주말에도 쉬지 못했다. 요즘은 그렇게 일할 수 없다. 그때는 참 건강했던 것 같다. 어릴 때 잘 먹고 운동도 많이 한 게 지금 생각해도 다행이다. 술을 잘 못 해 거의 마시지 않은 것도 축복으로 생각한다. 술을 했다면 진작 가수로서 ‘아웃’됐을 것이다.
일찍 가수로 성공하고 고생을 안 해봤기에 경제관념이 없었다. 돈을 벌면 모두 어머니가 관리해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기에 돈 관리하는 법을 잘 알았다. 어머니는 내조의 능력자였다.
***[역경의 열매] 남진 (11) 인기 절정일 때 해병대 군복에 반해 자원 입대
1969년 월남전 참전 위해 부산으로, 10대 소녀팬들 따라와 눈물…1년 복무기한 마쳤으나 연장 신청
남진 장로(가운데)가 동료 연예인 해병대원들과 함께 사진 촬영을 했다. 왼쪽은 가수 태원, 오른쪽은 진송남.
대학 선배들이 해병대 군복을 입고 휴가 나온 모습을 보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군복에 빨간 명찰을 달고 팔각모를 쓴 모습이 정말 멋졌다. 강하고 늠름한 모습을 보며 ‘군대는 해병대’라는 로망을 마음속에 품었다. 병역은 대한민국 남자의 3대 의무이지 않은가. 그래서 인기가 절정이던 1968년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처음에는 경기도 김포로 발령받았고 곧 서울 용산구 한남동 막사에서 복무했다. 당시 군 장성과 외무부 장관 등의 공관이 한남동에 있었다. 나는 외곽 경비 임무를 맡았다. 해병대이지만 특수부대 성격으로 내륙을 경비한 셈이다. 그러다 1969년 베트남으로 향했다. 월남전 참전을 위해서다. 10대 소녀팬들이 날 배웅하기 위해 부산까지 쫓아왔다. 나를 걱정하며 우는 이들이 많았다.
팬들에 둘러싸여 부산에서 출발할 때는 참 화려했다. 하지만 베트남에 도착해서는 일반인보다 더 엄하게 다뤄졌다. 목숨이라는 게 연예인이고 일반인이고 차이가 없지 않은가. 가수로서는 나와 진송남, 박일남이 베트남으로 향했는데 현지에선 뿔뿔이 흩어졌다.
베트남 다낭 옆 호이안이라는 지역으로 향했다. 청룡부대 2대대 5중대 소총수였다. 그 지역에 해병대 연대는 우리 하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몽둥이로 피 터지게 맞았다. 선임들은 “사회에서 편하게 있다 왔다”며 나를 더 때렸다. 유명 연예인이었으니 곱게 보였을 리 없었다.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온 선임들은 아주 살벌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누구보다 친해진 게 이들이다. 얼차려를 주면 받고 청소를 시키면 열심히 청소했다. ‘연예인인데’ 하며 잘난 척하거나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 빠르게 조직에 녹아들었다.
해병대라면 베트남에 1년은 꼭 갔어야 했고 그 이상 머무르게 하지는 않았다. 육체적·정신적으로 너무 힘이 든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난 2년을 머물렀다. 빨리 귀국하고 싶다는 이들과 달리 한국에 와서 초라하게 있기 싫었다. 한창 젊은 혈기여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다. 하루라도 빨리 안전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어찌 보면 대견하다.
베트남에 처음 갔던 1969년에는 나에 대한 기사가 많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2~3년을 활동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나를 잊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군대 생활 적응보다 더 힘들었다. ‘옛날처럼 화려한 명성을 다시 구가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밤마다 찾아왔다.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고민이었다.
베트남에서는 병영캠프와 작전지역 외에는 외출이 허용되지 않았다. 혈기 왕성한 나이에 여자 친구도 사귈 수 없는 베트남에서 지겨운 1년을 더 연장하겠다고 결심한 일이 지금도 감사하다. 만약 그때 한국으로 돌아왔으면 맥이 빠졌을 것이다.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한국에서 보고만 있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부대장도 흔쾌히 내 파병 연장 신청을 허락했다.
베트남에선 어머니가 담근 파김치가 제일 맛있었다. 한평생 먹은 음식 중 최고였다. 전우들이 많이 탐을 냈기에 그 파김치를 내 곁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지 않았다. 호이안에는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 위로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었기에 군복도 제대로 입고 있을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남진 (12) 눈앞에 포탄 떨어지고, 야간 전투 땐 총알 스쳐가고
전우가 내게 총 겨눈 채 오발 사고 “하나님께서 목숨 살리셨수”… 1971년 귀국하자 인기 치솟아
남진 장로가 1971년 베트남전 파병을 마치고 귀국해 어머니를 포옹하고 있다.
1969년 8월 한 종합일간지가 베트남까지 찾아와 취재한 뒤 크게 르포기사를 냈다.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폭양. 몸을 가누는 일 자체가 전쟁처럼 느껴지는 사막 같은 해안 모래밭에서 남진군은 침송강 부교 가설작업을 경비했다”고 월남전 참전 초기 나의 모습을 생생히 다뤘다.
베트남 다낭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내가 근무한 호이안은 다낭 바로 곁에 있는 지역이다. 다낭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연중 최저 기온이 20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 더운 곳이다. 호이안에 도착한 지 두 달 정도 됐을 때 저녁밥을 먹고 맥주 한 캔 마시며 기분 좋게 쉬고 있는데 ‘휘이익’ 소리가 들렸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휘파람 소리 같았다. 나는 무심코 서 있었는데 선임들이 “야, 포탄이다 엎드려”라고 소리쳤다. 신병이었던 나는 둔감해서 엎드리지도 않았다. 내가 서 있던 곳에서 5m 앞에 포탄이 하나 떨어졌다. 모래에 툭 박힌 채로 팽이처럼 마구 돌았다. 불발탄이었다. 터졌으면 바로 하늘나라에 갔을 것이다. 뭘 모르는 사람들이 더 용감하다고 하지 않는가. 전쟁터에서도 신병들이 더 용감하다.
어느 날 밤 작전 중이었다. 총알이 내 곁을 스쳐갔다. 맞아서 쓰러진 전우도 있었다. 그때가 잊히지 않는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전쟁터였다. 국내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는 작전현장에 나가서야 실탄을 나눠줬다. 전쟁터에선 내무반을 둘러보면 수류탄과 총알이 지천이다. 안전사고도 잦았다.
한 뼘 차이로 총알이 내 곁을 지나친 적이 있다. ‘탕’ 날아간 총알은 앉아있는 나를 지나쳐 내 곁의 수통을 뚫고 지나갔다. 그때 맞았으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한 전우가 총기를 다루다 실수로 나를 겨냥한 상태에서 오발 사고가 난 것이다. 지금도 그 전우는 “내가 남진을 죽일 뻔한 적이 있어”라고 말한다. 나를 만나면 “하나님께서 살리셨슈. 살아서 좋은 줄 아슈”라며 농도 건넨다. 전우로서 둘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 있기에 만나는 게 즐거운 사이가 됐다.
나도 총기를 잘못 다뤄 동료를 죽일 뻔한 적이 있다. 만지는 게 총밖에 없으니 안전사고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운이 좋은 셈이다. 전방에서는 전쟁으로 죽는다면 후방에서는 안전사고로 죽는다. 살고 죽고가 한 끗 차이다. 당시에는 종교라는 것 자체를 몰랐으니 기도를 하지는 않았다. 생과 사가 모두 운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국제시장’에 내가 나온다. 그룹 동방신기의 멤버 유노윤호가 나를 연기했다. 전라도 사투리를 나처럼 잘 구사했다. 나는 주인공인 황정민의 은인으로 묘사됐다. 영화에서 “가수는 남진”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참 재밌다. 제작진이 어떻게 그렇게 나를 잘 묘사했는지 궁금했는데 육군본부에 가면 내가 무엇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전쟁터에 있으니 연예인으로서 가치가 높아졌던 것 같았다. 1971년 귀국했을 때는 그야말로 나의 시대였다. 참전 전보다 인기가 더 좋았다. 축복 같았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오고 싶었을 텐데 그 조급함을 참았다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당시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으니 하나님께 기도하진 않았다. 다만 내가 베트남에 더 오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역경의 열매] 남진 (13)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화려한 부활
군복무 2년 공백 깨고 인기 질주… 프레슬리 공연 보고 감동, 같은 창법으로 ‘임과 함께’ 불러
남진 장로가 1973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복장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남 장로는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렸다.
1971년 4월 12일 베트남에서 귀국해 6월에 제대했다. 연예인에게 2년의 공백은 긴 시간이다. 게다가 참전용사로 베트남에 있었으니 세월의 변화가 느껴졌다. 귀국하니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나훈아는 나의 파트너였던 작곡가 박춘석과 손을 잡고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듬해 나훈아가 부른 ‘물레방아 도는데’(박춘석 작곡)는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공백에 대한 우려는 기우였다.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귀국 기념 공연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MBC는 입대 전 내가 부른 ‘마음이 고와야지’를 71년 최고 인기가요로 선정했다. 이후 ‘임과 함께’ ‘그대여 변치마오’까지 3년 연속 인기가요상을 받았다. 가수로서 최고 영예인 MBC 인기가수상도 71년부터 3년을 내리 수상했다. TBC 남자가수 대상은 71년과 73년에 받았다. 72년에는 나훈아가 받았다.
당시 언론은 나를 두고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 불렀다. 1935년생인 프레슬리는 나보다 나이는 한참 위이지만 춤을 추는 가수이자 영화배우인 점이 같았다. 그는 로큰롤이 기성세대로부터 지탄을 받자 자원입대까지 했다. 애국자 이미지로 쇄신한 것이다. 그의 곡 ‘GI Blues(군인 블루스)’는 영화로까지 제작됐다. 나도 그 곡을 번역해 불렀다.
72년 지인의 소개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프레슬리의 쇼를 보았을 때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쇼였다. 지금도 그때 쇼의 수준을 따라 하지 못한다. 음악 무대매너 액션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가 닮고 싶어서였을까. 프레슬리 스타일의 옷을 입고 그의 로큰롤 스타일로 노래를 불렀다. 1973년 하와이 공연 때는 프레슬리의 매니저로부터 직접 그가 입은 점프슈트를 구해오기도 했다. 그의 레코드판만 1000번을 넘게 들었다.
프레슬리는 자신이 부른 히트곡이 많았는데도 다른 이의 곡을 부르는 리바이벌 쇼(Revival Show)를 자주 했다.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 ‘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 등의 노래를 곧잘 불렀다. 원곡 그대로 부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로 편곡하고 색깔을 입혀 맛깔나게 불렀다.
지금도 한국에선 리바이벌 쇼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 텔레비전 예능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의 노래를 편곡해 다시 부르는 일이 거의 없다. 일본만 해도 리바이벌해 부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우리는 다른 이의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원곡과 비슷하게 불렀는지 아닌지 비판하려 든다. ‘왜 이렇게 꼴값을 떠느냐’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원곡에서 느낄 수 없는 편곡의 맛이란 게 있다. 비틀스의 노래를 여성이 부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프레슬리가 비틀스의 ‘섬싱(Something)’을 편곡해 부른 노래를 들어보면 그 맛을 알 수 있다. 끝내주게 좋은 곡이다.
‘임과 함께’는 프레슬리의 창법으로 부른 대표곡이다. 강약을 넣어 ‘저 푸른 초원 위에’를 불러보면 알 수 있다. 프레슬리의 창법 그대로다. 내 데뷔곡인 ‘서울 푸레이보이’도 프레슬리 창법이나 다름없다. 내가 부른 노래 대부분이 그의 창법에 젖어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들어도 내 노래가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세월이 흘러도 인정받는 로큰롤의 매력 때문이 아닐까.
***[역경의 열매] 남진 (14) 리사이틀로 인기 치솟으며 ‘남진 시대’ 활짝
오늘날 대한민국 가요계 초석된 TV ‘쇼쇼쇼’ ‘토요일 토요일 밤에’ PD들이 리사이틀에 결정적 도움
남진 장로(왼쪽)가 1970년대 초 ‘쇼쇼쇼’ 진행자 곽규석씨와 함께 무대에 서 있다.
오빠 부대의 원조는 나이지만 ‘리사이틀’을 본격적으로 활성화한 것도 나였다. 한 사람이 공연 전체를 책임지는 독창회 격인 리사이틀이란 개념은 1960년대까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당시는 여러 가수가 함께 공연을 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리사이틀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결정적 도움을 준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 텔레비전 방송의 역사에서 ‘쇼’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등장시킨 옛 동양방송(TBC) 황정태 PD다.
그분이 연출한 ‘쇼쇼쇼’는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64년 TBC가 개국하며 시작한 쇼쇼쇼는 춤과 노래 코미디가 결합한 버라이어티쇼였다. 희극인이자 훗날 미국 뉴욕의 한마음침례교회 목사가 된 곽규석씨가 진행을 맡았다. 곽씨는 성대모사와 원맨쇼의 개척자로 코미디계의 큰 어른이다.
내가 리사이틀 가수로 서는 데는 황 PD의 역할이 컸다. 그가 나를 쇼하는 가수로 만들어 주었다. 황 PD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분은 밴드 음악과 무용 합창까지 무대 공연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를 모두 종합해 쇼를 만들어냈다. 그는 대한민국 쇼의 일인자라 불릴 만했다. 당시 직급으로는 평 PD에 불과했는데도 명성이 자자했다. 천재였다. 나같이 인기 있던 가수라도 그를 만나기가 어려웠다. 출연을 부탁한다는 것 자체도 불가능했다.
1971년 가을 서울 종로구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남진 귀환 리사이틀’은 황 PD의 작품이었다. 안무는 한익평씨가 맡았다. 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이후 ‘남진 시대’는 그 리사이틀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조영남도 황 PD가 직접 찾아 방송에 출연시키며 스타로 만들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가요계는 그에게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요일 토요일 밤에’를 연출한 MBC 전우주 PD도 최고로 꼽을 수 있다. 전 PD는 대한민국 PD의 상징과도 같다. 실력만큼은 대한민국 최고다. 그는 극 작품을 잘 만드는 사람이었다. 혹자는 전 PD 같은 사람이 한 명만 더 있었다면 우리나라 대중문화가 바뀌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오래도록 연예계에 몸을 담았지만 전 PD와 같은 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 참 희한한 일이다. 지금은 기술이 과거보다 엄청나게 발달했는데도 창의적 기획력은 따라가지 못한다. KBS홀을 한번 가보면 세상이 좋아졌다는 것을 느낀다. 촬영장이 운동장만큼 넓다. 그런데도 당시 느낌은 잘 안 난다. ‘토요일 토요일 밤에’와 ‘쇼쇼쇼’는 지금 돌아봐도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다.
카메라 잡는 기술도 예술이었다. 그때는 카메라 2~3대로 쇼를 만들었다. 극에 있어 천재적인 실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요즘은 카메라가 스무 대 넘게 움직여도 그때 느낌이 잘 안 난다. 환경이 중요한 건 아닌 것 같다. 전 PD는 지난해 별세했다. 항상 그분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남진시대는 이런 분들이 만들었다. 천재적 PD들은 내면의 감춰진 진짜 재주를 보고 직접 스타를 고른다. 그건 연예인 본인도 모를 수 있다. 나도 나 자신을 잘 몰랐는데 그분들이 해보라 해서 따라 하니 잘된 경우가 많았다. 방송 레퍼토리라는 것은 방송을 오래 해본 사람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안무를 깔고 음악을 넣는 모든 작업은 예술과도 같다. 제작 과정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과정이다.
***[역경의 열매] 남진 (15) 시대의 애환 담은 ‘임과 함께’… ‘국민가수’ 명성
MBC 인기가수상 3년 연속 수상…히트곡 대부분 ‘트로트’ 아냐, ‘대중가요 가수’로 불리는 게 맞아
남진 장로가 1972년 발표한 ‘임과 함께’ 앨범의 표지. ‘임과 함께’는 산업화 시대 타향살이의 아픔을 담은 노래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1971년부터 3년 연속 MBC 인기가수상을 받는 데 큰 역할을 한 ‘임과 함께’ 가사 중 일부다. 당시는 산업화 시대였다.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공단에서 일하는 이가 많았다. 그림 같은 기와집에 살고 싶다는 민초들의 염원이 노래에 담긴 것이다.
작사가 고향씨는 부산 출신이다.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면서 밖을 보니 어수룩한 초가집과 양철집이 많았다. 반면 서울에는 산업화 덕에 근사한 기와집이 많았다. 그런 집을 푸른 초원 위에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가요는 시대를 반영한다. 몇 년도 가요라고 하면 그때의 시대상이 드러나야 좋은 가요다.
“울려고 내가 왔나 누굴 찾아 나 여기 왔나 낯설은 타향 땅에 내가 왜 왔나.”(‘울려고 내가 왔나’ 중)
1966년 발매한 나의 첫 히트곡인 ‘울려고 내가 왔나’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다. 비는 내려 처량한데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과 애인이 문득 생각난다는 내용이다. 낯선 타향에서 객지 생활을 한 사람이 많았던 시대에 이 곡은 호소력이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서울에 온 사람, 군에 입대한 사람 등 모두가 이 노래를 불렀다. 타향살이는 서글프고 힘들다. 그때는 타향살이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시대를 대변하는 노래를 부른 나를 방송에선 ‘국민가수’ ‘가요계의 대부’ ‘가왕’이라 표현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칭찬이 다소 유치하게 들린다. 진짜 국민가수는 현인 선배다. 내가 대여섯 살 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가사를 담은 ‘전우야 잘 자라’는 전 국민이 불렀다.
일본에선 ‘가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표현이다. 어떻게 가수의 왕이 있을 수 있는가. 가수마다 음색이 다르고 나름의 스타일이 있는 법이다. 누가 최고라고 할 수 없다. 그보다 ‘오빠 부대의 원조’라는 별명이 나는 좋다.
한국에선 유독 ‘트로트 가수’라는 표현도 많이 쓴다. 트로트 가수라며 무시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트로트라는 리듬은 엄연히 재즈 맘보 도돔바 등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리듬 중 하나다. 내가 부른 노래 대부분은 트로트가 아니다. 나에겐 트로트 가수보다 ‘가요 가수’라는 표현이 맞지 않나 싶다. 더 엄밀히 표현하자면 ‘대중가요 가수’다. 일본에선 트로트 가수라는 말을 쓰지 않고 ‘엔카 가수’라 한다.
트로트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리듬이다. 일본인들이 그 리듬을 엔카라며 따라 불렀다. 그게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광복이 되며 방송에서 엔카를 트로트라 부르며 말만 바꿨다.
옛날 노래를 전부 트로트라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엔카는 엄연히 일제 시절 시작된 노래 리듬이지 우리의 전통음악이 아니다. 우리 전통음악은 민요다. ‘가슴 아프게 울려고 내가 왔나’는 트로트 리듬이다. 하지만 나의 다른 많은 곡은 고고 디스코 트위스트 리듬이다. 엄연히 리듬이 다르다.
예로 ‘마음이 고와야지’는 트위스트다. 그 곡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가수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요즘엔 방탄소년단(BTS)이 무용수보다 춤을 더 잘 춘다. 지금은 그런 시대다. 옛날에는 춤은 무용수가, 노래는 가수가 불렀다. 시대가 달라졌다. 가요 전체를 어느 하나로 특징지을 수는 없다.
***[역경의 열매] 남진 (16) 나훈아와 라이벌… 기획사·언론이 만들어낸 ‘작품’
여섯 살 아래 후배이자 친구의 제자 평생 딱 한 번 TV방송 함께 출연…라이벌 구도로 가요계 황금시대 열어
남진 장로(오른쪽)와 나훈아의 히트곡을 모은 1990년도 베스트앨범. 남 장로와 나훈아는 한국 가요계의 명라이벌로 불린다.
나와 나훈아는 대중과 언론이 만들어놓은 한국 가요사의 라이벌 관계다. 정계의 YS(김영삼)와 DJ(김대중)라는 라이벌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의아한 점이 있다. 나는 나훈아보다 여섯 살이나 위다. 훨씬 이전에 데뷔했다. 그래서 나훈아는 라이벌이라기보다 후배다. 내 친한 친구의 제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귀국해 보니 그는 유명 가수가 돼 있었다.
기획사들도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이벌 관계를 만들어놔야 인기가 오르니 기획사와 언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명라이벌’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나는 나훈아와 나이 차이가 커 허물없이 지내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쉽다. 조용필은 나훈아보다 한 살이 많다. 어느 날 조용필이 내게 “형님, 제가 형님보다 나이가 아래입니다”라고 말해서 알았다.
그래도 라이벌 구도로 가요계의 황금시대가 왔으니 긍정적인 효과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로 전 국민이 가요계에 관심을 가졌다. 라이벌 구도가 없었다면 나도 지금 이 정도까지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을 수 있다.
1971년부터 내리 3년 MBC 인기가수상을 받았다. 그럴 때면 나훈아 팬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시상식장이 울음바다가 됐다. “대상 때려치워”라고 외치는 팬도 있었다. 나훈아 팬들에게 야유도 참 많이 받았다. 협박까지는 하지 않았다. 상을 못 받으니 소리 지르고 그런 정도였다. 나야 상을 받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가. 나훈아 팬들이 아쉬워하는 걸 지켜보는 게 참 재밌었다. 그런 모습이 그 시대의 자화상 같은 이미지로 내게 남아있다.
나훈아와는 평생 딱 한 번 텔레비전 방송을 함께 촬영한 적이 있다. KBS에서 제작한 1990년대 프로였다. 둘의 노래를 묶어 특별앨범이 나온 적은 있지만, 그 외에 함께 무언가를 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한 시대를 풍미한 나훈아 같은 라이벌과 특별한 방송을 기획하지 않은 것은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나와 나훈아의 라이벌 관계를 되새기며 함께 출연시키는 방송이 있다면 추억도 떠올릴 수 있고 역사적인 자료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훈아가 조영남처럼 나의 동갑내기 친구였다면 스스럼없이 지냈을 수 있다. 하지만 원체 나이 차이가 나니까 조금 어렵기는 했다. 같이 밥 먹으러 가고 놀러 다녔던 기억이 없다. 선배 입장이라도 후배에게 대하기가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다. 서로 존중하며 조심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서로 끌어안으면서 재밌게 지낸 추억을 만들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허물없이 지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방송국에서 만나면 나훈아가 꾸벅 인사를 한다. 그럼 나는 “오랜만”이라며 답례를 건넨다. 서로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 정도를 건네는 정도다. 지금이라도 함께 휴양도 가며 재밌게 놀면 좋을 것 같다.
나훈아는 ‘경상도 스타일’ 남자다. ‘선배님’ 하며 깍듯하게 인사를 한다. 하지만 보기보다 내성적인 것 같다. 무대에선 터프한 스타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무대와 개인 성격은 다르다. 나훈아는 나와 장난을 치고 농담을 주고받을 스타일은 아니다.
어떤 면에선 참 배울 점이 많은 후배다. 나훈아는 대중에게 ‘신비주의 콘셉트’로 접근했다. 무대에 설 때는 누구보다도 멋있는 가수다. 나는 세련된 도시 남자 이미지로, 나훈아는 부산 바다 남자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역경의 열매] 남진 (17) ‘나훈아 피습’ 배후로 지목당해 검찰 조사받아
범인은 사건 전 집에 찾아와 흉기로 위협하며 돈 달라 협박, 야단치고 보내…7년 뒤엔 고향집 방화
남진 장로(오른쪽)와 가수 나훈아가 1970년대에 함께한 모습. 남 장로는 1973년 나훈아 피습 사건의 배후로 오해 받아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1973년 6월 4일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서울시민회관 무대에서 나훈아가 피습을 당했다. 쇼가 끝나갈 즈음 나훈아가 세 번째 앙코르곡 ‘찻집의 고독’을 부르고 있을 때였다. 무대 위로 갑자기 뛰어든 김웅철이 깨진 사이다병을 휘둘러 나훈아의 왼쪽 얼굴에 큰 상처를 입혔다. 72바늘이나 꿰매는 대수술을 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나를 주범으로 지목했다. 나훈아와 라이벌인 내가 그의 범행을 사주했다는 것이다. 나의 팬들과 나훈아의 팬들이 서로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지검 특수부장을 독대했다. 서울지검 청사가 중구 덕수궁 근처에 있을 때였다. 검찰이 김씨를 조사한 이후였다. 특수부장과의 독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를 알고 지냈다는 그의 진술이 거짓임이 단박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수부장은 내게 사과하고 김씨를 구속했다.
나훈아가 피습 당하기 며칠 전 김씨는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 있던 내 집을 찾아왔다. 새벽에 눈을 뜨니 흉기를 들고 내 앞에 서 있었다. 나훈아를 찌를 테니 돈을 달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무엇보다 겁이 났다. 자고 일어났는데 모르는 사람이 흉기를 들고 서 있으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때만 해도 베트남전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돼 간이 클 때였다. 야단을 친 뒤 김씨를 돌려보냈다. 그 후 나훈아가 피습을 당했다.
배우 신성일의 매니저가 최근 TV방송에 나와 그 얘기를 했다. 김씨가 우리 집을 찾아오기 전에 신성일의 집에도 여러 번 찾아갔다고 한다. 신성일에게 돈을 요구했고 신성일은 사고가 나는 걸 방지하고자 용돈을 몇 차례 줬다. 그런데도 계속 찾아오니 경찰을 불렀고 다툼이 일었다. 김씨는 그 후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 사건을 두고 언론은 숱한 억측과 모함을 쏟아냈다. 내가 그에게 돈을 줬다느니 하는 기사까지 나왔다. 하지만 단언컨대 단 1원도 주지 않았다. 불쌍해서라도 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어넘길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 어떤 일도 쉽사리 넘어갈 수 없었다.
막상 그런 일을 당하고 나면 억울하기보단 무섭다. 유명세가 있다는 건 이런 무서운 일에도 휘말릴 수 있다는 얘기다. 김씨는 정상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이북을 넘나드는 특수부대 출신이었다. 사회에 대한 반항심이 있었다. 연예인을 공갈하면 돈이 나올 줄 알고 신성일과 나, 나훈아를 차례로 협박한 것이다.
그는 1980년 목포에 있는 내 고향 집에도 불을 질렀다. 그때 조부모의 유일한 초상화가 탔다. 가끔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리울 때가 있지만 초상화가 없어서 볼 수가 없다. 나이 들어 생각하면 협박받은 일보다 초상화를 잃은 게 더 화가 난다. 다시는 그분들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세월이 지날수록 가슴이 아프다.
30여년 전 지인으로부터 그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들었다. 교회에서 좋은 반려자를 만나 결혼하고 자식도 낳고 잘살고 있다고 했다. 교도소에서 나온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신앙인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여성을 만난 것 같아 나도 기쁘다. 신앙은 대단하다. 세상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전과자도 변화시키는 신앙은 축복이고 사랑이다.
***[역경의 열매] 남진 (18) 가수 윤복희와 3년 만에 이혼, 사유는 “…”
가수 조영남·배우 백일섭과 절친, 선천적으로 술 못해 진솔한 대화… 파경 이유 말하는 건 상대에 실례
남진 장로(왼쪽)와 배우 백일섭이 2017년 서울 근교에서 함께 방송을 촬영하고 있다.
유명인 중에 동갑내기 친구로 가수 조영남을 꼽을 수 있다. 조영남은 나보다 가요계 데뷔가 2년 늦었지만, 허물없이 친구로 지냈다. 조영남은 술을 좋아했다. 1970년대에는 야간 통행금지가 있었다. 클럽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놀 때면 통행금지를 피해 아예 그곳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 4시까지 클럽에서 나오지 못해 조영남과 함께 있을 때가 많았다. 결혼 전이니 자유로웠다. 조영남이 내 집에 와서 이불에 소변을 보길래 요강을 가져와 받아준 적도 있다. 그렇게 가까운 친구가 조영남이다.
조영남이 평소 술주정을 많이 하는 친구라는 뜻은 아니다. 워낙 친한 친구니까 편하게 지낸 것이다. 조영남은 말을 참 재밌게 한다. 개그맨 저리 가라 할 정도다. 나는 술을 안 먹으니 횡설수설할 때가 없다. 하지만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진솔하게 정을 나누는 분위기는 좋아하는 편이다.
요즘도 조영남과는 전화 통화를 자주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아무래도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선천적으로 술을 못 했다.
배우 백일섭도 좋은 친구다. 전남 여수 출신인데 1944년생으로 나보다 한 살이 많다. 백일섭과 조영남은 중학교 동창이다. 조영남이 학교를 한 해 일찍 들어가서 그렇다. 전라도에선 한 살 차이라도 깍듯이 모시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 나는 아직도 백일섭을 형이라 부른다. 백일섭과 조영남, 내가 함께 있으면 어색할 때가 많다. 하지만 백일섭과는 스스럼없는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가수 태진아 설운도 송대관은 지금도 많은 인기를 누리는 이들이다. 그들이 데뷔하고 나서 성공하는 모습까지 곁에서 지켜보며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태진아는 새까만 후배다. 그가 고생할 때부터 알고 지냈다. 성공해서 열심히 사니까 응원을 많이 건넨다. 머리가 좋고 기획력도 있는 친구다. 설운도는 서울에 갓 올라왔을 때 “넌 열심히 하면 성공할 거다”고 말했는데 그걸 정말 이룬 후배다. 지금도 나를 만나면 “저한테 성공할 것이라고 이야기해준 사람은 형님뿐이었습니다”라고 얘기한다.
송대관은 나와 동갑이다. 하지만 나보다 연예계 데뷔는 10년 정도 늦었다. 그래서 마냥 나보다 어린 줄 알았는데 주민등록증을 보니 나이가 같았다. 송대관은 내 후배들과 친구 사이다.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고생하다 보면 4~5년 정도 나이 차이가 나도 친구로 지낸다. 그래서 연예인들끼리도 서로의 나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동갑 친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참 아래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가수 윤복희와는 인연이 돼 만났다. 1976년 결혼해 3년 만에 이혼했지만 실제로 함께 산 기간은 1년 남짓했다. 윤복희와의 이혼에 대해선 여러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하지만 한 번도 윤복희와 왜 이혼했는지 이야기한 적이 없다. 흔히들 이혼 사유로 성격 차이를 많이 든다. 생각해보면 윤복희와는 그렇게 성격 차이가 나지 않았다. 윤복희는 참 좋은 친구였지만 결혼은 또 다른 문제였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그는 믿음으로 조용히 살아가는 신앙인이다. 40년 전 이야기를 굳이 들추는 것은 그분에 대한 실례인 것 같다.
***[역경의 열매] 남진 (19) 연예계 생활 쉬고 싶어 1979년 미국으로 떠나
뉴욕 교포와 결혼 후 레스토랑 운영, 3년 만에 귀국 방송 출연 어려워져…부친이 군사정권의 정적이라 금지
남진 장로(뒷줄 가운데)가 1990년 가족들과 함께 막내아들(앞줄 가운데)의 초등학교 입학을 축하하고 있다.
1979년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쉬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65년 데뷔 후 베트남전 파병 기간을 제외하면 쉼없이 연예계 생활을 했다. 많이 지쳐 있었다.
뉴욕에 사는 교포와 결혼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났는데 뉴욕에서 데이트하고 한국을 오가며 양가 허락을 받았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어머니는 아내와 나의 점을 11번이나 봤다. 그런데 그 결과가 모두 좋게 나오자 결혼을 빨리 하라고 재촉했다.
처가는 뉴욕에서 레스토랑을 30개 넘게 운영하는 집안이었다. 나도 레스토랑을 하나 맡아 운영했다. 미국에서는 공연을 보러 다니지도, 음악활동을 하지도 않았다. 마냥 쉬고 싶었다. 지금 후회되는 건 그때 음악 공부를 더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피아노를 배운다거나 음악에 대해 연구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결혼해선 아이 넷을 낳았다. 아이 셋은 연년생이다. 당초 생각보다 미국에 오래 머물렀던 이유도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가 늘었으니 쉬어야 했다. 그렇게 쉬다 보면 또 아이가 생겼다. 그렇게 셋을 키우다보니 한국 복귀가 늦어졌다. 첫째와 둘째는 생일이 1년 차이고 둘째와 셋째는 11개월 차이다.
딸만 줄줄이 셋을 얻었다. 82년 귀국하니 어머니는 딸만 있는 점을 섭섭하게 생각했다. 장남인데 아들이 없다는 게 우울했던 모양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아내는 ‘또 낳자’고 했다. 그렇게 83년 막둥이로 아들을 얻었다. 막내는 지난해 11월 결혼했는데 둘째와 셋째는 아직 결혼을 안 했다. 자식을 결혼시키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첫째 사위는 독일에서 사업을 한다. 그래서 독일을 자주 왕래한다. 둘째와 셋째는 나와 같이 산다. 막내는 매형과 함께 미국을 오가며 사업을 한다. 며느리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살던 교포다. 사돈 집안은 지금도 샌디에이고에 산다. 옛말에 ‘손자 바보’라는 말이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손자를 낳으니 알 것 같다. 하나도 버릴 게 없이 귀여운 게 손자다. 손자 보는 재미가 최고다. 여덟 살 외손주 하나와 돌을 앞둔 친손주가 하나 있다.
미국에서 돌아와 82년 12월 귀국콘서트를 했다. 방송국에선 나를 얼마나 반겼는지 모른다. 방송 출연 약속이 줄줄이 잡혔다. 그런데 몇 차례 방송이 나간 후 방송 출연이 연기되기 시작했다. PD들은 이유도 대지 않고 “다음에 출연하자”며 미뤘다. 느낌이 석연치 않았다.
알고보니 당시 방송국은 군사정권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권력층에 있는 누군가가 “전라도 사람 남진이 좀 어떻게 해 봐”라고 말한 것 같다. 윗사람이 기침을 한 번 하면 아랫사람은 몸살을 일으킨다고 그 말 한마디에 나의 방송출연이 금지됐다고 한다. 요즘 와선 군사정권의 정적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우리 아버지의 친분 때문에 방송이 금지됐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당시의 명목은 시대가 바뀌었으니 새 사람을 출연시킨다는 것이었다. 부산 사람인 나훈아도 그때 방송 출연을 거의 하지 못 했다. 하지만 유독 나의 출연을 더 강하게 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겁이 났다. 그때는 최고 인기스타냐 아니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무서운 시대였다. 서울을 떠나자고 마음먹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가수로 복귀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역경의 열매] 남진 (20) 방송 금지로 부르지 못한 ‘빈잔’… 구전으로 히트
권력층 압력으로 방송 못해 낙향, 카바레 문 열자 문전성시… 2년여 뒤 출연섭외 ‘해제’ 직감
남진 장로(가운데)가 1990년대 목포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촬영했다. 군사정권 때 방송 출연 제재를 받았던 남 장로에게 가족은 큰 힘이 됐다.
미국에 있다 1982년 말 귀국했더니 동양방송(TBC)이 사라지고 없었다. 전두환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80년 11월 KBS에 합병됐다고 했다. TBC에 친한 PD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KBS로 이직했다. 거대한 방송국도 없애버릴 정도로 정권의 입김이 셌으니 일개 가수의 방송 출연을 막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방송 출연을 제재하는 이유를 수소문하다 방송국 관계자로부터 “위에서 조금 제재를 하는 것 같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누군가 권력층에서 손을 쓴 게 틀림이 없었다.
“외로운 사람끼리 아! 만나서 그렇게 또 정이 들고 어차피 인생은 빈 술잔 들고 취하는 것.”
우연히도 1982년 만들어진 ‘빈잔’ 가사가 그때 내 상황과 잘 들어맞았다. 그 가사처럼 외롭게 느껴졌다. 큰 기대를 품고 귀국했지만 방송 출연을 제재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KBS에 출연하지 못하면 연예계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KBS에 못 나온다고 MBC에 나오면 된다거나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가수는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직접 관리했다. 음주운전이나 도박 등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어도 이런저런 이유로 출연을 금지하곤 했다. 대부분 비공식적 조치였는데 이게 더 무서웠다. 공식적으로 제재를 당하면 이유라도 알지만, 비공식적으로 알음알음 조치가 취해지면 이유도 모르고 당하기 때문이다. 정권도 명분이 없으니 비공식적으로 조치를 했지 싶다. 레코드업계에도 극심한 불황이 찾아왔다. 매니저는 방송국 출입이 금지됐고 가요방송 횟수 제한의 조처가 내려졌다.
팬들에게는 “쉬고 싶어서 목포로 간다”고 말했다. 권력층에게 출연 제재를 당했다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돌아와 활동을 재개한 지 얼마 안 됐기에 모양새도 이상했다. 얘기한다고 바뀔 것도 아니었기에 잠자코 있어야겠다고만 생각했다.
84년 목포에 극장식 카바레 클럽 ‘하와이관광’을 개업했다. 2년 정도 운영했는데 한창 인기가 있을 때 낙향해 유흥업을 하니 문전성시를 이뤘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왔다. 음악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주말에 내가 운영하는 업소에 가끔 가서 한두 시간 노래를 부르는 게 전부였다.
내 히트곡 중 유일하게 방송 활동 없이 인기를 얻은 게 ‘빈잔’이다. 방송에 못 나가니 사람들의 구전으로만 불리다 90년대에 와서야 히트했다. 방송이나 광고 한 번 안 하고 성공한 노래이기에 더욱 애착이 가는 노래다. 박자가 느린 노래는 오랜 시간이 지나 뜨는 경우가 있다. 천천히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는 것이다.
빈잔은 박춘석이 작곡하고 조운파가 작사한 노래다. 조운파와는 처음으로 같이 작업한 작품이다. 조운파와 친하지도 않았는데 희한하게 내 마음에 잘 맞는 가사가 나왔다. 먼 미국에서 외로웠던 마음이 조운파에게 전해진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목포에 내려가 외로워하던 내 마음도 이 노래가 달래줬다. ‘노래 시인’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조운파의 멋진 작사가 빛난 노래다.
목포에 내려간 뒤 2년쯤 지났을 때였다. 광주의 한 운동장에서 KBS가 주관하는 행사가 열리니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광주에서 행사를 열려면 목포에 머물던 내가 필요했을 것이다. 섭외를 하기 위해 PD가 직접 집까지 찾아왔는데도 참석하지 않았다. 출연 제재로 기분이 퍽 상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출연 제재가 풀렸다는 신호임은 직감했다.
***[역경의 열매] 남진 (21) 조직폭력배들이 호텔 주차장서 흉기로 습격
업소서 행패 부려 신고하자 보복, 허벅지 찔렸으나 큰 동맥 비켜나가…훗날 범인이 찾아와 사과해 용서
남진 장로가 1990년대 초 무대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 남 장로는 89년 조직폭력배에게 습격을 당해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었다.
1989년 11월 4일 밤 9시50분쯤 서울 중구 장충동 타워호텔 야외주차장. 일본에서 온 연예계 손님과 함께 승용차 오른쪽 뒷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20대 중반의 남자 3명이 갑자기 나타나 그중 한 명이 내 왼쪽 허벅지를 흉기로 찌른 뒤 달아났다. 조금만 옆으로 맞았으면 그 자리에서 사망할 수도 있었다. 큰 동맥이 지나는 바로 옆을 찔렀기 때문이다. 나는 전치 3주의 상처를 입고 순천향병원에 입원했다.
이 사건은 떠올리기 싫은 아픈 기억이지만 가해자들도 이제 60대가 됐을 테니 터놓고 얘기할 수 있겠다. 피습 사건이 있기 3년 전 목포에서 클럽을 운영할 때 가해자들과 언짢은 다툼이 있었다. 소위 깡패라 부를 수 있는 건달들이었다. 조직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어느 날 내가 운영하는 업소에 와서 전무에게 공갈 협박을 했다. 나에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직원은 가족과 같은 사람이다. 그때 못 본 체하고 지나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테지만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에 외면할 수 없었다.
서울 생활을 하다 보면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다. 이보다 더 심한 일도 숱하게 겪었지만 섭섭해도 그냥 지나가곤 했다. 그러나 내 업소, 내 고향에서 다툼이 생기면 문제가 전혀 다르다. 내 삶의 터전이기에 잠시 비켜 갈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향 후배들을 그냥 둬선 안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경찰에 신고했다.
그 결과는 폭력조직의 와해했다. 조직원들이 대거 구속됐다. 그들이 먹고사는 조직이 나 때문에 해체될 위기에 처하니 그 보복으로 날 피습한 것이다. 그 세계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는 한다.
지금도 상처가 남아있어 그 일을 떠올리게 한다. 사건이 있고 한참 후 호텔 커피숍에 누가 와서 꾸벅 인사를 했다. 자세히 보니 날 습격했던 청년이었다. 가정을 이뤄 잘 산다는 얘기를 듣고 아이 잘 키우라는 덕담을 건넸다. 내가 죽지 않고 산 게 그들에게는 굉장히 다행이라고 했다. 내가 죽었으면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됐겠는가. 가정은 이룰 수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청년들은 당시 조직의 선배로부터 지시를 받고 그 일을 저질렀다고 사과했다. 그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가끔 연락하며 사이좋게 지낸다. 내게는 정말 깍듯하게, 예의 바르게 대한다.
인생이란 참 이상하다.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용서 못 할 일도 없는 것 같다. 그때 청년들은 총각이었지만 지금은 자식을 둔 아버지다. 자식이 스무 살은 됐을 것 같다. 그들이 지금 와서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내가 젊었을 적 우습고 철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 돌이켜보면 보복 증오 폭력 같은 건 다 부질없는 일이다. 후회만 남는다.
당시 전국적으로 극장식 스탠드바나 디스코장 카바레 카페 등이 1만여개소가 있었다. 그곳에서 출연하는 연예인만 10만명을 넘었다. 무명일수록 폭행과 협박, 무리한 요구에 시달렸다. 나의 피습 사건이 있고 사흘 뒤 가수 300여명이 모여 ‘연예인들이 걸핏하면 폭력배에 의해 협박 폭행당하는 공포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검찰청사 앞에서 대책 수립을 촉구하는 시위도 벌였다.
***[역경의 열매] 남진 (22) 박자 틀리면 꿀밤 먹이던 ‘영혼의 히로인’ 박춘석
힘들었던 1980년대 보내고 재결합 2700곡 작곡한 스승님이자 ‘형님’… 1994년 작곡하다 뇌졸중으로 별세
남진 장로(오른쪽)가 데뷔 초인 1960년대 말 천재 작곡가 박춘석 앞에서 녹음하고 있다. 남 장로보다 열다섯 살 위인 박춘석은 남 장로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1980년대에는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93년이 돼서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박춘석과 재결합해 ‘내 영혼의 히로인’을 발표한 것이다. ‘가슴 아프게’ ‘마음이 고와야지’ 등 명곡으로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그분과의 재결합은 대중으로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다.
“헝클어진 운명의 끈을 바로잡지 못하고 사랑했던 그 사람을 잃어버린 채 돌이킬 수 없는 남이 되어 원점에 난 서 있네.”
‘내 영혼의 히로인’ 가사다. 오래된 이별의 상처를 다시 떠올린다는 내용을 담았다. 작곡 박춘석, 작사 조동산인 이 작품이 인기를 얻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제목처럼 여주인공이 되고픈 많은 여성이 이 노래를 사랑해줬다.
하지만 이 곡에는 아픈 기억이 함께한다. 박춘석과의 마지막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박춘석은 87년 14대 한국음악저작권협회장이 되며 작곡 외의 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듯했다. 94년 8월 밤새 작곡에 몰두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2010년 별세했다. 그분의 별명은 일본말로 ‘오야붕(대장)’이었다.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해준 분이자, 항상 대장처럼 따랐던 그분이 지금도 몹시 그립다.
박춘석은 진정한 예술가였다. 예술가가 지녀야 할 멋진 면을 다 갖고 있었다. 자존심도 굉장했지만 아이처럼 순수한 면도 있었다. 양면을 지닌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에게 경우 없이 행동했다가는 누구도 용서를받지 못했다. 매사 경우를 따지는 건 칼 같았다. 상대가 제아무리 유명인이라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한번은 유명한 가수 한 명이 박춘석의 눈 밖에 나서 크게 혼이 났다. 당시 연예계에서 힘깨나 쓰며 기획과 흥행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박춘석에게는 싫은 소리를 전혀 못했다.
나도 너무 바빠 연습에 빠진 적이 있다. 그때 아주 심하게 욕을 듣고 혼이 난 기억이 있다. 연습하다 박자가 틀리면 늘 꿀밤을 먹였다. 피아노를 치는 분이어서 그런지 손힘도 세서 꿀밤 한 방에 혹이 날 정도였다. 예의 없이 굴면 거칠게 욕을 하며 혼을 냈다. 누구에게나 무턱대고 그랬던 건 아니고 예의가 아주 없는 사람에게만 특별히 그랬다.
겉으로는 점잖아서 전혀 그러지 않을 것 같은 분이 그러니 더 무서웠다. 그와 같은 성격은 연예계에서도 참 드물어 손에 꼽힐 정도다. 예술가로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을 꼽자면 지금도 주저 없이 박춘석을 꼽는다. 스승님이면서도 멋진 예술인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어려워서 말도 못 붙였는데 가까워지자 친형처럼 포근하게 감싸줬다. 밥도 사주고 순수하게 인간적으로 만나줬다.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 취급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보다 열다섯 살이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약자에게는 약하고 강자에게는 강한 정의로운 이였던 것 같다.
그와 같이 작업하지 않았다면 그저 점잖기만 한 사람으로 그를 바라볼 것이다. 그분의 진면모를 아는 이는 대한민국에서 스무명 남짓이다. 대인관계를 넓게 맺는 이도 아니었기에 그렇다. 그는 오직 음악에만 몰두했다. 한 사람이 2700곡을 작곡한다는 게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박춘석은 존경받는 예술가였다. 예술가의 혼이 있고 매력이 있는 분이었다.
***[역경의 열매] 남진 (23) 정부 관리 벗어난 ‘대한가수협회’ 초대 회장
권익·복지 향상 위해 2006년 결성…최백호·신해철·이효리 등 트로트·발라드 가수 ‘통합’ 출범
가수들이 2006년 5월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대한가수협회 창립총회를 열고 기념 촬영을 했다.
1991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 14회 위원장을 맡았다. 전임이던 가수 김광진의 부탁을 받아서였다. 가수분과위원회는 신인부터 원로까지 가수들이 모두 모여 친목을 다지던 모임이었다. 문화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연예협회 배우협회 국악협회 등을 관리할 때였다. 연예협회 안에 작곡 무용 연주 등의 분과가 있었고 가수분과위원회는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가수분과위원회는 생각처럼 원활하게 활동할 수 없었다. 한국연예협회라는 상위 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한국연예협회 18대 이사장을 맡았다. 주로 한 일은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연예인들에게 시상을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상까지 받게 했으니 단체의 힘이 꽤 있었다.
그런데도 한계를 느꼈다. 진정 가수들이 원하는 목소리를 내려면 바로 제재가 들어왔다. 정부의 관리하에 있었던 탓이다. 요즘은 쇼 프로그램이 다양하지만 예전에는 한정돼 있었다. 공연은 모두 정부의 감시하에 이뤄졌다. 정부가 관리하는 단체에선 그런 문제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우리 세대는 그래도 나았다. 선배들인 원로급 가수들은 방송 출연도 마음대로 못했고 수입이 없어 비참하게 사는 분이 많았다.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가수 현인은 기독교인들이 임종까지 모든 걸 돌봐드렸다. ‘아빠의 청춘’을 부른 가수 오기택도 뇌출혈로 힘들어할 때 박상동 동서한방병원장 등 기독교인들이 도움을 주었다. 선배들 중에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음직 한 유명 가수라도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기는 어려웠다.
가수들의 권익 증진과 원로급 선배들의 복지 향상 등을 위해 정부 산하가 아닌 독립적인 협회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름 있는 가수들이 총대를 메고 젊은 가수들이 참여했다. 그렇게 정부에서 독립해 가수들이 주체적으로 2006년 설립한 게 대한가수협회다. 나는 임기 2년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대한가수협회를 창립할 때 후배 가수들이 잘 따라준 점이 지금도 고맙다. 그전에는 트로트 가수 따로, 발라드 가수 따로, 모두가 따로 놀았다. 이들을 뭉치게 하는 게 큰 과제였다. ‘낭만에 대하여’를 부른 최백호, ‘그대에게’를 부른 신해철, 그룹 ‘핑클’의 이효리 등 많은 가수가 도움을 줬기에 모두가 함께할 수 있었다. 2006년 5월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총회를 열고 그해 11월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가수 200여명이 모여 창립식을 했던 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대한가수협회가 보장받고자 한 권익은 이렇다. 노래방이나 방송에서 가요가 나오면 그 저작권이 작곡가 작사가 연주가 가수 등에게 돌아간다. 가수들은 그 저작권료의 배분 비율이 불합리하다고 여긴다. 작곡가와 작사가도 곡을 쓰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곡이 성공하는 데 있어 가수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음악 스트리밍의 경우 유통사와 제작자 작사·작곡가의 몫을 제하고 가수·연주자가 받는 몫은 6% 정도다.
원로급 선배 중에 생활이 힘든 분이 많다. 오늘날 가요계가 있기까지 고생을 많이 했지만 요즘 유명 가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산다. 저작권료 분배를 현실화하면 협회에서 원로급 선배들을 돕자고 회원들에게 요청할 명분이 생길 것 같다.
***[역경의 열매] 남진 (24) “몇 년 전부터 준비한 곡입니다”… 빈자리 채워준 ‘둥지’
3년 준비한 새 음반 마무리 작업 중 무명 작곡가가 놓고 간 테이프 듣자마자 감탄… 히트곡 갈증 날려
남진 장로가 2016년 작곡가 차태일과 함께 녹음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너 빈자리 채워 주고 싶어, 내 인생을 전부 주고 싶어, 여기 둥지를 틀어.”
2000년 발표한 곡 ‘둥지’의 가사 일부다. 그 곡이 요즘 나를 대표하는 곡이 된 듯하다. 최근 한 아나운서도 나를 소개하며 ‘둥지’를 언급했다. 나이가 쉰을 넘기니 젊은 세대와 멀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둥지’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좋아해 줬다. 젊은 세대도 내게 친밀감을 느꼈고 ‘임과 함께’ 등 나의 오래된 곡들도 부르게 됐다.
1990년대 후반만 해도 가수의 가장 큰 수입원은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빈잔’ 이후 특별한 히트곡이 없었던 나는 가족을 위해 정말 열심히 공연에 나섰다. 마음 한쪽에는 후속곡에 대한 갈망이 항상 있었다.
공연을 하면서도 틈틈이 새 음반에 넣을 12곡을 준비했다. 3년이 걸렸다. 녹음까지 마치고 마무리 작업 중일 때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내 작업실에 누군가가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놓고 갔다. 지방 공연이 많았기에 사무실을 비울 때가 많았다. 내가 없으니 카세트테이프만 놓고 간 것이다.
녹음을 다 끝낸 뒤였는데도 우리 직원이 카세트테이프를 틀었다. 곡이 마음에 들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언뜻 들었는데 느낌이 좋았다. 직원에게 제대로 틀어보라고 했다. 이번에는 ‘딱’ 손뼉이 쳐졌다. 그 리듬에 감탄이 나왔다. 누가 곡을 만들었나 명함을 보니 차태일이라고 돼 있었다. 그때만 해도 모르는 이름이었다. 전화해서 “어떻게 곡을 썼느냐”고 물으니 “선생님 드리려고 몇 년 전부터 준비한 곡”이라고 답했다.
새 음반을 발매하기 직전이었지만 모든 작업을 중지시켰다. 편곡자를 불러 바로 녹음실을 예약하자고 했다. 예약이 꽉 차 있었지만 마침 배일호가 노래하고 있었다. 한 곡만 녹음하면 된다며 사정해 녹음을 마쳤다. 그 곡이 차태일 작곡의 ‘둥지’다. 카세트테이프가 조금만 늦게 왔어도 그 곡을 담지 못했을 거다.
그 후 차태일은 최고의 동반자가 됐다. 원래 그는 전자피아노 연주자였다. 무명이었으나 음악성을 숨길 수 없었나 보다. 나보다는 어리지만 연배가 있어 같은 세대라 할 수 있었다. 전자피아노로 팝송을 많이 연주해 멜로디 진행 감성 등 음악 취향이 나와 비슷했다.
내 삶은 초대 대한가수협회장을 맡기 전과 후로 나뉜다. 평생 젊을 줄만 알았는데 50대를 넘긴 시점부터 나이가 들어감을 서서히 느꼈다. 지금도 콘서트를 하면 5시간 동안 70여곡을 부르는데 춤도 곁들이니 웬만한 체력으로는 힘들다. 젊은 사람도 힘든 일을 하다 보면 나이 들어감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지난해 최희준과 신성일이 별세하며 많은 걸 느꼈다. 그다음 세대가 나라는 게 현실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가수로서 산 내 삶은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 것인가. 오늘날 나를 있게 해준 팬들에게 좋은 모습과 노래로 보답하고 떠나는 게 나의 숙제다. 가수로 데뷔한 뒤 지금이 가장 어렵고 조심스럽게 느껴진다. 여기서 잘못하면 지금까지 쌓은 모든 게 망가질 수 있다는 걸 절감한다.
멋진 가수가 되고 싶다. 노래만 잘한다고 좋은 가수가 아니다. 동료와 선후배, 팬들에게 좋은 사람이었다는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인기를 누린다 해도 사람의 삶은 거기서 거기다. 유명인으로서 좋은 점이 하나라면 어려운 건 아홉이다. 나의 자식들도 내 삶에 대한 평가를 평생 듣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역경의 열매] 남진 (25) 초등생 때 교회서 특송… 가수로 이끌어 주신 듯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교회 출석… 그 후 40여년 하나님 모른 채 지내
남진 장로가 2017년 3월 서울 서대문구 가재울성천교회에서 간증하고 있다.
요즘은 전국교회를 돌며 간증 집회를 인도한다. ‘둥지’를 부르며 “여러분, 우리 모두 교회에 둥지를 틀까요”라고 외치면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한다.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시작한 것은 2015년 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에서였다. 믿음이 늦었던 만큼 성령이 날 단단히 붙잡아 주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나처럼 늦게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가 한 명이라도 더 복음을 접할 수 있도록 소명을 다하고자 한다.
내가 처음 교회를 접한 건 목포북교초등학교 5학년일 때다. 학교 바로 옆에 양동교회가 있었다. 광복 직후 초대 전라남도지사를 지냈던 이남규 목사가 시무한 교회다. 이 목사는 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목포를 이끌어가던 큰 어르신이었다. 선친과는 의형제 사이였다. 이 목사의 막내딸은 나의 초등학교 1년 후배였다.
양가가 깊이 왕래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촌 형은 양동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골목대장 노릇을 했던 형이었지만 신앙만큼은 진지했다. 하루는 그 형이 ‘교회에 와서 특별 찬송을 불러 달라’고 부탁해 처음으로 교회에 가보았다. 있는 힘껏 노래를 불렀다. 어렸지만 노래를 제법 불렀나 보다. 하나님께서 내 특송을 듣고 귀여워서 가수를 시켰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그 후 하나님을 모른 채 40년을 살았다.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조직폭력배의 흉기에 찔리는 등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그런데도 나의 생각과 의지, 눈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들었다. 젊고 건강했고 용기가 있었다. 기도 한 번 하지 않았다.
1991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을 맡으며 나 자신만이 아닌 다른 이도 둘러보게 됐다. 존경받아 마땅한 선배들이 생각보다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접했다. 세상 모든 인기와 명예가 덧없이 느껴졌다. ‘나는 누구인가’ ‘남은 내 삶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하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모든 일을 오롯이 스스로 할 수는 없다는 걸 절감했다.
그때 가수분과위원회와 친하게 왕래하던 목사님이 한 분 있었다. 수천만원을 들여 선배들에게 동남아여행을 보내주는가 하면 별세한 선배의 장례식도 직접 치러줬다. 겨울이면 생활이 어려운 선배들에게 꼭 한 벌씩 따뜻한 점퍼를 선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재벌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이분은 왜 그럴까 생각했다. 교회를 다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호기심에서였을까. 그 목사를 만난다며 몇 차례 교회를 찾아갔다. 무엇이 그가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도록만드는지 궁금했다. 40년 전 양동교회에서 특송을 했던 것까지 떠올리며 신앙이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집 근처 교회에 잠시 다니기도 했고 집에 있을 때 설교 방송을 틀어놓기도 했다. 방송으로 설교를 들으며 그 말씀의 의미를 삶 속에서 되새기려 했다.
그러던 차에 친척인 장욱조 한소망교회 선교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새에덴교회에서 특송을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가수 노사연 조영남과 함께 교회를 찾았다. 직후 고향 후배인 바리톤 여현구로부터 “형님, 주일마다 새에덴교회에 나오시오”라며 한 번 더 연락이 왔다. 친한 동생의 부탁이어서 한번 나가겠다고 답했는데 지금까지 새에덴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참 절묘하다. 집에서 설교 방송을 챙겨볼 때부터 믿음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때맞춰 지인들을 통해 교회로 이끌어주셨다.
***[역경의 열매] 남진 (26) 가수로서 누린 인기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 깨달아
“찬양으로 많은 이에게 말씀의 기쁨” 새에덴교회 명예홍보장로 맡아 여러 교회 다니며 특송과 간증
남진 장로(왼쪽 두 번째)가 2017년 새에덴교회에서 딸들과 함께 명예홍보장로 직분을 받고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든 일을 겪는다. 운이 나쁘거나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 부적을 만들고 굿을 하며 미신에 빠져들게 된다. 무신론자라면 원인을 분석해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해결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금세 깨닫는다.
크리스천들은 다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께 의지한다. 나도 요즘 손주가 아프면 ‘예쁜 손주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라며 하나님께 두 손 모아 기도한다. 하나님을 믿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의지할 생각이 없던 내겐 큰 변화다. 그래도 삶의 방식이 한순간에 바뀌진 않는다. 갓난아기처럼 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만 성령이 나를 붙들어 인도하신다는 것을 느낀다.
2015년 경기도 용인 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에 출석하게 된 데는 고향 사람인 장욱조 한소망교회 선교목사와 바리톤 여현구의 도움이 컸다. 이후엔 소강석 목사의 설교가 나를 단단히 붙들어 줬다. 평소 방송에서 그의 설교를 접해와 익숙했던 데다 전라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쓰면서 솔직한 모습을 보여줘 정감이 갔다. 소 목사의 설교를 실제로 처음 듣는 순간 어찌나 귀에 쏙쏙 들어오는지 푹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유머 감각도 있고 인간적으로도 소탈한 분인 것 같다.
2017년 새에덴교회 명예홍보장로 직함을 받고 전국 여러 교회를 다니며 특별 찬송을 하고 있다. 부족한 게 너무 많은데 명예라도 장로 직분을 받게 돼 부끄럽기만 하다. 하나님 앞에서는 가식을 부릴 수 없음을 안다. 찬양으로 많은 이에게 하나님 말씀의 기쁨을 전하라는 취지로 알고 최선을 다하려 한다. 팬들이 보여준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기도 하다.
간증할 때는 최대한 간단하게 한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신앙적으론 부족한 게 많아 잘못 표현하면 오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내 부족함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다. 가수로서 오늘날까지 받아온 모든 인기가 내 능력의 결과인 줄 알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임을 이제야 느낀다고 간증한다. 목소리는 물론 나의 인간적인 노력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얘기한다.
40여년 전 고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내게 ‘알았네 나는 알았네’라는 찬송을 직접 불러보라고 권했다. 처음 듣는 노래였기에 무슨 곡인가 궁금해하는 내게 하 목사는 이 곡이 내게 잘 맞을 거라고 했다. 지금에서야 내게 왜 그 노래를 권했는지 알 것 같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주관하심을 이제야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나를 만들어주신 하나님께서 내 삶을 주관하시고 성령이 나를 붙들어 인도해주시기를 매일 기도한다.
집에는 나무로 만든 예수상이 있다. 양 한 마리를 가슴에 안고 있는 큰 목각인데 새벽에 문득 깨어 그 앞에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곤 한다. 묻고 싶은 말을 마음껏 묻고 부탁도 한 번씩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는 부탁이다. 내 멋대로 살아온 세월이 긴데 그동안 잘못 살아온 습관을 고치는 방법은 간절한 기도밖에 없다. 평소에는 유튜브로도 설교방송을 듣는다. 그렇게 하나님과 가까워지며 그분의 말씀을 되새기곤 한다.
***[역경의 열매] 남진 (27·끝) “내 사명은 이제 하나님 만난 기쁨 전하는 것”
오늘날 나를 만든 곡 하나 하나가 축복… 하나님 모르는 팬들에게 믿음 권할 것
남진 장로가 21일 경기도 성남의 한 음식점에서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고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2017년 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에서 명예홍보장로가 됐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수많은 성도 앞에서 부를 때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는 가사가 내 신앙의 삶을 담은 것 같았다. 몇몇 성도들은 내 노래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주님 만난 삶에서 행복을 찾은 경험이 나에게만 있는 경험이겠는가. 내 사명이 성도들의 아픔과 눈물을 닦아주고 하나님 만난 기쁨을 전하는 데 있음을 느낀다.
지금 생각하면 오늘날 나를 만든 곡 하나하나가 큰 축복이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상황에 맞는 좋은 곡을 만났던 것 같다. 물질적인 것을 구해야만 축복이겠는가. 가수로서 좋은 곡과 가사를 받는 게 더 큰 축복이다. 내게는 ‘울려고 내가 왔나’ ‘가슴 아프게’ ‘빈잔’ ‘둥지’ 이렇게 네 곡이 최고의 곡이다. 나를 가수로 서게 한 ‘울려고 내가 왔나’, 작곡가 박춘석을 만나게 한 ‘가슴 아프게’, 오랜 공백을 딛고 대중 앞에 다시 설 수 있게 만들어 준 ‘빈잔’과 ‘둥지’는 내 인생 곡이다.
만남 또한 중요하다. 이 세상에 태어나 가정을 만들고 훌륭한 작곡가와 작사가를 만난 것 모두가 인연이다. 하나님은 삶 속에서 인연을 건네며 역사하심을 느낀다. 잘못된 인연은 인생을 비극으로 만들지만 좋은 인연은 인생을 축복으로 만든다. 어떤 것도 나만의 힘으로 이룬 게 없다. 모두가 참된 인연의 도움으로 이뤄진 것들이다. 항상 하나님께 좋은 인연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내 삶의 흔적을 정리해 남기는 일이 한편으로는 부끄럽다. 하지만 내가 경험하고 누린 모든 일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안다. 올해 말 전남 고흥군에 ‘남진가요기념관’을 건립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평생 나를 아낌없이 사랑해준 팬들과 함께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기념관은 공연 사진과 무대 의상, 레코드판 등 한국가요사를 엿볼 수 있는 여러 소장품으로 채워진다. 팬들과 소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팬클럽 하우스도 들어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별명은 ‘오빠 부대의 원조’다. 어느 가수가 55년간 한결같은 사랑을 받았겠는가. 팬들은 서울이든 제주도든 가리지 않고 공연을 찾아와 맛있는 전라도 음식을 싸주며 응원해준다. 50년 전 중학생일 때 나의 팬이 된 분 중에는 손주를 본 이도 있다. 노래는 사람을 젊게 만든다. 나도 대학생과 같은 젊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팬클럽 회원들은 모두 내가 교회를 열심히 다님을 알고 있다. 몇몇 믿음이 없는 팬에게는 오랜 시간 하나님을 모르고 산 나도 하나님을 믿게 됐다며 믿음을 권한다. 어렵고 힘든 세상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감사와 사랑 속에 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는 성경 말씀처럼 사랑으로 산다면 숱한 어려움과 슬픔도 우리를 비껴갈 것으로 믿는다. 사랑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믿음밖에 없다. 모두가 믿음을 찾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를 사랑하는 팬 모두가 현실의 아픔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 크리스천이 아닌 이들도 이 글을 읽을지 모른다. 그들에게도 믿음이 전해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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