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가을은 깊어지고 11월 중순 낙엽 쌓인 명륜당明倫堂 뒤뜰에서 맑은 얼굴로 서있는 華仁이 얼굴은 가을빛을 받아 투명하였 고 입술은 그윽하고도 청초하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아지고 둘 사이의 시간이 멈추어선 듯 감동적인 입맞춤의 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가을의 뜨락은 온통 금빛 바다가 되어 있었고 명륜당과 은행나무들은 다시 제 모습으로 드러났다.
어색한 순간을 잠시 모면하려 고개를 숙이고 예쁘게도 잘 물든 노오란 은행잎 하나 찾아서 상기된 華仁이 손에 건네주면서 문득 백년百年의 애련愛戀을 떠 올렸다.
다음 주 일요일 초선이 시골로 향할 때면 늘 타던 중앙선으로 양평까지 갔다.
곧 바로 천년 고승처럼 생긴 은행나무인 천왕목天王木이 초록빛으로 가득한 나이 어린 암자菴子를 인자하게 내려다 보고 있는 용문사龍門寺를 찾아가 양손을 모아 나란히 서서 공손히 합장했다.
다음 주엔 華仁이 요청으로 가까이에 있는 광주廣州의 천진암天眞庵까지 들렀다. 그곳은 마음의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하여 고요를 깰까 봐 하늘도 숨 을 죽이고 있었으며 수채화의 갤 판처럼 칠색七色낙엽과 선명한 가을빛을 가득 담고 있어 흰백의 순결純潔함이 더욱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가슴에 성호聖號를 그었다.
2부 ( 李善仁 , 외할머니)
화인이를 만난 그해의 무척 따뜻했던 겨울이 지나고 1980년 새봄이 되었으나 결코 정취情趣를 느낄 봄은 아니었다. 春來 不似春이라는 말이 아주 적절하게 와 닿았다. 연희동 집에 출입이 잦아지고 외할머니와 대화도 많아 졌다
문패를 보고서 이선인李善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현관 앞 사진속의 인물人物도 많이 익숙해졌다
녹차 한잔을 내 오셨는데 평소 중국中國 명차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그것이 바로 中國 강소성江蘇省에서 주로 생산되는 벽라춘碧螺春임을 금새 알아 보았다.
-이거 벽라춘이네요 !
-호오! 그걸 다 알아 ?
-귀한 차라 잘 알죠! 잘 먹겠습니다 !
벽라춘은 녹차로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른 봄철에 딴 잎에서 유래한 것으로 진한 꽃향기와 신선한 과일 향기가 나는 품위 있는 차로 유명하다
-맛이 어떤가 ?
-매우 산뜻하네요!
-후후 ! 맛도 잘 알고 !
그런데 문득 창밖에서 매일 들려오는 함성과 요란한 소리에...
-온통 시끄러워 ! 내 평생 조용한 것을 본 게 몇 해가 되질 않아 ! 지난 백여년 이상이나 어지러운 세상이었는데 언제 平和가 오려나 ?
-후유 ! 그러게요 !
그러고 보면 화인이 외할머니 생애(生涯)에 조용한 시절이 거의 없었다.
大韓제국 光武 11년 1907년 丁未生정미생 이라 합방合邦과 己未年 만세운동 관동 대지진 과 中日전쟁 太平洋 전쟁 직전의 大韓수재들의 親日 전향.
그러나 각계各界의 인물들이 대거 親日 전향에서도 半萬年 朝鮮의 ‘얼’과 ‘님’의 魂불을 피웠던 두 분이 계셨다
한분은 國學者이자 독립 운동가 였던 爲當선생(1893 ~ 1950 )이다. 爲堂은 漢詩에도 조예(造詣)가 깊었다.
-爲堂 선생님은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지.
-어떻게 아세요 ?
-이화여전 시절 배운 적이 있지.
-아 ! 그러세요.
-그때 무슨 과목을 배우셨어요?
-국학, 조선사 뭐 그런 과목이었지.
爲堂은 친우이자 조선이 낳은 천재인 春園과 그리고 六堂마저 親日로 돌아서자 곧 바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상복喪服을 입고 山으로 숨었으며.
詩調 한 수로 아픈 심경을 토로吐露하였으니 ‘명주 고름같이 가냘프고 부드러운 손’ 으로 쓴 바로 그 유명한 근화사 槿花詞.삼첩 三疊 이다.
-槿花는 培花 高女의 반화사班花詞 八篇 중의 으뜸인 수화首花야.
-반화사 八篇이 뭔데요 ?
-槿花 梨花 蘭化 梅花 菊花 蓮花 桃花 杏花 順으로 구성되어 있지.
-아 !그런 것도 있었군요. 할머니는 어느 女학교 나오셨어요 ?
-나는 淑明高女를 다녔어. 엄비嚴妃가 세운 학교지. 진명도 嚴妃가 세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