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철(金秀哲. 호는 北山)
김수철의 행적이나, 구체적인 사항을 알려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교우 관계를 미루어보아서 추정하기로는 1820년 경에 출생하여 1850-60년 경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고람 전기가 김수철의 그림을 중개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전기를 통하여서 그림을 판매한 것은 사실이나 도화서 화원은 아닌 듯 하다.
김수철이 교유하였던 인물들은 대부분이 벽오사(碧梧社) 동인들이었다. 김수철은 벽오사와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 등의 중인들의 서화 모임 주변을 맴돌면서 전기, 조희룡, 김영 등이 중인 신분의 화가들과 교유함으로 그도 중인 계급이 아니었을까로, 생각한다. 김수철은 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들어오는 문물을 접하게 된다. 새로운 문화와 화풍도 만났을 것이다.
19세기의 조선의 중인들은 예찬과 황공망의 회화를 자신들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고, 받아 들였다. 김수철 회화의 바탕이 문인화풍인 것은 이것이 이유이다. 그러나 조선의 중, 후기에 이르면 명말청초의 전통파적인 화풍도 받아들인다. 청대 화단에서는 일격적(逸格的)인 화풍이라는 개성파의 회화와 양주팔가의 화풍도 받아 들였다. 김수철의 회화가 맑고, 참신한 담채한 것도 그 영향이다. 준법은 사용하지 않고 윤곽선만으로 대상을 표현하여 선명한 느낌을 주는 화풍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진경산수화와 관계가 깊다.
윤제홍과 김수철의 화풍에는 유사성이 많다. 둥치가 가늘고, 춤을 추는 듯한 소남의 모습, 간략하게 묘사한 인물, 푸른 색이 감도는 담채를 화면 전체에 칠하는 기법도 닮았다. 짙은 묵점을 여기, 저기에 찍으므로 자칫 단조로움을 주는 화면에 강한 액센트를 주는 기법도 닮았다. 수채화처럼 간략하고, 담백하게 표현하는 그림을 학산파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1840년에 윤제홍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김수철과 윤제홍의 나이 차이는 거의 50년이나 된다. 김수철이 나이 차이 때문에 윤제홍에게 직접 그림을 배웠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윤제홍의 화풍을 가장 분명하게 잇고 있다.
김수철 회화의 바탕은 남종 문인화이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중국의 남종 문인화풍이다. 여항화가로 분류되는 김수철이 중국의 남종화풍을 배운 과정은 당시에 화가들이 문인화풍을 배운 과정과 같다. 첫째는 중국의 화보를 통하여 남종화풍을 배웠다. 김수철에엑 영향을 준 화보로는 안씨화보(顔氏畵譜), 당시화보(唐詩畵譜), 그리고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이다. 화보를 통하여 원, 명의 남종화풍을 수용하였고, 청대의 화풍도 수용하였다. 개성적이고, 현대적인 구도와 필치, 감성적인 묵법과 화려한 색채로 현실감있는 화제를 선택한 양주파 화풍도 수용하였다.
중국의 문인화풍을 받아들이는데는 김정희가 큰 역할을 하였다. 여항의 화가들은 김정희의 화론을 따랐으므로 김수철의 남인화풍에는 김정희의 영향도 묻어 있다. 그러나 김수철은 여타 여항 회가들과는 차이가 나는 화사한 담채를 사용하여 산뜻함을 주는 색채 감각과 참신한 구도는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풍을 창출하였다.
2) 김창수
김창수는 김수철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김수철의 동생이라는 주장도 있고, 심지어는 동일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김창수에 대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도 그의 이름이 올려져 있지 '않다.
‘한국회화대관’에는 ‘호는 학산(학山)이요. 산수를 잘 그렸다. 안개가 자욱한 산수를 특히 잘 그렸다. 서화는 김수철의 그림과 방불하다’라는 간단한 소개만이 있다. 그러나 최순우는 ‘김창수는 북산 김수철의 동생이다. 일명 김수혁(金秀赫)이다. 현재로서 두 화가는 작풍이 아주 비숫하다. 다만 김창수의 필력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다. 구도나 설채에도 어딘가 조금 모자란다는 느낌을 준다. 두 작가가 동일인일 가능성도 있다.’라고 하였다.
만약 동일인이 아니라면 김창수는 김수철을 추종하는 화가일 것이다. 김창수도 김수철과 마찬가지로 현대적인 감각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리므로 근대회화로 나아가는 가교를 놓은 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