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 월터 롤리는 1584년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 건설을 추진했다. 탐사 후 노스캐롤라이나 해안의 로아노크(Roanoke) 섬이 식민 대상지로 선정되었고 이주민을 모집했다. 이리하여 존 화이트의 인솔 아래 남자 90명, 여자 17명, 어린이 11명 등 모두 118명이 1587년 7월 22일 로아노크 섬에 상륙했다. 화이트는 보급 물자를 가져오기 위해 귀국했는데 때마침 영국과 스페인 간에 전쟁이 벌어져 발이 묶이고 말았다. 3년이 지나 1590년 8월에 화이트가 로아노크 섬으로 돌아와 보니 아무도 없었다. 나무 울타리에 CROATOAN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을 뿐 아무런 흔적도 없이 행방이 묘연했다. CROATOAN은 로아노크 섬에서 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섬이어서 화이트는 이 섬을 수색하고자 헸으나 화이트가 타고 온 배의 선장은 수색을 거절했다. 이 대규모 실종 사건은 "잃어버린 식민지"라 하여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제임스 1세 시절인 1607년초 버지니아 회사는 105명의 이주민을 모집하여 아메리카로 보냈다. 이들은 세 척의 배 수전 콘스턴트 (Susan Constant) 호(號), 갓스피드(Godspeed) 호(號), 디스커버리(Discovery) 호(號)를 타고 영국을 출발해서 그해 4월 26일 체서피크 만에 도착했다. 항해 도중 1명이 죽었다. 그들은 체서피크 만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 5월 13일에 상륙하여 터를 잡고 영국왕의 이름을 따서 제임스타운과 제임스 강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 최초의 아메리카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제임스 타운
이들 104명은 정착지의 가혹한 여건으로 6개월 만에 절반이 죽고 1년 만에 7할이 죽었다. 뒤이어 도착한 이주민으로 1609년 12월 제임스타운의 영국인은 220명이었으나 이듬해 봄이 찾아 왔을 때 생존자는 60명이었다. 식량 부족 때문이었다. 그 겨울을 지나면서 참을 수 없는 굶주림으로 묻힌 지 사흘 지난 한 남자의 시신을 파내어 다함께 먹어 치웠다. 어떤 사람은 자기 품안에서 자고 있는 부인을 죽여서 시체를 토막 내고 소금에 절여 머리를 뺀 모든 부분을 깨끗이 먹었다.
제임스타운의 생존자들은 인디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고 그들로부터 옥수수와 담배의 재배법을 배워 정착에 성공했다. 담배는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인디언 족장의 딸 포카혼타스가 영국인과 결혼하고 이주민을 도와준 이야기는 디즈니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제임스타운의 인구는 1618년 1천명으로 늘어났고 영국인들은 이 일대를 버지니아라고 불렀다.
포카혼타스 - 제임스타운
버지니아 식민지 초기 지도자
수전 콘스턴트호 복제품
제임스타운 300주년 기념탑 - 오벨리스크 형상이다
제임스타운 400주년 기념주화
담배
1620년 9월 16일 102명의 청교도가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잉글랜드의 플리머스를 출발해서 11월 21일 지금의 매사추세츠 주 프로빈스타운에 도착했다. 12월 21일에 지금의 보스턴 근방에 상륙하여 그곳을 플리머스라고 이름 지었다. 이들의 원래 목적지는 제임스타운이었으나 항로를 이탈하여 엉뚱한 곳에 도착하는 바람에 살아갈 방도가 막막했다. 겨울을 넘기는 동안 절반이 굶어죽었고 나머지는 인디언의 도움으로 살아 남았다.
청교도들의 이주 동기는 돈벌이를 위해 버지니아로 간 사람들과 달랐다. 청교도는 성서 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이단 종파였다. 그들은 교황과 사제의 권능을 부인한 까닭에 가톨릭과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받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난 것이다. 매사추세츠는 토양이 척박하고 겨울이 몹시 추워서 청교도 외에는 이주민이 별로 없었다.
메이플라워호의 항해
프로빈스 타운과 플리머스
메이플라워호 복제품
메이플라워호 기념물
누구나 알고 있듯이 미국의 공식적인 역사는 메이플라워호에서 시작된다. 대다수 한국인은 메이플라워호는 알아도 제임스타운은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러나 102명의 청교도들이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제임스타운의 인구는 이미 1천명이 넘었다. 죽은 사람을 포함하면 청교도들에 앞서 제임스타운에 도착한 사람들이 수천 명이었고, 이들을 싣고 메이플라워호에 앞서 제임스타운에 도착한 배가 수십 척이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왜 앞서 도착한 사람들을 제쳐두고 청교도들을 건국의 시조로 삼은 것일까?
아무도 이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남북전쟁의 결과이며 링컨 우상화와 맥을 같이 한다.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북부는 미국의 지배 세력이 되었고, 남부는 북부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후 북부인들은 북부의 터를 닦은 청교도들을 미국인의 조상으로 섬겼다. 이들보다 먼저 제임스타운을 개척한 사람들은 남부인의 조상이므로 미국의 시조로 모실 수 없다는 것이다.
북부인들은 청교도들을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즉 순례 시조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부르고 청교도 정신을 미국의 건국 정신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남부인들이 플리머스보다 제임스타운을 더욱 성대하게 기념하는 것으로 보아 미국의 공식적 건국신화는 오로지 북부에서만 통용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