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ng-nam Oh
3시간 ·
<<영성 없는 진보>> 그리고...
최근 책 소개가 이어지네요. 이번에는 얼마 전 출판사로부터 받은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의 <<영성 없는 진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온뜰, 2024)이라는 책입니다. 온뜰 출판사 편집자 박예찬 님이 이 책을 편집하면서 제 생각이 났다고 하며 한 권 보내주었습니다.
이 책에서 김 교수님은 오늘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하고 그 위기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분석한 다음 그 처방법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김 교수님에 의하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한국 정치가 “영성의 부재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믿음이 병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성이란 무엇인가? 김교수님은 그것이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상을 전체로 고찰할 때” ‘조선적 영성’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나와 전체의 합일에 대한 믿음”으로, 한국에서 원효의 ‘일심(一心)’에서부터 퇴계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이나 수운의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에 이르가까지 일관되게 이어져 내려온 한국 사상 전체의 본질적 특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짧게는 해방 이후, 길게는 동학 농민 혁명 이래, 이 나라의 진보적 정치 활동이란 “전체를 위한 자기 희생”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수 많은 사람이 전체의 선을 위해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독재에 맞서 싸운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전태일이라 할 수 있지만 전태일 뿐 아니라 3.1 운동, 5.18에 참석한 이들도 모두 전체와 내가 하나라는 믿음에 기초한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한 운동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런 믿음이 증발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어디에서도 나와 세계가 하나라는 믿음도, 그 믿음에 근거하여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근원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되면 “정치는 나를 던져 세계를 구하겠다는 열정이 아니라, 단지 권력을 쟁취하고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욕망의 경연장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가? 김 교수에 의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지난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런 믿음은 믿음이기 때문에 종교적 영역이지만 현재 역사 의식도 없이 오로지 개인의 안녕과 구원만을 강조하는 재래 종교에서는 이런 믿음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낡은 종교가 물러가고 새로운 믿음, 그리고 그 믿음에 뿌리를 둔 새로운 영성이 도래할 때만 우리가 처한 전면적 불의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부처를 믿는 것도 아니라,” 오로지 “믿음을 믿는 것”(117쪽) 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고 이런 믿음이 최제우와 한용운과 전태일 등 선구자들이 보여준 믿음이며 이들이 믿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래하는 새로운 하나님일 것”이라고 책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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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니 다빈치 코드의 저자 Dan Brown이 쓴 Origin이라는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한국어로도 <<오리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종교학 전공자인 제가 보기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큰 소설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 소설 때문에 이 소설의 배경이 된 스페인을 방문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이 소설에 심취되었더랬습니다.
소설 끝 부근에 가면 주인공 Langdon이 커쉬라는 제자가 제작한 인류의 근원을 파헤칠 중요한 컴퓨터 프로그램의 비밀번호를 찾기 위해 바르셀로나의 성가족성당(Sagrada Familia Basilica)으로 가서 지하에 펼쳐진 영국의 신비주의자면서 화가인 William Blake의 시(詩)에서 “The dark religions are departed and sweet science reigns”(어두운 종교는 떠나가고 감미로운 과학이 지배한다)는 문구를 발견하고 그것이 바로 password라 알게 됩니다. (제가 지금 한국어 번역을 가지고 있지 않아 영어로 된 것을 인용하는데, 한국어 번역본에 나온 번역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 후 이 성당을 담당하고 있던 Beña 신부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베나 신부가 블레이크의 시에서 “어두운 종교”라는 구절이 마음에 걸린다고 하며, 블레이크가 종교들을 어두운 것, 악의적인 것, 심지어 악한 것으로 본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하자, 랭돈 왈, “그것은 일반적 오해입니다. 사실 블레이크는 깊이 영성적인 인물로 18세기 영국의 건조하고 속좁은 기독교를 훨씬 넘어서 윤리적으로 앞서간 분”이라고 하면서 그에 의하면 종교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창조적인 사고를 억누르는 어둡고 독선적인 종교요, 다른 하나는 내면을 들여다 보는 내성(內省, introspection)과 창조성을 권장하는 밝고 확장적인 종교라는 것입니다.(the dark, dogmatic religions that oppressed creative thinking, and the light, expansive religions that encouraged introspection and creativity. 제가 말하는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와 맞먹는 생각 같습니다.) 랭돈은 이어서 블레이크의 결론을 쉽게 표현하면 “감미로운 과학이 어두운 종교들을 추방해 주므로 개명된 종교들이 번창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Sweet science will banish the dark religions so the enlightened religions can flourish.’”라는 말이라고 일러줍니다. 그러자 베냐 신부는 “교수님 감사합니다. 교수님은 제가 가지고 있던 거북한 윤리적 딜렘마에서 저를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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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교수도 어두운 종교는 떠나고 감미로운 과학이 열어놓은 공간에 새로운 종교가 도래할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짧은 이 책을 통해 오늘 한국 정치의 현주소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미래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평소 심층종교의 특색 중 하나가 나와 우주, 그리고 나와 이웃이 모두 하나라는 만유일체(萬有一體)를 강조하는 것이라 주장하는데, 김상봉 교수가 이와 같은 맥락의 이론을 펼치는 것이 반가워 이 책을 즐겨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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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다리: 출판사 사장이 정모세, 편집자가 박예찬인 것을 보면 모태 기독교인들인 것 같고 책이 나온 곳도 IVP인데 어찌 이런 진보적인 책을 출판하게 되었는지 사뭇 흥미롭네요. 이들도 어둡고 독선적인 기독교에서 밝고 확장적인 기독교를 택하게 된 것인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