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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플레비언나비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남산
◇ 의정부 외국인학교 시절 첫째(앞줄 맨 왼쪽)와 둘째(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한국에서 교수로서의 활동이 어느덧 5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하나님은 나를 장신대로 이끄셨고,
이 글을 쓰는 2023년 8월 현재, 지난 26년 동안 광나루에서 나의 삶을 충만하게 채워주셨다.
그러는 사이 아홉 살, 여섯 살로 한국에 처음 발붙였던 두 딸이 어느덧 열세 살, 열 살이 되었다. 그간 두 아이는 한국에서만 세 번의 이사와 세 번의 전학을 해야만 했고 한국 학교와 외국인학교를 경험하며 성장하게 되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경험한 학교는 광주 외국인학교였다.
이제 서울에서 학교를 정해야 했는데, 서울의 외국인학교는 학비가 만만치 않았다. 연희동과 용산의 외국인학교를 알아보니 내 봉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의정부에 위치한 한 외국인학교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곳에 두 딸이 다니게 되었다.
자녀들이 다니게 될 의정부의 외국인학교와 광나루에 있는 장신대 사이에 살 집을 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때마침 고교 동창이 운영하는 부동산 회사에서 창동역 근처의 서울가든아파트를 알아봐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였다. 우리 부부는 자녀들이 걸어 다니며 전철과 버스를 탈 수 있는 그곳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그런데 광주에서 서울로 이사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일단 광주 임대아파트의 저렴한 보증금으로 서울의 아파트를 계약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갖고 있던 임대 보증금 세 배 정도의 액수를 은행에서 대출받는 수밖에 없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의정부 외국인학교는 작고 소박한 학교였으나 농구부도 있었고, 치어리더팀도 운영하고 있었다. 나의 두 딸은 치어리더를 경험해 보면서 학창 생활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가끔 차로 데려다주기도 하고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을 때 보면 철없는 청소년 시절과 낭만을 즐기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그건 나의 희망 사항이었고 실제로는 먼 길을 오가며 온갖 유혹에 그대로 노출되는 험한 세상에 두 딸을 그대로 내놓은 격이었음을 훗날 깨닫게 되었다. 그때 나와 아내는 밤낮없이 일하며 한국에서의 삶을 영위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녀들의 숙제를 봐주는 일이나 학창 생활 중 야기될 수 있는 다양한 고민을 들어주고 대화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것을 훗날 뼈저리게 절감하게 되었다.
아내는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서빙고에 있는 온누리교회 유년부 전도사로서 사역했다. 서빙고 온누리교회는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교우들이 정말 많은 교회였다. 대개 주일학교 교사들은 일주일에 네 번 정도 교회에서 봉사하며 온갖 예배와 성경공부 프로그램, 그리고 교사모임에 참여했다.
그렇게 교회 일을 돕던 아내는 한국컴패션 설립을 위한 창립멤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컴패션은 한국전쟁 중 1952년에 참혹한 한국의 고아 현실을 미국에 있던 성도들에게 알리며, 실로 우연히 창립하게 된 긍휼사역 단체이다. 그들은 선교 현장의 교회와 밀접한 연결을 통해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양육하는 걸 기본적인 정신으로 삼는다.
서정인 목사는 미국의 컴패션 본부에서 몇 년 동안 적임자를 물색하여 선임된 대표로서, 본부 담당자와 아내를 인터뷰했다. 나는 배우자이지만 같이 나와서 인터뷰에 응해 주면 고맙겠다는 요청을 받았다. 아내는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하여 응답하였고 나도 덩달아 컴패션의 직원이 되는 것 같은 심층 면접에 참여하게 되면서 컴패션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면접 이후로 10년 동안 컴패션의 감사직분으로 봉사하게 되었고, 세계 아동 선교와 양육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둘째와 첫째: 리치몬드 PSCE 시절, 1995년경
두 딸은 2001년 가을학기부터 의정부 외국인학교에 다니며 많은 친구를 사귀고, 종종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노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첫째 딸 수진이가 자신은 어릴 때부터 무용이 무척 하고 싶었다며 이제 중학생이지만 무용을 배우게 해달라고 해서 가족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일단 취미생활 정도로 생각하고 창동역 근처에 있는 무용학원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원장은 매우 곤란해하며 “정 그러시다면 수진이가 네 살, 다섯 살이 있는 초급반을 다녀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답했다.
그 답을 들은 딸은 결연한 표정으로 “나이가 문제일 수 없으며 나는 초급반에 들어가 무용의 기초를 배우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표현했다. 딸은 그날로 무용학원에 등록했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무용학원으로 등원하여 매일 거의 일곱 시간씩 맹훈련하며 무용을 배웠다. 그 시절 큰딸은 무슨 전사처럼 보였다. 학교에서 받는 많은 수업과 치어리더 활동, 리더십 훈련 와중에 무용까지 맹렬하게 하고 나서 집에 오면 또 남겨진 많은 숙제를 위해 새벽까지 공부하곤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벌어지는 일을 우리 가족은 목격할 수 있었다. 큰딸이 집에 오면 땀으로 젖은 무용복의 땀이 줄줄 떨어지는 걸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해맑게 웃곤 했다. 하지만 언니의 무용에 대한 열정으로 동생인 둘째가 언니와 떨어져 의정부역, 창동역에서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적이 많았던 걸 우리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워낙 명랑하고 지혜로웠던 둘째 예진이에 대해서는 가족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리치몬드에서 유아시절을 보내고 광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도 얼굴에 웃음을 놓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족 모두는 둘째가 학교 공부에 어려움을 갖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은 다 지나간 일이고 사회인으로 두 딸 모두 잘 생활하고 있기에 지나간 추억거리로 말하고 있으나, 교육학을 가르치던 학자요 아버지로서 느낀 자괴감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둘째는 학교 공부가 너무 버거운 나머지 수년 동안 학교 숙제를 전혀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째는 유치원 때 한국에 와서 영어도 한국어도 모두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 둘째의 미국 고등학교 졸업사진
게다가 큰딸은 현대무용을 전공할 요량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아빠 엄마, 나는 김연아처럼 몸이 이쁘지 않고 특히 팔이 짧아서 무용으로 대성하기는 쉽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을 때 우리 가족도 모두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애써 온 큰딸의 아픈 마음이 사무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딸은 또다시 결연한 표정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겠어요. 고등학교에서 그나마 성적이 괜찮았고 SAT 점수도 괜찮게 나왔으니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는 있을 거예요”라며 캘리포니아 주의 챕맨대학교(Chapman University)에 지원서를 넣고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하지만 큰딸을 뒤따라 미국으로 간 둘째 딸이 오렌지카운티 브레아올린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경험하게 될 공부에 대한 무게감을 어떻게 이겨낼지가 너무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나의 걸음을 인도하고 계셨던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걱정했던 둘째는 당당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졸업한 롱비치 주립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신대의 학기가 막 마칠 무렵 둘째의 고등학교 졸업식이 열렸다. 미쉘 예진 킴이라는 이름이 명단에 있는 것을 몇 번씩 확인하고서 나는 남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다. 자랑스러운 딸의 이름이 거기에 있었기에. 나의 오십 대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사랑하는 주님이 나의 인생의 고삐를 그렇게 잡고 계셨고, 그분의 손길을 따라 하루하루 그분의 뜻대로 빚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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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일은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cnews1970@naver.com
출처 : 주간기독교(http://www.cnew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