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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라밀 실천도량 원문보기 글쓴이: 보기
마음의 본성 2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현존하는 현실과 그에 대한 설명을 저는 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적용이라는 것은 방법, 혹은 철학이나 개념입니다. 세 번째는 결과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초전법륜인 사성제의 설법을 이해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실제 부처님의 설법을 들여다보면,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의 반복을 통해서 사성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부처님께서는 진리의 특정한 본질을 규명하셨습니다. 즉 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성제를 설명하실 때에는 이 각각의 진리의 기능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을 알아차려야 하고 고통의 원인은 제거되어야 하며 고통의 소멸이 실현되어야 하고 소멸의 길에 이르는 길을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이해를 바탕으로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세 번째로 반복하실 때는 그 앎을 적용했을 때 어떤 결과를 성취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설하셨습니다. 사성제를 설하신 초전법륜에서부터 부처님께서 진리를 어떤 맥락에서 제시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첫 번째는 현실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셨고 두 번째는 그 지식을 일상의 삶과 수행에 적용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그 길을 적용함으로써 얻게 되는 결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불교의 특징을 세 가지 범주로 구별해서 말하는데 그 첫 번째는 불교의 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불교의 개념과 철학입니다. 불교의 개념과 철학은 불교적으로 현실을 이해하는 것, 즉 불교의 과학에서 나옵니다. 불교의 과학 다음이 불교의 개념, 혹은 철학입니다. 그리고 나서 세 번째는 불교라는 종교입니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없앨 수 있는 바로 그 가능성 때문에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성하께서 법문하시려고 했던 책이 있었는데 여기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어서 읽어드리겠습니다. 실제적인 설명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마음의 근본적인 바탕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본래적인 상태의 마음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설명인데 그것은 현실의 본성을 이해하는 단계에 해당합니다. 어떻게 마음이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는지를 분석함으로써 현실의 숨겨진 본성을 찾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소개를 하고 난 다음 어떻게 그것을 수행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세 번째는 그 수행에 기초해서 어떤 차원의 경험과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설명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과학자들과 함께 일련의 토론과 세미나를 계속해왔습니다. 그것은 대화 혹은 토론이었고 사실상 서로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기본적으로 네 분야가 있습니다. 우주학, 신경생물학, 양자 물리학과 같은 원자물리학, 그리고 심리학입니다. 양자물리학에 유사한 견해가 있습니다. 우주학은 기본적으로는 같습니다. 하지만 세계가 평평하다거나 중심에 산이 있다거나 하는 더 특정한 설명이 있는데 이제는 낡은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불교 경전에는 우주학에 대한 다른 설명이 있습니다. 사실 불교는 어떤 것을 택할 것인지에 대한 자유가 있습니다. 양자물리학은 2000년전 불교의 개념에 큰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물리학의 가장 최근의 발견과 불교의 개념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어쨌든 물질의 영역에서는 불교가 현대 과학으로부터 배울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함께 공부하는 것은 아주 가치가 있습니다.
그다음은 신경생물학이 있습니다. 물론 밀교에서 마음과 에너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신경생물학에서) 감정과 신경, 이런 것들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물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현대 과학이 훨씬 더 앞서 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주 유용합니다.
하지만 신경과 의식, 마음의 관계는 아직도 그다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과학(소프트 사이언스)이라고도 불리는 현대의 과학, 심리학은 아직 성숙한 단계가 아닙니다. 유치원생 정도의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고대 인도에 있었던 마음에 관한 과학은 그것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 아주 많은 정보들이 있는데 어떤 것들은 현대 과학자들에게도 유용한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제 과학자 친구들은 실험을 위해 간단한 장비들을 (인도에)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거의 10년 전인 것 같습니다. 장비를 설치해 놓고는 누군가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막상 장비가 있으니까 우리가 기다리던 실험 대상자는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먼 곳에서 누군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거기에 장비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작년에 그 두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것들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더 깊은 탐구를 위해서 서로의 협력을 통한 지식의 융합이 필요하고 그것이 아주 유용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관한 과학자들과 만남을 계속해 왔는데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2천, 3천 년쯤 전에 인도에 있었던 감각적 경험과 정신적 경험에 대한 어떤 지식입니다. 우리가 과학자들과 대화를 해오는 과정에서 고전적인 인도의 사유와 관련하여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대 과학이라는 이론적 전통에서는 고대 인도의 사유와는 달리 감각적 경험과 정신적 경험의 분명한 구분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구분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감각적 의식 혹은 마음은 몸, 혹은 몸의 요소와 아주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정신적 차원 역시 제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거친 단계에서는 몸과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점점 더 미세해질수록 점점 더 많은 독립성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행동을 유발하는 근원적 상태의 마음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감각적 차원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차원의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행복과 불행, 해로움과 부상 등 우리 경험의 많은 부분을 규정하는 정신적 차원의 경험의 기능과 작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단순히 감각적 차원의 경험을 관찰하고 학습하는 것에 주력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티베트 불교는 날란다의 순수한 전통을 잇고 있으며 그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물론 티베트에서 7세기에 이미 불교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고 그것으로부터 배우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보다 체계화된 불교의 교학과 수행은 8세기가 되어서야 이루어졌습니다.
실제로 교학과 수계를 책임지고 있었던 분은 샨따락시따였습니다. 8세기에 티베트의 왕 티송데우쩬이 두 분의 인도 스승을 초청했는데 한 분은 빠드마삼바바였고 다른 한 분은 샨따락시따였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계율과 법을 가르치는 책임은 주로 샨따락시따에게 있었습니다. 샨따락시따는 아주 잘 알려진 날란다 최고의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중관(madhyamaka) 철학을 잇고 있었습니다.
샨따락시따는 위대한 논리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날란다 대학의 설립은 서기가 시작 될 무렵부터 이루어졌습니다. 나라르주나(용수)를 비롯한 많은 스승들이 날란다 대학 출신이셨습니다. 그러한 법맥에서 위대한 철학자와 논리학자가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샨따락시따는 중관파의 철학자였고 동시에 위대한 논리학자였습니다. 티베트어로 번역된 그의 저술이 지금도 있는데 그가 훌륭한 논리학자였고 철학자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티베트에 불법을 들여온 핵심 인물이 날란다 대학 최고의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위대한 수행자, 위대한 스님이었다면, 그리고 스승이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였다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제자도 그런 사람이길 바랄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티베트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날란다 전통에 맞닿아 있습니다.
저는 종종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곤 하는데 티베트 전통에서는 6-7살 정도 되었을때 벌써 근본적인 불교 저작들을 외워서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제 경우 6-7살 때에는 불교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지식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저를 소개한 리처드 블럼이 제가 13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불교 경전들을 암기하는 공부를 시작했을 때 저는 수업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노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스승은 회초리를 준비해 두어야 했는데 당시 저와 제 형이 둘 다 스님이었고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 스승에게는 회초리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보통 회초리, 다른 하나는 노란 회초리였습니다. 노란 회초리는 성스러운 회초리라고 여겨졌습니다. 성스러운 노란 회초리는 성스러운 인간 달라이 라마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성스러운 회초리를 쓴다고 해서 고통까지 성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똑같습니다. 제가 공부의 의무를 지고 간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모든 책들을 다 암기해서 공부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전에 비구 스님이었고 저의 통역자였던 친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나가르주나(용수), 아리아데바(제바), 아상가(무착), 바수반두(세친)와 같은 날란다 스승들의 근본 저작들을 공부했습니다. 그 모든 책들이 날란다의 스승들에 의해서 저술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중간에 논서도 공부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티베트 논서는 물론이고 인도의 논서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 논서도 물론 읽지만 모든 핵심 저술들은 날란다에서 탄생한 것들입니다. 이 논서들에서도 중요한 개념에 도달하면 날란다의 스승들이 한 말에 의지하고 그것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날란다 전통이라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또 한분 빠드마삼바바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밀교의 가르침을 펴는 특별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많은 인도의 스승들이 쓴 책 가운데 티베트어로 번역된 것은 200권 정도에 달합니다. 그 가운데 꽤 많은 밀교의 저술과 논서들이 나가르주나(용수) 아리아데바(제바), 그리고 다른 많은 분들에 의해서 탄생했습니다.
티베트 불교의 전통은 날란다의 계보를 잇고 있는데 그런 가운데 완전한 형태의 불교가 존재했습니다. 그 말은 팔리 전통에 입각한 불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도 율장의 원래 언어는 팔리어였습니다. 경, 율, 론 삼장으로 알려진 것 가운데 하나는 계율에 관한 것입니다. 티베트의 율장은 주로 팔리어로 된 가르침에서 번역 된 것입니다. 남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는 경전이고 다른 하나는 아비달마 또는 더 높은 지식입니다. 경전과 아비달마에는 특정한 팔리 원본이 있지만 티베트어 판은 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번역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티베트 전통에서 아비달마 전통을 논할 때 거기에는 두 가지의 체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더 낮은 아비달마, 다른 하나는 더 높은 아비달마입니다.
티베트에서는 8세기 이후 완전한 형태의 불교가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초기 번역파 즉, 닝마파하고 합니다. 9, 10, 11세기에 티베트에서의 불법 확립은 고난과 쇠락의 어려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국가로서의 티베트도 서로 다른 작은 왕국들로 나뉘어졌습니다. 11세기 초엽에 스승 아띠샤가 인도에서 티베트로 왔습니다. 티베트 불교 홍법의 두 번째 시기라고 불리는 때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으로부터 카담파, 카규, 사캬 등 다른 티베트 불교의 전통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 겔룩의 전통도 시작되었습니다. 이 모든 전통들은 각기 완전한 불교의 전통을 구현했습니다. 그것은 그 각각의 전통들이 금강승을 포함한 모든 승(乘)의 가르침을 구현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초기 번역파인 닝마 전통의 경우 구승(九乘) 즉 9개의 수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먼저 제자승(弟子乘), 독각승(獨覺乘), 보살승(菩薩乘) 등 세 개의 외부적인 수레로 규정됩니다. 그 다음 금강승(金剛乘)의 가르침 안에서는 ‘크리야(kriya,액션)탄트라’, ‘우빠탄트라’, ‘요가탄트라’가 있습니다. 이것들을 가리켜 ‘외부적 탄트라’라고 합니다.
나머지 세 가지는 ‘내부적 탄트라’로서 ‘마하탄트라’, ‘아누탄트라’, 그리고 ‘아띠탄트라’입니다. 보시다시피 거기에는 완전한 형태의 불교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제 미세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닝마파, 특히 존첸(Great perfection)의 관점에서는 가장 미세한 차원의 의식에 관한 것, 가장 미세한 차원의 의식에 관한 것, 즉 맑은 빛의 본래적인 마음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거기서의 핵심은 주로 그 차원의 마음의 본성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의 성취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족첸 전통의 독특한 한 방법은 기본적인 마음과 본래적인 자각(릭파, rigpa)의 구별에 기초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 구별은 다음과 같은 것에 기초해서 이해됩니다.
더 우발적이고 더 일시적이며 불안정한 본성을 갖는 것은 기본적인 보통 상태의 마음의 특색입니다. 본래적인 자각(릭파, rigpa)은 그와 같은 불안정함이 없이 항상 존재하며, 의식의 근원적인 자질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그 둘은 이렇게 구별되어집니다.
죄송합니다만 아까 제가 잊은 것이 있습니다. 본래적인 자각은 불안정한 성질이 없고 항상 존재한다는 특성 등으로 규정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사만타바드라 즉, 보현보살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시간을 초월합니다. 다시 말하건대 족첸 전통 안에는 수많은 차원, 혹은 수많은 종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요한 세 종류의 가르침으로 마음의 주기(cycle of mind), 확장의 주기(cycle of expanse), 가르침의 주기(cycle of instruction)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족첸 전통안에도 수많은 종류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현보살의 특성으로 언급되는 본래적인 마음(rigpa)은 실제로 근본적인 불성으로 설명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본래적인 부처의 성품입니다.
하지만 이 근본적인 불성은 우연히 일어나는 정신적 요인, 즉 번뇌나 다양한 생각의 과정 등에 의해 가려져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서 이 근본적인 불성이 드러날 때, 우연히 일어난 정신적 요인들이 말끔히 없어지면 우리는 다시 깨어나고 다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다시 깨어나는 것, 혹은 다시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반야바라밀다(perfection of wisdom)파의 가르침에 들어 있는 생각과 유사한데 거기에서는 마음의 본성이 자연스러운 니르바나(열반)라고 표현됩니다. 자연스러운 니르바나는 유여열반, 무여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기초로서 작용합니다. 무여열반은 온갖 번뇌를 완전히 소멸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자연스러운 열반(니르바나)이 없다면 실제적인 니르바나를 성취할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비슷한 것입니다.
족첸(Great perfection)의 가르침에서는 그와 유사하게 우리 안에 근본적인 불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가 다시 깨어남을 얻을 수 있는, 즉 불성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닝마파의 관점에서 구승(九乘), 아홉 수레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부처님의 일반적 가르침에 대해 단순히 제시하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승의 모든 가르침이 그 길에서 수행하는 사람의 진보에 적절하게 활용되는 전통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승의 모든 가르침은 수행자 개인의 변화에 적절한 것이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성제의 가르침과 수행은 제사승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사성제의 가르침이 더 상세히 설해질 때, 즉 사성제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의 인과적 연관이 정교하게 논해질 때 12연기의 가르침은 합당한 것이 됩니다.
여기서 12연기의 관계가 두 가지 방법 즉 순서대로 그리고 역관으로 설명되고 성찰됩니다. 그리고 나면 수행자는 홀로 깨달은 자의 수레, 즉 독각승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개인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보리심의 개발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기초해서 보시, 지계 등 육바라밀의 수행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선정(禪定, 사마타, tranquil abiding)과 지혜(위파사나, 특별한 통찰)의 개발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나면 수행자는 보살승을 수행하게 되고 그것에 기초해서 또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다음 단계는 디어티(deity) 요가의 수행이 일상의 수행에 도입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개인의 경험의 단계에 따라서 디어티 요가 수행이 좀 더 미세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 다음에 오는 세 가지 수레의 단계를 점차적으로 밟아가게 됩니다. 어떤 수행자의 경우 초기에는 크리야(kriya, 액션) 탄트라의 수행에서 축복을 주고 수행을 허락해 주는 외부 스승의 형상을 관상하는 디어티로 삼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디어티 요가를 통한 깨달음이 더 깊어지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침내 수행자가 마하 요가, 아누 요가, 아띠 요가로 나아갈 때 그 단계에서는 미세한 에너지와 채널과 정(精)의 제어와 같은 훨씬 더 진일보한 금강승의 수행이 도입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비적인 수행으로 구축되었을 때 족첸의 아띠 요가 수행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수행의 초점은 본래적인 자각의 실현을 가져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롱첸빠(Longchenpa)의 7개의 보물(Seven Treasuries)에서 제시된 접근법입니다.
저는 족첸 수행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롱첸빠의 철학적 시스템의 보물을 공부하라고 추천합니다.
그 다음에는 소원 성취의 보물을, 그리고 그것에 기초해서 편안히 머무는 본래적 상태의 보물을 공부합니다.
이 각각의 명상주기는 일(日) 단위 혹은 주(週) 단위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면 보통 더 오랜 기간 동안 이 수행을 한꺼번에 다시 합니다. 그것이 이롭습니다.
그런 다음에 점차적으로 최상승의 보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법계의 보물을 공부합니다. 이렇게 하면 수행의 접근이 매우 체계적일 수 있습니다.
-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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