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이와 엄마 / 조미숙
1박 2일의 여정을 마치고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섰다. 딸아이 방에서 자던 보물이가 앙칼지게 짖는다. 딸이 잠결에 침대에서 내려 주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반긴다.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두 다리로 서서 팔짝팔짝 뛴다. 보물이는 우리 집에서 1순위고 보물이에게는 내가 그렇다. 먹이고 씻기고 산책시켜 주는 힘이 크다.
내 어릴 적 고향집에는 온갖 동물들이 살았다. 소, 돼지, 닭은 물론 토끼, 거위, 오리까지 다 키워본 경험이 있다. 아니 부모님이 키우셨다. 집을 지키는 개는 항상 있었다, 덕분에 개는 늘 시골집 풍경 안에 같이 들어온다. 소나 돼지는 살림의 보탬이 되라고 키웠지만 개는 엄마가 특히 좋아해서 그랬다. 당신 자식인 양 이미 사라지고 없어도 어떤 개는 뭐를 잘했고 이번 개는 이랬다고 자랑하기 바빴다. 개는 마을 입구에서부터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로도 주인을 알아본다고 영특하다고 늘 치켜세웠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개고기를 먹고 절에 가면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친다는 말이 있었다. ‘동네 누가 그랬네 ’하는 소문이 돌기도 해서 개고기를 먹으면 큰일 날 줄 알았다. 물론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우리 식구는 아무도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개장수에게 팔지도 않았다.
집에서 돌보는 가축이 많으면 개에게 밥을 주거나 닭을 몰아 닭장에 넣는 일 같은 자질구레한 것뿐만 아니라 소나 토끼에게도 먹일 풀을 베로 다니기도 한다. 아버지가 이른 아침 이슬이 앉은 풀을 한 짐 지고 와 부려놓으면 싱그러운 풀 냄새가 훅 끼친다. 닭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내는 소리와 함께 아침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였다. 닭은 집에 손님이 오거나 명절이 되면 여지없이 아버지의 손에 잡혀 맛있는 고기가 되었다. 키우던 닭이건만 전혀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그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었다. 특히 닭고기 육수에 끓인 떡국은 소고기 저리 가라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어디에서 받아온 병아리 네 마리를 키운 적이 있었다. 품에 품어 가며 재우고 먹였더니 나만 졸졸 따라다녔다. 밥상을 차리면 기가 막히게 알고 달려온다. 밥을 먹여 키워서 그렇다. 하지만 병아리들이 어찌나 시끄럽게 굴고 아무 데나 똥을 싸고 돌아다니는지 감당하기 힘들었다. 날개깃이 나오면서 제법 병아리티를 벗는 것 같아 부모님 집으로 보내기로 했다. 시골로 간 병아리들은 연로하시고 적적하신 부모님께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두 분만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들을 부모님은 너무나 애지중지했다. 행여 도둑고양이가 물어 갈까봐 밤에는 방에 들여놓거나 마루 위에 올려놓고 단단히 막아두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식구가 간다는 연락을 받은 아버지가 일찌감치 길가로 마중을 나왔나 보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버지를 따라나선 병아리들은 마늘밭으로 들어가서 함흥차사가 되어버렸다. 엄마는 두고두고 아버지를 타박했다.
한번은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시골의 겨우살이가 힘들어 서울로 가야하는데, 엄마는 며칠 더 남아서 집안을 단속해야 한다고 아버지를 먼저 보냈다. 이것저것 일은 마쳤는데 살아있는 닭이 문제였다. 누구에게 맡길 수도 없었고 잡아달라고 부탁할 사람도 딱히 없어 엄마는 그것을 보자기에 싸 왔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마중 나간 작은언니는 기겁을 했다고 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시골할머니가 보따리에 꼬꼬댁거리는 닭을 들고 있으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승용차도 없는데 살아있는 닭을 들고 지하철을 탈 일이 너무도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 엄마는 죽어도 닭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의 동물 사랑은 고향을 떠나와 서울에서 지내면서도 계속됐다. 큰언니네 강아지에게 사람이 먹는 것은 죄다 먹였다. 아무리 조카들이 말려도 몰래 주어 핀잔을 받았다. 결국은 엄마 때문에 더 이상 키우지 못하고 말았다. 치매를 앓고 있으면서도 돌보아야 한다는 본능이었을까? 막내 동생이 키우던 고양이도 잘 놀아주면서 엄청 예뻐했다. 동물들과 이야기도 잘한다. 이러쿵저러쿵하며 사람 대하듯 한다. 지금 우리 집 보물이를 본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아마 쪽쪽 빨고 물고 할 것이다. 보물이가 사랑스럽고 예쁜 짓을 할 때마다 엄마 생각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