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의 섬세한 돌보심
(출 13: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출 13: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출 13: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출 13:20)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출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출 13: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제가 요즘 그 어느 때 보다 더욱 기도에 힘쓰고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것을 구하면서 제게 나타나는 현상은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바뀌고 제 언어와 행동이 아이처럼 보이는 모습이 가끔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당혹스럽기 까지 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좀 의젓하고 무언가 신중해야 되는데 어찌 이렇게 경박(輕薄)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제 마음에 주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마 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특징은 무엇을 말할까요? 여러 가지 특징을 말할 수 있지만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염려와 근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저의 집 아이들도 어렸을 때 둘이 있을 때는 엄청 웃어댑니다.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고 우스운지 웃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이 아이들이 벌써 서른이 넘어서 그 때의 웃음 보다는 한결 줄어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슨 차이지요? 어른이 되면서 생각이 많아지고 고민하고 염려하는 것이 많아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어린아이는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웃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깊어지면서 염려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눈동자같이 지켜 주심을 확증하기에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잘 웃고 떠들고 단순해지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믿음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철저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어지면 내 사고와 행동이 어린 아이와 같이 순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명칭을 얻은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자기를 하나님의 눈동자처럼 보호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향하여 눈동자 같이 섬세하고 치밀하게 보하고 계심을 여실하게 경험했고, 이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것이 눈꺼풀입니다. 갑자기 위험한 일을 만나거나, 이물질이 들어오려고 하면 번개같이 눈동자를 덮어 보호합니다. 눈동자가 상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눈에서 눈물이 나는 것도 눈동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눈이 빡빡하고 따가운 것은 눈물샘에서 눈물이 잘 안 나와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보호해 주시는 경험은 다윗 개인의 경험이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경험이었습니다. 이 자애로운 돌봄은 부모가 자식을 향하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고 그분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눈동자처럼, 날개 아래 품은 새끼처럼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오늘의 말씀은 애굽에서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저들의 보호자가 되셔서 저들을 인도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지도를 보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길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가는 길로 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쉬운 길입니다. 장애물만 없으면 당시에 걸어서 한 달이면 충분하게 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두 번째 길은 중앙의 광야를 가로질러 가나안으로 직접 들어가는 길입니다. 세 번째 길은 홍해를 지나 시내반도 남쪽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지도를 보면 당연히 첫 번째 길이나 두 번째 길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멀고 힘든 길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먼 길로 인도하셨을까요? 출애굽기 13장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출 13:17) 했습니다. 하나님은 적군들을 만나 전쟁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 먼 길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제나 전쟁을 피하는 그런 나약한 백성으로 남아있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중요한 이유는 저들이 군대로 세움을 받는데 있었습니다. (출 12: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여호와의 군대’로 부르신 것입니다. 군대의 의미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분의 능력으로 승리를 얻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군대’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군대입니다. 군대는 반드시 싸워서 물리쳐야 할 대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이라고 하면 저와 여러분은 하늘의 정사와 어둠의 권세를 잡고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이 더러운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유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구원에 대하여 너무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내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반복적으로 듣는 말들이 “예수 믿어 구원 받습니다”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되 잘 믿으십시다.”라고 권면합니다. 잘 믿는 믿음이 교회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봉사하고 헌금 잘 내면 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 이면(裏面)에 영적인 전쟁을 치러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이르렀을 때 상급이 있고 누림이 있습니다. 천국은 결코 평등한 곳이 아닙니다. (고전 15: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 했습니다. 그 나라에서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였던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오늘은 성령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돌봄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하여 성령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될 것입니다.
첫째는 약속의 말씀에 붙들림을 받아야 됩니다.
본문 19절에서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죽으면서 유언을 남긴 것을 400년이 넘는 시점까지 그 말을 기억하였다가 마침내 애굽에서 탈출하여 나올 때 유골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요셉이 남긴 말을 가슴에 새겼다는 것은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내 보내실 날이 있음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자세는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됩니다. 성령은 내 안에 있는 말씀으로 그 분의 뜻을 전하십니다. 내 안에 말씀이 들어있지 않으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반주기에 갖가지 음원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판으로 몇 장의 찬송을 적어서 치고 명령을 하면 그 명령을 따라 반주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성령은 내 안에 담겨있는 말씀으로 말씀하시고 그 분의 선하신 뜻을 알려주십니다. 만약에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하면 큰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기록된 말씀의 범주를 넘어서 그 분의 뜻을 전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느 날 마음이 답답하고 곤하여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따지듯 “하나님 뭐라 말씀해 보세요! 어휴! 답답합니다.”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성령께서 제 마음에 살풋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어떤 음성을 듣기를 원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하였지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네 음성을 들었고 너의 기도를 들었으니 응답하리라고 하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 때 성령은 “이미 기록된 말씀으로 응답하지 않았냐?”고 하십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떠올리게 하십니다. 그 말씀이 응답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에게 필요한 말씀을 떠올리고 이를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합리화하면 어떻게 되냐고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의 말씀은 믿음의 성도들에게 필요한 모든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성령으로 화합하여 내 것을 받아들이면 그 말씀이 내 삶을 이끌어 갑니다.
루마니아 공산 치하에서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혀 무려 14년의 옥고를 치르신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그 분이 감옥에 갇히면서 조그만 성경을 몰래 들고 들어갔는데 감옥에서 하도 심심해서 성경에 과연 ‘두려워하지 말라’가 몇 번이나 나오는지 세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365번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365번의 ‘두려워하지 말라’를 발견한 범브란트 목사님은 힘들 때마다 이 말씀을 되뇌면서 기도하여 두려움을 극복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성령은 기도할 때 말씀이 떠올리게 하면서 하나님의 선명한 뜻을 전하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22절에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광야의 낮은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정도로 뜨거운 폭염이 계속해서 내리 쬐입니다. 웬만한 식물들은 그런 뜨거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고사해 버리고, 광야에서 비취는 햇볕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대로 밖에서 한 시간을 서 있으면 일사병으로 쓰러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구름기둥으로 마치 차일(遮日)을 펼쳐서 햇볕을 가려주지 않으시면 저들은 생존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축복의 은혜를 적절하게 가려주시므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바르게 세워나가십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무척 어색하게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성령이 가린다니 말이 되냐고 반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에 등장하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축복을 받아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 왕이 천국에 이르렀다고 보십니까?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였고,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기록할 정도로 하나님을 잘 믿던 왕이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나이 들어서 이방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많은 이방여인들을 왕비로 삼았고, 왕비들로 인하여 이방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산당을 지었고, 이방신들을 좇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십계명 가운데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제일 계명을 범하였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지 아니했는데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결국은 솔로몬은 그가 젊어서 하나님을 섬겼으나 나이 들어서는 이방신들을 섬기므로 그는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요즘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이 누리는 호화판 생활은 재벌회장과 다를 바가 없음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듣고 보고 있습니다. 세계최대 교회로 부흥시킨 목사는 골프 연습장이 달린 고급빌라에 살고 있고 어떤 목사는 시가 3억원에 달하는 최고급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고 합니다. 또 다른 목사는 경기도 남양주 인근에 값은 매길 수도 없을 정도의 초호화 별장을 소유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분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였더니 복을 내려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과연 그렇게 호화판으로 세상에 묶여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변화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저들은 겉으로는 번지르하나 그 안에는 예수와는 상관없는 생명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됩니다. 저는 언젠가 기도하면서 내게도 풍요를 누리는 목사처럼 은혜와 축복을 허락하여 주실 것을 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성령의 음성은 “네가 그들처럼 풍부를 누리게 되면 겸손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깨달은 것이 성령께서 적절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가려주셔서 내가 그 축복으로 인하여 교만하지 않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베풀어주시고자 하는 모든 축복을 성령께서 가려주시지 않고 우리들에게 그대로 임하게 되면 그 축복이 오히려 독이 되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광야는 낮의 불볕더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밤이 되면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 견디기 힘든 추위가 몰려옵니다. 그래서 한 여름철에도 밤에는 두터운 겉옷을 걸치고 지내야 하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이런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끼치는 해로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시 121:6). 이럴 때 불기둥은 화롯불과 같아서, 급격히 떨어지는 기온으로 인한 밤의 추위를 막아주는 난방장치였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진영의 주위에 거대한 모닥불을 피워 놓은 것처럼 훈훈하고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광애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정만 60만 명, 여자와 유아까지 200만으로 추산되는 대 민족인데 그들이 한 밤의 추위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진영의 주위에 거대한 모닥불을 피워 놓은 불기둥이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세상에서 밤중을 지날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따뜻하게 감싸 주십니다. (욥 35:10)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밤중이라는 것은 죄로 인하여 고독하고 고통스런 환경을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하여 있을 때 성령께서 내게 찾아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공의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의 빛으로 찾아 오셔서 내가 죄인 되었음에도 사랑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시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 죄를 지었음에도 나를 한 밤중에 추위에서 불을 피워 따뜻하게 안위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제가 아버지의 사랑을 깊게 누린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의 아버지 환갑잔치에 갔다가 막걸리를 몇 사발 먹은 것이 사달이 나서 한 밤중이 일어나 마당에 토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희 아버지가 잠에서 일어나셔서 저의 등을 두들겨 주시면서 “웬 술을 그렇게 마셨니?”하면서 야단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아침에 미안한 마음으로 일어났더니 마당에 오물을 말끔히 치워놓으셨습니다. 그 때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유산으로 상속받아 먼 나라에 가서 탕진하고 돌아 온 아들을 아무런 질책 없이 맞아 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옵니다. 오히려 그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며 신을 신겨 잔치를 베풀어 기쁨을 드러내는 모습이 나옵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죄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를 품어 주시고 사랑으로 감싸 주십니다. 이 때 넘치는 사랑에 의하여 흘리는 눈물이 참된 회개입니다. 나의 죄를 죄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 줄 때 내 안에 담겨 있는 악한 죄가 떠오르면서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오늘 우리들의 삶에 깊숙이 간여 하여 주셔서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 않는 축복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 가십니다. 또한 죄악의 형벌에서도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 주서서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감격하게 하십니다.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십시오! 성령의 민감하게 반응하는 비결이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하는 마음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