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에게 사랑받는 여자 / 허숙희
추석이 가까워지자 문득 뒷산의 밤나무가 궁금했다. 밤송이가 어느 정도 벌어졌는지 보고 싶어 아무 준비 없이 산에 올랐다. 알밤이 가을 햇살 아래 반짝였다. 마치 누군가가 주워 모아 둔 듯, 여기저기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며칠 전 내린 가을비에 씻겨 더욱 영롱하게 빛났다. 부지런히 움직였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정신없이 주워 담았다. 바지 주머니에도 금세 가득 찼다. 한곳에 모아 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바빴다.
그런데 그때였다. 숨어있던 산모기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물어 댔다. 집모기보다 몸집이 크고, 침도 강해 두꺼운 옷을 뚫는다. 물리면 많이 붓고 가려움이 심하다. 독이 있어 나처럼 피부가 민감한 사람은 물집이 잡히고, 염증이 생겨 오랫동안 고생한다. 그리고 끝까지 따라붙는 끈질긴 녀석이다. 그걸 잘 알기에 더 이상 줍지 못하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손에는 알밤의 묵직한 감촉이 남았고, 마음엔 아쉬움이 맴돌았다.
모기는 유난히 나를 좋아한다. 그래서 여름이 싫다. 남편은 여름 내내 모기에게 한 번도 물리지 않는다. 함께 있어도 방향을 정확하게 틀어 그를 외면하고 나를 향해 정조준한다. 그럴 때면 그는 어김없이 웃으며 말한다. “자기는 모기 맛집이야.” 거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꼭 한마디를 덧붙인다. “당신이 더러워서 그래.” 장난인 줄 알면서도 괜히 약이 오른다. 그때마다 “깨끗이 씻었거든요!” 앙살을 부린다.
도대체 왜일까? 내가 모기한테 사랑받는 이유가 무얼까? 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 사람의 체취와 유전적인 요인에 달려 있다고 한다. 피부의 산성도, 체온, 이산화탄소 배출량, 심지어는 혈액형까지 영향을 준다고 알려졌다. 특히 나처럼 오(O)형은 모기에게 인기 최고라고 한다. 전에 아버지도 유독 모기에 잘 물리셨다. 그렇다면 이 체질이 유전된 걸까? 내 잘못은 물론 위생 탓도 아니라는 생각에 미치니 마음이 편해진다.
여름이 다가오면 나는 모기를 피하려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다. 뿌리는 즉시 살충 효과가 있다는 홈○○를 여러 개 사서 집 안 구석구석에 놓아둔다. 밤에는 전자식 모기 퇴치기를 켜 놓고, 마당에는 살충 기능이 있는 태양광 램프도 설치해 둔다. 가방에는 언제 어디서나 꺼내 쓸 수 있도록 국내 최초로 인증받았다는 위생 기피제 무○○○○를 넣어둔다. 그뿐이랴. 벌레에 물려 가려울 때 바로 진정시켜 준다는 스테로이드가 들어있지 않은 리○○○○ 크림도 챙겨서 다닌다. 올해는 밤을 주울 때 산 모기에게 얼굴을 공격당하지 않으려고 챙이 넓고 촘촘한 망이 둘러쳐진 모자까지 사 두었다.
모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귀신같이 나를 찾아낸다. 그리고 틈만 보이면 영락없이 몇 방 물어 버린다. 어떤 녀석은 아예 나를 따라 집으로 들어온다. 잠깐 방심하면, 팔과 다리 심지어 얼굴까지도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공격한다. 기술이 뛰어난 녀석은 긁기도 힘든 손가락 사이와 발바닥을 문다. 물리면 금세 빨갛게 부어오르고, 참기 어려울 만큼 가렵다. 심하면 피가 나거나 진물이 날 정도다. 웬만한 상처는 준비해 둔 연고로 가라앉지만 지독한 녀석에게 당하면 까만 딱지가 앉을 때까지 괴롭다. 결국 피부과까지 갔던 적도 있다. 아직도 물렸던 자국이 여기저기 거무죽죽하게 선명하다.
지난번에 아무 생각 없이 산에 올랐다가 모기에게 공격받고 내려온 뒤로는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주워 온 밤을 다 먹고 나니, 밤나무 아래서 빛나던 알밤이 눈에 아른거렸다. 이른 봄에 사서 창고에 걸어 둔 그물 모자가 생각났다. “그래, 이번엔 제대로 준비해 녀석들의 맹렬한 환영을 피해야지.” 그물 모자의 끈을 단단히 조이고 장화를 신었다. 방수 일바지와 점퍼, 고무장갑까지 완벽하게 갖췄다. 잠시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흘렀지만, 모기를 피하면서 마음껏 밤을 주우려면 이 정도 불편쯤은 감수해야 한다. 먹고 나눌 만큼 밤을 주웠다.
집으로 돌아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자마자 수돗가에 있던 집모기의 애정 공세를 받았다. 오른쪽 턱을 두 곳이나 물리고 말았다. 긁적긁적 긁으며 밤을 고르다 “모기는 나를 언제나 잊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추석에 조상님 상에 올릴 굵은 녀석들은 따로 골라 담고, 아이들과 친구에게 보낼 밤은 포장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비타민 씨, 비 씩스, 칼륨이 풍부해 신경세포를 보호하고 도파민의 합성을 돕는다는 말을 떠올리며, 지퍼 백에 차곡차곡 담아 김치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다.
올가을 밤 줍기는 이걸로 끝이 났다. 이제 남은 밤은 그 숲을 뛰노는 다람쥐의 몫이다.
첫댓글 하하! 저도 모기에게 사랑 받는 여자랍니다.
주변에 모기 애인들이 의외로 많아요. 그러니 마트에 가면 모기 퇴치제가 즐비한 가봐요.
모기도 무섭거니와 땅벌에게 물리고 풀독도 올라보고 나니 선뜻 산에 가지지가 않습니다. 선생님 글을 읽으며, 긴 연휴동안 산의 밤을 하나도 줍지 않은 것을 반성합니다.
땅벌 무서운 녀석이죠. 물것들이 가리지 않고 절 넘봅니다. 고약한 것들이죠. 사실 시골에 사니 잡초 보다 더 겁나는게 벌레들의 짝사랑입니다.
하하하, 산 모기도 입이 고급인가 봅니다. 특별식을 알아보네요.
지금도 언제 물렸는지 이마 양 눈섭 사이에 한방, 오른쪽 눈 아래 두 곳이 빨갛게 부풀어 있네요. 하하. 미간에 물린건 잠결에 긁었는지 살짝 상처가 났어요.
모기에게까지 사랑 받는 분이시군요. 하하. 선생님 글 읽으니 밤은 버릴 데가 없네요. 가을 가기 전에 부지런히 먹어야겠어요.
모기가 사랑하는 선생님이 여러분 계시군요? 모기에게 안 물리려면 준비를 잘 하셔야 합니다. 장화, 긴 바지와 셔츠, 목과 귀를 덮을 수 있는 스카프, 망사가 달린 긴 챙모자 그리고 모기 기피제를 꼭 뿌리셔야 합니다. 선생님이 성의를 보이셔야 모기가 공격을 단념하거나 후일을 기약할 것입니다. 해충과 싸움 하면서 얻은 귀한 알밤. 선물 받은 분들은 아시겠죠?
단단히 챙겨도 어느새 나에게 파고듭니다. 지금도 미간에 녀석에게 당한 자리가 부풀어 올랐어요. 사랑의 흔적을 남길까 걱정이예요.
하하하, 모기 맛집? 이라니요. 그러니깐 저도 위로가 됩니다. 모기 때문에 늘 우아한 표현을 고집하는 제가 " 내 피는 더러워서 그래." 하는 지저분한 표현을 불사하게 하거든요. 정말, 모기도 나름 생태계에서 필요할 진대... 으, 갑자기 인상이 찌푸려지네요. 어제도 친정집 풀에서 산소에서 한바탕 했거든요.
모기도 한편 불만이 많다네요. 인간들이 때려 잡기만해서. 하하하.
하하하. 모기까지 선생님을 사랑하시는군요. '모기 맛집'이라는 표현도 멋집니다. 저도 일행 중 가장 먼저 모기에 물리는 편이라 그런 지청구를 듣지요. 전 무서워서 이제는 아예 텃밭에 나가지 않는답니다. 보이지 않는 데는 물론이고, 얼굴까지 공격하는 바람에 흉이 져서 혼났거든요. o형이라 그런다는 건 일리가 있네요. 저도 그 혈액형이거든요. 하하하. 재밌게 잘 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