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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권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심우기(시인, 가천대 출강)
여기서 문단이라 함은 필자가 시인이다 보니 시단을 중심으로 구술하며 또한 지극히 개인적 주장이며 필자가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에 불과할 수 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한국 시단에 있어 시가 안팔리다고 한다. 이는 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문학재의 소비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영회 한 편이 거의 만원 담배 한갑이 거의 오천원을 넘기는 시점에소위 시집이나 문예지가 만원 안쪽임에도 불구하고 소비가 안되거나 판매가 안되는 것은 독자에게 비난을 돌릴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게로 창끝을 돌려봐야 하지 않을 까 생각해 본다.유통이 안된다는 것은 문학 소비 패턴의 변화와 대중과의 괴리를 불러 일으키는 창작과 불통을 전제로 하는 작품이 현대적이고 전위적이라는 창작의 풍토, 그것이 더 우월하다는 듯한 풍토와도 관련된다. 대중과 괴리된 시나 작품, 거기에는 소위 이해 불가와 난해한 작품의 등장으로 소통의 불가로 인한 대중의 외면을 불러왔다.
또한, 한국에만 존재하는 등단제도의 폐해는 소위 문단 권력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작가의 입문과정은 크게 신춘문예 등단과 각종 문예지를 통한 등단 그리고 자비로 책 출간을 통한 과정을 거친다.
공인되는 권력으로서 신춘등단 과정은 소위 문창들의 로망이고 스스로의 권위를 가져왔다. 그러나 신춘 등단 이후에도 본인이 소속한 문예지가 없거나 속한 동인이나 작가회 모임이 없으면 외면당하거나 스스로 사라지는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신춘 출신이 다시 문예지로 등단과정을 거치거나 활동의 장을 찾기 위해 문학회 회원 가입 등을 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작가로서의 활동이 거의 없게 되거나 사장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신춘 등단자 중 등단 이후에 현재까지 계속 작품 발표활동을 하는 작가가 30% 내외라는 통계에서 나오듯이 과거처럼 신춘만 등단해서는 청탁이나 고료가 쏟아지거나 문의가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럼 여기서 문예지의 등단과정을 살펴보자.
소위 문예지를 통한 등단은 투고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과거에는 기성 시인이나 유명 시인의 추천 형식을 통하여 도제수업이나 훈련된 이들이 검증받아 등단하여 문단 활동을 하였다. 지금은 독자 투고 형식을 빌리고 있으나 그 속을 들춰보면 뛰어난 잡지 몇 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별도의 창작교실 운영 등을 통하거나 작가회나 소위 문예지 동인 모임 등을 통해 등단 입문 과정을 거친다. 심지어는 개인 지도를 받다가 인맥과 그 연줄로 등단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심하게 부패 한 곳은 등단과정에 돈이 오가거나 댓가를 주는 삼류 잡지도 있다. 이런 곳은 책 구매를 반강제적으로 강요하거나 자신들의 잡지 문학회원 가입과 구독을 요구한다.
세 번째로 자발적으로 시집을 내거나 시를 발표하여 등단하는 경우인데 소위 주류 문단에서는 이렇게 활동을 하는 작가는 별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된다. 이런 등단 과정을 따져서 신춘출신의 우월의식이나 잡지 간의 등급을 매겨 차이와 차별을 만들어 공공연히 운영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시단의 형편이다.
이는 편하게 실제 작품과 내용보다는 우선 신춘 출신이냐 아니냐 등단지가 어디냐 심지어는 대학교수냐 아니냐 잡지 주간이나 발행인인지 아닌지 등도 고려하여 작품을 청탁하고 서로 띄어 주고 상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소위 상금이 많이 걸린 문학상(많은 경우는 7~8,000만 원을 함) 등은 심사위원부터 선정자까지 서로 부조의 개념으로 상을 주고 또 넘긴다. 그럼으로 상의 권위와 본 취지를 떨어뜨리고 그들 소수만의 잔치와 리그가 되고 있다. 이는 대중들의 관심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등단을 주로 누가 하는가를 살펴보자
요즈음은 전문적 글쓰기와 창작을 훈련받은 전문적 학과가 각 대학에 있다. 소위 문예창작과나 문화 콘텐츠 학과의 등장과 특수 대학원이나 일반 과정으로서의 창작교실이 생겨나서 그 출신 등이 세력 또는 세트 주의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전문적으로 훈련되고 연습한 이들이 문단에 전면 등장한다. 이는 한국사회의 오랜 피폐인 인맥과 학맥의 부정적 모습으로 문단 내에서도 일종의 라인과 세트 주의 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이 주로 등단하거나 활동하는 문예지나 작가 모임 등이 뭉쳐서 소위 힘을 형성하게 되고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관계가 형성된다. 주로 젊은 작가들이 선호하거나 인정하는 잡지를 소위 선민화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이나 권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객관적 기준이나 지표는 사실 없다. 이의 연장에서 심지어는 나이나 등단지를 통하여 차별하고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풍토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소위 주류라고 하는 이들이 무시하고 있지만, 일반 독자나 일반인이 기존의 문단 시스템과 상관없이 작가로 지원하거나 등장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등장하는 것이 요즘의 흐름 중의 하나이다. 이는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발현되어 자신들만의 표현이나 방식을 다양하고 변화된 미디어 매체 인터넷, SNS, 페이스북 등을 통해 분출하고 있다.
이들은 소위 문학 판의 질서나 권위에는 신경 쓰지 않으며 나름의 시장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사회 활동을 하며 뒤늦게 자아를 찾는 욕구 속에 글에 헌신하거나 투신하는 이들이 시단에도 대거 등장하는데 늦깎이 문학지망생들이 많아지고 있다.
현재의 각종 문예지를 살펴보면 작금의 문예지는 대부분이 동인지 수준이다. 이는 독자가 거의 없는 잡지, 자신들의 작가회 회원들이 글을 쓰고 발표하는 장으로서의 잡지 수준이라는 것이다. 유료독자가 300명 이상 넘는 잡지가 다섯 손가락 꼽을 정도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젊은 작가와 일부 편집인을 중심으로 새로운 읽을거리와 볼거리, 생각할 거리를 채운 잡지가 등장하고 있다. 전통적인 잡지에서 탈피하여 사진과 만화 심지어는 아이돌 연예인을 등장하여 대중에게로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는 독자를 다시 찾기 위한 노력으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문예지는 독자는 없고 작가가 독자이고 잡지 간의 특색도 없다. 50명 내외의 사람이 모여 패거리와 세트주의로 뭉쳐 근거도 없이 우월의식에 빠져 문예지의 등급을 나누고 편을 가르며 기고나 청탁 등을 빌미로 권력을 형성하고 작가들에 차별을 두고 있다. 또한 운영에 있어서도 대부분이 일인(발행인 아니 주간 혼자서 함) 경영의 영세하고 소규모 자본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기획이나 시집이나 소설, 잡지 마케팅이 전무하고 문학이 갖는 사회적 공기로서의 기능에 대한 고민과 접근이 부재하다.대부분이 발행인 중심의 운영이다 보니 명목상 편집워원을 선정해두고 실제 편집회의나 논의나 기획이 없고, 민주적 결정의 방식이 아니라 실제로는 발행인이나 주간의 개인 취향에 따라, 심지어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잡지의 청탁과 배치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는 개인사업이다 보니 운영이 주먹구구식이고 불투명하고 즉흥적이며 출간의 원칙이 개인적 취향에 너무 매이고 있다는 것이다.이는 대부분 열악한 재정 때문인데 발행인 개인의 사재 출연에 의존하고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의 폐단이 운영에 부침을 느끼고 일부 독지가의 도움이나 자신들 출신 작가의 호주머니 돈을 뜯어 운영하고 있는 잡지도 많은 것이 현실인 실정이다. 이의 극복방안이 국가 지원제도 등이 있지만 최근의 정부가 개입된 블랙리스트 파문이나 지원 선정에 있어서도 공정을 기한다고 하지만 심사나 심사위원 선정 등 앞에서 거론된 문제들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잡지의 문제는 운영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 자신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일부 작가는 발표하고 싶은 욕구와 허영에 우스개 이야기로 돈내고 글 발표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즉 그 잡지의 작가회에 가입을 하여 가입비를 내고 또 구독비도 내는 형태의 돈을 내고 글을 발표하거나 주간이나 발행인 등은 잡지 간 필진 교류라는 명목에 자기 작가회 회원 즉 회비를 낸 자들을 서로 넘기고 하며 그들 위주로 발표의 기회를 준다. 그러다 보니 주간들이 자신들 잡지의 회원이 아닌 다른 이의 작품을 주의를 기울여 읽고 발표시키는 게 아니라 연예인처럼 이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기본으로 깔고 소위 이름을 얻은 이들로 구성된 필진으로 채우고 나머지는 자기 잡지나 다른 잡지의 필진교환 진용으로 구성하는 경우이다. 이 잡지 저 잡지
같은 이가 여러 발표를 하거나 비슷한 경향과 차이나 특색이 없는 잡지가 나오게 된다 심지어는 편집위원도 2~3군데 중복되어 있거나 유행처럼 시도 유행을 탄다. 새롭거나 잘 쓰는 무영작가의 개발과 소개보다는 편하게 운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소위 돈 없고 문단에 얼쩡대지 않는 자는 사라지거나 잊혀지게 된다. 작품성이나 글의 완성도라는 것도 취향의 문제라 이름을 이미 얻은 작가나 신춘 출신 또는 세트 주의에 묶여진 무슨 문예지 출신이나 특정 대학 출신 등으로 닫힌 출판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이는 작품 발표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시집이나 책 출간 등에서도 작동을 한다. 시집 출간도 그가 어느 출신이냐 또는 교수인가 등이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차이와 차별 철폐가 시대적 요구인데 우리 문단은 반성해야 할 점이 없지는 않느지 묻고 싶다. 중앙과 지역, 성별, 나이 차별, 학벌, 소속 단체나 문예지 등등의 차별이 암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다. 이는 진보적이라는 잡지도 예외가 아니고 그들은 표방하는 진보나 민주적 가치를 보았을 때는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다.자비 출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끼리만의 폐쇄적 기준을 가지고 열린 의식이 아니라 편협과 잘못된 선민의식에 쩔어 있다. 이런 제반 환경이 혼재되고 섞이어 소위 문단권력이라는 것을 형성한다. 이는 그들이 각종 문학상의 심사위원이나 문학관의 운영 등에 영향을 미치고 각종 공모나 심사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내가 보기에 문단에 자정의 객관적 능력을 상실했고 독자의 외면으로 더욱더 비평과 비난을 할 주체가 사라진 것이다. 이는 독자의 외면을 이끌게 되었다고 본다. 이런 것들이 쌓여 최근에 일어난 문단내 성추행이나 일탈에 있어 스스로의 자정이나 제재가 작동하지 않고 있고 실제로는 걸러지는 권위나 인정받는 시스템이 없는 경우를 초래했다고 본다.여기에 기존 문창과나 국문과 외에도 소위 특수 과정의 글창작 과정을 통해 형성된 인맥은 카르텔을 형성해서 발전보다는 장사나 대학 영업이익의 일환으로 전락함이 없지 않아 있다.
이의 극복 방안은 역시 대중과의 소통이며 교류다. 변화된 현대미디어의 등장 속에 책의 소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웹상의 잡지 발간과 인터넷상의 소비와 교류에 눈 돌려야 한다. 쓰기와 읽기의 방식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독자의 확보는 왜곡된 문학판의 질서를 바로잡고 평가하며 바로잡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잡지 특색이 없는 잡지는 사라지고 영세규모는 통합하여 자본과 사람을 모으고 창작과 소비 그리고 문학의 발전적 재생산 구조를 갖추고 비평과 새로운 창작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문학을 새롭게 넓히고 변화된 대중의 정서와 호흡에 동참하게 만들게 된다고 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이 아니라 권위다. 문학으로서의 권위, 작가로서의 권위가 필요하다. 이는 오랜 사유와 단련에서 나온 작품과 이를 소화하는 과정에서의 소통과 교류라고 본다. 음모적이고 소수자의 놀이로 전락한 문학이 아니라 대중이 누리고 공유하는 문학으로서의 회복이 이루어질 때 권력으로서가 아니라 권위로서의 문학, 힘으로서의 문학이 살아날 것이다. 이는 작가 개개인 모두의 자성과 자각이 필요하며 작가 각자가 한 사람의 고유한 창작자로서의 자존과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창작의 길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길이며 나와의 또 다른 싸움이며 외침이며 소리라고 본다. 이는 누가 알아주고 주목되고의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완성도 높은 작품에 대한 열정과 미침, 이것이 들끓을 때 우리는 권위를 가진다고 본다. 또한, 그릇된 문단 권력을 우습게 보게 될 것이며 아부하지 않고 굽신거리지 않으며 당당할 것이다. 이런 멋진 시인과 문학인이 횡행하는 올 한해를 소망한다.