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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지난 8월, 대만 해협을 겨냥한 미사일들이 발사되었다. 중국이 대만을 봉쇄하고 사상 초유의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인 것이다. 이후 강도 높은 군사적 압박을 연일 이어가고 있는 중국, 미국 낸시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 이후 고조된 이 갈등은 미-중 간의 패권경쟁으로 까지 치닫고 있다.
토니 블링컨/미국 국무장관: 긴장 고조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데다 중국을 포함해 아세안 회원국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자오리젠/중국 외교부 대변인: 중국은 모든 것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으며 중국 인민해방군이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번 미국 측에 엄숙히 경고합니다.
내레이션: 계속되는 중국의 위협에 대만 역시 대규모 군사훈련으로 응수하며 긴장감을 드높이고 있는 상황, 하지만 양안 간의 갈등은 그 이전부터 계속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을 이끌던 마오쩌둥과 국민당을 이끌던 장제스가 중국 패권을 두고 맞붙은 국공내전으로 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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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정/KBS 아나운서: 377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오늘은 중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두 인물, 장제스와 마오쩌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은 우리에게도 익숙하죠. 우리 한국 현대사에도 자주 등장하죠.
최태성/한국사 강사: 참 언젠가 장제스와 마오쩌둥 이야기를 할 거다 했는데 드디어 오늘 하네요.
이시원/배우: 중국하면 뭔가 딱 떠오르는 인물이 두 명인 거 같애요. 근데 이게 아름답고 좋다 라는 이미지보다는 둘 다 어마 어마 하잖아요. 중국에서 저의 프로그램을 보고 이 발음이 마음에 안 든다 이 발음이 마음에 안 든다.
허준/방송인: 기죽을 게 없습니다. 자신 있게 발음하세요.
최원정: 편집 잘 해주겠죠.
최태성: 사실은 장제스, 마오쩌둥이 입에 붙어요?
최원정: 선생님, 저 발음 연습하다 왔어요. 우리 때는 장개석(蔣介石)-모택동(毛澤東)으로 발음했어요.
최태성: 그렇죠, 우리 때는 다 그렇게 배웠으니까 쉽지 않은데~
최원정: 중국어 표기법에 맞게 발음해야 되는 게 신해혁명 기준이라구요. 그 이전의 옛날 사람들은 한자음대로 읽었지만 오늘은 표기원칙에 따라 장제스, 마오쩌둥, 톈안먼으로~ (왜래어표기법 제4장 제2절 제1항 中-현대인은 원칙적으로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되 필요한 경우 한자를 병기한다-신해혁명 기준으로 과거인과 현대인 구분),
최태성: 성조까지 넣으신 거예요?
최원정: 너무 어려워요.
이시원: 근데 항상 대만하고 중국은 사이가 안 좋았잖아요. 최근에는 이러다가 전쟁 나는 게 아냐 또 어떤 사람들은 몇 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거다 라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구요.
태상호/군사전문기자: 맞아요, 아까 영상에서 보셨듯이 지난 달이었죠. 대만을 둘러싸고 여섯 군데에서 굉장히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통상적인 군사훈련하고 결이 달라요.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는데 그 수가 무려 11발이에요. 그리고 그중의 일부는 타이완을 동에서 서로 가로 질러서 일본이 정한 경제적 배타수역에 탄착이 되었습니다.
최태성: 그래도 되는 거예요? 안 되잖아요?
태상호: 원래는 안 돼죠. 여태까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서는 이건 뭐 침공에 가까운 건데 하지만 계속 중국이 이야기하는 대만은 우리의 하나의 성(省)이다. 이걸 무력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고요. 군사훈련 자체도 대만을 침공하기 위해서 그들이 해야 되는 모든 군사적 단계를 다 했어요. 해상봉쇄하고 상륙훈련하고 그리고 육해공 전군이 투입되었구요. 그리고 전쟁 전에 꼭 이루어지는 전상자 긴급후송 훈련까지 다 실시해서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제 침공 시나리오는 완성이 됐고 그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리고 겁을 준 것이다 라고 얘기를 하고 있어요.
최원정: 전쟁이 나는 건가요?
태상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에는 전쟁이 날 것이다. 안 날 것이다 라는 예측을 안 하기로 했어요. 왜냐면 그때 잘못 예측을 해서 그게~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진행된 지 6개월이 되었잖아요. 국제 의용군으로 가서 싸우고 있거든요. 그 사람들마다 하는 얘기가 뭐냐 다음엔 대만에서 만나자.
이시원: 그런데 이제 들어보니까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이 없는 것 같애요.
허준: 이렇게 긴장된 상황에서 지난 8월에 펠로시 의장이 갔잖아요. 다들 자국 대통령도 가도 괜찮겠어요 했는데 펠로시 의장이 대만 방문 후 긴장감이 더욱 높아졌잖아요.
최원정: 이게 전쟁의 가능성을 살짝 내비치셨지만 중국-대만 관계의 본질을 알면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우리가 얻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런데 오늘 자리해 주신 김지훈 교수님, 그날에 처음 나오셨는데 사실 어려운 결정을 해주신 거에요. 교수님들 마다 양안 관계를 다루는데 있어서 고민들을 많이 하시는데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일동: 안녕하세요.
김지훈/한양대학교 사학과 겸임교수: 중국하고 타이완의 관계는 보통 양안 관계라고 부르죠. 중국에서도 타이완에게도 아주 민감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사드 배치를 해가지고 중국과 상당히 문제가 생겼었는데 중국에게서 양안 관계 라는 건 제가 보기에 더 민감한 중국의 핵심이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부분입니다. (핵심이익-합의와 양보가 불가능한 최상위급 국가이익), 최근에 들어와서는 양쪽이 상당히 첨예하게 대립을 하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양안관계가 동아시아 전체 또는 세계 평화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이 듭니다.
최태성: 지금 시청자 댓글이 올라왔는데요. 양안 관계의 양안이 뭐냐고 무슨 뜻이냐?
김지훈: 타이완 해협을 두고 중국 대륙하고 타이완 섬이 있잖아요. 양쪽 해협에다 놓고 있잖아요. 서안(대륙)과 동안(대만)=양안(兩岸) 이라고 하는 거죠. 중국의 입장에서는 국가로 보지를 않거든요. 타이완을 국가로 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돌려서 표현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준: (국가를 인정하는) 양국 관계 라고 볼 수 없다는 거죠.
최원정: 본격적으로 얘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타이완과 중국이 지금의 갈등은 국공내전에서 시작이 된 거죠.
김지훈: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애증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24년 군벌세력이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국민당(장제스)과 공산당(마오쩌둥) 간의 협력, 즉 1차 국공합작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27년에 1차 국공이 분열이 되었다. 근데 일본의 침략으로 2차 (1937~1945년) 국공합작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2차(1946~1949년) 국공 결렬 및 내전을 하게 돼죠.
이시원: 붙었다 떨어졌다 친했다 싸웠다 아주 난리네요.
최원정: 이혼했다 재결합했다 남녀관계 같은 느낌이네,
최태성: 국공내전하면 낯설 수 있지만 (도표를) 보면 이해가 될 거예요. 제가 준비를 해 왔는데요. 자~ 보시죠.
최원정: 진짜 돈이네요. 지폐를 부치신거네~
최태성: 맞습니다. (중국지폐 대 대만지폐), 왼쪽이 지금 중국 지폐이구요. 오른쪽이 타이완 지폐입니다. 중국지폐의 공통점은 뭔가요?
이시원: 모두 마오쩌둥 초상화가 있네요.
최태성: 마오쩌둥이 있구요. 여기 타이완 지폐를 보시면 알겠지만 쑨원(100달러)이 있구요. 여기 200달러에 누가 있습니까?
최원정: 장제스네요.
허준: 마오쩌둥은 젊은 마오쩌둥이고 장제스는 나이 먹은 장제스네요.
이시원: 어떻게 보면 지폐라는 게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을 넣기 마련이잖아요. 상징성을 갖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보면 딱 중국과 대만을 보여 주는 거 겠네요.
최원정: 중국가면 마오쩌둥 사진이 엄청 많다면서요.
김지훈: 네, 많죠.
최태성: 저기 톈안문 광장 나오네요.
김지훈: 톈안문 광장을 보면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저 초상화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설립 이후부터 걸리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여러 차례 바뀌기는 했지만 저 자리를 꼭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마오의 초상화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자동차에 부쳐 놓기도 합니다.
태상호: 저는 취재 중에 실제로 본 적이 있습니다. 유엔 파병군으로 해외 파병 온 중국군이 중국군 장갑차량 안에 저 마오쩌둥 사진이 있더라구요.
최태성: 맞아요. 중국 사람들은 마오쩌둥이 자기를 보호해 준다는 보호개념으로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최원정: 이 정도면 반인반신(半人半神)인 거네요.
이시원: 그래요, 신격화 되어 있는 거네요.
김지훈: 그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했다는 인물이고 지금 현재 중국의 초석을 닦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죠.
최태성: 마오는 중국 현대사 그 자체~
최원정: 장제스는 타이완에서 초석을 만든 사람이고,
김지훈: 장제스는 국공 내전에서 패배를 하고 타이완으로 건너갔죠. 죽기 직전까지 타이완을 통치 했고 지금 현재의 타이완을 만드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분이죠.
태상호: 중국 공산당의 중국이 국민당의 중국을 이겼으니 원래 전력이 더 강했을 거야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1946년에 벌어진 2차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은 약 430만 명인 반면에 마오쩌둥이 이끈 공산군은 약120만 명 정도였어요. 수치상으로는 3분의 1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죠. 하지만 이건 병력이라는 단순한 수치고 그들이 가진 무장-훈련을 보면 격차는 더 벌어집니다.
이시원: 그러니까 라이트급과 헤비급이 붙었다. 이런 느낌이겠네요.
최원정: 어떤 차이가 과연 중국의 운명을 바꿔 놓은 걸까요? 국공내전을 이끈 두 인물을 비교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이광용/아나운서: 여러분, 세계의 라이벌하면 누가 떠 오르세요? 아시아에선 한국과 일본이 있구요. 우리 가요계에선 남진과 나훈아, 그리고 SES 대 핑클, HOT 대 젝스키스, 그리고 20세기 중국엔 이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둥,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요?----------------------
일동: (새로운 강사 등장) 안녕하세요?
김재형/한국 MBTI연구소 연구부장, 상담 및 임상심리 전문가: 안녕하세요, 한국 MBTI 연구소에서 연구부장으로 있는 김재형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최태성: MBTI요?
이시원: 이거 술자리에서 만나면 처음 한번 다 물어 보잖아요. 요즘 MBTI 유형이 뭐야? (MBTI (Myers-Briggs Type indicator): 인간의 성격유형을 검사하는 도구),
최원정: 그러니까 저 MBTI를 이 친구(이시원)한테 배웠어요. MZ 세대라서,
이시원: MZ세대는 이거 다 자기 것 알고 있어요.
허준: 그런데 요즘에 10대들은요. MZ세대라는 말 쓰는 사람을 이미 꼰대라고 한데요.
이광용: 오늘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얘기하면서 이 두 사람의 MBTI까지 공개가 됩니다.
장제스 마오쩌둥
생년월일 1887.10.31. 1893.12.26.
사망 1975.04.05.(만87세) 1976.09.09.(만82세)
출생지 중국 저장성 중국 후난성
출신 몰락한 소금장수의 아들 부유한 농가아들
키 169cm 172cm
습관-취미 아침6시기상후 물두잔마시기 독서
일기쓰기
좋아했던 음식 해산물,생선요리 고추, 매운음식
기호식품 차(茶) 술과 담배
일단 장제스가 마오쩌둥 보다 여섯살 많습니다. 87년생과 93년생, 장제스는 저장성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납니다. 8살 때 소금장수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홀어머니 밑에서 아주 아주 어렵게 살았습니다. 반면 의외로 마오쩌둥은 부농의 아들이었어요. 어렸을 때 유모에 하인까지 둔 풍족한 환경에서 태어났구요.
이시원: 어린 시절만 보면 마오쩌둥이 공산주의자가 된 게 참 특이해요.
최태성: 마오쩌둥은 부르조아고 장제스는 프롤레타리아네,
허준: 마오쩌둥이 부유한 거면 본인 스스로 자기 손으로 집안을 때려 잡아야 하는 거죠.
최태성: 야 이거 재밋다.
김재형: 제가 두 분을 봤을 때는 특히 마오쩌둥에 관심이 갔어요. 어떤 부분이냐 하면 밑에 보시면 독서 있죠. 이것의 근본적인 것은 무엇일까. 이런 것에 탐구하는 쪽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애요. 나중에는 베이징 대학교 사서로도 근무했다고 하고 아까 전쟁이나 전투 중에는 공작원들이 신간 책을 가지고 오면 그 상황에서도 굉장히 즐거워했다고 전해집니다. 밑에 코드 중에 두번째 코드가 M코드인 사람과 세번째 코드가 I코드인 사람은 지적 호기심이 강한 측면이 있습니다. 산을 한번 볼 때 나무를 볼까요? 수풀을 볼까요?
이시원: 숲을 보겠죠.
김재형: 큰 그림을 보고 가는 특징이 마오쩌둥에게는 보여집니다.
이광용: MT~ 저는 SF인데~
최원정: 저도 SF에요 나랑 안맞네,
이광용: 이런 마오쩌둥이 가장 즐겨 읽었던 책은 무엇일까요?
이시원: 철학책 아닐까요?
최원정: 중국 사람이니까 삼국지~
이광용: 공산주의자이니까 맑스의 자본론~ 그런데 의외로 손자병법이었습니다.
태상호: 손자병법은 최고의 병법서이자 전략서이죠. 조조와 나폴레옹 같은 위대한 장군들도 언제나 읽는 책이었고 심지어 세계 최강의 군대인 미육군 특수전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손자병법이 많이 인용된 데요.
이광용: 반면 장제스는 자신만의 루틴은 아주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여기 보시면 아침 6시에 일어나요. 물 두잔을 마십니다. 그런데 물 온도까지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기를 썼는데 28살부터 83살 까지 일기를 단 하루도 안 빼먹고 섰다고 합니다.
허준: 세계기록유산으로 남겨야겠네요.
이광용: 자기 관리의 상징 그런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최태성: 이순신 장군 스타일이네.
이광용: 그리고 원래는 술을 즐겼는데 개신교도인 아내 쑹메이링과 결혼한 후에 술을 끊고 담배도 안 피웠데요.
허준: 원래는 담배 끊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술까지 끊었으니 이건 절대 만나서는 안 돼요.
태상호: 장제스는 정치가 이전에 군인이었어요. 일본 군관학교를 졸업했구요. 또 이 사람이 제일 듣기 좋아하는 말이 군인-지도자 보다 교육자입니다. 군인과 교육자의 공통점이 뭘까요?
이시원: 절제~
태상호: 그렇죠, 그리고 정해진 루틴입니다.
허준: 최태성 선생님은 안 그러시던데요
최원정: 큰 별쌤은 엔터테이너인 걸로~
김재형: 대조적으로 저도 확인해 보니까 마오쩌둥은 담배를 18세부터 81세까지 피웠다고 해요. 그리고 평균적으로 하루에 세갑 이상씩 피웠다고 합니다.
최태성: 거의 담배를 입에 물고 다녔어요.
이광용: 세갑이면 60개비 이잖아요. 두 사람은 성격도 무척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장제스가 무뚝뚝하고 고집이 세고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엄격한 면이 있었는데요. 마오쩌둥은 그와는 반대로 친화력이 정말 뛰어나서 사람을 다루는데 무척 능숙했다고 합니다.
김재형: 혹시 MBTI의 코드가 떠오르는 게 있을까요?
이시원: 장제스는 I로 시작할 것 같구요, 마오쩌둥은 E로 시작할 것 같애요.
최원정: 내성형? 외향형?
김재형: 우리가 마오쩌둥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을 MBTI 코드로는 ENTP 라는 코드로 추정해 볼 수 있고 자기의 전략을 어떻게 앞으로 펼칠까에 대한 생각이 많았지 않았을까 추정이 되고요.
최원정: 장제스는 뭐예요?
김재형: 장제스는 INFJ라는 유형으로 추정이 됩니다. 이 분들은 완벽주의가 있어요. 그 완벽주의가 어떤 완벽주의냐 하면 현실의 완벽주의가 아닙니다. 이상의 완벽주의입니다. 이 분들이 소위 말하는 한 신념 한 신념하는 특징이 있는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이광용: 뭐 겹치는 거 있어요?
최태성: 제가 INFK예요.
이광용: 장제스 형님이랑 MBTI가 딱 맞아떨어지는~
최태성: INFJ-INFP 되게 비슷해 가지고 지금~
김재형: MBTI에 너무 과몰입해 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최원정: 너무 재미있어 MBTI~
이광용: MBTI 연구하시는 분이 MBTI에 과몰입은 안 됩니다 라고 마지막 말씀하셨습니다. 중국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두 사람, 1937년에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내레이션: 1937년 7월 일본군이 중국 본토를 침략한다. 선전포고도 없이 자행된 일본군의 대규모 파병과 공격,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7월말 일본은 중국의 베이징과 텐진 일대를 제압하며 침략을 본격화한다. 날이 갈수록 그 희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고 중국 국민들은 국민당 정부에 철저한 항전을 요구한다. 일제의 수탈과 억압에 맞서 공산당과 함께 항일투쟁에 나서 달라는 것이다. 1924년 한 차례 연합 이후 크고 작은 내전을 이어갔던 국민당과 공산당, 결국 다시 힘을 합해 일본에 항전하기로 한다. (동영상), 1937년 9월 22일 두번째 국공합작이었다. 공공의 적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손을 잡은 장제스와 마오쩌둥, 본격적인 중국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최태성: 아까 국공내전에서 왜 두번 싸우고 두번 손을 잡았다는 그런 얘기가 있는데요. 요게 지금 보여준 영상이 두번째 국공합작, 왜냐면 중일전쟁이 벌어지면서 두 당이 손을 잡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
최원정: 공공의 적을 향해서요?
최태성: 그렇죠.
김지훈: 실제로 이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어요. 왜냐하면 10년 동안 서로 싸우면서 많은 자신의가족들을 비롯해서 자기의 동료들이 죽고 죽이고 하는 그런 관계가 형성이 되었거든요.
최원정: 국공합작이라는 게 우리로 치면 좌우합작 운동 같은 것인데 사실 뭉칠 수 없는데 큰 뜻을 위해서 잠시 뭉쳤던 거예요.
이시원: 전쟁사에 나오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참 어떻게 보면 마오쩌둥하고 장제스는 애증의 관계인데 이거 좋아할 수도 없고 싫어할 수도 없고 가장 가까운 것 같은데 가장 죽이고 싶은 존재였을 것 같애요.
허준: 그건 밖에서 쳐다 볼 때 그런 거구요. 사실 애증의 관계가 아니라 장제스에게 마오쩌둥이나 공산당은 증증(?)의 관계예요. 무조건 싫고 다 싫은데 어쩔 수 없이 한 것 뿐이지 장제스의 연설 중에 굉장히 유명한 연설인데 이런 연설이 있어요. “일본인들은 피부병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심장병이다.” 걸리면 죽여 무조건 없애야 돼,
이시원: 옌 싫은데 걔는 더 싫어! 이런 거네요.
최태성; 장제스는 공산당에 대한 증오가 엄청 쌨어요.
최원정: 자나 깨나 멸공 멸공~
허준: 아마도 이 노래는 장제스에 맞는 것 같애요. 무찌르자 공산당~
김지훈: 우리나라나 타이완이나 과거의 필리핀은 아시아의 유명한 3대 반공국가예요. 그런데 장제스가 왜 이렇게 공산당을 토벌하는데 신경을 쓰게 되었느냐면 역사의 교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장제스 생각에 과거에 명나라가 왜 멸망을 했는가. 그것은 외세인 만주족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이자성의 농민봉기 라든가 내부에 의해서 무너졌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이자성의 난-1630~1640년대 중국 명나라를 멸망시킨 농민 봉기), 그래서 중일전쟁 기간 동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공산당 마오쩌둥과 협력하는 관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산당이 세력이 커지는 것에 대해서는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태상호: 1945년 8월에 일본이 패망을 하죠. 그래서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승리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제일 많이 득을 본 측이 국민당측이었을까요? 공산당측이었을까요?
최원정: 일본이 패했으니까 둘 다 득을 보지 않았을까요?
태상호: 아닙니다. 그것을 나타내는 객관적인 수치가 바로 전사자 수치인데 국민당군의 전사자 수치가 320만 명이고 반면에 공산당군은 그들이 한 주된 전투는 딱 하나 밖에 없어요. 백단대전이라고 하는데 (백단대전(1940.8.20~1941.1.24)-허베이성을 중심으로 중국 공산당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전투), 사실은 이 전투의 기간을 보면은 대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의 기간이 있긴 하지만 전황이나 일본군의 전사자수를 보면 이걸 과연 대전이라고 불러야 되느냐 라는 의문이 남구요.
김지훈: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바로 중일전쟁 기간이 굉장히 힘들었고 공산당이 어려움을 겪었던 그 기간을 지나서 다시 자신의 실력을 회복하고 일정한 지역을 확보하고 그 다음에 통치를 하고 군대를 양성할 수 잇는 중요한 계기였어요. 위기가 기회가 되었던 거죠. 그래서 중일전쟁이 없었다면 아마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 싸워서 승리하고 중화인민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최원정: 항일투쟁이 국민당에게는 걸림돌이 되었고 공산당에게는 디딤돌이 된 거잖아요. 장제스가 멸공할 만 하네요.
허준: 상황을 보면 아마 마오쩌둥이 항상 가지고 다녔다는 책이 있죠. 손자병법, 거기에 “승리 중에 상책 최고의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김지훈: 마오는 전투를 해서 이길 수가 있거나 전투를 하지만 굳이 질 것이 뻔한 경우에는 공산당의 군대는 전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길 수 있는 전투만 하고 최소 비기거나 이기지 않는 전쟁을 계속한다면 결국 이길 수 있죠. 계속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으니까요.
이시원: 장제스 입장에서는 진짜 마오쩌둥이 얄미웠겠어요.
최원정: 일본 패망 후에는 둘이 싸울 수 밖에 없었겠네요.
김지훈: 그래서 실제로 1945년 8월이 되면은 양쪽이 서로 전쟁의 길로 나가게 돼죠.
최태성: 우리가 지금 얘기하면서 국민당군이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굉장히 큰 피해를 봤다는 얘기까지는 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면에서는 여전히 국민당군이 차 국공내전 초기 1946년에는 우세합니다. 아까 기본적으로 국민당군이 몇 명이라고 했죠? 국민당군 430만 명~ 공산당군이 120만 명~ 일단 거기서 차이가 나구요. 무기, 국민당군 같은 경우는 미국측에 최신식 무기를 계속 지원 중에 있기 때문에 장착 중인 상황이었는데 공산당군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공산당은 싸우면서 노획하는 거예요. 여기 기관총 남기고 갔네, 공산당은 총기 브랜드가 다 달라요.
태상호: 육군만 봐도 이런데 공군-해군-기갑 부대에서는 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국민당군은 공군병력이 16만명, 약900여 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구요.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주력 전투기였던 스핏파이어, 모스키토 뿐만 아니라 미군의 주력기인 P-47 썬더볼트와 P-51 무스탕 등 아주 훌륭한 전투기를 가지고 있었고 B-24,25 같은 폭격기도 구입하거나 공여받아서 운영을 했습니다.
최태성: 국민당군은 굉장히 신식 무기로 완전무장했어요.
태상호: 지금 저 화면에 보이는 전투기가 영국군의 주력 전투기 스핏파이어인데요. 보시기에도 유용하게 생겼죠. 2차 세계대전에서 생산된 전투기 중에 가장 아름다운 전투기이고요. 그냥 아름답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전투력도 우수해서 영국 항공전에서 영국을 구한 전투기로도 유명하고 심지어 한국전쟁에도 투입이 됐던 전투기입니다. 이 전투기에는 P-51 무스탕 이란 전투기인데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날아다니는 캐딜락이란 별명을 가지고~
이시원: 그렇게 편안해요?
태상호; 편안할 뿐 아니라 힘도 좋고 그냥 미국을 뜻하는 전투기라는 의미가 있구요. 심지어 얼마전에 개봉한 영화 탑건에도 계속 1편 2편에 출연하는 그런 전투기 중에 하나죠. 반면에 공산군은 어떠냐?
최태성: 비행기 몇 대 입니까?
태상호: 비행기는 거의 없다시피 했구요.
최태성: 공군력이 완전히 없네요.
태상호: 그렇죠, 해군도 전투함은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장제스는 1930년 대에 독일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서 유럽 등에서 경전차 200여 대를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기갑부대를 편성해요. 반면에, 공산군은 1945년 11월 전까지는 전차가 없었습니다.
이시원: 공산당엔 있는 게 없네요.
태상호: 1945년 11월에 구일본군 기지에 있던 전차를 노획하러 갔죠. 그런데 그 기지를 이미 국민당군에서 접수를 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명령을 받은 젊은 공산당 간부가 소련군인 척 하면서 전차를 뺏어 탔다. 102번 전차는 자신과 자신의 소대원들이 몰고 나가고 그 전차가 중국 공산당 의 첫번째 전차가 되었죠.
최태성: 전쟁 영화에 나올 법한 이야기인데~
이시원: 저게 웃긴 게 지금 겨우 훔쳐왔던 주서서 왔든 한 대 있는 거잖아요.
태상호: 그때 당시 공산당 동복 포병사령관의 이야기가 진국입니다. 단지 전차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전차부대를 가져왔다. 그래서 지원자 30명을 모아 전차대대를 창설합니다 (평균 대대기준-전차 40~60여대, 보병 300~1000명),
최원정: 102번 전차가 공산당 입장에서는 영웅 같은 전차겠어요?
김지훈: 그래서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는 개국대전을 할 때 그때 열병식을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열병식을 하는데 거기에 공신호(功臣號) 102번 전차를 비롯한 전차가 참여를 하죠. 아무튼 이렇게 병력과 무기에서도 열세였고 초반에 1946~1947년 초기에 중국 국민당의 공세에 중국 공산당은 후퇴를 하게 돼죠.
최원정: 지금 우리가 에게~ 하며 공산당을 얕봤는데 결국 공산당이 이긴다는 얘기잖아요?
이시원: 그러니까요.
최태성: 국민당군이 저렇게 많은 최신식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지는게 오히려 힘든 일 아니에요?
최원정: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배를 격파한 이순신 장군 같은 사람이 중국 공산당에서도 있었다는 얘기예요?
허준: 리더가 누구였나가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김지훈: 마오쩌둥과 장제스는 전략에서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장제스 같은 경우는 이미 기존에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는 그런 상태였죠. 그러다 보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토를 한 치라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방어를 해야될 지역은 굉장히 광범위했던 거죠. 중국은 실제로 거대한 나라입니다. 그런 거대한 나라에 요소 요소를 다 지킨다는 게 쉽지가 않은 일이었구요. 반면에 중국 공산당의 전술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영토는 빼앗겨도 상관없다. 다만 국민당의 군대를 다 궤멸시키고 소멸을 시키면 전국의 영토는 다 자신들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신의 오랜 근거지였던 (공산당의 근거지) 산시성의 옌안 지역도 포기를 한 것이죠.
이시원: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는 그런데 반면에 장제스는 지킬 게 너무 많으니까 아무 것도 지키지 못하게 된 그런 상황이네요.
태상호: 국공내전 당시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전투가 벌어졌는데요. 특히 중요한 지역이 랴오선 전투(1948.9~1948.11), 화이하이 전투(1948.11~1949.11), 핑진 전투(1948.11~1949.01)의 3대 전투가 그 지역에서 벌어졌어요. 그런데 국민당군은 거기에 주력부대들을 이미 투입시켜 놓고 요새화하고 있었죠. 하지만 보급이 원할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너무 나라가 넓다 보니까 보급선을 끊는게 쉬웠죠. 오히려 이들은 오도 가도 못한 채 움직이지 못하는 타깃 같았고 공산당군은 그들을 향하여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전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어요.
김지훈: 또 다른 문제는 파벌의 문제인데요. 국민당 군대 안에는 파벌이 존재했는데 서로 대립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 부대가 전투를 하고 있는데 그 부대에다 보급을 제대로 안 해줘요. 왜냐면 라이벌이에요. 라이벌 이니까 저 사람이 몰락을 하면은 나는 승진을 하거나 출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상황이 항상 그렇게 된 건 아닙니다. 반대 상황도 올 수 있죠. 지난 번에 안해줬지, 너도 당해 봐라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최원정: 그러니까 리더쉽과 전략의 부재라고 봐야 될까요?
김지훈: 세 차례 대규모 전투에서 거의 국민당군대 150만 주력군이 항복하거나 궤멸 당하게 됐고 그러면서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는데 전투가 잘 풀리지 않게 되니까. 장제스는 일선 지휘관들의 지휘에 대해서 더 참견을 하게 돼요. 그래서 전장 상황은 굉장히 유동적이고 여러가지 임기웅변도 필요한데 거기에 잘 대응을 하지 못하고 애초에 세웠던 작전계획대로 작전을 무모하게 수행하다 보니까 많은 병력과 물자가 소모가 되면서 전투력 손상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시원: 시키는 대로 했는데 이거 정말 안 좋잖아요.
최원정: 현장 지휘관한테 결정권을 줘야지요.
최태성: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장제스가 모든 걸 다 간섭을 하니까 지휘관들이 굳이 움직이지를 않는 거예요.
김지훈: 또 하나 공산당은 전투에서 밀려서 어려웠던 시기에 토지개혁을 시작합니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그들을 공산당의 편으로 끌어들이게 돼죠. 일단 공산당으로부터 토지를 분배받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국민당 쪽에서는 어떻게 봤냐하면 공산당의 협력자로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단 토지개혁이 이루어지게 되면 좋든 싫든 간에 농민들은 공산당과 한 배를 타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공산당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넓혀 갈 수가 있었고 비교적 효율적인 통치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공산당 통치에 대한 신뢰감이 강화되었습니다.
최원정: 중요한 건 민심이네요.
이시원: 마오쩌둥 하면 딱 떠오르는 건 언변가 선동가였거든요.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알고 그 이미지를 잘 포장해서 자기 꿈에 가까워지는 거잖아요. 또 당시의 농민들 같은 경우는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당연히 훅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구요.
태상호: (강 위에 배가 떠있는 사진) 사진을 보시면 어떤 사진 같은 가요?
이시원: 나무로 만든 배 같은데~,
최원정: 목선이잖아요.
태상호: 1949년에 공산군의 양쯔강 상륙작전에 관한 모습입니다.
최태성: 잠깐, 저건 사진이 잘못된 게 아닌가 저건 나무로 만든 배인데 저걸로 상륙작전한다구요?
태상호: (동영상) 황포 돛 단배 같이 보이죠, 이 상황을 본 미군 군사고문단이 아니 국민당군의 항공우세면 아니면 해군력이면 이건 그냥 빗자루로 쓸어담듯이 해도 너무 손쉬운 승리일텐데 도대체 국민당군은 뭐하고 있는 거야 라는 의견도 내비쳤어요.
김지훈: 실제로 저런 도하가 가능했던 이유는 중국 국민당 내부에 공산당 협력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내부의 협력을 받기도 했구요, 그리고 국민당 군대가 굉장히 우월한 장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뭐라고 얘기했냐면 미국이 대규모의 무기를 제공해 주는데 그 무기를 국민당이 받아 가지고 다시 암시장에 내다 팔거나 해서 공산당이 강해지는 거에요. 그러다 보니까 공산당 쪽에서는 가장 많은 무기를 제공해 준 사람이 누구냐? 그건 장제스였다.
최원정: 미군이 보급해 준 무기를 공산당군이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시원: 미국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였네요.
최태성: 부정부패가 너무 심했어요. 장제스 주변까지 다 싹 썩었다. 그런 국민당 내부의 부패는 더 이상 무엇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른 거네요.
최원정: 국민당 정부는 정치적인 위기를 맞게 되는데 민심이 떠날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여기서 중국 상하이에 연결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주세요~
--------------------글로벌 이슈 세계는 그날/중국 상하이----------------------
권순우/삼프로TV취재팀장: 그날 경제 특파원 권순우입니다. 오늘 1948년 5월 26일 지금 저는 중국 최대 상업도시 상하이에 나와 있습니다. 지금 상하이는 하루가 가기 무섭게 물가가 오르고 있는데요. 상인들은 물건을 대지 못해 문을 닫아버리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물건을 사면서 물가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권순우/고객役: 사장님! 니하오
이광용/상인役: 니하오, 물건 사시게?
고객: 한국말 잘 하시네요.
상인: 배웠어요, 잠깐만 잠깐만, 그새 또 가격이 올랐어! (잠깐 사이 오른 쌀 가격 630만 위안?)
고객: 사장님, 제가 지금 한국에서 왔다고 바가지 씌우는 거예요? 630만 위안 너무 비싸잖아요.
상인: 기자 맞아요? 쌀을 사자 쌀을 들었어 너무 비싸 놨어 쌀이 있어야 되잖아, 다시 쌀을 들었어, 그 사이에 가격이 올라 있어요,
이시원: 들었다 논 사이에 올랐어요.
상인: 물건 안 살라면 장사 방해하지 말고 가요.
고객: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럴 줄 알고 쌀을 살려고 돈을 챙겨 왔어요.
상인: (돈 가방을 받음)
고객: 제가 방금 (사진) 이 만큼의 쌀을 1948년 5월에 무려 630만 위안에 구입했습니다. 1948년 중국은 사상 초유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비싼 물건이 아니라 생필품을 사려고 이렇게 많은 돈을 지불해야 되는 상황입니다. 땅콩기름 1850만 위안, 비누 703만 위안,
이시원: 저때 지갑 파는 사람들 다 망했겠네~
최태성: 지금도 남미에서 저런 나라들이 있잖아요.
허준: 리어카로 돈을 싣고 다니는~ (초인플레이션 영향),
최태성: 그렇지,
이시원: 시간을 돌리는 거죠.
권순우: 오늘은 1948년 8월 18일입니다. (부채질) 그새 많이 더워졌네요, 날만 더워진게 아니라 그 사이에 제가 산 쌀의 가격이 1948년 8월에 무려 6,300만 위안이 되었습니다. 두 달 동안 상하이 물가가 무려 열 배가 올랐습니다. 지금 상황을 국민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제가 한번 직접 들어 보겠습니다.
국민: 어떻게 보느냐고요? 이거 방송 나가는 거예요?
기자: 방송 나가는 겁니다. 편집 안 합니다.
국민: 안 해요, 말 좀 합시다, 아니 정부는 대체 뭘 하고 있습니까? 아니 돈이 완전히 휴지 조각이에요. 진짜 물가가 하루에 30배가 뛴 적이 있다구요. 믿어지시냐구요 이게? 아니 근데 그런 애기 들으셨어요?
기자: 어떤 얘기요?
국민: (소문에 의하면) 돈 있는 사람들은 지금 다 중국을 떠나고 있데요.
기자: 중국을 떠난다고요? 어디로요?
국민: 어디냐, 그 타이완~ 자기가 가진 재산 먼저 그쪽으로 넘겨놓고 몸도 가는 거지, 근데 가진 것들은 타이완 가고 우리처럼 없는 사람들은 여기서 이렇게 장사 하다가 죽으라는 건가? 나 장사 안해! 장사 접어 오늘!
최태성: (웃으면서) 일부러 그렇게 컨셉을 잡은 거죠?
기자: 좀 어벙하게 잡았어요. 기자가 기자 연기를 할려니까 힘드네요.
국민: 1948년 국공내전이 계속 진행되고 있던 당시 상황을 극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여러분께 설명을 드렸는데요. 공감이 되셨습니까? 안 믿어지시죠?
허준: 하루에 10배가 오른다는게~
이시원: 저거는 물건을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둘 다 행복하지가 않아요.
최원정: 저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최근 물가 때문에 많이 힘들잖아요. 근데 지금 세계적인 물가상승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인 거 맞죠? (권순우 기자를 향해),
권순우: 전쟁의 영향도 맞지만 사실 코로나 19 때 굉장히 많은 돈을 풀었어요. 물건을 살 수 있는 사람도 많아졌고 쓸 수 있는 돈도 많아졌는데 그 와중에 갑자기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거예요. 우리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는 뭔가 물건을 만들기가 어려워지겠구나 자원을 캐기가 어려워지겠구나 물류를 하기가 어려워 지겠구나 이런 것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물건을 살려는 사람은 많고 돈은 많은데 물건이 부족한 상황 물가가 올라가게 되는 거죠.
이시원: 그러면 어떻게 보면 당시 중국도 똑 같은 상황이었네요.
권순우: 사실 인플레이션은 전쟁을 할 때만 발생하는 건 아닌데 국공내전 당시 인플레이션은 경제사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어마 어마한 큰 인플레이션 이었어요. 사실 전쟁에 필요한 재정을 정부가 찍어내는 수준이 이전하고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지폐유통량이 1948년부터 일년도 안 되어서 무려 4500배가 중가를 했고 인플레이션은 5000%가 증가를 했습니다. 1945년을 기점으로 해서 쭉 봤을 때는 매달 30% 이상 올랐는데요. 제가 지금 뭐라고 그랬죠? 매달~ 매달 30%가 올랐고 그러다 보니까 상하이 물가지수는 통합으로 계산을 해보면 무려 13만 배가 올랐습니다.
이시원: 13만 배요? 13만 배면 다 죽으라는 소리예요.
허준: (13만 배면) 천원 짜리 과자가 1억3천만원~
이시원: 그 당시에 웬만한 사람은 과자도 못 사먹어요.
최태성: 얼마전 냉면을 먹었는데 가격이 14,000원인 거에요. 제 기준은 7000원이었거든요.
----------------이광용: 여기서 막간 퀴즈~14,000원X13만=? 냉면 값이 얼마나 됩니까?
최태성: 엄청나네요.
이광용: 냉면 한 그릇이 대략 20억 정도 되는 거죠.
권순우: 그러다 보니까 중국 사람들은 지폐를 세는 게 힘들어서 저울에다 지폐를 달아서 화폐를 측정하고 조금 더 가볍게 지폐를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위안 지폐에 60억 위안화 지폐가 나올 정도로 하이인플레이션이 국민들을 엄청 힘들게 하였습니다.
이광용: 그렇다면 당시 상하이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동영상), 포대 자루에서 쏟아지는 건 돈입니다. 이게 흔한 상하이 풍경인데요. 상하이에서 지갑이 필요 없어요. 돈이 무거워서 자전거에다 이렇게 싣고 다녀야 돼요. 담배 한 갑을 사려고 해도 돈을 다발로 건네야 됩니다. 돌려 받는 거스름 돈도 꽤나 두둑해 보이죠. (동영상), 여기는 한 원단 가게입니다. 실크 한 장 얼마일까요? 가격이 나오는데~Brocade Silks @$ 16,5000. 세기 힘들 정도로 큰 액수 하여튼 천만 단위에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급 날이 돌아왔지요. 월급날의 표정은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내 월급만 빼고 다 오른다는데 여기도 월급이 올랐나봐요. 기분 좋아서 웃고 있어요. 그런데 월급이 오르면 뭐 하냐구, 물건이 비싼데~
이시원: 저 때 억만장자-조만장자는 명함도 못 내밀겠네요.
권순우: 억만장자가 냉면 정도 사드실 수 있어요.
최태성: 아까 저기 월급에서 돈 다발 3개로 담배 하나 받았잖아요.
권순우: 당시 한 신문의 사설입니다. “파멸의 시작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내일을 생각함이 없이 그날그날 살아가고 있다” 경제가 악화되면서 하루 하루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중국의 상황에 대한 자조적인 표현입니다.
이광용: 중국에서는 전쟁에 대한 공포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인플레이션에 대한 공세가 전국민을 지배하게 됐구요. 장제스가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고 아들을 상하이에 보내서 급하게 화폐개혁까지 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장제스, 결국 화폐개혁까지 실패한 후에 총통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최태성: 화폐개혁 완전히 실패하면서 오히려 인플레이션이 더욱 더 심해지는 대참사가 벌어진 거죠. 이러고 보니까 양쯔강 삼각주의 중산층들 여기의 재산을 모두 날려버리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온 거예요. (중산층의 몰락), 이러면 정부 관료들은 이걸 수습할려고 노력해야 되는데 정부 관료들이 여기에 편성해 가지고 예를 들면 구호물자 있으면 경매를 해서 자기 이익을 챙긴다든지 상품을 독점한다든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국민당을 지지하겠습니까?
허준: 당연히 미워하죠.
이시원: 이젠 민심이 아예 공산당으로 돌아섰겠네요.
최태성: 이제는 왜 민심이 공산당으로 돌아섰는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까? 탱크 없어도 됩니다. 비행기 없어도 됩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김지훈: 그리고 군사적인 상황도 악화가 되었는데요. 1948년 부터 본격적으로 공산당이 반격을 하게 됩니다. 만주지역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부터 승리를 거두게 되었구요. 세 차례의 전투에서 공산당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국민당의 군대가 궤멸을 하게 됐고 그리고 국공내전 중인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 이 수립되고 (동영상), “중화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합니다”
마오쩌둥: 국민당 정부의 반동 통치를 무너뜨렸습니다. 인민 해방전쟁에서 이미 기본적인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에 국민당을 이끌고 있었던 장제스는 1949년 12월 10일 타이완으로 떠나게 됩니다.
최원정: 거의 탈출 수준으로 도망간 건데 그런데 왜 하필 장제스는 타이완을 선택했을까요?
김지훈: 타이완으로 가게 된 것은요. 패배가 다가 오자 이미 준비를 미리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48년도 그 언저리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고 타이완은 지금 보시면 굉장히 양안이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13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죠 (중국과 13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고 보호막이 되어 주는 대만 해협), 그래서 해안이 보호를 해 주고 있는 지역이고 그리고 타이완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으면서 기반시설이 어느 정도 되어 있었습니다.
허준: 근데 재미 있는 게 사실은 중국의 크기를 봤을 때 저걸 다 밀었는데 타이완도 그냥 밀지 왜 안 갔느냐고 했을 때 유물이 손상될 까봐 못 들어갔다는 설이 있다구요.
이시원: 유물이 인질이네요.
김지훈: 그런 얘기도 있습니다. 왜냐면 중국 역사에서 당시 까지는 가장 핵심 있는 유물을 다 가지고 간 것이기 때문에 만약에 전쟁이 났을 때 그것이 파손될 염려와 걱정이 있었죠.
최원정: 문화재를 소유한 자 중국의 정통성을 이어 받는다 그런 신념으로 열심히 챙겨간 것 같애요. 오늘 중국을 이끈 두 리더들의 운명을 가른 국공내전을 자세히 살펴 봤는데 장제스와 마오쩌둥, 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요인들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태상호: 전쟁이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간결함이 중요합니다. 마오쩌둥은 단일 목적이 있었어요. 중국을 공산화시키고 내가 정권을 잡겠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다 적입니다. 강조를 하죠. 반면에 장제스는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일본 침략자들과 싸워야 하고 대내적으로는 공산당 그리고 군벌하고 싸워야 했어요. 누가 더 잘 했다가 아니라 적을 얼마나 없앨 수 있으며 얼마나 간결하게 만들 수 있느냐가 승리의 요건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김지훈: 저는 중국 국민당이 대륙을 상실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민심을 모우고 그것을 잘 수용할 수 있는 시스템, 정치체제 이런 것을 구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시간이 부족했을 수도 있구요.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비전, 이럼 면에서 양자에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원정: 다음 시간에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중국-타이완 이야기로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 감사했습니다. (KBS 역사저널 그날 377회 ① 대만은 왜 동아시아의 화약고가 됐나? 에서 정리).
① 지난(2022년) 8월, 대만 해협을 겨냥한 미사일들이 발사되었다. 중국이 대만을 봉쇄하고 사상 초유의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인 것이다. 이후 강도 높은 군사적 압박을 연일 이어가고 있는 중국, 미국 낸시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 이후 고조된 이 갈등은 미-중 간의 패권경쟁으로 까지 치닫고 있다. 계속되는 중국의 위협에 대만 역시 대규모 군사훈련으로 응수하며 긴장감을 드높이고 있는 상황, 하지만 양안 간의 갈등은 그 이전부터 계속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을 이끌던 마오쩌둥과 국민당을 이끌던 장제스가 중국 패권을 두고 맞붙은 국공내전으로 부터 시작된다. 항상 대만하고 중국은 사이가 안 좋았다. 최근에는 이러다가 전쟁 나는 게 아냐 또 어떤 사람들은 몇 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거다 라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다. 지난 달, 중국은 대만을 둘러싸고 여섯 군데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였다. 그런데 통상적인 군사훈련하고 결이 달랐다.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는데 그 수가 무려 11발이다. 그리고 그중의 일부는 타이완을 동에서 서로 가로 질러서 일본이 정한 경제적 배타수역에 탄착이 되었다. 이건 침공에 가까운 건데 하지만 중국은 계속 대만은 우리의 하나의 성(省)이다. 이걸 무력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② 군사훈련 자체도 대만을 침공하기 위해서 그들이 해야 되는 모든 군사적 단계를 다 했다. 해상봉쇄, 상륙훈련, 그리고 육해공 전군이 투입되었다. 그리고 전쟁 전에 꼭 이루어지는 전상자 긴급후송 훈련까지 실시해서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제 침공 시나리오는 완성이 됐고 그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리고 겁을 준 것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렇게 긴장된 상황에서 지난 8월에 펠로시 의장이 대만을 방문했다. 자국 대통령도 가도 괜찮겠느냐 했는데 펠로시 의장이 대만 방문 후 긴장감이 더욱 높아졌다. 이제 중국-대만 관계의 본질을 알면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우리가 얻게 되지 않을까.
③ 중국하고 타이완의 관계는 보통 양안 관계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도 타이완에게도 아주 민감한 문제다. 우리가 과거에 사드를 배치해가지고 중국과 문제가 생겼었는데 중국에게서 양안 관계라는 건 더 민감한 중국의 핵심이익이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양쪽이 상당히 첨예하게 대립을 하고 있다. 양안관계가 동아시아 전체 또는 세계 평화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타이완 해협을 두고 중국 대륙하고 타이완 섬이 있다. 서안(대륙)과 동안(대만)을 양안(兩岸) 이라고 한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을 국가로 보지를 않고 있다. 타이완을 국가로 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돌려서 양안이라고 표현한다. 타이완과 중국간 지금의 갈등은 국공 내전에서 시작이 된다.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애증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1924년 군벌세력이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국민당(장제스)과 공산당(마오쩌둥) 간의 협력을 1차 국공합작이라 부른다. 그러다가 1927년에 1차 국공이 분열되었다. 일본의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2차 (1937~1945년) 국공 합작을 하였다. 중일전쟁이 끝난 이후 2차(1946~1949년) 국공 결렬 되었고 내전을 하게 되었다.
④ 중국가면 마오쩌둥 사진이 엄청 많다. 톈안문 광장에도 나온다. 톈안문 광장을 보면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 초상화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설립 이후부터 걸리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바뀌기는 했지만 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중국에서는 마오의 초상화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다. 자동차에도 부쳐 놓는다. 유엔 파병군으로 해외 파병 온 중국군이 중국군 장갑차 안에 마오쩌둥 사진을 부쳤다. 중국 사람들은 마오쩌둥이 자기를 보호해 준다는 보호개념으로 가지고 다닌다. 마오는 반인반신(半人半神)이다. 신격화 되어 있다. 그건 그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했고 현재 중국의 초석을 닦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마오는 중국 현대사 그 자체다. 반면 장제스는 타이완에서 초석을 만든 사람이다.
⑤ 장제스는 국공 내전에서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건너갔다. 죽기 직전까지 타이완을 통치 했고 현재의 타이완을 만드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중국 공산당이 중국 국민당을 이겼으니 원래 전력이 더 강했을 거다 그러는데 그렇지 않다. 1946년에 벌어진 2차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은 약 430만 명인 반면에 마오쩌둥이 이끈 공산군은 약120만 명 정도였다. 수치상으로는 3분의 1 정도 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이건 병력이라는 단순한 수치고 그들이 가진 무장-훈련을 보면 격차는 더 벌어진다. 어떤 차이가 중국의 운명을 바꿔 놓은 걸까. 국공내전을 이끈 두 인물을 비교해 본다.
장제스 마오쩌둥
생년월일 1887.10.31. 1893.12.26.
사망 1975.04.05.(만87세) 1976.09.09.(만82세)
출생지 중국 저장성 중국 후난성
출신 몰락한 소금장수의 아들 부유한 농가아들
키 169cm 172cm
습관-취미 아침6시기상후 물두잔마시기 독서
일기쓰기
좋아했던 음식 해산물,생선요리 고추, 매운음식
기호식품 차(茶) 술과 담배
일단 장제스가 마오쩌둥 보다 여섯살 많다. 87년생과 93년생, 장제스는 저장성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8살 때 소금장수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홀어머니 밑에서 아주 아주 어렵게 살았다. 반면 의외로 마오쩌둥은 부농의 아들이었다. 어렸을 때 유모에 하인까지 둔 풍족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만 보면 마오쩌둥이 공산주의자가 될 수가 없다. 마오쩌둥은 부르조아고 장제스는 프롤레타리아다.
⑥ 마오쩌둥에게는 큰 그림을 보는 특징이 있다. 그가 가장 즐겨 읽었던 책은 의외로 손자병법이었다. 손자병법은 최고의 병법서이자 전략서다. 조조와 나폴레옹 같은 위대한 장군들도 언제나 읽는 책이었고 심지어 세계 최강의 군대인 미육군 특수전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손자병법을 가르친다. 반면 장제스는 자신만의 루틴에 아주 엄격하였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물 두잔을 마신다. 물 온도까지 신경을 썼다. 그리고 일기를 썼는데 28살부터 83살 까지 일기를 단 하루도 안 빼먹고 섰다. 자기 관리의 상징 인물이다. 원래는 술을 즐겼는데 개신교도인 아내 쑹메이링과 결혼한 후에 술을 끊고 담배도 안 피웠다. 장제스는 정치가 이전에 군인이었다. 일본 군관학교를 졸업했다. 대조적으로 마오쩌둥은 담배를 18세부터 81세까지 피웠다. 하루에 평균 세갑 이상씩 피웠다. 거의 담배를 입에 물고 다녔다. 두 사람은 성격도 무척이나 대조적이다. 장제스가 무뚝뚝하고 고집이 세고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엄격하였다. 반대로 마오는 친화력이 정말 뛰어나서 사람을 다루는데 능숙했다. 중국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두 사람, 1937년에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⑦ 1937년 7월 일본군이 중국 본토를 침략한다. 선전포고도 없이 자행된 일본군의 대규모 파병과 공격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7월말 일본은 중국의 베이징과 텐진 일대를 제압하며 침략을 본격화한다. 날이 갈수록 그 희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중국 국민들은 국민당 정부에 일제의 수탈과 억압에 맞서 공산당과 함께 항일투쟁에 나서 달라는 것이다. 1924년 한 차례 연합 이후 크고 작은 내전을 이어갔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결국 다시 힘을 합쳤다. 1937년 9월 22일 두번째 국공합작이다. 공공의 적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손을 잡은 장제스와 마오쩌둥, 본격적인 중국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이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둘은 10년 동안 서로 싸우면서 자신의 가족들을 비롯해서 자기의 동료들을 많이 죽고 죽이고 하는 그런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사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어떻게 보면 둘은 서로 좋아할 수도 없고 싫어할 수도 없고 가장 가까운 것 같은데 가장 죽이고 싶은 존재였다. 장제스의 연설 중에 이런 연설이 있다. “일본인들은 피부병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심장병이다.” 장제스는 공산당에 대한 증오가 엄청 쌨다. 우리나라나 타이완이나 과거의 필리핀은 아시아의 유명한 3대 반공국가다. 그런데 장제스가 공산당을 토벌하는데 왜 신경을 쓰게 되었느냐면 역사의 교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과거 명나라가 왜 멸망을 했는가. 그것은 외세인 만주족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이자성의 농민봉기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일전쟁 기간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공산당 마오와 협력하는 관계였지만 공산당 세력이 커지는 것에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⑧ 1945년 8월에 일본이 패망하고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승리를 한다. 국민당군의 전사자 수치가 320만 명이고 반면에 공산당군은 거의 전사자가 없었다. 마오가 싸운 백단대전이라고 있는데 사실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전사자수를 보면 공산당군은 전혀 싸우지를 안했다.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중일전쟁 기간이 공산당이 군대를 양성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 위기가 기회가 되었던 거다. 중일전쟁이 없었다면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 싸워서 승리하고 중화인민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한 마디로 항일투쟁이 국민당에게는 걸림돌이 되었고 공산당에게는 디딤돌이 되었다. 마오는 항상 손자병법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거기에 “승리 중에 상책 최고의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마오는 전투를 해서 이길 수가 있거나 전투를 하지만 굳이 질 것이 뻔한 경우에는 전투를 하지 않았다. 이길 수 있는 전투만 하였고 고로 계속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⑨ 일본 패망 후 1945년 8월 양쪽이 서로 전쟁을 한다. 국민당군은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굉장히 큰 피해를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면에서는 여전히 국민당군이 공산군보다는 우세했다. 기본적으로 국민당군이 430만 명, 공산당군이 120만 명 일단 여기서 차이가 났다. 무기, 국민당군 은 미국측에서 최신식 무기를 계속 지원받아 왔다. 공산당군은 그럴 수 없었다. 공산당은 무기를 싸우면서 국민당군으로 부터 노획하였다. 육군만 봐도 이런데 공군-해군-기갑 부대는 더 큰 차이가 있었다. 국민당군 공군병력이 16만명, 약900여 대의 항공기를 보유하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주력 전투기였던 스핏파이어, 모스키토 뿐만 아니라 미군의 주력기인 P-47 썬더볼트와 P-51 무스탕 전투기를 가지고 있었고 B-24,25 폭격기도 구입하거나 공여받았다. 국민당군은 신식 무기로 완전무장했다. 반면에 공산군은 비행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해군도 전투함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리고 장제스는 1930년 대에 독일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서 유럽 등에서 경전차 200여 대를 구입했다. 그리고 제대로 된 기갑부대를 편성했다. 반면에, 공산군은 1945년 11월 전까지는 전차가 없었다. 공산당엔 있는 게 없었다.
⑩ 1945년 11월에 공산군은 구일본군 기지에 있던 전차를 노획하러 갔다. 그런데 국민당군에서 이미 접수를 하였다. 그러니까 명령을 받은 젊은 공산당 간부가 소련군인 척 하면서 전차를 뺏어 탔다. 그게 102번 전차란다. 그 전차가 중국 공산당의 첫번째 전차가 되었다. 당시 공산당 동복 포병사령관의 이야기다. 단지 전차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전차부대를 가져왔다. 그래서 지원자 30명을 모아 전차대대를 창설했다. 평균 대대기준-전차 40~60여대, 보병 300~1000명, 102번 전차가 공산당 입장에서는 영웅같은 전차였다. 그래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는 개국대전을 할 때 그때 열병식을 하는데 거기에 공신호(功臣號) 102번 전차를 비롯한 전차가 참여 하였다. 1946~1947년 초기에 중국 국민당의 공세에 중국 공산당은 후퇴를 하였다. 그런데도 결국 공산당이 이긴다는 얘기다. 국민당군이 진다는게 이해가 안되었다. 그러면 중국 공산당에도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배를 격파한 이순신 장군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다. 리더가 누구였나가 중요하다.
⑪ 마오와 장제스는 전략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장제스는 기존에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토를 한 치라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방어를 해야될 지역은 광범위했다. 중국은 거대한 나라다. 그런 거대한 나라에 요소 요소를 다 지킨다는 게 쉽지가 않다. 반면에 중국 공산당의 전술은 영토는 빼앗겨도 상관없다. 다만 국민당의 군대를 다 궤멸시키면 전국의 영토는 자신들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산당은 자신의 오랜 근거지였던 산시성 옌안도 포기를 했다. 반면에 장제스는 지킬 게 너무 많으니까 아무 것도 지키지 못하게 된 상황이었다. 국공 내전은 당시 동시 다발적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중요한 지역인 랴오선 전투(1948.9~1948.11), 화이하이 전투(1948.11~1949.11), 핑진 전투(1948.11~1949.01)에 국민당군은 주력부대들을 이미 투입시켜 놓고 요새화하였다. 하지만 보급이 원할하지 못했다. 나라가 넓다 보니까 보급선을 끊는게 쉬웠다. 이들은 오도 가도 못한 채 움직이지 못하는 타깃 같았고 공산당군은 그들을 향하여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전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⑫ 또 다른 문제는 파벌의 문제였다. 국민당 군대 안에는 파벌이 존재 서로 대립을 했다. 한 부대가 전투를 하고 있는데 그 부대에다 보급을 제대로 안 해줬다. 왜냐면 라이벌 이니까 저 사람이 몰락 하면은 나는 승진을 하거나 출세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항상 그렇게 된 건 아니다. 반대 상황도 올 수 있다. 리더쉽과 전략의 부재다. 세 차례 대규모 전투에서 국민당군대 150만 주력군이 항복하거나 궤멸 당하였고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는데 전투가 잘 풀리지 않게 되니까. 장제스는 일선 지휘관들의 지휘에 대해서 참견을 하게 됐다. 전장 상황은 굉장히 유동적이고 여러가지 임기웅변도 필요한데 거기에 대응을 잘 하지 못하고 애초에 세웠던 작전계획대로 작전을 무모하게 수행하다 보니까 많은 병력과 물자가 소모가 되면서 전투력 손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또 하나 공산당은 전투에서 밀려서 어려웠던 시기에 토지개혁을 시작했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그들을 공산당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일단 공산당으로부터 토지를 분배받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국민당 쪽에서는 공산당의 협력자로 보았다. 그러다 보니까 일단 토지개혁이 이루어지게 되면 좋든 싫든 간에 농민들은 공산당과 한 배를 타게 되었다. 그러면서 공산당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넓혀 갈 수가 있었고 비교적 효율적인 통치를 했다. 공산당 통치에 대한 신뢰감이 강화되었다. 중요한 건 민심이다.
⑬ 그리고 중국 국민당 내부에는 공산당 협력자들이 있었다. 국민당 군대가 굉장히 우월한 장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이 뭐라고 얘기했냐면 미국이 대규모의 무기를 제공해 주는데 그 무기를 국민당이 받아 가지고 다시 암시장에 내다 팔거나 해서 공산당이 강해졌다. 공산당 쪽에서는 가장 많은 무기를 제공해 준 사람은 장제스라고 했다. 미군이 보급해 준 무기를 공산당군이 가지고 있다. 미국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부정부패가 너무 심했다. 장제스 주변까지 다 싹 썩었다. 그런 국민당 내부의 부패는 더 이상 무엇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⑭ 국민당 정부는 민심이 떠날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1948년 5월 26일 중국 최대 상업도시 상하이는 하루가 가기 무섭게 물가가 오르고 있었다. 상인들은 물건을 대지 못해 문을 닫고 있다. 1948년 5월에 쌀을 630만 위안에 구입했다. 1948년 중국은 사상 초유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비싼 물건이 아니라 생필품을 사려고 많은 돈을 지불해야 되었다. 1948년 8월에 쌀 가격이 6,300만 위안이 되었다. 두 달 동안 물가가 무려 열 배가 올랐다. 돈이 완전히 휴지 조각이 되었다. 물가가 하루에 30배가 뛴 적이 있다. 돈 있는 사람들은 다 중국을 떠나 타이완으로 가고 있다. 물건을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둘 다 행복하지가 않다.
⑮ 지금 세계적인 물가상승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영향도 맞지만 사실 코로나 19 때 굉장히 많은 돈을 풀었다. 물건을 살 수 있는 사람도 많아졌고 쓸 수 있는 돈도 많아졌는데 그 와중에 갑자기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거다. 우리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는 뭔가 물건을 만들기가 어려워지겠구나 자원을 캐기가 어려워지겠구나 물류를 하기가 어려워 지겠구나 이런 것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물건을 살려는 사람은 많고 돈은 많은데 물건이 부족한 상황 물가가 올라가게 된다. 사실 인플레이션은 전쟁을 할 때만 발생하는 건 아닌데 국공내전 당시 인플레이션은 경제사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어마 어마한 큰 인플레이션 이었다. 사실 전쟁에 필요한 재정을 정부가 찍어내는 수준이 이전하고 차원이 달랐다. 그러다 보니까 지폐유통량이 1948년부터 일년도 안 되어서 무려 4500배가 중가를 했고 인플레이션은 5000%가 증가를 했다. 1945년을 기점으로 봤을 때 매달 30% 이상 올랐다. 매달 30%가 오르다 보니까 상하이 물가지수는 통합으로 계산을 해보면 무려 13만 배가 올랐다. 이건 다 죽으라는 소리다. 그러다 보니까 중국 사람들은 지폐를 세는 게 힘들어서 저울에다 지폐를 달아서 화폐를 측정하고 조금 더 가볍게 지폐를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위안 지폐에 60억 위안화 지폐가 나올 정도로 하이인플레이션이 국민들을 엄청 힘들게 하였다.
ⓐ 당시 상하이의 모습은 돈을 포대 자루에 넣어서 다녔고 이게 흔한 상하이 풍경이었다. 지갑이 필요 없었다. 돈이 무거워서 자전거에다 싣고 다녔다. 당시 한 신문의 사설, “파멸의 시작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내일을 생각함이 없이 그날그날 살아가고 있다” 경제가 악화되면서 하루 하루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중국의 상황에 대한 자조적인 표현이다. 중국에서는 전쟁에 대한 공포 못지 않게 그 이상으로 인플레이션에 대한 공세가 전국민을 지배하게 됐다. 장제스가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고 아들을 상하이에 보내서 급하게 화폐개혁까지 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장제스는 결국 총통 자리에서 물러났다. 화폐개혁 완전히 실패하면서 오히려 인플레이션이 더욱 더 심해지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러다 보니까 양쯔강 삼각주의 중산층들이 몰락하게 되었다. 이러면 정부 관료들은 이걸 수습할려고 노력해야 되는데 정부 관료들이 여기에 편성해 가지고 구호물자 있으면 경매를 해서 자기 이익을 챙긴다든지 상품을 독점한다든지 하였다. 이로 인해 민심은 국민당에서 공산당으로 돌아섰다. 공산당은 탱크 비행기 없이도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 1948년부터 공산당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한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부터 승리를 거두는데 세 차례의 전투에서 공산당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국민당의 군대가 궤멸을 하게 됐고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두 달 뒤 1949년 12월 10일 국민당의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떠난다. 패배가 다가 오자 이미 48년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타이완은 양안이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 중국 본토와 13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 대만 해협이 보호막이 되어 주고 있다. 그리고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으면서 기반시설이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국민당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핵심 있는 유물들을 다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문화재를 소유한 자 중국의 정통성을 이어 받는다는 신념으로 말이다.
ⓒ 장제스와 마오쩌둥,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요인들은 마오는 중국을 공산화시키고 내가 정권을 잡겠다는 단일 목적이 있었다. 반면에 장제스는 대외적으로 일본 침략자들과 싸워야 했고 대내적으로는 공산당과 군벌하고 싸워야 했다. 누가 적을 얼마나 없앨 수 있느냐가 승리의 요건이 되었다. 중국 국민당이 대륙을 상실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민심을 모우고 그것을 잘 수용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구축하지 못했다. 그런 시간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비전도 없었다. 이게 양자의 차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