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정의 온전한 신앙모습 말씀 : 삼1:22-28
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25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26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서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는 것은 교회생활 뿐 아니라 가정, 직장, 사회에서 일관성있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온전한 신앙가정이란 예수의 피로 흠뻑 젖은 가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 자매인 고로 신앙가정은 하나의 작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가정의 신앙모습은 예배가 있어야 하겠고, 봉사, 선교, 교육, 훈련이 살아숨쉬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편 127:3) 라고 하였습니다. 상급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랑이 되는 것 같이 분명히 자식은 부모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러나 자칫 사랑만 있고 채벌이 없는 가정의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온전한 가정의 신앙모습은 광야와 물이 잘 어우러진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가르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여러분, 교회는 건물이 아닌 우리의 믿음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교파나 제도가 아닙니다. 또한 시대의 사상이나 철학도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로 사신 온전한 교회의 모습은 사랑과 공의가 살아 숨쉬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교회는 광야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교회의 온전한 모습은 사랑과 봉사, 선교, 교육, 훈련이 어루어진 모습이면서, 특히 사랑과 공의가 확실히 적용되는 가정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 사랑은 충만하나 공의가 실종된 모습의 가정교회가 많음을 보게 됩니다. 소가 쌍둥이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맏송아지가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나에게는 코뚤레를 끼지 말아 주십시오. 너무나 아파요. 대신에 동생 송아지보다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만일 약속을 어기면 그 때 가서 코뚤레를 하여 주십시오.> 주인은 맏송아지의 청을 들어 주었습니다. 맏송아지는 동생 송아지보다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코뚤레는 끼운 것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기라도 하듯이 무슨 일을 하든지 잘 했습니다. 주인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감사와 감격이 사라졌습니다. 동생 송아지는 항상 코뚤레를 끼고 고통스럽지만 변함없이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맏송아지는 꾀를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점 요령을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인 말을 안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맏송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생 송아지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님! 형 송아지 어디 갔어요?> 주인이 대답하였습니다. <푸줏간으로 보내 죽여 버렸다.>
그렇습니다.
식물인간화 되어가는 자녀들, 로봇들로 성장하는 자녀들이 갈곳은 푸줏간으로 간 맏송아지와 다를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온전한 가정교회의 모습을 분별하셔서 광야의 은혜와 축복을 수혜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모두 되셔야 할 것입니다.
본론>
=====1:22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한나는 그 서원을 성실히 지킬 양으로,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일다 자제하였다. 아이를 젖 떼거든...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 아이가 하나님의 전에 평생 바쳐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양육이 된 후에야 가능했다. 대개 중근동 지역에서는 이유(離乳) 시기를 타지역 보다 활씬 긴 약 3년 정도로 잡았다(참조, 마카비 짜서 7:27). 그러므로 이 기간이 지나면 사무엘도 어느 정도 자라서 '희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2:22>에게 맡겨져 육체적으로 양육될 수 있었고, 또한 제사장에 의하여 영적으로도 훈련될 수 있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슈미트(Schmidt) 같은 학자는 3년 정도 된 아이는 엘리 제사장에게 오히려 부담만 될뿐이라는 가정하에서 아이가 젖뗀 후 13살까지는 어머니의 손에서 양육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한다. 그러나 이는 벌로 타당성이 없는 견해이다(Keil,Fay). 왜냐하면 그처럼 서원하여 성소에 바쳐진 어린 아니는 제사장이 직접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희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에 의해 양육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Gerlach).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 사무엘은 레위인이므로 당연히 성소에서 봉사를 할 수 있었다<1절>. 그렇지만 일반적 원리대로 한다면, 그의 봉사 가능 기간은 30세에서 50세까지인 것이다<민 4:30>. 그러나 어머니 한나의 서원에 따라 사무엘은 '평생'(11절) 하나님 앞에서 봉사할 수 있게 되었다. 11절 주석 참조.
=====1:23 여호아께서...이루시기를 원하노라 - 17절에서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한 말처럼, 엘가나의 말 또한 한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남편 엘가나의 간절한 마음을 나타낼 뿐이다. 따라서 혹자(Rabbins)의 생각처럼 엘가나의 이 말을 그가 사무엘의 출생과 봉사에 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직접적인 계시를 받고 한나에게 예언한말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이다(Keil Delitzsch).
=====1:24,25 수소 셋 - 25절에는 '수소'가 단수 형태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에 근거하여 70인역(LXX)과 일부 역본들(Syriac, Arabic Version)은 여기 '수소 셋'을 '삼년 된 수소'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옳지 못하다(Thenius). 왜냐하면 25절의 기록은 단순히 아이를 위하여 사용된 제물이 수소 한 마리 뿐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세 마리의 수소 중 한 마리는 아이를 주께 바쳐 평생 성전에서 봉사케 하는 의식과 관계된 특별 번제용이며, 또 하나는 엘가나의 가족이 매년 드리던 매년제의 제물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서원을 이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키 위한 감사의 제물임이 분명하다(Pulpit Commentary). 가루 한 에바 - '에바'(Ephah)는 구약 시대에 고체의 부피를 측정하는 단위로서, 빠에바는 약 23L 가량이다. 그런데 한마리의 수소를 번제로 바칠 경우 밀가루 한에바의 십분의 삼(3/10)이 필요하다는 민수기 15:8-10의 규정에 비추어 볼때, 여기 '가루한 에바'는 수소 세 마리를 제물로 바칠 때 필요한 밀가루의 분량임이 분명하다(Keil, Smith).
=====1:27 여호와께서...허락사신지라 - 여기서 한나는 사무엘의 출생이 전적으로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요, 또한 은총의 선물임을 고백하고 있다. 사실 오랜 기간동안 무자(無子)로 인해 당한 온갖 고통과 수모를 생각할때, 어렵게 얻은 자식을 여호와의 전에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아들이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서원을 변치 않고 그 아들을 여호와께 도로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한나의 신앙을 귀하게 보신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그 정성과 신앙을 기억하시고, 그녀에게 사무엘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허락해 주셨다(2:21).
=====1:28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 한나의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이다. 여기서 한나가 하나님께 사무엘을 드리겠다고 한 것은 일시적인 위탁이 아닌 영원히 양도하겠다는 뜻이다. 실로 그녀는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고(욥 1:21), 아울러 하나님께 대한 서원의 존엄성을 깨닫고 있었으므로(시 15:4) 모성애를 초월한 헌신적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드리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울'은 직역하면 '요구되다', '구하여지다'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요구를 듣고 그 아이를 주셨으므로, 자신도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여 그 아이를 바친다'는 뜻이다(Fay, Calvin). 그 아이는...경배하니라 - 문자적으로는 '그가 경배했다'란 뜻이고, '그 아이'란 말은 없다. 그런데 여기서 '그'(he)라는 3인칭 단수 대명사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한글 개역 성경처럼 '그'를 '사무엘'로 볼 경우, 당시 3살짜리 사무엘이 경배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하다. 그래서 어떤 사본 및 역본들(별겟역, 수리아역, 아랍역)은 이 말을 복수 형태의 '그들'로 번역하여, 곧 '엘가나와 그의 가족이 경배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처럼 히브리 사본을 고치는 것 역시 무리이다. 그러므로 가장 타당한 해석은 '그'를 '엘가나'로 보는 것이다. 즉 한나가 제사장에게 아들을 바쳤을 때 남편 엘가나는 아직 성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기 때문에, '엘가나는 경배하니라'라고 번역함이 타당할 듯하다(Keil Delitzsch, Vol-ii.p. 28). 더욱이 다음 장에서 곧이어 한나의 찬양(2:1-10)이 언급되는 것은 아직 엘가나와 한나가 모두 여호와의 성소를 떠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결론>
우리는 주를 위하여 받는 크고 작은 고난과 핍박을 특권으로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히 12:6).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바꾸어 가집니다(5절). 그래서 야고보는 시련을 당할 때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여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약 1:2).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역경은 외부적인 핍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핍박하는 자는 반드시 징벌하시고 핍박을 받는 자는 보상하십니다(6-7상절).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핍박하는 사람은 벌주고 핍박받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야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자녀교육과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의 공의하심을 잘 교육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은 너무 약하고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괴롭히는 자를 벌주시고 괴로움을 당하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원리가 온전한 가정의 신앙모습을 만들어 감을 분별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게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